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혈산(風穴山, 485m)-관모봉(冠帽峰, 585.5m)-곰넘이봉(610m)

 

여행일 : ‘21. 2. 13(토)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과 영중면의 경계

산행코스 : 풀빛농원(이동숯불갈비)→잠수교→개머리골→풍혈산→관모봉→곰넘이봉→헬기장→진불암갈림길→진불암(소요시간 : 약 11km/ 5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에 함몰 당해버린 요즘은 방콕이 대세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근교산행 정도가 가능하다고나 할까. 그러던 차에 최군의 전화를 또 받았다. 이번 주말에도 시간이 난다는 것이다. 그가 미답이라며 추천한 산은 관모봉. 2주 전에 올랐던 관음산의 건너편에 위치한 산봉우리이다. 그러면서 같은 능선에 있는 풍혈산과 곰넘이봉까지 합해서 답사를 해보잔다. 능선의 끝에 있는 금주산은 5년 전에 함께 올랐었다면서 말이다. 다만 경사가 가파른데다 거칠기까지 해서 고생은 좀 할 것이란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험한 산이었다. 시작부터 길을 찾지 못해 주능선에 오를 때까지 길을 개척해가며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나타나는 봉우리마다 가파르기 짝이 없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거기다 곰넘이봉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으니 ‘고진감래’라는 멋진 고사성어도 남의 집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일부러는 찾아갈 필요가 없는 산이라 하겠다.

 

▼ 산행들머리는 ‘풀빛농원’(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33)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다가 ‘성동삼거리’에서 우회전 37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풀빛농원’에 이른다. 풀빛농원이라는 상호로 2개의 식당(순두부집 및 이동숯불갈비)을 열고 있었는데, 타고 온 차량은 음식점 앞 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대신 산행을 마치고 저 식당에서 닭백숙으로 뒷풀이를 할 예정이다. 참고로 ‘성동리(城洞里)’라는 이곳 지명은 궁예(弓裔)가 건국한 태봉(泰封) 시절, 이곳에 성(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큰 재(山) 아래 있다고 해서 ‘잣골’이나 ‘잿골’ 또는 ‘백곡’이라고도 불리었단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모봉만 콕 찍어서 오르지는 않는다. 대신 금주산과 곰넘이봉을 포함시켜 종주산행을 하는 게 보통이다. 이때 사용하는 들머리와 날머리는 금룡사와 양문산업단지가 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린 관음산의 대표 들머리인 ‘파주골순두부’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풀빛농원’을 들머리로 삼았다. 지도에서 ‘△103.5’로 표기된 지점 근처인데, 영평천을 건넌 다음 일동면과 영중면의 경계를 따라 풍혈산을 오른 다음 관모봉과 곰넘이봉을 거쳐 희망봉까지 가볼 계획이다. 그러다 힘에 부칠 경우 중간에서 내려오면 될 일이고 말이다.

▼ 풀빛농원 건너편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영평천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입구에 물놀이나 수영, 낚시를 금한다는 119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영평천은 잠수교를 이용해 건넌다. 건너편 산자락에 터를 잡은 ‘포천 원시림캠프300’에서 만들어놓은 다리가 아닐까 싶다. 폭우로 인해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날을 빼면 1년 중 300일 정도만 캠핑이 가능하다는 캠핑장이다. ‘캠프300’란 이름도 그런 이유에서 붙여졌단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영평천의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서슬 시퍼런 층암절벽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그게 영평천의 맑은 물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이 근처에 풍혈산 유원지가 있다고 했는데 저런 경관이 있기에 가능했지 않나 싶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캠핑장 진입로와 헤어져 오른편 계곡으로 들어간다. 계곡 초입에 사용 불가능한 간이화장실이 흉물처럼 서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참! 다음의 지도에 이 골짜기가 ‘개머리골’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초반에는 길이 잘 나있었다. 개머리골 일대의 사방사업을 위해 개설한 임도가 아닐까 싶다. 시행청인 서울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구호지점표지판(다아 : 8109-0200)도 보인다. 하지만 사방댐을 지나면서부터는 자갈밭으로 변해버린다.

▼ 계곡으로 들어선지 15분쯤 되었을까 교각처럼 생긴 구조물이 나타난다. 폭우 때 발생할 수 있는 산사태를 대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 우리는 이 구조물 근처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길이 나있었던 것은 아니다. 광야에서 길을 묻듯이 길이 찾아 헤맸을 따름이다. 참! 일부 지도에는 계곡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다 왼편 산자락에서 들머리를 찾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풍혈산 정상의 정복은 포기해야만 한다.

▼ 아무리 찾아도 길이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이웃 산자락으로 옮겨갔으나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최군은 가파른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아니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는 길이 없으면 만들면서 가면 된단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 할퀴고 찔리다 못해 따귀까지 맞아가며 30분 정도를 오르자 한숨 돌리기 딱 좋은 곳이 나타난다. 임도의 흔적도 보인다. 주변에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는 걸로 보아 사방사업 때 만든 임도인 모양이다.

▼ 하지만 능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가팔라진다. 그것도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가시넝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그렇게 15분쯤 오르자 군인들이 파놓은 교통호가 나오더니, 곧이어 목이 빠지도록 찾아 헤매던 주능선에 올라선다. 그리곤 이곳에서 성동리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등산로를 만났다. 길은 능선을 따라 제법 또렷하게 나있었다.

▼ 능선에 오르니 경사가 많이 누그러졌다. 아니 아까에 맞먹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또렷하게 길이 나있어 아까처럼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능선에 올라선지 25분.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치고 오르자 벙커가 나타난다. 이렇듯 관모봉은. 아니 포천지역에 소재한 산봉우리들의 대부분은 벙커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내팽개쳐져 있지만, 남북 간의 대치상황이 그만큼 치열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벙커를 우회해서 올라서니 ‘풍혈산(風穴山)’ 정상이다. 지도에 ‘481.0’로 표기된 지점이다. 참고로 풍혈산은 이름 그대로 구멍에서 바람이 솔솔 나온다는 산이다. 여름철에도 시원한 바람이 나와서 6월까지 얼음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구멍은 어디쯤 있을까? 아까 개머리골의 입구에서 크레바스에 가까운 두꺼운 얼음을 만났는데, 혹시 풍혈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서너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표지석’은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고 간 표지기들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개중에는 봉우리의 이름을 잘못 적은 표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정확한 지명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 다음 등정지인 관모봉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나 길이 나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었다.

▼ 길이 여유로워지자 시선 역시 자유스러워지나 보다. 단생산사(團生散死). 즉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풍경까지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을 우리는 금과옥조로 삼고 살아왔다. 분열은 사회를 멍들게 하지만, 단결은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버린 요즘은 ‘모이면 위험하고 흩어지면 안전하다’가 대세가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멀리 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다들 힘들겠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우리들이 헤치고 나가야할 숙제일 것이다.

▼ 풍혈산을 내려선지 15분쯤 되는 곳에서 산행 중 처음으로 이정표(관모봉↑ 0.8㎞/ 독지골약수터→/ 파주골↓)를 만났다. 오른편은 양문산업단지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이내 능선으로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활엽수 낙엽이 하도 많이 쌓여 걷기조차 불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임도의 방향도 관모봉과는 어긋나가고 있었다.

▼ 산길은 이후로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서 이어진다. 가파르다는 표현이 어울리나 그렇다고 버겁지도 않는 정도의 산길이다. 그건 그렇고 능선은 이렇게 움푹 파인 곳들이 많았다. 아니 능선의 모든 봉우리들이 모두 이런 교통호들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능선을 걷는 게 만만치가 않다. 교통호의 바닥이 울퉁불퉁한데다 낙엽까지 수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통호의 양 옆을 따르자니 좁고 비탈져서 이 또한 만만치가 않다.

▼ 풍혈산을 내려선지 40분. 벙커가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정자처럼 생긴 초소가 나타난다. 군사시설이 산봉우리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관모봉’이다. 생김새가 벼슬아치들이 쓰던 관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깃대봉’이란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이름처럼 일제 강점기 때 세부 지적측량을 위하여 이곳에 깃대를 꽂았었다고 전해진다.

▼ 정상은 초소 등 온갖 군사시설이 널브러져 있을 뿐, 가장 중요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동면사무소에서 세웠다는 이정표(금주리↑/ 양문리→/ 파주골↓)가 이곳이 관모봉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마에다 ‘관모봉 585m’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아 정상표지목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참! 정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 적힌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었다.

▼ 관모봉(冠帽峰)은 산의 모양이 갓처럼 생긴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관모(冠帽)란 조정의 백관들이 쓰던 모자이다. 그런데 이 모자의 양 옆에는 매미의 날개를 형상화한 장식물이 달려있다. 관직에 머무르는 동안 매미의 다섯 가지 덕(德)을 거울삼아 덕이 있는 정치를 펼치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 관모산은 그런 목민(牧民)의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진나라 시인 육운(陸雲)이 한선부(寒蟬賦)에서 말한 매미의 오덕(五德)은 이렇다. 머리에 홈처럼 파인 줄이 지혜를 상징하는 갓끈과 비슷하니 첫째 덕목인 '문(文)'이요, 나무의 수액만을 먹고 자라 잡것이 섞이지 않았으니 둘째 덕목인 '청(淸)'이다. 다른 곡식을 축내지 않으므로 염치가 있으니 셋째 덕목이 '염(廉)'이고, 살 집을 따로 짓지 않아 검소하니 '검(儉)'이 그 넷째 덕목, 계절에 맞춰 오고 가니 믿음이 있기에 다섯째 덕목인 '신(信)'이 되는 것이다.

▼ 환기구 아래에는 군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내부반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식당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보인다. 경계용의 초소를 넘어 영구 주둔지였던 모양이다.

▼ 봉우리를 둘러싼 잡목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버리기는 하지만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미세먼지에 가로막힌 오늘은 그 윤곽만 희미하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 다음 답사지인 곰넘이봉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이건 숫제 낭떠러지다. 스틱으로 중심을 잡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 나무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엉덩이를 땅에다 대고 미끄러져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엉덩이를 땅에다 대고 내려오다 괜찮은 풍경을 만났다. 수십, 아니 수백 년은 먹었음직한 나무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서 내려왔더라면 눈에 띄지도 않았었을 테니 이런 걸 보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가 보다.

▼ 이후로는 바윗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흙으로 된 능선에 바위가 놓여있는 모양새라서 우회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저 주변의 잘 생긴 바위들을 눈요기 삼아 걷기만 하면 된다. 이 구간도 크고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게 됨은 물론이다.

▼ 요런 바위 군락은 아예 우회를 해버린다. 그러다보니 가파르게 내려서야 했지만 그렇다고 위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 바윗길을 걷거나 바위를 넘는 곳이 있는가하면 아래처럼 바위 사이를 통과해야만 하는 곳도 있다.

▼ 모두가 다 바윗길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전형적인 육산을 하나 넘기도 한다. 이즈음에서 오른편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임도가 보이기도 한다. 양문리에서 ‘새닫이고개’로 올라오는 임도가 아닐까 싶다.

▼ 그렇게 35분쯤 진행하자 헬기장처럼 널따란 공터에 내려선다. 맞은편 산비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물도 구축되어 있다. 새내기고개, 세내지고개 등 지도마다 이름을 달리하고 있는 ‘새닫이 고개’일 것이다.

▼ 어느 지도는 이곳을 산내지(일동면 수입4리)와 금주리(영중면)를 잇는 고갯마루로 표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장에서 50m쯤 더 걷자 갈림길(이정표 : 금주리↑/ 양문리→/ 관모봉↓ 1.5㎞) 하나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정표는 이 길이 양문리로 연결된다고 표시해 놓았다. 지도를 살펴보니 둘 모두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고을에서 시작된 임도가 모두 이 고갯마루의 바로 아래까지 나있었기 때문이다.

▼ 임도를 잠시 따라다가 또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이때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금주산 7939m)가 눈길을 끌었다. 1천 미터, 아니 7천 미터가 넘는 거리를 Km가 아닌 m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기드믄 미터법 표시여서 낯설었던 모양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이때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타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곰넘이봉’일 것이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열리면서 관음산과 사향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 ‘새닫이 고개’를 지난지 20분쯤 되었을까 흡사 수직굴처럼 지반이 푹 꺼져있다. 누군가는 이 굴을 광산의 흔적이라고 했다. 이 근처에 광산(鑛山)이 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채굴을 위한 갱구는 아니다. 근처에 있었다는 광산으로 인해 생긴 싱크홀(sink hole)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야간 산행이라도 할 경우에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오래내림의 길이가 확대된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무척 가팔라졌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까 올랐던 관모봉보다도 더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여럿 나타난다는 점이다. 집사람이 버거워하는 게 역력한데 큰일이다.

▼ 너무 가파른 곳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굴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봉우리. 즉 밧줄에 의지해서 오른 봉우리가 곧 ‘곰넘이봉’이려니 했다. 하지만 ‘육군’이라고 적힌 군사시설 푯말이 전부이다. 그 흔한 표지기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첨부된 지도의 ‘488.7m봉’인지도 모르겠다.

▼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커다란 바위들이 빈도를 높이고 있는 능선을 따라다보면 또 다른 함몰지도 눈에 띈다. 잠시 후 나타나는 산비탈을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면 벙커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하지만 집사람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던가 보다.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갈수록 멀어진다며 언제쯤 곰넘이봉이 나오느냐고 징징거린다.

▼ 그렇게 25분쯤 진행하자 ‘금주2리 갈림길(이정표 : 금주산↑/ 금주2리→/ 관모봉↓)’이다. ‘수일동’이라는 자연부락인데 금주산과 갈미봉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에는 금주 저수지가 있어 경치가 좋은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정표(금주산↑/ 산내지←/ 관모봉↓)는 이곳이 산내지(수입4리)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산내지(山內地)'란 지명은 금주산의 산골짜기에 살포시 들어앉아 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새내지'라고도 불리며, 와룡암이 있어 ‘와룡암', 고려 때에는 '용곡소'라고도 불렀단다.

▼ 경주에 있는 단석산(斷石山)의 명물인 ’단석(斷石)‘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위도 만났다.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얻은 신검(神劍)으로 내리쳤다는 그 바위 말이다. 아니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둘로 쪼개진 것이 단석산의 바위보다 훨씬 더 잘 생겼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나 붙여놓는다면 또 하나의 명품 바위로 탄생될 게 틀림없다.

▼ 얼마쯤 걸었을까 ’곰넘이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오늘 걸었던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답게 엄청나게 가파른 모양새이다. 우리 일행은 그런 오름과의 버거운 씨름을 끝내고서야 겨우 ’곰넘이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주2리 갈림길을 출발한지 25분만이다.

▼ 널찍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 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곰넘이봉‘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이유이다. 아무튼 나는 산행을 마친 다음 그 기록을 하다가 ‘우리산줄기이야기’의 신경수(산경표) 씨가 이곳을 ‘곰넘이봉’이라 부른다는 걸 알았다. 그는 또 오늘 걷고 있는 이 산줄기를 ‘한북금주단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한북정맥이 운악산의 봉우리들을 만들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분기하여 밋밋하게 흐르다가 막바지에서 금주산과 곰넘이봉, 관모봉, 풍혈산 등을 솟구친 다음 영평천의 성동교에서 그 숨을 다하는 21km 길이의 산줄기란다.

▼ 이후로도 산길을 가파른 산봉우리 두어 개를 더 넘는다. 그리고는 ‘폐광지대’라는 ’구호지점표시목(현위치 : 3-2)‘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맞다. 옛날 이곳에는 영중광산이라는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요 아래 마을이 ’금주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근원이다. 이 광산은 일제 강점기에 문을 열어 반세기 동안이나 금을 채굴해왔는데 당시만 해도 금주리는 800여 호나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 산길은 암봉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봉우리 하나를 더 넘는다.

▼ 이어서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폐광지대 표시목에서 15분 거리인데 이곳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정표(금주산↑/ 일동←/ 관모봉 6520m↓)가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면의 이름 대신 ’수입리‘라는 고을 이름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수입리(水入里)라는 지명은 수입천과 영평천이 모두 들어오는 것만 보이고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산길은 헬기장을 지나면서 한없이 고와진다. 사납기 짝이 없던 능선이 그 기세를 완전하게 누그러뜨린 데다 길 또한 넓고 또렷해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구호지점표시목(현위치 : 2-2)을 만난다. 이번에는 ’기도원분기점‘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오른편으로 3㎞를 가면 기도원이라는데, 계곡을 따라 금주 저수지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 걷기 딱 좋은 능선을 따라 5분 남짓 더 걷자 기산리로 내려가는 삼거리(이정표 : 금주산/ 일동면 기산리 2.0㎞/ 관모봉)가 나왔다. 이곳에서 우린 하산 지점을 놓고 고민에 빠진다. 결론은 하산. 조금만 더 가면 금주산이 나온다고 최군이 입맛을 다시지만 어쩌겠는가. 비단을 수놓았다는 금주산(錦珠山)은 차치하더라도 500m만 더 걸으면 나오는 ’희망봉‘까지도 그림의 떡일 정도로 집사람의 체력이 바닥나버렸으니 말이다.

▼ ’기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약간의 경사마저도 없애버렸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집사람의 발걸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참고로 일동면 면소재지가 있는 기산리(機山里)는 ’금주산(錦珠山)‘이란 이름을 낳게 한 지명이다. 기산리 앞산이라고 해서 금주산에 ’비단 금(錦)‘을 붙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산에서 금(金)이 채굴되면서부터 ’쇠 금(金)‘ 자를 써 금주산(金珠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기산’이란 옛날에 비단을 짜던 직기(織機)인 베틀에서 나온 이름이다.

▼ 내려오는 도중 벤치를 놓아둔 쉼터도 만났다. 일동면 주민들이 그만큼 자주 오르내리는 등산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쯤 되면 삼거리가 기다린다. 왼편은 일동고등학교로 연결되나 우리 일행은 1.0㎞를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진불암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완만한 길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이다.

▼ 날머리는 진불암(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산 32-1)

하지만 이 결정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벌목지를 벗어나자마자 길이 험해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경사가 가팔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은 탓인지 곳곳에서 잡목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가까이를 더 내려가자 진불암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진불암은 일반 여염집에 가까운 모양새이다. 아무튼 오늘은 총 6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5시간 30분. 11㎞ 정도쯤 되는 거리를 걷는데 소요된 시간치고는 너무 길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관음산(觀音山, 732.6m)

 

산행일 : ‘21. 1. 30(토)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과 이동면, 영중면, 영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파주골순두부→안마을→파주골→능선→관음골재→관음산→남릉→안부 삼거리→자연의 집(소요시간 : 약 9km/ 4시간 5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에 밀린 요즘은 개인 산행이 대세다. 그러니 서울 근교의 산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던 차에 최군의 전화를 또 받았다.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곳은 포천의 불무산. 하지만 바윗길이 많은데다 폭설까지 예보되어 있어 부랴부랴 인근에 있는 관음산으로 바꿨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위험요소가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찾는 사람들이 드물 게 뻔하다. 하지만 ‘언택트(un-contact)’가 일상화가 된 요즘으로서는 최상의 산행지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들머리에는 ‘파주골순두부’라는 소문난 맛집까지 있으니 가족 산행지로도 꼽힐만하다. 감염의 위험이 없는 곳에서 오순도순 산행을 즐긴 다음 맛있는 음식으로 뒷풀이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 산행들머리는 ‘파주골순두부’ 주차장(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135-8)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다가 ‘성동삼거리’에서 우회전 37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잠시 후 ‘파주골순두부촌’에 이른다. 타고 온 차량은 ‘원조파주골순두부’ 식당의 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그 덕분에 우린 저 식당에서 끼니(점심)를 때웠다. 하지만 메인 메뉴인 ‘순두부 정식(6,000원)’은 물론이고 서브 메뉴들까지 온통 두부요리 일색이라서 우리 같은 애주가들에게는 궁합이 맞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그나마 술안주에 가까운 ‘두부전골(8,000원/1인)’과 ‘두부파전(8,000원)’을 주문했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은 요리들이 익숙하진 않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긴 수많은 유명 연예인들이 흔적까지 남기고 갔을 정도이니 그 요리 솜씨가 어디 갔겠는가.

▼ 주차장에는 ‘파주골’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패주(敗走)골’. 왕건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던 궁예가 패해 달아났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영평천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어 산수경관이 뛰어난데다. 최근 순두부촌까지 형성되면서 포천시의 맛집이자 관광명소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단다.

▼ 식당(원조파주골순두부) 화장실의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안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인데,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슬비가든(버선전골 전문점)과 자작나무가든(국수카페) 등의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르면 된다.

▼ 길가에 ‘경주최공휘운붕공(慶州崔公諱雲鵬公) 판전의봉사주지파(判典儀奉事周之派)’라고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하단의 화살표는 그의 위패를 모시는 ‘봉산사(峰山祠)’이라는 사당이 파주골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5분쯤 걷자 ‘파주골(성동4리)’ 마을이 나온다. 아니 ‘안마을’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성동4리, 즉 파주골이 ‘안마을’과 ‘바깥마을’이라는 두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동리(城洞里)’라는 지명은 궁예(弓裔)가 건국한 태봉(泰封) 시절, 이곳에 성(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큰 재(山) 아래 있다고 해서 ‘잣골’이나 ‘잿골’ 또는 ‘백곡’이라고도 불리었단다.

▼ 마을 안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하도 작아서 다리라 할 것도 없는 모양새지만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시 말해 마을을 벗어난다고 보면 되겠다.

▼ 다리 앞에는 ‘관음산’의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등산코스를 1코스와 2코스로 나누고 둘을 합해 종주의 개념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보광초교와 산정캠프장, 낭유고개, 그리고 노곡리의 주유소에서도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고 표기했다.

▼ 개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난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걷자 ‘브니엘기도원’이 나온다. 홍릉교회의 수양관을 겸하는 곳인데 부속건물인 ‘벧엘성전’이 무척 이색적이다. 집회장소를 이층에 배치하고 아래층을 뻥 뚫어 길을 내놓은 것이다. 관음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살리려다 보니 저런 모양새가 되었지 않나 싶다.

▼ ‘벧엘성전’을 지나고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폐광지역의 산림복구공사를 위해 내놓은 도로가 아닐까 싶다.

▼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비탈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뚫려있었다. 앞에 철망 울타리를 쳐놓은 것이 폐광된 ‘흥진광산’의 갱구인 모양이다.

▼ 임도의 끄트머리에서 이정표(관음산 정상 4.1㎞)를 만났다. 야미리(쇠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사거리)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입구이다. 참고로 고개 너머에 있는 야미리(夜味里)는 울창한 소나무 덕분에 밤이면 도둑들이 재미를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거는말·도내지·봉오골·서두물·쇠골·아랫배미·윗배미 등의 자연부락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쇠골’로 연결된다. 옛날 철(鐵)이 생산되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하지만 우린 반대편에 보이는 민가로 향했다. 그쪽에 또 하나의 등산로가 나있기 때문이다. 이 등산로는 북릉의 ‘안부 삼거리’로 연결된다. 지도에는 조금 전에 헤어졌던 코스와 ‘안부 삼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게끔 그려져 있었다.

▼ 민가를 지난 탐방로는 곧장 낙엽송이 울창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관음산 정상 4.0㎞)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파주골’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갈수기 탓인지 아니면 골짜기가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물기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건천(乾川)이다. 그래선지 개울을 가로지르는 데도 안전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폭우 때만 조심하면 되니 구태여 돈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골짜기를 따르다보니 비탈진 사면을 치고 오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 길의 형편은 썩 좋지가 않다. 다래나무 등 넝쿨식물들이 탐방로까지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기다 태풍 때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의 흔적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 그렇게 얼마쯤 올라갔을까 탐방로는 드디어 골짜기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시설물 하나를 만났다. 이정표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국가지점번호(다아 8131-0410) 표시목’이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2.6㎞.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이정표에 정상까지 4.0㎞로 적혀있었으니 벌써 1.4㎞를 걸어온 셈이다.

▼ 탐방로는 이후부터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던 마지막 민가를 지난 지 35분 만에 능선(이정표 : 정상→/ 파주골↓)에 올라섰다. 일부 지도는 이곳을 ‘500m봉’으로 표기하고 있었으나 내가 보기엔 그저 능선의 안부일 따름이다. 참! 산행을 마치고 그 결과를 기록하다보니 이곳을 ‘광산골재’라 표기하고 있는 지도도 여럿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첫 이정표를 따라야 사거리인 ‘광산골재’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조금 더 걷자 이정표(관음산 정상 3.1㎞) 하나가 반긴다. 앗! 그런데 정상까지의 거리가 3.1㎞나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까 능선으로 오르는 도중에 만났던 국가지점번호판에는 정상까지의 거리를 2.6㎞로 적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참이나 걸었는데도 오히려 0.5㎞를 뒷걸음치는 꼴이 됐다. 하루라도 빨리 설치 기관인 포천시(국가지점표시목 설치)와 영중면사무소(능선의 이정표 설치)가 서로 협의해서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 탐방로는 이후부터 남쪽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이때 풍혈산과 관모봉이 위치한 오른쪽으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기 직전이라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 나뭇등걸의 기이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 수많은 버섯들이 마치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난 것이다. 저런 모양새 때문에 ‘운지버섯’이란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아무튼 저 버섯은 종양 저지율이 77.3%나 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관상용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만큼 흔한 버섯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3㎞나 되다보니 미리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었나 보다.

▼ 능선에 올라선지 23분 만에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정상↑/ 순두부체험관→/ 파주골↓)는 이곳이 순두부체험관에서 올라오는 길(2코스)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곳이 ‘관음골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 오른편 산자락에는 잣나무가 한가득이다. 그것도 무척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긴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인 가평이 바로 옆 고을이 아니겠는가.

▼ 15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1.9㎞나 남았단다. 이정표는 또 이곳이 5부 능선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껏 절반 밖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맑고 포근한 날씨로 변할 거라던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추워지는데 큰일이다.

▼ 길의 상태도 썩 좋지 않다. 수북이 쌓인 눈 때문에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야만 하는 곳도 만나게 된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은 한북정맥의 8지맥 가운데 하나인 ‘명성지맥(鳴聲枝脈)’이다. 한북정맥에 속한 광덕산에서 서쪽으로 새롭게 가지를 치고, 영평천과 한탄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50㎞의 산줄기로 각흘봉(838m)과 명성산(923m), 사향산(736m), 관음산(733m), 불무산(663m), 보장산(555m) 등의 유명산들을 품고 있다.

▼ 그렇게 22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구호지점표시목(다아 8298-0417)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정상까지의 거리가 적혀있지 않았다. 참! 왼쪽으로 나있는 산길도 눈에 띄었다. 꽤 많은 리본들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산정호수 방면의 ‘산정캠프장’이나 ‘우물목’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일 것이다.

▼ 드디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이어서 하루 앞도 못 내다보는 기상청을 향한 욕설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되돌아 내려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마침맞게 설화까지도 우릴 유혹한다. 내친김에 정상까지 올라보기로 한 이유이다.

▼ 설화(雪花), 즉 눈꽃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는 현상을 말한다. 두리뭉실하게 쌓이면 한낱 눈송이일 따름이지만 이게 상고대처럼 아름답다보니 ‘꽃(花)’이란 토씨 하나를 더 달았다. 참고로 상고대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변한 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었다는 의미에서 ‘수상’ 혹은 ‘나무서리’라고도 하고 ‘서리꽃’으로 부르기도 한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신시설도 눈에 띄었다. 소요 전력은 태양전지판에서 얻어다 쓰는 모양인데 용도는 알 수 없었다.

▼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은 명성지맥의 일부이다. 이 지맥은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곳곳에서 군부대나 군사시설들이 일반인들의 통행을 막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곳 관음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흘러간 옛 얘기로 남았지만 그 흔적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능선을 따라 길게 교통호가 파여 있는가 하면 거의 모든 봉우리마다 벙커가 지어져 있다.

▼ 능선에 올라선지 1시간 35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10평 남짓 되는 정상에는 왕수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 외에도 이정표(수입리/ 관음골)와 삼각점(갈말 25)이 설치되어 있다. 이 봉우리의 또 다른 이름은 ‘망무봉’이었다고 한다. 옛날 궁예가 올라가 적정을 살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주변의 나무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기는 했어도 옛 얘기가 실감날 정도로 사방이 막힘이 없다. 하지만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오늘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북쪽의 명성산과 사향산은 물론이고, 남쪽의 운악산과 금주산. 그밖에도 명지산과 청계산, 금주산, 왕방산 등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이정표에는 나타나있지 않으나 이곳 정상에서 낭유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관음산이란 지명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이 산마루에 바랑을 벗어 놓고 갔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년대 초 발간. 보물 제1591호)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발간),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년경 발간) 등에 ‘영평현 동쪽(또는 북쪽)’에 있다고 나와 있을 정도니 오래 전부터 그리 불리어왔다고 볼 수 있겠다.

▼ 추위와 눈보라에 떠밀려 하산을 서두른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수입리’ 방향의 남쪽 능선이다. 하산길은 불길하게도 엉덩이 썰매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후로도 꽤 여러 곳에서 이런 상황들과 맞닥뜨렸다. 보통 때라면 이까짓 바윗길쯤이야 우습게 여기겠지만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으니 어쩌겠는가.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순백의 눈꽃으로 빛나는 겨울왕국’. 이런 표현을 스스럼없이 쓰는 산들은 의외로 많다. 설악산, 태백산,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 이들은 또 하나같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고대와 설경을 뽐내는 곳이라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압도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라면 꼭 그런 산을 찾을 필요가 없을 듯 싶다. 보라! 눈꽃으로 치장된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들이 내세우는 풍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눈보라나 한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눈보라는 나뭇가지 위까지 소담스럽게 쌓아올렸고, 계속되던 한파는 그걸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그게 바로 눈 속에서 피어난 꽃, ‘눈꽃’이다.

▼ 하산길은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겨울 풍경을 일러 ‘죽은 나무도 꽃을 피운다.’고 했다. 별천지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표현 또한 이상향을 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왕에 만났으니 더 이상이 없을 것 같은 완벽한 눈꽃 세상을 만끽해 보자.

▼ 산길은 서둘지 않고 고도를 낮추어간다. 작은 오름과 긴 내림이 반복되기 때문에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완만한 산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오른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순두부체험관’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일 것이다. 참! 최군은 하산 코스로 이 루트를 주장했지만 내가 고집을 세워 계속해서 능선을 탔다. 이정표도 세워놓지 않을 정도로 등산로를 내팽개치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정표는 딱 한곳에서만 보았을 따름이다.

▼ 능선은 양쪽 모두가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비탈지다. 아니 왼쪽은 가까운 게 아니라 아예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덕분에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깔끔하게 단장된 ‘축구장’이 내다보인다. 관음산 자락에 들어선다던 ‘축구마을’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는 국제 규격의 축구장을 중심으로 빌라형 주택과 식당, 카페 등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공사가 마무리 되었나보다.

▼ 길의 상황은 썩 좋지가 않다. 갈수록 경사가 가팔라지는데다 바닥이 너덜로 되어있어 발을 내딛기가 편치 않은 것이다. 거기다 미끄럽기까지 하니 최악이라 하겠다. 수북이 쌓인 낙엽만 해도 미끄럽기 짝이 없는데, 거기다 눈까지 더했으니 아예 죽을 맛이다.

▼ 그렇게 20분쯤 진행하자 이정표(수입리/ 정상) 하나가 반긴다. 하산 길에 만나본 유일한 이정표이지만 길 찾기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근처에서 길이 하나 나뉘는데도 이정표에는 표기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갈리는 길이 조금 더 또렷한데도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탔다. 이 또한 내 고집 탓이다. 아니 지난번 청우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자초하게 만들었던 최군의 기가 많이 꺾여있던 덕분이기도 하다. 참! 이곳에서 떠올랐던 궁금증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오른편으로 나뉘는 길이 어느 지도에서 보았던 ‘산내지’로 내려가는 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선을 따라 걷자는 내 주장은 옳은 선택이 된다. 다만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안부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

▼ 아무튼 내 고집은 우릴 고생만 잔뜩 시키고 말았다. 능선을 따라 15분 넘게 진행하다가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능선이 점점 가팔라지더니 종내는 절벽에 가깝게 되어버렸으니 어찌 발길을 되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 지나쳤던 삼거리까지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안부(아래 사진)에서 오른편으로 또렷하게 산길이 나있었다는 점이다.

▼ 주능선을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은 아직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작고 완만한 오름과 가파른데다 긴 내림이 반복되지만 어떤 곳에서는 제법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기도 한다.

▼ 그렇게 올라선 첫 번째 봉우리에서 돌탑을 만났다. 모양새야 비록 삐뚤빼뚤하지만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되는 장삼이사의 기념물이라 하겠다. 산행에 나선 이들이 나름대로의 염원을 가득 담아 쌓아 올렸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안부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기괴한 모양의 바위도 보인다. 어느 영화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슈퍼히어로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이다.

▼ 하나둘 보이던 바위가 언제부턴가 아예 바윗길로 변해버렸다.

▼ 덕분에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도 가끔 눈에 띈다. 거기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푸름까지 더하면서 산길은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관음산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구간이라 하겠다.

▼ 바위가 많다보니 조망까지 시원스럽다. 일동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남녘지방의 평야지대가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 돌탑봉에서 20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군의 시설물들이 널려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타이어나 벙커, 교통호, 군사시설 보호구역 푯말 등은 관음산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하겠다. 맞다. 이곳 관음산은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남북이 대치하던 접경 지역이었다. 귓가에 포성(砲聲)이 들려오는 걸 보면 현재의 남북경계선인 휴전선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모양이다.

▼ 이 능선은 소나무 숲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바위가 이미 없어진데다 가파름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까지 쌓여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으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기에 딱 좋은 곳이다.

▼ 두어 곳에서 노곡리(蘆谷里)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을 나누어보내자 무덤 몇 기가 연거푸 눈에 들어온다. 동네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노곡리는 ‘갈월’ 또는 ‘노곡’이라고도 불리는데, 갈대(蘆)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 땅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날머리는 자연의 집(포천시 이동면 노곡리 1244-1)

잠시 후 날머리인 자연의 집 근처에 내려섰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밭의 경계선을 따라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의 침범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겠지만 나 같은 등산객에게는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산비탈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끝내는 울타리를 넘고 말았다. 그나저나 오늘 산행은 5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10분이 포함된 시간이다.

 

곱돌산(滑石山, 215m)-퇴뫼산(堆山, 372m)

 

여행일 : ‘21. 1. 24(일)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과 진접읍. 별내동, 별내면 일원

산행코스 : 퇴계원역(2번 출구)→216.5m봉→곱돌산→197.5m봉→전두치고개→성터→퇴뫼산→옛성산→잣고개→에코랜드→별내면사무소(소요시간 : 약 11km/ 3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남양주시는 1995년의 전국행정구역개편 때 남양주군이 미금시와 통합하여 도농통합시라는 새로운 형태로 출발했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서울시의 교외화 현상으로 인한 인구가 증가로 급격한 도시화 현상을 겪고 있지만, 총면적의 70%가 아직도 산림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예봉산, 운길산, 천마산, 문안산 등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산들을 많이 갖고 있는 이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명세를 띠고 있는 산들에 밀려 관심에서 멀어져있지만 남양주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수없이 많다. 오늘 찾은 곱돌산과 퇴뫼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지자체에서 도심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덕분에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다. 다만 탐방객들이 하도 많아 산행이 끝날 때까지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불편은 있었다.

 

▼ 들머리는 경춘선 전철 퇴계원역(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 221-3)

코로나-19의 2.5단계 격상과 함께 문을 닫아걸었던 ‘헬스장’이 무려 6주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니 체육관에 가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거기다 50평도 넘는 널찍한 공간인데도 운동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대여섯 명이 전부이니 코로나의 감염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6일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갔던 이유이다. 그러다 문득 글 쓰는 소일꺼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 주말에 다녀온 ‘청우산’의 원고를 어제 저녁에 끝마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마친 집사람을 채근해 부랴부랴 집을 나섰고,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전철을 이용해 이곳 퇴계원역까지 왔다.

▼ 퇴계원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와 ‘강남아파트’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나가면 4차선 도로인 ‘퇴계원로’가 나온다. 이때 길 건너에 있는 ‘별내농협’을 보았다면 제대로 길을 찾은 셈이다.

▼ 일단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리고는 북쪽 방향. 그러니까 별내농협이 위치한 방향으로 100m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퇴계원초등학교와 퇴계원중학교의 이정표가 눈에 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들어가면 잠시 후 ‘퇴계원초등학교’를 마주하게 된다. 퇴계원중학교는 건물의 뒷면만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퇴계원역에서 초등학교까지는 6분 정도가 걸렸다.

▼ 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돌자 길이 둘로 나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 길은 ‘퇴계원성당’ 앞에서 또 다시 합쳐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성당에서 매달아놓은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을 따랐다.

▼ 성당에서 50m쯤 더 들어가면 흙먼지 털이기까지 갖춘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 이정표(곱돌산 정상 2.4㎞/ 마을회관 50m)와 함께 ‘등산로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자. 퇴뫼산을 오르는 방법은 네 가지라고 한다. 그중 ‘1코스(5.5㎞)’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데 퇴계원2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해 곱돌산을 거쳐 퇴뫼산에 이르는 코스이다. 2코스(3.1㎞)와 3코스(2.2㎞), 4코스(1.6㎞)는 각각 용암리와 별내면 행정타운, 대궐교에서 출발한단다. 하지만 막상 산행을 해보니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 50m쯤 더 들어간 곳에서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붙는다. 왼편은 널따란 과수원이다. 농원의 이름인 듯 지성원(志誠苑)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최근의 세태를 체감할 수 있는 현수막도 눈에 띄었다. 이젠 산에서도 마스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얘기일 것이다.

▼ 농원의 끄트머리쯤(이정표 : 곱돌산 정상→ 2.16㎞/ 마을회관↓ 260m)에서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통나무로 놓은 예쁜 계단을 따라 산을 오른다.

▼ 잠시 후 올라선 지능선(이정표 : 곱돌산← 2.09㎞/ 퇴계원4리→ 0.6㎞/ 마을회관↓ 0.36㎞)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곧이어 주능선(이정표 : 곱돌산→ 2.03㎞/ 극동아파트← 1.2㎞/ 마을회관↓ 0.42㎞)을 만난다. 쉼터로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 오르내림이 느껴지지 않는 능선을 따라 8분쯤 걷자 이번에는 사거리(이정표 : 곱돌산↑ 1.71㎞/ 약수터← 0.2㎞/ 군관사→ 0.47㎞/ 마을회관↓ 0.68㎞)이다. 이렇게 자주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것은 곱돌산. 아니 근교의 산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산자락 곳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으니 산책길이 나지 않고 어찌 배겨내겠는가.

▼ 탐방로 곳곳에는 ‘걷기코스’라고 적힌 푯말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방향표시 밑에 적힌 숫자가 좀 애매하다. 곱돌산의 정상이랄 수 있는 헬기장까지의 남은 거리가 1.71㎞ 밖에 되지 않는데도 푯말에는 3.3㎞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를 출발지를 기준으로 삼은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는 도심의 산책로보다도 더 낫다. 우선 경사를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능선이 완만하다. 거기다 일행끼리 얘기를 나누며 걸어도 될 만큼 폭도 널찍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질퍽거릴 염려도 없애버렸다. 산책코스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6분쯤 더 걷자 ‘160.5m봉’. 정자가 있던 봉우리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을 뿐이다. 파고라 모양의 정자를 짓는 모양인데, 또 어떤 모습으로 등산객들을 맞을지 모르겠다. 참! 이곳으로 오는 도중 주공아파트 갈림길(이정표 : 곱돌산↑ 1.44㎞/ 주공아파트→ 0.6㎞/ 마을회관↓ 0.97㎞)을 지나기도 했다.

▼ 색다른 푯말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누구나 걷고 싶은 길. 가꾸는 사람들’이란 제목 아래에 구간표시와 함께 관리하고 있는 단체의 이름을 적었다. 이곳 곱돌산 탐방로를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눈 다음. 관할지역의 단체들이 책임지고 가꾸어오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피톤치드로 넘치는 소나무 숲속을 8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곱돌산↑ 1.05㎞/ 퇴계원8리→ 0.75㎞/ 마을회관↓ 1.36㎞)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리좌표 등의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 이제 탐방로는 천주교 묘역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그런데 큰 묘석에 큰 봉분을 한 묘지들도 꽤 보인다. 묘표를 보니 그 내력이 상당하다. 유력 인사들은 죽어서까지 호사를 누리나보다.

▼ 묘역 덕분에 왼편으로 시야가 활짝 열린다. 별내신도시 너머로 불암산과 수락산. 그리고 그 뒤에서 도봉산과 북한산이 고개를 내미는데 이게 달력에서나 볼 법한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 중말사거리로 연결되는 삼거리(이정표 : 곱돌산↑ 0.59㎞/ 중말사거리← 1.05㎞/ 퇴계원공동묘지↓ 2.32㎞)를 지나자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산불감시초소를 만났다. 퇴계원8리 갈림길에서 16분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 높이 216.5m의 산봉우리인데 인데, 이곳에도 삼각점(성동 303)이 설치되어 있다.

▼ 삼각점을 살펴보다가 ‘배하사’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금덕산’이란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은 이가 바로 배하사인 것이다. 오지의 산을 찾아다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산꾼인데 이젠 정상표지판까지 설치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적어놓은 ‘금덕산’이란 지명은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 탐방로는 또 다시 딱 걷기 좋게 변한다. 소나무가 참나무로 바뀐 것 빼고는 ‘216.5m봉’ 이전과 똑 같다. 콧노래라도 부르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 그렇게 5분쯤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정표(곱돌산→ 0.1㎞/ 퇴뫼산← 3,2㎞/ 마을회관↓ 2.31㎞)의 거리표시가 좀 이상하다. 삼거리와 맞물려 있는 봉우리가 ‘곱돌산’의 정상이 분명한데도 이정표는 100m를 더 걸어야 한다고 적혀있는 것이다. 아무튼 삼거리 근처의 나무계단을 오르자 널따란 헬기장이 길손을 맞는다. 곱돌산의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퇴계원역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 헬기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오남읍과 진접읍. 그리고 별내면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다만 웃자란 잡목들이 그 아랫도리를 잘라버리는 게 아쉬운 점이다.

▼ 헬기장에서 내려와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곱돌산 정상’으로 진행해봤다. 그러자 갖가지 운동기구들을 갖춘 체육공원이 나타난다. 벤치는 물론이고 팔각정까지 지어놓아 인근 주민들의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곱돌산의 정상표지석을 만났다. 일부러 쌓아올린 듯한 작은 봉우리 위에 작고 아담한 정상석을 세워놓은 것이다. 휑한 느낌의 헬기장보다는 해발은 조금 낮지만 산봉우리 느낌의 이곳이 한결 더 풍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곱돌산’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곱돌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곱돌이란 ‘활석(滑石)’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납석 또는 각섬석으로도 불리는 곱돌은 입자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불에도 잘 견디며, 철분이 섞이지 않아서 쉽게 깨지지도 않고 알맞게 물러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깎을 수가 있어 가공이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장재(印財)나 조각 재료, 내화벽돌, 타일의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한때는 독이 없다고 해서 돌솥이나 고기를 굽는 불판으로도 많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 데크로 만든 광장도 보인다. 인근 마을에서 올라온 듯한 사람들이 꽤 많이 운동을 하거나 쉬고 있었다. 인근 마을이 제법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고급 소재인 활석광산이 이곳에 있었다면 오래전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헬기장 아래 삼거리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퇴뫼산으로 향한다. 길이 너른데다 길가에 교통호까지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도로가 아닐까 싶다.

▼ 군사도로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번에는 벙커까지 나타난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군사도로와 헤어져 북쪽 방향의 능선을 탄다. 들머리에 이정표(퇴뫼산 2.88㎞/ 곱돌산 0.42㎞)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겠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오솔길 수준으로 작아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자체에서 길을 잘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산비탈에 난간을 설치했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가파를라치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이 구간의 특징은 유난히도 많은 묘들이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풍수지리가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이 정도로 햇빛이 잘 드니 어찌 명당으로 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오남읍과 진접읍 일대의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까지 겹치고 있지 아니한가.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국사봉(國賜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국사봉은 수락산에서 흘러나간 산줄기로 해발 331.3m인 주봉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310봉과, 311.4봉, 190.5봉 등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국사봉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의 개국공신인 충경공(忠景公 柳亮)에게 이 산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 이곳도 역시 소나무가 많은 편이다. 완만한 능선 길에 솔향까지 가득하니 가족 산행지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도란도란 묵은 얘기라도 나누다보면 쌓여있을지도 모르는 앙금 정도는 금방 털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 그렇게 25분쯤 걷자 ‘197.5m봉’에 올라선다. 물론 벙커 앞 삼거리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송전탑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 이곳에도 삼각점(성동 414)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삼각점은 이후로도 하나 더 만나게 된다. 곱돌산과 퇴뫼산이 400m에도 못 미치는 작은 산들이지만 지리좌표 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전두치 고개’로 내려선다. 이정표(퇴뫼산↑ 1.8㎞/ 내곡리→ 1.4㎞/ 광전리← 1.5㎞/ 곱돌산↓ 1.5㎞)는 이곳이 내곡리(진접읍)와 광전리(별내면)를 잇는 고갯마루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고갯마루가 이름을 빌려왔다는 ‘전두치 마을’이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기분 좋은 산길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다만 오르내림의 경사가 조금 가팔라졌을 따름이다. 하지만 곳곳에 나무계단을 만들어놓아 버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김(金)’이라고 적힌 석주가 심심찮게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김씨 문중의 산임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전도치고개에서 15분 남짓 더 걷자 또 다른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이정표(퇴뫼산↑ 1.03㎞/ 내곡리→ 1.82㎞/ 광전리← 1.1㎞/ 곱돌산↓ 2.27㎞)는 이곳 역시 내곡리와 광전리를 잇는 또 다른 고갯마루임을 알려준다.

▼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돌탑 하나 없겠는가. 오가는 사람들이 던져놓았을 돌들이 모여 어느덧 돌탑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네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서 말이다.

▼ 퇴뫼산에 가까워지자 편의시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벤치에 평상까지 갖춘 널따란 쉼터도 그중 하나이다. 정상 근처에는 쉼터를 겸한 체육공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 언제부턴가 산길이 가팔라졌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명색이 정상인지라 그냥 손님을 맞기가 민망했던 모양이다.

▼ 그렇게 20분쯤 올라서자 산비탈에 기대 듯 쌓아올린 석축이 보인다. ‘퇴뫼산성’일 것이다. 퇴뫼산성은 퇴뫼산의 정상부와 남쪽의 363.6m봉을 연결하고 서쪽으로 산복을 감싸 안으며 구축한 사모봉형(紗帽峰形 : 사모관대의 사모처럼 뒷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험준한 산악 지형이고 앞면은 완만한 협곡 지형)의 석축산성이었다고 한다. 형태는 남서쪽을 장변으로 하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성의 전체 둘레는 625m이다. 하지만 대부분 훼손돼 북서쪽 일부 성벽만 남아있을 뿐이다. 산성은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한강유역의 아차산성이나 호암산성보다 조금 늦은 통일신라 후기에 쌓아졌다고 봐야 한다.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단다.

▼ 성터를 오른편에 끼고 돌아서자 널따란 분지(이정표 : 퇴뫼산 정상 0.17㎞/ 곱돌산 정상 3.14㎞)가 나온다. 옛날 이곳에는 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冶隱) 선생도 이런 상황을 접하는 느낌으로 시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 분지의 가장자리. 커다란 바위 곁에 삼각점(성동 304)이 설치되어 있었다. 삼각점은 경도. 위도, 표고 등의 지리좌표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따라서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372m인 정상을 놓아두고 그보다 낮은 363m 지점에 설치했으니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 그게 못마땅했던지 배하사는 이곳에다 ‘정상표지판’을 떡하니 매달아 놓았다. 정상이라고 해서 가장 높은 곳만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 삼각점에서 정상은 지척이다. 체육공원을 겸한 쉼터를 지나자마자 ‘퇴뫼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먼 옛날 장대(將臺)가 있었음직한 정상은 이제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은 감시탑 앞에 세워놓았다. 김문암씨의 정상표지판이 매달려있는 걸로 보아 세운지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 한국지명유래집에서는 퇴뫼산(堆山 혹은 堆峯)이 어떤 힘센 장사가 흙을 날라다 쌓은 산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한다. 어학적으로 접근하여 '갈라져 나온 산'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퇴’는 결채, 행랑(廊)을 뜻하는 우리말로 본채의 앞뒤나 좌우에 달아 지은 반 칸 너비 정도의 작은 칸실을 뜻한다. 그러니 ‘퇴뫼’란 높은 산에서 줄기가 뻗어 나와 독립적인 봉우리를 이룬 산이 된다는 것이다. 퇴뫼산이 처한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는 별개로 태봉마을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태봉(胎峯)'이라 부른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아니 태(胎)를 묻은 곳이 ‘태봉(胎峰)’이니 이곳에 어느 왕자의 태가 묻혀있을지도 모르겠다.

▼ 정상에서의 조망도 훌륭한 편이다. 그래선지 조망이 트이는 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여유를 갖고 조망을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건너편의 국사봉은 물론이고 불암산과 수락산, 그리고 북한산과 도봉산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자리이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수리봉(536.8m)과 용암산(476.9m)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을 따르면 된다. 탐방로는 많이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침목계단을 놓고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아서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기 때문이다.

▼ 내려오는 도중에는 자작나무 숲도 만날 수 있다. 하얀색 일색인 저 숲에 눈까지 쌓였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문득 러시아의 톰스크 지역에서 만났던 자작나무 숲이 생각난다. 7년쯤 전인가 현지 교수의 초청을 받고 그의 산막에서 하룻밤을 머물렀었는데 순백의 풍경을 연출하던 숲은 온통 자작나무 일색인데다 광활하기까지 했다.

▼ 길가 나무기둥에 곤충의 허물이 매달려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 매미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매미란 놈이 ‘5가지 덕(五德)’의 본채를 허물로 남겨놓고 떠나간 셈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그 다섯 가지의 덕도 알아보자. 머리에 홈처럼 파인 줄이 지혜를 상징하는 갓끈과 비슷하니 첫째 덕목인 '문(文)'이요, 나무의 수액만을 먹고 자라 잡것이 섞이지 않았으니 둘째 덕목인 '청(淸)'이다. 다른 곡식을 축내지 않으므로 염치가 있으니 셋째 덕목이 '염(廉)'이고, 살 집을 따로 짓지 않아 검소하니 '검(儉)'이 그 넷째 덕목, 계절에 맞춰 오고 가니 믿음이 있기에 다섯째 덕목인 '신(信)'이 되는 것이다.

▼ 잘 가꾼 탐방로를 따라 15분쯤 내려서자 삼거리(퇴뫼산 0.61㎞)가 나온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광릉숲 생물권보전지역 둘레길’을 따라 별내면사무소로 내려가면 된다. 참! 삼거리에 세워진 또 다른 이정표, 즉 ‘광릉숲 생물권보전지역 둘레길’의 1코스인 옛사랑길에서 세운 이정표(진접중학교 11.07㎞/ 별내면사무소 1.98㎞)를 보다가 문득 ‘옛성산’을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것을 알아냈다. 옛성산의 정상이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곳이 정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오죽했으면 퇴뫼산과 하나로 취급하고 있겠는가.

▼ 길가 바위가 어디선가 본 듯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경주에 있는 단석산(斷石山)이란 이름을 낳게 한 ’단석(斷石)‘이다.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얻은 신검(神劍)으로 내리쳤다는 그 바위 말이다.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둘로 쪼개진 것이 단석산의 바위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나 붙여놓는다면 또 하나의 명품 바위로 탄생될 게 틀림없다.

▼ 탐방로는 이제 ‘광릉숲 둘레길’을 따른다. 정식 명칭은 ‘광릉숲 생물권보전지역 둘레길’. 여기서 말하는 ‘광릉숲 생물권보전지역’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로부터 국내에서 4번째로 지정받은 ‘생물권보전지역’이다. 생태·역사·문화·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생물 다양성의 보전과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레길은 광릉숲과 그 주변의 숲들을 헤집으며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구간인 ‘옛사랑길(별내면사무소↔진접중학교)’을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잣고개’에 내려선다. 청학리와 내각리를 잇는 고갯마루인 잣고개는 옛날 어떤 사람이 잣 한말을 지고 가다가 고개를 넘으면서 까먹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다 넘고 보니 잣 한말을 모두 먹어치웠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개가 길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누군가는 대동여지도에도 이곳이 백현(柏峴, 栢峴)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잣나무 백(栢)’자를 쓰고 있으니 지명의 유래와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하겠다.

▼ 잣고개는 이름 그대로 잣나무로 가득하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데 하나같이 굵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잣고개’라는 지명은 잣을 까먹은 것과 관련된 설보다는 잣나무가 가득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 잣고개를 지난 탐방로는 곧이어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것도 속도 조절이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어쩌면 능선을 조금 더 타다가 내려섰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긴 까짓 길을 조금 벗어났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 걸어보려고 하는 ‘광릉숲 둘레길’의 1코스인 ‘옛사랑길을 걸을 때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 옛성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자 에코랜드가 나온다. 산과의 경계선을 따라 철망 울타리가 쳐져 있으나 문이 잠겨있지 않으니 그냥 열고 나오면 된다. 참! 들머리에 이정표(별내면사무소 1.2㎞/ 진접중학교 11.8㎞)와 함께 ’광릉숲 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광릉숲 둘레길‘을 걸어보겠다고 길을 나설지 누가 또 알겠는가.

▼ 탐방로는 이제 에코랜드 경내의 도로를 따른다. 아스팔트가 깔려있지만 이 길은 산책로를 겸한다. 입구에서 시작해 에코랜드를 한바퀴 돌게 되는데 총 거리는 1.8㎞에 이른다. 참! 쓰레기 적치장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청학리(靑鶴里)’이다. 사람들은 청학동이라면 흔히 지리산 청학동을 떠올린다. 하지만 저 마을도 엄연히 청학동이다. 마을 뒤편의 계곡이 바로 청학동인 것. 마을 동쪽에 있는 은행나무에 청학이 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저 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따라 수락산유원지를 지나면 수락산으로 이어진다.

▼ 에코랜드는 건설폐기물을 매립하면서 친환경적으로 처리하고 그 매립지를 공원 및 체육시설로 꾸며, 남양주의 새 명소가 된 곳이다. 수영장을 비롯해 축구장과 야구장, 풋살구장 등이 들어서 있다.

▼ 윗옷을 벗고 걸어야 했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 하지만 아직은 엄연한 겨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엔코랜드의 명물인 인공폭포는 메말랐고, 그 앞의 연못은 꽁꽁 얼어붙었다.

▼ 에코랜드를 벗어나자 잘 꾸며진 조각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도로가를 따라 수많은 조각품들을 마치 가로수처럼 세워놓았다.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의 예술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라 하겠다.

▼ 산행날머리는 별내면사무소

그런 길을 5분 정도 걷다보면 ‘별내면사무소’가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총 3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20분이 걸렸다. 선답자의 글에서 이번 코스가 11㎞라고 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청우산(靑雨山, 619.3m)

 

산 행 일 : ‘21. 1. 16(토)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상면, 조종면의 경계

산행코스 : 덕현리(구정동 마을)→청우능선(남서릉)→정상→남릉(알바)→능선안부 복귀→청오사→덕현리 원점회귀(소요시간 :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방콕문화’가 이젠 우리 집까지 파고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질 않는데다 체육관까지도 문을 걸어 잠갔으니 방콕뿐. 따로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찾아낸 소일거리가 천변 걷기였다. 묵현천을 따라 걷다가 자전거도로를 만나면 이를 따르고, 그마저도 끝나면 도로변을 따른다. 하지만 매일 같은 코스를 걷다보니 이마저도 맥이 빠져 버린다. 그러던 차에 최 군(君)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말에 시간이 나니 산행이나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 나선 곳이 가평에 있는 ‘청우산’이다. 해발이 600m를 겨우 넘기는 이 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능선이 완만한데다 전형적인 육산이라서 위험한 곳이 일절 없다. 거기다 근교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코로나-19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요즘으로서는 가족 산행지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근교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걸을 수 있는 산행지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산행들머리는 ‘광성교회 수련원’(가평군 상면 덕현리 408-2)

‘국도 46호선’을 타고 가평·춘천 방면으로 달리다가 하천 IC(가평군 청평면 하천리)에서 현리·포천 방면 ‘국도 37호선’으로 옮긴다. 잠시 후 다원교차로(가평군 상면 덕현리)에서 옛 국도로 내려와 같은 방향(현리·포천)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성교회 수련원’이 나온다. 수련원 앞에서 우회전하여 덕현교를 건넌 다음. 청우산 등산안내도 앞의 공터에 차를 세우면 된다.

▼ 하지만 예정했던 곳에 차량을 세워둘 수 없었다.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가 폐석더미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사면 기둥 붉었타/석양 행객 시장타/네 절 인심 고약타’라는 김삿갓의 희작시(戱作詩)가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주차를 못하도록 누군가가 일부러 쌓아놓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니길 빌어본다. 김삿갓이 준비했었다는 ‘지옥 가기 딱 좋다’라는 구절이 뒤를 이어서야 되겠는가.

▼ 별수 없이 차량을 이용해 ‘구정동’ 마을까지 들어갔다. 그리고는 폐가의 진입로에다 파킹을 하고 들머리로 되돌아 나왔다. 다리(덕현교)에서 두어 곳의 유원지(겨울이어선지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었는데, 물가에 위치한 식당이라고 보면 되겠다)를 지나면 나타나는 ‘구정동’ 마을의 첫 번째 가옥 앞이다. 덕분에 우린 이곳 구정동 마을의 명물이라는 ‘느티나무’를 구경하지 못했다. 1720년에 식재된 보호수로 훌륭한 눈요깃감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들머리에는 이정표(→1코스 3.21㎞/ 2코스↑ 3.1㎞)와 함께 ‘청우산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청우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이곳에서 청우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 ‘1코스’이다. ‘2코스’의 출발지도 1코스와 같다. 역시 이곳을 출발해 청우능선을 거쳐 정상에 이른다. ‘3코스(2.75㎞)’는 ‘조가터’가 출발지이다. 조가터에서 청우능선으로 오른 다음부터는 2코스를 따른다. ‘4코스’는 녹수계곡에서 곧장 정상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정상까지 1.8㎞로 가장 짧은 거리이다. 참고로 안내도에 나타나지 않은 탐방로도 있다. 정상에서 북릉을 타고가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망배치마을로 연결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갈림길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민가의 담장을 따라 난 수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2코스 방향이다. 오늘 산행은 청우능선(2코스)를 따라 정상에 이른 다음 1코스를 이용해 출발지로 되돌아올 계획이다.

▼ 왼편으로는 국도 37호선이 지난다. 경상남도 거창군(거창읍)에서 경기도 파주시(문산읍)에 이르는 총 연장 399.2㎞의 일반 국도이다. 내륙 산간지역을 관통하는 전형적인 계곡·산악형 드라이브 코스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으나 확포장을 거친 지금은 고속도로나 다름없어졌다.

▼ 수로가 끝나면서 산길은 능선으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너른 편이다. 오가는 사람이 서로 비켜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다 한적하기까지 하니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멍 때리기 딱 좋은 길이다. 가끔가다 만나게 되는 잣나무 숲의 상쾌한 공기는 덤이라 하겠다.

▼ 키 작은 잡목 사이로 난 산길을 따라 걷길 10분 남짓. 능선이 온통 잣나무 일색으로 바뀌어 있다. 국내 잣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잣 생산지인 가평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 나무에서 채취되는 잣 또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단다. 가평군이 타 지역보다 일교차가 높은 탓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잣 또한 타 지역의 것보다 더 고소하기 때문이란다. 가평 잣의 자랑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탄수화물이 타 산지 잣보다 많고 지방산중 리놀레산(Linoleic acid)과 아라키논산(Arachidonic acid)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혈압을 내리고 피부를 아름답게 하며, 호두나 땅콩보다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 저 나무에서 채취한 잣은 ‘막걸리’로 승화되기도 한다. 트림이나 숙취가 없고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는 ‘가평 잣막걸리’가 저 열매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잔에 따르면 표면이 옥빛으로 반짝인다고 해서 '옥지주'라고도 불리던 술인데, 조선시대에는 임금님의 수라상에까지 오를 정도로 귀한 술이었다. 잣막걸리와 함께 최근 슬로푸드로 각광받고 있는 잣 요리가 잣국수와 잣죽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잣나무 숲속에서 사거리를 만났다. 왼편은 3코스의 시점인 조가터에서 올라오는 길. 하지만 3코스는 조금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길이 나뉘는 안부에는 이정표(정상↑ 2.32㎞/ 조가터← 630m/ 뒷골→ 450m/ 등산로 입구↓ 780m) 외에도 식탁용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가 넘치도록 만들어지는 곳이니 힐링까지 하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안부에서 시작되는 오르막길은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벌목을 끝낸 산자락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명품 유원지로 알려진 녹수계곡(綠水溪谷)을 눈에 담을 수도 있으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녹수계곡은 명지산과 청계산, 그리고 귀목봉에서 발원한 조종천((朝宗川) 가운데 청우산과 녹수봉 사이의 계곡을 이르는 지명이다. 곧게 흐르던 물줄기가 이 지역에 이르러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붙여놓은 것이다. 가평요와 조종암에서 시작해 망배치와 간성터를 지나 조가터에 이르는 유원지형의 계곡인데 거리는 3km쯤 된다.

▼ 발아래로 임초리와 행현리 일대가 펼쳐지는가 하면. 그 뒤로는 깃대봉과 운두산을 잇는 능선이 길게 늘어섰다.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축령산이 눈에 들어온다. 두 산줄기의 사이에는 가평의 또 다른 명물인 ‘아침고요수목원’이 들어서있을 것이다.

▼ 잣나무 숲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 숲길을 걷고 있자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아무리 걸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 그 까닭은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잣나무가 자연의 명의인 셈이다.

▼ 가끔은 요렇게 잘생긴 바위가 나타나기도 한다. 두꺼비를 닮은 것 같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 안부에서 30분,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정상↑ 1.7㎞/ 조가터← 1.4㎞/ 광성교회↓ 1.8㎞)을 만났다. 왼편은 ‘조가터’에서 올라오는 ‘3코스’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가터(曺哥垈)란 조씨(曺氏)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조가 댁’ 동네로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집성촌으로서의 흔적은 사라지고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한다. 지명의 끝에 ‘터’라는 토씨가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참! 마을의 형상이 조개를 닮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해 두자.

▼ 겨울 산행은 보약이라고 했다. 그것도 잣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은은한 솔향이 코끝을 휘감는다. 솔향은 소나무에서만 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말처럼 소나무와 잣나무는 닮은 점이 참 많다. 하지만 다른 점 역시 많다. 잣나무 숲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소나무와 비슷해 보이던 잣나무의 차이점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의 껍질이 적갈색, 흑색인 것과 달리 잣나무는 회갈색, 회백색을 띠었다. 껍질도 크게 갈라지지 않는 편이다. 어른 주먹만 한 열매도 크게 차이가 난다. 솔방울에 비하면 잣송이가 4~5배나 더 크다.

▼ 돌탑도 눈에 띈다. 산행에 나선 이들이 나름대로의 바램을 담아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맨 위의 돌멩이 몇 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었으면 저리도 오묘하게 쌓아올렸을까 싶다.

▼ 어설프지만 이런 바윗길을 오르기도 한다. 다른 산이라면 너덜로 칠 규모지만 바위가 하도 귀하다보니 이마저 시선을 끈다.

▼ 앞서가던 최군이 뭔가를 가리킨다. 다가가보니 ‘영지버섯’이 아닌가. 중국의 본 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 산삼에 비견되는 영약으로 소개했을 정도로 신령한 버섯이다. 종암 저지율이 77.8%나 되는 대표적인 항암 약초이기도 하다. 활엽수의 뿌리 부분이나 그루터기에서 자라는데, 이곳이 참나무 군락지이다 보니 생육조건에 딱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보다 ‘아카시아재목버섯’을 훨씬 더 많이 채취했다. 장수버섯이라고도 불리는 이 버섯도 종암저지율이 44.2%나 된다고 한다.

▼ 3코스와의 접점을 통과한지 25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니 진행방향 저만큼에 정상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금과 똑 같은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상은 그 너머.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에 있다는 얘기이다.

▼ 이후로도 잣나무 숲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덕을 지녀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는 나무.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그대로를 받고 부족함을 말하지 않는다는 나무이다. 숲길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잣송이는 숲의 전령들이 길을 찾느라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을 연상시킨다. 그 잣송이들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다. 잣나무는 2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기다림의 나무다. 그러니 사람이건 다람쥐건 급하게 서두른다고 잣을 얻을 수는 없다. 귀한 잣을 얻기 위해서는 꽃이 피고도 꼬박 1년을 넘겨 다음 해 가을이 되어야 잣을 수확할 수 있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의 이름은 ‘청우’이다. 문득 청우산의 본래 이름이 ‘청우산(靑牛山)’이었다는 게 생각난다. 도가(道家)의 창시자인 노자(老子)가 서역(西域)으로 갈 때 탔던 수레를 끌었다는 소가 곧 ‘청우(靑牛)’이니 그렇다면 신선(神仙)이 되기를 갈망하던 어느 선비가 이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의미로 잘 쓰이고 있는 도교(道敎)에서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도가란 우리 인간이 자연의 명령에 따르며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 사상을 가리킨다.

▼ 최군이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릿찌를 하는 듯한 폼을 잡는다. 바위가 드물다보니 볼거리는 물론이고 즐길거리까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내 넋두리를 들었나보다.

▼ 3코스 접점을 통과한지 55분 만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청우산↑ 0.15㎞/ 육천유원지← 1.66㎞/ 덕현↓ 2.20㎞)를 만난다. 왼편은 육천유원지에서 올라오는 길. 그러니까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안내도의 ‘4코스’이다. 이정표 옆에는 돌탑도 보였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올려놓은 돌멩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돌탑의 모양새를 갖춘 모양이다.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올려놓은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품고서 말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눈꽃잔치가 시작된다.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상고대(霧氷) 잔치이다. 상고대란 안개 등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영하(零下)의 기온으로 인해 나뭇가지 등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저지대에서 보이는 설화 즉 내리는 눈이 나뭇가지에 쌓여 언 눈꽃과는 달리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눈요깃감이다. 그런데도 600미터를 겨우 넘기는 나지막한 산에서 이런 상고를 만났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며 걸음을 멈춘다.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맞다. 능선은 온통 황홀한 아름다움만 가득하다. 하긴 이런 곳에 어찌 부정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 나뭇가지에 매달린 미세한 얼음조각들은 가히 환상 그 자체이다.

▼ 상고대 잔치에 심신을 내맡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청우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15평 남짓의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가평군 특유의 말뚝 모양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뭔가를 매달았음직한 깃대도 보인다. 하지만 길 찾기에 도움이 되는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하산 길을 잘못 들어섰고, 그로 인해 위험천만한 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청우산의 본래 이름은 ‘청우산(靑牛山)’이었다. 푸른 소가 서있는 듯한 지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다가 ‘소 우(牛)’ 자가 ‘비 우(雨)’ 자로 변음 되면서 지금의 청우산(靑雨山)이 되었다 한다.

▼ 정상에는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었다. 건설부에서 세웠다는데 자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였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데다 유일하게 트인 서북쪽마저도 연무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는 서쪽으로 축령산과 서리산 능선이 북으로는 운악산, 청계산, 명지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 수리봉 방향의 능선을 따라 10m쯤 걷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하산을 시작한다. 앞장서고 있는 최군이 찾아낸 산길이다. 그러나 내 머리는 ‘아니올시다!’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온다. 능선이 아예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은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최씨 고집이 어디로 가겠는가. 지도까지 보여주며 고집을 부린다. 아무튼 우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찾았어야 했는데 우린 정상을 지나친 지점에서 들머리를 찾았던 것이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킨다. 산악회의 리본이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군의 편에 서버린다. 하지만 나는 끝내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정규 등산로인데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 능선은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팔라져 버렸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듯 발로 스피드를 조절해가면서 말이다.

▼ 그런 악전고투를 한 시간이나 치른 뒤에야 우린 계곡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생이 끝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수리재’ 마을로 흘러가는 계곡에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마을까지 간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차량이 파킹되어 있는 ‘구정동’ 마을까지 되돌아오려면 택시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그에 따른 시간이나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 우리가 내린 결론은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 즉 정규등산로(1코스)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쉬운 결정은 물론 아니다. 집사람의 체력이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라가야할 능선은 보면 볼수록 가파르지 않는가.

▼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고 적힌 푯말이 보인다. 그래선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별로 없다. 어쩌면 저 시설물을 세운 군인들이 잡목이나 넝쿨식물들을 제거했는지도 모르겠다.

▼ 한참을 오르는데 또 다른 상황이 우릴 맞는다. 능선이 자꾸만 정상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능선을 옆으로 째가며 오르기로 했다. 넝쿨식물로 뒤덮인 계곡을 지나게 됨은 물론이다. 긁히고, 찔리고, 싸대기를 얻어맞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은 아래로 지나가는 것까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정도이다. 그래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 길을 개척해가며 오르기를 30분. 드디어 1코스 등산로가 나있는 능선에 올라섰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대충 500m 남짓. 20분이면 내려설 수 있는 거리를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90분이 걸렸다. 고생을 사서 한 셈이다.

▼ 잠시 후 능선안부(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2.61㎞/ 청우산 정상↓ 600m)에 내려선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계곡을 향해 가파르게 내려선다.

▼ 원점회귀를 위해 구정동 방향으로 내려서는 산자락엔 잣나무 대신 낙엽송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 구간은 또 칡과 다래 등의 넝쿨식물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 산길이 거칠다보니 예절교육은 기본이다. 쓰러진 나무 아래를 통과하는데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지나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열심히 살펴보더니 ‘연리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집사람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여자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메신저라는 연리지(連理枝)를 빼다 닮았다. 연리지란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연리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연리지(枝 또는 木)의 고사(故事)는 후한 말(後漢 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됐다.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3년 동안을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간병을 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10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보살폈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그 후 옹의 집 앞에 나무 두 그루가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더니 마침내는 한 그루처럼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리지라는 단어는 원래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 위의 나무가 아가페(agapē)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면 아래 사진의 나무는 ‘에로스(erōs)’ 사랑의 실체라 할 수 있겠다. 상대방의 몸뚱이를 양 다리로 칭칭 감고 있는 게 얼마나 열정적인가. 참고로 연리지를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한 첫 번째 인물은 당(唐)나라 시인 백락천(白樂天)이었다. 그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으면서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다.>

▼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듯한 나무도 보인다. 하나의 뿌리에서 엄청나게 많은 줄기들이 돋아난 것이다. 저 정도의 출산율이라면 최근의 화두인 ‘저출산’이 어디 문제나 되겠는가. 인구 감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정부의 홍보용 자료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참! 저런 나무는 고흥의 마복산(馬伏山, 539m)에서도 본 일이 있었다. ‘반송(盤松)’으로 분류되는 소나무로 한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려나온다고 해서 만지송(萬枝松)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 길가. 특히 계곡은 온통 다래넝쿨로 뒤덮여 있다. 이를 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올 봄에 다시 찾아오자는 것이다. 연하기 짝이 없는 다래 순이 욕심난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 잠시 후 자그마한 계곡을 건넌다. 요 아래 구정동 마을의 상수원이지만 이름은 없다. 크고 작은 바위가 널려있는 것이 계곡으로서의 풍모를 갖추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누울 자리를 보고 자리를 뻗으랬다고 가평에서 이 정도로는 계곡에 끼이지도 못한다. 가평은 등산안내도에 표시된 산만 해도 52개소나 된다. 산이 많으니 계곡이 많고 계곡이 많으니 하천도 많아 산과 계곡과 하천과 강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고장이니 어련하겠는가.

▼ 계곡을 벗어나자 ‘더빌라 2호점’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1.74㎞/ 더빌라 2호점← 2㎞/ 청우산 정상↓ 1.47㎞)이 나오고, 이후부터 탐방로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에는 뒷골 갈림길(이정표 : 덕현리 등산로 입구↑ 1.57㎞/ 뒷골← 1.05㎞/ 청우산 정상↓ 1.64㎞)을 지나기도 하는데 오른편에 조성된 단풍나무 숲이 장난이 아니다. 범위까지 넓으니 가을철에는 울긋불긋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 임도를 따라 20분쯤 내려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청오사(靑悟寺)가 나타난다. 인터넷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던 절인지라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일단은 들어가 보기로 한다. ‘푸를 청(靑)’에 ‘깨달을 오(悟)’자를 쓰고 있는 절이니 작은 깨달음이라도 하나 얻어 갈지 누가 알겠는가.

▼ 대웅전과 칠성각, 종각, 요사채, 차방(茶室)으로 이루어진 전각들은 하나같이 세간의 여염집을 닮았다. 단청이 들어간 멋진 전각들을 지을만한 교세를 아직 갖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이 절은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청우당 무공(靑雨堂 無空)‘이라는 스님의 부도에서 그가 창건했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따름이다.

▼ 절의 이름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을 여럿 얻어올 수 있었다. 가슴에 와 닿는 글귀들을 곳곳에 붙여놓아 읽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내가 평생 추구해 온 내용도 보이기에 옮겨 본다.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려 하지 말고 부모가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살아가라’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 절간을 빠져나오는 중생에게 불이문(不二門)이 배웅을 한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또한,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여기를 지나면 금당(金堂)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난 지금 불국토, 즉 부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세계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 청오사를 빠져나오면 길은 이제 널따란 신작로로 변한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는 완만한 임도가 덕현리(구정동)까지 이어진다. 참! 산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청우산은 ‘푸를 청(靑)’자를 쓴다. 사시사철 푸른 잣나무로 둘러싸인 데서 연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푸름이 겨울이면 더욱 짙어진단다. 하얀 종이 위에 푸른 잣나무를 그려놓았다고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엊그제 폭설이 내렸던 터라 그런 절경을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으려니 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청우산에는 눈이 아예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구정동마을(원점회귀)

‘더빌라2호점’ 갈림길(이정표 : 등산로 입구↑ 630m/ 더빌라2호점← 3.55㎞/ 청우산 정상↓ 2.58㎞)을 지나고 이어서 잘 지어진 전원주택 몇 채를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아침에 출발했던 구정동 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5시간 1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하산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1시간 이상을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일당산(日堂山, 453.6m)-당산(塘山, 540m)-웅덕산(熊德山, 520m)

 

산 행 일 : ‘20. 12. 24(목)

소 재 지 : 경기도 양평군(양동면)·여주시(강천면)과 강원도 원주시(지정면)의 경계

산행코스 : 홈다리골 주차장→일당산→당산→곰지기→웅덕산→북쪽 능선→홈다리골 주차장(소요시간 : 7.9km/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집사람과 함께 다산길을 걷고 있는데 세무회계 일을 하고 있는 최 군(君)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무실을 하루 제치려는데 같이 산행할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여버린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거기다 위치까지도 요즘 상황에 딱 맞지 않겠는가. 승용차로 접근이 가능한데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지의 산이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찾은 일당산과 당산, 웅덕산은 경기도의 여주시와 양평군, 그리고 강원도의 원주시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산들이다. 세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니 바윗길처럼 위험한 구간이 있을 리가 없다.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해발도 500m 안팎이라서 오르는데 부담스럽지도 않다. 거기다 오지라서 찾는 사람들까지 뜸하니 가파른 오르내림만 극복할 수 있다면 가족 산행지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원시의 숲 향기를 만끽하며 오순도순 걸을 수 있는 산행지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산행들머리는 ‘홈다리골 주차장’(양평군 양동면 삼산리 1340)

광주-원주고속도로 ‘동양평 TG’를 빠져나와 우회전. 곧이어 단석교차로(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417-1)에서 3시 방향의 88번 지방도(원주 방향)를 탄다. 잠시 후 삼산교(三山橋)에 이르자 ‘당산 등산로 입구(800m)’라고 적힌 커다란 이정표가 눈에 띈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가 되는 ‘홈다리골 주차장’이다.

▼ 세 개의 산 가운데 가장 높은 ‘당산’을 오르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솔치마을’에서 물탕골과 일당산을 경유하여 오르는 방법이 그 첫 번째(1코스)이고, ‘홈다리골 주차장’에서 일당산을 경유하는 방법이 두 번째(2코스)이며, ‘홈다리골 주차장’에서 곰지기 계곡의 끝인 여주군 강천면 도전리와의 경계가 되는 고개마루(곰지기)를 경유하여 오르는 방법이 세 번째(코스)이다. 마지막 하나(4코스)는 ‘홈다리골 주차장’에서 출발해 웅덕산과 곰지기를 거친 다음 당산으로 오르는 방법이다. 이 가운데 ‘2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된다.

▼ 앞서가던 최군이 안내도의 한쪽 귀퉁이를 가리킨다. 참나무 자생지인 이곳 당산에는 버섯이 많은 편인데 그 가운데 하나인 ‘등갈색 미로버섯’이 안내판에서까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 운이 좋은 편이다. 항균·노화예방에 뛰어난 효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종암 저지율이 80.1%나 되는 대표적인 항암 약초이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이 버섯을 꽤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 주차장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탐방로(2코스)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 말고도 ‘당산 등산안내도’를 세워놓았으니 꼼꼼히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진행하려는 코스를 미리 알아두는 게 안전산행의 기본일 테니까 말이다.

▼ ‘2코스’는 이곳 ‘홈다리골 주차장’에서 일당산을 거쳐 당산으로 연결된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2.3㎞. 그런데 반대 방향의 표시가 조금 이상하다. ‘곰지기 등산로 입구’까지가 1.96㎞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옆에 세워놓은 안내도에는 분명 3코스와 4코스의 등산로 입구를 모두 이곳 홈다리골로 표시해 놓았으면서도 말이다. 등산로 입구를 ‘곰지기’ 고갯마루로 오해했다 치더라도 거리가 틀렸다. ‘곰지기’ 고갯마루에 세워놓은 이정표에는 같은 코스의 거리를 2.0㎞로 적고 있었다.

▼ 산길은 시작부터 많이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파른 곳이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굵은 밧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그렇게나 보기 싫던 안개가 이번에는 최고의 눈요깃거리로 변해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난 안개는 불과 10m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10㎞도 못되는 속도로 고속도로를 엉금엉금 기면서 안개란 놈을 얼마나 욕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산허리를 감싸고돌면서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려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하고 10분쯤 되자 임도에 올라선다. 과거 벌목공들이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와 함께 팀스프리트 훈련 때 탱크가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도 전해지는 길이다. 아무튼 탐방로는 임도를 가로지른 다음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 안개 낀 산하에 도취한 내 발길은 더디기만 한데, 그런 나를 기다리며 서있는 집사람의 모습이 흡사 적군의 침입을 경계하는 파수꾼을 닮았다. 맞다. 이곳 ‘삼산리’는 구한말(舊韓末)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봉기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 아니겠는가. 역사는 1907년 이곳에서 이인영(李麟榮, 1868-1909) 의병장이 이끌던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음을 전한다.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의 홍주의병이 치른 홍주성전투와 함께 을사늑약 후 항일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개한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 참고로 양평은 의병의 고장이다.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에서 최초로 을미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해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했을 때 양평에서는 의병장 조인환, 최대현, 이연년 등이 용문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인근 석곡리에는 ‘양평의병 묘역’이 그리고 아까 지나왔던 단석교차로 근처의 ‘양동레포츠공원’에는 ‘을미의병 추모비’가 조성되어 있었다.

▼ 양평의병과 관련된 사진도 하나 올려본다. 이 사진은 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우리 눈에 익은 것으로 영국인 기자가 1908년에 출간한 ‘조선의 비극(F.A. 메켄지 저)’에 함께 실린 사진이다. 구한말 군대가 해산(1907)된 뒤 의병에 합류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데, 이 사진은 의병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으로 재현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특히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한 의병들의 대답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죽어야 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죽는 편이 일본의 노예로써 생명을 부지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과거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도 없다’고 했듯이 양평 의병의 숭고한 정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참나무 세상에 소나무가 하나하나 개채수를 늘려나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숲을 이루고 있다. 지자체에서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숲속에 ‘ㄷ’자 의자를 놓아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정상까지 30분 남았습니다.’라고 적힌 팻말도 걸려있다. 초행길 산꾼에게는 유용한 정보라 하겠다.

▼ 산길은 많이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매어놓은 굵은 밧줄에 의지해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 요런 이정표도 보인다. 등산객들을 배려한 것까지는 고마운데, 방향표시만 달랑 있어 도움은 썩 되지 않는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매직으로 지명을 적어 넣었다.

▼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보행이 편하도록 길을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가파르다 싶은 곳에는 계단을 놓거나 난간용의 밧줄을 매어두었다.

▼ ‘운지버섯’도 꽤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구름처럼 뭉게뭉게 뭉쳐있다고 해서 ‘구름버섯’이라고도 불리는데, 질감이 단단해서 그냥 먹지는 못하고 달여서 차로 마시거나 한약탕과 같이 약용으로 사용하는 버섯이다. 항암에 뛰어난 효능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까 앞에서 얘기하던 ‘등갈색 미로버섯’만은 못하지만 종암 저지율이 77.3%나 된다고 한다.

▼ 그렇게 걷기를 35분. 1코스와 2코스가 합쳐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솔치(松峙)’ 마을에서 물탕골을 거쳐 올라오는 1코스이다. 우리가 들머리로 삼았던 ‘홈다리골 주차장’에서 4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길이 거친 탓에 이용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한다.

▼ 이정표(일당산 정상↑ 0.18㎞/ 솔치 등산로입구← 1.37㎞/ 홈다리골 등산로입구↓ 1.31㎞)는 200m쯤 더 걸어야만 일당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일당산 정상에서 두 코스가 합쳐지게 그려놓은 산행안내도는 틀렸다는 얘기가 된다.

▼ 남은 구간은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진다.

▼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만에 일당산(453.6m) 정상에 올라선다. 헬기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일당산’이라는 지명이 적힌 시설물도 둘이나 보인다. 하지만 굳이 ‘산’이라 불러야만 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지근거리에 위치한 ‘당산(541m)’과 큰 골이 없이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당산을 주봉(主峯)으로 삼고 이곳은 ‘일당봉’ 정도로 부르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아쉬웠던지 관할 지자체인 양평군에서 ‘일당산 정상, 해발 453.6m’라고 적힌 팻말을 세워놓았다. 그 옆에는 ‘등산 안내도’도 세워져 있다. 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등산코스 위주의 안내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산의 특징과 함께 지명에 얽힌 옛 이야기까지 자세히 적어놓았다.

▼ 이정표(당산 정상 0.82㎞/ 홈다리골 등산로입구 1.5㎞, 솔치 등산로입구 1.54㎞)에는 눈에 익은 정상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대구에 거주하는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일 것이다. 그는 산을 산답게 하는 열혈 산꾼이다. 오지 산을 찾는 등산객에게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다는 일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덕분에 무명 산이 그의 유별난 산사랑 덕분에 ‘무장봉’이란 새 이름을 얻기도 했다.

▼ 당산으로 향한다. 숲 사이로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당산이 희미하게나마 고개를 내민다. 두 봉우리를 잇는 이 능선은 한마디로 부드럽다. 그래선지 심심찮게 눈에 띄던 밧줄도 매어져 있지 않다.

▼ 산의 주인이 참나무일지니 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또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거센 비바람에 부대끼며 살아온 인고의 세월은 나무 하나하나를 기괴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 아래 나무는 ‘사랑나무’라 할 수 있겠다. 하나의 뿌리에서 두 줄기의 몸채가 자라났으나 또 다시 하나로 합쳐진 모양새이다. 부부를 나타내는 일심동체(一心同體)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 광대 모양의 홍보용 풍선을 닮은 나무도 보인다. 저기에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까지 더해진다면 이곳은 분명 신장개업한 가게 앞이 될 것이다.

▼ 어느 보양강장제 음료회사의 TV 광고를 보면 ‘차마 말로는 못하겠다’는 멘트가 나온다. 맞다. 아래 사진을 찍으며 뭔가 설명을 덧붙이다가 나 역시 집사람에게 된통 당했다. 외설스런 얘기를 함부로 내뱉는다나?

▼ 눈이 쌓여있는 곳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주차장에 쌓여있는 눈을 보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챙겨오지 않은 내 부주의를 자책하던 상황이다. 하지만 그 눈이 두텁지 않아 걷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 일당산을 출발한지 25분 만에 당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여남은 평쯤 되는 정상은 한마디로 어지럽다. 정상석이 세 개나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 ‘당산’의 정상이 3개 시·군의 경계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나, 지자체간 협의를 통해 하나로 된 정상석을 세웠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아무튼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 등의 시설물이라도 하나로 통일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정상은 벤치와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푹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도 좀 살펴보라는 듯 ‘등산 안내도’도 세워놓았다. 물론 양평군의 작품이다. 그래선지 그 앞에다 양평군의 산악회에서 만든 정상석을 세웠다. 선점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듯하다.

▼ 혁신도시가 들어선 원주시는 강원도의 자랑이다. 그런 원주시가 어찌 양평군에게 뒤지겠는가. 원주시의 로고까지 들어간 정상석을 떡하니 세워놓았다.

▼ 어깨를 맞대고 있는 여주시라고 해서 어찌 빠지겠는가. 그것도 원주시처럼 지자체에서 손수 세웠다. 그런데 ‘못 당(塘)’자를 써서 ‘당산(塘山)’이라 적었다. 조금 전에 올랐던 일당산(日堂山)처럼 ‘집 당(堂)’자를 쓰는 줄 알았는데도 말이다. 귀가해서 시중에 나돌고 있는 지도들을 확인해보니 두 지명이 함께 혼용되고 있었다.

▼ 이정표가 참 이채롭다. 거리나 지명을 표기하지 않고, 그저 세 방면에 위치한 지자체의 이름만 적어 넣었다. 양평군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상석도 이런 자세로 세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개가 덜 걷힌 탓에 오늘은 예외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이의 조망 기록을 올려본다. <정다운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양동면 소재지를 비롯한 작은 마을들이 조망되며, 원주 쪽으로는 멀리 치악산이 병풍을 두른 듯 내다보이고,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들이 조망 된다. 혹 날씨라도 맑은 날이면 멀리 여주 쪽 남한강의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아스라이 조망된다.>

▼ 마지막으로 오를 웅덕산으로 향한다. 내려서는 길목에 멋지게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 앞에 ‘당산소나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당산나무’란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를 말한다. 때문에 동네 어귀에 있는 게 보통인데 산의 정상에 이런 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채롭다.

▼ 나무는 밑동의 굵기부터가 여간 범상치가 않다. 그만큼 오래 묵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게 ‘당산나무’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 나무의 자태도 만만치가 않다. 아랫동에서 뻗어 나온 굵은 가지가 바닥에 둥지를 튼 다음 또 다시 자라나는 모양새이다. 그것도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은 듯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날아오르고 있다.

▼ 당산나무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 계단을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굵은 밧줄까지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3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곰지기’라는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곰지기’란 화전민이 살던 능선 아랫마을의 이름이라고 한다. 대여섯 채가 모여 살던 화전민들은 이제 제 터전을 찾아 떠나갔지만 여전히 이 골짜기는 곰지기로 통한다. ‘곰지기’란 지명은 곰이 살아가기에 딱 좋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 ‘곰지기’ 고갯마루에도 등산안내도와 함께 이정표(웅덕산 정상↑ 1.0㎞/ 홈다리골 등산로입구→ 2.0㎞/ 도전리(여주) 등산로입구← 1.5㎞/ 당산 정상↓ 1.0㎞)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곰지기골을 거쳐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홈다리골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웅덕산으로 오르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산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 웅덕산으로 오르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에 딱 맞는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등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오를 수가 없을 정도로 가파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45도 정도 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 길가에 굵은 밧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 밧줄마저 없었더라면 우리 일행은 오르는 것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웅덕산 정상의 높이는 520m이다. 반면에 방금 지나온 곰지기 고갯마루는 해발이 316m. 고갯마루에서 웅덕산 정상까지 1㎞를 걷는 동안 고도를 204m나 높여야 한다는 얘기이다. 산길이 몸서리치게 가파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 능선의 양 옆은 산짐승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탈지다. 그러다보니 말 잔등처럼 생긴 능선을 걷기도 한다.

▼ 힘겨운 오름짓을 두어 번이나 더 치른 뒤에야 웅덕산(熊德山, 520m) 정상에 올라선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느구리봉’ 또는 ‘호랑봉’으로도 불리는 봉우리이다. 하지만 요 아래에 있는 골짜기가 ‘곰 웅(熊)’자의 ‘곰지기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웅덕산’이 맞는 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여흥 민씨’ 조상 중 한분의 묘가 도전리 소재의 웅덕산 아래에 있다는 내용이 여주군지(驪州郡誌)에 기록된 것을 ‘웅덕산’의 증거로 드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참고로 곰지기에서 웅덕산 정상까지는 35분이 걸렸다.

▼ 대여섯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정상석이 세 개나 세워져 있던 당산과는 달리 이곳 웅덕산은 정상석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등산안내도는 물론이고 심심찮게 놓아두던 벤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웅덕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증고개 입구→ 3.4㎞/ 곰지기↓ 1.0㎞)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조망이 트이지 않는 정상에서 오래 머물 일은 없다. 곧바로 하산을 시작하는 이유이다. 하산은 북쪽 능선을 타보기로 했다. 아까 지나왔던 고갯마루로 되돌아가 곰지기골을 따라 하산할 수도 있겠지만, 등산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같은 길을 같은 날에 또 다시 걷는 것 아니겠는가.

▼ 웅덕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20분 남짓. 작은 오르내림을 번복하며 고도를 낮추던 산길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을 벗어나는 상황이라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후기도 여럿 보였었다.

▼ 이런 상황을 지자체에서 파악했던 모양이다. 오인하기 딱 좋은 능선의 나무에다 등산로가 아니라는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 오른편으로 갈려나가는 능선은 시작부터가 가파르다. 아니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내려설 수도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이러니 안전시설을 보강하기 전에도 이곳에서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아직도 주차장까지는 많이 남았다. 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산길이 계속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가기 때문이다.

▼ 그렇게 40분쯤 진행하자 산길은 임도로 내려선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임도의 연장으로 보이는데, 산길은 이 임도를 가로지른다.

▼ 날머리는 ‘홈다리골 주차장’(원점회귀)

8분쯤 더 걸어 숲속을 빠져나오자 새로 지은 듯한 펜션들이 여럿 나타난다. 구획정리가 반듯한 것이 영락없는 기획부동산 작품인데 산행이 종료되는 ‘홈다리 주차장’은 이 펜션촌의 길 건너에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3시간30분쯤 걸은 셈이다. 겨울 산행치고는 제법 긴 거리였다고 보면 되겠다.

▼ 점심 식사를 위해 들렀던 ‘솔치장어탕’. ‘솔치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꽤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있었다. 밥보다 술을 좋아하는 최군과 나는 ‘수육’에 끌려 들어갔지만 준비된 재료가 이미 떨어져 버렸단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메뉴는 ‘곱창전골’. 맛이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소주를 4병이나 마셨으니 술안주용으로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겠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생선 탕수육’이 엄청나게 맛있었다면 본말전도(本末顚倒) 일까? 아니다. 막국수를 주문한 집사람이 입맛까지 다셔가며 먹는 걸 보면 주인장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광교산(光敎山, 581m)-백운산(白雲山, 562.5m)

 

산 행 일 : ‘20. 9. 12()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수원시 장안구, 성남시 분당구, 의왕시 경계

산행코스 : 고기리 노인회관돌담집다이노스타 테마파크광교산 체육공원수지 꿈학교수리봉광교산 정상노루목백운산고분재관음사고기리 노인회관(소요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시가지 가까이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이다. 하지만 넓이는 꽤나 넓은 편, 남쪽으로 수원시, 북동쪽으로 성남시 분당구, 동쪽으로 용인시 수지구, 북서쪽으로 의왕시와 접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바위가 거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점이다. 능선에 수목이 울창해서 두 정상을 포함한 서너 곳을 제외하고는 조망이 터지지 않은 이유이다. 이는 볼거리가 거의 없는 산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두 산은 찾는 사람들로 항상 넘쳐난다고 한다. 도시와 가까워서 접근성이 뛰어난데다 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등산로까지 평탄해서 삼림욕 하듯이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고기리 노인회관(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215)

또 다시 도시 근교의 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경기 중부지역에 위치한 광교산이다. 대부도에 살고 있는 취우님 부부에게 이보다도 먼 거리는 무리라는 최군의 배려였다. 들머리인 고기리 노인회관은 수인분당선(또는 신분당선) 미금역에서 내려 관음사가 종점인 14번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오면 된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관음사(또는 장작골 마을)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도로라서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이 없는 풍경이 펼쳐지나 들러볼만한 곳은 있다. 노인회관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PURPLE RABBIT’이다. 국제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유기농밀가루와 프랑스산 최상급 버터, 그리고 수제 과일청과 국산 팥앙금으로 빵을 만들어 낸단다.

 

 

 

판소리연구소를 부설기관으로 갖고 있는 듯한 법향정사를 지나자 실제 들머리라 할 수 있는 돌담집입간판이 보인다. 근처의 버스정류장도 역시 돌담집 앞이다. 출발지인 노인회관에서 도보로 8분쯤 되는 지점인데 버스를 이용했다면 이곳에서 내리면 되겠다. 참고로 우리 일행은 승용차의 주차 때문에 노인회관을 들머리로 삼았다.

 

 

능이백숙 전문점인 돌담집을 지나자 길이 둘로 나뉜다. ‘우리는 커피가 미치도록 좋다는 현수막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오른편에 위치한 카페 별 다섯 크래프트 커피공장에서 내건 것이다. 베이커리도 겸한다니 출출할 때 들러봄직 하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조금 더 걷자 공룡 테마파크인 다이노스타가 나온다. 공룡 놀이기구와 체험시설을 중심으로 미니골프에 정글짐, 인공암벽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는 천문교실로도 변한다니 가족단위의 놀이터로 제격이겠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테마파크를 지나자 탐방로는 시골길로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들머리로 삼았던 돌담집에서 12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이곳에서는 호원관(鎬源館)’의 방향표시를 따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산사랑이라는 한정식집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방향을 틀자마자 호원관으로 들어가는 널찍한 길을 버리고 왼편 비포장 임도로 들어선다. 밭과 야산의 사이로 내놓은 전형적 시골길이다. 이 길을 따라 4분 남짓 걸었을까 광교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군의 말로는 마을버스(14-3)의 종점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운동기구 외에도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공원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대안 초·중등학교인 수지 꿈학교방향이다. 이 학교는 수지 지역에서 '공동 육아''방과후'를 하면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길을 일궈오던 부모와 교사들이 공동으로 열었다고 한다.

 

 

꿈학교의 담벼락 끝,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등산로가 열린다. 체육공원에서 200m쯤 떨어진 지점인데, 이정표는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를 1.7로 적고 있다. 비교적 짧은 거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 새로 세운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2.8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들머리인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전원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고기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기리는 광교산(남쪽)과 백운산(서쪽), 바라산(북쪽)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모양새이다. 오직 동쪽으로만 뚫려 분당지역과 연결된다. 그래선지 용인시(수지구) 관할인데도 주말농장은 대부분 성남(분당구) 사람들이 짓는단다. 고기(古基)란 지명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고분현과 손기동이 병합되면서 양쪽에서 한 글자씩 따다 만들었다고 한다. 1996년 용인군의 시() 승격에 이어, 2001년 수지읍이 구()로 승격되면서 고기동이 되었다. 용인(龍仁)이란 지명도 한번 살펴보자. 용인은 지금의 수지(水枝) 일대를 지칭하는 용구(龍駒)’에서 출발했다. 고구려 때에는 구성(駒城)이었다고 한다. 태종 13(1413) 용구(龍駒)와 처인(處仁: 현재 용인시 처인구)이 합쳐 용인이 됐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정비가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고 길가에는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거기다 야자수 매트를 깔아 미끄럼까지 방지하고 있다. 수도권의 산답게 이정표도 갈림길마다 거르지 않고 세웠다. 등산로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타 지역에서 보아오던 등산로, 아니 국립공원도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육산이라 해도 봉우리를 오를 때 숨이 차오르는 건 매한가지다. 지자체에서는 이런 점까지 신경을 썼나보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아래 사진은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광교산 정상1.3/ 미륵사1.2/ 체육공원1.3)이다.

 

 

산길은 가파름의 연속이다. 그것도 내림 한번 없이 오로지 오르막길 일색이다. 주능선이나 마찬가지인 수리봉까지의 거리가 1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서 고도를 높이고 있는 모양이다.

 

 

숨이 턱에 차게 오르길 25,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전형적인 육산인 광교산에서는 보기 힘든 바위봉우리라 하겠다. 그래선지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산줄기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용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난개발의 대표라고 지탄 받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뭇 빼어나다.

 

 

잠시 후 수리봉(565)에 올라선다.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구간(광교산 정상수지성당)에 위치한 바위봉우리이다. 아니 정상 부분만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더구나 낙석사고가 우려된다고 해서 한때는 막아놓기까지 했었다.

 

 

힘겹게 올라선 수리봉 정상은 텅 비어있었다. ’정상표지석은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고 알려져 있다. 용인과 수원의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조금 전까지 비를 몰아왔던 구름이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리봉 아래에도 이정표(광교산 정상0.3/ 법륜사2.0, 수지성당 6.5/ 미륵사2.4)가 세워져 있었다. 등산에 제법 이력이 붙은 내 눈에도 수준급으로 보이는 이정표이다. 검정바탕에 흰 글씨야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 하지만 광교산의 것은 지도까지 장착했다.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 위에 현재 위치까지 표시함으로써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도록 했다.

 

 

수리봉은 한남정맥에 놓여있지 않으니 광교산의 주능선은 아니다. 하지만 성지바위산을 거쳐 수지성당에 이르는 능선은 6.5나 된다. 주능선에 뒤지지 않는 굵직한 능선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의 기세가 많이 꺾여 있었다.

 

 

느긋하게 10분쯤 걷자 광교산의 정상인 시루봉올라선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봉이다. 시루봉은 약간 용인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교산등산로 안내판등 시설물들이 하나같이 용인시에서 세운 것들 일색이다. 그나마 수원 23’으로 표기된 삼각점이 수원시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긴 수원의 진산이니 어련하겠는가.

 

 

광교산(光敎山)이란 지명은 1530(중종 25)에 증보하여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광교산(光嶠山), 광악산(光岳山), 광옥산(光獄山) 등으로 불리다가 수원부지도(1872)’에 있는 아래 내용으로 인해 광교산으로 굳어졌다. <고려 야사에 의하면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서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고 하였다.> ! 용인군 지도읍지에는 서봉산(瑞峯山)’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북쪽으로만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비까지 내린다. 큰 기대 없이 전망대로 다가가는데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구름이 걷히면서 청계산과 관악산이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몸매가 자칫 화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한산과 도봉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백운산으로 갈 차례이다. 이때 토끼재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나 개의치 말자. 그렇다고 김준용(金俊龍) 장군의 전승지 및 비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8도에서 근왕병이 밀어 닥쳤다. 전라근왕병은 감사 이시방과 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6000명과 승통 각성이 이끄는 2000명이었다. 전라병사 김준용은 병사 2000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고, 전투에서는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 때 이러한 승전이 있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장세영이라는 중학생의 시를 적어놓은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99년 수원시 장안구에서 공모한 광교산에 어울리는 시에 최우수 작품으로 당선되었다는데, 광교산을 어머니에 빗대어 적어간 내용이 그동안 읊조려봤던 그 어떤 시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큰 오르내림이 없는 탐방로는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길가에는 수원 팔색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이 능선은 수원시에서 만든 둘레길인 팔색길가운데 육색(六色)모수길이기도 하다. ‘물길의 근원이다하여 백제시대부터 모수국이라 불렸던 수원의 대표 하천인 서호천과 수원천을 따라 도심 속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광교공원에서 출발해 화홍문, 팔달문시장, 수인선협궤열차길, 잠사과학박물관, 서호공원, 광교산을 거쳐 광교공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 19의 둘레길이다. 참고로 수원팔색길은 수원이 지닌 팔의 긍정적 의미를 담아 수원 곳곳을 연결하면서 수원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팔의 의미로는 수원의 주산이자 혈처인 팔달산과 사방으로 통해 있고 팔방으로 도달한다는 교통의 중심지 수원을 상징한단다.

 

 

잠시 후 아름드리 노송들이 꽉 들어찬 노루목에 이른다. 딱히 특징이랄 것은 없고, 그저 광교산의 유일한 대피소가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책도 몇 권 비치되어 있단다. ! 노루목 대피소에서도 길이 나뉘고 있었다. 왼편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고려 때의 절 창성사로 이어지고, 오른편은 수지의 고기리 방향이다.

 

 

대피소를 지난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무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걷는데 백운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이정표(송신소/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능선은 송신소가 차지하고 있으니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산비탈에 다리 모양으로 탐방로를 내놓았다.

 

 

 

통신시설에 빼앗긴 봉우리를 돌아서니 수북하게 쌓인 돌무더기(이정표 : 백운산 0.9/ 광교산 1.1)가 나온다. 생김새로 봐서는 어김없는 서낭당이다. ‘원추형으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특징이니 말이다. 이곳에서 지지대 및 절터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니 서낭당의 또 다른 특징인 고갯마루가 아니겠는가. 서낭당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아쉽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데 어쩌겠는가.

 

 

그 옆에는 억새밭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친절하게도 억새와 참억새, 무늬억새에 대한 특징까지 적고 있다. 하지만 막상 억새밭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한 평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면적이 작기 때문이다. 억새밭이라고 하면 정선 민둥산이나 화왕산의 그것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네 근린공원에 표본용으로 식재한 수준에 가깝게 정말 조그맣다. 지금은 억새가 별로 없는 때라는 변명도 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앞서가던 최군이 커다란 바위로 냉큼 올라간다. 능선에는 저런 커다란 바위들도 제법 보였다. 하지만 탐방로는 어김없이 바위를 피해 우회시키고 있었다.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 출신인 최군이 지금 내 얘깃거리를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눈요깃거리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4형제 소나무(가칭)‘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네 개의 줄기가 자라났는데, 혹독했던 그네들의 삶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나같이 몸을 배배꼬고 있었다.

 

 

버섯으로 덕지덕지 뒤덮인 나무도 보였다.

 

 

길가에는 꽃망울을 활짝 연 들국화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2주 전, 춘천의 금병산을 오를 때만 해도 무더위에 무척 시달렸는데 오늘은 선선하기까지 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통신대가 나타난다. 경기방송의 송신소로 백운산은 물론이고 광교산의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하지만 등산객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일 따름이다. 시설에 빼앗긴 산봉우리를 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인구가 이미 100만을 넘겼다는 수원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거기다 불에 타다 남은 고사목까지 더해져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통신대 앞(통신대 헬기장0.8, 지지대 5.1/ 백운산0.3/ 억새밭0.6)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왼편은 지지대고개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마룻금이다. 백운산은 물론 통신대를 왼쪽 옆구리에 차고 이어지는 오른쪽 길이다.

 

 

갑자기 가팔라진 비탈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백운산 정상이다. 분지(盆地)를 연상시키는 널따란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외에도 삼각점(수원 451)과 이정표(바라산 2.2/ 광교산 1.9)가 세워져 있었다. ’종합안내도등 두어 개의 안내판도 보이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남정맥(漢南正脈)‘에 대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산줄기가 광교산과 백운산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과 금북으로 갈라진다. 그 중에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을 한남정맥이라 한다. 이 산줄기는 경기 남부권 일원을 포용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수계의 분수령을 이루는 경기산하의 모체라 할 수 있다.

 

 

정상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조망을 돕고 있다. 의왕시가지는 물론이고 군포시와 안산시까지 눈에 들어온다며 조망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모락산과 수리산 등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북쪽 멀리로는 관악산도 보인단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굵어진 빗줄기가 100m 앞의 풍경까지도 가려버렸다.

 

 

백운산 정상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늘 아래 놓아둔 수많은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육각정까지 지어놓았다. 굵어진 빗줄기를 피해 주저앉은 우리 일행은 정자에서 1시간 이상이나 쉬어버렸다. 점심 식사도 이곳에서 때웠음은 물론이다.

 

 

 

운지버섯으로 여겨지는 버섯이 탐스러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그 위에서 놀고 있는 달팽이가 더 눈길을 끌었다.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둘로 나뉘는 길 가운데 오른쪽 방향, 그러니까 바라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왼편으로 나있는 길은 한남정맥으로 백운사를 거쳐 의왕시의 모락산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고분재까지 1,560m를 남겨놓은 이 길은 잠시 후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침목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안심되지 않는다면 길 양편에 세워놓은 난간에 의지하면 될 일이다. ! 급경사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쭉나무가 숲을 이루는 평평한 구간이 나오는가 하면 564.2고지와 464고지 등 작은 봉우리를 넘기도 했다.

 

 

의왕시에서 만들어 놓은 길안내판이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의왕대간이라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대간(大幹)’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이중환(李衆煥)택리지(擇里志)’이다. 그는 큰 줄기는 산협으로 잘리지 않고 횡으로 뻗어 수천리를 남하하여 경상도 태백산에 이른다(大幹則不斷峽 橫亘南下數千里 至慶尙太白山)’라면서 대간을 큰줄기라는 일반명사로 쓰고 있다. 그러다 여암 신경준(申景濬)이 쓴 산경표(山經表)’에 오면 대간(大幹)이란 단어는 더 이상 일반명사가 아니다. 택리지에서 말하던 백두산에서 수천리를 남하하는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했고. 함흥에서 동쪽으로 뻗는 줄기를 장백정간(長白正幹)이라 했으며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바다로 달리는 13개의 산줄기를 정맥(正脈)이라 했다. 그러니 대간, 정간, 정맥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쓰기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곳 의왕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이어야 할 대간을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서 20분 남짓 내려오니 고분재(古盆 峴·)이다. 고기동(용인시)에서 학의동(의왕시)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옛날에는 산골마을이던 고기리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위해 지겟짐 지고 안양장 보러 다니던 길이었다. 요 아래 마을인 고기리(古基里)’는 이 고갯마루와 손기동(遜基洞)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다고 한다. 고개의 이름에 동이 분()’자를 쓴 이유는 이 근처에서 장석(長石)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장석은 사기그릇 유약의 첨가물로 쓰이며, 이게 또 풍화되면 도자기의 원료인 도토(陶土)가 된다. 옛날 이곳에서 캐낸 장석은 광주의 분원리 도요(分院里 陶窯)’로 보내졌다고 한다.

 

 

왼편 고기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길은 곧장 내려서지를 않고 횡()으로 굽어 산자락을 옆으로 짼다. 구불구불 많이도 휘었다는 얘기이다. 고분재(古盆峴)의 또 다른 이름인 곡현(曲峴)’은 이래서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잠시 걷자 길가에 서낭당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색색의 천과 같은 옛 정취를 불러일으켜줄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목(堂木)으로 여겨지는 나무 아래에 돌무더기만 수북하게 쌓여있을 따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서낭당을 성황신(城隍神)을 모시는 것으로 안다. 예전 나라와 지방 관아에서 모시던 그 상황신 말이다. 하지만 성황신이 아니라 산왕신(山王神)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학자들도 있다. 민초들이 산길에서 만나는 서당당과 잘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고분재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산자락을 벗어나고(이정표 : 고분재 0.7, 바라산 1.4), 탐방로는 이후부터 마을길을 따른다. 광교·백운·바라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동막천, 東幕川)와 나란히 나있으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평범한 길이다. 아니 산골에서나 볼 법한 허름한 주택과 산뜻하게 지어진 전원주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점은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산행날머리는 고기리 노인회관(원점회귀)

마을길을 따라 5분쯤 더 걷자 관음사라는 절간이 나온다. 백운산이나 광교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들머리 또는 날머리로 삼는 곳이다. 일단 경내부터 들어가고 본다. 하지만 눈여겨 볼만한 것들은 갖고 있지 못했다. 누가 언제, 왜 지었는지도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건 그렇고 산행이 종료되는 고기리 노인회관은 아직도 30분 정도 더 걸어야만 한다. 이 시간까지 합칠 경우 오늘 산행은 총 6시간 10분이 걸렸다. 점심식사 등을 위해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20분을 걸은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왔으니 광교산과 백운산의 산자락에 스며있는 선현들의 얼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빗줄기에 쫓긴 탓에 우리는 찾아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유적지 가운데 둘은 오늘 산행의 들·날머리인 고기리(수지구)에 위치하는데, 하나는 왜구(倭寇)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李從武) 장군의 묘이다. 그로 인해 왜구가 항복문서(通書于禮曹判書乞降)‘를 보내왔으니 이후 이런 순간이 우리 역사에 또 있었던가? 이 묘는 500여 년 동안 잊히어 오다가 1972장자승평이 세웠다(長子昇平立)’ 묘표의 글자가 판독되어 다시 찾았다. 다른 한 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李莞) 장군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싸움을 독려해 대승을 거둔 인물이다. 이후 명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정묘호란 때 의주에서 분사했다. 마지막 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 김준용(金俊龍) 장군의 전승지이이다. 전라병사이던 그는 전라근왕병 2천명을 지휘하여 광교산에서 싸워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산전도의 치욕으로 물든 병자호란에서 거둔 유일한 승전이 아닐까 싶다. 그 흔적인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 및 비는 종루봉(또는 토끼봉, 수지구 신봉동) 너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산자락에는 고려 때 지어진 세 개의 커다란 절이 있었다. 서봉사(峯寺)와 성불사(成佛寺), 창성사(彰聖寺)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셋 모두 터로만 남아있다. 특히 성불사는 문화재 안내판만이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서봉사도 폐사지에 현오국사비(玄悟國師碑 : 보물 제9)’만이 외롭고, 창성사 터에도 초석과 장대석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창성사에 있던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 보물 제14)는 현재 화성 안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옆으로 옮겨져 있단다.

불기산(佛岐山 600.7m)

 

산 행 일 : ‘20. 4. 25()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과 청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빗고개(버스정류장)자원순환센터연인지맥불기산연인지맥알바임도수리재 버스종점(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한북연인지맥에 올라앉은 봉우리들로 깃대봉, 대금산, 불기산, 청우산이 나란히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은 해발 600.7m로 나지막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능선과 계곡마다 수림이 울창해 알차면서도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하지만 능선이 흙길에다 경사까지 가파르니 눈비가 올 경우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참고로 불기산(佛岐山)’은 옛날 이곳에 절을 지으려고 절터를 다지다가 그냥 가버린 탓에 절터에 부초만 자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시대 때 불교신자들이 산 중턱에서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부처님처럼 솟아 오른 산' 또는 '부처님이 자리 잡은 산'이라는 뜻으로 불기산(佛起山)이라 쓰기도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의 가평군 산천조에는 불기산(佛棄山)이라 쓰면서 일봉산(釖峯山)과 같이 견치산(犬齒山)에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행들머리는 빗고개군내버스 정류장(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382-10)

이번에도 대중교통이 가능한 근교산을 찾았다. 2주 전 대금산 산행 때 집사람의 체력을 생각해서 생략했던 불기산을 마저 오르기 위해서이다. 이 산도 역시 경춘선 가평역에서 내리야 접근이 용이하다. 들머리인 빗고개로 가는 군내버스(73-1, 가평터미널과 청평터미널을 왕복 운행)가 가평역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편인 청평 쪽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버스가 청평역에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하차지점도 빗고개가 아닌 상색리라서 접근성도 많이 떨어진다.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 ’73-1‘번 버스도 뜸하게 운행(7:20, 8:20, 9:15, 11:05, 13:05, 14:55, 16:05, 17:45, 19:05)하는 편이니 출발 전에 미리 시간표를 체크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빗고개이다. 지금은 길이 훤하게 뚫려 험한 재라는 느낌이 사라졌지만 큰길로 확장되기 전에는 꽤 알아주는 험한 고갯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승용차로 넘으려면 가속페달 두어 번 정도는 밟아야 할 정도이다.



가평군 자원순환센터방향으로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오늘 걷게 될 코스가 한북연인지맥이니 지맥(地脈)을 거꾸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 지맥은 반대편에 있는 주발봉과 호명산으로 연결되나 4차선 도로가 갈 길을 막고 있는 모양새이다. 중앙분리대까지 만들어놓았으니 지맥을 탐사하는 이들의 입이 한 자쯤 튀어나올 만도 하겠다. 참고로 한북연인지맥이란 한북정맥상에 있는 강씨봉과 청계산 중간 890(귀목봉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귀목봉(1036m), 명지3(1199m), 연인산(1068m), 우정봉(906m), 매봉(929m), 깃대봉(910m), 대금산(704m), 불기산(601m), 주발봉(489m), 호명산(632m)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산줄기를 말한다. 신산경표(저자 : 박성태)에서는 연인지맥을 명지지맥으로 분류하고 있다.



자원순환센터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 능선으로 들어선다.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 흔한 리본 하나 매달려 있지 않으니 대충 감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아니 들머리에 세워진 산 입양사업안내판을 기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50m쯤 오르다가 송전탑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도 역시 리본은 보이지 않는다. 길의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저 능선이려니 하고 올라야만 하는 이 구간은 거칠기 짝이 없다. 길을 막는 잡목에 싸대기 두어 대쯤은 각오하고 올라야만 한다. 가시넝쿨이 없어 할퀴고 찔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게 10분 남짓 오르면 드디어 능선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오른편 발아래에 위치한 자원순환센터가 내려다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능선에 모셔놓은 무덤이 더 눈길을 끈다. 산짐승의 피해가 많았었는지 빙 둘러서 비닐 망을 쳐놓았다.



조금 더 걷자 벌목을 끝낸 개활지(開豁地)가 나온다. 이 일대는 고사리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질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우리 집안 제사상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이니 어쩌겠는가.



개활지에서의 조망은 끝내준다. 한북연인지맥을 완성시키고 있는 주발봉과 호명산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 터를 잡은 상천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른편 산자락에는 잣나무 숲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 가평은 ''의 고장이다. ‘가평하면 곧바로 이 튀어나올 정도다. 생산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고 품질도 좋기 때문일 것이다. 잣은 송자(松子백자(栢子실백(實栢)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특산으로 명성이 높아 예로부터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당나라 때의 해약본초(海藥本草)’에는 그 생산지를 신라로 기재했고,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아예 신라송자(新羅松子)라 칭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우릴 반긴 것은 붓꽃이었다. 개활지는 햇빛을 가릴 지장물들이 모두 제거된 덕분인지 꽤 많은 붓꽃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 정상에 오르는 동안에도 붓꽃의 군락지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참고로 붓꽃은 계손(溪蓀) 또는 수창포(水菖蒲)라고도 하는데 붓꽃이란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전의 모습이 붓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서양에서는 아이리스(Iris)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이리스는 여신 주노의 예의가 바른 시녀였다. 그녀는 주피터가 집요하게 사랑을 요구하자 자신의 주인을 배반할 수 없어 무지개로 변하여 주노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때문인지 이 꽃은 여름을 재촉하는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거나,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함초롬히 피어오를 때 가장 아름답다. 꽃말도 비 내린 뒤에 보는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다.



잠시 후 산길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숲은 이제 완연한 연록이다. 2주 전 대금산을 찾았을 때보다 훨씬 더 짙어졌다. 하긴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가 바로 지난 일요일이 아니었던가.



능선의 오른편은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산나물 채취 금지라고 적혀있는데 CCTV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걸 보면 약용식물을 재배하고 있나보다.




조금씩 가팔라지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날카롭게 곧추서 버렸다. 곧장 위로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어른들도 버거울 정도이니 아이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군의 두 아들인 민상이와 동규의 얼굴 표정에서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어찌된 일인지 저 아이들만 오면 어김없이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제발 그런 일이 안 일어나길 빌어볼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에 능선 삼거리에 올라섰다. 오른편은 서울시 학생교육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정상은 물론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를 알리는 말뚝 모양의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탓에 글씨가 모두 지워져버렸다.




이후부터는 여유로운 산행이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한 것이 걷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벙커가 보이는 걸 보면 이곳 불기산도 한때는 군의 주요 경계지역이었나 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드디어 불기산 정상이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의 한가운데에는 굴뚝 모양의 시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옛날 군의 벙커라도 있었나 보다. 말뚝처럼 생긴 석제 정상석은 굴뚝 앞에 세워놓았다. 이정표를 겸한 정상목도 보인다.




이정표는 본래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는 상태다. 글자판이 대부분 지워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매직으로 복원시켜 놓았지만 오른편은 그마저도 틀렸다. ‘학생교육원 2.9산림조합 2.1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일동 315)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높이를 601m로 적어놓았다. 사사오입을 한 모양이다.




정상 근처 진달래는 이제야 만개했다. 비옥하고 아늑한 좋은 땅은 우악스런 경쟁자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생존의 극한 상황인 산꼭대기로 쫓겨나다보니 영양실조에라도 걸렸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진달래를 나무나라의 가난한 백성이라고 했다. 바위가 부스러져 갓 흙이 된 척박하고 건조한 땅, 소나무마저 이사 가고 내버린 땅을 찾아 산꼭대기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한북연인지맥의 대금산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부드러운 육산(肉山)이지만 바닥이 바위로 된 곳도 심심찮게 나온다. 앞서가던 최군이 그게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스틱을 꺼내 아이들에게 쥐어주는 걸 보면 말이다.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자 이정표(두밀리2.4/ 샘말 쉼터1.7/ 불기산300m)가 세워진 삼거리가 나온다. 한북연인지맥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흐른다. 하지만 이정표는 지맥에 솟아오른 대금산이라는 지명 대신 능선에서 벗어나있는 두밀리로 적고 있다. 이정표라는 게 본디 등산객들을 위한 시설임을 감안하면 대금산을 병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두밀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갈 지()’자를 써야만 겨우 내려설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이곳은 폭까지 좁아 갈 지()’자의 효과마저도 반감되고 있다.



두밀리 방향에도 벙커가 여러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어느 선답자는 후기에서 벙커봉이란 지명을 붙이면서 각 봉우리를 1, 2, 3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가파른 것만은 아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완만한 구간도 있다.



그렇게 200m쯤 더 내려서자 글씨가 다 지워진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누군가가 불기산 500m’라고 표기해 놓았다. 대금산 방향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는 두밀리 2.2, 상천리(수리재) 3.1라는 표식이 적혀있던 공간이다.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아니 아까보다 조금 더 가팔라졌다.



혹이 주렁주렁 달린 참나무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파른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오름이 나오는가 하면 그 끝에는 봉우리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몸의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만일 스틱을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것 같다.




능선을 따르다가 잣나무 군락을 다시 만났다. 이왕에 들른 잣의 고장이니 이번에는 잣의 효능에 대해 알아보자. 잣에는 지방유가 약 74정도 들어 있고 그 주성분은 올레인산·리놀렌산이다. 오래 먹으면 장의 유동운동을 촉진시키면서 배변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마른기침을 하는 사람이 복용하면 폐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기운이 없을 때 먹으면 기운이 소생하며, 피부가 윤택하여지고 탄력을 얻게 되므로 미용에도 좋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약용보다는 식용으로 주로 쓰여 왔다. 각종 음식에 고명으로 들어가며 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 정월 보름날에는 잣을 열두 개 준비하여 불을 붙여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민속도 있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우린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 한참을 내려왔는데 길이 끊겨버린 것이다. 아니 길이 아닌 곳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팔랐던 내리막은 다 그런 때문이었을 게고 말이다. 아무튼 우린 내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던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갈 일에 한숨만 쉬고 있는데 이때 리딩을 맡은 최군이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혼자서 좌우를 헤집고 다니면서 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배태랑 산꾼다운 능력이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산길, 이곳도 일 년에 한두 명이나 다닌 탓인지 길의 흔적을 찾기가 만만찮다. 그 흔한 산악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인적이 끊긴 덕분에 다래와 고춧잎나물이 지천이었던 것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라고 우린 이곳에서 산나물을 뜯기로 했다. 그리고 꽤 많은 양을 채취할 수 있었다.



집사람이 산나물을 뜯는 동안 나와 최군은 캔맥주로 시간을 때웠다. 이때 눈에 들어 온 것이 금낭화이다. 금낭화는 아치형으로 활대처럼 곧게 뻗은 꽃대에 아이들 복주머니 모양의 진분홍색 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꽃이다. 꽃 모양이 옛날 며느리들이 차고 다니는 주머니를 닮았다 하여 며느리주머니라고도 부른다.



계곡을 빠져나오자 널따란 경작지가 나온다. 아니 지금은 이름 모를 나무들로 그 주인이 바뀌어 있다. 통상적인 밭작물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묵밭에서 내려서니 임도다. 길가에 불기산정상에서 2쯤 되는 지점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수리재로 연결되는 임도인 모양이다. 아까 능선에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더라면 이 길로 편하게 내려왔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나물은 뜯지 못했을 것이니 이런 걸 두고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아득한 옛날 세상이 홍수로 범람했을 때 물이 넘쳐흘렀다는 고개가 수리재이다. 그게 사람들에게 물의 이치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나? 그 고개 밑에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수리재라고 불린단다.




이젠 임도를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왼편은 길이 3.1의 지방하천인 수리천이 흐르지만 물기는 한 점도 없다. 주변 풍경도 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것들뿐이다.



날머리는 수리재(가평군 청평면 상천리 1567)

임도에 내려선지 20분쯤이면 수리재(상천3)’ 마을에 닿는다. ! 실제 상황을 얘기해보자.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 일행은 두밀리로 내려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두밀리 마을이 나오기만 기다리며 걷는데 난데없이 수리재 마을의 버스 종점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특히 독도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는 최군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어디서 정규 탐방로를 벗어났었는지를 짐작조차 못한다. 그저 잣나무 군락지 근처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직전 이정표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나온다는 헬기장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늘 산행은 4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4시간을 걸은 셈이다. 하지만 산나물을 뜯느라 발걸음은 더뎠고, 가끔은 멈추기까지 했으니 소요시간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다 



대금산(大金山, 733m)-약수봉(850m)

 

산 행 일 : ‘20. 4. 11()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과 조종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새밀 버스종점임도지능선주능 삼거리약수봉대금산두밀리 고개임도(이장형님네 산속농원)두밀리 버스종점(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한북연인지맥에 올라앉은 봉우리들로 깃대봉, 대금산, 불기산, 청우산이 나란히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은 해발 704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인적이 드물고 능선과 계곡마다 수림이 울창해 알차면서도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능선을 걷는 재미도 있다. 동쪽은 육산(肉山)인 반면 서쪽은 깎아지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암릉 산행만이 갖고 있는 손맛까지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금산은 이 산에서 큰 금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 때 이 산의 소림광산에서 말 한 마리만큼 큰 금광석이 나왔다는 얘기와 함께 대금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산행의 들·날머리가 되는 두밀리의 옛 지명은 삼이곡이었다. 십이탄(十二灘) 건너 부락이라고도 불렸는데 물길을 열두 번 건너야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오지(奧地)라는 데서 연유했다. 옛날에는 나라에 난리가 날 때마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피난처로 찾았을 정도로 오지였단다.


     

산행들머리는 새말군내버스 종점(경기 가평군 가평읍 두밀리 377)

모처럼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근교산을 찾았다. 경춘선 전철 가평역에서 내려 군내버스(10-3)를 갈아타고 두밀리(종점)‘로 들어가다 새말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는 이곳을 종점으로 삼아 되돌아 내려가다 다시 두밀리(종점)로 향한다. 오늘 산행의 날머리가 되는 곳이다. ! 두밀리행 버스가 조금 뜸하게(6:55, 7:45, 10:05, 11:25, 14:05, 16:35, 18:55) 운행하는 편이니 출발 전에 미리 시간표를 체크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두밀리에서 나오는 버스는 앞의 출발시간에다 25분을 더하면 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계곡 가에 내놓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일차선이라서 대형차량은 진입이 불가능하다. 참고로 달전천'은 가평군(가평읍)에 위치한 깃대봉(910m)과 약수봉(810m)의 사이 계곡에서 발원하여 하색리를 거쳐 달전리에서 북한강으로 합류되는 10.8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잠시 후 유럽풍으로 지어진 올가펜션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오른편은 광산골을 거쳐 송이봉으로 연결된다. 깃대봉이나 약수봉은 물론 곧장 직진하면 된다. 하나 더, 송이봉을 거쳐 깃대봉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계곡에 철봉을 세우고 그 위에 주택을 올려놓은 게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잠자리 아래로 물이 흐르니 풍수(風水)와는 상극이다. 하지만 여름철에는 이만한 피서지도 없을 것 같다.



골짜기 주변의 민가들은 하나 같이 펜션을 겸하고 있다. 이 주변이 잠시 쉬었다 가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계곡은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널찍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긴 저런 여건을 갖추고 있기에 곳곳에 펜션이 들어서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펜션(나투라 펜션)을 지나니 약수봉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즐거운 산행, 안전한 산행을 하시란다. 우리가 지금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시멘트 포장길, 약수봉이나 깃대봉은 모두 왼편 비포장 임도를 따라야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되었을까 커다란 바위 앞에 그럴듯한 집이 한 채 지어져 있다. 생김새만으로는 영락없는 성황당인데 문틈으로 내다본 내부는 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었다는 얘기이다.



언제부턴가 계곡은 개울로 변해있다. 물은 별로 보이지 않고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정도이다. 계곡이 온통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진 탓도 있겠지만 건조경보까지 내려질 정도로 심한 요즘의 가뭄 탓이 아닐까 싶다.



15분 남짓 더 걸으니 오른편으로 오솔길(이정표 : 약수봉1.50/ 깃대봉1.84/ 윗삼일1.14) 하나가 나뉜다. 깃대봉으로 가고 싶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약수봉은 물론 직진이다. 근처에는 또 다른 이정표(약수봉1.48/ 깃대봉2.36/ 윗삼일)가 세워져 있었다. 깃대봉으로 오르는 또 다른 등산로가 있는지, 아니면 깃대봉까지의 거리 표시가 잘 못 되었는지 모르겠다.



임도는 두어 번쯤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개울은 곳곳에서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고 있었다.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8분쯤 더 걸었을까 앞서가던 최군이 개울로 파고든다. 그런데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망설일 일은 아니다. 산행대장 경력까지 있는 그의 능력이라면 오래지 않아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울로 들어선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조금만 더 임도를 따랐다면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났을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지 15, 할퀴고 찔리고 심지어는 따귀 두어 대를 맞고 난 다음에야 지능선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렷하진 않지만 등산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선답자들이 남긴 흔적(리본)도 눈에 띄었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15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송전탑(送電塔)이 나온다.



능선에 올랐어도 가파름은 여전하다. 아니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치르길 35분 여,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주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곳의 이정표는 약수봉까지 0.23가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 두밀리에서 이곳까지는 2.8, 깃대봉 방향은 글씨가 지워져 있는데 누군가가 매직으로 1.40라고 적어 놓았다.



왼편 약수봉 방향으로 향한다. 길은 조금 전의 지능선보다 훨씬 완만해졌다. 길의 흔적 또한 훨씬 또렷해졌다. 하긴 한북연인지맥의 제2구간을 걷고 있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한북연인지맥이란 한북정맥상에 있는 강씨봉과 청계산 중간 890(귀목봉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귀목봉(1036m), 명지3(1199m), 연인산(1068m), 우정봉(906m), 매봉(929m), 깃대봉(910m), 대금산(704m), 불기산(601m), 주발봉(489m), 호명산(632m)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산줄기를 말한다. 신산경표(저자 : 박성태)에서는 연인지맥을 명지지맥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후부터 능선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대체로 큰 봉우리가 3, 그 사이사이에 작은 봉우리들이 여럿 들어있는 형태이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높은 봉우리는 고맙게도 왼편으로 우회를 시킨다. 아까 이정표에 적혀있던 0.23라는 거리 표시를 감안하면 이 봉우리가 약수봉일 텐데도 말이다.



이어서 두어 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뒤를 잇는다. 이 능선은 좌우로 확연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왼편은 가파르긴 하나 흙으로 이루어진 사면(斜面)인 반면에 오른편은 바위 벼랑이 대부분인 것이다. 안전에 유의하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오른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심심찮게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짙게 낀 연무(煙霧) 탓이다.



버섯으로 덮인 고목이 예뻐 카메라에 담아봤다. 천 미터에 가까운 높은 산이어선지 희귀 버섯이나 고사목 등 깊은 산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오른 봉우리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약수봉의 정상표식은 맨 마지막으로 오른 봉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반바지라는 산객이 붙여놓은 코팅지인데, 아까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만났던 이정표의 거리 표시를 감안하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능선에서 만난 봉우리들 가운데 정상표식이 붙어있는 유일한 봉우리이니 말이다. 주능선에 올라선지 35,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30분이 지났다. 들머리 부근에서 나물을 채취하느라 걸음이 조금 더뎌졌던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삼면이 잡목으로 둘러싸인 탓에 오른편으로만 시야가 트인다. 하지만 연무 탓에 그마저도 시원치 않다. 그런 희미함 속에 나타나는 산들은 아마 운악산과 축령산, 서리산 등일 것이다.



대금산으로 향한다. 이때 길을 잘못 들어섰지 않았나 의심이 들 수도 있다. 대금산이 정면에 보이는데도 등산로는 왼편 두밀리방향 능선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대금산1.39km/ 두밀리 삼일3.3/ 깃대봉2.62)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거기다 바윗길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태롭지는 않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이후의 능선은 작고 완만한 오름과 길고 가파른 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진행하자 안부삼거리가 나온다. 두밀리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는 이곳에는 글씨가 모두 지워진 낡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래서 선답자들의 후기에서 찾아낸 표식(대금산0.22/ 윗두밀2.75깃대봉3.81)을 옮겨본다. 이후부터 등산로는 방화선을 따른다.



웃자란 억새밭을 피해 방화선의 비탈진 가장자리를 따라 10분쯤 오르자 드디어 대금산 정상이다. 한쪽 면이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말뚝 모양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데 두 동강이가 난 것을 누군가가 다시 붙여놓았다. 이정표도 세워져 있으나 하도 오래된 탓에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역시 선답자의 후기에서 찾아낸 방향표시(청우산5.20/ 윗두밀2.40/ 깃대봉4.03)를 옮겨 놓았으니 참조할 일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터도 좁고 나무에 둘러싸여 호탕한 맛이 없다. 그나마 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시야가 트이고 있다. 서쪽 대금이 계곡의 부드러운 패임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뒤로 축령산과 서리산은 물론이고 멀리 화악산까지 조망된다. 진행방향에 있는 청우산이 더욱 가까워졌음은 물론이다.



철탑 시설물인 무인강우경보기 뒤로는 조금 전에 지나왔던 약수봉 능선이 나타난다. 우회했던 첫 번째 봉우리와 아무런 표식이 없었던 봉우리, 그리고 정상표식이 붙어있던 또 하나의 봉우리가 합쳐져 마치 삼형제처럼 보인다. 그래 일단은 삼형제봉이라고 불러보자.



하산은 반대편 능선을 타면 된다. 아니 곧장 윗두밀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으나 조금 더 편한 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능선을 타고 안부까지 간 다음 윗두말로 내려가는 코스가 훨씬 더 완만하기 때문이다. 능선은 억새와 마른 가지의 나무가 섞인 가파른 내리막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벼랑을 만났다. 벼랑이 높은데다 수직에 가까운지라 등산로는 벼랑을 우회해서 내려간다. 안전용 밧줄이 매어있긴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밧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무심코 의지할 경우 중심을 잃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능선은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했다. 잡목 탓에 조망도 별로이다. 그저 화사하게 꽃망울을 열고 있는 진달래꽃이 잠깐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줄 따름이다.



능선은 작고 완만한 오름과 길고 가파른 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 간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바윗길을 만들기도 한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란 얘기이다. ! 이 구간은 낙엽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참나무류의 낙엽이 무릎까지 차올라서 걷는 게 여간 힘들지가 않다.



타다 남은 고사목(枯死木)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걸 보면 오래 전에 산불이 났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30분쯤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청우산4.8/ 두밀리2.2/ 대보리 버스종점5.5/ 대금산0.5)에 내려서게 된다. 엄마의 등처럼 푸근한 두밀리 고개이다. 푹신한 낙엽과 풀로 이루어진 여유로운 터가 한숨 돌리고 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우린 이곳에서 그만 하산하기로 했다. 왼편에 위치한 윗두밀 방향이다. 참고로 반대편 산길은 조종면의 대보리로 연결된다.



집사람에게 좋은 먹잇감이 생겼나 보다. 최군과 어울려 달래를 캐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채취한 두어 움큼의 달래는 일주일 내내 우리 집 밥상을 풍요로우면서 봄 내음이 가득하게 해주었다.



두밀리로 내려가는 길도 역시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곧장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자()’자를 쓰고 나서야 내려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속도만 조금 줄이면 된다.



바쁜 걸음으로 15분 정도 내려섰을까 임도(이정표 : 윗두밀2.0/ 청우산4.70/ 대금산1.0)가 나온다. 오른편은 630m봉과 592.7m봉 사이의 고갯마루로 연결되고, 하산 지점인 윗두밀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집사람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머물렀다. 근처에 쑥이 지천으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이장형님네 산속농장이라는 안내판에 세워져 있었다. 내려오다가 산허리에 둘러쳐진 철조망을 보았는데 그걸 말하는 모양이다. 농장에서는 산양산삼과 산더덕, 산두릅 등의 임산물을 판매한단다.



이후부턴 임도를 따른다. 눈에 담을만한 멋진 풍광은 보여주지 못하나 흙길이라서 걷는 데는 부담이 없다.



특이하게 생긴 갈구리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최군의 얘기로는 잣을 따는데 사용한단다. 그러고 보니 이곳 가평은 우리나라 최대의 잣 생산지였다.



두밀리에도 펜션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여우가 달을 사랑할 때라는 대형 펜션은 아쿠아월드에 가까운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임도에 내려선지 30분만에 두밀리(윗두밀)에 있는 군내버스 종점에 도착했다. 산행이 끝난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50분을 걸었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5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아무래도 산나물을 채취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나 보다.



등산로 입구에는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대금산을 오르는 코스는 이곳 두밀리 외에도 하면의 대보리가 있다. 그러나 교통관계상 접근이 용이한 두밀리 쪽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주발봉(周鉢峰, 489m)

 

산 행 일 : ‘19. 9. 28()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과 청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가평역능선삼각점봉주발봉발전소고개호명호수 입구상천역(소요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한북정맥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기가 귀목봉(1,036m)을 지나 연인산과 대금산으로 이어지다 빗고개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지막으로 솟구쳐 오른 봉우리이다. 이 산줄기는 주발봉에서부터 솟아올라 호명산(632m)에서 그 절정을 이룬 다음 서서히 북한강으로 사라지게 된다. 주발봉의 특징은 높이가 500m도 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라는 점이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이러니 내세울 만한 산세가 있을 리가 없다. 흙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정상과 벌목으로 인해 생긴 개활지(開豁地)가 아니었더라면 눈요기 한번 해보지 못하는 산행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볼거리도 일절 없다. 그저 산행 내내 만나게 되는 잣나무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볼 때 일부러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호명산과 연계해서 걸어본다든지, 아니면 운동 삼아 올라본다면 몰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경춘선 전철 가평역

모처럼의 근교산행이다. 그것도 최군의 배려로 수도권전철인 경춘선으로 접근이 가능한 주발봉을 찾았다. 이곳 가평역을 산행 들머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봉역에서 오전 530분부터 오후 1120분까지 약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춘천행 전철을 이용하면 손쉽게 가평역에 이를 수 있다.




가평시내와 반대방향으로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참고로 가평서 들어온 군내버스는 이곳 가평역 앞에서 180도로 회전을 한 후에 다시 시내로 돌아나간다. 100m 조금 못되게 걷자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46번 국도로 연결되고, 왼편은 75번 국도로 연결된다. 하지만 왼편 도로는 아직까지 개통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곳 삼거리에서는 왼편 ’75번 국도방향으로 진행한다.



코스모스가 곱게 핀 길을 따라 50m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비포장 임도가 하나 나뉜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주발봉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 가평역을 들머리로 삼기를 피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정표가 없다보니 들머리를 찾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임도로 접어들자마자 왼편 절개지(切開地)를 치고 올라야 한다. 원래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나 도로를 새로 내면서 없어져 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위로 올라서자마자 또렷한 길이 나타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으로 접어들자마자 평산 신씨(平山 申氏)‘ 가족묘역을 만났다면 제대로 길을 들어선 셈이다. 가평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묘역은 풍수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명당(明堂)으로 보인다. 이런 묘역은 이후로도 두어 번 더 만나게 되는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통정대부(通政大夫) 등 묘() 주인들의 품계도 만만찮다. 발복(發福)이라도 받았던지 많은 묘들이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갖고 있었다.



산은 잣나무 천지다. 그러고 보니 이곳 가평은 잣나무 고장이다. 전국에서 잣나무가 가장 많고 잣 생산량이 전국 생산량의 40%나 차지하는 잣 특산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소나무 과에 속하는 잣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장 오래된 수종 중의 하나라고 한다. 옛날부터 백자목(柏子木), 해송(海松), 유송(油松), 오엽송(五葉松), 홍송(紅松) 신라송(新羅松)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학명이 한국소나무(Pinus koraiensis) 라고 불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그러나 소나무의 학명은 안타깝게도 일본소나무(Japenese Pine). 지난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는 동안 전국의 많은 동식물들 명칭이 대부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인들에게 소나무는 일본나무로 알려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잣나무는 일본지역에 흔치 않은 편이어서 그들의 명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소나무는 잣나무인 셈이다.



작은 산이라는 선입감 덕분에 마음까지도 다들 여유로워졌나 보다. 앞서가던 집사람과 최군이 잣송이에서 열매를 빼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잣나무는 목질이 단단하고 무늬가 고와 목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식용으로 사용되는 씨앗으로 더 유명하다. 이 열매는 송자(松子백자(栢子실백(實栢)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특산으로 명성이 높아 예로부터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당나라 때의 해약본초(海藥本草)’에는 그 생산지를 신라로 기재했고,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아예 신라송자(新羅松子)라 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 하면 바로 가평 잣을 손꼽는다. 생산량도 가장 많고 품질도 좋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잣에는 지방유가 약 74정도 들어 있고 그 주성분은 올레인산·리놀렌산이다. 오래 먹으면 장의 유동운동을 촉진시키면서 배변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마른기침을 하는 사람이 복용하면 폐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기운이 없을 때 먹으면 기운이 소생하며, 피부가 윤택하여지고 탄력을 얻게 되므로 미용에도 좋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약용보다는 식용으로 주로 쓰여 왔다. 각종 음식에 고명으로 들어가며 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 정월 보름날에는 잣을 열두 개 준비하여 불을 붙여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민속도 있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했을까 갑자기 길이 넓어진다. 오른편에서 올라온 널찍한 길과 만나면서부터다. 경사도 대체로 완만해졌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나있는 걸로 보아 오프로드용 자동차인 버기카(buggy car)’가 다니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10분쯤 더 걷자 또 다른 평산 신씨(平山 申氏)‘ 묘역 앞에서 첫 번째 이정표를 만난다. 처음으로 만났으니 반가울 만도 하련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정표에다 출발점을 가평역으로 표기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들머리에는 이정표를 세워놓지 않은 가평군청의 처사에 대한 불만 때문이지 싶다.



이정표(주발봉 4.1, 청평역 14.3/ 가평역 2.3)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은 좌우로 길이 나뉘는 사거리이다. 널찍한 길이 좌우로 갈려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발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다시 오솔길로 변한다.



다시 시작되는 잣나무 숲길을 10분쯤 더 걷자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움푹 파인데다가 양 옆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는 걸로 보아 오른편 상색리와 왼편의 이화리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길이 아닐까 싶다. 맞다. 고갯마루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올렸을 돌무더기까지 있는 걸로 보아 분명할 것이다.



돌무더기 위에는 스님 조형물 넷이 올라앉았다. 탁발 나온 스님이 있는가 하면, 물통을 지고나온 스님도 보인다. 둘은 불경공부에 여념이 없다. 정진(精進)하고 있는 스님들을 나머지 스님들이 성심껏 돌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조금 더 걷자 벌목을 마친 개활지(開豁地)가 나온다. 그 덕분에 오른편으로 조망이 트인다. 억지춘향인 셈이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불기산과 대금산, 약수봉, 깃대봉, 연인산 등 이미 올랐거나 앞으로 오르게 될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말이다.




뒤이어 나타난 오르막길에는 잣나무들이 그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뿌리들이 엮기거나 흩어지면서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한 구간이다.



그렇게 올라선 봉우리에는 삼각점(춘천 316, 2005복구)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지점인데 지도에 나오는 360m봉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각점 외에는 눈여겨 볼 것이 하나도 없는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하다. 조망도 트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10분쯤 더 걷자 두 번째 이정표(주발봉 2.5, 청평역 12.7/ 가평역 3.9)가 세워져 있다. 오른편으로도 오솔길이 나있으나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아둘 필요도 없겠다. 얼마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으면 길의 흔적이 저렇게 희미하겠는가.



잠시 후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아니 아까 올랐던 삼각점봉 보다도 더 높으니 낮다는 표현은 옳지 않겠다. 아무튼 봉우리에 올라서니 주발봉으로 여겨지는 산이 시야에 잡힌다. 그렇다고 속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안부까지 뚝 떨어졌다가 정상으로 여겨졌던 다음 봉우리에 오르면 정상은 또 다시 저만큼에서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까지 깊어 힘든 산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왼편 산자락은 철조망을 쳐 사람의 통행을 막고 있다. 간벌(間伐)까지 깔끔하게 마친 걸 보면 산양삼이라도 재배하려는가 보다.



철조망이 끝나는가 싶더니 앞서가던 집사람이 발걸음을 멈춘다. 모처럼 시야가 트이니 반가운가 보다.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가평 시가지를 받쳐주고 있는 산들은 물론이고 춘천에 있는 새덕산도 눈에 들어온다.




아까 정상이라 오해했던 봉우리에는 송전탑(送電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사 9929-7609‘라고 적힌 국가지점번호판을 이름표로 달고서 말이다.



산길은 텅 비어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일행 외에는 인기척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 소리는커녕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최군의 말로는 이 능선을 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반대편 능선을 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했을 경우 아직까지 이곳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평역 부근에 있는 들머리를 찾기가 만만찮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식당 등의 편의시설들을 감안할 경우 우리처럼 가평역을 들머리로 삼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정상이 가까워질 무렵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가에 밧줄난간까지 쳐놓았을 정도로 가파르다. 해발고도가 500m도 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명색이 정상이니 내놓고 자신의 품속으로 들이기가 민망했던가 보다. ! 오는 도중에 에덴동산(알곡성전)에서 올라오는 삼거리(정상에서 1.5km정도 떨어진 지점)를 만났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명지지맥 상에 있는 빗고개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지만 지맥답사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무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사진촬영이라고 해뒀을 리가 없다.



정상에 다와 갈 무렵 바위지대를 만났다. 그래봤자 커다란 바위 몇 개가 일렬로 누워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오늘 산행에서 처음 만난 귀한 바위였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마침맞게 물결무늬를 하고 있는 바위의 생김새까지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위는 또 다른 생명을 품고 있었다. 영양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면서 말이다. 조그만 난관에도 곧잘 좌절해버리는 인간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초입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군()의 시설물이 정상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니 교통호(交通壕)였던 것이 참호(塹壕)로 발전했으니 오히려 더 강화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있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주던 보루가 평화라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젠 아픈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드디어 주발봉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40분 만이다. 정상은 뽈록하니 솟아오른 분지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모양새가 밥주발을 빼다 밞았다고 해서 주발(周鉢)’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으니 내 수양이 그만큼 부족했음이리라.



넓지도 높지도 않은 봉우리에는 여러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평군에서 세워놓은 정상표지석이다. 밥주발을 형상화했는데 여간 앙증스럽지가 않다. 그밖에 삼각점과 이정표, 등산로안내도는 물론이고 산 입양사업안내판과 공청안테나 등도 보인다. 조금은 너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정표(발전소고개 2.2/ 가평역 6.4)도 눈길을 끈다. 아까 보았던 이정표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올레길용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양쪽에 표시된 지명의 위에다 가평올레길 6코스라는 용도를 보무도 당당히 올려놓았다. 참고로 가평올레길이란 가평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건강과 문화를 함께 얻을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둘레길이다. 10개 코스 118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평의 자랑인 북한강 수변(水邊)은 물론이고, 관내 산골·농촌마을, 명산·계곡, 호수 등이 포함됐다. 가평군이 자랑하는 수려한 경관과 생태자원, 역사와 문화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왕에 세워놓은 시설물이니 등산로 안내판도 한번 살펴보자. 들머리는 가평역, 우리가 올라온 코스이다. 이후는 발전소고개와 호명호수, 기차봉, 호명산을 거쳐 청평역까지 이어지는데 거리는 총 16.6, 모두 걸으려면 7시간 정도가 걸린단다. 그게 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발전소고개에서 상천역으로 하산하면 된다. 이 경우 거리가 12.4로 줄어든다.



조망이 터지는 북쪽 방향에는 전망데크를 배치했다.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가평읍내와 북한강의 풍광이 일품이다. 가평읍내 너머 멀리로는 경기 제1봉인 화악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읍내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물론 보납산과 물안산, 마루산일 것이다.



주발봉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쉼터의 기능을 겸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다 평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평상의 두 면에는 벤치를 놓아 식탁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막걸리 한잔 앞에 놓고 신선놀음하기에 그만이지 싶다.



다시 길을 나선다. 1시간 반이나 쉬었으니 피로도 다 가셨다. 다만 청평역까지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되어버린 시간이 좀 아쉬울 따름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헬기장을 만난다. ‘H’자를 만들기 위해 깔아놓은 보도블록(步道block)이 새것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새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정상의 시설물들을 설치할 때 말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느낌도 매우 포근하고 아늑하다. 흙산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벌목(伐木)을 해놓은 탓에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하나같이 오른쪽으로 열리는데 아까 정상으로 오르면서 보았던 불기산과 대금산, 약수봉은 몰론이고 이번에는 정우산과 깃대봉, 축령산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호명산을 바라보며 산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내 고민에 빠져든다. 청평역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상천역으로 하산할 수밖에 없는데, 능선을 벗어나는 지점을 어디로 삼아야 할까를 놓고 말이다. 결론은 발전소고개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났다. 도중에 상천저수지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발견했지만 길의 흔적이 너무 희미했기 때문이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에메랄드빛 하늘이 펼쳐진다. 가을이 완연하다는 느낌이다. 하긴 한로(寒露)가 이제 열흘 밖에 남지 않았으니 누가 뭐래도 가을 아니겠는가. 농부들은 가을이 깊어져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할 것이고 말이다. ! 그러고 보니 설악산의 단풍이 오늘(928) 시작된다는 뉴스도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 보다. 집사람의 눈이 밝은 덕분이지만 그 귀하다는 노루궁댕이버섯을 땄으니 말이다. 불로장생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영지버섯서너 개와 1도 넘는 잔나비걸상버섯(Elfvingia applanata)’도 땄다. 항암효과가 있다는 상황버섯과의 버섯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가평역에서 집사람과 주고받았던 얘기가 생각난다. 광화문에서 아베에게 미안합니다.’를 외치던 여자가 지나가기에 재수 없다며 침을 뱉는 나에게 액땜 했다고 생각하라던 집사람의 충고를 그냥 흘려버렸는데 그 매국노가 액땜 치고도 제대로 된 액땜이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반대방향에서 오는 등산객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비켜 지나간다. 호명산 쪽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우리들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다. 이미 네 시간을 넘긴 시점인데도 처음으로 만난 등산객인 걸 보면 주발봉이라는 곳이 그만큼 인적이 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근 호명산과는 달리 입소문을 덜 탔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 이 근처 능선의 양쪽은 경사가 매우 급한 비탈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딴판이다. 한쪽은 잣나무 숲이 빽빽한데 비해 다른 한편은 잡목이 우거졌기 때문이다. 좌우로 갈려 난장판을 치고 있는 요즘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입안이 씁쓸해진다. 아니 기왕에 좋은 산에 왔으니 속세의 생각은 잠시 떨쳐버리기로 하자.



잣나무 숲 향기에 취해 능선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발전소고개이다. 이 고갯마루는 상천마을과 청평댐 가에 위치한 복장마을을 잇는 도로가 지난다. 차량통행도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선지 두 개의 이정표(#1 : 호명호수 1.8, 청평역 8/ 주발봉 2.2, 가평역 8.6, #2 : 호명산 정상6.6/ 복장리방/ 상천역방향/ 주발봉2.2)와 함께 예쁜 팔각정까지 지어놓았는데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서너 분이 둘러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사이클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진 기념비도 보인다. ‘18회 아시아 여자 사이클 선수권대회’5회 아시아 여자주니어 사이클 선수권대회‘, 그리고 ’1997.9.2.-9.6‘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걸로 보아 그 기간 중에 열렸던 사이클 대회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젠 낙석방지시설 설치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청평역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구불구불하다. 단풍나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미 식상해져버린 벚나무 가로수길이 아닌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 단풍나무들이 울긋불긋한 가을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오길 30분여 만에 청평댐입구 삼거리에 이른다. 호명호수와 복장리, 그리고 상천리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로 버스정류장은 호명호수 제1주차장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카페와 식당, 거기다 펜션까지 줄줄이 늘어서있는 이곳은 유원지로 틀을 잡은 모양새이다. 계곡을 끼고 있는데다 호명호수를 찾는 관광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닭요리 전문점이 눈에 띄자 최군이 전화부터 걸고 본다. 식사를 마친 후에 상천역까지 태워다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흔쾌한 승낙과 함께 들어선 식당은 돌쇠네(TEL : 031-584-5382)‘. 더덕구이, 더덕주물럭, 더덕닭갈비등 더덕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식당인데 서브 메뉴로는 양푼보리밥과 막국수, 감자전, 양평막거리를 내놓고 있었다. 우린 토종닭 더덕백숙을 시켰는데 더덕향이 울어난 국물이 일품이었다. 술국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물김치 등 기본으로 깔아놓은 밑반찬의 숫자나 맛도 훌륭했다. 그 덕분에 우린 소주를 각기 두 병씩이나 마시게 되었지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경춘선 전철, 상천역

날머리인 상천역까지는 식당 주인아저씨가 자신의 승용차로 태워다 주었다. 그렇다면 이 아저씨는 주인마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돌쇠가 분명하다. 그것도 끝내주게 주인마님을 잘 모시는 사내일 게고 말이다. 상천역까지 오는 동안 우리와 주고받았던 스스럼없는 얘기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30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1시간 40분을 쉬었으니 실제로는 3시간 50분을 걸은 셈이다.


태화산(泰華山, 642m)-마구산(馬口山, 595m)-정광산(正光山, 563m)-노고봉(老姑峰, 578.2m)

 

산 행 일 : ‘19. 4. 27()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과 용신시 처인구 모현면·양지면의 경계

산행코스 : 백련암 입구 버스정류장백련암태화산마구산마락산(475)패러활공장휴양봉벌덕산정광산노고봉상림1리 버스정류장(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곤지암에서 양지면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 옆에 위치한 태화산은 규모가 작아 어느 방향에서 산행을 시작해도 3시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산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태화산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백마산과 용마봉, 발이봉, 노고산, 정광산, 마구산, 태화산 등 광주산맥의 일곱 산을 종주하는 게 보통이다. 우리도 이 가운데 태화산에서 노고산까지를 걸어보기로 했다. 이 구간에는 휴양봉과 벌떡산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산이 2개가 더 포함되어 있는데, 이 모든 산들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하지만 큼직큼직한 바위들을 많이 품고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바윗길도 만난다. 특히 일부 산들의 정상은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산행들머리는 백련암입구 버스정류장(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산 18-2)

오늘도 근교산행이다. 수도권 전철계통의 간선철도인 경강선(京江線 :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환승)의 곤지암역에서 내린 다음 곤지암천을 건너 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이어서 추곡리로 들어가는 시내버스(37번 계통)를 타고가다 백련암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하지만 운행간격이 너무 길다는 단점이 있으니 출발시간을 미리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승용차를 이용했다. 곤지암 공용주차장에다 주차시킨 다음 길 건너편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1010분에 출발하는 추곡리행 버스를 탔다.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 오른편에 버스정류장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참조하면 되겠다. 탐방로 왼편에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주택가가 끝났음에도 길은 계속해서 포장길이다. 백련암을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 길이 수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포장만 되어있을 따름이지 경사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출력이 약해진 노후 승용차는 오르지도 못할 것 같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백련암의 주차장이 나온다. 꽤나 넓어 보이지만 주차된 차량은 기껏 한 대에 불과하다. 백련암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현수막이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하겠다.



이제부터 길은 비포장으로 변한다. 길이 곧지도 못하다.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다는 얘기일 것이다. 백련사를 찾는 신도의 숫자가 적은 이유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길가에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궤도(軌道)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백련암(白蓮庵)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23, 산행을 시작한지는 43분 만이다. 백련암은 산자락을 가득 메운 거대한 바위들 사이의 작은 틈새에 자리 잡았다. 그 터가 하도 좁다보니 전각들을 한 곳에 모을 수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비탈을 깎고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든 다음 각 전각들을 나누어 배치했다. 참고로 절간에는 장군수라는 유명한 샘물이 있다고 한다. 물맛이 뛰어나다고 해서 찾아봤지만 복이 없어서인지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백련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고려 충숙왕 때 일련선사(日蓮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는 일련암이라 하였으나, 1387(우왕13)에 승려 해안이 중건하고, 일련선사의 부도와 3층 석탑을 건립한 뒤 백련암으로 개칭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된 부도(浮屠)를 보유하고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로 낮은 받침을 두고,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양새이다. 부도와 함께 세워진 3층 석탑은 1925년 홍수 때 산사태로 매몰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사찰의 맨 위쪽, 그러니까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에 자리한 산신각은 꼭 올라가볼 것을 권한다. 가건물처럼 생긴 전각이야 보잘 것이 없지만 앞마당에서의 조망만은 뛰어나기 때문이다. 추곡리 너머 도척면의 좁은 들과 낮은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참고로 도척하면 도둑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춘추시대의 도척(盜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도둑에게도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자신을 설득하려온 공자(孔子)를 위선자라고 꾸짖으며 내쫓았던 인물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도척면은 도척(都尺)’을 쓴다. 백제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할 때 자로 재고 또 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절간을 다 둘러봤다면 또 다시 산행을 나설 차례이다. 들머리는 요사채의 뒤에서 찾아야 한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의 반대편을 살펴보면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산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0m쯤 오르면 만나게 되는 능선에서 이정표(태화산0.38/ 추곡리 마을회관1.39/ 추곡저수지1.32/ 백련암0.04)를 발견했다면 제대로 길을 찾은 셈이다.



오른편 능선을 따라 태화산으로 향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비록 크진 않지만 바위들을 만날 때면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얼마쯤 올랐을까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널찍한 정규등산로는 정면으로 곧게 나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우린 오솔길로 들어섰고, 잠시 후에는 좌우로 길이 나뉘는 능선에 올라선다. 오른편은 작은 안나의 집(노인 요양시설)‘에서 올라오는 등산로, 태화산의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KT의 송신시설이 나타난다. 태양광집열판을 너절하게 매달고 있는 것이 자체발전으로 전원을 충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 누군가 정상석이 세워져있는 자리가 본래의 정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가 말한 옛 정상이 이곳을 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하기를 이동통신의 송신탑이 들어서면서 정상을 빼앗겨버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철조망까지 둘러쳐졌다고 했다. 지금은 그 양쪽이 열려있지만 말이다.



통신시설을 빠져나오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태화산 0.20/ 백련암 0.22/ 은곡사 1.60)에서 아까 헤어졌던 등산로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태화산 정상에 올라선다. 백련암에서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정상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정상표지석 외에도 태화산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과 이정표(추곡리, 정광산/ 병풍바위, 백련암)가 세워져 있다. 사각의 정자와 꽤 많은 벤치도 보인다. 아예 쉼터로 꾸며놓은 듯한 모양새이다. 품격에 걸맞는 대접이라 하겠다. 이곳 태화산이 광주팔경(廣州八景)‘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관광객의 설문조사와 관계전문가의 의견수렴 등을 거쳐 선정된 광주팔경에는 1경 남한산성, 2경 분원도요지·팔당 물안개공원, 3경 경안천 습지생태공원, 4경 앵자봉·천진암, 5경 무갑산, 6경 태화산, 7경 경기 도자박물관, 8경 중대 물빛공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구산으로 향한다. 말뚝 모양의 이정표(추곡리, 정광산/ 백련암, 병풍바위)가 가리키고 있는 정광산 방향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20m쯤 걷자 널찍한 마당바위가 나타난다. 이 거대한 바위는 나무계단을 설치해 아래로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그것도 두 개나 연속해서 놓았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서자 추곡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마구산1.20/ 추곡리2.14/ 태화산0.50)가 나온다.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광주시와 용인시의 경계선을 따른다. 태화산은 온전히 광주시 땅인 반면 나머지 다섯 산은 이웃인 용인시와 사이좋게 어깨를 마주대고 있기 때문이다.



길고 가파르게 내려서던 산길이 오름짓을 잠깐 하더니 헬기장에 올라선다. 태화산에서 10분쯤 되는 지점이다. 바닥의 무늬가 아직도 선명한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삼각점(이천 11)이 설치되어 있다. 위도와 경도 외에도 이곳의 높이가 561.8m라는 것까지 적어놓았다. 국가기본측량에 의해 결정된 지리좌표일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완만해진다. 경사가 거의 없다싶은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내려가면 안부에 이른다. 이어서 조금은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따라 15분 정도를 오르자 삼거리(이정표 : 마구산0.11, 마락산 1.04, 백마산 9.05/ 추곡리1.50/ 태화산1.60)가 나타난다. 왼편은 추곡리에서 올라오는 길, 마구산은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커다란 바위들이 쌓여있는 모양새의 마구산(馬口山)’이 고개를 내민다. 태화산을 출발한지 45,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45분이 지났다. 정상으로 오르는 바윗길이 위험스럽게 보였던지 용인시에서는 데크 계단을 놓아 안전을 도모했다. 계단을 오르는데 검정콩알처럼 생긴 배설물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게 눈에 띈다. 함께 산행을 하던 최군의 말로는 인근에서 키우는 염소의 흔적일 것이란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사슴의 배설물이었다. 사슴농장을 빠져나온 두 마리의 사슴이 자연에서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데크를 깔아 너른 공간을 조성한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정광산4.5/ 영화마을8.2) 외에도 마구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이왕에 올랐으니 산에 대한 내력도 알아두라는 모양이다. 원형의 식탁도 놓아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도록 했다. 그러면 안내판을 참조해가며 마구산(馬口山)’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 보자. 마구산의 옛 이름은 말아가리산이라고 한다. 정상의 바위가 마치 말이 입을 벌린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도 포곡읍의 유운리(에버랜드 부근)에서 보면 말머리 모양으로 나타난단다. 산의 높이는 595m, 용인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광교산(光敎山·582m)보다 13m나 높다. 그래서 최근에는 용인 제1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름도 되찾아 주었다. 지역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말아가리산이란 옛 이름을 찾아냈고, 용인시에서는 정상에다 마구산이라고 적힌 커다란 정상석까지 세워놓았다. ‘아가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뒤편, 그러니까 동쪽엔 태화산릉이 웅장함을 내세우고 북쪽 정광산 쪽 광주산맥은 거침이 없다. 서쪽으로는 포곡읍 너머 인자해 보이는 석성산 그리고 용인시내 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정광산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시작부터 맞닥뜨리는 산비탈에는 긴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다음은 침목계단이다. 그 가파름이 조금 누그려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잠시 또 다시 나타나는 나무계단, 이어서 또 다른 침목계단이 줄을 잇는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23분 정도를 진행하자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이정표(정광산2.64/ 금어리(용인)2.10/ 상림리(시어골)1.30/ 마구산0.80) 외에도 원형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오래지 않아 그 고생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기 때문이다.



봉우리에는 무인산불감시탑과 함께 삼각점(이천 463)도 설치되어 있다. 그래선지 지도에는 지명 대신에 삼각점과 높이(475.1m)만 표시되어 있다. 이름이 없는 봉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마락산으로 표시하는 지도도 눈에 띈다. 아까 마구산에서 만났던 이정표의 마락산도 역시 이곳을 이르는 지명이었을 것이다.



내려서는 길은 사나왔던 기세를 많이 누그러트렸다. 그런 빈틈을 산벚꽃이 비집고 들어왔나 보다. 꽃망울을 활짝 연 벚꽃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늘어서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터널을 헤치고 나오자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가 나온다. 이정표(패러이륙장0.3, 노고봉 2.9/ 매표소2.2/ 마구산2.5)와 구호지점표시목(2·3, 휴양림)으로 보아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자연휴양림에 이를 것이다.



임도를 따라 10분쯤 오르자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나타난다. 넓은 임도에 지프차까지 닿을 수 있는 이 활공장은 용인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활공장이라고 한다. 문수봉 활공장이나 삼봉산 활공장에 비해 착륙장이 좋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단다. 그나저나 민둥산처럼 생긴 활공장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바람에 맞춰 이륙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륙에 성공한 몇몇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 인간이 창공을 나는 모습은 정말 신기하고 멋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하늘을 나는 그들이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다.




조팝나무와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꽃길을 지나자 바윗길이 시작된다. 웅장하지도 그렇다고 위험하지도 않은 바윗길이지만 바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는 구간도 있다. 그래선지 안전로프를 여러 곳에 매달아 놓았다. 가끔은 잘 생긴 바위도 눈에 띄니 보는 재미까지 갖춘 구간이라 하겠다. 지도에 형제바위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는데 이 부근을 이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아래와 같은 억척스런 삶도 만난다. 바위의 갈라진 틈새에 뿌리를 내린 저 나무는 과연 어디에서 얼마만큼의 영양분을 공급받을까?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자라고 있는 나무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워본다.



바위지대가 끝나면 능선은 다시 육산(肉山)으로 돌아가고 그 끄트머리에서 휴양봉(520m)’을 만난다. 활공장에서 15분 거리이다. 바위무더기로 이루어진 꼭대기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휴양림주변 조망안내도와 두 개의 평상을 배치했다. 요 아래에 있는 용인자연휴양림에서 세웠다는 정상표지석도 보인다. 참고로 다음(Daum) 지도에서는 이곳을 큰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혹시 휴양림을 만들면서 봉우리의 이름을 바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요 아래에 있는 자연휴양림은 물론이고 포곡읍과 모현읍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경안천을 낀 마을들 멀리 향수산과 문형산이 또렷하다. 그 오른편에 있는 광주의 산들까지 시야에 잡힌다.



휴양봉을 지나면 산책삼아 걷기 딱 좋은 힐링 로드로 변한다. 보드라운 흙길이 대부분인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팔라진 길을 잠시 오르면 이번에는 벌덕산이다. 휴양봉을 출발한지 15분 만이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119에서 설치한 구호지점표시목(1·4, 휴양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표시목의 하단에 벌덕산이라는 지명을 적고 그 아래에 이곳의 높이인 475m를 표시했다.



정광산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서니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놓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 안부까지 내려섰다가 반대편으로 짧게 오르면 웃자란 잡초만이 무성한 헬기장이다.



잠시 후 복사꽃이 만발한 곳에서 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되는 안부삼거리(이정표 : 정광산0.7/ 밤티골매표소2.2/ 마구산4.2)를 만났다싶으면 산길은 많이 가팔라진다. 이곳도 역시 밧줄난간을 만들어 오르내리는 탐방객들을 돕게 했다.



그렇게 23분을 진행하자 정광산(正光山)’에 올라선다. 물론 벌덕산을 출발하면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에는 왕산초등학교졸업생들이 만든 자그만 판석(板石)이 바닥에 심어져 있다. ‘정광산이라는 지명과 함께 이곳의 높이인 563m를 적어 넣었으니 일종의 정상석이라 하겠다. 그 뒤에는 정광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노고봉0.5/ 자연휴양림1.7/ 벌덕산0.75)가 버틴다. 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되는 길이 이곳 정광산에서 나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젠 마지막 봉우리인 노고봉만 남았다. 노고봉과 이곳 정광산은 큰 오르내림이 없는 밋밋한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것도 보드라운 흙길 일색이다. 그래서 노고(老姑)’라는 지명에 산()이 아닌 봉()이 붙었나보다.



정광산을 출발한지 17분 만에 도착한 노고봉(老姑峰)은 여러 시설물들로 복잡하다. 널따란 공터에 정상석은 물론이고 119의 구호지점표시판과 말뚝 모양의 이정목(백마산5.5/ 도웅리2.7/ 태화산5.5)이 세워져 있다.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는가하면 정성들여 쌓아올린 돌탑도 보인다. 원형 식탁과 함께 두어 개의 벤치도 놓여있다. 숫제 종합 쉼터로 꾸며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젠 하산만 남았다. 하산은 상림리 방향인 오른쪽 능선이다. 들머리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얼음골곤지암로 적혀있으니 참조한다.



산길은 능선을 따른다. 능선의 왼편은 곤지암컨트리클럽이 들어서있다. 때문에 산길은 골프장에서 쳐놓은 철조망을 따라 나있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되는 570m봉은 원래 길이 둘로 나뉘던 지점이다. 하지만 골프장에서 쳐놓은 철조망에 가로막혀 도궁초등학교로 연결되던 등산로는 이제 금단의 길이 되어버렸다.



하산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몸을 의지할만한 안전시설도 눈에 띄지 않으니 그저 최대한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조심조심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간이라 하겠다.



그렇게 30분쯤 내려오자 진행방향에서 325m봉이 얼굴을 내민다. 경사가 가팔라 고생께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맞게 길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드디어 이곳 안부(다음 지도에는 질마고개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에서 철조망과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길의 형편이 나아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봉우리를 넘지만 않을 따름이지 경사가 가파른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전로프를 매달아놓아 몸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0여분쯤 내려왔을까 주변이 온통 다래넝쿨이 우거진 원시의 숲으로 변한다. 이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새로 돋아난 보드라운 잎들이 그녀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었나보다. 부지런히 숲속을 들락거리며 다래순을 따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내려가자 임도가 나온다.



산행날머리는 상림1리 버스정류장(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286)

임도 주변에는 잘 지어진 고급 전원주택들이 곳곳에 들어서있다. 임도 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린 개울도 보이는데 흐르는 물도 넉넉해서 작은 폭포와 소()들을 여럿 만들고 있다. 전원주택이 들어서기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그렇게 15분쯤 더 걷자 상림1리 버스정류장이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1시간을 쉬었으니 실제로는 5시간을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