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6코스(몽산포해변 - 연포해변)

 

여 행 일 : ‘25. 4. 12()

소 재 지 : 충남 태안군 남면·태안읍·근흥면 일원

여행코스 : 몽산포해변몽산포항진산리갯벌체험장평화염전용요천안기2리 마을회관용신경로당원용경로당연포해변(거리/시간 : 22.9km, 실제는 14.46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평화의길)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들머리는 몽산포해변(충남 태안군 남면 신장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읍까지 온다. 남문교차로에서 77번 국도(안면도 방면)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남면소재지(신장리)에 위치한 몽산포해변에 이른다. 서해랑길(태안 66코스) 안내도는 여름파출소 앞 해변에 세워져있다.

 몽산포해변에서 연포해변까지 태안반도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북·서진하는 22.9km의 여정. 작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항구와 서해의 갯벌과 염전 등 어촌의 삶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코스이다. 난이도는 별이 두 개(다섯 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몽산포해수욕장.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일원답게 모래가 깨끗한데다 울창한 곰솔 숲을 배후에 두고 있어, 명품 해수욕장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선지 10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바다는 이미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그게 물놀이가 아니라 조개잡이를 하는 진풍경이었지만.

 오늘도 일기예보가 심상찮다. 3시부터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지난 주말 평화의길 때 빗속을 걸으며 고생했던 게 떠올라 비가 시작되기 전에 트레킹을 마치기로 했다. 그렇다고 66코스의 주요 포인트인 몽산포항까지 빼먹을 수야 없는 노릇. 산악회 버스로 이동해 살짝 둘러본 다음 출발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물이 빠져나간 몽산포항(夢山浦港)’은 포구라기보다 해수욕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몽산포항은 쭈꾸미 잡이로 유명한 포구다. 배 한척 당 30에서 60씩 잡아 올리는데, 100% 소라껍질을 이용해 잡기 때문에 쌍끌이 그물로 잡는 타 지역의 주꾸미에 비해 상태가 온전하고, 개펄과 모래가 적절히 조화돼 맛 또한 일품이라고 한다. 하나 더. 포구 앞 갯벌은 해루질 명소로 꼽힌다고 했다. 낙지부터 왕우럭조개(일명 코끼리조개), 소라, 바지락까지 다양하게 잡힌단다. 안목도 언저리에서 해루질 삼매경인 저 사람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수문장을 자처하는 안목도’. ‘오형제섬이란 별칭답게 다섯 개 섬이 공룡의 등처럼 이어져 있다. 일몰과 은하수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고 해서 사진작가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기도 하다. 황홀한 해넘이가 끝나고 어둠이 깔리면 반짝반짝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수직의 별무리가 다섯 섬 한가운데로 거대한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린다나?

 10 : 31. 실제 출발은 진산교차로에서.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비가 시작되기 전에 트레킹을 마치기 위한 결단이다. 이곳에서 바닷가로 나가 서해랑길을 만날 경우 정규코스(22.9km)  15.5km만 걸으면 되고, 그럴 경우 비를 맞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10 : 32. 안면대로(국도 77호선)을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진출입로를 겸한 소로가 나있다. ! 15km쯤 걷겠다는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나버렸다. 교차로에서 남쪽으로 50m쯤 가다 굴다리 근처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바닷가에 이르는데(이 경우 정규코스에서 7.4km쯤 단축하게 된다), 방향을 잘못 잡아 북진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10 : 36. 진산1리 마을회관. ‘망원산(望遠山)’ 남쪽에 자리 잡은 진산1리는 예부터 갬밭, 개천으로 불려온 동네이다. 예전에는 바다에 기대어 살았지만, 지금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야산 개간사업으로 농토를 일군 덕분에 건강한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곳으로 이름을 얻고 있다. 햇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는 진산리 황토밭에서 자란 인삼, 총각무, 고구마, 감자 등은 품질과 영양, 맛에서 전국에서 으뜸으로 꼽힌단다.

 10 : 44. 진산2교차로. ‘용삼굴(龍井洞)’로 들어가는 길목인 굴다리를 스쳐갔다 싶으면 어느덧 진산2교차로이다. 남면과 태안읍의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10 : 46.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굴다리가 나오는데, 이쯤에서 바닷가가 있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조금 더 가다 남산교차로에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평화염전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산1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초입에 위치한 쿠키키즈풀빌라를 참조하면 되겠다. ‘키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에 특화된 펜션이라고 한다.

 사방이 온통 마늘밭이다. 진산리는 원래 바다가 80퍼센트고 농사가 20퍼센트였었다고 한다.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뒤집혔다. 황토 구릉지가 없었으면 턱도 없었을 일이다. 주민들은 이 황토를 하늘이 내린 선물로 여긴다고 했다. 작물이 자라는데 황토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늘과 생강 등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념류 채소는 말할 것도 없고, 황토 총각무(알타리무)도 태안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효자 농산물로 꼽힌다.

 10 : 50. 구릉지 가장자리를 따라가던 길이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해버린다.

 10 : 52. 바닷가에 이르면서 서해랑길(동서트레일 이정표 : 태안읍행정복지센터 6.1km/ 몽산포항 7.5km)’과 만났다. 둑 너머는 대하양식장인 듯하다. ! 이곳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망원산(望遠山)’이 나온다고 했다. 진산리의 주산으로, 태안군의 심장인 백화산이 남쪽으로 능선을 뻗어 내리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 봉긋하게 솟아올라 생겨난 산이다. 높이는 해발 44미터에 지나지 않는 야산이지만, 상여는 물론이고 혼례 가마도 산을 빙 돌아다닐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망원산을 귀하게 여겼단다.

 우중 트레킹은 사진을 첨부해야만 하는 작가들에게는 사약이나 마찬가지다. 이석암님과 몽중루님이 나처럼 코스를 단축해서 걷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즈음 평화염전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장명수 바다를 제방으로 막아 조성했다는 염전이다. 참고로 태안은 천혜의 소금밭으로 불리는 서해안에서 강화·곰소·비금도·증도 등과 함께 손꼽히는 염전지다. 현재 32개소에서 매년 6,820톤을 생산하고 있단다. 하나 더. 염전의 역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숨 가쁜 발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나무로 쇠스랑을 만들어 사람과 소가 같이 개펄 위를 끌었다. 바닷물이 밀려오지 않는 시간에 맞춰 개펄의 흙을 엎고 말리는 소위 갈개 젖는일을 하고 나면 허리 펼 시간 없이 바닷물을 부었다. 간수가 만들어지면 큰 솥에 붓고 낮이나 밤이나 종일 불을 땠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태안 자염(煮鹽)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시간이 흘러 솥은 없어지고 흙바닥은 타일로 바뀌었다. 보다 대량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천일염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의 허리는 펴질 날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일 소금꽃을 피우고 대패로 모아 소금을 실어 날랐다. 질 좋은 태안 천일염의 8할은 태안 사람들의 땀방울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아예 염전에 어깨까지 걸치고 간다. 덕분에 더욱 가까워진 염전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염전은 삭막할 정도로 무채색이다. 드문드문 서있는 소금창고의 빛깔도 그렇다. 절대 고요 속에서 무욕의 결실을 맺어간다. 염전은 가장 오래된,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생산방식이다. 수차와 고무래, 수레 정도를 빼면 별다른 도구도 없다. 오직 햇볕과 바람, 시간이 무심히 바닷물을 졸이고 그 사이를 염부가 가끔 오갈 뿐이다. 서두른다고, 재촉한다고 빨리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평화라는 이름처럼 염전은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하지만 염부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맞다. 3월 말쯤 채렴식이 열린다고 했으니 염전은 이미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참고로 채렴식이란 염부와 가족, 이웃들이 모여 그해의 첫 소금을 뜨는 행사다. ‘염전일이라 하면 보통 사람들은 단순히 바다가 만든 소금을 사람이 건져 올리는 줄로만 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닷물과 햇빛만큼 염부들의 땀과 정성이 들어간다. 애당초 염전일이란 농사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해마다 밭을 새로 일궈야 한다. 염판과 둑을 다지고 소금이 나는 결정지의 장판을 새로 까는 식이다.

 오른쪽에는 무슬림의 미나레트(minaret)’를 연상시키는 예쁜 건물이 놓여있었다. 중증장애인거주시설인 아이원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1 : 10. 배수문. 바다를 만나는 지점으로 동서트레일 이정표(태안읍행정복지센터 4.9km/ 몽산포항 8.7km)가 세워져 있다. 동서트레일 걷기를 4주 전에 시작했다는 총무님 말로는 이런 이정표가 500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게 동서트레일의 특징이라고 했다.

 서해랑길은 이제 서해바다를 옆구리에 차고 간다. 갯벌, 갯골, 습지 등 바닷가의 다양한 풍경들을 마주할 수 있는 구간이다.

 진산리 앞바다는 개천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민물 강을 개천이라고 부르지만, 진산리는 앞바다 자체의 이름이 개천이란다. 앞바다 한가운데 큰 똘(도랑)이 있으니 그것이 강이 되고, 그 주변이 천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잠시 후 길은 방조제 위로 올라선다. ‘장명수 바다를 막았다는 그 둑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 이정표가 66코스의 중간 지점임을 알려준다.

 조금 전 진산리 앞바다에는 커다란 이 있다고 했다. 똘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가 풍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똘은 물고기들이 먼 바다에서 육지 가까운 바다로 오가는 길목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 울타리를 고기를 잡는 독살로 여기지는 말자. 대하양식장에서 도망쳐 나온 새우들은 잠시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울타리일 테니 말이다.

 이후부터는 방조제를 따라간다.

 방조제 안쪽에는 굉장히 큰 대하양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1996년이었던가? 정부는 소금 수입을 개방했다. 이로 인해 중국을 비롯한 외국 소금들이 물밀 듯 들어왔고, 가격 경쟁력에서 뒤진 국내 염전들은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바로 새우양식장이었다. 싸디 싼 수입소금에 부담금을 매기고 그 재원으로 양식장 등 다른 사업으로의 전환을 원하는 염전들을 지원했다. 당시 소금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날밤을 새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왼쪽으로는 장명수라 불리는 바다가 펼쳐진다. 안기2리 명장동 앞 바다와 남산2리 용뿌리 앞의 자그마한 바다를 말하는데 조선 숙종 때부터 둑을 쌓아 육지로 만들려 했으나 폭우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더란다. 그 후 장명이라는 사람이 다시 그 둑을 완성하여 100정보의 염전과 100정보의 논밭을 일구는 기적을 일으켰다나? 그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질이 좋아 조선 3대 염전으로 손꼽혔으며 장명이는 수많은 인부와 소작인을 둔 거대한 부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807 2월 한풍이 몰아치던 겨울 끝에 서해 대해일이 일어나 둑은 무너지고 산더미같이 밀려든 바닷물은 그 일대 넓은 염전과 논밭, 그리고 장명이와 집의 주춧돌 하나 흔적 없이 삼켜버렸다. 그 후부터 이곳을 장명수로 부르고 있단다.

 장명수 해안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서해랑길은 이 해안을 따라가기 때문에 구불구불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가야할 길(왼쪽 제방)이 저렇게 코앞에 놓여있는데도 바다에 가로막혀있어 에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1 : 20. 위 사진의 끝 지점. 그러니까 육지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의 끄트머리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태안읍과 안흥면의 경계지점이기도 한 이곳에서 이제껏 함께 해온 동서트레일이 서해랑길과 헤어지기 때문이다. 동서트레일 이정표(태안읍행정복지센터 4.2km/ 몽산포항 9.4km) 기둥에 붙여놓은 서해랑길 방향표식을 따라가면 되겠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이 지점을 반환점으로 삼아 왼쪽으로 돌아 나온다.

 봄바람은 꽃띠 소녀들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봄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민 나물을 캐겠다는 여심이 방심(芳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덕분에 난 봄나물에 해물을 잔뜩 얹은 전을 먹으며 이 글을 써나가고 있다.

 길은 이제 근흥면의 둑길을 따라간다. 고려시대부터 여송무역선이 드나들었다는 국제적인 고을이다. 덕분에 자연부락들을 지날 때마다 바다에 기대 울고 웃으며 살아온 동네 사람들의 푸르른 인생역정을 느껴볼 수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 했던가? 오늘도 새로운 앎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본 누수계측기가 바로 그것이다. 방조제의 안전관리를 위해 탐사 측선과 수위 계측공이 매설되어 있다나? ‘과학 입국을 부르짖는 나라답게 방조제도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있나 보다.

 항아리 주둥이처럼 좁은 장상수 바다의 입구. 그러니 물결 또한 호수처럼 잔잔할 게 분명하다. 지금은 비록 검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지만.

 방조제 안에는 작은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다. 둑으로 인해 물길이 막힌 용요천(龍腰橋)’이 만들어놓은 인공호수이다. 옛날에는 용요천을 따라 바닷물이 꽤 깊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러니 강이 깊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느 날 왜놈들이 쳐들어와 피난갈 일이 생겼다고 한다. 강물이 깊어 건너지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이때 용()이 나타나더니 허리를 세워 다리를 만들어 주더라나? 하천 이름에 허리 요()’자가 들어간 이유이다.

 잠시지만 나직막한 산자락을 에돌아가기도 한다. 호수처럼 변한 서해바다를 뜨락삼아 들어선 멋진 전원주택을 여럿 만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저 갯벌에는 동죽이 지천이라고 했다. 동죽은 꼬막처럼 오동통하게 생겼는데 꼬막과 같은 주름은 없고 회백색이다. 바지락보다 식감이 쫄깃해서 담백한 국물 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 다만 모래펄에 살기 때문에 반드시 해감을 해서 먹어야 한다.

 11 : 34. 안기리 배수장. ‘용요천(龍腰川)’의 하구역(河口域)은 커다란 호수로 변해있었다. 배수장도 오늘 보아온 것들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참고로 용요천은 소원면 시목리에서 발원한다. 수룡리와 마금리, 두야리, 안기리 들녘을 적셔주며 흐르다가 이곳에서 서해로 유입된다.

 11 : 38. 계속해서 방조제를 따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둑길이 아니고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라간다. 그렇게 200m쯤 걷다가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11 : 40.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마을 앞 삼거리에서는 왼쪽으로 간다. ! 마을길이 명장길로 바뀌어있었다. 길 이름이라는 게 본디 인근 지명에서 따오는 법이니 요 어디쯤에 명장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명장길을 따라 안기2리 마을회관쪽으로 간다.

 안기2 마을은 구릉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민가는 몇 채 되지 않지만 마을회관은 물론이고 보건지료소와 교회까지 들어서 있었다.

 뒤돌아본 풍경. 산골짜기에 들어선 작은 들녘과 장명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11 : 51. 안기2리 마을회관(오른쪽 붉은 벽돌 건물). 산자락의 아늑한 안쪽에 터를 잡았다는 안기리(安基里)’는 구한말의 기호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의 신주를 모신 안양사(安陽祠)로 유명하다. 선생의 나이 65세인 1905,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간재는 조약의 파기와 체결에 앞장선 오적(五賊)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조선은 결국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간재는 역적의 무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겠다며 섬으로 떠돌았다. 간재를 이곳으로 모신 이는 그 제자였던 노백(老栢) 최명희(崔命喜, 1851-1917)였다. 하지만 간재가 생을 마감한 곳은 부안 계화도이고 묘소는 전북 인산에 있단다. 태어난 곳도 전남 담양이다. ‘안기리에서는 5년 정도 머물렀다고 한다.

 구릉지에 들어앉은 마을은 누런 황토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선지 이곳에서 생산되는 총각무(알타리무)는 태안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효자 농산물로 꼽힌다고 했다. 같은 품종이라도 태안에서 자란 무는 아린 맛이 없으며 단맛이 좋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뛰어나단다. 크기 또한 적당하고 모양도 예쁘다니 어느 주부가 싫어하겠는가.

 마을회관을 지나면 길은 용남로로 바뀐다. 100m 남짓 더 걷자, 이번에는 궁틀길로 또 다시 바뀌었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8.8km)가 세워져 있다.

 11 : 55. 이후부터는 궁틀길을 따라 용신1리 마을회관으로 간다. ‘궁틀들녘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2 : 04. 마늘밭 사이로 700m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GPX 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바닷가로 가려는데, 1km쯤 앞서 걷고 있던 몽중루 작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른편에 보이는 농로를 이용해 들녘을 횡단해버리라는 것이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으니 구태여 바닷가까지 에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생략해버린 구간의 풍경. 제방 너머는 장명수이다

 12 : 10. 단축코스, 즉 궁틀 들녘을 횡단하는 농로는 400m쯤 이어진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에돌아온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12 : 13.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150m쯤 가면 산자락 마주하게 된다. 갈림길에 세워놓은 이정표(종점까지 7.1km)가 왼쪽으로 가란다.

 산자락에는 민가 몇이 웅크리고 있었다. 옛 멋을 폴폴 풍기는 고택도 눈에 띈다. 안기리(安基里)를 구성하는 자연 부락(궁틀·돌고지·둔젓골·밤고개) 중 하나인 궁틀마을일지도 모르겠다. 태안문화원은 궁틀마을은 운동(雲洞)마을 남쪽에 위치한 궁기(弓機)마을을 이른다고 했다. 길쌈이 성했던 지역이라서 베틀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다나? 다른 설도 있다. 이 지역의 산이 활()처럼 휘어졌다거나 또는 이 마을에서 활을 만들었다고 해서 궁기(弓機)라 불리다가 궁틀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라간다. 66코스 중 유일하게 산속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자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S’자 형으로 휘어나가는 고갯길을 보리밭이 따라다닌다. 4월의 보리밭을 푸르르다. 때문에 꼭 보리밭 사잇길을 걷지 않더라도 싱그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이 늘 따라다닌다. 최근 글로벌 흥행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두 주인공이 유채꽃밭에서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저 보리밭으로 옮겨보자. 교복 입은 애순과 관식이 보리밭 사잇길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장면을 말이다. 청명한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떠간다. 무릎까지 차오른 보리밭에 봄바람이 불어오거나 불어갈라치면 옥빛으로 넘실대는 파아란 보리밭 물결에 사춘기 어린 가슴은 터질 듯 황홀한 장면이 된다.

 서해바다를 뜨락삼은 전원주택. 중장년층의 직장 남성들이 꿈꿔오는 로망은 은퇴 후에 저런 주택을 갖는 것이다.

 방풍림 사이로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건너편은 남면의 진산리 해안일 것이다.

 12 : 27. ‘클럽티지엠(펜션)’을 지나 용신리로 넘어갔다. 법정 동리가 안기리에서 용신리로 바뀌었지만 길은 아직도 궁틀길로 이어진다. 그나저나 용신리로 들어가자 제법 큰 자연 부락이 나타났다. 용신1리 동쪽 끄트머리에 있다는 각골이 아닐까 싶다. 산이 마을을 둘러싸 각을 잡고 서 있다는 그 마을 말이다.

 민가(궁틀길 79) 지붕에 설치해놓은 전광판이 눈길을 끈다. 대체 무슨 수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계속해서 궁틀길을 따라간다. 낮은 언덕에 자리한 진리교회를 전면에 두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왼쪽에 있는 서해바다를 내다볼 수도 있다.

 오른쪽에는 전원주택 단지가 커다랗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 옆 산기슭에는 태양광발전소가 훨씬 더 크게 들어섰다.

 진리교회가 위치한 언덕을 넘으면 용신1, ‘자리골이 맞는다. 옛날에 돗자리를 만드는 재료인 왕골이라는 풀이 많았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왕골이 천지사방에 흐드러지게 돋아났다는 것이다. 이를 이용한 돗자리가 많이 생산되었음은 물론이다. 하나 더. 가랑이골, 각골, 천안골 등 용신1리의 지명에는 '' 자가 들어간 곳이 유난히 많단다. 여기서 ''이란 고을을 의미한다나?

 12 : 40. 용산1리 마을회관은 2차선 도로인 용남로 도로변에 지어져 있었다.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마을회관 앞(이정표 : 종점까지 5.6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해바다 쪽으로 내려간다.

 12 : 43. 잠시지만 남의 집 앞마당 같은 곳을 지나기도 했다. 그러자 더 넓은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12 : 45. 잠시 후, 서해랑길은 농로(용남로)’로 인도된다. 이어서 들녘의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바닷가로 간다.

 12 : 49. 농로를 따라 잠시 걷자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GPX트랙은 이번에는 바닷가가 아닌 들녘을 횡단하란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바닷가로 가기로 했다. 66코스 중 가장 빼어난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는데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바다원뚝 산책길이란다. 2024년 태안군역량강화사업의 일환인 마을동아리 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용신1리 앞바다 원뚝(제방)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제방으로 올라서자 서해바다가 다시 한 번 펼쳐진다. 태안군의 내만 중 하나인 장명수 바다는 물론이고, 몽산포항과 그 앞에 있는 안목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2 : 58. 잠시지만 용남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GPX 트랙(서해랑길)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150m쯤 걷다가 오른쪽 농로로 들어섰다. 잠시 후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총무님의 잔머리를 쫓아 논두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서해랑길을 조금 더 빨리 만날 수는 있었지만 본래의 농로를 타는 것보다 한참이 도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래 사진에서 언덕(초입의 이정표 : 종점까지 3.9km)으로 올라가는 길이 서해랑길이다.

 탐방로는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어간다. 그러자 근흥면의 행정타운인 용신리(龍新里)’가 맞는다.

 13 : 08. 근흥반도의 병목지점에 자리한 용신1(신대마을)’는 근흥면의 중심지이다. 면사무소, 치안센터, 보건지소, 농협, 우체국 등 대부분의 주요 기관은 물론 지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회화나무도 용신1(근흥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다. 소원을 빌고 잎사귀를 보며 농사와 흥망을 점쳤다는 신목이다. 참고로 회화나무는 신목 중에서도 제일로 꼽힌다. 출세와 승진을 돕는 최고의 길상목이고, 마당에 심어두면 집안의 평안을 돌봐준단다.

 근흥장로교회를 지나 용도로로 올라섰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용신경로당과 용신2리 다목적회관이 마주보고 있다. 참고로 용도로 ()신리와 ()황리를 잇는다.

 잠시지만 용도로를 따라간다. 꽃구경을 실컷 할 수 있는 구간이다. 걷는 내내 함께 했던 수선화는 기본, 목련에 벚꽃, 진달래, 동백 등 갖가지 꽃들로 도로가 장식되어 있었다.

 개량종인지 동백꽃이 유난히도 탐스럽다. 하지만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는 많이 퇴색했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안에서도 지주식 김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하긴 특별한 먹거리와 볼거리를 소개하는 SBS 생방송 투데이에서도 태안에서 전통방식으로 김을 생산하는 현장을 소개하지 않았던가.

 13 : 15. ‘용신2·원안해수욕장입구 버스정류장 앞에서 용도로와 헤어져 마을안길로 들어간다. 하나 더. 계속해서 용도로를 따라가도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용경로당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거리는 용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더 짧다.

 탐방로는 좌동교회 앞을 지나 또 다른 들녘으로 내려간다. 스카이로켓향나무 묘목장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원안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이 나뉜다.

 길은 구릉지를 헤집으며 간다. 주변은 온통 누런 황토색. 문득 용신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노루지가 이곳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노루지라는 지명이 흙이 노랗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아무튼 구릉지가 많은 근흥반도에서는 작은 야산의 언덕길들이 걷기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묘미가 되어주기도 한다.

 13 : 29. 다시 용도로(이정표 : 종점까지 2.1km)’로 올라섰다. 도로변에는 원용경로당이 지어져 있었다. 이곳이 법정 동리인 용신리(龍新里)에 속한 원용마을이란 얘기일까? 옛 이름을 적은 표석을 동구 밖에 세워두던 전라도나 경상도 지역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충남 지역에서는 단위부락을 만날 때마다 하게 된다.

 13 : 32.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연포)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는 메인 도로는 채석포항을 거쳐 연포해변으로 간다. 이따가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얘기이다. 하나 더. 중간쯤에서 용신리와 도황리의 경계가 나뉘기도 한다.

 13 : 50. 아까 헤어졌던 메인 도로(종점까지 0.6km)를 다시 만났다. 작은 고개를 넘어온 우리와는 달리 해안선을 에돌아온 것이다.

 13 : 51  13 : 54.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는 소암해변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그러나 아름답기 짝이 없는 해변이다. 특히 연포해변의 자랑거리인 솔섬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포십승(鳶浦十勝) 중 여덟 번째인 소암탁족(梳岩濯足), 즉 소암에 걸터앉아 맑은 물에 발 담그니의 현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소암해변은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연포해변과 이어진다. 하지만 중간이 바위산으로 막혀 있어서 마치 비밀의 해변과 같은 모습이다.

 13 : 55. 생태탐방로로 능선을 이어놓은 고개를 넘고, 옥녀봉 등산로 입구를 지나 연포해변으로 들어간다.

 상가지역. 솔개의 날개 모양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해안이 해수욕장으로 조성되면서 솔개낭청을 가운데로 한편은 상가지역과 선착장이 자리 잡았으며. 또 한편인 도당골(소암해변 일대)의 솔밭에는 텐트촌(사유지라서 지금은 폐쇄된 듯)이 형성되어 있다.

 13 : 57  14 : 09. 연포해수욕장. 삼성그룹이 고급휴양지로 조성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개발한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 1.6km( 200). 수심이 얕은데다 경사까지 완만해 해수욕장으로 적당한 조건을 갖추었다. 기반시설이나 편의시설도 훌륭해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단다. 연포(鳶浦)라는 지명은 1800년대 이곳으로 시찰을 나온 안흥진의 방어사가 지세를 보고 솔개가 날개를 활짝 편 형국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했다. 도당골에서 서낭댕이로 넘어오는 언덕의 바다 쪽 작은 바위산에 솔개가 많이 살아 솔개낭청이라 한데서 유래를 찾는 이들도 있다. 1971년 중앙일보·동양방송이 그 일대를 매입하여 해수욕장으로 개발·분양하면서 솔개 연()’ 사모할 연()’으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이곳이 연포해수욕장임을 알리는 표식(조형물 같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춘화의 연포아가씨 노래비에 적힌 연포가 유일한 표식이었다.

 바보선언이라는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꽤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그러나 이곳 연포해변은 가요제로 더 유명했다. TBC(동양방송)에서 연포 해변가요제를 열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가 잘 아는 노래들이 발표되고 유명한 가수들이 배출되었다. 구창모, 배철수, 이치현도 그렇지만 그룹으로 출전해 그랑프리를 받은 징검다리의 여름이란 노래는 지금 들어도 흥겹다.

 연포해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솔섬이다. 솔섬 뒤로 떠오르는 해가 일품이라고 해서 사진작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동해처럼 장엄하지는 하지만 바다와 갯벌을 붉게 채색하는 해돋이가 서정적이라나? 그걸 사진에 담으라는 지 솔섬 쪽으로 포토죤까지 만들어 놓았다.

 14 : 12.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집단시설지구로 들어간다. 그리고 도황1리 다목적회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4.46km 3시간 40분에 걸었다. 나물 뜯어가며 걷는 집사람의 속도에 맞춰졌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서해랑길(태안 67코스) 안내도는 다목적회관과 화장실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 트레킹을 마치고 산악회에서 제공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게 점차 굵어지더니 10분쯤 지나면서는 아예 여름철 장마 수준으로 변해버리는 게 아닌가. 코스를 줄여 걸은 우리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증명해주는 상황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