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2코스

 

여행일 : ‘19. 11. 16()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과 (오분·남양·성내·정하·), 동해시 추암동 일원

여행코스 : 한재소공원(버스 이동)오십천교죽서루삼척항새천년 해안유원지삼척해변수로부인공원추암해변(소요시간 : 13.9/ 3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원래 거리가 22.3이니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긴 구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오십천대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지난 31코스 때 이미 답사를 끝낸 한재까지 말고도 볼거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4정도를 더 생략했다. 또한 삼척항에서 시작되는 산길 대신 새천년 해안도로(이사부길)‘를 따랐다. 볼거리가 많은 곳만 추려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덕분에 죽서루와 소망의 탑, 이사부공원, 수로부인공원, 삼척해변, 추암해변 등 아름답기로 소문난 삼척의 해안을 빼놓지 않고 둘러볼 수 있었다. 코스를 단축하면서 생긴 여유 시간은 일행들과 함께 갯바위에 둘러앉아 삼척항에서 뜬 싱싱한 회를 먹는 것으로 소일했다.

 

32코스의 시작점은 맹방해수욕장(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 산 1-7)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이용 근덕교차로(근덕면 교가리)‘까지 온 다음, 마읍천 둑방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맹방해수욕장의 입구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32코스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일행 대부분은 지난번 31코스 때 종점으로 삼았던 한재소공원으로 이동한다. 같은 길을 또 다시 걸을 필요야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31코스 때 종점으로 삼았던 한재소공원(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산 30-11)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게 정상이나 아름답기로 소문난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산악회 버스를 이용 실제 출발지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삼척대교까지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갖고 싶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마침 삼척항의 생선회 값이 저렴하다고 소문까지 나있지 않겠는가.



실제 출발지는 오십천교(삼척시 남양동 325-3)

죽서루에서부터 출발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경행서원 터를 들러보고 싶어서 오십천대교를 일부러 들머리로 삼았다. 버스에서 내려 오십천교아래로 난 굴다리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왼편에 삼척여고, 그리고 오른편에는 오십천을 끼고 나있다. ! 들머리 바로 곁에 보훈공원이 있었으나 들러보지는 않았다. 충혼탑과 ’6·25 및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지만 다른 지역의 유사(類似) 탑들과 대동소이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삼척여고의 담장이 끝났다싶은 곳에서 탐방로는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민가 하나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위벼랑 아래의 한 뼘이나 될 법한 비좁은 공간이 개인 사유지라니 어쩌겠는가. ! 방향을 트는 지점에 세워놓은 푯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정표(예술회관 방면/ 번개시장 방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오랍드리 산소길 3코스 강변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오랍들이'란 이웃 또는 집주변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삼척시에서 오랍들이 산소길이란 둘레길을 조성했다고 하더니 이곳에서 해파랑길과 겹치는 모양이다. 참고로 오랍들이 산소길은 삼척의 외곽 205개 코스로 나누어 각기 봉수대길, 봉황산길, 강변길, 삿갓봉길, 해변길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단다. 그렇다면 이곳은 제3코스인 강변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길은 더 고와졌다. 울창한 숲속으로 멋진 데크로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른편은 바위절벽, 오십천과 삼척시가지가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중간쯤에 만들어놓은 전망대로도 모자라 망원경까지 갖춘 것은 보여주는 풍경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전망데크를 지났다싶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산허리를 돌아 곧장 가라고 안내하지만 우린 오랍드리길을 따라 산봉우리로 올라간다. 그러자 목책 데크계단 옆에 '경행서원 기적비(景行書院 紀蹟碑)'라고 적힌 비석(碑石) 하나가 서있다. 경행서원은 삼척부사를 지낸 성암 김효원(省庵 金孝元, 1542-159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배향하기 위하여 1631년 창건,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그렇다면 그 지긋지긋한 당파싸움의 원조를 모신 셈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던 당파가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1824년 경행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역시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許穆, 1595-1682)을 추가 배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뒤 복원되지 못하다가 1980년대 후반 복원추진위원회에서 복원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기적비를 세워 그 흔적을 남겼단다.



그 아래쪽에 비석이 하나 더 있다. '척주초혼단비(陟州招魂壇碑)'라는데 과거 삼척에 살다 후손을 두지 않고 사망한 57위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란다. 비명 아래 57위의 이름이 새겨져있는데 이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공설시장을 세웠다고 한다. 아무튼 전각의 안에다 모셔놓은 건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삼척시에 소중한 자산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다시 해파랑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봉우리를 넘기로 한다. ‘오랍드리길이어선지 이곳도 역시 데크로드를 곱게 깔아놓았다. 가을빛이 짙어가는 숲길을 잠시 내려오자 널디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엑스포광장이라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삼척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까 갈림길에서 곧장 해파랑길을 탔을 경우에는 저 건물 뒤에 있는 야외공연장으로 내려서게 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참고로 이 일대는 배용준 손예진 주연의 영화 외출의 촬영지이다. 이곳 말고도 죽서루와 새천년 해안도로, 삼척 의료원, 삼척 경찰서, 소망의 탑 등도 영화의 배경이 되었단다. 그건 그렇고 엑스포광장은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도착했다.



시간이 느긋하니 둘러볼 곳이 많아진다. 그래서 들어선 것이 삼척시 교류도시 홍보관이다. 지구본을 본떠 만든 저 건물에는 삼척시와 자매 및 우호를 맺고 있는 국내외 16개 도시와의 교류 진행상황 및 교환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부러 찾아볼 정도의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했다.



홍보관을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면 동굴 신비관으로 연결된다. 2002년 삼척세계동굴엑스포의 대표적 시설물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관람 대신 팸플릿을 읽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전시관은 1, 2층은 세계유명동굴과 영화 속의 동굴, 동굴의 문화연출, 동굴의 과거/현재/미래 디오라마, 동굴의 파괴/보존 디오라마와 환생교 및 학술관련자료, 동굴내 서식동물인 박쥐의 생태, 기념사진 촬영 코너 및 전망대, 박쥐의 일생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3,4층의 주제영상관에서는 대형 I-MAX영상으로 환상의 동굴을 체험할 수 있단다.



다시 돌아온 엑스포광장, 건너편에는 삼척 시립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삼척은 고대 실직국(悉直國)의 영역이었다. 옛 삼척지역(동해, 삼척, 태백)의 다양한 역사유물과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발굴(조사보존·연구·전시하기 위해 전문박물관으로 지어진 시설이다. 지하1층 지상2층의 건물에 4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학예연구실, 시청각실, 유물보존처리실을 갖추고 있단다. ! 박물관 건물 옆에 밧줄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자. 해안지방인 부내와 산간지방인 말곡이 편을 나누어 승패를 겨루던 정월 대보름의 민속놀이인 삼척 기줄다리기때 사용하던 밧줄이라고 한다. 이 민속놀이가 최근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니 축하할 일이다.



이젠 죽서루로 가야할 차례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다리(죽서교)’를 건널 일은 아니다. 죽서루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가람영화관을 바라보며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오십천 둑방에 걸터앉은 정자 하나가 보일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한 폭의 산수화로 완성된 죽서루의 풍광을 한눈에 쏙 담을 수 있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오십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다. 죽서루의 잔영(殘影)을 수놓을 정도로 잔잔한 수면 위에는 카약 두 척이 서로를 희롱하고 있다. 또 다시 길을 나서는데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길이 하나 나있다. 그렇다고 성급히 들어서는 것은 금물, 죽서루의 진입로는 50m쯤 더 가야 나온다. 홍어회 전문이라는 진주집을 오른편에 낀 골목으로 들어서야만 한다.



100m쯤 더 들어갔을까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竹西樓)가 나온다. 정면 7칸에 측면 2,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누각으로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죽서루라는 간판 말고도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고 적힌 현판 하나를 더 달고 있었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고, 1403(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엑스포광장에서 죽서루까지 오는 데는 15분이 걸렸다. 두 곳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누각은 맨발로만 올라가란다. 신발 벋기가 귀찮아 이이(李珥) 등 여러 명사들의 시를 곁눈질 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하긴 열심히 살펴봐야 한시(漢詩)를 이해할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대신 정자 앞 절벽위로 다가가 조망을 즐겨본다. 오십천과 엑스포광장, 삼척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지만 아까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풍경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다.



오십천으로 되돌아 나오니 해파랑길은 이제 오른편 어깨를 오십천에 기댄 둑방길을 따른다. 차도와 오십천 사이에 데크로드(deck road)가 조성되어 있다. 가끔은 망원경까지 갖춘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벤치를 놓아둔 걸 보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정성들여 가꾸었다는 느낌이다. 삼척판 올레길인 '오랍드리 산소길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십천교의 북단을 지나자 장미공원이 나타난다. 죽서루에서 15분 거리이다. 오십천 둔치의 고수부지(高水敷地)에 조성된 공원에는 총 21813만 그루의 장미가 식재되어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 수량을 자랑한단다. 천만 송이의 장미가 피어날 때면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루며 특히 야간이면 장미꽃 군락이 조명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을 볼 행운이 나에겐 없었나보다. 늦부지런을 떠는 놈들까지도 꽃망울에 힘이 빠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85000에 이른다는 장미공원 구간은 산책로 말고도 오십천의 물길 가까이로 탐방로 하나를 따로 내놓고 있었다. 포토존을 비롯해 장미터널과 이벤트 가든, 바닥분수, 잔디광장, 맨발공원, 인라인 스케이트장 등 각종 휴양 및 편의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2.5가까이 되는 장미공원 구간이 끝나면 삼척교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7번 국도로 올라선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천변(川邊)을 따랐다. 구경거리가 더 많을 것이란 섣부른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눈요깃거리는커녕 곁눈질거리 조차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시멘트의 거대한 구조물을 구경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거기다 길까지 막혀있어 물어물어 겨우 해파랑길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해파랑길, 고생한데 대한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비탈진 산자락에 기댄 계단식 집들이 해외여행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삼척항(三陟港)에 이른다. 오십천 하구에 발달한 공업항이자 무역항으로 인근에 있는 동해항과 더불어 시멘트 반출의 전진기지이다. 정라항(汀羅港)으로 불리던 조선시대에는 삼척포진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곳 삼척항이 천연의 양항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왕에 들른 삼척항이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지인들과 함께 포구에 늘어서있는 활어회센터들을 기웃거리며 흥정에 들어간다. 오십천교에서 삼척항까지는 55분이 걸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다시 길을 나선다. 회센터 입구의 삼척수협 정라동지점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이 이 부근에서 도로를 벗어나 마을안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극복유적지'비와 '광진산 봉수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사부길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집사람에게 소망의 탑에 매달린 종을 쳐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 항구를 빠져나오는데 곰치국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처럼 과음이 잦은 사람들에게 인기 좋은 음식이다. 곰치는 기가 찰 정도로 못생긴 생선이다. 어선의 그물에 잡혀도 그냥 버려지던 때도 있었단다. 포구 인근 주민들만이 김치 국물에 쉽게 끓여내는 국의 맛을 알았었는데 그 시원함이 입소문을 타면서 동해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단다.



잠시 후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간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조금이라도 파도가 높을라치면 물속에 잠겨버릴 갯바위에 예쁘장한 정자를 지어놓았다. 육지와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정자에 오르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닷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삼척항에서 4만원을 주고 썰어온 히라스(부시리)와 무늬오징어를 꿰차고는 갯바위로 내려선다. 소주와 맥주에 막걸리까지 넉넉하게 챙겼음은 물론이다. 바닷바람을 가슴에 들이켜 소주 한 잔에 회를 오물거리는 시간이 즐겁다. 그리곤 일행 넷이서 잔을 주고받다보니 1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이래서 여행을 자유라고 하나보다. 아래 사진은 갯바위에서 바라본 새천년해안도로의 풍경이다. 갯바위가 널린 바닷가 절벽 위에는 펠리스호텔이 걸터앉았다. 해돋이의 명소로 입소문을 탄 곳인데 아침햇살이 갯바위를 비출 때는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갯바위들이 그려놓는 그림 같은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단다.



불콰하니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비경에 빠져든다. 삼척해변에서 삼척항까지 4.6해안을 벗한 새천년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 선정된 명품도로이다. 냉전의 산물인 철조망을 걷어내고 산뜻한 모습의 경관용 펜스가 설치된 해변에는 유난히 갯바위가 많고 바닷바람이 강하다고 소문났다. 오늘은 예외이지만 바람이 거센 날에는 밀려오는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대포 소리를 내며 하얗게 부서진단다. 굽이굽이 S자를 그리는 새천년해안도로가 물보라로 장식되기도 한다니 주의할 일이다.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소망의 탑에 이른다. 2000년 새천년의 소망을 담아 건립한 탑으로, 건립 후원자 33,000명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으며 3단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은 신혼부부의 소망석이며, 2단은 청소년, 3단은 어린이의 소망석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은 소원을 비는 두 손의 모양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탑 아래에 묻어 두었단다.



탑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소망의 탑에 매달려있으니 소망의 종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집사람에게 3번을 치며 소원을 빌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빌었는지는 그녀만이 알 일이다. 동그란 조형물 안으로 해가 쏙 들어올 때 종을 울려야 효력이 있다지만 뭐 어쩌겠는가. 효력은 조금 떨어질는지 모르겠지만 빌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소망의 탑을 지나면 광진항이다. 말만 항구일 뿐 실제로는 어선 한 척 보이지 않는다. 맞다. 이 항구는 물질 나가는 해녀들이나 아담한 풍경에 홀린 관광객들만 간간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닥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바다가 맑고 푸른데다 작고 아담한 해안선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곳은 비치조각공원이다. 새천년해안도로변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로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상 등 1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노변공원(路邊公園)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하공간에 있는 카페 마린데크는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서 차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단다.



후진항에 가까워질 무렵 두꺼비를 닮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막 뛰어 오를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집안이 번성하고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해진단다. 그래선지 길가에다 두꺼비 조형물을 세워두었는가 하면 유리난간에는 이에 대한 설명문까지 적어놓았다.



길은 여전히 곱다. 이 길은 이사부길로도 불린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과 함께 바다가 바로 접해 있어서 사람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푸른 해송과 기암괴석, 동해의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로 말미암아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작은 어선 두어 척이 정박되어 있는 후진항(後津港)을 지났다싶으면 이름만큼이나 작은 '작은후진해수욕장'이다. 수상안전요원이 없어 물놀이를 금지한다는 푯말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갯바위들이 널린 데다 물빛까지 좋으니 사람들이 안내문을 따를지는 모르겠다. 삼척항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후진마을에서는 해신당(海神堂)도 볼 수 있었다. 후진의 옛 이름은 뒷나루였다고 한다. 동헌이 있던 시내에서 볼 때 뒤쪽에 자리한 포구였기 때문이다. 후진마을은 작은후진큰후진으로 나뉘는데, 해신당은 원래 작은후진마을 동쪽의 바닷가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1999년 새천년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던 것을 201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단다.



조금 더 걷자 널따란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길이가 1.2에 이르는 삼척해수욕장(三陟海水浴場)으로 모래사장 뒤편의 송림이 장점이다. 식당과 숙박업소의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 또한 장점이라 하겠다. 그밖에 미디어글래스와 백사장 데크로드, 포토존, 파고라, 다목적광장 등 다양한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 덕분인지 올 여름에는 해양수산부의 전국 우수·으뜸해수욕장에 선정되기도 했단다.




삼척해변을 벗어난 해파랑길은 내륙으로 파고든다. ‘쏠비치 삼척이 바닷가를 독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솔비치의 앞 고갯마루를 넘자 '수로부인공원'이 나온다. 공원에는 임해정(臨海亭)이란 정자를 세워 조망대를 겸한 쉼터의 역할을 수행토록 하고 있다. ‘해가사의 터라고 적힌 비석도 보인다.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 전하는 해가(海歌)’라는 설화의 주 무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해가는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노래(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海龍)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純貞公)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유래됐다. 그래선지 공원에는 해가의 가사를 적은 빗돌 말고도 드래곤 볼(Dragon Ball)’을 전시해 놓았다. 여의주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높이 1.6미터에 지름 1.3미터인 오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회전이 가능하도록 제작됐다. 여의주에는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불렀다는 4구체의 향가 '헌화가(獻花歌)‘도 새겨져 삼국유사를 펼쳐놓은 듯하다.

참고로 해가(海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현)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수로부인공원의 아래는 증산해변(해수욕장)이다. 수심이 낮고 물빛이 곱다고 소문난 해안이나, 그보다는 추암해변과 촛대바위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이곳을 한 번 다녀간 사람은 꼭 다시 찾아온다는 속설까지 전해진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후진해변에서 이곳 증산해변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증산해변의 끄트머리에서 시작되는 데크로드를 타고 오르니 해파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32코스의 종점이자 33코스의 출발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해파랑길의 스탬프보관함은 추암역의 앞에 설치되어 있다. 코스 트랙도 마찬가지다. 두 지점 간의 조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아니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곳 이사부사자공원입구를 교차지점으로 정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곳을 지나면서 동해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33코스가 짧은 반면 32코스는 많이 길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고 말이다.



! 해파랑길 안내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가 30m만 들어가면 이사부 사자공원을 만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신라 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담은 가족형 테마공원이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실직주(삼척) 군주였던 이사부 장군은 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 정벌을 단행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편입시킨 인물이다. 그는 배에 싣고 간 사자상을 이용해 우산국을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공원에 유난히도 많은 사자상이 전시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동해시 관내로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150m 길이의 해수욕장과 그 뒤를 받치는 섬처럼 생긴 돌출부가 한데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그 오른편은 칼바위와 촛대바위 등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룬다.



해수욕장을 지나 섬처럼 보이던 돌출부로 향한다. 이곳은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육지에 가까운 부분에 모래, 자갈 등이 퇴적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섬을 육계도(陸繫島)라 부른다. 아무튼 이곳은 해금강이라 불려왔을 정도로 유명한 경승지이다. 조선 세조때 한명회가 강원도 제찰사로 있으면서 그 경승에 취한 나머지 능파대(미인의 걸음걸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육계도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안초소로 쓰이던 건물을 전망대로 개방했다는데 출입구를 막아놓아 위로 오를 수는 없었다. 많이 넓어진 조망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남한산성의 정동방(正東方)추암해수욕장이라고 적힌 빗돌이 전망대 아래에 세워져 있어서 이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었다.



육계도 주변은 소문난 경승지이다. 그 가운데서도 촛대바위가 단연 돋보인다. 애국가의 첫 소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들려오면서 그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촛대바위는 바다에 일부러 꽂아놓은 듯 뾰족하게 솟아 있다. 참고로 촛대바위는 원래 두 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숙종 7(1681)의 지진 때 중간 부분 10척 가량이 부서져 나갔단다.



형제바위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바위들이 너무 기기묘묘해, 흡사 조각 작품 전시장에라도 와 있는 것 같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안절벽과 함께 기암괴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외국, 그것도 기경으로 평가받는 곳에서나 볼 법안 석림(石林)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바위 숲에 동해의 거세고 맑은 물이 바위에 밀려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삼척 심씨(三陟 沈氏)’의 시조인 심동로(沈東老)1361년에 세웠다는 '해암정(海岩亭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이다. 심동로는 고려 말 높은 벼슬을 지내던 중,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삼척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해암정'을 짓고 후학양성과 풍월을 읊으며 말년을 보냈단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530년에 다시 짓고, 두 차례의 수리 및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안에는 우암 송시열 등, 이곳을 다녀간 묵객들이 경치를 읊은 판각이 걸려있단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을 지나자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해변 돌출부 두 곳을 잇는 길이 72m의 다리이지만, 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반대편에 이를 수 있으니 다리라기보다는 관광용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아무튼 이 다리는 주변의 석림과 드넓은 동해바다의 비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추암조각공원 주차장(동해시 추암동 474-3)

출렁다리의 끝은 추암 조각공원으로 관광객을 위한 조각전시장과 야외무대 및 휴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애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치했다는 6.25 한국전쟁 형제의 벽을 정상에 배치한 다음, 그 아래로 30여 점의 조각품들이 사방에 전시되어 있다. 공원을 둘러본 다음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또 다른 주차장이 나오면서 32코스가 종료된다. 오늘은 총 5시간 20분이 걸렸다. 회를 뜨는데 걸린 시간과 이를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는 13.9.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해파랑길 31코스

 

여행일 : ‘19. 11. 2()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일원

여행코스 : 궁촌레일바이크역동막교부남교덕봉교맹방해수욕장한재소공원(소요시간 : 15.8/ 3시간4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원래의 거리가 9.8이니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모든 구간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도로를 따른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옛 국도나 하천 둑방길, 또 나머지는 마을안길을 걷도록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다는 자랑스럽지 못한 특징도 있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우린 한재소공원까지 거리를 늘려서 진행해봤다. 맹방해변과 한재 인근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31코스의 단점을 보완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23가까이나 되는 32코스에 대한 부담도 미연에 줄여놓았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결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 31코스의 단점들을 피하기 위해 코스를 변경한 일행도 있었다. 공양왕릉에서 대진항과 부남해변을 거친 다음 산길을 이용해 덕산해변까지 가는 방법인데 조금 더 힘은 들지만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을 실컷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한다.(첨부된 사진 가운데 두어 장은 산사나이님과 뚜벅이님의 것을 빌려다 썼다)


 

궁촌 레일바이크역(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46-10)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 궁촌교차로(삼척시 근덕면 매원리)에서 빠져나오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더 올라가면 31코스의 들머리인 궁촌레일바이크역이 나온다. 해파랑길 안내판과 스탬프보관함은 역사 앞 교통섬에 설치되어 있다.



일단은 레일바이크 역사부터 둘러본다. 이곳은 삼척시가 자랑하는 해양레일바이크의 역사(驛舍) 2곳 가운데 하나이다. ’삼척 해양레일바이크2010년 근덕면 궁촌리와 용화리 사이의 5.4구간에서 운행을 시작했는데 바다를 낀 레일바이크로는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title) 덕분인지 관광객들의 호응이 아직까지도 식지를 않는단다. 아니 1시간여 동안 해저도시와 무지개터널, 빛의 향연터널 등 3개의 터널과 해송 숲을 거치며 해안절경을 즐길 수 있다는 매력도 한 몫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관광지의 가장 큰 매력은 그곳의 풍광을 담은 기념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레일바이크 역사‘, 그러니 상징 조형물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공양왕릉부터 다녀오기로 한다. 오른편에 궁촌마을을 끼고 걷게 되는데 궁촌이란 지명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해서 '궁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포구(궁촌항)는 국가어항으로 오징어를 비롯해 가자미, 넙치, 우럭, 대구, 방어 등 다양한 자연산 어종이 어획되며 관광 및 해양스포츠 장소로 복합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잠시 후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터를 잡은 공양왕릉(恭讓王陵 : 강원도기념물 제71)‘이 나타난다. ()은 석축굽을 돌린 큰 무덤과 그 옆과 앞의 작은 무덤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분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 34, 재위기간 1389-1392) 3부자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 ()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공양왕릉은 이곳 궁촌리 외에도 경기도의 고양시(원당동)에 하나가 더 있다. 그럼에도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실하지가 않단다. 다만 삼척시의 능이 민간에서 전해 내려온 반면, 고양시의 것은 조선 왕조에서도 인정한 능이라고 한다. 사적 제191호로까지 지정(1970)된 이유일 것이다. 진위에 대한 다른 주장도 있다. 공양왕이 이곳에서 죽어 묻혔으나 그 후 경기도 고양시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궁촌의 왕릉에 대한 기록으로는 현종 3(1662) 삼척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1855) 김구혁의 척주선생안이 있다. 또한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왕릉은 조선조 헌종 3(1837)에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奎憲)이 개축을 했으며 1977년에는 삼척군수와 근덕면장에 의해 새롭게 단장되었다.




궁촌역으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7번 국도를 따라 걷게 되는데 길이 산속으로 나있는 탓에 눈요깃거리가 일절 없는 지루한 구간이다. 하지만 이 길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재패했던 황영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 해오는 황영조 국제마라톤 대회의 공인코스이기도 하다. 삼척 엑스포광장을 출발해 반환점인 황영조마을을 다녀오는 코스인데 중간 중간에 아래 사진과 같은 지점 표시를 해놓았다.



참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갯마루인 사래재를 넘다보면 가끔가다 붉은 옷으로 곱게 갈아입은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부지런한 놈들뿐이라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말이다.



가로수 대신으로 심어놓은 산딸나무도 볼거리라 할 수 있겠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보고 꾸지뽕나무라는 나에게 함께 걷고 있던 친구 형우군이 산딸나무라고 일러준다. ’모야 모라는 어플리케이션으로 확인까지 시켜준다. 맞다. 같이 올라와 있는 꽃망울과 연결시켜보니 심심찮게 보아오던 나무였다.



바로 옆에 널찍한 국도를 새로 내놓은 탓인지 차량 통행은 드문 편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차량마다 속도가 하도 빨라 위험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동해안자전거길을 겸하는 탐방로를 도로 가장자리에 만들어놓았지만 그저 라인으로만 나뉘어 있는데다 차량이 몸을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데 어찌 소름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도 가스공사의 공급시설을 만났다. ’사래재고갯마루를 너머에 위치한 친환경농산물 종합유통센터의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험시설물이라기 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멋지게 만들어놓았다.



조금 더 걷자 ’427번 지방도가 교차되는 사거리가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만인데 왼편은 태백, 그리고 오른편은 대진항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맞은편 코너에 동막리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버스정류장도 동막이라고 적혀있으니 이 마을의 이름이 동막골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행여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마을이 아닐까 하여 꼼꼼히 살펴봤지만 마을의 분위기는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영화는 태백산맥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막골은 우리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만들었던 장소다. 북한의 불장난으로 어수선한 요즘 같은 때는 한번쯤은 떠올려 봐도 좋을 동네가 아닐까 싶다.



동막마을 옆에는 마읍천(麻邑川)이 흐른다. ’동막교는 이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참고로 마읍천은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사금산의 문의재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마읍이라는 고을에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이 마을은 마읍(馬邑마라읍(馬羅邑말읍(末邑마읍(麻邑)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 왔단다.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둑방길을 따른다. 마읍천을 오른편에 낀 제방(堤防)의 위로 길이 나있다. 왼편의 농지에는 여물용으로 꾸려놓은 볏짚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래 입동(118)이 다음 주 금요일이니 추수가 이미 끝났음은 자명한 일이겠다.




제방의 왼편 아래에는 축산시설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고약한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를 것은 당연하다. 해파랑길 31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부남리(府南里)에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눈길을 끌게 만든다. 노송(老松)들이 가득한 숲이 들녘, 그것도 하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래에는 당집까지 들어앉았다. 이 마을에서 신목(神木)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또 다시 마읍천을 건넌다. 25분만인데 이번에는 부남교를 이용해서이다. ! 이 부근에서는 낚시꾼들을 여럿 만났다. 2년 전엔가 이곳 마읍천에 연어 치어를 방류했다고 하더니 성어가 되어 돌아오기라도 했나보다.



다리를 건너면 부남1. 해파랑길은 이제부터 농로를 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마을안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덕분에 대봉을 주렁주렁 매달은 감나무를 만날 수 있는가 하면 휘늘어진 가지가 멋들어진 노송도 만나게 된다.





부남1리를 지나면 교가1‘, 오리마을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군내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난다. 하지만 인도가 따로 없으니 오가는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래선지 해파랑길은 또 다시 마을안길로 들어서버린다. 참고로 교가리는 근덕면의 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수령이 천 년이나 되는 느티나무의 가지가 서로 상교(相交)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막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마읍천은 이곳 교가리에서 노곡면 우발리 및 들입재(野入峙)에서 발원한 무릉천(武陵川)과 합류한다. 물길이 더 넓어졌으니 어류의 크기나 수량도 늘어났을 것이다. 이를 놓치기가 싫었던지 하천에 어망을 쳐놓았다. 물길의 양 옆을 그물망으로 감싸서 안으로 들어온 어류가 맨 안쪽에 있는 좁은 곳에 갇히도록 되어 있다. 전통적 어로(漁撈) 기법이라 하겠다.



탐방로는 또 다시 둑방길로 올라선다. 마읍천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근덕면 소재지인 교가리이다. 시골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잠시 후 근덕면소재 관공서들과 연결되는 덕산교를 지났다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덕봉교가 보인다. 다리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육계도(陸繫島, land-tied island)덕봉산인데 근처 백사장은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적격이다. 마읍천의 맑은 담수 속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물길이 약한데다 깊지도 않아 어린이와 노약자가 물놀이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란다.



둑방길이 끝나자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에 내려선다. ’원전백지화 기념탑이 세워진 소공원의 앞이다. 2012년엔가 이곳 근덕면(동막리 일원)이 원자력발전소 건설 예정지역으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계획이 취소되었나보다. 그렇다면 이곳도 역시 찬·반 논란으로 주민들이 몸살깨나 앓았겠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위험시설이 들어오는 걸 좋아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니 어딘가에는 꼭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부지가 없다. ’탈원전(脫原電)‘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는 현 정부의 고뇌는 이런 점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덕봉교입구에 있는 사거리이다. 직진하면 덕산해변‘, 오른편은 덕산항이다. 해파랑길 31코스가 종료되는 맹방해수욕장은 왼편에 보이는 덕봉교를 건너야 한다. 참고로 덕산해변(德山海邊)은 마읍천을 사이에 두고 맹방해변과 나누어진다. 해안사구를 따라 건설된 산책로 남쪽에 덕산항(남애포)이 위치하고 있는데,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회센타에라도 들를라치면 값싸고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스포츠센터에서는 윈드서핑도 즐길 수 있단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까진 생략하기로 했다. 겨울의 초입인 요즘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지역 주민의 전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는 여름에 찾아와야 제격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다리를 건넌 뒤에는 또 다시 둑방길을 따른다. 아니 도로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아무튼 이 부근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마읍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덕봉산(54m)‘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덕봉산(德峰山)은 해발고도 54m의 산이다.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현재의 덕산해변인 육계사주(육지로부터 돌출 성장하여 가까운 섬에 연결된 사주)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이다. <덕산도(德山島)는 삼척부 남쪽 23리인 교가역(交柯驛) 동쪽 바다 위에 있다.>고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그 증거라 하겠다. ‘해동여지도대동여지도에도 섬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섬의 이름은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했다. 물더덩(물독의 방언)과 흡사하여 더멍산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덕번산(德蕃山)을 거쳐 덕봉산(德峰山)이 되었단다.




기암괴석이 깔리다시피 한 덕봉산에다 무리지어 나는 철새 때라도 더할라치면 그 아름다움은 극치로 향한다. 어느 유명화가 있어 저런 풍경을 그림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내년이면 저 산은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 삼척시가 내년 말까지 해안 데크로드와 전망시설 등을 설치해 생태관광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짚라인과 군초소를 이용한 요새전망대, 대나무 숲길, 공예 체험장, 마읍천 수상 게스트하우스 등을 아우르는 종합 레저단지로 가꿀 예정이란다.



경관이 아무리 좋아도 덕봉산은 가보지 못했다. 맹방해수욕장과의 사이를 지나가는 마읍천에 섭다리처럼 생긴 다리가 놓여있으나 끝부분이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가면서까지 다녀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덕봉산은 바다와 강을 한꺼번에 끼고 있다. 백사장은 덤이다. 거기다 검은색을 띤 크고 작은 기암괴석이 바다 쪽에 널려있어 마치 수석정원을 보는 듯하다. 대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는 섬으로 들면 바람과 파도 소리, 대나무가 서로 맞닿는 소리가 일품이란다. 특히 산 정상이 330(100여평)나 되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삼척항과 맹방, 덕산해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단다.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덧 맹방해수욕장(孟芳海水浴場)이다. 교가1리를 통과한지 40분만인데 31코스가 종료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악회에서는 32코스의 일부분을 연장해서 걷겠다고 한다. 밋밋했던 풍경에 대한 위로차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23가까이나 되는 32코스의 일부분을 오늘 진행함으로써 다음 구간에 대한 부담을 줄여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참고로 맹방(孟芳)’이란 향을 묻었던 마을이라는 뜻의 매향방(埋香坊)’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옛날 이곳에는 매향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향나무를 잘라다가 제를 지내고 그것을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지점에다가 묻는 의식이다. 300년 후에 그것을 꺼내다가 피우면 향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포진(浦津)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식을 해왔고 부유층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매향을 했는데 자신의 땅에 묻고 최소한 100년을 묻혀 두었단다. 3대 이상이 걸린 셈이니 할아버지가 묻은 것을 그 손자 대에 꺼냈다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맹방 주변 해안을 매향을 행한 바닷가라는 뜻에서 매향안(埋香岸) 혹은 매향맹방정(埋香孟芳汀)이라고도 한단다.



탐방로는 해송 숲과 백사장의 사이로 나있다. 2차선 도로에 가까울 정도로 널찍하다. 아니 빈번하진 않지만 오가는 승용차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오른편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백사장이 너른데다 수심이 얕고 경사까지 완만해 삼척 제1의 해수욕장으로 불린단다. 다른 해수욕장들에 비해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단다. 그건 그렇고 호젓한 바닷가에서의 산책은 맹방해변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음향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와 라디오 PD인 은수(이영애)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할 즈음, 소리채집을 위해 찾은 곳이 바로 맹방해변이다.



뒤따라오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킨다. 해수욕장에 웬 축구공이냐면서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저건 물탱크란다. 여름철 피서객들에게 물을 쏟아주는 기능을 하고 있단다. ’2002 월드컵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당시 경기가 열리지도 않았던 이곳 삼척에 기념탑이 세워진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백사장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산책을 하며 즐기는 삼림욕 역시 맹방해수욕장이기에 가능한 즐길거리다. 많은 삼척 시민들이 삼척 제1의 해수욕장으로 맹방해수욕장을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너른 바닷가 역시 즐길거리로 충분하다. 저 바닷가에는 조개가 많이 묻혀 있다고 한다. 얕은 바다 속에서 발가락으로 모래바닥을 후비기라도 할라치면 어렵지 않게 조개를 잡을 수 있단다. 온 가족이 잡아 온 조개를 모아 커다란 냄비에 담고 조개탕을 끓여먹는 즐거움은 이곳 맹방해수욕장의 자랑거리 중 하나라고 한다.



맹방해변에서 하맹방해변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자그만 하천이 흐른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면서 만들어낸 S자로 굽어진 모래톱이 인상적인데 엄청나게 많은 새들이 몰려있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마읍천 하류만 철새 도래지인줄 알았더니 이곳도 그 범위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고운 모래사장이 너무 아까워 비록 잠시지만 모래사장에 내려서본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눈앞에서 부서지고, 끊임없이 흰 포말을 토하며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 좋다. 이런 걸 보고 힐링이라고 하는가 보다.



맹방해수욕장이 끝났어도 모래사장은 계속된다. 국민관광지인 맹방해변이 하맹방해변과 상맹방해변, 한재밑해변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4에 달해 삼척시 해변 중 가장 길다고 한다. 특히 반달처럼 완만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하맹방해변은 드라마 불굴의 며느리촬영지이기도 하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300년 전통의 종택 만월당에 사는 여인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인데, 주인공 영심(신애라)과 신우(박윤재)의 운명적 만남이 저 모래사장에서 이루어졌다. 그건 그렇고 해변이 하도 길다보니 보여주는 풍경도 어려가지다. 이번에는 바닷가 도로변을 아예 꽃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반대편은 씨스포빌 리조트에사 운영한다는 골프장일 것이다. 현재 골프장 6홀과 함께 콘도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파랑길은 상맹방해변이 끝나기 전에 왼편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차도까지 나간다음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벚나무 가로수길을 따른다. 하지만 이를 놓쳐버린 우리 부부는 해변이 끝나는 곳까지 진행해 버렸다. 비록 잠시지만 길을 잃고 헤맸음은 물론이다. 지역 주민의 도움으로 한재밑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와 ‘7번 국도의 굴다리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해파랑길은 또 다시 옛 ‘7번 국도를 따른다. 한재로 오르는 고갯길인데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맹방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긴 아름다운 바다 풍광을 따라 달리는 7번 국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풍경이라니 오죽 하겠는가.



트레킹 날머리는 한재소공원(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산 30-11)

한재를 넘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맹방해안의 항만 및 침수 친수공사를 위한 중장비가 자주 오가기는 했다. 비록 레미콘공장에서 공사장까지의 짧은 구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오르자 산자락을 휘돌아가는 모퉁이에 만들어놓은 한재소공원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총 15.8를 걸었다. 31코스의 원래 길이가 9.8이니 6를 더 걸은 셈이다. 걸린 시간은 3시간 45. 알맞은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한재(漢峙)는 근덕면 상맹방리에서 삼척시 오분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해발고도 102.6m의 고갯마루이다. 인근에서 가장 큰 고개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재의 능선이 동해로 들어가는 곳은 현재 암석해안으로 곶을 이룬다. 따라서 한재의 동쪽은 암석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 경관이 빼어난 이유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은 애환(哀歡)의 고개였다. 실직국(悉直國)이었던 이곳 삼척은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때 신라에 복속되었고,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때 신라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니 지증왕에 의해 실직국의 군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도 한재를 넘어 삼척으로 갔을 것이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들렀던 공양왕도 역시 이곳 한재를 넘었음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기쁨의 고개였던 반면에 또 다른 누군가에는 눈물의 고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고개가 지금은 한산한 고개가 되어버렸다. 7번 국도가 4차선으로 개통되면서 한치터널을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아쉬워한 삼척시에서 고갯마루에 작은 공원을 만들었으니 바로 한재소공원이다.



바다는 정면으로 바라볼 때보다 이렇듯 측면에서 바라볼 때가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화창한 가을날이어선지 바다는 더할 수 없을 만큼 반짝거렸다.



공원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북쪽으로는 삼척항과 삼척해안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갯바위들만 해도 아름다운데 그 옆의 서슬 시퍼런 절벽 위에는 예쁘장한 건물들이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다. 남쪽으로는 한재밑해수욕장과 맹방해수욕장의 흰 백사장이 길게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에 위치한 덕봉산은 아직도 싱싱한 초록빛 숲이다.



해파랑 22코스

 

여행일 : ‘19. 10. 28()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과 영해면, 병곡면 일원

산행코스 : 축산항(2.2km)대소산봉수대(5.9km)괴시리전통마을(2.4km)관어대(5.8km)대진해수욕장고래불해변(소요시간 : 원래 16.3이나 17.4로 늘어나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블루로드는 영덕대게공원에서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영덕판 올레길로 길이는 대략 64.6km쯤 된다. A~D구간으로 나뉘는 블루로드는 해파랑길 19~22코스와 거의 99% 일치하는데 해파랑길 22코스는 블루로드 C코스에 해당한다. ‘목은 사색의 길이라 부르는 이 구간은 남씨 발상지목은 기념관’, ‘괴시리 전통마을’, 봉송정(奉松亭)‘ 등을 끼고 있다. 선현들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이문열이 지은 '젊은 날의 초상'의 무대라는 대진항과 명사이십리라는 고래불해수욕장 등의 아름다운 경관까지 끼고 있어 눈까지 호사를 누리게 한다. 다만 거리가 멀다는 게 다소 흠이라 하겠다. 특히 우리 부부처럼 관어대까지 들러볼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야만 한다.

 

들머리는 축산항(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941-3 )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 방면으로 올라오면 축산교차로(축산면 상원리)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와 20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오다 염장삼거리(축산면 축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이어 축산항에 이른다. 해파랑길 22코스의 시점은 축산리 군내버스정류장이다. 스탬프 보관함은 정류장과 축산콜택시의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정류장 옆은 영덕의 대표적 어항인 축산항이다. 죽도산을 수문장처럼 어귀에 두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모양새로 와우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대소산이 서풍을, 죽도산이 남풍을 막아주는 피항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선지 ,대게 위판장이 열리는 전국 5개항 가운데 하나란다. 참고로 이곳 축산항은 물가자미 축제가 매년 열릴 정도로 가자미가 유명하다. 올해도 425일부터 28일까지 테마가 있는 맛있는 여행! 블루로드 영덕!’이라는 주제로 열렸다고 한다. 이는 대게의 원조항으로 소문난 이곳 축산항의 또 다른 명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물가자미의 알이 차는 4월은 막회가 유명한데, 뭉툭하게 썬 회를 잘게 썬 채소 위에 놓고 막장과 비벼먹는 축산항 물가자미 막회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와우산(臥牛山)‘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가 누운 형세라는 축산의 명산이다.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드는데, 위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에 남씨 발상지(南氏 發祥地)‘라고 새겨진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옆에는 영양 김씨 시조유허비각(英陽 金氏 始祖 遺墟碑閣)‘이란 빗돌도 보인다. 하단에는 70m쯤 떨어진 곳에 있다는 위치까지 표시해 두었다. 하지만 비각은 남씨의 시조인 영의공 남민(英毅公 南敏)‘의 것만 눈에 띄었다. ()의 당나라 시절 이름이 김충(金忠)‘이었으니 영양 김씨도 그를 시조로 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니 김충의 아들 김석중(金錫中)이 본래의 성인 김()을 사용하여 영양에 살면서 영양 김씨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기록을 본 것도 같다. 그건 그렇고 들머리에 블루로드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대소산봉수대 1.5/ 축산항 0.7)도 세워져 있다는 것도 참조하자.



계단을 올라서자 통사동(通使洞)‘이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남씨 시조가 살았다는 동네란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축산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비석 두 개를 만난다. 왼편은 남씨의 시조(始祖)영의공 민(英毅公 敏)‘의 유허비(遺墟碑). 그 오른편 비석에는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남씨(南氏)‘ 성을 얻게 된 과정을 적고 있다. 천보(天寶) 14(신라 경덕왕 14, 서기755), 당나라 현종 때 김충(金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을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이곳 축산에 도착,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여남)에서 왔다 하여 남()씨 성을 하사하고 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호는 영의(英毅)으로 하고 영양(英陽)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그 후 고려 후기에(1,200~1,300년대로 추정) 홍보(洪輔)와 군보(君甫), 광보(匡甫)라는 3형제가 나타나 영양(英陽)과 의령(宜寧),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삼아 중시조가 되었다.



유허비의 뒤에는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안에는 세 개의 비석이 모셔져 있었으나 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비각의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유허비라는 게 본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일 지니 그네 가문의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지 싶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영의공(英毅公) 이후 중시조(中始祖)까지 500여년이나 되는데 비해 남씨(南氏)의 족보에는 겨우 7만 기록되어 있단다. 기록이 유실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당()의 천보년대(天寶年代)에는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없었단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로보아 이곳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구전(口傳)되어온 집안 얘기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고증(考證)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하긴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조 탄생(誕生) 설화들 가운데 고증이 된 성씨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조금 더 오르자 일광대(日光臺) 및 월경대(月影臺) 비석이 연이어 나온다. 그런데 오석(烏石)으로 된 새 비석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왕에 새로 만들었다면 옛 것은 치웠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남씨 발상지가 있는 와우산을 넘자 또 다시 바닷가 도로변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은 축산면과 영해면의 경계이다. 이제부터 해파랑길은 영해면으로 들어선다. 도로 아래는 눈앞이 환한 바다다. 눈길이 마주치는 곳이 모두 블루다. 아름답다.



도로를 따라 50m쯤 걸었을까 잘 다듬어놓은 해안 길을 두고 해파랑길은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대소산 봉수대 2.0/ 남씨 발상지 0.8, 죽도산전망대 2.2) 외에도 블루로드안내판등 각종 안내판들이 어지럽다싶을 정도로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대소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까지 30분 정도의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무난히 오를 수 있는 길이다. 길이 너른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산자락은 온통 소나무 군락지다. 겨울의 초입이건만 솔잎이 한창 푸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다. 소나무숲길이 구불구불, 나무계단이었다가 흙길이기를 반복한다.



갑자기 가팔라진 오르막을 숨 가쁘게 치고 오르면 해발 282m의 대소산 정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만이다. 뾰쪽하니 솟아오른 꼭대기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수대(烽燧臺)’가 자리 잡았다. 이 봉수대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남쪽으로는 영덕 별반산봉수대, 북으로는 평해의 후리산봉수대, 서로는 광산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단다.



봉수대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네모난 대() 위에 원형의 화구(火口)을 갖췄는데 영덕 인근지역의 여러 봉수대 가운데 가장 뚜렷한 형태를 보유하고 있단다. 그 옆에는 이동통신사의 송신탑이 들어서 있다. 봉수대란 통신기기가 발달되기 전 국경지역의 외적 침입 등 위급한 소식을 횃불과 연기로 중앙으로 전하는 시설이다. 전파로 소식을 전하는 현대에서는 이동통신사의 송신시설이 봉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설이 한자리에서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지형의 유리함은 결코 놓치지 않는가 보다.



봉수대의 특징대로 조망이 뛰어나다. 활기찬 축산항이 그림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그 멀리 남쪽으로는 포항의 바닷가, 북쪽으로 평해를 거쳐 고래불에 이르는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내륙 쪽으로는 영해평야와 함께 백두대간의 산릉이 첩첩이 쌓여있다. 동쪽은 물론 물 맑기로 소문난 동해바다이다.



봉수대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은 소나무 터널이다. 상큼한 솔향기가 코끝을 맴돌다 지나간다. 저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있을 것이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라니까 말이다. 그러니 걷는 게 힘이 들 리가 있겠는가. 앞서가는 집사람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기도 하지만 통나무계단을 알맞은 높이로 깔아놓아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체육시설도 보인다. 정자나 벤치, 평상 등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의 탐방로에 비해 그 빈도가 훨씬 더 높은 걸 보면 블루로드를 그만큼 잘 가꾸어놓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 전 포항구간을 걸을 때 지역 특산품인 참가자미회를 사주겠다며 마중 나왔던 옛 동료도 자신의 동네보다 영덕군 공무원들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너무너무 열심히 근무한다고 말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15분 남짓을 진행하자 동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름이 망월정(望月亭)’이란다. 달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에 들어앉은 망월정이라니 조금은 어색하다. 어쩌면 다음에 오를 봉우리가 망일봉(望日峰)’이다 보니 같은 이름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솔숲 사이로 난 길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으니 편하기도 하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갈림길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는 해파랑길의 표식으로도 모자랐던지 블루로드의 표식들을 곳곳에 내걸어 두었다.



망월정에서 내려선지 10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동해를 옆구리에 낀 철제다리(이정표 : 괴시전통마을 3.4/ 대소산봉수대 2.4)가 길손을 맞는다. 축산면에서 영해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놓인 보행자 전용의 구름다리이다. 튼튼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이 다리도 금기사항은 있단다. 뛰지도, 흔들지도, 난간 매달리지도 말란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15분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아래로 푹 꺼지고 만다. 양 옆으로 또렷하니 길이 나있는 걸 보면 두 지역을 잇는 고갯마루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영덕소방서의 구조위치표지판(C-5)도 괴시리와 사진리를 잇는 임도라고 적어 놓았다.



고개를 지나서도 길의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쉼터를 겸한 체육시설도 눈에 띈다. 그렇게 20분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삼거리(이정표 : 목은기념관1.8/ 관어대2.7/ 사진구름다리3.0)가 나온다. 잠시나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고민했던 지점이다. 선답(先踏) 했던 지인께서 관어대를 꼭 가보라고 했는데 해파랑길은 왼편 목은기념관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해파랑길을 따랐고, 그게 최선의 선택이 되었지만 말이다.



삼거리에는 시판(詩板)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세운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 1495-1554) 선생의 망일봉(望日峰)’이란 시를 적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망일봉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곳이 산봉우리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른 하나에는 영해를 그리워하며라는 제목 아래에 두 편의 시를 실었는데 외가(外家)’라는 문구로 보아 이색선생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은 널찍한데다 조그만 갈림길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거기다 블루로드 표식과 해파랑길 표식이 하도 많이 매달려 있어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도 잃어버리지 못할 지경이다. 지금 걷고 있는 블루로드가 영덕을 대표하는 체험거리라는 영덕구체(盈德九體)’ 가운데 하나라고 하더니 그에 걸맞게 꾸며놓았지 않나 싶다. 나머지 체험거리로는 오천옹기 만들기와 동해안달맞이 영덕야간산행, 나라골 보리말 체험, 어촌마을체험(후리그물 당기기,대게잡이 등), 황금은어 잡이 체험, 초경량비행체험, 스킨스쿠버 체험, 수상레저 체험 등이 있다. 이밖에도 영덕군은 볼거리인 9()과 먹거리인 9()도 선정해 놓았다.



25분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괴시리전통마을50m/ 목은 이색산책로0.19)가 나온다. 또 다시 헷갈리는 지점이다. 전통마을과 목은기념관을 모두 둘러봐야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왼편으로 50m쯤 가서 전통마을전경을 조망하고 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 목은 산책로를 따라야 한다. 이럴 경우 둘 모두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우리부부는 왼편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전통마을이 통째로 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200년 이상 묵었다는 전통가옥들이 즐비한데 그 앞으로는 영해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다. 저 마을의 이름은 원래 호지촌(濠池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괴시마을로 굳어졌단다. 아무튼 저곳은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외가인 영양 남씨집성촌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괴시파종택6점의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조망을 즐기다가 마을로 내려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하려는데 마을입구에 세워진 이정표에 목은 기념관의 방향표시가 우리가 내려온 골목길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마을로 들어섰던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올라가면 나온단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200m쯤 거슬러 올라가니 한옥으로 지어진 목은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에는 목은 이색의 영정과 문집판, 목은집 등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은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오늘은 월요일, 전국의 박물관이 모두 쉬는 날이기 때문이다. ! 기념관 옆에 세워놓은 만서헌(晩棲軒)‘의 안내판을 깜빡 잊을 뻔했다. ’호은 남흥수(1813-1899)‘가 지은 정면 3,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집이라는데 생김새로 보아 목은기념관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을 말하는가 보다.



기념관의 앞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연못과 정자를 지어놓았는가 하면 선생의 작품으로 보이는 시들을 적은 빗돌들을 여러 개 세워놓았다. 이왕에 들렀으니 선생의 사상까지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이젠 괴시리(槐市里)’ 전통마을을 둘러볼 차례이다. 마을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괴시파 종택(槐市派 宗宅)‘을 비롯하여 괴정(槐亭), 구계댁(邱溪宅)’, ‘해촌 고택(海村 古宅) 15개소의 전통한옥(지정문화재)이 잘 보존되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조선 후기 영남지역 사대부들의 주택양식을 직접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한적한 생활에 지장을 주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마을에서는 한마당잔치와 고택음악회, 목은문화제 등 다채로운 행사가 시시로 열리기도 한단다. 또한 주말에는 괴정에서 마을 부녀회원들이 무료 차봉사도 하고 있단다.





마을 앞 도로변으로 나오니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는 목은 선생과 그의 아버지 가정 이곡(稼亭 李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워놓았다.



이젠 목은 선생의 또 다른 추억이 어린 관어정으로 갈 차례이다. 조형물과 벤치 등 대체로 잘 가꾸어진 도로를 따르게 되지만 거리가 꽤나 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간이라 하겠다.



관어대가 위치한 상대산을 바라보며 15분 정도를 걸으니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가면 대진항, 왼편은 대진해수욕장이나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연결된다. 관어대의 방향표시는 양쪽으로 다 되어있다. 하지만 관어대를 거쳐 대진해수욕장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해파랑길 표식도 물론 오른편으로 진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 다 그러라는 얘기는 아니다. 만일 대진항을 구경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대진해수욕장 입구에서 고래불대교를 건너면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한 시간 조금 못되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우리 부부에게 오른편 방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관어대를 꼭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이다. 거리도 먼데다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오가는 차량에 주의까지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크고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아래에 당집까지 지어져 있는 걸 보면 마을의 신목(神木)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혹자는 이곳에서 바닷가 민속신앙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천장군(千將軍)과 해불신, 우물신을 모시고 있다면서 우물신은 원활한 식수(食水) 공급을 위해서이고, 천장군은 마을의 질병과 잡귀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해불신은 마을에서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부처님이라고 했다.



삼거리에서 또 다시 15분 정도를 걸으니 대진항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오른편 언덕에 자리 잡은 대진교회를 꼭 기억해 두자. 관어대로 올라가는 탐방로의 들머리가 교회 건너편 산죽 숲속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숲이 하도 짙어서 길이 나있지 않을 것 같지만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시멘트 축대 위해 세워진 이정표(관어대 0.8/ 목은기념관 3.8)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산죽이 하도 울창해서 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몸을 틀어가면서 진행해야할 정도로 폭이 좁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죽군락지를 지나면서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는 아예 임도처럼 넓어져 버린다. 정비도 잘 되어 있었다. 산비탈 쪽에 밧줄 난간을 쳐놓았는가 하면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나무계단까지 설치했다.



산길로 들어선지 20분이 조금 못되어 상대산(上臺山) 정상(이정표 : 대진해수욕장 0.7)에 올라선다. 해발이 183m인 정상은 구릉처럼 밋밋한데 그 중앙에 관어대(觀魚臺)가 터를 잡았다. 관어대는 목은 이색(李穡) 선생이 '상대산 너머 바닷가의 고기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명명한 지명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관어대(觀魚臺)란 현판까지 걸어놓았다. 지명(地名)이 정자의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셈이다. 그나저나 안내판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 초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과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인인 원천석(元天錫) 등이 동명(同名)의 시를 남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변 경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관어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병곡면 일대의 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중심에는 고래불해수욕장이 들어앉았다. ’영해에서 태어난 이색 선생은 유년시절 이곳 상대산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때 하얀 물줄기를 내뿜으며 노닐고 있는 고래가 그의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 고래불‘, '고래들이 노니는 뻘'이다. 어린 소년이 지은 이름이 설마 지명이 되었을까도 싶지만 그게 무든 대수겠는가. 그저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해안선을 눈에 담아볼 따름이다. 또 하나, 고래불해수욕장은 대진해수욕장 위로 나있는 덕천해수욕장과 영리해수욕장을 모두 포함하는 지명이라는 것쯤은 기억해두자.



이젠 마지막 여정만 남았다. 대진해수욕장으로 내려가 도로를 따라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대진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니 대진해수욕장(大津海水浴場)이 나온다. 영해면과 병곡면(柄谷面)의 경계를 따라 바다로 흘러드는 송천강(松川江)의 하구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울창한 송림을 끼고 있는 등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2012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2TV의 미니시리즈 사랑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가을동화·겨울연가의 윤석호 PD가 연출하고 소녀시대의 윤아장근석이 출연한 작품으로 70년대 순수했던 사랑의 정서와 현시대의 트렌디한 사랑법을 동시에 펼쳐낸 청춘 로맨스물인데 이곳 대진리 일대와 이따가 들르게 될 고래불해수욕장의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모래사장은 모래알이 굵은 편이다. 영덕의 해안들이 대체적인 특징인데 몸에 잘 붙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단다. 그래선지 예로부터 모래찜질의 최적지로 입소문을 타왔다고 한다. 거짓말 좀 보태서 자갈처럼 굵은 모래 덕분에 맨발로 걸을 경우 그 촉감을 다음날까지도 느낄 수 있단다.



대진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는 고래불대교가 놓여있다. 영해면과 병곡면의 경계선을 겸하는데, 문설주 역할을 하고 있는 조형물이 특이한 다리이다. 영해면 쪽은 대게를 새겼는데 병곡면은 쪽은 고래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지방의 특징을 한꺼번에 담아보려는 고심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냇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은 항아리의 주둥이처럼 좁아들었다. 송천강(松川江)과 각리천(角里川)이 합쳐진 물줄기인데도 저리도 좁아진 걸 보면 가뭄이 제법 심했던가 보다. 덕분에 좋아진 점도 있다. 휘어진 해안선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면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면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20175월에 개장한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데 주차는 물론이고 조리실과 샤워실, 화장실이 유료예약자 전용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게 눈길을 끈다. 야영장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캠핑사이트(카라반, 텐트사이트, 오토캠핑 사이트, 펜션형 숙소)를 보유하고 있어 인원과 취향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데, 야영장 148동과 조형 전망대, 해안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중에 텐트사이트가 110동으로 가장 많고 카라반은 25동이 마련되어 있단다. 이 가운데 생활가전이 잘 갖춰진 카라반이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텐트장과 오토캠핑사이트도 항상 손님들로 붐빈단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는 국제청소년캠페스트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단다.



고래불해수욕장(국민야영장)은 영덕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다. 병곡면 일대 해안마을 6곳을 아우르는 탓에 그 어느 곳보다 시원스레 펼쳐진 해안이 놀랍도록 광활하다. 누군가는 이곳에 오면 4가지만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바다, 모래. 송림, 그리고 하늘이라며 그저 입이 턱 벌어질 따름이라는 표현도 덧붙였었다. 그래서일까? 내 가슴도 한없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런 그렇고 텅 비어있는 널따란 백사장 탓인지 배가 고파온다. 아니 아까 괴시리마을에 내려설 때부터 이미 고팠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마침 영덕군청에서 아홉 가지의 먹을거리인 영덕구미(盈德九味)’를 선정해 놓았다지 않겠는가. 영덕물회와 황금은어, 영덕해물탕, 대게정식, 영덕모듬회, 송이버섯전골, 미주구리회, 성게알 비빔정식, 전통메밀묵밥 등의 이름이 들어간 식당 간판을 열심히 찾아보는 이유이다. 하지만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를 때까지 식당은 하나도 없었다. 아까 대진해수욕장 근처에서 대게와 회를 파는 식당이 눈에 띄기는 했으나 월요일이라선지 이 또한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난데없는 김치찌개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소주를 반주로 올릴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산책로와 캠핑장, 샤워장, 화장실 등 기초시설은 물론이고 포토죤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 그려놓은 트릭아트(trick art)‘가 특히 눈길을 끈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사진 찍기에 그만이겠는데 이런 그림을 여러 곳에 그려놓았다. 사진을 첨부하지 않았지만 귀여운 동물모양의 카라반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토끼, 코끼리, 코뿔소, 강아지 등 다양한 동물모양 카라반이 일반 카라반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겠다.



모래사장과 솔숲의 사이로 나있는 시멘트길이 거북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를 따르면 된다. 이 산책로 역시 국민야영장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야영장의 상징 조형물도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큰 배 모양으로 생긴 조형물이 닻과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 배 부분은 전망대의 기능까지 겸하는데, 그보다는 야간에 펼쳐지는 빛 잔치가 더 볼만하단다.



고래불 야영장이 끝났다싶으면 봉송정(奉松亭)’이 나타난다. 영덕 고래불해양복합타운(국민야영장)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인근 관어대와 연계하여 해안 경치가 빼어난 솔밭에 봉송정이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건립된 정자란다. 정자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은 고려 중엽에 봉씨(奉氏) 성을 가진 영해부사가 송천(松川)과 덕천 사이의 능원에 세웠던 정자라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주변에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해풍을 막아 농사피해를 없애게도 했단다. 아울러 과거에 있었던 봉송정은 정자 주위에 울창한 수목과 학이 서식하고 푸른 동해 파도와 갈매기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장관이었다는 내용도 적고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의 대홍수로 정자는 사라졌고 하천제방이 정리되고 농지가 조성되면서 송림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복원은 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 허허벌판의 모래바닥에 이층짜리 정자만이 외로운 이유이다.



봉송정을 지나면 고래불1가 나오고 곧이어 거무역리(居無役里)’ 땅에 들어선다. ‘역옹패설(櫟翁稗說)’에 나오는 박세통 거북설화의 발상지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가 전무한 차도가 계속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그렇다고 걷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북을 구해주고 보은을 받았다는 구전설화나 되짚어보자. 고려 중기 원종(元宗)시대에 안렴사(按廉使) 박세통(朴世通)이 지방을 순행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을 사람들이 등에 ()’자가 새겨진 바다 거북이에게 온간 짓궂은 장난을 하고 있더란다. 이를 본 세통이 후한 재물을 주고 거북을 사서 바다로 보내주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용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집안 대대로 영광을 베풀겠다고 했단다.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린 세통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란 최고 벼슬에 올랐고, 아들 홍무(洪茂) 또한 시중(侍中), 손자 함도 복야(僕射)를 거쳐 시중이 되어 한 집안에 3대 정승이 나오자 이 마을을 부역을 면제하면서 이름 또한 거무역(居無役)’이라 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 연간에 묵산 남기만(南基萬)이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한 때 거묵리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날머리는 고래불해수욕장

지루하기 짝이 없는 탐방로는 마을의 지형이 연꽃이 물에 떠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는 영리(榮里)를 지나 자리(자루) 모양으로 생겼다는 병곡리(柄谷里)로 접어든다. 이어서 해파랑길은 고래불해수욕장의 널따란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22코스는 끝을 맺는다. ! ‘경북수산자원연구원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는 바닷가를 따라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중간에 있는 고래불1에서 바닷가를 빠져나왔다 되돌아가야만 하는 불편만 감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고운 모래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한 코스이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랐다. 너무 먼 거리를 걸어온 탓에 눈요기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아무튼 오늘은 5시간이 걸렸다. 관어대를 둘러보느라 원래 16.3이던 거리도 1이상 늘었다. 대신 멋진 경관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으니 고진감래(苦盡甘來)에 딱 어울리는 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이곳 고래불은 영덕구경(盈德九景)’ 가운데 하나이다. 거기다 체험거리인 영덕구체(盈德九體)’의 초경량비행체험이 이뤄지는 곳이다. 영덕의 대표적인 관광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고래불'이란 지명에 얽힌 이색의 일화부터, 동해안에서 가장 길다는 명사 이십 리의 백사장 등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나머지 9경도 알아보자. 영덕해맞이공원(풍력), 삼사해상공원, 도천숲(천연기념물), 팔각산, 사월의 복사꽃, 죽도산, 괴시리전통마을, 나옹왕사 사적비 등이라니 시간나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해파랑길 28코스

 

여행일 : ‘19. 10. 5()

소재지 : 경북 울진군 북면과 강원 삼척군 원덕읍 일원

여행코스 : 부구삼거리(6.1km)도화동산(0.8km)갈령재(수로부인길 : 3.8km)호산버스터미널(소요시간 : 10.7,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비교적 짧은 구간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코스의 대부분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을 지난다는 특징도 있다. 나곡리에서 갈령재까지는 옛 7번 국도,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갈령재부터는 산길을 탄다. 때문에 출발지인 부구리 근처의 바닷가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얻지 못할 정도로 구간 전체가 밋밋하다. 성에 차지 않는 풍경일지라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 때문인지 일행 중에는 코스에 변화를 준 사람들도 있었다. 갈령재 조금 못미처에서 고포마을로 내려갔다가 해안도로를 타고 호산까지 올라오는 방법이다. 이 경우 괜찮은 바닷가 풍경들을 옆구리에 끼고 걸을 수 있다니 참조한다.


 

들머리는 호산버스터미널(울진군 북면 부구리 149-9)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영덕 방면으로 내려오면 덕구교차로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와 천변도로를 타면 2분도 되지 않아 부구삼거리가 나타난다. ‘해랑길 28코스의 출발지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동북쪽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부구리(富邱里)의 원래 이름은 영구리(靈龜里)였다. 마을에 거북 모양의 신령스런 바위가 있다는데서 유래했단다. 1914년 토지를 측량할 때 일본인 측량 기사가 영구의 한자 표기가 어렵다 하여 부구천(富邱川) 건너 염전리(鹽田里)의 염()자와 구()를 쓰기 쉬운 구()자로 바꾸어 염구리(鹽邱里)가 되었고, 행정구역 개편 때 흥부동(興富洞)의 부()자와 염구동의 구()자를 따서 부구리(富邱里)가 되었다. 이곳 부구리는 예로부터 '흥부장'으로도 유명했다.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 보부상길'의 출발점이자 울진장·죽변장과 함께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보부상들이 이곳을 놓쳤을 리가 없다. 그들은 이곳에서 사들인 해산물을 등에 지고 태백산맥을 넘어 내륙에 가져다 팔았고, 돌아올 때는 내륙의 농산물과 공산품들을 한 짐 가득 지고서 돌아왔단다.





출발지에 내리면 삼거리라는 명칭과는 달리 길이 네 갈래로 나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트레킹은 동쪽 방향, 그러니까 부구천의 천변도로를 따라 바닷가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걷는 도중 오른편으로 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면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부구천의 하구, 그러니까 바다와 맞닿은 곳에는 방파제를 쌓아올렸다. 이곳까지 파도가 들이친다는 증거인데 높다란 방파제에는 예쁜 풍경화를 그려 넣었다. 포토죤으로 이용해도 그만이겠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우산 펴기도 힘이 드는데 풍경을 즐길만한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을을 벗어나자 바닷가가 나타난다. 여행자의 사진첩 속에 들어앉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는 아름다운 해안이다. 거센 파도에 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기암괴석들이 한 폭의 풍경화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그린 그림이다.




! 이곳에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데 주저하지 말자. 잠시 후 해안을 떠나면서 부터는 두 번 다시 이런 경관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해안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바위절벽이 가로막는다. 하지만 넘실거리는 바닷물 위로 데크로드(deck road)가 놓여있다. 한반도의 종주를 꿈꾸는 해파랑길 종주꾼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맨 끄트머리 바위덩어리는 섬이었었나 보다. 중간이 이렇게 나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곡해수욕장(羅谷海水浴場)‘이다. 경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300m쯤 되는 모래사장을 끼고 있다. 아니 안쪽에는 자갈이 깔려있다니 혼합형 해수욕장으로 보는 게 옳겠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한적한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정평이 나있다.



해수욕장의 널따란 모래사장은 쓰레기장을 변해버렸다. 플라스틱과 어구, 나뭇등걸 등 태풍 미탁이 실어온 해양쓰레기들이 가득하다. 이밖에도 콘크리트 구조물이 파괴되어 있는 등 태풍이 할퀴고 간 흔적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마을 앞 도로변에는 눈에 익은 조형물들이 도열해 있다. ’대게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아직도 여긴 울진 땅이란 얘기일 것이다. 이 조형물들은 울진의 특산물을 홍보하는 기능까지 담았다. 대게를 머리에 얹고 있는 막대들이 울진의 또 다른 특산물들을 담은 사진을 하나씩 매달고 있다. 속살이 쫄깃하고 담백하여 궁중에 진상되어 왔다는 울진대게와 다양한 영양분을 함유한 붉은대게, 울진 송림이 키워낸 송이버섯, 청정해역에서 자란 울진고포미역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석호교다리를 건너면 나곡1리 마을회관‘,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곤 천변(川邊) 길을 거쳐 옛 ’7번 국도로 연결된다. ! 이곳 나곡마을은 바다낚시공원과 함께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KBS에서 20167월부터 같은해 9월까지 방송된 함부로 애틋하게는 김우빈과 수지의 주연으로 어린 시절 가슴 아픈 악연으로 헤어졌던 두 남녀가 안하무인 '슈퍼갑 톱스타'와 비굴하고 속물적인 '슈퍼을 다큐 PD'로 다시 만나 그려가는 까칠하고 애틋한 사랑을 그린 멜로드라마이다. 드라마세트장 내부에 촬영당시의 소품과 주인공들의 촬영사진 들을 전시해놓고 있다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사진 촬영조차 힘들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지는데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이후부터는 옛 ‘7번 국도를 따른다. 곁에 국도가 새로 놓인 탓인지 차량통행은 빈번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속도를 높여 달리기 때문에 마음이 개운치만은 않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도로 가장자리에 동해안자전거길을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갈령재에서 시작되는 수로부인길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 자전거길을 따르면 된다.



도로의 상황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나곡천에 기댄 도로의 한쪽이 확 파여 나갔는가 하면 산사태로 밀려온 토사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곳도 자주 눈에 띄었다. 지난 주말 이곳을 할퀴고 지나간 태풍 미탁이 남긴 상처일 것이다.



길가에 가스공사의 시설이 보인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예쁜 외형을 을 갖고 있지만 용도는 모르겠다.



계속해서 옛 ’7번 국도를 탄다. 이 도로는 해파랑길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나곡교차로가 나온다. 왼편 나곡3로 들어가는 길은 새로 놓인 7번 국도로 연결된다. 그 들머리에는 나곡 태실마을이라는 간판을 세워놓았다. 하단에는 광해군 왕녀의 태()’라며 태실의 주인공까지 밝히고 있다. 맞다. 광해군 11(1619)에 태어난 왕녀 아기씨의 태를 묻었다는 기록(萬歷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 王女阿只氏胎室, 萬歷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이 적혀있는 비()가 저 마을에 있다고 한다. 태함과 태항아리, 태지석 등은 비록 도굴범들의 차지가 되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서 11녀의 자식을 낳았는데 문성군부인 류씨에게서 폐세자 질()을 숙의 윤씨에게서 옹주를 만력 47년에 낳았다.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나 박원(朴遠)에게 시집간 옹주의 출생년도가 같으므로 저 마을에 묻힌 태는 숙의 윤씨가 생산한 옹주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나곡교차로를 지나면서 길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하지만 차량 통행이 빈번했던 도로답게 경사가 거의 없는 편이다.



도로변에는 자전거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자전거 거치대와 함께 자전거코스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명품 자전거길로 소문난 동해안종주 자전거길다운 시설이라 하겠다. 그러나 벤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다. 자전거보다는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더 우선일 텐데도 그들이 쉴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조금 더 걷자 고포마을(나곡6)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이른다. 들머리에는 울진 고포 돌미역이라 적힌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조선시대 임금님의 진상품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그만큼 품질 좋은 돌미역이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포마을은 그보다 더한 특징도 갖고 있다.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마을이 두 개의 커다란 행정구역(경북 울진, 강원 삼척)으로 나뉘는 것이다. 같은 마을에서 행정구역이 둘로 나뉘니 생활의 불편이 많을 것은 뻔한 일이다. 주민들은 하나의 마을로 통합하길 원한다는데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동해안 자전거길고포마을 삼거리에서 오른편 고포마을로 향한다. 해파랑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옛 국도를 탄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표시지를 따른 것이 그 원인이지만, 억지로 들어가 봤자 빗줄기 때문에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을 것 같아서였다는 점도 또 다른 이유라 하겠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 더 걷자 도로변에 이보혁 홀민 유애비(李普赫 恤民遺愛碑)’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때 만든 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라고 한다.



안내판이 지시하는 언덕으로 오르자 밭 가운데에 비석(碑石)’가 자리하고 있다. 상단이 둥근 호패 모양의 월두형으로 된 비()인데, 밭과는 시멘트로 단을 지어 구획했다. 비의 전면에는 관찰사이공보혁휼민유애비(觀察使李公普赫恤民遺愛碑)’라 적혀 있다. 비문 양쪽에 새겨져 있다는 국화문양과 뒷면의 옹정십이년건립(擁正十二年建立)’이라는 글귀는 빗줄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보혁이라는 인물은 명인전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므로 휼민(恤民)이란 글씨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참조해 두자.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고포마을로 연결되는 삼거리다. 그래선지 아까와 같은 이정표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렇다면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가 고포마을을 둘러본 뒤에 이곳으로 되돌아 나왔다면 최상의 코스 선택이 되었을 것 같다. 국도변에 있는 도화동산이나 자유수호의 탑’, 그리고 수로부인길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로수로 배롱나무를 심어놓은 탐방로는 마음에 쏙 든다. 일본을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벚나무로 가득 찬 도로보다 얼마나 더 멋진 길인가.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목백일홍은 연분홍 꽃망울까지 활짝 열었다.



도로로 올라선지 1시간이 조금 못되어 탐방로는 도화동산에다 데려다 놓는다. 20004월에 발생한 동해안 산불을 무사히 진화했던 것을 기념해 세운 공원이란다. 26,794의 피해를 입혔던 당시 산불은 삼척시에서 울진군으로 번져 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민··군이 합심하여 22시간 만에 산불을 진화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울진군 피해지역인 이곳 고포리에 조성했다는 것이다. ‘도화공원이란 도화(道花)인 백일홍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공원에는 백일홍 등 교목 128본과 관목 4,850본이 식재되어 있으며, 정자와 산책로 등이 세워져 있다. 높이 6m, 길이가 3m인 천마 조형물 만들어 놓았다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산의 꼭대기에는 정자를 배치했다. 전망 좋은 곳에는 벤치도 놓아두었다.




동산에서 바라본 7번 국도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다.



경상북도(울진군 북면)과 강원도(삼척군 원덕읍)의 경계인 갈령(葛領) 고갯마루에는 자유 수호의 탑이 세워져 있다. 1968년 무장공비 120명이 남한혁명기지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과 삼척 지역에 침투했었을 때 아군 33명이 전사하고, 민간16명이 희생된바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주인공 이승복 소년을 떠올리면 쉽게 기억되는 사건이다. 이 탑은 무장공비 섬멸작전 당시 보여준 민··군의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고갯마루에는 휴게소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웬만한 축구장만큼이나 너른 주차장에는 두어 대의 자동차만이 외로울 따름이다. 7번 국도가 새로이 개설되면서 이 휴게소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이리라. 고개를 넘는 자동차들이 없는데 하물며 쉬어갈 자동차가 어디 있겠는가.



휴게소를 지난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수로부인길을 따르게 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문화생태 탐방로로까지 지정(2009)해 놓았으니 나름 유명한 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들머리에는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았다. 그저 해파랑길임을 알려주는 리본이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잘 살펴보고 들어서야 한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한양과 경기 동부, 강원도를 이어주던 관동대로는 조선시대의 9대 간선도로 중 제3로였다. 이 길은 한양 흥인문을 출발해 대관령을 넘고, 강릉 안인역과 삼척 사직역, 용화역, 소공령, 월천리, 갈령, 울진 망양정 등을 두루 거쳐 평해에 이르는 대로였다. 전체 길이 920리의 관동대로 가운데 삼척 구간 60(24)수로부인길인데 이 길은 동해의 쪽빛 바다와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명재상이었던 황희의 자취도 느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널찍한 임도로 들어서자 이정표(월천1리 방면 종점 2.47/ 월천리 정수레미콘방면)와 함께 삼척 수로부인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수로부인은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강릉태수를 역임한 순정공의 아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수로부인전에는 두 개의 설화가 전해온다. 아득한 높이의 바위 벼랑 위에 핀 붉은 철쭉꽃을 꺾어다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어느 촌로(村老)가 부른 헌화가(獻花歌)’와 용()에게 끌려간 수로부인을 구하면서 백성들이 부른 해가(海歌)’가 바로 그것이다. 수로부인은 워낙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워서 그 뒤로도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들에게 잡혔다가 풀려나곤 했단다. 당시 강릉으로 향하던 순정공과 수로부인의 실제 노정(路程)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해안의 남북을 가로지른 교통로였던 관동대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노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관동대로 삼척 구간이 수로부인길이라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과는 달리 수로부인길은 매력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둘레길의 하나였다. 산림이 우거져 호젓하게 산림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망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거기다 빗속에서 걷다보니 최악이 되어버렸다.



임도를 따라 걷다 해파랑길 표식이 붙어있는 장승이 보이기에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능선을 따라 진행하는데 길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탐방객이 드물었던 탓인지 잡목에 길을 내주어버린 상태로 변한 것이다. 거기다 그 나무들이 빗물에 젖기까지 해 걷는 게 여간 사납지가 않다.



이 구간에서는 국시뎅이(돌서낭을 가리키는 이 지역 방언)’도 만날 수 있다. 옛길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행로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돌을 주워 침을 뱉고 던져 쌓은 돌무더기인데 일명 구시라고도 하며 서낭당과 같은 기능을 가진 신령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당집은 보이지 않았다. 옛말에 당산림 가운데 참나무가 참말을 해서 엄나무가 엄두를 내고 자작나무가 제작을 해 당집을 지었다고 했는데 이곳 나무들은 조금 게을렀나 보다.



산길이 끝나면 월천1이다. 산길로 들어선지 30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월천리(月川里)의 본래 월라(月羅)였다고 한다. 나중에 마을 동쪽에 월봉(月峯)이 있는가 하면 가곡천(柯谷川) 하구에 위치한다고 해서 월천(月川)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마을회관에 이르자 오른편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 29m에 나무 둘레가 4.5m에 이르는 거목으로 나이가 500살도 더 되었단다. 소나무 아래에 당집까지 지어져 있는 걸로 보아 마을의 보호수 역할을 톡톡히 해온 모양이다.




마을 앞에서 개울을 따라 내려가자 가곡천 하류에 지어놓은 한국가스공사의 LNG생산기지가 나온다.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시설물은 LNG 저장탱크인데 도시가스 수요가 적은 계절에 LNG를 저장하였다가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동절기에 LNG를 보충해서 수요와 공급 간 불균형을 해소시키는 완충 역할을 한단다.



LNG 생산기지 앞에는 솔섬이 있다. 가곡천이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모래톱인데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고 해서 솔섬이라 불린단다. ‘속섬이라고도 불린단다. 아마도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솔섬2007년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가 한국에 와서 찍은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솔섬은 그저 그렇고 그런 작은 모래톱에 불과할 따름이다. 배경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LNG기지 탓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빗줄기로 인해 물 위에 섬을 띄워보는 사진작가들의 단골 기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게고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솔섬은 삼척 솔섬, 부안 솔섬, 태안 솔섬, 변산 솔섬, 순천 와온 솔섬, 장흥 소등섬 등 멋진 솔섬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곳 솔섬이 최고로 알려졌는데 LNG생산기지 건설로 인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게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첨부된 사진은 몽중루님의 것을 사용했다)



이젠 가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둑 아래 둔치는 공원을 만들려는지 공사가 한창이다. 아니 태풍 '미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치유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7번 국도의 다리 아래를 지나자 월천교가 나온다. 가곡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한쪽 가장자리에 보도가 만들어져 있다. 참고로 가곡천은 응봉산(1,267m) 남쪽 기슭과 삿갓봉(1,119m) 북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태백산맥 협곡을 따라 흐르다가 가곡면 풍곡리에서 두 줄기가 합류한 후 가곡면을 거쳐 원덕읍(월천리)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43.5의 하천이다. 옛날에는 하천 하류에 있는 옥원리의 명칭을 따라 옥원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상류에 위치한 용소골은 폭포와 소()가 협곡을 따라 수없이 펼쳐져 절경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월천교의 상류 쪽에 다리 하나가 더 놓여있다. 징검다리인데 똑 같은 규격으로 만든 게 눈에 좀 거슬리지만 동심(童心)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만한 다리도 없겠다. 하지만 태풍 미탁은 이곳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징검다리의 1/4 정도가 떠내려가 버렸다.



날머리는 호산 시외버스터미널

다리를 건너면 호산삼거리호산교차로가 연이어 나오고, 날머리인 시외버스터미널7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자마자 만나게 된다. 월천1리에서 30분쯤 되는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동안에 대략 11정도를 걸었다. 빗줄기 속을 걷느라 한눈을 팔지 않았던 게 원인이지 싶다. ! 이곳으로 오는 도로변에 '관찰사 한익상 영세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조선 헌종2년에 기근이 심하자 백성을 구호한 선정을 베푼 덕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旣停魚貢(세금으로 고기를 이미 다 바친 것을 중지하고), 又旣還錢(또 세금도 감하고 돈도 되돌려 줌으로), 海陸俱安(어촌과 농촌이 함께 다 평안하다,) 萬姓銘心(만백성들이 마음 깊이 새겨 오래도록 잊지 않는다.)



해파랑길 29코스

 

여행일 : ‘19. 9. 21()

소재지 : 강원 삼척군 원덕읍과 근덕면 일원

여행코스 : 임원항입구수로부인 헌화공원임원초등학교해신당공원장호항용화레일바이크역(소요시간 : 14.72/ 4시간) 본래 코스는 호산버스터미널에서 임원항입구와 아칠목재를 거쳐 용화레일바이크역에 이르는 18.3구간이다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닷길이 아니라 산길을 걷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눈에 담아둘만한 풍경이 드물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이 안타까웠던지 코스의 절반 정도에 변화가 주어졌다. 원래 산길을 지나도록 되어있던 중간지점인 임원리까지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옛 7번 국도를 이용 임원항을 경유하도록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임원항을 제외하면 바닷가는 밟아보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는 아예 해파랑길을 외면하기로 했다. 무미건조한 임원항까지의 구간을 아예 생략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구간도 산길이 아닌 바닷길을 따랐다. 덕분에 수로부인 헌화공원해신당공원이라는 명품 볼거리를 만날 수 있었고, 거기다 더해 월미도라는 절경까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들머리는 호산버스터미널(삼척시 원덕읍 호산리 193-6)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영덕 방면으로 내려오면 호산교차로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호산버스터미널이 해파랑길 29코스의 출발지이다.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터미널 앞 삼거리에서 호산1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실제 들머리는 임원항 입구(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1208-114)

우리부부는 산악회버스를 이용 임원항 입구까지 이동했다. 출발지에서 8.6km가 떨어진 이곳 임원항까지의 구간은 볼거리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도 없는 곳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것보단 해파랑길에서 잠시 벗어나 수로부인 헌화공원이란 명품공원을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다리를 건너 임원시가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300m 전방에 수로부인 헌화공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가 있음을 알려주는 조형물이 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임원항과 임원천 사이에는 횟집이 늘어서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꼭 들러야 할 장소이다. 이곳에서 회를 떠갖고 다니다가 트레킹 도중에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경관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떠온 회를 안주삼아 반주를 곁들인다면 또 다른 낭만이 아니겠는가.



▼ ㎏ 단위로 파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이곳은 마리나 접시 단위로 팔고 있어 계량단위에 익숙해진 우리를 다소 헷갈리게 만든다. 가격도 조금씩 다르기에 보다 더 저렴한 집을 찾다보니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 집인 연안부두 횟집(031-573-0392, 010-6767-5427)’까지 와버렸다. 이 집이 가장 친절하면서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히라시와 쥐치 그리고 오징어를 섞어서 4만원어치를 시켰는데 친구 부부를 포함한 일행 4명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 두 명을 더 불렀는데도 실컷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이 넉넉했다.



횟집에서 돌아 나올 때는 임원항을 따라 걸었다. 긴 방파제에 둘러싸인 항구에는 꽤 많은 어선들이 정박해있다. 하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그러니 위판(委販)되는 어획량도 많을 게 당연하다. 싸고 푸짐한 횟감을 찾아 이곳으로 오는 여행객들의 숫자가 날로 느는 이유일 것이다. 횟감을 직접 낚아볼 수도 있단다. 임원항의 방파제가 돔 낚시터로 유명하다는 소문이 있으니 사실일 것이다. 임원항은 해돋이 전망이 아름다운 포구로 동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다른 한편으로 이곳 임원항은 시멘트 적출이 주 기능이었다고 한다. 1995년 연안항에서 해제되고 1995'1종 어항' 으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에는 국가어항으로 항종 명칭이 변경되었다.




항구를 빠져나와 임원 시가지를 잠시 걷는다. 시골 마을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하긴 원덕이 읍으로 승격된 1980년 이전만 해도 이곳에 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임원(臨院)이란 지명은 조선조 때 이곳에 있었던 만년원(萬年院)’이라는 여행자의 숙박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과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서 임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수로부인 헌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남화산정상의 탐방은 50m 높이의 엘리베이터을 타면서 시작된다. 남화산(141m)의 아랫자락이 매우 가파른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노약자들에게 공원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을 게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그런 약점을 단숨에 해결해버렸다.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관광지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고객 편의주의에 선 진정한 행정이 아니겠는가. 삼척시청 공무원들에게 찬사를 보내본다. ! 매표소 건너편 벽면에 공원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헌화가(獻花歌)’를 만화로 그려 설명해 놓았으니 탐방을 시작하기 전에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 옆의 수로부인 헌화공원 안내도도 함께 살펴보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자줏빛 구름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터널형의 다리는 유리벽으로 외부를 차단해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도록 했다. 유리벽으로 만들어 외부 조망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안정성에다 외부조망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그러니 관광객들의 시선이 여유로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들은 머리맡에 시판(詩板)이 매달려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권2에 실려 있는 향가(鄕歌 :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로서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다)헌화가(獻花歌)’이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목숨을 걸고 꽃까지 꺾어다 바친 걸 보면 그 부인 예뻐도 많이 예뻤나 보다.



고개를 돌려보니 임원항의 긴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 좁고 긴 모래사장은 임원해수욕장이고 저 멀리 보이는 원통형 구조물은 호산항 LNG생산기지다. 7번 국도가 미끈하게 달리는 모습도 보인다. 조금 전 구름다리를 지날 때는 임원항이 보이기도 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남화산의 중턱이다. 이후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산의 동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조금씩 오르는데 절반은 계단, 절반은 마대포장길 혹은 고무 카펫길이다. 길가에 만들어놓은 정자와 전망데크를 기웃거리다보니 산마루 흘러내린 곶의 가장자리에 올라앉은 수로부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언덕에 오르니 공원의 안내도와 함께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의 전문과 배경설화를 적어놓았다. 둘 모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향가(鄕歌)로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되어 부임해가던 중 일어났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사람인 순정공의 부인으로 절세미인이었다.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던 중 수로부인이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돌산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마침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꺾어다가 바치고, 가사를 지어 바친 것이 4구체 향가인 '헌화가'. 행렬이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는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갔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자 다시 수로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노래가 신라가요인 '해가'. 둘 모두 수로부인 때문에 일어난 것을 보면 그녀의 미모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 만큼 예뻤다는 얘기일 것이다.



부지가 26,870에 이르는 수로부인 헌화공원은 남화산의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수로부인조에 실려 있는 두 이야기를 모티브로 조성됐다. 이곳 남화산은 헌화가의 무대로 알려진다. 하지만 공원은 또 다른 이야기인 해가사(海歌詞)’를 보다 중점적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해룡을 타고 오는 수로부인상을 공원의 대표적 조형물로 삼은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해룡을 타고 지상으로 돌아온 수로부인 상은 공원의 상징이다. 천연오색 대리석으로 조각된 상은 높이가 10m도 넘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바다풍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높이 10.6m에 가로 15m, 세로 13m. 중량은 500t에 달한단다.



수로부인상의 뒤편에는 전망대를 배치했다. 임원항과 호산쪽으로 이어지는 바닷가가 시야에 들오지만 날씨 때문에 화질이 별로여서 게재는 생략했다.



이젠 정상으로 향할 차례이다. 산마루에는 헌화정정자가 쉼터이자 전망대로 자리한다. 정자 서쪽에 해돋이 터널과 소망의 탑, 바람의 창 등의 조형물이 산책로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가하면 등대 모양의 화장실도 보인다. 정자의 동쪽에는 바다와 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cafe ()’가 있다. 지난 7월에 준공된 카페는 노인행복일자리사업으로 운영되는데 삼척시청에 1호가 있고 이곳은 2호란다. 1호점에 12명의 어르신들이 바리스타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곳은 1호점보다도 더 많은 어르신들이 참여한다니 이보다 더 바람직한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100세 시대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아무튼 삼척시청 공무원들 다시 한 번 파이팅!’이다.



카페 오른쪽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울릉도까지 거리는 약 137, 동해상에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지점이라 한다. 날이 극도로 맑거나 3대가 덕을 쌓으면 육안으로도 울릉도를 볼 수 있단다. 실제로 보았다는 기록도 있단다. 그런데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야외 망원경을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쌓은 덕이 조금 부족했던가 보다. 그러니 나라도 좀 더 쌓아야 할까 보다. 그래야 내 자손들이라도 울릉도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헌화정의 옆에는 순정공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해가사(海歌詞)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순정공 일행이 임원을 떠난 이틀 뒤 삼척의 북쪽인 증산 바다에 도착했을 때 수로부인은 용에게 납치된다. 이에 백성들을 모아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용이 부인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때 부른 노래가 해가(海歌)’.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큰 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바치지 않는다면/ 그물을 넣어 사로잡아 구워 먹으리라.’



그 옆에는 해학적인 모습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도 세워놓았다. !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는 막대로 땅을 두드리 있는 사람들도 보았었다. 장군도 병사도, 밭 갈던 농부와 고기 잡던 어부와 물질하던 해녀도, 마을의 아낙과 청년과 소녀도, 지나가던 당나라 상인과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선(神仙)조차도 모두 쿵쿵 땅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수로부인이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명색이 관광지로 꾸몄는데 포토죤(photo zone)’이라고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배경이 되어줄 인물은 당연히 수로부인이다. 그런데 수로부인의 미모에 놀라버렸는지 카메라에 잡힌 집사람의 얼굴이 흐리게 나와 있다. 아니 빗속에서 찍다보니 그랬겠지만 나에게는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열 명의 수로부인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임원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해파랑길을 따른다. 임원천을 오른편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동해안자전거길의 표식인 파란색 선을 따라 잠시 걷자 원덕읍 임원출장소임원파출소가 나온다. ‘원덕면이었던 시절만 해도 면사무소였으나 읍으로 승격되면서 본청을 호산으로 떠나보내고 이젠 출장소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다.



길가에 낭만가도(romantic Road of Korea)’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강원도에서 상표등록까지 한 국내 유일의 테마관광 도로인데,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이 길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에서 최남단인 삼척까지 이어지는데 길이는 239.5km. 국도와 지방도가 섞여 있는 낭만가도는 해안선을 따라 시원하게 펼쳐지는 백사장과 푸른 바다를 항상 데리고 다닌다. 시작과 끝 지점인 고성, 삼척뿐 아니라, 중간중간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을 지나며 크고 작은 해안도시를 즐길 수 있어 여행의 목적이 되기에 충분하다.



임원삼거리를 출발한지 10분쯤 지나자 임원초등학교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학교 옆의 임원교다리를 건너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전신주에 검봉산자연휴양림이 3전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정표가 매달려 있으니 참조한다. 하지만 동해안자전거길은 계속해서 주도로를 따른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르기로 했다. 내륙으로 파고드는 무미건조한 해파랑길보다는 바닷가로 빠져나가는 자전거길이 훨씬 더 매력적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관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월미도에다 볼거리가 넘치는 해신당공원과 장호항까지 둘러볼 수 있는 데야 어디로 갈지를 놓고 망설일 필요조차 없지 않겠는가.



이후부터는 지루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볼거리라곤 일절 없는 무미건조한 길이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표현은 안 했을망정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아까 임원초등학교 근처에서 해파랑길과 헤어져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두었는데 그게 주도로(main road)였다는 것까지는 몰랐던 게 원인이었다. 한참을 더 걸어도 바다가 보이지 않자 길을 잘못 찾아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솔솔 돋아났던 것이다. 친구의 핸드폰 앱을 살펴보니 이 또한 조금 이상하다. 앱에 깔려있는 해파랑길을 벗어나다 보니 핸드폰도 어리둥절 했나보다. 그나저나 리딩을 하고 있는 이대장을 원망하기까지 했으니 무지의 소치였다 하겠다. 비록 속으로 투덜대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핸드폰 앱에다 해신당을 입력해놓고 다시 길을 떠난다. 임원재를 넘어서니 국도 7호선이 나온다. 임원초등학교를 지난 지 40분만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해신당공원의 이정표가 제대로 왔다고 손짓을 보내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신남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오른편에서 갈남마을(葛南里)이 얼굴을 내민다. 갯바위가 많아 예로부터 미역과 우뭇가사리 등의 해초류와 이를 먹고 자라는 전복과 성게, 해삼 등이 많이 잡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 전복가공공장이 세워졌는가 하면, 1960~70년대에는 제주도의 해녀 50~60명과 머구리 잠수부 10여 명이 이곳으로 와 물질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해신당 공원의 주인공인 애랑이도 해초를 따던 처녀였단다. 참고로 갈남(葛南이란 지명은 갈산(葛山)마을과 신남(薪南)마을이 합해진 이름이다. 바닷가의 야트막한 해산(海山, 또는 일산)’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갈남1리인 갈산마을, 남쪽에는 갈남2리인 신남마을이 있다. 그렇다면 눈에 들어오는 저 마을은 신남마을이 분명하다.



잠시 후 신남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이른다. 신남마을로 연결되는 오른편에는 홍살문을 닮은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 머리맡에 해신당 공원·‘어촌민속전시관이라는 지명과 함께 화살표식을 적어 넣어 이정표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으니 다목적 문이라 하겠다. 그나저나 이곳에서도 길 찾기가 요구된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해신당공원의 관람은 가능하지만 보다 알차게 구경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동선(動線)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이 경우 해신당과 어촌민속전시관, 해안산책로, 해신당공원 등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코스를 왕복해야 하는 시간 낭비까지도 줄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함께 걷고 있던 친구가 영동지역에서 기관장으로 근무를 했다는 이력을 들먹이며 우겨댔기 때문이다. ‘처삼촌 벌초 하듯이지나갔던 그 친구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는가. 아무튼 20여분을 더 오르막길과 씨름을 하고나서야 해신당공원의 제2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 앞에는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파고라 쉼터와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입장권(3천원/)을 구입해 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공원 입구에 공원안내도와 함께 해신당과 애바위전설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해신당공원은 애바위 전설을 테마로 삼은 공원이다. 400년 전부터 처녀혼을 달래기 위해 전해져온 `남근(男根) 바치기' 행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92규모의 공원에는 해신당과 남근조각공원, 어촌민속전시관, 습지생태공원, 전망대, 산책로 등이 들어서 있다. 참고로 신남마을의 남근목은 1999년 죽서제(현재 삼척정월대보름제)에서 남근목 깎기대회라는 이색행사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길이 3크기의 대형 남근목 깎기대회는 국내 언론은 물론 AP, 로이터, 월스트리트저널 등 유명 외신들까지 현장 취재에 나설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큰 반향만큼 '성의 상품화' 등 반대 목소리도 거셌다. 그 이후 삼척시는 대형남근깎기행사를 중단해야 했고, 조성 계획이던 남근공원 이름도 '해신당'(海神堂)공원으로 바꿔야만 했다. 중단됐던 대형남근깎기대회는 2002년 삼척세계동굴박람회 부대행사로 다시 열렸다. 그리고 박람회가 끝난 후 작품들을 해신당공원으로 옮겨졌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크기의 남근(男根) 수십 개가 기립해 있다. 대부분 남근조각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작품들이라 한다. 빗줄기가 제법 거센데도 탐방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여성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커다란 남근이 코앞에 있는데도 멋쩍어하는 여성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즐겁기만 한 모양이다. 참고로 해신당공원은 지금 보고 있는 남근조형물들 외에도 습지생태공원과 남근 모양으로 만든 12지 신상, 전통 어가(漁家)인 덕배의 집과 애랑의 집, 그녀와 그의 동상, 바다 품기 전망대, 우리나라 어업 변천사와 국내외 성 민속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어촌민속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원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남근들이 만들어져 있다. 양 다리 사이에 달려있는 것은 기본,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안에다 갈무리하고 있는 거대한 양물(陽物)도 보인다. 의자의 팔걸이가 된 양물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악어로 변형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양물 자체로 남아있는 조형물이라 하겠다. 독야청청(獨也靑靑), 잘생긴 자신의 허우대를 마음껏 으스대고 있다. 아무튼 해신당 공원은 이채로운 관광지다. 옛 부터 전해오는 남근숭배풍습과 지역에 전래되는 전설을 관광에 접목했다. 외설적인 느낌도 다소 들지만 예술과 역사 그리고 전통이 한데 어울린 독특한 문화가 형성돼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이는 그 지방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설화나 전설을 소중하게 보존해온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까지도 남근을 형상화 했다. 십이지신상을 포함한 모든 조형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performance)는 하나같다. 모두가 자신의 남근(男根)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거리낌 없이 남에게 내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해를 따라 각기 를 가지고 있다. 이 띠는 열두 가지 동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십이지신이라고 한다. ‘12’라는 숫자는 112달을 의미하는 부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시간과 방위의 개념이 결합되고 나아가 열두 가지 동물과 결합하면서 십이지간(十二支干)이 완성된다.



옛날 집도 복원해 놓았다. ‘애바위 전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애랑이 살던 집이란다. 조금 더 아래에는 다른 한 축인 덕배의 집도 복원되어 있다. 애바위의 전설은 대강 이렇다. 옛날 이곳 신남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덕배 총각과 애랑 처녀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애랑은 해초를 뜯으러 바다 가운데 돌섬(애바위)으로 나갔다. 덕배는 애랑을 데려다주고 가며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정오를 넘어서자 잔잔했던 바다가 갑자기 사나워졌고 애랑은 그만 사나운 파도에 휩쓸려 죽고 만다. 이후 마을 어부의 그물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사고도 거듭되었다. 하루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에 벌컥 화가 난 한 어부가 뱃전에 서서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었다. 그러자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풍어였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나무로 실물모양의 남근을 깎아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됐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음력 115)과 음력 10월 첫 오일(午日)에 남근을 깎아 매달아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단다.



애랑의 집 건너편에는 애랑의 동상도 만들어져 있다. 어딘가를 향한 간절한 손짓이 애절하기 까지 하다. 데려오기로 약속한 덕배를 향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무튼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남근 조각공원에서 몇 되지 않는 조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웃음바이러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닷가 작은 언덕배기에는 아담한 해신당(海神堂)이 들어섰다. 해송들에 둘러싸인 신당의 내부에는 처녀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녀가 바로 애랑이다. 애랑의 초상 옆에 나무로 만든 남근이 굴비처럼 새끼줄에 엮여서 매달려 있다. 제단에 올려진 술은 벌떡주란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10월 첫 번째 오()일에 남성의 성기를 본딴 나무를 제작해 받치며 동제(洞祭)를 지낸단다. ()일은 12간지 중 성기가 가장 크다는 말()의 날이다. ! 덕배가 애랑의 꿈을 꾼 뒤 해풍을 맞고 자란 마을의 오래된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입구의 웅장한 향나무가 500년을 살았다 하니 그럴 듯도 하다.(사진은 남의 것을 빌려왔다)



2매표소로 되돌아와 다시 트레킹을 잇는다. ! 아까 임원항에서 떠온 생선회는 매표소 앞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에서 먹었다. 맛있는 안주가 넘치는데 어찌 반주라고 없을까. 그게 좀 과했던가 보다. 이후부턴 얼큰하게 취해 트레킹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갈남항이 나온다. 아니 정확히는 갈남1리인 갈산마을이다. 이 마을은 월미도라 이름붙은 솔섬과 그 앞 갯바위들의 풍경이 저절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동해 일출의 명소 중 한 곳이자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덕분에 최근에는 멀리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점차 늘고 있단다. 다른 한편으로 저 마을은 작년부터 자립형 관광어촌마을로 조성되고 있단다. 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월미도를 중심으로 해안의 절경과 해안 동굴, 마을박물관, 떼배, 서낭당 등 마을 자원을 주민 소득과 연계하는 사업이란다.



갈산마을의 보물섬인 월미도(越美島)’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월미도의 아름다움은 달이 뜰 때 절정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 때의 풍경을 이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월미도는 밤도 아름답지만 낮달이 뜰 때는 더 황홀하단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멋진 풍경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이곳을 배경으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된 이유일 것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갈남항에서 차지하는 월미도의 비중을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월미도는 또 달라 보인다. 커다란 물고기가 입을 쩍 벌리고 먹이를 노리는데 그 뒤를 작은 물고기들이 쪼르르 따르는 모양새이다. 오늘은 17호 태풍인 타파가 우리나라로 들어온다는 날, 하지만 여기는 빗줄기만 거셀 뿐 바람은 아직까지 일지 않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걷기는 좋았지만 덕분에 눈요깃거리는 놓치고 말았다. 파도가 몰아치면 점점이 흩어져 있던 바위들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가 이내 검푸른 바닷속으로 숨어드는 멋진 동영상을 만들어낼 텐데 말이다.




고개를 넘자 장호항에 이른다. 갈남항에서 15분 거리인데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등처럼 생긴 부분에 위치하며, ()의 형상이 수컷 오리인 장오리와 흡사해서 장울리, 장오리라고 부르다가 장호리가 되었단다.



나폴리형 해안선을 끼고 있다는 장호항은 국가어항이다. 그래선지 정박되어 있는 배들이 꽤 많다. 하지만 작은 고깃배가 대부분이다. 연안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장호항은 삼척의 어항들 가운데 낚싯배가 가장 많은 곳이란다. 그래서 가자미나 대구 지깅((jigging )낚시를 즐기려는 낚시꾼들로 항상 붐빈단다. 새벽 무렵 경매에 바쁜 어판장 풍경도 볼거리 중 하나란다. 이때 싱싱한 해산물도 구입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장호항의 왼편에는 활처럼 크게 휘어진 장호해수욕장이 터를 잡았다. 이 일대는 동그랗고 새하얀 해안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최근에는 '동양의 나폴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특히 2017년 개장한 장호 비치캠핑장은 스파 컨테이너 하우스 4동과 냉난방기와 화장실·씽크대·침대 등을 갖춘 유럽식 카라반 9, 오토 캠핑장 17, 소나무 숲에 조성된 일반 야영장 17면을 갖추고 있단다. 관리동과 샤워장, 화장실, 취사장, 편의점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음은 물론이다.



탐방로는 다시 고개를 넘는다. 걷다가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장호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바다 위에는 삼척의 자랑인 해상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용화리에서부터 장호리까지 바다를 건너 운행하는 해상 케이블카는 중간 철탑이 없어 시원한 전망에서 자연 절경과 청정해변을 방해물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고개를 넘자 해안선이 아름답고 바닷물이 깨끗하기로 소문난 용화해수욕장이 있는 용화리(龍化里)가 나온다. 여름철만 되면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시사철 손님맞이에 분주하단다. 삼척 해양케이블카가 이곳에서 출발하는가 하면 궁촌~용화 사이 5.4의 옛 철도부지에는 복선 해양 레일바이크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해안선을 따라가는 레일바이크이니 손님이 몰려들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날머리는 레일바이크 용화정거장입구

마을로 들어서자 해양레일바이크 용화정거장의 입구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나온다. 해파랑길 29코스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 종료지점임을 알리는 해파랑길 스탬프보관함은 조금 떨어진 곳에 만들어져 있다지만 찾아보지는 않았다. 아니 얼큰하게 술에 취해 찾아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는 게 옳은 얘기일 것이다. 또한 부근에 있다는 용화해수욕장도 가보지를 못했다. 초승달 모양 해변과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 황금색 갯바위로 유명하다니 30코스를 시작하면서 꼭 들러봐야겠다. 거기다 시간이라도 조금 남는다면 스쿠버다이빙이나 투명카누, 스노클링 등의 해양레포츠도 즐겨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14.724시간에 걸쳐 걸었다. 수로부인 헌화공원과 해신당공원을 둘러보느라 거리가 3정도 늘어났을 것이다.


해파랑길 27코스

 

여행일 : ‘19. 8. 17()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죽변면과 북면 일원

여행코스 : 죽변항 입구(2.1km)죽변등대(6.6km)옥계서원유허비각(2.7km)부구삼거리(소요시간 : 11.4,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볼거리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특징도 있다. 출발지에 있는 죽변등대까지 없었더라면 예쁜 사진 한 장 얻지 못할 정도로 구간 전체가 밋밋하기 때문이다. 탐방로 대부분이 내륙을 관통하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르도록 되어 있는데도 제대로 된 보행로가 없다는 단점도 있다. 지나다니는 차량들이 모두 쌩쌩 달리는데다 그 숫자까지 많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생략해도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이때는 죽변등대를 26코스에 포함시키면 되니 경관 좋은 곳을 놓칠 일도 없다.


 

들머리는 죽변 시외버스정류장(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330-13)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영덕 방면으로 내려오면 죽변교차로(죽변면 봉평리)가 나온다. 국도를 빠져나와 917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해안가로 나오면 잠시 후 죽변항의 입구에 있는 시외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정류장의 옆 전신주 아래에 해파랑길 27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죽변항(竹邊港)을 향해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곳 죽변항 일대는 볼거리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먹거리 역시 풍부한 울진의 대표적 관광지란다. 고을의 역사도 아주 오래로 거슬러 올라간단다. 신라 법흥왕(法興王 : 牟卽智寐錦王) 때 이미 막강한 세력 집단이 웅거(雄據)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번 26코스를 답사하면서 살펴봤던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가 전하는 내용이니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옛 영화를 떠올릴만한 흔적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도로변에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는 범상치 않은 향나무가 눈길을 끈다. 울진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은 향나무인데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듯 몸을 뒤틀며 하늘로 끌어올린 몸매가 마치 우락부락한 인왕상을 보는 듯하다. 수령이 500년을 훌쩍 넘겼는가 하면 키도 13.5m나 되는 이 나무는 민속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해서 천연기념물(158)로 지정되었다. 그래선지 동네 사람들은 이 향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받들면서 옆에다 성황사(城隍祠)를 지었다. 하지만 이 나무의 고향은 울진이 아니란다. 우산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살다가 동해의 용왕에게 빌어 육지로 나가는 것을 허락 받았고, 망망대해 파도에 떠밀려 닿은 곳이 지금의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라는 것이다.



향나무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죽변항(竹邊港)이 나온다. 후포항과 더불어 울진군의 주요 어업기지이다. 그래선지 항구 주변에 크고 작은 수산물 가공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오징어와 꽁치, 가자미, 대게 등 이곳으로 들어오는 어획량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아래 사진의 왼편 건물은 죽변 어판장이다. 가까이 울진 앞 바다와 멀리 독도 해역까지 출어하여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새벽에 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때를 맞춰 찾았더라면 경매꾼들과 상인들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탐방로는 항구를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심심찮게 횟집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재래시장에 이어 수산물시장도 나온다. 그런데 대게라는 낱말을 품지 않은 간판이 거의 없다. 하긴 대게가 집하(集荷)되는 곳으로 후포항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살이 올라 속이 꽉 찬 대게를 즐기는 축제가 해마다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제철이 아니니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신 활어회와 어패류를 매우 착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달 26코스를 마치면서 이곳을 찾은 우리 부부도 역시 광어와 오징어 회로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항구는 오징어 낚싯배가 대부분이다. 지난달엔가 이곳 죽변항을 먹여 살리던 오징어가 되돌아왔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는 죽변항 연근해와 울릉도 연근해에 오징어 어장이 대규모로 형성되면서 죽변항이 활기를 되찾았다고 전했었다. 오징어가 최 정점을 이룰 때(6.25)는 오전 한나절 동안만 해도 오징어 활어 129000마리에 선어 2080박스가 죽변수협 위판을 통해 도시로 팔려 나갔다면서 말이다. 금액으로 따져도 2억 원어치나 된다니 대단한 어획량이라 하겠다.



항구를 벗어나자 길이 답답해진다. 높다랗게 쌓아올린 테트라포드가 바다 쪽 경관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테트라포드가 끝나는 곳에서 다시 바다와 만난다. 출발지에서 23분쯤 떨어진 지점이다. 바위절벽과 바다가 얼굴을 맞댄 곳에는 데크로드를 만들어 놓았다. 암벽을 옆구리에 끼고 바다 위를 걷는 셈이다. 덕분에 눈이 호사를 누린다.




바다에는 갯바위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자신의 모양새를 바꾸어가는 바위들이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다. 갯바위들 뒤로는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는 오래 전 세미나 때문에 들렀던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보던 지중해를 쏙 빼다 닮았다.





200m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계단으로 변해 산자락을 파고든다. 다리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물길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 누군가 이 일대를 용추곶(龍湫串)이라 했었다. 용이 노닐면서 승천을 꿈꾸다가 그 꿈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 현대에 찍은 항공사진에서도 용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 나타난다면서 선현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표했었다. 이는 이 일대에 용소(龍沼)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정자를 거쳐 마을로 연결된다. 등대는 물론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향긋한 솔향이 코끝을 스쳐가는 멋진 길이다. 굵직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소나무숲길이 끝나면 이번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바톤(baton)을 이어 받는다. ! 이 길을 신라 때 군인들이 오가던 길이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신라 진흥왕이 현재 등대가 있는 언덕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수군 2천여 명이 주둔하는 큰 토성을 쌓았다면서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 길이 지금은 해파랑길로 변해있다는 얘기가 된다.



대숲 길 중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일망무제(一望無際). 비취빛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며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진 현대인들에게 호연지기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어 준다.




울창한 대밭을 지나자 아름답고 하얀 등대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림엽서처럼 서있다. ‘죽변등대(경상북도 기념물 제154)’인데 1910년에 점등되었다니 100살도 훨씬 넘겼다. 이 등대는 동해를 누비는 모든 배들의 길라잡이가 된 근대문화유산이다. 그동안 어민들의 고달픈 애환을 어루만져왔으며 아직도 우직하게 죽변항을 드나드는 배들을 지킨다. 대한제국 시절 착공된 죽변등대는 등탑 내부 1층 천장에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있었단다. 그러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 조형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대문을 빠져나오자 적당한 크기의 광장이 길손을 맞는다. 바닥과 축대를 온통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주민 참여형 한뼘 정원이란다. ‘용의 꿈길이라고 적힌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승천을 기다리며 용이 머물던 용소(龍沼)가 요 아래에 있는데 가뭄이 심해질 때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한단다. 그런 연유로 용추곶(龍湫串)이란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니 기억해두자.




잠시 후 빨간 지붕이 쪽빛 바다와 어우러지는 아담한 집 한 채가 나타난다지중해의 해변에서나 볼 법한 외모를 지닌 이 집은 2004년 방영된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기잡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제와 그들에게 다가온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드라마인데. 이덕화와 송윤아가 출연해 시청자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죽변항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재촉하는 명소가 됐다.



어부의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주변 풍광을 눈에 담아본다.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어부의 집은 울창한 대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다. 그 아래는 비취빛 푸른 동해바다. 청아한 바닷바람의 연주가 대나무 숲 속에 선듯 귓불을 타고 흐르며 속삭인다.



세트장 일대는 대나무 숲에 파묻혀 있는 모양새이다.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죽변(竹邊)’이란 지명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라 해서 죽빈(竹頻)’이라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죽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의 대나무는 우리가 늘 보아오던 대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키가 작고 얇은 소죽(소릿대)인데 선조들은 이 나무로 활을 만들어 왜적으로부터 죽변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어부의 집을 한 바퀴 돌다가 발걸음을 멈춘다. 잘게 부서지는 파도가 예쁜 하트 모양의 해안선을 만들어내고 있어서다. KBS-2TV생생 정보통에도 소개된 바 있는 저 풍경을 보기 위해 찾는 연인들의 숫자가 만만찮다고 한다.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는 징표로 삼기 위해서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곳을 연인들이 함께 거닐면 반드시 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까지 내려온다니 어찌 찾지 않고 배기겠는가. 혹시라도 사랑이 영원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연인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반드시 이곳으로 찾아와야 할 이유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도로 바닥에 그려진 파란색 선(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을 따르면 된다. 해파랑길이 버리고 해안길을 따를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어부의 집에서 하트해안으로 내려선 다음 해안길을 따르면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바닷가를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부부는 가다가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는 카페 주인의 경고성 조언에 넘어가 바닷길로 들어서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삼거리 근처에서 하트해변이 또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하트모양이 아까 어부의 집에서 보던 때보다 더 또렷하게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까는 물결무늬가 하트였는데 이번에는 해안선의 모양까지도 하트를 닮아있는 것이다. ! 어떤 이들은 더 나은 사진을 원한다면 죽변항로표지관리소 옥상으로 가라고 했다. 하트의 꼭지에 연인을 남겨둔 채이다. 드라마 세트장에서 찍은 사진보다 하트 모양이 아주 확실하게 그려지니 사랑의 맹세가 영원히 봉인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단 옥상에 오르려면 직원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군부대가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이고 해파랑길은 왼편이다. 우리 부부를 포함한 일행 몇 명은 이곳에서 하늘색 선이 그어진 자전거길을 따르기로 했다. 운영진으로부터 바닷가로 길이 나있다는 정보를 들었던 게 원인인데 이는 틀린 정보였다. 바닷가는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은 채 마을길만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파랑길보다 한참이나 에둘러 갔을 뿐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3분쯤 더 걸었을까 괴상하게 생긴 집이 보이는가 싶더니 죽변3마을회관이 나온다. 자전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아예 골목길로 들어서버린다. 가끔은 담 너머로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정겨운 길이다.



마을 안길을 통과해 언덕에 오르자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를 갖춘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정자와 벤치를 함께 만들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잠시 고개를 내밀었던 동해바다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한다. 그게 아쉽다면 정자에라도 올라 볼 일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울진의 바다는 도통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짙푸른 청람빛이다. 온몸이 금세 푸른 물에 물들 듯한 바다는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명징하며 매혹적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죽변 중·고등학교가 나온다. 시골 면소재지인데도 고등학교까지 있다는 게 놀랍다. 3층짜리 교사(校舍)까지 갖춘 걸로 보아 학생들의 숫자도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학교를 지나자마자 도로에 내려선다. 죽변면사무소에서 시작되는 죽변북로인데 이 길은 후정리에 있는 환동해 산업연구원으로 연결된다. 도로에 내려서서 4분 정도 진행하면 죽변도서관이 나오니 참조한다.



6분 정도 더 걷자 이번에는 후정해수욕장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송림과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수욕장인데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를 더 걸어가면서까지 들러볼만한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 이쯤에서라도 해파랑길을 찾았으면 좋았으련만 우린 그러지를 못했다. 덕분에 난 후정2에 있다는 장량수 급제패지(張良守 及第 牌旨)’ 제단비라는 볼거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국보 제 181호로 지정된 이 급제패지는 고려 희종 1(1205)에 진사시(進士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장량수에게 내린 과거시험 합격증이다. 장량수는 울진의 토성(土姓)인 장씨(張氏)로 울진부원군 문성공 장말익의 8대 손()이다.



계속해서 죽변북로를 따른다. 가로수가 없어 오뉴월 뙤약볕에 온 몸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악전고투가 계속된다. 트레킹 마니아들에게는 최악의 코스라 하겠다. 그렇게 17~8분쯤 걷자 후정교가 나온다. ‘환동해 산업연구원한국해양과학기술원(동해연구소)’의 들머리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 뚝방길을 탄다. 해파랑길로 합류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잘못된 판단이었다. 계속해서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을 따랐더라도 해파랑길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뚝방길을 따라 3~4분쯤 걸으니 해파랑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뚝방길을 탄다. 7번 국도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를 통과하자 잠시 후 길이 또 다시 나뉜다. 계속해서 뚝방길을 타야 하지만 이번에는 오른편에 보이는 고목2방향으로 진행한다. 뚝방길이 거친데다 해파랑길의 안내표식도 마을 방향에다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은 마을 앞에서 동해안종주 자전거길과 또 다시 만난다. 아까 후정교에서 계속해서 자전거길을 따랐더라면 조금 더 쉽게 이곳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탐방로는 바다를 떠난 지 이미 오래다. 한적한 농촌 마을길만 걷고 있으니 해파랑길의 정체성을 잃은 구간이라 하겠다.



고목2’ 근처 도로가에 황금송이라고 적힌 음식점 간판이 세워져 있다. 황금송이란 잎이 황금빛인 소나무를 일컫는데 돌연변이종이라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혹시라도 그런 나무가 눈에 띌까 좌우를 살펴보니 산릉이 온통 굵직한 소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울진은 금강송(金剛松)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워낙 깊은 산속에 자리한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에도 살아남았다. 옛 서면을 금강송면으로 개명을 했을 정도라면 이곳 울진의 금강송에 대한 애착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 금강송 숲에서 송이버섯이 자라는데 이게 또 송이버섯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로 친단다. 그런 장점을 그냥 지나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버스정류장에까지 송이버섯을 그려 넣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고목1(古木1)’ 표지석은 충절의 고장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조선 개국을 거부하고 고려왕조의 복벽(復辟)을 도모한 최복하(崔卜河) 선생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入鄕)한 곳이 바로 고목리이니 말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옥계서원 유허비(玉溪書院 遺墟碑)’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과 석당 김상정(石堂 金相定), 만은 전선(晩隱 田銑)을 함께 모신 서원이다. 원래 옥계서원은 울진읍 옥계동에 ()’를 세우고 우암 선생 진상(眞像)을 받들어 모셨으나 철폐되었다. 이후에 정조 1년에 죽변면에 중건되었고 순조 29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지만, 이후에도 이건 되고 중건되고 철거되고 낡아서 허물어지는 과정을 겪다가 2005년에서야 지금의 위치에 비각이 세워졌다고 한다.




탐방로(동해안종주 자전거길)는 파란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해 놓았으나 차량 통행이 잦은데다 속도까지 내어 달리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마음 놓고 걸으려면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아야 할 지경이다. 오뉴월 뙤약볕에 온몸을 노출시키는 것만 해도 죽을 맛인데 오가는 차량까지 조심까지 피해야하니 트레커(trekker)들에게는 최악의 코스라 하겠다.



위험스러울 뿐 눈요깃거리 하나 없는 지루한 도로를 30분 남짓 걷자 울진원자력발전소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수력원자력소속의 한울원자력본부1988년 울진 1·2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래 현재 총 6개의 원자로가 가동 중에 있다. 또한 새로 지은 신한울 1·2호는 상업운전을 앞두고 있다. 아주 오래전 정부 일을 하면서 출장 왔던 기억을 되살리며 발전소로 들어가 본다. 원자력발전소의 연료봉을 닮은 거대한 조형물을 지나자 원자력홍보관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홍보관은 3층 건물에 홍보관 1개동과 전시관 1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너지 역사 코너와 원자력 바로알기, 환경 방사능 관리 및 원자력 발전 수거물 코너 등 14개의 코너로 구성된 전시관에는 각종 모형(원자력발전소 내부 절개 모형, 원자력 발전소 전경 모형, 표준 원자력 발전 절개 모형, 태양열 발전소 모형, 풍력 발전소 모형, 지역 발전소 모형, 조력 발전 모형, 대형 터빈 모형)과 게임기, 영상물 등 첨단 기술의 다양한 체험용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홍보관의 외부는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여러 조형물과 잔디 광장, 산책로, 수목, 초화류, 파고라, 벤치 등이 설치되어 있다. 운동시설과 주차장,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지역 주민과 직원들의 휴식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자주 이용된단다.



발전소와 부구마을(富邱里)부구다리로 연결된다. 다리 건너의 부구마을은 생각보다 큰 동네이다. 북면의 소재지라는 점도 있겠지만 원자력발전소의 직원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부구삼거리(울진군 북면 부구리 149-9)

다리를 건너면 부구삼거리이다. 해파랑길 27코스가 종료되는 지점으로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삼거리에서 소방서로 가는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해파랑길 27코스의 공식적인 거리는 11.4이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2.66를 찍고 있다. 해파랑길이 아닌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을 따른 덕분에 1.2정도를 더 걸은 셈이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1시간에 4도 못 걸었으나 원자력발전소 홍보관과 죽변 등대공원을 둘러본 시간을 감안한다면 알맞은 속도로 걸었지 않나 싶다.



소방서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자 바닷가가 나온다. 응봉산에서 발원한 부구천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도 역시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트레킹을 하면서 흘린 땀도 씻을 겸 물놀이에 그만이다. 바닷물을 씻어내려면 소방서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겠지만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m, 해파랑길 울진구간은 총 5개 코스 67km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는 이 구간을 어떠한 기교나 화려함이 없는 선 굵은 동해안 트레일이라고 했다. 고독과 외로움을 벗 삼아 걷는 여행자에게 내면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는 구간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 등 그동안 걸어왔던 그 어느 구간보다도 해파랑길의 정체성을 많이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바닷길이 아닌 자동찻길을 따르는 일이 다른 구간보다 훨씬 더 많았다. 파란색이나 흰색 선을 그어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고 있지만 인도의 폭이 좁아 차량이 지나갈 때는 몸이 휘청거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나마 그 선이 지워져버린 곳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아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나 할까? 탐방로의 정비 또한 다른 구간에 훨씬 못 미쳤다. 기초이자 필수시설이라 할 수 있는 이정표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다른 표식들도 해파랑길 조성과정에서 만든 것들이 전부였다. 해파랑길에 대한 울진군의 노력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재정자립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요즘 지자체들은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게 대세이기에 하는 말이다.

해파랑길 26코스

 

여행일 : ‘19. 8. 3()

소재지 : 경북 영덕군 근남면과 울진읍, 죽변면 일원

여행코스 : 수산교(1.2km)울진 엑스포공원(3.8km)연호공원(6.8km)봉평해변(1.3km)죽변항 입구(소요시간 : 13.1, 3시간2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근남면 수산교에서 시작하는 26코스는 울진 시내를 통과하고 봉평해변을 지나 죽변항 바로 앞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거리는 대략 14km가 된다. 해파랑길 치고는 비교적 짧은 거리라 하겠다. 거기다 탐방로의 1/3 정도는 해안을 떠나 있다. 덕분에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더 없이 좋은 숲길을 걷게 된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시인묵객들이 반했을 정도의 아름다운 경관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잠깐의 눈요깃거리라 할 수 있는 엑스포공원과 은어다리, 연호공원, 봉평리 신라비 정도가 다라고 보면 되겠다.


 

들머리는 수산교(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21)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영주시로 들어오다 기흥교차로(영주시 기흥동)에서 36번 국도로 갈아타고 울진방면으로 가다보면 수산교차로(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78-4)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수산교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 다리의 남단이 해파랑길 26코스의 시점(始點)이다.




왕피천(王避川)을 가로지르는 수산교(守山橋)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수산리와 노음리를 연결시키는 다리로 1957년에 건설됐다. 그러다가 다리가 낡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87년 길이 282m(12.8m)의 규모로 다시 놓았다. 2차선 도로를 가운데에 놓고 양 옆에 인도를 따로 둔 모양새이다. 수산(守山)이란 다리 이름은 다리 북쪽에 있는 수산리(守山里)에서 따왔다. 옛날 왕피천이 범람할 때 강변의 산이 급류를 막아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면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다리 아래 왕피천(王避川)은 숫제 공원으로 바꿔놓았다. 왕피천이란 지명도에 걸맞는 대접이라 하겠다. 왕피천은 왕피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다. 옛날 실직국(悉直國) 왕이 피난 와서 잠깐 머문 적이 있다고 해서 왕피리라 불리게 되었는데,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도 같은 이유로 왕피천이라 불렀단다.



다리를 건너자 엑스포 공원이라 적힌 거대한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2005년에 열렸던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의 주행사장을 공원으로 조성해놓았는데, 이 공원은 강과 바다가 만든 20여만 평의 대지 위에 한국의 자연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 듯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걷자 엑스포 공원의 대문이 나타난다. 현수교(懸垂橋)를 형상화한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대문 앞에 선 집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양 손에 든 음료와 복숭아가 그 원인 일 것이다. 이곳이 고향이라는 일행분의 지우(知友)들이 공원 앞에서 음료수를 나누어 주시는가 하면, 또 다른 일행분은 집사람을 꼭 찍어 복숭아를 주셨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원의 너른 마당은 어린이들의 천국으로 변해있다. 지자체에서 물놀이장을 만들어 놓은 덕분이다. 조립식수영장과 에어슬라이드, 게임용수영장 등이 만들어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물총게임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만들어져 있다니 가족나들이 코스로 삼아도 되겠다.



공원 안에는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된 200년 이상의 금강송(金剛松) 1,0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보기 드문 생태공원이다. 거기에 사람들의 아름다운 손길이 보태졌다.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 곳곳에 아름다운 조형물들을 들여놓은 것이다. 자연을 찾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최고의 휴식처가 될 수도 있겠다.





하나의 아랫동에서 두 개의 줄기가 자라난 노송이 보인다. 안내판은 이 나무를 사랑소나무라고 적고 연리목(連理木)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연리목이라는 게 본디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라는 현상을 말한다. 하나의 뿌리에 줄기가 두 개인 이 나무와는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굳이 따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래나 위나 합쳐졌기는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민간에서는 연리목 아래에서 촛불을 켜놓고 빌거나 왼편으로 돌면 아들을, 오른편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구전이 전해진단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을 잡고 돌면 사랑의 보약이 되어 화합한단다. 평소에도 사이가 좋은 우리 부부에게는 필요 없는 효험이겠지만 말이다.



공원이 끝나갈 즈음 국내에서 3번째로 크다는 울진 아쿠아리움(水族館, aquarium)‘을 만난다. 동해안에 서식하는 다양한 수중생물들부터 전 세계 희귀어종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바다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았단다. 수중 암초인 왕돌초와 울진 대게를 주제로 하여 총 120여 종, 5,000여 마리의 해양 생물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331호로 지정한 점박이물범도 만날 수 있다니 한번쯤 들러볼만 하겠다.



공원을 다 둘러보았으면 이젠 은어다리로 가야할 차례이다. 탐방로는 남대천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어진다. 울진의 남대천은 응봉산에서 발원해 울진읍 비래봉(飛來峰)을 끼고 동해로 유입되는 25Km의 감입곡류 하천이다.



공원의 끝은 염전해변이다. 왕피천과 남대천 물길이 함께 만들어낸 천연의 모래사장이라고 보면 되겠다. 해변에 이르니 누군가 만들어놓은 작은 공원이 눈길을 끈다. 흙과 모래로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다 고사목(枯死木)을 꽂는가하면 자그마한 돌탑들을 수없이 쌓아올렸다. 그건 그렇고 이 일대는 바람이 좋기로 소문나 윈드서핑과 카이트 서핑 등 서핑 마니아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다. 매년 울진워터피아페스타'가 열리기도 한다. 카이트 서핑은 패러글라이딩과 서핑의 특성을 조합한 것으로 대형의 연(카이트)을 공중에 띄우고 연을 조정하며 바람의 힘에 따라 서핑보드를 끌며 바다나 강 위를 내달리는 수상레포츠이다.



해변에 서면 왕피천의 하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왕피천은 바다와 강을 오가는 은어와 연어, 황어, 큰가시고기들의 놀이터다. 이 물고기들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에서 수십 일 동안 머무르며 삼투압조절을 한단다. 민물에서 바다로 나갈 때는 염분을 받아들이고 그 반대인 경우에는 몸속의 염분을 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본능적 워밍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을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싶었던지 엑스포공원에는 생태공원도 만들어놓았다. 습지를 관통하는 갈대숲과 나무로 만든 오솔길에 물고기와 조류의 관찰장과 야생초 화원이 조성되어 있다.



반대편에 펼쳐지는 남대천 하구의 풍경도 일품이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모래톱이 들어섰다. 저런걸 보고 삼각주(三角洲)라고 하는가 보다. 모래사장 너머로는 만경창파(萬頃蒼波)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잠시 후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울진 은어다리를 만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만이다. 보행자 전용인 이 다리는 총연장 243m에 폭이 3m로 지난 20153월에 개통됐다고 한다. 다리는 매끈하게 생긴 은어 두 마리가 다리의 상판에 올라앉은 모양새이다. 남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은어를 형상화 했다는데 금방이라도 몸부림을 칠 것 같이 생동적이다. 울진의 랜드마크 성격으로 조성한 저 다리는 은어의 뱃속에 조명을 넣는 저녁이 더 고운 것으로 알려진다. 날이 저물면서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두 마리 은어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아름다움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단다. 다른 한편으로 저 다리는 일출(日出)과 월출(月出)의 명소로 입소문을 타면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앞서가는 일행들의 뒷모습이 마치 은어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양새이다. 야간에는 뱃속에 조명까지 켜져 한껏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누군가는 은어다리를 건넌 뒤 에일리언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고 했다. 하지만 난 물고기에 잡아먹혔다가 빠져나온 동화를 떠올렸다. 이왕이면 해피엔딩이 더 낫지 않겠는가. ! 은어다리의 난간에는 물고기 모양의 나무토막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단 이들의 다양한 바람이 적힌 소원패인데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소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다. 그게 끝이 아니다. 다음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해안이 날이 바짝 선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탓에 길을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탐방로는 데크계단이 끝난 뒤에도 가파른 오름짓을 계속한다. 그 길이가 길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삼각점(울진 3417)이 심어져 있는 헬기장을 만나면서 다시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최고 높이가 62.7m인 이 산길은 연호교차로까지 약 2km가 이어진다.



산을 넘으면 7번 국도를 만난다. 은어다리에서 20분 거리이다. 이후부터 탐방로가 좀 묘해진다.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방향을 트는데도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익숙해진 파란색 라인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구간에서는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의 표식인 파란색 선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방향이 바뀌는 곳마다 해파랑길 표식이나 리본을 빠짐없이 붙이거나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길을 찾아보자. 일단은 국도의 아래를 통과한다. 산속으로 파고드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2분 정도 따라가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들머리에 해파랑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공석육교로 7번 국도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 방향이다. 오솔길 수준인데다 이번에는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해파랑길 리본을 참조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자 연지1가 나온다. 이곳 역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거의 180도에 가깝게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이곳도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해파랑길 표식을 참조해 길을 찾아야 한다.



차도를 따라 다시 7번 국도의 굴다리를 통과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연호공원(蓮湖公園)’에 이른다. 연호(蓮湖)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저수지이다. 조선시대 말까지만해도 읍내 깊숙이 들어올 만큼 큰 호수였지만 오랜 시간동안 유입된 토사로 인해 지금의 규모로 축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저수지가 지금은 근린공원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지자체에서 저수지 주변에다 야외무대와 휴게시설, 체육시설, 울진과학체험관 등을 지어 공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널따란 저수지는 푸른 연잎들로 가득 차있다. 상류로 가니 몽우리를 활짝 열어젖힌 연꽃들이 지천이다. 누군가는 7월을 일러 ()의 계절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7월에 만개하는 연꽃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활짝 핀 연꽃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온통 연밭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저런 풍경이 호숫가의 향원정(香遠亭)’을 만들어냈지 않았나 싶다. 향원(香遠)을 풀이하면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저수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정자가 하나 놓여 있다. 연호정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정자는 조선 순조 15년에 향원정(香遠亭)’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이곳의 풍경을 시로 노래를 했고, 많은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던 장소였다고 한다.



저수지의 상류에는 울진과학체험관이 들어앉았는데, 움직임의 과학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며졌단다. 건물 1층에는 한국형 발사체 모형, 우리 몸속의 지도 DNA, 사계절 별자리 등이 있다. 2층에는 움직임의 과학 체험 학습실, 상설 전시관, 수유실 등과, 3층에는 4D 영상관, 키즈커버리(·유아 전용 과학 체험실) 등이 있단다. 미래의 과학 꿈나무인 아이들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야외 공간에는 항공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연호공원을 모두 둘러봤으면 이젠 바닷가로 돌아갈 차례이다. 1정도 되는 거리인데 이 구간 역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저수지의 상류에서 공원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하는데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7번 국도의 굴다리를 지났다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일렁거리는 바다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바다와 함께 이어진다.



바닷가에 이르니 안개가 자욱하다. 조금만 멀어도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바닷가는 피서 나온 사람들 천지다. 모래사장보다 스노클링(snorkeling)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 보면 덥기는 더운 모양이다.



잠시 후 연지3蓮池3)’에 이른다. 작은 포구(浦口)를 끼고 있는 마을인데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는 대나리라는 지명을 병기해 놓았다. 항구는 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방파제에다 물양장(物揚場)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정박해있는 배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한적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빈자리는 낚시꾼들이 메꾸고 있다. 방파제는 물론이고 근처의 갯바위마다 낚시꾼들이 들어앉았다. 지나가는 말로 작황을 물으니 놀래미의 입질이 괜찮은 편이란다.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객지의 낚시꾼들도 자주 찾는 장소라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바닷가에는 작은 갯바위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하지만 그 크기나 생김새 모두 25코스에는 훨씬 못 미친다. 짙은 안개로 인해 주변이 온통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는데도 지난번과 같은 예쁜 그림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15분쯤 걷자 온양리(溫洋里)’가 나온다.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외온동(外溫洞)과 상양정동(上洋亭洞)에서 ()’자와 ()’자를 따와 온양(溫洋)’이 되었는데, 이곳 ‘1는 양정(洋亭)이라는 단위부락이다. 바닷가에 위치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이곳도 역시 양정항란 포구가 들어서있다. 하지만 정박되어 있는 배가 한 척도 없는 건 매한가지이다. 그 빈자리를 낚시꾼들이 메꾸고 있는 것도 아까 지나왔던 ‘대나리항과 마찬가지다.




온양리 해안도 역시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의시설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피서 온 사람들이 백사장을 버려둘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탐방로는 20분 조금 못되어 온양2앞을 지난다. 특별히 기억해둘만한 얘깃거리가 없는 평범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자형으로 생긴 방파제만 축조되어 있을 뿐 포구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파도라도 높게 일면 옆 마을의 항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다. ! 언제부턴가 동해안종주 자전거길임을 나타내는 파란색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온양2리 방파제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데크로드로 변한다. 해안도로에 갓길을 낼 공간이 없었던지 바다 쪽에다 데크 탐방로를 따로 만들었다. 벤치를 갖춘 쉼터도 배치했다. ! 이 부근은 테트라포드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쌓아져 있다. 먼 바다에서 들이치는 파도가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봉평1(鳳坪1)’. ‘골장마을(骨長洞)’로도 불리는데 그 규모가 제법 크다. 그래선지 마을 앞에 들어선 포구도 앞에서 거론했던 항구들보다 많이 커졌다. 정박되어 있는 배들도 많다. 하지만 이곳 역시 낚시터로 더 유명하단다. 두 방파제가 마주보고 있어 폭풍주의보 이상의 경보 상황에도 너울이 방파제까지는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감성돔과 벵에돔이 초보자들 손에도 잘 잡힌다니 참조해 두자.



탐방로는 봉평2로 이어진다. ()가 많다고 해서 샛들또는 초평(草坪)’이라 불리는 단위부락이다. ! 이 근처에서 관동팔경 녹색경관길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났다. 강원도 고성의 대진등대에서 경북 울진 월송정까지 6개의 관동팔경을 잇는 약 330km의 보행로이다. 조선 선조 때 문신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관동팔경을 유람한 감회를 관동별곡에 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 같이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이 길이 만들어졌단다. 동해안의 수려한 해안 경관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천, 해안절벽 등 끊어진 구간을 다리로 이어놓아 차량과 도보여행이 모두 가능하단다.



바닷가에 울창한 송림(松林)이 보이기에 들어섰더니 봉평해수욕장이 나온다. 250m의 깨끗한 백사장이 맑은 바닷물을 품고 있는 해수욕장인데 여름철 피서객들로 붐비고 있다. 편의시설을 구비한 해수욕장이 인근에 없다보니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방방재청장이 아름다운 소하천으로 선정했다는 초평천을 건너니 대게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게의 다리 모양이 대나무와 같이 곧다하여 대게라 이름 붙였다는 뜻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울진은 대게의 고장이다. ‘대게를 놓고 영덕과 한 판을 벌일 정도로 대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선지 울진의 많은 상징물을 장식하는 캐릭터 역시 대게 일색이다. 저 조형물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형물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봉평 신라비전시관(鳳坪 新羅碑展示館)’을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200m만 더 걸으면 국보 제242호인 중요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2011년에 개관한 봉평 신라비전시관은 실내전시관을 비롯해, 야외 비석공원, 비석거리 등을 갖춘 비석 전문 전시관이다. 지하 1, 지상 2층에 연면적 2393규모의 실내전시관에는 봉평리 신라비와 고구려·백제·신라시대의 주요 비석 모형 10점 등이 전시돼 금석학의 계보와 시대별 비의 양식 변화 등을 엿볼 수 있다.



봉평신라비는 1988년 죽변면 봉평리 논에서 주민이 객토를 하던 중 발견됐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11(524)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204, 너비 32~55의 돌에 신라시대 노인법과 신라6부의 존재, 17관 등 명칭, 지방관명 등 문헌에 없는 귀중한 정보가 399자의 글귀에 담겨져 있단다. 6세기 초 신라의 사회상이 기록되어 있는 등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보 제242호로 지정됐다.




야외 비석공원에는 삼국시대에서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아우르는 국보· 보물급 모형비 25점과 울진지역 송덕비 45점이 세워져 있다.



이후부터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풍경들이 계속된다. 그저 후포항과 더불어 울진을 대표하는 항구인 죽변항을 바라보는 게 다라고 보면 되겠다. 그게 지루하다면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꽁치와 가자미가 많이 잡히는 바다로 유명하다. 대게도 많이 잡힌다니 트레킹을 마치고 어시장에라도 들러볼 일이다. 우리 부부 역시 어시장에 들렀었다. 하지만 대게 대신에 광어와 오징어회를 한 접시 시켰을 따름이다. 위에서 거론했던 어종은 제철이 아니란다.



트레킹 날머리는 죽변시외버스정류장(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330-13)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걷자 죽변항의 입구에 있는 시외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 보관함은 정류장 옆 전신주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 트레킹은 3시간 25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4.96를 찍고 있다. 눈요깃거리를 찾아 2남짓을 들락거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해파랑길 25코스

 

여행일 : ‘19. 7. 20()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기성면과 매화면, 근남면 일원

산행코스 : 기성버스터미널(6.0km)기성망양해변(3.8km)망양휴게소(11.8km)망양정(1.7km)수산교(소요시간 : 23.3가운데 16.73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기성공용정류장에서 시작해 수산교에서 막을 내리는 해파랑길 25코스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가장 긴 구간 가운데 하나(23.3)이자 가장 아름다운 구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초반에 잠깐 내륙을 걷기도 하나 그 이후부터는 줄곧 해안선을 따르게 되는데 빼어난 자태의 기암괴석들이 줄을 이어 나타나면서 잠시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구간에서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을 두 번(현종산과 둔산)이나 만나게 된다. 정자에 올라 그 옛날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조리던 시인묵객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아름다운 경관들이 이번 여정에는 태풍 다나스를 만났다. 높은 파도와 해무가 바닷가 절경들과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갖가지 풍광들은 어느 하나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도 잘 그린 수묵화(水墨畫)였다. 태풍이 몰고 온 빗줄기 속에서 거닐었지만 대신에 환상적인 풍광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이런 걸 두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은 통천의 총석정과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북한 지역에 있는 총석정과 삼일포를 빼고 나머지 관동6경을 모두 해파랑길에서 만날 수 있다.


 

들머리는 망양정 옛터(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413-4)

해파랑길 25코스는 기성공용정류장이다. 스탬프보관함 역기 버스정류장 앞에 설치되 어 있다.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올라오다 기성교차로(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구도(舊道)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더 올라가다 망양정 옛터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태풍 다나스가 몰고 온다는 비바람 속에서 23를 걷는다는 게 무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7쯤 되는 이 구간이 25코스 가운데 가장 볼거리가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쉼터에서 내려 망양정 옛터(望洋亭 舊地)‘로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벼랑에 올라앉은 탓에 갈지()‘자로 걸쳐놓은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위로 오르면 동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삼칸겹집(정면 3, 측면 2)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오래전 이곳에 있었다는 망양정(望洋亭)을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은 원래 기성면 망양리의 해안가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려(高麗) 때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방치되던 것을 1471(조선 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가 현종산(懸鍾山) 기슭인 이곳으로 옮겨지었단다. 이곳에 있던 망양정 또한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1517(중종 12) 울진현령 이휘호가 이를 한탄하며 지금 망양정이 있는 둔산(屯山 : 근남면 산남리)으로 옮겨 새로 지은 걸 보면 말이다. 그 이후 터로만 남아 있다가 2015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단다. 그러니 이젠 ()‘라는 용어는 그만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정자의 옆에는 망양정유허비(望洋亭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망양정에 얽힌 사연을 적은 안내판과 평생에 바다 보려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 보시게나라는 글귀의 시판(詩板)도 보인다. 수서 박선장의 시란다.



올라왔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망양2이다. 마을 앞에는 일자형 방파제가 만들어져 있으나 배들은 보이지 않는다. 태풍 다나스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저 정도 시설로는 거센 파도를 배겨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망양(望洋)이란 마을 이름은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이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연유되었단다.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이 상당수 널려있다. 그 가운데 뭍으로 기어오르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로등처럼 줄지어 서있던 대게 조형물들이 망양리에 이르면서 오징어로 변해있다.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산품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2015년엔가 이 마을에 대한 기사가 뜬 적이 있었다. 울진군의 특산물인 오징어를 자체 기술로 숙성시킨 '배오징어'를 판매하는 영어조합법인(營漁組合法人) '오징어 사랑'이 마을기업으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그게 이젠 자리를 잡았나 보다.



백사장에서 노닐던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의 도움닫기라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힘차게 하늘로 오르는 풍경이 장관이다. 태풍이 몰고 온 거대한 파도에 놀랐나 보다.



바닷가에 널린 기암들만큼이나 기괴한 느낌을 주는 폐건물도 보인다. 바닷물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있는데 이미 오래전에 버려졌는지 내부가 아예 쓰레기장으로 변해있다. 하지만 이 또한 멋진 풍광으로 다가온다. 높은 파도와 물안개가 만들어낸 극적인 효과일 것이다.



태풍 다나스의 영향으로 사위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해있다. 그 속에서 실루엣으로 나타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신비롭기 짝이 없다. 어느 화가가 있어 신선이나 살 법한 저런 풍경들을 그려낼 수 있을까. 조물주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20분쯤 걷자 바닷가에 조성해놓은 광장이 나타난다. ’황금 울진 대게공원이란다. ‘대게하면 사람들은 보통 영덕을 떠올린다. 하지만 울진 사람들은 울진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근거까지 질서정연하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래선지 이곳에도 집게발을 위엄 있게 벌린 대게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물론 터도 잘 잡았다. 광장 뒤편의 바위무더기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대게 조형물 옆에 세워놓은 빗돌에는 영덕 대게에 대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동국여지승람과 임원경제지, 대동지지에 자해(紫蟹 : 대게)’를 울진의 특산물로 적고 있다면서 말이다. 사실 울진이 세간에 알려진 일등공신은 영덕과의 대게 원조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진원지인 울진 후포항과 영덕 축산항은 20가 채 안 되는 직선거리다. 국경과 행정구역이 없는 대게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게의 최대 집산지는 포항의 구룡포항이라고 한다. 영덕과 울진으로 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진실이라 하겠다. 아무튼 아웅다웅하는 이들의 다툼은 결과적으로 둘 모두에게 시너지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경쟁하듯이 대게 축제를 열고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 덕분에 그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불어났기 때문이다. 참고로 울진의 대게축제는 후포항에 있는 왕돌초광장 일대를 무대로 삼는다. ‘월송 큰 줄 당기기등 전통 민속놀이와 대게춤 플래시몹, 대게춤 경연대회, 거일리 대게원조마을 풍어 해원굿 등 공연이 준비돼 있다.



대게공원의 옆에는 오징어판매점이 들어서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곳 망양마을은 '배오징어'라는 자체 상품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징어 사랑'이라는 영어조합법인은 행정안전부에서 선정하는 마을기업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그러니 저런 전문 판매장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겨울철이면 이 부근은 오징어풍물거리로 변한단다. 도로변이 온통 오징어 덕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 풍광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아올 정도란다.



망양정휴게소에 가까워져 가면서 바닷가 기암들이 많이 커졌다. 그 숫자도 아까보다 많이 늘어났다. 거기다 어떤 곳에서는 해식애(海蝕崖)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풍광은 15분 후에 만나는 망양정휴게소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휴게소는 해안가 바위절벽에 걸터앉은 여건 덕분에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소문났다. 동해 바다와 절벽이 어우러지면서 멋진 풍광을 펼쳐낸다는 것이다. 휴게소 건물에는 스카이워크도 만들어놓았다. 스릴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보라는 모양이다.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가는 계단도 놓치지 말자. 인물사진의 배경으로 바다 풍경을 넣을 수 있는 포토죤이기 때문이다. ! 휴게소 조금 못미처에서 기성면(망양리)이 끝나고 매화면(덕신리)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이후부터는 휴게소에서 합류한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 체력안배를 위해 코스를 단축한 집사람이 미리 휴게소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엔젤리나 커피 한 잔으로 시간을 때우면서 말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7번 국도와 만난다. 통행량이 많지만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국도와는 별개로 탐방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국도를 따라 걷는데 건너편에 덕신휴게소가 보인다. 덕신해안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20분 후에 만나게 되는 덕신1리에서 탐방로는 해안가로 되돌아간다. 계속해서 7번 국도를 타면 고분공원(古墳公園)이 있는 매화리에 이르게 되나 해파랑길은 해안길을 따르도록 나있다. 덕분에 우린 5~6세기의 묘제문화(墓制文化)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화리는 벽화마을로 더 유명하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치 오혜성과 마동탁, 엄지의 얼굴에 잠시나마 1980년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고분공원(古墳公園)에는 유구와 유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3호와 36, 51, 56호 고분과 그 부곽 3, 80, 82호 등 10기의 돌덧널 무덤껴묻거리들이 복원되어 있다.



덕신리 앞 해변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도 꽤 큰데다 해안방재림(海岸防災林)도 조성중이다. 하지만 내버려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황량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곳은 1991년에 개장한 해수욕장이란다. 길이 300m, 폭이 50m이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라 하겠다. 특히 이곳에서는 스쿠버다이빙과 수상스키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덕신(德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때 덕신역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때문에 역말이라고도 불린단다.




오덕교(오산리와 덕신리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지 않나 싶다)를 건너면 오산1(烏山一里)‘. 덕신리를 지난지 15분만이다. 이 마을은 오천(烏川)‘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뒷산이 까마귀 머리모양으로 생긴데다, 앞 냇가에도 까마귀가 많이 서식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방파제를 겸하고 있는 도로변 난간은 벽화를 그려 넣었다. 맨숭맨숭한 시멘트벽이 그림으로 채워지자 분위기 싹 바뀌었다. 좋은 발상이라 하겠다. 다만 다양한 변화를 주지 못하고 똑 같은 그림을 일렬로 배치한 것은 흠이라 하겠다.



잠시 후 오산항에 이른다. 오산항은 인근에서 조업하던 배들이 피항(避港)할 수 있는 항구로, 울진군에서 세 번째로 큰 곳이다. 정치망 어선들이 잡아온 활어를 경매하는 아침 풍경이 볼만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미역은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탓에 그 맛이 매우 뛰어나 고포 미역 못지않게 인기란다.



다음은 오산2초산마을이다. 1670년경 안동 김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만 해도 지심이라 했는데, 1680년에 울산 임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뒷산에 숲이 무성해지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면서 초산(草山)‘으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도로변의 조형물은 이곳에서 홍게로 되돌아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바닷물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있는 작은 바위섬이다. 발을 딛고 설 공간도 없는데 다리를 놓은 것이다. 조그만 특징까지도 흘려버리지 않고 관광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하겠다.



오산해변은 길면서도 너른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에 들어선 소나무 숲도 울창한 편이다. 하지만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해수욕장으로는 개발되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 건너의 울창한 송림에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연구센터가 들어있으니 이렇게 너른 모래사장을 독차지 하고 있는 셈이다.



10분쯤 더 걷자 오산3‘, ’무릉마을이 나온다. 한자로는 무릉(武陵)이라 쓴다니 그만큼 경관이 좋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마을 앞 도로변에 작은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아름다운 무릉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숲이란다. 이름 또한 새천년생명의 숲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홍게를 머리에 인 기둥들이 바닷가를 장식하는데 대게와 미역, 오징어 등 이 지역 특산물들을 중간 어림에 그려 넣었다.



간이 물양장(物揚場)도 보인다. 오산항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러운 배들을 위한 시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다. 하긴 태풍이 지나간다는데 그 누가 배를 대겠는가.



무릉마을을 지나면서 바다와 육지는 한껏 가까워졌다. 그 덕분에 강한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물방울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다. 기암괴석과 낙락장송들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풍경에 취해 자꾸 걸음이 늦어진다.



파도 속에서 거대한 바위군락이 치솟는다. 모나지 않고 매끈한 모양새이다. 주름이 깊은 것도 보인다. 파도가 지나간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오늘도 갯바위는 주름 하나 새롭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무릉마을(오산3)를 지나면 매화면은 끝을 맺는다. 이어서 탐방로는 근남면으로 들어선다. 동정마을(진복2)이다.



10분쯤 더 걷자 진복2‘, 동정마을에 이른다. 동정(洞庭)이란 호수 같은 바다를 둔 마을의 전경이 중국의 양자강 기슭 동정호(洞庭湖)를 닮았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마을 앞에는 제법 큰 포구가 만들어져 있다. 그 규모에 걸맞게 치장이라도 하려는 듯 정자를 짓는가 하면 바닥에는 트릭아트(trick art)‘까지 그려 넣었다.



동정항에서 20분 남짓 더 걷자 진복1, ’선진마을이다. 선진마을 부근은 예로부터 멸치후리로 유명세를 떨쳤던 곳이란다. 멸치후리란 어부들이 '당선' 이라 부르는 배를 타고 나가 멸치떼를 찾아내면 '망선'에 그물을 싣고 나가 그물을 둥글게 쳐서 멸치떼를 후려 낼 때에 부르는 소리이다. 당시 부르던 그물치기노랫말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단다.




진복리 해안 역시 수려하다.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기암괴석이 사방에 널려있다. 원래부터 저런 형상은 아니고 오랜 시간 파도와 바람에 쓸리고 깎여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뛰어난 조각가가 저런 모양을 새길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엉뚱한 것이 조물주만이 가능하다 하겠다.




멋지게 생긴 바위들은 하나 같이 정수리에 소나무를 이고 있다. 단단한 돌에 뿌리를 내린 생명력이 경이롭다. 한 생애가 지나가는 것처럼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아득한 수평선을 향해 무념무상으로 서 있다.



그런 절경들 가운데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촛대바위라 하겠다. 길쭉하면서도 타원형으로 생긴 바위가 바닷가에 서있는데, 정수리에서 자라는 나무가 인상적이다. 그 형상이 촛대를 빼다 닮았다고 해서 촛대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린단다. 하지만 이런 절경이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 1986년 울진해안도로를 개설하면서 장애물로 여겨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주민의 요청과 공사관계자의 노력으로 남아있는 게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바닷가 기암절벽들은 하나같이 옅은 안개 속에 잠겨있다. 그야말로 한 폭의 수묵화(水墨畫)이다. 옛날 사람들은 저런 바위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풍류에 취한 신선(神仙) 하나쯤은 꼭 올려놓았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이곳 울진을 일러 선사(仙槎)‘라 했었나 보다. 선사란 하늘의 은하수로 올라가는 뗏목이라는 뜻으로, 고문헌에 나타나는 울진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 무제(武帝) 때 장건이 선사를 타고 은하수에 올라 견우와 직녀를 만나서 베틀을 괸 돌을 얻어왔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단다.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하겠다.



해변에는 생김새가 각기 다른 갯바위들이 널려있다. 어떤 것은 몸을 포개기도 한다. 그 위로 거센 파도가 숨차게 들이친다. 그것도 태풍이 몰고 파도답게 바위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성 싶은 절경들이 끝나는가 싶으면 탐방로는 산포3에 이른다. 선진마을을 지난 지 30분만이다. 이 마을은 1600년 경 터를 잡은 홍천 용씨와 함께 제주 고씨가 마을을 개척했는데, 당시는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동네의 모습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흑포동(黑浦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예 화재를 없애기 위해 마을 뒷산 네 곳에 화강(火瓨)을 묻어놓고 매년 2월 초하루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단다. 다른 설명이 없는 걸 보면 그 이후 화재가 없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 앞 해변은 모래가 곱다. 야트막한 바위도 심심찮게 보인다. 가족 단위 피서지로도 인기가 좋을 것 같다.



잠시 후 산포2에 이른다. 해안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가리개(佳里介)’라고 불리던 마을이다. 1650년부터는 마을 앞 해안선에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고 해서 가는 개(細浦)’라 고쳐 불렀단다. 마을을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런데 도로 표지판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게 아닌가. 왼편은 해맞이광장으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망양정과 망양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는데, 그게(망양정) 그거(해맞이광장)로 여겨지니 말이다. 일단은 망양정 방향의 도로에 그려진 파란색 선을 믿어보기로 했다. ‘동해안자전거길의 표식인데 대부분의 구간이 해파랑길과 겹치기 때문이다. 이때 선두대장으로부터 신호가 온다.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집을 좀 부리다가 삼거리로 되돌아오니 해맞이광장 방향의 도로변 전신주에 해파랑길 표식이 붙어있다. 해파랑길과 자전거길이 삼거리에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도로를 따라 200m쯤 걸으니 울진대종과 망양정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이곳에서부터 울진해맞이공원(또는 망양정해맞이공원)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200m쯤 더 진행하자 해맞이광장이 나타난다. 공원의 핵심축인 이곳에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해맞이 행사의 타종식을 위한 울진대종(蔚珍大鐘)도 만들어져 있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이 만 듯 것으로 높이 286에 무게가 무려 7,518이나 나간단다. 문양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아름다운 비천상을 응용했단다.



바닷가 언덕에는 해맞이전망대를 지어놓았다. 이곳은 원래부터 일출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해발 45m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섬이나 다른 장애물이 없어 떠오르는 해를 한눈에 쏘옥 담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해맞이행사를 열어왔단다. 그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에 전망대를 들어앉힌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자 난간에 소원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해에 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해맞이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망양정(望洋亭)으로 향한다. 울창한 산죽(山竹) 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이 일품으로, 중간에 갈림길을 두 차례 만나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에 이른다. 아까 기성면에서 만났던 망양정 옛터의 정자를 옮겨지은 것이다. 1860(철종 11)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망양리의 정자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을 한탄하며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했다고 한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다가 2005년 울진군이 완전해체한 뒤 새로 지었다. 정자에는 꽤 많은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어두컴컴한 탓에 누구의 글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망양정을 노래했던 정철(송강별곡)이나 김시습 등의 시문(詩文)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들이 풍경을 노래한 망양정은 현재의 망양정이 아니다. 겸재와 김홍도가 그려냈던 망양정도 이곳이 아니다. 숙종이 내린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를 달았던 정자도 이곳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이 노래한 곳은 망양정 옛터에 있던 정자였다. 옛터에 새로운 정자를 짓고 유허비까지 이전 설치한 것은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해안도로가 나온다. 아까 길이 헷갈렸던 삼거리에서 직진했더라면 이곳에서 만났을 것이다. 도로 건너편은 망양정해수욕장이다.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폭은 좁지만 동해안에 있는 해수욕장 중에서는 수온이 높은 편이란다. 주변의 송림 또한 망양정해수욕장의 자랑거리란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태풍이 소멸되었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파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젠 수산교로 향할 차례이다. 울진의 젓줄이라는 왕피천(王避川)과 어깨를 나란히 걷는다. 강 건너에는 엑스포공원이 들어서있다. 2005년에 개최된바 있는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의 주 행사장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공원이란다. 걷는 도중에 울창한 송림 속에 들어앉은 캠핑장도 만났는데, 태풍이 예고된 속에서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캠핑족들이 의외로 많이 보였다.




트레킹 날머리는 수산교(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98-5)

그렇게 10분쯤 걷자 왕피천대교에 이르고, 다리 아래를 지나자 이번에는 수산교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다리 앞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이 16.7를 찍고 있으니 빠르게 걸은 셈이다. 태풍이 몰고 온 바람이 뒤에 밀어준 덕분이 아닐까 싶다.


해파랑 24코스

 

여행일 : ‘19. 7. 6()

소재지 : 경북 울진군 후포면과 평해읍, 기성면 일원

산행코스 : 후포항(0.5km)등기산공원(2.9km)울진대게유래비(6.0km)월송정(2.3km)대풍헌(6.4km)기성버스터미널(소요시간 : 18.1가운데 16.97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울진군 후포항에서 출발해 기성버스터미널에 이르는 18.1km 길이의 코스로 스카이워크가 있는 등기산공원과 옛날 대게가 많이 잡혔다고 하여 기알이라고 불렀다는 거일리’, 고운 모래가 일품인 구산해변등 경관 좋은 곳들을 연이어 지난다. 해안길을 걸으면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이라는 의미의 월송정과 울릉도를 향하던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다는 대풍헌’, 두문동 칠십이현의 한사람인 백암 김제의 충절 시비(詩碑) 등 선현들의 숨결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들머리는 후포항 한마음광장(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316-26)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올라오다 삼율교차로(울진군 후포면 금음리)에서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마음광장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광장 맞은편에 있는 공중화장실 옆에 설치되어 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풍기IC를 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울진 근남면까지 온 다음, 7번 국도로 갈아타고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후포항이 나온다.




실제 트레킹은 거일해변(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284)에서부터 시작했다. 후포의 등기산공원은 지난번에 이미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등기산공원에서 거일해변까지의 구간은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 없다기에 덤으로 지나쳐버렸다. 아니 15가 한계인 집사람의 체력을 배려했음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을 게다. 아무튼 백년손님 남서방을 뒤로 떼밀면서 해안도로를 4쯤 달리니 울진의 대게 원조마을이라는 거일2에 닿는다. ‘거일이란 지명은 대게 알을 뜻하는 게알에서 유래했다. 마을 초입에는 울진 대게 원조 마을을 알리는 울진 대게 공원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게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거일마을은 동해안 최대의 어족자원 보고(寶庫)라고 한다. 앞바다에는 후포항에서 거론했던 왕돌초를 안고 있단다. 대게 원조마을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대게가 바다에서 막 기어 나오고 있는데, 그 곁에는 대게를 잡는 배도 한 척 띄워져 있다. 참고로 울진은 대게의 고장이다. ‘대게를 놓고 영덕과 한 판을 벌일 정도로 대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선지 울진의 많은 상징물을 장식하는 캐릭터 역시 대게 일색이었다. 저 조형물들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공원 옆에는 해상낚시공원이 들어섰다. 매혹적인 자태로 동해 한가운데를 향해 뻗어 나간 잔교(棧橋)가 볼거리인 이곳은 해상산책로와 포토존, 휴게시설 등을 포함해 총 연장 470m로 구성됐다. 평균 높이 5m 내외로 만들어진 낚시터의 경우 200명까지 동시 입장이 가능한데, 감성돔과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는 입소문을 타고 이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선을 이용한 다양한 바다낚시와 미역 채취 체험(갯바위 체험)도 가능하다니 한번쯤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거일1로 향하는 해안도로의 방파제는 울진의 광고판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숨 쉬는 땅, 여유의 바다 울진’, ‘marinepia 울진등 울진의 특징을 다향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어촌체험마을이라는 거일1에 들어서자 후포리 백년식당이란 간판이 길손을 맞는다. ‘6시 내고향’, ‘생생정보등 각종 매체에서 대게요리 전문점으로 소개된바 있는 맛집이다. 홍게로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메뉴인 백년 한상은 게살비빔밥, 모둠간장게장, 수제 게살 스테이크, 통게 순두부찌개, 게살 초무침, 해물 치즈그라탕 등이 제공된단다. 그러나 직접 맛을 볼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트레킹 초반부터 식당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일2리에서 1리까지는 10분이 걸렸다.



방파제 너머 해변은 결이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버려져 있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아닐지라도 간이해수욕장 정도의 대접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먼 바다에서 들이닥치는 파도가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근에서 방파제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아졌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단조롭기 딱 좋은 구간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방파제에 그려놓은 알록달록하고 예쁜 벽화들이 오히려 더 재미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길과, 바다의 수평선, 하늘의 단조로운 수평의 구도를 더 재미난 사진으로 만들어 준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포항공대 평해연수원이 나온다. 건물의 모양새로 보아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나보다.



연수원을 지났다싶으면 직산2리가 시작된다. 1916년 행정개편 때 저장리(猪場里)와 직고리, 상남산리, 하남산리가 통합되면서 직고리(直古里)와 남산리(南山里)에서 ()’자와 ()’자를 따 직산(直山)’이 된 마을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직산항으로 연결된다. ‘2종 어항이어선지 바닷가 마을의 포구치고는 상당히 큰 항구이다. 어업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좌우로 나누어진 방파제에도 각각의 등대가 들어서있고, 물양장과 선양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찾고 있는 활어 공동판매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동어판장에서 회를 뜬 다음 갯바위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 저렴하게 먹을 수 있으므로 들르는 항구마다 기웃거리고 있으나 아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그런 행운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직산1리로 가는 해변도 역시 고운 모래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개발이 되지 않은 채로이다. 파도가 높은 탓일 것이다. 모래사장 끝에서 바닷물에 반쯤 잠겨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직산1리에는 항구가 없다. 대신 물양장(物揚場)으로 여겨지는 간이시설을 만들어놓았다.



직산리를 지나자 너른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월송리와 구산리의 앞바다인데 평민의병장 신돌석(1878~1908)이 나라 잃은 설움의 시를 읊조리기도 한 곳이다. 1896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 경기도 광주의 의병부대가 영덕으로 이동해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참전하였던 신돌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덕·영양·울진·삼척·강릉·양양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일본군에게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며 독립 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울진의 장흥포에서는 일본군선 아홉 척을 침몰시키기도 했다. 190812월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다음 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해산시킨 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있는 부하 김상열의 집에 칩거하였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 형제들이 건네준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신돌석은 30년의 짧은 세월 속에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쳐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간 의병장이었다.



월송정다리를 건너는데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간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오는 도중에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걷고 있는 해파랑길못지않게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역시 명품으로 자리 잡았나 보다.



다리를 건너다 만나는 바닷가 풍경도 일품이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진 세모꼴 섬도 보인다. 저런걸 보도 삼각주(三角洲)라고 하는가 보다.



월송정교를 건너 100m쯤 더 걷자 탐방로는 오른편 숲속으로 향한다. 이어서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난다. 흙과 모래가 반반인 소나무 오솔길이다. 원래 이곳은 만 그루의 소나무가 십 리가 넘는 흰 모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울창했던 송림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베어내어 황폐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6년 월송리 마을의 손치후라는 사람이 시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5천 그루를 다시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월송정 솔숲은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으로 이어진다. 평해사구(平海沙丘)는 경북 유일의 사구습지(沙丘濕地)라고 한다. 울진군에서 자연유산인 해안사구와 습지를 활용한 체험형 힐링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생태공원은 습지관찰대와 생태전망대, 수변데크, 야외무대, 휴식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구(沙丘)를 돌아서자 울창한 숲속에 들어선 정자 한 채가 나온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越松亭)’이란다. 안내판은 원래의 정자는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45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서,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이곳을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데서 월송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고 있다. 중국 월나라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심었다 하여 월나라 월()’자를 쓴다는 내용도 보인다. 신라의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라는 네 화랑이 이곳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빛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해서 달 월()’자를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정자가 처음 세워진 고려 때는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서의 역할이 컸단다.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진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로 내려와 정자(亭子)로 중건했고, 월송정은 그 뒤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누대에 올라서면 멀리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풍경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거기다 그 풍경화를 에워싸고 있는 솔숲은 금상첨화라 하겠다. 안내판은 다른 일화도 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종이 조선 팔도의 정자 중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을 그려보라는 어명을 내렸단다. 이때 올라온 두 점의 그림(영흥의 용흥각, 평해의 월송정) 가운데 임금이 최고라며 꼽은 게 월송정이라는 것이다.



시멘트길을 잠시 걷자 황보천(黃堡川)이 발길을 붙잡는다. 기성면과 평해읍을 사이에 두고 동해로 흐르며 주변에 너른 농경지를 끼고 있는 하천이다. 이곳에는 보행자 전용을 다리를 새로 놓았다. 덕분에 군무교까지 한참을 돌아가야만 하는 불편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서 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솔숲 사이로 열리는 모래사장 너머로 만경창파(萬頃蒼波)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다리를 건너자 탐방로는 다시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구산해수욕장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선지 솔숲의 곳곳에는 캠핑객들이 들어앉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햇볕을 가려주니 이만한 피서지도 없겠다. 숲속을 걷는데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해수욕을 하지 않아도 무더위를 식혀줄 만큼 시원하다.



잠시 후 구산해수욕장(邱山海水浴場)에 들어선다. 깨끗한 바닷물은 수심이 1.5~2m 밖에 되지 않고, 경사도 1520도로 얕고 완만한데다, 모래사장에서는 백합까지 채취할 수 있다고 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찾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림 속 야영이 가능해서 캠핑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단다.



500m 길이의 백사장은 모래가 곱기로 유명하다. 규사성분이라서 모래의 입자가 섬세하다 싶을 정도로 가늘기 때문이다.



구산항으로 향한다. 바닷가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길을 따르면 된다. 그런데 모래사장에서 뭔지 모를 시설공사가 한창이다. 구산방파제 준공 후, 해안류의 이상변동이 생기면서 구산리 일대의 모래가 유실된다더니 해안침식 방지시설을 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수욕장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구산마을(邱山里)에 들어선다. 굴미봉(掘尾峰) 아래 동쪽으로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구산포(邱山浦)라고 알려져 있으며, 마을 지형(地形)이 거북의 꼬리와 같다 하여 구미(龜尾)라고도 불린다. 마을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마음이 편해지는 조그만 어촌이다. 투명카누와 그물치기, 갯바위낚시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울릉도와 독도를 축소시켜 놓은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울릉도·독도를 지킨 수토사의 국토 수호 의지를 후세에 전하고자 만들었단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가 분명하다는 천명(闡明)의 뜻은 덤이라 하겠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증거는 마을에 위치한 대풍헌(경상북도 기념물 제16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풍헌은 구산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던 관청이다. 3년마다 파견되던 수토사들은 울릉도로 도망한 죄인들을 수색하고 토벌하며,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불법 어로를 못하도록 순찰하는 관리다. 수토사들은 울릉도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이곳 구산포에서 며칠 동안 순풍을 기다려 파도가 잠잠할 때 출발하였는데, 순풍을 만날 경우 2~3일이면 울릉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산항은 아까 지나왔던 직산항 보다도 훨씬 더 크다. 국가어항답게 정박되어 있는 배의 숫자나 크기도 더 커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공동어판장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를 떠주는 식당까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식당에서 먹는 가격이라서 부담이 가더라는 얘기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바다는 어느새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해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몰려드는 파도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다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도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만났다. ()이 승천하는 형상을 닮았는데, 반대편에서 보면 또 다른 모양새로 나타난다. 그나저나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그래선지 해파랑길 여행자들의 사진첩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풍경이 되었다.



구산항에서 15분쯤 더 걸었을까 널찍한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광장의 한복판에는 백암(白岩) 김제(金濟)의 충절시(忠節詩)를 적은 시비(詩碑)를 세워놓았다. 백암은 고려 말 평해군수 재직시 고려의 망국을 통분히 생각하고 시 한수를 써서 벽에 걸어둔 채 동해로 행방을 감추었다는 고려의 충신으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다.




도로 건너편 바위에도 같은 내용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충절로 몸을 던진 노련의 나루터는 어디메뇨? 뒤 따르려니 오백년 조정의 초개같은 이 신하, 바라건데 외로운 넋이라도 있어주어 붉은 저 해되어 임 계신 곳 비추리.’라는 내용인데 그의 후손들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남긴 그의 시를 새겼단다. 길가는 길손께서 읽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시라면 일부러라도 찾아와서 읽어볼 텐데도 말이다.



시비의 뒤편 바닷가 갯바위에 올라선 낚시꾼의 뒷모습이 그림처럼 곱다. 이 근처의 갯바위가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바다낚시 명당이라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갯바위를 후리는 파도에 맞서 손끝으로 왈칵 달려드는 짜릿한 손맛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그 참맛을 알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요 백견이 불여일행(百見而 不如一行)’이란 말도 있지 않겠는가.



제법 큰 마을인 봉산2바닷가에 이르니 붉은대게 조형물이 방파제를 따라 끝이 없다. 앙증맞게 줄을 서서 해안가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대게를 얹고 있는 막대가 울진의 특산물을 담은 사진까지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속살이 쫄깃하고 담백하여 궁중에 진상되어 왔다는 울진대게와 다양한 영양분을 함유한 붉은대게, 울진 송림이 키워낸 송이버섯, 청정해역에서 자란 울진고포미역 등 종류도 다양하다.



종착지인 기성면이 가까워진다는 의식 때문인지 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무작정 속도를 낼 수는 없다. 다양한 모양새의 기암들이 바닷가를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새하얀 모래 해변이 기암괴석들을 품으면서 시시각각 다른 풍광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데 어찌 걸음을 재촉할 수 있겠는가.



봉산1로 향하는데 표산봉수대에 대한 안내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 설치된 평해군 소속의 봉수대 셋 가운데 하나로 남쪽의 후리산봉수와 북쪽의 사동산봉수에 연결되어 소식을 전했다고 적혀있다. 안내판은 또 해발 78.3m의 산정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방인인 나로서는 그게 어디쯤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언덕 위에 보이는 저 안테나시설이 있는 자리가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렇다면 같은 자리에 같은 목적의 시설물이 시대를 초월해서 들어선 셈이 된다.



봉산리의 바닷가 역시 결이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생겼던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그렇게 20분 넘게 걸으면 추난개교에 이른다. 이름이 조금 묘하지만 이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심코 건널 일은 아니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자칫 엉뚱한 길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추난개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널찍한 도로를 따라 곧장 진행하는 게 옳은데도, 해파랑길이니 해안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해안도로로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봉산1’, 그중에서도 항곡마을에 이르면 높다란 해안 절벽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아버린다. 그런데도 우린 해안길을 따랐던 것이다. 동네 아주머니가 길이 끊긴다는 걸 알려주어 도중에 돌아설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시 올라선 구도(舊道)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이어서 고갯마루를 넘어서서 만나게 되는 기성교차로에서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 고갯마루에 있는 울진비행장 앞에서 옛 해파랑길이 오른편 숲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지도에 억매이지 말고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면 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비행장에서나 볼 법한 시설물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울진공항이 있다고 했다. 2003년 개항을 목표로 건설되었으나 수요가 없어 운용을 포기해버렸으니 애물단지 시설이라 하겠다. 현재는 비행교육 훈련센터 용도로 활용하고 있단다. 도로 왼편 높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비행장일 것이다.



날머리로 가는 길에 효자비각(孝子碑閣)을 만났다. 황응청이라는 효자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단다. 손바닥만 한 지붕을 이고 있는 비각 앞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그의 행실이 자세히 나열되어 있다. 언제 봐도 반가운 내용들이다.



조금 더 걷자 기성교가 나온다. ‘척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해파랑길 24코스의 종점인 기성버스터미널이 나오는데도 해파랑길이 곧 바닷길이라는 선입감을 고집하다가 엉뚱한 길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해파랑길의 지도도 길을 잘 못 표기하고 있다. 아까 울산공항의 앞에서 오른편으로 갈려나갔던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해파랑길 24코스의 날머리는 기성 공용정류장(기성면 척산리 260).

우리 역시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기성리(箕城里) 포구까지 거의 다 갔다가 공용버스정류장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1가까이를 더 걷고서야 말이다. ! 해파랑길의 안내판과 스탬프보관함은 정류장 앞의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다.



산악회의 버스는 기성항(箕城港)에 주차되어 있었다. 너른 들녘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잠시 걷자 마을회관이 나오고 이어서 마을안길을 지나면 작은 포구에 이른다. 면소재지치고는 엄청나게 작은 항구이다. 그러니 횟집이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는 상점까지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정류장 근처에 행정타운이 건설되면서 이곳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에 16.97를 걸었다고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해파랑길 23코스

 

여행일 : ‘19. 6. 15()

소재지 : 경북 영덕군 병곡면과 후포면 일원

여행코스 : 고래불해변(1.1km)병곡휴게소(3.7km)금곡교(3.9km)백암휴게소(3.2km)후포항등기산공원(소요시간 : 11.914.43로 늘려 3시간12)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의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짧은 코스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눈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다. 바닷가 사람들의 삶을 느껴볼 수 있는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이용해 24코스에 들어있는 등기산공원후포 벽화마을까지 연장해 보았다. 등기산공원은 스릴과 조망에다 선현들의 숨결까지 함께 느껴볼 수 있는 후포항의 새로운 명소이다. 스카이워크와 출렁다리에서 긴장감에 푹 빠져본 다음 망사정(望槎亭)에 올라 안축(安軸)과 서거정(徐居正)의 눈길로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내려오는 길에는 후포등대까지 둘러보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후포를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후포의 사위남서방이 노닐던 마을안길을 거닐었다. 그러다보니 본래의 거리보다 2.5를 더 걸었다. 그래봤자 15가 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들머리는 고래불해수욕장(영덕군 병곡면 병곡리 58-26)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올라오다 병곡리교차로(병곡면 병곡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고래불해수욕장의 상징이랄 수 있는 철제 구조물이 나타난다.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고래를 모티브로 한 것인데, 이곳이 해파랑길 22코스의 종점이자 23코스의 시점이다. 참고로 고래불해수욕장은 병곡면의 6개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장장 20리에 달하는 모래사장을 낀 해수욕장으로 고래불이란 지명은 고려 말 목은 이색선생이 상대산에 올랐다가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며 외친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파랑길 23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고래불해수욕장의 입구에 있는 음악분수(音樂噴水)의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다. ‘병곡의 노래라는 노래비가 버티고 있는 분수대의 건너편에는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이 역동적인 고래조형물(위에 첨부된 사진)’이 세워져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이며 고래불의 바람과 물, 태양 등은 모두 채움비움속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졌단다.



북쪽 방향의 해안도로를 따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방곡항의 마스코트인 거대한 고래조형물은 공사가 한창이다. 아니 포구 전체가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해수욕장의 개장시기에 맞추어 정비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잘 지어진 팔각정이 올라앉은 포구(浦口) 뒤편의 작은 동산은 용머리공원이다. 이곳에 병곡리와 용머리의 유래를 적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마을 뒤 야산(포성터)에서 내려다보면 지형이 자리(자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자루실또는 자래실이라 불러오다가 조선 중기 명종 때 영해부사로 있던 장응두가 병곡(柄谷)이라 부르면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자루 병()’골 곡()’을 썼으니 그동안 불러오던 지명을 한자로 고쳤다고 보면 되겠다.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통폐 때 합륙(柄陸), 병진(柄津)을 병합하여 병곡동이 되면서 영덕군(병곡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병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병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고래불에 대한 유래를 적은 빗돌도 보인다. 목은 이색 선생이 상대산 정상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래가 허공으로 분수를 뿜으며 튀어 올랐다. 진기한 광경에 선생은 고래불이다!’라고 외쳤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고래불이란다. ‘의 옛말이라니 고래 떼가 묘기를 부릴 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공원의 바닷가 방향에는 한쪽 귀퉁이가 움푹 파인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전국의 유명 지역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당시 이곳 자루실도 마을의 정기를 끊으려고 용머리처럼 생긴 영험한 바위의 위에 팔각정을 지어놓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를 알고 1961년 철거해서 지금의 해안도로에 매립해버렸단다. 지금도 전국의 유명 무속인(巫俗人)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며, 5년마다 열리는 마을 풍어제도 이곳에서 시작하고 있단다. 동혈처럼 생긴 곳에 제단(祭壇)이 놓여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른다. 바닷가에는 낚시하기 딱 좋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꽤 많은 강태공들이 이미 낚시에 여념이 없다.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벗어난다. 독특한 외형을 지닌 메르센트 펜션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7분 만에 병곡휴게소에 도착했다. 빛바랜 사진처럼 쇠락해진 휴게소는 화려한 고속도로 휴게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7번 국도4차선으로 확장되기 전에는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는데 과거의 화려함은 간데없고 적막한 풍경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후부터는 옛() 7번 국도를 따른다. 자동차도로와 자전거도로를 겸한 탐방로가 맞물려 있지만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일만도 아니다. 차량통행이 뜸한 탓인지 달리는 차량마다 속도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백석1표시석이 보인다. 이 근처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다랗게 방파제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예쁘장한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먼 바다에서 밀어닥치는 파도가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곳으로 오다가 KBS-TV의 예능프로그램인 12촬영지라는 블루베이 펜션을 만났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을 눈에 띄지 않았다. 해당 프로그램이 그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마을을 지나는데 烈女 金允岳之碑라고 쓰인 빗돌이 눈에 띈다. ’진실로 윤()‘큰 산 악()‘을 쓰는 여인이라니 이름에서부터 여장부였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하긴 그런 옹골참이 있지 않고서 어찌 열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가 후 각종 자료를 검색해봤으나 역시 눈에 띄지 않았다. 도로가에 터를 잡고 있을 정도의 열녀비라면 지자체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관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같이 효()가 사라져가는 세태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열녀비 근처에서 철암산 화석단지의 진입로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으나 거리가 500m나 떨어져 있다기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1500만 년 전의 굴과 가리비 화석이 자주 발견되는 곳으로 산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 대부분이 큰 자갈이 박힌 역암이라고 한다.



백석리 포구 조금 못미처에서 말뚝이 박힌 돌무더기를 만났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검색해봤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경북일보의 해파랑길 탐방기사에서 바닷물이 마을로 들이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 적힌 걸 보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빗돌까지 세워야 했을만한 기념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무더기의 크기 또한 물막이의 효과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왜소했다. 그나저나 해파랑길 안내에는 이곳 백석리에 물이 맑고 모래가 굵은 간이해수욕장이 있다고 했다. 빗돌근처의 모래사장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근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단 화장실 뒤편을 이르는 것일 테고 말이다.



조금 더 걷자 ‘2에 위치한 백석항을 만난다. 지금은 비록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한적한 포구이나 그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륙(白陸) 또는 백진(白津)으로 불리던 조선 성종(成宗) 10(1479)에 석주(石珠) 안이현(安履鉉)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왜구를 물리쳤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석리(白石里)’란 지명은 마을 북쪽에 있는 흰빛의 큰 돌에서 유래했다. ‘흰돌또는 힌둘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현재는 행정편의를 위해 백석12리로 나뉘어져 있다.



백석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다시 옛 국도로 올라선다. 잠시 속도를 내며 지나다니는 차량들에 주의을 기울이며 걷다보니 수석(壽石)’ 가게가 눈에 띈다. 문이 닫혀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으나 밖에 진열되어 있는 돌들은 대부분 조약돌들이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세상을 나선 조약돌은 부딪치고 깨지는 시련의 시간을 거친다.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담아 왔기기에 앙증맞은 모습이 되어 사랑을 받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백석리는 나전석(螺鈿石)’, 즉 나전칠기에 새겨진 듯 정교한 문양석의 산지로 유명하다. 탐석여건이 좋지 않은 곳이라서 아직은 입소문을 덜 탓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석가게까지 들어서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옛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4차선으로 확포장 된 7번 국도가 나오면서 칠보산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 칠보산이 위치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더덕, 황기, 산삼, 돌옷, 멧돼지, , 구리 등 보물이 일곱 가지나 있는 산이라지만 그곳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아니 길 건너에 있는 휴게소조차 들어가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후포항에서 맛 볼 계획인 참가자미회가 더 구미를 당겼기 때문이다.



바닷가 언덕에는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뒤 바다는 투명한 옥빛으로 빛나고 있다. 쪽빛으로 연상되는 동해바다이기게 의외라 하겠다. 그렇다고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샛노란 꽃들이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데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림은 금곡리의 아름다운 해안이 얼굴을 내밀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



길가 공터에는 조그만 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적당한 크기의 광장에 버섯모양의 그늘막을 만들고 그 아래에다 벤치 놓았다. 자전거 거치대도 보인다. 하지만 주차장이 없다는 것은 흠()이라 하겠다.



조금 더 진행하자 유금천(有金川)이 길을 가로막는다. ‘금곡(金谷)’이라는 마을 이름을 만들어 냈을 정도이니 사금(砂金)이 제법 많이 채취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금곡교를 통해 개울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서 금곡1가 시작되지만 도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택가를 통과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금곡이란 지명은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租)가 등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피신한 김한중(金漢重)의 자손이 번성하였으므로 그의 성씨인 ()’에서 따왔다는 또 다른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금곡교 다리를 건넌지 7분 만에 작은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 ‘2지경(地境)’ 마을에 이른다. 영해와 평해의 경계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지금도 영덕과 울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제대로 이름을 지은 셈이다. 참고로 금곡(金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그무실 또는 망곡(網谷)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마을은 어선이 어망(漁網)을 실은 형국이라는 망곡(網谷, 그무실 : 1), 영해와 평해의 경계라는데서 유래한 지경(地境 : 2), 6세기 경 금()이 발견된 데서 유래한 유금(有金 : 3) 3개의 행정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지경마을을 지난 탐방로는 이제 울진군 관내로 들어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금음리(金音里)에 이른다. 작은 포구를 거느린 이곳은 ‘4지경마을이다. 참고로 금음(金音) 지명은 금곡동야음동에 따온 이름이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울진군 평해면에 편입되면서 금곡동·만산동·야음동·지경동이 병합되면서 새로 만든 이름이란다. 마을에는 총 347세대 712명이 살고 있단다. 커다란 마을이라서 4개의 마을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데, 1리는 석골, 2리는 만산과 곧은골, 3리는 여쉼, 4리는 지경 등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올라선 옛 도로, 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는 쉼터가 자리 잡았다.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도로변도 꽃밭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금음 복개터널에 이를 즈음 탐방로는 다시 확장된 7번 국도와 맞붙는다. 그렇다고 씽씽 달리는 차량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둘 사이에 차단용 난간을 치고 자전거도로를 겸한 탐방로용으로 별도의 데크로드(deck road)‘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으니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관계자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길가는 온통 금계국(金鷄菊)의 노란빛 물결로 물들었다. 따스한 봄기운을 가득 담고서 피어난 금계국이 꽃말처럼 상쾌한 기분을 한아름 선사하고 있다. 그 속에 든 집사람의 얼굴 또한 상큼하기 짝이 없다. 저런 티 없는 모습에 반해 나는 밤낮없이 그녀에 푹 빠져 산다. 그게 바로 내 행복이고 말이다. 참고로 국화과인 금계국은 '노란 코스모스'로 불리며 여름을 알리는 들꽃으로 꼽힌다. 5월 말부터 8월까지 30~60정도 줄기 끝에 노란 꽃이 하나씩 달리면서 여름만이 가진 특별한 정취와 낭만을 전해준다.




길은 동해의 수평선을 내내 눈에 담고 간다. 시야에 들어오는 바닷가 건물은 모두 펜션이나 모텔 아니면 횟집이다.



4리를 출발한지 25분 만에 3리에 소재하고 있는 금음항(金音港’)에 이른다. 이곳도 역시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이다. 등대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금음항에 이르자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이미 8,3나 걸었음을 알려준다. 후포항은 이제 십리도 채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시간도 1시간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금음항을 지나면 두 개의 개울을 건너게 된다. 물이랄 수도 없을 정도로 수량이 적지만 개울은 개울이라 하겠다. 데크로드를 놓아 물길을 건네주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이 근처는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 폭은 좁디좁다. 3년쯤 전인가 이곳 금음리의 해변이 연안침식관리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 근처에 있다는 백암회센터휴게소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휴게소라고 생각되는 곳을 만났다는 기억조차 없었다.



국도변에 세워진 광고판이 눈길을 끈다. 백년손님에 나오는 후포리 남서방과 장인 장모가 대게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림으로 채워졌다. 후포마을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남서방이다. SBS-TV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백년손님에 출현했던 내과 전문의 남재현을 말하는데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인 사위와 장모·장인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기획의도에 딱 맞는 재미있는 소소한 일상들을 가감 없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람을 잘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옛말이 있다. 사위 하나 잘 들인 집 덕분에 동네가 유명해지고, 동네 사람들이 TV에도 나왔고, 주변은 관광지가 됐으니 사람하나는 제대로 들인 셈이다.



삼율천(三栗川)금음해안교를 이용해 건넌다. 다리의 이름은 금음이지만 마을은 이미 삼율리에 들어서있다. 이 근처를 통칭해서 금음리해안으로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만난 다리는 삼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삼율리(三栗里)7번 국도와 후포항으로 연결되는 6번 군도가 교차하는 교통중심지로 후포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곳에서 후포항까지는 취락이 밀집되어 있으며 상가와 숙박시설, 음식점 및 연립주택,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잠시 후 후포해수욕장(厚浦海水浴場)’에 이른다. ‘후포라는 이름과는 달리 해수욕장은 삼율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모래사장의 길이는 비록 250m에 불과하지만 깨끗하고 고운 모래톱이 인상적인 해수욕장이다. 특히 백사장과 쪽빛 파도가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광은 휴가철만 되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해수욕장에 지어진 야외공연장이 눈길을 끈다. 본 건물이야 흔한 외관이지만 그 앞에 세워놓은 요트 모양의 조형물이 색다른 것이다. ! 후포항 일대를 후포요트경기장이라고 부른다더니 이를 형상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경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경상북도 요트협회가 해변을 관리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제1회 전국해양스포츠제전 때는 요트의 예선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단다.



해수욕장이 끝나면 후포항(厚浦港)’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공판장으로 싱싱한 수산물로 항상 활력이 넘친다. 이왕에 왔으니 대게를 늘어놓고 경매를 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한산하기 짝이 없다. 오후라서 입항하는 배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린 이곳에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센터를 기대했었다. 센터에서 회를 떠다가 갯바위에 걸터앉아 먹으면 싼 가격에 신선한 회를 실컷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포는 우리가 기대했던 종류의 회센터는 갖고 있지 않았다.



후포항은 꽁치·오징어·붉은대게 등 동해에서 나는 모든 어족의 집산지이다. 그래선지 꽤 많은 어선들이 정박되어 있다. 배의 크기도 물론 많이 커졌다. 이른 아침에는 고깃배에서 부리는 각종 어패류와 어시장 풍경을 구경할 수 있고, 싼 값에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후포항은 후포면뿐만 아니라 울진군 개발의 선도 역할을 담당하고 있단다.



공판장을 지나자 한마음광장이 나타난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이 광장을 오른편에 끼고 들어가면 후포의 사위남서방의 처갓집 동네가 나온다. 그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이이 인기를 탄데다 마을 담벼락까지 벽화로 채운 뒤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곳이다. 마을 안길을 둘러본 뒤 곧바로 등기산공원으로 오를 수 있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스카이워크의 스릴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왕돌초광장이 길손을 맞는다. 너른 광장의 뒤편에는 울진 붉은 대게 홍보전시관이 들어앉았다. 1층은 울릉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이 출항하는 후포여객선터미널에 내주고, 2층에다 6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울진대게·붉은대게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천년의 맛을 고이 간직해온다는 울진대게의 유래와 역사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참고로 광장의 이름인 왕돌초(王乭礁)’란 후포 앞바다에 있는 해저벌판을 말한다. 동해는 불과 100m만 나가도 심해인데 후포 앞바다는 23떨어진 곳에 수심 3~25m의 해저 벌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왼편에는 여객선을 닮은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후포수협 수산물유통센터라고 하는데 어선이 아니라 여객선을 닮은 게 특이하다. 건물은 회식당으로 운영하며, 2층은 개별 방으로 만들어 영업하고 있단다. 3층은 2011년 현재 선박협회 사무실로 사용중이다.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면 예쁜 벽화가 그려진 높다란 방파제를 만난다. 이어서 출렁다리를 바라보며 조금 더 걷다보면 왼편에 등기산 공원(燈基山 公園)’으로 올라가는 목제계단이 나타난다. 이곳이 제대로 된 입구인데도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해파랑길 23코스의 종점인 후포항 입구로 돌아가려면 아무래도 스카이워크에서부터 탐방을 시작하는 게 옳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 걸으니 아스라한 허공에 걸쳐져있는 스카이워크가 나타난다. 철제 구조물로 된 다리가 까마득히 높기만 한데 상부까지는 나무계단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통로는 출구 전용이라는 것이다. 조금 전에 살펴봤던 입구로 되돌아갈까 하는데 관리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바람이 세서 스카이워크 탐방은 불가능하단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에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마침 관리인도 괜찮다는 눈치를 보내온다. 참고로 첨부된 아래 사진에서 스카이워크의 왼편 바위절벽 위에 올라앉은 시설은 갓바위전망대이다.



바람 때문에 진입이 불가능한 스카이워크의 반대방향으로 나오면 갓바위전망대가 나온다. 동해 해돋이(日出)의 명소로 알려진 이곳에 오르면 끝 간 데 없는 펼쳐지는 동해바다는 물론이고 바다를 향해 나아간 스카이워크와 그 아래에 놓인 작은 바위섬 갓바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갓바위는 바위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갓을 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총연장 135m 길이의 다리가 해수면에서 50m 높이에 서 있다. 긴장감을 돋우기 위해 바닥은 강화유리로 깔아 놓았단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중간지점을 넘어가면 부는 바람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스카이워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건 그렇고 스카이워크의 끝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조형물이 용의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의상대사는 몸이 불편하여 한 불자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서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선묘는 첫눈에 반하여 의상을 유혹하지만 의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스스로 평생 스승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그 후,의상이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공양을 하다가 의상이 귀국하자 용이 되어 따른다는 설화를 표현한 조형물이라는데 말이다.



오른편에는 '후포6'의 포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 번, 해파랑길 24코스를 답사할 때 지나가게 될 곳이다.



이젠 등기산을 오를 차례이다. 스카이워크와 등기산은 출렁다리로 연결된다.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지만 또 다른 짜릿함을 선사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다. 무서움보다는 기분이 왠지 좋아지는 긴장감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출렁다리 건너편의 언덕 위에 세워진 '망사정(望槎亭)'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문헌(울진군지)은 이 정자를 조선 연산군 때의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퇴락하여 없어졌던 것을 2010년에 새로 지었다. 고려시대 안축(安軸)과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망사정이란 시()로도 유명하다.



조금 더 오르자 등기산(燈基山)의 바다 쪽 산정에 후포등대(厚浦燈臺)’가 버티고 있다. 해발 64m의 등기산은 옛날부터 낮에는 흰 깃발을 꽂고 야간에는 봉화를 피워 후포항을 출입하는 선박들의 지표 역할을 해왔는데, 등기(燈基)라는 지명도 그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의 등대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고 보면 되겠다. 등대는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높이 11m의 팔각형 흰색 건물로, 19681월에 최초로 점등했다. 지리적으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등대로 10초에 한 번씩 불빛이 반짝이며, 35거리까지 도달한단다.



등대 근처의 전망대에 오르자 후포항과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배 모양으로 생긴 '후포수협 수산물 유통센터''울진대게홍보전시관' 등이 보이는가 하면, 그 앞의 바다에는 후포항으로 입출항 하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하얀등대''빨간등대'가 마치 수문장(守門將)이라도 되는 양 늠름하게 서있다



몇 개의 전망대를 오르내리며 반 바퀴쯤 돌자 이번에는 남호정(南湖亭)이 탐방객을 맞는다. 등기산의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이다. ! 등기산공원의 또 다른 명소로 꼽히는 나이가 이백년이나 된다는 팽나무는 가보지 못했다. 덩치 큰 나무의 아래에는 장의자가 놓여있고, 앉기라도 할라치면 주변 풍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석기유적관과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도 둘러보지 못했다.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은 곳으로 가려고 서두르다보니 산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고, 다시 되돌아 올라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반대편으로 난 샛길을 통해 등기산을 내려오자 골목이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다. 2015년엔가 이곳에 벽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했던가 보다. 당시 기사는 후포리 마을의 골목과 갓바위주변의 해안도로 등 5개 구역(ZONE)에 행복만선을 주제로 벽화를 그려넣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3구역(동화만선)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림이 주를 이루는 걸 보면 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후포마을 홍보의 일등공신은 남서방이다. 그래선지 벽화도 백년손님을 테마((thema)로 꾸며진 게 많이 보인다. 그네들이 놀았을 마을 정자에는 백년손님 촬영지라는 간판까지 매달아 놓았다. 백년손님 속에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긴 할머니들도 벽화의 주인공이 되어있음은 물론이다.



백년손님에서 소개된 동네 이발관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 사장님인 김진성씨는 마라톤 풀코스를 세 번이나 완주했단다. 하프코스와 단축코스를 완주한 횟수는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라톤을 좋아하다보니 이봉주 선수의 팬 사인회까지 따라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백년손님 촬영지라는 안내판과 함께 이봉주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도 벽면에 그려 넣었다.



트레킹 날머리는 스카이워크 근처의 주차장(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564-83)

이발소를 지날 즈음 산악회장님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버스가 스카이워크 아래에 주차되어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다. 휴대폰에 깔아놓은 앱을 이용해 방향을 잡는다. 일단은 후포6리 방향으로 잠시 걷다가 앱이 지시하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스카이워크가 나타난다. 트레킹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은 총 3시간 12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은 14.43를 찍고 있다. 해파랑길 23코스의 본래 길이가 11.9였으니 등기산 공원을 둘러보느라 꽤 많이 걸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