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4코스(산소버스정류장-원문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6. 11(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황산면과 문내면 일원

여행코스 : 산소버스정류장→초월마을→외입마을→춘정마을→옥동배수지→옥동마을→삼호마을→원문버스정류장(14.5km, 실제는 옥동마을까지 12.65km를 2시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구간(149.5km)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코스는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전무하다. 그저 방조제와 간척지, 태양광발전소가 볼거리면 몰라도. 그래서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는 옥동방파제를 찾았고, 그곳에서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지닌 유적을 만날 수 있었다.

 

▼ 들머리는 ‘산소버스정류장’(해남군 황산면 한자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강진방면 2번 국도. 서호교차로(영암군 서호면 서호리)에서 49번 지방도(삼호·진도방면),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77번 국도(진도·완도방면), 우수영교차로(해남군 문내면 선두리)를 지나 한자버스정류장에서 오른편 ‘한자길’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을 이용(‘산소버스정류장’을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4코스(안내도는 ‘영암 4코스’로 적고 있다)는 ‘산소버스정류장’에서 ‘원문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4.5km의 둘레길이다. 농로 및 임도를 따라 걷는 코스라서 어렵지는 않지만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풍경이 전무하다는 게 단점이다. 간척이 만들어놓은 널따란 들녘과 그 안에 들어선 거대한 태양광발전소가 볼거리라면 몰라도 말이다.

▼ 인증에 필요한 둘레길안내도(해남 4코스)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쪽으로 70m쯤 떨어진 곳에 세워놓았다.

▼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전신주에 4코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또 다른 표식이 매달려 있다.

▼ ‘산소(山所)’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산소마을은 법정마을인 한자리(閑子里)에 속한 4개의 자연부락(한자·산소·신정·징의) 가운데 하나다. 둘레길은 이 마을을 끝으로 한자리에서 호동리로 넘어간다.

▼ 산소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태극기’다.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린다. 궁금증을 못 이겨 동네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상시 태극기 게양 시범마을’로 선정되었단다. 365일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는 것이다.

▼ 계란을 판매한단다. 토종닭도 판단다. 그런데 닭은 세 마리뿐이다. 자기 먹기도 바쁠 텐데 남에게 팔게 있을까?

▼ 마을을 벗어나자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산소마을은 평평한 구릉(평야)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해남에서 가장 먼저 어업조합이 설립되었을 정도로 소문난 어촌이란다. 특히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지주식 김은 옛날 맛을 그대로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수간만 차를 이용한 전통방식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란다.

▼ 둘레길 순례꾼들의 벗은 ‘이정표’다. 얼마나 걸었고, 또 얼마나 걸어야할지를 알려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집사람은 부담부터 되는가 보다. 하긴 무릎이 시원찮은 그녀에게 14.5km는 버거운 여정일 수도 있겠다.

▼ 서해랑길에서 ‘양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로나 제방, 임도를 따르다보니 햇빛을 가려줄 게 일절 없기 때문이다. 오뉴월 뙤약볕을 견뎌내려면 양산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서해랑길 해남구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사방이 온통 들녘뿐인 것이다. 나머지는 언덕 수준의 산. 뜀뛰기 한번이면 거뜬하게 넘어버릴 정도로 낮다.

▼ 또 다른 특징은 태양광발전소다.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을 따라 태양광 패널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물론 논농사보다 소득이 더 나아서 일 것이다. 하지만 ‘식량 안보’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요즘으로서는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다.

▼ 간척지의 특징은 자로 잰 듯이 구획정리가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 사이로 난 둘레길 역시 직선일 수밖에 없다. 이런 길을 계속해서 걷다보면 지루해지기 딱 좋다. 가끔은 이런 곡선구간이 나타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길을 나선지 25분 만에 ‘호동배수장’에 도착했다. 간척지인 ‘호동리(虎洞里)’ 들녘의 물길을 관리하는 배수갑문이다. 법정 마을인 호동리에는 호동마을, 한아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들어서 있지만 둘레길은 마을안길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 배수장에서 바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아니 물이 빠져나갔으니 ‘망망 갯벌’이겠다. 그 중심에서 뽈록하니 솟아오른 건 죽도일 것이다.

▼ 배수장을 벗어난 둘레길은 다시 바다와 헤어진다. 그리곤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간다.

▼ 산이 낮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보니 산자락은 대부분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물이 필요했을 게고, 둘레길은 생태연못을 연상시키는 저런 ‘둠벙’을 심심찮게 만난다. 이 또한 해남 들녘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경작이 불가능한 곳에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다. 각기 다른 모양의 패널이 눈길을 끈다. 지형에 맞게 조립해놓은 모양인데 얼핏 예술 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 가슴에 담을 게 별로 없으니 지루해질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산딸기가 지천이니 쉬엄쉬엄 걸으면서 따먹어 볼 일이다. 주전부리로 이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 엊그제가 망종(芒種). 보리가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텃밭의 고추도 어른만큼 덩치를 키웠다. 오래 전 끄적거려봤던 자작시가 생각나 그 일부를 옮겨본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다들 들녘에 나간 빈자리만이 아이들을 반길 뿐/ 점심때 먹은 도시락은 기억에 없고 처마 밑에 매달린 대나무 광주리만 눈에 차 오른다./ 한걸음에 도착한 뒤안 옹달샘가/ 바닥에 깔린 보리 알갱이 하나라도 놓칠새라 조심스레 물에 인다./ 몽당 놋수저 움직임을 누가 볼새라/ 두입 걸러 한입 넣는 된장 입힌 풋고추의 얼얼함에 엉덩이 들썩거림은 차라리 추임새다./ 그나마 보리밥에도 정신없이 코 박던 옆집아이는 갈비뼈 앙상한 가슴에 배만 남산만 했다.>

▼ 옥수수도 수염을 달아 어른이 됐다. 홍천 우리 농장의 것도 저 정도 여물었겠지?

▼ 호동배수장에서 20분. 초월리에 들어섰다. 둘레길은 외입리(外笠里)의 3개 자연부락(외입·송청·초월) 가운데 하나인 이 마을의 골목길을 통과한다.

▼ ‘호박꽃도 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양파는 그런 농담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 초월마을에도 말뚝 모양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4.1km나 걸었음을 알리는. 하지만 트레킹을 끝마치려면 아직도 10km나 더 걸어야 한단다.

▼ 마을 뒤 언덕을 넘자 또 다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둘레길은 이제 외입리의 들녘을 꿰뚫으며 나아간다.

▼ 들녘은 모내기를 거의 끝마쳤다. 하지만 수확기를 앞둔 밀밭도 심심찮게 보인다. 보리 수매가 폐지되면서 대체 품목으로 심기 시작한 ‘우리밀’이 이젠 자리를 잡아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들녘을 꿰뚫으며 난 길은 곳곳에서 나뉜다. 하도 많다보니 그때마다 이정표를 세우는 건 애초부터 그른 노릇. 가장 쉬운 표식인 리본까지도 매달 수 없는 곳도 심심찮게 만난다. 이럴 때는 한번쯤 바닥을 살펴보자. 서해랑길 특유의 방향표식이 반긴다. 노란색이 정방향. 군청색은 반대방향이다.

▼ 이 뭐꼬? 처음 보는 꽃이라는 집사람의 호들갑에 카메라에 담아봤지만 무슨 꽃인지 도통 모르겠다.

▼ 길은 대부분 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지평선 못지않게 광대한 느낌을 준다. 들녘은 끝없이 넓고 산줄기는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배수장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에는 ‘연당’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연당리(蓮塘里) 들녘을 적셔주는 물길을 관리하는 배수갑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에서 또 다시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진도를 바라보는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해남의 뭍을 건너편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송청마을로 향하는 길. 바닷가 너른 터에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다. 옛날 같으면 천일염 생산이 한창이었을 게다. 이렇듯 해남의 염전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게 해남의 김치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한다. ‘청정 소금으로 만든 청정 김치’라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을까 해서다. 답은 ‘더 이상의 태양광발전소’는 ‘노’가 아닐까?

▼ 8분쯤 더 걸어 송청마을에 들어섰다. 200-300년 된 소나무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송청(松靑)’이란 지명을 얻었단다. 그나저나 마을은 너른 평야지대에서 도톰하게 솟아오른 구릉지에 걸터앉은 모양새이다. 하지만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의 실제 사례라고나 할까?

▼ 마을안길을 지나 고개를 넘자 또 하나의 자연부락. 아니 이곳도 역시 송청마을이다. 그건 그렇고 마을안길을 지나다 넉넉한 인심을 만날 수 있었다. 동네 어르신 두엇이 막걸리를 마시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불러 세우는 것이다. 갈 길이 바빠 권하는 술잔을 마다했지만, 그네들의 보태준 행복 바이러스만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옛 향기를 퐁퐁 풍기는 집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담장과 구분이 되지 않는 집은, 담장처럼 흙과 돌을 이용해 외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씌웠다.

▼ 밭을 가로지르는 둘레길 도반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서해랑길의 또 다른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서해랑길은 앞사람과 200m쯤 떨어져서 뒤따르는 게 가장 유리하다. 길이 하도 구불구불해서 아래 사진처럼 가로지를 경우 꽤 많은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 10분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외입마을’이다. ‘외입’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에 있는 갓을 씌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이 바위의 바깥에 해당한다고 하여 ‘바깥 갓바우’라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외립(外笠)’으로 변했단다.

▼ 마을회관은 어르신들의 놀이터다. 그래서 ‘경로당’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얻었다. 그런데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났던 경로당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곳은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까지도 달리 쓰고 있었는데, 이곳은 남녀를 별도로 구분해놓지 않았다. ‘성추행’이라는 사회적 화두에서 그만큼 자유롭다는 얘기가 아닐까?

▼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의 저서 가운데 ‘행복한 맛 여행’이 있다. 여행의 행복을 맛에서 찾았음이리라. 맞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오디를 따먹느라 정신이 없는 저 여인네들은 그 진리를 증명하고 있나보다. 그네들의 얼굴에 함박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보면 말이다.

▼ 마을 앞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외입저수지’가 있었다. 산자락을 끼고 있지 않아 아름다운 풍경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강태공들에게는 제법 이름을 알린 낚시터다. 월척 참붕어와 떡붕어의 입질이 잦고, 재수라도 좋으면 팔뚝만한 잉어까지 건져 올릴 수 있단다.

▼ 저수지 상류의 정자는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쉼터가 되어준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간식도 먹을 겸해서 올라서니 쉼터로는 이만한 곳도 없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야...

▼ 해남군에서 설치한 서해랑길 이정표다. 상단에 지명과 거리가 표시된 방향표식을 달았고, 하단에는 보드에다 4코스를 선으로 그려 넣었다. 하지만 방향표식은 서해랑길과 비서해랑길이 구분되지 않고, 하단의 지도도 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다. 길 찾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정표라고나 할까?

▼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호남 제조업의 대부랄 수 있는 ‘이훈동(李勳東)’씨의 공적비가 눈에 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조선내화(용광로 등 높은 온도에서 버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벽돌을 만든다)의 회장이자 전남일보를 설립한 기업인이었다. 고향 땅에 기부를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이곳 외입마을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 둘레길은 이제 춘정마을을 향해서 간다. 10분 남짓의 거리에 불과하지만 이 구간은 들녘길이 아닌 호젓한 임도를 따른다. 덕분에 잠시지만 그늘도 만나게 된다.

▼ 고개를 넘자 ‘춘정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법정 마을인 부곡리(富谷里)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자연부락(부곡·신곡·소정·춘정·성산) 가운데 하나이다.

▼ 잠시지만 버스정류장(춘정)부터는 2차선 도로(부곡길)를 따른다. 하지만 인도를 따로 내놓지는 않았다. 가끔가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거칠 것 없이 속도를 내니 주위를 살피면서 걷기로 하자.

▼ 도로를 벗어난 둘레길은 또 다른 들녘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두랑영농조합법인’의 커다란 창고를 스치듯 지나 옥동저수지(둑 아래를 살짝 지나가기 때문에 저수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로 다가간다.

▼ 이 구간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들판과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아득한 직선로다. 바닷가에 방조제를 쌓아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만든 갯벌을 간척해 바둑판 형태의 곡창지대를 일궈냈다. 그 곡창지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은 자연스럽게 직선이 된다.

▼ 연으로 가득한 논이 눈에 띈다.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자생한다고 해서 ‘연꽃 연(蓮)’자에 ‘연못 당(塘)’자를 붙였다는 ‘연당마을(연당 들녘은 아까 지나왔다)’이 아닌데도 말이다. 연을 길러 얻는 수익이 쌀농사보다 더 알차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1km가 넘는 농로길 중간에 있는 노루목산(해발 34m)은 국내유일의 금광이 있다. 아니 인근 모이산을 비롯해 충북(4곳)과 경남(2곳)에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곳을 빼면 그 양은 극히 미미하단다. 하긴 국내 생산량의 95%인 200㎏을 매년 생산한다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금을 얻기 위해서는 굴진(굴착)-측량-금맥발견-발파-채광-금광석 운반-선광(選鑛, 캐낸 금광석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잡석을 고른)-제련(製鍊, 금괴를 만드는 작업)의 과정을 거친다. 노루목광산에서는 선광까지만 이루어지며, 선광을 끝낸 정광(精鑛·금·은 등을 포함한 금속가루)은 제련업체로 보내져 금·은, 기타 금속으로 분리되어 금괴로 만들어진다.

▼ 너른 들녘 너머로 나타나는 마을은 옥동리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인 ‘옥연마을’일 것이다.

▼ 농로의 끄트머리(옥동리 마을회관을 1.7km쯤 남겨놓은 지점이다). 바다와의 경계는 배수갑문이 맡았다. 이름표는 붙어있지 않았지만 옥동들녘의 문지기이니 응당 ‘옥동배수장’이겠지? 참고로 춘정버스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28분이 걸렸다.

▼ 방조제로 올라서자 널디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건너 맞은편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부곡리 땅이다. 그 오른편에 진도가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배수장을 지난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크게 휜다. 그리고는 옆으로 누운 ‘U’자 모양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돈다. 그게 싫었던 우리 일행은 바닷가를 따르기로 했다. 토목공사가 한창이라 조금 위험했지만 200m 이상을 단축시킬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 해안가 모퉁이를 돌자 다시 둘레길과 만난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옥동마을로 향한다.

▼ 이때 커다란 대하양식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90년대 말쯤 일 것이다. 소금수입의 자유화와 함께 염전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당시 폐전을 원하는 일부 천일염 사업자들이 정부의 지원금을 종자돈 삼아 대하양식장을 열었는데, 저것도 그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 진행방향 저 멀리에는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 ‘옥매산’이 놓여있다. 그 아래 비탈진 곳에는 ‘삼호마을’이 자리 잡았다. 둘레길은 저 마을의 앞을 지난다.

▼ 배수장을 지나친지 23분 만에 ‘옥동(玉洞)’ 마을에 닿았다. 법정마을인 옥동리(玉洞里)를 구성하는 세 개의 자연부락(옥동·옥연·삼호) 가운데 하나로. ‘옥(玉)+동네(洞)’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이 옥(玉)이 생산되는 옥매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 이정표도 ‘옥공예체험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 이제 옥동마을과 삼호마을의 경계랄 수 있는 도로(‘삼원길’로 801번 지방도의 옥동버스정류장에서 옥동선착장을 잇는다)까지 나가기만 하면 된다. 다리가 불편한 집사람을 위해 콜택시를 불러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둘레길에서 1km쯤 벗어난 곳에 위치한 ‘옥동방파제’를 둘러보고 싶은 내 바램이 더 컸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유적이 있다는데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

▼ 마을을 빠져나오다 안타까운 현장을 만났다. 널디너른 남새밭에 말라비틀어진 배추가 한가득인 것이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수확을 포기한 농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옥매산’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었다. 일제가 군수품인 알루미늄 제련의 원료로 쓰이는 명반석(백반석)을 얻기 위해 개발, 산봉우리가 깎여나가 협곡이 됐을 정도로 많이 캐갔다. 저곳은 또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동원 중 가장 큰 규모의 동원지로 알려진다(자세한 얘기는 아래서 전하겠다). 그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옥매산의 산자락에서는 아직도 채광이 한창이었다. 도자기 원료로 쓰이는 납석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 택시에서 내리니 널따란 광장이 반긴다. 선착장(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옥동방파제’자 적고 있다)에 딸려있으니 ‘물양장’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지만 이곳은 강제징용에 의해 희생된 ‘옥매광산’ 광부들의 넋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더 유명하다. 해남군민 1인이 1만원씩을 내는 모금행사를 벌여 1400여만 원의 기금을 모았고, 그 돈을 종자돈 삼아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세웠다. 이런 사연은 tvN의 ‘유퀴즈 온 더 블록’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진행자인 유재석과 조재호가 성신여대 서경덕교수와 함께 이곳을 찾아 당시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전한바 있다.

▼ ‘임이여 영원하라’는 주제의 5.5m 높이 추모조형물은 배 모양으로 생겼다. 광부들이 타고 돌아오던 배를 상징할 것이다. 희생된 118명의 광부를 상징하는 같은 숫자의 원구는 수직으로 세웠다. 죽고 나서야 고향의 품에 안긴 광부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을 담았단다.

▼ 추모비의 뒤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옥매광산에서 채취한 맥반석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 저장하던 창고란다.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아픈 수탈의 역사를 잊을 수 없다는 듯 아직까지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안내판은 ‘옥매광산’에 대한 역사를 담았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이 지역의 광부들은 강제로 제주도로 끌려가 굴을 파는 일에 동원되었다. 해방을 맞아 어렵사리 구한 배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청산도(완도군) 앞바다에서 배가 화재로 바다에 가라앉으면서 118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후 유가족들과 지역민들에 의해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 방파제 쪽으로 나가자 ‘혈도(피섬)’가 눈에 들어온다. 정유재란 당시 이곳 명랑해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조선수군과 왜군 사상자들이 흘린 피가 만(灣)으로 흘러들면서 땅까지 선연한 핏빛으로 물들였다 해서 ‘피섬’이란 지명이 생겨났고 한다. 우리를 실어다 준 택시기사는 또 다른 얘기를 전해주었다. 명랑해전에서 대패를 당한 왜군이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줄도 모르고 저 섬에 숨어들었다가 조선수군에 의해 전멸을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왜군이 흘린 피가 섬을 핏빛으로 물들였다나?

▼ 바닷가에 서면 놀라운 장관을 볼 수 있다. 맞은편으로 진도가 길게 드리워져 있고, 그 남쪽으로는 수평선 아득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해남과 진도 사이에는 점점이 뜬 섬들이 호기심과 그리움을 자아낸다.

▼ 줌을 당겨보니 진도의 ‘타위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다. 울돌목 조망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원문버스정류장(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4코스의 종점인 원문버스정류장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집사람의 무릎을 핑계 삼아 3km 정도를 덜 걸은 셈이다. 아니 볼거리도 없는 잔여구간을 포기하는 대신 역사유적지를 둘러봤으니 그게 더 알찬 일정이었지 싶다. 그나저나 오늘은 2시간 50분을 걸었다. ‘산길샘 나들이’ 앱은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며 12.65km를 찍고 있다.

▼ 정류장 옆의 민가. 입구를 갖가지 꽃과 작은 소품들로 아름답게 치장했다. 이 부근이 정유재란 때의 대승지인 ‘울돌목’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돌로 만든 배까지 전시해 놓았다. 그렇다면 저 배는 판옥선이 분명하다. 13척의 조선 수군이 330여 척의 왜선을 괴멸시킨 명량해전에는 거북선이 참여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