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0코스

 

여행일 : ‘21. 3. 28(일)

소재지 : 강원 삼척시 근덕면 일원

여행코스 : 용화 레일바이크역→용화해변→황영조 기념공원→촛대바윗길→문암해변→초곡해변→원평해변→궁촌 레일바이크역(소요시간 : 7㎞/ 실제로는 10.25㎞를 2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50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해파랑길 가운데 가장 짧은(7km) 코스이다. 해파랑길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구간은 레일바이크를 통한 종주도 가능하다. 그런 이색적인 테마를 살리려다보니 코스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주장이 설득을 얻는 이유이다. 두 방법을 모두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코스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해금강’이라는 애칭까지 얻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용굴·촛대바위길’을 들러보라는 배려를 담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나는 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럴 경우 30코스의 길이가 10㎞ 가까이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용화 레일바이크 역(근덕면 용화리 166)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영덕 방면으로 내려오면 용화교차로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용화초등학교가 ‘해파랑길 30코스’의 출발지이다.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구간안내도와 함께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해파랑길 30코스는 삼척해양레일바이크의 두 정거장(용화↔궁촌)을 잇는 코스라고도 할 수 있다. 30코스가 걸어갔다가 레일바이크를 타고 돌아오도록 설계되었다는 주장의 근원이다. 반면 이 일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용굴·촛대바위길’이 코스에서 빠져있다는 큰 흠이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녀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려면 7㎞의 구간 거리가 9㎞로 늘어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초등학교 정문에서 마을 쪽으로 나오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50m쯤 걸으면 용화교(龍化橋)가 나오는데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우린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용화정거장을 들러보기로 했다. 용화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 잠시 후 ‘삼척해양레일바이크’의 용화정거장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에 놓은 폐철로를 활용해 궁촌에서 용화까지 5.4㎞를 편도로 운행하는 복선형 철길 바이크로 지난 2010년 7월 20일 개장했다. 역사 2동과 휴게소, 건널목, 조명이 연출되는 3개의 터널 그리고 부대시설로 주차장 및 화장실 등을 갖췄는데, 바이크를 타면 1시간여 동안 터널과 해송 숲 등을 거치며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오르막길에선 페달을 밟지 않아도 전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돼 있어 장년층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 레일바이크 정거장을 감싸 안듯이 반 바퀴를 돌자 요런 다리가 놓여있다. 용화천(龍化川)을 가로지르는 철교(鐵橋)에 기대어 내놓은 보행자 전용의 길이다.

▼ 탐방로의 아래로는 ‘용화해변(龍化海邊)’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길이가 1㎞쯤 되는 반달형 모양의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서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수심이 얕은데다 파도도 높지 않아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 휴양객들이 많이 찾기 때문이다. 하나 더. 해변 가운데로 용화천이 흐르는 덕분에 해수욕 후 담수로 몸을 씻을 수도 있단다.

▼ 해변은 반달 모양으로 생긴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모양새이다. 그 양쪽 끝 부분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바다로 돌출되어 있다.

▼ 남쪽 방향의 암석해안을 줌으로 당겨봤다. 바닷가 큼직한 갯바위를 연결시켜 놓은 구름다리가 멋지다.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다리주변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용화해변의 은빛 모래사장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대라고 한다.

▼ 해안을 빠져나와 레일바이크의 철로를 건넌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인데, 선로 출입금지 및 건널목 주의라는 경고판이 눈길을 끈다. 사람의 힘으로 가는 레일바이크일지라도 갑작스런 제동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초소까지 지어놓은 걸로 보아 레일바이크가 운행될 때에는 안전요원이 상주하는 모양이다.

▼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용화정거장에는 빈 레일바이크만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거장 앞에 노후시설물 정비를 위해 운영을 중단(3.26-4.20)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덕분에 필요 없는 고민이 시작됐다. 비어있는 선로를 따라 초곡리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가뜩이나 짧은 30코스(7㎞)를 더 줄인다면 뭐가 남겠는가.

▼ 철로를 건너면 용화리의 마을안길이다. 길가는 온통 펜션 천지이다. 이곳 용화해변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마을을 벗어나 뒤편 언덕으로 오르면 탐방로는 이제 옛 국도(7호선)를 따른다. 아니 정확히는 ‘동해안일주 자전거길’이다.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에다 파랑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해놓았다. 그렇게 14분쯤 걷자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 정자에 오르면 용화해변과 장호해변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 길 건너 산자락에는 ‘말굽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 이곳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신성시하던 성황당이 있어 지체 높은 양반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단다. 행여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를 넘을 경우 말의 발톱이 굽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말굽재’라는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유이다.

▼ 옛 국도변을 걷는 이 구간의 특징은 조망만이 아니다. 길가에서 피어난 꽃들로 인해 심심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매화꽃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함께 걷던 이는 벚꽃이란다. 꽃잎의 중간이 갈라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매화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꽃자루가 긴 것하며 한군데서 여러 송이의 꽃이 피어나는 것은 벚꽃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에라 모르겠다. 모름지기 꽃이란 아름다우면 그만 아니겠는가.

▼ 홍매화라 여겨 찍은 요것도 아니란다. 마을에서 쫓겨난 ‘복숭아’. 그중에서도 ‘개복숭아’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버림받은 나무가 산자락에서 터를 잡았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맞다. 우리네 조상들은 복숭아가 벽사(僻邪)의 기능이 있어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복숭아나무가 집안에 있으면 조상신(祖上神)이 집으로 올 수 없다하여 울타리 안에 심지 않았다고 한다.

▼ 개나리는 아예 사방에 널렸다. 도로를 내면서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탓일 게다. 그렇다고 해서 지겹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로 시작되는 윤석중의 ‘봄나들이’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데 어찌 지겨울 수가 있겠는가. 이왕에 시작했으니 하나 더 알고가자. 우리네 조상들은 개나리의 열매를 연교(連翹)라 하여 한약재로 써왔다고 한다.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올리는 탕제로 처방했을 정도라니 이보다 더 귀한 약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 그렇게 15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해파랑길 30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초곡항’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마을의 두 자랑거리인 ‘용굴·촛대바위길’과 ‘황영조기념공원’이 있음을 알리는 입간판을 초입에 세워놓았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참! 갯바위 사진도 눈에 띄었는데, 그게 ‘삼존미륵불’이라는 것은 마을을 벗어나면서 알 수 있었다.

▼ 옛 국도와 포구 진입로 사이에는 널찍하니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각의 정자 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그저 새참으로 준비한 막걸리나 마시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모처럼 선두대장을 탈피한 윤대장처럼 말이다.

▼ 초곡항으로 내려가는 길은 벚꽃이 장식했다.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힌 자태가 자못 빼어났지만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다. 일본의 나라꽃으로 도배된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벚꽃이 비록 일본의 국화(國花)이긴 하지만 그 원산지는 한국이라면서 말이다. 과거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일본 벚나무’의 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왕벚나무를 가져가서 개량해서 그네들의 국화를 만들었고, 실제 우리가 아름답다며 사방에 심고 있는 벚나무들이 왕벚나무가 아닌 그네들이 개량해 놓은 종자라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왕에 그런 항변을 하고 싶다면 우리네 손으로 개량한 품종을 더 널리 심고 난 뒤에 했으면 좋겠다.

▼ 조금 더 내려가니 진행방향의 언덕에 ‘오륜기’가 또렷하다. 1992년에 열렸던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를 재패한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 마을에 조성한 ‘황영조 올림픽기념공원’이다. 선수 개인의 인간승리 과정과 우승의 감격을 기리는 한편,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용기와 꿈을 심어주자는데 착안했단다.

▼ 공원으로 올라가기 전에 185.2m 길이의 ‘황영조 터널’부터 먼저 둘러봤다. 해양레일바이크 구간에 설치된 3개의 터널 가운데 하나로 마라토너인 황영조의 특징을 살렸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바이크의 스피드도 덩달아 빨리해보는 콘셉트로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 ‘Wonderful 삼척’이라고 적힌 전광판이 눈길을 끈다. 그 뒤로는 여러 색깔의 조명으로 터널을 꾸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가 달리는 모습을 이미지화했다는데 예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휘황찬란하다는 느낌뿐이었다. 참고로 3개의 터널 가운데 나머지 두 곳은 터널 내부를 색색갈의 조명으로 꾸며 놓아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는 ‘축제의 터널(309.8m)’과 각종 레이저 쇼와 함께 바다의 생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꾸민 ‘신비의 해저터널(1014m)’이다.

▼ 언덕에 오르자 3층으로 지어진 ‘황영조 기념관’이 먼저 반긴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22세의 나이로 우승한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1층과 2층은 전시실, 그리고 3층은 휴게실로 꾸며졌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결승선을 통과하는 영광의 장면은 물론이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에게 수여된 고대 그리스의 청동 투구도 만날 수 있으니 꼭 들어가 볼 일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 연락처부터 적으란다. 체온 측정이라는 코로나가 낳은 관문도 거쳤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1층은 두 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제1전시실은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을 제패하기까지의 성장과정과 훈련과정 등을 소개하는 각종 사진 자료, 그리고 제2전시실은 올림픽 우승 당시의 기념사진과 각종 마라톤 대회 참가 사진·물품·영상물을 전시했다. 2층으로 오르면 ‘세계 마라톤 역사관’과 ‘마라톤 체험관’을 만날 수 있다.

▼ 이젠 공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황영조 올림픽마라톤 세계제패 기념상’. 그 앞에는 시상대가 놓여있다. 세계를 재패한 황영조가 저 시상대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섰다는 표현일 것이다. 맞다. 당시 우리는 너나없이 지구의 반대편에서 들려온 낭보에 가슴벅차했었다.

▼ 그 뒤편에는 작은 집을 지어놓았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뚫린 구멍을 통해 황영조의 집을 찾아보란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황영조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저 마을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숨은 그림 찾기’인 셈이다.

▼ 힌트가 없어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어느 탐방기가 생각나 카메라의 줌부터 당겨봤다. 그러자 오륜기가 선명한 황영조의 집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미리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오륜기’라는 힌트는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 잔디밭의 끄트머리. 조망이 툭 터진 곳에는 황영조가 달리고 있는 형상을 새긴 조형물을 배치했다. 새처럼 빨리 달려 세계를 재패했다는 것을 암시나 하려는지 황영조의 뒤를 새가 따르고 있는 그림이다. 조형물 옆에는 도종환 시인이 황영조를 위해 쓴 ‘그는 파도처럼 달렸다’라는 시비(詩碑)가 있었다. 죽음과도 같은 몬주익 언덕을 넘어올 때 초곡리 파도가 그의 등을 떠밀었단다.

▼ 6년쯤 전인가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둘러보았던 ‘몬주익 언덕(Montjuïc Hill)’이 생각나 사진을 올려본다. 올림픽 주경기장 앞. 황영조선수가 일본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나섰음직한 언덕길에 조성되어 있는데, 한국 교민들은 ‘황영조 공원’이라 부른다고 했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상(像)과 풋프린팅(foot printing)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경기도와 바르셀로나가 상호 협의하여 조성했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경기도에서 세웠을까? 황영조는 강원도 출신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곳 교민들이 강원도에다 건의를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경기도에 부탁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강원도로서는 좋은 홍보 기회를 놓친 셈이다.

▼ 초곡항으로 내려서자 ‘풀 반환점(21.0975㎞)’이라고 적힌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황영조 선수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삼척 황영조 국제마라톤 대회’의 반환점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삼척 시내의 ‘엑스포광장’을 출발해 한치터널과 맹방·궁촌을 차례로 거친 다음 반환점인 이곳 황영조 마을을 찍고,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국제 공인코스(42.195㎞)이다. 25회 대회까지 매년 개최되어왔으나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대회가 취소되었다.

▼ 반환점 조형물 뒤는 초곡항(草谷港)이다. 레일바이크의 출발점인 궁촌해변과 어촌체험마을로 유명한 장호항 사이에 다소곳하게 자리한 작은 항구이지만, 예로부터 양양 남애항·강릉 심곡항과 함께 강원도의 미항으로 손꼽혀왔다. 독특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인근 해안이 절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지역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육로로는 다가설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규제가 풀리면서 해안절벽을 잇는 탐방로가 개설됐고,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명품 관광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참고로 ‘초곡(草谷)이란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연마을인 사일과 문암을 합쳐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사일(沙日) 또는 사곡(沙谷), 문암(門岩), 원평(院坪), 매리방(梅里芳), 희동(希洞), 개삼평(開三坪) 등의 단위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단다.

▼ 방파제 끄트머리로 나가자 초곡항 유일의 등대가 반긴다. 대부분의 항구는 2개의 등대를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빨강등대는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돼 항구가 왼쪽에 있음을 알린다. 하얀색 등대는 그 반대다. 그런데도 초곡항에는 하얀색 등대 하나뿐인 것이다. 그만큼 작은 항구라는 증거일 것이다.

▼ 탐방로는 초곡항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우린 직진했다. 초곡항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어준 ‘용굴·촛대바위길’을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직진하면 어판장을 지나자마자 탐방로의 입구가 나오는데, 일요일이어서인지 가족단위 탐방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예년 같으면 탐방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빌 터인데,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비교적 한산한 편이란다.

▼ 탐방로의 끄트머리인 ‘용굴’까지는 660m의 데크길이 짙푸른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그 길에 올라서자마자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제1전망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깎아지른 갯바위. 아니 날카롭게 솟아오른 작은 바위섬의 맨 꼭대기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었다.

▼ 전망대에 오르자 주변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굴·촛대바윗길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싶으면 제1전망대에 올라보라던 어느 기사가 이제 이해가 간다. 참고로 해안절벽을 잇는 저 탐방로는 지난 2019년 개장했다. 끝자락인 용굴까지 데크로드가 짙푸른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데, 촛대바위와 거북바위, 피라미드바위, 사자바위, 용굴 등 독특한 지형이 늘어선 해안 절경이 주요 볼거리이다.

▼ 망망대해의 동해와 함께 문암해수욕장도 한눈에 담긴다. 이곳 초곡항 앞바다는 자연산 문어와 전복 등의 주요 서식처라고 한다. 그런 해산물들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의 해녀들이 건너왔는데,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어머니 역시 제주 출신의 해녀였단다.

▼ 제1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드넓은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은 지점(‘광장 1’이라는 사람도 있었다)을 만나게 된다. 푸른 바다를 유영하는 고기를 형상화했다는 원형 테두리 안에다 포인트를 맞추면 동해의 푸른 바다가 가득 담겨온다.

▼ ‘광장 1’에 이어 나타나는 ‘광장 2’를 지나자 이번에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움푹 들어간 절벽 사이로 연결된 56m 길이의 현수교로 용굴·촛대바위길의 명소로 이미 자리 잡았다.

▼ 다리를 건넌다. 기대와는 달리 흔들림이 심하지 않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보무당당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중간의 바닥에는 강화유리를 깔아 11m 아래의 일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약간의 스릴을 맛볼 수는 있었다.

▼ 탐방로는 다리이다. 철제 교각(橋脚)에다 상판은 나무를 얹었다. 교각을 세우지 못하는 곳에는 잔도(棧道)를 만들었다. 수직의 험한 벼랑에다 선반을 매달 듯이 아슬아슬하게 길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받침대를 넣고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깐 중국의 잔도와는 달리, 곳곳에 철제 기둥을 세워 안전도를 많이 높였다.

▼ 탐방로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촛대바위’이다. 하지만 촛대바위가 선을 보이기도 전부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하긴 이 일대의 애칭인 ‘해금강’이 어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겠는가.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바위들이 그만큼 많이 널려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촛대바위와 거북바위를 살펴볼 수 있는 ‘제2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개개의 바위를 설명해놓았는데 그저 읽어보는 것만으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에다 실물을 맞춰보라는 얘기이다. 촛대나 사자, 피라미드 등 기암괴석들이 또 다른 의미 다가올 것이다.

▼ 전망대 맞은편 파도가 넘나드는 곳에는 바람이 세게 불면 곧 부러질 듯 곧추선 ‘촛대바위’가 있다. 용굴·촛대바위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상징물로 이 바위의 이름이 곧 탐방로의 이름이 되었다. 참! 옆에 있는 세모꼴의 바위를 보고 ‘피라미드바위’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피라미드바위는 거북이바위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요리조리 뜯어봐도 도대체 촛대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끝이 뾰족한 것도 아니고 뭉툭한데 어딜 봐서 촛대를 닮았다는 말인가.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육십 평생을 살아왔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미천하기만 한 모양이다.

▼ 촛대바위의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거북이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거북이를 닮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일행 한 분이 바위의 맨 꼭대기를 살펴보란다. 맞다. 그의 말대로 거북이 한 마리가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안내판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예로부터 잡귀를 쫓거나 간절한 소망을 빌 때 자주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라면서 두 손을 모아 거북이에게 소원을 빌어 보라고 권한다.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덕담도 빼놓지 않았다.

▼ 탐방로 주변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이 일대의 바위들은 ‘추암 촛대바위’ 군(群)과 함께 조선 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라고 한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 일대는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단다.(두산백과에서 발췌 정리했다)

▼ 탐방로의 맨 끄트머리에도 전망대를 배치했다. ‘용굴 촛대바위길’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용굴’은 물론이고 이사부의 전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자바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일류의 조망대이다.

▼ ‘용​굴’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굴이다. 안내판은 작은 고깃배가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고 적고 있었으나 배를 타지 않았으니 들어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용굴에 대한 전설을 옮겨본다. <먼 옛날. 바닷가에 살던 어느 가난한 어부가 죽은 구렁이가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꿈을 꾸었다. 이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부에게 말하기를 ‘죽어있는 구렁이를 가져가 초곡리에서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배를 타고 나가 보니 정말 죽은 구렁이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게 아닌가? 어부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되새기며 지금의 용굴로 끌고 와 정성껏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죽었던 구렁이가 살아나 굴속으로 들어가더니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이런 괴이한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 어부에게는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되어 얼마 후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단다.>

▼ 해안 절벽 중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사자바위’라고 한다. 수사자가 절벽에서 머리를 내밀고 동해를 바라보는 형상이란다. 안내판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 실직주의 군주였던 이사부가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서 항복을 받아낸 역사의 한 토막을 적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이사부가 만들었다는 사자가 저 바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반문을 덧붙인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촛대바위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앞에 있는 바위는 아까 거론했던 ‘거북이바위’이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아까와는 많이 달라졌다. 작년 봄 이집트의 기자지역에서 만나보았던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것이다. 안내판도 ‘피라미드바위’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집트에서 옮겨다 놓은 것 같다는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 포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지도를 보면 이 길은 문암해변과 초곡해변, 원평해변을 거쳐 궁촌항으로 간다. 하지만 이름만 놓고 보면 헷갈리기 딱 좋다. 초곡항을 금방 빠져나왔으니 초곡해변이 제격이련만 난데없이 문암해변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이 해변을 거쳐야만 초곡해안에 이른다. 참고로 해파랑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용굴·촛대바윗길’을 돌아보는 데는 35분이 소요됐다. 거리는 2.1㎞. 물론 등대까지 다녀온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 초곡항의 북쪽 방파제 초입. 석문(石門)처럼 생긴 바위가 특이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항구를 지키는 수문장이라도 되는 듯이 들머리의 양옆을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 모퉁이를 돌아 ‘문암해변’으로 들어서자 세은정사에서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삼존미륵불’이라는 이름과 함께 갯바위 사진을 게시했다. 까마득한 옛날 지질활동으로 생성된 바위에다 세은정사라는 절간에서 미륵불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 바닷가로 눈을 돌리자 조금 전에 들렀던 용굴·촛대바위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존미륵불’로 조금 전에 거론했던 바위이다. 하지만 내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미륵불의 형상이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맞다. 온갖 이름을 끌어대고 의미를 더해도 군더더기일 뿐, 이 길의 주인공은 역시 바다다.

▼ 문암해변에 이어 나타나는 초곡해변. 두 해변은 육안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두 해변은 거의 3km에 육박하는 기다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래사장 바로 옆길로는 가지 못한다.

▼ 조금 전에 만났던 ‘미륵삼존불’ 안내판을 세운 ‘세은정사를 지나 굴다리를 통과하자 탐방로는 다시 옛 국도로 올라선다. 초행객들을 위해선지 촛대바위길과 문암해변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입간판을 들머리에 세워놓았다.

▼ 초곡항을 출발한지 13분. 국도에 올라서자마자 ‘초곡휴게소’에 이른다. 양쪽 역(궁촌과 용화)에서 동시 출발한 레일바이크가 중간에서 만나는 곳으로 간단한 식음료를 판매한다. 휴게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변풍경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조각품을 세워 쪽빛 바다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이후부터는 옛 국도를 따른다. 오른편은 해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반해 왼편은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한국은 세계 최강을 향한 현재 진행형‘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실감나는 풍경이라 하겠다. 제조업이 없는 세계 최강은 사상누각이고, 그 제조 산업은 원활한 물류가 받쳐주어야만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류의 기본인 도로건설이 이곳에서도 한창이라는 얘기이다.

▼ 15분 조금 못되게 도로변을 따르던 탐방로가 갑자기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오른편에 보이는 울창한 해송 숲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비록 잠시이지만 레일바이크의 선로를 따라서 걷는다. 운행이 중단된 레일바이크 선로는 텅 비어있다. 덕분에 우린 선로 위를 걸어볼 수 있었지만, 반면에 환호성과 함께 즐거워하며 열심히 페달을 밟는 레일바이크 행렬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 바닷가로 내려서거나 또는 솔숲을 걸을 수도 있다. 이때 만나는 솔숲은 운치가 있어 참 좋다.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넘겼을 법한 곰솔(해송)들이 바닷가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비보 숲이라도 되는 양 바닷가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 강태공인 듯 세월을 낚고 있는 낚시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뒤로는 전형적인 삼척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맞다. 삼척은 산다운 산, 바다다운 바다를 품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삼척에서 만나는 창망한 동해바다는 어딜 가나 쪽빛으로 일렁이고, 백두대간과 맞닿은 산줄기는 기운차고 늠름하다. 그 산과 바다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곧바로 기세등등한 산줄기가 시작된다. 고개를 들 때마다 눈이 상큼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 군함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재활용품으로 만들었다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레일바이크의 선로가 지난다. 참고로 레일바이크는 복선으로 꾸며져 있었다. 덕분에 궁촌정거장과 용화 정거장에서 동시에 출발하게 되는데, 이때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과 반가운 손짓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나 더. 반대편 정거장에서 내려 돌아올 때에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단다.

▼ 탐방로는 ‘그라시아 리조트’ 앞에서 원평해변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궁촌마을(宮村里)’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마을 이름인 ‘궁촌’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해서 '궁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국가어항을 갖춘 이 마을은 관광 및 해양스포츠 장소로 복합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 원평해변과 궁촌마을의 사이를 흐르는 ‘추천(楸川)’의 냇물은 철다리를 이용해 건넌다. 궁방산과 한우봉 아래서 발원하여 궁촌리와 매원리 사이를 지나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이다.

▼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자못 빼어나다. 궁촌항의 방파제 뒤편으로 보이는 바위섬은 이곳 궁촌마을을 어촌체험마을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바다낚시는 물론이고 스노클링 또는 투명카누를 체험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단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동통신사의 안테나가 세워진 산줄기의 왼편에는 공양왕 삼부자의 묘가 있다. 참! 공양왕의 왕릉이 하나 더 있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전문가들조차도 어느 쪽이 진짜라고 확단하지 못한다지만 고양의 묘역은 사적(제191호)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날머리는 삼척해양레일바이크 궁촌 정거장(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46-10)

해안가 도로를 아주 짧게 걷다가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옛 국도(7호선)의 도로변에 자리 잡은 궁촌 레일바이크 역에 도착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역사 입구의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트레킹을 마치면서 확인해보니 오늘은 총 2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0.25㎞를 찍고 있다. 용굴·촛대바위길 등 눈요깃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정규코스보다 3㎞나 더 걸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볼거리들이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관광지의 가장 큰 매력은 그곳의 풍광을 담은 기념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삼척 해양레일바이크’의 역사(驛舍), 그러니 상징 조형물 하나쯤 어찌 만들어놓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