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이집트

 

여행일 : ‘20. 2. 21()-29()

세부 일정 : 카이로(1)사카라멤피스(야간열차 1)아스완(1)아부심벨콤옴보(1)에드푸룩소르(1)후르가다(1)카이로(1)

 

아스완(Aswan), ’필레 신전(Philae Temple)‘

 

특징 : 나일 강의 진주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신전으로 예전에 필레섬에 있었다고 해서 '필레 신전'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아스완댐이 건설되면서 아랫도리가 물에 잠겨 있다가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1972) 때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으로 이전했다. 신전을 이전할 때 전체를 분해해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복원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왕조시대에 지어졌다는 이곳에서는 고대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의 아내 이시스(Isis)를 모셨다. 건물은 이집트 시대의 형태를 답습하면서도 그리스의 요소를 받아들여 건설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세웠다는 1탑문과 신전으로 향하는 참배의 길 양쪽으로 늘어선 100m 가까운 열주들, 그리고 신전의 벽면을 꽉 메우고 있는 상형문자들이 가장 눈길을 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kiosk)도 인증사진의 배경으로 넣기에 부족함이 없다.

 

크루즈 선착장을 출발한 버스가 20분쯤 달리자 필레신전의 매표소에 닿는다. 그렇다고 이곳에 신전(神殿)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스완 로우댐으로 인해 생겨난 인공호수의 안에 있는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에다 신전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매표를 한 후에 다시 배를 타야만 한다.

 

 

 

 

이집트 고대 유적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에도 기념품 판매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진열된 기념품들은 조잡한 것도 있는 반면 제법 퀄리티(quality)가 있어 보이는 것들도 눈에 띈다. 특히 일부 조각품들은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구입하는 우()는 범하지 말자. 흥정만 잘하면 그들이 부르는 가격의 절반까지도 깎아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조심해야 할 일은 또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파피루스(papyrus)‘는 사지 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파는 파피루스는 대부분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파피루스는 전문 상점에서나 살 수 있으며 가격대도 비싼 편이다. 참고로 파피루스란 식물 줄기의 껍질을 벗겨 내고 찢은 뒤, 다시 매끄럽게 해서 만든 일종의 종이. 이집트 문명의 제지기술은 종이보다 훨씬 빨랐다.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까지는 보트가 실어다 준다. 조금 전 100 EGP(이집트 파운드)을 주고 구입한 입장권에 뱃삯이 포함되어 있으니 추가로 돈을 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뱃삯을 별도로 내야 한다고 우기는 보트 기사들도 있다니 주의할 일이다.

 

 

강안(江岸)의 바위 언덕 위에 멋진 건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이 근처에 있다는 올드 캐터랙트 호텔(Old Cataract Hotel)‘로 오해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얼핏 ’old‘라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로 꼽히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면서 나일강의 죽음(1937)‘을 집필했다는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귀국해서 사진을 확대해보니 ’old nubian‘이라는 ’guesthouse‘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강기슭(江岸)은 온통 거대한 바위투성이다. 작은 바위섬들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그런데 그게 함께 어우러지더니 아예 한 폭의 풍경화로 변해버린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이런 풍경만 가지고도 유명 관광지가 되기에 충분하겠다 싶다.

 

 

10분 조금 못되게 달렸을까 좌측으로 필레 신전(Philae temple)‘이 모습을 드러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때 지어진 신전(神殿)으로 이시스(Isis) 여신을 모시는데 이시스이세트(Iset)‘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란다. 대지의 신 게브(Geb)와 천공(天空)의 여신 누트(Nut)의 딸로, 오빠 오시리스(Osiris)의 아내가 되어 호루스(Horus)를 낳았다. 그녀는 동생 세트(Seth)의 손에 죽은 남편의 갈가리 찢긴 유해를 고생 끝에 찾아내어 비탄 속에 매장한 일, 또한 자식 호루스를 온갖 위난으로부터 보호하며 양육한 일들로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는 여신으로 알려진다. 참고로 애초 저 신전은 필레 섬에 있었다. ’이시스여신을 모시고 있는데도 필레신전으로 더 익숙한 이유이다. 1960년대에 아스완댐의 건설로 인해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는 아부심벨 신전과 함께 평소에도 아랫도리가 물에 잠겨있던 필레 신전을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세계 50여 개국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4년에 걸쳐 이곳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잠시 후 아길리카 섬(Agilika island)‘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 10여 척이 정박되어 있는 목제 선착장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곳보다 잘 만들어져 있다. 유네스코 자금으로 복원하다보니 선착장까지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다.

 

 

배에서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투어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 경찰에게 표를 보여주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검색대를 지나면 신전으로 향하는 넓은 뜰과 연결된다. 그 뒤쪽으로 이시스의 친구이자 축복의 여신아렌스누피스 신전(Temple of Arensnuphis)’이 있다. 아리헤스네페르, 아르스누피스, 하렌스누피스 등으로도 불리는데 안내판에는 ’Arsenophis’로 표기하고 있다. 이정표는 이밖에도 누비아지역의 토착신으로 여겨지는 만둘리스 신전(Temple of Mandoulis)’‘Temple of Imhotep’, ‘Temple of Isis’도 표기해 놓았다.

 

 

잠시 후 기다란 열주(列柱)를 양쪽에 품은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프톨레마이오스 2가 세웠다는 1탑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리스 출신의 왕가(王家).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이자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으면서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기원전 305년에 이르러 스스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aeos I Soter)’로 칭하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도 그를 독립 이집트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했고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이집트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 당시 남자 통치자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로 칭했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 ‘베레니체등으로 불렸다. 세기의 미녀로 꼽히는 클레오파트라(정확히는 클레오파트라 7이다)’프톨레마이오스가문의 여왕이라고 보면 된다. ! 파라오의 뒤에 붙이는 숫자는 현대 역사연구가들이 편의상 붙였다는 것도 알아두자. 당대의 그리스계열 왕가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가령 프톨레아미오스 1의 경우 가문 뒤에다 ‘1‘2대신 구원자라는 뜻의 소테르Soter)’를 붙였다는 것이다.

 

 

1탑문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수많은 열주(列柱/ colonnade)들이 기다랗게 늘어선 모양새이다. 위로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들은 아주 크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기둥의 아래 부분은 상형문자를 음각(陰刻)했고, 머리 부분에도 여러 가지 문양들을 조각해 넣었다.

 

 

 

 

좌우로 늘어선 열주들 사이를 지나면 높이 18m에 폭이 45m1탑문이 나온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탑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가 세웠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벽면의 부조도 이시스 여신(Isis)’호루스 신(Horus)’, ‘하토르 여신(Hathor)’ 등의 신들 말고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벽면에 새겨진 조각은 너무나 선명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은 이시스와 호르스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호리호리한 몸매의 이시스는 둥근 원형판이 올라앉은 쇠뿔 모양의 관을 머리에 썼고, 호루스는 머리에 관을 쓰고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 탑문의 앞에는 원래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탑문의 안쪽도 부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특히 이시스가 갓난아기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 부조되어 있는 방이 눈길을 끈다. 혹자는 마미시라 적고 있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6(Ptolemaeos )’가 태어난 탄생소라고 주장했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 그림이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님께 젖을 먹이는 성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말이다.

 

 

 

그밖에도 이시스가 호루스를 낳는 장면과 습지에서 호루스를 돌보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이시스는 남편을 죽인 세트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루스를 파피루스로 대변되는 습지에서 키워야만 했다. 앙크(ankh, 생명의 열쇠)를 들고 있는 크놈신(Khnum,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이다)의 형상도 찾아볼 수 있다.

 

 

 

1탑문 너머의 안뜰(中庭) 모습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면 한가운데에 2탑문을 놓고 양쪽에 열주들이 늘어서 있는 모양새이다. 아니 다른 점도 있다. 오른편의 열주들은 회랑을 만들고 있는데 반해 왼편 열주들은 기둥의 아래에다 벽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중간에는 창문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열주들이 늘어서있는 오른편 회랑에는 여섯 개의 방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토트(Thoth, 학문의 신)’세샤트(Seshat, 도서관과 글쓰기의 여신)’가 보호하는 신성한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왼편의 기둥들은 특별한 사연까지 갖고 있단다. 10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오른편과는 달리 왼편은 7개의 기둥만 서있는데 이는 호루스가 칠삭둥이라는 것을 나타낸단다.

 

 

열주 회랑(列柱 回廊)을 지나면 2탑문이다. 신전의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보면 되겠다. 2탑문은 높이가 12m로 앞의 것보다 규모만 조금 작아졌을 뿐 생김새나 부조된 벽화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신전 안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제단(祭壇)도 있었다. 뒤 벽면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집트의 모든 신전을 폐쇄시켰다고 한다. 이곳 이시스 신전도 540년에 폐쇄되었는데, 이후 기독교 분파인 콥트교의 교회로 사용되었단다. 저 제단도 당시에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참고로 꼽트교란 이집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분파로 451칼케돈공의회에서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가 이단으로 단죄된 데 반발해 로마교구에서 독립했으며, 현재 이집트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시스 신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지성소(至聖所, Holy of Holies)‘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신전의 가장 은밀한 곳에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이시스가 오시리스에게 앙크 십자가를 넣어 부활시키는 장면과 어린 호루스에게 젖먹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호루스가 이시스에게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이시스(Isis)’ 여신이 남편인 오시리스(Osiris)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호루스(Horus)‘를 돌보는 그림에 대한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시리스의 부활을 도왔다는 네프티스의 모습도 보인다. 오시리스를 나타내는 사자(死者)의 관 양쪽 끝에는 흔히 이 두 여신의 모습을 그린다고 한다.

 

 

특히 이시스(Isis)‘ 여신의 부조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이시스라는 이름의 표의문자인 옥좌(玉座)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소의 뿔 사이에 원판(圓板)을 놓은 관()을 쓰고 있다. 참고로 이시스 여신에 대한 신앙은 이집트 지역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시스교()로서 소 교단을 형성하고 독특한 비의(秘儀)를 갖기에 이르기도 했단다. 또한 그리스 사람들은 그녀를 데메테르, 헤라, 셀레네, 그 밖에 아프로디테와도 동일시했다.

 

 

 

신전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젠 부속건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이시스 신전의 뒤, 나일강 앞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Temple of Augustus, 사진의 앞쪽 건물)’디오클레티아누스 문(Gate of Diocletianus)’이 자리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문(Gate of Diocletianus)

 

 

이시스신전의 동쪽에는 오시리스 신화와 관련이 있는 하토르 신전(Temple of Hathor)’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는 트라이아누스의 정자(Kiosk of Trajanus)’가 있었다.

 

 

하토르 신전(Temple of Hathor)

 

 

트라이아누스의 정자(Kiosk of Trajanus)이다, 필레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건물로 종려나무와 파피루스 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된 14개 기둥이 시선을 붙든다.

 

 

부조의 생김새로 보아 이곳이 ‘Graeco-Roman blocks by the temple of Hathor’가 아닐까 싶다. 멤피스의 야외박물관에서 보았던 하토르 여신의 두상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하는 말이다.

 

 

20세기 초반 영국에 의해 아스완댐(low‘dam)이 건설되면서 우기 때만 되면 필레신전의 기둥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건물 아랫부분의 색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 아킬리카 섬으로 옮긴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원형을 유지하며 신전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질키아 섬의 화강암을 폭파하고 제거하여 필레 섬과 동일한 지형을 조성한 후 유적 전체를 분해해 옮긴 후 재조립했단다.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섬 전체를 옮겨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주어진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신전의 곳곳을 둘러봤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고, 그런 다음에는 사진 찍을 곳을 찾아 두서없이 돌아다녔다. 결과는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하긴 나일 강의 진주라는 칭송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받았겠는가. 하물며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떻게 호수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겠는가. 건물 전체를 분해해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며 퍼즐을 맞추듯 복원하는 수고를 마다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 필레 신전은 누비아 유적(Nubian Monuments)‘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79)되어 있다. 포함된 범위는 아부심벨에서 필레까지(from Abu Simbel to Philae)‘이다. 이집트의 남쪽 끝, 수단과의 경계 지역인 누비아 지역에 있는 고대 유적으로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세운 필레 신전이 대표적이다. 두 유적 모두 1960년대 아스완 하이댐(Aswan High Dam)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안전한 장소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야외에는 관람석도 만들어져 있었다. ’필레 신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빛과 소리의 축제(Light & Sound Presentation)‘의 부대시설이 아닐까 싶다.

 

 

사원을 돌아다니다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필레의 첫 번째 사원과 전시된 다른 블록의 잔해(Remains of the first temples of Philae and other blocks on display)’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기존의 사원을 조각조각 내어 이곳으로 옮긴 다음 원래대로 다시 조립해놓았다니 이 안내도는 현재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집트 여행을 하려면 먼저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이시스신화부터 알아보는 게 좋다. 그래야만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남긴 유적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네트(Net)‘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다. 첫째가 오시리스(Osiris), 둘째가 이시스(Isis), 셋째는 세트(Seth) 그리고 막내가 네프티스(Nephthys)로 오빠인 오시리스와 이시스가 결혼하자 세트는 신들의 왕좌를 형에게서 빼앗고자 오시리스를 죽이고 그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나일 강 전역에 버린다. 남편의 시신을 찾아 이집트 전역을 다니며 모아 온 이시스는 남편의 시신 12조각을 동생 네프티스와 함께 부활시키고 그와의 사이에서 이집트의 신이자 인간의 왕인 호루스를 낳게 된다. 폭풍과 전쟁의 신 세트는 호루스의 탄생을 알고 어린 호루스를 죽이고자 뱀이 되어 그를 물었으나 지혜의 신 토트(Thoth)‘의 도움으로 이시스는 아들을 지켜낸다. 그리고 결국에는 호루스에 의해 세트는 죽임을 당한다. 이후 이집트 통일 왕국의 모든 파라오들은 자신들을 살아 있는 호루스로 칭하였고 이시스 여신을 자신들의 왕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앙했다. 참고로 이시스 여신은 오랫동안 하토르(Hathor, 호루스의 아내)‘ 여신과 혼용되어 오다가 AD 4세기 이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