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카이로 외곽, 기자(Giza) 지역의 피라미드들

 

특징 :  카이로(Cairo) : 아랍어로 승리를 뜻하는 카이로는 이집트 수도이자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큰 도시다. 세계에서 밀도가 가장 높은 인구 1700만 명의 카이로는 1000년을 넘게 수도로 이어져오면서도 신도시라 불린다. 5000년이 넘는 장구한 이집트의 역사 속에 멤피스 및 테베, 알렉산드리아 등 옛 이집트의 수도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현존하는 수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6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수많은 이집트 문명의 수도로서 오랫동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랍권에서는 카이로를 ’2개의 해협 또는 도시라는 뜻의 아랍어인 미스르(Miṣr)`라 부르는데, 현지에서는 마스르(Maṣr)’라고도 발음한다. ’미스르는 이집트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현재의 카이로는 전통과 동서의 영향, 고대와 현대가 잘 조화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는 늘어만 가는 이집트의 가난과 급격한 인구팽창으로 인한 문제, 쇠락해가는 사회기반 시설(社會基盤施設)을 보여주기도 한다.

 

 피라미드(pyramid) : 세계 곳곳에는 현대인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대 건축물들이 있다. 바빌론의 궁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등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대표적이다. 피라미드도 여기에 속하는데 고도의 건축 기술이나 장비가 없던 고대에 지어진 대형 피라미드의 건축 방식은 현재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으로 쓰인 건축물이다. 신의 화신이었던 파라오가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내고 신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사후세계의 집이었다. 피라미드가 거대하게 축조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한다. 영생을 얻은 파라오가 거주할 수 있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주거지를 만들었다는 것과 신의 세계에 닿기 위한 계단의 역할로 거대하게 지어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피라미드는 이곳 이집트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서 지어졌다. 그중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참 우리의 선조들이 만든 피라미드도 있다. 지금은 비록 중국(지린성) 땅에 들어있지만 고구려 시대의 무덤인 장군총도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들렀던 기자 지역에는 기원전 2500년께 이집트 4대 왕조의 쿠푸왕과 그의 아들 카프라왕, 손자인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가 있었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가 137에 이르는데, 무게 2.5가량 돌 250만개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피라미드는 내부 구조 또한 웅장하고 복잡한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왜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생각하다 보면, 그들의 오묘한 세계관과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그저 불가사의라는 단어로만 남게 된다. 멀리서도 우뚝 솟은 3개의 피라미드의 자태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에 무게를 더한다.

 

 다른 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카이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기자(Giza) 마을로 이동했다. 이집트, 아니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피라미드들을 대표하는 피라미드가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기원전 2560년 무렵에 세워진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완공에 약 20년이 걸렸는데 피라미드 중 가장 크다고 해서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라고도 불린다. 바로 옆에는 아들(카프레-Khafre) 및 손자(멘카우레-Menkaure)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파라오 3대의 피라미드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가이드로부터 건네받은 입장권은 ‘Giza Plateau, EPG 160( 11,200)’, 매표소에 계시된 입장료는 기자 피라미드지역 : 성인 EPG 160/학생 EPG 80, 대 피라미드 : 성인 EPG 360/학생 EPG 180, 카프레 피라미드 : 성인 EPG 100/학생 EPG 50 등이다. 즉 우리가 산표는 세 개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피라미드지역만 둘러 볼 수 있고, 피라미드내부를 보려면 또 다른 입장권을 사야한다는 얘기이다.

 

 

 

 

 8시가 되자 입장이 시작됐다. 소지품 검사를 거친 후 안으로 들어서자 역사상 세워진 모든 피라미드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쿠푸왕의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가 눈앞에 나타난다. 이름에 걸맞게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m(현재는 상당부가 조금 파괴되어서138m)나 된다. 밑변의 길이는 약 230m이다. 원래는 꼭대기에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는데 도난당해 지금은 윗면이 작은 사다리꼴이 됐다고 한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들어간 돌의 수는 약 230만개, 전체 무게가 약 700만 톤이나 되는 이 괴물 1311년 영국에서 첨탑의 높이가 160m에 이르는 링컨 대성당(Lincoln Cathedral)’이 완성되기 전까지 인류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3800년 넘게 보유해왔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탓인지 가자지구의 공기는 아침부터 탁했다. 덕분에 원거리 사진은 하나같이 뿌옇게 나와 버렸다. 그래서 이집트 연구가 곽민수 선생의 사진 몇 장을 빌려와 이해를 도와봤다. 그분의 글도 많은 정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건 그렇고 대피라미드의 네 밑변 합은 1년 일수와 같은 365인치이고, 높이는 지구-태양 간 거리의 10억분의 1이라고 한다. 양력을 사용한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것까지 미리 계산했다니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아래 사진은 대피라미드에서 발견되었다는 쿠푸왕(Khufu)‘의 좌상으로 현재 이집트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대피라미드 쿠푸왕의 무덤이다. 1837년 저 피라미드의 안에서 쿠푸왕(Khufu)’이라고 새겨진 상형문자가 발견되면서 무덤의 주인이 알려졌다. ‘쿠푸왕은 이집트 4대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기원전 2551년부터 2528년까지 약 2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왕이다. 하지만 '쿠푸왕(Khufu)'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고 7.5의 작은 좌상 하나만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왕이다

 

 

 이곳도 역시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과 낙타, 노새에 마차까지 줄줄이 나왔으니 이들 가운데 하나를 이용하면 수월하게 피라미드군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지역이니 흥정을 잘 해야만 한다. 또한 말이나 낙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피라미드의 오른편에는 그의 아들이 주인인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가 있다. 기자지역에 있는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인데 높이는 143m라고 한다. ‘대피라미드 보다는 단순하지만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역시 꽤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역시 그 내부에 남아 있는 것은 광택이 나는 화강암 석관뿐이란다. 아니 1818년에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Giovanni Belzoni, 1778-1823)가 현실(玄室)에 낙서를 남겨놓았다니 다른 점일 수도 있겠다.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 거대함 보다 피라미드 상단부에 남아 있는 석회암으로 된 외장석(外裝石, 마감재)’ 때문이다. 모든 피라미드들은 원래 저런 마감재들로 덧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카프레 피라미드의 상단부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란다. 기자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투라(Tura)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최고급 석회암으로 매끈하게 마감되어 해가 비치면 빛을 반사하면서 피라미드를 번쩍번쩍 빛나게 했단다.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본 고대 그리스인들이 피라미드를 하나의 거대한 돌덩어리로 여겼다는 것을 보면 피라미드가 완성되고 나서 2000여년이 지났을 때까지만 해도 마감재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아래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위 사진에서 보듯 카프레의 피라미드 옆에는 기자지구의 세 피라미드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The Pyramid of Menkaure)’가 있다. 쿠프와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워낙 큰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지만, 이 세 번째 피라미드도 역시 높이가 62m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두 피라미드에 비해 유난히 작은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카프레)와 할아버지(쿠푸)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느라 국고를 탕진해버린 탓에 규모를 확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다.

 

 

 대피라미드로 조금 더 다가가니 피라미드의 외벽에 사람들이 띠를 이루고 있다. 피라미드의 내부로 들어가려는 관광객들이 만들어낸 줄이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출입구는 대피라미드의 진짜 입구가 아니다. 현재의 입구는 832년에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마문(Al-Mamun)’의 명으로 조직된 탐험대가 대피라미드 내부에 진입하면서 인위적으로 뚫었던 입구이다. 당시까지도 대피라미드는 완전하게 봉인된 상태로 보존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알-마문의 탐험대는 대피라미드 내부에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대피라미드가 도굴당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텅빈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가운데에 있는 것인 진짜 입구이다. 우측 하단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부분은 -마문의 명으로 뚫은 입구이다. 피라미드의 진짜 입구는 아직까지도 봉인되어 있단다.

 

 

 

 자 이젠 피라미드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대피라미드는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건축물이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는 건 더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하지만 관계당국에 의해서 입장객 숫자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고,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도 추가로 내야 한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와서 입장료를 아끼겠다고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지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 카메라는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으니 입구에 맡겨놓아야 한다.

 

 

 

 대피라미드의 내부에서는 특별한 보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피라미드의 구조는 다른 피라미드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어 있다. ‘왕의 방과 여왕의 방, 지하의 방이라고 불리는 3곳의 현실 같은 공간이 있지만 현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공간만 공개되고 있다. !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왕의 방이나 여왕의 방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그 방이 왕이나 여왕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단다.

 

 

 안으로 들어서자 좁고 긴 회랑이 나타난다. 경사까지도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데 가파른 오르막, 그것도 어떤 곳에서는 고개까지 숙여가며 오르다보니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이건 눈요기용 관광이 아니라 숫제 고행이다. 앎을 찾아 떠나는 고행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안에서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 내부에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두침침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핸드폰의 손전등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대피라미드의 복잡한 여러 공간들 가운데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대회랑이다. 영어로는 ‘The Grand Gallery’라고 불리는 이곳은 왕의 방으로 가는 통로로, 실제로 그곳을 통해서만 왕의 방으로 갈 수 있다. 대회랑의 천장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높이가 8-9m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회랑을 오르는데 작은 터널이 보인다. 철망으로 입구를 막아놓았는데 환기구가 아닐까 싶다.

 

 

 땀으로 흠뻑 젖은 뒤에야 왕의 방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내부 탐험은 분명 신나는 여정이었다. 피라미드라는 위대한 업적의 속살을 본다니 어찌 흥분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설렘을 안고 찾아든 왕의 방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 흔한 벽화라던가 문자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玄室)에는 한쪽 귀퉁이가 깨진 듯이 보이는 화강암 석관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따름이다. 저 관에는 미이라(mirra)’가 들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미이라가 있었다는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에 왕의 미라나 유물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첫 번째 가능성은 '도굴'이다. 하지만, 내부와 외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굴을 당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대피라미드 쿠푸왕의 진짜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기록에 나일강 가운데 있는 섬 지하 어딘가에 쿠푸왕의 무덤이 있다.’는 점을 들어 쿠푸왕의 진짜 무덤이 나일강 유역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피라미드는 도굴을 막기 위해 만든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가능성은 대피라미드 내부에 '비밀의 방'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이집트에서 왕은 신이자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정중앙에 왕의 방이 건설되는데, 이에 반해 쿠푸왕의 방은 정중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어떤 곳에 진짜 왕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기자(Giza)’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카이로 도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자는 카이로 광역권에 속하는 위성도시이다. 동시에 기자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이집트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300) 독립된 거대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대중교통도 좋은 편이다. 카이로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기자역에 내려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참고로 카이로의 지하철은 현재 3개의 노선이 운영 중인데, 이중 기자역은 2호선으로 주황색 라인이다.

 

 

 이들 피라미드 말고도 작은 피라미드들이 여럿 보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헤테프헤레스(Hetepheres)’ 여왕의 묘는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입장료를 따로 받지는 않으나 아무런 장식(玄室)도 없는 작고 소박한 현실이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헤테프헤레스는 다슈르(Dahshur, 사카라 바로 남쪽 나일 강 서쪽 강둑에 있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유적지)의 주인공 스네페루(Sneferu, 고왕국 제4왕조의 창시자로 BC 2575~2551 재위)’의 왕비이다.

 

 

 

 피라미드 앞에 철책으로 둘러쳐진 배 구덩 (Boat Pits)이 보인다. 이따가 보게 될 태양의 배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 바퀴 돌아봤다면 이제 피라미드를 한눈에 담아볼 차례이다. 피라미드에 다가가보면 커다란 돌덩이들을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짐은 물론이다. 그렇게 230만개의 돌을 쌓아올렸다고 한다. 돌 하나의 무게는 평균 2~3, 가장 큰 것은 무려 15톤이나 나간단다. 이렇게 건설하는 데는 수만 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다들 일반 자유민이었다고 한다. 노예에 의한 강제노역은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란다. 당시 이집트는 나일 강이 범람하는 3개월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는데 그 농부들이 피라미드 건설의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 기자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삶의 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단다. 그들은 농한기에만 나와서 일을 했으며 국가로부터 식량도 지원 받았다고 하니 피라미드의 건설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사회보장적인 통치시스템의 일환이었다 하겠다.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하던 뉴딜정책(New Deal)이라고나 할까?

 

 

 피라미드에 다가갈수록 위엄 보다는 잘 정비된 우리 고향집 뒤 돌산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잘 쌓아놓은 큰 돌 계단 위에 걸터앉아 재잘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커다란 정방형의 바위 위에 앉아 셀카를 찍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화면에는 경외스럽던 피라미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핸드폰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인 것이다.

 

 

 

 대피라미드에서 남서쪽으로 1가량 가면, 6개 피라미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전망대를 만난다. 잔망한 즐거움은 여기서도 계속된다. 쿠푸 할아버지-카프레 아버지능 그룹과 멘카우라 손자능-대비-왕비능 그룹 간 간격이 벌어지자 그 사이에서 여행자들은 온갖 몸 개인기를 펼친다.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가운데 놓고 왼편이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오른편은 카프레의 아들의 묘인 엔카우레의 피라미드이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대피라미드보다 더 높아 보인다. 대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건설한 탓이겠지만 카프레 피라미드의 높이는 사실 136m로 훼손되기 이전의 대피라미드보다는 10m 가량, 훼손된 상태의 대피라미드보다도 1m 정도가 더 낮다고 한다.

 

 

 

 이젠 피라미드와 함께 놀아볼 차례이다. 먼저 피라미드를 배경 삼아 인생샷부터 건진다. 그게 끝나면 피라미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다음엔 손가락으로 집어도 본다. 무게가 나가지 않으니 카메라의 각도만 잘 맞추면 되겠다.

 

 

 

 

 

 기자지구에 있는 모든 피라미드들을 한 폭의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은 헤테프헤레스(Hetepheres)’ 여왕의 묘 뒤편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지를 못했기에 자료 사진을 첨부해 본다.

 

 

 에필로그(epilogue), 피라미드는 이집트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석조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이를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무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승천하는 곳이라는 뜻의 무르는 하늘로 올라가는 신성한 장소를 가리킨다. 현세의 고단한 삶보다 죽은 뒤의 사후세계를 더 동경했던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이다. 그들은 죽은 뒤에 이승의 고통스런 삶에서 해방되어 오시리스의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모든 죽은 자들은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와 하나가 된다. 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집트를 여행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눈에는 이 위대한 건축물이 별 것 아니게 보였던 모양이다. 광대한 사막에 우뚝 솟은 웅장한 건축물의 위용에 기가 눌렸을 법도 하건만, 자기들이 즐겨먹는 세모꼴의 빵쪼가리인 피라미스(Pyramis)’를 연상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아니 깎아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피라미드라고 다 전통적인 삼각 탑 형태인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 따라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데 기자 인근 사카라의 조세르왕 피라미드는 계단식이며, 다슈르는 한쪽 변이 굴절되거나 벽돌 색이 붉은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이런 형식들을 종합해볼 때 계단식(죠세르)으로 시작해 굴절식(스네푸르)을 거쳐 벽돌식(붉은 피라미드, 기자 피라미드)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