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혈산(風穴山, 485m)-관모봉(冠帽峰, 585.5m)-곰넘이봉(610m)

 

여행일 : ‘21. 2. 13(토)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과 영중면의 경계

산행코스 : 풀빛농원(이동숯불갈비)→잠수교→개머리골→풍혈산→관모봉→곰넘이봉→헬기장→진불암갈림길→진불암(소요시간 : 약 11km/ 5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코로나-19’에 함몰 당해버린 요즘은 방콕이 대세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근교산행 정도가 가능하다고나 할까. 그러던 차에 최군의 전화를 또 받았다. 이번 주말에도 시간이 난다는 것이다. 그가 미답이라며 추천한 산은 관모봉. 2주 전에 올랐던 관음산의 건너편에 위치한 산봉우리이다. 그러면서 같은 능선에 있는 풍혈산과 곰넘이봉까지 합해서 답사를 해보잔다. 능선의 끝에 있는 금주산은 5년 전에 함께 올랐었다면서 말이다. 다만 경사가 가파른데다 거칠기까지 해서 고생은 좀 할 것이란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험한 산이었다. 시작부터 길을 찾지 못해 주능선에 오를 때까지 길을 개척해가며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나타나는 봉우리마다 가파르기 짝이 없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거기다 곰넘이봉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으니 ‘고진감래’라는 멋진 고사성어도 남의 집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일부러는 찾아갈 필요가 없는 산이라 하겠다.

 

▼ 산행들머리는 ‘풀빛농원’(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33)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다가 ‘성동삼거리’에서 우회전 37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풀빛농원’에 이른다. 풀빛농원이라는 상호로 2개의 식당(순두부집 및 이동숯불갈비)을 열고 있었는데, 타고 온 차량은 음식점 앞 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대신 산행을 마치고 저 식당에서 닭백숙으로 뒷풀이를 할 예정이다. 참고로 ‘성동리(城洞里)’라는 이곳 지명은 궁예(弓裔)가 건국한 태봉(泰封) 시절, 이곳에 성(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큰 재(山) 아래 있다고 해서 ‘잣골’이나 ‘잿골’ 또는 ‘백곡’이라고도 불리었단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모봉만 콕 찍어서 오르지는 않는다. 대신 금주산과 곰넘이봉을 포함시켜 종주산행을 하는 게 보통이다. 이때 사용하는 들머리와 날머리는 금룡사와 양문산업단지가 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린 관음산의 대표 들머리인 ‘파주골순두부’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풀빛농원’을 들머리로 삼았다. 지도에서 ‘△103.5’로 표기된 지점 근처인데, 영평천을 건넌 다음 일동면과 영중면의 경계를 따라 풍혈산을 오른 다음 관모봉과 곰넘이봉을 거쳐 희망봉까지 가볼 계획이다. 그러다 힘에 부칠 경우 중간에서 내려오면 될 일이고 말이다.

▼ 풀빛농원 건너편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영평천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입구에 물놀이나 수영, 낚시를 금한다는 119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영평천은 잠수교를 이용해 건넌다. 건너편 산자락에 터를 잡은 ‘포천 원시림캠프300’에서 만들어놓은 다리가 아닐까 싶다. 폭우로 인해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날을 빼면 1년 중 300일 정도만 캠핑이 가능하다는 캠핑장이다. ‘캠프300’란 이름도 그런 이유에서 붙여졌단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영평천의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서슬 시퍼런 층암절벽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그게 영평천의 맑은 물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이 근처에 풍혈산 유원지가 있다고 했는데 저런 경관이 있기에 가능했지 않나 싶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캠핑장 진입로와 헤어져 오른편 계곡으로 들어간다. 계곡 초입에 사용 불가능한 간이화장실이 흉물처럼 서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참! 다음의 지도에 이 골짜기가 ‘개머리골’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초반에는 길이 잘 나있었다. 개머리골 일대의 사방사업을 위해 개설한 임도가 아닐까 싶다. 시행청인 서울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구호지점표지판(다아 : 8109-0200)도 보인다. 하지만 사방댐을 지나면서부터는 자갈밭으로 변해버린다.

▼ 계곡으로 들어선지 15분쯤 되었을까 교각처럼 생긴 구조물이 나타난다. 폭우 때 발생할 수 있는 산사태를 대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 우리는 이 구조물 근처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길이 나있었던 것은 아니다. 광야에서 길을 묻듯이 길이 찾아 헤맸을 따름이다. 참! 일부 지도에는 계곡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다 왼편 산자락에서 들머리를 찾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풍혈산 정상의 정복은 포기해야만 한다.

▼ 아무리 찾아도 길이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이웃 산자락으로 옮겨갔으나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최군은 가파른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길이 아니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는 길이 없으면 만들면서 가면 된단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 할퀴고 찔리다 못해 따귀까지 맞아가며 30분 정도를 오르자 한숨 돌리기 딱 좋은 곳이 나타난다. 임도의 흔적도 보인다. 주변에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는 걸로 보아 사방사업 때 만든 임도인 모양이다.

▼ 하지만 능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가팔라진다. 그것도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가시넝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그렇게 15분쯤 오르자 군인들이 파놓은 교통호가 나오더니, 곧이어 목이 빠지도록 찾아 헤매던 주능선에 올라선다. 그리곤 이곳에서 성동리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등산로를 만났다. 길은 능선을 따라 제법 또렷하게 나있었다.

▼ 능선에 오르니 경사가 많이 누그러졌다. 아니 아까에 맞먹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또렷하게 길이 나있어 아까처럼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능선에 올라선지 25분.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치고 오르자 벙커가 나타난다. 이렇듯 관모봉은. 아니 포천지역에 소재한 산봉우리들의 대부분은 벙커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내팽개쳐져 있지만, 남북 간의 대치상황이 그만큼 치열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벙커를 우회해서 올라서니 ‘풍혈산(風穴山)’ 정상이다. 지도에 ‘481.0’로 표기된 지점이다. 참고로 풍혈산은 이름 그대로 구멍에서 바람이 솔솔 나온다는 산이다. 여름철에도 시원한 바람이 나와서 6월까지 얼음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구멍은 어디쯤 있을까? 아까 개머리골의 입구에서 크레바스에 가까운 두꺼운 얼음을 만났는데, 혹시 풍혈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서너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표지석’은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고 간 표지기들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개중에는 봉우리의 이름을 잘못 적은 표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정확한 지명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 다음 등정지인 관모봉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나 길이 나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었다.

▼ 길이 여유로워지자 시선 역시 자유스러워지나 보다. 단생산사(團生散死). 즉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풍경까지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을 우리는 금과옥조로 삼고 살아왔다. 분열은 사회를 멍들게 하지만, 단결은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버린 요즘은 ‘모이면 위험하고 흩어지면 안전하다’가 대세가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멀리 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다들 힘들겠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우리들이 헤치고 나가야할 숙제일 것이다.

▼ 풍혈산을 내려선지 15분쯤 되는 곳에서 산행 중 처음으로 이정표(관모봉↑ 0.8㎞/ 독지골약수터→/ 파주골↓)를 만났다. 오른편은 양문산업단지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이내 능선으로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활엽수 낙엽이 하도 많이 쌓여 걷기조차 불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임도의 방향도 관모봉과는 어긋나가고 있었다.

▼ 산길은 이후로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서 이어진다. 가파르다는 표현이 어울리나 그렇다고 버겁지도 않는 정도의 산길이다. 그건 그렇고 능선은 이렇게 움푹 파인 곳들이 많았다. 아니 능선의 모든 봉우리들이 모두 이런 교통호들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능선을 걷는 게 만만치가 않다. 교통호의 바닥이 울퉁불퉁한데다 낙엽까지 수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통호의 양 옆을 따르자니 좁고 비탈져서 이 또한 만만치가 않다.

▼ 풍혈산을 내려선지 40분. 벙커가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정자처럼 생긴 초소가 나타난다. 군사시설이 산봉우리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관모봉’이다. 생김새가 벼슬아치들이 쓰던 관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깃대봉’이란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이름처럼 일제 강점기 때 세부 지적측량을 위하여 이곳에 깃대를 꽂았었다고 전해진다.

▼ 정상은 초소 등 온갖 군사시설이 널브러져 있을 뿐, 가장 중요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동면사무소에서 세웠다는 이정표(금주리↑/ 양문리→/ 파주골↓)가 이곳이 관모봉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마에다 ‘관모봉 585m’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아 정상표지목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참! 정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 적힌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었다.

▼ 관모봉(冠帽峰)은 산의 모양이 갓처럼 생긴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관모(冠帽)란 조정의 백관들이 쓰던 모자이다. 그런데 이 모자의 양 옆에는 매미의 날개를 형상화한 장식물이 달려있다. 관직에 머무르는 동안 매미의 다섯 가지 덕(德)을 거울삼아 덕이 있는 정치를 펼치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 관모산은 그런 목민(牧民)의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진나라 시인 육운(陸雲)이 한선부(寒蟬賦)에서 말한 매미의 오덕(五德)은 이렇다. 머리에 홈처럼 파인 줄이 지혜를 상징하는 갓끈과 비슷하니 첫째 덕목인 '문(文)'이요, 나무의 수액만을 먹고 자라 잡것이 섞이지 않았으니 둘째 덕목인 '청(淸)'이다. 다른 곡식을 축내지 않으므로 염치가 있으니 셋째 덕목이 '염(廉)'이고, 살 집을 따로 짓지 않아 검소하니 '검(儉)'이 그 넷째 덕목, 계절에 맞춰 오고 가니 믿음이 있기에 다섯째 덕목인 '신(信)'이 되는 것이다.

▼ 환기구 아래에는 군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내부반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식당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보인다. 경계용의 초소를 넘어 영구 주둔지였던 모양이다.

▼ 봉우리를 둘러싼 잡목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버리기는 하지만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미세먼지에 가로막힌 오늘은 그 윤곽만 희미하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 다음 답사지인 곰넘이봉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이건 숫제 낭떠러지다. 스틱으로 중심을 잡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 나무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엉덩이를 땅에다 대고 미끄러져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엉덩이를 땅에다 대고 내려오다 괜찮은 풍경을 만났다. 수십, 아니 수백 년은 먹었음직한 나무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서 내려왔더라면 눈에 띄지도 않았었을 테니 이런 걸 보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가 보다.

▼ 이후로는 바윗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흙으로 된 능선에 바위가 놓여있는 모양새라서 우회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저 주변의 잘 생긴 바위들을 눈요기 삼아 걷기만 하면 된다. 이 구간도 크고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게 됨은 물론이다.

▼ 요런 바위 군락은 아예 우회를 해버린다. 그러다보니 가파르게 내려서야 했지만 그렇다고 위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 바윗길을 걷거나 바위를 넘는 곳이 있는가하면 아래처럼 바위 사이를 통과해야만 하는 곳도 있다.

▼ 모두가 다 바윗길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전형적인 육산을 하나 넘기도 한다. 이즈음에서 오른편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임도가 보이기도 한다. 양문리에서 ‘새닫이고개’로 올라오는 임도가 아닐까 싶다.

▼ 그렇게 35분쯤 진행하자 헬기장처럼 널따란 공터에 내려선다. 맞은편 산비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물도 구축되어 있다. 새내기고개, 세내지고개 등 지도마다 이름을 달리하고 있는 ‘새닫이 고개’일 것이다.

▼ 어느 지도는 이곳을 산내지(일동면 수입4리)와 금주리(영중면)를 잇는 고갯마루로 표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장에서 50m쯤 더 걷자 갈림길(이정표 : 금주리↑/ 양문리→/ 관모봉↓ 1.5㎞) 하나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정표는 이 길이 양문리로 연결된다고 표시해 놓았다. 지도를 살펴보니 둘 모두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고을에서 시작된 임도가 모두 이 고갯마루의 바로 아래까지 나있었기 때문이다.

▼ 임도를 잠시 따라다가 또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이때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금주산 7939m)가 눈길을 끌었다. 1천 미터, 아니 7천 미터가 넘는 거리를 Km가 아닌 m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기드믄 미터법 표시여서 낯설었던 모양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이때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타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곰넘이봉’일 것이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열리면서 관음산과 사향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 ‘새닫이 고개’를 지난지 20분쯤 되었을까 흡사 수직굴처럼 지반이 푹 꺼져있다. 누군가는 이 굴을 광산의 흔적이라고 했다. 이 근처에 광산(鑛山)이 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채굴을 위한 갱구는 아니다. 근처에 있었다는 광산으로 인해 생긴 싱크홀(sink hole)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야간 산행이라도 할 경우에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오래내림의 길이가 확대된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무척 가팔라졌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까 올랐던 관모봉보다도 더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여럿 나타난다는 점이다. 집사람이 버거워하는 게 역력한데 큰일이다.

▼ 너무 가파른 곳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굴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봉우리. 즉 밧줄에 의지해서 오른 봉우리가 곧 ‘곰넘이봉’이려니 했다. 하지만 ‘육군’이라고 적힌 군사시설 푯말이 전부이다. 그 흔한 표지기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첨부된 지도의 ‘488.7m봉’인지도 모르겠다.

▼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커다란 바위들이 빈도를 높이고 있는 능선을 따라다보면 또 다른 함몰지도 눈에 띈다. 잠시 후 나타나는 산비탈을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면 벙커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하지만 집사람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던가 보다.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갈수록 멀어진다며 언제쯤 곰넘이봉이 나오느냐고 징징거린다.

▼ 그렇게 25분쯤 진행하자 ‘금주2리 갈림길(이정표 : 금주산↑/ 금주2리→/ 관모봉↓)’이다. ‘수일동’이라는 자연부락인데 금주산과 갈미봉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에는 금주 저수지가 있어 경치가 좋은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정표(금주산↑/ 산내지←/ 관모봉↓)는 이곳이 산내지(수입4리)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산내지(山內地)'란 지명은 금주산의 산골짜기에 살포시 들어앉아 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새내지'라고도 불리며, 와룡암이 있어 ‘와룡암', 고려 때에는 '용곡소'라고도 불렀단다.

▼ 경주에 있는 단석산(斷石山)의 명물인 ’단석(斷石)‘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위도 만났다.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얻은 신검(神劍)으로 내리쳤다는 그 바위 말이다. 아니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둘로 쪼개진 것이 단석산의 바위보다 훨씬 더 잘 생겼다.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나 붙여놓는다면 또 하나의 명품 바위로 탄생될 게 틀림없다.

▼ 얼마쯤 걸었을까 ’곰넘이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오늘 걸었던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답게 엄청나게 가파른 모양새이다. 우리 일행은 그런 오름과의 버거운 씨름을 끝내고서야 겨우 ’곰넘이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주2리 갈림길을 출발한지 25분만이다.

▼ 널찍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 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곰넘이봉‘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이유이다. 아무튼 나는 산행을 마친 다음 그 기록을 하다가 ‘우리산줄기이야기’의 신경수(산경표) 씨가 이곳을 ‘곰넘이봉’이라 부른다는 걸 알았다. 그는 또 오늘 걷고 있는 이 산줄기를 ‘한북금주단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한북정맥이 운악산의 봉우리들을 만들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분기하여 밋밋하게 흐르다가 막바지에서 금주산과 곰넘이봉, 관모봉, 풍혈산 등을 솟구친 다음 영평천의 성동교에서 그 숨을 다하는 21km 길이의 산줄기란다.

▼ 이후로도 산길을 가파른 산봉우리 두어 개를 더 넘는다. 그리고는 ‘폐광지대’라는 ’구호지점표시목(현위치 : 3-2)‘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맞다. 옛날 이곳에는 영중광산이라는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요 아래 마을이 ’금주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근원이다. 이 광산은 일제 강점기에 문을 열어 반세기 동안이나 금을 채굴해왔는데 당시만 해도 금주리는 800여 호나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 산길은 암봉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봉우리 하나를 더 넘는다.

▼ 이어서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폐광지대 표시목에서 15분 거리인데 이곳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정표(금주산↑/ 일동←/ 관모봉 6520m↓)가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면의 이름 대신 ’수입리‘라는 고을 이름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수입리(水入里)라는 지명은 수입천과 영평천이 모두 들어오는 것만 보이고 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산길은 헬기장을 지나면서 한없이 고와진다. 사납기 짝이 없던 능선이 그 기세를 완전하게 누그러뜨린 데다 길 또한 넓고 또렷해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구호지점표시목(현위치 : 2-2)을 만난다. 이번에는 ’기도원분기점‘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오른편으로 3㎞를 가면 기도원이라는데, 계곡을 따라 금주 저수지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 걷기 딱 좋은 능선을 따라 5분 남짓 더 걷자 기산리로 내려가는 삼거리(이정표 : 금주산/ 일동면 기산리 2.0㎞/ 관모봉)가 나왔다. 이곳에서 우린 하산 지점을 놓고 고민에 빠진다. 결론은 하산. 조금만 더 가면 금주산이 나온다고 최군이 입맛을 다시지만 어쩌겠는가. 비단을 수놓았다는 금주산(錦珠山)은 차치하더라도 500m만 더 걸으면 나오는 ’희망봉‘까지도 그림의 떡일 정도로 집사람의 체력이 바닥나버렸으니 말이다.

▼ ’기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약간의 경사마저도 없애버렸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집사람의 발걸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참고로 일동면 면소재지가 있는 기산리(機山里)는 ’금주산(錦珠山)‘이란 이름을 낳게 한 지명이다. 기산리 앞산이라고 해서 금주산에 ’비단 금(錦)‘을 붙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산에서 금(金)이 채굴되면서부터 ’쇠 금(金)‘ 자를 써 금주산(金珠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기산’이란 옛날에 비단을 짜던 직기(織機)인 베틀에서 나온 이름이다.

▼ 내려오는 도중 벤치를 놓아둔 쉼터도 만났다. 일동면 주민들이 그만큼 자주 오르내리는 등산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쯤 되면 삼거리가 기다린다. 왼편은 일동고등학교로 연결되나 우리 일행은 1.0㎞를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진불암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완만한 길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이다.

▼ 날머리는 진불암(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산 32-1)

하지만 이 결정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벌목지를 벗어나자마자 길이 험해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경사가 가팔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은 탓인지 곳곳에서 잡목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가까이를 더 내려가자 진불암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진불암은 일반 여염집에 가까운 모양새이다. 아무튼 오늘은 총 6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5시간 30분. 11㎞ 정도쯤 되는 거리를 걷는데 소요된 시간치고는 너무 길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