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50코스

 

여행일 : ‘22. 2. 27(일)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일원

여행코스 : 통일전망대(7.0km/차량 이동)→제진검문소(1.0km)→명파해변(4.7km)→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거리/시간 : 12.7km/ 실제는 5.87km를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광역시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초‘광역 걷기 길’이다.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사)한국의길문화’와 각 지자체 및 지역 민간단체가 뜻을 모아 조성했는데,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개(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 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다. 오늘은 5개 코스(46~50)로 이루어진 고성구간의 마지막이자 해파랑길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50코스를 걷는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12km 가운데 5.7km를 걷게 되는데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둘로 나뉘어 있는 조국의 아픈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는 구간이다. 아니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해파랑길 최고의 경관이라 할 수 있겠다.

 

▼ 들머리는 통일안보공원(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188)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 교동지하차도 사거리(속초시 교동)까지 온다. 이어서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타고 북쪽(간성 방면)으로 올라가다 ‘안보공원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통일안보공원이다. 공원에 위치한 통일전망대출입신고소가 오늘 트레킹의 출발점이다.

▼ 구간 조정이 약간 이루어진 코스이다. 원래는 명파초등학교에서 출발했으나, 최근 출발지를 ‘통일안보공원’으로 옮겼다. 민통선을 넘을 때 필요한 요식행위가 공원의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이루어지는데, 걷기와 이 행위가 따로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걷는 거리가 너무 짧았던 점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명색이 트레킹인데 1km만 걸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조정이 이루어진 덕분에 걷는 거리가 5.7km로 늘어났다.

▼ 해파랑길의 종점인 통일전망대에 들어가려면 통일안보공원에 위치한 출입신고소에서 출입명부 작성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는 방역이 더 우선이다. 그 시작은 발열검사. 확진자가 15만 명을 넘어선 지가 벌써 1주일 되었으니 이젠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 영상교육이 생략되었는지 오늘은 출입신고서(관람료로 1인당 3천 원씩을 낸다)를 작성하자 모든 게 끝이다. 하지만 차량의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 그렇다고 지루해 할 필요는 없다. 신고소와 함께 들어선 기념품 판매장에 다양한 상품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들쭉술 등 북한산 제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 아이쇼핑을 끝내고 밖으로 빠져나오니 ‘평화의 종’이 매달려 있다. 파주의 것 말고도 또 하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파주의 것은 ‘세계’라는 접두사를 달고 있으니 차원이 다르다. 재료(분쟁중인 국가 60여 개국의 탄피)나 크기(가로 1.5m, 세로 1.47m)도 물론 다르다. 그렇다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속뜻까지 다를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 해파랑길의 구간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평화의 종’ 근처. 그러니까 출입신고소의 앞마당 가장자리에다 만들어놓았다. 장승으로 배경을 삼았는가 하면, 옆에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마라토너라도 되는 양, 수많은 차량이 주차장에 줄지어있다. 국도7호선을 타고 통일전망대까지 갈 수 있지만 출입신고서 작성을 위해 이곳에 들른 차량들이다. 저들은 너나없이 조금 전 받은 출입신고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전망대로 가다가 중간의 군 검문소에 그 신고서를 제출하면 출입증을 내준다.

▼ 자동차로 10분쯤 달려 도착한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는 화장실부터가 남다르다. 오벨리스크를 쏙 빼다 닮은 특이한 외형에 ‘평화통일’이란 이름표까지 달아놓았다. 그러나 해파랑길 종주꾼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간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통일전망대는 전망타워를 중심으로 꾸며졌다. 전망타워를 한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에 리모델링이 예정된 옛 건물과 교회를 배치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가는 성모상(십자가)과 불상, 망배단, 351고지전투전적비, 충혼탑 등이 터를 잡았다. 6.25전쟁 기념관과 휴게소, 식당은 언덕 아래의 널찍한 주차장에다 지어놓았다.

▼ 휴게소 앞을 지나면 탐방로가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망배단과 성모상·불상 등을 거쳐 전망타워로 연결되는 무장애 탐방로이고, 충혼탑을 거치는 왼쪽 길은 거리가 짧은 대신 경사지에 놓은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 고성 출신의 금강산대장군은 청양에 살던 칠갑산여장군을 처로 맞았다. 2019년에 열렸던 청양칠갑산장승축제 때 장승혼례를 치렀단다. 그나저나 장승은 재앙과 악귀를 막고 소망을 하늘에 전하려 했던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이자 마을공동체를 지켜온 수호신이다. 그러니 저 장승에게 통일의 길을 물어보면 어떨까?

▼ 조금 더 걷자 길이 또 다시 나뉜다. ‘DMZ 평화의 길(A코스)’의 집결지가 있는 오른편으로 진행해본다. 망배단과 성모상, 불상이 집단으로 들어서있는 곳이기도 하다.

▼ 해안초소 쪽으로 나있는 ‘DMZ 평화의 길(A코스)’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2018년 남북한 정상은 ‘판문점 선언’에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는데 합의했다. 그 일환으로 실질적 평화의 지표를 만들기 위해 조성된 곳이 ‘DMZ 평화의 길’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의 경색,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유행 등으로 폐쇄되기도 한다. 갑자기 열리기도 하고 갑자기 닫히기도 하니 잘 지켜보는 게 우선. 그런 다음 부지런히 신청해보자.

▼ A코스는 이곳을 출발해 금강통문과 금강산전망대를 거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금강통문까지 2.7Km는 걷고, 나머지 5.2Km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이밖에도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 차량으로 왕복 이동하는 B코스가 있다. A코스는 20명, B코스는 80명씩 하루 두 차례만 운영하며 치열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추첨을 할 때도 있다.

▼ 전망대 바로 아래는 ‘망배단(望拜壇)’이 차지했다. 고성지역의 실향민들이 ‘망향제(望鄕祭)’를 드리는 곳이다. <황토마루 고개 넘어 그리운 고향/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의 소원/ 메나리 가락에 목들이 메어/ 어머니 품 안으로 안기어 가는/ 이 길은 고향의 길 불망의 길>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찾아갈 수 없는 실향민의 마음인 듯, 비석에 새긴 글귀가 슬프고 처량하다.

▼ ‘망배단’의 뒤는 명품 조망대이다. 절하는 이들의 마음을 담아 다가가보면 우리네 땅이지만 우리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금강산이 가깝게는 16km, 멀리는 25km정도, 해금강은 대부분의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망배단의 앞은 종교시설이 차지했다. 1986년에 천주교에서 세웠다는 높이 10.5m의 십자가가 주인공. 성모 마리아와 김대건 신부가 양 옆을 지키는 모양새이다. 불교라고 해서 빠질 리가 없다. 1988년 신흥사에서 그 옆에다 13.6m 높이의 ‘통일 미륵불’을 세웠다. 그 신상(神像)들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있는 방문객도 보인다. 통일을 향한 마음은 종교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 해발 70m의 맨 꼭대기이자 맨 가운데는 2018년에 문을 연 ‘전망타워’가 차지했다. 1984년에 개관한 기존 전망대가 낡아 안전사고가 제기되자 디자인공모를 거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DMZ(Demilitarized Zone)의 ‘D’자를 형상화한 건물은 1층과 2층이 붙어 있고, 3층은 엘리베이터와 계단, 양 축대를 지지대 삼아 공중에 뜬 형태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특산품홍보장 등이 있고, 2층에는 전망교육실과 통일홍보관, 맨 위층은 전망대가 차지했다. 옆에 붙어있다시피 한 기존 전망대는 리모델링을 거쳐 북한음식전문점으로 운영할 계획이란다.

▼ 전망타워 앞마당은 ‘351고지 전투전적비’가 차지했다. 월비산에 있는 이 고지는 ‘앵커(anchor·닻)고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남·북한군이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일 때 고성 앞바다에서 미군 함정이 포사격으로 한국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양측 전사자가 1만 명을 넘긴 이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저 빗돌을 세웠나 보다.

▼ 북한음식전문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옛 ‘통일전망대’ 앞에는 ‘통일우체통’을 세워놓았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통일의 의지를 담은 편지를 저곳에 넣으라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받는 이를 누구로 하면 좋을까?

▼ 지상 34m 높이에 있는 전망대는 승강기를 이용하면 된다.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으나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을 듯. 다만 승강기가 30인승 1대에 불과하니 줄을 서는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 전망대에 오르면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바다의 만물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조금 더 땅겨보라는 듯 망원경(유료)까지 배치했다. 하지만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하는 게 흠이다. 남쪽(이곳 말고는 조망되지 않는다)의 사진만 게시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보다 더 깔끔한 실물을 보고 싶다면 옥외 전망대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 1층에도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관람객들의 숫자가 전망타워보다도 오히려 더 많다. 북녘 땅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게 더 간절한 이들은 500원짜리 동전을 전망 망원경 투입구에 넣고 요리조리 돌리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 난간에 서자 북녘의 산하가 고스라니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안가의 작은 섬, 송도이다. 그 왼쪽으로 군사분계선 표시용 말뚝이 있다. 군사분계선은 철책이 아니라 서해부터 동해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1,292개)을 박아 표시한다. 말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북한군 초소와 한국군 초소가 육안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남북을 잇는 도로와 철로가 있다. 잘 뻗은 도로는 금강산 관광객을 실어 나르던 육로다.

▼ 눈에 들어오는 산하는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그릴 수조차 없는 수체화이다. 예로부터 절경을 본 사람은 많아도 비경(祕境)을 본 사람은 적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 비경보다 한 단계 위를 선경으로 꼽는다. 그렇다면 저 해금강 일대는 선경(仙境)임이 분명하다.

▼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해금강이 지척이다. 송도 뒤로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끝자락인 구선봉(낙타봉)이란다. 그 오른편으로는 해금강의 말무리반도와 만물상(사자바위), 현종암, 사공바위, 부처바위 등이 도열해 있단다. 하지만 일일이 대조해 볼 수는 없었다. 가보지를 못했으니 어떤 게 어떤 것인지를 어찌 알겠는가.

▼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강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날씨와 햇빛의 방향에 따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때도 많다는데 행운이라 하겠다. 저 봉우리 들은 외금강(外金剛) 2천봉의 하나인 옥녀봉과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관음봉, 일출봉 등이란다.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에는 내금강의 비로봉도 눈에 들어온단다. 하지만 이 역시 실물과 대조해 볼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없으니 어찌할까나.

▼ 그 오른편에는 ‘금강산 전망대’가 있다. ‘평화의 길’ 탐방을 통해서만 가볼 수 있는 곳. 신청을 해도 운이 좋아야만 선정이 되니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곳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는 2km. 그 거리만큼 북녘 땅이 다가오면서, 구선봉(북한에서는 낙타봉)과 해금강, 감호(선녀와 나무꾼의 무대) 등이 그 속살까지 아낌없이 보여준단다. 참고로 그 너머 오른편에는 북한의 ‘덕무현관망대’가 있다. 높이는 351m. 원래는 ‘356고지’였단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포격으로 산의 높이가 5m나 깎여 나갈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란다.

▼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도중에는 ‘고성지역 전투 충혼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조국 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 고성지역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전몰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 주차장에 되돌아오니 먼저 내려온 박군이 기다리고 있다. 직장에서 만났으나 40년 가까이 어울리다보니 고향의 불알친구처럼 되어버린 인생의 도반(道伴)이다. 나들이 삼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마지막 구간을 함께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다’며 휴게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미리 구입해 놓은 옥수수막걸리와 안주를 놓아둔 채로 말이다.

▼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6.25전쟁 체험전시관’으로 향했다. 어떻게 찾아온 여정인데 북녘의 산과 바다를 조망하는 데서 멈추겠는가. 왜 남과 북으로 분절됐는지, 어떤 아픔인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주차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전시관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교훈삼고 민족화합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그러니 동선을 따라가며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영상, 자료, 유물 등을 통해 현실감 있는 체험을 해보자.

▼ 안으로 들어서자 별안간 폭음이 들려온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외침소리도 들린다. 전쟁터에 들어왔다고 느끼게 하려는 효과음인 모양이다.

▼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즘은 남북이 평화에 순풍이 부는 상황이지만 아픈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6.25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와 땀이 지금껏 우리를 평화롭게 살아올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전시관은 영상체험실과 사진으로 보는 6.25, 전쟁체험실, 전사자 유해발굴실, 6.25전쟁 자료실, 유엔군참전국실, 6.25전쟁 자료실, 6·25 전쟁 중 동해에서의 주요 전투를 다룬 기획 전시실, 병영체험실 등으로 꾸며졌다.

▼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곳은 ‘전사자 유해발굴실’이었다. 전투에서 희생당한 국군 전사자 유해사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은 실제 발굴품 및 유골 등을 보면서 진한 아픔과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사자의 유해발굴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며, 전투기록 분석 및 지역주민, 참전 용사 증언 등으로 발굴 가능 지역을 결정해 발굴 후 신원이 확인되면 화장 후 현충원에 안장되며, 신원이 미확인되면 신원 확인 시까지 중앙감식소에 보관하게 된다.

▼ 앗! 요즘 군인들은 침대생활을 하는가 보다. 그 옆에는 내가 신병훈련소 시절 생활했던 시설(KATUSA로 근무했기 때문에 한국군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통로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의 맨바닥에서 잠자던 옛 병영도 재현해 놓았다. 이밖에도 국군홍보실과 국군비전실에서는 국군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트레킹은 제진검문소(군인들이 민통선으로 출입하는 인원과 차량을 확인하는 곳이다)부터 시작한다. 검문소 앞에서 7번 국도를 빠져나와 ‘명파리’ 방향의 도로를 따르면 된다. 이때 무심결에 검문소를 촬영했으나 게재는 않기로 했다. 명색이 국방부에서 과장직까지 수행(비록 파견근무였지만)했던 나인데 어찌 군의 시설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 있겠는가.

▼ 검문소 앞에는 광개토대왕비만큼이나 큰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국도 7호선’의 종점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국도 7호선은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까지를 잇는 도로를 말한다. 그러니 종점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따름이다.

▼ 대한민국의 실질적 최북단인 ‘명파리(明波里)’. 마을로 향하는 도로는 넓고도 곧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간성에서 대진검문소까지 4차선 국도가 개통되면서부터 지나는 차량이 뜸해졌기 때문이란다.

▼ 그래선지 관광객을 겨냥한 커다란 식당도 간판만이 도로를 지키고 있다. ‘95년 민통선이 북쪽으로 이동되면서 관광객들을 위해 생겨난 시설들이니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다시 문을 열 수 있으려나?

▼ 광산천(鑛山川)으로 여겨지는 하천을 만난 탐방로는 다리(명파2교)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강둑을 따라 바닷가로 향한다.

▼ 광산천과 명파천(明波川)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는 출렁다리가 놓였다. 출렁다리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흔들림이다. 하지만 이 다리는 아무리 발을 굴러도 끄떡없었다. 튼튼하게 지어놓은 탓에 출렁다리라는 본분을 망각했다고나 할까? 대신 생김새는 카메라에 담아두어도 좋을 만큼 잘 생겼다. 참! 출렁다리 앞의 너른 공터는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정자와 벤치, 그리고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명파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연어의 회귀천으로 입소문이 자자한데, 은어가 서식할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1급수를 자랑한단다.

▼ 출렁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2차선 도로(명파4길)와 마주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명파해수욕장’에 이른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17분만인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널따란 주차장. 매년 여름 피서객들을 위한 해변마당축제를 연다고 하더니, 저런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역특산물을 판매하는 부스 몇 개쯤은 설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 ‘명파해변(明波海邊)’은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소박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명파리(맑은 물과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라는 이름대로 길이가 500m(폭 50m)나 되는 은빛 모래사장 너머로 동해의 푸른 파도가 넘실댄다. 민물 하천이 모래사장을 스쳐지나간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해수욕장은 여름철에만 한시적으로 문을 연단다. 그것도 군부대와 협의해가며.

▼ ‘오토캠핑장’도 자랑거리다. 야영 데크 21개소와 돔하우스 5동이 조성돼 있는데, 얼마 전 해변의 철책 제거사업이 완료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하지만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약점으로 작용된다. 군에서 개방하는 시간에만 해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약점이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해변을 개방시키니 별다른 불편은 없겠지만.

▼ 명파해변의 또 다른 명물은 ‘아트호텔’이다. 영국 작가 뱅크시(Banksy, 익명으로 활동 중인 미술가 겸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세운 ‘벽에 가로막힌 호텔(Walled Off Hotel, 조망이 최악인 건물을 뱅크시의 작품들로 치장한 게 특징)’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접경지역 아트호텔이자 동해 최북단 호텔이다. 숙소의 기능을 잃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옛 ‘명파DMZ비치하우스’를 예술가·기획자·기관이 참여해 평화·생태·미래를 주제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8개의 객실을 8명(팀)의 예술가가 각자의 색깔을 담아 꾸몄다.

▼ 도로로 되돌아와 ‘마차진’ 방향의 도로를 따른다. 이정표(마차진 3.9㎞)의 하단에 해파랑길 표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오토캠핑장 뒤로 난 길을 따르고 있었다. 또 다른 볼거리인 ‘승마체험시설’을 눈에 담고 그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본래의 탐방로와 만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도로를 따라 200m쯤 걸으니 교통표지판(제진 검문소 1km 앞)이 세워져 있는 국도 7호선(동해대로)의 '명파교차로' 램프구간이 나온다. 탐방로는 교차로 조금 못미처에서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제진검문소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산비탈에 걸쳐놓은 계단 앞에는 ‘관동팔경 녹색경관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이후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들도 하나같이 같은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었다). 관동팔경녹색경관길이란 강원·경북지역의 7개 시·군이 상호 협력해 만든 길이 330km의 보행로로, 관동팔경 가운데 북한에 있는 2곳(삼일포·총석정)을 뺀 나머지 6곳(청간정·의상대·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을 잇는다. 조선 선조 때 문신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관동팔경을 유람한 감회를 관동별곡에 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감탄했던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여겠다며 세상에 내놓았다.

▼ 관동팔경의 아름다움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시작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이 나타나는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꽤 길기까지 하다.

▼ 고개를 돌리자 ‘명파리’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명파리(明波里)란 지명은 동해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낀 아름다운 경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광산천과 명파천이 들녘을 적셔주어 전답도 비옥하단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이유일 것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자 탐방로는 착하게 변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완만해졌다. 거기다 산길은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심을 정화시켜주니 이 보다 더 좋은 산책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 탐방로는 능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시야가 트이는 것도 아니다. 걷기 편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나있다고나 할까? 참! 마차진을 3.4km 남겨놓은 지점에서는 군 작전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 마차진을 2.7km 남겨놓은 지점부터는 임도를 탄다. 400m쯤 더 걸으면 임도는 아예 일반도로 수준으로 변한다, 인근에 군부대라도 있는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 산길로 들어선지 40분쯤 되었을까 이동통신 중계탑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정표(마차진 1.8㎞/ 명파해변 2.3㎞)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마차진 푯말이 실제와는 다른 방향에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표식에서 제대로 된 방향(왼편)을 알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눈치 빠른 나그네라면 오솔길 초입에 세워놓은 봉수대(술산봉수) 안내판을 보고도 대충 눈치 챌 수도 있겠다.

▼ 100m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봉수대 갈림길(이정표 : 마차진 1.7㎞/ 명파해변 2.4㎞)’이다. 해파랑길은 봉수대를 거치지 않으니 마음 내키는 나그네들만 들러보면 되겠다. ‘술산봉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능선을 타면 된다.

▼ 봉수대로 올라가는 오솔길은 무척 곱다. 솔숲 사이로 보드라운 흙길이 나있는데,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정비 또한 잘 되어 있었다.

▼ 그렇게 10분 정도 오르자 ‘술산봉수(戌山烽燧)’가 얼굴을 내민다. 석축기단을 쌓고 그 위에 봉화 아궁이를 올린 형태인데, 이는 전형적인 연변봉수대의 구조라고 한다. 

▼ 북쪽의 구장천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남쪽 정양산(거진읍 반암리) 봉수로 전달하던 술산봉수는 조선 후기에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국방에 대한 관심이 수도와 남북의 변경 지역에 집중된 데다, 왜구의 출몰까지 적어지자 동해노선의 중요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단다.

▼ 봉수대 곁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들어섰다. 봉​수란 변경 지역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다른 기지에 신속히 알리려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했었다. 봉수 부근의 경계도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밤에는 횃불(熢 봉)로, 낮에는 연기(燧 수)로 신호했다. 그 기능을 저 감시탑이 이어받았다고나 할까?

▼ 시야는 동쪽, 그리니까 동해바다 쪽으로만 트인다. 바다 건너에서 출몰하는 왜구를 살피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 하산은 반대방향이다. 정규 탐방로는 아니지만 길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다. 초입에서 ‘밀양 박씨’ 무덤을 만났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 오솔길을 따라 5~6분 정도 내려오자 본래의 탐방로와 다시 만난다.

▼ 봉수대에서 내려선지 25분 만에 도로(금강산로)에 내려섰다. 아까 산을 올랐던 명파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관동팔경녹색경관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아니 이곳에는 이정표(마차진 0.1㎞/ 명파해변 4.0㎞)까지 세워놓았다.

▼ 해파랑길은 왼편으로 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린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길만 사나울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0m쯤 걷자 ‘사거리(이정표 :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0.5㎞/ 명파해변 4.3㎞)’가 나온다. 조금 전 하산지점에서 왼편으로 들어섰었더라면 이곳으로 빠져나왔을 것이다.

▼ 하산 지점의 이정표가 가리키던 ‘마차진(麻次津)’에는 대공사격장이 들어서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진촬영은 금지다. 박군과 내가 일부러 도로를 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 조금 더 걸으니 .KBS 인간극장에서 ‘일심이네 집’으로 소개되었다는 가게가 나온다. 100% 태양건조 오징어만을 고집한다는 소문답게 마당에서 오징어가 말라가고 있다. 하지만 건어물가게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전화를 하면 달려 나올라나?

▼ 날머리는 통일안보공원(원점회귀)

모퉁이만 돌면 통일안보공원인데도 도로는 적막강산이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길가 상점이나 음식점도 하나같이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도 문을 연 건어물가게 하나를 만났고,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를 몇 마리 살 수 있었다. 아이스팩으로 포장까지 해주는 친절을 뒤로하고 길을 나서니 곧이어 통일안보공원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을 걸었다. 앱이 5.87km를 찍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