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이바노보의 암석 교회군(Rock-hewn Churches of Ivanovo)

 

특징 : 불가리아의 북동부 루센스키롬 강계곡 이바노보 마을 주위에는 많은 암굴 성당, 예배당, 수도원이 모여 있다. 이는 12세기에 수도사들이 동굴을 파서 만들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수도사들은 바위를 깎아 수도실, 교회당, 예배당을 건설했다. 당시 수도원 수가 약 40개에 달했고 그 외의 종교 시설 용지도 300개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사들이 수도생활을 하던 곳이었으나 13세기에 성당이 세워진 뒤에는 불가리아 종교·문화의 중심지로 변했단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자. 이들 수도원 건축물 안에는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제작된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으며 이는 중세 불가리아 미술의 걸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매표소가 코앞이다. 관람료를 내야한다는 얘기이다. 하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다는데 어찌 무료일 수가 있겠는가. 오늘 들르게 될 동굴은 이바노보 암석교회 군에 들어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단단한 암석들을 잘라 수도실과 교회, 예배당 등을 만들었는데, 이런 시설들은 장차 불가리아 정교회의 총 대주교가 될 요아킴(Joachim)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220년대부터 17세기까지 수도사 들이 거주했었단다. 주위에는 40여 개의 교회와 300개 정도의 다른 종교 시설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단다.

 

 

 

 

들머리에는 루센스키롬 자연공원(Rusenski Lom Nature Park)’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바노보 암굴교회군의 유적들이 공원지역의 안에 들어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키릴문자로만 적혀놓아서 공원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암굴교회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있었으나 꼼꼼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가이드의 뒤를 쫒아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촬영까지도 깜빡 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단 사진을 찍은 다음 귀국해서 번역해보는 습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덕분에 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시 방문했던 곳이 주의 계곡 성당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아니 가장 뛰어난 프레스코화를 보유하고 있다는 코라(Khora) 수도원일지도 모르겠다. ‘암석교회 군()’ 중에서 현재 개방하고 있는 곳이 단 한군데뿐이라는데도 정확한 명칭을 모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화라 하겠다. 사진만 찍었더라면 귀국해서 번역이라도 해봤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남동부 유럽의 기독교 예술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프레스코화까지 놓칠 수는 없으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곳의 프레스코화는 그리스정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이들은 타르노보회화파인데 그들은 헬레니즘 예술 작품과 누드화, 풍경화를 선호했었단다.

 

 

매표소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계단길이고 왼편은 경사가 거의 없는 오르막길이다. 안내판은 탐방의 순서를 아스팔트 길, 늙은 수사의 길, 절벽지대, 나무다리, 암굴교회의 순으로 적어놓았다. 왼쪽 방향을 말하는데, 경사가 거의 없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으나 대신 거리는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하지만 난 오른편에 보이는 계단으로 오를 것을 적극 추천한다. 힘이야 조금 더 들겠지만 10분이 채 되지 않아 목적지(암굴교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좋은 순서라 하겠다. 내려올 때 안내판에서 권하는 코스를 따르면 계단을 내려오면서 무릎 통증으로 끙끙대야하는 고역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오른편은 계단으로 시작된다. 아니 계속해서 계단이 이어진다. 제법 힘들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계단의 경사가 버겁지 않을 만큼 가파른데다 길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다면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면서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고 말이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T’로 나뉜다. 길이 나뉘는 지점에 암석교회가 있다는 화살표지가 있으니 찾아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몇 걸음 더 걷자 바위벽 사이의 틈새로 암굴교회의 입구가 드러난다.

 

 

암굴교회는 서너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연의 동굴을 다듬어 만들다보니 2/3 정도로 층이 낮은 곳도 있다. 벽면은 고르지 못한 모양새이다. 기존의 암벽에 약간의 손질을 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금 거칠게는 보여도 순수한 아마추어인 수도사들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밖으로 뚫린 공간에는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만하면 수도생활을 하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겠다. 테라스에 서면 루센스키롬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 바위절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바노보에 이런 종교 시설들이 300여 개에 달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저곳에도 이런 암굴교회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얘기했던 반 층 정도 낮은 방이다. 이곳은 외벽을 판자로 막고 창문까지 내놓았다. 물론 후세 사람들이 새로 만든 것이겠지만 옛 사람들의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내부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13세기 초 무명 화가들이 풍부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성인상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화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다가오지 않는다. 성경 내용을 머리에 떠올려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축적해 온 내 앎이 일천할지니 더 이상 어쩌겠는가. 그저 옛 사람들이 성서 이야기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그게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쯤으로 정리해 볼 따름이다.

 

 

 

 

 

 

 

 

벽화의 보존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천정과 벽면에 마멸된 곳이 보이는가 하면 그림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혹독한 기후와 세찬 바람, 지진과 산사태 탓일 것이다. 거기다 더하여 오랜 세월동안 잊히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풍경은 기념품 가게이다. 좌판에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대부분은 이콘화를 그려 넣었다. 그나저나 낯선 나라이니 토를 달 일은 아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유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 혹자는 불가리아를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고 관광산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사람들이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함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려올 때는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안내판이 추천했던 코스를 따른다.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코스를 추천해준 안내판의 의도를 알아 보고팠다는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걷다보면 작은 동굴들을 여럿 만난다. 벽화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곳도 있다. 아니 그들이 남겼을 흔적들도 눈에 띈다.

 

 

 

 

 

조금 더 걷자 암벽지대가 나타난다. 아니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넓게 펼쳐지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아까 들머리에서 살펴봤던 안내판에 적혀있던 문구 파노라믹 락(panoramic Rock)’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혹자는 이곳을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유하기도 한다. 동감이다. 조금 왜소하기는 해도 크게 뒤지는 풍경은 아니라 하겠다.

 

 

 

 

 

 

 

 

계곡은 바위절벽이라는 병풍을 펼쳐놓은 모양새이다. 이곳은 불가리아의 북동부다. 루센스키롬 강 계곡의 이바노보 마을 주변이다. 12세기 경부터 수도사들이 동굴을 파 신앙생활 했던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안내판 하나를 만났다. 지도에 교회와 성채, 새 등을 그린다음 지명으로 보이는 단어들까지 적어 넣었는데 온통 키릴문자라서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는 눈치조차 챌 수가 없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허리를 곧추세운 바위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벽면에 작은 테라스가 돌출되어 있는 걸 보면 아까 들렀던 암굴교회가 분명할 것이다.

 

 

 

 

매표소로 되돌아오니 노점상 둘이 전을 펼쳐놓고 있다. 그들도 역시 이콘화를 팔고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성모자상과 예수상이다. 그리고 역사 속의 성인 그림도 많다. 상대적으로 성인 게오르기의 그림이 눈에 많이 띈다. 다른 성인의 이름도 키릴문자로 표기해 놓았지만 읽을 수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난 다듬은 소나무 껍질에다 그려 넣은 이콘화를 하나 샀다. 우리 집 서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이바노보의 볼거리가 두어 곳이 더 있음을 알려준다. 중세의 교회유적과 성채유적이 남아있는 ‘Medieval Town Cherven’과 암굴교회와 프레스코화가 뛰어난 바사르보보 암굴수도원(Basarbovo Rock Monastery)’이다. 그중에서도 ‘St. Dimitrii Basarbovski’가 머물렀다고 해서 유명해진 바사르보보 암굴수도원을 못가본 것은 특히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행사에서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다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블로그에서 사진 두어 장을 얻어다 올려본다. 아래 글은 또 다른 이가 소개했던 글이다. <이 수도원은 2차 불가리아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수도원이나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터키의 세금 등록부상 1431년의 일이다. 수도원에 있었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St. Dimitrii Basarbovski이다. 그는 1685년에 근처 Basarbovo에서 태어났고, 그의 삶 대부분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이 수도원은 현재 불가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암석 수도원이며,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하다. 주차를 하고 나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정교회의 수도원이 맞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것은 중국 신장위구르의 쿠쳐의 키질 천불동이었다. 그 배치나 구조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바위 절벽에 군데군데 석굴이 파져 있고, 그 절벽으로 계단들이 나 있는 모습이 똑같았다. 수도원의 옆으로 계속 이어진 절벽에 아마도 석굴들이 더 있을 듯 싶었다. 여기는 명확하게 수도원이 만들어진 곳 보다 앞쪽에 벽화가 그려진 방치되다시피 한 석굴이 있었다.>

 

 

 

 

이젠 루마니아로 넘어갈 차례이다. 두 나라는 도나우강(Donau river)을 국경으로 하고 있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면 루마니아 국경검문소가 기다린다. 불가리아 국경검문소도 지나왔음은 물론이다.

 

 

 

 

 

이제부터는 루마니아 땅이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 확 바뀌어 있다. 산릉이 대부분이었던 불가리아와는 달리 사방이 온통 평야지대인 것이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불가리아에 비해 건물의 상태가 많이 양호해졌다. 아무래도 불가리아보다 생활형편이 많이 좋은가 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둘째 날 :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특징 :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30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2 불가리아 제국 시기인 1187-1393년에는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름은 투르노보였다. 이후 도시의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위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 벨리코를 붙였단다. ’이반 아센 2(Ivan Asen II)’ 치하의 최 전성기에는 비잔틴 제국을 압도하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던 적도 있다. ‘3의 로마로 불리던 시기이다. 그러나 아센 왕이 죽자 쇠퇴하기 시작해 숙적인 비잔틴 제국에 굴복 당했다. 1398년에는 오스만 왕조와 3개월에 걸친 수도 공방전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투르노보는 다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는 500년에 걸친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불가리아 왕국의 첫 국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1878년 베를린조약에 따라 승인된 불가리아 공국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1879417일에는 최초의 불가리아 의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으며, 이때 불가리아 최초의 헌법이 제정됐다. 이 헌법은 불가리아의 수도를 소피아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소피아는 지금도 불가리아의 수도로 남아 있다.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 : ’투르노보의 과거는 차레베츠 성(요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 5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건립된 성은 864년 동방정교를 국교로 택한 이후 139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협곡 위의 요새였다. 성곽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그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까지 400개 이상의 주택, 18개의 교회, 여러 개의 수도원, 상점, 성문과 타워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투르노보의 투어는 차레베츠 성(Tsarevets Fortress)’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시가지와 접한 곳이라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보다는 붉은 항아리로 만든 화분이 더 눈길을 끈다. 고고학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모양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오랜 역사를 나타내려는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장미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카잔루크벨리코 투루노보로 오는 도중 차창을 통해 엿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장미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5월이면 방문의 최적기가 아니겠는가. 만발한 장미꽃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장미 향기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패키지니 어쩌겠는가. 그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미가 심어진 꽃밭들이 바라보며 위안을 삼아볼 따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차레베츠 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성모 승천교회가 자리 잡았다. ‘차레베츠 성은 자연이 빚어놓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은 요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로 차단되어 있다. ‘얀트라 강(Yantra river)’이 해자이다. 도개교(跳開橋 : 몸체가 위로 열리는 구조로 된 다리)처럼 성 안에서 줄을 잡아당기면 외부와 차단되었다. 성으로 들어가는 외길의 양쪽이 천혜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가히 철옹성이라 하겠다.

 

 

성의 입구에 이르자 차레베츠 성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에 앞발을 얹고 있는 사자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조형물 아래에는 ‘1186-139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벨리코 투르노보가 1185부터 1393년까지 2차 불가리아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시에 사용하던 문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39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던 요새는 현재 복원 중에 있다.

 

 

잠시 후 첫 번째 성문을 만난다. 성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양 옆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곳에 길을 만들고 그 입구에다 성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될 때까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천혜의 지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한 건물군은 투르노보 대학교(Veliko Tarnovo University)‘라고 한다. 세상을 품을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동상이 이색적이다. 성 에프티미(Св. Евтимий)로 제2차 불가리아제국 정교회의 마지막 대주교였다고 한다. 그는 투르노보 인문학파를 만들어 불가리아 문화도 진흥했다고 해서 불가리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주교라고 한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두 번째 성문이다. 이곳도 역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이 요새는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옛 영화를 복원하는 일이라 하겠다. 흔히 벨리코 투르노보를 불가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고 부르는데, 그 저변에는 위대한 시절에 대한 향수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요새의 성곽은 두 번째 성문에서 좌우로 퍼져나간다.

 

 

 

 

안으로 들어서자 성벽에 뭔가가 적혀있다. 요새의 문장과 함께 1965-1972‘라는 숫자도 보인다. 하지만 키릴문자라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성문 옆의 건물터는 문지기 병사들을 위한 시설이 있던 자리가 분명할 것이다.

 

 

 

건너편 산등성이도 하얀 띠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저건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고 자연이 빚어놓은 암벽일 따름이란다. 천연의 성벽인 셈이다.

 

 

한때는 집이었을 터엔 이젠 관광객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길재가 읊조렸던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싯귀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아쉬움도 있다. 귀족들 집터와 왕궁 터 등 유적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있을 뿐 그에 대한 안내판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까지 가슴에 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서쪽으로 난 작은 문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모양새로 보아 정탐과 수비의 기능을 겸했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성곽에는 정문 외에도 2개의 성문이 더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문(little gate)과 동쪽에 있는 프랑크족 문(Frankish Date)’이다. 이 외에도 성에는 4개의 높은 탑이 있었고, 정교회 성당도 5개나 있었다고 한다.

 

 

 

 

타워도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소품들로 장식해 놓은 내부가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두대(斷頭臺)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앞에 놓인 광주리의 용도가 궁금하다. 설마 자른 목을 담았던 것은 아니겠지?

 

 

 

망루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인다. 주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최상이었겠다. 하긴 그래서 이곳에 망루를 만들었지 않았겠는가. 성의 아래에는 붉은색 지붕의 마을이 자리 잡았다. 성과 마을 사이에는 얀트라강이 흐르는데 여간 평화로워 보이는 게 아니다. 불가리아는 세계 최장수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저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사니 어찌 장수를 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벽은 난공불락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높으면서도 견고했다. 하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왕조는 이슬처럼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난공불락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적에게 무너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리 견고한 성일지라도 지키는 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지켜낼 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 무섭게도 성벽에는 어떤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 아니면 사망이다. 물론 올라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온다. 그렇다고 그만둘 사람이야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벽 자체에 두께가 있어서 바람이 세게 불지만 않으면 안전해 보이긴 했다.

 

 

구시가지 쪽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얀트라강(Yantra river)이 살아있는 뱀이 꿈틀거리는 모양새이다. 얀트라강은 불가리아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발칸산맥(불가리아어: 스타라 플라니나)에서 발원해 북으로 가브로보, 벨리코 투르노보, 비얄라를 지나 도나우강에 합류한다. 총 길이는 285이며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가장 심하단다. 얀트라강은 이곳에서 S자를 세 번이나 그리면서 도시를 감싸 흐른다. 특히 사라피나 하우스 지역에서 보면 강이 마치 세 줄기로 흐르는 것 같다고 한다.

 

 

요새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피라미드를 닮은 조형물도 볼 수 있었다. 뭔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인데 키릴문자로 적혀있어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불가리아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키릴문자는 마치 이색적인 부호 같아서 더욱 이국적 풍경을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병기들도 보인다. 관광객들의 눈요기를 위한 소품일 것이다.

 

 

뒤돌아본 투르노보 시가지, 얀트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집들이 그림 같다. 도시는 꾸불꾸불한 얀트라 강 협곡에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는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강으로 인해 마을은 스베타고라·차레베츠·트라페지차라고 하는 3개의 돌출지대로 구분된다고 한다. 능선의 경사가 심했던지 계단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마치 한 채씩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자매결연 관계였던 프라하에서 요새 복원기념으로 보내주었다는 종탑도 보인다. ‘행운의 종’ 4개를 설치하여 국가 행사시에는 4, 위급시에는 3개를 울린다고 한다.

 

 

명색이 유명 관광지인데 기념품 가게라고 없겠는가. 다만 이곳은 이콘을 위주로 파는 노점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콘장터는 불가리아 국민의 신심을 엿보게 해준다. 그래선지 온갖 이콘을 가득 실은 상인들의 수레는 관광객의 주요한 촬영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값싼 복제품이었으나 가정에 비치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비스듬한 언덕길을 오르는데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와 조명시설들이 눈에 띈다. 어둠이 깔리면 펼쳐지는 레이저 쇼를 위한 시설이란다. ‘빛과 소리(Sound and light)라고 불리는 이 쇼는 형형색색의 레이저가 성 정상을 향해 발사되는데 이때 종소리와 구슬픈 불가리아 민속음악이 뒤섞인단다. 하지만 우린 구경을 하지 못했다. 거세어진 빗줄기로 인해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자 성모승천 교회(Patriarchal Cathedral St. Ascension)가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성당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수도원교회로 지어졌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것을 이반 알렉산더 대왕 때 재건축하여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총대주교좌 성당이 되었지만, 오스만제국이 벨리코를 점령하면서 또 다시 교회는 파괴되었다. 이후 폐허상태로 남아있던 것을 20세기 후반 다시 건축했고 198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단다.

 

 

 

 

 

 

 

 

 

 

 

안으로 들자 성화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성화가 너무 현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1393년부터 500년 동안 고통을 받아왔던 피지배 민족의 과거를 현대 작가인 테오판 소케로프(Teofan Sokerov)‘가 그려서 이 교회의 복원 시기에 맞춰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성경속의 성인들이 아닌 불가리아 역사상 기념할만한 사건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뒤에서 바라본 성모승천 교회

 

 

불가리아 왕국의 역대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독립국으로서의 명이 끊긴 1394년에 기록이 멈춰 있다.

 

 

교회의 바로 아래에는 왕궁터가 있다. 차르 22명이 거주했다는 곳이다. 이곳 투르노보가 한때 차르(Tsarsㆍ러시아 황제)의 도시로 불리던 이유이기도 하다.

 

 

건너편 언덕에도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그 주변은 어수선한 것이 지금도 발굴 중인 모양이다. 이곳 투르노보의 또 다른 역사지역인 트라페지차(Trapezitsa)’가 아닐까 싶다. 옛날 저곳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성직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구시가지 왼쪽의 스베타 고라 언덕에는 2차 불가리아 왕국시대(12-14세기)에 생긴 투르노보 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연구 전통은 현재 키릴 메소디우스 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불가리아 어문학, 러시아 어문학, 역사, 예술 분야 전공이 유명하단다.

 

 

 

 

되돌아 내려오는데 아름다운 꽃밭을 만났다. 처음 보는 꽃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다시 돌아온 주차장, 구시가지의 입구쯤으로 보면 되겠다. 벨리코 투르노보에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후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할 당시에는 '3의 로마'라는 별명도 가졌을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으나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마을과 성당이 소실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불가리아 최고의 요새였던 차르베츠의 성벽 흔적과 조그마한 마을이 전부이다. 과거의 영광은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제국의 옛 수도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거리는 한산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현지인, 관광객의 빈도는 높지가 않다. 그래선지 인사를 건네 오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런데 하나같이 곤니찌와이다. 우리를 일본관광객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관광객들에게 이곳은 아직까지 낯선 관광지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I'm from Korea’다 요놈들아! 큰소리로 돌려주지만 몇몇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눈치다. 세계 12위의 GDP(Gross Domestic Product) 대국을 몰라보다니 괘씸한 놈들,

 

 

구시가지(Old Town)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내구경을 나가려고 했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투르노보의 대부분 지역이 불가리아의 역사·문화 사적지로 복구되어 고대의 건축물과 마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니 우리가 머문 호텔이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오가며 눈에 담았던 풍경에 만족하기로 하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경계에는 어머니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전몰자 추모비인 '어머니 불가리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네 가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라고 한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Hotel Premier Veliko Turnovo’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호텔. 1대 뿐인 엘리베이터도 캐리어를 갖고 탈 경우 2명이면 끝이다. 방뿐만이 아니라 욕실도 작아 샤워도 욕조에 들어가서 해야만 한다. 그나마 간단한 세면도구와 드라이기를 갖춘 건 다행이라 하겠다. 가운과 실내화를 비치해 놓은 건 의외였고 말이다. 식사도 다른 호텔들에 비해 처지는 수준이었다.

 

 

 

에필로그(epilogue) : 시간 부족과 빗줄기 때문에 둘러보지 못한 명소 두어 곳을 다른 이들의 글을 빌어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성 키릴ㆍ메토디 거리 주변에 위치한 성 니콜라 교회를 들 수 있다. 민족 부흥기인 1836년에 완성된 교회로 외관은 소박하나 인테리어는 매우 장엄하다. 또 키릴 문자를 고안한 수도사 형제 이름을 딴 성 키릴ㆍ메토디 교회가 있는데 종루는 거장 피체프가 만들었다. 그리고 지붕이 선명한 푸른색을 가진 성 처녀 강탄 성당도 있고, 성 디미타르 교회는 제2 불가리아 왕국의 아센 왕이 비잔틴 제국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둘째 날 : 플로브디프(Plovdiv)

 

특징 : 불가리아 제2의 도시로 트라케 평원에서 시작하여 120m까지 솟아오른 6개의 구릉 사이사이를 흐르는 마리차 강을 끼고 있다. 이 도시는 풀푸데바, 필리포폴리스, 트리몬티움, 필리베의 시간을 거쳐서 왔다. 고대 트라키아 시대에는 세 개의 언덕을 뜻하는 풀푸데바,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점령된 뒤에는 필리포폴리스, 기원 후 46년 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속주가 되면서는 세 개의 구릉을 뜻하는 트리몬티움, 1364년 오스만 터키의 식민지가 된 후에는 필리베,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 이름인 플로브디프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바뀐 도시의 이름만큼, 플로브디프는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져 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갖고 있다. 그 흔적은 구도심(올드타운)에 그대로 모여 있어, 여행자들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구도심((Old town))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에서 내리니 길바닥에 타일이 깔려있다. 차량이 일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보행자 전용도로라는 ’ulitsa rayko daskalov‘가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늘어선 건물들은 하나같이 중세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옛 건물들을 잘 보존해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알랙산드로 거리의 끝에 있는 스테판 스탐볼로프 광장(Stefan Stambolov Square)’이다. 프로브디프(Plovdiv)의 중앙광장으로 여행자들의 출발지이면서 되돌아오는 종착지이기도 하다. 광장에는 분수와 소공원 등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또한 주변에는 패션샵과 기념품가게, 야외 커피숍,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길거리 예술가들의 공연과 미술 전시회도 다채롭게 열린다고 한다.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시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구시와 자매결연(姉妹結緣)을 맺었다기에 주변을 살펴봤지만 우리나라와 관련된 기념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요즘 자매결연은 뉴스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흔한 행사가 아니겠는가.

 

 

구시가지의 중심 상업지구인 알렉산드로 거리(Knyaz Alexander I)’를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플로브디프(Plovdiv)’라는 지명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기원전 342년 마케도이아의 왕이었던 필리포스가 이곳에 있던 트라키아(Thracia)인들이 세운 유몰피아스(Eumolpias)’를 정복한 후 도시의 이름을 필리포폴리스로 바꾼 데서 유래되었단다. ‘알렉산드로라는 거리의 이름 또한 그와 같은 이유이지 않나 싶다.

 

 

 

 

중세풍의 거리는 한마디로 깔끔하다. 건물들도 새 단장을 한 것처럼 말끔하다. 하긴 누군가는 이곳 플로브디프가 수도인 소피아보다도 더 현대적인 도시라고 했다. 그는 또 카페나 바, 클럽들도 수준이 높으며 엔틱샵과 기념품가게들도 많고 물가도 저렴한 편이라고 했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로브디프는 2014년에 시작된 시민단체 ‘Plovdiv 2019’의 주도로 2019유렵 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로 선정된바 있다. ’카메니카 계단의 케스케이드(Water cascade down the stairs of the Kamenica)‘에 세워놓은 저 선정기념 조형물이 그 증거라 하겠다. 참고로 유럽 문화수도EU 회원국의 도시를 매년 선정하여, 1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각종 문화 행사를 전개하는 사업이다. 1983년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멜리나 메르쿠리가 유럽 문화도시(European City of Culture)‘ 사업을 제안했고 1985년 그리스의 아테네가 최초의 유럽 문화 도시로 지정되었다. 1999년 사업 명칭이 유럽 문화수도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다.

 

 

계단의 초입에는 밀료의 크레이지 동상(Statue of Milyo the crazy)’이 세워져 있었다. 플로브디프가 배출한 유명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밀료는 어두웠던 시대 속에서도 어린이들에게 웃음을 주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이곳에 기념비가 세워졌단다. 동상은 전체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돌고 있었다. 귀에다 대고 소문을 속삭이면 그 소원을 이루어주고 무릎을 쓰다듬으면 연인과의 관계가 원만해지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잠시 걷자 고대 유적이 나타난다. ’로마시대 경기장(Ancient stadium theater of Philippopolic)‘의 일부라는데 지표면보다 한참이나 아래에 있다. 이 경기장은 비잔틴시대에 더 이상 경기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자 통째로 위를 덮어버렸는데 그 일부를 발굴해 놓은 것이란다. 알렉산드로거리에 있는 엑셀시오르 쇼핑몰지하에서도 이런 관람석을 구경할 수 있다는데 일부러 가보지는 않았다. 건물을 지으면서 발견된 것이라는데 이곳과 별반 달라 보일 것 같지 않아서이다.

 

 

 

 

 

 

로마 하드리아누스황제 시대인 2세기에 지어진 이 경기장은 델피(Delphi)에 있는 경기장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길이 240m에 폭이 50m,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인데, 현재 북쪽 14열의 좌석만 복원되어 있다. 나머지는 플로브디프 구시가지 아래에 묻혀있단다. 참고로 AD 214년과 218년에 이곳을 방문한 카라칼라(Caracalla) 황제와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황제를 위해 경기를 거행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단다.

 

 

 

 

벽면에는 당시의 상황도를 그려놓았다. 그림만 봐도 엄청난 규모이다. 하긴 아까 출발지로 삼았던 시청사까지도 경기장의 일부였다니 오죽하겠는가.

 

 

한쪽 귀퉁이에는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쌓아놓았다. 어느 곳에 붙어있던 조각들인지는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옛스런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오스만 문화를 상징하는 드쥬야마 모스크(Dzhumaya mosque)‘가 스타디움(ancient stadium) 유적의 바로 옆에 서 있다. 1371년 오스만터키가 불가리아를 정복한 후 술탄 무라드 2(1421-1451)‘가 건립했는데, 발칸과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가운데 하나란다. ! 어떤 이는 이 모스크를 사연 많은 건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다양한 국가의 침공을 받으며 '고대 그리스 사원'에서 '카톨릭 교회'로 다시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1층이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고 했는데 이 또한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스타디움 유적 근처는 포토죤으로 유명하다. 중세풍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삼을 경우 멋진 풍경화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부근을 림스키 스타디온광장(rimsky stadion square)‘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드라주아 모스크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공원에는 작은 무대도 만들어져 있었으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악사들과 이야기도 나누어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벼룩시장도 열리고 있었는데 진열된 골동품과 그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이젠 중세시대의 불가리아를 만나볼 차례이다. 상점이 많은 거리를 지나는데 혹시 이곳이 카파나 거리(kapana street)‘일지도 모르겠다. kapana는 불가리아어로 덫이라는 뜻이다. 과거 이곳으로 실크로드가 지나갔고 신기한 물건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 덫에 걸린 것처럼 이 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동 중에 특이한 건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건물의 외벽이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는데,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라피티(graffiti)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혔다지만 환갑을 넘겨버린 난 그라피티는 낙서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별것도 아닌데 특이하게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

 

 

 

잠시 후 네벳테베 언덕 초입에 자리한 성모승천 성당(The Assumption of the Holy Virgin orthodox church)‘을 지난다. 9-10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나 1371년 오스만의 침입으로 파괴되면서 성당과 함께 있던 수도원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불가리아 르네상스시기인 1844-1845년 다시 세워졌는데, 불가리아의 종교적·국가적 독립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1859년 이 성당에서 최초로 불가리아어 미사가 집전되었고, 미사 후 주교는 당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있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단다. 오스만으로부터 불가리라가 해방된 후인 1881년에는 체코 건축가 비드조프(Novi Bidzhov)가 설계한 종탑이 교회 옆에 지어졌다.

 

 

 

 

가는 길에는 1868년에 세워졌다는 불가리아 최초의 고등학교도 만나볼 수 있다. 건물이 노란색으로 칠해졌다고 해서 ’The yellow school’이라 부르기도 한다. 학교의 맞은편에는 ‘St. Dimitar church’가 있다.

 

 

언덕 중턱에는 로마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인 고대 원형극장(Ancient theater of Philippopolic)’이 있다. 트리아누스가 재위하던 98-117년에 지어졌다니 대략 1900년이 된 셈이다. 7천명을 수용하는 28열의 좌석에는 지역도시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며, 로도피산이 조망되는 잠바즈 테페(Jambaz Tepe) 남쪽 경사면에 있어서 시내를 조망하는 즐거움까지 준다. 이 유적은 지하에 묻혀 있다가 산사태가 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단다. 현재도 오페라, 콘서트 등의 다양한 공연들이 정기적으로 열린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매년 6월 말에는 '베르디 페스티발'이 여기서 개최된단다.

 

 

 

 

이젠 올드타운을 꼼꼼히 둘러볼 차례이다. 올드타운은 보존이 잘 되어있어 거닐다 보면 마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역사유적들로 가득한 구시가지 전체가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 꾸면져 있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답게 색이 바랜 벽화와 곳곳에 놓인 동상들도 골목의 옛스러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첫 번째로 만난 건물은 ‘Lamartine’s House‘, 프랑스의 시인이자 여행가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1869)이 머물렀던 집으로 그는 이곳에서 받은 좋은 기억들을 자신의 여행기에 고스란히 담아냈단다. 외교관 출신이기도 했던 그는 불가리아가 터키로부터 민족부흥운동을 할 때 글을 통해 많은 정신적 지지를 해준 사람이란다.

 

 

 

 

 

그건 그렇고 이 건물은 1800년대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으로도 꼽힌다.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주택의 구조(1층 보다 2층이 넓은 구조)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곳을 지배할 때 맨 아래층의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매긴데서 시작되었단다.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1층을 좁게 지었다는 것이다. 기발한 절세(節稅) 방법이라 하겠다. 지금은 Old Town 지역에 새로 집을 지으려면 1층이 좁은 불가리아 양식으로만 지어야 한다니 이제는 아예 공개적으로 탈세를 하라는 모양이다.

 

 

언덕에서 바라본 플로브디프 시가지, 아쉽게도 플로브디프를 상징하는 6개의 언덕(불가리아어로는 Tepe)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탓에 언덕에 비중을 두지 않았고, 그 덕분에 카메라에 담을 생각조차 않았었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준비 없이 나선 여행이었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나머지 하나인 ‘7번째 언덕(Markovo tepe)’은 토목자재로 독일에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지금 ‘Markovo tepe mall’이 들어서 있단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식도락이다. 점심을 먹을 겸해서 찾아든 식당은 주인장보다 벽화가 먼저 반긴다. 불가리아의 전통혼례로 보이는 그림을 가운데에 두고 로마시대의 복장을 한 무리와 터키의 민속춤을 추고 있는 그림도 보인다. 이곳 플로브디프의 역사가 함축된 벽화라 하겠다. 점심 메뉴는 사츠(Sach)ch)‘ 커다란 철판에 닭고기 또는 돼지고기와 야채를 함께 넣고 굽거나 끓인 불가리아 전통 음식으로 우리나라 닭갈비와 흡사한데 까탈스런 내 입맛에도 딱 맞았다.

 

 

점심을 마치자 또 다시 투어가 계속된다. 여행자들에게 구시가지는 길 위에서 역사적 흔적을 만나는 곳이다. 좁고 비탈지고 굽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행자들은 집집이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쓴 문패들을 만난다. 길 위의 모든 집이 언제 지어진 누구누구 집 박물관이라는 분홍색 문패를 달고 있다. '의사 소티르 아토니아디의 집, 히포크라테스의 옛 의약박물관, 1872년 건축', '디미터 조지아디의 집, 1846~1848 건축, 국가기념문화재', '니콜라 네드코비치의 집, 1863년 건축, 국가기념 문화재' 등 대체로 18세기에 건축되어 국가기념문화재로 지정된 집들이다.

 

 

 

 

첫 번째 만남은 히포크라테스의 옛 의약박물관(Hippocrates old pharmacy)’이다. 1872년에 지어진 의사 소티르 아토니아디(Sotir Antoniadi)’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모양이다. 건물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하면 마당에 잡동사니들이 널려있는 걸 보면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에서는 건물의 외관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도 고스란히 보여준단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또한 옮기는 발걸음 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만난 하우스 뮤지엄은 불가리아의 대표적 화가인 '즐라튜 보야드지에브의 갤러리(Exposition Zlatyu Boyadzhiev)’이다. 플로브디프의 풍경과 민중들의 삶을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인데 건물 정면에 그의 초상화가 붙어있었다. 건물은 1858-1860에 지어진 ‘Dr, Stoyan Chomakov’의 집이라고 한다.

 

 

 

 

다음은 이콘박물관(Icon Exposition)이다. 이콘(icon, 聖畵)이란 동방정교회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나 불가리아만큼 이콘화를 압축해서 많이 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고 한다.

 

 

이콘을 위주로 한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도 여럿 보였다.

 

 

올드타운은 화려하거나 웅장하기보단 조금은 소박하다는 느낌이었다.

 

 

히사르 카피야(요새 문) 근처에는 동방정교회인 콘스탄틴과 엘레나 교회(Church of St Constantine and Helena)’가 있다. 기독교 공인 직후인 4세기에 세워진 플로브디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콘스탄티누스대제와 그의 어머니 엘레나에 헌정되었다고 한다. 여느 교회와는 다르게 이 교회는 성벽 안에 망루를 세워놓은 형태이다. 오스만제국 시대에 높은 담을 쌓아서 기독교회임을 숨긴 것이 그 원인이란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교회는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자하리 자그라프이반 파슈코우라의 이콘(icon)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방정교의 교회는 가톨릭에 비해 화려한 성화(icon)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히사르 카피아를 통해 올드 타운을 빠져나간다. BC 4세기에 만들어진 요새의 입구라니 역사적 의미가 깊은 문이라 하겠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가 만들었지만 지배자들이 바뀌는 과정에서 파괴와 복구를 반복해가면서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단다. 지금은 관광객들의 포토죤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저 돌길에 서려있는 수천 년의 세월을 담아가는 것이다.

 

 

히사르 카피야를 빠져나오자 동방정교회인 ‘Saint Nedelya Orthodox church’가 나온다. 바쁘게 걸어가는 가이드를 뒤쫓느라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길을 가다보면 아래 사진과 같은 현장이 보이기도 한다. 고대유적의 발굴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첫째 날 : 소피아(SOFIA)

 

특징 : 인천에서 이스탄불을 거쳐 도착하는 소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다. 푸른 숲의 공원이 많아 녹색의 도시로도 불리는 이 도시는 고대에는 트라키아인의 식민지였다. 29년 로마에게 점령된 후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군사근거지가 되었으며 이때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 후 고트족()과 훈족에게 파괴되었으나,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특히 이곳은 슬라브족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성채로 큰 몫을 했다. 8091018년 불가리아 제1왕국, 11941386년 비잔틴,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여 발칸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지점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점령되었고, 이듬해 불가리아인에게 넘어가 79년 수도가 되면서 행정·사법의 중심을 이루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만큼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6세기에 건축된 성 소피아성당,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성당, 회교사원 등 로마·비잔틴·투르크 등의 지배 하에서 건축된 유적들이 많이 있다.

 

 

 

소피아 여행의 시작은 대통령궁 근처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근처 지하에서 발견된 세르디카의 유적(Arheological Remains)’을 먼저 둘러보는 것으로 동선(動線)이 짜여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르디카(Serdica)’는 트라키아 계열의 세르덴 사람들이 만든 도시로 현재 소피아 구도심 지역에 위치한다. 세르디카의 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마케도니아와 로마 문화에 흡수되었으며,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98-117) 때 전성기를 누렸다. 광장과 극장, 목욕탕 같은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사원도 세워졌다. 그리고 2세기 말에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도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지하에서 발견되는 유적 대부분은 기원후 로마시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유적은 3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2~14세기, 이곳에는 세르디카(Serdica)’라는 도시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되겠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니 말이다. 이들 유적은 현재 지하에 있다. 2004년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그리고 구 공산당 본부로 연결되는 지하도를 건설하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동문으로부터 300m쯤 떨어진 곳에서 두개의 원형경기장이 발굴되기도 했다. 2세기에서 4세기까지 건설된 것으로, 5천에서 1만 명 사이의 관중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단다.

 

 

유적지 한켠에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 작업에 대한 기록들을 전시해 놓았다.

 

 

유적지의 한쪽 귀퉁이에는 성 페트카 지하교회(Sveta Petka Church)’가 있다. 구 공산당 본부 앞 광장에서 볼 때 지붕만 땅 위로 올라와 있는 건물이다. 이 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14세기에 건축되었는데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어졌다고 한다. 투르크인으로부터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소피아인들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라 하겠다. 교회 이름은 불가리아의 여성 성인인 성 페트카에서 따왔다고 한다. 창문도 없는 외관에 소박한 벽돌과 콘트리트 반죽으로 지어졌지만 고대 로마 사원을 기초로 해서 반원통형 돔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되어서 중세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도 손꼽힌다. 내부로 들어가면 소박한 외관과 달리 장식이 생각보다 화려하다. 15세기, 17세기, 19세기 때 그려진 예수의 일생에 관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반대편에는 바냐바시 모스크(Banya Bashi Mosque)’가 있다. 1576년 터키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로 둥근 돔(dome)과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탑(minaret)이 누가 봐도 회교사원인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 모스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참고로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건물 옆에 터키어로 목욕탕인 바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과거 소피아에는 70여 개의 회교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반야바시 모스크 하나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모스크 앞에는 분수공원이 있고 그 건너에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서 있다. 누가 봐도 궁전(宮殿)급으로 보이는 근사한 건물이지만 공중목욕탕인 소피아온천(Mineral Bath of Sofia)’이라고 한다. 191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온 46.8짜리 온천수가 류머티즘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참고로 우측의 길쭉한 기둥은 목욕탕 시절 사용하던 굴뚝이란다.

 

 

 

 

건물의 한쪽 귀퉁이에는 식수대(食水臺)를 만들어 놓았다. 오직 마시는 용도로만 사용하라는 경고판의 문구가 재미있다. ‘목욕과 세탁은 물론이고 설거지도 안 된단다(No bathing, no washing, and no washing-up)’, 사진에는 없지만 약수터도 만들어져 있었다. 커다란 물통에다 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걸로 보아 식수(食水)로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음은 광장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아치형 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장으로 연결된다.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 부서진 바위덩이들이 널려있다. 근처에서 출토된 유물들일 것이다.

 

 

잠시 후 스베타 네델리아 광장(Sveta Nedelya Square)’에 이른다. 과거에는 레닌광장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가 된 지금은 소피아 동상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광장의 이름도 네델리아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소피아 여신상은 왼손엔 부엉이 오른손엔 월계관을 들고 있다. 부엉이는 어두운 밤에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둡고 보이지 않는 곳에도 지혜의 여신이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어색한 점도 보인다. 어깨에 올라앉아 있어야 할 부엉이가 여신의 팔뚝에 앉아 있는 것이다. 팔이 저릴 텐데도 말이다.

 

 

광장은 예로부터 소피아의 중심이었으며 지금도 주요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전차의 기점이 됨은 물론이다. 광장 주변에는 구공산당본부(아래 사진의 중앙)과 성 네델리아교회, 대통령궁과 쉐라톤호텔, 국영 백화점(TSUM) 등이 위치해 있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구() ‘공산당본부(The Council of Ministers building)’는 현재 의원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공산당본부로 사용될 때에는 로켓 같은 첨탑의 꼭대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거대한 별이 매달려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단다. 1990년 민주화 시위 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성 네델리아교회(Sveta Nedelya Cathedral)불가리아정교회의 예배당으로 1856~1863년에 건축된 것이다. 네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인 거대한 돔과 화려한 벽화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특징인 이 교회는 10세기경 처음 지어질 당시 자그만 목조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스만 왕조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나서 주변의 여러 교회와 신학교들이 모여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회로 발전되었단다. 1925년에는 이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황제를 노려 폭탄을 설치한 것인데 무려 1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단다. 황제는 다행히 무사했다. 폭탄 사건 이후 망가진 교회는 다시 복원되었고, 정면 벽에는 테러 당시 희생자를 기리는 문구가 부착돼 있다. 참고로 네델리아는 일요일이란 뜻이란다.

 

 

다음은 비토사거리로 갈 차례이다. 이동 중에 대리석 석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불가리아 대법원(Palace of Justice)’이란다. 웅장한 외모의 건물 앞은 두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사자는 불가리아를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듯이 이곳 불가리아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땅 모양이 사자처럼 생겼다고 여긴단다.

 

 

 

 

그런데 사자의 걸어가는 모양이 많이 어색해 보인다. 오른쪽 앞발과 뒷발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왼쪽 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멍청한 사자(idiot lion)’라고 적은 글을 본 것도 같다. 그는 작가의 실수로 인해 졸지에 멍청이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자라고 적었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앞발과 뒷발을 번갈아가며 움직이는 게 정상이지만 어떨 때는 두 발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가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기에 이론을 달아봤다.

 

 

거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1900년 전후의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다른 류의 건물들이 혼재해 있는데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늦게 지어진 건물들도 하나같이 벽면에다 예술성을 더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옛 모습을 유지하려는 불가리아인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 아닐까 싶다.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트램(tram, 路面電車)이 지나가는 게 보인다. 이밖에도 지하철이나 버스, 트롤리버스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운행시간이 대체로 정확한데다 정류장도 도시 곳곳에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이용이 편리하단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거리의 악사라고 없겠는가. 이른 오후라서 인지는 몰라도 호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앞에 놓은 바이올린 케이스도 텅 비어있었음은 물론이다.

 

 

잠시 후 비토사(Vitosha)’ 거리에 도착했다. 소피아 구도심에서 남쪽으로 뻗은 이곳은 소피아 최대의 번화가로 명품 상가들과 토산품가게, 카페들이 밀집해 있다. 보행자 거리로 조성돼 산책도 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매우 쾌적한 장소다. 저녁에는 젊은이들의 생동감도 느껴볼 수 있다고 했는데, 한낮이어선지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걷다보면 해발 2290m인 비토사산(Vitosha Mt.)이 조망된다. 거리의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누군가는 최고봉인 클라니체흐(Cherni Vrah)도 눈에 띈다고 했는데 어떤 봉우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장미로 만든 제품들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장미비누는 물론이고 장미오일장미수도 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장미오일은 전 세계 생산량의 85%를 이곳 불가리아에서 책임질 정도란다. 불가리아의 별명이 '발칸의 붉은 장미'가 된 이유이다. 하지만 집사람의 관심은 불가리아의 또 다른 특산품인 유산균에 쏠려 있었다. ()이 아니라 알약을 팔고 있던 탓에 구입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거리의 특징은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주문을 한 뒤, 화장실 이용 방법을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스타박스에서 집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나는 물론 이 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카메니차맥주다. 슈멘스코와 자고르카, 스토리치노, 피린스코 등 불가리아에서 생산되는 맥주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가 카메니차이기 때문이다. 경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은 여행자라면 가격이 가장 싼 피린스코를 주문하면 된다. 참고로 이곳 불가리아는 기후적으로 맥주를 비롯해 와인 및 각종 주류의 맛이 뛰어나다고 유럽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국가 중 하나다. 불가리아 와인과 맥주는 높은 질에 비해 브랜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타 유럽산 제품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 대통령궁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음 내키는 곳을 찾아보라는 모양이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대통령궁과 쉐라톤호텔의 사이에 숨듯 들어앉은 성 게오르기 교회(Rotunda Sveti Georgi Pobedonosets)이다.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목욕탕으로 태어나(2세기) 교회로 자랐고(5세기 역할변경) 시집가서 모스크로 살다가(16세기 튀르크에 정복당함), 이혼 후 교회로 돌아온 사연 많은 건물이다. 이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로마 제국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는 트라키아의 세르디족의 정착지였던 이곳에 매료되어 제국의 소도로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로까지는 만들지 못하고 훌륭한 건축물들을 많이 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게오르기 교회 하나 밖에 없어 로마제국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 되었다.

 

 

 

교회는 로마시대 목욕탕과 연결된 지름 9.5m에 높이가 13.8m인 원형 건물로 세워졌다. 수도와 난방시설이 잘된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귀족들의 휴게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교회는 9세기 무렵 불가리아 사람들에 의해 성 게오르기 교회로 불리게 된다. 디아클레티아누스 때 박해를 받다 죽은 성인 게오르기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이때 교회 내부에 불가리아식 벽화가 그려졌고,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변해온 회화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1183년까지 불가리아의 수호성인 이반 릴스키(Ivan Rilski)의 유해가 모셔지기도 했단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들어있는 건물이다. ‘대통령궁(The Presidency building)’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도 썩 대단해 보이지 않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절반은 호텔로 쓰고 절반만 대통령 집무실로 쓴다고 한다. 소박한 국정운영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건물의 정면은 전통복장을 입은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매일 정오에 치르는 교대식이 볼만한 것으로 알려진다. 보초를 서고 있는 문의 위쪽에도 불가리아의 상징인 사자문장을 붙여놓았다.

 

 

 

 

 

이젠 소피아 투어의 종착지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로 갈 차례이다. 가는 길에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고고학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이다. 불가리아의 고대유적과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곳이란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앞에는 고대의 주춧돌, 기둥, 묘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BC 3,000~4,000년 전의 유물이 저곳에 전시되어 있는데도 가이드의 뒤꽁무니만 쫒다보니 눈도장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부터 알아왔더라면 자유 시간 때 들러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겠다.

 

 

 

 

두 번째는 국립민속지리박물관(national ethnographic museum)’과 국립미술관 ‘national art gallery)’이다. 불가리아 왕궁이었던 건물인데 이곳에는 불가리아 고유의 인종 및 문화에 기여해 온 민속의상과 청동기, 금속 공예품, 목각화, 도자기, 직물 및 전통 자수품,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불가리아 출신 화가들의 작품도 물론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거리는 중세풍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누군가는 특별히 지도를 들고 찾지 않더라도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기독교, 이슬람, 유대인들의 기념물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도시가 소피아라고 했다.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이 충돌했던 발칸지역 특성이 도시 전체에 남아있다면서 말이다. 그런 특성을 살리기라도 했었는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건물들까지도 중세풍의 외모를 지녔다.

 

 

 

 

그렇다고 모든 건물이 다 중세풍인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답게 현대식건물들도 즐비했다.

 

 

소피아는 '녹색의 도시'라는 별칭처럼 크고 작은 공원에 우거진 숲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로 가다 길에는 그런 공원도 지나게 된다. 공원에는 여러 종류의 조각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치켜 든 채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소망하는 동상이 보이는가 하면, 포즈가 가지각색인 군상(群像)도 세워져 있다. 머리를 숙이고 고뇌하는 사람, 한손을 이마에 대고 고민하는 사람, 두 손을 들고 소원을 비는 사람, 칼이나 막대기를 들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 어깨를 서로 감싸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이다. 그 옆에는 깃발을 들고선 동상도 보인다.

 

 

 

 

길 건너편에는 왕관을 쓴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양손에 칼과 십자가를 든 형상인데 키릴문자로 적혀있어서 누군지는 알아 볼 수 없었다. 동상의 앞에 꽃다발이 놓여있는 걸로 보아 독립영웅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공원 근처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는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물건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자수품과 의류, 그림, 오래된 시계나 카메라, ·칼 같은 전쟁무기류 등을 팔고 있었는데, 특히 목판이나 동판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이콘(icon : 聖畵)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보다 좀 더 원색적이고 사실적이다. 예술성은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조금 더 걷자 소피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Alexandar Nevski Memorial Church)’이 나온다. 러시아의 건축가 알렉산더 포만체프의 설계로 1912년에 지어졌는데,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발칸반도 최대의 사원이자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고 한다. 40년이 걸려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60m의 금색 돔을 비롯하여 12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비잔틴 양식이다. 불가리아 독립의 계기가 된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전사한 20만 명의 러시아 병사를 위령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단다.

 

 

12개의 돔으로 이루어지 성당의 외관은 아름답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을 뿜어내기까지 한단다. 전하는 얘기로는 금색 돔을 위해 러시아에서 금 20톤을 기증 받았다고 한다. 내부 장식 또한 화려하다. 이태리의 대리석, 이집트의 설화석고 브라질의 목재와 금으로 장식 되어 있다. 벽면에는 러시아와 불가리아의 유명화가들이 그린 성화들이 가득하여 보는 이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제대가 보인다. 가운데 문이 있고, 양 옆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동방정교에서 모두 그렇듯이 최후의 만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 제대 위에는 화려한 아치가 감싸고 있다. 성당 내부의 3개 돔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부는 하느님을 말하고 성자는 예수를 말한다.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하늘로부터 뻗어내려 오는 빛의 형태로 표현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은 외적인 크기, 내적인 예술성 그리고 종교적인 위상 등에서 불가리아 최고의 성당이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성당 근처에는 성 소피아 성당(St. Sofia Church)’이 있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Ayasofya)’과 동명인 이곳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당이다. 오스만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었고 지진 등으로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1900년 이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수도 소피아의 이름은 이 교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르디카였던 도시의 이름이 소피아로 개명된 계기는 동로마 제국의 황녀인 소피아와 관련이 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는 병약한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당대 온천도시로 유명했던 세르디카에서 요양한 후 치유된 것을 계기로 이 교회를 봉헌했고, 이를 계기로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gallery for foreign art)도 외관만 구경했다. 인도 고아지방의 독특한 미술작품과 일본의 전통목판화 등 해외 미술작품과 함께 불가리아의 유명 건축가. 미술가 편곡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1888년 설립되었다는 소피아대학(Sofia University ‘Kliment Ohridski’)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저 건물은 프랑스의 건축가인 Breasson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Ephoria EvlogiHristo Georgiev 형제의 후원으로 1937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학교의 이름은 키릴문자를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키릴(Cyril)과 메소디우스(Methodius) 형제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의 하나인 성 클레멘트 오흐리디스키(Kliment Ohridski, 840~916)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에필로그(epilogue), 불가리아에서는 예스노우가 우리와 정 반대라고 한다. 그들은 ‘Yes’를 표현할 때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단다. 반대로 ‘No’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이는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략과 정복을 당해 온 불가리아 역사의 집합체이자 결과물이란다. 불가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 불가리아인들은 로마에 맞서 자신들의 영토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이에 대한 로마 군인들의 처벌은 잔혹했다. 체포된 포로의 입에 칼을 집어넣고 저항을 포기하면 살려준다고 설득하는 로마군인들에게 불가리아 전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식 ‘No’가 만들어진 배경이란다. 로마인들 눈에는 그것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으로 저항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단다. 그런 로마인들의 유적들도 불가리아는 자신들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단호하지만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우리가 배워야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첫째 날 :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특징 : 불가리아(Bulgaria) :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 북쪽은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7세기 말 터키족의 일계인 불가스족이 볼가불가스왕국을 건설하였으나 터키의 동유럽 진출 통로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1396년부터 500년간 오스만투르크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18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결과 자치공국이 되었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독립했다. 1945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 신헌법을 채택 현재의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이 탄생했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으며 우리나라와는 1990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현재 상설공관을 두고 있다. 주민은 불가리아인이 전체 인구의 83.6, 터키인이 9.5, 그밖에 집시·마케도니아인·아르메니아인·러시아인·그리스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불가리아어이며, 터키어·마케도니아어도 쓰인다. 종교는 불가리아정교가 82.6, 이슬람교가 12.2, 가톨릭이 1.7%이다.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 ‘릴라산(Rila mt)’ 릴스키 마나스틸(Rilski Manastir)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10세기경 동방정교회(Orthodox Church)의 성자 반열에 오른 운둔자로 알려진 이반 릴스키(릴라의 성요한)’가 설립했다. 그를 따르던 신자들과 순례자들이 그의 은신처 주변에 촌락을 이루면서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로 점차 변해 갔다. 이반 릴스키 성인은 치유 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성인이었다. 그가 죽은 후 통치자들은 그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유골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1459년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안치되었다. 14세기 초 큰 지진이 일어나 수도원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이 지방의 귀족인 프레리요 드라고보라가 견고한 요새 형식으로 다시 지었다. 1833년에는 대화재로 인해 수도원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어 지금에 이른다. 198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불가리아 여행은 소피아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불가리아는 발칸국가들 중에서도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에 속한다. 그래선지 나라의 관문이랄 수 있는 공항의 규모 또한 작다. 입국절차를 마치면 가장 먼저 환전소가 눈에 띈다. 이곳 불가리아는 자국 화폐(레프, 불가리아어로는 레바)만 통용된다고 봐야 한다. 가지고 온 유로나 달러를 현지화폐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공항에서 바꿀 필요는 없겠다. 시내의 환전소를 이용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원화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소피아로 오는 도중 올 봄에 오픈했다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절차가 이루어졌다. 터키의 관문인 아타튀르크 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을 대체하기 위해 건설된 신공항이자 터키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새로 지어선지 비행기에서 내린 후 출국장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있었으나 내부시설 만큼은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소피아로 가는 비행기도 역시 터키항공이다. 크기만 조금 작아졌을 따름이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높디높은 산들이 눈길을 끈다. 이곳 소피아의 해발고도가 700-800m라니 저 산들은 2,000m는 너끈히 넘겠다. 그 증거는 아직까지도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비토샤산(Vitosha Mt.: 2,290m)스타라플라니나(Stara Planina) 산맥일 게고 말이다.

 

 

 

 

소피아 시내을 빠져나오는데 기괴하게 생긴 건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잡아봤다. 비스듬하게 기운 건물이 쓰러지기 직전인데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디자인이 만들어낸 착시효과였다. 똑바로 선 기둥이 안쪽에서 건물을 떠받히고 있었던 것이다.

 

 

외벽을 그림으로 채워놓은 건물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도시의 미관을 한결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어수선한 그라피티(graffiti)도 자주 나타났다. 요즘은 예술로 뿌리를 내렸다고 하지만 나이 먹은 내 눈에는 아직까지 낙서로만 여겨지는 장르이다. 참고로 그라피티는 고대 동굴벽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태깅(tagging)이라고도 한다.

 

 

소피아에서 릴라까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2시간 가까이 소요되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도 들른다. 매장의 안을 통과해야만 이를 수 있는 화장실의 특성상 나올 때 커피 한잔쯤은 팔아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휴게소이다.

 

 

점심 식사는 릴라수도원 근처에서 했다. 계곡의 가장자리에 지어진 아담한 식당인데, 식사보다는 하룻저녁 묵어가고 싶은 외관을 지녔다. 장식용 소품들도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음식 역시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예쁜 접시에 담긴 샐러드는 맛과 신선함을 함께 갖췄고, 콩 스프는 은은하면서도 맛이 깔끔했다. 다만 메인 요리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송어가 나왔다는 게 나로서는 불행이랄까. 다른 이들은 맛있게 먹었음은 물론이다. 앙증맞게 생긴 잔에 담겨져 나오는 디저트용 커피도 눈길을 끌었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그리스 방향으로 117km쯤 더 가면 릴라 산이 있다. 산으로 들어서서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속세와 떨어진 한적한 수도원이 나타난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크다는 릴라 수도원이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일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불가리아의 종교 및 문화 본거지였다고 한다. 수도원은 성당을 한가운데에 놓고 3~4층 건물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외부로 노출된 벽면의 창은 작게 만들었다. 1~2층의 것은 특히 작다. 첫 인상에서 요새(要塞)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맞다. 14세 초, 큰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자 이 지방의 귀족인 흘렐리요 드라고볼라가 외적인 공격이나 자연재해에도 끄떡없게끔 요새형식으로 견고하게 다시 지은 때문이란다.

 

 

수도원 방문은 성서로부터 시작된다는 느낌이다. 아치형 문의 천장이 성서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절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릴라수도원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수떨어진 곳에 있던 원래의 수도원은 13세기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단다. 흐렐류(Stefan Hrelyu)라는 이름을 가진 지방 봉건왕의 기부 덕택에 새로 지어졌는데 이때 터를 잡은 곳이 현재의 자리라는 것이다. 수도원은 성인의 유해가 옮겨진 1469년 이후 발칸 지역 전체의 순례지가 되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 불가리아 르네상스의 최고 세력 집단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이 기능은 계속되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판석(板石)으로 덮여있는 너른 마당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마치 유리처럼 윤기가 돌고 있다. 얼마나 많은 고행자들이 얼마큼 오랫동안 저길 거닐었기에 저런 모습으로 변했을까?

 

 

성과 같은 수도원 내부의 모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부정형 회랑과 벽이 중정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오묘한 자리에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된 성모탄생 교회(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ssumption)’가 들어앉았다. 그리스 십자 모양의 평면에 둥근 지붕 24개를 얹은 3랑식(三廊式) 성당이다. 얼룩말 무늬(흰색과 검은색의 가로줄)로 된 회랑(回廊)3개의 커다란 펜던티브 돔(pendentive dome)’이 특히 눈길을 끈다. 펜던티브 돔은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처럼 기둥 없이 큰 공간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건축구조 양식이다. 그나저나 1842년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아타나시오스 탈라두로(Athanasios Taladuro)가 설계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건물 너머의 거대한 산맥에 눈길이 간다. 깊은 숲 속에 들어앉은 수도원은 하나의 거대한 이콘처럼 느껴진다. 그래선지 현수도원을 한 바퀴 빙 도는데 그저 침묵만이 존재했다. 간간이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수도사들도 보였다. 문득 상업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나만의 오해였을까? 신심 깊은 불가리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니 나만의 오해였음이 분명하다.

 


 

 

 

 

 

교회의 외부 벽면과 천정은 선명한 빛깔의 프레스코화(fresco : 덜 마른 석회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채화하는 기법)’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다. 19세기에 그려졌다는데 그 숫자가 1,200여 점에 달한단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성서의 장면들과 수도원 근처의 생활 모습이 담겨있다고 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한 방편으로 그려졌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이 프레스코화들은 자하리 조그래프와 디미타르 조그래프 형제 등 많은 화가들이 참여했던 걸로 전해진다.

 

 

 

 

 

 

 

 

 

 

 

 

프레스코화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내게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경이로운 그림들이다. 소멸될 뻔했던 저 성화들은 전국의 수많은 화가가 힘을 합해 복원했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의 노력이 모인 만큼 색과 형태 또한 다양하다.

 

 

 

 

수도원의 설립자인 이반 릴스키(Ivan Rilski, 876-946)’를 그려놓은 인물화도 보인다. ‘릴라의 성요한으로도 불리는 그는 불가리아의 동방 정교회 성인(聖人)이다. 오소고보 산맥(Osogovo) 기슭의 스크리노(Skrino)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는 예수를 존경했다고 한다.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 주면서 수사가 되었다. 높은 산에서 수도 생활을 했지만 외부 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릴라로 떠났고 밤낮으로 하느님에게 기도를 했다. 어느 날 목자가 이반을 발견한 뒤부터 이반을 경건히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성당과 수도원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자비로움과 기적을 행했던 이반은 불가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성모승천교회옆은 흐렐류 탑이 자리 잡았다. 1833년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건축물이다. 덕분에 처음 만들어졌던 1335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외벽의 벽화 역시 처음 그대로 남아 있어 14세기의 종교화를 엿볼 수 있단다. 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높이가 25m흐렐류 탑5층은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에 바치는 예배당으로 꾸며져 있으며, 14세기 후반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단다.

 

 

수도원을 외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수도원 건물의 한쪽 귀퉁이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안으로 들면 4,100여 점의 서류와 필사본 그리고 기도문, 이콘 등의 수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란다. 눈으로만 보고 가슴속에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2(1790-1802)에 걸쳐 제작되었다는 라파엘의 십자가이다. 길이 50cm의 이 십자가에는 140여 개의 성서 장면들이 새겨져 있고, 등장인물만 해도 무려 1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십자가 양면과 측면 등 모든 부분을 얼마나 공 들여 섬세하게 조각을 했던지, 작가 라파엘은 십자가 조각을 마친 후 결국 눈이 멀고 말았단다. 이밖에도 비잔틴 전통의 계보를 잇는다는 십자가도 있었다. 릴라수도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십자가는 내부를 깊이 파서 바탕을 만들고 예수 고상을 돋을새김으로 부조했다. 예수상의 형태는 비잔틴 시기의 십자가 처형 상의 원형이 되는 이콘(icon : 동방정교회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을 닮았단다. 십자가의 명패는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 : 동방정교회를 믿는 슬라브어 사용자들을 위해 개발된 표기체계)가 새겨져 있다.

 

 

 

 

박물관의 외벽이랄 수 있는 회랑의 벽면에는 역사적 이야기가 담긴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수도원의 역사는 그 훌륭한 외관에 뒤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이 수도원은 은자들로 이루어진 수도원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이반 릴스키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치유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유명했으며, 그런 이유로 중세의 통치자들은 무척이나 그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단다. 유골은 1183년 에스테르곰으로 갔다가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를 거쳐 결국 1469년 릴라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원 건물 자체도 빈번하게 약탈당하고 이를 다시 짓는 일을 계속해 오느라 유골에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냈다. 현재의 건물은 불가리아가 강력한 부흥기에 들어섰던 시대인 1830년대에 건축됐다.

 

 

수도원은 성모승천대성당을 한가운데 두고 4층 건물이 빙 둘러 선 모양새이다. 4층 건물은 석조와 목조로 지어졌는데, 섬세한 난간 조각품과 얼룩말 무늬 아치형 기둥이 줄지어 미의 극치를 이룬다. 수도원 건물은 흐렐류 탑보다도 더 높다. 그래서 맨 위층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내부의 모습이 일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금()줄이 쳐져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수도원의 곳곳을 눈과 사진에 담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다. 1833년 우연히 일어난 화재로 대부분이 불타버렸던 것을 1834년 오스만제국의 허가를 받아 30여 년의 복원작업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단다. 8,800의 대지 위에 수사들의 독방 300, 예배실 4, 도서관,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손님용 방, 높이 22m에 이르는 굴뚝이 있는 수도원관리실 등을 건설했다.

 

 

 

 

침묵만이 허락된 곳, 이곳 릴라수도원은 '동방교회의 어머니'라 불린다. 발칸반도 최대의 수도원이기도 하다. 수도원 내에 성 요한의 유골이 안치돼 있어 신자들은 이곳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수도원을 둘러보는데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참고로 터키가 오랜 세월 불가리아를 지배하던 시절 기독교를 금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불가리아어로 된 서적을 읽는 것조차 제한했지만 릴라 수도원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그래서 불가리아 문화 지킴이 구실을 수행해온 이곳은 풍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역사까지도 아름다운 곳이다.

 

 

 

 

동상도 하나 세워져 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룻밤을 머문 스위트호텔 소피아(Sofia Suite Hotel)’

소피아 외곽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이다. 깔끔한 느낌의 객실에는 면도기만 보이지 않을 뿐, 세면에 필요한 일회용품을 모두 비치되어 있었다. 드라이기도 보인다. 커피포트 곁에 티백(teabag)도 놓아두었으니 맘에 드는 걸로 한잔 마셔볼 일이다. 이곳 소피아의 수돗물은 식수로 가능하다니 구태여 페트병의 물을 일부러 사용할 필요는 없겠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여덟째 날 : 블루 모스크(Blue Mosque)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ı)

 

특징 :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이다. 오스만 제국 제14대 술탄인 아흐메트 1에 의해 1609년 착공되어 1616년 완공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21,000여 개의 푸른색 문양 타일로 장식된 내부로 인해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도 불린다. 이 시기의 모스크는 대형 돔 1개와 반원형 돔 4개 사이에 조그만 돔 4개를 두어 균형감을 이루며, 4기의 미나레트(뾰족탑)를 세웠다. 블루모스크에는 6개의 미나레트가 있는데, 이는 맞은편에 위치한 하기아 소피아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아흐메트는 성소피아 성당을 이슬람교가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큰 모스크를 만들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소피아 성당 보다 한참 후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돔(dome) 크기를 더 키울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소피아성당을 지은이들의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모스크 내부는 높이 43m, 지름 23.5m의 돔과 260개의 푸른빛의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모스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불린다.

 

 

 

다시 돌아온 이스탄불, 오늘은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블루 모스크(Blue Mosque)’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둘째 날 성 소피아대성당을 방문할 때와 같은 장소에서 멈춘다. 그만큼 두 건축물이 가깝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두 곳 모두 이곳 구시가지(술탄 아흐메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곳 술탄 아흐메트 지역은 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프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대성당 등이 있으며,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오늘도 역시 거대한 성벽에 뚫어놓은 아치형 문을 지난다. ‘술탄 아흐메트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만 한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길이 둘로 나뉜다. 곧장 직진할 경우 성 소피아대성당으로 연결되니,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아치형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모스크의 첨탑과 외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니 앞뜰 정도로 봐도 되기 않을까 싶다. 아니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공원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이 광장의 특징은 블루모스크의 주요 볼거리들 가운데 하나인 첨탑(minaret, 이슬람교 사원의 외곽에 설치하는 첨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첨탑은 미나레트라고 부르며 뜻은 빛을 두는 곳, 등대이다. 초기에는 둥근 원통형이었지만 나중에 발코니를 두었다. 이곳 블루모스크에는 미나레트가 여섯 개나 된다고 한다. 모스크들은 대게 둘에서 넷 사이의 미나레트를 세우는 게 보통이고, 이슬람 성지(聖地)인 메카의 모스크만이 유일하게 여섯 개를 세울 수 있다는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나레트가 이슬람의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단다. 물론 야사(野史). 터키어로 6알투(Altu)’, 황금은 알툰(Altun)’이다. 왕은 알툰, 즉 황금 미나레트를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건축가는 그걸 알투, 즉 여섯 개를 세우라는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건축가의 귀가 어두워서 그리 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 더 설득력 있다. 미나레트마저 황금으로 세우면 나라 곳간이 완전 바닥날 걸 염려한 건축가가 알툰대신 알투미나레트를 세웠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이슬람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메카의 모스크만이 미나레트가 여섯 개였기 때문에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사람들이 꾸며 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기왕 미나레트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용도에 대하여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흔히 미나레트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장소라고 설명된다. 무슬림은 해뜨기 한 시간 반부터 해 뜰 때까지 한 번, 정오를 지나 15분쯤에 한 번, 정오가 3시간쯤 지난 뒤에 한 번, 해가 진 뒤 5분에서 한 시간 사이에 한 번, 잠들기 전에 한 번, 모두 다섯 번 기도를 해야 한다. 모든 모스크들은 사람들이 이 시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게끔 무아진(Muazzin)’이라고 하는 목청 좋은 독경사가 아잔(adhan, 신자에게 예배를 알리는 소리)을 불러 기도시간을 알려준다. 이때 아잔을 하기 위해 오르는 장소가 바로 미나레트인 것이다. 이런 미나레트는 압바스왕조 무렵 성소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 전에는 모스크의 현관이나 지붕이 기도를 알리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대형 스피커가 무아진을 대신하고 있다니 참조해 두자.

 

 

그런데 모스크로 들어가는 주변 풍광이 전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히포드럼 광장으로 연결되 있었고, 정문(正門)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갔었다. 또한 당시에는 문의 위쪽에 자 모양으로 쇠사슬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술탄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행여 고개라도 들고 들어갈까 봐 조심하라고 걸어놓았다는 그 쇠사슬이 말이다. 그 줄까지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남문의 앞일지도 모르겠다.

 

 

 

입장시간을 기다리면서 바라본 블루모스크’,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이었던 아흐메트 1의 지시에 의해 지어진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건축가 시잔의 제자인 센테프카르 메흐메트 아가(Sentefkar Mehmet Ağa)’1609년 착공을 시작해 1616년 완공했단다. 그는 아야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는 한편 더욱 발전시켰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의 모스만제국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1606년은 합스부르크왕가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제국과 13년간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져오던 전쟁을 마무리하는 지트바토르크(Zsitvatorok)’ 협정을 맺은 해이다. 오스만제국이 유럽에서의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첫 번째 사례였다고 보면 되겠다. 자존심이 상한 술탄은 알라께 모스크를 바쳐 위안을 삼고 오스만제국의 위용을 널리 알리고자 모스크의 건립을 결심하게 된다. ‘성 소피아대성당이 마주보이는 곳에다 위치를 선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유럽에 대한 우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막대한 재정 투입을 염려한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 블루 모스크이다.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모스크의 내원(內園)이다. 상당히 넓은 뜰인데 작은 돔(dome)으로 이루어진 회랑(回廊)이 건물을 감싸고 있다. 뜰의 가운데는 육각형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샤드르반(sardirvan)’이 아닐까 싶다. 만일 저게 세정시설(洗淨施設)’이었다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무척 어수선한 풍경이다. 보수공사를 하느라 많은 부분을 장막으로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첫날에 들렀던 그랜드 바자르도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던 걸로 보아 터키는 요즘이 보수공사 시즌인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스크의 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우리들처럼 기도가 없는 틈새 시간을 이용해서 모스크의 내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기도가 있는 시간, 특히 금요일에는 이교도(異敎徒)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랑에는 각종 자료를 담은 패널(panel)들을 게시해 놓았다. ‘블루 모스크의 내·외부 사진들이 실려 있는 걸로 보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전지식을 쌓아두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들어가느라 읽어볼 짬은 낼 수가 없었다.

 

 

이젠 기도 공간(실내)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하지만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신발을 벗어서 비닐봉지에 넣은 다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들은 반드시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야 한다. 무릎이 나오는 차림도 안 된단다. 그렇다면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관광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스크에서 스카프와 긴 망토를 무료로 빌려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집사람은 이런 번거로움이 싫다며 아예 입장을 포기해버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블루 모스크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게시되어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모스크는 354개의 크고 작은 돔들을 4단으로 배치하여 올린 다음, 마지막 네 개의 작은 돔(dome) 위에 직경 23.5m의 커다란 중앙 돔을 올렸다. 거대한 중앙의 돔이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작은 돔 위에 얹혀 있는 형태는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작은 돔들은 각각의 아치 위에 올렸고, 거대한 중앙 돔은 역시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본당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중앙 돔의 까마득한 천청과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고색창연한 빛들의 축제이다. 빛 때문에 얼른 눈에 안 띄었지만 모스크 내부의 위쪽 벽은 대부분 푸른 색상의 타일로 덮여있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돔의 천정과 벽면은 21,043장의 청···홍색의 이즈니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단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정교하고 현란한 무늬들은 안정된 조화와 대칭을 끊임없이 이루어내고 있다.

 

 

 

 

 

 

(hall)의 중앙에 서서 고개를 들어보면 가운데의 커다란 돔(dome)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arch)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눈에 꽉 찬다. 직경이 5m인데 사람들은 코끼리 다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블루모스크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네 개의 작은 돔이 받치고 또 이 돔들을 그보다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형태로 지었다. 그렇게 하중을 분산시킨 뒤 결정적으로 네 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받쳐놓은 것이란다.

 

 

사원 중앙의 엄청나게 너른 홀은 딱 반으로 나눠서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예배를 보는 곳으로 구분해 놓았다. 기도공간은 관광객들이 넘어갈 수 없도록 얕은 칸막이로 금()줄을 쳐놓았다.

 

 

관광객들에게 할애된 공간은 의외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보이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예배공간이 다르다. 블루모스크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의 예배장소를 2층에 배치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존을 위한다며 통행을 막아놓았다.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도 역시 막혀 있다. 물론 여성들의 기도처를 홀의 맨 뒤편에 재배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모스크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현란한 아라베스크 문양들이다.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다른 이의 글을 옮겨본다. <벽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 타일에 적힌 글씨는 오스만터키 최고의 서예가인 세이드 카심 구바리(Seyyid Kasim Gubari)’의 솜씨라고 한다. 그리고 원형 판 위에 적힌 칼리프의 이름과 쿠란의 구절들은 17세기의 서예가인 아메틀리 카심 구바리(Ametli Kasim Gubari)’가 썼다고 한다.>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출구에 미니어처(miniature)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블루 모스크를 축소시켜 놓은 모양인데 화려하기 짝이 없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면 성 소피아대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둘러본 블루 모스크를 지었던 아흐메트 1가 앞지르고 싶어 했다는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성소피아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지어보겠다는 황제의 꿈은 이뤄진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블루모스크의 중앙 돔의 지름은 23.5m, 높이는 43m. 성소피아 성당은 지름이 33m에 높이가 56m. 건물 전체로 봐도 블루모스크는 길이 51m에 너비가 53m고 성소피아 성당은 길이 77m에 너비 71.7m로 차이가 난다. 하중을 분산하는 등의 건축술 역시 1000년 전에 지은 성소피아 성당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품에 외형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그저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것만으로 평가 받았으면 좋겠다.

 

 

지하궁전으로 이동하는 길에 모스크의 첨탑 몇 개가 눈에 들어온다. ‘블루 모스크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와 목욕탕, 시장, 병원 등의 사회시설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설을 퀼리예(kulliye)’라고 부른다. ‘블루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고 한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지하 저수지인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ı)’. 다른 이름으로는 지하 궁전(Basilica Cistern)’이다. ‘블루 모스크에서 걸어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영화 ’007 시리즈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 저수지는 532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후에 유스티나누스 황제가 증축했다.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이곳까지 물을 끌어왔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일상적인 생활용수 공급 이외에도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사진은 출구 쪽 계단이다. 저수조로 들어오면서 찍은 사진이 흔들린 탓에 이걸 사용했는데 지하시설이다 보니 이런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올려봤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진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거대한 돌기둥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거기다 터키 음악까지 잔잔하게 흐르니 흡사 동화나라에라도 들어선 느낌이다.

 

 

지하 저수지에는 코린트식 기둥 336개가 늘어서 있다.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기둥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각 기둥이 각기 다른 신전 등에서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란다. 당시로서는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성한 지하 건물로도 유명하다. 하긴 다른 곳에서 완성품 자재(資材)들을 옮겨왔으니 공사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을 만도 하겠다.

 

 

이곳은 오래 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진흙과 오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인 끝에 1987년 멋진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단다. 오늘날 이곳은 궁전처럼 수백 개의 둥근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저수지임에도 불구하고 물은 빠져있다. 하지만 보통 때는 물에 잠기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물 위에 만들어진 다리는 관광객들에게 큰 볼거리이다.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세트로 쓰이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는 시청각 시설로 쓰이기도 한단다.

 

 

이곳은 배낭여행 프로젝트 제2탄으로 2013년에 방영된바 있는 tvN '꽃보다 누나'에서 소개되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꽃누나'들과 이승기가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에 이스탄불을 경유하면서 이곳 지하궁전과 '아야 소피아 박물관' 등을 들렀었다. 그래선지 한국 관광객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인다. ‘터기 사람들 다음으로 많은 게 한국 사람들...’ 터키에 머무르는 내내 느꼈던 생각이다. 그만큼 낯익은 얼굴들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호객꾼들이 내지르는 언어 또한 귀에 익었다. ‘반에 반값에 줄게요.’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등등... 이게 바로 국력(國力)인가 보다. 90년대 후반에 유럽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에는 한마디로 들을 수 없었던 한국어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흘러나오니 말이다.

 

 

높이 9m에 폭 65m, 길이가 143m인 거대한 지하공간에 336개의 돌기둥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거기다 은은한 조명까지 비추이니 가히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습기에 젖은 돌기둥들을 만져보면 천년 세월 너머로 로마의 신비로운 숨결이 전해오는 듯하다. 참고로 예레바탄 사라이(터키어: Yerebatan Sarayı)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란 뜻이란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나 교회와는 상관이 없단다.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뱀의 머리를 하고 두 눈을 부릅뜬 얼굴의 메두사의 머리를 볼 수 있다.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어있는 게 인상적이다. 이 메두사 얼굴은 보수공사를 하는 도중에 발견된 것으로 그리스도들은 예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교도의 신인 메두사를 기둥의 아래에다 깔아놓아 버렸단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메두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부조물(浮彫物)들을 사용하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비스듬히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가 전해지기도 한다.

 

 

 

 

 

 

 

 

지하라선지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하다. 밖은 30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선지 안에는 차이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일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터키의 전통복장을 입고 궁전세트에 앉아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길에 건넜던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 옛 이름은 ‘Hellespont’. 터키어로는 차낙칼레 해협(Canakkale Boǧazi)’이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잇는 해협이자 태양이 떠오르는 곳 이라는 아나톨리아 (Anatolia)반도와 갈리폴리 반도 사이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양쪽으로 나눈다. 길이는 62km이지만 폭은 1.2~8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와 근대사 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분쟁이 자주 일어났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 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을 위해 이 해협을 건넜으며 비잔틴 제국에게도 이 해협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런 이 해협은 흑해를 통하여 지중해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그리고 이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분쟁 끝에 1841년 런던 조약이 체결되어 오늘날은 모든 나라에 개방되기에 이른다.

 

 

 

아시아지역인 랍세키(Lapseki)’와 유럽지역에 있는 겔리볼루(Gelibolu)’사이의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은 페리(Feribot)를 타고 건너게 된다. 배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해협은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도시와 바다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바다가 깊은 탓인지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는데 운이라도 좋은 날에는 돌고래의 묘기까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난간까지 다가와 날개짓을 하는 갈매기의 재롱은 덤으로 여겨도 되겠다. 참고로 이스탄불까지는 앞으로 버스로 네 시간 정도를 더 달려가야만 한다.

 

 

 

 

 

에필로그(epilogue),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와 모든 종족이 어울려서 합성된 곳. 터키가 드러내는 얼굴은 다양하다. 동양도 서양도 포함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다신이 뒤섞여 있다. 획일적인 가치와 규격화된 규칙,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혔을 때 찾아보면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터키는 굴러다니는 돌조차 로마의 유적이고 문명의 흔적이라고들 말한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중심으로 갈라져 동양과 서양의 특징들이 미묘하게 뒤섞여있다. 이 역사와 지리적인 특징 덕분에 터키는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경을 만들어냈다. 한 골목 돌아설 때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다양하고 정제되지 않은 삶의 단면 단면들이 이방인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터키를 돌아다니는 내내 느꼈던 생각이다. 그런 모든 것에 흠뻑 빠졌었나 보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또 다시 찾아오고 싶은 욕망이 벌써부터 움트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타토피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일곱째 날 : 트로이 고고유적지(Archaeological Site of Troy)

 

특징 : 차낙칼레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트로이 유적은 우리에게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목마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대 도시이다. 전설 속의 도시로만 알려져 있다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그 실체를 발견했다. 슐리만은 어렸을 때 들었던 일리아드가 전설이 아닌 사실이라고 믿고 트로이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1873년 이곳을 발견했다. 그는 발굴 작업을 통해 발견한 금은보화 등의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하여 베를린 박물관에 공개하였고, 이로써 트로이는 전설이 아닌 실존 도시임이 널리 알려졌다. 아홉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트로이 유적의 최하층은 기원전 4000년대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이 외에도 2층에서는 메가론식의 왕국으로 짐작되는 건물과 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었다. 7층에는 호메로스 시대와 청기 시대 초기, 8층에는 아르카이크 시대, 맨 위의 9층에는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 시대의 유적이 있다. 첫 발굴 당시에는 2층을 트로이 유적이라고 여겼지만, 1930년대 미국의 재조사 결과 7층이 트로이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트로이 유적지의 발굴 작업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유적지는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소마(Soma)를 출발한 버스는 대략 2시간30분 정도가 지나자 트로이의 고고유적지에 도착한다. ‘차낙칼레(Çanakkale) 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30km쯤 떨어져 있는 이곳은 눈먼 음유시인 호메로스(Homeros)’가 지은 유럽문학의 효시 일리아스(Ilias)’오디세이아(Odysseia)’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의 논쟁으로 인해 발발된 전쟁에 휩쓸린 신화 속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설의 마당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만난다. 정원에는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옹기(pithos)들도 보인다. 이곳 히사를리크(Hisarlik, 요새지) 언덕에 고대 트로이의 유적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에드워드 다니엘 클라크, 찰스 맥클라렌 등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를 믿고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뛰어들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이는 독일의 부호이자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이었다. 1870년을 시작으로 20년에 걸쳐 진행된 슐리만의 발굴은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았으나 트로이에 존재했던 여러 도시 문명들의 유적을 잇달아 발견해냈고, 이는 당시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이 고고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트로이의 명물인 목마를 그냥 지나치는가 싶던 가이드가 작은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리고는 이곳 트로이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트로이는 서쪽으로는 에게 해를 두고 그리스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로 내려가는 해로가 있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너머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도시와 문명이 발달했다고 한다. 트로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4천년부터였단다. 기원전 3천년을 기점으로는 방어벽과 성채가 세워졌고, 기원전 2천년부터는 돌로 된 건물이 일반화되고 문화가 번성하면서 차츰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1350년경의 지진으로 한차례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는데,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묘사한 트로이 전쟁과 화재는 기원전 13세기나 12세기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안 버려졌던 도시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의 모도시(母都市)로 추대돼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도 했단다.

 

 

한 시대 도시유적 위에 다음 시대 도시유적이 잇달아 쌓여 있는 모양새로, 일반적으로 9개의 층(時期)으로 나뉜다. 언덕 중심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트로이 1(3000~2600 BC)는 유적지 내 최초의 거주 흔적이라 볼 수 있는데, 햇빛에 건조시킨 흙벽돌로 쌓은 방어벽이 남아있다. 그 위를 에워싸듯 포개져 있는 2(2600~2250 BC)에서는 돌과 흙벽돌을 함께 사용한 성채와 성벽,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 흔적인 메가론(megaron)이 발견되었다. 슐리만이 발굴해 독일로 유출한,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라 불리던 다수의 금재 장신구와 보석도 여기서 출토된 것이다. 3(2250~2100 BC)4(2100~1900 BC), 5(1900~1800 BC)에서는 이전 시대보다 발달된 기술이 적용된 규모가 큰 석재 건축물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6(1800~1300 BC)는 기원전 1350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에게 해의 대규모 도시 문명이다. 화재와 재건의 흔적이 보이는 7(1300~1000 BC)는 외부 침입으로 인한 큰 전쟁이나 지진이 있었던 시대로 추정된다. 슐리만은 발굴 당시 6기를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트로이라고 주장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7기를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800년경 조성된 8기는 이주민들이 들여온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시문명이다. 9기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의 유적으로 로마제국의 점령과 관련이 있다. 이 로마시대 구역 남쪽 가장자리에는 말발굽 형태의 건축물들인 극장 오데이온(Odeion)과 회의장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가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이 남아있다. 이후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5세기 말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의외로 간단하다. 입구에 세워진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하면 유적지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제자리로 되돌아 나오도록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유적은 동문 성벽(east wall)’이다. ‘트로이 6의 유적으로 트로이전쟁 당시 트로이를 지배하던 사람들과 동일한 민족이 세운 성벽인데, 동문(東門)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보면 되겠다. 동문은 성벽이 겹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성문에 접근하려면 성벽을 양쪽에 끼고 나있는 폭이 2m정도 되는 좁은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통로의 끝은 크게 휘어져 있다. 적군이 성문을 쉽게 부실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또 성문 양쪽에는 공격용 탑이 있어 적을 협공할 수 있었고, 두 성벽이 만나는 곳에는 나무로 만든 육중한 성문이 있었단다.

 

 

 

 

 

 

 

 

성문지(城門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폐허로 변한 유적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건물터로 보이나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당시의 용도는 알 수가 없었다.

 

 

트로이 6의 유적인 동북쪽 요새(northeast bastion)’로 나아가면 저 멀리 에게 해다르다넬스 해협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와 이곳 성벽까지는 엄청나게 너를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 군대가 저 벌판을 통해 쳐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 벌판 어디쯤에서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싸웠을 것이고, 트로이의 왕과 헥토르의 아내는 아킬레스가 전차에 매달려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체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던 신화속의 영웅담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여행객에게 그런 호사는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뒤쫓아 가야할 가이드의 등짝이 이미 보일락 말락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영웅 이야기는 귀국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고 지금은 발걸음에 속도를 내보자.

 

 

 

 

북동쪽에는 헬레니즘-로마시대인 트로이 8~9유적인 아테나신전(Temple of Athena)‘의 터가 있다. 이 신전은 알렉산더대왕의 명을 받은 리시마코스(Lysimachos)‘가 최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로마시대에 증축했으나 지금은 헬레니즘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파편들만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제우스의 딸인 아테나(Athena)는 지혜와 전쟁의 신이다. 신화 속에서는 트로이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원인, 미의 논쟁에 참여했던 세 여신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신전에서 내려오면 천막이 쳐진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에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안내판을 보니 트로이 2·3의 유적인 성채 벽(citadel wall)’이란다. 청동기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백색 흙벽돌과 복원된 붉은색 벽돌이 선명하게 대비되는데, 토성은 흙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견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냥 흙이 아니라 흙에다 낙타의 젓과 계란의 흰자를 섞은 반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선지 요즘도 성벽에는 벌이 많이 살고 있단다.

 

 

 

 

성채 벽(citadel wall)’이 축조된 트로이 2BC 2,600~2,250년 사이에 존재했으며, 옛 주거지와 같은 개념의 도시이다. 1기보다 성벽이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주거지와 궁전지역이 격자형으로 되어 있어 계획적으로 설계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궁전인 메가론과 그 주변 지역에서 프라이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장신구들과 수많은 보물들이 발견되었다. 이왕에 보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짚어보고 넘어가자. ‘트로이 유적지를 보려면 터키로, 트로이 유물의 진수를 보려면 러시아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슐리만은 분명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독일로 슬쩍해갔다. 그런데 왜 러시아로 가라는 얘기일까?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이 살짝 빼돌렸기 때문이란다. 그 유물들은 모스크바의 푸시킨박물관에 보관되어 왔지만 러시아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트로이 유물에 대해 시치미를 뚝 떼고 존재 자체를 부인했었다. 물론, 지금은 '프리아모스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전시 중이란다.

 

 

 

 

다음은 메가론(Megaron)이다. ‘트로이 2·3시대인 BC 2,290~2,200년 사이에 만들어진 흙벽돌 구조물로 성채 벽의 안쪽에 세웠는데 현재 1.5m(높이) 정도가 남아 있단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의식을 치르던 장소로 추정된다고 한다. 흙담의 유실을 막기 위해선지 간이 지붕을 덮어 보존해 놓았다. 참고로 트로이 2기는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이름을 붙인 황금 장신구를 발굴한 층이다. 큰 규모의 집터와 보물들 때문에 슐리만은 이곳이 일리아드의 트로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트로이 2는 청동기를 사용하던 이곳 최초의 번영기였다.

 

 

 

 

 

 

근처에는 트로이 1의 유적이라는 성채 벽(fortification wall)‘도 보인다. 그런데 돌로 쌓아올린 성벽이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2·3의 성벽이 흙벽돌로 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지만 오뉴월 땡볕을 피할 수 있는 곳도 나온다. 트로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무화과나무라고 한다.

 

 

근처에는 트로이 2의 유적인 귀족 거주지(Aristocratic residence)’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과연 귀족들이 선호했을 만도 한다. 하지만 그냥 보아서는 집터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유적이 파괴된 상태였다.

 

 

다음에 나타난 유적은 슐리만의 참호(Schlimann's Trench)’이다. 슐리만이 파놓은 구덩이인데 트로이 1·2의 주거지라고 한다. 이 가운데 ‘1의 집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라는데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슐리만이 자신이 생각대로 마구잡이 발굴을 한 탓이란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 옆에는 유적지를 파헤쳐진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도 있다. 시대별로 표시를 해놓아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우물터도 보인다. 아테나 여신에게 제사 드릴 때 올리는 물을 뜨던 샘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성()의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즉 옛날에 마차가 드나들었을 경사로(Ramp)’가 나타난다. ‘트로이 2의 유적인데 성채의 둥근 벽이 경사로 양 옆으로 뻗어 있다. 석회암과 흙을 사용해 1~4m 높이로 쌓은 경사로는 1992년에 처음 발견된 상태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부르던 유물을 발견한 장소라고 한다. 슐리만이 발굴했던 황금잔과 목걸이 왕관 등은 현재 모스크바에 있는 푸시킨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단다. 슐리만이 독일로 빼돌렸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베를린에 진주한 러시아가 슬쩍 해간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왕궁이 있던 곳으로 보이는 터(palace house VIM)도 보인다. ‘트로이 6때의 유적이라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배경이 되는 왕궁이었겠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나오는 프리아모스(Priamos)가 살던 궁전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인 라오메돈을 계승하여 왕이 된 그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는 뜻으로 다르다넬스해협을 이르는 말이다)까지 지배권을 넓힌 왕이었다. 그는 아리스베(예언자 메롭스의 딸)와 헤카베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가 가장 아끼는 헥토르와 파리스는 헤카베의 소생이다.

 

 

 

탐방로는 잠시 후 트로이 8·9의 유적인 성역(Sanctuary)’으로 인도한다. 고고유적지의 남서쪽에 위치한 성역은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최근 발굴된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대리석 제단(祭壇) 등 당시 제단으로 사용하던 장소와 우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커다란 지지벽과 더 오래된 제단들은 트로이 6·7인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은 목욕탕이 있던 자리란다.

 

 

트로이고고유적지는 현재진행형이다. 발굴과 복원, 탐방로 정비 등의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을 고고유적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오데이온과 보울레우테리온(Odeion and bouleuterion)’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오데이온(Odeion)트로이 9인 로마시대(BC 85~AD 400)에 지어진 실내극장이다. 보존 상태가 좋은데 크기로 보아 당시의 트로이는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보울레우테리온(bouleuterion)’은 이곳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장소를 이르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참고로 보울레우테리온(bouleuterion)’의 보울레(Boule)란 직접 민주주의를 위해 조직하는 의회를 일컫는다. 보울레 의원들이 모여 회의도 열고 민회 안건을 준비하며 찬반 표결도 벌이던 장소를 그리스어의 장소 접미사 (-on)’을 붙여서 보울레우테리온이라고 부른다.

 

 

맨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유적은 남문(south gate) 이다. 남문은 트로이의 정문이었다. 넓이가 3.3m쯤 되는데 비교적 넓은 오르막길이 있었고, 성문의 양 옆에는 넓이 7m의 아름다운 방어용 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이 바로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기다리던 스카이아문(Skaia gate)’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에서 궁정이 있던 언덕까지 잘 포장된 오르막길이 길게 뻗어있었단다.

 

 

고고유적지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성벽의 모습이다. 흙벽, 조개가 들어있는 벽, 돌벽, 벽돌 등이 각 층의 시대를 말해주고 축성방법, 건축기법, 건축 양식 등도 각 시대마다 다르다. 이 중 제 2층인 B.C 2500년부터 B.C 2200년까지의 유적에서 견고한 성벽과 웅대한 성문이 있는 메가론식건물 흔적이 발견됐다. 슐리만은 처음에 가장 큰 두 번째 층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단정했는데, 이후 제 7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돌아온 트로이 목마(Trojan horse)’ 1970년대에 신화속의 토로이 목마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증에 따라서 형태의 크기를 정했다기보다는 어린이 방문객을 위한 서비스에 가깝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 보면 목마의 내부는 두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의외로 사람들이 앉아 있을 만한 공간도 있고 목마의 뚫린 창으로 손을 내밀며 기념 촬영하는 사람도 많다.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는 뛰어난 목수이자 권투선수였던 에페이오스가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철수하는 체하고 근처의 테네도스 섬에 정박하고 있었다. 뒤에 남은 시논은 트로이인들에게 이 말이 트로이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든 아테나 여신에게 받치는 제물이라고 말했다. 라오콘과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이 말을 성 안으로 들여놓았으며, 말 안에 들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그날 밤 성문을 열어 그리스군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트로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다. 이후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목마 근처에는 기념품 숍(shop)이 들어서있다. 미니 트로이 목마 열쇠고리가 인기 품목. 어린이들에게는 그리스 병사들 인형이 더 먹힐 것 같다. 트로이 당시의 복장을 빌려주는 곳도 보인다. 목마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보라는 유혹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고대도시 트로이(Troy)에 대한 기대는 금물이다. 지명도에 비해 볼거리가 거의 없다. 볼만한 건축 유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은 이미 오래 전 외부로 반출된 상태다. 예전에 도시 앞까지 닿았다는 해안선도 수밖으로 밀려나 잘 보이지 않는다. 눈길을 잡아끄는 유적도, 시원한 바다 풍경도 없다는 얘기이다. 무용담을 펼치던 영웅들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그려왔던 트로이의 환상은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하겠다. 입장료를 내고 트로이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군데군데 돌무더기뿐이다. 성벽과 주거지, 신전 등이 발굴돼 있는데 제대로 원형을 갖춘 유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로마 시대 민회와 공연이 열리던 소규모 원형극장이 그나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발굴지마다 컬러 그림에 영문과 독일어 설명이 곁들여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트로이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도 떠올려보자. 그리스 여신인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최고 미녀의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였는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 시험에 들고 말았다. ‘누가 가장 아름답냐?’는 질문에 그는 요령도 없이 아프로디테를 택했던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 왕자에게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선물로 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가만있을 리 없다. 그리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해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아내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길고 지루했던 전쟁. ‘()의 논쟁이 이런 피를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튼 그리스는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전쟁을 끝냈다. 이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기록돼 있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타토피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여섯째 날 : 에페수스(Ephesus)

 

특징 : 라틴어로 에페수스(Ephesus), 터키어로는 에페스(Efes)이자 성경에는 에베소로 표기되는 에페수스는 로마보다 더 로마답고,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 도시의 필수 요건인 목욕탕, 아고라, 신전, 항구와 연결되는 대로 그리고 원형극장 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과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인 켈수스 도서관은 그 가운데서도 백미라 하겠다. 로마시대의 에페수스는 소아시아에서 정치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주재 로마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에페수스라는 도시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기원전 1044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정복으로 20개 도시로 구성된 이오니아 동맹에 속하게 된다. 그 후 이 도시는 차례로 리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에페수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 중 하나가 바로 에페수스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가운데 하나가 에페수스교회였을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울이 죽은 후에는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돌보며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오늘날의 에페수스는 역사 유적뿐 아니라 기독교 성지순례를 함께 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런 모든 점을 인정받아 201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에페수스의 탐방은 어퍼 게이트(Uper Gate)’에서 시작된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마그네시아 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참조한다. 그럼 반대편에 있는 출구는 자연스레 로워 게이트(Lower Gate)’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에페수스의 탐방은 이곳 어퍼 게이트에서 시작해 켈수스 도서관(Celsus Kütüphanesi)’을 내려다보며 쿠레테스 거리(Curates Street)’를 걸은 다음, ‘마블 거리(Marble Street)’아르카디안 거리(Arcadian Street)’를 거쳐 로워 게이트로 빠져나오면 되겠다.

 

 

 

 

 

 

안으로 들어가면 윗 아고라(Upper Agora)’ 또는 스테이트 아고라(state agora)’라고 불리는 널따란 광장(Agora)과 주위에 날려 있는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모든 종류의 정치 활동(선거, 모임, 집회 등)이 열리던 곳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안내판들을 깜빡 잊을 뻔했다. 에페수스의 지도와 함께 그 내력과 발굴과정들을 적어 놓았는데 한번쯤 읽어보고 투어를 시작해 볼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인데다 예습해온 내용들과 상이하기까지 해서 상당히 헷갈리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에페수스에는 아고라가 두 군데 있었다. 언덕으로 이루어진 에페수스의 위쪽인 이곳을 위쪽 아고라(Upper Agora)’, 다른 쪽을 아래쪽 아고라(Lower Agora)라고 부른다. 위쪽 아고라에는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Isis)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무너졌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자 세 개의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 2세기에 지어졌다는 바리우스 욕장(Various Bath)’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저 아치들은 열탕(caldarium)과 온탕(tepidarium), 냉탕(frigidarium)으로 들어가는 입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욕장은 곁에 있는 체육관과 함께 복합적인 시설이며, 바닥 아래로 더운 공기를 통과시켜서 난방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로마의 목욕탕은 로마법 대전을 정리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녀 혼욕을 금지하기 전까지 모두 혼탕이었다. 게다가 혼욕이 금지된 이후에도 남탕과 여탕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목욕탕의 입장시간을 오전에는 여자, 오후에는 남자 이런 식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로마의 목욕탕에는 남탕과 여탕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근처 땅바닥 위로 물파이프의 잔해가 드러나 있다. 그 옆에는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파이프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기도 했다. 흙으로 만들어진 저 파이프는 세상에서 가장 진보된 물 공급 시스템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탐방로의 좌우로는 토막 난 기둥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있다. 고린도 양식과 이오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일천한 내 지식으로는 두 양식을 구분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아고라(agora)나 바실리카(basilica)를 이루던 주랑(柱廊, peristyle)이겠거니 하는데, 곁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The phodian peristyle and the Prytaneum’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 통치 때 세워졌다는 시청사(Prytaneum)’가 이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기둥들로 장식된 주랑(柱廊)의 뒤에는 오데온(odeon)이 자리 잡았다. 2세기에 세워진 오데온은 도시의 행정관인 상원의원의 집회 장소였다고 한다. 때로는 연극이나 음악회, 시 낭송 같은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22층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객석은 1.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과 지붕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150년 경 에페수스의 귀족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가 세웠다고 한다.

 

 

 

 

 

 

오데온의 왼쪽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 세워졌다는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라는 공회당(시청) 건물이 있다. 로마는 속주(屬州)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므로 이 청사에서 에페수스의 통치권을 행사했다고 보면 되겠다. 발굴 당시 아르테미스 여신상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청 건물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프리타네이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에페수스를 지키는 성화를 보관하는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성화를 보관하던 장소가 프리타네이온의 안에 남아있단다.

 

 

 

 

잠시 후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오른편에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부조상이 눈에 띈다. 기원전 1세기 초,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소아시아 평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 멤미우스가 건립한 멤미우스 기념비(Monument of Memmius)이다. 술라는 포에니 전쟁이 끝난 다음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공화정 로마의 독재관인데, 그는 터키에 있던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의 침공을 막아낸다. 3만의 로마군이 20만의 폰투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폰투스 군은 로마의 속주였던 에페수스 일대의 옛 페르가몬 왕국 지역을 침공해 로마시민과 노예들을 무차별로 학살했었는데, 그 수가 8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비는 술라의 전승비인 동시에 학살당한 로마 시민들의 추모비이기도 하다. 기념비에 부조로 새겨진 인물은 멤미우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즉 술라와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

 

 

 

 

멤미우스 기념비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문 하나가 눈에 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us)으로 81년부터 96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도미티아누스(Caesar Domitianus Augustus) 황제를 봉헌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능했지만 독재 성향이 강했다. 로마시대는 선정을 베풀고 업적을 인정받은 황제는 그가 죽은 뒤에 수호신의 목록에 추가되고, 시민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향불을 피우며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고, 본인 이름으로 신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했다. 남을 시기하고 의심해 유력자를 처형하는 등 철권을 휘둘렀던 그는 결국 원로원들과의 관계가 악화된 후 암살을 당했고 자신에 대한 기록이 모두 말살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 황제의 신전이라면 건립 자체부터가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에페수스에서는 그의 신전을 추앙받았던 황제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우스 황제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원래대로 도미티아누스의 신전으로 부르고 있다. 아무튼 신전 건물은 앞부분은 문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나 뒤쪽에는 벽과 계단, 건물 내부의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그 옆에 보수공사가 한창인 건물은 폴리오의 샘(Fountain of Pollio)’이란다. 아틸리우스(Atilius)가 섹스필루스 폴리우스(Sextilius pollius)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인데 아치에 폴리오라고 적혀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도미티아누스 광장이 본디 상업의 중심지였다니 이 건물들은 물론 상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멤미우스 기념비와 도미티아누스 신전 사이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가 있다. 하얀 대리석 위에 부조로 새겨졌는데, 왼손의 월계관과 여신의 날개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여신은 그리스신화에서는 행운의 여신으로 나타난다. 로마에서는 포르투나여신으로 변하는데 영어 ‘Fortune()’은 이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나이키의 브랜드명과 로고가 이 부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가 새겨진 돌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당시의 병원표식인데 현재로 이 표시는 의술을 상징한단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병원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뱀은 껍질을 벗음으로서 젊어지거나 치유, 또는 재생된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상징하는 동물이 된 이유이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는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이라고 알려진다.

 

 

 

 

잠시 후 부조상(浮彫像)으로 채워진 기둥 두 개가 나타난다. 큐레테스거리(Curetes street)의 시작을 알리는 헤라클레스 문(Heracles Gate))’으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원래는 여섯 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이층 구조였는데, 4세기경 두 개의 기둥만을 찾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도미티아누스광장(Domitian square)에 있는 니케의 부조상도 이 문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문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해 기둥의 폭을 좁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4세기부터는 큐레테스거리가 보행자 전용의 거리가 되었단다.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면서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가 시작된다. 과거 이 거리에는 줄지어 늘어선 원형 기둥들 위로 지붕이 얹혀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 신전과 상점이 즐비했다고 한다. 참고로 쿠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를 보호하던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존재들로 등장하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행정실무와 종교업무를 담당하던 사제들을 쿠레테스라고 불렀다. 쿠레테스 거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매년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사제들의 행렬이 이 거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오른편에 트라야누스의 샘(Fountain of Trajanus)’이 보였다. 트라야누스의 님파에움(Nymphaeum)이라고도 불리니 참조한다. 오현제의 하나인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황제이다. 분수대의 중앙 받침대 위에는 12미터짜리 황제의 동상이 세워져있었다지만 지금은 발 부분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과거에는 동상의 발끝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정과 목욕탕으로 공급되었다고 한다.

 

 

왼쪽의 언덕위에는 고급주택가가 들어섰다. 고급 주택가는 발굴이 아직 덜 되었는지 양철지붕으로 막아 밖에서 볼 수 없게 해두었다. 한쪽에 일부 집들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다 무너져서 예전의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로마시대에는 부유층이나 유력자들만이 이곳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바닥에 깔려있는 모자이크 모양의 타일이 당시의 영화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무심코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다가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리고 만다. 느닷없이 바리우스 욕장(Varius Bath)’에 대해 적어놓은 안내판이 나타난 것이다. ‘학술원 골목(academy alley)’과 함께 쿠레테스거리의 북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시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문은 하단에 적혀 있었다. 지어진 시기(1.5~2세기)나 이름은 아까와 같으나 확실히 다른 목욕탕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이름 또한 다르단다. ‘스콜라스티카(Scholasticia)’라는 크리스트교 여성이 대대적으로 개수를 하였기 때문에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3층 높이의 건물로 재건축되었는데, L자 형태의 구조로 안에 탈의실과 냉탕, 온탕, 열탕 등 완벽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차가운 물이 있는 냉탕인 프리지다리움(frigidarium)과 따뜻한 목욕탕인 테피다리움(Tepidarium), 그리고 증기실인 칼다리움(caldarium)과 탈의실인 아포디테리움(Apodyterium)은 전형적인 로마 목욕탕에 있는 네 개의 주요 부분이다.

 

 

그 옆에서 고린도 양식으로 지어진 하드리아누스 신전(Hadrian temple)’이 자신도 있다며 손짓을 한다. 로마 5현제 중 하나로 추앙받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서기 138년 지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최근에 복원된 모습이란다. 이 신전은 로마의 건축물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란다. 여러 황제와 아테나여신, 아르테미스여신 등 흥미 있는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입구 달걀모양의 아치 중앙에 새겨진 두상(頭像)메두사란다. 저런 무시무시한 조각을 하필이면 신성한 신전의 앞머리에다 새겼을까? 어쩌면 잡신들의 침입을 막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스리슬쩍 들어오려 해봐도 메두사 때문에 돌로 변해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면 되겠다. 두 번째 입구의 박공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것이 화려했던 제국의 영광을 짐작하게 해준다.

 

 

목욕탕과 하드리아누스 신전 사이엔 공중화장실(Lartin)이 있다. 벽면을 따라 이어진 대리석에 동그란 구멍들이 뚫려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것들의 정체는 바로 로마 시대의 좌변기로 당시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던 공중화장실이다. 목욕탕에서 사용된 온천수를 대리석 좌식 변기 아래로 흘려보내 대소변을 자동수세식 방식에 의해 자연친화적으로 처리하도록 설계된 점이 놀랍다. 변기는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고, 일을 본 후에는 발아래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을 수 있게 했단다. 그러니 물이 흘러 들어오는 위쪽은 이용료가 비쌌을 게 당연하다. 아무튼 생각해오던 것보다는 규모가 훨씬 더 크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멋을 냈고 옛날에는 중앙에 청동으로 된 동상까지 배치했었단다. 이 정도라면 은밀한 장소로 이해되는 화장실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사교의 장소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화장실은 남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용료도 지불해야 했단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어디서 일을 처리했을까? 그녀들 역시 나들이를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많이 궁금하다.

 

 

 

 

 

켈수스도서관을 바라보며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이 나타난다. 둘로 나누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안내판을 보면 3층으로 지어진 하나의 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퍼레이드(parade)를 할 수 있는 중앙의 큰 문과 일반 보행자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두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리스의 아테네에 있는 하트리아누스의 문과 흡사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참고로 로마의 14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임으로, 제국 전체를 직접 발로 뛰는 순행을 수차례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소아시아의 유력 도시였던 에페수스도 그의 121년 순행과 128년 순행에 포함되어 있었단다.

 

 

 

 

 

 

잠시 후 켈수스도서관(Library of Celsus)’에 이른다. 에페수스 유적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로 우리나라의 중학교 교과서 표지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한 고대의 유물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건물은 지진으로 파괴 됐다가 최근 땅 속에 흩어져 있던 돌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현재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고고학적으로 복원기술의 최고 산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켈수스도서관은 서기 135년에 지어졌다. 110년 소아시아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라(Gaius Julius Aquila)’가 소아시아의 집정관이자 애서가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Tiberius Julius Celsus Polemaeanus)’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도서관의 지하에 켈수스의 관을 모셨다고 한다. 그가 남긴 25천 데나리온은 도서관을 짓고 양피지로 된 12천권의 장서를 구입하고도, 도서관을 유지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이 도서관으로서 용도를 갖게 되자, 세계 전역에서 걸출한 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두루마리들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당시 파피루스를 수출하던 이집트에서 켈수스도서관이 너무 커지자 견제하기 위해 아예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해 버렸단다. 그러자 에페수스는 파피루스 대신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양피산업과 양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양가죽은 터키제품을 최고로 평가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켈수스도서관의 책들과 건물은 서기 250년쯤 고트족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경외의 마음에 잰걸음으로 켈수스 도서관에 다가선다. 코린트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이 혼합된 화려한 앞부분은 에페수스 유적 가운데 단연 압권이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에서 풍겨나는 묘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각각의 처마에 새겨진 꽃무늬 조각들이 한층 더 세련된 예술적 가치를 뽐내고 있다. 아홉 개의 넓은 계단을 올라 1층에 오르면 세 개의 입구가 나오는데 양쪽 옆의 벽감에는 왼쪽부터 지혜(Wisdom, Sophia), (Virtue, Arete), 사고(Intelligence, Ennoia), 학문(Knowledge, Episteme)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진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에페수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란다. 2층은 1층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내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넓지 않았다. 이곳 켈수스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에 이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던 점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하겠다. 웅장한 외부의 모습과는 달리 왠지 허전해 보였지만 건축 당시만 해도 무려 12,000여권의 장서가 과학적인 구조에 의해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며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던 이 도서관으로 인해 에페수스는 학문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찍이 에페수스에서 활동했던 희랍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문 전통을 이어왔다.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은 켈수스 도서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켈수스 도서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2년간을 머무르며 복음을 강론했던 곳이기도 하다.

 

 

헬수스 도서관의 오른편으로 아치형의 문이 보인다. 상업아고라로 들어가는 남쪽 문, 즉 남문이다. 노예였던 마제우스(Mazeus)와 미트리다테스(Mitridates)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바친 것으로서 아우구스투스의 문 또는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Gate of Mazeus and Mitridates)‘이라고도 한단다.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와 오른편 문으로 나가면 확 트인 광장이 나온다. 에페수스의 상업 아고라(Commercial Agora)로 항구와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각지에서 들어온 물건이 총집합하던 거대한 국제 시장이었다.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있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사방 100넓이의 사각형 광장에 들어서면 온갖 물건과 다양한 인종들로 북적거렸을 고대 상업 아고라를 떠올려볼 수 있다.

 

 

쿠레테스거리가 켈수스도서관 앞에서 오른편으로 돌면서 시작하는 마블 스트리트(Marble street)’는 원형경기장 앞에서 아카디아대로로 연결된다. 널찍한 사각형 대리석이 깔려 있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편한 대리석길의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그 옛날 이 기둥에 횃불을 걸어 가로등을 삼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창가도 있었다. 대리석거리(Marble street)를 걷다보면 바닥에 발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창가 입장을 제한하는 발의 사이즈라고 한다. 발의 크기를 보고 미성년자인지를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난히도 발이 작은 나에게 사창가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일 수밖에 없었겠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사람이 바로 우리 집사람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여기서 아재개그 하나, 광고업계에서는 저 발바닥 문양을 인류 최초의 광고물로 여긴다니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도서관의 곁에 사창가가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공부하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면서 하라는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적당히 해소하는 게 인간의 본능일 테니까 말이다.

 

 

 

 

대리석 거리를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24000석 규모의 초대형 원형 경기장(Great Theater)’은 에페수스 방문의 절정을 이룬다. 수용인원이 24000명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에페수스의 인구를 25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대 극장들이 도시 인구의 약 10%를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존재하던 극장을 로마 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세 개의 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단의 일부는 아직 발굴·복원중이어서 철조망으로 막혀져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극장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의 야외 오페라 극장과도 같았다. 야구경기장의 홈베이스처럼 파인 중앙의 홈에는 당시 바닥에 깔았던 대리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연극 등의 공연은 물론이고 검투사들의 경기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몰아넣고 사자를 풀어 놓기도 했단다. 지금도 가끔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는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전 객석으로 소리가 울릴 정도란다. 참고로 이곳은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던 데미트리우스와 장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며 바울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원형경기장에서 항구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아르카디안 거리(Arcadian street)’이다.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의 명령으로 복구 작업을 벌인 뒤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길이 600(현재는 200만 남아있다)에 폭이 11인 이 거리는 길 양쪽으로 원형 기둥과 상점들이 늘어섰고, 밤에는 50여 개의 횃불로 가로등을 밝히기도 했단다. 과거 에페수스가 바다와 맞닿은 항구 도시였을 때, 배를 타고 에페수스에 도착한 사람들은 항구의 욕장에서 몸을 씻고 이 길을 따라 도시로 들어왔을 것이다. 상가거리를 뜻하는 아케이드란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으니 참고해두도록 하자.

 

 

 

아름드리 소나무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길을 따라 로워 게이트(Lower Gate)’로 나가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석관(Sarcophagi)들이 눈에 띈다. 근처에 고대의 대형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Necropolises)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덤과 묘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도시를 둘러싼 성벽 바깥, 성문주위와 도로 양옆에 묘지를 썼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비록 후반부에다 배열했지만 에페수스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와인 마을로 유명한 쉬린제(Sirince)’에 들렀다. 터키어로 즐거움을 뜻하는 쉬린제는 작지만 활기 넘치는 해발 700m의 산간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제국 당시 노예로 잡혀온 그리스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단다. 그들은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의 집을 짓고 포도와 올리브 등을 재배하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와 그리스가 주민을 맞교환 할 때 그리스에 살던 터키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전통적인 와인생산지로 그 이름이 굳어지게 됐다. 포도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석류로도 달콤한 와인을 빚는다. 한 병을 구입해서 그날 저녁 호텔에서 마셔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쉬린제마을의 투어는 너무 간단하다. 마을의 초입에 있는 아르테미스 레스토랑을 방문해보는 단출한 일정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시켜 먹을 만한 시간까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레스토랑의 지하에 내려가 와인을 시음해보는 것으로 투어가 끝나버린다. 그저 맘에 드는 와인이라도 있을 경우 한 병 사들고 나오는 시간 정도나 주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 눈요깃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풍스런 건물의 1층에는 이곳의 역사를 이야기 하듯 작은 전시장이 만들어져 있다.

 

 

 

 

난간으로 다가가면 언덕을 따라 조성된 쉬린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흰 회벽에 붉은 기와지붕 모습을 하고 있다. ‘터키 속의 작은 그리스'라는 애칭을 얻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았던 탓에 골목길을 걸어볼 수는 없었다. 터키 블루로 장식된 창문이나 오브제처럼 비치된 다채로운 테이블, 담장 아래 놓아둔 앙증맞은 꽃 화분들이 마치 그리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터키에서 로마유적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온 셀죽(에페수스의 현재 이름), 아주 작은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한식당(韓食堂)이 있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애기일 것이다. 맞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곳 에페수스는 빼놓지 않고 들르는 성지(聖地)가운데 하나이다.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머물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식당으로 들어서자 뒤편 언덕에 성()이 하나 보인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사도 요한을 기념해 지은 성 요한 기념교회(John church)’가 있는 곳이란다. 여기서 요한이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의 그 요한이다. 이 도시의 옛날 이름인 에페수스(에베소)’에베소서의 그 에베소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 바로 저곳이란다. 그렇다면 내 생에 처음으로 성지(聖地)라는 곳에 발을 디뎌본 셈이다. 하지만 우린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사는 애초부터 방문 계획이 없었고, 그렇다고 자유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트하게 짜놓은 스케줄 때문이라니 별 수 없지 않겠는가. 볼거리가 많은 곳인데도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곳 에페수스에는 마리아의 집도 있다. 셀죽 근교인 부르부르산 중턱에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하룻밤을 머문 ‘Ramada soma’

마니사 주(Manisa ili)에 속한 소도시 소마(soma)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은 없었다. 편의시설이나 제공되는 식사, 침실의 청결도 등이 터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여느 호텔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에필로그(epilogue), 부서진 옛 건물들이 수두룩한 에페수스는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누렸던 고대도시이다. 유물의 시기도 매우 다양해서 정확하게 도시의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로마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 이후 많은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전성기를 이뤘다. 로마의 그 유명한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고 이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또 다른 문화를 접목시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곳은 도시 전체가 그대로 유물이요 고적이며 노천박물관이다. 그러한 유적들은 과거 에페수스의 영광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관광객들은 그저 스치듯 지나가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대도시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뜨거운 태양빛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다.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가면서 그 유적들을 살펴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에페수스는 1863년부터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98년 독일의 고고학자 벤돌프가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전체 유적의 10%정도가 발굴되었다고 추정될 만큼, 유적의 발굴과 복원 작업의 진척은 미진하단다. 터키의 주요 수입이 관광인데 비해, 관광에 투자하는 비용은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한 듯 싶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다섯째 날 : 파묵칼레(Pamukkale)

 

특징 : 가장 기억에 남는 터키의 명소 세 개를 꼽으라면 난 이스탄불과 카파도키아 그리고 파묵칼레를 선택하겠다. 이스탄불이 동·서양 문물의 교차로 성격이 짙다면 카파도키아는 특이한 자연지형으로 명함을 내민다. 파묵칼레는 이 둘을 합쳐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석회층으로 이뤄진 온천지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로마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런 복합 세계유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경우라고 한다. ’목화(파묵)의 성(칼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파묵칼레는 하얀 온천지대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풍경을 보여준다.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논을 닮았다. 소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절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빙산이나 설산 같다. 석회를 머금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그 성분들이 층을 이루었고 그 층마다 푸른 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날이면 석회층은 물과 함께 청아하게 빛난다.

 

 

 

차에서 내리면 상가의 앞이다. 기념품과 먹거리 가게 등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수영복이 진열되어 있는 가게가 눈길을 끈다. 팔던지 아니면 빌려준다 치더라도 결국에는 물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곳 파묵칼레는 현재 수영복 차림으로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시키고 있는 걸로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주변에는 너른 황무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저곳이 바로 복합 세계유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히에라 폴리스의 옛터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남문 매표소가 나온다. 파묵칼레에 들어가려면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한다는 얘기이다. 매표소 옆에 현금자동인출기(bankamatik)‘가 들어서 있다는 것은 현금으로만 매표가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터키 리라(TRY)‘가 없는 사람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bankamatik‘에서 환전이 가능하다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곳 남문매표소 말고도 상부에 위치한 북문에 또 다른 매표소가 있다.

 

 

잠시 후 성벽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문 하나가 뚫려 있다. 5세기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남문이란다. 그런데 키가 큰 서양인들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하다. 문의 생김새 또한 안내판과는 조금 상이하다. 의문투성이지만 남의 나라 문화재이니 왈가왈부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안으로 들어서면 히에라 폴리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까는 빈터만 보였는데 이번에는 유적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의 에르메네스 2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단다. 다른 한편으로 히에라라는 이름이 페르가몬의 전설적 건국자인 텔레포스(Telephos·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의 아내인 히에라(Hiera)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니 참조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했다.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인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번영을 누려왔던 히에라폴리스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를 1887년 독일의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하였고 이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저곳에는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과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는데 최대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 극장은 현재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란다. 또한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 아폴로신전이 세워져있는가 하면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도 있단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특이성으로 인해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복합)으로 지정되었다.

 

 

탐방로의 대부분은 판석(板石) 아니면 데크로 깔았다. 문화재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조금 더 걷자 잘 정비된 광장이 나온다. 온천지대(석회층)와 히에라폴리스의 중간쯤 되는 곳인데 황량함 일색이던 조금 전의 풍경과는 달리 야자수 등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나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을 갖추었는가 하면 아이스크림과 음료수에다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간이상점도 몇 보인다. 여행객들을 위한 쉼터용으로 조성된 공간인 모양이다.

 

 

 

 

'목화 성'이란 이름처럼 새하얀 석회층이 환상적인 파물칼레의 첫인상은 맑고 청아했다. 다랑이 논을 빼다 닮은 흰 석회층 위로 에메랄드빛 온천탕이 옹기종기 모였다. 석회암 위로 온천수가 흐르면서 계단식 논과 같은 풀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고인 물에 하늘이 비치는 풍경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거대한 그림 내지는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을 마주한 느낌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워서 초현실(超現實)처럼 느껴진다. 터키어로 파묵은 목화, 칼레는 성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 부근은 목화가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단다. 또한 이곳 파묵칼레는 염색 과정에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 최초로 안약이 개발된 곳이기도 하다.

 

 

간혹 화보(畵報)를 찍고 있는 신혼부부도 눈에 띈다. 베일을 쓴 신부가 활짝 핀 흰 꽃처럼 웃는다. 연미복의 신랑 표정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구경꾼들 또한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행복에 전이된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답례를 보내준다.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이런 느낌을 위해서 이곳 터키까지 날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아래에 놓인 꽃바구니 근처에는 아가씨들 몇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신부를 따라온 들러리들인 모양이다.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원님 덕분에 나발분다는 격이라고나 할까?

 

 

 

사방팔방이 온통 흰빛이다. ‘목화의 성이라는 파묵칼레에 딱 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파묵칼레는 온천수가 빚어낸 석회암 덩어리를 빗대어 붙인 지명이다. 석회 성분을 다량 함유한 35의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은 것이란다.

 

 

 

 

용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층리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녹은 석회암이 저런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다랑이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석회암 위로 흐르는 온천수는 류머티즘과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다.

 

 

 

 

 

 

가끔은 석회층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색에 잠기는 여행자들도 보인다.

 

 

 

저 석회층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색이 변한단다. 푸르던 물은 희게 변색되기도 하며 해질녘에 띠는 색깔은 붉은빛이란다. 그래서 여행전문가들은 두세 시간 석회층과 인근 유적만 둘러보고 훌쩍 떠나는 것은 삼가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고스란히 재현된 옛 목욕탕에라도 들어가 볼 것을 추천한다. 후예들이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수영장 밑바닥에는 무너진 거대한 기둥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변은 카페처럼 꾸며져 있으니 다른 여행자들과 미소라도 나누며 파묵칼레가 시간에 따라 빚어내는 색의 마술을 감상해보라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신발을 벗어 가이드에게 맡기고는 맨발로 물에 들어간다. 맨발로만 입수(入水)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보기와 달리 미끄럽지가 않다. 부담 없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온도도 적당히 따뜻하다. 창백한 석회암에 갇힌 푸른 물빛이 무척 차가워 보이지만 막상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그면 겨울날의 이불 속처럼 따뜻하다는 얘기이다. 예전에는 탈의 후 목욕이 가능했지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1988년 이후부터는 발만 담글 수 있단다. 그럼에도 주위에는 수영복을 입은 여행자들이 가끔 눈에 띈다. 아니 몸 전체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수로(水路)도 보인다. 최근 온천수의 수량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더니 이와 관련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오전에 물을 막아 놓았다가 오후에만 물을 흘려보낸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도랑에 발만 담그는 데에 만족하고 온천은 오늘 저녁에 머무는 지역의 호텔에서 즐겨볼 일이다. 마침 온천수로 수영장까지 만들어놓았다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 지역의 호텔들은 대부분 온천수를 이용하는 수영장들을 갖고 있다. 우리의 온천과는 다른 개념으로 남녀 공용이 대부분이니 수영복과 수영모는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파묵칼레(석회층)의 오른편에는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의 유적이 있다. 지금은 비록 허물어져가는 유적에 불과하지만 저곳에는 냉·온탕과 스팀 사우나 방, 대규모 운동시설, 호텔 같은 귀빈실 등 귀족들의 휴양지로 완벽한 시설을 갖췄다고 한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니 말 다했다. 그러던 것이 1354년 이 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저렇게 폐허로 변해있다는 것이다.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한다. 그쪽에도 오래된 유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데크로드를 따라 잠시 걷자 중세에 지어진 요새(medieval fortress)’가 나온다. 본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버린 이 요새는 방어벽과 더불어 3개의 24각탑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자연 침전 석회암 분지 윗부분에 있는 혀 모양의 땅을 둘러막으면서 파묵칼레와 Lycos계곡을 조망하던 요새란다. 요새의 건축연대는 비잔틴제국과 셀주크터키간의 마찰이 한창이던 13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며, 그 후 14세기 후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안내판의 제목에 적힌 ‘FRIGYA(프리지아)’BC 1500년경 유럽에서 인도 유럽어족(語族)의 프리지아인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하고 터키에 세운 프리지아왕국을 말하는데.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한다라는 전설로 유명한 마이다스왕도 프리지아왕국의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히에로폴리스가 처음으로 지어진 연대가 기원전 546년까지 존속했던 프리지아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적었지 않나 싶다.

 

 

 

 

 

 

반대편에도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들이 뜸하다. 온천수에 발을 담그는 이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광장의 끄트머리에 서자 이번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까 우리가 들어가 봤던 석회층에 여행객들이 만들어내는 길고 긴 줄 하나가 보인다. 바지를 걷고 설산을 걷는 것처럼 보여 이채롭다. 고개를 돌리니 오른편으로도 하얀 석회층이 끝없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장관이라 하겠다.

 

 

구름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둑어둑해져 버린다. 그리고는 햇살 한줄기, 흡사 노을이라도 된 느낌이다. 그러자 태양 아래에서 빛나던 하얀 석회질과 푸른 물이 묘한 분위기로 변한다. 불그스레한 노을빛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가히 환상적이다. 문득 석양이 만들어낼 풍경을 떠올려본다. 이 정도로도 저런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과연 그 정점은 어디쯤일까? 사람들이 이곳 파묵칼레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면서 일출과 함께 일몰을 꼽는 이유일 것이다.

 

 

 

 

파묵칼레에서의 자유시간이 끝나자 가이드가 우릴 불러 모은다. 그리고는 바로 곁에 있는 고대도시 히에라 폴리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국가를 소아시아의 고대왕국인 페르가몬이 재건한 것으로 초대 왕비의 이름을 따라 히에라 폴리스라고 지었다고 한다. ‘히에라는 당시 내조와 존중, 사랑의 아이콘이었단다. 아늑하고 따뜻한 땅 파묵칼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설명을 끝낸 가이드는 유적지로 들어가는 것을 생략한 채로 남문으로 향해버린다. 아까 들어왔던 길이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같을 수밖에 없다.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은 그저 곁눈질이나 하라는 모양이다. 곧장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하겠다니 우리 부부만 남겠다고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우린 최대 1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신전 등 귀한 문화유적들을 가까이서 볼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단점인 것을. 참고로 파묵칼레의 탐방코스는 북문 매표소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석회층(파묵칼레)으로 내려오는 길에 히에라폴리스 유적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회층을 구경하고 난 다음에는 우리와 같이 남문으로 나가면 된다.

 

 

 

 

나오는 길 왼편에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로마인들의 유적인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지대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아니 서로 섞여있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로마인들의 휴양지가 갖는 가장 큰 특징아 아닐까 싶다. 목욕을 좋아하는 로마인들은 우선 자연 용출장이 있는 곳에다 휴양지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목욕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김없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극이나 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과 원형 경기장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파묵칼레를 로마인들의 대표적인 휴양지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주차장 근처에 이르니 바위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게 보인다. 얼핏 들은 얘기로는 무덤 유적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이곳에는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다고 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의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단다. 아무튼 목욕탕과 어울려 있다는 점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선지 일부 전문가들은 이 석관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을 피력하기도 한다.

 

 

하룻밤을 머문 스파 호텔 콜로새 테르말(Spa Hotel Colossae Thermal)’

파묵칼레 유적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이 호텔은 낡아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많은 부대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온천수영장과 야외수영장, 스파 센터, 터키식 목욕탕은 물론이고, 이런 부대시설과 관련된 작은 샵(shop)들을 갖고 있다. 또한 5성급 호텔답게 객실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제공되는 식사의 질 또한 뛰어나다. 다만 시설이나 객실의 배치가 복잡한데다 엘리베이터(elevator)가 없다는 점은 단점이라 하겠다.

 

 

 

에필로그(epilogue), 파묵칼레 일정도 역시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은 멀리서 눈요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박물관 또한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북문에서 시작해서 남문으로 빠져나오는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남문으로 들어갔다가 남문으로 나온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온천욕을 한 것도 아니다. 유물들을 옆에 두고 하는 온천욕이 일품이라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또 하나, 이곳 파묵칼레는 터키 문화관광부가 추천하는 일출 명소이다. 떠오르는 해가 붉게 하늘을 물들이면 불투명한 하늘색이었던 온천수가 햇볕을 받아 거울처럼 빛난다는 것이다. 마침 여행 일정이 파묵칼레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것으로 짜여있기에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그냥 에페소로 출발을 해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새벽잠까지도 설치게 해가면서 말이다. 온천욕만 해도 그렇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즐겼다는 온천욕을 하면서 한번쯤은 안토니우스가 되어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번 여행은 패키지여행은 가이드의 마음대로라는 유언(流言)이 정설이라는 게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구경거리가 많은 곳, 특히 유적들이 많은 곳은 가급적 자유여행으로 찾겠다는 결심이 굳어진 계기가 되었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다섯째 날 : 안탈리아(Antalya) 올림포스 산(Olympos Mount)

 

특징 : 안탈리아에는 고대 유적 외에도 가볼 만한 곳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올림포스 산(2365m)‘이다. 아담한 항구도시 케메르의 내륙 쪽에 솟은 산으로 토로스산맥(Toros Daglari)에 솟아오른 하나의 봉우리이다. ’타흐탈르(Tahtali) 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아니 원래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7쯤 산길을 차로 오르면 케이블카 탑승장(해발 726m)에 이른다. 20분쯤의 간격으로 운행되는 케이블카를 타고 10분쯤 더 오르면, 구름 위로 솟은 흰 바위산의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 옥상에 올라 바라보는 구름바다와 해안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정상에서는 패러글라이딩과 번지점프 등 레포츠를 즐길 수 있고 결혼식과 연주회 등도 간혹 열린다고 한다.

 

 

 

안탈리아에서의 두 번째 여행지는 올림포스 산(Mount Olympos)’이다. 안탈리아의 일정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림포스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와 유람선을 타고 안탈리아 해안을 둘러보는 코스 등 2가지의 선택 관광이 진행된다. 그러나 가이드는 둘 가운데 신청인원이 많은 것으로 하나만 진행하겠단다. 안탈리아에서의 모든 일정을 오전 중에 끝내야만 오후에 파묵칼레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고대했던 유람선 투어를 포기하고 케이블카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이곳으로 오려면 안탈리아에서 남쪽 방향의 해안도로를 타고 케메르(Kemer)까지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는 산길로 접어들어 굽이굽이 돌아 오르면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온다.

 

 

 

 

탑승장에는 베이다글라리 연안 국립공원(Beydaglari coastal national park)’의 안내도를 게시해 놓았는가 하면, 지금 타려고 하는 케이블카의 미니어처도 만들어 놓았다. 진열대에는 한글로 번역된 리플릿(leaflet)도 보인다. 번역은 좀 엉성하지만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리플릿에는 올림포스산을 타흐탈리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과 함께 병기(倂記)하고 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니 케이블카가 도착한다. 탑승인원은 80, 너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차체가 크다고 보면 되겠다. 케이블의 길이는 4.3로 스위스 삭도회사에서 2007년에 건설했는데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이용한단다. 자 그럼 케이블카를 타보자. 케이블카가 띄엄띄엄 운행되기 때문에 줄을 섰다가 타야만 한다. 이때 줄의 앞에 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케이블카의 창가에 서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경관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굼뜨게 행동하다가 가운데라도 섰을 경우에는 경치를 구경하기는커녕 키 큰 외국인들 틈새에 끼어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고역을 치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어느 전자회사의 광고 문구에 떴던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이곳에서도 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다만 10년이 아니라 10분쯤으로 줄이면 오늘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앞줄에 선 덕분에 창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투명한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발아래에 펼쳐진다. 유리로 가로막혀 피부로 느껴볼 수는 없지만, 저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면 싱그럽기 짝이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고도가 높아지니 산의 풍경이 확 바뀐다. 식물이라곤 하나도 볼 수 없는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다. 고산지대의 전형적인 풍경일 것이다.

 

 

10분쯤 오르자 상부 탑승장에 이른다. 이곳의 높이는 2,365m, 하부 탑승장이 726m이었다고 하니 1,639m나 되는 높이를 단 10분 만에 올라선 셈이다. 참고로 이곳 정상은 우리나라 프로축구팀들에게도 친근한 편이다. 이곳 안탈리아에서 겨울 전지훈련을 하는 팀들이 꽤 되는데, 이들이 산의 정기를 받아 우승을 차지하겠다면 신들의 산이라는 이곳을 찾기 때문이다.

 

 

1층에는 커피와 음료를 파는 카페가 들어서있다.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릴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일단은 옥상으로 오르고 본다. 옥상은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사방이 탁 트여있다.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는 얘기이다. 망원경까지 설치해놓은 걸 보면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했나보다. 아예 속살까지 엿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옥상에는 이정표가 하나 세워져 있다. 모두 아홉 개 방향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서울이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다. 터키에서 우리나라는 형제국가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키고 우리나라를 치켜 주는 터키가 한층 더 좋아지는 건 어쩌면 인지상정일 것이다.

 

 

바다 닷!’ 지중해(地中海)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자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땅 가운데 있는 바다'라는 단어 그대로 지중해는 남쪽으로 아프리카 대륙 북쪽으로 유럽 대륙 서쪽으로 아시아 대륙과 맞붙어 있는 실로 대륙 한 가운데에서 마치 호수처럼 존재하는 바다이다. 예로부터 이집트문명과 헬레니즘 문명 등 대부분의 문명이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된 이유이다. 특히, 2천 년 전의 로마시대 문명은 이 곳 지중해를 마치 자기 집 앞마당처럼 사용했다.

 

 

 

 

저 해안은 유럽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피서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많은 해안 중에 하필이면 이곳이냐며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물론 아름다운 경관이다. 일 년에 아홉 달이나 수영이 가능한 기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래사장이란다. 이쯤에서 아재 개그로 양념을 뿌려보자. 지중해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파도와 모래사장 그리고 큰 물고기란다. 개그이니까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하지만 이곳 지중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랑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만한 비유도 없을 것 같다. 또한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파도가 없을 때의 지중해는 호수보다 더 잔잔해서 마치 파랗게 꽁꽁 얼어붙은 바다 위를 배가 썰매타고 미끄러져 가는 것처럼 보인기도 한다니 말이다. 거기다 지중해 연안의 해안은 대부분 자갈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도 모래사장이 드물기에 행여 모래사장이라도 발견될라치면 어김없이 일류의 휴양지로 탈바꿈 되어왔다. 이곳 안탈리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곳도 역시 뛰어난 모래해안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에는 흡사 백년설이라도 쌓여 있는 것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할 정도로 헐벗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들의 놀이터라고 하는 모양이다. 신들이 다른 생명체의 접근을 막아놓았다면서 말이다.

 

 

 

 

하늘에는 꽤 많은 숫자의 패러글라이더(paraglider)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이곳 올림포스산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한다. 2층에는 10여 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gallery)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전망 좋은 곳에는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문 앞에 음료나 주류의 반입을 금한다는 경고판까지 세워놓은 걸 보면 조망만 즐기려는 공짜 손님들이 심심찮게 기웃거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은 패러글라이딩의 이륙장이다. 하지만 그 아래로 뻗어나가는 능선은 다른 이들의 차지란다. MTB 마니아들이라는데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 아래까지 내려간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탑승장을 빠져나오면 멀리 지중해가 다시 한 번 내려다보인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았는데 그 풍광이 아름답기 짝이 없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고 있는 터키 남서부에서는 마주치는 풍경마다 황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었다.

 

 

 

 

 

 

헐벗은 산자락에는 분화구(噴火口)처럼 생긴 웅덩이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웅덩이 모양의 지형인 돌리네(doline)가 아닐까 싶다. 올림포스산은 토로스산맥에서 솟아오른 하나의 봉우리이다. 때문에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루어진 토로스산맥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는 작은 돌리네들이 합쳐진 우발레(uvale)만도 146개나 된단다.

 

 

정상의 끄트머리에서는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가 펼쳐진다. 그네라고 불려야 할지 아니면 번지점프(bungy jump)의 일종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탄력이 있어 보이는 줄에다 몸을 묶은 채로 공중을 나는 것이다.

 

 

 

 

 

 

 

 

 

 

 

 

하룻밤을 묵은 안탈리아의 아이카 비탈 파크(Ayka Vital Park)’

안탈리아 외곽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이다. 야외수영장까지 갖춘 호텔로 쾌적한 환경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약간 엉성하다는 느낌이었다.

 

 

 

에필로그(epilogue), 그동안 나는 그리스에만 올림포스 산이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곳 터키에도 올림포스 산이 있단다. 아니, 어떻게 그리스 최고의 신들의 터전인 올림포스가 터키에도 있을까? 터키의 올림포스엔 어떤 신화가 전승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키아 올림포스'(2,365m, 다른 이름은 Tahtalı Dağı)인데 지하의 가스 때문에 가끔 지표면의 틈새로 불이 솟아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터키 올림포스산의 비밀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바위틈에서 꺼지지 않고 있는 이 불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자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살았다. 불꽃의 화신인 헤파이스토스는 태어나자마자 불꽃을 휘날리고 빛을 내뿜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형상에 혐오감을 느낀 헤라가 그를 추방해버렸는데, 이때 그가 내려온 곳이 바로 올림포스의 산자락에 있는 야나르타시(Yanartas, 불타는 돌이라는 뜻)’라는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는 불을 다루는 샤먼을 최고로 여겼다. 그러니 올림포스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바위산 야나르타시에 헤파이스토스가 살았다는 신화는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올림포스라는 지명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올림포스가 단순히 높은 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일 뿐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지중해 주변 각지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높은 산에다 올림포스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