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금)-29(토)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박)→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룩소르(Luxor, 옛 Thebes), 왕가의 계곡(vally of the king)
특징 : 하(下)이집트에서 고왕국의 거점을 마련했던 왕들이 자신들의 안식처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거대 피라미드를 지었다면, 중왕국 말기와 신왕국 시대의 왕들은 새로운 도읍지 테베(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에 지하 동굴 무덤을 만들었다. 태양 가까이 닿으려 지상에 지었더니 사후 부활해 쓸 부장품들을 도굴당하기 일쑤이기에 무덤 같지 않은 야산의 지하를 묘지로 선택한 것이다. 그 야산이 바로 ‘다이르 알바흐리(Deir el-Bahri)’ 계곡인데, 조금 전에 들렀던 ‘하트셉수트 장제전’ 말고도 이곳에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는 투트모세 3세, 투탕카멘, 람세스 왕가 등의 능(陵) 64기나 들어서 있다. 이곳이 낙점된 이유는 산꼭대기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였기 때문이란다.
▼ ‘하트셉수트 장제전’을 출발한지 10분 만에 ‘왕가의 계곡’에 도착했다. 이곳도 역시 보안검색을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초리는 카메라에 집중하는 눈치다. 오직 핸드폰 촬영만 가능하단다. 그래선지 덩치 큰 카메라는 보안검색 과정에서 걸러져 보관소에 맡겨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입장권(EGP 200/ 약 14,000원)을 구입하면 현재 관람을 허락하고 있는 여러 무덤 가운데 세 개를 골라서 들어가 볼 수 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검표원이 입장권에 구멍을 뚫어주므로 얼렁뚱땅 하나 더 보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 매표소에서 계곡 입구까지는 제법 멀다. 아까 들렀던 ‘하트셉수트 장제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걸어가겠다는 섣부른 생각은 일찌감치 떨쳐버리자. 마침 두 지점을 오가는 교통편이 ‘셔틀 트레인(Shuttle train)’이라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 셔틀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을 더 걸어야만 무덤에 이를 수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다 보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바위 골짜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그 끄트머리에 들어앉은 바위산의 생김새가 조금 묘하다.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왕실의 묘역이 이곳에 들어선 이유를 저 모양새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잦은 도굴로 인해 피라미드를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 조금 더 올라가니 쉼터가 나온다. 차와 탄산음료를 팔고 있어 휴게소의 기능을 겸한다. 또한 이곳에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안내도가 세워져 있어 가이드들의 해설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개방 중인 무덤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다음 자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가이드가 나눠준 입장으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아홉 기(基)의 무덤들 가운데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데, 누구의 무덤을 찾아볼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람세스 3세(Ramses III, BC 1186-1155 재위)’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인 ‘람세스 3세’는 제20왕조를 세운 ‘세트나크트(Sethnakth, BC 1190-1187 재위)’ 왕의 아들로 이집트에서 큰 권력을 휘둘렀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람세스 3세가 등극할 당시 이집트는 해상민족과 리비아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잘 막아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이집트 사회를 직업에 따라 계급화 했으며 테베 서쪽 마디나트 하부에 자신의 거대한 장제전, 궁전, 복합도시 등을 세웠다. 무역과 산업을 권장하여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해안지방 푼트에 해양 무역선을 보냈고 시나이의 구리 광산과 이집트 남쪽 지방에 있는 누비아의 금광을 개발했다. 람세스는 재위 32년 테베에서 죽었고 왕자 람세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렇게나 큰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궁중의 음모로 인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니 무덤에 대한 개략적인 구조와 설명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무덤의 주인인 ‘Ramses III’ 앞에 적힌 ‘KV 11’이라는 숫자가 눈길을 끈다. 왕들의 계곡에서 열한 번째로 발굴된 무덤이라는 것을 나타낸단다.
▼ 탐방은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진 계단으로부터 시작된다. 무덤으로 연결되는 이 연도(羨道)는 길다. 미라와 관이 있는 현실(玄室)은 계단-복도-방-복도-전실로 이어지는 연도를 지나야만 다다를 수 있다. 그가 가졌던 큰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람세스 3세가 가진 다섯 가지 이름을 보면, 강하고 위대하고 부유하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가 통치기간 동안 많은 일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지중해 동부 지역 민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전을 짓고 산업을 일으키는 등 부국강병을 위해 애썼다.
▼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여러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다. 하토르(Hathor), 라(Ra), 케프리(Khepri, 태양신), 이시스(Isis), 네프티스(Nephthys), 마트(Maat, 법과 정의의 여신)와 같은 여신들이 주를 이룬다. 첫 번째 복도에서는 매의 형상을 한 ‘라-하라크티(Ra-Harakhty)’가 길손을 맞고, 두 번째 복도에서는 제물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하는 인간과 신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세 번째 복도는 배를 타고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신과 파라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악어 형상을 한 소베크(Sobek)가 배를 이끌고 위에서는 뱀이 이들을 지켜준다.
▼ 이들을 지나 네 개의 석주가 있는 방에 이르면, 람세스 3세가 오시리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태양신 케프리, 라, 아툼(Atum)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 다음에 나오는 복도와 전실에도 농경과 천체의 운행 등을 담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인간이 하는 일들을 신들도 똑 같이 하는 모양이다. 이들을 지나면 드디어 현실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원래 람세스 3세의 미라를 담았던 석관이 있었다지만 현재는 텅 비어 있다. 미라는 이집트 박물관에 석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가 있기 때문이다.
▼ 두 번째로 둘러본 곳은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인 ‘메렌프타(Merenptah)’의 무덤이다. 메렌프타는 역대 최고의 파라오로 꼽히는 ‘람세스 2세(Ramses II)’의 열세 번째 아들로 BC 1213~1203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위대한 군주였다고 한다.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인을 정복했는가 하면 리비아인의 반군(叛軍)을 격파하여 왕의 일족을 포로로 잡았으며, 지중해 연안 여러 민족이 나일강 하구 부근에 침입해온 것을 격퇴시켰단다. ‘이스라엘은 황량하여지고 그 종자는 없어졌다’라고 쓰인 그의 전승비(戰勝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났다니 이 또한 기억해 두자.
▼ 메렌프타의 무덤 앞에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여덟 번째로 발굴되었다는 표시인 ‘KV 8’이 선명하다. 무덤의 주인인 메렌프티는 환갑에 즉위하여 10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아부심벨신전, 카르낙신전, 룩소르신전 등 가장 많은 유적을 남긴 ‘람세르 2세’가 무려 67년간이나 재위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도 오래 살다보니 그보다 서열이 빨랐던 열두 명의 형들이 모두 죽고 없어 열세 번째 아들인 메렌프타가 왕이 되었단다.
▼ 무덤으로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무덤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면 왕가의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곡을 감싸고 있는 산은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자리지 않는 민둥산이다. 동양의 왕릉은 대개 자연친화적으로 나무가 있고 봉분(封墳)이 있는데 반해 이집트의 왕릉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 이곳도 역시 아래로 길게 내려서야 무덤의 내부에 이를 수 있다. 그 길이가 160m에 이르는데 통로에는 전체적으로 태양신 라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무덤 속은 화려했다.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길게 뻗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면 벽과 천장이 온통 파라오와 왕비, 전쟁, 승리, 동물 부조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돼 있다.
▼ 신전의 종점이 지성소라면, 지하왕릉의 종점은 현실(玄室)이다. 메렌프타 묘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석관 두 개가 모두이다. 일찌감치 도굴 당한 탓에 발굴 당시에도 이런 상태였다고 한다. 하긴 부장품들이 남았다고 해봤자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몇몇 무덤은 도굴 방지를 위해 현실에서 무덤이 끝나는 양 처리하고는 지하 깊은 곳에 암굴을 두기도 했단다. 하지만 도굴을 피하지는 못했다. 19세기 영국인 탐험가 조반니 베르지오니가 람세스1세, 세티1세의 무덤을 발견한 이후 숱한 발굴이 이어졌지만, 투탕카멘의 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물찾기에 실패했다.
▼ 저 관의 주인인 ‘메렌프타’는 제19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이다. 이곳 ‘왕가의 계곡’은 메렌프타가 속한 ‘19왕조’뿐만 아니라 신왕국시대(BC 1550~1073년)의 다른 왕조들도 묘를 썼다. 외세 힉소스를 몰아내고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넓힌 18왕조(투트모세 왕가, 투탕카멘 등), 람세스·세티·아멘모세·타우세레트 등 왕가가 경쟁하던 19왕조, 람세스 왕가의 독점시대였던 20왕조의 임금과 왕실 가족의 묘 64기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이 가운데 아홉 기(基)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단다.
▼ 마지막 하나는 ‘람세스 4세(Ramses IV, BC 1156-1150 재위)’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인 ‘람세스 4세’는 국내외 상황이 어렵던 시기 거대한 건축 공사를 벌이는 등 이집트의 영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파라오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가 신에게 바친 선물, 아들에 대한 축복, 아버지의 통치에 대한 연구 등을 적은 긴 기록인 ‘해리스 파피루스(Harris Papyrus)’를 펴냈다. 또한 테베 서부의 다이르알바리에 2개의 커다란 신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아몬 신의 신전 단지인 카르나크에 자신의 아버지가 지어놓은 작은 신전들을 장식하는 일도 계속했다. 또한 아버지가 테베 서부에 지어놓은 커다란 건축물 근처에 자신의 조그마한 장제전을 지었고 이집트 곳곳에 명문을 남겼다. 하지만 즉위할 무렵 이미 중년의 나이였던 탓에 벌여놓은 사업들을 대부분 끝내지 못한 채 즉위 6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로 생각되는 람세스 5세가 왕위를 이었다.
▼ 이곳의 안내판은 ‘KV 2’라고 적고 있다. 왕가의 계곡은 현재까지 모두 64기(基)의 파라오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을 찾아내 체계적인 이름을 붙인 사람은 ‘존 가드너 윌킨슨(John Gardner Wilkinson)’이라고 한다. 그는 총 21개의 무덤을 발견했고,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을 뜻하는 ‘KV’ 다음에 발견 순서대로 번호를 붙였다. 이때 처음 발견된 것이 람세스 7세의 무덤으로 ‘KV 1’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맨 마지막 번호는 ‘KV 64’, 현재도 레이더 탐사를 통해 65번째 무덤 발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단다.
▼ 이곳도 역시 아래로 내려가면서 탐방이 시작된다. 하긴 ‘왕가의 계곡’ 무덤들이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계단과 경사로, 부속실(사적인 생활용품들을 넣어둔 방), 전실(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는 도구를 넣어둔 방), 현실(관을 넣어둔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제18~19왕조 때는 도굴방지를 위해 '샤프트'라 불리는 깊은 수직갱(수직으로 떨어지는 깊은 갱)까지 만들었다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 통로는 흰색 회반죽위에 부조와 채색이 되어 있는데, 석고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고 표면이 사포처럼 오톨도톨하다. 또한 배경자체가 흰색인데다 조명까지 비추다보니 무덤 특유의 칙칙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 ‘람세스 4세’의 무덤 현실에도 석관 이외의 부장품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발굴 당시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오의 무덤은 매장 후부터 도굴되는 수난을 당했다. 무덤 작업에 참여한 장인들에 의해 처음 도굴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집트의 역사는 도굴의 역사기도 하다. 고왕조에 지어진 피라미드가 도굴꾼의 표적으로 전락한데다 파라오조차 선조 무덤을 털었다니 남아도는 것이 없었다. 이에 따라 12왕조부터는 피라미드를 거의 짓지 않게 됐다. 그래도 파라오에게는 사후세계의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결국 피라미드를 대체할 ‘왕가의 계곡’이 룩소르에 조성된다. 18왕조 아멘호테프 1세(Amenhotep I, BC 1514-1493 재위)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 뒤를 이은 투트모세 1세(Thutmose I, BC 1493-1483 재위)가 실행에 옮겼다.
▼ 이 무덤 역시 일찍이 훼손되어 부장품이나 유물은 없다. 그렇다고 문화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굴당한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보물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벽화와 부조이다. 특히 벽화는 채색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Ancient Thebes with its Necropolis)’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 다섯 번째로 발굴되었다는 ‘KV5’, ‘람세스 2세의 가족(Sons of Rameses Ⅲ)’ 묘역은 문이 닫혀있었다. 무덤의 개략도를 보면 48개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그만큼 직계가족이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람세스 2세’는 52명의 아들을 포함해 100여명의 직계비속을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에필로그(epilogue), ‘파라오의 저주’라는 오싹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번 경이 모기에 물려 죽으면서 시작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죽은 뒤 2~3년 내에 투탕카멘의 발굴에 참여했거나 그 무덤을 구경한 사람들 20여 명이 사고나 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파라오가 자신의 무덤을 파헤친 자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마침 무덤 입구의 관 위에 ‘왕을 방해하는 자에게 죽음의 날개가 펼쳐지리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고 전해지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나중에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게 밝혀지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파라오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그건 그렇고 ‘다이르 알바흐리 계곡’을 방문했으면서도 ‘투탕카멘의 묘’와 ‘왕비의 계곡’은 둘러보지 못했다.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박물관으로 유물들은 모두 옮겨버린 ‘투탕카멘의 묘’는 몰라도 ‘왕비의 계곡’을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왕비의 계곡’에는 제19·20대 왕조(BC 1292~1075)에 속하는 여왕들과 몇 명의 왕자·공주들이 묻혀 있다. 그중에서도 ‘람세스 2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Nefertari, BC 1301-1255년)’의 무덤은 특히 유명하다. 벽화의 원래 색상이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단다. 하지만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예술에 문외한인 나에게 눈요기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입장료인 180유로(EUR)가 어디 작은 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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