여행지 : 중국, 샤먼(厦门, Xiamen) - 구랑위(鼓浪嶼, 고랑서)

 

여행일 : ‘25. 4. 18() - 4. 21()

 

세부 일정 : 산해건강보도, 증조안거리, 중산로, 고량서(숙장화원·일광암), 남정토루(전라갱·유창루·탑하촌), 남보타사.

 

특징 :  샤먼(厦門) : 샤먼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진 푸젠성(福建省, 중국 남동부) 2의 도시. 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 짙푸른 가로수,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걷다 보면 이곳이 중국인가?’ 싶다.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40km 펼쳐지고, 온종일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바다 아래로 사라지는 일몰은 남국의 정취를 닮았다.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정착시켰으며, 가장 먼저 차()를 해외에 알린 도시이기도 하다.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된 철관음(铁观音)이 샤먼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다.

 

 구랑위(鼓浪屿) : 샤먼에서 남서쪽으로 700m쯤 떨어진 작은 섬으로,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지는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이다. 오랫동안 열강들의 조계지였던 탓에 섬 곳곳에 유럽풍의 건물과 가옥들이 남아있어, 동서양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듯한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2017 7 8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구랑위(鼓浪屿)로 가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야만 한다. 구랑위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다리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선지는 크루즈센터 부두(邮轮中心码头)이다. 반면에 구랑위 시민들은 페리부두(轮渡)를 이용한단다. ! 티켓은 왕복이라서 잘 보관해야 한다. 돌아오는 배에서도 티켓을 검사한다.

 구량위는 19세기 아편전쟁의 여파로 조개지로 개방되면서 생겨났다. 오래된 도시답게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산책로(6km)를 위시해 길이 사통팔달로 나있다. 섬은 면적이 1.8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도 한 장만 있다면 느긋하게 걸어도 하루 안에 넉넉히 둘러볼 수 있다.

 10분 남짓이면 구량위에 도착한다. 구랑위에는 네이춰아오 부두(内厝澳码头)와 싼추톈 부두(三丘田码头)  2곳의 관광객 전용 부두가 있다. 하지만 짐이 있는 숙박여행자들이 아니라면 부두 위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구랑위는 지붕 없는 건축박물관이라 불리는 곳이다. 송말원초(宋末元初)에 개척되었으며 명나라 때 구랑위로 개칭했다.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에 의해 샤먼과 함께 개항되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점령(타이완처럼)을 두려워한 청나라는 영국 등 열강들에게 공공조계지로 제공했다. 덕분에 그동안의 역사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시가지로 꼽히는 이유이다. 또한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걸어서도 충분한 거리인데 여행사는 전동차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패키지여행의 가장 큰 특징인 타이트한 일정표에 맞추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구랑위에는 관광용 전동차 외에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다고 했다. 환경보호를 위함인데 자동차나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전거까지 진입을 금지시키고 있단다.

 전동차는 우리를 항자후(港仔后) 해수욕장에 내려주고 떠났다. 숙장화원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해변인데, 개장 시간(오전 8)까지 모래사장에서 시간을 때우라는 모양이다. 참고로 전동차는 선착장에서 출발, 섬 외곽의 도로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일주하도록 되어 있다. 동쪽의 호월원, 남쪽의 숙장화원, 서쪽의 금원, 북쪽의 조화산공원과 연미산을 지나는 코스다. 그런데도 우리는 섬의 남동쪽 해안만 구경한 것이다.

 손바닥만 한 섬치고는 무척 큰 해수욕장이다. 거기다 주변 산자락에 들어선 서양식 건물들과 잘 어우러지면서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남국의 풍치를 자아내는 야자나무도 한 수를 거든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오는 게 마땅찮은 사람은 숙장화원 앞 소공원에서 시간을 때워도 된다. 중국의 여느 여행지들처럼 조형물을 설치해 사진을 찍으면서 소일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숙장화원(菽庄花园)은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성인 기준 30위안이라는데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어 따로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숙장화원은 타이완 출신의 임숙장(林菽庄, 일명 林爾嘉)이 만들었다. 아버지 임유원(林維源) 형제들이 타이베이 판교(板橋)에 살아 판교 임씨라 불렸는데, 대만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단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타이완이 일본에 넘어가자 판교 임씨 일가는 선대 고향인 복건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가장 가까운 하문의 고랑서에 자리 잡고 1913년 초자산(草仔山) 아래에 타이베이의 판교 빌라를 모방해 숙장화원을 지었다. 언덕 아래 바다를 품은 2의 땅에 환상적인 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의 정원은 강이나 호수의 물을 끌어다 정원을 꾸미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숙장화원은 담수(淡水) 말고도 바닷물로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그중 하나인 민물이 가득한 호수를 만난다.

 숙장화원의 가장 큰 특징은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원의 한 축을 바닷물로 장식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는 이렇게 썰렁한 풍경으로 변해버리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먼저 바다 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임숙장이 자신의 44번째 생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44를 건넌다. 화원 앞 바다 쪽으로 뱀처럼 구불거리게 만든 다리다. 다리 입구에는 해활천공(海闊天空)‘이라고 적힌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탁 트였고, 하늘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태평양을 뜨락으로 삼은 숙장화원을 가장 잘 표현한 문구이지 싶다.

 뒷면에는 침류(枕流)‘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편안하게 누워 파도의 흐름을 즐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출처로 여겨지는 침류수석(枕流漱石)’ 억지를 부리고 둘러댈 정도로 몹시 남에게 지기 싫어함을 이르는 말이다. 서기 300년대 동진에 사는 손초(孫楚)라는 사람이 친구에게 죽림칠현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겠다면서 원래는 돌로 베개를 하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을 하는 침석수류(枕石漱流)’라고 해야 할 것을 흐르는 물로 베개를 하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枕流漱石)고 말해버렸다. 친구가 그에게 잘못 말했다고 지적하자 손초는 물로 베개를 삼는 것은 귀를 씻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 하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함이라고 교묘하게 둘러대며 변명하였다는 고사이다.

 산책로 바로 아래는 조금 전 거닐던 항자후해수욕장이다.

 정원은 바닷물의 수위에 따라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고 했다. 밀물 때는 태평양 바다까지 품는 호방함을 자랑하지만, 썰물 때는 이렇게 뼈대만 앙상한 풍경으로 변하기도 한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구랑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용두산 일광암이 보인다.

 바위를 지나면 다리는 바다로 이어진다. 중간에 정자가 있는데 명월부공십이란 장교지해삼천장(明月浮空十二欄 長橋支海三千丈)’이라는 편액형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다리와 정자를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열두 난간을 비추고, 긴 다리가 바다를 따라 만 미터나 이어진다고 표현했다. 중화를 외치는 중국인들의 시답게 과장이 엄청나게 심하다.

 처마에는 월도(月渡)’라는 시도 적혀 있었다. 임숙장은 정원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시를 짓고 낭송하기를 좋아했단다. ‘숙장음사(菽庄吟社)’라 불리던 모임인데, 그때 이런 시가 지어진 모양이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던 다리는 100미터도 되지 않아 육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장교지해삼천장(長橋支海三千丈)’이라던 싯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게 남세스러웠을까? 다리는 바닷가 바위벼랑에 기대어 한참이나 더 나아간다.

 이 멋꼬?’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물에 시선을 꽂은 내 두뇌는 재빠르게 화두(話頭)를 던져나간다. 그리고는 현지 젊은이를 붙잡고 물어봤으나 영어를 모른다며 손사래를 치고 가버린다. 요즘의 중국 젊은이들은 영어 소통이 대세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제는 숙장화원의 나머지 부분을 둘러볼 차례이다. 먼저 비탈진 산자락을 치고 올라 피아노박물관에 이른다. 건물에는 중국어로 고랑서동금박물관(銅琴博物館)’이라고 쓰여 있다. 동금은 피아노의 중국식 표기이다. 그 아래는 청도헌(聽濤軒)’이라 적었다. 파도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도소리가 아닌 피아노 소리만 들을 수 있다.

 피아노 기증자인 호우의(胡友義)의 흉상. 피아노박물관은 숙장화원의 주인 임숙장이 타이완의 해방(1945)과 함께 타이베이로 돌아간 다음 만들어졌다. 그의 친지가 남아 화원을 관리하다 1955년 국가에 넘겼는데, 그곳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화교인 호우의(胡友義)가 기증한 70대가 넘는 피아노를 전시하면서 이루어졌다.

 전시된 피아노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한다. 거리의 악사들이 사용하던 18세기 원통형 피아노(Barrel Piano)로부터 1928년 헤인즈(Haines)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다보니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었다. 영어가 짧아 해독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로마 출신의 영국 피아니스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 1752-1832)’에 의해 1801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피아노도 있다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인 스타인웨이 앤 선스(Steinway & Sons) 피아노와 독일에서 1900년대에 만든 뢴니쉬(Ronisch)나 베크슈타인(Bechstein) 같은 피아노도 있단다.

 박물관은 1층과 2층 두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피아노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도록 연대별로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슈만, 베르디 같은 이름을 알만한 음악가의 사진도 많이 붙어있다.

 수집된 피아노가 너무 많아서일까? 조금 위에 또 하나의 피아노박물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도 수많은 피아노가 전시되고 있었다. 주로 특수한 피아노들을 전시하는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매시 정각에 피아노 연주도 들려준단다.

 피아노박물관은 최고의 뷰를 자랑한다. 숙장화원과 저 멀리 일광암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일광암(日光岩, 92.7m)은 구랑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암자산(岩仔山), 황암(晃岩) 또는 두 개의 바위가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두산(龍頭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성공(鄭成功)이 일본 닛코산(日光山)’의 아름다움에 견줄만하다고 한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핸드폰을 맡겼더니 이런 작품을 남겨 놓았다.

 임공운환 부인(林龔雲環 婦人, 1874-1926)의 묘()란다. 피아노박물관과 관련된 누군가의 부인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Bergen)에 들렀을 때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를 작곡한 에드바드 그리그(Edvard Grieg)’와 그의 아내가 바위벼랑(구멍을 파서)에 묻혀있는 걸 보았는데 중국도 그런 풍속이 있었나?

 피아노박물관을 빠져나오면 길은 ‘12동천(十二洞天)’으로 이어진다. 주위가 온통 돌 조각품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다. 하단은 정자를 품은 예쁜 호수를 배치했다. 길도 멋스럽다. 미로처럼 얽히고설키게 만들어놓았다.

 돌 조각품 사이사이로 길이 미로처럼 길이 나있는데, 돌 사이에 숨어있는 자신의 띠 동물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가이드는 미로에서 출구를 쉽게 찾고 어렵게 찾는 것에 의해 인생길이 달라진다고 했다.

 임추각(壬秋閣)’의 정체는 대체 뭘까? ! 숙장화원은 보산(補山)과 장해(藏海) 지역으로 나뉜다고 했다. 보산에는 저 임추각 말고도 완석산방(頑石山房)과 십이동천(十二洞天), 역애오하(亦愛吾廈), 청조루(廳潮樓), 소란정(小蘭亭)이 있단다. 또한 장해에는 미수당(眉壽堂), 임추각(壬秋閣), 진솔정(眞率亭), 사십사교(四十四橋), 초량정(招凉亭)이 있다. 하지만 안내도가 없어 어떤 것들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차례는 일광암이다. 가이드의 뒤꽁무니를 쫄쫄 따라가며 연평공원(延平公園)을 가로지른다. 구랑위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라는데, 얼핏 정성공의 관직인 연평왕(燕平王)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

 캐리커쳐(caricature)를 그려주는 곳인 듯.

 주변에는 유럽풍, 그것도 중세 유럽풍의 건물들이 즐비했다. 맞다. 샤먼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강제 개항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대거 진출했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특히 자연경관이 빼어난 구랑위에는 다양한 외국풍의 영사관저가 들어섰고, 1900년대 초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 거주하던 서양인들의 별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오랜 역사 속의 풍상고초를 대변해준다.

 일광암으로 가는 길목.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일까? ‘고랑동천(鼓浪洞天)’이란 문구가 눈에 띈다. 하문 12경중 하나라며 하문십이명경지일(廈門十二明鏡之一)’라는 부언까지 달았다.

 일광암도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이곳은 60위안이나 된단다. 하지만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어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중국은 공산당(共産黨)’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 공산주의(communism, 지금은 사회주의를 천명하지만), 독재 등의 이미지가 꽤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나라다. 하지만 저 조형물을 보고 어느 누가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겠는가. 가이드도 중국의 체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중국을 여행할 수 있다고 했다.

 초입에 있는 일광암사(日光巖寺)’부터 먼저 들른다. 1521년에 지어졌다니 역사가 무려 500년이 거슬러 올라가는 절이다. ‘연화암(蓮花庵)’으로 문을 열었으나 1596년 다시 지으면서 일광암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0년이라고 한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정과법사(正果法師)가 다시 지었다. 문화혁명기간에는 고랑서 전기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아픔도 겪었다고 했다. 1983년 다시 옛 절의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현판이 매달린 문을 들어가니 비교적 좁은 공간에 여러 채의 당우가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미륵불을 모신 전각 등 당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가 하면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면적이 2856에 불과하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전각의 일부가 굴속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거석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이용해 지었는데, 이 거석을 기와로 간주하여 일편와(一片瓦)’라 부르기도 한단다.

 절 뒤의 암벽에 천풍해도(天風海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늘엔 바람이 불고 바다에는 파도가 친다는 뜻으로 청말민초(淸末民初) 북경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허세영(許世英, 쉬스잉)이 새겼단다. 고랑동천(鼓浪洞天)과 노강제일(鷺江第一)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고랑서의 선경이자 노강 제1이라는 뜻이란다. ‘임성(林鋮)’이란 이름도 눈에 띈다.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때 사람이라는데 노강제일경을 석각했단다. !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고량동천은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작품이라고 했다.

 이제 일광암으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절의 왼쪽에 있는 황암(晃岩)을 스치듯 지나간다. ‘황암(晃岩)’은 일광암의 또 다른 이름. 일광암으로 올라가는 입구임을 은연중 알려준다.

 중화민국 23년에 새겼다는 또 다른 석각. 카메라에 담기는 했지만 설명까지는 생략한다. 경치 좋은 중국의 명승지마다 흔해빠진 게 마애석각(磨崖石刻)이다. 민국시대(民國時代 :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2년부터 국부천대로 인한 국공내전 종전이 있었던 1949년 이전까지의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에 가장 많이 새겨졌다고 한다. 당시 사회적 지위에 오른 장삼이사들이 유행처럼 새기고 다녔다나?

 올라가는 길에 용두산채 유지(龍頭山寨 遺址)’를 지난다. 정성공이 멸청복명(滅淸復明)을 외치며 거병, 둔병(屯兵)했다는 곳이다.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은 청나라에 저항하면서 명나라를 다시 세우려했던 무장이다. 하문에 근거지를 두고 국토 회복을 노렸으나 실패했다.(사진이 별로여서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다음은 주민들이 피서를 했다는 고피서동(古避暑洞)’을 지난다. 바위 아래로 길이 나있어 굴 같기도 하고 통로 같기도 하다. 그 굴을 통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혔던 모양이다. 하나 더. 바위벽에는古避暑洞을 붉은 색으로 새겨놓았다. 대만 출신의 유명한 시인 시사결(施士潔) 100년 전에 쓴 것이란다.

 일광암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선지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바위 위로 길이 나있다.

 출입 인원을 통제할 때나 사용하는 시설이 눈에 띈다. 맞다. 일광암은 정상이 좁기 때문에 동시에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을 통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저 시설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오늘은 한가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광복대(光復臺). 일광암의 가장 높은 곳을 이르는 모양이다. 멸청복명(滅淸復明)을 외치던 정성공(鄭成功)’의 의지를 담아서 말이다.

 맨 꼭대기는 시멘트로 대를 쌓고 전망대를 배치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겨우 두 사람이 비켜 갈 수 있을 만큼 비좁았다. 거친 숨소리를 내는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줄줄이 지친 몸을 서로 부딪치며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래선지 정상 어림은 아예 중간에 휀스를 설치하여 자연스럽게 교차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오른쪽 길이 딱 멈추어있는 게 아닌가. 줄서있는 외국인에게 물으니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정상이 좁기 때문에 내려오는 숫자만큼 끊어서 올려 보낸다는 것이다.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 전망대를 가운데 놓고 순환 통로를 만들어놓았다. 줄서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순환통로만 한 바퀴 돌아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도 정상과 다름없는 조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위가 탁 트인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오마이뉴스의 시선을 빌어 주위를 살펴본다. 남쪽에는 숙장화원과 해수욕장이 있다. 숙장화원은 고딕에서 바로크까지 서양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색깔은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붉은색이다.

 눈을 조금 옮기면 팔괘루(八卦樓)’가 있다. 팔괘루는 건물의 상층부에 팔각형 돔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섬 바깥으로는 멀리 해창대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해창대교는 하문시의 호리구와 해창구를 연결한다.

 동쪽으로는 이청천(李淸泉) 별장과 공작원(孔雀園) 등이 눈에 띈다. 그들 바깥으로 노강(鹭江)이 흐르고 노강에는 하문과 고랑서를 연결하는 페리들이 끝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 너머가 하문시 사명구로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서쪽으로는 숲이 많아 건축물이 숲에 둘러싸여 있다. 그 중 금원(琴園)이 가장 눈에 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육지인 해창구가 보인다. 해창구는 공업지구와 주택지구로 새로 개발되고 있는 일종의 신도시다.

 이젠 시가지를 둘러볼 차례이다. 구랑위는 중국 속의 또 다른 중국’, 또는 중국 속 작은 유럽 마을로도 불린다. 서양 열강들의 조계지로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탓에 중세 유럽풍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붕 없는 건축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이다.

 1.8 남짓한 작은 섬에 유럽풍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아편전쟁 후 조계지로 개방되면서부터다. 샤먼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이 별장과 교회, 주택 90여 채를 지었다. 이 파스텔 톤의 유럽식 건물들이 지금은 카페와 상점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2만여 명의 주민이 실제 거주하고 있어, 자연스러운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구랑위의 매력이다.

 일광암에서의 지체는 골목 투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1/5도 안 되는 인원이 전체(4/5은 일광암 등정을 포기)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느라 역사적인 건물들을 챙겨보지도 못하고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인터넷에서 사진을 구해서 소개해 본다. 먼저 소개할 곳은 영국 영사관이다. 1869년에 지어진 3층짜리 벽돌 건물로 현재 영사관 여관(Consulate Inn)’이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두 번째는 1898년에 지어진 일본 영사관이다. 경시청이 들어있었던 탓에 우리 애국지사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이강(李剛, 1878-1964) 선생을 위시해 여러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다.

 천주당 1916년 마수렌(馬守仁) 주교에 의해 지어진 고딕식 건물이다. 1966년 문화혁명 이후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82년 천주당으로 기능을 회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개신교인 유니온 교회(Union Church)’이다. 1863년 중국 최초의 국제 예배당으로 문을 열었다. 예배도 영어로 보았단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은 1911년 수리를 거쳐 더 커진 유니언 채플(Union Chapel)’로 거듭 났다. 2011년부터 종교박물관, 음악홀, 예식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단다.

 고량서음악당. 구랑위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피아노 덕분에 중국에서 서양음악을 가장 먼저 배우게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단다. 1920년대 주숙안(周淑安), 30년대 임준경(林俊卿), 50년대 오천구(吳天球) 등이 유명하며, 중국 최고의 여자 지휘자인 정소영(鄭小瑛: 1929-) 1998년 이래 하문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고 있단다.

 인민체육장(중국 최초의 잔디구장) . 현대스포츠의 선구자라는 구랑위 출신 마약한(馬約翰, 1882-1966)’의 동상을 만났다. 의학에서 체육으로 전공을 옮긴 그가 청화대 체육주임이 되면서 중국 제일의 지도자가 되었단다. 현대스포츠를 소개해주면서 고랑서에도 운동부가 창설되었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나?

 얼마쯤 걸었을까 거리가 뭔가를 먹고 있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오고가는 언어가 대부분 한국어이다. TV 프로그램 신서유기에서 소개된바 있는 창펀(얇은 쌀피에 고기나 해산물, 채소를 넣어 돌돌 말아 푹 쪄서 간장에 찍어 먹는 요리)’ 식당이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이수근이 무척 맛있게 먹었는데, 방송 이후 샤먼을 찾는 한국인들이 꼭 들러봐야 하는 음식점으로 꼽힌다나?

 간식으로 요기를 때운 뒤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날씨가 제법 덥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목이 마른 순간이면 때깔 고운 열대과일을 바구니 가득 채운 과일행상이 어느 틈엔가 손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구랑위에서 식사는 식당에서 할 수도 있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인 샤오츠(小吃)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그래도 선택하기 어렵다면 줄이 길게 늘어선 곳을 고르면 실패가 거의 없다.

 바닷가를 따라 선착장으로 간다. 따가운 햇살에 바닷물 소금기가 말랐는지 볼을 스치는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전동차가 다니지만 여행자들은 쉬엄쉬엄 걷는 것이 더 좋은가 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야자수, 가지를 늘어뜨린 용나무 그늘 아래로 느긋한 걸음을 옮긴다.

 바다(현지인들은 노강이라고 부른다) 건너 본섬은 구랑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여느 대도시들처럼 마천루들로 뒤덮여 있다. 구량위와 함께 샤먼시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지역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