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델피(Delphi) 유적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유적.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신탁이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옴파로스(Omphals)’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였고 이후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냈고, 델피는 상업·무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 되었다. 하나 더, 이 성역은 기원전 586년부터 4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4년마다 열리기도 했다. 경기의 승자는, 템피 계곡의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테네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델피에 도착했다. 유적지 앞에 들어선 마을부터 들른 이유이다. ! 델피로 오는 도중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를 스치듯 지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린 송중기와 송혜교가 키스를 하던 종탑을 곁눈질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델피는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에 들른다. 델피와 테르모필레를 둘러본 다음 메테오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델피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협곡을 낀 드넓은 저 평원은 옛날 아폴론의 신성한 땅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에서 길처럼 나타나는 부분은 프레이스토스 강이란다.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단다.

 투어는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도시 델피’, 그런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개방시간 : 08:30-15:30)

 델피성역의 추정 조감도. 입구라 할 수 있는 로만 아고라를 시작으로 리산데르의 기념물, 트로이 목마,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아르카디아 기념물, 헬레니스틱 스토아,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물창고,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보물창고, 코린토스 보물창고, 낙소스 스핑크스, 다각형 옹벽, 아테네 스토아,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로도스의 전차, 아폴론 신전제단,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아폴론 신전, 극장, 서쪽 스토아가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에는 없지만 맨 위에 경기장인 스타디온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델파이의 무덤(the cemeteries of Delphi)’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 위에 놓인 석관(石棺)을 이르는 모양이다.

 델피 유적은 땅속에 묻혀있던 옛 도시를 발굴해 놓은 현장이다. 그러니 유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건 당연. 참고로 델피는 신탁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변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성한 인보동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39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면서 델피라 명명했다.

 첫 만남은 로만 아고라(Roman agora)’. 전형적인 스토아 형식으로, 성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의 담벼락에 바싹 붙어있다. 로마시대 상업과 만남의 장소였고 신전에 바칠 제물 등을 팔던 시장터이다.

 아고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토의와 그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도시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늘 아고라에 모여 정치나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고라가 민주주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장소였다는 얘기다. 여자와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돌기둥을 받히던 기단. 그런데 중앙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곳 그리스는 지진이 빈번한 나라, 그러니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저 구멍에 꽂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신성한 길(sacred way)’을 따른다.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창고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보물창고는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두던 금고다. 각지에서 모인 도시국가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시키니온과 시프니안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sikyonians and siphnians)’라고 한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산토리니가 속한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나라 시프노스(Siphnos)에서도 자신들의 번영을 유지할 방도를 구하며 봉헌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 신탁을 잘못 해석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지만... 하나 더, 시키온은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아르고스왕의 엑세드라(Exedra of the Kings of Argos). 아르고스(Argo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와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왕이나 고위직 관료가 델피를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는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휴식 공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보이오티아인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Boeotians). 보이오티아(Boeotia)는 코린토스 만에 접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였던 테베의 보물창고를 따로 지어놓은 이유는 뭘까?

 메가라 코린토스 등 다른 도시국가의 보물창고도 여럿 눈에 띈다. 하긴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을 받고자 하는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다니 어련하겠는가. 심지어는 신탁을 받으려고 델피에서 1년 넘게 머물기도 했단다.

 문자로 가득한 축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역사는 저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줄 안에 모셔진 저 돌은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한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앙을 배꼽으로 보듯 이곳을 땅의 중심으로 보고,  배꼽 돌을 놓아두었다고 한다(저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두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서로 만나더란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

 아테네의 보고는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寶庫), 2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이 받드는 매우 단출한 건물 형태를 보인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신화 속 영웅들의 무용담도 부조되어 있다. 1904-1906년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단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사진은 내가 찍은 게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아테네인의 열주랑(Stoa of Athenians :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축하하고 아폴론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 뒤에 있는 아폴론신전의 다각형 돌 축대(Polygonal wall)’. 쌓아올린 다각형 바위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 접촉면이 많은데다 틈새까지 보이지 않아 페루 여행 때 쿠스코에서 신기해했던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을 떠올렸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건물의 용도는 대체 뭘까?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보니 ‘Do not touch please’란다.

 아폴론 신전으로 오르는 길, 길가에 늘어서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기단부만 남아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을 경우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신성한 길(sacred way)’은 델피 유적의 구심점인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으로 인도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곳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졌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신전은 길이 60m에 폭이 23m이었다.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는데, 현재는 암갈색 돌기둥 6개와 여기저기 깨진 제단만 어지럽게 남아있어 얼핏 폐허처럼 보인다.

 현재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건축구조였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인 제우스는 쌍둥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피톤(델포이)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이들을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아폴론은 화살로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지명도 피톤에서 델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델포이의 신전은 아폴론의 신전으로 바뀌고, 신전의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게 하였다. 그 후로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아폴론 신전의 맞은편, 안내판은 ‘The altar of Chiots area’로 적고 있었다. ‘치오츠 제단 지역이라는데, ‘Chiots’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지역에는 치오츠 제단(The altar of Chiots)’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The tripod of the Plataeans)’,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동상의 받침대(he pedestal of the statue of Aemilius Paulus)’. 그리고 아탈로스 1세의 스토아(The stoa of King Attalus)’를 포함한다고 했다.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는 저 청동 기둥을 말하는가 보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승리의 기념비이다. 원래 빙빙 꼬여 올라가는 3마리 뱀의 머리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을 올려놓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청동 기둥만 남았다(머리 부분은 1204년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에 의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단다). 아무튼 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약탈당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히포드럼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이곳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동상(The statue of Aemilius Paulus)’은 받침대(pedestal)만 남아있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장군이 피드나 전투(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한 승전기념비로, 전투장면을 부조(상단에) 4각의 빗돌 위에 동상을 올려놓은 형태였으나. 이 또한 동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론 신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Tea Theatre)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2,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단다. 하나 더, 관람석 위로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뒤로도 길이 널찍하니 나있었다. 방향표시석은 이 길을 따르면 ‘Stadium’에 이르게 됨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쫓겨 달리듯이 다녀올 수밖에 없었지만...

 원형극장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리고 가장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들어앉혔다.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고 한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였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하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 도착한 꼭대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된 경기장은 길이 178m에 폭이 26m, 수용 인원이 6,000명인데,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이곳에서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재건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고,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가 되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하나 더, 이 제전의 특징은 다른 제전과는 달리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들른 건 고고학박물관(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탁을 행할 때 무녀가 앉는 자리로 썼다는 삼발 솥단지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피티아라 불리던 무녀는 신경이 약간 마비된 상태에서 유황 성분의 연기(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함유된 가스)까지 맡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절차를 거쳐 받아간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신탁을 받아간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라나?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 높이의 원주(圓柱)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으로, 에게 해의 섬 낙소스 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단다. 이밖에도 아폴론 성역의 보물창고들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건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시국가 아르고스에서 봉헌했다는 쌍둥이 형제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효자 아들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신에게 빌었더니 둘이 함께 죽어 신의 곁으로 가더란다. 당시는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자신 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아르카익 시대(BC8~5C)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웃을 수밖에...

 벽에는 황금머리 황소(The Silver Statue of a Bull)’가 걸려있었다. 기원전 6세기(아르카이크 시대) 이오니아에서 만든 작품으로 은박을 입힌 구리판 세 조각을 연결해 제작했다. 참고로 황소는 현신한 제우스를 상징한단다.

 아폴론과 그의 자매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신상이라고 한다. 금과 상아로 아름답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들이 치장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과 귀거리, 팔찌 등 황금으로 만든 치장물들을 함께 전시해 화려함을 잔뜩 자랑하고 있었다.

 대접처럼 생긴 저 도자기에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하던 비례·대칭의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헌주를 쏟고 있는 아폴론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까마귀와의 이야기, 적색기법의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추가된 흰색과 1.618의 황금 비율이 가미되어 있단다.

 소크라테스로 여겨지는 조각상도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석상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댄서의 원주(The Column of the Dancers)’라는 작품이다. 아칸서스(Acanthus) 잎 조각 위로 아름다운 세 여인이 머리에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를 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 앞에 따로 놓아둔 돌(옴파로스)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안티노우스(Antinoos)’로 적고 있었다. 로마의 다섯 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다.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가 로마에 공헌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의 조각상을 델포이 성역에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델피 박물관의 유물 중 최고로 꼽히는 이니오호스(전차를 모는 전사) 청동상이라고 한다. BC373년 지진 때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상으로는 드물게 오닉스(줄무늬가 있는 대리석)로 된 눈까지 남아있다. BC478 혹은 474년에 있었던 피티안 경기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시실리의 군주 폴리잘로스에 의해 델피에 헌납된 것으로, 옷이 날리지 않게 잡아매어 놓는다거나 굳게 다문 입술, 고삐를 잡은 팔에 보이는 힘줄 등 전차경기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기원전으로 시대를 돌리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렀다. ‘테르모 뜨거운’, 그리고 필레 입구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래선지 여행사는 이곳 노천온천에서의 족욕(足浴)을 그리스 여행 최고의 보너스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우리네 동네 뒷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개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장실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은 따뜻한데다 유황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임은 분명하다. 물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런 명당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만무, 먼저 온 유럽의 젊은이들이 삼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선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 보다는 오가는 외국 나그네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란다.

 그런 외설스러움이 익숙하지 않는 우리네 아낙네들은 하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좋다면서 희희낙락 했지만... 하나 더, 아낙네들은 족탕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며 이끼를 떼서 몸에 바르는 그리스의 민간요법을 귀띔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노천 온천탕에서 자유롭게 온천욕을 한다. 온도가 40도쯤 되는 해수 온천이라는데, 기록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저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에 지쳐가던 집사람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활기찬 반응을 보인다.

 온천 지역에는 스파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난민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3차 페르시아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전적지에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이 적군을 향해 포효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기단에서는 300명의 스파르타 특공대가 용전분투하고 있다. 좌우로 보이는 조형물은 스파르타의 전사 상이지 싶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특공대는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적군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파르타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페르시아군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전투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고, 스파르타 군에게는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은 승리를 거둔 것 이상>임을 상징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난다.

 3차 페르시아전쟁 당시 이곳은 서쪽에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있었고 동쪽은 바다였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은 이곳에서 페르시아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적는다)을 막았다. 그런 불리함속에서도 첫날과 둘째 날의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페르시아의 정예부대 1만이 샛길(산을 넘는)로 쳐들어왔고,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시킨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특공대는 모두 죽는다. 그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 ‘300’으로 만들어졌고, 그들의 무용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델피에는 아폴론 성역만 있는 게 아니다.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김나시온(Gymnasion)’과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인데, 아폴론 성역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난 탐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으로는 아폴론성역(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은 달리듯이 다녀왔는데도)과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했으니 어쩌겠는가. 평생 한번 다녀오기도 힘든 그리스인데,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돌아서며 아쉬움 넘치는 원망을 여행사로 돌리며 델피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