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8코스

 

여행일 : ‘22. 1. 23(일)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과 간성읍, 거진읍 일원

여행코스 : 가진항→남천교→동호2리→북천철교→송강·정철정→반암해변→거진해변→거진항(거리/시간 : 16.6km/ 실제는 14.11km를 3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은 떠오르는 해와 푸른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부산의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조성된 초‘광역 걷기길’이다. 770㎞에 이르는 동해안을 총 10개(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구간 5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오늘은 5개 코스 나누어진 고성군 구간(65.3km)의 세 번째 코스를 걷게 된다. 가진항을 출발해 남천과 북천, 반암항과 해변을 거쳐 거진항에 이르는 길이 15km의 트레일이다. 이 구간은 걷는 내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눈에 담는다. 또한 백두대간의 헌걸찬 모습도 조망된다. 하지만 대표 볼거리로 제시된 ‘연어맞이 광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카오나 네이버 등 그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는 않는데다, 연어맞이광장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 개선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 들머리는 가진항(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속초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간성(고성군청 소재지) 방면으로 올라가다 공현진교차로(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에서 바닷가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영화 ‘군함도’의 촬영지인 가진항(加津港)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48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가진항입구 삼거리’의 북동쪽 코너에 세워져 있다.

▼ 48코스는 가진항(고성군 죽왕면)에서 출발해 남천교와 북촌 철교(간성읍)를 지나 거진항(거진읍)에 이른다. 길은 농로와 해변길, 남천과 북천길을 걸으며 다양한 변주를 울린다. 갈 수 있는 남쪽 백두대간의 최북단 우뚝한 향로봉(2003년 나도 저곳에서 백두대간을 완성했었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제시된 길이는 16.6km. 하지만 남천교가 바닷가에 새로 놓이면서 2km 정도가 단축됐다.

▼ 해파랑길(고성구간) 안내도는 명태를 품었다. 이곳 고성군이 명태의 집산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가진항의 안내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편의시설을 설치했다면, 사후관리까지 해나가는 게 납세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 차에서 내리면 ‘활어회센터’가 길손을 맞는다. 맞다. 가진항은 ‘물회 1번지’로 유명하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자연산 가자미·오징어·해삼 등이 각종 야채와 초고추장을 푼 칼칼한 국물과 어우러지는 고성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별미다. 작년 이곳을 찾았던 우리 부부는 기본(일반회+해삼+멍게, 1만5천원)에 소라를 추가하면서 5천원을 더 부담했었다. 참! 물회는 국수를 말아먹어야 제 맛이다. 말만 잘하면 무한 리필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 회센타 뒤는 신년 일출로 유명한 ‘공현진2리 해변’이다. 아니 스뭇개바위(옵바위)로 더 유명하다. 해변의 남쪽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웅장한 크기의 기암괴석으로, 생긴 그 자체만으로도 황홀한데, 바위 사이로 해라도 떠오를라치면 말로는 표현 못할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북방파제(빨강등대가 있는 곳)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사직된다. 아니 ‘속초해경 가진출장소’ 방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수도 있겠다.

▼ 가는 길목이니 어판장 구경은 필수다. 전체적으로 한갓지지만 경매를 앞둔 탓인지 어수선한 풍경이다. 지난 20일이 대한(大寒)이었으니 아직은 엄동설한. 모닥불에 시린 손을 녹여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요놈 때문에 망신당할 뻔 했다. 어설픈 상식으로 ‘복어’라 우겼는데 경매 순서를 기다리던 어부가 ‘도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건드리면 자신의 몸을 활짝 부풀리는 게 영락없는 복어다.

▼ 탐방로는 해양출장소 앞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이차선도로인 ‘가진해변길’로 올라선다.

▼ 오른편은 ‘가진리(加津里)’. 조금 전 트레킹을 시작했던 ‘포구(浦口)’의 배후마을이다. ‘가진’이란 지명은 넉넉하게 잡히던 수산물에서 유래됐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덕포’. 규모는 작아도 예부터 다른 어항보다 수산물이 많이 나 주민들이 덕을 많이 봤다는 것이다. 후에 작은 나루가 하나 더 생기면서 ‘가포진(加浦津)’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진리(加津里)로 고쳐졌다.

▼ 바닷가에 들어선 갤러리(Square Root Gallery)가 눈길을 끌기에 다가가 봤다. 미술시장이 열린다니 소품이라도 하나 구입할 수 있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로 나가니 ‘가진해변’이 드넓게 펼쳐진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서는데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새로 내놓은 도로답게 거칠 것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 겨울 풍경은 역시 황량하다. 바다나 들녘 할 것 없이. 대한(大寒) 추위가 여전하지만 햇살은 더없이 강렬했다. 그 빛살아래 펼쳐지는 세상은 이제 막 펼쳐놓은 순백의 도화지다. 저 공간엔 사라진 지난 흔적들 대신 새로운 희망이 하나둘 수 놓여 갈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최근 개통했다는 ‘남천교’를 건넌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기존의 남천교까지 ‘ㄷ’자 모양으로 빙 돌아오느라 3.5km를 걸어야만 했는데, 이 다리가 놓임으로써 0.7km로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해파랑길 순례자들에게는 희소식 중에서도 희소식이라 하겠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백두대간을 배경삼아 들어선 간성읍(杆城邑)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성군 중앙부의 읍으로 8·15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되었다. 진부령(陳富嶺)에서 발원하는 북천(北川)과 마산(馬山)에서 발원하는 남천(南川)이 각각 읍의 북부와 남부를 지나면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를 형성한다.

▼ 반대편은 남천(南川)의 하수역이다. 남천은 마산(고성군 간성면 탑동리)에서 발원하여 향목리(죽왕면)에서 동해로 유입되는 길이 8.3km의 지방하천으로, 북천·자산천과 더불어 고성에서 소문난 은어 낚시터다. 그래선지 겨울철이면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오른편 둑길로 내려선다. 그리고 배수펌프장을 지나자 ‘동호리 해변(東湖里 海邊)’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해변의 초입에는 정자와 벤치. 운동기구 등을 갖춘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동쪽에 호수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동호리’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갈벌(갈대가 많다는), 선유리(仙遊里, 경치가 아름답다는) 등으로도 불려왔다나?

▼ 사람을 끌어드리려는데 포토죤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마스코트 삼아 세워놓은 듯한 저 손가락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 파도와 사랑 마크를 버무린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 반대편에는 가진해변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텅 빈 겨울 바닷가. 특히 일망무제의 동해 바다를 굽어보노라면 가슴에 쌓여 있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단번에 사라지는 듯한 통쾌함을 맛볼 수 있다.

▼ 탐방로는 해변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대신 방풍림용으로 조성된 듯한 울창한 해송 숲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아니 숲속을 들락거리기도 한다.

▼ 숲은 꽤 굵고 오래 묵은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더위를 피해 떠나온 여행자들에게는 최적의 피서지가 될 듯. 하긴 저런 여건을 갖추었기에 고성군의 관광종합계획에 ‘동호리 해양스포츠체험센터 조성사업’이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 길을 걷다보면 ‘관동별곡 800리길’ 이정표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580년 고성과 경북 울진 사이에 있는 관동팔경인 총석정·삼일포·청간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 등을 다니며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관동별곡을 지었다. 그가 유람한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트레일이 ‘관동별곡 800리길’인데 기존의 해파랑길과 겹쳐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가 곧게 뻗어나간 신설도로로 올라서는가 싶더니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트레킹이 끝나고 갖게 될 술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져보기 위해서이다. 코로나라는 놈이 ‘형우’군과 나 사이를 그만큼 오랫동안 갈라놓았다는 얘기도 된다.

▼ 신설도로의 끝에는 ‘북천 배수펌프장’이 있었다. 하지만 도로를 따른 탓에 바닷가에 있다는 습지와 갈대밭은 구경할 수 없었다.

▼ 펌프장의 뒤는 북천(北川)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하수역이다. 물가에는 모래언덕이 여럿 형성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의 물길은 바다에서 고향을 찾아 북천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회귀 경로이다. 참고로 북천은 칠절봉(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발원하여 봉호리를 지나 거진읍 송죽리에서 동해로 유입되는 길이 20.17km의 지방하천이다.

▼ 펌프장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강둑을 따른다. 강변에는 요런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맞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 건너에 지어놓은 정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작나무와 소나무로 치장된 자그마한 산을 배경으로 삼은 게 여간 멋스럽지가 않다. 참! 오리 떼도 볼 수 있었다. 아까 남천에서 놓쳤던 ‘철새 떼’를 엉뚱한 북천에서 보았다고나 할까?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25분. ‘북천 철교(北川 鐵橋)’에 도착했다. 1930년경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한 동해북부선(원산-양양)의 철교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철교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자 아군이 폭파하게 된다. 그 후 60여 년간 교각만 황량하게 남아있던 것을 행정안전부가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저탄소 녹색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이곳을 ‘평화누리길’로 지정하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 초입에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마차진터널, 공현진터널, 간성역, 문암역의 철도관사 등 새롭게 태어나야 할 문화재급 시설들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폐철각(廢鐵脚)을 기증받은 고성군은 이를 리모델링하고 길이 191m의 덱 상판을 설치함으로써 2011년 걷기와 자전거마니아들을 위한 전용교량으로 재탄생시켰다.

▼ 교각의 잔여 공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 주변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7번 국도의 ‘북천1교’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뒤로 펼쳐지고 있을 백두대간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저곳에 있을 향로봉은 백두대간의 남쪽 마룻금이 끝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이 끊어놓아 못내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나 역시 저곳에 올랐었다. 그리곤 북녘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에서 감히 눈길을 떼지 못했었다. 내 나이 벌써 칠십. 나에게 백두대간의 북녘구간 종주는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후배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시기가 앞당겨져 그 대열에 나도 끼었으면 더 좋겠고 말이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강둑을 따라 바닷가로 향한다. 이때 ‘리컴벤트 자전거’를 타고 가는 라이더를 만났다. 등을 대고 누워 타는 형태의 자전거로 편안한 자세로 페달을 밟을 수 있어 장거리 주행에 알맞다고 알려져 있다. 공기 저항도 작아 더 빠른 주행이 가능한데 디자인이 독특해 이미 선진국에서는 꽤 많이 보급돼 있단다.

▼ 잠시 후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의 북천철교인증센터(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시설)가 있는 쉼터에 이른다. 주인장격인 정자는 ‘松江鄭澈亭’. 조선 명종·선조 때의 정치인이자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정철(鄭澈, 1536-1593)의 이름으로도 모자라 그의 호(松江)까지 더해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은 그와의 인연을 내세우려는 모양이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그러지 않음만 못했다.

▼ 쉼터의 한켠. 강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아까 건너편 강둑을 걸으면서 철새 떼를 보았었는데, 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 해안 쪽 강변에는 데크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저 ‘생태습지’를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시간을 절약하는 만큼 형우군과 갖게 될 즐거운 술자리가 더 길어질 테니까. 하지만 습지를 그냥 지나친 건 두고두고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북천 하구의 전형적인 특징. 즉 침식과 퇴적이 병행하면서 만들어진 초지형태의 습지지역을 구경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마산해안교(초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를 건넌 탐방로는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사유지(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놨다)로 여겨지는 야트막한 산(아래 사진 : ‘마산’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반암리 솔밭길 1㎞/ 마산해안교 0.6㎞)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송죽 배수펌프장’이 손짓을 보내온다.

▼ 전혀 강원도답지 않게 드넓은 반암 들녘. 바닷가에는 방풍용으로 심어놓은 듯한 송림이 일자로 길게 늘어서 있다. 그게 하도 곧아서인지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 배수펌프장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오른편에 해송 숲을 끼고 이어진다. 사유지인지는 몰라도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출입을 막고 있었다.

▼ 언덕 아래로 난 작은 굴다리도 지난다. 군부대(왼쪽)와 오른쪽 해안가 초소를 연결하는 언덕에 뚫려있으니 대전차용의 시설일 수도 있겠다.

▼ 마산해안교에서 35분. 동해대로(국도 7호선)를 만나지만 탐방로는 국도를 따르지 않고 반암교차로(이정표 : 반암리 0.2㎞/ 마산해안교 2.9㎞)에서 일반도로를 따라 반암리로 향한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반암항 0.7㎞/ 반암리솔밭길 1.5㎞)에서는 오른편 반암마을로 들어선다.

▼ 마을은 민박집 일색이다. 규모가 조금 크다싶으면 어김없이 ‘펜션’ 간판을 달았다. 바닷가 마을이지만 주업은 서비스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2016년엔가 숙박·음식점 등의 서비스업이 접경지역 산업구조의 주축을 이룬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사실이었던가 보다.

▼ 민박집 중 일부는 바닷가 담장을 터 해수욕장과 연결시켰다. 눈을 뜨자마자 바닷물로 뛰어들 수 있으니 피서객들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숙소가 어디 있겠는가.

▼ 마을을 벗어나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반암항 0.1㎞/ 반암리솔밭길 2.1㎞). 탐방로는 오른편 ‘반암항’으로 향한다.

▼ 뒤돌아볼라치면 반암해변(盤巖海邊)이 드넓게 펼쳐진다. 반암은 넓고 평평한 바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바위는 보이지 않고 온통 모래사장뿐이다. 그 길이가 무려 12㎞나 된다는데, 군사지역 내에 있어 현재는 200m만 개방하고 있단다.

▼ 작은 어선 두어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반암항은 그냥 통과다. 생선회 값이라도 비교해보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시설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반암항을 약간 지난 지점. 바닷가 경사지에 커다란 시멘트 구조물이 2열로 설치되어 있었다. 대전차 방어용 구축물일 것이다.

▼ 바닷가에 쌓여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선형의 아름다운 모양새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들과는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 접경지역임을 실감나게 하는 군 초소도 눈에 담아본다. 멸공통일을 외치며 군 생활을 하던 우리만큼은 아니어도, 아직까지도 북한은 우리의 주적(主敵)이다. 어찌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 오른쪽 발아래로 곧장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몰려드는 파도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다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도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 초소를 지나면 ‘송포2리 해변’이다.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데크 탐방로가 길게 놓여있다.

▼ 갈매기를 품은 바다는 낭만적이다. 쉬지 않고 들락거리며 모래밭을 애무하는 파도의 숨결, 모래사장에 촘촘히 찍힌 갈매기의 발자국은 우리를 낭만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특히 갈매기의 날갯짓은 한여름의 따뜻한 원초적 기억까지 자극시킨다. 사람들이 겨울바다를 운운하며 달려오는 이유일 것이다.

▼ 하지만 해변을 오래 걸을 수는 없었다. 해안침식이 심해 곳곳에서 길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별 수 없이 도로(해오름해변길)로 올라섰다. 아니 탐방로도 도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해안침식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45분. ‘거진1교(이정표 : 거진항 1.9㎞)’를 건너면 거진리(巨津里)다. 이 마을은 오징어가 호황을 이루던 1970년대만 해도 인구가 2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500년 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가다 ‘클 거(巨)'자 모양으로 생긴 지형을 보고 장차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 했다니 말이다. ‘거진(巨津)’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거진리는 두어 개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거탄진리(巨呑津里)라는 옛 기록이 있는가 하면, 자산천이 둘로 나뉘면서 1km 정도를 길게 돌아 우회한다고 해서 수회리(水廻里)로 불리기도 했다. 두 갈래였던 물줄기를 곧장 바다로 흐르게 고친 후, 넓은 하천부지와 해안 매립부지를 택지로 조성해 현재 모습으로 만들었단다.

▼ 잠시 후 ‘거진11리 해변’에 이른다. 거진읍내 초입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1983년 문을 연 이래 매년 여름철에만 한시적으로 개장한단다. 백사장의 길이가 500m나 된다니 제법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라 하겠다. 거기다 읍내라서 숙식의 편의성까지 갖춰 가족단위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 관광입국(觀光立國)이 세계적인 추세가 된 요즘. 우리나라 지자체들이라고 관광객 유치를 뒤로 제켜둘 리가 없다. 해변에 예쁘장한 조형물들을 세워 인생샷 하나쯤 건져보려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그중 하나가 ‘명태의 꿈(아래 사진)’이다.

▼ 방파제는 낚시 삼매경인 강태공 차지다. 바람에 내맡긴 귀가 시릴 만도 하건만 귀를 감싸는 것까지 잊고 있다. 그래 낚시꾼에게 겨울바다는 그리움일 것이다. 입질을 기다리는 사무치는 그리움. 세상의 시름까지 잊게 만드는 그런 그리움이다.

▼ 동방파제와 서방파제로 둘러싸인 거진항(巨津港)은 고성군에서 가장 큰 포구이다. 하긴 1995년에 이미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거진항이 이렇게 커진 것은 모두 명태 덕분이라고 한다. 거진항은 오랫동안 명태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시내에는 다방도 많았고, 식당은 술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 명태로 바꾼 경기였다. 하지만 명태가 잡히지 않는 요즘은 추억속의 옛 얘기가 되어버렸단다.

▼ 어촌계 사무실로 여겨지는 건물은 벽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의 배들과 함께 바닷속 풍경을 그려 넣었는데, 대표 어종으로 돌문어를 꼽았다. 축제까지 열고 있는 ‘명태’도. 그렇다고 물회로 유명한 ‘가자미’도 아닌 것이다. 세월의 부침이 대표 어종까지도 바꾸어놓은 모양이다.

▼ 길가 건조대에는 말린 물가자미가 오밀조밀하다. 그 옆에는 자신이 터줏대감임을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명태 몇 마리도 걸려있다. 바닷가. 그것도 겨울철이면 저런 풍경은 일상화가 된다.

▼ 날머리는 고성수협 바다마트(고성군 거진읍 거진리)

몇 걸음 더 걸으면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세워져 있는 ‘고성수협 바다마트’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수산물판매장’. 그리움을 핑계 삼아 나를 따라나선 형우군의 숨은 노림은 바로 ‘회’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숭어와 물가자미를 넉넉하게 샀다. 서울의 생선은 대부분이 양식인데다, 스트레스를 받아 진이 다 빠진 것이다. 금방 잡아왔다는 자연산, 그것도 옆에서 군침을 흘리는 친구까지 있는데 부족해서야 되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가 14.11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생선가게 아줌마가 가르쳐준 ‘횟집’으로 들어가 8천원(2인)으로 상을 차린 다음 회를 먹었다. 회가 고소하고 너무 맛있었다. 아니 그 느낌은 순전히 형우군만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초밥. 10년 전쯤 제주도로 골프투어를 갔다가 터득하게 된 비법이다. 같이 간 어느 CEO께서 알려주셨는데, 맛김을 깔고 그 위에 밥과 회, 그리고 겨자를 차례로 쌓은 다음 또르르 말아먹으면 기막힌 초밥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소주 2병과 맥주 1병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비워버리고 말았다.

▼ 수산물공판장를 빠져나오면 어촌계가 운영하는 ‘활어회센터’. 그 사이의 광장(주차장 겸용)에는 거진항의 마스코트인 명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요즘은 그 빛이 바랬다지만, 옛날 이곳은 명태 잡이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었다. ‘고성 명태축제’를 아직까지 계속해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