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6코스

 

여행일 : ‘20. 8. 1()

소재지 :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과 고성군 토성면·죽왕면 일원

여행코스 : 장사항(6.6)봉포항청간정(3.5)아야진항천학정(1.1)능파대(4.4)백도해변삼포해변(소요시간 : 15.6/ 4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모두 5개 코스(46~50)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고성구간은 절경과 명승지가 의외로 많은 곳이다. 이 가운데 토성면(용촌리)에서 시작되는 46코스는 봉포해변과 백도해변, 자작진해변 등 크고 작은 해변을 9개나 품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도 그냥 해변이 아니다. 죽도와 가도, 앞섬 등 이름만큼이나 예쁜 바위섬들을 푸른 바다 위에 띄워 너나없이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낸다. 그런 아름다움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에서 절정을 이룬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고색창연한 정자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거친 해안 풍광이 일품인 청학정과 기암괴석의 전시장인 능파대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장사항(속초시 장사동 548-5)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수복탑사거리(속초시 동명동)까지 온다. 이어서 중앙로를 타고 고성방면으로 올라가다 우림연립(속초시 장사동 518-7) 앞에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해파랑길 46코스의 들머리인 장사항이 나온다. 장사항은 소박한 어촌 그대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항구에 비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에서는 바나나보트, 요트 등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해파랑길 안내도 맞은편의 'another blue' 카페 사잇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어서 '장사동 활어센터' 표지석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중앙로'를 따라 북진한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속초시의 캐릭터인 '해오미' 조형물과 함께 여기서부터 금강산입니다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속초시와 고성군의 경계인데, 하단에 금강산 고성군이라고 적어 넣은 걸 보면 고성군에서 금강산을 브랜드로 삼고 있는 모양이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 '해양경찰 충혼탑'도 만났으나 사진 게재는 생략했다. 전사·순직한 해양경찰관 174명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해양경찰대에서 세운 충혼탑이다.

 

 

·군 경계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ㅏ자' 갈림길이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까리따스 마테오 요양원'으로 간다. 이어서 고성 카페거리를 통과한 다음 중앙로로 되돌아 나온다. 하지만 카페거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카페는 몇 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바다정원'이라는 카페가 모든 것을 대신한다고 보면 되겠다. 몇 년 전만 해도 바닷가에 초록 카펫을 깔고, 하얀 의자와 빨간 파라솔 등을 놓은 강렬한 색감의 베이커리 카페로 화제를 모았던 곳이다. 손님들이 줄을 잇자 작년에 5층짜리 큼직한 신관을 오픈했단다. 이 집의 시그니처 빵인 모찌크림치즈빵과 치아바타 등을 주문할 수 있는 빵카페와 수제맥주를 파는 펍이 1층에 있고, 2층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다시 돌아온 중앙로. 보고 또 봐도 마음에 쏙 드는 풍경이다. 소나무와 무궁화가 산책로의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국화인 벚나무로 도배된 다른 지역의 도로들에 식상해왔는데, 이곳은 나라나무(國木)라 할 수 있는 소나무와 나라꽃(國花)무궁화를 가로수로 심어 놓았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면을 통해서나마 고성군청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도로 건너 용촌리(토성면)’는 작년에 발생했던 산불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불에 탄 주택은 흉물스럽게 버려졌고, 고사목으로 변한 소나무는 뼈대만 앙상하다. 하지만 새로 지은 듯한 주택도 여럿 보였다. 문득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가 생각난다. 화마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용촌천위에 놓인 용촌교를 건넌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용촌천의 기수역(汽水域) 풍경이 가히 일품이다. 푸른 습지 너머, 바다 한가운데 죽도가 떠있는데 그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설악산. 비선대, 울산바위, 미시령 고개가 바로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숨 멎을 듯 고요한 화폭에 설악은 구름과 바람과 산 공기를 불러 모아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냈다. 정말 장관이다.

 

 

용촌교를 건넌 해파랑길은 이제 도로와 이별을 고하고 둑방길을 따라 해안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켄싱턴 해변에 이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만이다. 이후부터는 모래사장과의 경계선에 놓은 데크 탐방로를 따른다. 안내판은 이 길을 평화누리길이라고 적고 있다. 세계 유일 분단지역의 상징성을 가진 평화 누리길접경지역 발전종합계획(2011.7.27.)’에 따라 2021년까지 총 551km로 조성될 계획이라고 한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총 10개 시·군에 조성되어 있으며, 자연·생태·역사·문화·안보 등 시군별 차별화된 테마로 조성된다. 또한 비포장도로와 기존 사용하고 있는 도로 및 폐 도로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군 작전로를 활용하는 친환경적인 길()이라고 한다.

 

 

잠시 후 '켄싱턴 리조트 설악비치' 앞을 지난다. 그런데 난데없는 버스 한 대가 리조트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게 아닌가. 런던의 명물인 '더블 데커(double decker)', 2층 버스인 '루트마스터(Routemaster)'라고 한다. 이 버스는 한때 2,700여 대나 운행되기도 했단다. 런던 전역을 누비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005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런던 중심가의 관광용 노선 2개만이 운행되고 있을 따름이다. 켄싱턴(Kensington)은 런던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상류층 주거 지역이다. 어쩌면 이 리조트가 켄싱턴 주민들에 버금가는 고객들이 쉬었다가기에 충분한 시설을 갖추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홍보용이 아닐까 싶다.

 

 

고운 모래가 자랑인 켄싱턴 해변은 동명(同名)의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프라이비트(private)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모래사장에 'KENSINGTON BEACH'란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트와 액자 속으로 들어간 테이블 등 조형물들도 여럿 보인다. 바닷물에 발을 담글 듯이 늘어선 식탁들도 비치파라솔을 씌워 멋을 더했다.

 

 

켄싱턴 해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단연 죽도(竹島)이다. 봉포항에서 1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 섬은 올해 안에 해양관광지로 다시 태어날 계획이라고 한다. 섬에 접근할 수 있는 접안시설과 해상 산책로를 설치하고, 얼굴바위와 큰발바위, 심장바위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상경관을 스토리텔링 할 계획이란다.

 

 

유럽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인공폭포도 아름다운 색상으로 덧칠까지 해놓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자 봉포항이 길손을 맞는다. 외항과 내항으로 나누어져 있는 봉포항은 50여 척의 배가 드나드는 작은 포구이다. 하지만 활어센터가 있어 싱싱한 활어회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단다. ! 봉포항의 볼거리가 방파제와 테트라포드에 그려진 모자이크 타일 벽화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한 잔 먹세그려 / 또 한 잔 먹세그려 /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그려로 시작되는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함께 적어 활어센터에 꼭 들렀다 갈 것을 권하고 있었다.

 

 

봉포해변은 봉포항의 방파제(이정표 : 청간정 2.1/ 고성군계 4.2) 뒤에서 시작된다. 마치 해외 휴양지의 물빛을 연상시키는 산호색 바다와 깨끗한 모래, 그리고 점점이 떠있는 갯바위가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해수욕장이다. 또한 앞바다에는 죽도가 있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없어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바다를 외롭지 않게 해준다. 죽도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한편 이곳은 스노쿨링과 다이빙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변에 널린 바위들이 바다 생물들의 생존 여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다.

 

 

봉포항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바닷가를 벗어나 도로를 따른다. 3~4분쯤 걸었을까 해변 주차장에 푸드 트럭들이 즐비하다. 청년포차 공간인 청년 상상마당이라는데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창업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고성군에서 조성했단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다 '천진해수욕장입구 정류장(이정표 : 청간정 1.3/ 봉포항 0.9)'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천진해변이 나온다. 천진항과 연결된 초승달 모양의 이 해변은 해안선을 따라 하얀 백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배후 마을은 민박 예고제를 운영하여 피서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단다.

 

 

천진해변과 연결된 천진항의 볼거리는 방파제의 뒤편에 있다. 테트라포드 너머 바닷가에 갯바위가 즐비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거북이를 닮은 바위 하나가 유난히도 시선을 끈다. 하지만 이곳의 명물은 맷돌바위이다. 파도가 치면 감싸고 있는 주변 바위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마치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데 다가가 보지는 않았다. 카메라에 담을 만한 외형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봉포항에서 천진항까지는 15분이 걸렸다.

 

 

천진항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잠시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이어서 애견 동반 펜션인 '멍 스테이''크리스마스 펜션'을 차례로 지나더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시 바닷가로 향한다. 이후부터는 데크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 이때 천진항과 그 너머 죽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니 놓치지 말고 감상해보자.

 

 

데크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청간정(淸澗亭)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남한에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데, ‘정자가 바위사이에 흐르는 물과 임해 있다는 뜻의 청간(淸澗)’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닷가 숲속에 들어앉은 풍경이 사뭇 아름답다. 이를 놓칠 시인 묵객들이 아니다.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청간정을 언급했고, 조선후기의 아웃사이더이자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였던 이옥도 청간정을 노래했다. 그런가하면 정선(청간정도)과 김홍도(금강사군첩) 강세황(청간정도)도 저곳에 들러 그림을 남겼다.

 

 

탐방로는 군 초소가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음 행선지인 청간정이 코앞에 있는데도 천진천(天津川)이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물길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가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군의 순찰로로 여겨져 이용하는 것 자체를 포기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만난 강줄기를 따라 잠시 거슬러 올라가자 청간교가 나온다. 천진항을 나선지 15분만이다. 청간교 건너에는 청간정' 입간판이 기와지붕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관동팔경 수일경이란 거창한 수식어까지 달고서 말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청간정 자료전시관에 들러 청간정을 노래한 시문과 회화 자료 등을 곁눈질 한 뒤, 작은 구릉 위로 오르면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인 청간정(淸澗亭)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정자의 외부 현판은 독립운동가인 청파 김형윤이 1928년에 쓴 글씨다. 원래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문헌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종 21년에 소실됐다. 정자 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청간정친필 현판과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 시판이다. 이 전 대통령은 1955년 중수 당시 이곳에 들러 현판을 하사했고 최 전 대통령은 1980년 여름에 이곳에 들러 한시를 남겼다. 참고로 청간정은 원래 청간역(淸澗驛)의 정자였다고 전해진다.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 15(1520)에 간성군수로 있던 최정(崔情)이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청간정이 있었다고 본다. 그 후 현종 3(1662)에 정양(鄭瀁)이 다시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844년 갑신정변 당시 불에 타 방치돼 오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5년 이승만 전 대통령 명으로 보수했고 1981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 복원됐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곱디고운 모래로 뒤덮인 해안들이 좌우로 펼쳐지는가 하면, 정면으로는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다. 조선 인조 때 간성군수를 지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노래한 수성지의 표현을 빌어보자. <정자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쳐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갈매기 수 백 마리가 아래위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현청에 드러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창문을 뒤흔들어 마치 배에서 잠을 자는 듯하다.>

 

 

청간정에서 내려서면 청간해변’. ‘명사(鳴沙)’로 불리는 특이한 모래사장을 보유한 곳이다. 여기서 명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니다. ‘곱고 흰 모래가 아니라 울 명()’자를 써서 우는 모래로 읽힌다. ‘신증동국여지승람모래색이 눈같이 하얗고 사람과 말이 지날 때면 부딪쳐 나는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 같다.’고 표현했고, 김정호도 대동지지에서 청간정은 해안가에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서 있으며 해변 위 모래는 빛나니 흰 눈이 뒤덮인 것 같고, 밟으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주옥을 밟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긴 피서객들로 들끓는 곳에서 그런 소리를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겠는가.

 

 

백사장으로 내려서니 큰애 부부가 술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며느리의 건강 때문에 주말부부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내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생선회를 준비한 모양이다. 홀로 서울 생활을 해야만 하는 아들은 안쓰럽지만, 함께 나온 며늘아기의 건강도 한결 좋아 보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곳에 아파트를 마련해 요양을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입원을 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튼 하룻밤을 이곳에서 머물다 다음날 자신의 차로 귀경하자는 아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파랑길 종주를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청간해변이 끝나갈 즈음 바닷가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모래사장이 바위지대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운동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너른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시 후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아야진포구에 이른다. 청간정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동해의 새벽 바닷길을 여는 아야진항' 벽화를 지나 아야진항으로 들어서면 고깃배들이 빼곡히 정박되어 있다. 포구에는 '아야진 연승협회'라는 특이한 간판을 내걸고 있는 건물도 들어서 있었다. 스포츠에 저런 종목도 있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지나가던 주민이 주낙이라고 알려준다. 비교적 굵은 한 가닥의 기다란 줄에 여러 가닥의 가는 줄을 달고, 그 끝에 낚시를 연결하여 고기를 낚는 어로 기법이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징어 모양의 등대가 특징인 이 항구의 원래 이름은 대야진(大也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큰 대()' 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아야진(我也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곳 아야진에서 옆 동네인 반암리로 넘어가는 산()의 생긴 모양이 한자어인 잇기'()'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이름의 유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야진(也津)’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마을의 단합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라는 뜻을 넣어 아야진(我也津)’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야진항의 북방파제는 바닥에 트릭아트를 그려 넣어 포토죤으로 조성했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사진 찍기에 그만인데 색이 바래서 현실감은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집사람에게는 반갑기만 한 모양이다. 하긴 25코스 동정마을 앞의 트릭아트를 마지막으로 1년 이상을 못 보았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탐방로는 이제 아야진 해변을 지난다. 물놀이보다는 낚시터로 더 어울리는 갯바위지대로 시작한 해변은 잠시 후 상당히 긴 모래사장으로 변한다. 크고 작은 갯바위와 질 좋은 백사장, 거기다 맑은 바다까지 함께 해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딱 좋다 하겠다. 백사장이 온통 피서객들로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모래사장만 벗어나면 암반 형태의 갯바위 지대로 바뀐다. 그것도 제법 넓고 길게 펼쳐져 있어 먼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물길을 막아준다. 그래선지 해변 끝까지 나간 아이들도 꽤 많이 보인다.

 

 

아야진 해변을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서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간성방향, 이후로도 탐방로는 물길을 건너는가하면 여러 곳에서 방향을 틀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만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평화누리길의 고성구간이기도 하다. 거기다 군의 순찰로까지 겸하고 있으니 길 세계의 팔방미인인 셈이다.

 

 

개발되지 않은 바닷가를 따라 난 탐방로를 따라가다 해변이 끝날 즈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교암길이 나온다.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25분쯤 걸리는 지점이다. 이 도로의 바로 앞에서 오른편 숲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꽉 들어찬 숲속을 잠시 걷자 천학정(天鶴亭)‘이 얼굴을 내민다. 1931년 지방 유지인 한치응과 최순문, 김성운 등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정면 좌측에 모암산인(茅菴山人)이 전서체로 쓴 천학정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천학정기천학정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에 걸터앉은 수려한 자태에 더해 수령이 백년도 더 넘은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고성8(高城八景 : 건봉사, 천학정, 화진포, 청간정, 울산바위, 통일전망대, 송지호, 마산봉 설경)' 중에서도 두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청학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남쪽으로 가도와 백도에 이어 청간정까지 바라다보이고 북으로는 교암항이 코앞이다. 하긴 청학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하천광(上下天光)’ 즉 동해의 푸른 바닷물을 거울삼아 그 모습을 비춘다는 뜻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이곳은 일출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니 기억해 두자.

 

 

청학정에서 내려서면 베짱이 다이브리조트라는 빨강색 건물이 눈길을 끄는 교암항(橋巖港)’이다. 교암항은 조용한 어촌마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고 한적한 어항으로 항구 자체보다는 천학정과 능파대, 그리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교암해변 등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교암항에서 문암항까지는 해안도로(청학정길)를 따른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교암 해수욕장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지는 멋진 구간이다. 이 해수욕장은 길이가 1km나 되는 백사장이 자랑거리다. 시위를 한껏 당긴 활처럼 잔뜩 휘어있는 모양새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경사가 완만하고 모래의 질까지 좋단다. 거기다 천학정과 능파대라는 명승까지 끼고 있으니 가족단위 피서지로 최상이라 하겠다.

 

 

교암해변의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 그러니까 교암항에서 10분 남짓 되는 지점에는 문암항(文巖港 : ’문암2리항이라고도 한다)’이 자리하고 있다. 한적한 어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작은 포구이지만, 뒤에 기암괴석 군락이 바다로 뻗어 나와 있어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항상 넘치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 문암마을의 옛 이름은 괘진(掛津)’이었다고 한다. 서쪽으로 큰 하천이 흐르나 이 하천이 범람해도 피해가 전혀 미치지 않는 마을로, 항상 걸려 있다는 뜻에서 걸릴 괘()’자와 바다를 끼고 있다하여 나루 진()’ 자를 붙였는데 지금도 주민들에게는 옛 이름이 더 익숙하게 들린단다. 하나 더, 마을이 하천과 바다로 둘러싸여 섬과 다름없다고 해서 연꽃마을로 불려왔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문암항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능파대(凌波臺)’이다. 목제 데크를 올라가면 능파대가 동남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타포니(tafoni) 현상이라는데, 타포니란 염풍화작용으로 암석에 동굴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지형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벌집이나 해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자는 골다공증 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선 타포니(오랜 세월 동안 바닷물의 염분이 화강암의 틈에 스며들어가 바윗덩어리를 부스러뜨려 만든 풍화혈) 외에도 그루브(groove : 암석 측면에 긴 고랑처럼 발달한 지형)가 발견된다고 한다.

 

 

능파대는 원래 섬이었다가 문암천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라고 한다. 이곳의 바위들은 1억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때 형성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지하에서 형성된 암석이 압력이 낮은 지표로 올라오면 돌이 물러져 풍화되기 쉽다. 그렇게 지상으로 돌출된 바위들이 1억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바닷물에 의해 풍화가 진행돼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참고로 능파(凌波)‘라는 지명은 '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라는 뜻으로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모 강원 감사가 관내 순시 중 파도가 해안가의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파도를 능가하는 돌섬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문암항에는 스킨 스쿠버 다이빙(skin scuba diving)‘ 간판이 여럿 보였다.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빚어내는 절경을 찾아 모여든 다이버들을 위한 전용 카페인 모양인데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렀던 항구들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서핑이 주를 이루던 양양이나 강릉, 삼척 등의 해안과는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그만큼 서핑이나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늦은 감은 조금 있지만 한번쯤은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 스쿠버다이빙(skuba diving)은 어쩔지 몰라도 스킨다이빙(skin diving)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능파대 뒤편으로는 문암해변이 펼쳐진다. 탐방로는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은 없지만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제법 많이 들어서 있었다. 탐방로는 이 해변을 지나 문암대교으로 향한다. 토성면(도원리) 마산(1,052m)에서 발원한 문암천(文岩川)’을 가로지르기 위해서이다.

 

 

 

문암대교를 건너자마자 백도 해변(白島海邊)’이 시작된다. 백사장의 길이가 200m인 해수욕장인데 '백도'란 이름은 바다 남동쪽에 위치한 백도에서 유래했단다. 이곳은 오토 캠핑장이 눈길을 끌었다. 비교적 시설(데크, 전기 등)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해변에는 조형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Endless LOVE’란 조형물은 담긴 뜻까지도 고왔다. 두 연인의 정열적인 포옹을 통해 사랑이 시작되고 그 사랑이 영원함을 상징한단다. 이밖에 대형 문어와 가리비, 고동 등의 조형물도 눈에 담을 만했다.

 

 

데크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걷자 두 기의 미륵불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77년 바닷가 모래밭에서 하나를 발견한 뒤 90년대에 또 하나의 석불을 발견하여 나란히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단다.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척부사를 지낸 이의 부친이 사망하여 무덤 앞에 문석을 세우기 위해 당시 문상을 왔던 고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고승이 알려준 마을에서 문석을 만들어 가져다 세우면 가문이 번성한다 해서 지금 문석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제작하여 삼척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석을 싣고 떠나려 하면 거센 풍랑이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삼척부사는 이 문석이 이 마을을 떠나려 하지 않으니 그냥 남겨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 뒤 이 마을에서는 청어 등이 많이 잡혀 풍어를 이루었고, 아이가 없는 집안에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 등 문석이 마을에 복을 준다고 하여 미륵불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일제 때 땅속에 묻혔는데, 6.25 사변 뒤 마을에서 무술인 등을 동원하여 찾기를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하나 밖에 찾지 못하였고 이후 큰 태풍이 지난 뒤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하나를 찾아 지금의 이 자리에 나란히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면 곧이어 문암1리항이 나온다. ‘문암2리항을 출발한지 20분만이다. ‘문암1리항은 포구 앞바다에 떠있는 백도의 유명세로 인해 백도항이라고도 불리는데, 인근 해역은 참가자미 낚시터로 꽤 유명하단다. 그래선지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항구 구경을 시켜준 탐방로는 이제 문암1고을을 꿰뚫고 지나가는 도로(문암항길)을 따른다. 잠시 후 '고성방가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문암리 선사유적(文巖里先史遺蹟, 사적 제426)’이 나온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의 남쪽 경사면 모래언덕에 형성된 이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유적지는 현재 텅 비어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동북아시아의 신석기문화,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과정 등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는단다.

 

 

선사유적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자작도 해변이 뒤를 잇는다. 300m가 조금 못되는 모래사장이 활처럼 안쪽으로 움푹 휜 해수욕장이다. 넓은 곳은 폭이 121m나 된다니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해수욕장으로 보면 되겠다. 그런데도 백사장은 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하긴 편안하게 쉬면서 물놀이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알려주던 지인까지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는 또 엿장수들이 피서철에 영업하러 왔다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쫓겨난 일화까지 들먹였었다. 아무튼 이곳은 수심이 무척 얕다고 한다. 해안선에서 20~30m를 나가도 성인의 허리와 가슴 사이 정도 밖에 물이 차오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는 딱 좋은 해수욕장이라 하겠다. 문암1리항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자작도는 하나의 섬을 일컫지 않는다고 한다. 풀이 듬성듬성 자란 모래사장 앞 바다에 펼쳐진 바위들, 즉 갈매기 배설물로 하얘진 백도와 소백도 안쪽으로 자작자작내려 않은 바위섬 군락을 통칭해서 자작도라 부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자작도의 옛 이름이 무선대(舞仙臺)’라는 주장도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금강산을 오가던 길에 고성의 무선대바위섬 위에서 춤을 추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무선대 바위섬들에 자작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자작도 해변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동광그룹 고성연수원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연수원 오른편의 해안선을 따라 진행해봤다. 명성이 자자한 자작도를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결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능파대와 똑 같은 풍광, 즉 기암괴석의 전시장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경관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연수원 앞으로 되돌아와 길을 다시 잇는다. 그리곤 마을안길(자작도선사길)을 통과한 다음 또 다른 자작해안에 이른다. 이어서 해안도로(삼포해변길)을 따라 자작교다리를 건너면 삼포해변이 시작된다. 800m나 되는 긴 모래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깨끗한 바닷물이 특징인 해수욕장이다. 경사도 거의 없는데다 물도 깊지 않아 해수욕의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단다. 한편 이 해수욕장은 해변을 붉게 물들이는 해당화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거기다 흑도와 백도, 호미섬 같은 작은 바위섬들이 바다를 떠다니며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그런 풍광에 초점을 맞춘 숙박 앱 고코투어는 이곳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여행지'로 소개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유명 휴양지에 버금가는 코발트블루 색상의 이국적 바다색깔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에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색의 변화가 매력적이라면서 말이다.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곳이란다.

 

 

왼편 길가에는 삼포광장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었다. 야생화 꽃밭과 벤치를 갖춘 해수욕장의 휴식공간이라는데 삼포해변에서 매년 열린다는 삼포해변 서핑축제(미드나잇 피크닉페스티벌)’ 때는 크게 한 몫을 하겠다. 아무튼 광장에는 원형 데크뫼 산()’자 조형물, 그리고 해수욕장 풍경을 액자에 담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

 

 

 

날머리는 오션투유 리조트옆 주차장(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243-11)

바닷가 풍광을 눈에 담아가며 잠시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오션투유 리조트가 어서 오라며 손짓을 보내온다. 삼포해변에 기대어 지어진 리조트로 46코스는 저곳에서 종료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저 리조트의 입구 맞은편 도로변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총 4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7.53를 찍고 있다. ‘()한국의길과문화에서 공지한 15.6보다 2나 더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9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46코스를 꼽았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