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3코스(영터버스정류장-산소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5. 28(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화산면·황산면 일원
여행코스 : 영터버스정류장→명성·가좌임도→고천암방조제→고천암자연생태공원→한자리방조제→산소버스정류장(14.7km, 실제는 한자리방조제까지 11.54km를 3시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구간(149.5km)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주요 볼거리는 ‘고천암방조제’와 ‘고천암 자연생태공원’이 전부라 할 정도로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 ‘관두산’에 오르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비경들을 만날 수 있다.
▼ 들머리는 ‘영터버스정류장’(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목포방면 2번 국도. 잠시 후 월산교차로에서는 13번 국도. 해남·완도 방면으로 내려오다 ‘화산면진입로’에서 우회전하여 화산면소재지(방축리)까지 온다. 77번 국도(황산 방면)로 옮겨 들어가다 재동마을 조금 못미처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왼편 ‘풍혈길’로 옮기면 관동마을에 이어 ‘영터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옛날 해진성관(海珍城館, 제주를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한 숙박관소)과 영(營)터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관동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단다.
▼ 3코스는 ‘영터버스정류장’에서 명성·가좌 임도와 고천암방조제(생태공원)을 지나 ‘산수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4.7km의 둘레길이다. 임도와 농로, 제방을 따라 걷는 코스라서 어렵지는 않지만 고천암방조제와 생태공원을 빼면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이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가며 관두산에 오를 경우 상황을 확 바뀌어버린다. 풍혈과 던바위·샘, 봉화대터 등 의미 있는 곳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까지 지정되어 있겠는가.
▼ 서해랑길 안내도와 이정표(종점 14㎞/ 시점 0.4㎞)는 관동방조제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바닷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트레킹도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북쪽), 그리니까 ‘관동리(關東里) 포구’쪽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모자를 쓴 것처럼 생긴 바위봉우리가 보이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이처럼 관두산은 옛날 대륙을 오가던 배들의 이정표였었다. 산은 저처럼 그 모습 그대로인데, 바다는 지금 완전히 달라졌다.
▼ 해무가 깔린 바다에는 다섯 개의 섬(상마도·안도·중마도·하마도·서당도)이 두둥실 떠있다. 옛날 제주에서 건너온 어승마(御乘馬)가 한양으로 올라갈 때까지 원기를 회복하던 곳이다. 1702년 ‘탐라순력도’는 임금이 탈 어승마 20마리를 비롯해 총 433마리를 진상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바다를 건너오는 말의 먹이를 준비하고 공마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마을이 ‘도회지(都會地)’였다. 그게 강진·해남·영암에 있었고, 그때 싣고 온 말이 쉬던 곳이 저 섬들이었다.
▼ 바닷가는 질 좋은 모래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갯벌투성이인 남해안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개발하지는 않은 듯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 첫 번째 삼거리에서 오른편 임도로 올라선다. 곧장 진행하면 ‘관두리 선착장’. 관두리방조제가 생기면서 새로 조성된 포구라고 보면 되겠다. 제주도와 중국(송나라)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던 국제무역항 관두량(館頭梁, 현재의 관동리 일대)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대동지지(1865), 동국여지승람(1481) 등의 문헌은 고려시대 중국의 남경을 왕래하던 개항지로 해남의 남쪽 4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관동-명성 임도’를 따른다. 이곳에서 시작해 명성마을까지 이어지는데 길이는 2.8km쯤 된다.
▼ 길을 나선지 8분(앱은 0.65km를 찍고 있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인다. 관두산을 오르느냐를 두고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길이 나있지는 않지만 관두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치고 올라야하기 때문이다. 내 선택은 물론 관두산 등산이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국가산림문화자산(산림과 함께 살아온 선조의 생활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생태적·경관적·정서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유·무형의 자산)’으로 지정된 비경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망설이겠는가.
▼ 관두산을 오른 다음 다시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봉수대와 풍혈, 던바위·샘, 난간절벽, 삼형제바위 등 관두산이 품은 비경들을 샅샅이 살펴본 다음 명성리 방향으로 내려가면 서해랑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멋진 경관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길은 흔적조차 없었고, 잡목과 가시나무, 넝쿨식물 등 장애물들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퀴거나 찔리고, 거기다 싸대기 두어 대는 각오해야 ‘감(甘)’을 만날 수 있다.
▼ 능선까지의 거리가 짧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악전고투를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고와진다. 길이 널찍해졌을 뿐만 아니라 중요 지점에는 국가지점표지판까지 설치해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 정상으로 가는 도중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이때 관동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1967년 화산면 관동리와 평호리를 잇는 관동리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그 옛날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방조제 인근에 있던 관(館)터와 영(營)터는 민가와 공장이 들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해남에는 저곳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대 해양도시가 곳곳에 있단다.
▼ 아래서 올려다본 관두산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조금 심했을 뿐 오르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철제계단을 놓았는가 하면 그게 불가능한 곳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 능선에 올라선지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만에 관두산(館頭山,178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표지기(산꾼들이 등정 기념으로 매달아놓은 리본)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이정표(풍혈 0.6㎞/ 땅꼭재 1.1㎞)와 삼각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봉수대(해남 향토문화유산 29호)가 있었다. 세종 때 쌓은 봉수로 멀리 서남해의 왜구들이 넘나드는 것을 조망하여 서울 쪽으로 봉화를 중계했었단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이웃 진도와 서남해 바다를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관두산봉수의 흔적은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때 초축되어 남으로 갈두산, 서로는 진도 첨찰산에 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먼저 오르는 도중 보았던 관동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진 채로이다. 그 뒤에는 달마산을 품은 ‘땅끝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리자 이번에는 해무 속에 잠긴 진도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전산수화 속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서니 헬기장이 나온다. 군사정권 시절 이 시설을 만들기 위해 봉수대의 돌들을 헐어냈다니 역사를 말살시킨 원흉이라 하겠다.
▼ 길은 짙푸른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가 대부분. 남쪽 해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사나무도 심심찮게 보인다.
▼ 조금 더 내려가니 ‘안부사거리’. 고맙게도 이정표(난간절벽↑ 0.4㎞/ 풍혈← 0.43㎞/ 던바위·샘· 30m/ 정상·봉화대터↓ 0.1㎞)와 탐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참! 삼형제바위를 찾는 사람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안내판의 하단에 거리 및 방향 표시를 따로 해두었다.
▼ 이 안내판 때문에 난간절벽을 걸어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풍혈과 난간절벽을 서로 엇갈리게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실제는 난간절벽을 지나 풍혈로 갈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 먼저 오른편 ‘던바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30m쯤 들어가자 바위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흡사 지붕의 처마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것이 비바람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지자체에서는 던바위 앞 널따란 공터에 돌탑을 쌓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바위틈에서 떨어진 물이 모여 작은 샘을 이룬다.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대로가 약수다. 이 약수는 기도에 영험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돌탑에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걸려 있었다.
▼ 동굴에서의 사진은 안에서 밖을 향해 앵글을 맞춰야 제 맛이다. 이때 함께 산을 오른 둘레길 도반의 모습이 주인의 허락도 피사체에 들어와 버렸다. 나름대로 산에 대한 이력을 인정받는 나보다도 한 수 위의 능력을 자랑하는 분이다.
▼ 던바위 옆에는 진짜 샘도 있었다. 이 샘은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똑같은 수위를 유지한단다. 산의 정상 어림에 그것도 산세도 그리 크지 않은 곳에 저럼 샘이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풍혈’쪽으로 향했다. 일행 두엇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없어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하지만 관두산의 또 다른 명소인 ‘난간절벽’은 길이 어긋나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낙화암을 무색케 할 만큼 깎아지른 절벽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거기다 난간에라도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잡힐 듯 가슴을 죄게 한다는데 말이다.
▼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풍혈사거리’가 나온다. 이정표(해안로/ 대상절벽/ 풍혈/ 정상·봉화대터)는 우리가 걸어온 방향을 ‘절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왼편은 ‘풍혈’. 오른편은 ‘대상절벽’이란다. 그렇다면 난간절벽 코스를 이용해도 풍혈에 이를 수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억울하다.
▼ 삼거리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돌탑들이 모여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저리도 공들여 쌓아올렸을까?
▼ 몇 걸음 더 걸으니 큰 바위들이 서로 엇갈리게 쌓여있는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이곳 관두산이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되게 만든 장본인인 ‘풍혈(風穴)’이다. 화산활동 과정에서 깨진 큰 바위들 틈에 크고 작은 동굴들이 만들어졌고, 암반 틈새로 흘러들어간 빗물이 데워지면서 수증기로 변해 이 동굴을 통해 올라온단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이곳 말고도 풍혈이 여럿 있다. 그중 여름철에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곳으로는 대두산(전북 진안)의 풍혈냉천(風穴冷泉)과 울릉도의 도동풍혈, 밀양 얼음골, 빙계계곡(경북 의성)의 빙혈(氷穴)이 유명하다. 겨울철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곳은 이곳 관두산 풍혈과 구병산(충북 보은), 작약산(경남 김해)의 풍혈이 있다. 이중 대두산 풍혈냉천과 구병산 풍혈, 도동 풍혈을 ‘3대 풍혈’로 꼽는다.
▼ 풍혈(風穴)이란 여름에는 찬 공기가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구멍을 말한다. 이곳 ‘관두산 풍혈’은 여름에 찬바람이 나오기보다는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구조다. 지하로 유입된 물이 지하의 열원에 의해 데워져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관두산을 이루는 암석의 틈새를 통해 올라오는 현상으로 추정된단다.
▼ ‘관두산 풍혈’의 얼굴마담은 ‘용굴’이다. 영하의 추운날씨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용이 숨을 뱉어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건 그렇고 ‘용굴’에 들어간 둘레길 도반의 첫마디는 ‘애계! 하나도 시원하지 않잖아?’였다. 맞다. 더운 바람이 나오는 관두산 풍혈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만나야 제격이다.
▼ 용굴 안에 있는 좁은 구멍. 그러니까 돌을 던지면 풍덩하는 소리가 났다는 그 구멍을 찾다가 포기(안 보이니까)하고 나오려는데 들어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도반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게 또 풍취가 있는 그림이 되는 게 아닌가. 맞다. 동굴은 안에서 밖을 향해 찍어야 제 맛이다.
▼ 풍혈은 ‘용굴’말고도 10곳이 더 있다. 아래 사진처럼 꼬맹이 풍혈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풍혈 주변은 겨울철에도 17∼20도 가량의 온도를 유지한단다. 고사리 및 이끼류가 많이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 다음 볼거리인 ‘삼형제바위’까지는 꽤 멀다. 길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런 잔소리를 서너 번이나 듣고 나서야 삼형제바위에 이를 수 있었다. 바위는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고만고만한 바위 세 개가 비스듬히 서있는데, 애달픈 옛이야기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 갑자기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5분쯤 내려왔을까 아까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관두산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탓에 일행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 집사람을 뒤쫓아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왼편으로 시야가 툭 트인다. 물 떠나가는 바닷가에 증도가 외롭다. 아니 꼬맹이 섬을 끼고 있으니 꼭 외롭지만은 않겠다.
▼ 임도가 끝나면 명성마을의 널따란 들녘. 서해랑길의 이정목(종점 11㎞/ 시점 4㎞)이 반긴다. 그런데 내 앱은 3.4km를 찍고 있다. 관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지만 대신 거리는 0,6km가 단축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적 작업이 한창인 물류창고가 나오는데, 꼭 남의 집 앞마당을 통과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작업자의 친절한 안내가 아니었더라면 난감한 상황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방조제에 올라서니 물 빠진 바닷가에 흔치 않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구를 잔뜩 실은 무동력선들이 흡사 섬이라도 되는 양 바닷가에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 방조제가 방조제 같지 않다는 느낌은 왜일까? 바다를 막는 큰 그림이 아니라, 바닷물이 넘쳐들지 못하게 해안에 둑을 쌓은 수준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로인해 작은 토지가 생겨났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 둑길을 지난 둘레길은 명성마을(관동리)로 들어선다. 이어서 마을을 스치듯 지나치며 무학마을(가좌리)로 향한다.
▼ 6분쯤 더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둘레길은 이곳에서 임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대월산(130m)의 허리께를 따라 난 임도를 따른다.
▼ 임도의 길이는 1.98km. 명성마을에서 시작해 대월산을 에두른 다음 가좌마을로 내려선다. ‘가좌-명성임도’로 명명된 이유일 것이다.
▼ 임도의 특징대로 길은 삭막한 편이다. 거기다 널찍하다보니 그늘을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여름철 뙤약볕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 가끔가다 시야가 트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때 해무에 잠긴 진도가 자태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는 ‘증도’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대월산이 바닷가에 떨쳐놓은 한줌의 땅처럼...
▼ 길가에 터를 잡은 집주인은 가로수 하나 없는 임도가 못내 서운했던가 보다. 수십 개의 고무 다라이(표준어인 ‘대야’로는 그 느낌 전해지지 않아서)를 길가에 펼쳐놓고 수련(睡蓮)을 키운다. 수련이 꽃을 피우는 여름철에라도 찾아오면 또 다른 멋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 17분을 걸어 임도를 빠져나오니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이렇듯 해남의 해안가 들녘은 너나없이 방조제로 바다와 경계를 삼는다. 그저 국가차원의 대단위 사업인지, 아니면 주민들의 손에 의해 오래전 만들어졌는지가 다를 뿐이다.
▼ 물 빠진 바닷가에는 잘생긴 섬 하나가 들어앉았다. ‘중도’란다. 조금 전에 보았던 섬은 ‘증도’. 헷갈리기 딱 좋은 이름들이다.
▼ 방조제 끄트머리에서 바닷가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가좌마을(可座里)을 향해 나아간다. 이때 썩 반갑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선 곳이 하필이면 농경지였기 때문이다. ‘식량 안보’.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 농로를 따라 18분쯤 걸었을까 구릉형의 산지에 들어앉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정표(종점 6.3㎞/ 시점 8.5㎞/ 가좌리마을회관 560m)까지 세워놓았을 정도로 중요한 지점인데 마을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자연부락마다 표지석을 세워 마을 자랑을 하고 있던 지리산 둘레의 마을들에 비해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서해랑길의 길안내 표식이 한꺼번에 모여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고개를 넘으면 ‘고천암방조제’가 나온다. 그 둑길을 걷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으로부터 이곳 해남의 특징을 들을 수 있었다. ‘산야해(山野海)’의 고장. 즉 산(두륜산과 달마산)과 야(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너른 들녘) 그리고 해(절반에 가까운 군 경계가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의 진리를 오늘도 절감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풍경을 이곳 ‘고천암 방조제’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 왼편에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진도가 가로막았다지만 바다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삼위(山野海) 일체의 하나(海)가 되었다.
▼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나머지 둘이 펼쳐진다. 고천암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이 지평선을 연상시킬 정도로 드넓게 펼쳐지는데, 그 뒤를 두류산과 미륵산 등 해남의 명산들이 떠받치고 있다.
▼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징의항’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징의리 어민들을 위한 포구지만, 선착장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 물 빠진 바다는 시커먼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내게는 갯벌로 보이는 저 바다는 어민들에는 생업의 터전이자 평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생명줄이다. 그래서 가끔은 안쪽에서 흘려보내는 담수 문제로 농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 잠시 후 배수갑문이 나오면서 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눈에 들어온 갑문은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저수량이 1만 7,103㎥나 되는 고천암호의 수위를 조절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팁 하나. 이곳 배수갑문은 옛날 ‘구수(口水)나루’로 불리던 곳이다. 새벽이면 해파리·돌김·숭어·병어·간재미 등 징의도에서 잡히는 풍부한 해산물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물이 드나드는 입’이라는 뜻의 이 나루터에 배수갑문이 생겼으니 옛사람들의 혜안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 배수갑문에는 ‘금보다도 더 귀하신 실뱀장어’의 현실을 보여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실뱀장어는 ‘연어’와 반대로 어미가 바다에서 산란하면 강으로 돌아와 산다. 그 새끼가 들어오는 길목에 불법(허가받지 않은 채로)으로 안강망(鮟鱇網)을 치는 행위를 하지말자는 것이다. 적발될 경우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지지만 고수익(하루에 수백만 원도 더 번단다)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 ‘고천암호’는 한자리(閑子里, 황산면)과 율동리(栗洞里, 화산면)을 잇는 1,874m 길이의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담수호다. 호수의 면적은 6.65㎢(약 202만평)로 갈대숲을 비롯한 습지가 잘 발달되어 철새들이 즐겨 찾는다. 내사리 일원의 갈대숲이 특히 유명한데, 갈대탐방로에 들어서면 사방을 에워싼 갈대숲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란다. 영화 ‘서편제’와 ‘살인의 추억’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고천암호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방조제 내 간척지에서 본격적으로 쌀농사를 시작하면서 철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겨울에 들어서면 전 세계 가창오리의 95%가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그밖에도 황새나 저어새 등 천연기념물들도 이곳에서 월동을 한단다.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가창오리 떼의 군무가 특히 유명한데, 해남군에서는 ‘고천후조(庫千候鳥)’라는 이름을 붙여 해남8경 중 으뜸으로 꼽는다.
▼ 배수갑문을 지나면 황산면 ‘한자리’. 트레킹을 시작하고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이곳에는 한국농어촌공사의 ‘고천암관리소’가 들어서 있다. 이는 곧 국가차원에서 호수를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고천암(庫千巖)’은 생태공원 맞은편의 산처럼 생긴 거암으로, 천석 벼를 쌓은 창고 모양이란 뜻이란다. 방조제가 생긴 이후 주위가 비옥한 평야로 변하자 주민들은 ‘천개의 창고를 채울 수 있는 곡창’으로 해석한단다. 선견지명이 담긴 지명이라 하겠다.
▼ 관리소 앞은 ‘자연생태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바닥분수가 있는 에코센터, 철새와 고천암호의 낙조를 즐길 수 있는 조류관찰센터와 조류탐조대, 고천암호 갈대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갈대탐방로 등이 들어서있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겨울철이 아니면 철새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공원을 대표하는 조형물은 ‘가창오리’다. 실물을 쏙 빼닮은 조형물을 설명판과 함께 곳곳에 세워놓았다.
▼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길가 징의리(澄衣里) 들녘은 모내기를 거의 끝냈다.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소만(小滿)이 지난지도 벌써 일주일. 부지런한 농부들에게는 모내기를 끝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 둘레길은 징의마을(작은재)을 향해 나아간다. 이곳 징의리는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7년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아직도 이곳을 '징의도'라고 부른단다.
▼ 그렇게 18분쯤 걷자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 2.5㎞/ 시점 12.3㎞)에 올라선다. ‘송호해변’에서 북상하는 이 국도는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이 1,258km나 된다. 여행자에게는 ‘77’이라는 도로번호만 봐도 반가운 것이, 바다가 지척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바다는 명량해협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다. 그 초입에 아름다운 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준도’라는 이름의 섬이다.
▼ 이곳에서도 태양광발전소를 만났다. 그런데 아까 ‘명성리’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범위가 넓다. 널디너른 간척지가 온통 태양광 패널로 덮여있는 것이다. 농사가 힘들다는 것은 나도 안다. 태양광발전이 고수익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 넓은 농토에 태양광발전소를 만들다니 해도 너무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않았던가.
▼ 날머리인 산소버스정류장을 2.5km쯤 앞둔 지점(징의버스정류장)에서 트레킹을 마감하기로 했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집사람을 배려해서이다. 친환경소금을 생산한다는 염전이나 밀·보리가 익어가는 간척지의 목가적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1.54km. 관두산을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꽤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날머리인 ‘산소(山所)’ 마을까지는 콜택시를 이용했다. ‘산소마을’은 한자리(閑子里)에 속한 4개의 자연부락(행정단위인 한자리, 산소리, 신정리, 징의리) 가운데 하나다. 평평한 구릉평야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소리는 해남에서 제일 먼저 어업조합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 종점으로 표시된 ‘산소버스정류장’이다. 하지만 서해랑길 안내판은 정류장에서 80m쯤 떨어진 삼거리에 세워놓았다. 삼거리가 3코스와 4코스의 시·종점이지만 특별히 내세울만한 시설물이 없다보니 이 버스정류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나보다.
▼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은 ‘산소항’에서 먹었다. 밥 먹을 장소를 찾던 회장님이 발품을 팔아가며 찾아낸 곳인데, 덕분에 우린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한껏 여유를 부려가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지주가 숲을 이루는 바다는 지주식 김을 주제로 한 어촌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김 채취와 제조과정을 전통방식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갯벌에 생육하는 망둥어·낙지·농게·굴·꼬막 등을 관찰하는 갯벌체험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지주식 김은 조수간만 차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생산해 옛날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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