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37코스(합산마을 버스정류장-하사6구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9. 23()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및 백수읍 일원

여행코스 :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월평항두우리 염전당두마을상정마을창우항하사6구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7km, 실제는 15.35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7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걷는다. 장점은 볼거리로 넘친다는 것. 칠산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은 기본,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염전과 드넓은 갯벌을 가득 채운 풍력발전기는 양념이다. 거기에 백바위해변의 빼어난 경관이 방점을 찍는다.

 

 들머리는 합산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22번 국도와 808번 지방도, 77번 국도를 갈아타고 들어오다 양일마을 경로당(염산면 봉남리)’ 앞에서 칠산로5로 옮기면 잠시 후 합산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영광37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염산방조제와 칠산로5길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번 구간도 간척사업과 인연이 깊다. 방조제의 둑길이 아니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염전이나 들녘을 횡단한다. 거리는 다소 긴 19.7km, 그게 부담스러운 나는 택시를 불러 5km(집사람은 7.5km)를 이동(같은 코스로)했다. 하지만 5만원이란 거금을 지불했으니 권장할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실제 출발지는 운곡마을(雲谷, 염산면 야월리) 앞 방조제(첨부된 지도에서 야월리 서쪽 해안의 툭 튀어나온 지점). 37코스의 시점에서 4.87km쯤 떨어진 지점이다. ‘월평항에서 2.5km쯤 더 나간 지점이기도 한데, 칠산갯길 300(천일염길)의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나 현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안내판 너머로 검붉은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사리 때는 10km나 떨어진 각씨도까지 경운기를 타고 가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척사업이 빚어놓은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바둑돌처럼 놓인 비작도를 위시한 작은 섬들, 그 섬들을 잇는 방조제가 바둑판의 선이라도 그리는 양 여백을 가득 채운다.

 칠산바다 갯벌은 지금 가을빛으로 물든 칠면초로 한가득이다. 그 뒤로는 작은 섬들이 둥둥. 이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 그림을 보기 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곳까지 왔다. 집사람을 핑계 삼아 생략해도 될 것을 5만원의 거금까지 들여가면서 말이다.

 11 ; 47. 방조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가음산(206.2m)을 정면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염산면의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앞바다의 작은 섬들을 줄줄이 방조제로 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생긴 들녘은 대부분 염전. 이게 또 경제성을 잃으면서 대하양식장으로 업종을 바꿨다.

 왼편은 칠산바다의 갯벌, 그런데 바다의 폭이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염전에서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가음산 자락의 농경지. 누렇게 익은 벼가 게으른 농부를 애타게 부른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한 염전이 뒤를 잇는다. 가을볕 아래 소금 알갱이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영광의 대표적 풍경의 하나라 하겠다. 참고로 영광 앞바다에 펼쳐진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라고 했다. 생산되는 소금도 미네랄이 풍부해 질 좋은 소금으로 정평이 나 있단다.

 12 : 09. 내만처럼 파고들던 바다가 방조제(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6.8km)를 만나면서 끝난다. 저 둑을 경계로 야월리에서 두우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저수지다. 저 물은 염전에 생명수로 공급된다.

 저수지에서 턴을 한 탐방로는 다시 방조제를 따른다. 바다를 향해 되돌아오는 모양새라고 하겠다.

 둑길을 200m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두우리의 염전 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지명(地名) 자체가 이미 소금 산(鹽山)’인 곳, 얼마나 소금밭이 컸으면 칠산 바닷물이 70리길을 들고 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첫 만남은 영백염전이다. ‘1회 전국 염전콘테스트에서 영예의 대상까지 수상한바 있는 50년 전통의 전통갯벌염전으로 소금 모으기, 운반하기, 수차 돌리기 등 염전 체험도 가능하단다.

 소금은 4월부터 10월까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매일 생산되는 건 아니고, 소금 알갱이가 영글어야 거두어들일 수 있다. 소금밭 두렁을 서성이는 저 염부는 그 때를 헤아리고 있을 게고...

 염전이 단지를 이루다보니 군내버스도 정기적으로 다닌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듯 버스정류장은 오토바이 차지가 되어버렸다.

 길 양옆으로 소금밭이 도열해 있다. 염전이 단지를 이루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화학물질 오염원인 농지와 거리를 둘 수 있어 친환경 소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야 칼슘·칼륨·마그네슘 등 필수 미네랄 함량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는 한국산 천일염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음식의 깊은 맛을 위해서는 국산 천일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그게 저 소금밭에서 염부들의 노력을 보태가며 얻어지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염전은 바닥을 타일이나 옹기로 깐 장판염이라고 한다. 햇빛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 염전은 크게 저수지와 증발지, 결정지로 구분된다. 염도 35(퍼밀·1000분의 1)의 바닷물이 각 구획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되고 염도는 높아진다, 결정지에 이르면 200 이상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에서 소금 결정이 생성된다. ‘꽃이 핀다고 표현되는 이 단계까지 오는 데 약 1개월이 걸린단다.

 비작도 쪽으로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런 풍경은 사진작가들에게 훌륭한 낚시감이 된다. 해가 뜨고 질 무렵 염전 풍경을 렌즈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양 옆구리에 염전을 낀 길은 1.4km나 이어진다. 하도 길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맞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영광은 신안에 이어 지역 대표 천일염 생산지 중 하나다. 천일염 전국 소비량 기준 약 17~18%가 생산된다. 오죽했으면 면의 이름까지 소금 산(鹽山)이 되었겠는가.

 12 : 32. 정자 둘이 나란히 서있는 둑에 올라섰다. 정자 뒤, 길게 뻗어나가는 방조제 끄트머리에는 비작도가 놓였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꼬맹이 섬이다. 그 오른편으로는 칠산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함평만을 벗어난 바다는 썰물이 한창인지 갯벌이 하늘 끝에 닿았다. 간척지도 망망한 염전. 저절로 가슴이 시원해진다.

 저 갯벌은 국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등이 매기는 갯벌 평가에서 매년 1위를 차지한단다. 겨울 북풍이 불 때 격한 파도가 치면서 바다 밑 뻘을 모두 쓸어가고, 다시 봄부터 새로운 뻘이 내려앉는 지형적 특징 덕분이라나?

 방조제를 따라 당두마을로 간다. 소금밭과 갯벌을 양옆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두우리의 저 싱싱한 갯벌은 영양가 높은 플랑크톤이 풍성해서 고기 떼가 몰려오고, 어패류도 쑥쑥 자란다. 봄에는 실뱀장어, 여름~가을엔 숭어와 새우 꽃게, 가을부터 늦겨울까진 김장용 새우가 잡힌다.

 생태계 복원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도 보인다. 모래 날림으로 인한 염전 피해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퇴사울타리와 대나무 방풍책을 설치했다. 자생 수목인 해송으로 방풍림도 조성했다. 그런 노력이 인정받아 산림청 주최 전국 우수 산림생태복원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간척지 방향은 옷을 바꿔 입었다. 소금밭을 지나자 진초록 대파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생명력 넘치는 푸른빛이다.

 당두마을로 가는 방조제는 꽤 길었다. 덕분에 우린 서해바다를 실컷 보게 된다.

 서해바다는 다도해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 섬 십여 개가 군데군데 보일 뿐 나머지는 일직선의 수평선이다. 그 많던 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위해 섬과 섬을 연결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잃었다.

 12 : 53. 배수갑문을 지나 두우리 어촌마을체험관에 이른다. ‘두우리 8km나 되는 해안선을 자랑한다.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7~12km나 걸어 나갈 수 있는 갯벌도 자랑거리다. 그러니 많은 주민들이 어촌계를 중심으로 갯벌을 부치며 살아갈 것은 당연. 그런 삶은 1973 KBS TV 연속극 두우리 녀석들로 소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체험관은 문이 닫혔다. 그 이유는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앞 갯벌에서 갯벌양식장 환경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합의 지속적인 자원관리를 위해 무단출입을 금한다니, 어찌 체험객들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체험관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9.9km/ 시점 9.8km) 37코스의 반을 걸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난 5km를 택시로 이동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인 셈이다.

 12 : 56. 200m 남짓 더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칠산갯길 300 이정표는 두우리해수욕장까지 1.07km 밖에 남지 않았다며 곧장 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당두마을’. 천일염으로 유명한 두우리(斗牛里) 3개 자연부락(당두·상정·창우) 중 하나로, 마을 뒷산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닭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당두(堂斗)’로 변했다. 그 왼쪽은 상정마을이다.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자와 같다고 해서 상정(上亭)’이란 지명을 얻었다.

 13 : 00. 77번 국도로 올라서 상정마을을 관통하는데 이때 원불교 마크가 눈에 띈다. 맞다.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다. 박중빈 대종사의 생가인 구호동 집터를 비롯해 기도터였던 마당바위,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노루목대각지까지 모두 영광에 있다.

 시골 마을치고는 제법 번화한 모양새이다. 펜션과 민박에 식당, 마트까지 갖출 것은 다 갖췄다. 백바위해수욕장과 인접해있다는 지리적 요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상정마을 버스정류장. ‘실뱀장어 채포 허가권에 대한 해양수산부 답변이 붙어있었다. 민물에서 사는 뱀장어는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한다. 때문에 장어 양식장에 공급할 치어(실장어)를 바다에서 잡아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그물(낭장망 어구)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튼 실장어잡이는 불법이 성행한다고 했다. 실장어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모기장 같은 극도로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 실장어뿐 아니라 모든 치어를 깡그리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상정마을 정자는 칠산바다에 대한 조망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칠산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잘못 잡았다. 도로 건너의 바닷가 언덕에 얹어놓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상정마을을 지나 백바위 해변까지는 기분 좋은 산책로였다. 77번 국도(칠산로)의 갓길에 나무데크를 깔았다.

 중간에 전망대까지 만들어두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칠산바다를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인 듯, 하지만 웃자란 잡목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13 : 14. 빼어난 경관으로 입소문을 탄 백바위해수욕장에 이른다. 입구의 울창한 노송 숲은 자랑거리, 백사장도 제법 넓은데다 모래 입자가 무척 곱다. 덕분에 모래사장이나 갯벌에서 씨름·닭싸움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갯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한단다. 영광군에서 천일염·갯벌축제를 연다니 일부러라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겠다.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다. 모래사장 너머의 갯벌은 호미로 헤집는 자리 어디서든 백합과 고둥이 나올 만큼 생태가 건강하다고 했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은 자동차 캠핑족들로 붐볐다. 그동안 서해랑길을 걸으며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칠산바다가 그만큼 곱다는 얘기가 아닐까?

 백사장 너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백바위(白巖)’라는 지명을 낳게 한 풍경이다. 해안가에 거대한 흰 바위 무리가 갯벌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바위 끝에 올라앉은 정자가 풍치를 더해준다. 이곳 백바위해안은 낙조의 명소라고 했다. 정자와 한데 어우러지는 낙조의 색감도 훌륭하지만, 인적을 드물어서 감동적인 낙조풍경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란다.

 백바위는 예쁘장한 나무다리로 연결되고 있었다. 조형미 넘치는 아치를 배경삼은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참고로 백바위는 무슨 특별한 전설이 있는 게 아니다. 바닷가에 둘러싸여 있는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

 13 : 24. 또 하나의 다리(조금 전보다 한참이나 작다)를 건너자 백암정(白巖亭)’이란 정자가 반긴다. 쉼터는 기본, 낙조를 바라보는 전망대를 겸했다. 거기에 뒤로 물러설 경우 낙조 풍경의 중심이 된다니 이만하면 다목적 정자라 하겠다.

 정자에 오르면 저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하다. 맞다. 두우리 앞바다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볼거리다. 마을 앞 10~20km 안에 영광굴비가 잡히는 칠산도, 한국관광공사가 아름다운 섬으로 꼽은 송이도, 영화 마파도 촬영장소인 각이도 등 20여개의 유·무인도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 영광 앞바다는 산처럼 보이는 일곱 개의 저 섬들이 있다하여 칠산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는 조기들의 고향이었다. 3월에서 4월 무렵, 산란을 위해 회유하는 조기 떼들로 바다는 넘실거렸고,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물 반에 고기 반, 사흘 동안 조기를 잡아 평생을 먹고 산다는 '사흘칠산'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자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다리 건너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커다란 백바위를 우회해 숲속으로 들어선다.

 13 : 30. 잠시 후 임도(이정표 : 종점까지 8.3km)로 올라 뒷산(81.6m)을 에도는 해안도로를 탄다. 이때 칠산바다의 고운 풍광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마침 오가는 차량도 없으니 실컷 눈에 담으면 될 일이다. 오죽 안 다녔으면 칡넝쿨이 도로 가운데까지 퍼졌을까.

 호젓하고 편안한 길은 주변까지 꽃밭으로 만들었다. 노란 금계국과 하얀 들국화가 더미를 이룬다. 그게 아스라이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저게 바로 칠산이란 지명을 낳게 한 섬들이다. 그런데 섬이 여섯 개 뿐이다.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일곱 개로 나타난답니다.’ 젊은 도반이 너스레를 떤다. 그럼 난 마음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백암정이 눈에 들어온다. 백바위 해변은 노을이 없는데도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하얀 바위가 넓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흡사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뒷산 자락의 바닷가, 나 홀로 외로운 등대도 잠깐으로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높이 11.5m(직경 1.8m)의 흰색 원형강관조로 인근을 항해하는 어선의 주·야간 항행지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13 : 45-59. 뒷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 끝자락에 정자가 걸터앉았다. 칠산바다와 백수읍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쉼터 겸 전망대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가져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칠산바다 조망, 하늘과 바다를 반반으로 나누는 선, 그 위에 고만고만한 섬 여섯 개(정확히는 일곱 개)가 놓여있다. ‘! 피라미드처럼 생겼네?’ 코로나의 만연으로 입국 여부가 불투명하던 시절, 우리부부는 이집트를 여행 중이었다. 당시 기자지역의 사막에서 바라보던 피라미드가 문득 떠올랐나 보다.

 백수읍 갯벌에 늘어선 풍력발전기 무리도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들녘을 가득 메우며 단지를 이룬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14 : 02. 임도를 벗어나 창우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이 푸른 바다(칠산바다)에 둘러싸여있다 하여 푸를 창()’자를, 소를 닮았다는 마을 뒤 한우산에서 소 우()’자를 따와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잠시 후 이른 창우항(이정표 : 종점까지 6.5km)’은 바다를 삶의 현장 삼아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선착장이다. 하지만 널찍한 물양장에다 크레인을 두 대나 갖춰 웬만큼 크다는 항구가 부럽지 않다. 커다란 창고와 어민회관도 눈에 띈다. 지역맞춤형 소득증대사업인 어촌뉴딜 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선착장에는 꽤 많은 고깃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인근 해역에 조기·꽃게·가오리·서대·새우 등 바다자원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맞나보다.

 창우항을 지나면 불갑천의 둑길을 탄다. 널따란 갯벌 위로 둑길이 뱀처럼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다. 갯벌 사이 고인 물에 햇살이 비치자 물고기 비늘처럼 번쩍인다.

 창우항을 돌아온 갯골은 깊고 긴 물 빠진 갯고랑을 불갑산 자락까지 끌어간다. 그래서 하천의 이름까지 불갑천이 되었다. 이즈음 갯벌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흰 갈매기 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갈대가 아니라 억새랍니다 둑길의 자취까지 지울 듯 잠식해오는 웃자란 억새를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초본(草本) 교육을 톡톡히 받았다.

 드넓은 갯벌은 온통 풍력발전기 차지다.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두우리의 국공유지 20여만 평에 해상풍력발전을 중심으로 에너지 융복합 산업플랫폼을 구축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해상풍력발전이란 풍력 터빈을 호수나 피오르 지형, 연안 같은 수역에 설치해 그 곳에서 부는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회전날개에 의한 기계에너지로 변환해 전기를 얻는 발전방식을 일컫는다.

 저 강태공은 시간이 아니라 운저리(‘망둥어 꼬시래기로도 불린다)’를 낚는 중이라고 했다. 36구간의 무미건조했던 대화가 떠올랐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한마디 더 건네 본다. ‘그럼요. 얼마나 맛있고 식감이 좋은데요’. 회로도 먹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불갑천이 좁아지더니 소하천으로 변했다. 아니 저건 염전에서 사용할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일종의 수로이다. 아무튼 건너편에서 둘레길 도반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출발지 부근처럼 이곳도 자 모양으로 길이 굽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염전이 들어서 있는 게 당연. 소금 만들기가 끝물이어서 일까? 염전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저 소금밭에는 흰 소금 대신 붉은 칠면초가 자라고 있을 게다. 쓸쓸한 분위기로 대변되는 염전의 겨울 풍경...

 14 :37. ‘자형 수로의 끝(이정표 : 종점까지 4.3km)에 이른다. 저 둑을 경계로 서해랑길은 송암리(같은 염산면)’로 넘어간다.

 방조제 안쪽은 커다란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 역시 염전에 공급할 바닷물을 가두어두는 곳. 거기에 대하양식까지 겸하고 있는 듯 통발모양의 어망이 쳐져 있었다.

 저수지를 지난 서해랑길은 이제 반대편 둑길(이정표 : 종점까지 4.1km)을 탄다.

 영광은 ‘Green Energy’의 메카다. 원자력에 풍력, 태양광까지 탈 탄소를 위한 발전시설을 모두 갖췄다. 나머지 2%는 조력(潮力)으로 채워 넣으면 완벽해지지 않을까?

 태양광발전소와 농경지 사이를 걷던 서해랑길이 다시 둑길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풍력발전기 사이사이를 걷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다가가 본 발전기는 멀리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구조물이다. 누군가는 저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불갑천 주변은 저수지나 염전, 양어장, 수로가 많다. 그래서 사방 천지가 물이다. 물에 비치는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15 :02. 탐방로가 함께 걸어온 불갑천과 헤어지잔다. 그리고 이정표(종점까지 2.5km)가 가리키는 들녘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또 다른 들녘을 횡단한다.

 15 : 14. 77번 국도(이정표 : 종점까지 1.6km)에 닿았다. 영광풍력발전() 사옥이 있는 지점이다. 영광풍력은 국내 최대 규모인 140MW(메가와트)급의 서해안 윈드팜(Wind Farm)’이다. 72천 가구가 사용 가능한 26MWh(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111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단다.

 탐방로는 국도로 올라서지 않은 채 왼쪽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었다. 그 끝에서 불갑천을 만났기 때문이다. 불갑천의 물길은 분명 좁았다. 그렇다고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니 애초부터 다리를 건너는 게 옳은 선택일 것이다.

 불갑천과 맞닥뜨린 우린 다리(불갑천교)로 올라갈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길을 만들었고, 가드레일을 넘어 다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염산면과 백수읍의 경계를 이루는 다리 아래로는 불갑천(佛甲川)’이 흐른다. 불갑면 자비리의 노은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길이 32.5km의 물줄기이다.

 15 : 28.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난 농로로 빠져나간다. 가드레일을 잘라 통로를 만들었는가 하면,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0.9km)까지 세워놓았다. 이럴 거라면 애초부터 다리 위로 인도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누렇게 익은 벼들로 한껏 풍성해진 들녘을 양옆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5 : 40. 하사리(下沙里)의 자연부락인 염전마을(하사6)’에 이르면서 37코스는 끝을 맺는다. 1952년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하나 더, 종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마을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 트레킹 날머리로는 이만 곳이 없었다.

 서해랑길(영광 38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농로가 백수로와 맞닿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칠산갯길 300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염전길에서 백합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15.35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36코스(향화도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

 

여행일 : ‘23. 9. 9()

소재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향화도항염전(옥실리)신흥마을내묘마을설도항합산항합산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4.13km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6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방조제를 시종여일 걷는다. 이때 물때에 맞춰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갯벌을 실컷 눈에 담게 된다. 자칫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칠산바다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눈요깃거리로 삼다보면 트레킹은 어느새 끝을 맺는다.

 

 들머리는 향화도항(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으로 들어온다. 신풍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22번 국도(함평방면), 종산교차로(영광읍 신하리)에서 808번 지방도(염산방면), 봉전교차로(염산면 상계리)에서 77번 지방도(해제방면)를 번갈아 타며 30km쯤 들어오면 향화도항에 이른다.

 칠산바다의 해안선, 아니 방조제의 둑길을 걷는 14km 길이 코스다. 오늘은 전 구간을 다 걸어보기로 했다. 앞세운 집사람과의 거리는 3km, 조금만 재촉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서해랑길(영광 36코스) 안내도는 칠산 갯길 300 탐방안내도와 함께 버스정류장(칠산타워) 옆에 세워져 있다.

 11 ; 28. 향화로를 따라 포구를 벗어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20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13.7km/ 시점 0.3km)에서 방향을 틀어 방조제로 간다.

 이때 칠산바다에 떠있는 목도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또 둘이 하나로 돌아오는 요술 섬이다.

 옥실리 앞바다, 무동력선 여러 척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바다를 삶의 현장삼아 살아가는 어부의 작업장이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대무마을(옥실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서해랑길 36코스는 이런 방조제들을 번갈아가며 걷는 여정이다.

 고개를 돌리자 향화도항이 눈에 들어온다.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항구는 제 기능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영광권역 해안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칠산타워만큼은 요지부동이다. 함평만과 칠산바다가 한꺼번에 조망되는 높이 111m의 전망대에 올라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들녘은 아직도 염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웃자란 갈대가 숲을 이룰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방조제가 끝나자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방조제는 아니지만 해안을 따라 길이 나있다.

 이즈음에서 우린 닭섬(kakaomap 닥섬으로 적었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닭을 닮았다는 섬이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섬은 민닭섬이다. 등대 위로 떨어지는 일몰로 유명한 곳이다.

 11 : 40. 길이가 700m쯤 되는 두 번째 방조제는 송촌마을(옥실리) 앞을 지난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은 염전으로 가득하다. 맞다. 영광군의 염전은 568ha로 전남 서남해안 염전(3007ha) 중 신안군 다음으로 많다. 소금도 전남 전체 생산량의 19%를 차지한다. ‘소금 염(), 뫼산()’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근원이기도 하다.

 토판염전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흙판에서 소금을 만드는 친환경적인 토판염은 장판염전에서 추출한 소금보다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염도가 낮은 데다 맛도 순해 요리에 그만이다. 그러나 장판염보다 품이 많이 들고 생산 날 수도 훨씬 짧아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후쿠오카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 때문에 시끄러운 요즘. 사재기로 인해 금값이 된 소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그런데도 저 소금밭은 왜 놀리고 있는 것일까? 경제성을 이유로 토판염전이 장판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공간은 대하양식장 차지다. 오래 전, 소금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린 많은 염전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당시 선택했던 대체업종이 바로 저 대하양식이었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칠산 바다가 펼쳐진다. 연평도와 더불어 그 옛날 조기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1 : 50. 방조제는 장고도(이정표 : 향화도에서 2.67km)’를 만나면서 끝난다. 간척사업이 바닷가 작은 섬을 뭍으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비탈이 심했던지 길은 신흥마을 쪽 내륙으로 에돌아간다.

 칠산 갯길 300의 탐방안내도가 눈에 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걷기 열풍에 동참한 영광군이 조성한 둘레길이다. 모두 5개 코스(굴비길·노을길·백합길·천일염길·불갑사길)로 나뉘는데, 이중 불갑사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해랑길과 일치한다. 하나 더, 오늘은 4코스인 천일염길(향화도항-설도항-야월리염전-백바위해수욕장)’을 따라 걷게 된다.

 잠시 후 옥실4에 이른다. kakaomap 신흥마을로 표기하고 있으나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신옥·와룡·내묘·송정·미동·소무·송촌·대무)에는 끼지 않는다. 새로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꽤 넓은 담수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칠산대교와 칠산타워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향화로2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가다 한우사육장인 성율농장(이정표 : 향화도에서 2.9km)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넘어 또 다른 방조제로 올라선다.

 꼬맹이 방조제를 지나면, 이번에는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아니 곶부리와 곶부리를 잇는 게 방조제일지니 반대편 곶부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쥐섬이 눈에 들어온다. 생긴 게 쥐를 닮았는지는 몰라도, 생쥐만큼이나 작은 섬이다. 땅 투기로 뜨겁던 시절, 친구는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를 가보지도 않은 채 샀었다. 지금까지도 애물단지로 남아있다던 섬이 저런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 08. 미동마을 앞 방조제로 올라선다.

 길이가 500m쯤 되는 방조제는 꽤 너른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미동마을과 송정마을 등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도 둘이나 된다.

 입질은 자주 있나요?’. ‘이제 막 왔답니다’. ‘뭐가 잘 잡히는가요?’. ‘안 잡아봐서 몰라요’. 강태공의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무미건조한 대화가 되어버렸다. 4년쯤 전 튀르키예의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난 강태공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었고, 당시 난 팔뚝만한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방조제가 끝나고 잠시지만 해안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잠시 후 해안에 다시 닿는다.

 12 : 20.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칠산갯길 300에서 이정표(장고도에서 2.96km)를 세워놓았다. 산자락을 향해 길이 나있는데도 서해랑길 방향표시는 오른쪽으로 가란다. 길이 끊겨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집사람을 따라잡은 기념으로 한 컷. 활짝 웃는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녀 뒤로 칠산바다가 펼쳐진다. 칠산바다는 꽃게··조기·새우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한다. 이들은 아까 거론한바 있는 천일염과 만나 젓갈·굴비 등 2차 가공품으로 재탄생되어 영광 수산업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서해랑길은 바닷가와 이별을 고한다. 장고도에 이어 두 번째인데 내묘마을(옥실리)’을 향해 내륙으로 파고든다.

 썩 넓어 보이지는 않은 간척지는 갈대로 한가득이다. 아직도 염기가 덜 빠져나간 모양이다.

 잠시 후 이른 내묘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 옥실리(玉瑟里)’를 형성하는 8개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고양이 머리를 닮았다 하여 괴머리라 불렀으며, 그 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묘라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꼬맹이 마을인데, 두어 곳은 아예 폐가로 방치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움 인정과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팔불여(八不如)를 말했다. 그중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영광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저런 풍경이라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마을 뒤 고갯마루를 넘으면 또 다른 방조제가 반긴다. 길이가 1.5km나 되는 긴 방조제다.

 12 : 39-49. 둑길이 하도 길다보니 쉼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저런 정자가 세 개나 길손을 맞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 논농사로 업을 삼는 신옥마을과 신오마을 등 옥실리와 오동리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앉았다.

 일주일 후면 추분(秋分). 둑길도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가을의 전령 인 물억새, 가을이 깊어갈수록 색이 짙어진다는 갈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KBS-2TV 건강 혁명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도 눈에 띈다. 2년 제작 과정의 장기 프로젝트로, 전국에서 모집된 30여명의 당뇨 환자들이 매월 23일의 캠프를 차리고 설도항의 아름다운 해변을 걸으며, 운동법·식습관·생활습관 등의 미션 수행을 통해 당뇨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던 프로그램이다.

 13 : 02. 젓갈 생산지로 유명한 설도항(雪島港)’으로 들어선다. 멸치며 민어, 조기 등 수산물을 깔아놓은 좌판이 주욱 늘어서 있고 갈매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는 작은 포구다. 하나 더, 설도는 원래 와도(臥島, 사람이 누워있는 모양새란다)라는 조그만 섬이었다. 1930년께 설도관문이 건설되면서 육지의 바닷가로 변했다. 이 와중에 누운섬 눈섬이 되었고, 이게 또 한자로 변환되면서 설도(雪島)로 굳어졌다.

 자그마한 포구는 선착장도 아담하다. 하지만 통통배부터 중형의 고기잡이배까지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크기나 숫자는 서해안답지 않게 컸다. 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수산물의 양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설도는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6.25 전쟁 중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됐다. 그 현장에 기독교인 순교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독교인 순교탑을 세워 놓았다.

 설도항은 젓갈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만고만한 젓갈 가게들이 줄지어 섰다. 하지만 내 집에 들든 네 집에 들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객행위가 없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 구입해도 맛과 가격이 같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여담 하나, 옛날 농사와 고기잡이를 함께 해야 하는 갯마을 어머니들에게 반찬 마련은 이중고였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젓갈이다. 새우·송어 등 재료가 흔했고, 거기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설도항의 명물 젓갈타운은 고깃배 모양으로 따로 지었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꼴뚜기·조개·멸치 등 각종 수산물에 천일염으로 간한 다양한 젓갈을 팔고 있음은 물론이다. ‘잡젓도 그중 하나. 황석어젓·밴댕이젓·곤어리젓으로 잡젓을 만들고, 풋고추를 담가 석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밥도둑이 따로 없단다.

 수산물판매센터는 젓갈타운과 함께 설도항의 주축을 이룬다.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활어와 꽃게·왕새우·낙지 등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안강망이나 닻자망으로 잡은 수산물을 수협을 거치지 않고 어민들이 직접 판매하기 때문이다.

 입주 상점들은 하나같이 영세했다. 커다란 수족관으로 치장된 다른 수산시장들과는 달리 작은 고무통들만 눈에 띈다. 그나마 수산물을 반도 채우지 못했다.

 13 : 10.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염산방조제의 둑길을 걷는다. 직진으로 뻗은 길은 차 한 대가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앞뒤로 오가는 자동차를 유의해 다니는 편이 좋다.

 이 구간은 자전거로 달려 볼 수도 있다. 염산면사무소에 비치된 약정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자전거(안전모와 무릎보호대 포함)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사전예약도 가능하단다. 참고로 자전거 둘레길은 설도항에서 봉양들까지의 방조제(7km)와 염전 및 청보리밭을 감상할 수 있는 농어촌도로(5km)를 합쳤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남도의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젓갈과 자연산 횟집으로 유명한 설도항에서의 먹거리는 덤이다.

 오른쪽으로는 방조제를 쌓아 만든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 봉덕산(295.6m) 자락에는 염산면 소재지인 봉남리가 들어앉았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봉남평야가 펼쳐진다. 1930년대 설도를 사이에 두고 옥실리와 야월리 방향으로 각각 방조제를 쌓았다. 이때 저 들녘이 생겨났고, 설도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봉양들로 가는 방조제를 걷는다. 바다를 향해 줄곧 달린다고나 할까? 하나 더, 이 구간 역시 건강 혁명의 촬영지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길가 들녘에서 생산되는 찰쌀보리·새싹보리·보리빵과 영광의 특산물인 청보리 한우·굴비 등이 제공됐다.

 졸지에 한나라의 공주로 둔갑해 남흉노로 시집가던 왕소군은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유래다. 하지만 난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를 외친다. 여름철에 피어야할 금계국이 입추가 내일모래인데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봄꽃인 민들레도 한 몫을 거든다. 하지만 국내 산천을 접수해버렸다는 서양민들레가 아닌 순수 토종민들레로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꽃받침(총포)이 뒤로 젖혀져 있지 않고 곧게 감싸고 있으면 토종민들레라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쯤 걸었을까 농경지가 끝나는가 싶더니 들녘이 온통 물 밭으로 변해버렸다. 커다란 합산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저수지들이 줄을 이룬다. 양식시설이 집단으로 들어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40. 지자체도 이때쯤이면 다리가 뻐근해질 것임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 이곳은 단축코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점이기도 하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을 에돌지 않고 간척지 들녘을 횡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1.5km 정도가 단축된다.

 단축코스에 대한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이정표(종점 4.8km/ 설도항 2.3km)가 가리키는 종점 방향으로 간다. 집사람은 물론 단축코스를 선택했다.

 이즈음 썩 내키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간척지에 그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겠지만, 원자력을 축소하면서까지 장려된 점은 분명 문제다. 이는 발전단가를 상당히 높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시선을 조금이라도 옮길라치면 저만치 눈앞에는 어김없이 칠산타워가 놓여있다. 맞다. 이곳 영광의 랜드마크는 칠산타워라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아무리 해안 길을 빙글빙글 돌아도 눈앞에서 칠산타워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둑에 걸쳐놓은 저 시설의 용도는 대체 뭘까. 칠산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발아래는 끝없는 갯벌, 뻘 바다에 올라앉은 어선, 너른 개펄에 놓인 통발과 행여나 통발에 걸릴까 집게발 들고 조심조심 오가는 게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밋거리일 것이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다. 그나저나 가을이 무르익어가나 보다. 공활한 하늘은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쏟아지는 햇살은 화사했다. 그 푸름에 바다가 더해진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이 티가 되어버린다.

 간척지가 하도 넓다보니 대하양식장도 단지를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의 양식장들과는 달리 대하를 잡는 통발 모양의 어망도 눈에 띈다.

 바다에 타워와 다리가 겹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14 : 08. 드디어 바다를 향한 긴 여정이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이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곳(둘레길 자전거여행 안내도는 합산항으로 적고 있었다)을 반환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는 선착장(이정표 : 봉양들 3.16km/ 설도항 4.36km)이 만들어져 있었다. 쉼터용 정자도 들어섰다. ‘월봉마을 어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정박하고 있는 배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 건너는 무안군(해제면) 도리포, 그 사이에 김 양식을 위해 세운 지주가 숲을 이룬다. 맞다. 도리포 인근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이후부터는 조개산(118.2m)을 전방에 두고 걷는다. 대하양식장과 태양광발전소 등 아까 합산항으로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역순으로 펼쳐진다.

 집사람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둘레길 도반을 따라잡았다.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도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신다.

 건너편에는 37코스가 지나가는 월평항이 있다.

 길은 가음방저수지와 내남저수지, 봉양저수지로 연결되는 수로형 내만의 둑길을 따라간다.

 트레킹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음부터 여유로워진다. 그러자 누렇게 물들어가는 봉남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들녘이 있었기에 영광이 ‘4()’의 고장으로 불렸을 게고 그 속에 쌀이 끼어 있을 것이다.

 조개산(118.2m)이 성큼 다가왔다. 그 앞이 종점인 합산마을이다. 1927년 간척지가 조성되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봉남리(奉南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동촌·내남·합산·설도·한시·봉전) 중 하나로 합산(蛤山)’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조개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

 14 : 42. 합산갑문을 지나 합산마을 앞 도로(칠산로5)에 이르면 트레킹이 끝난다. 염산방조제의 끝이자 버스정류장(합산마을)에서 1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4.1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영광 37코스) 안내도는 방조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하나 더, 시작점 표시판은 안내도 기둥에 매달려 있다.

서해랑길 35코스(돌머리해변-향화도항)

 

여행일 : ‘23. 8. 26()

소재지 : 전남 함평군 함평읍·손불면 및 영광군 염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돌머리해변주포항대발마을석계마을농암마을월천방조제안악해변함평항향화도항(거리/시간 : 19km, 실제는 첨단양식장부터 13.47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5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평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함평군에서 영광군으로 간다. 덕분에 함평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트레킹 내내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안악해변의 꽃밭과 칠산타워의 조망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돌머리 해수욕장(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따라 함평방면으로 2km쯤 내려오다 양림교차로(함평읍 진양리)에서 주포로로 옮겨 4.5km쯤 들어가면 돌머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서해랑길(무안 35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는 19km 길이의 코스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6Km를 줄여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첨부된 지도의 석창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산악회의 배려로 중요 포인트인 돌머리해변과 주포항을 둘러봤으니 봐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동 중 들른 주포(酒浦), 옛 이름은 주항포(酒缸浦, 1865년 간행 대동지지 지명), 1900년대 초부터 주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신설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서해에서 잡은 수산물의 집산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단다. 그러니 주막이 많았을 것은 당연, 하지만 어선이 대형화 되는 1955년 이후 점차 사양화되어 폐항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1962년 돌머리해수욕장 개장으로 횟집이 늘어나면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곰삭은 엽삭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단다)’이란 특이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했다. 황실이(강달이준치·조기(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등도 주포항으로 모였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포구는 서너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뿐 한적하기 짝이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구가 떠오를 정도로...

 쇠락한 포구의 물양장은 텅 비었다. 하지만 옛날, 특히 배가 들어온 날의 주포는 북적거렸다고 한다. 만선의 풍어를 알리는 배는 오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주머니가 두둑한 어부들로 붐비던 주포는 술과 음식이 넘쳐나고 노랫소리가 드높았단다. 주포의 이름에 술 주()’자가 박혀있는 이유일 게다.

 돌머리해수욕장이 개장된 뒤로 찾는 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수산물 직거래장터를 열었다. 그 옛날 주포를 먹여 살리던 뱃사람들 대신, 이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 난간에 서면 함평만의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35코스가 시작되는 돌머리 해안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서해랑길을 답사하면서 걸었던 현경면과 해제면의 해안, 즉 곶부리로 점철되던 아름다운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석창리를 에돌아가는 해안이 있다. 중앙에 보이는 산은 두류봉’, 그 왼쪽 끝을 돌꼬리(돌고지)라 부른다고 했다. 석창리의 포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포구의 오른쪽은 주포방조제다. 동쪽 깊숙이 파고든 함해만을 가로막은 방조제로 이로 인해 장교리(함평읍)과 궁산리(염산면)에 드넓은 들녘이 만들어졌다. 저 방조제는 수랑개라는 지명을 만들기도 했다. 바다를 막은 간척지의 진흙탕 즉 질흙 투성이 갯가로 발이 술술 빠지는 수렁의 갯가라는 뜻이다.  수랑개 술항개를 거쳐 주포가 되었다는데. 낭만적인 이름으로 이보다 더한 이름이 있을까 싶다.

 포구 근처에는 한옥 전원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볼거리(함평만의 황홀한 낙조)와 놀거리(돌머리해수욕장), 먹거리(식당·카페)를 연계시킨 체류형 관광단지로, 50여 동의 한옥 가운데 30여 동이 민박으로 쓰이고 있단다.

 주포방조제 끄트머리에는 함평의 명물 해수찜 마을(손불면 궁산리)이 있다. 유황이 함유된 돌을 소나무로 달구어 데운 물로 찜질을 하는 곳인데, 함평의 바닷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간요법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해수찜은 따뜻한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아니다. 해수에 뜨겁게 달군 유황석을 넣은 물에서 나온 증기로 몸을 데우고, 그 물에 적신 수건을 몸에 덮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한 해수탕과는 완전히 다르다. 피부질환·신경통·당뇨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해수찜은 세종실록의 도자기 가마를 이용한 한증법을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가열한 유황석을 쑥·삼못초·뱀딸기풀 등의 약초가 담긴 해수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하는 것. 뒤뜰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유황석을 넣은 탕의 온도는 섭씨 7080.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찜질한다. 이렇게 하면 온천과 약찜의 효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실제 출발지는 첨단양식장 버스정류장(함평군 손불면 석창리)’이다. 돌머리해수욕장에서 811번 지방도를 타고 손불 방면으로 6km쯤 오면 나온다.

 11 : 20. 서쪽, 그러니까 함평만을 향해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적힌 첨단 양식장 300m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담수어 양식단지, 첨단시설을 갖춘 입주업체들은 식품안전관리시스템인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해 물질이 섞이지 않은 담수어(장어)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에는 둥근 반지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양식장에서 기르고 있는 장어를 형상화했는데, ‘대지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참고로 뱀장어는 함평군의 군어이다. 함평군은 이밖에도 군 나비인 호랑나비와 은행나무·춘란·비둘기 등을 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갖고 있다.

 줌을 당기자 돌머리해안이 성큼 다가온다. 둥그렇게 울타리를 쳐놓은 곳은 낙지 산란장(낙지목장이란 이름표를 달기도 한다)’일 것이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갯벌낙지의 보존을 위해 낙지 산란장 조성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함평면의 해안선을 따라간다. 그리고 종점인 향화도항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바닷가와 헤어지지 않는다. ! 앱은 서해랑길과 만나는 이곳을 시점에서 6.13km쯤 떨어졌다고 표시한다. 집사람 덕분에 오늘도 6km 정도를 단축한 셈이다.

 갯벌은 아직도 황토색이다. ‘황토 랜드라는 브랜드는 무안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함평의 바다도 맑고 고운 황토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물때를 맞춰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11 : 35. 해안선을 따라 700m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아니 둑길 옆에 월천항으로 가는 811번 지방도를 새로 내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왼편 둑길을 따른다.

 들녘 너머는 석계마을’. 법정 동리인 석창리(石倉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석계·해창·대발·농암·대덕·해안) 중 하나로, 군유산과 두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 마을 돌꼬리로 유유히 뻗어 나가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이 시냇물 같은 형국이라 하여 석계(石溪)’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석창리 어민회관이 있는 돌고지 선착장이다. 35코스의 시점인 돌머리와 상대되는 지명으로 돌머리와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돌꼬리(또는 돌고지)’로 불린다고 한다. 함평의 구릉지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두 곶(), 즉 돌머리와 돌꼬리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선착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석계마을과 농암마을을 거쳐 산남리 방조제로 연결된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기는 했지만 산남방조제로 가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돌꼬리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도로가 온통 헤집어져 있다. 하지만 바닷가를 따라 난 옛길이 선명해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눈을 들자 석창리 앞바다의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저 갯벌은 석화가 지천이라고 한다. 석화는 해풍에 맛을 키우고 갯벌의 영양분을 빨아 제 살을 불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석화는 바다의 인삼로 불릴 만큼 영양이 높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때면 맛과 영양이 최고에 달해 이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나?

 11 : 54. 정자가 길손을 맞는 산남방조제(석창리-산남리-월천리를 잇는다)’에 이른다. 초입의 이정표는 종점(칠산타워)까지 1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함평만해안도로는 서해랑길 5코스처럼 돌머리해안과 영광군 칠산대교를 잇는다. 함평만의 수려한 경관과 명품 해상교량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명품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을 얻었다.

 이제 산남리 앞 방조제를 걷는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45분이나 걸린 엄청나게 긴 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 김연수가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삼양사라는 회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월천리 백옥과 석창리 농암 간 3.8km의 둑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시작해 1933년에 완공된 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400정보(町步)나 되는 손불간척지가 생겨났으니, 그게 바로 산남리의 저 너른 들녘이다. 이후 갯땅은 농토가 되었고, 지금은 고소하고 쫀득한 맛좋은 함평 간척지 쌀이 생산된다. 하나 더, 산남리 마을에는 1970년대 초 꽃반지 끼고의 가수 은희가 만든 문화공간 민예학당이 있다. 자연재료를 활용한 디자인 제품, 천연염색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잠시 들려도 좋을 것이다.

 반대편은 함평만의 드넓은 갯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경사가 완만해 석화()와 바지락, 낙지 등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석화(石花)’는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코끝이 알싸할 정도로 찬바람이 불 때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12월이면 절정에 이른다. 농한기의 귀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갯벌에 쳐놓은 저 그물망의 정체는 대체 뭘까? ‘개막이일지도 모르겠다. 조석간만의 차가 클 때 갯벌에 그물을 쳐 놓고 밀물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갇히도록 하는 전통 고기잡이다.

 12 : 18 - 12 : 48. 방조제의 중간쯤에서 만난 정자, 끝이 보이지 않는 둑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라서 더욱 반갑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 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30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그 사이로 강처럼 물길이 나있다.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생김새로 봐서는 낙지 산란장 같은데... 이곳 함평만이 세발낙지의 본고장이라니 말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여서가 아니라 가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갯벌에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한 낙지는 일하다가 쓰러진 소를 일으킨다고 할 만큼 원기를 북돋아 주는 해산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산삼 혹은 노다지라고도 불린다.

 13 : 07. 길고 긴 방조제의 끝은 일공구(이정표 : 종점까지 7.1km)’이다. 맨 처음 공사를 시작한 곳이어서 일공구라 한다는데, 위에서 얘기하던 삼양사의 간척공사 산물이다. 하나 더, 향토사 공부를 한다는 김경수씨는 간척공사 이전에는 이곳이 백옥동(白玉洞) 마을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일공구에도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갯벌에 기우뚱 몸을 기대고 있는 고깃배도 여럿 보인다. 포구에는 잡아온 물고기를 파는 횟집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간척공사 때 이곳은 각처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뿌리는 돈으로 늘 흥청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이나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옥교라는 무지개다리를 이용해 월천저수지(손불간척지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건넌다. 한가하게 날개짓을 해대는 서너 마리 갈매기의 환송을 받으며...

 ‘1공구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포구는 아직도 새로운 방파제를 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공구부터는 월천방조제를 걷는다. 일공구에서 안악에 이르는 이 방조제는 2000 8월 태풍 프라피룬으로 유실되었다.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을 때 거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해당화 6만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라고나 할까?

 13 : 22. ‘안악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월천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안악(雁岳)이란 지명은 雁來基(안래기 안애기)’ 또는 雁落(안락 안악)’이 변형된 것이란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기러기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월천방조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5.7km)이 조성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빗돌이 방금 전 월천방조제를 걸었고,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안악마을임을 알려준다.

 안악마을의 포구는 작다. 시쳇말로 주먹만 하다고나 할까? 정박하고 있는 어선도 주먹만 한 보트 두어 척이 전부다. 하지만 횟집에 펜션까지 들어서있으니 먹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함평만 갯벌에서 나오는 싱싱한 숭어·세발낙지·보리새우 등은 여름철 미각을 돋운다고 하지 않던가.

 포구에는 소녀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평만의 부드러운 곡선이 주는 안정감과 미래를 지향하는 함평의 기상을 형상화 했단다. 거기에 국민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총각선생님에 대한 섬 처녀의 간절한 기다림을 담았단다. 그럼 이곳 안악마을이 원래는 섬이었다는 얘기일까?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도 눈에 띈다. 10년쯤 전 대이작도를 답사하다 섬마을 선생님과 관련된 관광지를 만났었다. 1967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라면서 이미 폐교된 초등학교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노래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고나 할까?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안악해수욕장. 200m 길이의 결 고운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감싼다. 그 숲에는 썬 베드를 놓아 피서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했다. 백사장에는 규모는 작지만 전천후 인공해수풀장도 만들었다. 명품 피서지로 만들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화이트 정원(‘해름애 언덕’, ‘바람의 언덕으로도 불린다)’은 안악해변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농산어촌 활력화 경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수국·팜파스그라스·코스모스 등 여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꽃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싱그러운 여름 수국은 시들어가는 중, 대신 팜파스그라스가 나그네의 동심을 소환시킨다. 깃털모양의 풍성한 이삭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거기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기까지 해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다.

 그밖에도 보라색 버들마편초가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버들잎처럼 좁은 잎 모양 형태와 긴 꽃대 끝에 꽃이 달려서 마편 즉 말채찍처럼 생겼다고 해서 버들마편초란 이름을 얻었다.

 해당화는 일종의 보너스다. 해안가 도로변에서 만나게 되는데,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투성이의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살아간다.

 꽃밭에서의 힐링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진행방향에 칠산대교를 놓고 걷게 된다.

 함평만 해안도로는 황혼 무렵의 해넘이가 자랑거리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제반도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짙은 감흥을 선사한단다. 하지만 지금은 벌건 한낮, 일몰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13 : 46. 이번에는 학산리(鶴山里) 앞 방조제를 걷는다. 1930년경 목포사람 정태성이 막았다고 한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둑을 쌓은 이의 이름을 따 정태성농장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300m 남짓의 둑이 만들어낸 들녘치고는 꽤나 넓다. 그 너머 산자락에는 학산리의 자연부락인 지호(芝湖) 마을과 평산(平山) 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한없이 구불대는 함평만의 해안선을 따라 종점인 향화도항으로 간다. 문득 이은상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가 떠오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칠산대교가 코앞인데도 걷고 또 걸어도 이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평만은 육지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퇴적돼 만들어져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보고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차가 크고 조류 소통이 좋아 갯벌이 발달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갯벌에 기대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고, 김 양식을 하며 생활해왔다. 갯벌을 막아 농지를 조성하고 염전을 만들기도 했다.

 해안선은 곳곳에서 구불댄다. 해변에 바짝 붙어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은 한결 운치 있다. 옛 사람들은 그런 지리적 여건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방조제를 쌓았고, 주민들은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간다.

 바다는 김 양식장의 지주로 한 가득이다. 갯벌에 저런 기둥들을 세우고 김을 매달아 양식한다. 바다 건너 도리포 곱창김의 주산지로 알려진다. 그만큼 청정해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해역을 끼고 있는 함평에서도 곱창김을 양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식은 바다에서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해수를 저장해두는 저 저수지는 동성수산과 손불수산에서 양식업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808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온 함평항길이 해안도로와 만난 것이다.

 함평항으로 가는 길, 물 빠진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는 고깃배들이 의외로 많다. 근처에 함평항이라는 틀이 잡힌 포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함평항이 항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14 : 26. 함평항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해은항’, 해은마을(함평군 손불면 학산리)에 있는 포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어업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2006년에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이 되었다. 하지만 여객선은 들르지 않는다. 아니 들러본 적도 없고, 그저 인근 어민들의 선착장으로만 활용되어 왔었다. 그게 해안도로가 건설되고, 국가어항으로의 승격을 목표로 시설을 확충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부두는 웬만한 축구경기장보다도 더 넓었다. 하긴 국가관리 연안어항으로의 승격을 위해 명칭까지 바꿨다니 어련하겠는가. 해양 마리나 시설, 항로준설, 연안정비 등 개발 사업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널찍한 잔디공원에서 ‘HAM PYEONG’이라고 적힌 커다란 전시물이 반긴다. 이곳 함평항은 해넘이의 명소 중 하나다. 조형물 곁에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전망대를 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 육지와 섬의 실루엣, 이 둘을 이어주는 칠산대교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몰까지 더해지면 조물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단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옥실 방조제를 지나 영광 땅(염산면 옥실리)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이 방조제가 함평과 영광의 군 경계인 셈이다.

 푸름으로 뒤덮인 옥실리 들녘과 새하얀 철새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칠산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호리병처럼 생긴 함해만의 주둥이이자, 해제반도가 끝나는 북쪽의 도리포와 영광군 염산면의 향화도 사이에 놓은 다리다.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 12월에 개통됐으며, 그 덕분에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70분에서 5분으로 단축돼 생활편의가 크게 향상됐다.

 옥실방조제의 끄트머리에도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깃배보다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무동력선들이 더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선착장을 지나자 칠산대교가 머리맡으로 다가온다. 35코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함평만의 입구, 바다가 깊어졌나보다. 고기잡이에 한창인 어선들이 꽤 많다.

 14 : 56. 날머리인 향화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들어서자 111m의 높이를 자랑하는 칠산타워가 시야를 꽉 메워버린다. 전남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영광군의 11개 읍면이 하나로 화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칠산대교와 인근의 섬과 바다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서해랑길 안내도(영광 36코스)는 향화도항의 입구, 버스승강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함평만이 함평군과 무안군을 아우르는 큰 항아리라면 이곳 향화도항과 도리포 유원지는 그 항아리의 주둥이다. 지명에서 드러나듯 섬이었단 향화도(向化島)는 간척사업에 의해 육지가 됐고, 항구가 들어서면서 송이도와 낙월도를 잇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47km가 찍혀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속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서해랑길 34코스(상수장마을-돌머리해변)

 

여행일 : ‘23. 8. 1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현경면과 함평군 함평읍 일원

여행코스 : 상수장마을송정교차로하수장마을유수정마을외현화마을내현화마을파도목장돌머리해변(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현경면사소부터 14.62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4코스를 걷는다. 7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함해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간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비경들을 곳곳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전천후 풀장 등 다양하게 꾸며진 돌머리해안은 잠시 쉬었다가기에도 충분하다.(이 후기도 무안문화원의 자료가 많이 활용됐습니다)

 

 들머리는 상수장마을(무안군 해제면 송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송정교차로(해제면 송정리)에서 현해로(해제방면)로 옮겨 400m쯤 들어가면 상수장(3)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150m쯤 들어가면 24번 국도의 가드레일에 닿는다. 서해랑길(무안 34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가드레일 아래에 세워져 있다.

 해제반도의 동쪽 해안(함해만과 면한)을 따라 걷는 17.2km짜리 코스이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코스를 조금 단축했다. 5.7Km를 줄인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을 감안 현경면소재지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럴 경우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는 현경면 소재지인 외반리(버스정류장)에서 출발했다. 77번 국도에서 곧바로 서해랑길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접근성에 대한 설명이 난감해 거리를 조금 늘리기로 했다.

 11 : 45.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5층짜리 아파트가 눈에 띈다. 이곳 외반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55, 현경중학교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77번 국도가 나타난다.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으로 gpx트랙은 시점까지의 거리를 4km로 찍고 있다. 하지만 내 앱은 0.7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쫒아낸다더니, 약하디약한 집사람에게도 내 코스를 3.3km나 줄여줄 능력이 있었나 보다.

 서해랑길은 국도 아래로 난 소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굴다리 근처(이정표 : 종점 12.6km/ 시점 4.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곳은 황토로 유명한 해제반도.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온통 푸름으로 물들었다. 무안의 또 다른 특산물인 고구마와 콩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본래의 황토색을 덮어버렸다. 맞다. 무안은 요즘 구릉지마다 고구마 밭의 긴 이랑들이 줄지어 펼쳐진다. 지난 겨울 양파 밭이 그렇더니, 이 여름엔 또 고구마 밭들이 붉은 황토색 밭을 온통 푸르게 뒤덮어 버린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유수정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평산리(平山里) 4개 자연부락(원평산·평림·통정·유수정) 중 하나로 유수정(流水亭)이란 지명은 감방산 아흔아홉 구비에서 흘러내린 물이 평산을 지나 마을 앞으로 흘러간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해방 전까지 마을 뒤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게 시원한 정자구실을 톡톡히 한다며 ()’ 자를 붙였다나?

 마을회관 앞 빗돌은 마을의 유래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200년쯤 전 장흥고씨가 터를 잡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커졌단다. 빗돌은 또 장흥고씨 후손들이 마을 앞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임야를 개간하면서 마을을 부촌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무안문화원은 고기주라는 이가 서해바다라는 식당이 있는 곳에서 노두목까지 제방을 막았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들녘 덕분에 부촌이 되었다며 마을 주민들은 칭송하고 있었다.

 들녘의 끝, 그러니까 건너편 구릉지 아래에도 작은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 본 저건너란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해볼까 민가를 기웃거리는데, 누렁이 두어 마리가 단체로 짖어대는 게 아닌가. 아서라. 난 그저 마을 이름이 궁금했을 따름이란다.

 12 : 16. 길을 나선지 30, 815번 지방도의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평산4리는 유수정마을의 행정단위이니 유수정의 입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곳에서 함해만과의 첫 대면이 이루어진다. 바닷가에는 흰발 농게(수컷의 하얗고 큰 집게발이 특징)’ 대추귀 고둥(주둥이 쪽이 사람 귀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는 대추를 닮았다)’의 집단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멸종위기 야생 생물 2급이니 무단 채집이나 쓰레기 투기를 금지한단다.

 잠시지만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집사람은 출발도 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낭군과 함께 걷겠다며 2.4km쯤 뒤에서 출발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는 온통 황토색깔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은 자연 침식된 황토와 사구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 특이성을 인정받아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지난 2001년 전국 최초 습지보호지역지정, 2008년 람사르습지 등록, 같은 해 6월에는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함해만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며 200m쯤 걷다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해제반도의 전형적인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양파 수확이 끝나고, 속살을 드러낸 농토가 온통 황토색이다. 얼핏 보기에도 한없이 부드럽고 기름지다. 그러다보니 저 땅은 언제나 푸름을 물든다. 늦가을 무와 배추 수확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어도 일대 들판은 푸른빛이 펼쳐진다. 대파와 양파, 마늘이 황톳빛 들판을 뒤덮기 때문이다.

 구릉지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구릉지는 농업용수 확보가 생명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팠다. 얼마나 물이 절실했으면 한 방울의 물도 아까워 바닥에 비닐까지 깔았을까 싶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다. 이를 알리는 입추도 며칠 전에 지났다. 수확을 마친 저 참깨 단이 그 증거라 하겠다.

 구릉지를 헤집는 탐방로는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게 서해랑길의 가장 큰 장점이니 말이다. 서해랑길의 방향표식과 리본으로도 모자라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까지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 웃자란 잡초로 뒤엉킨 밭이지만 금화규가 어여쁜 꽃을 피워냈다. (항산화·항바이러스·항알레르기·항균) 작용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약초이다. 하지만 기르는 게 쉽지는 않은 듯. 동네 할머니는 어렵사리 씨앗을 구해 심었는데 자라라는 약초 대신 잡초만 한가득이라며 입을 석 자나 내밀고 있었다.

 12 : 38. 2차선 도로인 현화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300m쯤 떨어진 외현화마을 입구까지 이 길을 따라간다.

 길가에 효부 금성나씨 기행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칭송은 열부(烈婦), 즉 남편에 대한 순종과 수절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이 빗돌은 효부로 적었다. 그게 특이해 자료를 찾아봤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외현화마을(현화1) 입구. 버스정류장에 적힌 로두목이란 지명이 눈길을 끈다. 두음법칙을 적용 노두목으로 적는 게 보통일 텐데, 누군가의 위트가 더해지면서 정감어린 지명으로 변했다. 하나 더, 여기서 노두(路頭)는 갯벌을 건널 때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를 말한다. 그러니 저 로두목마을은 바닷가일 게 분명하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외현화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현화리(玄化里)를 구성하는 6개 자연부락(외현화·청룡·내현화·성자동·절동·노두목) 중 하나이다. 새터와 구터로 이루어진 마을은 지형이 게()의 형국이란다. 구터와 새터가 게의 두 발이고 마을 앞에 있는 두 개의 선독이 게의 눈에 해당된다나? 하나 더, 옛날에는 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게가 거품을 품을 수 있어 당시는 부자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닷물이 끊기면서 게의 거품이 일어나지 않아 마을도 가난하게 되었단다.

 동구 밖에는 전주최씨 삼강문이 들어서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이다. 이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병조참판을 역임한 제남을 충()으로,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의 감응을 이끌어낸 달신과 그의 아들 상효를 효(), 그리고 열()은 상효의 부인인 죽산안씨가 주인이다. 안씨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전염병으로 위독하자 허벅지살을 베어 약제로 사용함으로써 병을 낳게 하였단다. 삼강문 안에는 이를 기리는 2기의 비석이 있다.

 길가에 유정각을 지어 주민들뿐만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쉼터로 제공하고 있었다. 문객들로 붐비던 옛날이 그리웠나 보다. 참고로 조선 말, 최동현( : 노강)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살았더란다. 덕분에 그에게 배움을 원하는 수많은 인재들로 마을은 항상 붐볐고, 고을에 원님이 부임할 때는 직접 노강 선생을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을 정도였단다.

 건너편 구릉지에는 제각이 들어앉았다. ‘미수목란(난초가 필락말락 하는)’의 형국에 지었다는 전주최씨 제각 목란재가 아닐까 싶다. 이 집안에서 고시 합격자를 5명이나 배출했다니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탐방로는 구터를 지나 새터로 간다. 이어서 벽화로 치장된 마을안길을 지나 뒤편 들녘으로 빠져나간다. 원픽한 예쁜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은 구간이다.

 마을 앞에 서있는 저 바위가 게의 눈에 해당된다는 선독일지도 모르겠다. 뜬 눈에 해당된다는 새터의 그 바위 말이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현화리의 주산인 태통산(兌通山, 55.1m)’을 에둘러 간다. 추석 때 현화리의 주부들이 저 산에 모여 강강수월래를 하며 정을 확인했단다. ‘화합의 장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정상 부근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풍치가 대단히 좋았다고 전해진다.

 12 : 58.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2, 탐방로는 내현화마을에 이른다. 와우형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지형이 주민들의 넉넉한 심성을 만들어주었다는 마을로,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 김석구(金錫龜(호는 玄圃) 배우고 익히며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하며 이곳에 터를 잡았단다.

 ! 내가 동경해온 풍경이 아닌가. 취선루(醉仙樓), 이백(李白)만 술과 달을 희롱하는 게 아니라는 저 배포가 부럽기만 하다. 벽에 적힌 싯구도 감성 풍부한 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 흘렸더니 아! 빛나던 사랑이더라>

 마을 앞 팽나무 그늘에는 정자가 들어앉았다. 유리문을 달아 신발을 벗어야만 이용할 수 있던 외현화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통째로 개방되어 있다. 덕분에 우린 걸터앉은 채로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며 푹 쉬어갈 수 있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긴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덕분에 할머니들의 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먼저 밀고 다니던 유모차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으로 바뀐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터까지 달아 젊은이들의 승용차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은포 김영원이란 이의 기행비도 눈에 띈다. 마을의 양대 성씨인 김해김씨가 낳은 효자로, 무안군청 홈페이지는 그의 효행을 친병에 상분하고 정간에 애훼과인하다고 적고 있었다.

 이번 구간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시설물들을 자주 활용하게 된다. 무안지역은 갯벌 낙지길을 브랜드로 내세우는데, 그중 평산4리 버스정류장에서 해운보건소까지의 1구간(마을과 들녘 : 9.3km) 대부분이 서해랑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5분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4분쯤 더 걸어 현화로(이정표 : 종점까지 8.2km)’로 올라선다. 만나는 지점에 생록동의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바로 횡단해 생록동 마을을 향해 간다.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을 얻었다.

 4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 왼쪽은 생록동으로 이어지는 길,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간다. 이정표는 4.5km 전방에 후동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때 현화리의 나머지 자연부락들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감방산(259m) 자락에 들어앉은 구산마을과 성자동마을이다. 현화4리에 속한 작은 부락들로 감방산 아래 815번 지방도(장군로)를 사이에 두고 내현화 마을과 마주보는 형세이다.

 탐방로는 들녘을 향해 나아간다. 눈에 익숙한 구릉지가 아닌 걸 보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이 동네는 마음 고운 이들로 가득한 가 보다. 길가에까지 꽃밭을 만들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예쁜 낮달맞이꽃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었다.

 생록동 삼거리에서 8. ‘광덕1교로 현화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하천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하천변에는 야관문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원래 이름은 비수리’, 잘게 썰어 술로 담가 먹는데, 이게 남자의 정력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약재명인 야관문(夜關門)으로 세간에 입소문을 탔다.

 야관문의 약효를 의심하면서 걷길 8. ‘약효가 없다로 결론이 날 즈음 함해만에 이른다. 물 빠져나간 바닷가에는 꼬맹이 고깃배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주인을 모시고 고기잡이 나갈 물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방의 안쪽, 한때 양식장이었을 법한 연못은 방치되고 있었다. 대하양식장으로 그만이겠는데도 말이다.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건너편 해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맑고 고운 황토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맞은편 해제반도까지 짧은 곳은 7km, 먼 곳은 11km까지 드넓은 갯벌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다. 갯벌은 하루 두 번 물이 들고 나면서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6시간마다 스멀스멀 갯골을 기어오른 바닷물은 다시 눈에 띄지 않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를 반복하면서 갯벌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는 저런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느긋이 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눈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계단 모양으로 만든 방조제도 눈에 띈다. 단에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게 또 자다르(크로아티아)에서의 추억을 소환시킨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바다 오르간(Moske Orgulje)’인데, 그곳도 역시 돌로 만든 방파제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았었기 때문이다. 파도가 일렁이면서 이 구멍으로 물결이 밀려들어가고, 이게 방파제 밑의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면서 오르간처럼 소리를 내는 것이다. 파도의 크기와 속도에 따라 다른 음을 내는 것은 물론이다.

 바닷가 갈대밭은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로 제몫을 할 수도 있겠다.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갈대꽃만으로도 아름다울 텐데, 그 너머로 해제반도의 빼어난 풍경까지 더해진다면 이 아니 아름답겠는가.

 눈의 호사는 10분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향한다.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해운로로 올라선다. 이정표는 34코스의 종점인 돌머리해변까지 5.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4 : 00.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갯벌체험과 낙농체험을 함께 할 수 있다는 파도낙농체험농장에 도착했다. 치즈만들기, 젖소 젖짜기 등 다양한 낙농체험 프로그램으로 억대 농외소득을 올리는 알짜 목장이라고 한다. 농촌 살림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목장의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는 1.7km전방에 있는 후동마을을 가리킨다. 서해랑길도 이를 따르면 된다.

 탐방로는 바닷가를 향해 간다. 하지만 바다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겨난 들녘으로 들어선다.

 들녘에 들어선 길은 요리조리 잘도 방향을 튼다. 이유는 단 하나, 해운천과 자명천에 놓인 다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표식에 더해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파도목장에서 21, ‘해운1로 해운천을 건넌 다음 둑길을 따라 바닷가로 간다. 오리농장이 줄을 잇는 구간이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바닥을 드러낸 담수호(?)가 떡하니 길을 막는다. 탐방로가 내륙을 향해 방향을 틀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자명천을 건넌다. 이름조차 없는 이 다리가 군경계이다. 무안군을 누비던 서해랑길이 이 다리를 건너 함평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4 : 30. 잠시 후 바닷가에 이르니 다리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건너다닐 수는 있는 것이다. 이는 아까 파도목장에서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괜히 알바를 했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해안선을 따른다. 진행방향 저 멀리서 34코스가 종료되는 돌머리해안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함평 땅에서 만난 갯벌은 아까와는 많이 다르다. 맑고 고운 황토색이 아니라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모래톱이 고와 카메라에 담아봤다. 모래톱(沙濱)은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생긴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해안을 말한다. 그게 오래가면 비진도처럼 두 개의 섬이 하나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안길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걷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다.

 목적지인 돌머리해안이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빙 둘러 가야하기 때문에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면서도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까 해안에 올라선 후로 35분이나 더 걸어야만 했다.

 갯벌은 온통 구멍투성이다. 맞다. 이곳 함해만에는 해양수산부 지정 해양보호생물인 흰발농게, 대추귀고둥을 비롯한 250종의 저서생물이 살아간다. 또한 칠면초, 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 혹부리오리, 알락꼬리마도요 등 약 52종의 철새 등 많은 생명체가 이곳 갯벌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15 : 06. 드디어 종착지인 돌머리해안에 도착했다. 첫 만남은 ‘Stone Dahlia’ 호텔&리조트이다. 해안선을 따라오면서 랜드마크삼아 방향을 잡았던 건축물로, 객실에서의 프리미엄급 spa ocean view, 거기에 갯벌체험이 더해지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리조트 앞 갯벌은 게나 조개, 해초류 등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나보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노두 주변에서 뭔가를 잡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띈다.

 탐방로는 리조트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기껏해야 30m쯤 걷다가 광산김씨세장산 빗돌 앞에서 탐방로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잘 생긴 거북이 한 마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보라. 바닷가 해식애 속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있는 저 거북이를.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모퉁이를 돌면 전망대가 반긴다. 아니 3층 높이에 조망대가 있으니 전망타워로 불러도 되겠다. 트레킹의 막바지, 이미 바닥을 보이는 체력 때문에 3층 높이의 계단은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함해만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내 예상은 옳았다. 일망무제의 조명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내륙을 향해 항아리처럼 파고들어온 함평만이다. 그 건너는 해제반도, 폭이 불과 400m 정도인 송정리 땅으로 인해 뭍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저 멀리 함해만 입구에는 칠산대교가 놓여있다. 함해만은 반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다. 면적이 344(길이 17km/  1.8km)쯤 되는데, 입구에서 영광의 칠산 바다를 만난다. 길이 109.2km의 해안선이 원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맨 오른쪽에는 백사장의 길이가 1Km쯤 된다는 해수욕장이 들어앉았다. 아니 돌머리지구 연안유휴지 개발사업(85억 원이나 들였단다)’이 만들어낸 일종의 유원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해수욕장 일대에 해변탐방로·갯벌탐방로·어린이풀장·해수풀장·오토캠핑장 등 친서민 휴양시설을 조성했다.

 바닷가로 내려서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정자를 지어놓았다. 눈요깃거리로 예쁜 돌탑도 쌓아올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함평만 생태보존기념비’, 함평 땅에 들어서더니 함해만이 함평만으로 둔갑해버렸다.

 그 옆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워터버킷·워터슬라이드 등을 갖춰 해수욕과는 다른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돌머리해수욕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썰물 때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닷물을 끌어와 인공풀장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무려 7480나 된단다. 건강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해수를 교체해준다니, 피서객들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서해의 특징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것이다. 그런 서해에서도 가장 큰 곳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 돌머리해안이 꼽힌단다. 그런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든 게 갯벌탐방로이다. 해수풀장 근처에서 405m의 탐방로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다. 그 끝에는 물이 차면 보이지 않는 암초가 있다고 한다. 이 암초를 돌머리라고 부르는데, 이게 해안의 이름이 됐다.

 해안은 거의 유원지 수준이다. 샤워장·취사대·매점 등 편의시설을 두루두루 갖췄는가 하면, 원두막과 야영장 등 웬만한 유명 관광지가 부럽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긴 깨끗한 갯벌, 아름다운 낙조, 상쾌한 소나무 숲이 부각되면서 전국 청정해수욕장 20에 선정되기도 했다니 어련하겠는가.

 물이 빠져나간 해수욕장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생태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에서 게, 조개 등이 살아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마음 내키면 직접 잡아볼 수도 있다. 또 전망대 쪽으로 가면 자연산 석화(이 지역에서는 이라 부르기도 한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갯바위도 만나게 된다.

 서해랑길 35코스(함평)의 안내판은 해수풀장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부근에 편의점이 있어 맥주 두어 캔(집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행운까지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62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33코스(무안 황토갯벌랜드-상수장마을)

 

여행일 : ‘23. 7. 29()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 일원

여행코스 : 무안 황토갯벌랜드수암교차로가입마을마산마을성재동용정골두동마을석북마을수양촌상수장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9.9km, 실제는 13.20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2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해제반도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다. 덕분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비경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마산마을 부근에서는 함해만과 탄도만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진풍경을 마주하기도 한다.(이 후기는 무안문화원의 자료가 많이 활용됐습니다)

 

 들머리는 무안 황토갯벌랜드(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오른쪽 만송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황토갯벌랜드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무안 33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입구의 무안갯벌센터 표지석 옆에 세워놓았다.

 해제반도의 북쪽 해안(함해만과 면한)을 따라 걷는 19.9km짜리 코스이다(돌출된 곶부리 모두를 걷지는 않는다). 오늘도 집사람의 체력을 감안 코스를 조금 단축했다(홀통과 마산리 사이 검은 점이 찍힌 곳에서 시작). 거기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두동마을과 석북마을도 둘러보지 못했다.

 실제출발지는 홀통교차로(현경면 마산리)’. 홀통유원지로 들어가는 입구로 지난 24코스 답사 때 이곳을 지나가기도 했었다. ! 주민들은 이 부근을 배나무정(梨木亭)’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버린 배나무 씨가 자라난 곳으로 예전에는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었다나?

 마산마을을 정면에 놓고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걷다가 삼거리에서 왼쪽 농로로 접어든다.

 그렇게 6분쯤 걸어 방조제에 이른다. 함해만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24코스 때 길을 헤매다가 방향표시가 왜 거꾸로 되어있지?’를 외쳤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 더, 앱은 이곳이 출발지에서 4.35km 떨어진 지점이라고 한다. 그러니 오늘은 15.5km만 걸으면 된다.

 정규탐방로를 만났으니 기념사진부터 한 장. 마침맞게 무안갯벌을 자랑하는 안내판이 둑에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 아래로 보이는 저 방향표시를 보고 24코스 때 헷갈려했었다.

 둑으로 올라서자 조롱박처럼 생긴 바다가 펼쳐진다. 가입리 곶부리()와 마산리 곶부리가 빚어 놓은, 함해만 속의 작은 만()이다. 그런데 갯벌이 검지 않고 붉은 게 아닌가? 맞다. 이곳은 황토로 유명한 무안의 해제반도이다.

 둑길(아래로 나있다)을 따라 걸으면서 33코스의 탐방이 정식으로 시작된다. 마산마을을 부티 나게 해준 고마운 둑이다. 간척으로 인해 생긴 토지가 많아 현경면에서 첫째가는 부자마을이란 소리까지 들었다니 말이다.

 잠시 후 도착한 방조제 끝(이정표 : 시점 4.5km/ 종점 15.4k), 서해랑길은 함해만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내륙에 들어앉은 마산마을을 향해 내닫는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 법정 동리인 마산리 2개 자연부락(마산·신기) 중 하나인 마산마을에 이른다. 마산(馬山)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 주변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단다.

 이 마을은 효자·효열비나 공덕비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열각(旌烈閣)을 포함하여 22개나 세워져 있단다. ‘함평이씨세거지(이 마을은 광산김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빗돌이 수문장 노릇을 하는 동구 밖에서도 3개를 만날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마을 고샅길로 들어간다. 하지만 관통하지는 않고 마을 뒷산인 비룡산을 오른편에 끼고 한 바퀴 돈다. 마을을 관통하면 거리가 훨씬 단축되겠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해만의 풍광을 구경해보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때 느닷없이 펼쳐지는 진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해제반도를 감싸는 두 개의 바다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것이다.

 일단 탄도만부터 주워 담고 본다. 무안군 운남면·망운면·현경면·해제면과 신안군의 지도읍에 둘러싸인 넓은 만()으로 2008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으며, 전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생명의 땅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함해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탄도만과 함께 무안갯벌의 양대 축을 이루는 해안이다. 이곳도 갯벌습지보호지역(1) 및 갯벌도립공원(1)으로 지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008년에는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다. 생물 다양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실제로 무안갯벌에는 칠면초·갯잔디 등 47종의 염생식물과 250종의 저서생물이 서식한다. 또한 혹부리오리·알락꼬리마도요 등 52종의 철새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전망 좋은 언덕. 노거수 아래는 쉼터로 변했다. 응접실용 소파를 놓아둔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을 느긋하게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조선 유학의 거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인이 이곳 마산마을을 열었다더니,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예()를 발로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비룡산을 한 바퀴 에돌아가는 탐방로는 임도다. 그러다보니 약간은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가입리의 곶부리가 눈에 들어온다. 함해만에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저런 곶부리가 수없이 많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마산마을의 곶부리가 함해만의 중심을 향해 뻗어나간다.

 임도를 빠져나오면 또 다시 마산마을을 만난다. 아까 마을을 관통했을 경우 이곳으로 나오게 된다.

 비닐하우스의 변신. 작물의 보금자리가 건조장으로 변했다. 온도 조절이 필요 없어진 농작물은 노지로 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고추·쪽파 등 최근 거둬들인 수확물들이 차지했다.

 이곳에도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었다. 하긴 현경면 제일의 부촌이라는 얘기가 허투루 생겨났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 부근에서 최근의 농촌 현실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15명 정도의 주민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새참을 먹는데, 주고받는 언어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큰 무리는 당연히 한글, 하지만 베트남어로 얘기를 주고받는 무리도 대여섯 명은 족히 되겠다. 이주 여성들의 숫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가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은 흔하디흔한 들꽃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나 보다.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란다는 것 말고는 관심 밖의 들꽃이었는데, 오늘따라 저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 말이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기 소리까지 떠오르게 만들면서...

 천일홍(千日紅)도 그 빼어난 자태를 뽐낸다. 꽃의 붉은 기운이 1000일이 지나도록 퇴색하지 않는다는, 예로부터 불전을 장식하는 꽃으로 애용되어 왔을 정도로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

 서해랑길은 마산마을의 곶부리 앞(이정표 : 종점까지 13.2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용정리로 넘어가는 구릉지 위로 오른다. 이때 해초랑이라는 건조해산물 유통회사(사진 속 건물)가 눈에 띈다. 바닷가다운 풍경이랄까?

 구릉지를 넘자 또 다른 해안이 얼굴을 내민다. 마산리와 용정리 사이의 해안으로 그 끄트머리에서 용정리 곶부리가 바다를 향해 달음박질을 친다. 무안지역의 또 다른 볼거리인 용정리 곰솔(전남기념물 제176)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즈음 길은 평야지대로 들어선다. 구릉지만 내내 걷다가 만나는 들녘이 생경스런 풍경으로 다가온다.

 가슴 아픈 풍경도 눈에 띈다. 방송은 온 나라를 괴롭히던 장마가 남부지역, 특히 해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전했었다. 34코스는 그 해제반도를 걷는다. 그래선지 당시 만들어진 상처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신기마을 갈림길(이정표 : 종점까지 11.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24번 국도가 얼굴을 내민다.

 조금 더 걸어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탐방로는 24번 국도를 왼쪽에 놓고 나란히 간다.

 길가 빗돌이 눈길을 끈다. ‘송암거사’. 빗돌까지 세웠을 정도로 명망 높은 인물인 듯한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빗돌은 웃자란 잡초 무더기에 묻혀버렸다. 그나저나 이 지역은 거사(居士)’라는 호칭이 유행인가 보다. 아까는 낙헌거사라고 적힌 빗돌도 보았었다.

 그렇게 10분 남짓 걷자 2차선인 성재길을 만나고, 이 길을 따라 24번 국도의 아래를 지난다. 용정리 곶부리(끝에 월두마을이 있다)를 향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성재마을’. 법정 동리인 용정리(龍井里)’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새터·용정골·월두·성재동·봉대) 중 하나로,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 곶의 초입에 해당한다. 성재동(成才洞)이란 지명은 땅이 기름지고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얼음 막걸리로 목을 축이다가 문득 전해오는 노랫가락 하나를 떠올려본다. <먹고가자 성재동/ 어야디야 달머리/ 가갸거겨 두동/ 깔끔하다 신촌/ 뺐다박았다 용정골/ 건방지다 수양촌> 성재동 주민들의 어진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 노래라 하겠다. 맞다. 이 마을은 배고픈 길손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넉넉한 인심을 자랑한단다.

 계속해서 성재길을 탄다. 그리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1차선으로 바뀌었다.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에 김해김씨 삼현파(용정가문)’의 가족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참고로 삼현파는 김수로왕의 49세손 김관(고려 고종·충목왕 때 사람)이 기세조(1)  파시조이다. 남의 집안 묘역이 뭐가 중요할까마는 하도 반듯하게 써져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선대부(2), 통정대부(3) 등 빗돌에 적힌 품계들이 하나같이 당당하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듯.

 고개를 넘으면 내용마을(용정골에 속한 자연부락)’, 하지만 서해랑길은 내용마을로 들어가지 않는다. 갈림길(이정표 : 종점까지 9.0km)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용정골로 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 용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용정골에 이른다. ‘용정이란 지명은 마을 앞 용샘에서 따왔다. 서해의 용이 승천하려다 샘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형국이란다. 용정골은 무안군 제일의 쪽파 생산지로 알려진다. 외지와 계약재배를 통해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단다.

 마을회관 건립 기념비는 마을의 유래와 함께 김해김씨의 내력을 주저리주저리 읊고 있었다. 삼현파의 13세손 김문암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생겨났단다. 이 마을이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월두마을(용정리 곶부리의 끝자락에 들어앉았다)로 연결되는 2차선 도로를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아니 100m쯤 따라다가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갈라져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갈림길 초입.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가 눈에 띈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역사 자원을 특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 국내외 탐방객들이 느끼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사업으로, 무안군은 갯벌 낙지길을 브랜드로 내세운다. 그중 월두마을에서 송정리 버스정류장까지의 2구간(11km)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이 지점부터 서해랑길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해랑길은 이제 용정리에서 수양리로 넘어간다. 길은 바닷가에 인접해 나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온통 황토색으로 물든 구릉지다. 해제반도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즈음 가슴속에 꼭꼭 담아두고 싶은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함해만이 용정리와 수양리 곶부리 사이를 항아리 모양으로 움푹 파고들어온 것이다. 거기에 꼬맹이 섬 두어 개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길은 또 다른 구릉지를 넘는다. 해제반도는 땅도 바다만큼 낮아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절반이다. 풍경으로만 따진다면 하늘이 열 일하는 곳이다.

 폭우와 강풍을 몰고 온 장마가 온 나라를 헤집고 지나갔지만, 그런 땅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은 계절에 맞춰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다음 주 아니겠는가.

 멋들어지게 지어진 한옥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저 저수탑(貯水塔)도 구릉지의 전형적인 풍경 중 하나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둠벙)을 팠다. 그 마저도 어렵다면 저런 저수탑이라도 만들어 물을 대야하지 않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 2차선 도로인 팔방길로 내려선다. 수양리 곶부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두동마을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한다.

 이때 수양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장마철 폭우 때문인지 물이 온통 황토색을 띠고 있다.

 5분쯤 걸었을까 석북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직진해 두동마을로 간다. 참고로 서해랑길의 가장 큰 장점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걷기길 여행자들의 가장 큰 걱정(혹시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이 이곳에서는 남의 집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난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코스를 단축하려는 이들의 뒤를 무심코 따르다가 그만 서해랑길 표식을 놓치는 우를 범해버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지 5,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왼쪽은 석북마을로 이어진다. 우린 갈림길을 무시하고 2차선 도로(석북길)를 따라 직진했다.

 5분쯤 더 걸어 만난 삼거리에서 아까 놓쳤던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석북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우리와 헤어진 서해랑길은 수양리 곶부리를 한 바퀴 에돌아 이곳으로 온다. 이때 수양리(垂楊里) 3개 자연부락(수양촌·석북·두동) 중 두동마을과 석북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정표(종점까지 3.5km)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섰었음을 확실히 알려준다. 방향표시 날개가 좌(시점(종점)로만 달려있고,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좌우로 상당히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요 어디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대부분에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이곳 해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는 저 물고기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니, 흐름을 멈춘 저런 웅덩이쯤이야 물이 끓는 수준이 아닐까?

 그렇게 15분쯤 걸어 수양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수양촌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소양촌’. 소를 기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다가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아 수양촌(垂楊村)으로 고쳤다고 한다. 수양촌은 부자마을로 유명하다. 하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초근목피로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둑을 쌓아 농지가 마련됐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삶이 확 바뀌었단다. 거기에 주민들의 부지런함이 보태졌음은 물론이다.

 여름철 마을회관은 주민들의 피서지로 변한다. 정부가 지원해준 냉방시설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게 오늘처럼 살인적인 무더위에는 여행자들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목이라도 축일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잠시 쉬어가라며 자리까지 내준다. 덕분에 얼음처럼 차가운 정수기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을에는 한마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정자와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회관 앞 팽나무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늘 아래 팔각정을 짓는 기지를 발휘했다. 덕분에 둘레길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마을 주변은 비닐하우스로 한 가득이다. 안에서는 고소득 작물인 참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여성들 할일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마을은 1970년대 80년대 농민운동의 발상지였다. 특히 1988년 전국을 뒤흔들었던 고추파동이 이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현실참여도 활발해 2000년대 들어서는 마을의 임원들이 대부분 여성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또 다시 길을 이어간다. 이때 무안의 특산품인 고구마 밭 너머로 함해만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오던 황토색 갯벌이 아니라,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호수다. 참고로 함평과 해제 사이의 함해만(咸海灣)은 칠산 바다의 좁은 입구로 막힌 호수 같은 바다다. 그 바다에 물이 빠지면 황토색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참솔고 버섯농장이란다. 스마트팜 재배로 상위 1%, 천 개의 표고버섯 중 몇 개만 자라나는 백화고를 재배한다나? 희소가치만큼이나 특별한 효능으로 암, 면역질환 환자들의 필수 섭취 대상 1호라고 한다.

 수양촌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들녘을 지난다. 이때 갈림길을 여럿 만나지만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면 길을 놓칠 일은 없다.

 코스 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24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지나 송정리로 들어간다. 이때 만나는 굴다리는 2, 첫 번째 굴다리는 그냥 지나친다. 코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방 쪽으로 간다.

 굴다리를 지나 구릉지 위로 오른다. 24번 국도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150m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의 이정표(송정리 버스정류장 50m/ 수양마을 1.8km)는 이곳에서 오른쪽(송정리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이를 무작정 따라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방향표지판은 없지만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정표에 나타난 버스정류장을 33코스의 종점으로 삼고 있는 kakaomap을 절대 따르지 말라는 얘기다.

 날머리는 무안방향 24번 국도의 송정교차로에서 300m쯤 못 미친 지점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50m쯤 걸으면 24번 국도의 아래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그러나 기점을 삼을만한 구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300m를 더 가면 송정교차로가 나온다는 국도 표지판이 전부다.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4코스)와 이정표(종점까지 17.1km)는 국도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3.20km가 찍혔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상황에서 시간당 4km를 걸었으니 무리하게 걸은 셈이다.

서해랑길 32코스(매곡마을 삼강공원-무안 황토갯벌랜드)

 

여행일 : ‘23. 7. 22()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매곡마을외분마을염전입석마을송계마을도리포항망대봉범바위산삼복산노문마을무안황토갯벌랜드(거리/시간 : 17.5km)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2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이번도 역시 바닷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해안길이 대부분, 여기에 5km 정도의 산길이 보태진다. 난이도에 별이 셋(5개 중에서)이나 붙어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칠산 앞바다와 함해만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리포, 황토갯벌랜드가 더해지는 등 볼거리가 많아 힘들다는 느낌이 들 여유도 없다.

 

 들머리는 매곡마을(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 원일아파트(해제면 양매리) 앞 삼거리에서 매곡·내분길(오른쪽)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매곡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무 32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 앞 삼강공원에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닷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17.5km짜리 둘레길이다. 해제반도의 동북쪽으로 돌출된 곶()을 한 바퀴 도는 모양새, 하지만 우린 트레킹을 시도조차 못한 채 포기하고 말았다. 폭우경보(시간당 45나 내린단다)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초속 10m의 바람은 우산까지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집스레 강행했던 도반 한 분은 폭우로 인해 생긴 웅덩이에 빠져 고가의 DSLR 카메라를 망가뜨리는 불상사를 초래하기도 했다.

 트레킹은 고사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조차 버거우니 어쩌겠는가. 버스를 탄 채로 도리포항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니 트레킹을 강행한 일행 2명을 중간지점에서 낚아채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더 계속할 경우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 억지로라도 포기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완주도 좋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도리포는 유원지. 그러니 소문난 맛집 하나쯤 없겠는가. 인터넷에 심심찮게 뜨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점심부터 먹고 본다. 여름이 제철인 농어를 안주삼아 술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30명이 넘는 인원의 염원이 하늘에까지 닿았음인지 점심이 끝날 즈음 비가 그쳐주었다. 비록 잠시였지만... 아무튼 비가 뜸해진 틈을 타 도리포 일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도리포는 함해만(흔히 함평만이라 부른다)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 일대는 조차가 심해 좋은 포구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항만 구실을 하는 곳이 도리포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도리포와 영광 향화도를 잇는 칠산대교가 놓이면서 여행객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도리포 인근 해역은 사적 제395호로 지정된 고려청자 매장지이다. 왕실과 관아에서 사용하기 위해 강진 가마터(대구면 사당리 미산부락)에서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1995년을 시작으로 세 차례의 발굴을 거쳐 639점의 고려청자(분청사기로 넘어가는 시기)를 건졌다고 한다. 바닷속 갯벌이 해저유물을 저장하는 진짜 수장고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도리포는 해제반도에서 동북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곶에 위치한 항구다. 바다 건너 영광(염산면 향화도) 땅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놓은 다리가 칠산대교’. 왕복 2차선, 길이 1800m로 지난 2019년 말 개통됐다. 저 다리가 개통되면서 양 지역은 차량 이동 시간이 크게 단축됐고, 생활편의도도 그만큼 크게 향상되었다.

 무안 땅에 웬 영광군의 관광안내도? 그나저나 동해는 일출이 서해는 일몰이 아름답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 둘을, 특히 바다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곳 도리포가 딱 그런 곳이란다. 함해만(흔히 함평만이라 부른다)을 배경으로 뜨는 해를 보고, 오후에 칠산 앞바다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널따란 광장 근처, 바닷가에는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갯바위(살아서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환생바위로 불린다) 하나가 오롯이 솟아올랐다. 방파제로 연결시켜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꼬맹이 섬인데,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를 조성해놓았으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내가 찍은 사진이 좋지 않아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렸다)

 꼭대기는 망부석 차지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여인의 형상인데, 서해 먼 바다로 고기잡이 떠난 낭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맞다. 이곳 도리포는 내해(內海)인 함해만에서 서해바다로 나가는 관문, 고기잡이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다 망부석이 된 여인이란다.

 망부석 아래 석판에는 백창석 전 무안문화원장의 사랑이여 그리움이여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바닷물에 씻어내고/ 별빛으로 밀려온 설움/ 퍼렇게 멍든 가슴 갈매기 벗삼아/ 기다려 온 천년 세월/ 두 손 꼬옥 잡고 맹세한 약속/ 칠산바다 노을에 달라진 그리움/ 도리포 환상바위 위에/ 새겨놓은 애달픔 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천 년을 기다려온 사연을 담았다나?

 망부석과 시비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환생바위에서 자라고 있는 팽나무에 행운을 비는 나무라는 스토리텔링을 입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로 내놓았다. 작달막하지만 수령이 200년도 넘는 무안군의 보호수라고 한다.

 내만에는 도리포 항이 들어앉았다. 참 도리포 인근해역은 참숭어가 많이 잡힌다고 했다. 보리가 익는 시기(5)가 제철이라고 해서 보리 숭어라는 별명이 붙은 생선이다. 자산어보는 고기 맛이 달고 깊어서 물고기 중에 최고로 적고 있다. 하지만 횟집의 수족관에는 숭어가 없었다. 하긴 살이 무른데다 갯벌 냄새까지 나는 여름철 숭어를 누가 사먹겠는가.(‘여름철 숭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분에 우린 자연산 농어와 광어를 반반으로 섞어 먹었다.

 도리포항의 등대는 단순한 등대 기능에 해양관광자원 기능을 보탰다. 이 지역의 대표 수산물인 갯벌 낙지(쫄깃한 맛과 게르마늄 갯벌의 향으로 전국 최고의 브랜드와 명성을 자랑한다)’를 형상화 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을 소개하기 위해 칠산 앞바다(섬은 닥나무가 많이 난다는 닥섬’)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도리포의 동쪽과 서쪽으로 발달한 저 갯벌에서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주식으로 곱창김을 생산하는데, 일반 김보다 채취 횟수가 적어 대량 생산이 어려운 반면 김 값이 훨씬 좋단다.

 32코스의 종점인 무안 황토갯벌랜드로 가는 여정 또한 산악회 버스가 대신 해줬다. 그러다보니 32코스는 버스로 시작해 버스로 끝나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공짜로 코스를 완주했다고나 할까? 아니 미완의 코스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 같다.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3코스)와 시작점 표지판은 황토갯벌랜드로 들어가는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32코스 종점이 황토갯벌랜드의 부대시설인 황토찜질방 근처로 검색된다. 코스 변경이 최근 이루어졌지 않나 싶다.

 덕분에 남아도는 게 시간. 그 시간을 이용해 황토갯벌랜드를 둘러보기로 한다. 지난 2006년 무안황토갯벌센터로 처음 문을 연 갯벌랜드는 국내 최대(총면적 42)의 갯벌 테마파크다. 무안갯벌을 배경으로 과학전시관, 해상안전체험관, 갯벌체험장, 캠핑장 등이 펼쳐져 있다.

 첫 만남은 해상안전체험관이다. 해상재난과 안전사고 등 긴급상황 발생 시 대처능력을 향상하고 안전의식을 고취시키는 서남권 유일의 안전체험관이다. 연면적 1091 2층 건물에 다양한 체험시설(가상현실·침수차량 탈출·바닷가생활안전·구명보트·심폐소생술·선실탈출)을 갖추고 있다.

 시간에 쫓긴 탓에 실제 체험은 사양. 안전의식을 얻어가는 선에서 만족해본다. ‘I will survive’, 미국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의 노래로 더 친숙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더욱이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라는 전제조건이 주어진다면....

 갯벌랜드는 1천만 평도 넘는 대단위 테마파크이다. 하지만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방치된 곳이 없었다.

 그러니 포토 존이 빠질 리가 있겠는가. 핑크 뮬리(Pink muhly)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꽃밭으로 조성했던 지자체들이 다시 제거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던 식물이다. 그게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포토 존으로 되살아났다.

 핑크 뮬리(Pink muhly)는 가을이 제철이다. 가을이면 분홍색 꽃이 풍성하게 피기 때문이다. 때를 못 맞췄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황토와 편백나무를 베개 삼아 아름다운 갯벌을 바라다보고 즐길 수 있는 숙박시설도 자랑거리 중 하나다. 황토이글루, 황토움막, 방갈로, 카라반 등 형태도 다양하다. 캠핑가족들을 위한 오토캠핑장과 카라반사이트도 널찍하니 마련되어 있었다.

 편의시설로는 황토찜질방, 샤워장, 바비큐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황토찜질방은 힐링 명소로도 입소문을 탔단다. 황토방·편백방·소금방·산소방 등을 갖춘 데다 동시에 112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단다.

 황토찜질방 곁에는 낙지광장이 있다. 무안의 대표 특산물인 낙지를 광장의 이름으로 삼으면서 디자인 또한 낙지 모양으로 했다. ! 조금 더 가면 문형렬분재역사관과 분재공원, 생태갯벌과학관이 나오지만 주어진 시간에 쫓겨 포기하기로 했다.

 광장 근처에도 다양한 포토 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를 형상화한 저 조형물도 그중 하나다.

 무안지역의 갯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짱뚱어도 포토 존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갯벌을 체험해 볼 차례다. 갯벌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1.4의 탐방다리(갯벌탐방로)를 놓았다.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덤이라고 한다.

 검은 비단으로도 불리는 무안갯벌은 갯벌 특유의 아름다움과 생물 다양성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그러니 이를 배경삼은 포토 존 하나쯤 없겠는가. ‘사진 찍을래? 고래고래^^’라는 멘트가 귀엽다. ‘그래그래를 젊은이들의 용어인 고래고래로 바꾼데 더해 아예 조형물까지 고래로 바꿔버렸다.

 망둥어나 농게 등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무안의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미리 알아두라는 모양이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테니까...

 데크 탐방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하긴 길이가 1.4km나 된다니 어련하겠는가.

 탐방로는 데크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갯벌 위로도 노두길처럼 길은 내놓았다. 농게들의 먹이활동과 짱뚱어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귀여운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오늘은 시간당 40의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 일행이 트레킹을 포기해야만 했을 정도로... 그래선지 시뻘건 황토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갯벌 중에서도 무안의 갯벌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저 황토 때문일 것이다.

 요기조기 기웃거리며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막혀있다. 위험하니 넘어가지 말란다. 아니 기대지 말란다. 기댈만한 것도 없는데...

 탐방다리가 하도 길다보니 완성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금줄이 너머 구간은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무작정 앞만 보며 걷는 우는 범하지 말자. 다양성을 자랑하는 무안 갯벌이 발아래로 펼쳐지니 말이다. 참고로 무안갯벌 250종의 저서생물, 칠면초와 갯잔디 등 56종의 염생식물, 혹부리오리 등 52종의 철새들이 찾는 생태계 보물창고다. 전국 최초 갯벌습지보호지역 제1, 람사르습지,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갯벌탐방로의 하이라이트는 일출전망대(안내도에 그렇게 적혀있었다)’이다. 함평만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한 지점에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면 물결 잔잔한 함해만이 넓게 펼쳐지고 그 뒤로 함평과 무안의 야산들이 남북 방향으로 줄지어 달린다. 이곳도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다. 건너편 야산 위로 솟아오르는 해가 일품이라는 것이다.

 전망대에는 바다헌장비가 세워져 있었다. 국전 특선작가인 김오성씨가 제작했다는데, 한 쌍의 남녀가 돌고래가 미는 선박을 타고 노를 저으며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형상이다. 해양개척 정신과 해양강국 실현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뭍으로 되돌아갈 때는 다리가 아닌 바닥(썰물 때만 길이 나타난다)을 걸었다. 이왕에 물때를 맞췄으니 조금 더 가까이에서 갯벌을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갯벌은 무안의 대표 염생식물인 칠면초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칠면초(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무안 전역도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가을철 무안은 그래서 더 예뻐진다나? 그런데도 갯벌은 이미 붉게 물들었다. 무안의 갯벌은 욕심쟁이인 모양이다.

 일출전망대 부근은 흰발 농게의 집단서식지이다. 덕분에 한쪽 집게만 큰 농게들을 실제로 볼 수도 있다. 도구를 지참했을 경우 갯벌체험도 가능하단다. , 물때표를 참고해 안전한 시간에만 체험을 해야 하며, 정해진 구역에서 관찰만 가능하다(수집 및 채취 금지)

 갯벌을 벗어날 즈음 낙지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이왕에 왔으니 낙지라도 먹고 가라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낙지를 날로 먹는 탕탕이, 양념을 바른 낙지를 나무젓가락에 끼워 돌돌 말아서 구워낸 낙지호롱이, 심심함 속에 숨어있는 얼큰함과 시원함이 일품인 연포탕, 새콤한 낙지 초무침 등 다양한 낙지요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무안이니까.

 체험을 마친 탐방객들을 맞아주는 건 세족장이다. 먼저 발을 씻은 다음 샤워장으로 가란다. 이때 주의할 점도 있다. 갯벌 생태계 보호를 위해 세척제 사용은 금지다. 물을 아껴 쓰는 건 기본.

 편의시설 중 하나인 농게 쉼터는 문이 닫혀있었다. 하긴 폭우경보가 내려진 날씨에 여유롭게 쉬다 갈 사람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서해랑길 31코스(수포마을회관-매곡마을 삼강공원)

 

여행일 : ‘23. 7. 8()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수포마을석산마을감정마을송전마을백학마을백학산 임도백림사대사리입구슬산마을사야마을내분마을매곡마을(거리/시간 : 13.1km/ 실제는 13,27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1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백학산 임도를 빼고는 대부분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로 이어진다. 주요 볼거리로는 백학산 임도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과 감정마을 곰솔, 매곡마을 삼강공원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포마을(臨水里의 자연부락)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1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설치해놓았다.

 서해랑길 중 가장 짧은 코스 중 하나(13.1km). 거기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를 따르는 여정이라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백학산 임도(2km)’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데다, 꼬맹이 섬들로 가득 찬 서해바다나 길가 야생화 등 주변이 온통 아름다운 풍광들로 치장되어 있어 오히려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으로 변해버린다.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난 마을안길로 들어서면서 트래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옛날 이곳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수포(水浦)’라는 지명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조답이라는 방죽이 있었는데 두렛물이랄 정도로 수량이 많아 인근 간척지의 농업용수로까지 사용했단다. 덕분에 인근에서 가장 부촌으로 소문났었다나?

 5분쯤 걸어 마을 뒤 구릉지를 넘자 민대들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어서 805번 지방도(봉대로)로 내려선다.

 석포마을(돌과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을 지나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11.2/ 시점 0.9)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서쪽 바닷가를 향해 널찍하니 쭉 뻗어나간 농로를 따르면 된다.

 이 일대는 민대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석산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 된 여자가 마을의 부족한 농토를 보충하기 위해 막은 간척지라고 한다. 19세기 말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던 연병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염해에 강한 목화를 기르기도 했단다.

 저 들녘 너머에는 아시래라는 염전이 있다고 했다. 본동(석산마을)에서 볼 때 아스라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데,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들어서 있단다. 하지만 옛날 저곳에는 화렴(火鹽, 불꽃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석산마을로 들어가기 전 애송재(愛松齋)라는 제각을 만났다. 석산마을의 터줏대감인 해주최씨 문중의 사당이라는데, 근래(1985)에 지어져서인지 사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모양새이다.

 아시래 잔등으로 여겨지는 곳(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 얘기한)에는 정자와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원래의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죽고, 새로 돋아난 나무가 대신 그 자리를 지키는데도 신기(神氣)는 여전한 모양이다.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니 말이다. 봄철, 당산나무의 잎이 어떻게 피는가를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던 풍속을 지켜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더 걸어 석산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석룡리(石龍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석산·용흥·감정) 중 하나로 석산(石山)’이란 지명은 동네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 앞 방정각(芳井閣)’이란 정자는 주민들의 식수원이던 방정샘에서 빌려왔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그 기능을 잃었으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단다. 동학군들이 마셨다고 해서 동학샘으로도 불린다.

 방정각은 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편액도 달았다. 기웃거리던 나는 문득 천상운집(千祥雲集)’을 덧대본다. 온갖 좋은 기운이 구름처럼 모이고 수많은 귀한손님이 이 마을을 찾아온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을 앞에는 해주최씨 삼의사 숭모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의사란 농학혁명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처형당한 민제 최장현(崔璋鉉)과 청파 최선현(崔善鉉), 춘암 최기현(崔寄鉉)을 말한다. 이 마을에 살던 삼형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인근 장정들을 모아 봉기했고, 마을 앞 들녘에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추모비는 삼의사의 생애와 동학혁명 당시 활동내용을 후세에 전해준다.

 마을회관에 이르니 돌뫼동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마을의 유래와 지세 등을 시로 읊었다. 부정과 외세에 맞선 동학혁명의 역사도 빠졌을 리가 없다.

 7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감정마을이다. 석룡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감정(甘井)이란 마을 앞 샘물을 마신 인근 원갑사의 노승이 물맛이 참 좋다고 한데서 유래됐다. 하긴 물이 귀한 바닷가를 지나다 한 모금 얻어 마셨으니 얼마나 달고 시원했겠는가. 지금이야 민대들이라는 너른 들녘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다니 말이다. 동구 밖 어림인 개어덕도 바닷가와 관련된 지명이란다.

 마을 앞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175) 곰솔이 있다. 입향 시조가 전염병을 예방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데, 수형이 제대로 잡혀 무안의 기념물 중 가장 잘 생겼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이나 되다보니 영험해졌나보다.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준단다. 감정마을의 신목(神木, 매년 2월 초하룻날 당제를 지낸다)이 된 이유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경고판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외지인들은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는 게 배달민족의 미풍양속이 아니었던가?

 이 마을에는 담양전씨 삼강비라는 빗돌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순국한 전준엽(田俊燁, 1806-1882)과 그의 처인 연안차씨의 열행(烈行) 그리고 전성기(田聖淇, 1865-1950)의 효행을 기리는 비이다.

 마을 앞에는 석룡저수지가 있다. ‘민대들의 넓디넓은 들녘은 간척사업에 의해 태어났다. 소금기로 찌든 간척지는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석룡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감정마을을 빠져나와 805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전 찍고 부산이라던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내려와 버린다.(전신주에 서해랑길 방향표식이 붙어있다)

 서해랑길은 이제 구릉지로 올라선다. 상품성 떨어지는 양파가 길가에 나뒹구는 구간이다. 맞다. 이 부근은 알아주는 조생양파 생산지라고 한다. 사질양토와 해양성 기후 등 지역적 특성 덕분에 양파의 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단단하고 아삭하며 즙이 풍부하단다. 그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이삭을 줍는 둘레길 나그네들이 두엇 보였다.

 5분쯤 소요되는 구릉지를 넘자 송전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학송리(鶴松里)를 구성하는 2개의 자연부락(송전·학암) 중 하나로 송전(松田)이란 지명은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주민들은 봉대산 기슭에 소쿠리처럼 들어앉은 마을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라고 했다. 이때 물은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락거렸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또한 열부가 많음을 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고 있었다. 토지가 비옥해 먹고사는 게 풍부한데다, 주민들이 서로를 아껴주기 때문에 혼자된 여자가 재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이름값을 해보려는 모양이다. 학송리 앞 서해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고대하던 일은 쉽게 이루지지는 않는 법, 엊그제 시작된 장맛비가 길을 방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은 수로에서 평균대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송리 앞 들녘,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백학마을로 가는 도중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또 하나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백학마을이란다. 법정동리인 대사리(大士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신사·백학) 중 하나인데, 농토가 협소한 탓에 마을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참고로 백학(白鶴)이란 지명은 뒷산인 백학산에서 따왔다. 하나 더,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花蟹弄珠, 捶馬渡江, 天馬施風 , 梅花落池, 玉女彈琴, 白鶴歸巢, 將軍大座, 九龍爭珠)  백학귀소의 명당 터로 꼽히고 있었다. 백학귀소는 백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국을 뜻한다.

 마을을 지나자 탐방로는 백학산 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이어진다. 왼편은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 하지만 웃자란 갈대가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소담스런 방죽들이 줄을 잇는다. 널브러져 있는 시설들로 보아 양식장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왜 문을 닫았을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첫 대면한 바닷가. 감정마을(시점에서 3km쯤 되는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바닷가가 경치까지 하도 곱다보니 인생샷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앞바다에 황금어장이 형성되었었다는 백학포구일지도 모르겠다. ‘구래포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철마다 칠산 바다의 낙월군도 사람들이 찾아와 땔감이며 식량 등을 준비해갔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주막이 4곳이나 되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선착장 끄트머리에는 다드락섬이라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놓여있다. 섬으로 연결되는 저 노두길은 날마다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나? 썰물 때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길이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선착장(이정표 : 종점까지 7.5km)을 지난 서해랑길이 이번에는 백학산(126.3m) 자락으로 파고든다. 주민들 말로는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의 자연경관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내놓은 일주도로라고 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유인책이 필요한 법. 무안군은 그 첫째로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 자연경관을 꼽았다. 2% 부족한 것은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으로 채우고 싶었나 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굵직한 동백나무가 줄지어 길손을 맞는다.

 ! 사과 닷!’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동백나무에 꽃 사과를 쏙 빼닮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저 열매로 기름을 짰었다. 그 기름을 머리에 바른 아낙네들은 참빗으로 곱게 빗은 다음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었다.

 빼어난 풍광의 다도해를 뜨락 삼은 언덕, 그곳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예쁜 집이 들어앉았다. 그게 부러웠던 내 입에선 홍천의 농장을 팔아 이곳으로 이사오자가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집사람의 표정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다.

 백학산 자락을 에두르는 임도는 관광자원화가 주된 임무다. 그러니 벤치 하나 놓아두지 않았겠는가. 하나 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가 국내 제일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진도의 세방낙조보다도 한수 위라는 것이다.

 ·소 각시도와 상·하 낙월도, 임병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 찬 칠산 앞바다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완전한 게 어디 있겠는가. 바다는 그 부족분을 김 양식장의 지주로 메꾸고 있었다. 물결모양으로 겹겹이 늘어선 지주들이 조물주가 그린 풍경화에 방점을 찍는다.

 오늘도 반가운 이들이 남긴 흔적을 만났다. 서해랑길을 함께 시작했는데, 어느덧 한참이나 앞서가고 있다.

 길섶에는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예덕나무 꽃도 심심찮게 보인다. ! ‘쑥부쟁이 꽃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가을에나 만날 수 있는데...

 엉겅퀴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임도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칠산 앞바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후부터는 둘레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 임도를 빠져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림사(대한불교조계종)’로 향한다. 해수관음상이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한적한 산사치고는 제법 붐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염집 느낌이 강한 전각들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사찰일 게 분명하다.

 백림사 부근에서 바라본 함해만(또는 함평만)과 칠산대교, 이 또한 흔치않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8분쯤 더 걸어 대사길로 내려선다. 805번 지방도와 대사선착장을 잇는 도로로 최근 2차선으로 확·포장됐다. 도로변 이정표는 종점까지 4.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선착장으로 가는 옛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이번에는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구릉지로 오른다. 이렇듯 이 일대는 높은 산지가 없고 고만고만한 언덕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그 너른 땅이 농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이곳 무안의 특징이라 하겠다.

 구릉지 오른편은 신사마을이다. 대사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데 서해랑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구릉지를 넘으면 대사리 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4km). 신사마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둑길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른다. 덕분에 난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평만(함해만) 풍경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부지런한 농부는 오뉴월 삼복더위도 두렵지 않나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한낮, 그것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인데도 밭일이 한창이다. 수확을 끝낸 양파 밭에서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중일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서해랑길은 또 다시 805번 지방도와 만난다. 신사마을의 입구(표지석은 대사리로 적고 있었다)라서인지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신사)이 설치되어 있었다.

 1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이번에도 길은 구릉지로 연결된다. 아니 숲이 우거진 게 영락없는 산이다.

 고갯마루의 숲속 터널을 지나면 슬산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덕산리(德山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슬산·내분·사야) 중 하나로, ‘슬산(瑟山)’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옥녀봉(봉대산의 맥을 잇는다)에서 유래됐다. 마을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해제면의 8명당 중 하나인 옥녀탄금의 명당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는 이홍복(李弘福)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함평 이씨의 선조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인근 쥐머리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기도 했단다.

 함평이씨와 함께 마을의 세거 씨족인 함평노씨(고려 문하시중 노목을 시조로 모신다) 한림공파 슬산종가의 서당이란다. 옥녀탄금형의 명당에 장춘오헌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때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란다. 하지만 서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라고나 할까?

 동구 밖(이정표 : 종점까지 2.3km) ‘해당화도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을 만 했다. 때를 못 맞춘 탓에 연분홍빛 꽃무리는 보지 못했지만 윤기가 자르르 한 황적색 열매가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805번 지방도. 이곳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오가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벽지 도로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신호는 점멸’, 저게 제대로 된 신호를 보낼 때도 있을까?

 마을입구(신호등 사거리) 안내도는 소풍(笑豊)의 명소란 부제를 달았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소풍(消風, 학생들이 좋아하는)’이 아니다. ‘웃을  풍성할 자를 썼다. 웃음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거나 횡단하지 않는다. 도로에 발을 걸치자마자 다시 내려와 슬산저수지의 둑길을 걷는다.

 둑길 끝에는 나주정씨절효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후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둑길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민가 두어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분재와 묘목을 기르는 농원이 볼만하다) 뒤 고개를 넘는다. 그러자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평탄한 구릉지의 초록 밭들과 녹음 짙은 산자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그 너머로는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구릉지를 넘어 사야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샛들’, 슬산과 내분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잇들이란 의미인데 이게 음차되면서 사야(沙野)’로 변했다. 다른 해석도 있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그 바닷물에 유난히도 많은 모래()가 밀려왔다는 것이다.

 사야마을과 내분마을 사이 구릉지, 거대한 팽나무(당산제를 지낸다는 신목일지도 모르겠다) 한 그루가 내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에 평상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내분마을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노릇까지 톡톡히 수행하는 모양이다.

 사야마을에서 5분쯤 거리에 내분마을이 있다. ‘내분(內盆)’이란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형이 소쿠리형으로 멀리서 보면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마을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대를 지칭하던 분매동을 위치에 따라 외분·내분·매곡으로 나눠부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하자.

 고삭을 지나는데 금줄을 쳐놓은 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샘거리제를 지낸다는 그 영험한 샘일지도 모르겠다. 샘을 메우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마을에 자주 일어났고, 이에 놀란 주민들이 다시 복원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더니 그치더란다.

 내분마을의 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0.4km)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양매제방(내분제방이라고도 함)을 쌓아 만든 들녘인데, 탐방로는 이 들녘의 상부 어림을 가로지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양매마을’. 법정 동리인 양매리(兩梅里) 5개 자연부락(매곡·토치·외분·양간양간2)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분매동(盆梅洞)이었다, 마을 지형이 와우형인데 매화까지 많았다나? 그러다가 양대 씨족 중 하나인 광산김씨 측에서 파평윤씨가 주로 살던 분매동과 구분하기 위해 매곡(梅谷, 입향조의 아들인 김득남을 모시는 사당이 매곡사이다)’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날머리는 삼강공원(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 앞에는 삼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즉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부모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매곡마을에 이를 몸소 실천한 조상들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광산김씨 충렬문(光山金氏 忠烈門)’ 광산김씨 7효열각(光山金氏 七孝烈閣)’이 그 증거다. 정려편액(旌閭扁額) 2점이 걸려있는 충렬문(정려각)은 충의공 득남(병자호란 때 순국)과 부인인 밀양김씨를 그리고 효열각에서는 문중에서 배출한 5효자 2열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이들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한 삼강비(三綱碑)는 충열문과 칠효열각 사이에 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빗돌은 어딘가로 떠나가고 빈 전각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분매동의 역사를 적은 유래비도 눈에 띈다. 첫발을 디딘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가 주를 이룬 가운데, 나중에 들어온 파평윤씨 가문을 살짝 끼워 넣었다.

 삼강공원은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분매동에는 파평윤씨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그러니 그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2코스 이정표는 삼강공원 앞, 팽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27km,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평지에 가까운 길이 그만큼 수월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 사진은 시점(수포마을)의 안내도(무안 31코스)를 게시했다.

서해랑길 17코스(세한대학교-목포지방해양수산청)

 

여행일 : ‘23. 5. 27()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삼호읍과 목포시 옥암동 일원

여행코스 : 세한대학교대불방조제산호양수장농업테마공원농업박물관영산강하구언목포지방해양수산청(거리/시간 : 11km/ 12.1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열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 12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17코스의 특징은 영산호와 함께한다는 점이다. 처음에서 끝까지 영산호의 하구언(河口堰)과 둑길 등을 따라 걷는다. 주요 볼거리로는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농업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들머리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목포시 옥암동 110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내려와 영산로’, 석현삼거리에서 녹색로로 바꿔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지방해양수산청은 해양수산부 소속으로, 부산·인천·여수 등 해안지역에 설치되어 각 지역의 항만 운용과 개발, 해양환경 보전·관리 따위의 사무를 맡아본다.

 새롭게 단장된 3개 코스 중 마지막으로 구간 전체가 영산호와 함께 한다고 보면 되겠다. 영산호의 둑길과 하구언 등 코스 전체가 평지인데다 코스 길이(11km)도 짧아 난이도는 최하이다. ! 17코스의 시점은 세한대학교이다. 하지만 우린 산악회 사정으로 인해 종점인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서 출발 세한대학교까지 거꾸로 걸었다.

 통일대로를 따라 전남도청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목포지방해양수산청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25호 광장 교차로에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어 있었다. 도로를 새로 내면서 생긴 절개지 경사면을 활용해 높이 30m(너비 10m)의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인터넷과 우편을 통한 명칭공모를 통해 만남의 폭포라는 이름도 얻었다.

 통일대로와 교차되는 녹색로는 예쁘장하게 생긴 육교로 건넌다. 6차선 도로(녹색로)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으려는 목적이겠지만, ‘만남의 폭포라는 볼거리를 한눈에 쏙 담을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만남의 폭포 반대편. 영산강 하구언(河口堰)을 향해 뻗어나가는 녹색로가 시원스럽다.

 육교에서 내려와 녹색로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이때 낭만 항구 목포의 여러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갓바위 근대역사관 같은 목포를 대표하는 경관들을 사진에 담아 도로변에 게시했다.

 잠시 후 만난 영산강 하구언(河口堰), 둑으로 올라가기 전 왼쪽으로 자전거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영산강 수계지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영산강 발원지인 가마골 용소(전남 담양군)’까지 자전거길이 나있지 않나 싶다.

 영산호 주변은 금계국(金鷄菊)이 만개해 있었다. 요즘은 전국 곳곳에서 저런 군락지들을 만나게 된다. 외래종인줄로만 알아 온 내 앎이 잘못된 것일까?

 하구언(河口堰)에 올라선다.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아 만든 4,351m 길이의 제방으로, 이 둑으로 인해 영산강과 황해가 분리되면서 영산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겨났다.

 둑길을 걷다보면 남악신도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남도청의 청사가 무안군(삼향읍)으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일종의 복합 행정타운이다.

 하구언이라는 게 본디 바다와 강의 경계, 그래선지 심심찮게 해당화가 눈에 띈다. 옛 사람들은 해당화를 여인으로 심심찮게 둔갑시킨다. 그게 여염집 여인이 아니라 요염한 기생이었지만. 하지만 난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싶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예쁘니까. 꽃 중의 꽃이라고나 할까?

 둑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희미해져 무엇을 그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혈세까지 들여가며 꾸며 놓았다면, 때맞춰 보수를 해나가는 게 옳지 않을까?

 목포와 영암의 경계지점 빗돌에는 명심보감용 글귀가 적혀있었다. ‘모든 권리는 의무의 이행에서’, 봉사단체인 국제와이즈멘의 지역 클럽에서 세웠지 않나 싶다.

 이곳이 영산호(榮山湖)’임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띈다. 영산강지구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목포시(삼향동)와 영암군(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길이 4,351m(높이 20m)의 하굿둑이 건설됨으로써 생겨난 담수호(34.6)이다. 매년 반복되는 홍수와 염해의 피해를 막기 위해 1981년 쌓았다.

 조금 더 걸어 배수갑문(排水閘門)을 만난다. 집중호우를 대비해 증설했다는데,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형상화했단다. 새롭게 도약하는 영산강 하굿둑의 비전을 상징하고 있다나?

 다음은 농어촌공사(영산강사업단) 사옥이다. 옆에는 기존 배수갑문과 신규 배수갑문의 화합을 상징한다는 58m 높이의 타워를 세워 랜드 마크로 삼았다. 꼭대기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오르면 서해바다와 영산강에 대한 조망이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단다. 홍보전시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잔디광장이나 포토존 같은 편의시설도 만들어 놓았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농어촌공사의 사옥이 들어선 곳은 섬이었었나 보다. 인공 섬이라 부르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은데, 그곳에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너머 영산호의 수면을 영산철교가 가로지른다. 대불공단의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불선 철도인데, 제 기능을 못해 2010년에 운영이 중단됐다고 한다.

 둑길은 이제 서호대교로 인계된다. 오른편에는 기존의 배수갑문 8개가 들어서있다. 참고로 배수갑문은 방조제로 인해 갇힌 내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시설물로, 밀물 때 바닷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한다.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 영암 땅으로 들어선다. 하구언 둑길을 걷는 데는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앱은 2.4km를 찍는다. 자료는 길이를 4,351m로 적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서해랑길의 특징 중 하나로 꼽아도 좋을 만큼 자주 만나게 되는 멀구슬나무를 오늘도 만났다. 그게 오늘은 꽃까지 활짝 피워 올렸다. 맞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가의 늦봄(田家晩春)’에서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라고 읊지 않았던가. 하지가 다음 달 21일이니 멀구슬나무도 지금쯤 라일락처럼 향기를 내뿜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암 땅에 들어서니 무화과 조형물이 반긴다. 무화과는 영암의 얼굴마담으로 꼽히는 특산품, 우리나라 무화과의 90%가 생산될 정도이니 어찌 조형물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중생에 불과한 난 나뭇잎 치마를 두른 아담과 이브의 모습부터 떠올린다.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 그네들이 무화과의 잎을 엮어 알몸을 가렸다고 했으니까.

 기암괴석과 금계국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국가스공사는 사무소의 사옥보다 부대시설이 더 시선을 끈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예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용도는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0. 17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전라남도 농업박물관에 도착했다. 농업박물관은 말 그대로 농업에 대한 박물관이다. 지난 1993년 농업과 농경문화를 전시하는 농업 전문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현대화 물결 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 농경문화 유산을 연구·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옛 모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 박물관의 정문안내소가 매표소로 오해받기 딱 좋게 생겼으나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으니 부담 없이 들어가면 된다.

 농업박물관은 크게 남도 생활민속관과 농경 문화관, 쌀 문화관 그리고 농경문화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시설로는 전통 초가, 야외전시장, 작은 동물원, 농업테마공원 등이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일단은 인증사진부터 찍고 보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양이 모양의 귀여운 포토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를 옮겨왔으면 아직까지 밧줄에 의지하고 있을까. 참고로 이 박물관은 1993 9 24일 개관했다.

 첫 만남은 부대시설 중 하나인 작은 동물원이다.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공간으로 토끼··오리·염소·진돗개 등 가축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옆에는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물레·물통·연자·디딜)방아와 수차, 뒤주, 모정 등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시설들을 복원해 놓았다.

 전시물 중 하나인 물레방아.

 마을 공동체 신앙물인 산신당·성황당·장승·솟대 등도 전시되어 있다.

 세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체험관이다. 조상들이 사용해오던 민속 생활용품 및 재래 농경도구 등을 관람객들이 직접 만져보거나 사용해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추억을 남기기 위한 기념촬영은 기본, 투호나 윷놀이 등의 전통 놀이도 집접 해 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로 놀이를 해볼 수 있으며, 진열된 옷은 착용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전통놀이나 생활방식을 알려줄 수 있으니 어린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남도 생활민속관이다. 남도민의 전통 생활상과 민속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남도의 주거생활과 의식주, 공예, 문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가옥의생활식생활공예민속신앙의 순서로 둘러보는 게 바람직한 동선이지 싶다.

 안으로 들자 초가 일색인 농촌마을이 맞는다. 순천의 낙안읍성이 아닐까 싶다. 한 해의 1/4 정도를 국내외 여행으로 소일하는 나로서도 낯선 풍경이라서 세 번이나 다녀왔고, 그 풍경은 내 뇌리 속에 생생히 저장되어 있다.

 남도의 전통가옥을 세트장으로 만들고, 그 안에 밀랍인형을 배치해 그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의생활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먹는 문제가 빠질 수 있겠는가.

 다섯 번째 만남은 농경문화관이다. 하지만 건물의 현판은 농업박물관으로 적혀있었다. 이 건물이 전라남도농업박물관의 메인 전시장, 즉 본관이 아닐까 싶다.

 안으로 들어서자 촌부들의 일상을 담은 조형물이 맞는다.

 농경문화관은 1, 2층으로 나뉜다. 하지만 전통혼례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층에 전시되어 있다.

 농경의 역사(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농경문화 발달사), 농경의 사계(농촌의 옛 풍경과 농경생활 모습), 공동체문화(농경과 관련된 놀이, 신앙공동체) 등을 실물과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선사시대의 농기구부터 각종 농경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다. 농악을 위한 유물들도 눈에 띈다.

 전시장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상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쌀 문화관’. 말 그대로 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평소 너무나 쉽게 먹고 있는 쌀이 어떻게 자라고 어떤 품종이 있고, 또 과거에는 쌀을 어떻게 수확하고 가공했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은 우리 겨레와 함께 해온 쌀 농업의 중요성과 가치를 일깨우려는데 방점을 찍었다. 쌀을 주제로 쌀의 역사, 쌀의 일생, 쌀의 문화를 알려준다.

 방앗간, 쌀집 등 갖가지 쌀과 관련된 생활상을 밀랍인형으로 꾸며놓은 덕분에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생명의 땅 전남의 쌀 제품 홍보도 하고 있었다.

 박물관 투어(둘러보는데 35분이 걸렸다)를 마치고 쌀 문화관 옆 후문으로 나오면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이어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농업박물관 마실길로 올라선다.

 영산호관광지의 관광자원 및 생태자원을 활용해 만든 산책로로 농업박물관과 농업테마공원을 오솔길로 연결시켰다. 농업박물관을 찾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농업테마공원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입구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꽃길을 따른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하는 오솔길인데, 꽃무릇·맥문동·영산홍·백철쭉 등 꽃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않았나 싶다.

 작은 숲속 키 작은 나무 사이로 난 길을 200m쯤 걷다가 오른편 산봉우리로 오르니 꼭대기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니 이번에는 전망대(마실길 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던 트리하우스가 아닐까 싶다)가 반긴다. 농업테마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2층 높이의 대를 올렸다. 전망대는 의자를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농업테마공원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영산호와 남악신도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뒤돌아 본 전망대, ‘취사금지 및 야영금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데도 주변 원두막들은 하나같이 고기 굽는 냄새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17코스 시점(6km를 남겨놓았단다)을 향해 쉼 없이 진행해버린 이유이다.

 점심때가 넘었는지라 간식을 먹을 만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온 나들이객들이 주변 원두막을 빠짐없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랑길은 농업테마공원을 가로지른다. 이 공원은 농업을 주제로 한 체험공간이다. 138,612의 부지에 농업광장·생태연못·친환경농업 관찰학습장 등의 시설이 들어있다. ‘선농단이란 시설도 눈길을 끈다. 왕이 몸소 밭을 갈며 신농(神農)에게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향했다는 곳이다.

 벼한살이 체험장에서는 밀(또는 보리)을 심었던가 보다. 널따란 들녘이 온통 타작을 마친 밀대로 뒤덮여 있다.

 공원의 끄트머리에는 영산재(榮山齋)’라는 고급 한옥호텔이 들어섰다. 안과 밖이 통하고, 몸과 영혼이 엮이는 게 한옥의 특징이라고 한다. 영산재는 그런 옛 것의 장점을 살리고,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시킨 전혀 새로운 개념의 호텔이란다.

 농업테마공원을 벗어나 둑길(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5.6km)로 올라선다.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히고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제방이다. 이 둑이 쌓이면서 나불도 일대에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조성됐다.

 이때 영산호의 선상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동력수상레저면허를 취득하려는 사람들이 찾는 곳인데, 1층은 연수 및 시험장이고 2층이 카페로 운영되고 있단다. 흔들리는 선상에서 커피 한 잔으로 즐기는 낭만?

 나불도의 들녘, 저 곤포사일리지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보리까지 수확을 끝마친 시기에 설마 볏짚이 들어있지는 않겠지? 참고로 이곳 나불도(羅佛島)는 영암군에 딸린 6(나불도·외도·문도·구와도·고마도·서도)의 유인도 중 하나(가장 큰)였다. 하지만 영산강이 하구언으로 막힌 지금은 저렇게 너른 농경지로 변해있다.

 왼편으로는 영산호가 펼쳐진다. 제방과 강 사이에는 습지가 형성됐다. 과거에는 영산강 하구의 갯벌이었으나 하굿둑이 축조되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한다.

 인동초(忍冬草) 군락지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고 김대중대통령이 곧잘 인동초에 비유됐었고, 그의 고향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안군이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곳이 영산강종주 자전거길임을 알리는 말뚝도 눈에 띈다. 담양댐에서 영산강하구언에 이르는 길이 133km의 자전거길인데, 그게 이 둑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럼 아까 하구언의 목포 쪽 입구에서 만났던 그 자전거길 안내도와는 어떻게 다를까?

 나불도 들녘과 영산호를 양쪽 옆구리에 낀 둑길은 꽤 오래 이어진다. 3.5km나 되다보니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산호의 아름다운 풍광으로도 부족해 호남 제일 기경으로 소문난 월출산을 앞에 두고 걷다보면 지루하기는커녕 한눈 팔 잠깐의 틈도 허락되지 않는다.

 옛말에 곡식은 부지런한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야 모내기를 하고 있는 저 농부는 어떨까? 부지런한 농부가 심은 벼들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

 둑길로 올라선지 30, ‘산호양수장(이정표 : 17코스 시점까지 3.4km)’에 이르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제껏 걸어오던 길(차량통행이 가능한)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는데도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서해랑길 나그네들이야 물론 자전거길을 따른다.

 10분쯤 더 걷자 자전거길이 제방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까 헤어졌던 길과 합류된다. 제방 위는 흙길로 변하면서 걷는 게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조망을 위해 그냥 둑길을 걷기로 했다.

 이즈음 영산호를 가로지르는 무영대교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국내 최초로 5개 주탑이 연속으로 연결된 엑스트라 도즈교(Extradsed Bridge : 사장교와 거더교의 장점을 접목시킨 교량)’이다. 그 뒤는 영암의 또 다른 명산인 은적산일 것이다.

 길이 거칠지만 예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제법 빈번했던 모양이다. 제방에 기댄 둔치에 쌈지공원까지 만들어 놓았다. 인적이 끊긴 지금은 잡초 속에 묻혀버렸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영산호와 영암호를 잇는 물길 대불 수로의 오른쪽을 걷는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다리(수로교) 부근을 빼면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지극히 밋밋한 구간이다. 하지만 도로변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는 재미는 나름대로 쏠쏠했다.

 두 번째 다리를 지나면서 대불수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른편에는 세한대학교의 교정이 펼쳐진다. 교사는 물론이고 축구장·야구장·골프연습장 등 다양한 시설들을 지녔다. 하지만 주말이라선지 시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불수로의 둔치에도 쌈지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금계국이 활짝 핀 공원은 아예 꽃밭으로 둔갑했을 정도, 하지만 사람은 흔적조차 없다. 주말을 맞은 대학생들이 집에라도 다니러 간 모양이다.

 날머리는 세한대학교 입구(영암군 삼호읍 산호리)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세한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대불교차로’. 그곳에 17코스의 시점인 세한대학교 영암캠퍼스 정문이 있다. 세한대학교(世翰大學校) 2개의 캠퍼스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이곳 삼호읍의 호등산(虎嶝山, 126.8m) 자락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방대학교의 학생 수가 감소되는 최근의 추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서해랑길(영암 17코스)의 안내도는 세한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2.14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하지만 수치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17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농업박물관을 얼마만큼 꼼꼼히 둘러보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이 결정될 테니까 말이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극찬에 이끌려 공도교 배수갑문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산호와 영암호의 물 흐름을 조정해주는 갑문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몽중루님의 글로 대신한다. <명품 갑문이 나온다. 공도교 1.2교와 겹치는 수직과 수평 형 두 개의 갑문이 그것이다. 이 중 서쪽에 있는 수평 갑문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수평 갑문이다. 반원 형(半圓形)의 수평을 이루는 갑문을 지탱하는 철 구조물이 인상 적이었다.>

서해랑길 30코스(점암선착장-수포마을회관)

 

여행일 : ‘23. 6. 24()

소재지 : 전남 신안군 지도읍 및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점암선착장소금출저수지취동마을서동마을참도선착장내양마을임치마을수포마을(거리/시간 : 17.2km/ 소금출저수지부터 14,29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0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대부분이 농로와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평지로 되어 있으며, 참도 선착장부터 박동산 입구까지는 방조제를 따라 걷게 된다. ‘1004의 섬으로 대변되는 신안의 수많은 섬들을 눈과 가슴에 담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들머리는 점암선착장(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로 들어온다. 계속해서 24번을 타고 임자도 들어가다 점암교차로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점암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0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여객선터미널 옆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와 해제반도(일부)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다. 구간 길이는 17.2km, 하지만 3km를 줄여 소금출저수지(자그맣게 회색 칠해진 곳)’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서동마을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지루해 할 수밖에 없는 시간. 즉 뒤따라오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내 작은 배려이다.

▼ 선착장 위로는 임자대교가 지나간다지도(감정리)와 임자도(진리)를 잇는 4.99km짜리 연도교(連島橋)아니 정확히는 지도와 임자도 사이 수도라는 꼬맹이 섬을 잇는다(때문에 임자1로도 불린다). 길이는 750m, 수도와 임자도는 1,135m짜리 임자2로 연결된다두 다리의 길이를 합치면 1,885m, 여기에 수도를 지나는 구간과 임자대교를 연결하기 위해 확장된 도로 구간까지 합치면 4.99km가 된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여객선은커녕 자그만 고깃배 까지도 자취를 감췄다여객선터미널도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고 두 섬을 오가던 뱃길이 끊기면서 나타난 서글픈 현실이다뱃길과 관련된 부대시설들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그래서일까지중해풍으로 지어놓은 화장실이 더욱 애틋하게 보이는 건.

▼ 그런데도 주변은 제법 번화한 풍경이다너른 주차장과 버스매표소(대합실), 두엇의 횟집민박집매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횟집에도 손님이 없다연륙교의 편리함이 만들어낸 서글픈 한 단면이랄까?

 실제 출발지는 소금출 저수지 부근 도로변으로 삼았다(‘두순재 뒷산의 아랫도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30코스의 시점인 점암선착장에서 3km쯤 떨어진 지점으로, 한시라도 서방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며 따라나선 집사람에 대한 내 작은 배려이다. 혼자 걷는 게 서툰 집사람을 어찌 장시간 방치할 수 있겠는가.

 2차선 도로인 봉리길 아래로 소금출저수지가 보인다. 이곳 신안의 들녘은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소금기로 찌든 땅은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저 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잠시 후 시야가 열리면서 푸름으로 뒤덮인 불취들이 내려다보인다. 취동마을 앞 제방의 축조와 함께 생겨난 들녘으로, 제방 너머로는 신안의 자랑거리인 갯벌이 그 광활한 자태를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 바닷가에 위치한 취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리(鳳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봉동·심동·서동·황금·취동·죽곡·칠이지·참동·원동) 중 하나로 마을 북쪽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막힘없이 바람이 마을로 불어온다 하여 불 취()’자를 넣어 지명을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 방조제로 올라선다. 300m쯤 되는 구간인데, 이때 ‘1004의 섬 신안의 진면모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임자도를 비롯해 어의도, 만지도, 작도 등 신안의 수많은 섬들이 조망된다.

 바다 건너에는 임자도(荏子島)’가 있다(섬이 낮아 여러 개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의 섬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섬 전체가 튤립으로 뒤덮인다는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나 같은 중생들에게는 전장포(사진의 한가운데 푹 꺼진 곳일 듯)’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새우젓의 60~70%가 생산된다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겠는가. 새우를 숙성시키던 토굴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체험 및 볼거리로 제공된다나?

 거북이 닷!’ 갯바위가 갯벌을 헤집으며 솟아오르는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 뒤의 섬은 어의도(於義島)’이다. 섬의 지형이 늘어진 형상이라고 해서 느리섬이나 느리로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어의도가 됐다. 저 섬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충무공은 왜구들과 싸울 때 어의도를 전략적인 기지로 이용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된 조선 수군을 이 해역에서 재건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 조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마치기라도 했다는 듯, 서해랑길은 둑 아래로 내려가 내륙으로 파고든다.

 취동마을에서 16분쯤 걸으면 서해랑길은 다시 봉리길로 올라선다. 그곳에서 봉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서동마을을 만났다. 옛날 이곳에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당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고치면서 서동(書洞)’으로 변했다.

 신안군의 버스정류장 부스는 뭘 형상화하고 있는 걸까. 설마 홍어는 아니겠지? 신안을 대표하는 경관이나 특산물을 이미지에 담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서해랑길은 서동마을을 관통한다. 마을표지판 앞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서 황톳빛으로 물든 작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자연부락, 이곳 역시 서동마을이란다. 황톳빛 구릉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 비탈에 대칭을 이루며 민가가 들어선 모양새이다.

 특이한 마을 구조는 정자까지도 사이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서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같은 나그네들도 생수 한 모금 나눠 마시며 쉬어갈 수 있었다.

 서동마을을 빠져나오면 기다란 둑이 기다린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방조제는 분명 아닐 터, 어쩌면 저 멀리 보이는 방조제가 새로 놓이면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옛 방조제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서동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둑일지도 모르겠고...

 서동 들녘의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기 위해 축조된 서동저수지는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겨울철이면 남녘으로 날아가던 철새들이 잠시 들렀다 갈 수도 있겠다.

 오른편으로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겨난 농경지(봉리간척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하긴 서동마을을 비롯해 원동·본동·참도 마을 주민들이 저 들녘과 발을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300m쯤 되는 둑길이 끝나자.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서동마을(버스정류장)에서 16. 서해랑길은 또 다시 2차선 도로(아까와는 달리 참도길이다)로 올라선다. 그곳에는 참도(站鳥)’마을이 있었다. 어의도와 포작도 주민들이 쉬어가던 곳(지명에  자를 쓰는 이유다)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참동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기억해두자.

 갈림길로 빠져나와 구릉지로 올라선다. 이때 참도선착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봉리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지도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섬이 크다보니 산은 필수(호남정맥의 줄기인 봉대지맥이 흐른다). 그 사이사이에 논과 밭이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고 있다.

 이후부터는 구릉지 위를 걷는다.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황토색이다. 대량의 양분을 함유한 황토는 농사에 유리하다고 알려진다. 황토로 재배한 작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이 더 좋다는 것이다. 고구마나 양파·감자 등의 뿌리작물이 특히 잘 자란다는데, 그래선지 밭이랑에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양파가 내버려져 있었고, 그런 양파를 이삭 삼아 줍는 나그네들도 몇 보였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55. ‘참도선착장에 닿았다. 인근 섬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포구로 참도라는 지명처럼 어의도와 포작도 같은 섬 주민들의 참새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단다. ! ‘참도는 원래 섬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초기 지도와 연결되면서 육지가 됐단다.

 포구에는 식당도 들어서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식사할 요량으로 곁눈질 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폐업했는지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었다.

 선착장에는 섬사랑 3가 함께 갈 손님들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차도선인 저 배는 60명의 손님을 태우고 포작도와 어의도를 오간다. 이밖에도 점암선착장과 목섬, 재원도 등 북부권 작은 섬들을 하루 두 차례 오간다고 했다.

 참도의 또 다른 선착장에는 여러 척의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건너편 포작도와의 사이 해협에서는 더 많은 배들이 물이 더 차오르기만 기다린다. 그래야 고기잡이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선착장을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제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거꾸로 된 자 모양의 이 방조제는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거리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하나같이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방조제 오른쪽에는 염전이 들어섰다. 증도에서 만났던 태양염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하지만 구릿빛 어깨에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어야 할 염부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배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미리 청정 소금을 사두겠다는 민심 때문에 소금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줌이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일까?

 나머지 공간에는 대하양식장이 들어섰다. 1997년 우루과이라운드 발효를 계기로 산업자원부는 폐 염전정책을 시행한다. 수입소금이 들어오면서 서해안에 산재하던 천일염 생산지도 급격히 줄게 돼 신안·영광 등 일부 서남해안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염전을 그만둔 사업자들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대하양식장이다. 정부는 그런 이들에게 시설자금을 지원했었고...

 참도선착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대포작도는 나지막하면서도 펑퍼짐한 것이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해산물을 보자기에 싸는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의 보작도’, ‘포작도(包作島)’라는 지명이 붙여진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나란히 서있는 2개 섬의 형태가 포알처럼 뾰족뾰족 나와 있어 그 중 큰 섬을 대포작도’, 작은 섬을 소포작도라 했다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대포작도와의 사이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던 시절 섬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던 것은 갯벌뿐이었다고 한다. 갯벌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고, 또 갯벌에서 소금을 얻으면서 삶을 영위했단다. 그 갯벌이 지금은 칠면초로 뒤덮였다. 해마다 7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염초식물이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가을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미리 찾아온 오뉴월 삼복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해협에 떠있는 꼬맹이 어선들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저 바다는 새우와 민어가 주로 잡힌다고 했다. 인근에 위치한 전장포가 새우잡이로 유명했듯, 어의도 또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 새우잡이 어선의 파시가 형성됐다고 한다.

 둑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생겨난 제방이 아니니 해안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참도마을(봉리)과 가정마을(내양리) 사이의 자그만 들녘인 여끝들을 지나자 작은 선착장이 나타난다. 가정마을(산자락에 가려진 탓인지 마을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앞에 있으니 가정선착장으로 부르면 되겠다. 참고로 가정마을은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지형이 가재모양이라고 해서 가재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정(佳亭)’이 됐다.

 갯벌에 꽂혀있는 저 지주와 어망은 독살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돌이나 장대를 이용해 갯가에 안팎을 경계 짓는 담장을 두르고 간조와 만조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방식 말이다. 어부는 밀물에 멋모르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생선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어부들의 쉼터는 서해랑길 나그네들에게도 자리를 내주었다.

 또 다시 나타나는 길고 긴 제방. ‘내양리에 놓인 둑이니 내양리방조제 쯤으로 기억해두자. 600m쯤 되는 이 구간에서 우린 대·소 포작도와 앞·밖 갈우도를 조망해 볼 수 있다.

 오른쪽, 널디너른 간척지는 태양광 패널로 한 가득이다. ‘농자천하지대본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나 보다. ‘식량 안보가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멀쩡한 농경지에 저런 시설이라니... 이익을 찾아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이라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풍경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개운치 못했던 뒤끝이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칠면초가 만들어내는 붉은 빛 갯벌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그 감동에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린다.

 방조제를 지난 서해랑길이 느닷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가 나있으니 말이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숲으로 인해 생기는 그늘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나 할까?

 임도를 따라 박동산(59.2m) 능선을 넘자 내양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법정 동리인 내양리(內楊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내양·외양·묘두·가정·적동·송항·둔곡) 중 하나로 강산나루 안에 있다고 해서 안나루구지로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하면서 내양(內楊)’으로 바뀌었다.

 내양마을은 녹색 농촌체험마을이다. 꽃피는 춘사월이면 마을 앞 너른 들녘이 온통 노란 유채꽃밭으로 변한단다.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을 걸어보는 건 기본. 농작물 수확이나 메주·흑두부 만들기도 가능하단다. 갯벌에서는 전통 고기잡이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어선지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만 펼쳐진다. 아니 푸름으로 물들고 있어야 할 들녘이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 내양마을 앞 도로(80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담장처럼 쌓아올린 양파 망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10m쯤 걷다가 건너편 태양광발전 단지로 들어선다.

 태양광발전단지를 지나면 간척사업으로 만들어낸 들녘. 길 양옆으로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줄지어 늘어섰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서는 벼가 이미 무릎 높이까지 자랐는데도...

 잠시 후 도로 느낌의 둑으로 올라선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방조제이다. 아니 바다 쪽으로 더 나가면 또 하나의 방조제가 나오니 그저 둑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나 더, 이 둑은 무안과 신안의 군계(郡界)이다. 신안군이 끝나고 이제 무안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둑의 양옆 옛 해협은 담수호로 변해있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의 저 해협은 진도의 울돌목만은 못하지만 2의 울돌목이라 불릴 정도로 물살이 거셌다고 하다. 하지만 몇 곳에 둑이 쌓이면서 지금은 저런 담수호로 남아있다.

 서해랑길은 또 다시 둑길을 탄다. 지도를 육지화(陸地化)하면서 간척지와 물길을 구분하기 위해 쌓은 둑이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끝 간 데 없이 넓다. 저 들녘은 1975년 지도(신안군) 연륙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지도와 해제반도 사이 해협의 양옆에 물막이 제방을 쌓고 국도 24호선과 지방도 805호선을 냈다. 더불어 주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237(지도읍 820·해제면 1217)의 농경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1km쯤 걷자 배수갑문이 나온다. 지도를 연륙화하기 위해 쌓은 북쪽 제방의 부속시설이다.

 배수갑문과 그 옆의 방조제 위로는 2차선 도로(805번 지방도)가 나있다. 아까 내양마을 앞에서 계속해서 도로를 탔다면 이곳으로 나왔을 것이다. 이 경우 서해랑길 30코스는 1km 남짓 단축된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단축코스를 권하고 싶다.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난 농로를 따른다. 오른쪽에는 전남 3갑사 중 하나인 원갑사가 자리를 튼 강산(129.6m)이 있다. 길은 강산의 산자락과 서해바다를 양옆에 끼고 나있다.

 길가 농경지에서는 단호박 수확이 한창이다. 설탕이나 시럽의 첨가 없이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내는 식재료로 우리 집 식탁에도 가끔씩 올라오는 채소다. 그런데 작업자가 외국인 일색 아니겠는가.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농·어촌 현실, 그 대안으로 외국인 계절노동자를 들여온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고추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가 그끄저께였으니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절이 하도 하 수상하다 보니, 때 이른 무더위에 농작물이 헷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또 다른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임치들녘을 만들기 위해 쌓아올린 방조제일 것이다.

 왼쪽은 서해바다, 바다가 항아리라도 되는 양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평평하게만 보이는 갯벌에도 높낮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 갯고랑(전남 지역에서는 개웅이라 한다)이다. 어부들은 그 고랑을 용케도 찾아내고, 이제는 길이 된 고랑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오른쪽은 방조제로 인해 생겨난 습지다. 습지는 갈대로 한 가득이다. 갈대가 꽃을 피우는 가을철이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게 분명하다. 거기에 철새들의 군무까지 더해진다면 더없이 환성적일 텐데...

 길이가 400m쯤 되는 방조제의 끝에 이르면, 서해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내륙으로 파고든다. 그곳에서 임치마을을 만났다. 법정 동리인 임수리(臨水里)’를 구성하는 3(임치·수포·석포) 자연부락 중 하나로 임치(臨淄)’라는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 따왔다고 했다. ‘()’처럼 생겼다나? ‘삼 수()’변에 꿩 치()’이니 꿩을 닮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진입로는 꽃으로 단장됐다. 지도를 대표하는 유채꽃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1004섬 신안은 꽃으로 대변된다. 압해도의 애기동백부터 선도의 수선화, 임자도의 튤립, 지도의 유채꽃, 도초도의 수국, 홍도의 원추리, 병풍도의 맨드라미, 안좌·박지도의 라벤더까지, 사계절 내내 형형색색의 꽃으로 섬이 물든다.

 그중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를 담아봤다. ‘수레국화인데 가을하늘( 雅號)을 닮은 파랑색(프러시안 블루)이 너무 좋아서다. 꽃말은 행복감’, 아내와 함께 걸으며 느끼는 내 심정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해주고 있을까.

 하지만 마을회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행여 말동무라도 만날세라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 마실 나왔다는 할머니는 나그네와 나누는 말 한마디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노인들만 남았다는 농촌 현실은 이미 흘러간 옛 얘기란다. 그 노인들이 이제 마을회관에 나올만한 기력까지 없어져 버렸단다.

 마을에는 임치진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라우도(全羅右道)의 도만호진(都萬戶鎭)으로 목포진·다경포진·법성포진·검모포진·군산포만호진을 관할하는 주진이었으며, 군선도 중선 8척에 별선이 12, 군사도 1,055명이나 배치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단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에 병신년(1596) 98일 임치진성에 들러 첨사인 홍견(洪堅)에게 방비책을 물었다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100m쯤 들어갔어도 성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1685년부터 1873년 사이 세웠다는 역대 첨사들의 선정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은 동령재를 넘는다. 고개 너머의 작은 취락도 임치마을(‘동령재마을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여담 하나. ‘임치(臨淄)’는 제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의 근거지였던 산동성, 그곳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 나라가 있었다.

 임치마을을 빠져나와 수포마을로 간다. 수포들녘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농로를 따른다. 참고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바닷물이 깊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바닷가 마을을 물이 많다는 의미로 수포(水浦)’라 불렀다.

 들녘 너머에서 작은 마을 몇이 고개를 내민다. 임수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석포마을과 석룡리의 자연부락인 석산마을이 아닐까 싶다.

 날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그렇게 10분쯤(임치마을에서) 걷자 수포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14,29km가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무더운 날씨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르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 낮았다는 얘기도 된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서로 도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사랑 한 술은 필수겠지요. 부부 싸움은 물론 안 됩니다. 승자가 누가 되든 남은 반쪽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현자들은 이런 싸움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리스 북부 피루스왕이 다스리던 강대한 나라가 로마와의 전쟁에는 이겼으나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국력을 소비한 탓에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요?

대청호오백리길 19구간(청남대 사색길)

 

여행일 : ‘23. 5. 20()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일원

여행코스 : 상산마을곰실고개곰실봉철책초소청남대2관문좌골삼거리피미숲길작은용굴괴실삼거리노현리 습지공원(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3.26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아홉 번째 구간인 청남대 사색길(14km)’을 걷는다. 청남대(옛 대통령 별장)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인도가 따로 없다)을 걷는 게 다소 부담스럽지만, 호젓한 대청호 풍광에 더해 선사시대 유적이라는 작은 용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들머리는 하산마을 버스정류장(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문의 IC에서 내려와 32번 지방도를 타고 문의·대전 방면, 문의사거리(문의면 미천리)에서 회남·문의로(청남대 방면), 상장삼거리(문의면 상장리)에서 509번 지방도로 옮겨 회남·보은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19구간의 시점은 상산마을이나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해 출발지를 변경했다.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로 이어지는 호젓한 드라이브 길(주말에는 교통체증도 생긴다)이 포함된 구간, 상산마을에서 청남대2관문까지 곰실봉(326m) 구간(3km)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를 걸으며 아름다운 대청호 풍광과 마주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피미숲길, 대청호반에 기대어 아름다운 산책로를 조성했다. 하지만 청남대로 연결되는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하산마을 쉼터에 세워진 안내판. 19구간(청남대 사색길)의 초반부는 초록감투마을 산책로와 상당부분 겹치는 모양이다. ‘곰실봉으로 가면서 만난 이정표도 대부분 초록감투마을에서 세운 것들이었다. 참고로 초록감투마을이란 산덕리 일대에 조성된 농촌휴양체험마을이다. 마을에 머물면서 손두부·장아찌·과실청만들기 등의 체험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마늘·버섯·과일·효소 등을 로컬매장을 통해 구입할 수도 있다. 얼마 전 16구간 때 만났던 벌랏한지마을과 같은 형태의 체험마을로 보면 되겠다.

 서쪽, 그러니까 상산마을로 연결되는 산덕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시간에 쫓겨(집사람은 3km쯤 전방에서 걷기 시작했다) 답사를 포기했지만 왼편의 야트막한 봉우리에는 태실(충북 기념물 제86)이 있다.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10분쯤 걸으면 상산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산덕리(山德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그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상산(上山)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18구간과 19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19구간 청남대 4/ 18구간 염치리 4.5)는 상산마을 어귀의 쉼터(정자) 앞에 세워놓았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청남대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19코스가 시작된다. 십여 호쯤 될까 한 작은 마을을 관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마을길에서 만난 이정표(거리나 방향표시가 조금 전 마을 어귀에서 본 것과 같다)가 이제 그만 마을을 벗어나란다. 그런데 청남대 방향의 표지판을 뒤집어 놓은 건 무슨 이유일까?

 내일이 소만(小滿).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농부는 모내기에 한창이었고, 마을 앞 들녘은 모내기를 이미 끝낸 논들도 상당히 보였다.

 작고 외진 산골마을이지만 그 역사만큼은 오래인가 보다. 저렇게 큰 은행나무가 우릴 배웅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 어귀에서는 이보다 더 큰 느티나무도 만났었다.

 은행나무 옆 제각이 눈길을 끌기에 다가가 봤다. 충효각이나 열녀각쯤 되겠거니 하며. 하지만 안에 묘비를 모시고 있었다. 부인이 숙부인(淑夫人)이니 본인은 조선시대 정삼품 당상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묘비는 중추부사(종이품 벼슬로 처에게 정부인의 작호를 내렸다)라 적었다. 앞뒤에 적힌 벼슬은 더 이상하다. 직장(直長, 종칠품)과 현령(縣令, 종오품)이란다. 아서라. 남의 가문 빗돌에 왈가왈부해서 뭐하겠는가.

 농로였던 길이 산자락에 들어붙은 후부터 임도로 변했다. 오르막길이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에 딱 좋다. 웃자란 잡초가 심심찮게 발목을 휘감기는 했지만...

 그렇게 15분쯤 걸어 곰실고개에 올라선다. 월굴봉과 곰실봉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이정표(정상전망대 0.42/ 2코스 초록감투마을 2.0/ 초록감투마을 1.5)는 이 구간이 초록감투마을산책로와 겹침을 알려준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 그러니까 곰실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난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0(곰실고개에서 15). 19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곰실봉(328.2m)’에 올라섰다. 높이가 300m를 겨우 넘기는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남쪽 산자락에 아름다운 청남대를 품었으니 명산의 반열에 놓아도 손색이 없겠다. 그런 점을 높이 샀던 모양이다. 꼭대기에 멋진 데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대청호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로막아 완벽하지는 않다. 시야를 높이기 위해 대를 만들었지만 숲 위까지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이정표(학바위전망대 2.7/ 초록감투마을 2.0)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학바위전망대 방향이다. 시작부터 급하게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이는 기우였다.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이후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순탄한 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산봉우리를 향해 치닫는 방향표지판과는 달리 오백리길은 산의 허리께를 째며 옆으로 간다. 초록감투마을등산로와 헤어지는 지점이지 싶다.

 오백리길은 대부분의 산봉우리를 피해 우회한다. 그러다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그저 피톤치드를 듬뿍 보내주는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고나 할까?

 하산을 시작한지 15. 시멘트로 지어진 초소(첨부된 지도에는 대공초소로 나타난다)가 눈에 띈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군인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초소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곰실봉 구간에서 경사가 가장 심할 듯. 거기다 이곳에는 밧줄도 매어놓지 않았다. 그 가파름이 오래지 않아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4~5분쯤 더 걸어 능선 안부(첨부된 지도의 철책초소’)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청남대로 연결되는 맞은편 능선이 철조망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도중 대청호와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다. 대청호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살짝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 청남대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에 내려섰다. 이정표(작은용굴 6/ 청남대 1.5)는 이곳을 청남대 입구로 적고 있었다.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청남대 제2관문이다. 저 길을 따라가면 전두환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청남대에 이르게 된다. 1983년에 지어져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2003년 민간에 개방됐다. 하지만 사전예약은 필수, 또한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후부터는 청남대길을 따른다. 해를 등진 채 왼쪽으로 대청호를 옆에 끼고 북쪽(문의면소재지 방향)으로 걸어 올라간다. 이 구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이었던 만큼 길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왼쪽에 대청호수가 펼쳐져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이 부근은 산딸나무 군락지인 모양이다. 길의 양옆이 온통 새하얀 산딸나무 꽃으로 뒤덮였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저 꽃을 성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를 산딸나무로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기다 묘하게도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쏙 빼닮지 않았겠는가.

 대청댐 건설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세운 망향비가 눈에 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많은 마을들이 물속에 잠겼고, 대청호 주위 곳곳엔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망향비가 들어섰다.

 굵직한 가로수를 친구 삼아 천천히 걷다가 호수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청호가 보여주는 풍광에 흠뻑 빠져본다.

 그렇다고 너무 빠져들지는 말자. 이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는 2차선 도로라서 길 한쪽에 붙어 걸어야 한다. 평일은 어쩐지 몰라도 오늘 같은 주말에는 오가는 차량이 많아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호숫가 가까이 산책로를 따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인근 지자체에 전해본다.

 도로로 내려선지 40. 청남대 관람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1이 나온다. 차량통행을 막을 때 사용되는 바리게이트가 놓여 있는 게, 이곳에서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을 제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청남대를 오가는 이 길(청남대길)은 좌우로 도열해 있는 가로수가 멋지다고 해서 청남대 가로수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울창함이 드리운 숲길은 새어드는 햇살도 살갑고 파고드는 바람도 상쾌하다. 2004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입상했는가 하면, 2005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도 꼽힌바 있다.

 조금 더 걸으면 정문.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에 적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청남대가로수길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이고 숲이 보내주는 청정한 기운으로 넘치는 길...

 정문을 벗어나자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저 민박집은 커피에 라면까지 판단다. ‘매점에 들러 시원한 맥주라도 하나 챙겨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피미마을에 이미 도착해있다는 집사람으로부터 아직도 안 온다는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으니 어쩌겠는가.

 이병의란 사람의 효행비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부모를 향한 효성이 지극해 성균관장의 표창을 받았단다. 2000년에 받았다니 최근,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효자가 아직도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 옆에는 이병걸이라는 사람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었다.

 청남대가로수길을 벗어나서도 길은 여전히 고왔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아무튼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가로수길은 기산사 갈림길에 이르면서 끝난다. 참고로 기산사(箕山祠)는 경술국치로 순절한 이재 조장하(趙章夏, 1848~1910)선생의 항일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유림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청남대길로 내려서서는 50). 기산사 입구를 지나 좌골삼거리(이정표 : 작은용굴 1.5/ 청남대 6)’에 이르면 청남대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나뉘는 1차선 도로로 들어간다.

 마을(상장2) 표지석이 피미마을로 들어가란다. ‘작은 용굴까지 도로를 따라 곧장 갈 수도 있지만, 피미마을까지 에둘러가면서 피미숲길이라는 명품 산책로를 걸어보라는 것이다.

 4분쯤 더 걸어, ‘길모퉁이란 민박집(카페)을 지나자 길이 다시 둘로 나뉜다.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들길로 내려선다.

 초입에 피미마을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피미마을의 숲길 산책로는 대청호 호반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마을 뒤 언덕으로 오르는 마을단위 둘레길이다. 수변산책길·명상숲길·전망대·가족쉼터 등 1.3 숲길을 조성해 온 가족이 자연을 느끼며 숲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이정표는 기산사(아까 좌골삼거리에 이르기 직전 왼편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에서도 이곳으로 곧장 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도로(청남대길) 아래, 물 빠진 호숫가를 따른다. 대청호에 물이라도 넘실거리면 통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잠시 후 가족쉼터란 안내판이 맞는다. 선착장 근처를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단다. 버스정류장은 그리운 그 시절이라는 소재의 벽화로 채웠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린 소년은 울상이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소년은 자기도 걸릴세라 가슴만 두근거린다.

 선착장은 텅 비었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사공은 이미 떠나버렸고, 고철로 변한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청호의 물도 많이 줄었다. 호숫가는 풀밭으로 변했고, 저 배는 어즈버 태평연월을 그리며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시야가 툭 트이니 전망대가 빠질 리 없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대청호와 함께 포토박스에 담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난간에 서자 대청호가 성큼 다가온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와 우람한 산줄기, 그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한데 어우러져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다. 일상에 지친 마음에 호수만큼 넓은 여유를 품는다.

 가족쉼터 뒤는 피미마을이다. 지형이 키(, 곡식을 까불러서 쭉정이 등을 걸러내는 기구)처럼 생겼다 해서 치뫼(箕山, ‘는 키의 방언형이다)’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피미(皮味)’로 변했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대부분이 대청호에 수몰되고 현재 몇 집만이 남아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수변산책로로 들어선다. 이때 관광지로 탈바꿈한 피미마을의 현재를 살짝 가늠해 볼 수 있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저런 예쁜 집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우리 피미 갈래?’가 유행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미는 미세먼지를 피한다는 뜻으로 통한단다.

 명상숲길이란다. 핑크 뮬리(Pink muhly)로 치장된 구간이라는데 때를 못 맞추어선지 아름다운 꽃은 물론이고, 그 줄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여름에 자라기 시작해 가을에 분홍색이나 자주색 꽃이 핀다고 하지 않았던가.

 명상숲길이 끝나면 물가를 따라 난 숲길 수변산책길이 이어진다.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만들었다. 바닥을 야자매트로 깔아 장마철에도 질퍽거리지 않게 했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조금 더 걷자 숲길종점 안내판이 이별을 고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 부근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앱이 가리키는 왼쪽 방향에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를 무시하고 앱의 지시를 따랐으나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100m쯤 걸으면 두 길이 다시 만나는데, 오른쪽 길이 더 가까울 뿐 아니라 길의 상태도 더 좋았기 때문이다.

 다시 뭉친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임도로 변해 산자락을 헤집는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이때 대청호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대청호에 물이 담기면서 인공호수엔 기이한 해안선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안선보다도 더 복잡한 선들이 구불구불 윤곽을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 10분 정도 임도를 타던 오백리길은 다시 청남대길로 내려선다. 이 도로를 따라 6분쯤 더 걷자 도로로 올라오는 자전거 마니아 몇이 눈이 띈다. 저 어디쯤에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50m쯤 들어가자 작은 용굴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유적의 성격이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안쪽에 널찍한 광장이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공간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 4만 년 전의 유골인 흥수아이와 짐승 뼈가 발견된 청원 두루봉동굴이 인근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용굴이라는 이름처럼 이 굴에는 용()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 이무기들의 수도장에서 머물던 10마리의 이무기 중 탈선한 한 마리의 이무기가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죽게 되고 수도에 전념한 9마리의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다.

 동굴 내부 계단을 오르면 천정에 뚫린 구멍 너머로 하늘이 내다보인다. 9마리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올라갈 때 생긴 창굴이라는데, 승천 때 마찰로 생긴 비늘 자국도 찾아볼 수 있단다.

 동굴의 가장 큰 매력은 내부에서 내다보는 바깥 세상이다.

 도로로 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곧이어 월리사 갈림길(이정표 : 작은용굴 0.2/ 노현습지공원 1.5)을 마주한다. 표지판은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 적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면서 본사인 법주사보다도 먼저 지었단다. 하지만 의신대사가 세운 법주사의 역사는 진흥왕 14(553)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참고로 625에 태어난 의상(義湘) 702년까지 살았다.

 작은 용굴에서 8. 느티나무가 많다는 괴곡(塊谷)’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자 괴실삼거리이다. 이정표(노현습지공원 1.3/ 작은용굴 0.4)는 이곳에서 청남대길을 버리고 대청호로 내려가란다.

 잠시 후 습지로 내려서 노현리 습지공원을 향해 걸어간다. 대청호에 물이차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습지로, 여름에 걸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초록으로 바뀌는 듯한 기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싱그러운 구간이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수양버들과 키 큰 갈대숲이라고 했다. 웃자란 갈대 때문에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가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갈대밭이 싱그럽기 짝이 없었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갈대밭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대청호에 대한 각종 규제로 인해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덕분이다. 그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우린 그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라도 차오르면 이 길은 물에 잠길 것이다.

 습지공원에 가까워지면서 길이 또렷해졌다. 탐방로는 품곡천(안내판은 노현천으로 적고 있었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노현리 습지공원 비점오염저감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곳은 원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된 소류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자연이 복원됐다. 수련·부들·난초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야생조류의 산란처·서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품곡천이 대청호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청남대 만남의 광장이 들어서 있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파는 휴게소이다. 넓은 주차장과 쉴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해학적인 표정의 항아리들을 쌓아올린 담이 눈길을 끈다.

 오백리길 19구간은 이곳에서 끝난다. 하지만 우린 문의면소재지를 향해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상이 20구간을 따라 200m 남짓 더 간 지점에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노현교 건너 품곡천 주변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오가는 이들의 따가운 눈총에 개의치 않고 입맞춤에 열중인 청춘남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라때는 남녀가 손을 잡고 걷기도 부담스러웠는데...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신탑(祭神塔)도 눈에 띈다. 왜소한데다 외모 또한 초라하지만 금줄을 쳐놓은 걸로 보아 요즘도 동제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날머리는 노현리 습지공원 위 공터

문의면소재지 방향의 도로를 따라 200m쯤 더 걷자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산악회버스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26km. 초반 곰실봉 구간(3km정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나 빨리 걸은 셈이다. 앞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고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공터는 일류의 전망대였다. 노현리 습지공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대청호의 분수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