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3구간(내동산 도는 길)

 

여행일 : ‘24. 2. 3()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및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백운면사무소산림환경연구소구신치원구신마을염북마을염북재쉼터점촌마을원외궁마을성수면사무소(거리/시간 : 18.5km, 실제는 산림환경연구소부터 16.18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백운면사무소(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10km쯤 내려오다 백운3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임진로로 들어오면 곧이어 백운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이름(내동산 도는 길)처럼 내동산을 가운데 놓고 반 바퀴쯤 돌아가는 18.5km짜리 구간이다. 덕분에 내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여러 마을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도 여럿 넘는다. 난이도는 중간’.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산림환경연구소부터 걸었다.

 3구간의 출발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다.

 10 : 25. 실제 출발지인 전북산림환경연구소. 임업에 관한 연구와 기술보급, 우량종묘 생산, (산림박물관·수목원·휴양림)운영관리 등을 위해 설치된 전북특별자치도청 소속기관이다. 특히 지역 적응력이 뛰어난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이곳에서 육종 개발한 왕방울은행나무는 상표등록까지 되어있으며, 무궁화 신품종도 국립종자원에 품종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연구소는 내동산(887.9m)의 허리쯤에 들어앉았다. 덕분에 지대가 높아 시야가 툭 트이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청사 앞 잔디밭을 전망대 삼아 조망도까지 설치해 놓았다. 백운면의 들녘너머로 지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을 사진과 대조해가며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좌우로 펼쳐진다.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게 선인무수(仙人舞袖)와 장군대좌의 천하명당을 숨기고 있다는 선각산(仙角山·1,142m)이다. 왼쪽은 덕태산(1,113m), 그리고 오른쪽 저 멀리로 보이는 게 팔공산(1,151m)이다.

 이곳은 고원화목원’. 그럴듯한 이름에 이끌려 단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청사 근처에서 한국 전통정원을 만났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연못과 정자가 전부인 풍경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철이니 야외 식물원은 더 초라할 게 분명하다. 나머지 구역의 구경을 포기해버린 이유다.

 정원의 뒤. 산림욕장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앞에서 진안고원길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6km/ 백운면사무소 2.5km)를 만났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2.5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2017년 문을 연 고원화목원은 식물연구소로 우리나라 식물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위한 곳이다. 전문 원() 23개와 아열대식물원, 자연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1,150종류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고원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구름국화·한라구절초·구상나무 등 우리나라 특산종도 보호되고 있단다.

 반달곰 가족이 손님을 맞는 아열대식물원은 피라미드형으로 지어졌다. 오전 9 30분부터 오후 5 30분까지 문을 여는데, 동절기(10-2)에는 이보다 30분 늦게 문을 열고, 30분 먼저 문을 닫는다.

 온실 내부엔 260여 종 7,000여 본의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1 365일 언제든 활짝 피운 다채로운 꽃을 만나볼 수 있다.

 겨울에 보는 꽃은 호사(豪奢). 웰빙을 넘어선 힐링이다.

 고원화목원은 내동산(萊東山)의 품에 안겨있는 모양새다. 참고로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원구신(성수면 구신리)’ 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다고 한다. 내동산의 명칭은 선인이 노닐었다고 해서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蓬萊)에서 ()’자를 따왔다고 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 광여도에는 내동산(內東山)으로, ‘여지도서에는 내동산(萊東山)으로 표기 돼 있다고 했다.

 10 : 44. 단지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5.1km/ 백운면사무소 3.1km) 고원화목원을 통과하는 구간이 900m임을 알려준다. 내 앱은 1km를 찍고 있다. 볼거리가 없다며 투어를 생략했지만 탐방로를 벗어나 두어 곳을 기웃거렸더니 어느새 그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모양이다.

 10 : 46. ‘상서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현리(德峴里)’ 5개 행정부락(원덕·상서·윤기·동산·내봉)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마을 앞 이정표는 상덕현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행정 단위인 상서마을도 2개의 자연부락(상덕현·서촌)으로 나뉘는데, 그중 상덕현 마을이란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원덕(또는 원덕현)’ 마을로 간다. 예전 마을 어귀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고 해서 장승백이로도 불리는 덕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이때 백운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흘러가는 반송리·동창리·운교리 일대는 300-500m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다른 곳에 비해 평야지대가 넓은 편이다.

 10 : 49. 원덕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신치로 간다. 초입의 이정표가 다음 들르게 될 원구신 마을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구신치로 올라가는 길.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논두렁에는 세 떼를 쫓던 허수아비가 올 가을 찾아올 새로운 풍요를 기다리며 다랑논을 지키고 있었다.

 가슴 아픈 현장도 눈에 띈다. 규모가 제법 큰 축사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가축을 기를 수 없는 뭔가의 이유가 생겼을 것이고, 이를 헤쳐 나가지 못한 농부는 눈물을 머금고 축사의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고원지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겨울 한파가 매섭다는 점이다. 바람도 거셀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주택의 외벽을 두껍게 돌로 쌓았다. 저 정도면 그 어떤 추위도 무서울 게 없겠다.

 11 : 02. 낙엽송 숲속에 들어앉은 구신치를 넘는다. 백운면의 덕현리와 성수면의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불린다. 예전 백운면 사람들이 임실장이나 관촌장을 오갈 때 넘나들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오랜 세월 발길에 닳고 닳은 고갯마루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고갯마루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3.8km/ 백운면사무소 4.7km)는 이곳이 3구간의 인증 장소임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길은 각 구간마다 두 곳의 인증지점이 있다.

 고개 너머에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목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통나무 의자를 배치했다. 구신리 쪽의 시야까지 툭 트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원구신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원구신마을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맞다. 진안고원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고 했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11 : 07. ‘742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임실군에서 들어와 진안군 성수면과 백운면을 거친 다음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이다.

 도로를 80m쯤 걷다가 마을표지석 앞에서 농로로 접어들어 원구신 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구신·염북·장성·시동) 중 하나로 원구신(元求臣)’이란 지명은 구신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11 : 11. 잠시 후 도착한 원구신 마을. ‘구신리라는 지명은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한 후 개성으로 돌아가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신하를 구하는 형국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사진은 마을회관 앞 정자이다. 공동 우물 위에 정자를 올린 게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마을 어귀. 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동뫼라는 나지막한 동산(저 위까지 올라가본 둘레길 도반은 꼭대기에 묘가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모정(茅亭)이 들어앉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낳게 한 기념물이 바로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안내판은 모정 옆에 노적바위가 있다고 적었다. 모정보다도 더 커다란 저 바위를 이르지 않나 싶다.

 저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고 한다.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지금의 내동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이 됐단다.

 동뫼 아래에는 열부 경주김씨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전태익의 처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은 제법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탐방로는 그 물길을 따라 간다. 하나 더. 안내판은 또 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란다. 덕분에 농작물의 수확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나다나?

 이즈음 집사람을 만났다. 출발지인 원구신마을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나는 3km쯤 걸어왔다). ‘혼자가 아닌 함께를 추구하는 그녀답게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1 : 23. 탐방로는 구신천(求臣川)’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간다.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다리(이정표 : 하염북마을 1.6km/ 원구신마을 550m)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구신천을 왼쪽으로 바꿔 차고 간다. 참고로 구신천은 구신리의 내동산 남쪽에서 시작되어 관촌면 방현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1km의 하천이다. 이게 운수·신기리를 지나면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지류들을 보태 몸집을 부풀린 다음 좌산리에 이르면 좌산천(佐山川)’으로 이름을 바꾼다.

 11 : 27. ‘구신천(求臣川)’을 경계로 진안군과 임실군이 나뉜다. 때문에 임실군(관촌면)의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구암교(이정표 : 하염북마을 950m/ 원구신마을 1.1km)’를 만나기도 한다. 그 너머 산골짜기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는 구암마을(운수리)’이 들어앉았다.

 구신천은 공존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에 물길(魚道)을 따로 만들어 물고기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덕분에 하천에서 서식하는 회유성(回遊性) 어류가 인공구조물로 막힌 공간을 쉽게 오르내린다.

 11 : 35. 또 다시 742번 지방도(성백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100m쯤 걷는다. 짧은 거리지만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가며 걸어야 한다. 도로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하염북마을 앞을 지나는 이 도로는 옛날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곳 하염북에 주막이 3개나 있었단다.

 11 : 37. ‘하염북마을 앞 삼거리에서 관촌으로 향하는 742번 지방도(성백로)를 버리고, 성수 방면으로 가는 오른쪽 염상로로 옮긴다. 단풍나무와 철쭉을 가로수 삼은 멋진 구간이다. 하지만 이 구간도 역시 보행로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걸어야 한다.

 인삼 재배단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안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이 재배됐다. 기록상으로도 370년쯤 전, 지금의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진안은 인삼과 사과가 주요 소득원이다.

 11 : 46. 이정표(‘하염북마을에서 650m)가 이제 그만 상염북마을로 들어가란다.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행정단위)으로 아까 지나온 하염북과 이곳 상염북을 합쳐 염북(念北)’이라 하는데, 마을 앞에서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충성스런 느티나무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자나 깨나 임금이 계시는 북쪽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앞은 1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37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진안군 보호수)가 눈길을 끈다. 국난을 맞아 군왕을 생각하여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는 나무다. 임진왜란이 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나무가 스스로 북쪽으로 엎드려 꽃을 피우지 않다가 선조가 환궁하자 스스로 일어나 꽃을 피웠는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 때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이 나무를 충목(忠木)’이라 불렀고, 그늘에 충목정(忠木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 충정을 기려오고 있다고 했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 넣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암시하는 풍물놀이와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몸짓에서 산골마을의 이상향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농로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한다. ‘염북터널로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에 손바닥만 한 다랑논들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이런 골짜기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상들은 논·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저장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11 : 57. 농로는 2차선 도로인 염상로와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는 100m쯤 전방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초입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9.6km/ 백운면사무소 8.9km) 3구간의 절반 조금 넘게 걸었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구신리(백운면) 염북마을과 도통리(성수면) 중평마을을 잇는 6.42km 길이의 임도로 중간에 해발이 543m나 되는 염북재를 넘어야 한다.

 안내판은 차량통행 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폭이 넓은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있어 안심하고 다녀도 되겠다. 차량통행이 빈번한 탓인지 길도 반질반질하게 나 있었다.

 진안고원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이정표나 리본, 화살표(페인트) 등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런 안내판은 옥의 티라 하겠다. 진안고원길의 산악구간을 재구성한 풍경이라는데 얼룩이 져서 애초에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임도는 완만한 편이다. 가끔 가파른 구간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이처럼 평탄하게 이어진다. 임도 초입에서 염북재까지의 거리는 3km. 반면에 높여야 할 고도는 200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산이 깊으니 야생동물이 많을 것은 당연. 멧돼지를 주의하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둔 이유일 것이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을 적어두는 배려가 돋보인다.

 야생동물 포획 틀도 눈에 띈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인적이 드문 진안고원길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많이 만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갑자기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꿩을 보고 놀란 게 전부였다.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벤치도 놓아두었다.

 외길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도 시·종점까지의 거리가 적힌 이정표를 곳곳에 세워놓았다. 덕분에 얼마를 왔고, 또 얼마가 남았는지를 감안해가며 걷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요런 경사로가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길은 굽이굽이 잘도 휘돌아간다. 이래서 내동산 도는 길이라는 3구간의 브랜드가 생겨났지 않나 싶다.

 겨울철 트레킹의 가장 큰 단점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빈 가지만 남은 길가 나무들이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45.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염북재 쉼터에 이른다.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데크로 대를 쌓고 그 위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참고로 이곳은 임도구간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548m를 찍고 있었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6.4km/ 백운면사무소 12.1km)가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3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

 쉼터에서의 조망은 화려했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손바닥만 한 농경지.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뒤로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저래서 이곳 (··)지역을 첩첩산중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능선의 한 지점을 넘는다. 생김새로 봐서는 염북재이지 싶다. 하지만 해발은 쉼터보다 약간 낮은 536m를 찍는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벌목이 끝난 개활지를 눈에 담아가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12 : 58. 두 번째로 만난 임도 안내판. 이정표(성수면사무소 5.5km/ 백운면사무소 13.0,km)가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산이 이렇게 깊은데 심마니가 없겠는가. 산자락을 누비고 있는 심마니들을 만났고, 또 그들이 캤다는 더덕과 도라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초에 문외한 나에게는 더덕이나 도라지 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복분자가 더 관심을 끈다. 이곳뿐만 아니라 임도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복분자 숲을 만난다. 그러니 진안고원길 3구간은 오뉴월에 찾아야 제격이겠다.

 13 : 27. 첫 삼거리를 만나 오른편으로 간다. 같은 임도(중평-염북)이지만 중평안길이란 고유의 이름까지 갖고 있는 구간이다. 이정표는 이제 3.4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성수면사무소에 이른다고 알려준다.

 13 : 28. 100m쯤 더 걷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초입에 방향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도보 여행자의 약속을 되뇌어본다. 먼저 길을 허락해주신 마을과 숲속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렇듯 사유지까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주민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오솔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이라서 내려서는데 부담은 없다.

 13 : 34. 잠시 후 도착한 점촌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3.0km). 법정 동리인 외궁리(外弓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원외궁·안평·신고) 중 하나인 신고마을. 이게 또 신리와 고미동, 점촌으로 나뉜다. ‘점촌(店村)’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요지(陶窯址)로부터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고려 때 청자를 생산했었고, 120년쯤 전에는 옹기(甕器) 가마가 들어섰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이때 귀여운 소품들로 치장된 민가를 지나기도 한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는 진안고원길이다. 하지만 이 구간을 걸으며 묵은 길이란 표현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나만의 오해일까? ‘진안고원길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땔감이나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산길로 코스를 돌려놓은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높이 326m의 능선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통나무계단이 끝 간 데 없이 놓여있는 구간이다.

 13 : 53. 신리저수지 제방으로 내려선다.

 13 : 54. 건너편 관진로(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2.1km)로 올라서서, 종계장(種鷄場)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을 전면에 두고 걷는다.

 14 : 04.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만난 삼거리(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1.6km)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원외궁마을이 놓여있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서면 다른 한 마을이 나오는 게 진안고원길의 특징이다. 추억 속의 내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14 : 12. ‘원외궁(元外弓) 마을에 이른다. 외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외궁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활등성이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렇게 생긴 이름이 활목’, 마을의 위치가 그 활목의 바깥쪽이라고 해서 외궁(外弓)’이 되었다. 여기에 으뜸 원()’자를 보탰으니 외궁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구 밖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원외궁 마을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이라서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마을에 샘을 파지 못하게 했고, 재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구막이 역할을 해줄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가외반로를 따라 안평마을(성수면소재지)’로 간다.

 14 : 21. 외궁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1934년에 문을 열었다는 학교는 현재 20명의 학생이 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건물은 도회지 학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날이 갈수록 주민이 줄어들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종점인 성수면사무소로 가는 길. 중간에 서바이벌 훈련장을 연상시키는 놀이터가 들어서있었고, 화장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어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화장실을 찾아 면사무소 문을 두드렸는데, 당직자로 보이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맞다. 현대는 공공 업무도 서비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14 : 26. 조금 더 걸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6.18Km을 찍고 있다. 절반 이상이 임도나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마주보지 말고 같은 방향을 보자는 집사람. 그런 그녀가 함께 해주었기에 오늘도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