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1코스

 

여행일 : ‘19. 5. 18()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영덕읍과 축산면 일원

산행코스 : 영덕해맞이공원(2.1km)오보해변(6.8km)경정리대게탑(2.7km)죽도산전망대(1.2km)축산항(소요시간 : 12.8123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이번 구간도 역시 영덕 블루로드를 따른다. 해파랑길 21코스가 블루로드의 B코스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블루로드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바닷길을 끼고 있다. 그래서 타이틀(title)마저도 환상의 바닷길이자 바다와 하늘이 함께 걷는 길이란다. 파도소리 따르며 소나무 숲도 지나고 갈대숲도 지나다 보면 노물항과 경정마을 등 바닷가에 들어앉은 작은 어촌마을들을 만난다. 돌미역과 대게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특산물들이 생산되는 곳이다. 또한 바다부채길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길을 걸으며 기기묘묘한 생김새의 갯바위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언덕 하나를 몽땅 뒤덮어버린 오매향나무의 늠름한 풍채를 직접 느껴볼 수도 있다. 날머리인 축산항에서 싱싱한 활어회를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자랑거리라 하겠다.


 

들머리는 영덕해맞이공원(영덕군 강구면 오포리 83-9)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포항방면으로 내려오면 강구항이 나온다. 여기서 20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축산·영해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들머리인 영덕해맞이공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우린 200m쯤 못미처에 위치한 창포말등대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등대 아래에 있다는 멋진 갯바위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창포말등대는 대게의 고장 영덕답게 대게의 집게다리가 등대를 떡하니 붙잡고 있는 모양새다. 하긴 오늘 걷게 될 블루로드B코스가 푸른 대게의 길이란 이름을 따로 두었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탐방로는 창포말 등대의 바로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대게 조형물의 뒤에서 열린다. 튼튼한 집게발이 영덕의 상징인 양 파르스름한 빛깔을 띤 채 하늘을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블루로드(B코스)의 들머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정규의 코스는 큰길가로 난 걷기 전용 데크 길을 따라 잠시 걷다가 해맞이공원 정자가 있는 곳에서 해안절벽 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참고로 대게는 다리가 대나무처럼 곧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덕의 축산 앞바다 쪽 고운 모래바닥 심해에서 3·4월 잡힌 것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자 바닷가에 데크전망대(이정표 : 오보해수욕장2/ 약속바위/ 블루로드 B코스 시점, 해맞이공원)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는 약속바위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곳 해맞이공원이 영덕에서 가장 유명한 일출 명소 중 하나라고 소개하면서 전망대 근처에 있는 바위의 표면에 볼록하게 새겨진 문양(文樣)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등이 보이게 새끼손가락을 편 왼손 주먹의 형상이어서 약속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바위가 힘을 받아 갈라지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문양이라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영겁의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온 약속바위와 손가락을 걸고 찍은 사진은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부언과 함께 말이다.



전망대는 온통 흰 암석들로 포위되어 있다. 2억 년 전(중생대)에 땅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굳어져 만들어진 화강섬록암(花崗閃綠岩, granodiorite : 화강암과 섬록암의 중간 정도 화학성분을 가진 암석)이라고 한다. 화강암처럼 흰 빛깔을 띤 이 암석은 처음에는 쪼개진 틈이 없이 매끈했으나 깊은 곳의 큰 압력을 받아서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때 동서방향의 큰 수직 틈에 의해 평평한 바위 면이 생겼고, 다양한 각도의 여러 틈들이 잇달아 생기면서 여러 가지 문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약속바위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양이라고 보면 되겠다. 특히 약속바위의 손등 오른쪽에는 점과 같은 검정 무늬가 있는데, 이는 화강섬록암이 만들어질 당시에 다른 성분의 검은 용암이 주입되어 만들어진 것이란다.



오보해수욕장 방향으로 트레킹을 이어간다. 해안에는 동해 바닷물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 생긴 다양한 침식지형이 발달해 있다. 바닷가의 낭떠러지인 해식애, 바닷물에 의해 평평하게 깎인 땅인 파식대지, 그리고 서로 부딪혀서 둥글게 된 돌들이 모인 몽돌해변 등. 이런 경관들은 이곳의 암석이 땅 위에 드러난 이후부터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의해 만들어져왔으며, 이러한 과정은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란다.



탐방로는 이런 침식지형들을 헤집으며 나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게 불가능할 경우엔 바위를 에돌아간다. 그마저도 불가능한 곳에는 안전을 위해 데크로 계단을 놓았다. 탐방객을 위한 배려는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걷는 게 불편할 정도로 공사자재들이 널려있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우리를 위한 공사가 아니겠는가.



가끔은 소나무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안가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오른편 옆구리는 여전히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풍경을 두고 환상의 바닷길이라고 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이런 풍광들을 여유롭게 둘러보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전망 좋은 곳에다 벤치는 물론이고 예쁘장한 팔각정까지 들여앉혔다. ! ‘() 받기 좋은 곳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뒤의 높은 산이 북쪽 청룡과 남쪽 백호로 형성되어 있어, 산에서부터 해안 바위까지 기가 뻗어 해안 바위부분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이다. 기를 받는 방법까지 설명하고 있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 몸에 힘 빼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편안하게 5~10분 정도 호흡을 하면 기를 받아갈 수 있단다.



25분 정도의 해안절경 구경이 끝나자 대탄항(이정표 : 대탄리 0.4/ 해맞이공원 1.1)’이다. 하지만 항구가 작은 탓인지 어선 대신에 보트 두어 척이 매어져 있을 따름이다. 합숙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포구의 위쪽에 자리 잡은 것 외에는 눈에 띠는 시설도 없다. ‘해양안전 체험장이라며 이곳에서 지켜야할 안전수칙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국립청소년해양센터에서 운영하는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잠시 후 대탄리(大灘里)로 연결된다. 바닷가 큰 여울 옆에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해여울또는 해월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이 마을은 16세기 무렵 정영용(鄭英用)이란 사람이 개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마을 이름은 향월(香月)이었단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강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대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단다. 마을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하겠다. 하지만 마을 앞에 자그마한 해수욕장이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마을이었다.



대탄마을에서 탐방로는 20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이어서 차단봉으로 구분해놓은 인도를 따라 7분쯤 걷자 오보리(이정표 : 노물리방파제 0.8/ 대탄해수욕장 0.5)가 나온다. 새천년기념 마을 숲이 트레이드마크인 오보마을(烏保里)은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올치미라고 불렀단다.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마을 앞 해수욕장의 백사장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것 말고는 오보마을 역시 조금 전에 지나왔던 대탄리와 하등에 다를 것이 없다. 항구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아니 다른 점도 있기는 하다. 저 멀리 풍력발전단지에서 풍차들이 맴을 돌고 있는 게 보이니 말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고개로 올라서자 탐방로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만들어놓은 데크계단 입구에 이정표(노물리방파제 0.6/ 대탄해수욕장 0,7)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데크로드가 끝나면 예쁘고 빨간 등대가 길손을 맞는다. 제법 큰 규모의 포구를 갖고 있는 노물리(老勿里)이다. 이곳은 돌미역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채취한 돌미역은 비타민과 알긴산이 풍부해 동맥경화와 고혈압을 예방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칼슘과 정신을 안정시키는 칼륨, 암세포 발생을 억제하는 셀레늄도 풍부해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영덕은 다른 해안과 달리 강물 등 민물 유입이 없어 바닷물의 염도가 일정해 좋은 미역이 생산된다고 한다. 특히 사진리에서 나오는 미역을 최고로 친다고 하나, 이곳에서 채취되는 미역도 그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줄기가 짧고 조리 후에도 탄력을 유지하며 윤기가 나는 게 특징이란다.



노물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를 따른다. 해안절벽으로 들어서자 절경이 펼쳐진다. 속이 다 비치는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절벽 위로 보드라운 흙길이 나 있다. 바닷가 쪽으로 밧줄을 이어 놓은 모습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광이다. 또한 길가는 초록색 풀들로 덮여있기도 하다. 간간이 들꽃들도 보인다. 그러니 좌우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초록과 푸름의 연속이다. 눈이 편하다.



바닷가에는 절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들어오는 갯바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오묘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로 기기묘묘하게 생겼다. 그런 풍광을 조금이라도 더 즐겨보라는 듯이 탐방로는 절벽의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위험한 곳에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안전까지 도모했으니 우리에겐 눈이 호사(豪奢)를 누릴 일만 남았다.



바윗돌과 흙길, 나무 난간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솔향과 바다 내음에 심신이 편안해질 무렵 해변에 세워진 해녀 조형물과 만났다. 미역으로 유명한 석리와 노물리의 특징을 살려, 물질을 끝내고 해안으로 올라오는 해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다시 길은 이어지고 바닷가는 여전히 기암괴석들로 가득 차 있다. 절벽 위로 난 길이 위험할 수도 있으나 데크를 설치해 안전을 도모했다. 중간에 송림의 오솔길을 만나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니 눈이 호사를 누리느라 그런 생각이 들어올 틈도 없다. 누군가는 정동진에서 심곡항까지 이어지는 부채길이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도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갖고 있다. 아니 사람의 손길이 덜 미친 탓에 천연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해야겠다.




길가 밧줄난간이 숫제 무당집 처마로 변해있다. 블루로드를 찾은 산악회나 동호인들이 명품코스를 다녀간 흔적을 집중적으로 달아 놓은 것이다. 저렇게 많은 단체들이 다녀갔다 함은 그만큼 이 구간(블루로드 B코스)이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65길이의 명품 둘레길인 블루로드는 모두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B코스푸른 대게의 길이 백미(白眉)로 꼽힌다. 해안절벽과 기암괴석의 갯바위 등 다양하고 수려한 경관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옥색 바닷길로 분류되는 전체적인 풍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가까운 바다는 비취색, 먼 바다는 진한 쪽빛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 소비자 선정 관광테마 부문에서 최고 브랜드 대상을 받았고, 2012년에는 한국인이 꼭 가 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에 뽑혔다. 2010년과 2009년엔 명품 녹색길 33’,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7에 이름을 올렸다. 명실공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바닷길이라 하겠다.




바닷길로 들어선지 30분쯤 되었을까 탐방로는 다시 20번 지방도(이정표 : 석동마을 입구 1.1/ 노물리 방파제 1.5)로 올라선다. 하지만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바닷가로 내려간다. 그것도 조금 전에 방향을 틀었던 개울의 건너편이다. 이럴 것이라면 왜 도로로 올라오게 했을까가 궁금해진다.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까 방향을 틀었던 지점에 개울물이 불어나 징검다리가 잠길 경우에 해안도로를 경유해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하릴없이 길을 우회한 셈이다. 냇물이 적어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하등에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후로도 탐방로는 바닷가를 따른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아까와는 많이 다르다. 대부분이 소나무 숲길을 따른다. 오른편은 여전히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 일색이다. 다만 그 규모와 숫자가 아까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을 따름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경사가 심한 오르내림이 반복된다는 점이라 하겠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드나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석리(石里)가 나온다. 경정3리를 1남겨놓은 지점이다. 석리마을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층층이 지어진 집이 특히 예쁘다. 집들이 서로 머리를 맞댄 채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 마치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같다 하여 따개비 마을로도 불린단다.



절벽에 걸쳐놓은 철제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블루로드 가운데서도 가장 백미(白眉)로 꼽히는 구간이다. 또한 해파랑길 중에서도 이만한 절경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들머리에다 블루로드의 스탬프를 찍는 곳을 만들어 두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블루로드 지도에 각 구간에 있는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블루로드 완주메달을 받을 수 있단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나에게는 이미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계단을 올라 모퉁이를 돌자 입이 딱 벌어진다. 바위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치듯이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바다 쪽으로 밧줄을 이어 안전을 도모했지만 파도가 치면 그 여파에 옷이 젖을 정도로 바다가 가깝다. 해안절벽의 바위를 걷는 맛이 제법 스릴 있다. 발밑에서 파도가 부서지며 갯내를 한껏 내뱉는다.



비가 그치고 시야가 넓어지자 보이지 않던 낯선 풍경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안초소다. 동해안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던 그 해안초소가 곳곳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해파랑 쉼터로 다시 태어났다. 비어있는 초소의 주변에 데크를 깔았는가 하면 군인이란 제목의 조형물도 설치했다. 벤치도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은 아직도 군인들이 초소근무를 서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군인들의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친근감 있게 방문객들을 맞이하려는 의도에서 조성한 시설이라고 한다.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들이 아슬아슬하다. 그 덕분에 주변 풍광은 화려하다. 이런 수려한 바다와 길을 여기 아니면 또 어디서 걸어보겠는가. 길이 험해도 걷고 또 걷는 이유이다. 가슴속 저 밑바닥에 엉겨 붙어 있는 묵은 때마저도 말끔히 씻어내 버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걷고 있는 바다를 에두르며 이어지는 길들은 군인들이 다듬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경계를 서기 위해 개척했고, 또 그들이 매일같이 다니던 길이다. 사실 오랜 세월 동안 바다는 경계용 철책 너머에 있었다. 다가가 안을 수 없는 경계의 저쪽이 바다였던 것이다. 그 길이 지금은 블루로드라는 둘레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길을 지금 우리가 걷고 있다. 평화를 향한 세상의 변화에 경의를 표해본다.



바닷가 갯바위는 강태공들의 세상이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들은 던지고 채고, 다시 미끼를 끼운다. 그 옛날 주나라의 강태공이 때를 기다리듯이 그들은 월척의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빼어난 경관에 취해 20분 정도를 걷다보면 경정3에 이르게 된다. 몽돌해안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선바위(立石)’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며 다가가보니 옆모습은 넓적하다.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 아쉬움은 오른편 해안에서 해소된다. 표고버섯 모양을 한 돌들이 납죽납죽 엎드려져 있는 풍경이 참으로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자연 발생적 아름다움에 오묘한 멋까지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경정3리의 본래 이름은 오매마을(烏梅里)’이다. 마을 주변에 있는 오두산매화산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란다. 풍수적으로 볼 때 까마귀가 열매를 물고 마을로 들어오는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경정3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경상북도의 보호수(11-4)로 지정되어 있는 오매향나무가 꼽힌다. 500년이 넘었다는 수령만으로도 놀라운데, 동신바위라 불리는 언덕 전체를 문어발처럼 감싸고 있는 향나무가 단 한 그루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상상을 초월해버린 셈이다. 마을의 전래에는 처음 권씨들이 마을을 개척할 때 대나무와 향나무, 소나무를 심었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다른 나무는 모두 죽고 지금의 향나무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동신바위 아래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동신당이 자리하고 있다.



경정3리인 오매마을에서 경정1리까지는 백사장으로 연결된다. 메꽃(바다에 피는 나팔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마치 콘크리트를 타설해 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들이 늘어서있는가 하면, 나이 먹음직한 해송(海松) 한 그루를 머리에 이고 있는 바위도 보인다. 척박한 바위 틈새임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니 고고함을 오히려 더 짙어졌다.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에는 모래사장도 통과해야만 한다. 경정해수욕장인데 번잡하지 않고 일상의 자연스러움과 활기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가 곱고 파도가 잔잔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반면에 백사장 면적이 작아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아무튼 길을 걷다 만나는 해수욕장은 또 다른 덤이다. 거친 갯바위들을 넘나들며 바닷가를 걷다가 만나는 뽀얀 백사장은 갯벌의 개흙처럼 보드랍고, 또 푹신한 스펀지처럼 퍽퍽하다.



오매마을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경정1(이정표 : 대게 원조마을 1.5/ 경정해수욕장 0.13)’에 이른다. 2리를 건너뛰었으니 순서가 맞지 않는 셈이지만 까짓 문제될 거야 없다. 참고로 경정이란 마을 이름은 긴 모래불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뱃불이라고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대게는 이곳 경정리의 앞바다에서 잡힌 것을 최고로 친단다. 해안에서 10~12마일쯤 떨어진 수심 200~800m의 지점에 일명 왕돌암이라 불리는 대륙 경사면이 있는데 이곳에서 잡힌 대게는 다른 대게와 달리 색깔이 황금빛이고 맛과 육질이 뛰어나 대게 중의 대게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경정1리부터는 20번 지방도를 따른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의 바닷가를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 길이다. 검정색 일색이던 바위들이 붉은 색깔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경북동해안 지질공원이라는 지명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그 지질공원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경북동해안 지질공원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경정1리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지점인데 지질 명소인 경정리 백악기퇴적암이라는 부제까지 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질(地質) 명소는 경정마을과 차유마을 사이의 해안 지형을 아우른다. 1억 년쯤 된 이암(泥巖, mudstone)과 사암(砂岩, sandstone)이 이곳 해안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유마을 쪽에서는 붉은 이암이, 경정마을 쪽에서는 붉은 이암과 흰 이암이 분포되어 있단다. 여러 암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이색적이라 하겠다. 또한 암석을 통해 과거의 다양한 흔적을 유추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탐방로는 공원(이정표 : 대게원조마을 기념비 0.22/ 경정1리 버스정류장 0.83)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대게 원조마을인 경정2리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 이곳이 대게의 원조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차유마을로도 불리는 이곳은 고려 29대 충목왕 때 영해부사 일행이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어왔다고 해서 수레 ’(), 넘을 ’()를 썼다고 한다. 마을의 형국이 우마차(牛馬車)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대게 원조마을이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고려 태조(왕건)가 안동 부근에서 후백제군을 물리칠 때 예주(지금의 영해면)의 호족들이 참전해 준 것을 감사히 여기고 경주로 내려갈 때 이곳을 순시했다고 한다. 그때 수라상에 이 마을에서 나는 대게를 올렸는데 이런 스토리를 발굴해서 마을의 브랜드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하나 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경정마을의 앞바다는 대게의 가장 좋은 서식지로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타 지역보다 맛과 질이 단연 우수하단다. 또한 이곳은 타 지역에서 잡은 대게를 들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조마을을 지키려는 마을주민들의 의지와 철학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직접 잡아들인 대게는 겨울부터 봄까지 횟집에서 팔고, 전국 각지로 배송도 한단다.



경정2리에서 축산항까지의 4km 구간은 해안경계를 서는 군인들이 오가는 길이라고 해서 일명 초병의 길로도 불린다. 그러고 보면 21코스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 다니지 못한, 군인들만 알던 꽁꽁 숨겨 두었던 길로 이어지는 셈이다. 아직도 완전하진 않지만 그 진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나저나 죽도산 입구 해변까지는 이제까지 걸었던 해안절벽 길과는 달리 울창한 소나무 숲을 걷게 된다. 중간에 숲길과 모랫길로 나뉘기도 하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길은 다시 합쳐지기 때문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죽도(竹島)’가 나타난다.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이야 ()’이라는 글자를 무색하게 만들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육지로부터 동떨어진 섬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 모래언덕이 점점 쌓이면서 자연적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섬이 귀한 동해에서 받았을 귀한 대접을 자연이 빼앗아 가버린 셈이다. 그래선지 지명 또한 죽도(竹島)에서 죽도산(竹島山)’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부근도 역시 기암괴석들이 널려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공룡(恐龍)을 닮은 바위가 아닐까 싶다. 죽도산을 배경으로 서있는데 중생대의 하늘을 지배하던 프테로사우스(Pterosaurs, 翼龍)’를 쏙 빼다 닮았다.



모래사장이 끝나자 뜻 모아 하나로! 힘 모아 세계로!’라는 캐치플레이즈(catch phrase)를 달고 있는 현수교(懸垂橋)가 길손을 맞는다. 죽도산 앞의 시내(축산천)를 가로지르는 블루로드 다리로 총연장 139m에 주탑(主塔)의 높이는 25m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현수교들과는 달리 주탑이 하나뿐이다. 보행자 전용이라서 상판의 무게가 가벼운 탓일 게다. 죽도산을 가기 위해서는 블루로드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다리는 흔들흔들 제멋대로다. 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은 탓에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장난기 발동한 어느 일행이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흔드는데도 누구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블루로드 다리를 건너자 화장실을 갖춘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있다. 이곳이 죽도산 정상으로 오르는 들머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리어카를 개조한 수산물 판매대들 뒤의 들머리에다 죽도산길 안내판죽도산야생초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모래가 굳어진 돌과 자갈이 굳어진 돌이 어우러진 섬의 지질을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섬의 역사와 함께 해국(海菊)과 산국(山菊), 참나리, 섬쑥부쟁이 등 섬에서 자생하고 있는 야생초들의 군락지들을 표시했다. 이젠 죽도산의 정상으로 올라야 할 차례이다. 이름에 걸맞게 시누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죽도산은 높이가 고작 80m 밖에 되지 않지만 정상으로 오르는 일은 꽤나 고달프다. 가파른 비탈에 깔아놓은 나무계단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오르자 등대(燈臺)가 나온다.



정상에는 높이 26.9m(7)죽도산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1935년에 문을 연 축산등대(丑山燈臺)가 있었다. 일제 말 미국의 폭격 표적이 된다고 해서 철거되기도 했으나 광복 후 다시 세워 운영해오다가 2011년 옛 등대를 헐고 그 자리에다 지금의 죽도산전망대를 대신 세웠다고 한다. 등대(燈臺)도 맨 위층에서 새롭게 태어났음은 물론이다. 엘리베이터(elevator)를 타고 5층으로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망원경은 물론이고 벽면에는 이집트의 파로스등대와 독일의 브레머헤븐 등대등 많이 들어본 듯한 등대들과 육계도(원래 육지였으나 자연적으로 육지와 연결된 곳)인 죽도의 생성과정과 주변 해안의 어종들을 실은 패널(panel)들을 빼꼭하게 진열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축산항 일대를 조망하는 기분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그 자체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드는 축산천이다. 그 오른편에는 이곳 죽도를 육지로 만들어버린 모래톱이 길게 펼쳐지는데, 사빈(沙濱)이 만들어진지 오래되었던지 지금은 주택들이 빼꼭히 들어차있다.



모래톱의 오른편에는 1924년에 조성된 축산항(丑山港)이 들어서 있다. 축산항은 영덕의 대표적인 어항이자 대게의 위판이 열리는 전국의 다섯 개 항구 가운데 한곳이다. 또한 인근의 여러 항으로부터 유입된 배들이 싣고 온 고기의 입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영덕대게를 비롯한 동해의 무공해 해산물을 좀 더 맛있게 먹으려면 축산항으로 가라는 구전(口傳)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런 호사를 누려볼 수 있었다. 정자 근처에 위치한 축산대게 활어타운에서 싱싱한 회를 싼 가격에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축산(丑山)’이라는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축산포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지킨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축산도(丑山島)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소와 같아 축산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오래 전 축산리는 섬이었나 보다.



축산리의 반대방향으로는 한없이 펼쳐진 동해 바다가 푸른빛으로 넘실댄다. 산중턱에는 군부대의 옛 건물이 보이는가 하면, 영덕을 한가운데에 놓고 사방으로 국내외 도시들을 표기해놓은 광장도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에는 여러 개의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모래돌과 자갈돌로 이루어졌다는 이곳 죽도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가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죽도산 주차장(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산106-1)

조망을 즐겼다면 이젠 내려갈 차례이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울창한 시누대숲 사이로 내놓은 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서자 잘 지어진 팔각정이 나온다. 팔각정 주변은 화장실을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시키라는 모양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조금 더 가야하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까짓 다음에 조금 더 걸으면 되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표시하고 있는 거리가 12이니 느긋하게 걸은 셈이다. 아니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멈췄던 시간과 죽도산전망대에서 지체한 시간을 감안할 경우 천천히 걸었다고 볼 수도 없겠다.


해파랑길 9코스

 

여행일 : ‘19. 5. 13()

소재지 : 울산광역시 동구와 북구 일원

산행코스 : 일산해변(3.0km)현대중공업(4.9km)동부회관(2.5)주전봉수대(3.4km)주전해변(3.2km)강동축구장(4.8km)정자항(거리·시간 : 19.4가운데 14.78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이번 구간도 역시 주전해안과 당사해안 등과 같은 아름다운 해안길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하지만 다른 구간들보다는 월등히 많은 숲길이 포함되어 있다. 후반부에 만나게 되는 강동사랑길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하겠다. 강동사랑길이란 북구(울산시)가 이야기와 설화 등을 간직한 지역 내의 관광지들을 믿음·윤회·연인·부부·배움·사색·소망 등 7개의 테마로 구간을 나눠 조성한 둘레길이다. 고리() 모양으로 생긴 각각의 구간들은 순서에 따라 서로 연결되는데 숲길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해파랑길 트레커(trekker)같은 걷기 여행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중반에 만나게 되는 남목역사누리길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 도중에 주전 봉수대(烽燧臺)’남곡 마성(馬城)’과 같은 문화재까지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산해변에서 봉대산 입구까지의 초반은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울산의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중공업의 담장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걷으면서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내품는 매연(煤煙)을 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일산해변‘(울산시 동구 일산동 947-4)

동해고속도로(포항-울산) 남경주 IC에서 내려와 산업로(지방도)‘’14번 국도를 징검다리 삼아 ’7번 국도로 올라선 뒤 울산 시내(명촌교북단교차로 : 울산시 북구 명촌동 930-1)로 들어온다. 이어서 태화강변의 아산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일산해수욕장사거리(동구 일산동 597)‘가 나온다. 우회전한 다음 곧이어 나타나는 회전교차로에서 9시 방향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 일산동행정복지센터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8코스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임을 알리는 해파랑길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행정복지센터의 맞은편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다.




실제로 트레킹을 시작한 곳은 동부 패밀리아파트의 부속시설인 동부회관(동구 동부동 218-1) 앞이다. 참가자들의 단축 의견을 수렴한 산악회측이 버스로 이곳까지 이동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트레킹이라는 점을 감한하면 최선의 선택이라 하겠다. 현대중공업의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대로변(大路邊)을 걸으면서 일부러 매연(煤煙)에 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트레킹 거리도 6가 단축되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점심 때 반주까지 곁들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왼편에 패밀리아파트의 담벼락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 산자락 아래에다 일렬로 주차장을 만들어놓아 걷기가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산자락에 위치한 남목마성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테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10분쯤 들어가자 ()‘ 몇 마리가 길손을 맞는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남목생활공원이라는데 뒷산이 마성(馬城)이었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해 말의 조형물을 설치했나보다. 참고로 마성(馬城)이란 말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의 둘레를 돌로 쌓은 담장으로, 마치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초기에 외교나 군사적으로 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처음에는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목장 관리를 겸임케 했다가 뒤에 가서는 전임 감목관(監牧官)을 배치하기에 이른다. 이곳 방어진 목장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전임 감목관을 두지 않고 있다가 효종 5(1654) 이후에 배치하여 고종 31(1894 갑오경장) 목장이 폐지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하나 더, 조선조 초기에 펴낸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의 울산군 목장 조의 군 동쪽 적진리에 방어진 목장이 있는데 그 둘레는 47리요, 360필이 방목되어 있고, 수조가 풍부하다는 기록도 기억해두자.



탐방로는 공원의 끄트머리에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남목마성 0.35, 봉호사 2.18/ 동부회관 0.4)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리 또한 짧기 때문이다.



10분 정도를 가파르게 올라서자 능선삼거리에 이른다. 그런데 이정표(삼거리0.6, 주전봉수 1.24/ 삼목체육소공원0.35)/ 현대중공업0.75/ 동부회관0.7) 옆에 남목마성 (南牧馬城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에 대한 안내판이 두 개나 세워져 있다. 이곳이 남목마성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마성(馬城)이란 말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의 둘레를 돌로 쌓은 담장이다. 성종(成宗) 2(1471) 신숙주(申叔舟)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보면 1474년에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왕명을 받들어 항거왜인(抗拒倭人)의 실태를 조사하면서 그린 삼포(三浦)의 지도가 추가 삽입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염포(鹽浦) 지도에 염포의 동쪽 산정 일대에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방어진(方魚津) 목장이 있다. 마성은 두 군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 즉 염포동의 중리와 성내마을의 경계를 따라 방어진행 도로의 남쪽 산록을 지나 현재의 현대공업고등학교 뒤편을 거쳐 동해로 빠지는 곳이다.



임도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자 이정표(주전가족휴양지 2.25, 봉호사 0.64/ 남목시장 1.88)’남목역사누리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진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서 차량통행이 가능한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봉호사 갈림길이다. 남목마성에 15분 거리인데 봉호사의 표지석 옆에다 봉대산의 정상표지석을 하나 더 세워놓았다. 183m라는 산의 높이까지 새겨 놓았지만 하도 밋밋해서 정상의 위치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2016년에 조성된 남목역사누리길은 동부동과 주전동 일원의 기존 등산로를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원과 접목시킨 총 11km의 누리길이다. 종합 안내판과 이정표는 물론이고 야자매트와 침목계단, 로프펜스 등을 설치해 주민들의 여가활용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50m쯤 더 걸었을까 봉대사 앞 삼거리(이정표 : 주전봉수대60m/ 주전가족휴양지2.54, 망양대 0.32/ 삼거리0.6)가 나온다. 다음 행선지인 주전해안은 왼편으로 가야하니 봉수대를 둘러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삼거리 오른편에 공터가 보여 다가가보니 세계적인 조선회사인 현대중공업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973년 현대건설의 조선사업부에서 독립한지 10여 년 만에 선박 수주 및 건조량 세계 1위를 달성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세계 제1의 조선 대국으로 이끈 굴지의 기업으로 조선과 해양·플랜트·엔진기계·건설장비 등의 영역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현재는 또렷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전해진다.



먼저 봉호사(烽護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봉호사는 주전봉수대의 부속 건물인 봉대사(烽臺舍)’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사찰이다. 봉수의 기능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섰단다. 그래선지 절의 이름도 봉수대(烽燧臺)'()'자에 보호할 '()'자를 쓰고 있다. 절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전부일 정도로 그 규모가 작다. 하지만 '주전봉수대관련고문서(朱田烽燧臺關聯古文書 : 울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6)'라는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단다. 울산부사가 박춘복·박명대 부자에게 내린 주전봉수대 별장 임명장과 별장과 인근 동수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등 철종 9(1858)부터 고종 33(1896)까지의 고문서(古文書)들인데, 이를 통해 주전봉수대가 수령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봉수군은 봉수를 담당하면서 유사시에는 적군을 맞아 싸우는 군사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역은 봉수대 인근 주민들이 담당하였고 군량 등 운영경비도 이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단다(문화재청 자료에서 발췌)



대웅전의 뒤로 가자 해수관음상이 사바세계에서 온 중생을 맞는다. 관세음보살은 현세에서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에 바다를 향한 관음보살이 해수관음보살인데, 이 부처는 소원을 잘 이루어 주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래선지 울산시에서 세운 안내판에도 한번쯤 불공을 드려볼 것을 권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해수관음상 앞에서면 비취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가족휴양지로 소문난 주전해안이 발아래에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해수관음상의 뒤로 오르면 주전봉수대(朱田烽燧臺)’가 나온다. 봉수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중앙봉수라고도 불린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京烽燧)와 해륙과 변경의 최전선에 위치한 연변봉수(沿邊烽燧), 그리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 연변봉수는 바다정찰과 신호전달, 해안경비뿐만 아니라 적의 침략 시 자체적으로 응전·방어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주전봉수(남목봉수)는 이 가운데 연변봉수로 분류되는데 이웃인 천내(川內)에서 봉수를 받아 유포(柳浦)로 소식을 전했다. 18세기 유포봉수가 폐지된 후에는 북쪽으로 경주의 하서지봉수로 보냈단다. 1981년 정비사업을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주전가족휴양지 방향이다. 잠시 후 야생화단지 갈림길과 체육공원삼거리가 연이어 나타나나 개의치 않고 직진한다. 2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곳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야 8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망양대(望洋臺)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양대는 울산의 고지도(古地圖)에 나오는 지명이다. 옛날 봉대산 지역을 망양대라 불렀다는 자료에 착안해서 옛 지명을 계승하고, 큰 바다를 바라보는 좋은 명소라는 뜻에서 정자를 짓고 이름을 망양대라 했단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길가에는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벤치와 원형의 식탁까지도 배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울창한 소나무숲이 아닐까 싶다. 굵거나 오래묵지는 않았지만 숲이 짙기 때문에 짙은 솔향을 친구삼아 걸을 수가 있다. 그래서 길가에다 봉대산 산림욕장길이란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나 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왕복 4차선인 미포산업로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탐방로는 이 도로의 아래에 뚫어놓은 굴다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행하자 보밀길이라는 이름의 도로에 내려선다. 도로의 앞 바닷가가 모래와 잔자갈이 골고루 섞인 자그만 해수욕장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다. 아니 꽤 많은 캠핑카들이 도로변 공터에 늘어서 있는 풍경은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주전천을 건너면 주전 가족휴양지 캠핑장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해수욕장에다 담수(淡水)가 흐르는 개울까지 옆구리에 차고 있으니 가족휴양지로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거기다 바닷가에는 낚시하기 딱 좋은 갯바위까지 널려있으니 개개인이 입맛에 맞춰가며 놀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후부터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소문난 주전동해안길이다. 주전동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들어선 동네다. 남북으로 얼추 3가 넘고 하리항과 큰불항, 주전항 등 항구가 3개나 된다. 바다에 면해 있어도 8할 이상이 임야라 옛날에는 농사짓는 이가 많았다 한다. 조선 정조 때는 해안 마을을 주전해리(朱田海里), 언덕 위의 마을을 주전리라 했다. 고종 때 주전동으로 통합되었고 1911년에는 주전동(酒田洞)이 되었다. ‘붉은 주()’를 뺀 자리에 술 주()’를 넣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지만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니 어쩌겠는가. 본래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잠시 걷자 특이한 조형물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다가가보니 주전마을 제당이야기가 적혀있다. 주전동은 마을 속에 작은 마을이 7개나 있었단다. 상마을, 중마을, 아랫마을, 봉수대 아래에 있는 보밑마을, 큰불마을, 언덕 위의 번덕마을, 새마을 등인데. 마을마다 제당이 있었고 모두 합하면 10곳이나 된단다. 이런 세분화는 다른 어촌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현상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던 제당들은 이제 없다고 적혀있다. 2005년 경로당을 신축하면서 모든 위패를 모아 2층에 모셨고, 주전동 남쪽 어귀에 사라진 제당들을 기억하는 조형물과 표지석을 세워놓았단다.



김순연 시인의 집도 보인다. ‘국제신문의 시조 부문과 한울문학의 시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으로 몽돌여인과 달그림자 머무는 그곳‘, ’누가 주전동 좀 사가소등의 저서를 발표했다. ‘꽃을 꺾어 시를 얻기보다는 시를 접어 꽃을 간직하는 향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며 잠시지만 시선을 고정시키다 자리를 뜬다.



잠시 후 주전항에 이른다. 179m나 된다는 방파제의 끄트머리에는 빨간 옷을 입은 등대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선박의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다보탑(多寶塔) 모양을 형상화했다는데 잔잔한 물결 사이로 푸르름과 빨강 등대가 어우러지며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방파제도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었다. 바닷속 풍경에 더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특히 높이가 5m나 된다는 해녀반신상이 돋보인다. 주전마을을 대표하는 게 해녀들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주전항을 지나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해안이 나타난다. ‘울산 12중 하나인 주전 몽돌해안이다. 주전은 땅이 붉다는 뜻으로 실제 땅 색깔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동해안을 따라 15km의 해안에 직경 3~6cm의 새알 같이 둥글고 작은, 까만 몽돌이 길게 늘어져 절경을 이루는가 하면 주변에는 노랑바위, 샛돌바위 등 많은 기암괴석이 산재하고 있다. 그나저나 작은 몽돌사이로 드나드는 파도소리에는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함이 들어 있다. 참고로 울산 12에는 태화강대공원과 십리대숲, 대왕암공원, 가지산 사계, 신불산 억새평원, 간절곶 일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 강동·주전 몽돌해변, 울산대공원, 울산대교,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대운산 내원암 계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해안에는 오랜 시간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몽돌이 널려있다. 바닷가에 내려서니 잡으면 미끄러질 듯 윤기 나는 몽돌 사이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파도소리가 천상의 소리인 듯 더없이 감미롭고 몽환적이다. 하긴 동구(울산)소리9을 선정하면서 이곳 주전해변의 몽돌소리를 8번째로 꼽았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울산 동구 소리9에는 동축사 새벽종소리, 마골산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 옥류천 계곡 물소리, 현대중공업 엔진소리, 신조선출항 뱃고동소리, 울기등대 무산(霧散)소리, 대왕암 몽돌 물 흐르는 소리, 주전해변 몽돌 파도소리, 슬도명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주전해안의 끝은 운곡천(성골천)이다. 주전 새마을과 아래성골 사람들의 천연 목욕탕 역할을 했다는 개울이다. 물길이 끊어놓았던 길을 다시 잇는 다리(운곡교)를 건너자 이젠 구암마을이다. 아니 북구(어물동, 於勿洞)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마을 표지석을 확인하고 2027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 더 걷다가 솔마레 펜션앞에서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주전해안에 비해 폭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곳도 역시 몽돌해안이다. 울산의 몽돌해안은 7~8월이 피크라니 그때는 이곳까지도 피서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나저나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백사장은 여름철 피서의 백미(白眉)가 분명하다. 하지만 모래 대신 동글동글한 몽돌이 덮인 몽돌해변도 나름 매력적이다. 파도가 닿을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몽돌 소리가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해안길은 오래지 않아 끝나버린다. 그리곤 2027번 지방도로 또 다시 올라서는데, 해파랑길 9코스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 아닐까 싶다.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데도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인도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가장자리에 그어놓은 하얀 선의 밖으로는 보행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조심조심 10분쯤 걷자 금천교가 나온다. 물론 운곡교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다리를 건너자 강동사랑길의 안내도가 눈에 띈다. ‘강동사랑길이란 울산 북구에서 개설한 둘레길로 정자항에서 출발해 당사항과 어물동 등 정자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총 길이 14km로 신((((((() 7가지 주제로 나뉘는데 각각의 구간이 고리()처럼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구간의 종주는 한 바퀴를 빙 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끝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해파랑길은 7개 구간 모두를 조금씩이나마 걷게 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각 구간의 특징을 조금 더 알아보자. 정자항과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발자국 흔적과 조선시대 설치된 유포석보 등을 도는 코스는 '믿음의 강동 사랑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윤회의 강동 사랑길()'은 곽암과 거북바위, 수로낭 등에 얽힌 설화를 엮어 만들었으며, '연모의 강동 사랑길()'은 사랑 이야기로 옥녀로, 강쇠로, 옥녀봉, 일신 전망대 등을 잇는다. 까치봉과 해녀의 집, 금실정은 '인정의 강동 사랑길()'을 탄생시켰으며, 자연학습장과 봉수대, 축구장은 '배움의 강동 사랑길()'을 만들었다. '사색의 강동 사랑길()'은 당사항과 용바위, 추억의 학교, 몽돌밭으로 펼쳐지며, '소망의 강동 사랑길()'은 어물동 마애여래좌상과 소망의 등산로 등을 아우른다.



강동사랑길 안내도를 살펴보다가 구암마을 방향에 바닷물고기를 닮은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방파제 위에 세워진 걸로 보아 등대가 아닐까 싶다.



금천교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를 따른다. 담장에 그려놓은 예쁜 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 그러고 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강동사랑길6구간인 '사색의 강동 사랑길()'이다. 이 구간은 당사항과 용바위, 추억의 학교, 몽돌밭 등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다. 담벼락의 벽화는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함께 그려 넣은 모양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바위가 나온다. 하늘나라에 살던 뱀이 옥황상제로부터 오해를 받고 지상으로 쫓겨나 살다가 이후 진실이 밝혀져 용으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바위이다.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서 하늘로 올랐는데, 이때부터 물길이 다시 트였다는 것이다. 목제계단을 이용해 바위의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했는데 입구에 용바위에 얽힌 옛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얘기의 스토리가 조금 거북스러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뱀과 거북이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쁜 역할 단골이던 뱀이 이곳에서는 선량한 배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악역을 대신함은 물론이다.



계단을 오르자 '승천하는 용()'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다. 전설이 깃든 용바위를 모티브(motive)로 삼아 승천하는 용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아무튼 용의 발등에라도 앉을라치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용바위 옆에는 길이 156m의 잔교(棧橋)가 설치되어 있다. 낚시 전용인데 소정의 요금을 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단다. 우리와 같은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 저 다리의 끄트머리가 넘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방파제 앞에 앞뒤 생각 없이 설쳐대는 파도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바위라는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사실일 것이다.



마을 앞 포구를 지나는데 자연산직판장건물이 2층으로 지어져 있다. 안주감이라도 좀 챙길까 해서 기웃거려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관광객들이 찾는 주말에나 문을 여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당사(堂舍)’는 동네 입구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던 당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방파제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그런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청정해변의 일출과 바위, 자갈마당 등에 대한 찬사만 잔뜩 늘어놓았을 따름이다. 멀리 태평양에 살던 파도가 경치에 이끌려 이 마을까지 왔다는 자랑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강동사랑길을 조성했고, 기왕에 스토리텔링까지 시도했으니 마을에 대한 구전(口傳)까지 곁들였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며 바다와 이별을 고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해파랑길 표식이 또렷하니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부부는 비록 들머리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말이다.



잠시 후에 올라서는 1027번 지방도에서는 오른편 방향이다. 이어서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에서는 왼편 도로를 따른다. ‘2002 FIFA 월드컵, 훈련캠프장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당시 터키대표팀이 훈련을 하던 강동축구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인데 가로수용으로 심어놓은 굵고 오래 묵은 벚꽃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봄에 찾아올 경우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실컷 구경할 수도 있겠다.



바닷가를 떠난 지 12분 만에 현대중공업에서 건설했다는 강동축구장에 이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의 기술훈련을 위해 지은 운동장으로 총 3만여 평에 이르는 면적에 사계절 잔디축구장 2면과 잔디광장, 산책로, 원두막 등의 공원시설과 함께 동해바다의 절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쾌적하고 아늑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감독이 첫 훈련장소로 택한 곳도 이곳 강동 축구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월드컵 기간에는 형제의 나라로 유명한 터키의 국가대표 축구팀이 훈련캠프장으로 사용했었단다.



축구장을 지나자마자 길이 둘(이정표 : 까치봉1.6, 옥녀봉 1.9/ 우가항0.7/ 당사항0.7)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우가항을 버리고 까치봉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강동사랑길 5구간의 방향표시가 되어있다. 그런데 방향표시가 거꾸로 되어있지 않나싶다. 이곳은 5구간이 끝나고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중간에 능선을 치고 오르는 오솔길이 나뉘기도 하나 신경쓸 필요는 없다. 반대편에서 길은 다시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까치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왼편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표식도 같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으니 망설이지 않고 들어서고 본다. 숲길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무가 뱉어내는 산소를 깊이 마시니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다. 삼림욕하기 좋은 곳이라 하겠다.



가파르게 5분쯤 올라서자 우가산(까치봉) 정상이다. 양 옆에 전망데크를 끼고 있는 정상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삼각점(울산 306) 외에는 이곳이 우가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줄만한 공식적인 표식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신 벤치와 피크닉용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망원경도 설치했다. 툭 트이는 조망을 실컷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편엽서 모양의 포토죤이 아닐까 싶다. 엽서 속에 아름다운 강동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스탬프보관함도 보인다. 우가산을 올랐다는 것을 기념해보라는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쪽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가 하면 우편엽서 안으로 들어온 바닷가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되살아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반대편 망원경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들여다보기라도 할라치면 당사항은 물론이고 저 멀러 주전해안까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이젠 하산을 서두를 차례이다. 가파른 침목(枕木) 계단을 잠시 내려서면 아까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나고,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강동사랑길 3구간과 4구간이 겹치는 강쇠길·옹녀길의 들머리(이정표 #1 : 강쇠길·옹녀길0.1/ 옥녀봉1.2/ 강동축구장1.6, 이정표 #2 : 제전항 1.5, 정자항 3.4/ 우가산(까치봉) 0.2, 당사항 2.6)가 나온다. 옥녀봉으로 연결되는 옥녀봉을 버리고 오른편 오솔길로 내려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옹녀나무라는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떤 나무가 옹녀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탐방로가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나있는데 혹시라도 용녀의 품속으로 들어가듯이 지나가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게 되는 강쇠나무도 고민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한 그루의 나무가 두 줄기로 자랐는데 그 사이에 짧고 뭉텅한 삭정이가 조금 남아있을 따름이다. 저걸 보고 남근(男根)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길은 무척 곱다. 평평하면서도 보드라운 흙길인데 조금이라도 경사가 가파르다싶으면 야자매트를 깔아놓아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울창한 오리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의 곳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느긋하게 쉬어가면서 사랑길의 묘미를 되새겨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이 길은 옹기를 타고 물 밖으로 나온 바다의 공주 옹녀와 옹녀를 사랑한 강쇠의 이야기가 서린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던지 1027번 지방도가 내려다보일 즈음에 이런 내용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정신적 운우의 정을 나누던 그네들이 주고받은 노래와 함께이다.



1027번 지방도를 건너면 제전포구(이정표 : 정자항1.3/ 우가항2.4/ 옥녀봉2.6)로 들어선다. 옹녀·강쇠길로 들어선지 20분 만이다. 옛 장어마을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마을로 강동사랑길3구간과 4구간의 출발과 도착 지점이기도 하다. 제전마을은 한때 전복과 장어, 복어 등 각종 수산물로 번성했던 곳이다. 1980년대에는 제전 숯불장어가 미식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영남권 최고의 으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민들 사이의 갈등 등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끝내는 이름만 남고 모든 게 사라져버렸단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1년 제전장어의 옛 맛을 재현한 사랑길 제전장어(북구 마을기업 1)’가 문을 열면서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단다. 그런 얘기를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지 마을회관 2층에는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 제전마을 이야기와 미역·전복·돌김 등을 채취해온 해녀문화를 재연, 주민들이 살아온 삶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1층은 물론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숯불에 구워낸 장어구이는 물론이고 전복과 함께 후려낸 장어 매운탕, 붕장어구이 요리까지 팔고 있다니 한번쯤은 들어가 볼 일이다.



마을 앞 방파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 기능을 다한 어구(漁具)들을 예술품으로 환생(幻生)시켜 문화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마을 박물관만들기 사업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 방파제에는 제전마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아주 먼 옛날 장어란 놈이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던 모양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던 장어가 공주와 혼인시켜줄 것을 용왕께 애원했는데, 너무 화가 난 용왕님이 장어의 눈알을 빼버리는 형벌을 내린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태평양 바다까지 헤엄쳐서 다녀오면 공주와 혼인을 시켜주겠다고 했단다. 이를 믿은 장어는 지금까지도 죽어라 헤엄쳐가고 있는데, 많은 장어들이 그 눈먼 장어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 제전항으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이젠 판지항으로 갈 차례이다. 지금부터는 해안길을 따라 걷는다.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걷는 즐거움,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가고, 맑은 하늘에 새겨진 한 조각의 구름이 사색에 들게 한다.



15분 후 판지마을에 이른다. 청정 바다와 함께 조용한 휴양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푸른 바다와 멋진 갯바위, 아늑한 펜션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데 꿈꾸는 바다 펜션도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국풍(異國風)의 목조건물로도 모자라 제 기능을 다한 버스까지 배치해 주변 풍경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풍차로 장식된 별관의 앞에 배치한 다른 버스는 아예 카페로 만들어버렸다, ! 이곳 판지항의 방파제에도 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먼 옛날 어느 여신(女神)하고 입김을 세게 불었다고 한다. 그러자 입김에 몰린 바위들이 바닷가로 몰렸고 그중 한 곳에 둥그런 구멍이 뚫렸던 모양이다. 이를 본 여신이 해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의 판지항이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총각이 여신의 신발을 훔쳐가게 되었는데, 관리를 잘못 한 탓에 기능까지 사라져버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해국(海國)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신이 총각과 결혼하게 되었고, 이후 판지항에서는 신발을 건져주는 총각은 신발의 주인인 처녀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단다.



판지마을 앞 바다, 파도의 일렁거림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거무스름한 바위 봉우리는 곽암(미역바위)머리. 곽암의 대부분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2001,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됐을 만큼 곽암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흥려승람에 의하면 곽암은 태조 왕건이 서기 918년 고려를 건국할 당시 이 지역의 토호였던 울산 박씨의 시조 박윤웅(朴允雄)에게 하사한 바위다. 곽암으로부터 나는 미역이 예로부터 그 품질을 인정받아 이 지역 최고의 특산품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을사람들로부터 양반돌’ ‘박윤웅돌이라고 불린 이 바위에서 해녀들이 따는 미역은 현재까지도 국내 최고의 미역 중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이젠 정자항까지 가는 일만 남았다. 정자항의 마스코트인 빨갛고 하얀 귀신고래를 바라보며 바닷가를 걷다보면 섭다리(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잎나무와 잔가지 등을 얹어 만든 다리)’의 안내판을 만난다. 2015년에 만들었다는데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 이미 옛 얘기로나 만나볼 수 있나보다. 근처에는 강동 신생대화석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곁에 조개류 등이 박힌 돌들이 수북이 쌓여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트레킹 날머리는 정자항 입구 조형물(울산시 북구 정자동 621-8)

바닷가가 끝나면서 만나게 되는 장자천을 건너면 정자항의 대문을 겸하고 있는 아치형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이 조형물의 바로 뒤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정자항의 마스코트인 귀신고래 형상을 한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암수 귀신고래 형상의 두 개 등대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서로 지킴이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명소가 됐단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4시간 1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14.78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정자항의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버드나무 아래 정자가 있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위에서 보면 항의 모양이 자궁과 흡사하고,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자궁 속으로 정자가 헤엄쳐 들어가는 것과 닮아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정자항에는 대게를 파는 음식점 일색이다. 하지만 참가자미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라고 한다. 이곳에서 잡히는 참가자미가 전국 유통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란다. 그 덕분에 그물망 위에서 하얀 배를 드러낸 채 해풍에 말라가는 가자미들을 항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단다. ! 활어직판장에 가면 갓 잡은 신선한 참가자미를 즉석에서 회로 맛볼 수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트레킹 도중에 점심을 먹느라 주어진 여유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20코스

 

여행일 : ‘19. 5. 4()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영덕읍과 강구면 일원

산행코스 : 강구항(8.0km)고불봉(8.3km)신재생에너지전시관(2.5km)영덕해맞이공원(소요시간 : 18.8,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20코스는 영덕의 올레길인 블루로드(Blue Road)‘’A코스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블루로드는 영덕군 남정면의 대게누리공원을 출발하여 강구항과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해안 올레길이다. 희망과 사색의 빛깔인 파란 바다를 끼고 걸으면서 영덕의 모든 것을 만나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시원한 동해바다의 바람은 물론이고 따뜻한 사람과의 만남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중 ’A코스는 바닷길을 품고 있지 않은 유일한 구간이다. 그러니 기기묘묘한 해안절벽이나 아름다운 해수욕장, 정겨운 어촌마을 등 블루로드가 자랑하는 해안 풍광은 만날 수가 없다. 대신 이 구간은 걷는 내내 진한 솔향이 함께 한다. 그 내음에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함은 물론이다. 고불봉에서의 빼어난 조망과 이곳 영덕의 자랑거리인 풍력발전단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구간이 너무 길다는 점은 단점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강구다리 남쪽 입구(영덕군 강구면 오포리 83-9)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포항방면으로 내려오면 강구항에 이르게 된다. 잠시 후 국도는 강구항을 떠나게 되는데 그 직전에 만나게 되는 강구다리(江口橋)가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가 된다. 들머리 오른편에 강구파출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다리 앞 사거리의 왼편 모퉁이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강구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대게 조형물이 설치된 저 원형건물의 1층에 블루로드의 스탬프를 찍은 곳이 있다지만 그냥 통과해버린다.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나로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로드의 지도에 여섯 개의 스탬프를 받아올 경우 기념메달을 선물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로드가 해파랑길과 겹쳐있으니 스탬프를 찍는 번거로움을 조금 감수했더라면 또 다른 추억거리를 간직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오른편 난간 너머로 강구항이 펼쳐진다. 강구항은 김주영의 장편소설 천둥소리의 배경이며 인기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졌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게가 더 유명하다 하겠다. 항구를 낀 거리에는 영덕 대게 상가 300여개가 성업 중이란다. 대게 철인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저곳은 번잡한 도심으로 변하는데 이때는 눈에 밟히는 게 대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대게 찌는 냄새가 항구 전체를 뒤덮을 정도라는 것이다. 참고로 강구(江口)’라는 지명은 오십천의 강어귀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왼편에는 강구대교(江口大橋)가 나란히 오십천을 건넌다.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옛 다리인 강구다리(江口橋)의 노후화로 인해 2.5톤 이상 차량의 통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새로 놓은 다리이다. 그나저나 강구대교는 범선(돛단배) 조형물을 머리에 이고 있다. 길이 120m에 높이가 19m로 마치 범선을 타고 강구항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6800여개 전등을 달아 야간에는 빛의 잔치도 벌인단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빛의 항해라고 붙여 놓았다. 조형물의 양쪽에 음악 분수까지 설치해 놓았다니 낮 보다는 밤이 제격인 다리라 하겠다.



집게발을 벌리고 까맣고 단단한 눈으로 인사를 건네는 대형 게 모형이 바라보이는 강구다리를 건너면 사거리가 나온다. 개의치 않고 직진하다 ‘T’형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끄트머리에 사계절 대게 직판장이 보인다면 제대로 길을 찾은 셈이다.



새마을금고를 지나 진이네 분식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영덕 블루로드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마을안길을 잠깐 걸었다싶으면 이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육각정자(이정표 : 해맞이등산로 입구 330m/ 붕붕 대게어판장 180m)가 길손을 맞는다. 유리벽을 두른 것으로 보아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아닐까 싶다. 하긴 강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조망까지 좋으니 쉼터로서 이만한 곳도 없겠다.




조금은 경사가 누그러진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또 다른 정자가 쉬었다가라며 손짓을 보내온다. 이번에는 팔각(八角)에다 예스런 멋까지 보탰다. 정자 옆의 도로로 내려서서 왼편으로 잠시 내려가면 저만큼에 탐방로의 입구가 보인다.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나무계단의 입구에는 블루로드 안내도와 이정표(금진다리 2.5/ 강구항 1.9) 외에도 흙먼지 털이기를 설치해 놓았다. 그만큼 블루로드를 찾는 강구주민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이 지났다.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강구대교 갈림길’(이정표 : 고불봉7/ 강구대교0.7/ 강구항0.5)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한두 사람이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정도의 소나무숲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오래내림이 반복되지만 경사가 평지와 다름없으니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탐방로는 운동기구를 갖춘 쉼터를 여러 곳에 끼고 있다.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정자에 벤치, 심지어 어떤 곳은 식탁과 평상까지 거느리고 있다. 걷기가 하도 편하다보니 그 부족량을 운동으로 채우고 가라는 모양이다.



금진택지 갈림길(이정표 : 고불봉6.3/ 금진택지0.5/ 강구항1.1) 등 두어 곳에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는 물론이고 해파랑길의 표지판과 블루로드 표지판, 거기다 해파랑길 특유의 리본까지 팔랑거리고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전혀 없다.




솔 내음을 맡으며 기분 좋게 걷자 예쁘고 튼튼하게 생긴 금진구름다리가 보인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50분쯤 지난 지점이다. 금진다리는 영덕읍과 바닷가 해안을 이어주는 금진도로(지방도)를 건네주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이다. 길을 내면서 사람이 끊어놓았던 마룻금을 인간의 손으로 다시 이어놓은 셈이다. ! 누군가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봉화산을 지난다고 했지만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정상석이나 안내판 등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진다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능선의 골이 깊어지면서 그 가파름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가팔라지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바닥에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깊은 골이 수도 없이 나타나니 무척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챙겨간 막걸리를 마시고 일어서다보니 동해바다가 잘 보이는 봉우리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하지만 동해바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엉터리라 하겠다. 주변의 나무들이 그동안 많이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바다가 잘 안 보이는 봉우리로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블루로드의 아쉬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정표의 거리표시가 하도 들쭉날쭉해서 눈대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능선은 전체가 숲으로 덮여있는 탓에 전혀 시야가 트이지 않는다. 조망도 없는데다 변화까지 없다보니 저런 안내판까지도 반갑다. 멧돼지, 고라니에 뱀까지 자주 출몰한단다. 뱀을 싫어하는 나로 봐서는 때를 잘 맞추어 찾아왔다고 봐야겠다.



아무런 볼거리도 없이 고달프기만 한 길을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고불봉 아래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고불봉0,2/ 풍력발전단지7.4/ 강구항8.0)에 이른다. 고불봉은 전면의 가파른 오르막길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정상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곧장 풍력발전단지로 향하면 된다. ! 오는 도중에 하금호 갈림길’(이정표 : 고불봉2.9/ 하금호0.8/ 강구항4.5)숭덕사 갈림길’(이정표 : 고불봉0.9/ 숭덕사0.8/ 강구항6,5) 등의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깜빡 빠뜨릴 뻔했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금세 땀이 날 정도로 급경사이다. 그렇게 잠시 치고 오르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풍력발전단지/ 강구항)가 나온다. 이정표의 풍력발전단지가 오른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정상을 찍고 난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10분 남짓을 진행하자 드디어 고불봉(高不峰) 정상이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해발 235m)’과 이정표(강구항 8,4/ 못골 0.8/ 신세계아파트 1.0) 외에도 정자와 벤치, 운동기구 등의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왕에 나왔으니 고불봉에 대한 문헌도 참고해보자. 영덕 화림산 일맥이 천천히 달려 내려와 무둔산 자락에서 숨을 고르며 영덕의 정기를 받아 동으로 다시 달려 봉우리를 만드니 이것이 곧 고불봉이란다. 동해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두둥실 봉우리에 걸치면 봉우리도 둥글고, 달도 둥글다 하여 망월봉(望月峰)으로도 불린단다.



이곳 고불봉은 예로부터 경치가 곱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그런 풍경을 보고 옛 사람들은 불봉조운(佛峰朝雲)’이라 부르며 영덕팔경의 하나로 꼽았단다. 옛날 동해의 붉은 해가 심해 깊숙이 잠겨 있고 그 붉은 기운만이 적막강산을 휘감을 때 붉은색 비단이 덮이듯 새벽 구름에 싸여 있는 봉우리라는 것이다. 영덕에 유배 온 고산 윤선도는 이런 풍경에 반해 고불봉 밑에 유배소를 정하고 고불봉(高不峰)’이란 시를 남기기도 했단다. 정상석 바로 옆에 그의 시판(詩板)을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읽어볼 일이다.



구릉(丘陵)처럼 밋밋하게 생긴 고불봉(高不峰) 정상은 일부러 조성한 철쭉 꽃밭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정자는 물론이고 벤치에다 운동기구까지 여럿 배치한 것이 영락없는 산상공원(山上公園)이다. 누군가는 돌탑까지 쌓아 놓았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주민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들 위에는 열 손가락으로는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돌리고 있다. 그 너머의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영덕 읍내와 영덕읍을 가로지르는 오십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진행방향의 능선에 세워진 풍력발전기들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 구간은 통나무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잠시 후 삼거리에 내려선다.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삼거리에는 이정표(풍력해맞이단지/ 강구항/ 고불봉) 외에도 안내판 하나를 더 세워두었다. 블루로드는 고불봉이 정규코스가 아니란다. 다녀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구간이 경사가 심하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까지 적고 있다. 아까 고불봉으로 오르면서 만났던 삼거리에는 이런 안내판이 분명 없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고불봉을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표정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또 다시 가팔라진다. 이번에는 길가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다. 그런 가파름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어서 나타나는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서면 집수장으로 보이는 시설 아래에서 아스팔트가 깔린 이차선 도로(이정표 : 환경자원관리센터0.65, 풍력발전단지 6.5/ 고불봉1.3)를 만난다. 정상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도로를 따른다. 걷기가 편해지긴 했지만 속도를 내서 달리는 차들이 많으니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250m쯤 걸었을까. 길 건너에 영덕환경자원관리센터 입간판을 두고 곧장 좌측 산길을 오른다. 나무계단이 놓여있는데다 블루로드 안내판과 이정표(산림생태공원 3.8/ 해맞이 등산로 0.2)까지 세워져 있으므로 길을 못 찾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난 환경자원관리센터 앞으로 난 임도를 계속해서 따를 것을 권하고 싶다. 새로 내놓은 듯한 이 길을 따를 경우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꽤나 길게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억에 남을 만한 볼거리도 보여주지 못하니 일부러 고생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10분 남짓 올랐을까 데크전망대(이정표 : 산림생태공원 3.3/ 해맞이등산로 0.7)가 길손을 맞는다. 강구항이 눈에 들어오지만 아까 고불봉 정상에서 보았던 것에는 훨씬 못 미친다.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버리는 이유이다.



전망대 뒤의 고개를 넘으니 탐방로는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바닥에 침목계단을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길 양쪽에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았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아까 환경자원관리센터 앞에서 헤어졌던 임도(이정표 : 산림생태공원 3.0/ 해맞이등산로 1.0)를 다시 만난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7분만이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대형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임도를 따른다. 산허리를 휘감고 굽이굽이 도는 임도지만 볼거리는 별로이다. 기껏해야 길가에 세워진 정자와 맞은편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풍력발전기들이 다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산자락에 들어선 자작나무 숲의 눈부신 하얀빛도 볼거리로 쳐도 되겠다.




지칠만하면 불쑥 쉼터가 나타나고, 덥다 싶으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준다. 그렇게 1시간 남짓 걷자 드디어 풍력발전단지가 나타난다. 사계절 바람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활용한 시설이다. 풍력에너지라는 특수한 부존자원을 십분 이용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나저나 단지에 들어서자 비행기가 날아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음이 들려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어떤 사람은 오락실 게임에서 마사일을 발사할 때 나는 소리와 같다고 했다. 참고로 이 발전단지는 발전용량 1.65메가와트(megawatt)짜리 발전기 24기가 들어서있어 시간당 39.6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는 일반가정 2만 가구에서 월 400Kwh를 사용할 수 있는 양이란다. 영덕군이 20163말 기준으로 20,113세대였으니 영덕군민 전체가 쓸 수 있는 양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 단지는 전기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색적인 관광지로도 제공된다. 바람을 이용한 24기의 바람돌이들과 함께 잘 꾸며진 정원과 공원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 야외공연장과 별반산봉수대, 해맞이오토캠핑장, 대표문인들의 시비(詩碑)까지 보인다. 그야말로 영덕의 에너지와 전시, 문화와 역사가 총망라된 셈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만들어진 이 출렁다리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임도로 되돌아와 다시 탐방로를 따른다. 그러다가 정크트릭아트전시관이라는 생소한 풍경을 만난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폐품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평면의 그림으로 놀라운 착시 효과까지 준다고 한다. 부모와 함께 나들이 나온 아이들에게 딱 맞는 장소라 하겠다.



단지를 통과하다보면 곳곳에서 발전기를 만난다. 위풍당당한 발전기들 앞에 서면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하긴 한쪽 날개의 길이가 41m에 이르는데다 최대 높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니 어디 이를 말이겠는가. 포토죤(photo zone)도 가끔 보인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하얀 거인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 영덕의 명물인 대게를 빼먹었을 리가 없다. 앉을 자리를 아예 대게 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대게를 벗어난 영덕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의사표시가 아닐까 싶다.



조각공원도 보인다. 여러 조각상 중에 대게발의 오브제가 가장 눈길을 끈다. ! 단지 주변에 나무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어리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1997년 대형 산불이 났던 탓이란다. 영덕 해맞이공원도 산불이 나서 폐허가 됐던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란다.



곳곳에 바다와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다. 해돋이의 명소로도 널리 알려진 지리적 이점을 살릴 의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낯선 모습으로 서 있는 발전기와 함께 바라보는 일출은 이국적이라고 한다.



청소년해양체험관 앞을 지나다 이곳 풍력발전단지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신재생에너지전시관과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인 별반산봉수대를 둘러보지 못했음을 알아차린다. 너무 서두르다보니 그냥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하긴 해파랑길 20코스가 18.8나 되는데다 걷는데 주어진 시간까지도 빠듯했으니 그랬을 만도 하다.



매점이 들어있는 경북동해안국가지질공원 영덕홍보관건물 옆에는 윤선도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해설판도 보인다. 아까 고불봉에서도 얘기했듯이 영덕으로 유배를 온 윤선도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비까지 세워놓은 모양이다.



해파랑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는 곳에 동해안 일대의 여성 놀이 가운데 하나인 영덕월월이청청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15, 16세쯤 되는 처녀들과 새댁들이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노는 원무(圓舞)로서 음력 2월 보름날 밤에 가장 절정을 이루는 여성 집단놀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전라도 해안지방에 전승되는 강강술래와 흡사한데, 해안선을 따라 동해안의 영일·영덕지방에까지 분포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노물리 이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단다. 다른 주장도 있다. 영덕지방이 옛날부터 왜구가 자주 침범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지나간 곳이라 하여 월월이청정(越越而淸正)’이라 쓰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밝은 달밤에 논다고 하여 월월이청청(月月而淸淸)’으로 적기도 한다.



영덕월월이청청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동해안 쪽으로 진행한다. 풍력발전단지를 통과하는데 40분이 걸린 셈이다. 이젠 10분 남짓 소요되는 아스팔트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10분쯤 내려갔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창포말등대가 보인다. 등대 너머 먼 바다에는 어선 판 척이 거친 파도를 헤치고 있다. 어선은 결코 자연과 대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결위에서 유연하게 흔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도 꼭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조금 더 내려가자 바닷가 벼랑위에 걸터앉은 창포말등대가 그 속살을 내보인다. 그런데 등대가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평범한 등대가 아니다. 등대 기둥을 대게의 집게발이 감싸면서 빨간 윗부분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이다. 대게의 고장이어선지 등대 하나에도 이 고장 영덕만의 독특한 모양으로 빼어난 멋을 부렸다. ! 위의 빨갛고 둥근 것은 해를 형상화한 것이라니 기억해 두자.




등대 아래에 조성해놓은 광장에서도 대게의 조형물이 여행객을 반긴다. ‘바다의 헌장을 적은 빗돌이 한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광장의 중앙에 대게의 집게발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튼튼한 집게발이 영덕의 상징인 양 파르스름한 빛깔을 띤 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이젠 20번 지방도를 따라 해맞이공원으로 향한다. 차량이 많이 달리는 도로이지만 탐방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데크와 철제조형물로 장식까지 되어 있으니 주변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서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영덕 해맞이공원

그렇게 5분 정도를 진행하자 해맞이공원에 도착하면서 오늘 트레킹의 종료된다. 길가 작은 공간에 주차장을 조성하고 해안 쪽에는 데크전망대를 만들었다. ‘영덕해맞이공원이라는 표지석도 세웠다. 그만큼 해맞이하기에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간 너머로 뻥 뚫린 시선이 저 멀리 태평양 바다까지 닿을 것 같다. 쪽빛 바다가 파란 하늘과 어울리며 가슴까지 후련하게 만들어준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5시간이 걸렸다. 18.8에 이르는 구간 대부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꽤나 빨리 걸은 셈이다.



해파랑 19코스

 

여행일 : ‘19. 4. 20()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와 영덕군 남정면·강구면 일원

산행코스 : 화진해수욕장(4.2)장사해변(5.1)구계항(3.8)삼사해상공원(2.7)강구항(소요시간 : 15.84시간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의 영덕구간은 영덕판 올레길이라는 블루로드와 대부분 겹친다. 화진해수욕장에서 출발해 강구항에서 막을 내리는 해파랑길 19코스역시 예외가 아니다. 화진해수욕장에서 지경교까지 20분 남짓의 거리를 제외하고는 블루로드 D코스(쪽빛 파도의 길, 14)’와 온전히 겹치기 때문이다. ‘대게누리공원에서 시작되는 블루로드의 특징은 백사장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삼사리의 해상산책로와 해상공원 등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경관을 함께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장사리에서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사상륙작전의 역사적 교훈도 되새겨 볼 수 있다. 또한 이 구간은 영덕의 어촌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트레킹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들르게 되는 어촌민속전시관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들머리는 화진해수욕장(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포항방면으로 내려오면 해파랑길 19코스의 날머리인 강구항을 거쳐 잠시 후에는 들머리인 화진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백사장길이 400m에 폭이 100m인 화진해수욕장은 평균수심이 1.5m밖에 되지 않는다. 1만 평에 이르는 백사장은 하루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단다. 참고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해수욕장을 벗어나기 직전에 해수욕장안내도와 함께 만날 수 있다.




’7번 국도로 올라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자전거도로를 겸한 탐방로가 국도와 구분되어 있지만 씽씽 내달리는 차들의 속도감에 기부터 질려버린다. 사실 트레킹을 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곳이 찻길이다. 교통량이 부쩍 늘어나는 국도라면 더욱 질색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19코스는 다들 피하고 싫어하는 그런 상황을 부지기수로 만나게 된다. 마을과 마을이 대부분 국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심 또 조심이 필요한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도로에 올라선지 얼마 되지 않아 탐방로는 바닷가로 향한다. 그리곤 왼쪽에 해송 숲을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기기묘묘하게 생긴 갯바위들은 덤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걷는 19코스는 영덕판 둘레길인 블루 로드D코스와 겹친다. 하늘을 봐도, 그 하늘을 닮은 바다를 봐도 온통 쪽빛 푸르름이 가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이번 여행에서 촬영한 내 사진들은 파란 길이라는 그 이름에 동화되어 버렸다. 사진들마다 하나같이 온통 쪽빛으로 도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카메라 조작을 잘못해서 생긴 불상사인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름에 걸맞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수 덕분에 그 푸르름이 짙고 더 짙어져 무서움마저 들 정도까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맞다. 이 정도는 되어야 파란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바위이다. 누군가는 물고기처럼 생겼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무서운 동물처럼 보인다.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으니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생김새 또한 달리 보이는 게 정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 바위가 파도를 가르며 헤엄쳐 들어갈 자세를 취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8분 만에 지경마을에 도착한다. 대여섯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는 작은 포구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청하현과 영해현의 경계(地境)에 놓인 땅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리인 이곳 지경마을에다 2리에 있는 어사터와 염전(鹽田)이란 자연부락이 합쳐지면서 법정마을인 지경마을(地境里)이 완성되었다.



포구에서 지경마을의 주택가까지는 해안길을 따른다. 바닷가에 방파제를 쌓고 그 안쪽에 기대어 도로를 만들었다.



지경 마을의 끄트머리에서 지경천(地境川)을 만나면 탐방로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1톤 이상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킨다는 지경교 옛 다리를 건너면 이젠 영덕(남정면) 땅이다. 동네 이름도 부경리(阜境里)가 된다. 사람들은 지경천을 회리천(晦里川)이라고도 부르며 또 어떤 이들은 이 부근을 골곡포(骨谷浦)라고 주장하면서 신라시대 향가 헌화가가 탄생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수로부인이 경주를 출발해 지금의 포항을 거쳐 강릉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있었는데 되레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빠진 한 백성이 벼랑 위 철쭉을 바쳤다는 것이다.



지경다리를 건너자 국도 왼편에 대게누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에 세워놓은 엄청나게 큰 대게조형물이 이제 대게의 본고장인 영덕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맞다. 영덕은 대게의 고장이다. 오죽했으면 대게라는 보통명사 앞에 영덕이라는 지명이 붙어 영덕대게라는 고유명사가 되었겠는가. 그래서 영덕에서는 대게 모양의 구조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공원에 세워진 저 조형물도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영덕의 관문인 부경마을(阜境里)은 고부동(高阜洞)의 부()자와 지경동(地境洞)의 경()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리와 2리로 나눠지는데 포구가 있는 1리는 19세기 후반에 박씨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원진(元津)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고부동이라 고쳐졌단다. 아까 지경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났던 2리는 임진왜란 때(1592) 개척된 마을이라니 참조한다. 지경리에서 이곳 부경1까지는 19분이 걸렸다.



부경리의 특징은 탐방로가 해안가가 아닌 마을안길을 따르는 점이라 하겠다. 그렇게 부경마을을 빠져나오면 탐방로는 다시 7번 국도로 올라선다. 맞닿는 곳에 부경1의 마을표지석과 이정표(장사해수욕장 1.17/ 대게누리공원 1.1)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씽씽 달리는 차량들로 넘치는 국도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국도 옆에 자전거용 도로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영덕 관내로 들어서면서 탐방로의 꾸밈새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이정표의 숫자도 훨씬 더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길 양옆으로 흰색의 실선과 푸른색 실선이 나란히 붙어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흰색이 파도이고 푸른색은 바다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더 있다. 길바닥에 심어놓은 방향표시가 그려진 동판이 심심찮게 보였다.



국도로 올라서서 1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부경리에서 13분이 걸린 지점이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타원형을 이룬 채 길게 뻗어있는 모래사장이 길손을 맞는다. 장사해수욕장이라는데 작은 규모(길이 900m에 폭이 80m)이지만 교통이 편리한데다 백사장 뒤로 소나무 숲까지 우거져 있어 인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단다. 특히 모래의 알이 굵고 몸에 붙지 않아 맨발로 걷거나 찜질을 할 경우 심장과 순환기계통의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장사해수욕장의 바닷가에는 회색빛 배 한 척이 정박되어 있다. 쪽빛 바다에 무겁게 가라앉은 저 배는 장사상륙작전 때 태풍으로 침몰했다는 문산호의 실물 크기 모형이란다. 장사상륙작전은 실제 상륙지점인 인천의 반대편에 있는 동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상륙 지역을 오판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적들의 주의를 동해안 지역으로 집중시키고,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의 전진로를 개척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작전은 미군 군사전문가들조차도 성공 확률을 5,000분의1로 점치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태풍에 좌초한 문산호는 1997년에야 바닷속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모형으로 다시 태어나 후세들 앞에 전승기념관으로 섰다.



문산호의 앞에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벽면에는 작전에 참전했던 용사의 명단이 화인(火印)처럼 박혀있고, 다른 한 쪽 면에는 그때의 정황을 요약한 내용이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영덕군에서는 장사해변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으로 꾸미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는 장사상륙작전의 재평가를 통해 그분들의 충혼이 후세에 널리 기려지게 하려는 목적이란다. 그래선지 원래의 위령탑이 자리 잡았던 장소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위령탑의 오른편에 위령탑의 원래 자리임을 알리는 검은색 빗돌(碑石)을 세워놓았다.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내용을 적은 비석도 물론 함께이다. 당시 학도병을 주축으로 한 병력 772명은 상륙함인 문산호를 타고 태풍으로 인한 풍랑을 무릅쓰고 상륙함으로써 7번 국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희생도 컸단다. 출처에 따라 숫자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기념탑의 명판에는 130여 명이 전사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 장사해수욕장은 MBC-TV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해변 촬영지로 알려진다. 가난한 어촌 가정을 중심으로 한 형제들 간의 각기 다른 사랑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로 최불암과 김혜자, 박상원, 최진실, 차인표, 송승헌 등 당시(1997)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배우들이 총 출연해서 화재를 불러 모았던 작품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야외무대의 바닥에 드라마의 장면들을 그려 넣었다. 야외무대 앞에는 영덕 블루로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도보여행자를 위한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영덕블루로드는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688km의 동해안 트레킹코스인 해파랑길 중 영덕군 남정면 대게공원을 출발하여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64.6km의 해안길이다. '쪽빛 파도의 길'빛과 바람의 길’, ‘푸른 대게의 길’, ‘목은 사색의 길등 모두 4개의 코스로 이루어져있는데 영덕만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과 이야기 덕에 꾸준하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단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변(이정표 : 원척항 2.4/ 대게누리공원 2)으로 올라선다. 도로 오른편으로 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부흥리해수욕장(이정표 : 원척항 1.8/ 장사해수욕장 0.31)’이다. 하지만 폭이 좁은 것이 썩 뛰어난 해수욕장은 아닌 것 같다. ! 해수욕장의 이름은 비록 부흥(富興)이지만 이곳의 행정구역은 사실 장사리임을 기억해 두자.



부흥교를 지난 탐방로는 동해연수원(경운대학교, 대구과학대학)을 좌측에 두고 해안 오솔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바닷가에 지어진 사신당(社神堂)’을 만난다. ‘사신(社神)’이란 토지의 신을 말한다. 바닷가 마을에서 모시는 신이 대부분 해신(海神)인 점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하겠다. 그런 내 의구심을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금빛 거북이 세 마리를 신당 앞에다 모셔놓았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거대한 벽화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의 축대에다 커다란 갯바위 위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이 부근의 갯바위들이 일류의 낚시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부흥리(富興里)1리인 날미(飛勿)’2리인 가추(佳雛)’, 그리고 3리인 자부랑(者富郞)’으로 이루어졌다. 부흥이라는 지명은 자부랑(慈富 : 者夫郞)의 부()자와 신흥(新興)의 흥()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신흥이 어디를 이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닷가에는 바닷고기 조형물을 곁들인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휴게시설을 갖춘 깔끔한 거리에 벽화와 전망대, 조형물 등 한마디로 정성아 담뿍 들어간 마을 풍경이다. 2년쯤 전인가 이곳 부흥리가 토탈경관 디자인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이 사업은 지붕도색 및 벽화조성을 위주로 한 경관개선사업, 깨끗하고 보행이 편안한 거리 조성사업, 이색적인 문화공간 및 휴게공간 조성사업, 해안마을 특성에 맞는 조형물 설치사업, 도시미관을 고려한 옥외광고물디자인사업 등으로 이루어졌다니 참조한다.




포토죤(photo zone)도 만들어져 있다. 그러고 보니 주변 경관이 장난이 아니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이 쪽빛 바다와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부흥마을을 지난 탐방로는 바닷가로 내려선다. 이어서 모래사장과 갯바위를 번갈아 걷다가 다시 국도(이정표 : 경보화석박물관 0.2/ 경운대연수원 0,25)로 올라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원척리(구계항 2.5/ 장사리 3.1)에 이른다. 국도에 올라선지 5분 만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동신당(洞神堂)’ 건물이 눈에 띈다. 동신(洞神)은 마을을 수호해주는 신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동신을 모시는 마을들의 대부분은 매년 정초에 마을 전체의 풍요와 건강을 비는 제사를 공동으로 드리는데, 이런 성격의 동신제는 삼한시대의 제천의식을 거쳐 단군신화에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동신 신앙에는 한민족이 살아온 생활사적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냥 흘러들어서는 안 되는 우리네들의 문화유산이라는 얘기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원척항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까지 오면서 만났던 포구들보다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포구 옆의 주택들도 역시 층수를 높였다. 그래봤자 마을 포구임에는 변함없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 원척마을(元尺里)은 조선 인조 년간에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동해바다와 산언덕을 자()로 재듯 조화롭게 관리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원척마을 지나면 탐방로는 다시 국도(구계항 2.2/ 장사리 3.5)로 올라선다. ! 그러고 보니 동네를 지나는 도중 경보화석박물관를 지나쳐버렸음을 알리는 이정표(구계항 2.4/ 경보화석박물관 건너편 1.0)가 눈에 띄었었다. 경보화석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화석박물관이다. 석기시대 때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보존가치가 높은 화석과 규화목들을 빼곡하게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탐방로가 박물관의 건너편으로 나있던 게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국도를 따라 잠시 걸으니 방학중이야기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백수로 산 해학가이자 못하는 것이 없는 기발한 재주꾼, 유머가 넘치는 익살스런 인물로 알려진 방학중이 영덕 출신의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근세의 해학과 풍자의 달인으로 구비 역사에 남아있는 그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속임수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고 사람들은 그를 천하잡보라고 부른단다. 아무튼 기발한 재주꾼에 유머가 넘치는 그는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인물이다.



안내판 근처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자전거길을 겸한 원래의 탐방로를 놓아두고 오른편 바닷가 쪽으로 길이 하나 나뉘는 것이다. 길가에 블루로드의 진입로임을 알리는 표식이 되어있어 일단 내려서고 본다. 하지만 해파랑길 표식은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고 있으니 참조한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위에서 봤던 방학중에 대한 안내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이곳이 지푸심골에 위치한 박학중의 묘소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묘도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무튼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과 언덕길, 갯바위 등을 반복해서 오르내리는 탐방로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은 제법 쏠쏠한 편이었다. 기암괴석들이 쪽빛 바다와 잘 어울리고 있는 백사장과 솔향 가득한 소나무 숲길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쌓였던 피로를 풀어주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바닷가로 내려선지 15분 만에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이정표 : 구계항 1.2/ 원척항 1.3)로 올라선다. 하지만 길은 이곳에서 또 다시 둘로 나뉜다. 이번에는 해파랑길의 표식도 아래로 향하고 있다. 아니 또 다른 해파랑길 표식은 계속해서 자전거길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가라는 모양이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아까보다도 더 나은 풍광들이 펼쳐진다. 낚시질하기 딱 좋은 갯바위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 숲도 더욱 짙어졌다.



눈요기를 즐기며 걷다보니 길이 끊겨있다. 난간까지 두른 쇠사다리가 중간이 뚝 부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이곳에서 다시 국도로 올라붙는다. 이어서 진행방향에 위치한 구계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구계(龜溪)’라는 지명은 마을 앞 바위의 모양이 마치 새우가 물에 떠있는 형상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하부(鰕浮)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구배, 구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고 깊은 계곡이 있어 구계라 했다고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잠시 후 탐방로는 구계리’(이정표 : 남호해수욕장 1.67/ 원척항 1.9)’로 들어선다. 빨갛고 하얀 등대가 세 개나 서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포구를 끼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은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는데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이후로는 많은 배들이 드나든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마을에는 횟집과 펜션, 카페들이 제법 들어서있다. 원척마을에서 구계마을까지는 5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이 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길가 방파제를 쉼터로 꾸며놓았다는 점이다.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앞은 갯바위에다 테트라포드를 연결해 천연의 풀장을 만들어 놓았다. 물놀이철로는 아직 일러선지 사람들 대신 갈매기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구계리를 빠져나오면 또 다시 국도(이정표 : 남호해수욕장 0.5/ 구계항 0.5)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남호해수욕장에 이른다. 1km쯤 되는 결이 고운 백사장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분위기가 아늑한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결 곱다는 백사장이 아니라 해변에 늘어선 예쁜 펜션과 찻집 등이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남호항을 지나면 곧이어 남호마을(南湖里)이 나온다. ‘남호라는 지명은 1914년에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때 생겨났으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역전(驛前)으로 불리었단다. 냄불, 남역불, 내무뿔로도 불리었는데, 이는 남역 앞에 있는 벌(모래사장)가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나저나 남호마을은 남정천(南亭川)이 둘로 갈라놓는다. 자연이 갈라놓은 마을을 인간이 다시 이었다. 보행자 전용의 예쁘장한 다리를 새로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다리를 꽃다리라 불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지명검색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리 건너의 카페 앞은 파라솔 천지이다. 하지만 나그네의 눈길을 끄는 건 금과옥조(金科玉條)들을 적어놓은 팻말들이다. 삶은 파도와 같다는 파도위에서 춤추기’,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한다는 나옹선사의 법어 등이 적혀있는데 그중에서도 바다와 청산이 한곳이라는 춘원 이광수의 시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바닷길 트레킹에 심취해 있는 우리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지나서도 바닷가를 떠나지 못한다. 아니 쪽빛 바다와 갯바위들이 어울리며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내는 풍경에 반해 탐방로를 일부러 돌려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블루로드(Blue Road)는 우리말로 쪽빛 길이고 해파랑은 해와 푸른바다를 벗 삼아 걷는다는 뜻이니, 이렇게 고운 바닷가를 놓아두고 어찌 국도로 올라서겠는가.



그렇다고 바닷길이 삼사마을(三思里)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잠시 국도(이정표 : 삼사해상산책로 0.31/ 남호해수욕장 0.64)로 올라섰다가 마을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사라는 지명은 신라(新羅) 때 시랑(侍郞) 벼슬을 한 세 사람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 사람의 시랑들이 이 마을에 숨어 살았다 하여 삼시랑골 또는 삼시랑이라 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생각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삼사(三思)라는 지명만 놓고 보면 맨 마지막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조금 더 걷자 2011년에 준공했다는 233길이의 해상산책로가 바다의 심장부로 향하듯 길게 뻗어 있다. 부채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입구로 들어가 손잡이 부분을 지나면 좌우로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산책로는 교각이 높고 길어 동해안 바다의 풍경을 가까이에서 눈에 담고 느끼기에 딱 좋다 하겠다. 중간에는 강화유리로 바닥을 깔아 철썩이는 파도를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도 했다. 유리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 아래가 내려다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산책로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산책로에 오르면 수평선까지 펼쳐진 동해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풍경너머로 삼사리를 낀 주변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다. 마을 뒤에 위치한 언덕은 이곳 삼사리의 또 다른 명소인 삼사해상공원이다.



이곳 삼사리도 역시 방파제를 계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저녁 나들이 나온 주민들이 담소를 즐기기에 딱 좋겠다. 이 구간은 방파제의 위를 걸어봤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가로등의 기둥을 피해가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파도소리를 벗삼아 걷기에 제격이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선착장 근처에 이정표(삼사해상공원 정문0.2/ 삼사해상공원 산책로0.7)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탐방로는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잠시 후 탐방로는 삼사해상공원(三思海上公園)의 정문에 이른다. ‘어서 오십시오반원의 형태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 마치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길손을 반긴다. 이젠 꽃단장이 된 산책로를 따라 공원으로 오르는 일만 남았다. 가는 중간에 이북도민 망향탑무공수훈자 전공비도 기웃거리면서 말이다.



곧이어 탐방로는 언덕 위에 만들어진 널따란 광장에 올라선다. 주변의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손짓을 하지만 그냥 공원의 안으로 들어서고 본다. 광장 중앙에는 일출의 장관을 표현한 바다의 빛이라는 주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전체높이 6m40cm에 넓이가 12m인 이 대형 조형물은 하늘과 땅,그리고 바다 등 세상만물의 모든 기운을 모아 가운데 원을 행해 나아가 드넓은 우주로 펼쳐가는 형상을 담았단다. 또한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과 파도의 상징성도 갖고 있다니 한번쯤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광장 한켠에는 돌에 꽃무늬가 있다는 거대한 화문석(花文石)을 모셔두었다. 그런데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크기가 천하제일인지 아니면 그 문양이 천하제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매화, 공작 등이 새겨져 있으며 무게가 20톤이라는 내용만 알아낼 수 있었다. 화문석의 근처에는 하산 김한홍선생의 해유가비도 세워져 있다. 영덕 태생인 김한홍 선생은 1894년 향중의 시회(詩會)에 장원으로 뽑힐 만큼 일찍부터 한시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빗돌에는 어지러웠던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을 적은 싯귀가 적혀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는 경북대종을 모신 전각이 올라앉았다. 매년 초 타종식 행사가 열린다는 경북대종은 신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種, 국보 제29호인 에밀레종)을 본()으로 삼아 대금을 부는 천인상(天人像)’과 사과를 든 비천상(飛天像)’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야외공연장도 보인다. 주위 경관이 좋아 가족단위의 나들이 코스로 각광 받는다고 했는데 그에 맞추어 각종 문화공연이 자주 열린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대종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어촌민속전시관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아니 해파랑길도 이 길을 따르니 일부러 찾아갔다고는 볼 수 없겠다. 이 어촌민속전시관은 어촌지역에서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과 문화를 발굴·보전하여 전통 어업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관광객 및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새로운 볼거리 제공과 산 교육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지하부터 지상 3층까지 크게 3개의 층으로 나눠져 있으며 어촌, 대게, 낚시와 바다세계 등릐 전시뿐만 아니라 가상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영덕 어민들의 어로활동과 별신굿에 대한 이야기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특히 대게 잡이의 모습을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재현해 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어류화석 전시실도 꼭 들러볼 것을 권해본다. ! 맨 위층에 강구항이 잘 조망되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배경이 된 어촌마을로 드넓은 청청해역을 낀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전시관의 뒷길로 내려오면 해안길이 나온다. 탐방로는 이제부터 해안도로를 따른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오포마을(烏浦里)이다. 마을 뒷산이 까마귀의 머리(烏頭)’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마을로 들어가는 도중에 모래해안이 나오지만 공사자대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이 상태가 별로다. 하지만 이 마을에 있는 하얀 등대는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주인공 민규(송승헌)가 애견 도꾸와 나란히 앉아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곳이다. 그건 그렇고 해안이 끝나기 전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골목길로 인도된다. 오십천(五十川)이 마을길을 끊어놓은 때문인데 삼거리(오포리 해안쪽)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던 탐방로는 오포교를 건너 ‘7번 국도에 또 다시 올라선다. ! 중간에 테라스(terrace) 모양으로 만든 탐방로를 걸으면서 강구항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이층의 테라스로 오르면 강구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십천 건너의 상가에 엄청나게 큰 대게 조형물이 걸려 있다. 아까 영덕 땅에 들어서면서도 얘기 했듯이 영덕은 대게의 고장이다. 오죽했으면 영덕이라는 지명과 대게가 합쳐져 영덕대게라는 교유명사까지 나왔겠는가. 그러니 이곳 강구라고 해서 예외일리는 없다. 많은 건물들이 대게조형물을 매달고 있음이 그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린 대게를 맛볼 수가 없었다. 산악회의 시간표가 느긋하게 대게를 맛볼 만큼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산물이라는 가자미이다. 하지만 우린 이마저도 맛볼 수 없었다. 횟집에서 부른 가격이 상상외로 비쌌기 때문이다. ‘대게뿐만이 아니라 가자미마저도 귀하신 몸이 되었나 보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강구파출소(영덕군 강구읍 오포리 75-1)

국도를 따라 잠시 걷자 강구파출소를 오른쪽 옆구리에 낀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강구다리를 건너 강구항으로 연결된다. 해파랑길과 동해안 자전거길은 이 다리를 건너 20코스로 이어진다. 그래선지 이곳 사거리에 해파랑길안내도스템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아무튼 오늘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에 나타난 거리가 17.56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냈던 점을 감안하면 속도는 조금 더 빨라지겠지만 말이다.


해파랑길 18코스

 

여행일 : ‘19. 4. 6()

소재지 : 경북 포항시 흥해읍과 청하면, 송라면 일원

산행코스 : 칠포해변(3.3km)오도리해변(7.8km)월포해변(8.2km)화진해변(소요시간 : 19.316.96를 걷는데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칠포해수욕장을 출발하여 포항의 흥해읍과 청하면, 송라면의 어촌마을들을 지나 포항의 북쪽 끝자락인 화진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19.3의 둘레길이다. 물 맑고 수심 얕은 여러 해변을 걷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칠포와 월포, 화진 등 백사장이 길게 늘어져 있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있는 조경대 부근의 해안은 18코스의 백미(白眉)라 하겠다. 또한 칠포, 오도, 청진, 이가, 용두, 월포, 방어, 조사, 방석, 화진 등 10개의 크고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며 그들의 삶과 숨결을 느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한 편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칠포해수욕장(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112)

새만금-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영일만대로를 타고 영일만신항 방면으로 달리다가 우목터널(흥해읍 용한리 산 149-36) 부근에서 20번 지방도로 옮겨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칠포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흥해읍이 자랑하는 멋진 해수욕장으로 해파랑길 17코스와 18코스가 이곳에서 나뉜다. 참고로 이곳 흥해(興海)는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먼 옛날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나 이 일대가 호수로 변해 있다가 동편 곡강(曲江) 어귀의 산맥이 절단되면서 물이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은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는 평야지대가 되었단다.




백사장 길이 2km에 폭이 70m인 칠포해수욕장은 하루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왕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며 주변 바닷가에서는 바다낚시도 가능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재즈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매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열리는데 꽤 많은 국내외 동호인들이 몰려든단다.



18코스의 들머리는 주차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바다시청·해양스포츠클럽 쪽으로 열린다. 해파랑길의 스탬프 함도 이곳에 만들어져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얼마간 걷자 탐방로는 이내 산비탈로 파고든다. 벼랑 수준의 바윗길이지만 데크로 계단을 놓아 탐방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방도를 따라 에둘러가야만 하는 불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작은 데크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트레킹을 시작했던 칠포해수욕장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는 끝 간 데 없이 넓고 푸르다. 거센 파도에 속살을 내주고 있는 칠포해수욕장의 긴 백사장도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능선을 내려서자 아담하고 아름다운 칠포2리 해변이 반긴다. 아직은 해수욕장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조용해서 텐트 치고 놀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장소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모래사장을 지나는데 우뚝 솟아있는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위 위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모습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썰렁한 느낌의 간이해수욕장을 단연 돋보이게 만드는 풍경이라 하겠다.




모래사장이 끝나자 단위부락인 강서(江西) 마을칠포 2이다. 고현천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칠포 1강북(江北) 마을과 함께 법정마을인 칠포리(七浦里)‘를 완성한다. 마을이 끝나면서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칠포교(七浦橋)를 건넌다. 물이 제법 많은 하천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면 강북마을‘, 즉 방파제 벽화가 아름다운 칠포1포구이다. 조선 중종 5(1510)에 쌓았다는 칠포성(七砲城)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니 원래의 칠포라 보면 되겠다. 이곳 칠포는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이다. 고종 8(1870) 동래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군사 요새로서,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하여 칠포성(七砲城)이라 불렀다 한다. 칠포(漆浦)라고도 부르는데 절골에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한 듯 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현재의 지명인 칠포(七浦)1914년 강서와 강북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생겨난 이름이란다. 옛 얘기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칠포 앞바다는 현재 방파제를 쌓아 항구로 만들었다. 그것도 제법 너른 규모이다. 하지만 햇살이 고여 아늑한 항구에는 작은 어선 몇 척뿐이다. 옛 영화를 되살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칠포를 지난 탐방로는 뽈록하니 튀어나온 해안가를 따른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오른쪽은 축대를 쌓아 파도를 막아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길이다. 동해와 평행하게 달리는 7번 국도의 명성에 가려진 이 길은 지방도이면서 마을 앞길이기도 하고, 바다와 마을 사이를 구분 짓는 방파제 길이기도 하다. 웬만한 지도에는 길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이다.



바닷가 언덕 위, 언뜻 보면 신전 기둥을 떠올리게 하는 아치형 하얀 구조물이 눈길을 끈다. 작년 여름 터키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신전(神殿)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가씨에 이끌려 자세히 살펴보다가 헛웃음을 짓고 만다. 허물다만 폐건물의 기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없애는 것보다는 조형물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아보였던 모양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변에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이 길손을 맞는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 마치 해골을 보고 있는 듯하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재작년 대만의 야류지질공원을 둘러보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던 바위들에도 하등 뒤질 게 없어 보이는 모양새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데크로드로 연결된다. 20번 지방도로 올려다놓는 오르막 계단이다. 계단의 들머리에는 연안녹색길(해파랑길 18구간)‘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칠포리에서 오도리로 넘어가는 이 길을 새로 내면서 함께 세운 모양이다. 도로로 올라서서 100m쯤 더 걷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가 나타난다. 해오름전망대란다. 해오름은 포항과 울산, 경주 등 3개 도시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라고 한다. 3개의 도시는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다. 산업화를 일으킨 산업의 해오름 지역이라는 뜻과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단다. 트레킹 들머리에서 이곳 해오름전망대까지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전망대는 금방이라도 동해의 푸른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것 같은 범선(帆船)의 모양새이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바닥은 금속으로 된 무늬창살 같아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집사람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하긴 작년 가을 태항산에 갔을 때 100m도 넘는 바위절벽에 제비집처럼 걸쳐놓은 유리잔도(玻璃栈道)‘300m나 걸었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전망대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툭 튀어나간 스카이워크 뒤로는 망망대해가 끝 간 데 없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 지나온 칠포2리 마을과 그 너머의 모래해안 풍경이 길게 펼쳐진다. 반대 방향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석해안이 저 멀리 오도리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군()의 초소가 눈길을 끈다. 맞다. 아까 만났던 안내판에는 이 구간을 연안녹색길이라고 했었다. 과거 군사보호구역으로 해안경비의 이동로였던 곳을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볼 수 있게 조성해 놓은 길이란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탐방로는 다시 해안으로 내려간다. 이어서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전망 좋은 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도 1이다. 자연부락 이름으로는 섬목(島項)‘이 아닐까 싶다. ’섬목이라는 게 본디 오도리(烏島里)‘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겠는가. 그 증거가 바로 오도(烏島)‘라는 지명이라 하겠다. 부둣가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한 3개의 커다랗고 질펀한 검정색 바위섬을 이르는 이름이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곳 오도리는 1914년 이곳 섬목한가심이‘, ’검댕이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작은 포구가 만들어져 있다.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항구이다.




오도 1리 앞 바닷가는 간이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다. 칠포해수욕장처럼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여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명소라고 한다. 바다는 풍파 없는 삶처럼 잔잔하고 햇볕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따스하다. 그래선지 텅 비어있어야 할 모래사장이 사람들을 품고 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이 보이는가 하면 텐트 옆에 주저앉은 여인은 뭔가를 끓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금빛 백사장과 오도(烏島)섬을 앞에 둔 마을에는 횟집과 카페, 펜션 등의 상가들이 빙 둘러 앉았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고래카페라 하겠다. 뽀얀 건물에 벽화와 소품이 예뻐 오도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직접 로스팅을 해주는 실력 좋은 카페라고 하니 한번쯤 들렀다 가볼 일이다. ! 제주도의 돌담 분위기를 가져왔다는 카페 린도(Rin Do)‘도 권장 받을만하니 기억해두자.



간이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날 즈음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로드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역시 언덕위로 올려놓는 오르막 계단이다.



언덕으로 올라 모퉁이를 돌은 다음 오도교를 건너면 이번에는 오도 2이다. 큰 나루터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 한가심이와 비구니들만 사는 금단(禁斷)의 절이 있다는 뜻의 지명이 변천한 검단(檢丹)‘이 함께 들어있다. 사람들은 이곳 오도 2의 볼거리로 사방기념공원을 꼽는다. 한국 사방 100주년을 기념해 2007년 문을 연 이 공원은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1975년부터 5년간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되어 총면적 4,500ha를 단기간에 녹화한 전국 최대 규모의 사방사업 성공사례를 보여주는 외부공원과 사방사업 기술변천과 각종 자료를 모아 전시한 실내전시실로 나눠져 있다. 그 옛날 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 춘궁기를 넘기기 위해 사방사업에 종사하며 국토 녹화에 이바지한 사방기술인의 혼과 땀이 깃든 자료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를 둘러보지 못했다. 산악회에서 정해놓은 귀경시간에 맞추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해오름 전망대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오도리를 지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20번 지방도(이정표 : 이가리 간이해변3.4/ 오도리 간이해변1.4)로 올라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청진 3보리진마을에 이른다. 오도리에서 10분이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청진 3는 포이포, 포위진, 모진으로도 불리는데 임란 때 왜적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보리가 잘 되는 어촌이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1리인 대곶이2리인 푸나리와 함께 법정 마을인 청진리(靑津里)‘를 이룬다. 이곳 청진 3부터 청하면이 시작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 마을도 역시 두어 척의 작은 어선이 전부인 작은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청진 2로 가는 길, 아니 청진 1까지는 마을과 바다를 갈라놓은 길을 따른다. 바다는 파도가 집으로 들이칠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깝다. 그러니 그 사이에 놓인 길은 방파제를 겸한 셈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청진 2푸나리마을로 들어선다. 작은 포구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원래 길 서편 골짜기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역시 송정이었다. 그러다가 바닷가로 이주하면서 푸른나리로 변했고, 언제부턴가는 이를 줄여 푸나리(靑津)‘로 부르기 시작했단다.



물이 맑고 수심이 얕은 바닷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청진 3‘, 대곶이마을이 나온다. ’죽관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마을 이름을 낳게 한 대나무 숲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청진3리에서 청진1리까지는 20분이 걸렸다.



해파랑길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여행자의 길이다.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 뼘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연인바위이다. 설화에 따르면 선사시대 때 이곳은 다른 부족과의 전쟁이 잦았다고 한다. 아버지인 부족장이 싸움에 패하자 그의 딸 해수기는 피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도중에 추격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마을 청년 무돌이 해수기를 구한 뒤 100여 일 동안 저항하지만 끝내 죽음을 맞았고, 두 사람은 바위가 되어 서로를 애틋이 지키고 있다. 죽어서라도 사랑을 꽃피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위대함을 화두로 삼으며 외딴 모퉁이를 돌아서니 10분 만에 이가리(二加里)‘가 나온다. 해양경찰서의 파출소까지 설치되어 있는 걸 보면 제법 큰 마을인가 보다. ’이지로포이기로진으로도 불리는데 옛날 도 씨와 김 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에 두고 각각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하나로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란다. 옛날 두 기생이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터를 잡고 살면서 늙도록 마을을 개척했다는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여기서 백암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자연부락이다. ! 이곳 이가리에는 독도체험연수원라는 특이한 볼거리가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2017년 폐교한 이가초등학교 자리에 세웠는데,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까지 정하는 등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떼쓰는 현실에 비추어 큰 의미가 있는 시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는 이번에도 안으로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이가리를 벗어날 즈음 월포해변까지 3.3가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다. 흔하디흔한 게 이정표이니 뭐가 신기하겠는가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에 거론해본다. 이정표나 해파랑길 표식 모두가 왼쪽으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해안가를 따라갈 것을 권한다. 제멋대로 생긴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이 부근이 해파랑길 18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아도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하다. 그런 풍광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부근이라 하겠다.




볼거리가 널린 해안을 돌아가면 이가리 간이해수욕장이다. 이곳도 역시 칠포해수욕장에는 한참을 못 미친다. 크기뿐만 아니라 편의시설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아늑한데다 뒤에 울창한 숲을 끼고 있어 한적한 곳을 찾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는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모래사장과 인근 소나무 숲속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간이해수욕장의 북쪽 끝에서 탐방로는 작은 언덕으로 오른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전망이 좋은 저 언덕은 조경대(釣鯨臺)’라 불린다.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그의 유람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에서 이곳의 아름다움을 읊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화단의 대표 화가 중 한 분인 겸재 정선도 청하현감으로 재직하며 2년간 머무를 때 이 부근의 풍광에 빠져 자주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황여일(黃汝一)은 조경대에서의 풍광을 북쪽 바다 위의 하늘은 광활하고 서쪽 산엔 구름이 우거졌으며, 가까이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빽빽하게 서있다고 읊었다. 그의 말마따나 바닷가에는 제멋대로 생긴 기암들이 수없이 늘어서있다. 화가나 시인이 꼭 아니더라도 그 기이한 풍광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겠다. 머리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바위도 보인다. 바위도 바위지만 단단한 곳에 뿌리를 내려 푸른 숨을 쉬고 있는 소나무의 의지도 대단하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면 엄청나게 널따란 모래사장이 길손을 맞는다. ‘용두리 해수욕장인데 통행을 막고 있다. ‘포스코 패밀리직원 및 가족의 전용시설이라며 출입을 삼가 해달라는 안내문까지 세워놓았으니 어쩌겠는가. 때문에 탐방로는 포스코수련원의 앞으로 난 20번 지방도로를 따른다. 이가리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포스코연수원을 지나면 용두리(龍頭里)’이다. 이곳에도 해수욕장이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월포해수욕장에 가려 빛을 못 보는 비운의 해수욕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라 하겠다. 부족한 편의시설은 이웃에 있는 월포해수욕장의 것을 이용하면 된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모래사장이 다소 투박하다는 점이다. 모래와 자갈이 뒤섞여 있어 어린이들이 뛰어놀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용두리해변을 빠져나와 20번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서정천(西井川)에 놓인 용두교(龍頭橋)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포항의 공식 해수욕장 중 하나인 월포 해수욕장이 나온다. 백사장길이가 900m에 폭70m인 해수욕장은 하루 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단다. 출발지인 칠포해수욕장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민박시설이 다소 부족한 칠포에 비해 이곳은 민박과 펜션이 많아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월포리(月浦里)는 청하면 연안최대의 마을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작은 어선들이 정박했었다는 데서 유래한 적은포(1)’와 수군만호진영기가 설치되어 있던 개포(2)’, 그리고 고인돌군으로 추정되는 큰 어금니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달이 뜨는 언덕이라는 뜻의 월아구(3)와 개포 주둔 수군의 중군지휘소가 있었다는 중휘(3)가 합쳐진 법정 마을이다. 월아구의 자와 개포의 자를 취해서 새로운 지명인 월포가 되었단다. 포스코해안에서 이곳까지는 20분이 걸렸다.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에서 청하천(淸河川)에 놓인 월포다리를 건너면 방어리(方魚里)’이다. 마을 어귀 해변의 큰 바위가 말 같다고 해서 말바윗골이라 부르다가. 방어가 잘 잡히는 현 위치로 마을이 이동하게 된 후 방어진(方魚津)이라 부른 게 어원이 되었다. 방어리에는 포구를 두 개나 거느리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작은 포구가 그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도로(이정표 : 조사리 간이해변3/ 월포해변1)로 잠시 빠져나왔다가 다시 해안으로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본 마을에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방어진(方魚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겠다. 그건 그렇고 방어리의 볼거리는 방파제 건너의 눈부시게 하얀 테트라포드라 하겠다. 테트라포드 위에 푸른 바다가 놓인 풍경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월포해변에서 이곳 방어리항까지는 25분이 걸렸다.



방어리에서 조사리로 넘어가려면 거친 구간을 잠시 지나가야만 한다. 바닷가를 따라야하는데 해안도로를 새로 놓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사방에 널린 공사자재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조사리(祖師里)’이다. 방어리항에서 20분 거리이다. 조사리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 말 원각조사(圓覺祖師)가 태어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단다. 조사리도 역시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데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이 제법 많다. ! 이곳 조사리부터 송라면(松羅面)이 시작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조사리와 방석리 사이에는 매우 길면서도 넓은 백사장이 놓여있다. 광천(廣川)에 놓인 조사교(祖師橋)를 건너면서 시작되는데 모래보다 자갈이 많아서인지 아직까지 간이해수욕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제법 많은 펜션들이 들어서있고 백사장의 바로 뒤는 작지만 소나무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래가 들어붙는 것이 싫은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들 수도 있겠다. 자갈을 굴리며 들어오는 파도소리가 제법 들을 만하니까 말이다.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해파랑길 트래킹에는 푹푹 빠지는 해변이 반가울리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국토종단 동해안자전거길이 나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한참 더 멀뿐만 아니라 인도구분이 없는 차로에서 씽씽 달리는 차량들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있었지만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것보다야 나았으니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된다.



‘5명의 해병 순직비라고 적힌 표지판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방석리(芳石里)’에 이른다. 조사리에서 25분 거리이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가 많아서 꽃이 피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는 방화(芳花)‘와 마을 앞 바닷가에 검고 넓은 큰 바위가 하나 외로이 있다는 데서 유래한 독석(獨石)‘이 합쳐져 법정 마을인 방석리(芳石里)’가 되었다. 이 마을은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파제가 최고의 볼거리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해양 동물들을 보호하자는 의미에서 황제펭귄부터 붉은 바다거북, 북극곰, 고래상어, 범고래 등을 그려놓았다. 시간이 조금 남는다면 방파제 위로 올라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 길쭉한 방파제 위에 트릭아트가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길가 작은 숲속에 ‘5인의 해병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1965년 해룡작전 때 수색업무를 하다가 거센 파도에 휩싸여 순직한 해병들의 넋을 기리는 비()라고 한다.



방석리를 빠져나오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화진리가 나온다. 그런데 주변 해변이 의외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상 동해는 조금만 들어가면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곤 하는데도 멀리까지 아주 얕은 것이다. 그 바닷가에 널린 갯바위는 갈매기의 천국이다. 그만큼 고기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이 부근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서 동물성 플랑크톤이 많이 서식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조사리 부근에서는 낚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니 부산에서부터 이곳까지 해파랑길을 이어오는 동안 가장 흔하게 눈에 띄었던 풍경이 시간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곳에서 만난 낚시꾼들의 그물망 속에는 몇 마리의 수확물이 들어있었다. 이 부근에서는 꽁치와 놀래미가 많이 잡힌단다.



잠시 후 풍속화들이 마을의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화진리(華津里)에 들어선다. 자연부락인 이진(耳津)과 대진(大津), 화산(華山)이 합쳐지면서 화진(華津)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포구의 모습이 귀를 닮았다는 이진(耳津)’일 것이다. 마을 앞 포구에 이르니 반가운 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7코스 때 마중을 나왔던 옛 동료가 다른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싱싱한 회를 사준다면서 말이다. 이쯤에서 트레킹을 마쳐야 하는 이유이다. 덕분에 우린 2남짓 되는 구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생략한 구간이 위험이 노출되는 차도를 걸어야만 하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회진해수욕장(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지경리에서 물회로 점심을 마친 후 회진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해파랑길 18코스와 19코스가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또한 포항 구간의 끝이기도 하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화진리 구간을 건너 뛴 탓에 총 16.96㎞㎞를 걸었다. 3시간 50분이 걸렸으니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옛 동료를 만날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걷겠다는 욕심이 작용했지 않나 싶다.


해파랑 17코스

 

여행일 : ‘19. 3. 16()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와 북구 일원

산행코스 : 송도해변(3.1km)포항여객선터미널(5.0km)여남동숲길(5.4km)포항영일신항만(4.4km)칠포해변((소요시간 : 전체 17.910.52시간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포항의 송도해변(평화의 여신상 광장)을 출발해 영일대해수욕장(북부해변)과 여남동 숲길, 포항 영일신항만을 거쳐 칠포해변에 이르는 17.9해안둘레길이다. 총 여섯 개 코스로 이루어진 포항구간 중 하나인 17코스는 포항을 대표하는 영일대해수욕장과 바다 위에 세워진 누각(樓閣)인 영일대, 테마파크인 환호해맞이공원이 대표적인 볼거리이다. 특히 영일대해수욕장이 들어있는 북부해변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조각품들은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라 하겠다. 공업도시 포항이 예술의 도시 포항으로 탈바꿈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환호해맞이 공원을 지나면서부터는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 사라져 버린다. 특히 영일신항만에서 칠포해변에 이르는 산업단지 및 모래사장 구간은 지루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우리 부부가 별다른 고민 없이 이 구간의 걷기를 생략해버린 이유라 하겠다. 은퇴 후 포항에서 거주하고 있는 옛 동료와의 식사 약속을 위해 일부 구간을 생략해야만 했는데, 이때 선답자들이 남긴 후기를 참조했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포항 평화의 여신상 광장(포항시 남구 송도동)

울산고속도로 남포항 IC에서 내려와 28번 국도를 타고 형산강변까지 온 다음, 유금 IC(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에서 7번 국도로 옮겨 포항시내로 들어간다. 이어서 대잠교차로(포항시 남구 대잠동)에서 오른편 희망대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의 여신상이 세워진 광장에 이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니 월계수를 든 평화의 여신이 2주 만이라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소나무들이 인상적인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 쪽으로 설치해 놓은 예쁘장한 조형물 몇 개가 눈길을 끈다. 송도해변을 배경삼은 인증사진이라도 남겨두라는 포토죤(photo zone)일 것이다.




일기예보에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일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는지 오랜만에 시야가 툭 트인다. 덕분에 영일대가 있는 북부해수욕장은 물론이고 환호해맞이공원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보면 포항제철의 위용과 함께 영일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더 가까이는 몇몇의 강태공들이 시간을 낚으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한가한 풍경도 눈에 띈다.



해안산책로의 끄트머리에는 ‘S’자 모양의 조형적 건축물이 하나 지어져 있다. ‘송도 워터폴리(Water Folly)’란다. 폴리(Folly)란 자연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공들여 지은 구조물을 말한다. 송도 워터폴리는 동해와 태평양을 향해 세계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갈매기의 꿈과 비전을 담았다고 한다. 붓의 한 획으로 그린 듯한 S곡선은 갈매기가 미래를 향해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란다. 12.7높이의 건물 1층은 물 위의 테크, 2층은 미팅 공간 그리고 3층은 뷰(view)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탐방로는 워터폴리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리고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조금 더 걷자 송도 송림 테마거리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년쯤 전인가 송도의 기존 아스팔트 도로 자리에 솔 개천과 워터스크린, 바닥분수, 물레방아, 징검다리 등의 다양한 시설들을 만든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걸 두고 했던 말인가 보다.



거리의 끄트머리에는 동빈큰다리가 놓여있다. 요즘은 다리를 놓았다하면 대교(大橋)‘가 따라붙는데 순수 우리말로 지어진 이름이라서 한층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이름들이 자주 눈에 띄길 바래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이 지났다.



다리의 오른편에는 요트 계류장이 만들어져 있다. 저런 계류장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만큼 요트가 많은 고장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 포항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넉넉하다는 반증일 테고 말이다.



계류장 너머에는 포항함이 정박되어 있다. 몇 년 전 서해에서 피격당해 침몰한 천암함의 원형 모델이라는데 30년 가까이 조국의 영해를 수호하다가 퇴역했다고 한다. 현재는 안보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옛 동료가 영일신항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반대 방향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동빈내항인데 탐방로는 항구의 선착장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른다. 참고로 동빈내항은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송도와 죽도, 해도, 상도, 대도 등 5개의 섬 사이로 흐르는 형산강 물과 영일만 바닷물이 맞닿은 아름다운 항구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지난 1914년 여름철 물난리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으면서 물길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형산강 직강공사가 이뤄지면서 동빈내항으로 연결됐던 형산강 물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로 인해 다섯 개의 섬들도 이름만으로 섬이었던 것을 기억할 뿐 섬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대규모 환경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 동빈내항에서 형산강까지 옛 물길을 다시 연결하는 동빈운하 건설을 핵심으로 동빈부두 정비공사, 송도백사장 복구, 포항구항 해양공원 조성, 포항구항 재개발 등이 포함됐다.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참고로 왼편으로 가면 포항의 또 다른 명물인 죽도시장이 나온다. 점포의 수만 12,000여 개에 달하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공동어시장이다. 먼 옛날 송도와 죽도는 섬이었다고 한다. 특히 죽도는 60년 대 후반까지도 갈대가 우거져 갈대섬이라 불렸단다. 당시 힘든 삶을 영유하던 사람들이 갈대가 무성한 내항의 습지대에 노전(蘆廛, 露廛)을 폈으니, 이게 죽도시장의 시초이다. 그 시장이 포스코의 발전과 함께 번창해서 지금의 죽도시장으로 변한 것이란다.



동빈내항에 들어서자 포항개항지정기념비(浦項開港指定紀念碑)‘가 길손을 맞는다. 포항 개항(1962612)을 기념하기 위해 개항 다음 해인 1963년에 포항시 구청사에 세운 기념물이다. 포항시의 청사 이전 후 포은도서관 주차장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가 동빈내항의 복원(2009)과 연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란다.



길목에는 청동조형물로 농촌과 어촌의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엿장수와 가마니를 지고 가는 농부, 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나이어린 딸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여인 등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보아오던 옛 생활 모습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특이한 외형을 지닌 건물은 한국예술총연합회의 포항지회라고 한다. 주변에 예술 조각품들이 널려있다시피 한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크루즈 선박(Cruise ship)‘도 보인다. 그렇다고 지중해나 북해를 여행하면서 내가 이용해봤던 크루즈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호텔의 역할을 하는 크루즈는 아니고 그저 배를 타고가면서 식사를 하는 유람선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탐방로는 오른편에 구항(舊港)의 부두를 끼고 이어진다. 수많은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는데, 출어(出漁)를 준비하는 듯한 어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한 풍경이다. 이를 반영하려는 의도인지 몰라도 길가에 어구(漁具)를 손질하고 있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구항의 예스런 풍경들과 잘 어울린다 하겠다.



포항지방해양수산청 건물 못미처에서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대로를 따라 영일대해수욕장(옛 이름은 포항 북부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해양수산청과 포항여객선터미널 때문에 길을 돌려놓은 모양이다. 사진 게재는 생략했지만 해수욕장의 오른편에 여객선터미널이 위치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왕복하는 쾌속선이 저곳에서 출발한단다. ’동빈큰다리에서 이곳까지는 20분이 걸렸다.




영일대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는 워터폴리(Water Folly)’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영일대의 워터폴리는 고래의 꼬리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안녕! 등에 올라 타렴이라는 이름으로 만지고 올라타고 놀이하며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밤에는 빛나는 야경까지 제공된단다. 워터폴리는 이밖에도 전망대와 등바위 버스킹 무대, 물방울쉼터 등의 주요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1975년에 개장된 영일대해수욕장(迎日臺海水浴場)은 백사장 길이가 1,750m에 폭은 40~70m, 모래사장의 면적만도 38에 달하는 동해안에서 가장 너른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이다. 백사장의 모래가 고와 가족단위 피서지로 인기가 높으며 샤워장과 탈의장, 무료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해안산책로는 아예 예술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수많은 조각품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영일대 해수욕장 테마공간 조성사업의 일환이라는데,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15년에는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의 다섯 개 부문 중 하나인 누리쉼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상은 주민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데 기여한 단체와 지자체를 선정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누리쉼터상은 자연환경과 조화되는 공간 환경을 만든 장소에 수여한다.





그런 노력들은 수문(水門)까지도 예술품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수문을 지나면 바다 위의 누각인 영일대(迎日臺)’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해바다를 지킨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지나 영일교라는 돌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지평선을 향해 뻗어 나갈 듯 바다 위에 세워진 영일대가 있다. 영일대는 바다 위에 세워진 2층의 전통 누각(樓閣)이다. 해변으로부터 100m쯤 떨어진 바다까지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겸한 누각을 세웠다. ‘한국의 정서를 담고’, ‘바다 위를 걷다라는 컨셉(concept)이란다. 해수욕장에 들어선지 30분 만에 영일대에 도착했다. 조각품들을 보느라 걸음이 많이 더뎌졌던 모양이다.




이층으로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동해의 너른 바다는 물론이고, 오른편으로는 포항제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여기서 바라보는 포항제철의 야경(夜景)포항 12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데 시간대를 맞추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참로고 포항 12호미곶 일출내연산 12폭포 비경‘, ’운제산 오어사 사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영일대&포스코 야경‘, ’포항운하‘, ’경상북도수목원 사계‘,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철길숲 &불의정원‘, ’죽장 하옥 계옥의 사계‘, ’장기읍성&유배문화체험촌‘,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등이 꼽힌다.



건너편에 위치한 두호항(斗湖港)‘은 아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200척의 레저선박을 계류할 수 있는 마리나(marina) 항구라고 한다. 참고로 저곳 두호마을(斗湖洞)의 옛 이름은 두무지였다고 한다. 조선 말기 원님이 그동안 이곳에서 큰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놓은 이름이란다. ‘두호두무지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란다.



영일대에서부터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어보기로 한다. 명색이 해안둘레길인데 한번쯤은 모래 위를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길을 버리고 걷는 모래사장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내 발바닥이 닿은 모래밭은 이제 나의 안식의 테두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는 내 세계의 일부가 된다. 내가 밟은 곳을 구석구석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한낮의 모랫길은 햇볕에 뽀얀 속살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그런 길이다.



두호동 해안도로는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누군가는 이 부근에서 화석산지를 만날 수 있다고도 했다. 1300만 년 전에 살았던 생물들의 화석이 발견되는데 나뭇잎 화석부터 게 화석, 물고기 화석 등 종류가 다양하단다. 환호공원 못 미쳐서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 난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환호공원에 포커스(focus)를 맞추다보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아까 영일대에서 보았던 요트계류장을 지나자 도로 왼편에서 환호해맞이공원이 손짓을 보내오고 있다. 첨단과학과 해양·문화·체육 등 여러 테마(thema)로 나눠 꾸며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의 공원과 어린이공원, 전통놀이공원, 미술관, 공연장, 전망대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다기에 일단은 올라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눈에 담을 만한 풍광은 만나지 못했다. 그저 되돌아오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영일만과 포항제철의 전경이 전부라 하겠다.




도로를 겸하고 있는 방파제의 오른편 바다는 테트라포드(tetrapod, 파도나 해일을 막기 위해 방파제에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가 다시 한 번 파도를 막고 있다. 동해의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그만큼 세다는 증거일 것이다.



환호마을 앞의 백사장도 역시 갈매기들의 놀이터다. 그만큼 먹잇감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강태공들에게는 만만치 않았던지 오는 길에 들여다본 그들의 그물망 속은 텅텅 비어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이곳이 환호마을임을 알리는 돌비석이 보이고, 바로 앞 전봇대에는 국토종단 동해안 자전거길이정표가 걸려있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자전거길과 헤어진다는 표시이다. 아무래도 자전거를 타고 여남동의 고갯길을 넘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영일대에서 이곳까지는 33분이 걸렸다. 환호공원에 다녀온 시간을 감안하면 25분쯤 걸린 셈이다.



조금 더 걷자 환호항(環湖港)이 나온다.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해 있는 작은 항구이다. 참고로 이곳 환호마을(環湖洞)은 푸른 바다와 산들에 에워싸여 마치 물이 큰 고리처럼 돼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환호마을을 지나면 곧이어 여남마을(汝南洞)’에 이른다. 여씨 집성촌의 남쪽마을이라는 뜻으로, 앞의 환호마을과 합쳐져 법정부락인 환여동(環汝洞)’이 된다. 이곳도 역시 작은 항구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지나왔던 환호항보다는 그 규모가 한참이나 더 크다. 근린 시설로 체육공원과 쉼터용 정자 등도 만들어놓았다. 환호마을 표지석에서 이곳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여남방파제에 다다르기 직전에 있는 시내버스 회차지앞에서 탐방로는 마을안길로 들어선다. ‘여남동해횟집의 오른편으로 길이 나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오른편의 꿈꾸길이라는 벽화골목길 안내판을 기점으로 삼아도 될 일이고 말이다.




인적이 끊긴 마을안길을 통과하자 탐방로는 산속으로 파고든다. 길은 넓지만 인간의 손길을 가미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대신 사방에 쓰레기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길이다. 이런 길은 10분 남짓 계속된다.




능선을 넘어 왼편 임도를 따르면 탐방로는 다시 바닷가로 연결된다. 저 멀리 포항 영일만신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컨테이너 전용부두라고 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해상크레인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바닷가에는 해초를 채취하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해안은 물이 맑아 바다생물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다. 낚시터로 제격이겠다. 그래선지 서너 명의 강태공들이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닷가로 내려선지 10분쯤 지나는 곳에서 탐방로는 바닷가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20번 국도로 올라선 뒤 죽천교를 건너 흥해읍((興海邑)으로 들어선다. 오늘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옛 직장동료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은퇴 후 안락한 노후를 즐기다가 어머님이 노령으로 자리에 누우시자 보살펴드린다며 귀향한지 벌써 몇 해가 지났으니 각박한 요즘 세태에서 보기 드문 효자라 하겠다.



탐방로는 잠시 후 바닷가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죽천리(竹川里)’ 해안도로를 따른다. 이곳 죽천2의 원래 이름은 대벌이라고 한다. 이대(箭竹)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새들이 많이 서식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지을(知乙)’ 마을, 즉 죽천1리와 합쳐져 죽천리가 된다. 그나저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해안길을 따라 2쯤 걸었을까 저만큼에 옛 동료가 보인다. 약속장소인 포항신항까지는 2가까이 남아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에 이곳까지 더 와버렸단다. 덕분에 우린 트레킹을 짧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억울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루한 해안길을 조금 더 걷는 것보다야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을 더 오래 갖는 게 훨씬 더 좋았으니까 말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칠포해수욕장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결지인 칠포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해파랑길 17코스 종착점이자 18코스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으로 고종 8, 동래로 옮겨가기 전까지 일곱 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해서 칠포성(七砲城)이라 불렀던 곳이다. 칠포 절골에 옻나무가 많다고 해서 옻 칠()’자를 쓰서 칠포(漆浦)라고도 했단다.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을 한 듯 검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해마다 이곳 칠포해수욕장에서 재즈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음도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해파랑길 17코스는 2시간 20분 동안에 10,5을 걸었다. 원래의 길이가 17.9인 점을 감안할 때 많이 빼먹은 셈이다. 조금은 아쉽지만 반가운 이를 만났으니 능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하겠다.


해파랑길 16코스

 

여행일 : ‘19. 3. 2()

소재지 : 울산시 포항시 남구와 북구 일원

산행코스 : 흥환보건소(2.35km)하선대(5.04)도구해변(4.03)공항삼거리(5.35, 차량 이동)형산강변(3.22)송도해변(거리 및 소요시간 : 14.64,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구간이다. 전설(傳說)과 기암절벽이 널려있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르는가 하면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심을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1·2구간을 기본에 깔고 포항제철의 담벼락을 따르는 도심구간과 형산강 둑길을 더한 코스로 보면 되는데, 포항제철의 담벼락을 따르는 도심구간이 조금 지루하지만 조물주가 빚어놓은 조각품들이 널려있는 하선대 해안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서린 도구 해변‘, 세계적인 철강기업의 위엄을 느껴볼 수 있는 형산강변등의 뛰어난 경관은 그런 단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눈요깃거리가 넘치는 코스라는 얘기이다. 또한 도심구간을 걷는 게 딱히 싫다면 도심구간인 공항삼거리에서 형산강변까지 대중교통(버스)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우리 부부 역시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도심구간(5.35)을 통과했다.

 

트레킹 들머리는 흥환 보건진료소‘(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동해면(포항시 남구)소재지까지 온다. 이어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흥환리에 이르게 된다. 자그만 간이해수욕장이 개설되어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곳은 주막(酒幕)’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옛날 행인이 묵어가던 주막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지형이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과 닮았다하여 연화(蓮花)’라고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한때 초등학교(1928년 개교 당시에는 동해공립보통학교)까지 소재했을 정도로 번창했으나 요즘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있다. 초등학교(동해초등학교 흥환분교장) 역시 취학 아동이 줄어들면서 2013년에 폐교되었다.




국도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늘도 역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따른다. 대신 이번에는 1코스인 연오랑세오녀길(청림동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6.1)‘, 2코스인 선바우길(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흥환해수욕장, 6.5)‘을 역()으로 걷게 되는데, 이 구간은 맑고 투명한 바다를 옆에 두고 기암절벽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고 해서 힐링 로드로 꼽힌다. 이들에다 지난번 15코스 때 걸었던 구룡소길(3코스 : 동해면 발산1구만리 어항, 6.5)‘호미길(4코스 : 호미곶면 구만리호미곶 상생의 손, 5.3)‘을 더하면 총 길이 25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완성된다.



잠시 후 너른 모래사장을 만난다. 그러나 여느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편의시설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흥환이라는 지명 뒤에 간이 해수욕장이라는 부언(附言)이 따라다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름철이면 이곳도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 풍선 터지는 소리처럼 시원하고, 고기 굽는 냄새는 송림 사이로 퍼져나간단다.



모래사장에 잔자갈이 섞이는가 싶더니 해변이 끝날 즈음에는 몽돌해변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는 이내 데크로드(deck road)‘가 시작된다. 오른편으로는 망망대해가, 그리고 왼편에 기암절벽을 끼고 걷게 되는 멋진 구간이다. 발아래에 깔려있는 바다에서는 상큼한 해초 냄새를 끊임없이 보내온다.



데크로드 아래 평평한 돌바닥으로 맑은 바닷물이 파도의 리듬에 맞춰 들락날락한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이곳은 한마디로 거대한 조각공원이다. 자연이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간을 조물주가 빚어놓은 조각품들의 전시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작품은 군상바위이다. 금강산이나 가야산 등의 만물상(萬物相)에는 훨씬 못 미치나 군상(群像)‘이라는 바위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온갖 형상들을 함축하고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두 번째는 미인바위이다. 하얗게 생긴 바위벼랑의 일부분이 바다를 향해 쏘옥 튀어나왔다. 그게 영락없는 코의 모양새인 것이다. 위치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눈 모양의 구멍까지 뚫려있다. ’미인(美人)‘이라는 이름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한 모양새라 하겠다.



다음에는 두 개의 비문바위가 연거푸 나온다. 검정색 바위에 글자를 새겨 넣은 것 같이 가로세로 문양이 선명하다. 그중 하나는 위에다 수많은 돌들을 올려놓고 있다. 생김새가 영험해 보여서인지는 몰라도 오가는 사람들이 작은 소망 하나씩을 쌓아놓고 갔음 이리라. 그밖에도 이스트 섬의 모아이를 닮은 것 같은 신랑각시바위물개바위등 기이한 바위들도 있었으나 사진 게재는 생략했다.



데크로드가 끝나면 마산마을(馬山里)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만이다.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말()이 머리를 육지로 향하고 꼬리를 바다 쪽에 둔 채로 뛰어가는 형상이라고 해서 말미 또는 마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산에다 말을 놓아 먹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마을 뒷산에는 말을 먹이던 목장터도 있단다.



마을에는 작은 항구가 만들어져 있다. 낚싯배 몇 척이 매어져 있는 한적한 항구이다. 방파제의 끄트머리에 만들어놓은 등대도 역시 자그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도 2013년에야 설치되었단다.



항구를 지났다싶으면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를 따른다.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도록 바위절벽과 바다 사이에다 데크로드를 조성해 놓았다. 그 초입에 먹바우(검둥바위)’가 있다. ‘연오랑세오녀를 일본으로 싣고 갔다는 전설의 바위다. 바위 앞에 세워둔 안내판에는 두 사람이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는 해와 달이 없어졌지만 연오랑이 준 비단 덕분에 해와 달이 다시 생겼다는 설화(說話)가 적혀있다.



데크로 올라서자마자 하선대(下仙臺)의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하선대는 입암리와 마산리 사이의 황옥포(黃玉浦)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선녀를 사랑한 용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해용왕이 칠석날이면 용궁에서 나와 옥황상제의 윤허(允許)를 얻어 선녀를 초청하고 가무를 즐기던 곳이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잇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풍어제와 기우제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동해안에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서려 있다. 동해의 힘차고 거센 환경이 용의 기상과 많이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데크로드가 끝나는가 싶더니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작은 몽돌해변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너머로 하얀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오랜 세월 바닷물에 움푹움푹 파인 것이 흡사 해저동굴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절벽을 힌디기라 부른단다. 바위가 하얀 것은 화산활동이 많았던 지역이라 화산성분의 백토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란다.




흰 바위절벽 언저리로 시선을 돌리면 여러 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나타난다. 구멍마다 납작한 돌멩이가 소복이 쌓인 것으로 봐서 소원을 빌었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데크에 걸려있는 명찰에도 소원바위라고 적혀있다. 돌멩이로 동전을 대신 할 수 있는 재미난 장소라 하겠다.




흰디기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이번에는 킹콩바위(고릴라)’가 길손을 맞는다. 이름이 붙게 된 모양새를 찾느라 한참을 서성이게 만든 바위이다.



그 곁에는 바다속 주상절리라고 적힌 안내판이 걸려있다.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란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식을 때 수축작용에 의해 수직의 돌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절리(節理)를 말한다. 쉽게 말해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내지 다각형인 기둥 모양의 절리라 하겠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모양새를 찾아보는 게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꼼꼼히 살펴봤지만 돌기둥 모양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이름만의 주장절리인지도 모르겠다.



아래 사진은 여왕바위란다. 그러고 보니 왕관을 쓰고 있는 여왕의 옆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이 근처의 바위들은 하나같이 좀 묘하게 생겼다. 크고 작은 돌멩이와 모래가 뒤섞인 것이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육지의 바위들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화산 열압력에 의해 백토(벤토나이트 성분)가 들어난 바위가 수 만년에 걸쳐 바닷물에 씻기고 바람에 깎여 나가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했기 때문이란다.



폭포바위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바위의 위 나무 한 그루 없는 언덕배기에는 누렇게 말라죽은 풀들이 덮여있다. 안내판은 저곳이 해국군락지라고 전해준다. 그렇다면 이곳의 탐방은 7월에서 11월이 적기라 하겠다. 활짝 핀 해국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데크로드가 끝나갈 즈음 뾰쪽하게 솟아오른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난다. ‘입암(入岩)’이란 마을 이름을 낳게 한 선바위이다. 6m 가량의 거대한 모래덩이가 바다를 향해 벌떡 일어선 모양새가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선바우 옆에는 그 생김새가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는 남근바위(男根石)’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보아오던 남근바위들 가운데 가장 못 생겨서 사진 게재는 하지 않았다.



조각공원을 꿰뚫는 데크로드가 끝나는 곳에 터를 잡은 자연부락은 입암2선바우(立岩)’이다. 행정단위인 입암리(立岩里)’는 이곳 선바우와 1리인 힌디기등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선바우라는 마을 이름은 조금 전에 보았던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도 자그만 어선 두어 척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항구가 만들어져 있다. 마산리에서 이곳 선바우까지는 22분이 걸렸다.



그저 그렇고 그러던 마을 담벼락은 트릭아트(Trick Art)‘ 기법을 활용해 멋진 포토죤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트릭아트란 빛의 반사와 굴절, 음영과 원근 따위를 이용하여 그림을 입체적이고 실감 나게 표현하는 미술 기법.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한다. 이곳에는 거북이를 그려 넣어 물속을 입체화 했다. 그밖에도 기억에서조차 아득해져버린 공중전화 박스를 설치해 옛 정취에 흠뻑 빠져들수록 했다.



13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입암1힌디기마을에 이른다. 옛날 노씨가 처음 정착하면서 조금 더 흥하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흥덕이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힌덕‘, ’힌디기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힌디기마을 역시 한적한 어촌마을이다. 항구는 언제 출항할지 모를 고깃배 몇 척이 정박해 있을 따름이다.



마을을 벗어난 탐방로는 잠시나마 929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울창한 대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비탈진 언덕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양새의 시설지구가 나타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테마파크이다. ‘연오랑세오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해와 달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두 남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해와 달도 함께 건너가 버렸는데, 세오녀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니 신라의 해와 달이 다시 정기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일월신화를 중심으로 동해 바다와 함께 신라권 문화탐방을 할 수 있도록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은 것이다. ‘힌디기마을에서 이곳까지는 17,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30분이 지났다.



바닷가에는 이층짜리 한옥 정자가 지어져 있다. ‘일월대(日月臺)’라는데 고깃배가 떠다니는 먼 바다를 조망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밤에 찾아올 경우 은은한 조명과 함께 포스코의 야경과 동해의 밤바다를 눈에 담을 수 있다니 꼭 기억해 두자



테마파크의 중심축은 세오녀의 비단을 보관했다는 귀비고(貴妃庫)’이다. 연면적 1890(지하1, 지상2)의 공간에 포항의 대표 역사자원인 연오랑세오녀의 가치와 의미를 비롯해 포항의 발전사와 연계한 전시실, 영상관, 라운지, 야외테라스 등을 갖춘 복합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귀비고의 뒤편에는 신라마을을 복원해 놓았다. 도기야댁과 세오댁, 연오댁 등의 신라 주택이 지어져 있고 연오댁 뒷문을 열면 신라 철기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작품들이 전시된 철의 뜰이 보인다. 그밖에도 귀비고의 주변에는 한국뜰과 일본뜰, 연오랑뜰과 신라뜰이 조성되어 있다.



귀비고 앞의 둔덕에는 쌍거북바위가 올라앉아 동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타고 간 바위이자 세오녀가 짠 비단을 싣고 돌아온 바위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란다. 복과 수명을 준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그냥 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바람 하나쯤 빌어보자. 더불어 연오랑 세오녀의 일월신화(日月神話)에서 우리는 일본의 철기문화와 직조기술이 신라에서 전파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 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자.



탐방로는 이제부터 호미곶 해안둘레길1코스인 연오랑세오녀길(6.1)’을 따른다. 이곳 테마파크에서 시작해 청룡회관과 도구해수욕장, 해병대 상륙훈련장을 거쳐 청림운동장으로 연결된다. 아무튼 테마파크를 빠져나오면 임곡리(林谷里)가 나온다.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 임곡포란 지명으로 나오는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해군기지인 영일진이 있었다고 한다. 제법 규모가 큰 항구가 들어서 있는 이곳은 임곡2리인 조사리(造沙里)’이다. 해풍으로 인해 군데군데 모래가 쌓여 모래산을 이루는 곳이라는 뜻에서 연유한 이름이란다. 이름 그대로 해안에 모래사장이 발달되어 있다고 했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모래사장은 임곡1인 숲실(林谷)에 이르러서야 만날 수 있었다. 주변에 숲이 넓게 우거져 있어 음지(陰地)로 고기가 많이 모여든다는 마을이다. 그건 그렇고 이 마을에서 우리는 연오랑세오녀설화를 다시 만나게 된다. 마을과 바다가 경계를 이루는 방파제에다 설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 해놓았기 때문이다. 157(아달라이사금 4)의 어느 날 연오랑(延烏郞)은 해조류를 채취하러 바다로 나갔다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왕이 되었다. 그의 부인인 세오녀(細烏女)가 그를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바위 위의 신발을 발견하고서, 그 바위에 올라타고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건너가 마침내 부부가 서로 재회하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사람들이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사신을 보내 귀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자신이 돌아오는 대신에 세오녀가 짠 세초(생사로 짠 고운 비단)를 주면서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면 된다고 했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하자 해와 달이 과연 빛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연오랑과 세오녀가 제철기술의 지도자라는 주장도 있다. 그들은 검을 오()’자가 들어간 둘의 이름에서 근거를 찾는다. 제철을 하면서 숯을 사용했으니 얼굴 검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제철 기술자가 신라를 떠났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을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그런 설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세오녀의 ()’옷을 짜다의 뜻으로 이들이 제철 기술과 함께 일본에 전해준 문명이 직조 기술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연오랑세오녀 테마파크를 나선지 30분 만에 도구해수욕장에 이른다.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서린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 800m에 폭이 50m. 넓이 12,000평의 규모로써 하루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단다. 포스코 인근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으로 학교와 일반기업체의 하계수련장으로 각광받고 있단다.



해수욕장의 주차장에 이르자 경주마(競走馬) 몇 필이 쉬고 있다. 그 옆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승마 동호회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감으로 넘쳐흐른다. 하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탐방로는 주차장의 끝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난 뚝방길을 따른다. 왼편에는 경작용 비닐하우스들이 빽빽이 들어서있고, 오른편으로는 하얀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진다. 포스코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도구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이 백사장은 포항의 자랑거리였다. 햇볕을 받으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금모래라 부르기도 했단다. 또 그 길이가 십리나 되어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알려지면서 명사십리로 불리던 곳이었다. 특히 여름에 물놀이 하다가 지치면 송림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해수욕장이었단다.




모래사장은 해병대의 상륙훈련장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운이라도 좋을 경우에는 말로만 듣던 귀신 잡는 해병을 만날 수도 있단다. 그런 행운이 우리 부부에겐 없었던가 보다. 그저 뚝방의 왼편에 들어서있는 훈련장에서 질러대는 고함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곳 포항은 해병대 1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해병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길고 긴 백사장이 끝나면 청림운동장이 나온다. 지명인 청림은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만났던 소나무들이 마을의 이름을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겠다. 그 소나무들의 대부분은 땅에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소금기 많은 바닷바람에도 생존력이 좋은 해송(海松)이었다. 방풍효과 또한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구해수욕장에서 이곳까지는 35,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35분이 지났다. ‘호미곶 해안둘레길’ 1.2코스 12.6를 걷는데 걸린 시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청림운동장을 끝으로 탐방로는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도심(都心) 속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해군 항공역사관에 이른다. 지난 1978년에 해군항공이 포항으로 온 이래 오늘날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설이니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만한 짬도 내지 못하겠다면 야외에 전시해놓은 비행기들이라도 살펴볼 일이다.




이후부터는 포스코의 담벼락으로 오른편에 끼고 걷는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코스라 하겠다. 그래선지 이 구간을 생략해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시내버스(101, 12분 간격 운행)를 타고 항공역사관앞에서 형산교까지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도 역시 산악회에서 제공한 버스로 이동을 했다. ‘포스코역사관에 잠시 들러 철은 우리에게 사업이 아니라 사명이었다.’는 박태준회장의 말을 되새겨 볼 수도 있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집결지에 도착해 횟집에라도 들어가 볼 욕심에서였다.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옛 다리(舊橋)’를 건너면 탐방로는 강변에 쌓아올린 뚝방길을 따른다. 강물과 맞닿는 길도 열어놓았으니 각자의 취향에 따르면 될 일이다.




강 너머에는 포스코(POSCO)의 건물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1968년 설립된 포항종합제철()을 모태로 하는 포스코그룹의 중심 기업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철강기업이다. 1970년대 영일만에 포항제철소를, 1980~90년대에 광양제철소를 준공했으며,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전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2000년 민영화 이후, 해외 거점에 생산 설비를 증설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해오고 있다.



강이 끝나갈 즈음, 그러니까 뚝방길에 올라선지 35분 만에 2014년에 건설되었다는 포항운하(浦項運河)가 나타난다. 동빈대교와 형산강을 남북으로 잇는 물길이다. 길이가 1.3km에 불과하나 바닷길과 연결하면 8~10km나 된단다. 아무튼 옛 물길이 새로 열리면서 이곳은 시민들의 공원은 물론이고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 되었다. 그래선지 운하 물 관리센터의 옆에는 크루즈의 탑승장이 들어서 있었다. 운하의 물길을 따라 크루즈를 타고 가면서 낭만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곤돌라(gondola) 같은 예쁘장한 선박이라도 떠다닌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런 풍경만으로도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이르면 포항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 잡은 워터폴리가 길손을 맞는다. 유리구 높이 14m인 전구 모양으로 동해 일출을 모티브로 해오름을 형상화했다는데 내·외부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어디에서나 주변의 풍경을 환히 내다 볼 수 있다. 특히 야간에는 음악에 맞춰 포스코 조명이 바뀌는 다이나믹한 야경쇼를 즐길 수 있단다.



트레킹 날머리는 평화의 여신상광장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해송이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를 조금 더 걷자 100여 평 정도 넓이의 광장이 나타난다. ‘평화의 여신상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광장이다. 지난 1968년 해수욕장 입구에 최초 건립된 여신상은 태풍 등의 영향으로 파손과 부분 보수를 반복하다가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현 위치에 옮겨졌다. 하지만 이후 거듭된 덧칠로 인해 조형물의 모습이 원형에 비해 기형적으로 비대해지는 등 옛 모습을 오히려 해친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었다. 새로 세워진 여신상의 높이는 5.4m(좌대 2m, 여신상 3.4m)라고 한다. 이밖에도 광장에는 추억의 우체통과 포스코를 배경으로 넣을 수 있는 포토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트레킹은 4시간 정도가 걸렸다. 버스를 이용하느라 지체된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4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광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포스코는 물론이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영일대가 있는 북부해수욕장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근처에 있는 방파제는 몇몇의 강태공들이 시간을 낚으면서 한가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해파랑길 15코스

 

여행일 : ‘19. 2. 16()

소재지 : 울산시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과 동해면 일원

산행코스 : 호미곶(2.5km)대보저수지(1.2km)동호사(7.2km)임도사거리(3.8km)흥환보건소(거리 및 소요시간 : 14.7㎞, 실지거리 12.45㎞에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 15코스는 한반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호미곶 일대를 거닐며 바닷가 절경을 감상하는 코스다. 사진으로 이미 익숙해진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물론이고 기암괴석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참고로 해파랑길 15코스는 최근에 새로 개설된 호미곶 해안둘레길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구간이다. 하지만 해파랑길 종주꾼 대부분은 처음에서 끝까지 호미곶 해안둘레길을 따른다. 내륙을 드나드는 해파랑길보다는 해맞이와 석양이 아름다운 천혜의 해안을 따라 기암절벽과 발끝에 닿을 듯한 파도와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둘레길이 더 입맛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호미곶 해맞이 광장‘(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동해면(포항시 남구)소재지까지 온다. 이어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대한민국 최동단이라는 호미곶(虎尾串)‘에 이른다. 우리나라를 호랑이로 비유했을 때, 지리상으로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어 '호미곶'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서로 돕고 사는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상생의 손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밖에도 해맞이광장을 비롯하여 등대까지 다양하고 풍성한 볼거리들을 갖춰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래 사진에서 맨 뒤에 보이는 독특한 생김새의 건축물은 새천년기념관이다. 3층 건물로 1층은 포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문화, 미래 비전 등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2층은 바다화석박물관으로 조성되었다. 3층은 호미곶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먼저 광장의 풍경을 살펴보자. 해변으로 가는 방향의 좌측으로는 고래 모양으로 생긴 해안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고, 반대편의 잔디 광장에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군상(群像)을 그려 넣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의 사이사이에는 홈을 파놓아 사람이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포토존(photo zone)인 셈이다. 그 뒤에는 높이 8m연오랑·세오녀청동상(靑銅像)’이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이 정답게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인데, 그들이 딛고 있는 좌대는 두 사람을 일본에 싣고 간 바위를 암시한단다. 또 바닥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하며,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을, 그리고 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한 선진문물인 비단을 의미한단다.



광장의 중심에는 왼쪽 손을 형상화한 커다란 청동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다. ‘호미곶 해맞이 축전의 상징물인 상생의 손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에 설치되었다. 참고로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한 호미곶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그 덕분에 2000년 및 200111일 두 차례에 걸쳐 국가지정 해맞이 축전이 개최되었음은 물론이고 해마다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성대하게 열려오고 있다. 이런 제반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 바로 해맞이 광장이다. 호미곶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소는 바다와 육지에 쑥 나와 있는 상생의 손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곳은 늘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바닷가로 나아가자 또 다른 손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왼손이었던 광장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른손이다. 아니 두 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세움으로써 상생(상극의 반대)의 이념을 담았단다.



바닷가에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호미곶이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또한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이곳을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하였고,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일출 제일의 이곳을 조선십경(朝鮮十景)의 하나로 꼽았다.



바다 쪽으로 쭉 뻗어 나간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데크로드(deck road)를 따라 잠시 걷자 돌문어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돌문어가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음이리라.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물살이 센 덕분에 여기서 잡힌 돌문어가 전국에서 가장 맛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이곳에서 잡히는 돌문어는 타우린이 34%나 함유돼 시력회복과 빈혈방지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계의 담석을 녹이는 작용을 하며, 돌문어에 많이 함유된 베타인(감칠맛) 성분은 간 해독을 촉진하고 항암작용과 세포복제 기능 등의 작용을 한단다.



돌문어상을 지나니 바다위에 마련된 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찬바람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전망데크의 한가운데는 희망의 해돋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나침판과 어린아이의 동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린이의 손가락은 대한민국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방향을 알려주려는 듯 먼 바다의 한 곳을 가르키고 있다. 또한 데크의 끝자락에는 투명유리를 깔아 바다 위를 걷는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했다. 찾는 이들이 수려한 바다 풍경을 맘껏 즐기도록 한 설계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바다는 물론이고, 바닷속 '상생의 손' 조각과 국립등대박물관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이 그림엽서처럼 곱다.



육지의 끝자락에는 호미곶 등대(虎尾串燈臺, 경상북도기념물 제39)’가 자리 잡았다. ‘대보등대(大甫燈臺)’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등대로 1908년에 점등(點燈)했다. 8각형의 탑()처럼 생긴 등탑(燈塔)의 높이는 26.4m이고 둘레는 밑부분이 24m에 윗부분은 17m이며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다. 이 등탑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 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또한 이 등대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01년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우리나라 연안의 해류, 어군의 이동상황, 수심 등을 조사하기 위해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쳐 전원이 익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은 사건의 책임을 고스란히 우리 정부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빚까지 내가며 세운 등대가 바로 호미곶 등대라는 것이다.



등대의 옆에는 국립등대박물관(國立燈臺博物館)’이 들어서 있다. 항로표지 100(18936월 도입)을 기념하고 산업 기술의 발달과 시대적 변화로 사라져가는 항로 표지의 시설과 장비를 영구히 보존·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3,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1·2·기획 전시관과 야외전시장, 테마공원 등으로 이루져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저 독도등대와 화암추등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바다지킴이들의 미니어처(miniature)들이 전시되어 있는 테마공원을 눈에 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근처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란 영일만을 끼고 동쪽으로 쭉 뻗은 트레킹 로드이다. 연오랑세오녀의 터전인 청림 일월(도기야)을 출발해서 호미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동해면 도구해변과 선바우길을 지나 구룡소를 거친 후 호미곶의 해맞이광장에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25km,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 해파랑길 13, 14코스로 연결되는 구룡포항과 양포항, 경주와의 경계인 장기면 두원리까지 합치면 전체길이는 58km로 늘어나게 된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될 해파랑길 15코스는 두어 곳을 제외하고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3코스(구룡소길 : 발산1구만리, 6.5)4코스(호미길 : 구만리호미곶, 5.3)를 그대로 따른다. 아니 기존의 해파랑길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따른다고 보면 되겠다.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하던 해안절벽에 안전시설을 갖춘 둘레길을 새로 내었기 때문이다.



호미곶등대를 왼편에 끼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오른편은 물론 동해의 너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대보항(大甫港)‘이다. 대보항은 돌문어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다. 국내 위판물량의 12%가 포항에서 출하되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이곳 대보항에서 나온단다. 매년 호미곶 돌문어 축제가 대보항에서 열리는 이유이고, 부둣가에 수북이 쌓여있는 둥그런 통발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대보항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길이 160m트릭아트(Trick Art)‘ 벽화라 하겠다. ’상생의 손을 주제로 그려졌는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최상의 포토죤(photo zone)으로 이미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2014년 제작 당시의 기네스북 기록이 148.63m이었다니 세계 최장의 트릭아트인 셈이다.




이름은 비록 대보항(大甫港)‘이지만 북쪽방파제는 구만리에 터를 잡았다. 그 북쪽방파제에 다다를 즈음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탐방로임을 알리는 표식은 보이지 않으나 블랙피싱 낚시 점포를 오른편에 낀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 반대편 해안으로 나가면 일렬로 늘어서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눈길을 끈다. 파도나 해일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이니 그만큼 이곳이 파도가 세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이 부근이 까꾸리계(鉤浦溪)’라는 지명으로 불려왔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까꾸리계는 구포계라는 한자어 지명인데 갈고리 구()’자를 써서 지은 것이란다. 포항 지역에서 가장 바람과 파도가 거칠다보니 풍랑이 칠 때면 청어 떼가 해안까지 떠밀려 와 갈퀴로 끌어 담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만리 해안을 지나다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등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평상시에도 거친 파도로 악명 높은 교석초(矯石礁, 다릿돌)‘에 외롭게 선 수증등대이다.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처럼 생긴 도드라진 지형 탓으로 바닷바람이 세게 몰아치는 곳이다. 다른 해안에 비해 파도가 높을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런데다 암초도 많단다. 그만큼 뱃길이 험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호미곶 인근에는 바닷길을 밝히는 등대가 무려 5개나 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수중등대인데, 암초가 많기로 소문난 구만리(九萬里) 앞바다에 자리 잡았다. 이 등대는 흰색과 빨간색이 보통인 여느 등대들과는 달리 파란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로 항구의 대문격인 등대는 배가 포구에 들어올 때를 감안하여 오른쪽 빨간색이고 반대쪽은 흰색이다. 국제적으로 약속된 등대의 색깔이라고 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구만리항(九萬里港)에 이른다. 구만리는 범 꼬리처럼 굽이친 지형인데다 거북이까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구만(龜滿)’, 구릉지가 많다는 의미로 구만(丘滿)’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섭슬끝의 처녀가 시집갈 때 까지 백미 3말을 못 먹고 간다는 목장보슬말(牧場涉瑟末)의 유래에서 섭슬골이라고도 했단다. 다른 한편으론 계유정란(1452) 때 황보인의 충복 단량(丹良)이 황보인의 손자 서()를 항아리 속에 넣어 도망가다 이곳에 이르러 보니 앞에는 바다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만 가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포구를 지나자 바닷가에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다. 그 옆에는 쾌응환 조난기념비(快應丸 遭難紀念碑)‘라고 적힌 빗돌이 버티고 있다. 1907년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주변을 조사하던 일본의 수산실습선(137ton급의 쾌응환호)이 거친 파도에 좌초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당한 사고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1926년에 세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 파괴되었다가 1971년 재일교포에 의해 다시 세워졌단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수중등대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설치되었다니 참조한다.



기념비 옆에는 데크 조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 아래 바닥에는 트릭아트(Trick Art)‘로 독수리를 그려놓았다. 근처 바닷가에 날개를 접고 앉은 독수리 형상의 기묘한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갯바위가 파도와 해풍에 깎이면서 저런 형상을 만들어냈단다. 조물주가 아니라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호미숲 해맞이터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일단은 들어가 보기로 한다. 호랑이 꼬리에 위치한 숲에다 만들어 놓은 해맞이 터라면 일출(日出)의 명소일 게 분명한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특히 그 끄트머리에는 전망데크까지 만들어놓지 않았겠는가.



전망대에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해돋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바닷가에 놓여있는 소맷돌, 악어바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바닷가로 기어 나오고 있는 악어 형상의 바위를 찾아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악어모양으로 생겼다는 악어바위는 안내판에 그려넣은 사진을 참고하지 않고는 쉽게 찾아낼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걷자 건너편에 작은 항구가 하나 보인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도로는 계속해서 산속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포항해경 동구만대행신고소가 있는 저 항구로 내려서야 한다. ‘호미곶 해안둘레길이 새로 뚫렸기 때문이다.



도로변에는 월보 서상만(月甫 徐相萬)’의 시비(詩碑), '나 죽어서'가 세워져 있다. 2년쯤 전엔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구만리(호미곶면)의 생가터 앞 야트막한 언덕에 시비를 세운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했던가 보다.



항구를 지나면 새로 내놓은 듯한 길이 나타난다. 절벽과 파도 탓에 얼마 전까지도 접근이 불가능했던 구간인데 절벽의 아랫도리를 돋우고 그 위에다 잔자갈을 깔았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생김새는 물론이고 걷기까지도 여간 편한 게 아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새로 내면서 조성한 탐방로일 것이다.



육로(陸路)를 만들 수 없는 곳에는 데크로드(deck road)를 설치했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바위벼랑에 잔도(棧道)를 내었는가 하면 그마저도 불가능할 때에는 아예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다 다리를 놓았다. 두 명이 교차해 걸을 수 있을 만큼 폭이 여유로운 데크로드를 걷다보면 암초에 부서지는 흰 포말이 보면 볼수록 빨려들게 만든다. 그리고 내 마음속 잡념이 자신도 모르게 씻겨 내려간다.



얕은 바다 위에 조성한 덱(deck) 길을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푸른 동해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기암절벽이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 풍경은 남미 칠레의 이스터섬(Easter Island)에 있다는 모아이 석상을 닮은 바위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그 형상을 아래 사진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데크로드가 끝나면 이번에는 바닷가를 있는 그대로 이용했다. 무게에 짓눌린 듯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소나무 아래로 난 탐방로가 서정적인 구간이다. 다만 바닷물과 너무 가까운 탓에 파도라도 조금 높을라치면 탐방이 불가능해질 것 같다.



새로 내놓은 탐방로의 끝에는 대동배 2가 있다. 독수리바위에서 35분 거리인데, 마을 앞에는 작은 항구가 들어앉았다. 파도를 가로막은 방파제 안의 포구는 평화롭다. 선창에 묶여 서로 몸을 기댄 작은 배들이 잔물결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대동배 2에서는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하면 대동배 1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걷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지방도로의 위험요소를 피해 조성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1.2내내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거닌다지만 우린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심심찮게 오르는 산에서 맨날 보게 되는 소나무 숲보다는 코끝을 스쳐가는 비릿한 바닷바람이 더 그리웠기 때문이다.



15분 후 이번에는 대동배 1에 이른다. 신라시대에는 동을배곶’(冬乙背串)이라 칭하여 봉수대의 이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1664년 경, 조정의 관리인 김상구(: 이필)가 이곳에 정착하여 작시한 동해순토학달비(東海舜土鶴達飛)’라는 시구에서 연유하여 학달비(鶴達飛)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형상이 먼 바다에서 보면 날아가는 학의 모습을 닮아서란다. 1679년 경, 박현섭이라는 어부가 마을 뒷산이 달비 같다 하여 한달비’(大達飛)‘라 불렀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후부터는 호미곶 해안 둘레길 중 3코스인 구룡소길’(6.5)을 따른다. 마을에서 조금 더 걷자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할 때 굴을 아홉 개나 뚫었다는 전설이 있는 구룡소(九龍沼)가 나온다. 이곳은 용추, 용수리, 용치기미로도 불린다니 참조한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벼랑 끄트머리에다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파도칠 때 그 굴로 유입된 바닷물이 용이 불을 뿜어내는 것 같고 그 소리가 천지를 울리듯 우렁차다고 하더니 조금 더 가까이서 느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구룡소는 높이 4050m, 둘레 100의 움푹 팬 기암절벽이다. 전망대에 서면 그런 구룡소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크고 작은 파도가 용이 살았다는 소()를 휘감으면서 들락거리고 있다. 그러나 용이 뚫었다는 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참고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나 풍어제, 출어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후에는 해안 절벽 위에 새로 내놓은 탐방로를 따른다. 비록 잠시지만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제법 그럴듯한 바윗길을 올라서면 이번에는 폭신폭신한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를 친구삼아 거닐기에 더없이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바닷가로 내려선 탐방로는 또 다시 산으로 기어오른다. 험하지도 그렇다고 구간이 길지도 않지만 이마에 배어나는 땀까지 막을 수는 없다. 산길은 역시 산길일 수밖에 없나보다.



또 다시 바닷가로 내려서니 상큼한 봄바람이 땀에 배인 이마를 훑듯 지나가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준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른다. 지층 단면을 드러낸 바위 절벽 아래 파도와 해풍에 깎인 갯바위와 자갈이 펼쳐져 있다. 파도에 휩쓸린 몽돌이 화음을 만들고,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더 걷자 발산 2(發山 二里)’가 나온다. 발산2리의 또 다른 이름은 여사(余士)’이다. 신라가 망한 후 망국의 한을 품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선비 행세를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도 역시 작은 어선 대여섯 척이 정박해있는 어촌 마을이다. ! 이 마을의 뒷산 어부 보안림에 있다는 모감주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371)’는 구경하지 못했다. 앞만 보고 걷다가 군락지로 연결되는 들머리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꽃이 만발하면 마치 황금비가 내리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기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다 하겠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지방도인 호미로의 축대 아래로 나있다. 멀쩡한 도로를 제켜놓고 찰랑거리는 바닷물 바로 옆에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길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커다란 판석(板石)을 깔아 멋까지 더했다. ‘호미곶 해안 둘레길이 낳은 명품 산책로라 하겠다.



잠시 후 장군바위가 길손을 맞는다. 투구를 쓴 장군이 아이를 업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언젠가 보았던 촛대바위에 더 가깝다. 함께 걷던 친구는 남근바위라며 아예 한술 더 뜬다. 하긴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라고 하지 않았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탐방로는 이후로도 바닷가를 따른다. 너른 바다가 끝 간데 없이 펼쳐지는데 바다를 향해 내닫다 그만 돌로 굳은 듯한 꿈의 파편들이 암초를 이룬 채 여기저기 흩어져 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왼편에 펼쳐지는 풍경도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기암절벽에 매달린 채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노송 몇 그루만으로도 훌륭한 풍경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더 걷자 발산 1가 나온다. ‘발산(發山)’ 마을로도 불리는데 조선시대 세워진 흥인군 공덕비에는 발산(鉢山)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지형이 바랑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랑골 또는 발미골이라 불렸다라고 볼 수 있으나, 언제부터 쏠 발()’자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단다.



마을길을 걷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손질한 고기를 널고 있다. 그런데 이곳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나 오징어가 아닌 아귀란다. 새로이 부각되는 특산품일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도로를 해안도로를 따른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내 눈이 한가해진 것은 아니다. 날머리가 가까워졌으니 이쯤에서 들어가 볼만한 횟집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닷가라선지 횟집은 꽤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연 집은 거의 없었다. 성수기에만 문을 여는 모양이다. 그런 풍경은 날머리인 흥환리까지 계속됐다. 덕분에 우린 최근 이곳에서 많이 잡힌다는 오징어를 맛은커녕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해안길을 따르다보면 왼편 언덕에 비각(碑閣) 하나가 보이기에 올라가본다.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구간에 돌 울타리를 쌓고 군마 등을 키우고 관장했다는 장기 목장성비(長䰇 牧場城碑)’가 모셔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興寅君) 공덕비와 목장을 관장하던 감목관(監牧官) 공덕비등이 함께 세워져 있다.




트레킹 날머리는 흥환리 백년손님 마트(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발산리에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간이해수욕장이 있는 흥환리에 이르면서 해파랑길 15코스의 트레킹이 끝을 맺는다. 해파랑길의 스탬프 함은 흥환교 건너 백년손님 마트의 문 앞에 세워져 있다. 이정표는 해수욕장의 모래사장과 흥환보건진료소를 경유해 마트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929번 지방도까지 진행한 다음 흥환교를 건너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해파랑길 15코스의 공식적인 거리는 14.7이다. 하지만 핸드폰의 깔아놓은 앱은 12.45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두어 곳에서 해파랑길 대신에 호미곶 해안둘레길을 따랐던 탓일 것이다. 아무튼 12.453시간이 걸었으니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결과이다.


해파랑 13코스

 

여행일 : ‘19. 1. 5()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구룡포읍 일원

산행코스 : 양포항(2.6km)금곡교(8.0km)구평포구(1.5km)장길리 낚시공원(6.9km)구룡포항(거리 및 소요시간 : 원래는 19이나 이 가운데 대진리에서 구룡포항까지의 14.17구간을 걷는데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중 여섯 개의 코스가 들어있는 포항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다. 양포에서 출발해 구룡포항까지 줄곧 해안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가끔은 국도로 올라서기도 한다. 때로는 인도가 구분되지 않는 길을 걷는 모험도 감수해야만 한다. 이 구간은 특별히 기억해둘만한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이 널린 수려한 바다 풍광을 걷는 내내 감상할 수 있으며, 양포항과 구평항, 장길항 등 빼어난 경관을 지닌 항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싱싱한 회는 물론이고, 만나는 항구마다 대게와 과메기를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대진리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20가까이 되는 거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집사람을 생각해서이다. 덕분에 우린 신창마을의 명물이라는 우는 바위와 영암마을의 갓바위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둘 모두 전설까지 갖고 있었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들머리는 ’GS칼텍스 대진주유소‘(포항시 남구 장기면 대진리 86-8)

울산고속도로 남포항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구룡포방면으로 달리다가 세계교차로(포항시 남구 오천읍 세계리)에서 오른편 929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양포항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13코스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난 31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다. 20에 가까운 거리가 부담스럽다는 집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빨리 생선회를 맛보고 싶다는 친구의 희망까지 보태져버렸으니 나 혼자서 완주를 고집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31번 국도변에 있는 ’GS칼텍스 대진주유소로 오늘 트레킹의 시작점이 된다.




주유소를 오른편에 끼고 난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바닷가를 향해 잠깐 걷자 대진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대진리(大津里)’의 역사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포리에 수군의 만호진(萬戶鎭)’이 설치되면서 대초전이라 불리던 게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매진마을이 합쳐지면서 대진리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 마을회관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과 이곳에서 헤어지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은 물론 오른편의 바닷가 방향이다.



마을안길을 걷다가 눈에 확 띄는 풍경을 만났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들이 상점과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것인데 조그만 바람에도 돌아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기발한 아이디어라 하겠다.



몇 걸음 더 걷자 드넓은 모래사장이 바닷가에 펼쳐진다. ‘광활하다라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대진해수욕장인데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활짝 열린 하늘과 탁 트인 바다, 그리고 더없이 너른 모래사장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백사장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소나무 숲(松林)은 덤이라 할 수 있겠다.



해수욕장의 건너편, 그러니까 북쪽 방향에 빨강색의 등대가 보인다. 저곳이 모포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국도로 되돌아 나가야할 차례이다. 해파랑길은 원래 대화천()에 놓인 다리(대진교)를 건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모래사장을 걷기로 한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때 국도로 나가도 될 것 같아서이다. 대진리 해변과 모포 해변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의 가뭄이 제법 심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비록 물(水量)이 적지만 저 하천은 대진해수욕장의 자랑거리라 할 수도 있겠다. 저 정도면 천연의 담수(淡水) 샤워장으로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면 해안도로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멘트 난간에 그려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로고(logo)를 발견한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에서 시작해 구룡포를 거쳐 장기면의 두원리에 이르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5코스)’은 해파랑길의 13·14코스와 겹친다. 그러니 탐방로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참고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호미반도의 해안을 따라 내놓은 포항판 올레길이다. 해병대 상륙훈련장이 있는 청림 해변에서 호미곶 광장까지 25구간을 4개 코스로 나눈 뒤 연오랑세오녀길(청림동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6.1), 선바우길(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흥환해수욕장, 6.5), 구룡소길(동해 발산1구만리 어항, 6.5), 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호미곶 상생의 손, 5.3) 등 코스별로 특색을 살린 이름을 부여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부턴 구룡포를 거쳐 장기 두원리까지 33.6를 잇는 해파랑길 1314코스와 연결되는데, 이 구간을 해안둘레길에 포함해 해파랑길(5코스)‘로 부르기도 한다.



오늘도 역시 바닷가는 갈매기들 세상이다. 갯바위나 모래사장을 가리지 않고 쉴만한 곳일라치면 어김없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있다.



길을 나선지 35분 만에 모포마을에 도착했다. ‘모포(牟浦)’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봄보리가 일찍 돋아나는 포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같은 의미로 버리꾸지(包衣浦)’라 불리기도 했으며, 바위가 동해로 돌출하여 구석을 만들고 있다 해서 바우꾸지(巴衣浦)’라고도 불렀단다. 작은 어선들 몇 척이 정박되어 있는 마을 앞 항구는 방파제(동방파제 265m, 남방파제 215m)와 물양장(170m)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이 마을에는 모포줄에 대한 옛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장기 현감의 꿈에 뇌성산에서 한 장군이 용마를 타고 내려와서 우물물을 마시더니 이 곳을 만인이 밟아주면 마을이 번창하고 태평하며 재앙이 없을 것이다라고 이르고 사라지더란다. 그래서 시작된 게 줄다리기이다.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땅을 밟아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줄다리기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매년 음력 816일이면 골매기당에 보관하고 있는 줄을 꺼내어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며, 놀이가 끝난 뒤 줄은 다시 골매기당에 모셔진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줄다리기가 끝난 줄은 버려지거나 태워지는 게 보통인데 이곳 모포리에서는 신앙대상물로 여기기 때문에 모셔둔다는 것이다.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 마을 뒤 국도변에 위치한 현몽각(縣夢閣)에 모포줄(牟浦)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다니 이미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모포항의 끄트머리쯤에서 탐방로는 왼쪽 방향의 언덕으로 오른다. 데크계단으로도 모자라다 생각했던지 들머리에다 이정표(장길리 복합 낚시공원4.95/ 모포항0.4)까지 세워놓았다. 하긴 이정표가 없다면 진행방향에 있는 축양장(畜養場)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구간은 우회구간이라고 보는 게 옳다. 300m쯤 지난 지점에서 탐방로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오른편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고양이바위라 부르던 바위이다. 이밖에도 송곳바위두꺼비바위’, ‘망부석등 이런저런 다양한 이름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바라보는 각도(角度) 또는 바라보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망부석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등에 업힌 아이는 칭얼대고 배는 자꾸 불러오는데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지어낸 스토리텔링이 안성맞춤으로 다가온다.





이제부터 해파랑길은 자갈과 몽돌이 깔려있는 해안가를 따른다. 바닷물과의 간격이 너무 좁을 뿐만 아니라, 왼편에 끼고 있는 언덕은 너무 가팔라서 위급상황이 생겼을 때 몸을 의지할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 구간이다. 바람이 일어 파도라도 높을라치면 통행이 불가능하겠다는 얘기이다.



몽돌 해안길은 축양장(畜養場)으로 연결된다. 덕분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축양장이란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축양장이란 어업 또는 양식에 의하여 생산된 수산물을 알맞은 시설에서 얼마 동안 보관하여 기르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겨울철 횟감으로 최고라는 방어(魴魚)를 기르고 있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대방어도 눈에 띈다. 제철을 맞아 출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갯바위들이 널려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오른편에 끼고 시멘트 포장도로가 꼬불꼬불 나있다. 탐방로 주변의 갯바위들에는 꽤 많은 숫자의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만큼 입질이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다가가보면 실적은 꽝이었다. 학꽁치를 낚고 있다는데 물고기를 넣는 박스마다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학꽁치라는 게 본디 낚시에 큰 재주가 없더라도 금세 잡을 수 있다고 알려졌는데 빈말이었던가 보다.




모포항을 출발한지 40분 조금 못되어 구평리(邱坪里)’에 이른다. 해안선을 따라 자로 길게 형성된 구평리는 5개의 자연부락이 1(새바우)2(邱坪, 학교마), 3(都邱亭, 황사디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새바우(島岩)’라 불리는 ‘1인 모양이다. 참고로 구평리(邱坪里)란 지명은 옛날 이성지라는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뇌성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이곳이 평평한 두들로 되어 있다고 해서 구평(邱坪)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거북의 등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구반(龜盤)’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비록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이 마을에는 효자 하영식(河永湜)의 행적을 기리는 선효각(善孝閣)’ 지어져 있단다. 이곳 구평리에 살던 하영식이란 사람이 병환을 앓은 어머니를 위해 겨울에 꿩을 잡아 요리해 드렸는데, 그 요리를 먹은 어머니가 병이 낫고 건강을 되찾는 기적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하늘을 감동 시켰다고 해서 고종 21(1884)진주 하씨문중에서 비를 세웠단다.



마을회관을 지나자 방파제로 둘러싸인 작은 포구가 나타난다. 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이 바다에 널려있는 것이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데 새들이 날아와 쉬었다 간다고 해서 조암(島岩, 새바우)’ 또는 새금돌이라 불러오고 있단다. 마을 이름도 이 바위로부터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신생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곳임을 입증해주는 화산암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화산암이 파도와 염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저런 형이상학적 모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항구를 벗어나면서 탐방로는 마을 안길로 파고든다. ‘구평2’, 학교마(學校村)’라는 단위마을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구룡포남부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49년에 설립되었는데 지금은 구룡포초등학교 구남분교장으로 격하되어 있다. 아무튼 마을을 벗어나면 31번 국도로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앞에서 말한 구남분교장을 만나게 된다. ! 초등학교 앞에 수령(樹齡)450년이나 되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구평2리 마을 주민들이 매년(음력 106) 당제를 지내오는 당목(堂木)인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국도를 따라 10분쯤 걷다보면 장길리복합낚시공원이라 적힌 간판을 만날 수 있다. 간판 뒤로 드넓은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고, ‘장길리(長吉里)마을 앞으로 갯바위와 방파제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분위기는 아늑한 편이다. 주변 지형이 마을 앞 내항을 둘러싸는 형상이어서 편안한 느낌이 감돈다. 참고로 장길리는 장구목처럼 생겼다는 장구목생길리등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길(長吉)’이라는 지명 또한 두 마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장길리는 해양테마를 주제로 한 복합낚시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2015년 조성된 공원은 확 트인 해안데크 산책로와 조경공원, 야경이 아름다운 경관조명 등대, 부유식 낚시터, 바다에 떠있는 펜션, 카페 등 여러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어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단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단연 펜션이 아닐까 싶다. 바다에 부유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다 펜션을 배치했다. 들어가 보지 않아 내부시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외관만큼은 액자에 넣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낚시를 좋아하는 강태공들이라면 가두리낚시터를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갔을 때는 방어를 풀어놓고 있었는데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정도로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말이다.






마을 북편은 언덕이 동해로 뻗어 나와 작은 반도를 이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 언덕에는 전망카페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공연장, 그리고 소나무숲이 자리하고 있다. ()처럼 바다 쪽으로 뽈록하니 튀어나온 곳에는 바다를 향해 170m 길이의 나무다리를 놓았다. 갯바위인 보릿돌(麥岩)’을 잇는 다리다. 다리 이름 또한 보릿돌 다리라 명명했다. 2012년 조성된 이 다리는 복합낚시공원의 랜드마크(landmark). 짙은 갈색의 나무다리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비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SF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보릿돌교를 건너면 장길리 최고의 낚시 포인트이자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보릿돌에 도착할 수 있다. 보릿돌교와 연결된 큰 갯바위가 안 보릿돌’, 조금 더 먼바다에 위치한 작은 갯바위가 바깥 보릿돌이란다. 폭이 50m나 된다는 안보릿돌갯바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는 순수 관광객들이 있는가하면 낚시 삼매경에 빠진 강태공들도 보인다. 그런가 하며 저녁거리라도 마련하려는지 해초를 채취하는 알뜰 살림꾼들도 눈에 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보릿돌의 이름과 관련한 마을 구전도 알아보자. ‘보릿돌이란 이름은 보리()를 닮은 갯바위의 생김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보릿돌에 해산물이 워낙 많아 보릿돌에만 가면 보릿고개를 면할 수 있다고 해서 보릿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으니 마음 내키는 것으로 골라잡으면 되겠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다리 주변으로 탁 틔어 있는 바다는 도시의 답답한 일상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난간 아래의 은근한 에메랄드빛 바다도 눈길을 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바닷속 바위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일 정도다. 조망 또한 뛰어나다. 장길리 해안은 물론이고 저 멀리 구룡포항까지 연결되는 해안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문화공연장이 있는 언덕 뒤편으로 나있다. 데크계단을 내려서면 길은 몽돌해안을 따라 걷도록 나있다. 해안선을 따라 어느 정도 걷다가 31번 국도로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르기로 했다. 바위절벽 때문에 난감한 상황도 만났지만 징검다리를 놓아가면서 진행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까지 권할 일은 아닐 것 같다.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걷다보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천초(天草)를 줍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우뭇가사릿과에 속한 바닷말인데 민물에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바랜 것을 고아서 찌꺼기를 걸러내고 식히면 우무가 된다. 이 우무는 예로부터 채쳐서 콩국에 띄워 청량음료로 사용하여 왔다. 우무 자체는 영양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변과 함께 그대로 배설된단다. 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에게는 최고의 건강식이라 할 수 있겠다.



바닷가와 국도를 두어 번 오르내려봤지만 마지막은 국도로 장식된다. 이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다는 게 특징이다.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고 해도 씽씽거리며 달려가는 자동차들 때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이 구간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국도를 따라 걷다보면 그럴듯하게 생긴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침식애(侵蝕崖)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위는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도 그럴듯해서 해안으로 다시 내려가 보았지만 위에서 본 풍경보다 못해서 사진은 올리지 않았다.



장길리를 출발한지 50분 만에 하정리(河亭里)’, 정확하게는 하정1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해안선을 따라 다섯 개의 자연 부락이 1(임물), 2(하성, 태끼, 솔머리), 3(당사포)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1임물(臨勿)’ 마을인 모양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될 지세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글쎄다. ‘인물임물은 달라도 많이 달라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마을 앞 해안은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도 꽤나 긴 편이다. 하지만 해수욕장으로 조성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파도막이용 시멘트난간에 기대어 간이 천막을 몇 곳에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작은 어선 두어 척이 매어져 있는 작은 항구는 ‘2에 만들어져 있다. 2리는 마을의 생김새가 성을 쌓아둔 것 같다는 하성(河城)’과 쇠머리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바닷가 언덕에 지어진 소나무 정자(일송정)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솔머리(松亭)’, 그리고 마을 어귀의 돌출된 지형이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태끼(‘토끼의 방언)‘ 등 세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동해의 널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여름철보다 한층 더 짙어진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온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치고 부서지면서 흰 포말을 무수히 쏟아낸다. 그 풍경이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겨울 바다 하면 물론 동해다. 겨울의 동해는 여름 바다와는 달리 날 선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지만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렇다고 쓸쓸함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비어있는 공간에다 새해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보자. 그래도 비어있다면 낭만 한 숫갈 추가해도 좋을 일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하정3‘, 당사포(堂士浦)‘를 지난다. 마을 뒤에서 보면 자 같고, 앞에서 보면 자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선비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이름의 연원(淵源)을 찾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마을 뒤 언덕 위에는 경북대학교 수련원이 있다. 1리에서 3리까지는 25분이 걸렸다.



7~8분쯤 더 걷자 수산물 가공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병포리(柄浦里)가 나온다. 구룡포만을 끼고 구룡포리와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하며, 북쪽의 대보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와 남쪽의 장기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마을 앞 자라를 닮은 바위에서 이름을 따온 자래골(柄里)과 웃자래골(上柄), 구룡포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의 남포리 등 3개의 자연부락이 행정구역상 각각 1, 2, 3리로 구분되어 있다. 참고로 병포리의 ()’은 자래골을 한자로 표기할 때 자래의 뜻을 자루로 잘못 해석하면서 생겨난 글자라고 한다.



구룡포에 가까워지면서 길가는 과메기 천지가 된다. 그야말로 한 집 걸러 한 집에서 과메기를 말린다고 보면 되겠다. 그 때문인지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퀴퀴한 냄새가 아닌 깨끗한 생선이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맛있는 냄새다. 지금은 겨울,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첫눈과 낭만적인 스키장, 그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식도락가들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별미를 그 무엇보다도 기다린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메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과메기하면 포항 구룡포가 수식어처럼 붙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구룡포 지역을 지금 걷고 있으니 눈에 띄는 것이 모두 과메기라 해도 뭐가 이상하겠는가. 참고로 요즘은 대부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지만 과거에는 과메기라 하면 으레 청어를 일컬었다. ‘과메기란 이름은 관목어(貫目魚)’, 즉 눈을 꿰어 말린 생선에서 나온 말이다. 청어가 흔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덕과 포항 일대에선 으레 처마 밑에 청어를 걸어 놓고 말려 먹었다고 한다.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는 말처럼 청어는 많이 잡히기도 했거니와 맛도 좋고 영양가도 높아 옛 문헌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쉽게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는 생선이라 해서 비유어(肥儒魚)’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우리 속담 중에 죄인들을 오랏줄에 묶어 줄줄이 감옥으로 끌고 갈 때 쓰는 비웃 두름 엮듯 한다는 말에서 비웃또한 청어를 일컫는 말이다. 생선 스무 마리를 줄줄이 엮는 두름처럼 청어가 무척이나 흔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병포리 근처는 오징어덕장이 장관이다. 너른 공터는 물론이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오징어 건조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요즈음 구룡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데, 함께 걷고 있던 친구의 입에서 구룡표 과메기를 이젠 구룡포 오징어로 바꿔야겠다는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올 정도였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튼 반건조 오징어라 불리는 피데기는 동해안의 생물 오징어를 바닷바람에 3일 정도 말린 것이다. 피데기는 30% 이상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마른 오징어에 비해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단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자 드디어 구룡포항이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구룡포는 경관이 수려하고 풍부한 어장이 있는 곳이다. 그래선지 일제강점기 때 가가와현과 오카야마현에서 일본인 어부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순식간에 침탈의 현장으로 변해버렸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큰 배로 대량 어획을 해서 부를 축적했고 어업과 선박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을 하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그 흔적은 지금 관광지로 변해 있다. 참고로 구룡포라는 이름은 전설로부터 얻어졌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나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치더란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 있었는데 이 소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구룡포 읍내로 들어서면 또 다른 풍경이 눈길을 끈다. 거리를 빼꼭히 매우고 있는 음식점의 간판들이 하나 같이 대게를 대표 음식으로 내걸고 있는 것이다. ‘구룡포 과메기는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는 듯이 말이다. 광장에 과메기 상설시장천막까지 없었더라면 오해하기 딱 좋겠다. 하긴 그 오해가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수심 200~400m 청정심해에서 포획하는 이곳 구룡포 대게가 전국 수협 위판량의 약 50%를 차지한다니 말이다. 특히 유통단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2, 3단계 정도 생략됨에 따라 신선하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란다. 그나저나 구룡포의 또 다른 명물인 대게빵은 맛을 보지 못했다. 아라광장의 건너편에 있으니 먼 거리도 아니련만 찾아볼 겨를도 없었다. 싱싱한 회가 그저 최고라는 친구의 눈에 다른 먹거리들이 들어올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대게는 아예 언감생심(焉敢生心)이 되어 버렸다.



날머리는 아라광장(구룡포읍 구룡포리 954-34)

부둣가를 따라 반대편으로 가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Park Guell)을 벤치마킹한 듯 그림 타일로 장식된 테라스풍의 의자가 눈길을 끈다. ‘아라광장인데 과메기 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만든 두 개의 광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아라는 바다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다른 하나는 구룡포(九龍浦)의 이름 중 용()을 뜻하는 미르광장이란다. 그건 그렇고 아라광장은 아라장터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문화행사나 축제 외에도 과메기 특판등의 행사를 가끔 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 날에도 과메기 상설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날머리에 도착해서 핸드폰의 앱을 살펴보니 오늘 걸은 거리가 14.17로 표기되어 있다. 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렸단다. 알맞은 거리를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양포항에서 대진해변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길에 금곡교에서 버스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오리가 물가에 납작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일출암이라는 명품바위로 장기천을 따라 내려온 민물이 동해의 바닷물과 만나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두 물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옛날에는 이곳이 날물치라 불리기도 했단다.


일출암은 우뚝 솟은 바위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일품인데 육당 최남선은 이곳을 조선 십경(朝鮮 十景)’ 가운데 한 곳으로 꼽기도 했단다. 바위와 소나무 틈새로 그림같이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 백두산 천지와 금강산 단풍 등에 비견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일출암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지만 내 눈에 비친 바위는 분명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문득 조선 개국 초기 승려인 무학대사의 명품 문장인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 떠오른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인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최남선이 느꼈던 감흥을 따라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해파랑길 12코스

 

여행일 : ‘18. 12. 15()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감포읍과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원

산행코스 : 감포항(1.4km)송대말등대(2.0km)오류고아라해변(2.5km)연동마을(7.6km)양포항(거리 및 소요시간 : 14.56, 3시간 26)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경주의 대표어항인 감포항을 출발하여 포항의 미항으로 손꼽히는 양포항까지 이어지는 해안가를 따르는 코스이다. 그러니 해안 절경들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특히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모티브로 한 등대가 올라앉은 송대말(松臺末)‘과 옛 시인들의 놀이터였다는 소봉대(小峰臺)‘는 그 어디에 내놓아도 뒤질게 없는 명품 경관임이 분명하다. 지역의 특성에 맞게 디자인 된 송대말등대와 연동항의 치미등대등의 등대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거기다 어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길가 덕장에서 드러누운 채로 싱그러운 해풍을 맞으며 영글어가는 포항의 특산품인 과메기를 만날 수 있는가 하면, 운이라도 좋으면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연출하는 하얀 물보라까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모퉁이의 끝자락에 걸터앉은 등대가 멋진 계원해변과 외국에서나 볼법한 요트들이 정박되어 있는 양포항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이국적(異國的)이다. 한마디로 눈요깃거리가 넘치는 코스라 하겠다.


 

트레킹 들머리는 감포항(경주시 감포읍 감포리 504-20)

동해고속도로(포항-부산)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929번 지방도를 이용해 문무대왕릉 방향으로 달리다가 대본삼거리(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서 31번 국도로 갈아타고 포항방면으로 올라가다 보면 감포교차로(경주시 감호읍 나정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오른편 동해안로(포항 방면)‘를 따른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전촌사거리(감포읍 전촌리)에서 우회전하여 감포로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파랑길 12코스의 들머리인 감포항에 이른다. 방파제회센터(감포읍 감포리 504-20)의 모서리에 해파랑길(11-12코스) 안내도와 함께 스탬프보관대가 설치되어 있다.




횟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12코스의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으로 감포항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짐은 물론이다. 감포항은 규모가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등대가 방파제의 끄트머리에서 손짓을 보내오고 있다.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나그네를 길 배웅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항구를 오른편에 낀 해안도로를 따르다 보면 그 끄트머리쯤에서 수협활어직판장을 만난다.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홍보 문구 또한 천년의 바다‘, ’천년의 향기‘, ’천년의 맛등 온통 천년(千年)‘ 일색이다.



탐방로는 수협활어직판장의 뒤편에서 골목으로 파고든다. 입구에 방파제슈퍼가 문을 열고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기괴한 풍경을 만난다. 담장 위에 난감하게 생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의 아래에 새 천국. 새작가 김삿갓이라고 적어놓은 걸로 보아 새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나 아무리 봐도 새로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 아까 들머리에서 살펴봤던 해파랑길 탐방기사(경북일보)‘를 옮겨놓은 패널(panel)에서는 이런 정보가 없었다. 기사를 쓴 이순화 시인역시 이 길을 걸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시인의 눈에는 하찮아 보였을 수도 있겠다.



언덕으로 올라서니 ‘november resort’가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송대말 등대(松臺末 燈臺)’로 가는 길인데 소나무가 우거진 대의 끝부분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숲의 끝자락에는 관사를 포함한 사무동 등 건물 전체가 한옥(韓屋)으로 지어진 등대가 자리 잡았다. 1933년 감포어업협동조합에서 감포항 인근 해역에서의 해난사고를 막기 위해 등간(燈竿)을 설치한 것이 송대말 등대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감포항의 이용선박이 점차 늘어나면서 1955년에는 감포항 북쪽 송대말(松臺末)에 무인등대를 새로 설치했고, 1964년에는 유인등대로 바꾸면서 기존 등탑에 대형등명기를 설치해 광력을 증강했다. 특히 2001년에는 감은사지 3층 석탑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등탑의 외형을 눈에 띄게 바꾸었다. 지역 특성에 맞게 디자인을 한 것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송대말등대까지는 18분이 걸렸다.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송대말(松臺末)의 맨 끄트머리에는 하얀색 등대가 자리 잡았다. 뒤에 보이는 네모진 등탑(燈塔), 즉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모티브로 한 등탑을 새로 지었으니 이 등탑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래도 옛 등대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냥 남겨놓은 모양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오래 묵은 시멘트 구조물과 함께 말이다. 이 구조물은 더 오래된 등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일제 강점기 때의 송대말은 최고급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옛이야기일 따름이고 시멘트 구조물에 붙어있는 당시의 역사를 담은 안내판과 사진만이 과거의 번성했던 영광을 전해줄 따름이다.



등대 앞 갯바위는 주상절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갯바위와 육지 쪽의 암벽을 시멘트벽으로 막아 놓았다. 위에서 거론했던 일제강점기 때의 흔적으로 당시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수족관(水族館)의 흔적이란다. 당시 이곳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고관대작의 전용 별관인 영빈관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귀하디귀했던 딸기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창때는 일본인들을 실어 나르던 전속택시까지 상주했을 정도로 번성했다는 것이다. 총독부 우정국에서 송대말의 사진을 담은 우표까지 발행했을 정도라니 말 다했다. 아무튼 고관대작들은 이곳 송대말에서 경관을 즐기다가 즉석에서 생선회를 떠서 먹었다고 한다. 저 수족관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만든 회였을 게 분명하다.



등대 앞은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뷰(view)를 자랑한다. 난간에 서면 갯바위로 밀려드는 파도와 파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암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커 보이는 암초 위에는 작은 등대가 걸터앉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암초를 희롱하고 있는 바닷물은 영롱한 에메랄드빛 그 자체이다. 하긴 관광공사에서 아무 곳이나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선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경주의 또 다른 새해 일출 명소로 알려져 있다. 경주의 일출 명소는 물론 봉길리의 문무대왕릉 해변이다. 하지만 너무 입소문을 탄 탓에 신년이면 해맞이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즈넉하게 일출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갯바위와 바다 위의 무인등대 뒤쪽으로 해가 돋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등대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갯바위들이 널린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보면 척사항(尺紗港)’이 나온다. 송대말등대를 출발한지 15분만이다. ‘척사의 원래 이름은 장사였다고 한다. 백사장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다음에는 창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창사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때에 더없이 너른 백사장이 파도가 치면 자로 비단 주름을 재는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자 척()’비단을 잣다 사()’를 써서 척사(尺紗)라고 고쳐 불렀단다. 그러나 지금은 백사장은 대부분 사라지고 대신 뾰쪽뾰쪽한 갯바위들만 바닷가에 널려있을 따름이다. 아무래도 바다 이름을 다시 창사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 같다.




척사항에 들어서니 방파제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등대가 눈길을 끈다. 2005년에 지어진 간이등대가 노후화되자 높이 10m의 새로운 등대를 최근(2018)에 다시 만들었다는데,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송대말등대와 마찬가지로 지역 특성에 맞는 이색적인 등대를 만든 셈이다. 특히 저 등대에는 스피커를 설치해서 실제로 종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했단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만들어주었다고 보면 되겠다.



척사항을 빠져나와 언덕으로 오르면 왕복 2차선의 자동차도로(감포로)를 만난다. ‘해파랑길 12코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의 대부분이 바닷가를 따르지만 심심찮게 자동차도로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 도로들 가운데는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는 31번 국도도 있다. 특히 탐방로를 따로 만들어놓지 않아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을 피해가며 걸어야 하는 소름끼치도록 위험한 구간도 있다.



다행이도 몇 걸음 걷지 않아 탐방로는 또 다시 해안으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곧이어 오류 고아라해변(오류해수욕장)’에 이른다. 척사항에서 10분쯤 걸렸다. 길이 600m에 폭이 70m인 백사장은 현재 해수욕장으로 성업 중이란다. 자갈이 대부분인 인근 해변들과는 달리 고운 모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래로 찜질까지 할 수 있을 정도란다. 거기다 1.5m 안팎의 수심(水深)과 우거진 소나무 숲, 그리고 민물까지 곁에 두고 있으니 해수욕장의 입지조건으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잘 자란 해송들이 그득한 해변 숲속에는 2013년에 조성된 오류캠핑장이 들어서 있다. 카라반 28대와 캠핑사이트 8면을 갖춘 명품 캠핑장이다. 거기다 어린이놀이터와 체육시설은 물론이고 샤워장과 흔들의자, 세척실까지 만들어놓았다니 가족단위 캠핑을 하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그래선지 이곳의 카라반 예약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소문이 나있다. 하긴 개장 이래 매년 6만 명 이상이 찾는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탐방로는 바닷가로 내려선다. 밀려오는 파도에 따라 자갈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매력적인 바닷가이다.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화살표시를 따라 시멘트 계단을 오른다. 이어서 언덕을 넘어서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자그만 포구를 낀 모곡마을이 나타난다. 고아라해안에서바닷가로 내려선지 10분만이다. 모곡마을의 옛 이름은 맥곡이었다고 전해진다. 옛날 어느 선비가 지나가다가 야생보리가 잘 된 것을 보고 보리를 심어 정착한 것이 마을의 시초라고 해서 보리 맥()’을 써서 맥곡이라 했단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모곡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에게는 옛 이야기가 그리웠던가 보다. 마을에 붙여져 있는 표지판들은 하나같이 보릿골 길이라는 주소를 달고 있었다.



수묵화처럼 들어앉은 모곡항을 놓아두고 또 다시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 이번에는 ‘31번 국도가 길손을 맞는다. 바닷가를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묵화는 국도를 따라 걸으면서도 가끔 눈에 담을 수 있다.



국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동해안 자전거길을 따른다. 그리고는 꽤 오랫동안 이 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아름다운 해안 풍경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망 좋은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는 아름다운 펜션들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하겠다. !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핸드폰에 깔아놓은 해파랑길 지도와 다르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중간 어디쯤에선가 바닷가로 내려가야 했는데 앞서가는 집사람의 뒤꽁무니만 따라오다 보니 들머리를 놓쳐버렸다.



길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약간 유별나 보이는 건물의 외관이야 그렇다 치도라도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이 너무 독특해서이다. ‘우물 정()’자를 형상화 시킨 것이라고 우기는 나에게 집사람이 음표(音標, note)의 기호라며 점잖게 타이른다. 그러고 보니 올림표(sharp)’내림표인 (flat)‘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저 건물은 음악관련 공연장일지도 모르겠다.



국도에 올라선지 15분쯤 지나면 연동마을이다. 예로부터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는 마을이라 해 염동(鹽洞)으로 부르다가 현재는 연동(蓮洞)으로 고쳐 부르고 있단다. 접근성이 뛰어난데다 신선한 해산물이 많이 난다고 해서 경주는 물론이고 인근 포항이나 울산에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특징을 살렸는지 이곳은 현재 어촌체험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어촌마을 관광활성화와 소득증대를 위한 어촌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어촌체험마을은 전국에 100여개가 산재해 있는데, 경주에서는 유일하게 연동마을이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있단다. 마을 앞 전망 좋은 곳에는 연동어촌체험마을 펜션이 자리 잡았다.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지었는데 1층은 식당 겸 회의실로 사용되고 2층은 펜션으로 문을 열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단다.




바닷가 갯바위에는 연화정(蓮花亭)이란 정자가 올라앉았다. 신라의 왕과 연화의 애절한 사랑 얘기가 전해지는 바위이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연화가 넋을 놓은 채로 저 바위에 앉아 있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이지만 정자까지 지어놨으니 여행객들에게는 구전에 의한 얘기쯤으로 들릴 만도 하겠다.



포구의 안쪽에는 철제 타워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포구의 밖에도 같은 모양으로 생긴 타워가 하나 더 있다. 두 타워를 연결한 줄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아라나비라는 해양레포츠 시설이라고 한다. ‘아라나비는 바다의 순 우리말인 아라나비를 조합한 것으로, '체험자가 안전띠와 연결된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다 위를 하강하는 신종 익스트림 레포츠(extreme leports)'를 말한다. 이밖에도 연동마을에는 스노클링과 카약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그야말로 바다놀이터인 셈이다. 또한 토박이 주민들이 어릴 적 추억으로 간직하던 대나무낚시새우잡이’, ‘통발낚기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단다.



방파제 끝에 세워놓은 등대의 외형이 특이해서 다가가보기로 한다. 신라시대의 국찰(國刹)이었던 황룡사의 치미(鴟尾)’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치미란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를 말하는 것이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훌륭한 착상이라 하겠다. 항구에 있어서 등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등대들은 하나같이 밋밋하고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작은 등대에다 자기 고장 특유의 멋을 담았으니 얼마나 기발한가. 요즘은 디자인이 곧 경쟁력인 시대이다. 작은 시설물 하나에도 기능성과 함께 디자인의 중요성을 도입한 경주시에 찬사들 보내드린다. 그리고 나처럼 호기심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이 늘어나기를 빌어본다.



등대로 연결되는 방파제의 바닥에는 타일을 이용해 벽화까지 그려놓았다. ‘트릭 아트 포토죤(trick art photo-zone)’이라며 일단은 작품 속으로 들어가 모델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그림 위에 서서 사진을 찍을 경우 실제로 흔들다리 위에 서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사방에 널린 볼거리들을 바쁘게 주워 담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이제 테트라포드(tetrapod, 해일이나 파도를 막기 위해 방파제에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들이 마치 담장이라도 되는 양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는 해안가를 따른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해파랑길 이정표(양포항 6.4)가 보이는가 싶더니 두원마을(斗院里)이 나온다. 마을 앞에 등대도 갖추지 않은 작은 포구가 조성되어 있을 뿐 눈에 담을만한 풍경은 갖고 있지 않다. 그저 흔하디흔한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거랑(시내보다는 크고 강보다는 조금 작은 물줄기를 이르는 의 방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다시피 한 연동마을과 두원마을은 하나같은 둘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이 거랑마저도 수년 전 복개가 되어 얼핏 보면 한 마을로 보일 정도다.



두원마을에 들어서자 이제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다른 모양의 이정표(양포항6.8/ 경주시)가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는 안내판 모양으로 제작된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포항시에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세운 것이란다. 참고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호미반도의 해안을 따라 내놓은 포항판 올레길이다. 해병대 상륙훈련장이 있는 청림 해변에서 호미곶 광장까지 25구간을 4개 코스로 나눈 뒤 연오랑세오녀길(청림동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6.1), 선바우길(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흥환해수욕장, 6.5), 구룡소길(동해 발산1구만리 어항, 6.5), 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호미곶 상생의 손, 5.3) 등 코스별로 특색을 살린 이름을 부여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부턴 구룡포를 거쳐 장기 두원리까지 33.6를 잇는 해파랑길 1314코스와 연결되는데, 이 구간을 해안둘레길에 포함해 해파랑길(5코스)‘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우린 지금 호미반도 해안둘레길5코스를 걷는 셈이다.



탐방로는 두원리에서 비탈진 언덕 위로 향한다. 철제계단을 밟고 위로 오르면 개인용 도크(dock)로 여겨질 정도로 작은 항구들이 두어 곳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난다.



마을 안길을 잠시 걷다가 풍력발전기가 내다보이는 방향으로 오르니 또 다시 ‘31번 국도가 나온다. 해파랑길 12코스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는 그동안 함께 써오던 동해안 자전거길마저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도로를 자동차와 함께 나누어 써야만 하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이런 길에서 안전을 유지하려면 약자인 인간이 강자인 자동차를 피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이 구간을 걷다보면 해안이 잘 조망되는 곳에 놓여있는 카라반들이 눈에 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여름철 피서객들에게 꽤나 인기가 높을 것 같다.



씽씽 달려대는 자동차들을 피해가며 얼마간 더 걷자 탐방로는 다시 해안가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몽돌해변을 따라 걷는다. 자갈 위를 걷다보니 발걸음이 피곤해진다.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처럼 발을 붙잡는 곳이 있는가하면 삐끗해지지 않으려고 발목에 힘을 주는 통에 발에 피로를 주는 곳도 있다.



잠시 후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개울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는데, 건너는 게 녹록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물길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징검다리를 피해 옆으로 돌아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길의 폭이 꽤 넓어서 건너뛰는 것은 애초에 글렀다.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결국에는 조금 큰 돌을 옮겨놓고 이를 징검다리 삼아 건널 수 있었지만 물에 빠질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었다. 평소처럼 스틱을 챙겨왔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트레킹이라서 만만히 본 게 불찰이 아니었나 싶다.



탐방로는 언덕을 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먼저 넘게 되는 언덕은 능선으로 연결된 무인감시초소를 머리에 인 봉우리의 끝이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져 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언덕을 가로지르면 된다. 그러나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언덕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길은 언덕을 가로지르면서 나있지만 모퉁이만 살짝 돌면 반대편에서 그 길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은 갈수록 험해진다.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하던 몽돌이 언제부턴가 숫제 너덜로 변해있다. 걷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음은 당연하다. 대신에 눈에 들어오는 경관은 더욱 고와졌다. 해안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해식애가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선바위(立石. 생김새로 이름을 지어봤다) 근처에 이르자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끝이 보일 때까지 진행을 고집하겠다면 바위벼랑에 매어져 있는 밧줄에 의지해서 위로 올라갈 수는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세 방향이 모두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한쪽마저도 군부대의 철조망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모험을 포기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기로 한다. 속상했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오른편 산자락으로 나있는 오솔길 하나를 찾아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희미한데다 경사까지 가팔라서 오르는 게 만만찮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올라서면 또 다시 31번 국도를 만난다. 정규의 탐방로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 구간을 걷다보면 가로수처럼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내다보인다. 특히 진행방향 저 멀리에 있는 소봉대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모퉁이를 돌아선 탐방로는 다시 해안가로 내려선다. 고운 모래가 300m쯤 깔려있는 해안이다. 거기다 폭까지 30~40m쯤 되니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하지만 해변은 그냥 방치되어 있다. 그늘을 가려줄만한 숲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양포항이 4가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 뒤에도 모래사장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다만 그 폭이 조금 좁아졌을 따름이다. 그런 모래사장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나있는 탐방로를 따르다보면 아까 나무사이로 살짝 내다보이던 소봉대가 어느새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걷자 드디어 소봉대(小峰臺)이다. 두원리를 출발한지 40분 만이다. 소봉대는 장기면(포항시 남구) 계원2리에 딸린 조그만 섬이지만 물이 낮아지고 방파제가 생기면서 지금은 걸어서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소봉대란 지명은 인근 복길 봉수대(烽燧臺)’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작은 봉수대가 있었다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것 같다고 해서 복귀봉(伏龜峯)’이라 불리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아무튼 작은 산봉우리 모양으로 생긴 이곳은 경관이 빼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울렁이는 심상을 글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구암 이정·검간 조정·도곡 이의현·유하 홍세태 등 조선 중후기 선비들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있단다. 특히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지은 칠언절구는 시비로 만들어져 섬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요즘의 소봉대는 한가롭기 짝이 없다. 봉수는 무너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갯바위에는 풍류를 읊던 옛 선비들 대신에 세월을 낚는 낚시꾼들만 가득하다.



길을 걷다보면 지역 특산품인 과메기를 말리고 있는 작업장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겨울철 대표 별미인 과메기는 청어나 꽁치를 말려서 만든다. 저렇게 매달거나 널어놓은 과메기들은 차가운 해풍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맛이 고소하고 담백해지며, 특히 어린이 성장과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과메기라는 이름은 말린 청어인 '관목청어(貫目靑魚)'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꼬챙이 등으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뜻이다. 1960년대 이후 청어 어획량이 줄면서 꽁치로 대체됐었으나 요즘은 다시 청어가 잡히기 시작한단다. 과메기는 아래 사진과 같이 꽁치나 청어의 배를 갈라 내장과 뼈, 머리를 제거하고 나서 말리는 편과메기가 일반적이다. '배지기 과메기'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새끼줄에 매달아 통째로 말리는 통과메기도 있단다.



다시 길을 나선다. 탐방로는 이제 해안도로를 따른다. 국도는 아니고 그저 마을 앞으로 난 길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몽돌해변으로 내려서서 걷기도 한다. 이곳도 역시 해수욕장으로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탐방로가 결국에는 국도로 올라서고 만다. 국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아일랜드팬션의 안내판이 가리키고 있는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탐방로는 다시 왼편으로 휘어져 나간다. 다시 국도로 되돌아나간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가를 따르기로 했다. 건너편 뽈록하니 튀어나온 땅끝에 걸터앉은 계원등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해파랑길을 벗어났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긴 밭두렁을 따라 얼마간 걷자 길은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탁 트인 초원이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다. 소봉대를 출발한지 30분만이다. 이국적이다 싶은 풍광의 초원 끝에는 양포항로표지관리소, 계원등대가 자리 잡았다. 보여주는 풍광은 아름답지만 무인등대에다 규모까지 작다보니 등대에 대한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여기서는 등대의 역사나 짚어보자. 등대의 기원은 기원전 280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áro) 섬에 세워진 등대다. 이 등대는 세계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다. 등대가 서있는 파로스 섬은 알렉산드리아와 1km 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대리석으로 이뤄진 등대는 높이가 135m에 이르고 등대 안에는 수백 개의 석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다. 파로스 등대에서 밝히는 빛은 반사경을 타고 50km 밖까지 전해졌으며, 맑은 날에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모습이 반사경에 비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등대는 해양도시의 첫 관문이자 그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지난밤에도 조업을 나간 어선이 길을 잃지 않도록 수초에 한 번씩 깜빡거렸을 등대와 눈을 맞춘 뒤 양포항으로 향한다. 길은 해식애와 갯바위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안가를 따라 나있다. 해식애 너머로는 포항 제일의 미항이라는 양포항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살짝 드러낸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황계마을(계원1)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손재림 문화유산 전시관이 위치한 마을이다. 중풍 치료의 명의로 알려진 한의사 손재림 씨가 폐교를 매입해 화폐와 한의학 등을 모아 만든 전시관이란다.



계원등대에서 1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황계마을의 해안가를 따라 걷다가 엄청나게 큰 소나무가 보여 골목으로 파고든다. 그러자 수령(樹齡)500년이나 된다는 곰솔(1992년 보호수 지정)이 길손을 맞는다. 용수철처럼 몸을 ‘S’자로 잔뜩 웅크린 채로 곧 튀어오를 것 같은 모양새가 일품인 노거수(老巨樹)이다. 저런 모양새, 즉 나무줄기의 뒤틀림이 용처럼 생겼다하여 용송(龍松)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나무는 엄청나게 굵고 무성하다. 몇 해 전의 태풍으로 가지가 많이 부러졌다는데도 저 정도이니 피해를 입기 전에는 얼마나 더 웅장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참고로 곰솔 앞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는 성혈바위란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거북이를 닮았으며, 지름 10~15에 깊이가 8인 구멍들이 뚫려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여기서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에 고인돌이나 민간신앙의 기원을 담아 바위 표면에 새긴 원형의 홈을 말한다.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된 기념물로 추정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트림을 하고 있는 나무줄기의 아래쪽은 여러 가닥의 새끼줄로 묶여있다. 새끼줄의 안쪽에는 반듯하게 접힌 종이뭉치를 끼워 넣었다. 뭔지는 몰라도 신성(神聖)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하긴 저렇게 괴이한 모양으로 자랐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저 표식은 마을에서 당산나무로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물어본 다음 곰솔을 오른편에 끼고 난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신우대 숲 사이를 헤집으며 난 시멘트포장길을 잠시 걷자 탐방로는 또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잠시 후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양포항 1.75/ 두원리 어항 5.1)가 오른편에 보이는 옛 도로로 들어서란다. 길은 할 일을 모두 마친 은퇴자처럼 한가한 풍경이다. 뻔질나게 오가던 차량 대신에 이젠 어망이 그 주인이 되었다. 한쪽에는 마른 어망을 손질하고 있는 주민들도 보인다.



국도를 다시 만나기 조금 전에 또 다른 이정표(양포항 1.4/ 두원리 어항 5.4)를 만난다. 이번 것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로 내려서라고 일러준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탐방로는 이제 방파제를 겸한 축대의 위를 따른다. 그러다가 우린 테트라포드’, 아니 바다 숲 조성을 위해 만든 어초(魚礁)들이 널려있는 곳에서 길을 놓쳐버렸다. 별 수 없이 어초를 우회한 후 자그만 조선소의 작업현장을 통과한다. 남의 사유지로 들어서버린 것이다. 미안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이런 해프닝 또한 이번 구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양포항(포항시 남구 장기면 양포리)‘

계원마을을 출발한지 40분 정도가 지나 해안가 끝자락에 이르니 탐방로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바로 앞에 양포항이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길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양포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양포항으로 들어선다. ‘포항의 미항이라는 애칭이 붙은 양포항은 마리나(marina), 즉 요트나 모터보트 등의 선박을 위한 항구이다. 단순한 요트계류장이라기보다는 상업시설과 관광 기능이 두루 포함된 곳이다. 여름철 해변 산책로에 가로등이 켜지면 캠핑장에서는 고기가 익어가고 바다 공연장에서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떠돌 정도로 유명한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해파랑길의 스탬프보관함은 안내도와 함께 양포복합공원에 만들어져 있다. 이곳 양포항이 해파랑길 12코스의 종료지점이라는 얘기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에는 오늘 걸은 거리가 14.56로 표기되어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들락거리다보니 원래의 거리(13.5)보다 1를 더 걸은 모양이다. 걷는 데는 3시간26분이 걸렸다. 시간당 4를 조금 더 걸었으니 알맞은 속도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