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아스완(Aswan), 미완성 오벨리스크

 

특징 : 사람들에게 아스완은 그저 세계문화유산인 아부심벨(Abu Simbel)‘을 보고 룩소르(Luxor)‘로 가는 나일 크루즈를 탑승하는 관문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나일강을 유람하는 나일강 크루즈가 대부분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완도 파라오시대 때부터 이집트 남쪽의 국경도시로서의 기능을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절 인근 나일강 동쪽에 스웬(고대 이집트어로 '定期市'라는 뜻)이라는 고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어 시에네와 아랍어 아스완이 이로부터 유래되었단다. 그 이후 로마·터키·영국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에도 국경초소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재의 아스완은 행정중심지이자 동계휴양지이며, 수단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상업 중심지이다. 또한 공업도시로서 구리 및 제철공업단지, 화학비료공장, 시멘트 공장, 제당공장 등의 시설이 있으며, 화강암과 대리석을 캐는 채석장들도 있다.

 

다음 행선지인 아스완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자역(El Giza station)’으로 가야만 한다. 카이로의 중심역인 람세스역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기자역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야간열차가 기자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30분 먼저 역에 도착했다. 열차의 출발시간이 들쭉날쭉해서 미리 도착하지 않을 경우 열차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경고성 멘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기가 만만찮았는데 역사 안에 휴게소가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차의 연착시간까지 합하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는데, 휴게소 아니었으면 플랫폼(platform)에서 고역을 치렀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온통 지린내로 진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열차들이 하나같이 싸자마자 밖으로 배출되어버리는 화장실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란다.

 

 

 

 

스무디(smoothie) 한 잔씩을 시켜놓고 한 시간 가량을 버티다가 1.8짜리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나오니 우리를 태우고 갈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침대가 있는 야간열차라고 해서 ‘Wagon lit sleeper(침대차)’라고 불리는데 이곳 이집트에서는 상급으로 쳐주는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열차는 창가로 복도를 내고 반대편에 21실의 객실을 배치했다. 화차마다 한 명씩의 차장이 배정되어 있어 저녁과 아침 식사 등 호텔과 다름없는 서비스를 제공 받게 된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차장에게 컵라면에 부을 온수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게 되는데 이때 매너 팁을 주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객실은 여행용 트렁크 두 개를 넣으니 발 뻗을 공간이 없어져버릴 정도로 좁았다. 평소에는 소파 하나만 덜렁 놓여 있으나 벽면에 붙어있는 조립식 테이블을 펴면 식사도 가능하다. 각 객실에는 세면대도 있었다. 하지만 물의 공급이 원활치 않아 급할 경우에는 미리 준비해온 생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차장이 돌아다니면서 소파 등받이 뒤에 숨겨져 있던 침대를 끄집어 내준다. 이때 상부에도 별도의 침대가 펴진다. 이래서 21실의 객실이 되는 것이다. ! 화장실 얘기를 빼먹을 뻔했다. 화차 별로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게 되는데,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싸자마자 바닥으로 쏟아지게 되어 있는데도 수세식이라서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언제 열차에서 내려야 할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카이로-아스완 철도의 남쪽 종착역이 바로 아스완(Aswan)‘이었기 때문이다. 역을 빠져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우릴 아스완 댐Aswan dam)‘까지 데려다 준다. 아스완댐은 나일강의 범람을 막고 관개를 통한 안정적 농경을 위해 쌓은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 석틀 방파제) 댐이다. 그로인해 막대한 전력도 생산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댐은 1902년에 영국 기술진이 만든 로우 댐(low‘dam)과 나세르의 지도하에 이집트 정부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70년에 완공한 하이 댐(high dam)‘으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가운데 하이 댐을 찾았다. 참고로 이 댐이 만들어짐으로 해서 얻는 물은 이집트와 수단이 3:1 비율로 공평하게 나누어간다고 한다.

 

 

아스완댐에 대한 첫 느낌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아스완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고 말이다.

 

 

준공 비(竣工碑)‘라고 한다. 아랍어로 쓰인 탓에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아스완 댐을 쌓아올린 대역사의 기록들이 적혀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일강은 이집트와 수단, 에디오피아 등 주변국들 사이에 분쟁의 장으로 변해있다.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에디오피아가 나도 한 번 잘 살아보겠다며 댐을 지으면서 시작된 물 분쟁인 나일강 분쟁이다. 위쪽 물을 잠글 경우 아래쪽이 메마를 것은 당연지사. 아프리카에서 나름 힘 좀 쓰는 이집트가 이를 우려해 반대하니 미국까지 껴들게 된 이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댐의 상부(남쪽)나세르호(Lake Nasser)‘이다. 1960년대에 착공해 1971년에 준공된 아스완 하이 댐으로 나일강 물이 모아지면서 생긴 인공호수(길이 550/ 면적 5,250/ 깊이 25.2m)이다. 담수량이 1,640(소양호의 60)에 이르는 나세르호의 물을 하류로 방출하여 관개함으로써 324,000의 경지가 늘어났고, 283,400의 범람지를 영구 관개지로 개조시켰다. 또한 호수에는 식용 물고기도 기른다고 한다. 참고로 이 거대한 호수는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그래서 이집트에 속한 호수의 북쪽 2/3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1956~70)‘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 호라 부르며, 수단에 속한 남쪽 1/3누비아 호(Lake Nubia)‘라 부른다.

 

 

 

댐의 아래는 기존의 나일강이다. 저런 강에다 높이 111m에 길이가 3,830m나 되는 거대한 둑(dam)을 쌓아 나세르호를 만든 것이다. 아무튼 댐의 완성되면서 나일강변은 더 많은 경작지가 만들어졌다. 다모작이 가능해짐으로써 이집트 농업생산량을 200% 이상 증가시켰는가 하면, 댐에서 생산된 전력은 이집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왼편 언덕에는 우정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연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연꽃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스완댐의 건설 당시 러시아(당시는 소비에트 연방)가 기술과 비용을 지원한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란다. 1964년의 1차댐 준공식에 낫세르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는 아스완 하이댐을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댐의 하부에는 발전소가 들어앉았다. 수문을 열면 댐에 갇혀있던 물이 낮은 곳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이 원리를 이용한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 댐은 8개의 주 터널과 24개의 지 터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발전터빈도 24개라니 지 터널마다 한 개씩의 발전터널을 배치했나 보다. 발전용량도 210나 된단다. 준공 당시 이집트 발전량의 50%를 생산했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대충 이해가 될 것이다.

 

 

아스완 하이댐 관람을 마친 일행의 다음 코스는 아스완 외곽에 있는 화강암 채석장이다. 이곳에 미완성 오벨리스크라는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만들다 만 오벨리스크가 채석장 한가운데에 버려진 듯 드러누워 있단다. 참고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이 이집트 최대의 화강암 채석장이었고, 나일강이 가까워서 무거운 오벨리스크를 배에 실어 나르기가 편했기 때문이란다.

 

 

 

채석장이어선지 주변은 황량하기 짝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온통 바위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곳도 역시 입장권(EGP 80-5,600)을 산 다음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맨 꼭대기에는 초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채석장과 미완성 유적을 한데 묶어 야외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고고학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얼마쯤 올랐을까 누워있는 거대한 돌기둥이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보고자 했던 미완성 오벨리스크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3500년 전, 하트셉수트 여왕의 명으로 제작되었는데, 저 오벨리스크가 만약 완성되었더라면 높이 42m에 무게가 1,200ton이나 되는 지상 최대의 오벨리스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화강암을 자르다 균열이 생긴 탓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룩소르 카르낙 신전의 하트셉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가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기록되고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반대편에서 봐야만 그 규모나 생김새가 제대로 파악된다. 오벨리스크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네모나고 거대한 돌기둥을 말한다.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데 기둥면에 상형 문자로 왕의 공적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가 새겨지지 않았다. 거기다 기둥의 상부도 잘려지듯 금이 나가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스완 채석장의 오벨리스크는 제작이 포기됨에 따라 바닥 부분이 여전히 기반암과 이어져 있는 상태다. 비록 누워있지만 누워 있는 자체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준다. 그저 크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 어떤 기이함이라 할까. 참고로 오벨리스크는 그리스어로 바늘이라는 뜻이다. 끝으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오벨리스크는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대부분 200톤이 넘는 규모였다. 이런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문장 등을 새겼는데, 태양의 신 라(Ra) 또는 파라오의 수호신 호루스(Horus)가 등장하기도 한다.

 

 

 

오벨리스크를 조망하라고 만들어놓은 전망대 옆의 커다란 바위 위에는 돌맹이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강도가 강한 검은색 돌로 화강암의 표면을 마찰함으로써 저렇게 매끄러운 오벨리스크를 만들 수 있었단다.

 

 

 

오벨리스크를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고 난 일행들은 아까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이번에는 아예 바위언덕을 넘어버린다.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는 채석장의 전모를 통째로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부근의 채석장들은 고대 이집트의 많은 기념물 건축에 사용된 화강암을 공급했으며, 지금도 채석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고개를 넘어가다 자원공학과 출신인 형우군과 석재 채취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천공기 같은 장비가 없던 당시에 어떻게 저리 반듯반듯하게 바위를 잘라낼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현장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작은 구멍들이 일렬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도 같은 방법이었단다. 손바닥 크기의 돌로 거대한 바위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구멍에 쐐기(나무막대)를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바위가 원하는 대로 금이 간다는 것이다.

 

 

채석장을 내려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카펫과 스카프을 위주로 각종 조각품 등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놓고 있었는데 품질이 성에 차지 않아 그냥 통과해버렸다. 서재에 놓아둘 정도의 품질을 찾고 있었기에 이런 방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아스완의 일정 가운데는 펠루카 체험이 있다. ‘펠루카란 삼각형의 돛을 달고 바람의 힘을 이용해 움직이는 전통 돛단배를 말한다. 나일강은 강물이 흐르는 방향과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반대라서 돛단배인 펠루카가 수월히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일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던 이집트인들은 펠루카로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그 펠루카가 요즘은 나일강을 따라 유람하고픈 여행자들에게 낭만을 선사해 준다.

 

 

 

펠루카 투어는 짧게는 서너 시간부터 12일 동안 진행되는 것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고 협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흥정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자라면 머무르고 있는 숙소 주인의 소개를 받는 것이 좋단다. 펠루카 체험을 크루즈 투어에 포함시켜 흥정할 수도 있다니 기억해 두자.

 

 

 

우리는 해질 무렵에 맞춰 펠루카를 탔다. 그리곤 일몰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강을 오르내렸다. 패키지여행이라는 특수한 여건에서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의외의 여유였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집트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으로 펠루카 체험을 꼽기도 한다. 느긋하게 강을 따라 흘러가면서 강변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집트인들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비록 그네들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강변의 풍경에서 어깨너머로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펠루카 체험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야 끝난다. 해가 떨어지자 강 건너에 있는 귀족들의 묘역에 조명이 켜지면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낮에는 그저 황금색 모래산에 불과했는데 밤이 되자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콤옴보와 에드푸를 거쳐 룩소르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타고 갈 ‘M/S Semiramis I’호다. 이제부터 나일강 크루즈(Nile River Cruise)가 시작되는 것이다. 저 배에서 23일 동안 머무를 테니 우리의 집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아니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배에서 하게 되니 우리 집이 분명하다. 하지만 웰컴 홈!’처럼 다정한 인사를 건네 오는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게 해 번거로웠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탑승한 배는 리버 크루즈이기 때문에 모든 시설을 콤팩트하게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지중해나 카리브해를 떠다니는 대형 오션 크루즈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1층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2층과 3층은 객실, 갑판 위에는 작은 수영장이 만들어져 있다. 모든 식사는 배 안의 레스토랑에서 제공된다. 음식은 중동과 서양요리가 주로 나오지만 동양인에게도 잘 맞는다.

 

 

갑판에는 작은 수영장과 썬 베드, 푹신한 소파 등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서 사용하지 못했지만 여름철에는 또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겠다. 이번엔 다른 시설들도 살펴보자. 트윈 베드(twin bed)가 놓인 객실은 널찍하고 따뜻했으며, 욕실의 온수도 풍족하게 쓸 수 있었다. 특히 레스토랑 말고도 스테이지가 딸린 라운지 바(Lounge bar)’를 갖고 있어서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제격이었다. 또 하나 질 좋은 기념품코너가 있다는 것도 장점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품질이 성에 차지 않아 고민하던 투탕카멘의 두상을 이곳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말이다. 집사람은 잠옷 삼아 입겠다면서 이집트 전통 의상을 하나 챙겼다.

 

 

크루즈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조망이라 하겠다. 크루즈는 갑판뿐만 아니라 방에서도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커튼만 제키면 나일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배가 달리는 내내 풍경화, 그것도 잘 그린 그림들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참고로 나일강은 탄자니아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해 지중해까지 그 길이가 6650나 된다. 나일을 이집트 사람들은 닐이라고 부르는데, 위대한 강 또는 큰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발원한 백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수에서 시작하는 청나일이 수단의 하루툼에서 합류한 다음 이집트의 아부심벨로 흘러 들어온다. 아부심벨을 지난 나일강은 아스완 하이댐에 의해 만들어진 낫세르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아스완을 지나 룩소르, 아슈트를 지나 카이로에 이르게 된다. 카이로는 나일삼각주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도시로, 여기서 나일강은 다시 동서로 갈라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로제타(Rosetta)로 빠져 나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지중해의 다미에타(Damietta)로 빠져 나간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가 바라본 나일강의 가치는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강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농경민들에게 강을 다스리는 `치수는 삶의 기본이었다. 나일강변에 수로를 만들어 해마다 범람하는 강물을 순하게 땅으로 끌어들였다. 이집트(Egypt)라는 국명(國名)`오래된 도시를 뜻하는 `아이귀프토스라는 말에서 나왔지만, 정작 그들은 `홍수의 나라로 부르거나 `검은 땅의 나라라고 불렀다. 나일강을 따라 건설된 이집트 문명에 기후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이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일강 없는 이집트는 `앙꼬없는 찐빵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집트의 역사, 이집트의 신화, 이집트의 문화는 모두 나일강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엑소더스`홍해의 기적이니 하는 히브리의 신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역시 나일강의 산물이었다. `모세라는 말은 `물에서 건진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이집트 파라오들이 많이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의 눈물이 만든 영웅이었던 것이다.

 

 

 

나일강은 크루즈의 천국이라 할만하다. 항구마다 수많은 크루즈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항해 중인 크루즈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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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박물관(Egyptian Museum)‘

 

특징 : 이집트 5천 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고고학 박물관(The Egyptian Museum)으로 수집(12만 점)의 충실도는 세계의 어떤 박물관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고고학박물관은 19C 프랑스인 언어학자 샹폴리용(Jean-Franois Champollion, 1790-1832)‘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집트의 역사 및 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이집트 유물의 보존 조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34년 이집트 유물보호국의 설립을 시작으로, 1858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 오거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riette: 1821-1881)‘가 유물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지배자이던 사이드 파샤(Sa'id Pasha,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부왕)‘에게 부탁하여 1863 Bulaq 지역에 유물보관소(구 박물관)을 건립토록 했다. 현재의 건물은 케디브 아바스 헬미 2(Khedive Abbas Helmy)‘가 재위하던 1897년에 착공하여 19021115일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1,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박물관은 1층은 왕조 연대별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2층은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및 왕의 묘에서 발굴된 매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에 도착하자 붉은색으로 지어진 중세 유럽풍의 2층 건물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107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다는 이집트고고학박물관(The Egyptian Museum)이다. 출입문의 상단에는 파라오의 두상(頭像)을 부조(浮彫)해 넣었는데 이중 왕관을 쓴 모양새이다. ’·하 이집트를 아우르는 통일왕국의 파라오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파라오의 양편에는 왕비로 보이는 팔등신의 미녀들을 배치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오른쪽에는 쇠똥구리동판(銅版)이 박혀있었다. 쇠똥구리 즉 스카라베(scarab)‘는 고대 이집트에서 다산과 풍작,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똥을 굴리고 가는 쇠똥구리의 모습이 마치 태양이 지구를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태양신의 사자라 여기기도 했단다. 그래서 수호부적과 인장의 도안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의미를 담았지 않나 싶다. 참고로 이집트의 우주창조론에서는 쇠똥구리가 분구(糞球)를 돌리는 것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공()은 지구를, 쇠똥구리는 태양을 의미하며 6개의 다리에 있는 30마디(실제로 이 종은 20마디이지만 아주 가까운 근연종은 30마디를 소유함)는 매달의 30일을 나타낸다.

 

 

이곳도 역시 꼼꼼한 보안검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는 약과라 하겠다. 호텔에 들어갈 때는 물론이고 열차나 크루즈선박을 탈 때도 일일이 보안검색을 거쳐야 하는 등 이집트를 여행하는 내내 보안에서 시작해 보안에서 끝난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받았다. 하긴 그 덕분에 우리가 이집트라는 낯선 나라를 마음 편히 둘러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오랫동안 테러 위험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천정이 올려다 보인다. 돔으로 되어있다는 것 말고는 특이한 게 없는데도 카메라에 담은 걸 보면 천정을 찍는 게 이젠 습관이 되었나 보다.

 

 

이집트 전도(全圖)가 붙어 있는 안쪽 벽면은 가이드들의 근무처라도 되는 모양이다. 각자가 인솔하는 무리들을 대동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5000년이나 되는 이집트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는데 어찌 옛 지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1층의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와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Greco-Roman 시대의 유물이(정문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전시되어 있다. 유물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을 것이라면 2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더 낫다.

 

 

 

1층에는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의 상을 위시해 많은 석상과 석관들이 도열하고 있다. 고대 왕조로부터 그레코로만에 이르는 유물들인데, 관람자들은 멘카우라, 하쳅수트, 람세스, 투탕카멘 등 이집트의 역사 속 왕들을 유물로 만날 수 있다.

 

 

1층 중앙에는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 BC 1390~1353 재위)’티이(Ti)’여왕의 거대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하여 훗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Akhnaton)’을 낳았다.

 

 

서기 상(The scribe, 書記 像)‘이다. 무릎에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한 손에 붓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당시 상류층(세습)이던 서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란다. 사카라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데 5왕조(BC 2450년 무렵)에 이미 문자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란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쿠푸왕의 조각상이다. 상아로 만든 높이 7.5의 좌상인데 쿠푸왕의 유일한 상이라고 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좌상으로 인해 피라미드의 주인이 쿠푸인 것을 알게 되었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의 그 피라미드 말이다.

 

 

아래의 조각상은 사제(司祭)‘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사제는 모두 대머리였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가이드는 이 목상(木像)의 눈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초롱초롱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라호테프네페르트의 조각상이다. 기원 전 257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조금 색이 벗겨진 것 빼고는 완벽했다. 이것도 역시 눈이 포인트다. 유리알과 보석을 사용해서 만들었다는데 보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면 조각상의 동공이 따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참고로 당시에는 파라오가 아니면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라호테프왕자는 그의 부인을 사랑하여 몰래 만들었단다. 그래선지 무덤에는 조각의 뒷면이 무덤의 앞면을 향하도록 놓아두었더란다.

 

 

난장이 세네브(Seneb)와 그의 가족 상, 세네브는 기원전 2520년경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에서 고위 법원 관리로 일했던 난쟁이라고 한다. 그가 앉은 자리의 아래에는 자녀들을 새겨 넣었다. 그건 그렇고 고대 이집트의 유물로 발견된 조각품들 중에는 의외로 신체장애자들의 형상이 많다고 한다. 왕족 또는 귀족이었을 이들이 근친혼의 풍속을 갖고 있었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18왕조(BC 1570-1293)6번째 파라오였던 하셉수트 여왕(Hatshepsut)이다.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여성 파라오인 그녀는 투트모스 1(Thutmose I)’의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적출 왕자가 없을 경우 공주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고 공주의 남편이 파라오의 자리를 상속할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 법에 따라, 그녀는 투트모스 1세의 서자와 결혼했다. 남편 투트모스 2세조차 적출 공주 한명만 남긴 채 요절하자, 법에 따라 어린 서자가 투트모스 3로 즉위하였다. 핫셉수트는 처음에는 투트모스 3세의 섭정을 하다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정통 파라오로 등극하여 약 2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하셉수트는 파라오가 된 후부터 남성의 모습으로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그녀의 목상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턱수염을 달고 있었다.

 

 

 

 

 

파라오의 내장을 담았던 도자기(카노푸스), 미라를 만들면서 떼어낸 뇌나 내장을 담았던 항아리인데 대리석이나 상아를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나오는 석판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아크나톤(Akhenaten, 아멘호테프 4)‘가 아닐까 싶다. 룩소르신전을 지은 아멘호테프 3(Amenhotep )‘의 아들인 그가 이전까지 행해오던 다신 숭배(아몬, Amon)을 버리고 유일신인 태양신(아톤, Aton)을 섬기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으니 말이다. 수도인 룩소르를 버리는 천도(遷都)까지 단행한 그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전통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이상적 평화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다. ! 석판에 그려진 여성은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Nefertiti)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위 석판의 주인공인 아크나톤(Akhenaten)’이다. 18왕조의 9대 파라오였던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와 그의 제1왕비 티예(Tiye)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멘(Amen, 테베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커지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제어하려 했다. 그래서 다신교인 종래의 이집트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도입했다. 또한 아멘 숭배와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수도를 테베에서 오늘날의 알-아마르나 지역으로 옮기고 아케타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나 권력 축소에 불만인 신관들에 의해 종교개혁은 실패했고, 아크나톤이 죽은 뒤 아멘 신앙이 부활하였으며 수도도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반듯하니 잘 생긴 외모의 아크나톤(Akhenaten) 흉상이다. 하긴 그랬으니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는 네페르티티(역삼각형 모자를쓴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를 왕비로 삼지 않았겠는가. ! 아크나톤은 비정상적인 몸매로 표현되기도 한다. 파라오의 순수 혈통을 위해 근친결혼이 성행했었던 탓에 열성 유전자가 만들어졌고, 그로인해 여자 같은 몸매를 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4왕조의 4대 파라오인 카프레(Khafre)’의 좌상(坐像)이다. 2대 파라오인 쿠푸(Khufu)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기자 지역에 대형 피라미드를 쌓은 인물이기도 하다.

 

 

 

 

세트(Seth)’의 상이 아닐까 싶다. 혼돈의 신이자 악의 신인 그를 이집트인들은 땅돼지의 머리와 닮은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형인 오시리스를 살해해 나일강에 버리고 왕위에 올랐던 그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아래 사진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파라오의 관석(冠石, Capstone)이라고 한다.

 

 

나르메트 팔레트(Narmer Palette)‘는 작은 석판에 불과하지만 이집트 미술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르메르 상이집트 왕이 적의 머리채를 잡고 내리치는 형상으로 이집트의 통일 과정을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다. 호루스를 상징하는 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의 위에 앉아있는가 하면, 신성시하던 소()는 가장 위쪽에 새겨져 있다. 나일강 상류의 상이집트와 하류의 하이집트로 나뉘어 있던 초기 이집트는 BC 3100년 상이집트의 나이메르 왕에 의해 통일된다.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것은 연꽃과 흰색의 위로 긴 타원형의 파라오관이고,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것은 파피루스와 원통형으로 된 붉은색의 파라오관이다. 통일된 이후에는 빨강 하이집트 관속에 하얀 상이집트 관을 겹쳐서 썼다.

 

 

당시의 글과 그림이 적힌 파피루스도 전시되어 있다. 4천 년을 훌쩍 넘겼는데도 당시의 색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참고로 파피루스(papyrus)5000년 이전부터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이것을 종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700년 무렵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당시 이 파피루스를 지중해 연안 지역에까지 수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 역사에서 파피루스는 신성한 식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햇살 모양의 꽃이 태양신 아몬 레(Amon Re)를 상징하고, 삼각형의 속 모양이 영원성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이 파피루스는 성경에서 다섯 번 정도 언급된다. ‘Bible(성경)’이라는 단어나 종이를 나타내는 Paper도 파피루스에서 유래되었다.

 

 

잘생긴 스핑크스도 여러 점 진시되어 있다.

 

 

호루스 신과 어린 람세스 2라고 한다. 자신이 호루스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다.

 

 

 

새로운 문명을 만났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집사람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자유스러움에 푹 빠져 나이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어린 람세스 2세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천진난만하게 따라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2층 전시실에는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되었다는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영국의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캐너번 경의 후원을 받아 6년의 노력 끝에 18왕조의 파라오인 투탕카멘(Tutankhamen)’의 왕묘(王墓)를 발견했다. 그는 도굴이 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이 무덤에서 3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한다. '파라오의 영원한 휴식을 방해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의 저주를 받는다'는 속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때 발견된 유물들 일부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아래 사진은 자료사진을 빌려왔다)

 

 

투탕카멘8살에 즉위해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한 단명(短命)의 파라오였다. 어린 나이였던 탓에 사제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간 불운한 임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물들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차, 목관, 황금관, 황금 마스크, 알라바스타 항아리, 침대, 의자, 우산 등 전시되어 있는 유물 하나하나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참고로 아래 사진은 파라오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존재인 카(Ka)의 조소상이다. 머리에는 가발과 두건을 쓰고, 이마에는 코브라 장식을 했다. 어깨를 덮어 가슴까지 내려오는 상의를 걸치고, 쉔디트로 알려진 스커트를 입었다. 양손에는 곤봉과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엄지발가락 사이로 줄을 꿰는 샌들을 신었다. 키가 192로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편인데 피부는 검고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은 황금색이다. 검은 색은 오시리스와 관련이 있고, 황금색은 파라오와 관련이 있단다.

 

 

투탕카멘의 옥좌란다. 등받이에 투탕카문 부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 팔걸이 부분에는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투탕카문의 카르투쉬가 새겨져 있고, 그 앞으로 사자의 머리가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리의 아랫부분은 사자의 다리를 모방했다. 전체적으로 황금색이며, 필요한 곳에 갈색, 하늘색, 파란색을 사용했다. 의자 앞에는 발판이 놓여있다. 화려함이나 정교함에서 이 보다 훌륭한 의자를 또 있을까 싶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체를 담은 옥으로 만든 용기와 그 용기를 감싸고 있는 닫집이다. 옥으로 만든 용기는 내부에 다시 네 개의 용기를 넣었는데, 그곳에 투탕카멘의 몸에서 나온 간장, 허파, , 내장을 넣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이시스, 네프티스, 네이트, 셀케트 네 신이 지킨다. 이들 용기는 다시 닫집 안에 넣어지게 되며, 이 닫집은 호루스의 딸로 알려진 네 여신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넣는 관 집도 네 개나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폭과 길이 그리고 높이가 148×290×190에서 328×508×275까지 커진다. 이들은 6두께의 오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문이 있고, 외부에 부조 형식으로 그림과 문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관 집의 내부 벽에는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나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투탕카문의 미라와 황금마스크를 감싸는 관도 두 개가 있다. 이들 관은 나무에 보석과 유리로 외부를 치장했다.

 

 

당시의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유적지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된 것들이니 당연히 미니어처(miniature)이다.

 

 

파라오가 사용하던 놀이기구도 보인다. 가이드는 장기와 유사한 서양의 놀이기구인 체스(chess)의 원조라고 했다.

 

 

검은 색 자칼 모습의 아누비스(Anubis)죽음의 신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으로 여겼다. 때로는 자칼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몸매로 나타나 오시리스 앞에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역할을 한다.

 

 

미라도 전시되어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가 최근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62호 묘로 되돌아갔다던데, 관람객들을 위한 대용품으로 전시해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에는 미라를 넣었던 목관과 석관을 중심으로 기타 유물들이 널따랗게 전시되어 있었다. 파라오들의 미라’ 11구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추가 요금을 내야만 입장이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이 박물관은 약 12만 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많다면 많겠기만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임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유물들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유물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부터 시작해 영국, 프랑스 등 해외 각국으로 약탈돼 나갔다.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은 그렇게 확보한 이집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들이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비석과 잘린 오벨리스크들이 마당에 널려있다. 건물 앞으로 나오니 십여 개의 좌상(坐像)도 보였다. 이 박물관을 만드는데 기여한 인물들일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epilogue),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은 썩 편하지 않았다. 진열되어 있는 모든 유물들이 하나같이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한 것들이지만 어느 것 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언제 발굴된 것인지, 고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도대체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시대별로 모아 놓고 해석은 관람객이 알아서 하라는 모양이다. 그러니 가이드의 뒤만 쫄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다고 해도 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설명을 일일이 기억해 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대충대충 흘려들으며 나 혼자 아이 서핑(eye surfing)’을 해버린 이유이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멤피스(Memphis)야외 박물관

 

특징 : 멤피스(Memphis)는 카이로 남쪽 25지점 나일강 서쪽 연안에 위치하는 고대 이집트의 첫 번째 수도이다. 기록에 따르면 멤피스는 BC 2925년 무렵 메네스(Menes)가 세웠다고 한다. 그는 선사시대의 두 왕국인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한 인물로 알려진다. BC 2200년까지 수도로 발전해 왔으며 테베스로 수도를 옮긴 중왕국 시대에도 멤피스는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멤피스의 원래 이름은 이네브 헤지(Ineb Hedj/ 흰 담)‘이었다고 한다. 중왕국 시대에는 앙크 타위(ankh taui)‘라고 불리기도 했다. 의미는 두 땅의 생명이라는 뜻으로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 사이의 전략적인 요충지임을 강조하는 이름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멘네페르(mennefer)‘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콥트어로는 멘페였으며, 멤피스라는 현재의 지명은 여기서 유래했단다.

 

다음은 사카라에서 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멤피스이다. 멤피스는 전설 속의 파라오인 메네스(Menes)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제3왕조의 조세르 통치하에 이집트의 수도가 됐다고 한다. 4왕조에서 제6왕조 시대에 전성기를 이뤄, 이 시대를 멤피스 시대로 부른다. 이후 람세스 2세 시기에는 인근 국가와 먼 그리스에서까지 교류하는 국제적인 도시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AD 640년 이슬람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자 완전히 사멸해버린다. 거기다 서기 13세기 나일강둑 붕괴로 수많은 유적이 유실됐고 현재는 과거의 명성을 역사 저편에 묻어둔 채 종려나무 숲으로 뒤덮인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Entry Fees’에 대한 안내판이 보인다. 성인 기준 80이집트 파운드(EGP), 학생들은 반값이란다. 원화(KRW)에 대한 환율이 80원이니 6,400원쯤 되는 셈이다. 아무튼 여행을 해나가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곳 이집트에는 공짜 관광지가 없었다. 그 안에 있는 화장실도 공짜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관광지 안을 배회하는 현지인들의 선심성 행위마저도 공짜가 없었으니 돈에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고 보면 되겠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자 멤피스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관광객들이 이곳 멤피스를 찾는 이유는 인근에서 발견된 높이 10m가 넘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을 보기 위해서다. 야외박물관에 있는 유일한 2층 건물의 안에 모셔져 있는데, 누워 있는 석상은 1층과 2층에서 바라볼 수 있다. ! 이곳에 모셔져 있는 석상과 함께 발견된 다른 하나는 카이로 중앙역 광장에 있다가 지금은 건설중인 대이집트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층에서 보는 석상은 볼품이 없다. 이게 과연 석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애매모호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 이 석상이 람세스 2라는 것은 눈치조차 챌 수가 없다. 참고로 석상의 주인인 람세스 2는 역대 파라오 중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다. 투탕카멘 및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파라오이기도 하다.

 

 

이층으로 오르자 드디어 석상의 정체가 파악된다. 전시관 1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석상은 2층에 올라서도 카메라 앵글에 한 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이집트에서 만나는 모든 석상이 그러하듯이 람세스 2역시 최상의 비율로 만들어진 젊고 늠름한 모습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람세스 2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누워있다. 하지만 썩 기분 좋은 모습은 아니다.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살가죽에 앙상한 뼈마디의 해골이기 때문이다.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치아는 태양의 아들 파라오가 말년에 여러 질병으로 고생한 노인이었음을 증명한다 하겠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저 석상을 보고 람세스 2세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는 것을...

 

 

석상은 늪에 파묻혀있던 것을 1820년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왼쪽 다리와 팔 부분이 일부 잘려나간 것을 제외하고 너무도 매끈한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맞는다. 수천 년 전의 유물임에도 몇 년 전에 만든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놀라운 보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튼 두 눈을 뜨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람세스의 모습은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신비로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파라오의 왕관은 상이집트가 희고 원추형으로 생겼으며 앞쪽에 코브라 모양의 휘장이 달려 있는 반면 하이집트의 왕관은 붉고 2개의 돌출부(뒤쪽의 높고 곧은 것과 앞쪽의 소용돌이 모양의 것)가 달렸고 모자처럼 생겼다. 파라오들은 종종 이 두 왕관이 합쳐진 '이중왕관'(Double Crown)을 쓰곤 했는데, 이는 양분된 이집트가 하나로 통합되어 신성한 왕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상징한다.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Statues of Ramses )은 길이가 무려 12m, 무게는 80ton이나 된단다.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던 그는 3,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히 범접치 못할 아우라(aura)를 뿜어내고 있다. 참고로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파라오는 단연 람세스 2.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재위기간이다. 그는 왕세자이던 14세 때 섭정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10년 후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는 67년간이나 재위했다. 19왕조의 존속기간이 110년이니 그가 2/3를 통치했던 셈이다, 당연히 지속가능한 발전을 통해 나라는 안정·발전되었을 거고,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그는 영토를 키워나갔을 것이다. 물론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조형물을 많이 세웠다. 특히 자신의 조형물을 이집트의 구석구석까지 세웠다. 이번 여행 내내 수없이 많은 그의 석상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이다.

 

 

하나의 큰 석회암을 깎아서 만든 석상의 어깨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종의 문장이라 할 수 있는 카르투시(cartouche)’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람세스 2가 아니라 람세스 3의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원래는 람세스 2의 것이 새겨져 있었으나 람세스 3가 깎아내고 자기의 것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종의 횡령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는 이런 일이 흔했단다. 더구나 이러한 횡령을 가장 많이 한 파라오가 람세스 2였다니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이젠 밖으로 나가볼 차례이다. 야외박물관의 한쪽에는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진열되어 있는 조각품들이 너무 조잡해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자신들의 집에 놓아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호텔에서 람세스 2세의 좌상을 챙겼는데 이곳보다 무려 10배를 더 주고 샀다.

 

 

 

나머지 공간은 수많은 석조물들로 메꿔져 있다. 프타 신전이 있던 장소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인근에서 발견된 수많은 멤피스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것들도 여럿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제1왕조 때인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글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스어로 '거룩한 기록' 을 뜻하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리고 불리는 이집트 글은 형상을 본떠 글자를 만들었다 하여 상형문자라고도 한다. 모두 850여 개의 기호를 사용하는 히에로글리프는 서로 다른 3종류의 기호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알파벳처럼 발음에 따라 쓰이는 소리글자와 그림의 모양에 따라 의미를 전달해 주는 뜻글자‘. 그리고 단어 뒤에 붙여서 발음은 안 하지만 그 단어의 종류를 정해 주는 결정문자가 그 세 가지 체계이다. 히에로글리프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쓰고 읽기도 하는데, 글자 중 사람이나 동물의 머리가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다. 히에로글리프는 배우고 사용하기가 아주 어려운 문자로 신전이나 왕의 무덤에 기록을 할 때나, 공식적인 문서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일반 서민은 쓰지 못하는 신성한 문자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경부터는 디모틱(Dempteic)‘이라 불리는 서민들의 흘림체 글이 사용되었다. 기원후 394년까지 약 3600여 년간 사용되던 히에로글리프는 이후 완전히 잊혀진 글이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상폴리옹(Jean-Franois Champollion, 1790-1832)‘이 오랜 연구 끝에 히에로글리프를 읽는 데 성공했다.

 

 

 

 

밖으로 나와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을 살펴본다. 맨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멤피스지역의 주신인 프타(Ptah)’의 가족 석상이다. 프타를 가운데에 두고 오른쪽에 프타의 부인이자 전쟁의 여신인 세크메트(Sekhmet), 그리고 왼편에는 프타의 아들인 네페르툼(Nefertum, 농작물의 성장을 담당한다)으로 분장한 람세스 2(Ramses )’라고 한다. 누군가 이집트에서 돌을 던지면 셋 중의 하나는 람세스 석상에 맞는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던가 보다.

 

 

 

아래 사진은 프타의 가족석상 뒷면이다. 프타(Ptah)는 이집트 종교에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만물의 제조자, 장인들 특히 조각가들의 수호자로 섬겨져왔다. 이집트의 한 문헌에 따르면 프타는 마음과 말씀의 힘으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즉 인간이라는 개념이 창조주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다음 신의 말씀 그 자체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과 음악의 여신인 하토르(Hathor)’의 두상(Head)’도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같은 종류의 여신인 그리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예쁘기만 한데 말이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하토르가 소의 귀를 가진 여인으로 표현되고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했다.

 

 

 

그밖에도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가이드는 몇 개의 유물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고고학은 그저 곁눈질로만 알면 된다는 내 신조에 따라 나 혼자서 주변을 둘러봤다.

 

 

 

광장의 한가운데는 스핑크스(sphinx)’ 석상이 웅크리고 있었다. 힘의 상징은 사자의 몸에 지혜의 상징인 사람의 얼굴을 가진 스핑크스이다. ‘멤피스의 스핑크스(Sphinx of Memphis)’ 또는 알라바스타 스핑크스(The alabaster sphinx)’로 불리는데 기자의 스핑크스와는 달리 설화석고(알라바스타)로 만들어져 있다. 1912년 영국의 고고학자가 모래에서 삐져나온 밝은 돌을 발견했는데 이게 스핑크스의 꼬리였다고 한다.

 

 

 

스핑크스의 크기는 길이 4m에 높이가 2m라고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스핑크스 가운데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하지만 기자의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는 훨씬 더 잘 생겼다. 균형미가 돋보이는데다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이 매력을 듬뿍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을까 싶다.

 

 

 

 

광장의 가장 안쪽에는 람세스 2의 거대한 입상이 버티고 있다. 높이가 7m에 이른다는데 왼쪽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살아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기법이라니 그가 살아있을 때 이 석상을 만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석상은 상이집트의 상징인 흰 왕관을 쓰고 있다. 몸매는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로 표현했다. 이집트 최대의 왕국을 건설한 그의 강인함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오른쪽 손목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는 등 채색된 흔적도 눈에 띄었다. 이로보아 당시의 석상들은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이곳에는 이집트 신화에서 우주의 신으로 등장하는 프타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옛 헤케프타유적 입구에 조그만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헤케프타는 프타신의 영혼의 집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야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멤피스 야외박물관((Memphis open Air Museum)’이라고 부른다.

 

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사카라(Saqqara)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

 

특징 : 이집트(Vietnam) :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해진 나일 강 유역에 일찍부터 도시 국가를 형성하며 살았다. 농토를 확대하기 위해 시작된 강력한 공동체는 기원전 3000년경 여러 도시 국가들을 통합한 통일 왕국을 만들어 냈으며, 폐쇄적인 입지조건 덕분에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에 정복되기까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과 후기 왕조 시대로 구분된다. 고왕국 시대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달한 시기로 파라오가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반면 중왕국 시대에는 파라오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기원전 1600년경 힉소스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다가 신왕국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는데, ’람세스 2때는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며 지중해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7세기 이후 이슬람 문화권에 편입되었다가 18세기부터는 프랑스·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왕국을 세웠으나 19527월 쿠데타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사카라(Saqqara) : 수도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4km쯤 떨어진 나일강 좌안(左岸)에 위치한다. 기자(Giza)·아부시르(Abusir)·다수르(Dahshur) 등과 함께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피라미드 소재지로 유명하며 1979년에는 한꺼번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제3왕조(BC 2650~2575)2번째 왕이었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각뿔 모양이 아니라 직육면체 모양을 여러 층으로 쌓아올렸는데 이게 이집트 피라미드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이곳에서는 이집트 역사의 초기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진흙벽돌 무덤(마스타바)들이 발견되었다. 분묘 안에서 발견된 저장 단지에는 제1왕조 왕들의 이름이 씌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왕들은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 묻혔기 때문에 이 무덤들은 당시 고위 관리들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여행은 사카라로부터 시작됐다. 카이로에서 20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도심을 통과했는데도 악명 높은 카이로의 교통체증을 겪지 않고도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슬람의 공휴일이 금요일과 토요일인데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라서 그렇단다. 공휴일에 도심이 텅 비는 것은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차에서 내리면 피라미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많이 어색하다. 사진으로 접해오던 사각뿔 모양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저 피라미드의 주인은 이집트 제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조세르(Djoser, BC 2668-2649 재위)‘이다. 또한 저 피라미드는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이자 최초로 바위를 사용한 피라미드이기도 하다. 참고로 조세르는 왕권과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시나이반도와 누비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고대 이집트왕조의 기틀을 닦고 국력을 튼튼히 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석조 건축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사카라 남부에서 찾아낸 제19왕조 시대의 한 비문에 조세르를 돌을 연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행한 사람은 이모텝(임호테프이라는 재상이었다. 임호테프의 의미는 가득 차서 오는 자인데 하 이집트 왕의 상서, 상 이집트 왕 바로 아래의 수석, 대왕궁의 행정관, 세습 귀족,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은 조각가요, 돌 항아리 제작자라고 기록된 초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로 보아 이모텝은 고왕국 시대의 천재 재상이자 불멸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겠다.

 

 

피라미드 묘역으로 들어가는 탐방로는 장제전(mortuary temple)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왕들을 예배하고 죽은 왕들에게 바칠 물건과 음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고왕국(BC 2575~2130)과 중왕국(BC 1938~1600)의 장제전은 보통 피라미드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기둥이 늘어선 개방된 정원, 창고, 5개의 가늘고 긴 사당, 위장문과 제단이 설치된 예배실이 있었단다. 예배실 안에서 사제는 매일 장례의식을 거행하고, 죽은 왕의 카(ka : 수호영)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왕국 시대(BC 1539~1075)가 되면서 왕들은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묻혔으나, 근처에 독립된 장제전을 무덤과 분리해 짓는 일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밖에서는 건물의 거대한 외벽처럼 밋밋하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열주(列柱)들이 늘어선 회랑(回廊)이 나온다. 한때 우람한 기둥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신전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높이 6.6m의 기둥 20개만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이런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는 점이 조세르 피라미드의 특징이라고 한다. 다른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여러 부속 건축물들이 포함된 복합단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묘역은 이후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기둥을 살펴보면 세로로 줄무늬가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석재를 쓰기 전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나무 묶음을 건물의 기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풍조는 석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사진처럼 파피루스 묶음 형태의 돌기둥 무늬로 응용되었다. 이런 무늬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등 도리아식(Doric Order) 기둥에서도 발견된다. 이집트의 건축기술이 그리스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일 것이다.

 

 

장제전의 돌기둥 사이에는 수십 개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 이집트를 구성하던 43개 부족의 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행사 때 찾아온 각 부족의 사신들은 자신의 부족에 해당하는 방에서 머물렀단다.

 

 

장제전을 지나면 엄청나게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오늘의 주인공인 조세르 파라오(재위 : BC 2668-2649)의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다. 조세르(Djoser)는 그의 출생명으로 후일 성스러운 몸이라는 뜻의 네체리케트(Netjierichet)’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스식 이름인 토스르토스로도 불린다니 기억해 두자. 아무튼 선왕인 사나크테의 동생인 조세르는 19년을 통치하였으며, 그 기간에 저 계단피라미드와 같은 대규모건설공사를 여럿 시행했단다.

 

 

왼편에 보이는 계단부터 올라가고 본다. 아무래도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 피라미드의 제 모습이 나타날 것 같아서다. 전체적인 윤곽을 먼저 살펴본 다음 피라미드로 다가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 주어진 자유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그런 내 예산은 적중했다. 조금 전에 바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또렷이 보이는 것이다.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는 모두 여섯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네 개였는데 공사 중에 두 개를 추가시켰다고 한다. ‘조세르 파라오(재위 : BC 2668-2649)’가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래 산 것이 설계변경의 이유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으나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덕분에 높이가 62m에 이르는 현재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된 것은 분명하다. 기초부도 동서길이 125m에 남북길가 109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저 피라미드의 북쪽 입구에서 조세르의 거대한 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세르의 모습은 석상이 소장된 카이로박물관에 가야 살펴볼 수 있는데 파라오가 쓰는 무거운 가발을 머리에 쓰고 턱에도 파라오 특유의 턱 장식이 붙어 있는 등 이집트 파라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단다. 하지만 원래의 석상에 박혀있던 갖가지 보석은 도굴꾼들이 파내갔다고 한다. 덕분에 눈 부분이 움푹 들어가면서 더욱더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한다지만 말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을 ‘Step pyramid’로 적고 있었다. 최초의 피라미드이자 최초로 바위를 사용했다면서 계단 모양으로 쌓아올린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맞다. 이집트인들이 접대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의자인 마스타바(Mastaba)의 구조를 확대한 것이 조세르 피라미드이다. 정육면체 블록들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계단 피라미드 구조를 완성했다. 그 사이사이를 메꾸면 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 즉 기자에 있는 대피라미드모양으로 변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피라미드의 반대편에는 메마른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파헤쳐지거나 뭔가를 복원하고 있는 현장이 곳곳에 널려있다. 맞다. 이곳은 이집트의 광대 한 고대 매장지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Memphis)의 묘지 역할을 했었다. 이곳에 있는 5·6왕조 시대의 피라미드나 왕비·재상들의 마스타바(Mastaba)에서는 비문과 조각물 등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부근의 멤피스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들과 함께 고대 이집트유적·유물의 보고로 평가된다. 그러니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황무지를 보다가 문득 조세르가 이집트에 찾아왔던 극심한 가뭄을 해결했다는 어느 기록을 떠올려본다. 7년의 기나긴 가뭄에 시달리던 조세르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상이었던 임호테프의 자문을 받아 나일강의 남쪽 끝 엘리판티네 섬에 크눔(Khnum)’ 신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자 비가 쏟아지면서 막혔던 나일강의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아래 사진에서 산등성이처럼 보이는 곳, 그러니까 조세르 피라미드 앞쪽으로 100m를 걸어가면 제5왕조 마지막 파라오의 무덤인 우나스 피라미드(Pyramid of Unas)‘가 나온다. 최초의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가 발견됐다고 해서 고고학계의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피라미드다. 이곳에 있는 피라미드 텍스트(아래 두 번째 사진)‘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종교적 주문(呪文)을 담은 문자다.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야 만나게 되는 이 텍스트는 청색과 녹색 물감으로 그린 상형 문자다. 모두 228개 주문으로 이뤄진 텍스트에는 이집트인의 내세관과 파라오에 대한 축복, 신과 파라오를 결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내부에선 발견되지 않은 것이어서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단다. 하지만 난 우나스 피라미드를 가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거기다 가이드로부터도 그런 정보를 듣지 못했으니 어찌 가볼 수 있었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공부를 좀 해두었어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못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언덕에는 십여 마리의 낙타와 말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기로 했다. 가끔 떨어져서 부상을 입는 사고가 생긴다는 가이드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관광지 근처에서 서성이는 전통복장의 현지인들도 조심하라고 했다. 친한 척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찍자고 하는데, 응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돈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경고를 무시한 일행 가운데 몇 명은 눈을 뻔히 뜨고도 10불 씩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저 멀리 아까 들어왔던 장제전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왼편에 보이는 건물로 가볼 차례이다.

 

 

위에서 얘기한 장제전의 왼편에 이르니 반쯤 복원된 세드(Sed) 신전이 있다. 파라오가 내세에 위대한 신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기원하던 신성한 장소로 직선과 곡선 형태의 암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인 '세드 축제(Sed Festival)'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 신전을 받치던 돌기둥 세 개만 남아 당시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열리던 헤브-세드 축제(Heb-Sed festival)‘BC 3000년 무렵 이집트 제1왕조를 창건한 메네스(Menes)가 시작했다. 파라오의 재위를 기념해 3년 마다 열었는데, 의식을 통해 왕국의 통일을 재차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발견된 수많은 부조물과 그림들, 그리고 이곳 헤브세드 축제 유적지를 통해 축제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왕은 먼저 여러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 뒤 왕관을 썼다. 처음에는 상이집트의 흰색 왕관을 쓰고 다음에는 하이집트의 붉은색 왕관을 썼다. 마지막으로 왕은 동물의 꼬리가 뒤에 달린 짧은 치마를 입고 4번에 걸쳐 의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호루스 신과 세스 신을 경배하는 신전으로 갔다.

 

 

피라미드 주변은 대체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피라미드와 함께 복합단지를 이루던 부속건물들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상태로 마무리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2%, 아니 20%는 부족해 보였다. 이렇게 무너져 내린 건물터들은 이곳 말고도 여럿 눈에 띄었는데, ’조세르 피라미드만이 갖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 피라미드만 달랑 있는 게 아니라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벼락 안에 장제전과 신전을 비롯한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들어있는 일종의 피라미드 콤플렉스(Complex, 복합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왼편은 흔적만 남아있다시피 한 신전의 담벼락이다. 피라미드는 높이가 10m쯤 되는 요철부가 있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이 담벼락에는 13개의 가짜 문과 남쪽 끝자락에 1개의 진짜 문이 있었는데,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장제전이 진짜 문이란다. 현재도 유일한 출입문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모퉁이를 도는데 현지인이 손짓을 한다. 그리고 발목만 남아있는 석조상을 가리키며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의 석상이 있었던 자리라고 일러준다. 그리고는 안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거부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무엇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피라미드로 가까이 다가가 본다. 피라미드는 하도 높아서 끝이 안보일 정도이다. 높이 60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144m)에는 못 미치지만 이전 파라오의 묘에 비해선 압도적인 크기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조세르 피라미드(Djoser Pyramid)'는 세계 건축역사의 한 장을 이루는 인류 최초의 피라미드식 석조건축물이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피라미드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원형에 가깝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네모진 돌들을 쌓아올렸다. 당시의 건축술은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모텝이 처음으로 석재(石材)를 사용했단다. 태양열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석재는 너무 덥기 때문에 주거시설의 재료로는 부적합하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석재를 사용한 것은 왕가(王家)와 마찬가지로 영원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겨우 첫 번째 단, 그것도 중간쯤까지 올라갔을 뿐인데 까마득하게 높아 보인다.

 

 

피라미드를 벗어나려는데 꽤나 먼 곳에 서있던 또 다른 현지인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그곳에도 볼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가가니 석실 안으로 나를 이끌면서 손짓발짓을 총 동원해가며 설명을 해준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말이다. 눈만 멀뚱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아예 벽면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짚어주기까지 한다. 사진이라도 찍어두라는 모양이다. 그래 당신도 수고료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소이다.

 

 

 

 

피라미드의 앞마당은 엄청나게 넓었다.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이 까만 점으로 보일 정도다. 고왕국 시대에는 저 마당에서 왕위갱신제(Heb Sed Jubilee)‘라고 불리는 세트축제(Sed festival)가 벌어졌다. 이 축제는 나일강의 범람이 끝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의 첫달, 첫날에 열렸다고 한다. 파라오는 이때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통치를 해왔고, 앞으로도 통치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사를 거행했다. ·하 이집트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체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경계를 나타내는 두 개의 반월형 표적 사이를 오가며 달렸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피라미드를 쌓은 이모텝(임호테프)‘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보자. ’이모텝하면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 미이라에서 나오는 탐욕스러운 신관을 연상할 것이다. 저주와 분노를 불처럼 터뜨리던 그 이모텝(임호테프)‘ 말이다. 하지만 이모텝조세르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공사를 맡아서 진행한 재상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었던 피라미드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에 힘입어 완성됐다고 한다. 그는 신관이자 천문학자이며 서기 등의 다양한 칭호로도 불리었다. 그만큼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던지 '건축의 신'이나 '창조의 신 프타의 아들'로 기록될 정도였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는 의학의 신으로까지 모셔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할리우드 영화는 마치 악의 화신인 것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서구적 상술이 만들어낸 허구라 하겠다.

 

 

이틀 밤을 머물렀던 람세스 힐튼 호텔(Ramses Hilton Hotel)‘

카이로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있는 36층짜리 초고층 호텔로 뛰어난 접근성으로 인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객실의 청결도나 편의시설의 종류, 제공되는 서비스 등 호텔의 수준도 뛰어나다. 4성급 호텔이나 다른 나라의 5성급 호텔로 보면 되겠다. 일회용품 제공도 완벽했다. 비누나 샴푸는 물론이고 치약과 칫솔까지 제공된다. 면도기 빼놓고는 모두 다 비치되어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방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 따로 돈을 내야한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긴 공짜가 없는 게 이집트 여행의 특징이니 어찌 공짜 와이파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조망이 아닐까 싶다. 36층의 초고층 건물답게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층건물이 가득한 시내 중심가는 물론이고 나일강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만 도시 전체가 뿌옇게 보이는 점은 아쉬웠다. 지금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시기가 아니니 미세먼지가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 나라의 창조신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에 태양신인 라(Ra)가 딸 마아트(Maat)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이집트를 세우고 다스렸다고 한다. 진리와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는 지혜의 신인 토트(Thoth)왕과 결혼하여 아들 '오시리스', '세트'와 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는다. 이들은 성장하여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한다. 그리하여 오시리스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는다. 세트는 형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는데, 오시리스 사이즈에 맞는 관을 만들고, 누구든지 관에 들어가 사이즈가 맞는 사람에게 관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관을 닫고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기적의 힘으로 남편을 지하 세계에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낳는다. 호루스는 자라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를 되찾아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오시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어 영생을 심판하는 신이 되었고, 이시스는 사랑과 여신으로 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