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2코스

 

여행일 : ‘20. 6. 6()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과 현북면 일원

여행코스 : 죽도해변(5.4)기사문항(2.8)하조대(1.4)하조대 해수욕장(소요시간 : 9.6, 실제로는 11.8/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죽도해변에서 시작해 동산해변과 잔교해변, 기사문해변을 거친 다음 하조대해변에서 끝을 맺는 양양의 두 번째 구간으로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비교적 짧은(9.6)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간은 특별히 가슴에 담아 둘만한 풍경은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들르게 되는 하조대가 이 모든 걸 상쇄시켜 버리고도 남는다. 기암괴석과 노송들로 이루어진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68)‘으로까지 지정되었겠는가. 또 하나, ’국군의 날제정의 근거가 된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38선 휴게소도 그냥 지나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들머리는 죽도 해변(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17-1)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양양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양양·속초 방면으로 달리다가 시변리삼거리(양양군 현남면 두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트레킹 들머리인 죽도해변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죽도 오토캠핑장의 담장에 세워놓았다. 참고로 이곳 죽도해변은 서퍼들의 메카로 알려진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 입문자뿐만 아니라 중·상급자들에게도 최상의 물살로 인정받고 있단다. 양양군에서는 이들을 위한 공간인 서핑 스파 라운지도 만들어 놓았다. 돔하우스 78m²와 스파시설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퍼들이 서핑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는 휴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단다.

 

 

 

남북으로 뚫린 해안도로를 북쪽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쪽 옆구리에 죽도해변을 끼고 걷는 셈이다. 아니 정확히는 오토캠핑장을 끼고 걷는다. 왼편은 상가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여행자 숙소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데, 내걸은 간판마다 ‘surf’라는 문구를 넣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서퍼들의 메카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자 나지막한 동산이 나오는데, 부부 시인인 김귀녀·김내식의 시 두 편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 동산의 도로 쪽 면에도 불망선정비 6기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하지만 이 동산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양양지구 전투 초전 충혼비''UN 태국 해군 참전 기념탑'이다. 6.25전쟁 당시 강원도 지역방어에 힘쓴 8사단을 추모하고, 8사단 초전 전투(50. 6.25~6.27)에서 전사한 전몰장병 748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가 양양지구 전투 초전 충혼비이고, ‘유엔 태국 해군 참전 기념탑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쌀 4t을 지원키로 하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한국전 지원 의사를 밝힌 태국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이다. 당시 태국은 보병 1개 대대와 군함 9, 수송기 편대 등 연인원 15천여 명이 참전해 전사 136, 실종 4, 부상 1139명의 피해를 입었다. 태국의 군함 쁘라새함이 한때 양양 해변에서 좌초되었다고 하던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지 않았나 싶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동산을 오른편에 끼고 해안가로 나간다. 그리곤 데크 탐방로를 따라 동산항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다가 동산항 입구의 ‘7번 국도진입로에서 동산해변으로 내려섰다. 이어서 해송 방풍림 사이로 내놓은 데크 탐방로를 따른다.

 

 

해변에 조성해놓은 캠핑장은 가족단위의 캠핑족들이 쳐놓은 텐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모래사장이 텅 비어있어 전체적으로는 한적한 풍경이다. 양양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해변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캠핑장 한켠에는 조각가 '표찬용'환영(幻影) 바다를 넘다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도를 타는 서퍼의 형상인데 이는 서핑 명소인 동산해수욕장의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또한 바다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나타내는 파도를 승리를 나타내는 V자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동산해변(洞山海邊)에서 바라본 죽도방향 해안이다. 하나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로 보아 죽도해변과 동산해변을 하나의 해변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동산마을을 지나면 또 다른 동산해변이 나오니 이곳은 죽도해변이라 부르는 게 옳을 것 같다.

 

 

마을 복지회관과 어촌계 펜션을 지났다 싶으면 '동산항(洞山港)'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동산항은 작은 어선들 십여 척이 정박되어 있는 한적한 포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동산항은 특별한 볼거리를 갖고 있다. 2013년 초에 개봉됐던 박신양, 김정태 주연의 영화 박수 건달중 무당이 굿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저 바위, 그러니까 둥글면서도 괴이한 저 생김새가 영화 제작진들을 불러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탐방로는 명문펜션 앞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편은 동산항의 방파제로 연결되니 주의한다. 이어서 영락없는 여염집, 그것도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동산암(東山庵)'을 지나면 동산마을이다. 아니 동산마을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동산항에서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동산해변까지를 아우른다. 참고로 고구려 때 이곳은 혈산현(穴山縣)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신라 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동산리(洞山里)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해당화, 용수골 등이 있다.

 

 

마을 끝자락에서 바라본 동산해변이다. ’Kakaomap’에서는 포구 옆의 해변과 이곳을 모두 동산해변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두 해변은 모래사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 모래사장은 북쪽 복분리해변과 함께 쓰고 있는 모양새이다. ! 동산해변은 일출 명소로 손꼽힌다. 해변의 끝자락에서 바다를 향해 뛰쳐나간 갯바위들에다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해를 집어넣을 경우 개인전에서나 볼 법한 멋진 사진이 태어나기 때문이란다.

 

 

동산해변에서 바라본 북쪽 복분리 해변(北盆里 海邊)’ 풍경이다. 두 해안의 모래사장은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아니 중간에 작은 개울이 지나가고 있으니 구분된다고 우길 수는 있겠다.

 

 

다시 도로로 돌아와 탐방을 이어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조개굽는 마을' 표지석 앞을 지난다. 동산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겠거니 하고 카메라에 담아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흥수산이라는 수산물 공급업체의 홍보용 빗돌이었다. 각종 조개들을 도매가로 여행객들에게 팔고 있다는 것이다. ‘동해안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이용 조개를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걸고 말이다.

 

 

​▼ 이어서 탐방로는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른다. 이는 해파랑길 42코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코스의 대부분이 자전거길을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왼편에 ‘7번 국도’, 그리고 오른편에는 울창한 솔밭을 끼고 이어진다. 그러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바닷가로 나가더니 복분리해변(北盆里 海邊)’과 마주한다. 동산항을 나선지 18분 만이다. 백사장 길이가 350m에 이르는 복분리해변은 수심이 얕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는 다른 곳에다 포커스(focus)를 맞췄다. 이곳의 자랑거리인 소나무 숲속에 솔밭 야영장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래선지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다 숲속에서 노닐고 있었다.

 

 

해변 끝에서 왼편으로 휘어져 나가 ‘7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복분리마을표지석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복분리 경로당이 보인다. 이 일대의 길가에는 꽃양귀비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었다. 재배가 금지된 양귀비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붉디붉은 색갈이 너무나 예쁘다. 지자체에서 조경용 씨앗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안길이 끝나갈 즈음 효원재(曉園齋)’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독특한 외모의 건물을 만난다. 담벼락에 건축에 대한 이력이 적혀있었으나 이 역시 건물의 정체는 밝히지 않는다. 다만 맞은편 건물이 원불교의 표식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 원불교와 관련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임도처럼 산자락을 누빈다. 덕분에 이 구간에서는 금강소나무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탐방로는 또 다시 ‘7번 국도와 만난다. 그렇다고 국도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국도 직전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가면 훼밀리 휴게소가 나오니 주의하자. 아무튼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복분교다리를 건너 잔교리 해변으로 연결된다. 자전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해파랑길은 7번 국도를 건너도록 설계되어 있다. 횡단보도가 나있지만 신호등이 없으니 오가는 차량들을 살펴가며 건너야 하는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참고로 복분리해변에서 이곳까지는 20분이 걸렸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해난 어업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해상 조업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 실종된 어업인의 넋을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1995년에 세운 탑으로, 매년 510일 위령제가 개최되며, 107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단다.

 

 

위령탑의 왼편은 잔교 해변(棧橋海邊)’이다. 38선 휴게소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백사장이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주변에 숙박업소나 상가가 없어 한적하지만 화장실 등 부대시설은 물론이고 해송 사이로 야영장이 갖춰져 있어 피서를 즐기기에 딱 좋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상용(최다니엘)이 희중(이민정)에게 사랑을 고백한 장소가 바로 여기다.

 

 

잔교해변에 있는 무궁화동산을 들르도록 되어 있는 해파랑길을 버려두고 국도로 되돌아와 자전거길을 따른다. 핸드폰 앱이 길을 벗어났다며 경고를 보내오지만 내 신뢰는 선두대장의 경험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까짓 진교해변쯤이야 조금 전 위령탑에서 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국도를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걷다보면 진교해변에 조성된 무궁화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경찰전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양양·속초 지역은 수많은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이 지역의 25개 격전지에서 32명의 경찰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자 충혼비라고 한다.

 

 

경찰과의 인연 때문인지 탑의 오른편에다 각종 도로교통 관련 표지판들을 세워놓았다. 도로를 내었는가 하면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배치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교통안전 교육장일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탐방로는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대부분이 소나무, 그것도 나이 든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가슴속까지 상큼한 기운이 스며드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데, 문득 이곳 잔교리국군의 날제정의 토대가 된 마을이라는 것이 생각난다. 1945년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졌고 뒤이어 5년 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연합군은 한때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북진을 거듭하게 된다. 이 무렵 유엔에서 연합군 측에 38선을 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단다. 연합군이 머뭇거렸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에 북진 명령을 하달했고 국군 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잔교리의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다. 그날이 1950101일이었고 현재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한 것이다.

 

 

숲속으로 길이 나있다보니 간식거리도 눈에 띈다. 새콤달콤한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이런 산딸기 밭은 하조대 인근에서 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탐방로는 육교를 이용해 7번 국도를 건넌다. 아이디어를 담은 대형 광고판이 눈길을 끌게 만드는 멋진 다리이다. ‘말이 돼? 양양 서핑도 안 해보고!’ 이곳 양양이 대한민국 서핑의 메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담을 수 있는 문구가 있을까 싶다. 반대편에는 파도를 탄다. 행복을 탄다라는 문구와 함께 서핑을 하러 바닷가로 나가는 어느 가족의 사진까지 넣었다.

 

 

육교를 건넜다싶으면 곧이어 삼팔선휴게소가 나온다. 널따란 광장에는 이곳이 삼팔선임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38표지석)과 함께 삼팔선 숲길(38)’디모테오 순례길(18)’이 그려진 ‘38숲길 노선도그리고 ‘38선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미·소 양국이 군사경계선으로 그어놓았다는 38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38선 표지석에 적혀있는 내용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1988년 처음으로 세워질 당시만 해도 이 빗돌이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15km 떨어진 3·8휴게소 광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수를 겸해서 2001년에 이곳으로 옮겼단다. 그렇다면 이곳이 38선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처음 세울 때 자리를 잘못 잡았던지 말이다. 그건 그렇고 38선이 그어질 당시 잔교리는 마을 중심을 흐르는 잔교천(38선천)을 경계로 북쪽 능선에는 소련군 초소가, 남쪽 능선에는 아군 초소가 설치되어 한마을이 불시에 양단되었다고 한다. 이 결과 혈육이 생이별하였음은 물론이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단다.

 

 

휴게소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갯바위들이 널린 남쪽바다에는 푸른 숲을 머리에 인 작은 바위섬이 떠있다. ‘조도라는 섬인데 하늘과 경계를 나누지 못하는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북쪽 방향의 그림 속에는 잠시 후 들르게 될 기사문항들어있다. 양양의 특산물인 송이버섯 모양으로 생긴 등대가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펼쳐놓은 술상에서 소주 두어 잔 얻어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진교천을 가로지르는 삼팔선교를 건너니 기사문항(基士門港’)의 입구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얼굴을 내민다.

 

 

잠시 후 ‘38해변이라고도 불리는 기사문해변에 이른다. 백사장을 걸으면 사박사박 소리가 난다고 해서 새소리 오()’자를 넣여 오사(嗚沙)’라고도 불리는 해수욕장이다. 이곳도 서퍼(surfer)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윈드 파인더 기준 최대 3m까지 라이딩 가능한 파도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서퍼가 아니라 산소통을 짊어진 스쿠버 다이버(scuba diver)’들이였다. 10여 명이 모터보트에 올라타는 걸 보면 이 근처에 멋진 다이빙 포인트라도 있는가 보다.

 

 

몇 걸음 더 걷자 기사문항에 이른다. 정주 어항이라고 해서 작고 한적한 포구인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다. 먼 바다는 나가지도 못할 크기지만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수도 많다. 거기다 물고기를 닮은 어촌계 활어센터도 버젓이 갖고 있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안이 텅 비어 있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 기사문리(基士門里)는 원래 내외부락으로 나뉘어 초진기사진으로 불리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 기사진을 기사문리로 개칭했단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담벼락에 벽화가 가득하다. 한복을 입은 군중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뭔가를 외치고 있는 그림이다. 1919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현북면 주민들이 이곳 기사문리에 있던 주재소를 공격하려고 했다더니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런 그림을 그려 넣었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국도의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른다. 잠시 후 만세고개에 오르자 ‘3·1만세운동 유적비(三一萬歲運動遺蹟碑)’가 국도 너머에 세워져 있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겁나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태극기가 새겨진 타원형의 저 빗돌 기단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좌우의 작은 빗돌에는 '만세고개의 유래'와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단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은 이곳 현북면을 비켜가지 못했다. 박규병(朴奎秉원병(元秉) 형제와 임병익(林秉翼오정현(吳鼎鉉) 등이 주도했는데, 47일의 첫 번째 만세시위에 이어 49일에 다시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이 관고개(關峴지금의 만세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때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군경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선두에 섰던 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단다.

 

 

국도를 따라 걷다가 하조대 교차로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하조교 앞 사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광정천의 천변도로를 따른다. 다리 앞에 세워놓은 하조대 표지석에 방향표시까지 되어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겠다.

 

 

그렇게 20분 남짓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물론 기사문항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42코스 종점인 하조대 해변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양양팔경의 다섯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명승지 하조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마침맞게 해파랑길도 하조대를 다녀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조대의 정문이랄 수 있는 아치형 대문으로 들어서는 이유이다.

 

 

5분쯤 걸었을까 나지막한 언덕 위에 벤치 하나가 놓여있다. 뭔가 볼거리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일단 오르고 본다.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깔고운 모래사장이 하늘과의 경계를 못 만드는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 그림의 정점은 물론 백사장의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조대의 자랑거리 기암괴석들이다.

 

 

몇 걸음 더 걸으니 이번에는 군휴양소의 입구(이정표 : 하조대 둘레길/ 군휴양소)가 나온다. 하조대 스카이워크로 가는 둘레길이 이곳에서 나뉘니 꼭 기억해 두자. 여기까지 와서 하조대의 또 다른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스카이워크는 올라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 더 걷자 하조대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그 옆에는 하조대의 또 다른 명물인 등대카페가 똬리를 틀었다. 너와지붕의 형태를 한 독특한 외관 말고도 차 맛과 조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고 해서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란다. KBS `12`에서 방문했을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이곳에서는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하조대정자가 나오고, 왼편은 무인등대로 이어진다.

 

 

먼저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 68하조대(河趙臺)’부터 찾고 본다.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전망대라고나 할까? 그런 하조대에는 현재 육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정자의 이름 또한 하조대이다. 정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조 때 재건됐다가 1939년에 육모정자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6때 무너진 것을 1955년 다시 지었고, 1998년의 해체·복원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 안에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과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쓴 두 편의 시가 걸려 있으며, 정자 입구에 있는 두 개의 하조대각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세근(李世瑾, 1664-1736)이 썼다고 한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하조대는 일종의 전망대이다. 육지가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나와 바다와 만나는 지점, 천길 절벽의 위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압권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기암괴석과 만경창파를 주제로 한 풍경화가 그려지고, 먼 바다에서 밀려온 높은 파도는 절벽을 때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가히 국가 명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그런 절경 가운데서도 백미는 단연 애국송(愛國松)’이다. 이 소나무는 바닷속에서 금방 솟아 나온 듯한 기암(奇岩) 위에서 자라고 있다. 크거나 굵지는 않지만 수령은 무려 25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애국송이란 이름은 수년전 애국가 영상 화면에 이 소나무 뒤로 떠오르는 일출이 소개되면서 붙여졌단다.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관광안내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하조대 등대로 향한다. 해송과 바위 사이로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라 잠시 걷자 새하얀 무인등대가 나온다. 등대도 역시 바다를 향해 손가락처럼 뻗어나간 끝자락, 바위 절벽의 위에 지어져 있다. 그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좌우의 기암절벽과 함께 망망대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등대의 입지로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등대 부근의 풍광도 역시 장관이다. 사실 아름답지 않은 동해안 풍경은 없다. 하지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가 기암절벽을 둘러싸고, 소나무 사이로 동해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경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래선지 젊은이들의 감성 사진 포인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단다. ! 이곳 역시 일출 명소로 꼽힌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군휴양소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하조도 둘레길을 따른다. 하조도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은 스카이워크로 연결되는 탐방로인데 지난해(2019) 봄에 개장했다. 군 경계지역이라서 철조망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밖에 새로 놓은 데크는 기껏해야 200m 남짓이다. 하지만 동해안의 융기가 빚어낸 기암괴석을 구경하며 걷는 기분 좋은 길이다. ! 이 둘레길은 시간을 정해놓고 개방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겨울철에는 일출 30분 전부터 오후 5, 여름철에는 일출 전부터 오후 8시까지 개방한단다.

 

 

지난 2012년에 개방한 하조대 스카이워크 전망대는 하조대의 새로운 관광명소이다. 전망 좋은 정자등대로 유명한 하조대’.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 이곳 스카이워크를 합해 하조대의 삼대 전망대로 꼽아도 나무랄 일은 아닐 것 같다. 기암절벽이 주를 이루는 주변 경관도 빼어난 편이다. 거기다 등대를 닮은 독특한 외모도 눈요깃거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카이워크의 재미는 투명유리 위를 걷는 것이다. 행여 유리라도 깨질세라 가슴조리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일품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곳 하조대 스카이워크는 높이가 썩 높지 않아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철썩이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양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이를 상쇄시켜 준다.

 

 

전망대답게 스카이워크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스릴감을 더하며 끄트머리로 나가보면 먼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 팔을 벌리기라도 할라치면 오롯이 저 푸른바다를 품에 담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양 옆으로는 군 전용해변과 하조도해변이 펼쳐진다. 거센 바람에 층층이 포말을 그리며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는 물론이고 설악 능선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드넓은 하조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부드럽게 펼쳐진 모래사장, 그리고 군데군데 자리한 등대가 눈길을 사로잡는 곳으로, 동해안 바닷가 중에서도 빼어난 풍광과 고즈넉함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폭이 100m나 되는 백사장의 길이가 1.5나 되는데다 해안에서 바다쪽으로 70m까지 나가도 수심이 1.5m에 불과하기 때문이란다.

 

 

트레킹 날머리는 하조대해수욕장 입구(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80-2)

스카이워크전망대를 빠져나오면 하류교가 나오고 이어서 하조도해수욕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아까 하조대에서 보았던 애국송을 닮았는데 이 조형물의 아래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총 11.85를 걸었다. 지도에 표기된 거리가 9.6이니 경관 좋은 곳을 들락거리느라 2나 더 걸었던 모양이다. 걷는데 소요된 시간은 3시간 20, 하조대라는 명승지를 둘러보았는데 어찌 시간이 지체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하조대(河趙臺)의 정확한 위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돌출 해안 정상부에 건립된 정자 주변을 지칭한다.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한다. 그러니 하조대하조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높다란 대인 것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하조대는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암석해안으로, 동해바다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지점이자 빼어난 조망처이다. ‘하조대라는 지명도 한번 살펴보자. 하조대는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은거하던 곳이라 하여 그 둘의 성을 따서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근거로 드는 주장도 있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된 두 청춘남녀가 저 세상에서라도 결실을 맺자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리며 만들어낸 이름이 하조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