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테네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그리스(Greece) : 발칸반도의 최남단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신화의 나라이자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린다. 서구 문명과 민주주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과학과 철학을 발달시켜 서양 문명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 문명을 서양 문명의 요람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아테네(Athens) : 그리스의 수도로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자 고대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기원전 800년경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 중 하나로,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개방적인 성향의 문화가 성립되면서 민주 정치가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인 2004년 하계올림픽을 다시 개최했다.

 

 아테네 관광의 핵심은 고대 신전과 공공건물, 거기에 도시의 뒷골목을 꼽을 수 있다. 이중 고대신전(아크로폴리스)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먼저 도심의 풍경을 엿보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곳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국회의사당’. 그리스 왕국의 초대 왕 오토를 위한 궁전으로 1836년 바이에른 건축가 가르트너가 설계했다. 80년 동안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1924년 그리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행정부가 사용했고, 1935년 의회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에 표기된 일정과는 약간 다르게 진행됐다. 고린도 대신 수니온에 들렀다.

 국회의사당 앞 벽에는 무명용사의 비(Monument of the Unknown Soldier)’가 있다. 그리스-튀르키예(터키) 전쟁(1919~1922, 그리스 왕국의 패전)이 끝난 이듬해에 세웠는데,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면에는 병사의 모습, 양쪽에는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은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왼쪽은 누워 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란다.

 벽면에는 그리스가 참전해왔던 전쟁을 기념하는 동판(銅版)이 붙어 있다. 한국전 참전 기념 동판(KOPEA=KOREA의 그리스어)도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는 1개 대대 849(나중엔 2000명을 넘기기도 했다)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미군에 배속되어 원주전투 등에서 용명을 떨쳤다고 한다.

 묘역은 에브조네스(Evzones)’라는 풍성한 치마 형태의 전통복장을 입은 의장병들이 이 지킨다. 붉은색 모자, 흰색 치마에 방울이 달린 가죽 구두를 신은 이들의 모습은 아테네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의 복장은 오스만튀르크 시절 독립투쟁을 벌인 민병대원들의 복장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치마의 주름은 모두 400개로, 오스만튀르크 치하 400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한다. 아테네의 명물이라는 근위병 교대식은 시간을 맞추지 못해 구경할 수 없었다.

 국회의사당 옆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1864~1936)’의 동상이 서 있었다. 정치인이자 혁명가로써 그리스왕국과 그리스 제2공화국의 총리직을 여덟 번이나 역임하며 정치·사회 개혁을 주도하고, 군비를 확장해 영토를 넓혀 국가의 기틀을 다져 놓은 현대 그리스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테네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딴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이라니 기억해 두자.(시진이 잘못 나와 남의 것을 빌려왔다)

 구시가지와 국회의사당 사이에 위치한 신타그마 광장(Syntagma square)’은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다. 아테네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아테네에서 그리스 각지로 뻗는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삼는다. 신타그마는 헌법광장이라는 뜻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뻗어나간 에르무(Ermou)거리·미트로폴레오스(Mitropoleos)거리는 대표적인 쇼핑가이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본 아테나 학당(Akademeia)’.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건물 앞 기둥 위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아테나 여신과 악기를 들고 있는 아폴론 신이 올라가 있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고 아폴론은 학문과 예술의 신이다. 둘이 합쳐지면 아카데미를 상징하게 된다나?

 요새 이름은 아테네대학교’. 정식 이름은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인데, 그리스 독립 전쟁의 지도자였던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1837 5 3일 그리스의 오톤 국왕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서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간 하드리아누스의 문은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렸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AD76~138)’ 131년에 만든 문으로 기존의 아테네를 확장하는 하드리아누폴리스를 건설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Panathenaic Stadium)’이다. ‘1회 올림픽(근대 올림픽의 시초)이 열린 곳으로 고대 아테네 시대에는 판 아테네 대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저 경기장은 1895년 제1회 올림픽 개최 당시 그리스 부호인 아베로프가 낸 기부금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대리석 좌석과 말굽 모양의 트랙은 고대 경기장을 그대로 복원시킨 것인데, 고대에는 관람석이 없었으나 로마시대 대부호인 헤르데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으로 만들어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소실되었고 근대에 와서 아베로프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경기장은 45000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밖에서도 경기장 내부를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데, 굳이 5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 이곳은 BC 490년 고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던 때 한 아테네 병사(Fidipitz)가 달려와 아테네 시민들에게 마라톤 평야에서의 승전소식을 알리고 쓰러져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안내판은 경기장의 길이가 268.31미터이고, 너비가 141미터임을 알려준다. 트랙의 길이는 191미터라고 한다. 그밖에도 여러 제원이 상세하게 적혀있으나 설명은 생략.

 출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시간이 없음을 핑계 삼아 발길을 돌린다. 주어진 10분 안에 경기장을 모두 둘러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장 입구에는 그리스의 사업가이자 박애주의자인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Georgios Averoff)’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896년 하계올림픽 준비를 위한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의 후원금을 제공하고 올림픽 접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다.

 경기장 조감도인 모양인데, 영어는 한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은 2500년 마라톤의 역사를 전한다. BC 330 고대올림픽(BC 776년 최초로 개최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이 열렸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140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경기장을 개축하면서 좌석을 5만 석으로 늘렸다. 현재의 경기장은 1896년 첫 근대올림픽을 위해 건축되었다. AD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되었던 올림픽이 1,500년이 지나 같은 장소에서 근대올림픽 대회로 재탄생 한 것이다. 108년이 지난 2004년에는 또 한 번의 올림픽(우리나라는 금메달 9, 은메달 12, 동메달 9개로 종합 9위를 기록했다)이 이곳 아테네에서 열렸다.

 다음 방문지는 모노스트라키 광장이다. 아니 광장 근처에 서는 벼룩시장이다. 차에서 내리니 그래피티(graffiti)로 도배된 건물이 눈에 띈다. 1970년대 브롱스(뉴욕) 빈민가의 거리 낙서로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턴가 예술의 한 장르로 어엿이 자리 잡았다. 내 눈에는 타인의 재산권을 무단으로 훼손하는 범죄행위로 여겨질 따름이지만.

 잠시 후 벼룩시장이 나온다. 매주 일요일 모나스트라키 광장 인근 골목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목요일, 그런데도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까짓 그게 무슨 대수인가. 해외여행에서 벼룩시장을 찾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니, 우린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앙증맞은 도기 인형,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잡한 조각상들. 거리의 좌판에는 없는 것 없이 그득했다. ! 이곳은 고대 아고라의 근처라고 했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의 메인 스트리트로, 시장·신전·정부청사·감옥 등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그렇다면 저 벼룩시장은 고대 아고라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걸으니 유적지 발굴현장이 나온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라고 하는데, 널브러져 있는 건물의 잔해 너머로 아크로폴리스가, 다른 한편에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이 보인다.

 아고라(agora)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는 시장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된다. 민회(民會)나 재판·상업·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민생활의 중심지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근처에는 로만 아고라도 있다고 했다. 로마인들이 고대 아고라를 대체할 목적으로 조성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아니 방문 당시만 해도 아고라 유적이 고대아테네와 로마 지역으로 나누어진다는 것도 몰랐다. 참고로 로마 시대에는 아고라를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안내판은 번역이 귀찮아 naver 지식백과에서 빌려왔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 시대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아고라는 대략 550×700m 크기의 직사각형 광장의 3면을 주랑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주변에 커다란 공공건물들이 들어서 균형 있는 배치를 이루고 있다. 1931 ASCSA(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에 의해 발굴되었다. 1950년대에는 아고라 동쪽의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이 재건되어 오늘날 아고라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마침 지하철이 발굴현장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런데 바깥 면이 온통 그래피티로 도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아고라 주변답게 노점상들이 늘어섰고, 야외에 테이블을 내놓은 카페와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곳은 오가는 시민과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꽤 번화한 골목을 걸었다.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파는 상점도 많았다.

 식당이나 카페는 예외 없이 야외에 의자를 놓아두었다. 커피 한 잔 놓고 몇 시간이고 대화한다는 그리스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마디로 이 골목은 현대의 아고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 그리스도 군복이 대세인 모양이다. 군복과 군장을 파는 상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드디어 모나스트라키 광장(Monastiraki square)’이다. 모나스티라키는 작은 수도원(monastery)’이라는 뜻으로,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갈색 수도원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아테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자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광장 주위에는 유명한 타베르나와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있고, 상품을 진열해놓은 상점들도 꽤 많다. 과일 노점상도 그 가운데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었다

 지하철역처럼 생겨 살짝 들여다보았다. ‘모노스트라키역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만난다는...

 누군가 성 아포스톨루(Apostolou)성당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 아포스톨루 성당이 고대 그리스 유적이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일부만 복원된 벽화와 천정화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올라가다보니 요런 유적지가 얼굴을 내민다. ‘치스타라키스 사원(Tzistarakis Mosque)’이라는데, 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정복했을 때 치스타라키스라는 파샤가 세운 사원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통 도자기·민속예술·민속악기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혹자는 아담은 이브에게 갈비뼈를 주었고 제우스 신전은 치스타라키스 사원에게 기둥을 주었다고 했다. ‘치스타라키스가 저 사원을 짓기 위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17번째 기둥을 뽑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테네 투어의 마지막은 아크로폴리스의 조망으로 꾸몄다. 언덕 위의 고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카페(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낮과는 또 다른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봤다.

 아크로폴리스에 조명용 불이 켜졌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밤하늘에서 초승달과 별이 손을 흔들어준다. 일정에 쫓겨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사용했던 ‘Xenophone Hotel’. 이 호텔은 개인 짐을 직원이 수동식 기계를 이용해 계단위로 올려주는 게 특징이다. 엘리베이터의 문도 수동으로 밀어야만 열린다. 하나 더, 여행사에서는 욕실 일회용품과 드라이기, 커피포트를 알아서 챙겨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칫솔·치약과 면도기 말고는 모두 제공되고 있었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여섯째 날 : 클루지 나포카(Cluj-Napoca)

 

특징 : 루마니아의 북서부 소메슈강과 미크강 유역의 분지(盆地)에 위치한 클루지 주의 주도(州都)로 지명은 '폐쇄된 장소'라는 뜻이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스키타이, 다키아 등 고대 민족이 살았던 땅으로 로마 시대에는 나포카라는 이름으로 다키아 지방의 주도가 되었다. 도시의 또 다른 축인 클루지(Cluj)는 중세 때 쿨루스라는 이름으로 1173년의 문서에 기록된다. 15세기 초에는 클루지(1213년에 세워진 작은 요새인 카스트룸클루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로 알려졌으며, 독일명인 클라우젠부르크(Klausenburg)와 헝가리명인 콜로지바르(Kolozsvár)로도 불렸다. 1405년에 자유도시로 선포되었고, 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 자치공국이 되면서, 쿨루지(Cluj)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20년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함께 루마니아에 합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이웃한 나포카(Napoca)와 합쳐지면서 클루지나포카(Cluj-Napoca)가 됐다. 루마니아 제2의 도시이자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문화중심지로 14세기에 건립된 고딕 건축물인 미하일 교회 등 유적이 많다.

 

 

 

클루지나포카의 투어는 연방광장 (Union Square, Piata Unirii)’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의 메인 광장이라서 주요 볼거리가 대부분 이곳에 몰려있다고 보면 된다. 옛 이름은 '자유광장(Piata Liberatii)'이었단다. 참고로 ‘Union Square’통일광장으로도 번역되는데 루마니아 대도시마다 거의 하나씩 갖고 있는 광장의 대표적 이름이다.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인 성 미카엘 성당(Cathedral of Saint Michael)‘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성 야곱 예배당의 자리에 지은(1350-1487) 건축물로 웅장한 외관에 하늘로 치솟을 것 같은 상승감을 한껏 강조한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뒤쪽에 80m 높이로 우뚝 솟은 탑은 1836년부터 1862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위에 있는 십자가는 높이만 해도 4m에 이른단다. 1390년에 제작된 제단과 벽화가 볼만하다는 성당의 안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보수공사 때문인지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탐방 기사에서 이왕에 성 미카엘 교회를 찾았다면 올라가 보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던 교회의 첨탑도 올라가보지 못했다. 그렇게나 길더라던 줄은 보이지 않았지만 공사 중이라며 출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높은 탑답게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물론이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클루지나포카의 경관을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성당 앞에는 말을 탄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 클루지나포카 출신의 헝가리 왕 마테이 코르빈(Matei Corvin)‘이란다. 1440년 이곳에서 태어나 1458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를 다스렸으며, 재위 중 고향 마을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인 특권 부여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조각가 파드루스즈 져노스(Fadrusz János)‘의 작품인데 1902년 트란실바니아 지역이 헝가리 지배하에 있을 때 세워졌단다.

 

 

 

 

성당의 옆에는 트란실바니아 바로크양식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국립미술관(National Museum of Art Cluj-Napoca)‘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독일건축가 ’Johann Eberhard Blaumann‘이 설계를 맡아 1774~1785년에 지어진 반피궁(Banffy Palace)‘을 개조해 1951년부터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단다. 첫 번째 소유주가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인 헝가리 공작 기요이 반피(György Bánffy)‘라고 해서 반피 궁으로도 불린단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 내부관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에 내부 풍경은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루마니아 미술가, 조각가들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니콜라에 토니차(Nicolae Tonitza), 이온 투쿨레스쿠(Ion Tuculescu), 게오르게 페트라스쿠(Gheorghe Petrascu) 같은 루마니아 대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고가구, 무기류, 수공업자들이 사용하던 도구, 성상, 페르시아 양탄자 등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광장은 트란실바니아 국제 영화제(Transylvan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IFF)‘의 준비로 분주했다. 비영리 영화단체인 루마니아 필름 프로모션(Romanian Film Promotion)‘이 처음 기획한 국제영화제로, 2002년 클루지나포카(Cluj-Napoca)에서 제1회 영화제가 시작되어 곧 루마니아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영화 축제로 자리 잡았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감독의 영화 노스페라투(Nosferatu)’ 속 드라큘라 캐릭터인 오를로크 백작(Count Orlok)’을 영화제의 마스코트로 사용하는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4회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바 있다.

 

 

진행요원 대기실로 보이는 곳에서는 음료도 팔고 있었다. 덕분에 우르소스(Ursus)’라는 현지 생맥주로 목을 축이며 가이드를 기다릴 수 있었다. 우루소스는 라틴어로 곰을 뜻하는데 루마니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란다.

 

 

 

 

연방광장은 클루지나포카 관광의 랜드 마크일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중심이라고 한다. 중세 때 시장이 들어서있던 광장 주변은 지금도 많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다. 때문에 광장을 둘러싼 거리엔 자동차들로 넘쳐나고 광장도 휴식을 취하려는 시민들로 늘 붐빈다. 도시가 커서인지 집시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루마니아는 집시 비율이 10%로 유럽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얼굴로는 구별이 잘 안 가는 집시도 있지만 단속을 해야 하는 경찰들은 족집게처럼 잘도 골라낸단다.

 

 

 

 

연방광장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다른 눈요깃감을 찾아봐야 한다. 이곳 클루지나포카에서 두 번째로 꼽히는 관광지는 아브람 이안쿠 광장(Piața Avram Iancu)’이다. 루마니아 정교회의 대성당과 국립 오페라하우스, 정의의 궁전 등 예쁘게 지어진 건축물들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 이안쿠 광장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광장을 빠져나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사각의 기둥 두 개를 길게 세우고 그 꼭대기에다 종을 매달은 모양새이다. 하단에는 ‘1894-1994’라는 년도 표시와 함께 15명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맨 아래에 ‘in memoriam’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걸 보면 위에 적힌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탑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두 관광지를 연결하는 도로는 인도와 차도의 폭이 거의 비슷했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인지 트란실바니아 국제 영화제(TIFF)‘를 위해 만들어놓은 시설들도 여럿 보였다. 통로 모양의 목제 부스(booth)를 새로 만들고 영화제 관련 사진들을 게시해 놓았다. 알만한 내용이라도 있을까 해서 기웃거려 봤지만 우리나라 영화에 대한 소개는 없었다.

 

 

 

 

 

 

가는 도중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예쁘장한 건물을 만났다. ‘Cluj-Napoca’라는 지명의 위에 자치시라는 뜻의 ‘municipiul’이 적힌 걸로 보아 시청이 아닐까 싶다. 어느 도시든 시청 건물은 그 도시를 대표한다. 때문에 청사의 대부분은 외모가 빼어난 편이다. 이곳 클루지나포카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산뜻한 색상의 정교회도 만날 수 있었다. 지도에는 ‘biserica schimbarea la fata’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거리에는 율리우 호쑤(Iuliu Hossu : 1885-1970)’의 동상도 보인다.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한 로마 가톨릭 추기경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얼마 전 복자품위에 오른 인물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회심을 위해, 값을 치르고 용서를 선사하기 위해, 이 고통의 어둠 속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라는 그의 말이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을 지탱케 해주었다니 거리의 한켠을 차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아름답기 짝이 없는 건축물 하나가 여행객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오스트리아 건축가인 페르디난트 펠너(Ferdinand Feller)와 헤르만 헬머(Hermann Helmer)의 설계로 건설된 클루지나포카 국립오페라하우스(Cluj-Napoca Romanian Opera)‘이다. 건설 당시에는 클루지나포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헝가리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이 루마니아 영토로 편입된 후 재단장하여 1919121일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루시안 블라가(Lucian Blaga)‘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1904~1906년에 지어진 건물은 아치형 출입구 3개가 나란히 있고, 양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탑이 솟아 있어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준다.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이 결합된 형태라고 한다. 예쁜 외관에 걸맞게 주변 풍경도 쉬어 가기 좋을 만큼 예뻤다. 겸사겸사해서 공연도 한 편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긴 그런 호사는 자유여행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오페라하우스의 맞은편은 아브람 이안쿠 광장(Piața Avram Iancu)’이다. 이곳 트란실바니아가 루마니아의 영토로 편입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혁명가 아브람 이안쿠(Avram Iancu : 18241872)’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라고 보면 되겠다.

 

 

 

 

광장의 중앙에는 분수를 배치했다. 그 중앙은 물론 아브람 이안쿠몫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계속해서 합병시키려는데 맞서 혁명전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민족적 권리를 구체적으로 인정받게 한 최초의 협정을 이끌어 낸 인물이라고 한다. 2016년에는 루마니아 의회와 클라우스 요하니스 (Klaus Iohannis)’ 대통령에 의해 국가영웅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인정한 영웅이니 전국 방방곳곳에 이런 동상이 세워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광장은 1933년에 개관했다는 루마니아 정교회 대성당(Catedrala Adormirea Maicii Domnului)’이 완성시킨다. 이스탄불의 소피아대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메인 돔(main dome)’을 루마니아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띤 4개의 타워로 둘러쌓고, 대리석으로 조각된 18개의 기둥이 돔을 받치고 있는데 루마니아 르네상스양식과 비잔틴양식이 혼합된 루마니아 정교회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란다. 1933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성당의 내부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성당 앞에는 정교회의 신부로 보이는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광장에는 프랑스에서나 볼 법한 건축물도 보인다. 어느 권세가의 저택이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정의의 궁전(palace of justice)’이란다. 1898-1902년에 건축가 귈라 바그너(Gyula Wagner)의 지휘 아래 지어졌으며 현재는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풍물시장(風物市場)이 열리고 있었다. 기념품은 물론이고 의류 등의 공산품, 거기다 지역 토산품과 중고품까지 숫제 만물(萬物)이 다 모였다. 거기다 사람들도 인산인해다. 맞다. 우리네 시골 장터도 이런 모습이었다. 이젠 사라져버린, 그래서 사진으로나 보게 되는 풍경이지만 말이다.

 

 

 

 

장터를 둘러보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현지인이 다가와 ‘Korean’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North’‘South’ 가운데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온다. ‘ROK’임을 분명히 했더니 대뜸 김정은에 대한 욕설부터 내뱉는 게 아닌가. 중화학 기술자인 자신이 북한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북한의 살림살이가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김일성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리곤 김정일과 김정은이 핵개발을 하면서 나라를 빈곤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자신이 도와주었던 나라의 비참한 현실이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같이 동조를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익숙한 풍경이었다.

 

 

연방광장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는 온통 중세풍의 건물들로 가득하다. 층수는 높지 않지만 굵직굵직 한 것이 과연 루마니아 제2의 도시답다. 하긴 인구도 30만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루크 오일(LUK OIL)’라는 브랜드를 내건 주요소도 보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석유회사라는데 이번 여행 중에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회장인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정치에 뜻을 두고 푸틴 대통령에 대항하다가 오히려 푸틴의 재벌 길들이기에 호되게 당한바 있다. 반 푸틴 행보를 하다가 탈세 혐의로 구속 수감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석방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앞으로도 반 푸틴 행보를 이어갈지는 모르겠다.

 

 

 

 

 

 

연합광장으로 돌아오는 길, 투어가 끝났다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아까는 보지 못했던 주변 풍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두 아이가 짐승의 젖을 물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 형제를 상징하고 있다는데, 로마에서나 볼 법한 조형물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신들이 로마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조형물이 이탈리아에서 선물로 준 5개의 카피본 가운데 하나라니 그들의 우호관계를 증명하는 셈치고 이곳에 놓아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자투리 시간은 먹거리들을 기웃거려봤다. 화장실도 사용할 겸해서 찾아간 곳은 아이스크림 전문점 ‘Moritz’,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동구(東歐) 쪽에 여러 개의 지점을 갖고 있는데,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가 되고 있단다. 대표적 길거리 간식이라는 랑고쉬(Langos)’는 눈요기만 했다. 밀가루 반죽을 펄펄 끓는 기름에 넣어 튀겨 낸 다음, 그 위에 잘게 썬 치즈를 얹는 것인데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이다. 집사람의 또 다른 선택은 구운 옥수수였다. 삶은 옥수수에 버터를 두르고 소금으로 간을 했는데 입을 대자마자 못 먹겠다며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그동안 먹어오던 옥수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단다.

 

 

 

이스탄불로 되돌아올 때는 클루지나포카 국제공항(Cluj-Napoca International Airport)’에서 터키항공을 탔다. 1933년에 첫 국제노선을 띄운 공항인데 정식 명칭은 아브람 이안쿠 국제공항(Aeroportul Internațional Avram Iancu Cluj)’이다. 위에서 거론했던 아브람 이안쿠의 이름에서 따왔단다. 하지만 국제공항치고는 그 규모가 무척 작았다. 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 숫자도 적은 편이다. 하지만 소요되는 시간만은 짧지가 않았다. 수화물 체크인 등 제반 절차가 우리나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느릿느릿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친절도 또한 우리나라에 견줄 수 없었다. 하긴 고객서비스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공항들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특히 2004GT Tested Awards가 시작된 이래, 11년 연속 세계 공항서비스평가 1위를 차지한바 있는 인천국제공항에 견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여섯째 날 : 투르다 소금광산(Salina Turda)

 

특징 : 투르다(Turda)는 클루지에서 남쪽으로 3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디에르나라는 다키아인들의 정착지로 출발한 이 도시는 로마인들의 카스트룸이 되면서 포타이사로 고쳐 불렸고, 후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시의 역사보다는 시의 북쪽에 있는 암염 광산으로 더 유명하다. 로마시대에 개발된 방대한 규모의 이 소금광산은 1932년까지 양질의 소금을 채굴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방공호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관광객들의 훌륭한 볼거리로 변해 있다. 중세시대의 소금광산이라는 환경, 그리고 그 장소에 직접 선다는 신비로움 때문인지 매년 60만 명 정도가 이 신비한 소금광산 테마파크를 방문하고 있단다. 참고로 이곳은 지하세계라는 특이성 때문인지 공상과학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배트맨 시리즈 중 한 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도 이곳에서 일부가 촬영되었단다.

 

 

 

버스에서 내리니 엄청나게 많은 차량들이 널따란 광장을 꽉 매우고 있다.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인기는 덤일 것이고 말이다.

 

 

 

 

찾는 사람이 많으니 기념품가게라고 없을 리가 있겠는가. 아예 5일마다 선다는 시골 장터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광산의 입구는 달팽이를 닮은 특이한 외형을 갖고 있었다. 저 지하에는 로마시대에 개발되었다는 소금광산이 있다. 하도 오랜 세월을 채굴하다보니 그 깊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단다. 하지만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문을 닫았고, 이후 버려진 채로 방치되었다. 아니 2차 세계대전 때는 대피소로 변했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치즈 저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1992년에 지역 의회의 도움으로 관람차, 미니 골프코스, 스포츠 경기장, 원형 극장, 지하 호수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춘 테마파크(Romania Salina Turda Salt Mine Park)‘로 다시 태어났단다.

 

 

 

 

 

 

건너편 산자락에는 양떼가 노닐고 있었다. 산양 떼를 쫒다가 암염광맥을 발견했다는 옛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양들에게도 소금은 꼭 필요한 영양소이다. 그런 연관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러 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입장권(30레이)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자 소금광산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통로의 벽면에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의사 선생의 손놀림이 바빠지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여행을 마친 뒤에 해독(解讀)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하철역을 연상시키는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동굴 투어가 시작된다.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인데도 느낌은 그 반대다. LED가 만들어낸 마법이랄까? 아니면 이 밑에 숨어 있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지하세계를 연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수평 갱도(坑道). 광업(鑛業) 계통의 업무를 총괄해봤던 내 경험에 의하면 갱도란 붕괴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시설이다. 그런데도 이곳은 지지대(支持臺)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암염(岩鹽, halite)의 강도가 세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내가 들러봤던 독일의 ’Morsleben 처분장은 방사성폐기물을 폐() 암염광산에 저장하고 있지 않았던가.

 

 

수천만 년 동안 형성된 소금암벽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바위벽에 온통 허옇게 붙은 덩어리는 소금이다. 모든 벽이 암염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도 만날 수 있었다. 테이블과 소파 몇 개가 놓여있는가 몇 점의 운동기구도 보였다. 소금광신이 변신한 테마파크 직원들의 쉼터가 아닐까 싶다.

 

 

 

 

 

소금 결정체가 만들어놓은 환상적인 마블무늬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동굴 안에는 옛날 소금광산으로 가행되던 당시 사용하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다는 내 얘기를 들은 어느 기자는 이곳을 일러 소금 박물관이라 했었다. 더 깊게 들어가면 투어의 재미가 사라질 것 같아 흘려들어버렸지만 이런 풍경이 있었기에 박물관이란 표현을 했지 않을까 싶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881년부터 사용해왔다는 소금을 캐내는 기계이다. 채굴한 소금 덩어리를 위로 퍼 올리기 위해 제작된 기계인데 여러 마리의 말들이 회전축을 돌렸다고 한다.

 

 

 

 

광산의 미니어처(miniature)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기도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목숨을 건 작업장이었으니 신에 의지하는 마음 또한 컷을 게 분명하다.

 

 

 

 

지하 공간은 이제 테마파크로 바뀌어 있다. 암염을 캐고 난 커다란 공간을 둘로 나누어 각종 놀이시설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엘리베이터(elevator)를 타고 편히 내려갈 수도 있고, ‘갈 지()’자를 끊임없어 써내려가는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우리 부부는 두 가지를 모두 이용해 보았다. 엘리베이터의 편안함이 좋았으나 그렇다고 계단에서 바라보는 풍경까지 건너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지하광장까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9인승인데 13층 깊이의 광장까지 내려가는 데는 잠깐이면 됐다. 그렇게 도착한 첫 번째 광장에는 운동기구과 놀이기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의 태양은 LED ()이다. 수많은 LED ()들이 깊고 검은 거대한 동굴 내부를 비춘다. 그 무리들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으니 마치 어느 유명한 설치미술가의 작품 전시공간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하다.

 

 

두 번째 광장으로 가려면 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야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옛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오르내렸을 광부들의 마음을 안고서 말이다.

 

 

계단을 빠져나오니 지하 120m에 만들어진 신비한 언더월드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그런데 널따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깊이가 무려 8m나 되는 호수란다. 그나저나 소금이란 물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게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 주변에는 암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소금광산이 문을 닫은 대신 테마파크가 들어선 이유가 아닐까 싶다.

 

 

호수에는 여행객들이 직접 노를 저을 수 있는 보트도 준비되어 있었다. 테마파크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종목이라는데 15레이를 내면 20분을 탈 수 있단다.

 

 

 

 

호수에는 작은 섬도 있었다. 시계태엽을 닮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는데 호수 위에 만들어놓은 다리를 건너 직접 들어가 볼 수도 있다. UFO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저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소금호수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4인승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랐다. 그렇게 올라선 광장은 엄청나게 넓었다. 이 거대한 원추형의 공간은 그 깊이가 무려 112m에 이른단다. 폭도 67m나 된다니 웬만한 스포츠 경기장 하나쯤은 너끈히 들어설 수도 있겠다.

 

 

올라오는 도중에 소금호수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공간은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 공간이라고 소개한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난다. 아니 미국의 경제전문지인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도 그런 표현을 썼었다. 맞다. 지구 태초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수직 동굴에 화려하게 켜진 조명은 마치 SF영화 속의 우주기지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널따란 광장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들이 들어서 있다. 그 가운데 백미는 회전관람차가 아닐까 싶다. 까마득한 높이까지 오르다보면 테마파크의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탁구대도 여럿 배치했다. 이곳 살리나 투르다의 특징을 잘 살린 시설이라 하겠다.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이곳은 1년 내내 11~12도의 기온을 유지한단다. 또한 습도가 80%로 유지되어 박테리아가 서식할 수 없는 조건이란다. 덕분에 알레르기성 호흡기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재활치료 장소가 된단다. 그러니 유산소 운동의 하나인 탁구대를 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편 이곳의 소금 순도는 80%에 달한다고 한다. 소금의 좋은 성분들이 공기 중에 함유되어 있어서인지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당구대도 보인다. 미니 볼링장과 미니 골프장도 이용할 수 있다. 운동과 오락을 함께 할 수 있는 시설이라 하겠다. 거기다 때만 잘 맞추면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도 있단다. ! 오락적인 기능이 주를 이루고 있는 다른 테마파크를 연상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놀이동산의 꽃인 롤러코스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이로드롭이나 바이킹 같은 스릴 넘치는 기구도 없기 때문이다.

 

 

 

 

찾는 이들이 저렇게 많으니 기념품가게가 들어서지 않았을 리 없다. 소금은 이용한 제품, 특히 암염을 깎아 만든 조각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의 벽면도 역시 서릿발처럼 생긴 소금 결정체들로 뒤덮여 있다. 아니 이번에는 고드름만큼 굵은 것들도 보였다. 그 소금 종유석이 긴 것은 3m나 된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몇 가지의 놀이기구를 체험해 본 다음에는 계단을 이용해 위로 올랐다. 13층이나 되는 높이이니 올라가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 커서 고된 줄도 모르고 오를 수 있었다.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불빛들이라니...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각 층의 벽면에는 년도를 적은 동판이 붙어 있었다. 채굴하던 년도가 아닐까 싶다.

 

 

소금광산 투어를 끝내고 클루지나포카(Cluj-Napoca)로 가는 도중에 투르다시가지를 둘러봤다. 이오시프(osif) 광산지구라고 해서 중세시대부터 소금을 채굴하던 광산이 밀집해 있는 광부들의 마을이었다. 인구가 5만 명쯤 되는 도시인데 어제 둘러봤던 시기쇼아라보다 훨씬 밝아진 색상의 중세풍 건물들이 길가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만 독일풍의 외모를 벗어던졌다고나 할까? 참고로 중세 때만 해도 이곳은 트란실바니아 의회의 회의장이 있던 곳으로 투르다 역사박물관과 정교회 대성당, 투르다 시립공원 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찾아보지는 못했다.

 

 

 

 

광장에는 아브람 이안쿠(Avram Iancu : 18241872)’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계속해서 합병시키려는데 맞서 혁명전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민족적 권리를 구체적으로 인정받게 한 최초의 협정을 이끌어 낸 인물이라고 한다. 2016년에는 루마니아 의회와 클라우스 요하니스 (Klaus Iohannis)’ 대통령에 의해 국가영웅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인정한 영웅이니 전국 방방곳곳에 이런 동상이 세워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점심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이 아닐까 싶다. 호텔을 겸하고 있는 건물의 외관이 드라큘라성, 브란성(Castelul Bran)을 쏙 빼다 닮았기 때문이다. 상에 올라온 음식은 샤르말레(sarmale), 포도나 양배추, 근대 등의 잎에 쌀이나 다른 곡물, 다진 고기, 양파, 허브 등을 넣어 말아 만든 음식이다. 그렇다고 이에 만족할 내가 아니다. 드라큘라의 집에 왔으니 어찌 맥주(와인 대신이다)를 곁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여행의 즐거움 중 식도락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루마니아에 가면 꼭 먹어보라고 권하던 샤르말레는 오늘 먹어봤고, 시나이아에서는 미티데이(mititei)’도 섭렵했다. 그 외에도 두어 가지의 음식을 더 먹어봤지만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나 우리나라 국과 비슷하다는 초르바(ciorba)‘ 등은 접해보지 못했다. 이따가 들르게 될 클루지나포카에서 눈요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에필로그(epilogue), 우리나라에도 살리나 투르다와 비슷한 관광지가 있다. 1912년 일제가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개발했던 광명시의 광명동굴로 1972년 폐광될 때까지 약 8km에 이르는 갱도를 뚫어 금과 은, , 아연 등을 캤었다. 그 이후로는 새우젓 저장고로 사용했다. 그러던 것을 광명시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굴테마파크라는 슬로건으로 관광지로 꾸며 2015년에 개방했다. 광산의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비롯해 미디어파사드쇼, 아쿠아월드, VR체험관, 와인 레스토랑 등으로 꾸며졌다. 와인 레스토랑에서는 직접 시음도 해볼 수 있었다. 정선의 삼탄마인아트센터도 마찬가지다. 1964년부터 38년간 운영해 오다 200110월에 폐광된 삼척탄광을 개발해 문화예술단지로 바꾼 사례다. 삼탄역사박물관, 현대미술관 캠, 예술 놀이터, 작가 스튜디오 등으로 재탄생해 지역문화 소생 프로젝트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루마니아 여행 #8 : 시기쇼아라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2 19.06.11 08: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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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시기쇼아라(Sighișoara)

 

특징 :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무레슈(Mureș) 주에 속한 도시로 타르나바 강(Târnava River) 유역에 있다. 시기쇼아라는 12세기 헝가리 왕국이 국경 방어 차원에서 이주시킨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장인과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이다.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의 라틴어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이후 몽골제국의 침입을 겪으며 시기쇼아라 성채는 끊임없이 보강되어 높은 성탑과 성벽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각각의 길드(guild)들이 저마다 성탑을 쌓고 관리해왔다 그러다가 1337년 자치시로 승격되었으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교역이 발달하면서 1516세기 크게 번성했다. 성채의 규모가 더욱 넓혀졌고 오스만제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보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잇단 화재와 지진 피해에다 길드의 특권까지 사라지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루마니아의 땅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원래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왕국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Sighisoara)’가 있으며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버스는 우릴 산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다른 옛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시기쇼아라도 대형버스의 올드 타운(old town)’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뉴타운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의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중세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렀던 다른 도시들의 독일식 건축물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하긴 작센인이라는 뜻의 사시(Saşi)’라고 불리던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세운 도시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막길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시비우를 나설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비가 제법 굵어졌지만 걷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 도로의 바닥을 돌로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옛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걷기에 조금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비가 올 때는 질퍽거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을 살펴가며 잠시 걷자 성문(城門)이 나타난다.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이라는데 이 도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대변해주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시기쇼아라가 길드(guild), 즉 장인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요새도시이기 때문이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의 지역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 이주해온 독일인(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각 길드 별로 도시 방어를 위한 성탑을 쌓고 관리했다. ‘신발 장인의 탑(Schusterturm)’, ‘정육업자의 탑(Fleischerturm)’ 등 개개의 길드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다. 하지만 1676, 1736, 1788년에 큰 화재로 건축물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특히 1676년의 화재 때는 당시 있던 건축물의 75% 정도가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이후 길드조직이 특권을 잃으면서 도시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한때 14개에 이르던 성탑도 시계탑을 포함해 9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성의 안으로 들어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또 다른 문()이 얼굴을 내민다. 두 건물의 2층을 회랑으로 연결하고 그 아래에 아치형의 문 2개를 내놓았다. 이 지역 건축물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지역의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측면으로 아치형 출입통로가 나있으며 작은 부지 탓에 때로는 인접한 집들이 서로 통로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들어가자 또 다른 성탑(城塔)하나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다. 아니 조금 전에 지나왔던 재단사의 탑보다 훨씬 더 커졌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기쇼아라 시계탑(Sighişoara Clock Tower)’으로 2m나 되는 두꺼운 벽과 함께 적들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했을 4개의 포탑이 마련되어 있다. 29명의 병사들이 상주하던 이 시계탑은 방어적인 목적 외에도 의회 개최장소나 기록보관소, 마을의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꼽힌다.



도시를 대표하는 탑답게 눈이 번쩍 띌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애초 30m 높이였으나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64m 높이로 증축되었다고 한다. 167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에 의해 다채로운 색을 입은 지붕을 얹은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단다.



탑에 시계가 장착된 것은 1604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가 1648년에 금속 시계로 교체했다. 시계 옆 벽감에 있는 나무상들도 흥미롭다. 요새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평화, 정의의 신들이 천사와 함께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도시를 향하고 있는 벽에는 요일을 나타내는 행성의 신들이 날짜에 따라 움직인단다.



시계탑의 가장 주된 용도는 물론 출입문이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시계탑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1899년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공예품과 각종 자료를 전시한 시립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아담하게 꾸며진 박물관 안쪽에는 1670년대 이후의 중세 약학, 인종학, 미술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특히 나선형 계단을 따라 맨 위층으로 올라가면 시계와 나무상들이 돌아가는 기계장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꼭대기의 전망대에 서면 시기쇼아라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빨간 타일로 덮인 구시가지의 지붕들 사이로 조약돌이 촘촘히 박힌 폭 좁은 거리가 선을 긋고 있는 16세기 색슨인들의 주거환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계탑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걸으면 대장장이의 탑(Ironsmiths' Tower)’을 만날 수 있다. 내부에 무료로 전시물을 볼 수 있다는데 이곳도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참고로 시기쇼아라의 방어 시스템은 중세 길드가 세운 930m 길이의 성벽과 14개의 탑, 5군데의 요새가 주를 이뤘다고 한다. 요새와 탑은 당시 기술로는 가장 뛰어난 방어기능을 담당하게끔 만들어졌단다.



대장장이의 탑근처의 성벽에 서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 구시가지와 대비되는 신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시기쇼아라는 구시가지가 위치한 언덕을 휘감고 흐르는 트르나바(Trnava) 을 경계로 신·구 시가지가 나뉘어진다. 참고로 신시가지는 19세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언덕위에 있는 구시가지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로 그 기능을 계속 이어갔지만 상업과 공예활동 등은 확장단계에서 요새가 소실된 저지대로 이동했단다.




시계탑 옆에는 장식이 없는 파사드 형태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도미니카 수도원(Dominican Monastery)’이 이 근처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도원에 있던 작은 교회(St Mary)’만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아니 소박한 외모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보다 더 옳은 표현이겠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옮겨 그 분위기를 살펴본다. <교회 안은 500년 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르네상스풍의 의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 등이 어우러져 무척 인상적이다. 수백 년 동안 시기쇼아라의 기독교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장소. 이 교회는 작은 규모와 달리 엄숙함과 장중한 무게감으로 충만하다.>




구시가지 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멋진 건물이 바로 시청(City hall)이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대부분인 도시에서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만났으니 화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거기다 3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의 청사치고는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그래선지 학술제나 음악콘서트 등이 저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시계탑 바로 앞의 광장에 서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노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블라드 체페쉬(Vlad Ţepeş)‘가 태어나 어린 시절 살았던 그의 생가이다. 시기쇼아라는 드라큘라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블라드 체페슈 3가 태어난 곳으로 전형적인 중세 루마니아 양식을 지닌 저 집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이 된 그가 1431년에 태어나서 가족과 함께 네 살이 되던 1435년까지 실제로 살았던 집이란다. 이후 드라큘라 가족은 남쪽의 트르고비슈테로 이주하게 된다. 참고로 드라큘라 백작1456년부터 1462년까지 왈라키아 지방을 통치한 블라드 백작에게서 영감을 얻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재탄생시킨 가공의 인물이다 




건물 입구에는 촌스럽지만 철로 만들어진 용()이 걸려 있었다. 블라드 3체페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2드라쿨용의 기사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의 기사단의 ‘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드라쿨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단다. 용의 조형물을 걸어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로 ‘Dracul’은 용맹하다는 뜻과 용(Dragon)이라는 뜻, 그리고 악마라는 뜻이 혼용된다고 한다. 소설 속의 드라큘라 백작처럼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시기쇼아라 주민이나 루마니아인들은 블라드 2블라드 3를 훌륭한 위인으로 꼽고 있단다.



드라큘라백작의 생가는 현재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다. ‘드라큘라의 집으로 불리는 이 레스토랑은 마을에서 가장 멋진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층은 나무탁자에 둘러앉아 생맥주 한 잔을 들이키기에 그만이고, 고딕식 가구로 인테리어를 꾸민 2층의 아늑한 레스토랑에서는 훌륭한 수프와 루마니아 전통요리를 맛보며 기분 좋은 저녁을 만끽할 수 있다. 2층은 또 블라드 체페쉬에 대한 기록이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드라큘라 백작의 도시에 찾아왔으니 그의 집, 아니 그가 앉았었을 지도 모르는 식탁에 앉아 와인을 곁들인 만찬을 즐겨보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서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여행의 즐거움을 나만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이젠 시기쇼아라의 명소인 산상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금 전에 통과했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 조금 못미처까지 되돌아간 다음 왼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산상교회로 가는 골목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구시가의 주택들과, 낡았지만 세월이 쌓여 있는 골목길이 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매력을 풀풀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예쁜 집들과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Scara acoperita‘라고 적힌 긴 터널형 계단의 입구가 나온다. ‘학생의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642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와 교회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학생과 신도들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사방이 막혀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담을 만한 풍경 하나쯤은 만날 수 있었다. 175개의 계단이 끝나갈 즈음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쾌한 리듬이었는데 십여 명의 학생들이 몸까지 흔들어가며 음악에 맞춰 흥을 돋우고 있었다.



계단을 빠져나오자 학교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조금 전 거리의 악사 앞에서 몸을 흔들던 학생들의 크기로 보아 고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1619’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설립연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본관에 적힌 ‘1901’은 재건축 년도 쯤 되겠다.




몇 걸음 더 오르면 이번에는 작은 공원과 함께 산상교회(Church on the Hil, 山上敎會)’가 길손을 맞는다. ‘산 위에 지어진 교회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 받는단다. 교회는 1345년 짓기 시작해 180년 후인 1525년에 완성되었다. 1838년에는 지진 피해를 입어 복구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원래 니콜라스 성인에게 봉헌된 가톨릭교회였다고 한다. 1547년 작센인들에 의해 개신교로 바뀌었단다.



내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수수했다. 1480년에 만들어졌다는 설교단을 비롯하여 15세기에 제작된 귀중한 조각품들이 있다. 채색이 화려한 그림들이 여럿 걸려있는가 하면, 벽면에는 500년 전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도 여럿 보였다. 또한 로마의 옛 유적지에서나 볼 법한 조각품의 잔해들을 복도에 늘어놓아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지하에 또 다른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덤으로 사용되던 곳이 아닐까 싶은데 텅 비어있었다.



언덕교회 뒤쪽에는 묘지예배당(Capela Cimitirului)’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 앞 전망 좋은 곳에 서면 시기쇼아라의 신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기쇼아라는 시비우처럼 독일인이 건설한 도시로 중세에는 시비우와 쌍벽을 이룰 만큼 융성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산상교회에서 내려올 때는 우회로를 이용했다. 계단을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똑 같은 길을 또 다시 걷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취로 반질반질하게 닳아져버린 돌길을 따라 내려오는 도중에는 한층 더 예스러워진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려오는 도중에 두 개의 성탑(城塔)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정육업자의 탑(Butchers' Tower)’모피상의 탑(The Furriers' Tower)’이다. ! 산상교회를 한바퀴 둘러보는 도중에는 밧줄 제작자의 탑(opemakers' Tower)’도 눈에 띄었었다. ‘요새도시인 시기쇼아라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도시다. 그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14개의 성탑을 세웠는데 각 탑들은 도시의 길드, 즉 수공업자나 상인 조합에서 세우고 길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때문에 재단사의 탑, 모피상의 탑, 제화업자의 탑 등의 흥미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산상교회 근처에서 이들 가운데 셋을 눈에 담은 것이다.



재단사의 탑근처로 되돌아오니 비가 그쳐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아까는 그냥 흘려보냈던 기념품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앙증맞은 상점들은 안을 기웃거려도 누구 하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가게 주인들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훈훈한 인심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시기쇼아라를 일러 세상이 급변해도 여전히 수백 년 전의 골목과 인심이 어우러져 낯선 여행자의 마음까지 금세 편안해지게 만든다고 칭송하는가 보다.



산상교회에서 헤어졌던 두 길은 학생의 계단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아까 투어를 시작하면서 들어왔던 재단사의 탑(Tailors' Tower)’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신발장인의 탑(Shoemaker’ Tower)’이 나온다. 신발 제조업자들이 돈을 모아 지은 탑일 텐데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설명문도 루마니아어로 적혀있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신발 장인의 탑맞은편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있다. 예쁘게 지어진 건축물이나 그 내력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정면에 붙여놓은 표지판에서 건축년도가 1896년이라는 것만 알아낼 수 있었다.




교회 앞의 작은 공원에는 페퇴피 산도르(Sándor Petőfi : 1823-1849)’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헝가리의 위대한 시인이자 혁명가 중 한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동상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가 헝가리 혁명당시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사령관 요제프 벰장군의 부관으로 근무했다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시기쇼아라가 바로 트란실바니아가 아니겠는가.



구불구불한 대리석 길들과 조용한 광장과 탑들, 온전히 보존된 성채와 주택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여행자의 마음은 낭만에 젖고 시간은 저절로 과거로 회귀한다. 파스텔 톤으로 채색된 골목에 들어선 나 자신도 마치 중세시대로 와 있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길가에 미니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를 타고 올드타운을 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미니열차도 탈 수 있다고 했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숙소가 위치한 트르나바(Trnava)’ 강가로 내려오자 시청과 가톨릭교회 등 언덕 위에 들어선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특히 아까 골목을 걸을 때는 카메라의 앵글에 들어오지 않던 시청의 거대한 청사도 이곳에서는 촬영이 가능했다.




하룻밤을 머문 더블트리 바이 힐튼 호텔 시기쇼아라 카발레르(Double Tree by Hilton Hotel Sighisoara-Cavaler)’, ‘트르나바(Trnava)’ 강가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시기쇼아라 구시가지에 대한 조망이 가장 큰 장점이다. ‘더블트리 바이 힐튼'프리미엄 비즈니스 호텔'을 표방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호텔이다. 그래선지 투숙객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객실과 욕실의 청결도도 뛰어났다. 다만 샤워시설이 욕조 안에 들어있어 주의하지 않을 경우 미끄러질 염려가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신시가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금방 발길을 돌려버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 삼위일체 성당((Biserica Sfanta Treime din Sighisoara)'도 없었더라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일도 없었을 뻔했다. 백색 톤으로 산뜻하게 지어진 성당은 중세의 궁전을 쏙 빼다 닮았다. 정교회의 예배당이라는데 역사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성 삼위일체 성당에서 올려다본 구시가지 풍경이다. 완전체로 보존되고 있는 옛 도시이지만 말 위에 올라탄 기사나 검은 수도복을 입은 성직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신비로움을 조장하는 희뿌연 운무도 없었다. 훼손되지 않은 건물에만 중세의 형적이 남아있을 뿐, 500년 뒤로 밀린 인간의 삶은 현세에 머물러 있었다.



내일이면 이번 여행도 끝을 맺는다. 비행기에서 이틀을 자는 것으로 짜여진 58일의 이번 일정은 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라는 결코 작지 않은 두 나라를 돌아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버스 속에서 때워야만 했다. 힘든 여정이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일정과의 이별도 우리 부부에겐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으로 다가온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6년 째 누비고 다니는 중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지금 집사람이 짓고 있는 미소 속에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시비우(Sibiu)

 

특징 : 루마니아 중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 다키아가 로마에 점령된 후 식민도시로 건설됐다. 그 후 12세기 독일인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14세기에는 독일계 주민들의 행정·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는데 독일인들이 만든 일곱(시비우, 브라쇼브, 비스트리차, 클루지나포카, 메디아슈, 세베슈, 시기쇼아라) 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나 1차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로 넘어왔다. 하지만 독일의 문화적 흔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단다. 1928년에는 루마니아 최초의 동물원이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으며,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전쟁 피해를 입었지만 학교와 성당 등 중세 독일식의 유적이 남아 있다. 2007년 유럽연합은 유럽의 문화수도로 이 도시를 지정했으며, 중세도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버스는 우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두터운 성벽의 밖에다 내려놓는다. 저 성벽의 안에 들어있는 구시가(Old city)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끼가 두텁게 내려앉은 성벽을 보니 마치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하다. 누군가는 이곳 시비우를 루마니아 문화의 중심지라 했다. 역사를 품은 저런 풍경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은 산책로로 잘 가꾸어 놓았다. ‘포브스(Forbes)’는 시비우를 유럽에서 가장 살고 싶은 이상적인 도시 8로 선정하기도 했다. 저런 풍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나 싶다. 그나저나 숙소를 시비우로 정했을 경우 아침 산책코스로 안성맞춤이겠다.

 

 

 

 

구시가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유럽 스타일 일색이다. 이곳 시바우가 본디 독일계 이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지배하고자 했던 헝가리 국왕은 특이하게도 헝가리인이 아니라 독일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토록 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 시비우와 시기쇼아라였는데, 근면했던 독일인들은 훗날 길드를 조직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번성하기에 이른다. 루마니아 곳곳에서 중세 유럽의 진향(眞香)이 배어나게 된 이유란다.

 

 

 

 

중세의 풍경을 고이 간직한 도시인데 분수(噴水)가 빠질 리 없다. 널따란 광장(廣場)과 광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건축물들, 그리고 거리 곳곳에 들어서있는 저런 분수들이 중세도시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중세 건물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걷다보니 어느덧 엄청나게 너른 광장(廣場)에 이른다. 이름 또한 큰 광장(Piața Mare. Grand Square Sibiu. Large Square)’인데 18세기의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로만 가톨릭 성당과, 루마니아 최고의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브루켄탈 궁전이 있어서 더욱 빛나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 대광장은 루마니아 민주화혁명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1989년 민주화혁명이 발생했을 때 대광장 주변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문화의 특징은 광장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도시에 있어서 광장은 필수 요인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광장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시민들은 이 아고라에서 토의하고 연설하는 등 민주주의 시초를 행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고라는 시민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변에 공공생활에 필요한 시설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회의장과 사원, 점포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이자 구심의 역할을 하는 곳이 광장인 것이다. 이러한 광장은 중세에 넘어오면 종류가 다양해진다. 대성당이나 교회 앞에 있는 교회광장, 왕족이나 귀족 대저택 앞의 시민광장(시뇨리아), 시장이 열리는 시장광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 시비우의 대표적인 건물은 시청사이다. 그러니 대광장은 시민광장인 셈이다.

 

 

 

 

광장은 예쁘장한 유럽풍의 건물들로 포위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단연 시청사이다. 루마니아 국기가 걸려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저 건물에 관광안내소가 들어있다는 점을 참고해 두자.

 

 

시청사의 오른편 건물은 가톨릭성당(Biserica Romano Catolică)이다. 내부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닌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저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있는 내 여행 스타일을 탓해 볼 따름이다.

 

 

아래 건물은 브루켄탈 국립박물관(Brukenthal National Museum)으로.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자 유럽 전체에서도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박물관이라고 한다. 브루켄탈 박물관은 행정과 관리는 통합되지만 미술관과 민족관, 민속관 등 위치가 각각인 여섯 개의 박물관으로 이루어지며, 브루켄탈 저택의 박물관은 브루켄탈 국립박물관의 본관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브루켄탈 박물관이라고 하면 이곳을 가리킨단다. 박물관으로 개조된 브루켄탈 저택은 루마니아의 바로크 양식 건물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8세기 말 트란실바니아 통치자였던 사무엘 폰 브루켄탈(Samuel von Brukenthal) 남작의 저택으로 1777년에 건설을 시작해 1787년에 완공되었다. 1817년 개관했다는 미술관은 주어진 자유시간이 부족해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을 빌려 내부 전시물을 정리해본다. 미술관에는 루벤스와 보티첼리, 반다이크를 비롯한 유럽 화가들의 회화작품 1,090점이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 학파, 플랑드르 학파, 이탈리아 학파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망라하며, 루마니아 거장들의 작품 1,500점도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15세기부터18세기까지 미술품, 골동품, 동전, 희귀 서적 등 저택의 주인이었던 브루켄탈의 개인 소장품이 별도로 전시된다.

 

 

광장을 둘러보다 문득 시비우의 눈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독일식 건축양식 창문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은 묘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보이지만, 독재자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국민을 감시하던 독재자의 눈초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감시자의 눈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시비우를 일러 건축물 하나에도 역사와 더불어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흥미로운 곳이라고 말한다.

 

 

감시자의 눈은 주택 지붕의 채광창이자 통풍용 창이다. 찢어진 듯한 눈초리 형상이 마치 그 옛날 독재자가 지배하던 시절 국민들을 억누르던 감시의 눈과 같다고 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여졌고 한다.

 

 

광장에는 루마니아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게오르기 라자르(Gheorghe Lazăr.1779~1823)’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818년 부카레스트에 루마니아 최초의 언어학교(Romanian language school)를 설립한 사람이란다.

 

 

정체불명의 시설도 보였다. 옆면에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음수대(飮水臺, drinking fountain)가 아닐까 싶다.

 

 

대광장의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에반겔리카 교회(Biserica Evanghelica)‘가 나온다. 12세기에 세운 로마 가톨릭교회가 있던 자리에 1520년 개신교인 루터파가 새로 지은 교회당이다. 중앙에 다섯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교회는 시비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내부가 화려하게 장식된 가톨릭교회들과는 달리 단순하고 장식이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이란다.

 

 

 

 

 

 

교회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에 탐방을 마치려다보니 발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쪽 벽면에 그려졌다는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를 표현한 9m 높이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특히 루마니아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오르간을 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독일 장인이 1671년에 만든 것을 1914년에 개조했다는데, 6,000개의 파이프가 장착되어 있다니 얼마나 웅장하겠는가. 하지만 예비지식 없이 여행을 떠나온 내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에반겔리카 교회의 앞은 후에트 광장(Huet Square)’이다. 이곳도 역시 고딕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큰 광장과 마찬가지다. 그 규모가 꼬맹이라는 점만 다르다고 보면 되겠다.

 

 

광장 서쪽에는 14세기에 창설된 중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18세기 트란실바니아 통치자였던 브루켄탈의 이름을 따서 사무엘 폰 브루켄탈 학교라고 불린다. 시비우에서 유일하게 모든 수업이 독일어로 진행되는 학교로, 시비우에 중세도시를 건설했던 독일인들의 전통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 건물은 17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금 더 걸으면 루마니아 최초의 철골 다리인 거짓말의 다리(The Liar's Bridge/ Podul Minciunilor)’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 손님을 끌기 위해 과장된 거짓말을 섞어 판매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라거나, 한창 사랑에 불타오르는 젊은 연인들이 금세 변해버릴 사랑의 약속을 했던 데서 다리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다리는 예쁜 꽃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정교한 쇠장식으로 치장된 난간의 아름다움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1859년에 건설될 당시의 다리 이름은 단순히 철교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 다리 위에서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거짓말쟁이의 다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단다. 꼭 속설이 아니더라도 이 다리에서는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근처 건물들의 지붕에서 감시자의 눈들이 시퍼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리 아래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나있다. 위쪽 마을과 아래쪽 마을을 이어주는 오크네이(Ocnei)’ 거리란다.

 

 

 

 

다리를 건너면 소광장(Piața Mică, The Small Square)’이다. 후에트광장과는 조금 전에 지나온 좁은 골목으로 연결되며 대광장과는 시계탑 아래로 난 문을 통해 연결된다. 소광장도 잘 보존된 아름다운 중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대광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소광장 주위의 많은 건물들이 현재 박물관으로 쓰인다는 점은 다르다 하겠다. 과거 약국이었던 건물에 들어선 약학박물관을 비롯해 색슨족 박물관, 세계 민족박물관,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 등이 모두 소광장 주변 건물을 활용하고 있다.

 

 

 

 

광장에는 지붕을 올린 좌판들이 일렬로 서있는 풍경도 볼 수 있다. 혹자는 구시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세 광장들은 조금씩은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 소광장은 주로 상인과 직인들의 거처나 상점이 많았던 일종의 비즈니스가 지역이라 했다. 그렇다면 규격화된 저 노점상들은 옛 특징을 현대에 재현해 놓은 셈이다.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으로 쓰이는 아트하우스(Sibiu Arts House)’이다. 15세기에 지어졌으며 1층에 8개의 아치가 일렬로 늘어선 주랑이 있고, 다갈색 지붕이 특징적인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가게로 사용되던 1층에는 과거 정육점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훗날 모직물을 파는 상인들이 사용하다가 18세기에는 곡식저장고로 쓰였고, 1765년에는 잠시 극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월드뱅크의 지원을 받아 완벽한 복원작업을 거친 후 2004년부터 트란실바니아 문명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의복, 직물, 도자기, 성물 등 4만 점이 넘는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중 1만여 점은 역사적으로 가치도 높고 희귀한 자료들이란다.

 

 

 

 

소광장을 둘러싼 건물들도 역시 감시자의 눈들 일색이다. 아니 게슴츠레하게 뜬 것이 영락없이 웃는 모습이다. 그래선지 저 독특한 독일식 건축양식은 마주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한다.

 

 

소광장과 대광장이 접하는 곳에는 도시의 상징인 시의회 탑(Sibiu Council Tower)’이 서있다. ‘시계탑으로도 불리는데 특별히 꾸미지 않은 모습에 깔끔한 흰색으로 칠해졌으며 13세기에 건설되었다. 시의회 탑이라는 이름은 바로 옆 건물이 시비우 최초의 시청으로 쓰였기 때문에 붙었다. 애초에는 방어용 성벽의 관문 역할을 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때로는 감옥으로, 때로는 시민들의 옥수수 창고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부분적인 붕괴와 재건 과정을 거쳤으며, 1829년 마지막 층을 증축하고 지붕을 올리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도시의 전경을 살피기 위해 탑의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오른다. 비좁은데다 경사까지 져서 내려오는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부대껴야 하는 불편을 감수 해야만 한다. 이런 계단은 전시장을 만나면서부터는 삐꺽거리는 나무계단으로 변한다.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작은 공간들은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올드 시티(Old city) 미니어처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갤러리(gallery)로 꾸며진 공간도 2개 층이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두대가 놓인 공간이 가장 눈길은 끌었던 것 같다. 아래 사진과 같은 기념사진을 원하는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있었을 정도니 말이다.

 

 

거창한 기계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아까 광장에서 바라보던 시계의 태엽이다. !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기계가 돌아가는 광경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위층은 전망대로 꾸며 놓았다. 이 시계탑으로 연결되는 대광장과 소광장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시비우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고딕 냄새가 물씬 나는 교회와 붉은색 지붕들이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각 방향에는 전경 사진을 내걸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비교할 수 있게끔 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중요 건축물에는 이름까지 적어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그만큼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많이 품고 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광장에서 빠져나오는 도중에도 중세의 옛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아래 건물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루마니아의 국기까지 걸려있는 걸로 보아 예사 건물은 아닌 게 분명했다.

 

 

 

 

구시가를 빠져나오는 길에 콘서트홀(Thalia Concert Hall)’이 눈에 띈다. 시비우의 독특한 지붕양식과 현대적인 외모를 함께 지니고 있다. 구시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장한 풍경이다.

 

 

 

이어서 ‘Carpenters Tower’가 눈에 들어온다. 성벽과 함께 시비우를 보호하던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할애한다면 ‘Harquebusiers Tower’, ‘Potters Tower’과 같은 다른 망루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다섯째 날 : 루피아 요새(Cetatea Rupea)

 

특징 : 루마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세의 요새 중 하나이다. 브라쇼브 카운티와 무 레스 카운티 경계, cohalm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요새는 오랜 시간동안 전략적 위치에서 주변 언덕과 계곡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1432년과 1437년에 터키에게 약탈당했고, 1643년에는 엄청난 화재로 폐허가 되어 버려졌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정부의 노력으로 성채가 복원되면서 루마니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탈바꿈되었단다.

 

 

 

요새로 가는 도중 차창 너머로 나타나는 루피아요새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차에서 내리면 요새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바위절벽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다른 요새들과는 달리 이곳은 언덕 위에다 쌓아올렸다. 그마저도 경사가 밋밋하니 성벽의 높이나 두께의 강도를 한껏 높였지 않을까 싶다.

 

 

 

 

 

 

이곳 루피아 요새는 최근들어 관광객들이 부척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니 기념품 판매점이 들어서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요새를 모티브(motive)로 사용한 상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요새를 브랜드로 사용할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기념품에 흥미를 잃으니 자연스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게 주변에는 요새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과 조감도 외에도 성채의 복원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루마니아어로 적어놓아 이방인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하긴 영어로 적어놓았다고 해도 전체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이젠 성채를 둘러볼 차례이다. 그런데 황토색 성벽에 뾰쪽한 첨탑이 어쩐지 눈에 익다. 유럽보다는 아랍 문화권에서 흔히 보아오던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설은 ‘Bacon Tower’이다. 성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식량창고로 사용했지 않나 싶다.

 

 

 

 

개개의 건축물 앞에는 가운데 성채의 성문(The middle fortress gate)’, ‘예배당(The chapel)’ 등과 같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외형들이 엇비슷하기 때문에 탐방객들에게는 꼭 필요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성곽은 두 겹으로 쌓여 있었다. 안쪽의 성벽도 견고하게 쌓아올린 것이 난공불락에 가깝게 보였다.

 

 

 

 

 

 

 

 

 

 

중문(Middle Fortress Gate)을 통과하자 ‘Ungra Tower’라고 적힌 건물이 나온다. ‘Ungra’가 루마니아의 Braov County에 있는 코뮌의 이름인 것은 알겠는데, 건물의 용도는 모르겠다.

 

 

이어서 나타나는 것은 ‘The chapel’, 루마니아가 본디 하느님을 믿는 나라이니 예배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시설이라 하겠다.

 

 

 

 

 

 

 

 

 

 

 

 

 

 

내성(內城)에도 망루가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상부에는 왕궁(The throne chamber)이 들어서 있었다. 높은 사람들이 조망 좋은 곳에 사는 건 고금을 막론하는 모양이다.

 

 

 

 

 

 

맨 꼭대기 건물에는 상부 거주지(The top lodge)’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대(將臺 : 장수가 지휘하는 곳)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부에 탁자 하나만 덜렁 놓여있을 따름이다. 거주지라기보다는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상부(The top)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요새는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적군의 활동을 감시하는 곳이다. 그러니 조망이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상부는 보초 한 명만 세워놓아도 개미 한 마리 숨어들지 못하게 보였다.

 

 

 

 

 

 

 

 

 

내려올 때는 왕궁 옆으로 난 통로를 이용했다. 왕궁이라고 해도 텅 비어있는 상태이니 눈요깃거리가 있을 리 없다.

 

 

 

 

 

 

 

이번에는 아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걸어봤다. 물론 내성(內城)의 위이다.

 

 

 

맨 마지막으로 만난 건물은 필사(筆寫)의 방(scribe tower)’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쇄소라고나 할까? 루피아 요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성채이다. 그럼에도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쇼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브라쇼브(Brasov)

 

특징 : 루마니아 중부 카르파티아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는 도시로 브라쇼브 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하다. 몰다비아·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 지방을 잇는 교통·상업의 중심지이며, 동쪽의 오스만제국과 서쪽의 유럽을 잇는 교역로에 위치하여 중세시대부터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식민지로 발전했다.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의 식민지화를 위해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이곳에 독일인들을 집단 이주시킨다. 이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하 작센인)‘이라 불린다. 13세기 초에는 몽골과 터키의 침입을 대비해 튜턴기사단에게 브라쇼브를 맡겨 국경수비를 강화시킨다. 13세기 중반 기사단이 물러갔지만 작센인들은 남는다. 이 시기 브라쇼브는 독일어로 크론슈타트(Kronstadt) 혹은 라틴어로 코로나(Corona)라 불렸다. 헝가리왕에게 특권을 부여받은 작센인들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한편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반면에 루마니아인들은 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슈케이(Schei)라 불리는 외곽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브라쇼브에는 루마니아인보다 작센인이 더 많았단다. 그러다가 1918년 트란실바니아지역이 루마니아에 합병되면서 브라쇼브도 루마니아의 도시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소련의 영향아래 공산화가 되면서 독일계 주민들은 서독으로 이주한다.

 

 

 

버스는 우릴 구시가지(Old town)의 입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다 내려놓는다. 다른 옛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대형버스의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브라쇼브는 중세와 현대가 함께 호흡하고 있는 특이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반쪽은 현대식 건물로, 다른 반쪽은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중 구() 시가지를 오늘 방문하게 되는데, 예전 중세 시대의 집들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단다.

 

 

 

 

 

 

 

 

’T’자형 도로의 뒤로 보이는 건물은 조지 바리티투 도서관(Biblioteca judeteana george barititu)‘이란다. 그 옆으로 보이는 건물도 공공건물로 보이나 용도는 알 수 없었다.

 

 

 

 

중세풍의 옛 건물들을 오른편에 끼고 걷는다. 왼편은 브라쇼브에서 가장 크다는 중앙공원(parcul central)이다. 예쁜 꽃들과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낸다니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둘러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길가에 놓아둔 벤치에라도 앉아 공원이 주는 분위기에라도 빠져볼 일이고 말이다. 아무튼 도로가 널찍한데다 공원까지 끼고 있는 것이 시민혁명 때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 이곳 브라쇼브는 차우셰스쿠 통치에 반대한 시민들의 봉기가 처음으로 발생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1987년 당시 임금삭감과 긴 노동시간, 식량배급 등에 불만을 품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기본 식량 확보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었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 역시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아니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 이곳 브라쇼브에서는 세월이 만들어놓은 독특한 문화를 엿보는 게 중요하단다. 도시가 루마니아는 물론이고 헝가리와 독일의 문화까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헝가리의 식민지였던 이곳 브라소보를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세웠기 때문이란다. 때문에 지금도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는 등 독일의 영향이 아주 강하단다. 도시 이름 자체를 ‘Kronstadt’라는 독일어로 표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곁가지로 나뉘는 골목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런 풍경을 보고 마치 독일에라도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것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란다. 독일인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만들어진 도시라서가 아닐까 싶다.

 

 

걷는 도중에 성 페트루시 파벨 교회(St. Petrusi Pavel)‘라는 정교회를 만났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앞서가는 가이드의 뒤를 쫒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역사를 품고 있는 작은 거리를 따라 걸으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졌거나 멋지게 다듬어진 바로크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중세 건물들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삼각형 모양으로 훤하게 뚫린 광장이 나온다. 브라쇼브 구시가의 핵심인 스파툴루이 광장(Casa Sfatului)’이다. 의회광장이라 부르는 광장의 중앙에선 원형 분수가 물줄기를 힘차게 뿜고 있고, 분수대 주변 대리석 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 여유롭게 휴식을 즐긴다. 이 광장에서는 1968년에 시작된 '황금사슴벌레(Cerbul de Aur, Golden Stag) 뮤직 페스티발'이 매년 늦은 여름(2018년의 경우 829일부터 92일까지)에 열린다고 한다.

 

 

 

 

광장은 오래된 중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동유럽 제일이라고 극찬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광장 북쪽에는 붉은 지붕과 노란 시계탑이 예쁘게 조화를 이룬 옛 시청 건물이 서 있다.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축 당시 용도는 48m 높이의 감시탑이었다고 한다. 15세기 증축 과정에서 58m로 더 높아졌다. 감시탑 꼭대기에서 병사들이 적의 침입 등 위급 시 나팔을 불어 시민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래선지 나이 지긋한 시민들은 아직도 이곳을 트럼펫의 탑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매일 오후 6시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열린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구경하지는 못했다. 병사와 나팔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팔을 부는 등 쏠쏠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흰색 돔 위에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루마니아 정교회인 스판타아도미래 교회라고 한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외관 덕분에 교회라기보다 궁전 혹은 호텔 같은 인상을 준다. 참고로 루마니아인들은 정교회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정교회 교회력을 지킨다고 한다. 또한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평생에 2, 그러니까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꼭 정교회를 찾는단다.

 

 

 

 

스파툴루이 광장과 이 도시의 메인 도로인 공화국 거리(Rebublicii Strada)가 만나는 곳에 서면 검은 교회(Black Church, 또는 흑색교회)’가 수줍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제단이 있는 뒤쪽 면이라고 보면 되겠다. 브라쇼브가 속해 있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독일식 고딕 건축물로, 1385년에 짓기 시작해 15세기 완공할 때까지 100년 가까이 걸렸다. ‘검은 교회란 이름은 168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대의 공격을 받아 건물 외부와 내부가 불에 타 검게 그을린 데서 유래했단다. 38m에 길이가 89m인 이 교회는 독일 여행 때 보았던 뮌헨성당 만큼이나 웅장해 보였다.

 

 

외관은 복원을 통해 해마다 조금씩 그을음을 벗겨내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검은 벽돌과 흰 벽돌이 섞인 모자이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검은 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다는 얘기이다.

 

 

외벽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조각상들로 장식돼 있다.

 

 

벽면에 부조(浮彫)된 조형물들을 구경하며 돌다보면 교회의 전면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 교회는 독일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도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루터파 교회의 본산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독일식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유일 것이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완공된 교회는 또 다른 인고(忍苦)를 세월을 100년이나 겪어야만 했다. '검은 교회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화재 이후 재건에 걸린 시간이다. 65.5.m 높이의 종탑도 이 때 만들어졌는데, 종탑 안에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무거운 6,300kg짜리 종이 매달려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규모면에서 브라쇼브 최고의 건축물이자 상징으로 꼽힌다.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839년에 만들었다는 파이프오르간을 구경 못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베를린 부흐홀츠(Buchholz)사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제품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온 내 잘못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총 4000개의 파이프 관으로 만든 이 오르간은 유럽 남동쪽 지역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음의 공명과 우아하고 정교한 음향 덕에 이전 시대는 물론, 지금도 큰 규모의 클래식 콘서트에 쓰일 정도로 귀한 악기이자 보물이란다.

 

 

교회를 한 바퀴 돌다보면 '요하네스 혼테루스(Johannes Honterus, 1498~1549)'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비엔나(Vienna)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친 '트란실바니아의 사도'였다. 인도주의자이며 신학자로 선교활동과 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1535년에는 트란실바니아 최초의 인쇄소도 세웠단다. 동상아래에는 그의 업적이 새겨져있다.

 

 

 

 

동상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요하네스 혼테루스 기념관이 있다.

 

 

이 근처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학교 건물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온 광장, 아까보다 관광객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 유럽의 광장은 주민들의 삶의 중심이자 터전이 되어 온 곳이다. 이곳도 만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드넓은 공터가 있을 건 뻔한 일, 1945년부터 1990년까지는 이곳에서 장이 서기도 했단다.

 

 

 

스파툴루이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가는 리피블리카거리에는 야외 카페가 즐비하다. 이 거리가 보행자 전용도로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해발 900m템파 산(Tampa Mountain)‘은 구시가와 신시가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도보나 케이블카를 이용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데 그 푸른 언덕에다 할리우드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글씨체로 브라쇼브(Brasov)라고 적어 넣었다. 브라쇼브가 원래 이곳 탐파산 위에 지어진 요새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니 이를 선전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뒤로 하얗게 보이는 건축물은 백색탑(Turnul Alb)’이다. 브라쇼브 성벽을 따라 있는 요새 가운데 하나로 1494년에 그 옆에 있는 흑색 탑과 함께 축조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저 건축물은 광장에서 볼 때는 사각으로 나타나지만 뒤는 둥글게 지어졌다. 원통을 절반으로 뚝 잘라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백색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흑색 탑(Turnul Negru)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용도는 봉화탑이었는데 1559년에 번개에 맞아서 검은 그을음이 남으면서 흑색탑이라 부르기 시작했단다.

 

 

스파툴루이 광장에서 탐파 산방향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브라쇼브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스케이 성문(Poarta Schei)’이 여행객을 반긴다. 옅은 노란색의 예쁜 모양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문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3~17세기 색슨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 루마니아 원주민은 이 문과 성벽으로 격리된 스케이 지구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들어올 때는 오직 이 문으로만,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통행료를 내고 성안을 오갈 수 있었고, 성안에서는 주택을 비롯한 어떤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단다. 1827년에 다시 지어진 현재의 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문 옆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작은 문이 따로 나 있다.

 

 

슈케이 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아주 좁은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스포리 거리(Strada sforii)’라고 적힌 화살 모양의 까만 이정표가 붙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정표를 따르다보면 비좁기 짝이 없는 골목이 나타난다. 135cm에 길이가 80m인 이 골목은 성인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데, 가다 보면 점점 더 좁아져 결국에는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는 정도가 된다. 골목을 걷다보면 연인의 골목이라는 별명을 만들어내게 만든 이유가 눈에 띄기도 한다. 연인을 어깨에 태우고 사진을 찍는 광경 말이다. 17세기 고문서에도 언급된 이 골목은 원래 소방도로의 기능을 했었다고 한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뒷골목을 들어가 봤다. 누군가는 이 도시를 일러 독일풍의 중세도시라고 했다. 13세기 독일인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도시가 생겼고 이후 루마니아인들과 헝가리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발칸의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시계요새(Cetatuia de pe straja)’로 여겨지는 성곽은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먼 거리로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에 꼭 등장하기에 가보고는 싶었지만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누군가 브라쇼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다섯 군데라고 했다. ‘스파툴루이 광장(Piața Sfatului)’역사박물관(Muzeul de Istoriei)’, 검은 교회, 탐파 산, 그리고 성 니콜라스 교회(Saint nicolas church) 등이다. 이중 앞의 세 곳은 무리를 짓고 있어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는 반면, 탐파산과 성 니콜라이교회는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미처 가보지 못한 성 니콜라스교회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잠시 빌려다 썼다. 참고로 성 니콜라스 교회1392년 나무로 지어지고 1495년에 석조 구조물로 대체됐으며 18세기에 확장을 거쳐 지금은 비잔틴, 바로크 및 고딕 양식이 혼재된 건축학적 걸작이 됐다. 다른 중세 교회들처럼 커다란 나무문이 있고 방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교회가 마치 왕국의 성 같은 위용을 보여준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엠비언트 브라쇼브 호텔(Hotel Ambient Brasov rumnien)’

구시가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로 4성급이라는 격에 부끄럽지 않은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객실의 크기나 청결도도 이만하면 최상급. 욕실에 일회용 세면도구와 드라이기가 비치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아침 제공되는 식사는 중간 정도였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드라큘라의 성으로 더 잘 알려진, 브란 성(Castelul Bran)

 

특징 : 브란(Bran) : 브라쇼브 시로부터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브란, 포아르타(Poarta), 프레델룻(Predeluţ), 시몬(Şimon), 소호돌(Sohodol)이라고 하는 다섯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13세기 초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이 디트리히슈타인(Dietrichstein)이라는 나무로 된 요새를 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1242년 몽골에 의해 요새가 폐허화되었다가 1377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이 현재의 브란 성 부근에 석재로 된 요새를 건설할 것을 명령하면서 재건됐다고 한다.

 

브란 성(Castelul Bran) : 일명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가 된 곳.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으나 192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여왕에게 헌정되었고, 이후 대대적인 개조를 통해 애초 요새로서의 외양이 사라지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시대에 따른 새로운 양식이 추가되면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된 특징을 갖게 되었단다. 브란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지면서부터다.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를 쓰면서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를 가상모델로 삼았는데, ’블라드 테페슈또는 블라드 드라큘라로 불리던 그가 이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브란성의 투어는 브라쇼브 주(Judeţul Brașov)에 위치한 산골마을인 브란(Bran)에서 시작된다. 동명(同名)의 성()이 먼저인지 아니면 마을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에 딸린 작은 마을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 브란 성이 드라큘라의 성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이곳 역시 유명 관광지로 변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드라큘라 이야기는 15세기에 이 지역을 통치했던 블라드 테페슈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에 적과 범죄자를 가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매표소로 들어가는 골목은 엄청나게 많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기념품뿐만 아니라 의류와 잡화 등 진열해놓은 품목들도 다양했다. 식당이나 호텔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만큼 관광객들로 넘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연간 60만의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카리스마 넘치는 뱀파이어 이야기는 소설로 발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어서 영화 등으로 리메이크 되면서 드라큘라 백작은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쓴 스토커는 사실 이곳을 방문한 적도 없단다.

 

 

 

 

드라큘라로 먹고 사는 동네답게 곳곳에서 드라큘라의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파에 밀려 걷다보면 어느새 매표소이다. 입장권은 성인 기준으로 40레이(한화로 약 12,000), 나처럼 65세 이상의 노인(30레이)과 학생(대학생 25레이, 고교생 이하 10레이)들은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입장은 연중무휴(年中無休)이나 입장시간은 동절기(11~3: 9~16)와 하절기(9~18)를 구분해서 운영한다. 단 월요일은 계절에 관계없이 12시부터 문을 연단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자 잘 꾸며진 공원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호수까지 갖춘 울창한 숲속에 산책로는 물론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카페까지 들어앉혔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두어 종류의 조형물도 눈에 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브란성보다도 더 예쁘게 꾸며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성곽(城郭)은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드라큘라의 성이라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채 일반적인 중세 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아 있는 것이 그저 예쁘기만 할 따름이다.

 

 

 

 

 

성은 뾰족한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을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건물은 시대에 따라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면서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단다.

 

 

 

공원 산책이 끝났으면 이젠 성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성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가에는 두어 종류의 깃발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온통 박쥐(흡혈?)들로 채워져 있는가 하면 저녁에는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등 겁주는 문구들을 적어놓기도 했다. 아마 음산함을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

 

 

길을 걷는데 귀여운 달팽이가 보인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걸음까지 멈추어가며 호들갑을 떤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상하며 걷고 있었기에 낯선 풍경일 수도 있겠다.

 

 

성 앞에서 십자가를 만났다. 드라큘라는 십자가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어둠이 깔리면 나타난다는 드라큘라로부터 관광객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싱거운 추측을 해본다.

 

 

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계단은 새로 만들어놓은 것이지 싶다. 지금과 같은 형태였다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못 막아냈을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부분은 감시탑이라고 했다. 가이드로부터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사진촬영에 바빠 한쪽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경비실을 지나자 역대 성주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소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블라드 테페슈(Vlad Tepes)의 초상화(아래사진의 오른쪽에서 네 번째)도 보인다. ‘브람 스토커드라큘라는 사실 '브란 성을 배경으로 쓴 것은 아니란다. 이 분의 이름이 주는 느낌과 약간은 잔인했던 성주였다는 것이 소설의 모티브로서 채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성은 밖에서 보다 안에서 바라볼 때가 더 아름다웠다. 서있는 장소를 불문하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하나같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내부의 방들을 구경하다보면 마리 여왕(Queen Marie)과 공주 일레아나의 이런저런 삶과 관련된 얘기들을 적어 놓은 기록물들을 만난다. 그러나 관광객들의 관심은 온통 드라큘라에 쏠려있는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드라큘라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닐 따름이다. 참고로 이 성은 1920년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마리여왕에게 헌정되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소유권을 박탈(1948) 당했다. 이후 정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1956)하여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으나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아갔다고 한다.

 

 

 

 

 

 

 

 

 

 

레지나 마리아(Regina Maria)의 방도 보인다. 그녀로 여겨지는 흉상이 모셔져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머물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Sala gotica‘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하단에 ’the gothic room’라고 덧붙여 놓은 걸 보면 이 부근은 고딕양식으로 꾸며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어용으로 지어진 탓에 외관은 작고 단순하다. 하지만 내부는 좁고 가파른 비밀통로가 미로(迷路)로 얽혀있다. 그렇게 작은 방들이 연결되니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암살에 시달리던 성주가 찾아낸 지혜의 산물이란다.

 

 

내부는 층별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다. 층과 층은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와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내부는 회랑(回廊) 모양의 복도가 만들어져 있다. 덕분에 어디서나 중정(中庭)이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성 안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그래선지 밖이 내다보이는 공간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하나같이 카메라 렌즈의 사냥감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나 또한 그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말이다.

 

 

성의 꼭대기에는 조망이 툭 트이는 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에는 망루로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창문 사이사이로 브란마을이 내려다보인다. 푸른 숲속에 들어선 집들은 하나같이 붉은 지붕에 하얀 벽면이다. 발칸지역, 아니 지중해나 흑해 연안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아래쪽에 있는 회전식 창문은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적을 공격하고 난 후 외부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이나 총탄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지 싶다.

 

 

블라드 테페슈(Vlad Tepes)‘의 초상화가 붙어있는 방도 보였다. 그가 생활하던 공간이 아닐까 싶다. 소설 드라큘라의 주인공으로 묘사돼 더욱 유명해진 그는 루마니아 첫 독립 국가인 왈라키아 공국의 통치자로 재위했던 인물이다. 테페슈라는 말은 그의 본명이 아닌 별명이었다. ‘창 꽂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테페슈가 별명이 된 이유는 당시 그가 적을 창에 꽂아 처형하고 그 모습을 보며 만찬을 즐기는 잔혹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테페슈보다는 드라큘라로 더 많이 불렸다. 서명을 할 때도 본명이 아닌 블라드 드라큘라라고 서명을 하는 등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소설도 블라드 테페슈 공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면서 드라큘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소설 속에서 흡혈귀로 묘사되는 것은 실제와 다르게 과장이 있긴 하다. 그래도 잔혹했던 블라드 테페슈와 그를 모티브로 한 드라큘라라는 소설 덕분에 루마니아에는 많은 관광 명소들이 탄생했다.

 

 

 

 

 

 

당시의 의상은 물론이고 쇠창살과 철도끼 등 중세시대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소설 드라큘라(Dracula)‘는 영국의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 1847-1912)‘에 의해 쓰여 졌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과 처음 만난 조너선 하커와 조너선의 부인 미나, 시워드 박사, 흡혈귀가 된 희생자 루시 웨스턴라 등 주요 등장인물의 일기와 일지 형태로 쓰여진 이 이야기는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가 초능력을 사용해 영국으로 건너가 자기가 먹고 살아야 할 피를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줄거리이다. 1890, 스토커는 민속학에 정통했던 부다페스트대학(헝가리 소재)의 교수 아르미니우스 뱀버리로부터 동유럽의 흡혈귀 설화를 듣고 드라큘라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블라드 테페슈를 비롯한 흡혈귀들의 설화와 전설을 조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출간된 드라큘라는 현실적인 가상의 글을 모아 놓은 형태의 서간체 소설이다.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 소설은 연극과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루마니아인들의 영웅이었던 블라드 드라큘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동일시되었다. 더불어 브란성도 드라큘라가 실존했던 증거인 양 관심을 모았다.

 

 

 

 

중정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아래로 비상통로가 나있다는데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그저 관광객들이 던져놓고 간 지폐와 동전들만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필로그(epilogue) : 드라큘라성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한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는데 직접 체험해 보지는 못했다. 성의 투어를 끝내면 야외에 설치한 텐트 안으로 안내되고, 이어서 좀비 치어리더들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괴한 옷을 입은 이들이 분위기를 한껏 이끌어준다고 했다. 피를 주제로 한 붉은 칵테일을 바에서 만들어 내면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이 칵테일을 권한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성에서 밤에 진행되는 파티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좋은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긴 그런 멋진 행사가 아무 때나 열릴 리는 없겠지? 더우기 우리 같이 대낮에 투어를 끝내버린 관광객들이라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셋째 날 :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

 

특징 :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휴양도시 시나이아의 근원이자 상징이 된 수도원으로 발라키아공국의 왕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l Cantacuzino)’1695년에 세웠다. ‘시나이아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성경에 등장하는 시나이아반도의 시나이아산(시내산)’처럼 이 지역을 루마니아의 성스러운 영지로 여겼기 때문이란다. 이는 또 지역의 이름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현재 20여 명의 정교회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원 부지는 수도사들의 독방이 있는 낮은 건물로 둘러싸인 두 곳의 뜰로 구분되고, 각 뜰의 중앙에 비잔틴 양식의 그리 크지 않은 교회 건물이 서 있다. 하나는 1695년에 세운 것으로 옛 교회라고 불리고, 나머지 하나는 1846년에 세워졌는데 규모가 더 커서 큰 교회라고 불린다. 도서관이자 박물관으로 쓰이는 작은 방에는 1668년 최초로 루마니아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필사본과 성상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루마니아 최초의 종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펠레슈 성을 출발한 버스는 한눈 팔 사이도 없이 시나이아수도원에 도착해버린다. 10분이 채 안되었을 것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였을까? 버스는 우릴 수도원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숲속에 들어앉은 아름다우면서도 고풍스런 건축물들을 구경하면서 걸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시나이아는 이름난 휴양도시이다. 그러다보니 경제력이 넉넉한 층들이 자신들의 별장을 이곳에 짓게 되었고, 또한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설계한 탓에 건물들마다 개성이 강한 외관들을 지니게 되었단다.

 

 

 

 

이곳이 휴양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카를 1세가 여기에 별장인 펠레슈 성을 지으면서 부터라고 한다. 왕족이나 귀족들이라고 아름다운 곳을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수도인 부쿠레슈티와 기차노선이 연결되면서부터는 왕족들도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게 되었단다. 루마니아가 낳은 세계적인작곡가 게오르그 에네스쿠도 여기서 여름을 보냈단다.

 

 

 

 

 

 

잠시 후 고풍스런 수도원 하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시나이아 수도원으로 화려하다거나 규모가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존재감이 대단하단다. 수도원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으로 굳어진 이유일 것이다. 수도원은 발라키아공국의 왕인 미하이 칸타쿠지노(Mihail Cantacuzino)’1695년에 세웠다. 성경에 등장하는 시나이아산(이집트의 시나이아반도 소재)’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그가 자신의 영지를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아산처럼 성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란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편에는 종루(鐘樓)가 자리하고 있었다. 1892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는 종은 그 무게가 무려 1,700kg도 넘는단다.

 

 

경내로 들어서면 1846년에 지어졌다는 큰 교회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루마니아의 전통양식인 뾰쪽한 모양의 돔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색체를 띠고 있다. 1846년 카롤 1세가 세웠는데 기존에 있던 구교회보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큰 교회라 불린단다. 정교회의 특징이랄 수 있는 화려한 성당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곁에 있는 초록색 건물은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고, 반대편에는 종루와 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역사박물관에는 칸타쿠지노 가문의 유물들과 1668년 루마니아의 최초 성경 등 의미 있는 종교적 유물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초를 꽂고 기도하는 곳도 보인다. 유럽의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경내에는 나무십자가와 함께 철로 만든 독수리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터기 지배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쇠망치로 두드려 수도사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려주었단다. ()이었던 셈이다. 조형물은 독수리의 머리가 두개인데 각각 국가와 교회를 상징한단다. 머리 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관이 있다. 조형물 옆에는 타께 이오네스꾸(Tacho Ionescu : 1859-1918)’의 무덤이 있었다. 1918-1920년 파리강화조약 때 루마니아 대표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란다.

 

 

음수대(飮水臺)의 특이한 생김새에 이끌려 카메라에 담아봤다.

 

 

교회를 마주보고 작은 문(中門)을 지나면 낮은 건물들이 중정(中庭)을 빙 둘러싸고 있다.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수도원이다. 1690년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12명의 수도사로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더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머무르고 있단다. 수도원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정결한 느낌이다. 수도사들의 청빈한 삶과 수도에 정진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중정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예배당이 터를 잡았다. 1695년 수도원이 처음으로 문을 열 당시 건축된 () 교회인데 17세기 말에 약간 증축한 것을 제외하곤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단다.

 

 

 

 

 

옛 교회는 성서의 내용을 담은 프레스코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건물을 바치고 있는 기둥의 부조(浮彫)가 특이하며, 입구의 벽면에 그려 넣은 천국과 지옥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교회 내부는 많이 작다. 하지만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경내를 둘러보는데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수도원에는 저런 수도사들이 2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단다.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팰리스호텔(Palace Hotel Sinaia)’인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상에 오른 메뉴는 미티데이(mititei)’, 루마니아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음식이란다. 생김새는 우리의 떡갈비와 매우 흡사하나 고기의 종류와 부위가 다르다고 한다. 대부분 유럽 음식이 그렇듯 고기의 간이 세고 향도 강했으나 내 입에는 딱 맞았다. 함께 나온 감자도 바삭하게 구워져 맛과 식감이 뛰어났다. ‘미티데이는 루마니아의 국민술이라는 추이카(tuica)’라는 술을 곁들여 마시는 게 현지 전통 방식이라고 한다. 추이카는 자두로 만든 브랜디의 일종인데, 난 한국산 소주에 루마니아산 맥주인 우르수스(Ursus)를 섞어 반주로 삼았다. 한국 사람에겐 역시 한국 술이 제격 아니겠는가.

 

 

 

 

점심 후에는 30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마침 호텔의 뒤편이 ‘Central park’라서 모처럼 눈요기도 즐기면서 소일할 수 있었다. 이곳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해발 800m 고지대에 위치한 휴양지이다. 그러니 자연경관이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다. 공원은 그런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의 무성한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숲속에는 산책로와 더불어 정자와 벤치 등 편의시설들을 고루 갖추었다. 페인트칠을 해놓은 거목의 그루터기들도 전시해 놓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베어낸 것들이 아닐까 싶다.

 

 

 

 

 

 

 

 

동상도 여럿 보였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공원의 한쪽 귀퉁이에는 중세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들어앉았다. 화려한 외관에 이끌려 다가가보니 카지노(casino)란다. 1912년에 카를 1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지금은 컨벤션센터로 사용된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자그만 묘역(墓域)도 보였다. 국기를 게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포까지 진열해 놓은 걸 보면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이들이 잠들어 있는 모양이다.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브란으로 가는 길에 부체지산(Bucegi Mt. 2,504m)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카라이만 봉(caraiman peak)에는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십자가(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가 세워져 있다는데 육안으로 식별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조명이 켜지는 밤에만 구경할 수 있나보다. 참고로 이 십자가는 루마니아 2대국왕의 부인인 마리아 왕비가 1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으로 국민들에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앙을 지키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행지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여행일 : ‘19. 5. 29() - 6.5()

세부 일정 : 소피아릴라소피아(1)플로브디프벨리코 투르노보(1)이바노보부카레스트(1)시나이아브란브라소브(1)루피아시비우시기쇼아라(1)투르다클루지나포카

 

여행 넷째 날 : 루마니아의 국보 1, 펠레슈성(Peleş Castle)

 

특징 : 카르파티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휴양도시 시나이아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카를 1(Carol I)’의 명에 의해 1873년에 건설을 시작한 이 성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처음에는 독일 건축가 빌헬름 도데러(Wilhelm Doderer), 나중에는 그의 제자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z)가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시켰다. 이후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 활용되었으며, 1914년 카를 1세가 죽자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 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로 만든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와 정원, 주변경관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인 모습도 장관을 이루며 건물은 정면에 조각정원이 딸린 커다란 공원 안에 세워져 있다. 성을 지을 때 경비실, 사냥용 별장, 마구간, 발전소 등 부속건물들까지 같이 건설되었으며, 자체 발전소를 갖추고 있어 유럽에서 전력을 사용해 불을 밝힌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중앙난방을 사용한 최초의 성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루마니아의 국보 1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펠레슈 성을 둘러보려면 우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약 두 시간 가량 떨어진 시나이아(Sinaia)’라는 도시까지 와야만 한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는 프라호바 주의 한 도시인데 경관이 수려하여 예전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카를 1세는 이곳에 여름 별장으로 펠레슈 성을 지었다.

 

 

 

 

성은 마을 주차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울창한 숲속을 잠시 걸어야만 만날 수 있다.

 

 

숲길이 끝나면 중세풍의 건물들이 관광객을 맞는다. 펠레슈성의 부속건물인데 성과 비슷한 형식의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하나같이 아름답다. 펠레슈 성보다 규모만 작다고 보면 되겠다.

 

 

 

 

 

 

펠레슈성은 그동안 보아왔던 유럽의 다른 성들과는 많이 다른 외관을 갖고 있었다. 우중충해 보이던 다른 석성(石城)들과는 달리 높이 솟은 첨탑 등 동화 속에서나 만나볼 법한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목재와 그림이 함께 섞인 독특한 외관은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양식이었다. 또한 성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푸른 나무숲은 물론이고 주변의 산릉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등 여름궁전이라는 목적에 딱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궁전에 이르면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뜰이 나온다. 그림은 궁전의 하얀 벽면을 채우고 있는데 주 건축재인 목재와 잘 어우러지며 보는 이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건물은 독일 건축가와 체코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으며, 목재와 벽돌, 대리석 등을 이용한 독일의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입장료는 기본이 20레이(5유로)이다. 하지만 이는 1층에 한정된다. 3층까지 모두 둘러보고 싶다면 50레이를 추가로 내야만 한다. 거기다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 경우엔 32레이(8유로)를 따로 지불해야만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그렇다고 사진촬영을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점심상에 올릴 요량이었던 반주를 빼내기로 하고 카메라를 챙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곳 루마니아는 EU 회원국이지만 자체 화폐 레우(Leu·복수형은 레이)를 쓴다. 1레우는 300원 안팎이다. 현지 맥주 한 캔이 5레이, 담배 한 갑이 8~10레이, 1.5리터 생수가 2~3레이여서 전반적인 생활 물가는 한국보다 조금 낮은 편이라고 한다.

 

 

궁전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방이 무려 170개나 된단다. 내부는 전체적으로 목제로 꾸며진 모양새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이나 난간, 벽면은 빈틈없이 조각이 되어있었고, 천정에 그려진 그림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무엇 하나 놓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곳곳에 배치해 놓은 수천 점에 달하는 그림과 조각품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성은 10세기 후반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 혼용된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축 당시 터키와 알바니아, 체코 등에서 유명한 건축가들을 불러들였고 4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단다. 성의 내부와 외부는 모두 나무 재질의 화려함을 살려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각종 무기들이었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조성된 무기의 방에는 4,000점에 달하는 유럽과 동양의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는데, 얼마나 다양한지 그야말로 박물관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내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아름다운 도자기와 금이나 은으로 만든 접시, 크리스탈 샹들리에, 멋진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가구들까지 어느 것 하나 호화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궁도서실에는 황제가 유사시에 다른 곳으로 피해 이동할 수 있도록 비밀문도 만들어 놓았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감쪽같았다.

 

 

 


 

 

 

 

수많은 방들 중에는 시리아와 이란, 이라크, 터키, 알바니아,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에서 수집한 각종 물건이 전시된 국왕 집무실과 이탈리아 가구로 꾸며진 이탈리아 룸, 100년도 더 된 크리스탈 거울이 걸린 베네치아 룸, 음악회와 영화를 즐기던 극장 등이 눈길을 끈다.

 

 

 

 

 

유럽 미술가들의 회화작품 2,000여 점도 소장되어 있다.

 

 

 

 

 

 

 

 

1875년에 지은 옛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성에는 세 가지의 최신 설비가 장치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천정 자동 개폐식 환기 장치이고 둘째는 음식을 나르는 엘리베이터 시설, 셋째는 중앙 집진식 청소 장치란다.

 

 

 

 

 

 

 

 

 

 

 

 

 

 

아쉽게도 펠레슈성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정원은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정원 안쪽에 조각공원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이드의 뒤만 쫄쫄 따라다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떠나오기 전에 예습이라도 해두었으면 잠시라도 짬을 내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이쯤은 감수해야 할 일일 것 같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언덕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규모가 조금 작은 성 하나가 나온다. 독일 '호헨쫄레른' 왕가 출신의 카를 1세가 자신의 조카이자 미래의 왕이 될 페르디난드 왕자 부부를 위해 1899년 건축을 시작해 1902년에 완공한 펠레쇼르 성(Castelul Pelisor)’이다. 그는 펠레슈 성을 유난히도 싫어한 페르디난드의 부인 마리를 위해 펠레슈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언덕 위에 이 성을 지었다. 때문에 마리 왕비의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펠레슈 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게 다 그거로 보였지만 말이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덕분에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호화스런 내부 장식도 볼 수 없었다. 루마니아의 두 번째 왕이었던 페르디난드가 숨을 거둔 방과 침대는 물론이고, 한때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사용하던 별장의 모습도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