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누비아(Nubia)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s)‘

 

특징 : 6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Ramses II)’는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국내외에 펼쳐 보이고자 이집트 곳곳에 크고 작은 기념물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이집트 남부 아스완주에 세운 거대한 신전(神殿) ‘아부심벨이다.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 결전을 벌인 카데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집트 남쪽 사암층을 뚫어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이 만들어졌다. 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이며 안쪽으로 63m나 파 들어갔으며 입구에는 높이 22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좌상 4개를 세웠다. 신전의 규모도 경이롭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신전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성소에 까지 햇빛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3000년 전에 만들어낸 경이로움 못지않게 현대 인류도 아부심벨 신전을 위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위기에 몰리자 유네스코와 국제사회가 이 경이로운 신전을 살려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4년 반 동안에 50개국의 지원과 수많은 고고학자의 노력으로 신전은 원래 위치에서 65m 위로 옮겨졌다.

 

아스완에 정박해 있는 배(크루즈)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아부심벨로 향했다. 이곳 아스완에서 280나 떨어진 국경 근처(수단 국경에서는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에 있다 보니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설 수밖에 없었고, 아침식사도 역시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때워야만 했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 아스완댐을 지나왔는데 그곳에서의 보안검색이 눈길을 끌었다. 거의 30분을 기다려야만 했을 정도로 꼼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테러가 많은 지역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어둠을 뚫고 2시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휴게소에 들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작은 휴게소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다. 휴게소는 간편식사와 음료도 팔고 있었으나 주 수입원은 유료화장실로 보였다. 1인당 5 EGP(이집트 파운드)를 받고 있었는데 휴게소에 들르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 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정신없이 졸다가 깼는데도 창밖은 계속 비슷한 풍경이었다. 어스름이 걷혔는데도 역시 똑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온통 사막뿐이었다.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어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풀 한포기 없는 평탄한 사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곳은 이집트의 서부사막이란다. 구릉지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평한 대지에는 송전탑들만 우뚝하다. 이련 풍경이 서부사막의 특징인데 그 덕분에 가끔은 신기루를 볼 수도 있단다. 또한 후루가다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동부사막의 풍경과는 확연히 구분 된단다.

 

 

거칠 것 없는 평평한 대지이다 보니 거기에 건설한 고속도로도 거칠 게 없다. 조그만 구부러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도로가 집사람에겐 색달라 보였던 모양이다. 냉큼 포즈부터 잡고 본다.

 

 

크루즈를 출발한지 4시간 가까이 되어 아부 심벨(Abu Simbel)’에 도착했다. 하지만 매표소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만 했다. 둘 사이에 기념품 상가를 들어앉혔는데 그 규모가 제법 컸기 때문이다. 도로변에도 인도가 따로 나있었으나 관광객들은 다들 상가 안으로 나있는 코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곤 너나없이 진열되어 있는 각종 기념품들을 기웃거린다. 그동안 들러왔던 다른 관광지들보다 상가의 크기나 서비스, 특히 상품의 퀄리티(quality)가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기념품 상가는 매표소 앞까지 이어진다.

 

 

 

매표소에 이르니 입장료가 200 EGP(이집트 파운드)란다. 한화로 14,000원쯤 되니 꽤 비싼 편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다. 아부심벨 신전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스완 인근에 댐을 만들었는데 댐에 물이차면서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한 것. 다행히도 유네스코가 직접 개입해 신전 전체를 강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상류로 통째로 옮겼다. 이전 비용이 많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입장료가 비싸진 이유를 유네스코에서 찾는 이유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아부심벨을 보고 감탄할 수 있지 않은가.

 

 

매표소 건물에는 아부심벨 신전이 옮겨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부심벨 신전은 과거 아스완 댐 공사 때 수몰될 뻔했던 것을 유네스코에서 조각조각 내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옮기는 작업에는 1,700여명의 인력과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신전 전체의 모형을 복원하기 위해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고 주변까지 포함한 125000의 암석을 조각조각 분리해 옮긴 후 그대로 조립해 냈다. 공사 중 댐 수위가 점차 올라오자 신전 둘레에 보조댐까지 쌓으면서 진행된 공사는 결국 3000년 전에 만들어 계산해 낸 태양의 움직임까지 훼손하지 않으면서 완벽한 이전을 마무리해 냈다.

 

 

옮기기 전의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되어 있었다. 이집트 최남단에 위치한 아부 심벨(Abu Simbel)’은 지금으로부터 약 3200년 전에 지어졌다. 이집트 신왕국 19왕조의 파라오이던 람세스 2의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조선 시대쯤 되겠다. 그렇게나 대단한 유적이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 모래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17년 스위스의 고대 이집트 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Giovanni Battista Belzoni, 1778~1823)’에 의해 발굴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부심벨은 발굴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 소년의 이름이라고 한다. 1979년 어제 들렀던 필레 신전과 함께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입장권을 끊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우뚝 솟아있는 정체불명의 사암 언덕이 보인다. 저 언덕의 아래에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이 들어있다. 본래의 아부심벨은 나일강변의 절벽을 뚫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이것을 원래의 위치보다 65m 정도 높은 언덕으로 이전하기 위해, 우선 언덕과 언덕 내부 사이에 대형 돔을 설치하여 신전의 붕괴를 예방한 다음, 1 6천여 개의 조각으로 분할한 신전을 원래대로 쌓아올렸다고 한다. 1972년에 시작한 대역사는 4년 후에야 조립을 마칠 수 있었단다.

 

 

아래 사진은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라본 사암 언덕이다.

 

 

나일강을 따라 난 길을 돌아서면 나세르 호반(湖畔)에 위치한 아부심벨 신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부심벨 대 신전(大神殿)’과 그 옆의 소 신전(小神殿)’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신전은 람세스 2 자신을 위한 것이고 소신전은 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Nefertari)’를 위해 지었다. 둘 모두 내부에서의 카메라 촬영은 불가다. 핸드폰 촬영은 가능하다니 구태여 추가로 돈을 내고 카메라를 이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가 자신을 위해 세운 대신전은 정면의 높이가 32m이며 너비는 38m이다. 안쪽 깊이는 63m라고 한다. ‘람세스 2는 이집트의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한 왕이다. 그는 정복지 중에서도 아프리카 내륙의 누비아 지역에 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누비아 지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민에 대한 해답은 아부심벨이었다. 누비아에 이집트의 위풍당당함을 광고하는 한편, 누비아인과 싸워야 하는 이집트 병사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누비아와 가장 가까운 아스완에 신전을 건설했다. 그리고 신전 앞에 앉아 수단 쪽을 향해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대신전 앞에 서자 높이가 22m나 된다는 거대한 좌상(坐像)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모두가 람세스 2의 좌상이라는데 태양의 신 (Ra)’를 숭상하는 람세스 2세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한 상, 하 이집트를 의미하는 왕관을 씌워 자신이 초대 왕 메네스(Menes, BC 3150)’ 이후 이집트를 재통일한 주역임을 알리고 있단다. 좁은 의미의 이집트는 나일강 하류의 하이집트이고, 상이집트는 남쪽 누비아문화권이다.

 

 

좌상의 다리 사이에 보이는 작은 입상들은 람세스 2세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 딸 등 왕족의 형상이라고 한다. ! 왼쪽에서 2번 째 좌상은 허리 윗부분이 부서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라는데 복원을 하지 않은 채로 보존되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월의 흐름까지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부심벨만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입구의 위, 매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상(神像)은 호루스와 태양신 라(Ra)가 결합된 지평선의 호루스, ‘-호르-아크티(Ra-Hor-Akhty)’라고 한다. 문의 양쪽에는 여성의 상()이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이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라고 한다.

 

 

람세스 2세의 발밑 받침대에 보이는 상형문자는 태양의 신 라(Ra)와 지혜의 여신 토트(Thoth)에게 바치는 헌시(獻詩)라고 한다. 또한 매 형상의 호루스와 수호천사의 조소상은 신전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단다. 이러한 내용들은 1822년 상형문자의 해독이 가능해지면서 알게 되었단다.

 

 

 

신전의 안으로 들어서면 네 개씩 두 줄로 늘어선 석상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두 팔을 가슴 앞에 십자로 모으고 있는 10m 크기의 여덟 석상들은 모두 오시리스(Osiris)’의 모습으로 표현한 람세스 2라고 한다.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는 쌍둥이 동생 세트의 음모에 빠져, 몸이 14조각으로 잘려, 이집트 전국에 뿌려졌으나, 그의 아내 이시스가 물고기가 삼킨 생식기만을 제외한 사체 14조각을 모두 찾아내서 부활시킨다, 람세스 2세는 오시리스의 이런 부활 능력을 빌어 사후에 신으로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맨 안쪽에는 지성소(至聖所)가 있다. 네 개의 신상이 모셔진 신성한 곳으로 가장 왼쪽이 창조의 신이자 암흑의 신인 프타(Ptah), 그 옆이 파라오의 수호신 아몬(Amen), 그리고 그 옆이 바로 람세스 2세이고, 가장 오른쪽은 태양의 신 라(Ra)와 호로스가 결합한 라-호르-아크티(Ra-Hor-Akhty)’라고 한다. 위대한 신들과 자신을 동격화 시킨 람세스 2세의 배짱과 의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지성소의 뛰어난 점은 다른 데에 있다. 지성소는 대신전 입구에서 61m쯤 떨어져 있는 암굴이다. 그런데도 1년에 두 번, 그러니까 춘분(2 22, 람세스 2세의 생일)과 추분(10 22, 람세스 2세가 왕위에 오른 날)이면 해가 떠오르면서 햇빛이 이 깊은 암굴 속까지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리곤 신상을 환하게 비추는데 가장 먼저 람세스 2세를 비추고, 그 다음에 곁에 앉은 태양신 라를 비춘 후, 라몬으로 이동하지만 어둠의 신 프타는 비추지 않고 약 20분 후에 사라진단다. 3000년 전 태양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계산할 수 있었던 이집트의 천문학적 지식과 건축기술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아부심벨에 도착했을 때는 태양이 이미 중천에 떠있었던 관계로 햇빛이 비치는 장관은 구경하지 못했다. 오늘은 10 22일과 2 22일이 아니니 햇빛이 성소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언저리까지는 오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황을 읊은 어느 여행가의 글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아침 해가 뜰 때면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기다린 람세스 2세의 좌상이 창백한 모습에서 차츰 홍조를 띤다. 햇살이 강렬해짐에 따라 그 모습이 마치 조금씩 차오르는 생명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아무튼 이집트는 대단한 나라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거대한 건물을 조각하면서도 태양의 방향과 각도, 시간 등까지 계산해가면서 치밀하게 작업을 했다니 말이다. 하긴 이렇게 뛰어난 선조들을 두었으니 '죽은 자가 산자를 먹여 살리는 나라'라는 말을 듣지 않겠는가.

 

 

석상 뒤의 벽에는 부조가 새겨져 있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쟁을 묘사한 카데시(Kadesh) 전투 장면이란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인 카데시를 두고 벌인 이 전투는 기원전 1274년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변,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의 이집트 마차부대와 무와탈리(Muwatalli) 2세의 히타이트 마차부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카데시 전투는 상호인정·상호불가침·호혜평등 등이 담긴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낳기도 했다. <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해 약탈하지 않는다.>라는 평화조약문을 상형문자(象形文字)와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적어 각각 나눠 가진 것이다. BC 1258년의 일인데 양국은 조약에 명시된 대로 BC 1180년 히타이트가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람세스 2는 평화 속에서 신전과 석상 등 수많은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세워 그의 업적을 과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히타이트와의 평화조약에 대한 기록은 아부심벨 신전을 비롯해 라메세움 신전, 카르낙 신전과 옛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도 남아 있단다.

 

 

2실과 3실 사이의 벽에는 이시리스 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하는 모습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다음은 소신전 차례이다. 정면의 높이 12m에 폭이 26m, 안쪽 길이가 20m인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람세스 2가 자신의 아내 네페르타리(Nefertari, BC 1301-BC 1255)’를 위하여 지은 신전이란다. 그는 이 신전의 건축을 짓는 이들에게 역사상 그 어떤 신전보다도 아름다운 신전을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첫 번째 왕비였던 네페리타리(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의미)’ 왕비를 제일 총애하여 그녀를 위해 신전을 짓고 사랑의 여신, 하토르(Hathor)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신전의 네파르타리 왕비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 긴 깃털과 뿔이 달린 관을 쓴 사랑의 여신 하토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10m 높이의 입상(立像) 여섯 개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와 다섯 번째 상()은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이고, 수염 난 네 사람은 모두 람세스 2. 이왕에 만났으니 네페르타리(Nefertari)의 미모에 집중해보자. 우리나라에선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가 최고 미녀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에선 네페르티티(Nefertiti, BC 1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왕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타리 그 뒤에 클레오파트라 순으로 미녀 서열이 매겨진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네페르타리는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전을 가진 왕비, 왕 무릎을 넘는 조각이 금지됐던 시대에 왕과 동등한 높이의 석상이 건축된 왕비다. 그만큼 람세스 2세로부터 인정을 받은 왕비였던 것이다.

 

 

람세르 2세와 네페르타리의 발치에 만들어놓은 입상들은 둘 사이에 낳은 왕자와 공주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왕비의 다리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람세르는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반면 네페르타리 왕비는 두 발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전을 만들 당시 람세르 2세는 살아 있었지만 네페르타리는 죽은 뒤였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무늬가 나타난다. 나일강변의 절벽을 뚫어서 만든 본래의 신전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들이란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산고의 아픔이자 영광의 상처들인 셈이다.

 

 

신전 내부에는 하토르여신의 입상이 새겨진 여섯 개의 기둥의 있고, 벽면은 왕비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하다. 소신전의 구조는 대신전과 비슷하지만 내부의 기둥이나 벽화 등은 대신전에 비해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벽면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토록 오래전 세상을 다 가졌던 위대한 왕이 부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중국에도 진시황이라는 같은 의미의 영웅이 있다. 그도 역시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또한 만리장성 같은 역사적 유적도 남겼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구분된다.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즐기기 위해 아방궁을 지은 진시황과는 달리 람세스 2세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를 조각하고 이를 신전으로 남겨 백성들에게 본보기로 삼게 했다. 폭군으로 남은 진시황과는 달리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는 위대한 왕이 된 이유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s)’은 문화유적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집트가 낳은 영웅 람세스 2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신전은 모래 속에 파묻힌 채로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히어왔다. 그러다가 1813년 페트라(Petra, 고대 나바테아 왕국의 도시 유적)를 발견한 스위스 학자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수작업으로 모래를 제거하는 기술이 없어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817년에야 이탈리아의 모험가 조반니 벨초니(Giovanni Battista Belzoni)’에 의해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발굴을 도와준 현지인의 이름이라는 아부심벨이란 지명도 이때 생겼다. 1831년 영국의 로버트 헤이가 람세스 동상의 발밑까지 모래를 제거했지만 또 다시 모래에 묻혀버렸고, 1909년에야 프랑스의 가스통 마스페로(Gaston Camille Charles Maspero)’의 지휘 아래 신전을 덮고 있던 모래가 완전히 제거됐다. 하지만 1960년대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댐을 건설하면서 또 다시 물에 잠기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발 벗고 나선 게 유네스코였다. 1968년 신전은 만여 개의 조각으로 분리돼 원래 자리에서 65m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재조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