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북한산('03.6.10)

2011. 11. 4. 11:17

산벚꽃도 지고 철쭉도 지고, 허공에 가득하던 새 울음소리도 잦아든 때입니다.
새초롬한 봄날은 갔고 무성한 여름날은 아직 주춤거려야할 유월의 아침나절....
도심의 열기 탓인지 아님 며칠 빨리 온다는 계절 탓인지 북한산은 이미 한 여름이로군요.

다행이 진달래 능선은 숲길이라 짙푸른 녹음이 알맞게 햇볕을 가려주지만
습기를 품은 무더운 공기는 산행 초입부터 이쁘게 닦는걸 포기하라 땀을 많이도 내려줍니다.
옆에서 걷는 울 짝궁, 불암․수락산 종주하며 그리도 힘들어하던게 겨우 이틀전이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씩씩하게 따라오는건 아마 오늘이 그녀에게 특별한 날이기 때문일겁니다.

오늘은 저희 만남의 일주년 기념일...
둘다 무던히도 산을 좋아하기에 우린 만남의 의미를 산에서 찾아보기로 했거든요.
거기다 내 좋아하는 님들과 같이하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벤트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나 산 아래에는 내 절친한 친구들이 눈이 빠지게 제 하산길을 기다리고 있을 거구요.
내 귀여운 소주, 막걸리, 맥주들이 내 사랑 다시 찾은 날을 축하한다면서 말입니다..

“난 엄마의 딸이어서 행복했어요.”
“난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이 될 건데, 엄마도 내 엄마가 되어 줄 거야?”
시인 도종환 님의 글에 나온 어느 모녀의 대화입니다.
임종을 앞둔 엄마와 딸이 나눈 이 마지막 대화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 이유가 뭘까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에서 말입니다.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봅니다.
아! 콩콩이 이런 저희 뒷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나요?
그리고 가만히 속삭여 봅니다.
“난 당신의 옆지기여서 행복합니다”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데 괜찮겠소?”
수줍게 웃는 그녀의 옆 얼굴너머 떡갈나무 이파리도 행복에 겨워 빛나고 있습니다.

만경대 밑을 돌아 백운대를 오릅니다.
아까부터 감탄을 연발하던 솔피네와 군청색의 입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더 높고 더 험한 산도 넉넉히 오르는 그녀들이건만 북한산은 처음 오른다나요.
이걸보고 燈下不明이라고 하나요? 갑자기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하는군요.
어쩻든 누군가를 기쁘게 해준 건 사실이잖아요?

코발트와 분위기가 비슷한 산새의 나르는 듯한 산행실력을 얘기했더니
자기도 5등안에는 든다고 시기하던(?) 아삼이 안보이는게 벌써 날라갔을까요?
아님 미모에 반한 외간 남자들이 같이 사진 찍자 집적대던데 혹시 작업중?

백운산장에 들르니 설산과 설인이 반기네요. 돌림자가 같은 雪字인데 형제인감?
두부 한조각 김치에 싸서 막걸리 한잔 걸쭉하게 들이키는데 앗뿔싸 이건 아니옵니다.
어찌나 신지 몸에 좋다 눈 딱감고 마시던 감식초가 불현 듯 떠오르는군요.
하도 시어 홀짝이는 막걸리 사발이 바닥날 즈음 달친구가 도착합니다.
어제 설악산에 다녀오고 또 다시 산에 오르다니....
리찌리보고 산에 미쳤다고 했더니만 여기 또 한사람 미친분이 계시군요.

리찌리의 인도로 인수산장까진 바윗길을 택해봅니다.
새로 태어난 리찌소녀 군청색의 모습에 환호하고
작품사진에 열중한 가로수길은 급경사 암반이 무섭지도 않은지 이리저리 잘도 뛰어 다닙니다.

어제 늦게까지 마신 탓에 힘들어하던 오션과 푸울의 표정이 밝은게 이미 풀렸나보군요.
막둥이 알피니스트 얼굴에선 청량한 미소가 잠시고 떠나지 않네요.

앗! 분위기에 오염되었을까요?
아예 얼굴부터 웃는 형인 스피드님이나 산봉우리․온정이 부부는 차지하고라도
근엄한 다우악님까지도 문듯 문듯 미소를 보이시네요.
덩달아 디브(몰디브? 여행사에 다니냐 물었더니 아니라는 군요)도 새내기 신선도 살짝 웃네요.

북한산까지 온통 ‘산과 사람들’의 분위기에 빠져 껄껄거립니다
아마 먼저 내려가신 스텔라님도 조용한 미소로 답하고 계시겠지요?
그 증거는 늦게 나타난 명륜당님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찾을 수 있군요.


아! 점심 얘기가 빠졌죠?

점심의 풍요로움은 언젠가 끄적여본 어릴적 야그로 대신해봅니다.

많고 많은 음식들 이것저것 주어 담았더니 고통속에 줄여논 허리가 어느새 원상회복....
거기다 푸울이 준비한 얼린 생맥주에 또 다른 이가 준비한 막걸리...(누구였더라?)
이미 배불뚝이가 되어버린 허리에 한숨쉬며 옆집아이의 배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밖에요.

누군가 어느 정책 반대방향에 서면 그해 농사는 틀림없이 성공이란 얘기를 하더군요
혹여 음식이 부족할새라 조금은 여유롭게 준비했는데 다들 같은 생각이었던가 봅니다..
차려진 점심상은 진수상찬 그 자체였습니다. 저걸 짊어지고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들 했을꼬?


어린시절 봄이되면 늘상 배가 고팠다
먹을 것이 없어 비참했던 보리고개, 얼른 모리가 익었으면...
참다 못해 보리서리라도 하다보면 입 언저리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먹물로 물들었다.

아이야 무슨 소린지 이해할까마는 그래도 들려주고 싶다.
“사기그릇에 고봉으로 가득담은 보리밥과
열무김치 하나로 끼니를 때워도 뿌듯햇던 때가 있었노라고....“

학교갔다 돌아오면 다들 들녁에 나간 빈자리만이 아이들을 반길뿐...
점심때 먹은 도시락은 기억에 없고 처마 밑에 매달린 대나무 광주리만 눈에 차 오르고.
한걸음에 도착한 뒤안 옹달샘가...
바닥에 깔린 보리 알갱이 하나라도 놓칠새라 조심스레 물에 인다.

몽당 놋수저 움직임을 누가 볼새라
두입 걸러 한입 넣는 된장 입힌 풋고추의 얼얼함에 엉덩이 들썩거림은 차라리 추임새다.
그나마도 보리밥에도 정신없이 코박던 옆집아이는 갈비뼈 앙상한 가슴에 배만 남산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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