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49코스(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청)

 

여 행 일 : ‘24. 4. 13()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하서면 및 부안읍 일원

여행코스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석하마을구암리 지석묘군분장마을장서마을대초마을매창공원서림공원부안군청(거리/시간 : 19.2km, 실제는 13.86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9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새만금을 멀찍이 뒤로 밀어내며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부안의 명기를 기리는 매창공원과 서림공원, 구암리 지석묘군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들머리는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백련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단지 맨 안쪽 월포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평야지대를 걷는다. 평지를 걷지만 19.2km나 되는 길이가 부담스러웠던지 난이도는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다.

 실제 출발은 ‘705번 지방도(변산로)’ 석하마을 버스정류장(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숨결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이정표(종점 13km/ 시점 6.2km)는 우리가 1/3이나 단축해서 걷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너무 많이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11 : 41. 석하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법정 동리인 석상리(石上里) 8개 행정부락(청일·반암·구암·용와·석상·석하·마전·운암) 중 하나로, ‘석하란 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바위 인근에 있는 마을(‘돌마리 또는 돌마을’) 아래뜸이라고 해서 석하(石下)로 불린다는 것이다.

 11 : 48. 석하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벚꽃으로 단장한 도로는 변산로에서 고인돌로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부안의 명소 중 하나인 구암리 지석묘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녘 너머에서 악어산(48.7m)’이 고개를 내민다. 뒤는 석불산(289.7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도로변에서 만난 만첩홍매화’. 매화인데 붉은 겹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원예가 유박(柳璞 : 1730-1737)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녹악(綠萼)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운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박처럼 고매한 품격을 지니지 못한 내 눈에는 만첩홍매가 모든 매화 중에서 가장 예쁘게만 느껴진다.

 11 : 50. 잠시 후, 도로를 벗어나 석상(石上) 마을로 들어간다.(초입에 마을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리(石上里)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돌마리 웃뜸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다.

 마을 입구에는 지석묘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이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니 다 같이 아껴주자는 안내문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석상마을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구암마을로 간다. 석상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구암(龜巖)’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유래했다. 고인돌의 생김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12 : 00  12 : 05.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제103)’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인돌 주변의 민가를 없애고 잔디를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했다.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처럼 생긴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인 남방식이 있는데,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받힘돌이 있는 남방식이라고 한다. 원래 13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기만 남아 옛 얘기를 전해준다.

 고인돌은 10기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덮개돌(上石)을 여러 개의 고임돌(支石)이 받혀주는 모양새이다. 바둑판식 지석묘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덮개돌 아래에 몇 개의 주상(柱狀) 또는 판상(板狀) 고임돌을 외연을 따라 세운 것으로, 그 자체가 무덤방(石室)의 역할을 한단다.

 요것은 영락없는 탁자다. 그래서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에 고인돌 찻집을 차리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놓았었다니 말이다.

 12 : 06. 도로(고인돌로)로 빠져나와 구암교 영은천(靈隱川)’을 건넌다. 내변산 입구 우슬재와 하서면 옥녀봉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하나 더. 다리건너 도화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하지만 지방도는 705번에서 736번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상서초등학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연상시킨다. 교정에 힐링 숲길을 조성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함께 기린, 얼룩말 등의 조형물을 세워 자연학습 공간으로 꾸몄다.

 구암교에서 상서면으로 들어선 고인돌로는 면소재지를 향해 달려간다.

 왼쪽으로는 하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게 한 근원일 것이다. 저런 평야지대가 있었기에 지석묘를 축조할 만한 세력이 웅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오른쪽에는 도화(봉암)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통정리(通井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통정·성암·신성·도화·풍랑·수련) 중 하나로 부안의 너른 들녘이 품은 마을답지 않게 명덕산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12 : 17.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고인돌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봉야로를 따라 분장(分章)’ 마을로 간다.(삼거리의 도로표지판은 장동 방향으로 적고 있었다) 법정 동리인 장동리(長東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장동·장서·분장) 중 하나이다.

 도로(봉야로)를 가운데 두고 통정리(왼쪽)와 장동리(오른쪽)가 나뉜다. 아래 사진은 통정리의 자연부락인 성암마을이다. 반대편에는 장동리 소속의 분장마을이 있다.

 12 : 26. (분장마을)버스정류장과 양곡보관창고를 차례로 지나면 수로(水路). 서해랑길은 이 물길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수로의 둑을 따라간다.

 12 : 28. 잠시 후, 평야지대를 만나면서 수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들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이 구릉지인데 반해 오른편으로는 푸름으로 물든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12 : 32.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반긴다. 하지만 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사철을 맞아 들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을 이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장서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구릉지와 농경지를 양쪽에 낀 들길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생과 사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민들레는 그 차이마저도 없애버렸다. 꽃과 홀씨가 한데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봄바람 불고 들녘에 아지랑이 아롱거리면, 길가에 무심하게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야생화 한 송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문득 박미경이 부른 발라드곡 민들레 홀씨 되어의 가사가 떠오른다. <-전략-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후략->

 12 : 42.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장서마을이 반긴다. 장동리(長東里)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장동리의 옛 이름은 장다리(長橋里)’였다.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민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지명도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다리라 불렀단다. 1935년 두포천 하구에 갑문이 설치되고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고, 이때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 장서(長西)’로 불리게 된다. 장교가 장동(長東)’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2 : 44. 장서마을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른다.

 좌우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녘은 온통 푸름에 젖어있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는 초지일 것이다.

 들녘 곳곳에는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듯 하나같이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덕분에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분뇨 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료용 초지도 많지만 푸름의 대부분은 청보리 몫이다. 시선을 따라 초록빛으로 물든 청보리 물결이 가득 일렁인다. 5월에 수확하는 청보리는 4월에 한창 물이 올라 청록의 봄을 알려준다.(사진은 보리를 다치지 않으려고 고랑에서 찍었다)

 들녘이 넓어서인지 물을 대는 수로도 하천만큼이나 넓다. 물막이도 바닷가 간척지의 배수관문을 연상시킨다.

 12 : 57. ‘주상천(舟上川)’을 건넌다. 두포천(斗浦川) 또는 목포천(木浦川)으로도 불리는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해 주산면·행안면·하서면을 지나 계화면(의복리) 돈지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길이 18.4km의 지방하천이다.

 대초양수장. 농경지에 물을 대려면 양수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상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주상천을 건너면서 행안면에 바톤을 넘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행안면의 들녘은 무척 넓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행안면에서의 첫 만남은 야룡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大草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대초·송호·송서·야룡) 중 하나로, 늦깎이 등단 시인으로 시선을 모은 왕정순(79) 할머니가 사는 고을이기도 하다. 2022 문해, 지금 나는 봄이다라는 시로 전라북도 도지사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 부문 전북문단 신인작품상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13 : 18.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13 : 16). 이어서 만나게 되는 도로(순환북로)는 그냥 횡단해버린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농로를 탄다.

 13 : 2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도로(봉야로)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도로를 따라 부안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23. ‘원일볼트라는 제조공장 앞에서 도로(봉야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간다. 대초마을로 들어가는 길인데, 초입의 주영목장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13 : 26 - 13 : 41. 대초마을 동구 밖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경기장에 운동기구, 거기다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도시 부럽지 않은 시설이다. 덕분에 우린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13 : 43.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대초리(大草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초마을에 이른다.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마을이다.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마을 크기와 발음 표기상의 편의를 감안 대추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대초마을 경로당.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나게 굵은 팽나무가 건물을 감싸주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 경로당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들녘은 부지런한 농부들로 그득했다. 논에 물을 대고, 밭은 갈아둔다. 돌아오는 농번기를 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충경이라 하겠다.

 13 : 50. 2차선 도로(행안중앙로)를 횡단하면 신월경로당에 이어 신월마을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신기리(新基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신월·청교·안기·계시) 중 하나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로 불리다가 신월(또는 신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3 : 56. 또 다른 2차선 도로(신기신월로)를 횡단하면 길은 재내마을로 이어진다. 법정 동리인 진동리(眞洞里) 6개 행정부락(남산·지석·행산·신목·순제·재내)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시멘트 건물 위에 별도의 지붕을 올린 정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지붕이 위태위태한데도,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서해랑길은 재내마을을 왼쪽으로 에두른 다음 작은 고개를 넘는다.

 14 : 03. 고개를 넘어 월륜길로 내려선다. 그곳에 1941년에 개교했다는 행안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도 부침의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 한때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이를 타개했다. 부안읍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유치했다나?

 14 : 10  14 : 32. 행안초교사거리(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매창로를 따른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명답게 도로도 4차선으로 바뀌어 있다. ! 로터리 부근 진동공원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은 다음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라는 모양이다.

 14 : 45. 매창로를 따라 걷길 13. ‘매창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3.2km)’에 이른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매창의 묘와 시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매창(李梅窓 : 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이고 호는 매창이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작품이라 전하는 시가 수십 편에 이르는데 그중 이화우는 이별을 노래한 으뜸 시로 꼽힌다.

 1592, 20살 무렵의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 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귀와 허균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매창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린다. 봄비처럼 흐느끼는 이화우(梨花雨)’  배나무 꽃비는 그런 매창의 처지를 읊지 않았을까 싶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사랑을 애태우는...<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밖에도 억고인(憶故人), 증취객(贈醉客), 병중(病中) 등 매창의 여러 시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규원(閨怨)’도 그중 하나다.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은데 소식은 끊어지고 긴긴 밤에 애간장만 탄다나?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애끓는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남아 세였고나/ 생각나는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유희경과 매창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의병을 일으킨 유희경과 이별하게 되었고 매창이 37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온 행운아다.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끊을 수 있겠는가.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도 눈에 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 7월이었다. 허균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된다. 이후 10년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허균의 문집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후세 문인들도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매창 뜸이란 시를 지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도 그중 하나이다. <-전략-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 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정비석(鄭飛石 : 1911-1991) 매창묘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전략-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 60여 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후략->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묘는 소박한 묘비와 상석이 석물의 전부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오석비신에 팔작지붕을 얹은 근사한 묘비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의 인품과 시를 사랑하는 선비와 풍류가에 의해 세워지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더. 정비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부안군에서 다른 묘들을 이장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매창의 묘만 남겨두었단다.

 공원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매창의 묘와 시비 외에도 매창테마관, 습지공원, 어린이놀이터, 농구장, 운동기구 등이 들어서 있었다. 부안의 출향 인사들이 세운 부사(扶士)의 탑도 눈에 띈다.

 15 : 06. ‘매창테마관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매일 10시에 개관해 5시에 문을 닫는다. 하나 더. 사람들은 매창을 사랑의 화신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트() 조형물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어두고 테마관으로 들어가 보자. 화사하게 핀 튜립이 당신의 사랑을 한껏 축복해줄 것이다.

 매창테마관의 현판, ‘매창화우상억제(梅窓花雨相憶齋)’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으로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가 짓고 썼다고 한다.

 전시관은 4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경에 그녀의 대표적 시문을 감상할 수 있게 했고, 이어 매창의 생애, 매창이 남긴 작품 감상과 매창집이 남긴 의미 등을 알아보는 순서로 꾸몄다. 맨 마지막엔 디지털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만일 58편의 작품이 담긴 매창집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매창을 알 수도 없었겠지? 매창은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부안현의 아전들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을 모아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후세에 전해진다. 3부를 간행했는데, 2부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1부는 미국 모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내가 좋아하는 매창의 시 춘사(春思, 봄날의 그리움)’가 적혀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로 읊는다. 나 같으면 단숨에 부안으로 달려왔을 텐데...

 테마관 뜨락에서 만난 글자 조형물. 매창을 낳은 고장답게 바람 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등 부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함께 들어 행복한 소리이자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표현했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도 새 맛을 퐁퐁 풍기는 각종 시설물들은 물론이고, 산책로에는 나무와 꽃들을 식재하고 곳곳에 조형물과 쉼터를 설치했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운치 있는 야간 산책도 가능하단다. 그런 여건을 살려 매년 5월 이곳에서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15 : 18. 매창공원을 빠져나와 도로(오리정로)를 건너면 부안예술회관이다. 문화·예술 공연시설로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2층은 499석의 공연장과 회의실·연습실·분장실 그리고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15 : 23. 조금 더 진행해, ‘번영로를 가로지르면 이번에는 부안중학교가 반긴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5 : 29. 부안중학교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상소산(上蘇山, 114.9m)’이 고개를 내민다. 조선시대 부안현의 진산으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쳤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상소산(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얘기이다. 하나 더. 저 산에는 부안현의 사묘 중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공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저 가운데에 서면 천사로 변할 테니 최고의 포토죤이라 하겠다.

 15 : 30. 서해랑길은 서림공원(西林公園)으로 들어간다. 1848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해 온 조연명에 의해 숲이 조성되었는데, 관아 주변의 성황산이 황폐한 것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나무를 심고 서림정이라는 정자도 건립했다. 이후 이필의 현감이 부임해 왔을 때 숲이 다시 황폐해져 있어 앞서의 를 다시 부활시켜 숲을 가꾸면서 오늘의 서림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서림(西林)이란 부안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서림공원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가 나무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됐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에는 두 현감의 서림 숲 조성과 서림정을 건립하여 가꾼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관의 주도 하에 가꾸어진 서림공원은 2016년 산림청의 국가산림문화자산에 지정된바 있다.

 15 : 34. 조금 더 걷자 gpx트랙이 이제 그만 산책로(임도)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인도한다. 수십 년은 족히 묵은 듯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멋진 구간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15 : 39. 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었다. 종합안내도에 아래 전망대로 표기된 곳인데, 조금이라도 더 낳은 조망을 보여주려는 듯 이층으로 올렸다.(내 사진이 역광이라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부안읍내는 물론이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하의 속살까지 샅샅이 보여준다.

 계화면 방향은 아예 막힘이 없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는 새만금의 드넓은 들녘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5 : 44. 반대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다시 산책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포커스만 잘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오른쪽 산자락에는 부안 향교가 들어앉았다. 1414(태종 14) 창건된 부안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선조 33)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해 오늘에 이른다.

 서림공원에도 매창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그런데 저 백운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절일까?

 시비 근처. 매창의 시처럼 예쁜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나?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이 고장 출신인 백양촌 신근의 시비도 보인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을 예찬하는 시이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후략->

 15 : 53.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왼쪽은 성황사와 윗전망대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이정표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부안군청까지 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잠시 후 만난 혜원사(慧圓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924년 해인사 삼선암 승려 지승이 세웠다. 서외리(부안읍)에 인법당을 세우고 청일암이라 했다.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고 1999년에는 혜원사로 이름까지 바꿨다. 금당인 극락전을 위시해 인법당·산신각·무구원·마하문화원 등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15 : 58. 서림정(西林亭)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이 33인으로 시계(詩契)를 결성하여 건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그 터에 근래에 새로 지었다. 노휴재(老休齋, 조선 후기의 경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상소산도(上蘇山圖)’에 조선시대 당시의 서림정과 상소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옛 부안 현감들의 송덕비 등 부안지역과 관련한 각종 비석들이 서있다. 현감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 임정유애(林亭遺愛) ()도 찾아볼 수 있다

 석암(石菴) 정형태(鄭㺾兌) 기적비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 송덕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암각서(巖刻書)는 찾지를 못했다. 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부안 지역의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어, 지은 시나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사랑나무란다. 맞다. 100년 넘은 서어나무 두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연리목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 특히 한 쪽씩 날개를 가진 비익조(比翼鳥)’와 더불어 남녀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사랑과 결혼, 화합 등의 상징이자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16 : 12.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수련을 했다는 심고정(審固亭)’ 터를 지나면, 잠시 후 부안군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3.86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매창의 숨결을 느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군청과 의회 건물을 잇는 공중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부안군청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은 낯선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느 소녀상들과는 달리 서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단발하기 전의 긴 머리로, 침탈받기 전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소녀로 표현했다. 발은 맨발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었다는 것과,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단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내 맘에 드는 나로 바뀐다.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지금 하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집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