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룩소르(Luxor,  Thebes),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특징 : ’카르나크 신전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주신(主神)인 아몬(Amon)을 위해 지어졌다. 아멘호테프 3세의 작품으로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신전이다. 유일신 아텐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아멘호테프 4(아케나텐)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아케나텐의 뒤를 이어 즉위한 투탕카멘이 공사를 재개했고, 훗날 람세스 2세가 제1탑문과 첫 번째 안마당을 세워 지금과 같은 신전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한참 뒤의 지배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성스러운 배가 놓이는 제실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로마의 황제들까지도 신전의 부분 부분을 끊임없이 증축했기 때문에 딱 한 마디로 신전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완공되었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단다. 룩소르 신전은 이처럼 여러 파라오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완성되었지만 신전이 지어진 목적만큼은 분명하다. ‘카르나크 신전처럼 룩소르의 3신인 주신 아몬과 그의 아내 무트, 그리고 아들 콘수를 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카르나크 신전에 비하면 조금 떨어진다. 그 규모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아멘의 신상이 모셔졌던 카르나크 신전에 비해 이곳 룩소르 신전은 일 년에 딱 한 차례,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라고 불리는 특별한 기간 동안만 아멘의 신상을 모셨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릴 무렵 룩소르 시내를 마차로 누볐다. 다음 행선지인 룩소르 신전이 야간 투어로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신전의 야경(夜景) 가운데 룩소르 신전이 가장 뛰어나다는 가이드의 추천인데 어찌 대낮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일정은 정규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은 선택 관광이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한껏 치장된 마차를 타고 나름대로 전통 의상을 갖춘 마부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시내 곳곳을 둘러보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 마부는 유창하진 않지만 영어 대화가 가능했다. 여행객들로부터 배운 탓에 글을 읽거나 쓰진 못한다지만 주변 풍광을 설명해주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마차는 나일강을 따라 룩소르 신전 옆 도로와 시장을 누빈다. 넓은 도로를 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마차 두 대가 겨우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물 흐르듯 잘도 달린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거기다 사람까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도대체 막힘이 없는 것이다. 부대끼며 살아온 오랜 세월이 만들어 낸 문화가 아닐까 싶다.

 

 

 

 가끔 영어로 된 삼성 휴대폰 대리점이 보여 반갑다. LG 가전제품을 팔고 있는 상점도 눈에 띄었다. 외국에만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내 가슴 또한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룩소르 기차역이다. 중세 유럽풍의 외관으로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집트의 신전 탑문과 신전의 기둥을 조합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집트는 10% 정도 되는 기독교를 제외하면 모두가 이슬람이다. 그래선지 시내에서 만난 기독교의 예배당까지도 외관은 모스크를 영락없이 빼다 닮았다.

 

 

 시장 골목은 우리네 전통시장과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야채나 과일가게는 물론이고 의류, 잡화 등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풍경보다는 마차가 복잡한 시장바닥을 비집고 돌아다니는 것이 더 신기하기만 했다.

 

 

 이슬람 세상이니 여성들의 히잡과 차도르가 시장 곳곳에 내걸려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투어를 마친 마차는 우릴 룩소르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룩소르 신전의 앞에다 내려놓는다. 룩소르 신전은 도시 한복판에, 그것도 나일강 동편 중심지에 있어 더욱 유명한지도 모른다. 카르나크가 신과 선대왕에 대한 경외심의 상징이라면, 제전을 치르는 가장 중요한 사원 룩소르 사원은 신과 왕의 대화가 이뤄지는 장소로 민중들에게 각인돼 있다. 나일강 범람 등의 현안을 해결하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자 숫양(아몬을 뜻한다)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널따란 길의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30왕조의 초대 왕인 넥타네보 1가 만든 스핑크스의 길(Avenue of Sphinxes)‘이란다. 저 길은 해마다 열리던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아몬신과 무트신의 결혼을 기념하고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축제)‘  카르나크 신전에서 모셔오던 신(아몬, 무트, 콘수)들을 거룩한 나룻배에 태워 3쯤 떨어진 이곳 룩소르 신전으로 모셔오던 성스러운 길이다. 신들은 이곳 룩소르 신전에서 3주간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신전 앞의 널따란 광장 한켠에는 룩소르 신전과는 별개로 작은 신전이 하나 있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궁금해 하는데 일행 중 한명이 사라피스(Sarapis)‘ 신을 모시는 예배소라고 귀띔해준다. 사라피스는 제우스(Zeus)의 용모를 띤 신()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Ptolemaeos I Soter, BC 323~285)‘가 여러 그리스적 요소와 함께 도입했다. 그는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멤피스에서 숭배한 평생 한번밖에 출산하지 못하는 암소가 천상에서 비추는 빛으로 임신하여 태어난 성스러운 수소 아피스(Apis)‘를 하나로 합쳐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 신으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습합(syncretism)이 잘 나타난 형태라고 보면 되겠다.

 

 

 널따란 마당(’넥타네보 1세의 뜰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에는 너비 65m에 높이가 25m 1 탑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여섯 개의 거대한 석상과 하나의 오벨리스크(obelisk)도 보인다.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가 세운 기존의 아몬신전에다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덧대어 지은 것들이다. 그나저나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신전이라는 세평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은 대단했다. 하긴 람세스라는 당대 신 같은 통치자가 축조했다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람세스 2가 세웠다는 24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현재 하나만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고 한다. 1829 무하마드 알리 왕이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에게 선물로 보냈기 때문이다. 한편 루이 필립은 오벨리스크 선물에 대한 답례로 시계를 보내왔는데 이 시계는 지금 카이로의 알리 모스크에 설치되어 있단다. 이집트의 신전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그 많던 오벨리스크들 대부분이 유럽 각지로 약탈되어 나갔고 막상 이집트에는 몇 개 남아있지 않다.

 

 

 맨 왼쪽에 있는 석상은 나머지 셋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이다. 양 팔을 ’X‘자 모양으로 가슴위로 모은 석상의 인상착의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얼굴의 생김새도 매끈하게 생긴 게 영락없는 여성이다. 그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과 턱에 달고 있는 파라오 수염 정도가 다른 상들과 같은 정도이다.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맨 오른쪽 석상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양쪽 팔은 떨어져 나가버렸고 얼굴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그래선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까지도 달라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문을 지키고 있는 두 좌상(坐像)은 원형에 가깝다. 오른쪽 석상의 얼굴이 훼손된 것을 뺀다면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쪽 좌상의 앞에 보이는 좌대는 위에서 얘기한바 있는 오벨리스크, 즉 프랑스의 콩코드광장으로 옮겨간 오벨리스크가 서있던 자리이다.

 

 

 1탑문에는 그 유명한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 장면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카데시 전투란 람세스 2가 다스리던 이집트 신왕국과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던 라이벌 히타이트(Hittite)가 기원전 1274년에 오늘날의 시리아 카데시 지역에서 벌였던 전투를 말한다. 결과부터 말하면 카데시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인류 최초로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그리고 이 조약은 람세스 2가 내치에 힘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무승부를 승리로 포장하면서까지 람세스 2세의 치적으로 삼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탑문 뒤로는 1 마당(람세스 2세의 마당)‘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1탑문과 함께 람세스 2에 의해 만들어진 57mx51m 규모의 이 널찍한 공간은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2 탑문까지 이어지는데 74개나 되는 원기둥으로 조성된 아주 인상적인 공간이다. 참고로 1탑문 뒤쪽에 있는 3개의 제실은 테베의 3신인 아몬과 무트, 콘수가 타던 성스러운 배를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파피루스 머리로 장식된 기둥들 사이에는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왕관(파피루스)을 쓴 람세스 2와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흰 왕관(연꽃)을 쓴 람세스 2‘, 그리고 통일 이집트를 상징하는 이중 왕관을 쓴 람세스 2세의 석상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함께 다스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파라오 두 땅의 주인(nb-tAwy)’이라는 호칭도 갖고 있었단다. 참고로 람세스 2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 가운데 하나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주인공 모세와 어린 시절 다정한 친구였으나 나중에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탄압하는 폭군으로, 이집트 전역에 흩어져있는 엄청난 유적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1995년 세계적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로 인해 더욱 잘 알려졌다. ‘이집트 태양왕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집트 신왕조 시절인 기원전 1303년부터 기원전 1213년까지 90세의 수명을 누렸고 60년 동안 통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으로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며 대규모 건설사업을 계속하면서도 내분을 잠재우는 리더십을 발휘했고, 밖으로는 이집트 영토를 넓히고 많은 포로를 확보했던 정복의 영웅으로서 맹위를 떨쳤다.

 

 

 

 첫 번째 마당의 남서쪽에는 신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슬람풍의 건축물 하나가 들어서 있다. ‘아부 엘-학가그(Abu el-Haggag)’란 이름의 모스크(mosque)이다. ‘순례자들의 아버지란 뜻을 가진 아부 엘 학가그는 이곳 룩소르에 이슬람을 전파한 인물로 훗날 이집트인들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는다. 1174년 이라크의 모술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장사를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다. 하지만 40세가 되던 해에 이슬람에 대해 더 알고자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넘어와 이집트 중부 만수라에 정착했는데 꿈에 남부의 테베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룩소르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하가그는 룩소르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카이로의 칼리프가 그에게 이집트의 대법관 자리를 맡으라고 했을 정도였단다. 그의 시신은 현재 모스크의 중앙 돔 지하에 있는 검은 색 관에 모셔져 있단다.

 

 

 아래는 다른 분에게서 빌려온 사진으로 낮에 바라본 모스크의 풍경이다. 남의 신전에 기대어 지어진 이슬람 시대의 모스크는 룩소르 신전이 갖고 있는 다층적인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 지금도 저 신전에서는 이슬람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단다.

 

 

 투탕카멘(Tutankhamen)과 아낙수나문(Ankhesenamun) 부부로 여겨지는 석상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석상도 눈에 띄었으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해득이 불가능한 부조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회랑의 가장자리에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었다. 투탕카멘과 호렘헵 시대에 지어졌다는 외벽에 새겨진 부조들이다. 벽에는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때 룩소르의 3신이 배를 타고 카르나크에서 룩소르 신전으로 향하는 모습과 다시 카르나크로 돌아가는 여정이 꽤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거의 무너져버린 2 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에 의해서 지어졌다. 하지만 탑문 앞에 세워진 한 쌍의 좌상(坐像) 1탑문과 마찬가지로 람세스 2의 것이다. 아무래도 람세스 2세가 신전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갈아치우지 않았나 싶다. 하긴 이집트의 온 국토가 전부 람세스 2세의 놀이터라는 얘기가 어디 그냥 만들어졌겠는가.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두 번째 탑문을 지나게 되면 하나의 회랑(回廊)을 만나게 된다. 높이가 19m에 이르는 원기둥 14개가 두 줄로 늘어서 있는데 원래는 천장으로 덮여 있었다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나저나 이 회랑은 신전의 핵심부로서 입구보다 조금 더 높게 지어졌다고 해서 대회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의 신전들은 신전의 핵심부를 입구보다 조금 더 높게 짓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대회랑을 통해 연결되는 곳은 아멘호테프 3세의 마당(’태양의 마당이라는 이도 있다)’이라는 2 마당이다. 이곳은 수많은 기둥들이 이중으로 둘러싼 다주식 광장(Hypostyle hall)이다. 45×50m 규모의 광장을 파피루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64개의 아름다운 원기둥들이 삼면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형태이다. 하지만 큰주랑 쪽에 있는 기둥들은 윗부분이 거의 부서졌고, 주랑에서 마당으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만 기둥들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정면에 보이는 기둥들은 안마당의 것이 아니고 다음 방의 열주실 기둥들이다.

 

 

 

 이 마당은 카르낙신전의 7탑문 전의 안마당과 마찬가지로 은신처를 의미하는 ‘cachette’라고도 불린단다. 이유도 같다. 미국 탐사대가 1987년 이곳에서 20개가 넘는 18왕조 시대의 석상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유물들은 현재 룩소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단다.

 

 

 

 

 태양의 마당은 32개의 원기둥이 8개씩 네 줄로 늘어서 있는 열주실로 이어진다. 이제 완벽하게 지붕으로 덮여있는 신전의 지성소가 곧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장으로 덮여진 신전은 원기둥이 있는 열주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이집트 신전의 구조에 관한 일종의 규칙이라니 말이다. 23개의 방과 27개의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은 원래 천장으로 다 덮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남아있지 않지만 말이다.

 

 

 

 신전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변해온 신들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이곳은 원래 파라오들이 자기 자신의 지성소를 지었던 장소였다. 하지만 세월은 온전히 그들 것만으로 놓아두지를 않았다. 신왕조의 파라오들뿐만 아니라 이후 이집트를 통치하며 파라오 대우를 받았던 황제들까지도 이곳에 예배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신전은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행태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알렉산더 대왕이라 하겠다. 그는 이곳 신전 내부에 자신만의 예배소(아래 사진)를 지었는가 하면, 아멘호테프 3세를 모방하여 자신이 직접 이집트의 신들을 경배하는 부조(아래 두 번째 사진)를 남겨 놓았다.

 

 

 

 열주실 다음의 4개의 기둥이 있는 방은 봉헌실로 아몬신에게 봉헌을 올리던 곳이고, 바로 뒤는 알렉산더 대왕이 복원한 아몬의 성스러운 배를 모시던 공간이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아멘호테프 3의 즉위를 표현한 대관식의 방이 있고, 여기서 다시 왼쪽으로 가면 탄생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 나온다.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가 신의 손길로 아들을 임신하고 파라오 아멘호테프가 신의 아들로 신성하게 태어나 축복을 받으며 성장하는 장면의 부조가 있다. 크눔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단다.

 

 

 신전의 마지막 방은 아멘호테프 3세의 지성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룩스르 신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아멘호테프 3세가 태어난 분만실이자 아몬신의 거룩한 배를 보관하던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이다. 신전이 실제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오로지 고위 신관들과 파라오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성소 내부는 이집트의 조각과 로마의 스투코(치장 벽토)로 장식한 전실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로마인들 역시 이곳을 제의를 올리는 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벽면에는 장례문서의 내용인 밤과 낮의 태양선이 새겨져 있다는데 확인까지는 불가능했다. 나란히 남아있다는 알렉산더대왕과 아멘호테프 3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긴 이 모든 것이 낯선 신성문자로 표현되어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벽에 새겨진 조각상과 그림들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흔적들은 읽지는 못하지만 파라오들의 역사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

 

 

 

 룩소르신전은 한때(로마시대 이후) 교회로도 사용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곳곳에 예수와 열두 제자의 그림,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분명 고대 이집트의 주신(主神)인 아멘과 그의 부인 무트, 아들 콘수를 위해 지어진 신전이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을 모시는 예배당으로도 사용한 것이다.

 

 

 왕가의 계곡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멤논의 거상(Colossi of Memnon)’을 찾아봤다. 그러니까 파라오들이 부활을 꿈꾸며 잠들어 있는 나일강의 서안(西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유적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곳은 원래 아멘호테프 3(Amenhotep III, BC 1390~1353 재위)’의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신상의 주인은 아멘호테프 3일 텐데 왜 멤논이라 불리는 것일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27년 룩소르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아멘호테프 3 석상에 균열이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이 지역을 여행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스트라보(Strabo, BC 63-23)가 석상 아래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었는데, 여명이 밝아올 무렵 석상의 균열 사이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스트라보에게는 이 소리가 아들 멤논을 잃은 어머니 에오스의 울음소리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석상에 멤논의 거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멤논(Memnon)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자 에티오피아의 왕으로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으나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 이 석상은 199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보수된 후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거상은 두 팔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옥좌 위에 앉아 있다. 무릎 오른쪽에는 아멘호테프 3의 부인 테예(Teje)’, 왼쪽에는 어머니인 무템비아(Mutemwia)’가 서 있다. 하지만 맴논은 얼굴과 가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남쪽 석상의 오른쪽에 있는 테예의 조각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참고로 거상은 그 높이가 기단을 포함해서 18m나 된단다. 남쪽의 석상은 기단이 3.3m 좌상이 13.97m, 전체 높이가 17.27m. 북쪽의 석상은 이보다 조금 더 커 기단이 3.6m 좌상이 14.76m, 전체 높이가 18.36m.

 

 

 거상의 측면에는 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조와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신 하피(Hapi)’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연꽃과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하나로 묶고 있는 모습이다. 상형문자는 석상에 사용된 돌의 원산지까지 밝히고 있단다. 나일강 하류 헬리오폴리스 동쪽 아흐마르산의 채석장에서 나왔다고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돌을 분석해본 일부 학자가 아스완 서쪽 굴랍산이나 팅가르산의 규암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단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에는 왕궁이 없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우연히 던져진 누군가의 화두(話頭)가 끝내는 화재로 변해버렸다. 7일 동안 이집트를 일주하다시피 했는데 왕궁은커녕 왕궁의 주춧돌도 구경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이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30~40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세보다는 부활을 위주로 한 내세(來世)에 관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유적들은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등으로 대변되는 무덤과 신전, 부활을 위한 미이라로 집약할 수 있다고 한다. ! 가이드는 왕궁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는 흙벽돌로 짓고, 신전은 화강암으로 올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