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다섯째 날 : 안탈리아(Antalya) 구시가지(Old town)

 

특징 :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중심도시로 상주인구가 100만 명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여름철이면 이 지역의 인구는 급증한단다. 3000m를 훌쩍 넘기는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웅장한 토로스산맥(Toros Daglari)을 낀 자연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코발트색의 바다, 연중 300일 이상의 맑은 날씨, 부드러운 백사장 등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변에 많은 유적지까지 품고 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이곳 안탈리아가 터키의 관광 수도로 꼽히는 이유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159년 페르가몬의 아타로스 2(Attalus II)‘땅위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아딸레이야(Attaleia)’였다. 하지만 기원전 133년 로마인의 손에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비잔틴·몽골·베네치아·제노바 등에게 지배당했으며, 15세기에는 투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1919년에는 이탈리아가 점령했다가 3년 후 돌려주는 등 역사의 굴곡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런 탓인지 이곳에는 부침의 세월만큼이나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성의 안(城內)’을 뜻하는 칼레이치(Kaleici), 즉 구시가지에 들어서서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하드리아누스의 문미블리 미나레트등 역사를 품은 유적들은 물론이고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목조 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안탈리아 여행의 시작은 춤후리예트(Cumhuriyet) 광장이다. 광장은 조경이 잘 되어있는 탓인지 공원의 느낌이 더 강하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카페도 들어앉았다. 안탈리아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광장의 특징은 한가운데에 세워놓은 아타튀르크Atatürk)의 동상이라 하겠다. 아타튀르크란 투르크인의 아버지란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부(國父)라고 해야 할까? 터키에서는 초대 대통령을 지낸 무스타마 케말(Mustafa Kemal)’의 이름 뒤에 ’Atatürk‘을 붙여서 쓰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왕정(王政)을 폐지하고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재임기간 동안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이슬람의 개혁과 개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오른편에는 지중해의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저곳은 유럽 최고의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지중해에서는 보기 힘든 모래사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안탈리아 연안에는 크고 작은 모래사장이 네 곳이나 있는데, 가장 긴 콘얄트 해변은 모래사장이 무려 2나 된단다. 그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이번에는 붉은색 기와를 얹은 주택들이 들어서있다. 지중해 연안 특유의 풍경이지 싶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관광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우리 부부처럼 말이다. 하긴 질 좋고 물가가 싼 동남아를 놓아두고 이곳까지 휴양을 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취향대로 구시가지로 가는 길가에 오래된 성벽이 길손을 맞는다. 안탈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로 쌓아올린 성벽은 도시가 생길 때 함께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땅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아름다운 성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투어를 막 시작하려는데 두세 마리의 개가 쪼르르 몰려오더니 자기네들끼리 으르렁댄다. 마치 먹이 감을 앞에 두고 서로 다투는 모양새이다. 이윽고 순번이 정해졌는지 그중 한 마리가 우리 일행의 앞장을 선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이 꼬리까지 흔드는 게 아닌가. 영락없는 가이드(guide)’이다. 이곳 안탈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란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안내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방영했던 KBS-1TV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는 내레이터(narrator)가 터키의 개들을 일러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곳 안탈리아의 개들은 예외라고 할 수 있겠다. 저렇게 손수 벌어서 먹고 사니 말이다.

 

 

가는 길에 고양이촌도 만나게 된다. 길가 숲속에 엄청나가 많은 고양이집이 지어져 있는 것이다. 몇 마리가 길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도 피할 줄을 모른다. 어떤 놈들은 아예 포즈까지 취해준다. 이곳 터키는 개들만 천국인줄 알았더니 고양이들에게도 천국인가 보다.

 

 

첫 번째로 마주치는 건 시계탑인 사아트 칼레시(Saat kalesi)’이다. 이 시계탑과 잠시 후에 만나게 될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기준으로 안탈리아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경계를 이룬다고 보면 되겠다. 안탈리아를 검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시계탑은 투박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해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탑 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안탈리아의 상징물이자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이블리 미나레트(Yivli Minare)‘이다. 높이 38m의 첨탑(尖塔)인 이블리 미나레트는 셀주크의 술탄 아라에딘 케이쿠바트(Alaeddin Keykubad I)‘13세기에 세웠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에 세워졌지만 사원은 소실되고 현재는 첨탑만 남아 있다. 저 미나레트는 붉은 벽돌의 외부에 8개의 홈이 있는 독특한 문양이 특징이라고 한다. 참고로 저 첨탑은 시내 어디서도 보인다. 길을 잃었을 경우 방향으로 삼기에 딱 좋겠다.

 

 

 

 

시계탑 뒤쪽으로 빠지는 길로 들어서면 미로처럼 이어지는 칼레이치(Kaleici, 의 안이라는 뜻), 즉 구시가지(Old town)가 나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한 예쁜 길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터키 전통의 알록달록한 접시와 찻잔 등을 파는 곳들이 자주 눈에 띈다. 시간에 여유라도 생긴다면 노천카페에 앉아 한잔의 차로 여행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예스러우나 다른 한편으론 생소하게 느껴지는 풍경도 펼쳐진다. 자연석을 이용해 건물의 벽과 담장을 쌓았는데 그 정교함이 거푸집을 사용하는 요즘의 콘크리트만큼이나 정교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더 이상의 치장을 하지 않은 채로 속살을 보여주고 있어 한층 더 예스러워 보인다. 다만 미장했던 부분이 떨어져나간 채로 방치되고 있는 건물의 외벽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닌 것 같다.

 

 

 

 

잠시 이블리 미나레트와 함께 안탈리아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 , Hadrian Kapısı)‘에 이른다. 이 건축물은 130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안탈리아 인근의 프하세리스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세운 목적에 맞추려 했던지 당시에는 아치 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가족의 석상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석상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참고로 당시의 하드리아누스 문은 안탈리아로 들어오는 유일한 관문이었다고 한다.

 

 

문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3개의 대리석 아치로 꾸며져 있다. ‘스리 게이트(The Three Gates)’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이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들이 돋보이는 성문의 바닥에는 마차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성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관문이었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을까?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남긴 흔적들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히드리아누스의 문을 지나자 신시가지이다. 반듯반듯한 규모의 상점들과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보도, 길가에는 꼬맹이 광장도 만들어져 있다.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고대의 복장을 한 남녀가 뭔가에 흠뻑 빠져있는 듯한 조형물도 만들어 놓았다. 여자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에 한창이고, 남자는 무비 카메라에 뭔가를 담느라 열중해 있다. 젊은이들을 위한 쉼터,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거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이곳 안탈리아는 안탈리아 국제 영화제(International Antalya Film Festiva)’가 열리는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1963년 설립된 이 영화제는 터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영화제이자 터키의 오스카상(Turkish Oscars)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제의 주요 상 이름이 황금오렌지(Golden Orange)‘여서 2015년까지는 안탈리아 황금오렌지 영화제(Antalya Golden Orange Film Festival)‘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 작품으로는 전규환 감독의 댄스 타운2011년 개최된 제48회 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초청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은바 있다.

 

 

 

이젠 본격적으로 구시가지(Old town)를 둘러볼 차례이다. ()의 안()이라는 뜻으로 칼레이치(Kaleici)라고도 불리는데 도보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규모이다. 하지만 로마 시대의 유적과 오스만 시대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자리 잡은 운치 있는 옛 집들,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터기의 최고 관광지답게 안탈리아에서 즐길 수 있는 요트와 래프팅, 사파리 등 각종 레포츠들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판도 보인다. 휴양과 관광을 동시에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비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을 잃어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큰 어려움 없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에는 오스만의 전통가옥들들 많이 들어서있어 옛 도시가 보여주는 정취를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골목은 꽃과 나무들로 잘 가꾸어져 있다. 그런데 꽃은 물론이고 나무까지도 화분에다 기르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비좁은 옛 골목의 단점을 보완한 지혜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울타리에는 부겐빌레아(bougainvillaea)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꽃말이 정열인 이 꽃은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기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밖에서도 꽃을 피우는 걸 보면 그만큼 이곳의 기후가 따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반짝이는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선물가게와 멋스러운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100년은 족히 넘은 고택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문득 이런 풍경에 반했다는 어느 작가의 글이 떠올라 잠깐 옮겨본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골목길 또한 하릴없이 걷기에 제격이다. 군데군데 펼쳐진 노점하며 가게들도 제각각의 꼴을 갖추고 있다. 따가운 햇볕을 막아선 좁은 길이 이리저리 이어진다. 유럽도 동양도 폭 넓게 받아들인 이네들 터키에서는 어떤 것도 자유롭다. 낯섦조차 반가움으로 받아들이는 땅에 서면 오랜만의 자유 또한 호사스럽게 누릴 수 있다. 정작 주민보다는 관광객이 더 많아 보이는 거리에 서서 나는 익명성에 묻은 한가함을 넉넉하게 부린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골목의 끝에 보이는 괴상하게 생긴 첨탑(尖塔)이블리 미나레트만큼이나 유명한 케식 미나레트(Kesik minaret)’일 것이다. 5세기경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성모마리아 교회였으나 셀주크투르크로 권력이 바뀌면서 모스크(Mosque)가 되었다고 한다. ‘케식 미나레트잘린 첨탑이라는 뜻이라는데 생김새 또한 위가 싹둑 잘려나갔다.

 

 

 

 

길을 걷다보면 오래된 성벽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는 상점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요즘의 트렌드인 재활용이라고나 해야 할까? 상점에는 터키 특유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 등이 진열되어 오가는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벽의 출입문을 레스토랑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도 보여 흥미로웠다.

 

 

 

 

 

 

아예 성벽을 그대로 놓아두고 그에 맞추어 지어놓은 집도 보인다. 성벽을 개인주택의 벽이나 담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에 이런 종류의 유적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예 건축허가부터 나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시계탑으로 되돌아 나오기 직전에 18세기에 지어졌다는 테켈리 메흐멧 파샤 모스크(Tekeli Mehmet Pasa Mosque)’를 만난다.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안탈리아의 모스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다고 해서 들어가 보려했지만 가이드의 재빠른 발걸음을 뒤쫓느라 그럴만한 틈을 내지 못했다. 하긴 오전에 올림포스 산까지 다녀와야 하니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칼레이치(Kaleici)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니 바닥분수를 갖춘 작은 광장에 아탈로스 2(Attalos )’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 안탈리아를 세운 페르가몬(Pergamon)’의 왕이다. 안탈리아는 BC 159년 그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아탈로스의 도시(Attaleia)’, 훗날 안탈리아로 불리게 된다. 참고로 이 광장의 너머는 신시가지이다. 이곳 안탈리아의 주요 고객이 유럽인이기에 유러피안 풍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가게들, 깨끗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거리, 전차와 마차가 공존하는 트램 길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에필로그(epilogue), 안탈리아 투어는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다. 꼭 들러봐야만 하는 명소들을 대부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아펜도스극장등 고대유적들은 도시를 벗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신시가지는 물론이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안까지 곁눈질도 못해봤기 때문이다. 특히 안탈리아 인근에서 채집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고고학발문관에 들러보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가슴이 아플 것 같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1988년 유럽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박물관으로 뽑혔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는 유물만은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타이트하게 짜여진 여행 일정 때문일 것이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넷째 날 : 카파도키아의 우치히사르(Uchisar)와 콘야의 카라반사라이(Kervansaray)

 

특징 : 오늘 일정은 우치히사르(Uchisar)’카라반 사라이(Kervansaray)이다. 우치히사르는 모서리, 칼날, 화살촉과 같은 개념으로 뾰족한 바위를 뜻한다. '은둔자의 마을'이라고 불렸으며 바위산 중턱에는 아직도 작은 마을이 있다. 과거 전성기에는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던 곳이란다. 우치히사르계곡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우치히사르 성채에 오르면 괴레메 야외박물관 등 카파도키아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 다른 방문지는 카라반사라이는 안탈리아로 이동하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데 옛 실크로드의 길목마다에 있던, 대상들이 먹고 묵으며 쉬어가던 숙소이다. 대상들의 숙소는 물론이고 낙타가 쉬는 공간, 목욕탕, 시장역할 공간인 바자르(Bazaar)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비둘기계곡이 있는 우치히사르(Uchisar, Üçhisar)’로 이동한다. 아니 우치히사르가 가장 잘 조망된다는 전망대이다.

 

 

 

 

 

 

 

 

전망대로 가려는데 가이드가 부른다. 길가에 있는 이층 규모의 커다란 보석가게를 먼저 들르라는 것이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쇼핑부터 하라는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직원들이 나누어주는 자이 한잔을 마시고는 매장을 둘러본다. 이곳에서 팔고 있는 보석의 종류는 터키석이 주류인데 터키의 특산품 가운데 하나이다. 목걸이와 반지 외에도 다양한 액세서리들을 진열해놓고 있으니 관심이 있을 경우 하나쯤 구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가격은 제법 쏠쏠하지만 말만 잘하면 특별 할인율을 현장에서 적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평소에는 쇼핑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건성이던 집사람도 100(EUR)을 훌쩍 넘기는 터키석 목걸이를 주워들고 본다. 그만큼 맘에 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쇼핑이 끝나면 다음은 우치히사르 비둘기 계곡(Uçhisar Güvercinlik Vadisi)’이다. 그렇다고 계곡을 트레킹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계곡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이동할 따름이다. 하긴 빠듯한 일정 탓에 계곡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전망대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즐기다가 시간이라도 조금 남는다면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작은 소품이라도 하나 구입해 볼 일이다.

 

 

 

 

우치히사르 계곡옛날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이 비둘기를 길렀다 하여 비둘기 골짜기(Pigeon Valley)’라고도 부른다. 그래선지 전망대의 비둘기 떼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갈 줄을 모른 채로 자기 할 일만 바쁘다. 내가 주인인데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어디 있느냐며 말이다.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 우치히사르 성채가 눈에 들어온다. 해발 1300m에 위치한 우치히사르 성채는 응회암으로 뒤덮여 있다. 이 응회암이 부식작용을 일으켜 약한 부분은 깎여나가고 단단한 부분은 남아 오늘날과 같은 바위산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채는 히타이트 시대부터 요새로 사용되어왔고 그 이후에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숨어 살았단다, 지금은 카파도키아에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전망대로 변해 많은 여행객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인기 장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성채의 지하 100m 지점에서 비밀터널이 발견되기도 했다. 비상시에 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성채의 위로 오르면 카파도키아 일대를 360도의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벌집같이 숭숭 뚫려있는 구멍들은 대개 비둘기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비둘기뿐만 아니라 수도사들도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단다. '비둘기 골짜기'라는 별명이 붙게 된 이유이다. 이곳 전망대에서 성채까지 이어지는 4의 트레킹 코스는 배낭여행자들이나 자유여행자들이 즐기는 호사(好事)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는 우리들은 멀리서 겉모양만 보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바쁠 따름이다.

 

 

매끈하게 생긴 계곡의 바위에 뚫려있는 작은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라고 한다. 이 집들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은 이곳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또한 이곳은 인간과 비둘기의 공생관계로 만들어진 기묘한 공간이었다.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에 살던 비둘기의 알에서 채취한 염료로 기독교인들은 석굴 예배당에 성화를 그렸고 배설물로는 비료를 삼았다고 한다. 대신 비둘기는 이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았을 테고 말이다. 이들의 묘한 공존이 독특한 자연 경관을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겠다.

 

 

전망대의 앞 잎이 다 져버린 삭막한 나뭇가지에 푸른 눈 모양의 유리 장식과 알록달록한 헝겊이 묶어져 있는 것이 흡사 서낭당에라도 온 느낌이다. 행운의 상징인 '나자르 본죽(Nazar boncuk)'이란다. 나자르 본죽은 사람들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전통 부적이라서 터키 사람들은 집이나 가게, 승용차의 내부 등에 나자르 본죽을 두는 것은 물론 반지·귀걸이·목걸이 등의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단다.

 

 

 

 

특이하게도 나무에 술병과 항아리들을 매달아 놓았다.

 

 

 

건너편 바위벼랑에는 성당처럼 생긴 유적이 들어서있다. 이곳 카파도키아의 유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남겨놓은 유적일 것이다. 그들은 계곡 바위산 곳곳에 동굴을 뚫어 수도원과 성당을 건설했으며, 그 내부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종교 벽화의 대부분은 비잔틴제국(9~13세기 후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 저녁에 머물게 될 숙소가 있는 안탈리아를 향해 달리던 버스가 잠시 멈춘 곳은 술탄 하니(SultanHani)’. 카파도키아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다. ‘(Han)’이 옛날 낙타상인들의 호텔이었던 카라반 사라이(Kervansaray)’를 뜻하는 단어이니 술탄하니라는 지명은 이곳에 지어져 있는 카라반사라이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다.

 

 

도로변에 만들어 놓은 작은 소공원에는 가슴 위만 새긴 흉상(胸像)을 여럿 세워놓았다. 이름 옆에 술탄이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터키를 다스리던 왕들인 모양이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의 흉상도 세워놓은 걸 보면 그도 술탄의 반열에 드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라반 사라이(Kervansaray)’이었다. 터키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단다. 카라반 사라이는 옛 실크로드의 길목마다에 있던, 대상들이 먹고 묵으며 쉬어가던 숙소이다. 낙타가 최대 하루동안 걸을 수 있었던 거리는 대략 45km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카라반 사라이는 30~40km마다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대상들의 숙소, 낙타가 쉬는 공간, 목욕탕, 시장역할 공간인 바자르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있었단다. 악사라이(Aksaray, 카파도키아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나게 된다)로부터 42지점에 있는 이곳에 지어진 이유일 것이다.

 

 

셀주크터키의 대표적 카라반 사라이인 이곳의 정문은 높이가 13m나 된다. 석류 모양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눈길을 끄는데 장식도 화려할 뿐만 아니라 세밀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이곳은 셀주크터키 제국시대인 1223년에 최초로 지어졌다고 한다. ‘카이쿠바드 1때이나 당시의 건물은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후 카이쿠스라우 3술탄이 1278년에 재건하면서 그 규모 또한 크게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셀주크터키는 몽골의 속국(屬國)이었으니 참조한다.

 

 

 

 

 

 

약간의 돈을 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구경할 수 있는 공간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모스크도 접근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입장료를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나마 숙소로 이용되던 공간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텅 빈 공간, 그것도 공사자재들이 곳곳에 방치된 채로 관람객들을 맞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카라반 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쉬거나 묵고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인근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교역 장소였고, 오가는 카라반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징세소(徵稅所)이기도 했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제공하거나 파는 공급소이기도 했다.

 

 

 

 

 

 

 

 

숙소로 여겨지는 공간이다. 저 공간은 아무나 들어와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단다. 이용객들은 대부분 매우 부유하고 고가의 귀중품을 소지한 상인들이었으며 나머지 상인들은 주변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숙박료가 매우 비쌌었기 때문이란다.

 

 

 

 

 

 

 

 

두 번째로 멈춘 곳은 오브룩 한(Obruk Han)’이다. 여기서 오브룩(Obruk)’은 지명이고 (Han)’은 호텔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 ‘오브룩 한은 오브룩에 있는 호텔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나 이스탄불(터키)그랜드 바자르에 이르는 총 12의 실크로드에 위치한 카라반 사라이(Kervansaray)’ 즉 카라반들이 쉬어가는 숙소를 이르는 말이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물건 매매와 여행정보를 교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황량한 벌판에 텅 빈 건물만이 외롭다. 더구나 오늘은 문까지 닫혀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고 읊조렸던 길재선생이 바라보던 개경의 풍경도 이랬었을까? 아무튼 오브룩 한은 그 외형만 남아 실크로드 전성시대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오브룩한 뒤로 올라가니 커다란 담수호(淡水湖)가 나타난다. 이 호수는 지진에 의해 푹 꺼진 땅 속으로 지하수가 채워지면서 생긴 저수지라고 한다. 호수는 짙푸른 청색이다. 하긴 1.2의 직경에 수심(水深)이 무려 200m나 된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일종의 싱크홀(sink hole)이라 하겠다. 아니 블루홀(blue hole)이라 부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싱크홀(Sink hole)은 자연적인 현상의 하나로 땅이 가라앉아 생긴 구덩이를 말한다. 자연 상태의 싱크홀은 석회암 등 퇴적암이 많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게 보통인데 지하수가 빠져나가면서 땅속 흙이 함께 쓸려가거나 특정 성분이 녹아 공간이 생기면서 만들어진다. 반면에 블루홀(Blue Holes)은 과거 동굴이나 석회암 동굴과 같은 지형이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바다 속으로 수몰되면서 얕은 여울에 구멍이 뚫린 듯한 지형이 형성된 것을 뜻한다.

 

 

 

 

 

호수의 물을 뽑아 쓰기라도 했었는지 양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 아침에는 벌룬투어가 진행됐었다. 터키여행 하이라이트라는 카파도키아’,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벌룬 투어(Balloon Tour)’로 알려져 있다.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 일출을 바라보는 코스인데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목록'에도 낄 정도로 인기 있는 상품이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그런 나를 위로라고 하려는지 집사람까지 열기구를 타지 않겠단다. 미안함에 자책하고 있는데 열기구를 타러갔던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열기구가 뜨지를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괜히 아침 잠만 설쳤다며 투덜댄다. 그렇다. 카파도키아의 벌룬투어는 하늘이 도와주어야만 가능하다. 바람이 세게 부는 등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열기구가 뜨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기구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장관이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기구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풍경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라는데 우리 일행들에게는 그런 장관을 볼 행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우리처럼 건기(乾期)에 찾아왔다고 해도 1/3만이 벌룬투어를 할 수가 있다니 그리 억울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셋째 날 : 카파도키아(Cappadocia) 지프투어

 

특징 : 카파도키아는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수백만 년 전 화산 폭발과 대규모 지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생성된 기묘한 암석군이 웅장한 자연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짧은 일정으로 돌아보려면 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때 이용되는 게 미니밴을 타고 카파도키아를 둘러보는 것이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Open air museum)’이나 파샤바계곡(Pasabag,Paşabağı)’ 같이 대형버스의 접근이 용이한 곳은 걸어서 돌아보고, 대신 일반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카파도키아의 험난한 지역들은 지프를 타고 돌아보는 것이다. 경쾌하고 빠른 음악을 들으며 카파도키아의 기암절벽들과 바위들 사이를 쌩쌩 달리다보면 오지 탐험가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유명 명소를 묶어서 차로 이동하며 편리하게 볼 수 있는 그린 투어와 레드 투어, 해 지는 풍경을 보러 트레킹하는 로즈밸리 투어, 열기구를 타고 하늘 위에서 신비한 지형을 구경하는 벌룬 투어 등이 있으니 참조한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지프투어이다. ‘선택 관광’, 즉 원하는 사람만을 위해 진행되는데 카파도키아를 대표하는 투어 중 하나로 꼽힌다.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장소들을 지프를 타고 모두 둘러볼 수 있는 특별한 투어이기 때문이다. 전망이 좋은 높은 곳을 집중적으로 가보기 때문에 투어 내내 카파도키아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지프차와 함께 오프로드를 누비기 때문에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activity)를 즐기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투어에 나선 짚은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 괴뢰메(Goreme) 마을을 지난다. ‘괴레메(Greme)’'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6세기경 지어진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지역 중 하나이다. 이곳의 바위는 화산성 응회암으로 만들어져서 매우 잘 파지는데, 그걸 이용해 주거지로 활용했으며, 지금도 이곳을 개조해 식당이나 여관으로 이용하기도 한단다.

 

 

투어는 사륜구동(四輪驅動)으로 보이는 지프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주로 산길을 달리는데 평평한 가운뎃길은 놔두고 일부러 경사진 곳을 달린다. 덕분에 우린 소리를 지르며 스릴을 만끽한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로즈벨리(Rose valley)이다. 카파도키아의 기압괴석은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번의 나눠진 축적으로 단층이 생겼는데, 단층마다 인, 황 등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계곡을 이루는 암석의 색도 빨강, 분홍, 주황, 노랑 등 장미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로즈벨리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즈벨리는 레드벨리(Red valley)라고도 부른다. 붉은 계통의 단층이 많기 때문에 노을이 질 때면 계곡 전체가 다 붉게 물들기 때문이란다.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시야가 툭 터짐은 물론이다.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주변 경관을 구경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눈으로만 보지 말고 가슴에 담으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석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고 알려진 석양 전망대(sunset point)’가 이곳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는 기념품가게는 물론이고 즉석 사진을 찍어주는 곳도 보인다. 물론 음료수도 판다.

 

 

 

 

 

 

계곡에는 밝고 아름다운 살구색의 바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작고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은 거대한 바위절벽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미니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길가에 이정표가 보인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물일 것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만난 지인은 카파도키아를 즐기는 여러 방법들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은 '걷기'라면서 한번 걸어볼 것을 나에게 권했었다. 계곡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서 말이다.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만 따라가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고 했다. 특별한 준비물도 필요 없다고 했다. 편안한 복장과 운동화, 마실 물과 간식거리, 그리고 카메라와 풍경을 즐기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자연에 조금 더 귀 기울이고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오면 앉아서 휴식을 취하면 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여행이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시간여유가 없는 패키지여행자이다. 그리고 지금은 지프투어가 진행 중이다. 다음 행선지로 출발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이다.

 

 

가이드는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카파도키아의 로즈벨리라고 했다. 관광안내서에도 쓰여 있었다는 누군가의 귀띔이 있었으니 사실일 것이다. 석양은 어디에서건 장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터키에서 그것도 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카파도키아에서의 석양은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그야말로 천연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하루해가 저물 때면 저 멀리에 있는 로즈벨리 계곡의 바위들이 붉은 색의 태양빛으로 덧입혀지면서 붉게 타오른단다. 하지만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에게는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여행사의 일정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는데 해가지려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며 어느 여행가가 내뱉었다는 ! 이래서 로즈 밸리이구나!’라는 감탄사로 그가 느꼈을 감정을 전이(轉移)시켜본다. 자연이 만들어 낸 작품과 인간이 붙인 이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더라는 그 느낌말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괴레메 석굴이다.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위산에 구멍을 뚫어 교회와 병원을 지었다. ‘마리아교회와 병원의 유적이라고 한다. 마리아교회는 7세기에 만든 비잔틴양식의 석굴교회이고, 나란히 붙은 2개의 석굴은 병원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였던 카파도키아 석굴교회는 AD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재위, 307-337)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시대별로 다양한 양식의 교회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석굴의 위에다 이층으로 창문을 냈는가 하면, 내부는 요즘 교회처럼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3열의 돌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붉은 색의 장식이 있고 기둥들 사이는 돔(dome)처럼 오목한 반구형의 천정을 두었다. 일부 기둥의 중앙부분이 잘리고 중앙제대 뒷벽의 프레스코화(Fresco : 덜 마른 석회벽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그리는 기법)가 형태만 남아있는 걸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보존이 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원은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랑이 있는 곳이 주 건물로 보이며 벽에 작은 벽감들을 거느리고 있는 건물은 환자 병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교회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첨부하지는 못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던 카파도키아는 하나의 제국이 일어설 때마다 전쟁터로 변했다. 기원전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래,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다. 로마와 비잔틴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됐던 이곳은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기독교가 번성했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카파도키아를 수천 년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자산으로 분류한다. 신비하고 신기한 자연과 역사와 문화유적을 함께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찾아드는 방문객들로 사시사철 붐비는 이유이다.

 

 

 

 

 

 

 

 

 

 

 

 

동굴의 앞에는 낙타 모양의 조형물도 만들어놓았다. 이를 보고만 있을 집사람이 아니다. 냉큼 올라타고 본다. 낙타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을 옮기는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린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낙타와의 접촉을 피해달라는 쪽지를 보건 당국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래서 행여 낙타라도 만날라치면 피해서 돌아다녔는데 안심하고 올라탈 수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동심으로 돌아갔나 보다.

 

 

세 번째로 멈춘 곳은 오르타히사르(Ortahisar)’를 가장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전망대이다. ‘중앙이라는 뜻을 지닌 오르타히사르는 괴레메와 위르귑 사이에 있는 천연 바위 성채이다. 내부는 10개 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정상에서의 조망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아래는 주거지이다. 그런데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들만 있는 게 아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옛날에 지어진 건물들로 변해간다. 그리고 맨 위에는 순수한 동굴주거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저곳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거주해온 역사의 현장이다. 저곳이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저곳에 굴을 파고 교회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후에도 이런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세월이 흐른 후에는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수도하기 원하는 수도사들이 모여서 살게 된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세상에 알려진다. 끊임없이 미스터리(mystery)를 풀어야하는 숙제와 함께 말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판자리크 교회(pancarlik kilise church)’이다. 판자리크계곡에 있는 석굴교회 가운데 하나로 10세기에 데오도르 성인(St. Theodore)’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계곡에는 꼬마 암봉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다. 어쩌면 저 바위들 하나하나에는 사람들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구멍 속에서 살았다는 요정들처럼 말이다. 분명 누군가 살았었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은 막연한 이질감. 카파도키아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이상한 나라'일 뿐이다.

 

 

 

‘Pancarlik Kilise Church’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Kilise는 터키어로 교회를 뜻하는 단어이니 판잘리크 교회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보면 되겠다.

 

 

저만큼 아래에 판자리크 교회(pancarlik kilise church)’가 보인다. 바위산의 크기로 보아 교회의 규모 또한 제법 클 것이다. 주변에 널린 작은 바위들에도 꼬맹이 동굴들이 뚫려있다. 사람들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석굴까지 가보지는 보지는 못했다. 넉넉하지 않은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까 보았던 마리아교회와 별반 다르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섣부른 판단 때문에 난 보존상태가 좋기로 소문난 프레스코화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예수님과 천사, 그리고 제자들을 그린 프레스코화들이 중앙 제대의 위쪽 둥근 돔과 천장의 3면에 빼곡하게 들어차있다는데도 말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전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참고로 이곳의 프레스코화는 안료(顔料, pigment)에 비둘기 알에서 분리한 노른자를 섞어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그 위를 흰자로 코팅한 것이 특징이란다. 이곳 카파도키아의 프레스코화는 89세기 우상파괴운동 때 훼손돼 초기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단다. 현재의 프레스코화는 대부분 1213세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마저도 극단적인 무슬림들에 의해 훼손된 것이 많단다.

 

 

발아래는 낯선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기암괴석들은 수백만 년 동안 자연의 풍화에 부서지고,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란다. 언젠가 보았던 화성 탐사선이 찍었다던 화성 표면의 사진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난 지금 지구가 아닌 화성에 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초현실적인 풍경이라는 얘기이다.

 

 

 

 

짚 투어의 마지막은 샴페인과 함께 했다. 외계 횡성을 탐험했다는 자축인 셈이다. 탁자에 놓아둔 와인 잔 너머에는 아직도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 소리와 함께 샴페인이 거품을 터트렸고 사람들은 인간세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으로 박수를 친다.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적시자 우리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의 꿈같은 현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우린 숙소로 향한다.

 

 

 

하룻밤을 머문 딘러 호텔(Dinler Hotel Urgup), 4성급 호텔로 깨끗한 객실은 물론이고 체력단련시설과 실내·외 수영장, 레스토랑, 매점 등 편의시설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조식도 물론 괜찮은 편이었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셋째 날 : 카파도키아(Cappadocia) 괴레메(Göreme)골짜기와 파샤바계곡(Pasabag)

 

특징 : 카파도키아는 네브세히르(Nevsehir)와 카이세리(Kayseri) 사이에 위치한 광활한 기암지대를 부르는 이름으로 수도 앙카라에서 300km 남쪽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카파도키아는 아름다운 말()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로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슬기가 극치의 조화를 이룬,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명소이다. 지상의 기암괴석과 지하의 암반, 그리고 그 속에다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마련한 도시와 마을, 교회가 하나의 조화로운 복합구조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누구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세계 100대 경관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기이한 경관으로 SF영화의 선구자격인 스타워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 기이한 경관은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의해 스타워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실제로 그는 지구의 자연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역이라고 했다. 카파도키아라는 촬영장소가 영화 성공의 중요한 한 요소였던 것이다. 아무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고깔모자와 버섯같이 생긴 지평선 위의 기기묘묘한 기암괴석, 높이 50m에 달하는 모래 빛깔의 원뿔 모양의 둔덕,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동굴암벽, 동굴 속에 암벽을 뚫고 지은 은신처와 교회 등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유일 것이다.

 

 

 

드디어 카파도키아(Cappadocia)’에 도착했다. 소아시아반도의 내륙을 차지하는 해발 900m의 분지(盆地)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한 카파도키아는 이스탄불에서 750km나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거리이니 상당히 먼 거리라 하겠다. 하지만 이곳 터키에서는 훨씬 더 먼 곳으로 체감(體感)된다. 도로사정과 제한속도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을 버스 속에서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카파도키아에서의 첫 번째 방문지는 괴레메(Göreme) 골짜기이다. 괴뢰메(Goreme)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 마을인데, 근처에 위치한 괴뢰메 야외 박물관(Goreme Open Air Museum)’은 모자이크로 장식된 암굴 교회와 예배당의 복합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의 대규모 정착지로 이곳에는 엘말르 교회성 바질 교회’, ‘성 바바라 교회’, ‘일라니 교회등 아주 흥미롭고도 잘 보존된 교회들이 산재해 있다. 교회들은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고, 교회 근처의 바위를 깎아 만든 침실이나 테이블, 창고 등은 이곳에서 수도사들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림에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괴뢰메의 교회들이 성지 순례의 장소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 교회들을 찾아온다고 한다.

 

 

 

 

 

입구에는 여러 마리의 낙타가 휴식을 취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아니 이미 손님을 태우고 투어를 나서는 낙타도 보인다. 계곡에 널려있다는 암석교회들을 둘러보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가이드는 우릴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로 인도한다. 사진이나 찍고 돌아가자는 의도일 것이다. 바닥이 미끄러운 탓에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조금이라도 경사가 진 곳은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까지 주어진다. 아예 발까지 묶어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크고 작은 돌기둥들이 골짜기를 꽉 메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아예 바위산으로 불러야 될 만큼 거대하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마다 수많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 게 아닌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쪼아 만든 것들이란다.

 

 

카파도키아에는 자연의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다양한 모습을 한 계곡들이 여럿 생겨났다. 이곳 괴레메골짜기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바위들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곳의 돌은 그냥 돌이 아니란다. 흙과 비슷하다고 할까? 손톱으로 혹은 뾰족한 무언가로 콕콕 긁으면 돌가루가 툭툭 떨어진다. 카파도키아의 지형은 본래 부드러운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백만 년 전 화산방출로 인해 생긴 응회암(凝灰岩, tuff) 층이 그 위를 덮어버렸고, 응회암 위로 또 다시 용암이 흘러넘치면서 단단한 새 지층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지층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사암과 응회암은 경도(硬度)가 낮다. 이곳 주민들이 어렵지 않게 동굴을 만들어 그곳에서 거주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동굴내부는 여름이면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거주공간인가.

 

 

 

 

저 벼랑 어디쯤엔가는 동굴교회가 있을 터인데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가이드가 허용한 시간이 주변 경관의 사진을 찍기에도 빠듯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참고로 카파도키아에는 3천 개가 넘는 동굴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괴레메 골짜기 내에도 30여 개 이상의 동굴교회가 있는데 독거 수도생활에서 공동 수도생활로 변화해가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9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인데 내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등을 주제로 하는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대표적인 동굴교회로는 바실리우스 교회(작은 교회), 엘말러 킬리세(사과 교회), 성녀 바르바라 교회, 열라늘러 킬리세(뱀 교회), 카란르크 킬리세(어두운 교회), 차르클러 킬리세(샌들 교회), 크즐라르 마나스트러(수녀원), 엘 나자르 교회, 토칼러 킬리세(버클 교회) 등이 있다. 교회 이름은 각 교회 내의 벽화에서 그 특징을 따서 부르고 있단다.

 

 

 

 

 

 

 

 

가까이에 있는 바위에 다가가 보니 사람이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공간이 뚫려있다. 사람의 손으로 파낸 탓인지 정교한 맛은 떨어진다. 벽화도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거론했던 교회로 분류될 정도는 아닌가 보다. 그저 거주공간으로만 이용되었을 수도 있겠다.

 

 

 

 

 

 

눈의 호사는 잠깐으로 끝나버린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게 바로 패키지여행의 특징인 것을. 다음 행선지는 카파도키아에 위치한 도자기 마을 아바노스(Avanos)’이다. ‘크즐으르막 (kızıl Irmak)’ 주변에서 나는 질 좋은 흙을 사용해서 명품 도자기를 빚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카파도키아의 바위산을 파서 만든 공방(工房)으로 들어서면 발로 돌리는 물레를 이용해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잠깐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는 항아리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는 자기네 가문의 자랑과 함께 제품의 홍보가 시작된다. 그런데 터키의 명물인 항아리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벽걸이용 접시에만 집중하고 있다. 하긴 여행자들의 눈길이 하나같이 항아리보다는 아름다운 접시로 쫒아가도 있으니 어쩌겠는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터키에 가면 이슬람 패턴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접시를 사와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벽면의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만큼 화려하다는 얘기이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대를 이어 전수되어온 기법으로 구워낸 접시라고 해서 꽤 비싼 가격으로 두 점이나 구입했다. 그리고 만든 이의 서명까지 덧칠해져 우리 집 거실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아바노스(Avanos) 마을의 옆에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 이 흐른다. 흑해로 흘러가는 총 길이 1,355의 강으로 터키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조금 전에 보았던 아바노스의 도자기들은 저 강의 바닥에서 채취한 질 좋은 흙으로 빚어낸 것이란다.

 

 

다음 방문지로 이동하는 길, 차창너머로 카파도키아의 풍경이 펼쳐진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기암괴석들은 그런 느낌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하다.

 

 

바위산에는 마을이 들어앉았다. 그런데 가장 뒤편에 위치한 집들 중에는 바위벼랑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것도 반듯하게 격식까지 갖췄다. 신형 암굴주택인 셈이다.

 

 

두 번째 방문지는 파샤바 계곡(Pasabag, Paşabağı)이다. 괴레메골짜기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깔모자나 레고 장난감처럼 다양한 생김새의 바위들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송이버섯처럼 몸통은 하얗고 갓은 거무튀튀한 버섯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앞서간 사람들이 내놓은 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선다. 요정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계곡이다. 푸른색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계곡 사이를 걷자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라도 된 느낌이다. 나만이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개구쟁이 스머프'로 유명한 벨기에의 작가 피에르(Pierre Culliford)’는 이 기괴한 모습을 보고 스머프(The Smurfs)’ 속 버섯 집을 그려냈다. 그러니 저 바위들은 '개구쟁이 스머프'의 모델하우스인 셈이다.

 

 

웨딩복 차림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가 보인다. 터키 젊은이들에게도 이곳 카파도키아는 평생을 간직하고 싶은 풍경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마치 꼬마 요정들의 땅이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반지의 제왕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꼭대기에 뚜껑이 달린 원뿔형의 바위기둥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이 놀라운 정경은 수천 년에 걸친 침식의 결과물이란다. ‘에르키예스 산(Mt.erciyes)’에서 솟아나온 분출물들이 쌓여 깊은 층의 응회암(화산재가 암축되어 형성된 부드러운 암석)이 되었는데, 이 응회암이 풍화되면서 현무암 등 좀 더 단단한 암석덩어리보다 침식 속도가 빨라지면서 저런 남근 모양의 바위봉우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신기한 풍경에 넋을 놓다가 문득 언젠가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이곳 카파도키아에 대한 느낌을 적었는데 하도 실감이 나서 여기에 옮겨본다. <지구에는 그런 곳이 있다. 그토록 무수한 소문을 듣고, 그토록 많은 사진을 보았다 해도 그 앞에 서면 생생한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곳. 자연이 만든 풍경 앞에서 인간의 언어 따위는 무기력하고 진부하기만 해 그 모든 말과 감탄사조차 사라지는 곳. 터키 중부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그런 곳이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앞에 서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은 여럿이 함께 보다는 혼자 와야 하는 곳이고, 한낮의 태양보다는 늦은 오후의 사위어가는 햇살 속에 찾아야 하는 곳이다>

 

 

 

 

언덕 위로 오르니 버섯바위들이 들어찬 계곡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건 그렇고 발아래에 펼쳐지는 저 바위들을 요정의 굴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재치 있는 사람이 바위 위를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아니 저런 바위에 구멍을 파고 살았을 고대 인간들의 행위를 연상하면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 눈에는 영락없는 버섯 모양이다. 카파도키아의 지형은 화산폭발로 쌓인 화산재를 바람과 빗물이 긴 세월에 걸쳐 침식·풍화시키면서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 저 버섯바위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품인 셈이다.

 

 

 

 

 

 

 

더 안쪽에는 조금 다른 모양의 바위들이 들어서있다. 바위의 머리 부분이 잘 발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색깔도 아까 같이 검지를 않다. 파사바계곡 입구에서 1쯤 들어가면 만나게 된다는 젤베(Zelve) 계곡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젤베(Zelve) 계곡에는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수도원과 동굴교회가 많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도 이곳에 있단다. 대개 8~9세기경에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은신처로 이용됐다. 젤베의 가장 큰 특징은 1924년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도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역학관계가 변하면서 기독교도들은 계곡을 완전히 떠나야만 했고, 이슬람교도들 역시 1950년 침식으로 인한 거주 위험으로 젤베계곡을 완전히 떠났단다.

 

 

 

이 언덕은 우리나라 TV에서도 심심찮게 보여주는 명소이다. 최근(20187)에도 tvN 예능프로그램 '이타카로 가는 길'에서 방영한바 있다. 가수 윤도현과 하현우가 함께 어울려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번에는 ‘FT 아일랜드의 이홍기가 합류했었다. 그들은 이 언덕에서 붉은 밭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등 자연과 어우러지는 멋진 무대를 선보였었다. 참고로 '이타카로 가는 길'은 오직 SNS에 업로드한 노래 영상 조회 수만으로 얻은 경비로 터키에서 그리스 이타카섬까지 가는 여정을 담는 프로그램이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터키의 국기가 팔랑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그 뒤에는 구멍이 뚫린 버섯바위가 버티고 있다. 국기가 펄럭인다는 것은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부의 생김새가 궁금해서 다가가니 반갑게 맞이해준다. 터키의 전통 차인 차이(cay)까지 권하면서 내부를 둘러보란다.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장식은 보이지 않았으나 공간만큼은 여러 사람이 생활해도 괜찮을 정도로 널찍했다.

 

 

근처에 있는 바위 몇 개를 더 둘러보았는데 어떤 곳은 신전처럼 잘 다듬어진 곳도 있었다.

 

 

 

이번에는 계곡을 돌아보기로 했다. 계곡의 풍경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자연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가 저런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버섯처럼 땅 거죽을 뚫고 자라난 바위들은 하나의 몸체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색조를 띤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지구가 아니라, 어느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하긴 명장으로 알려진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이 이곳에서 스타워즈 에피소드 1(Star Wars : Episode I)’을 찍었다니 오죽하겠는가.

 

 

시간이 조금 남아 버섯바위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어느 곳은 꽤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암이라서 미끄럽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망설일 수는 없는 일이다. 개구쟁이 스머프를 만날지도 모르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굴의 안은 사람들이 산 흔적이 뚜렷하다. 먹고 자며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생활공간 또한 예상했던 것보다는 꽤 넓었다.

 

 

 

 

 

 

 

 

조금 더 돌아다녀봤지만 교회 유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수도사였던 누군가 성 시메온이 거주하던 교회를 만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기대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그건 그렇고 현지인들은 저런 버섯바위들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요정이 춤추는 바위', 또 다른 사람들은 고대 수도사들이 바위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신앙생활에 몰두한 곳이라고 해서 '수도사의 골짜기'라고 불렀단다.

 

 

 

 

버스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파노라마 전망대 (Esentepe Panoramic View Point)이다. 우치사르에서 괴레메로 가는 방향의 비둘기 계곡 끝자락에 있다. 이곳의 특징은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카파도키아의 절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기념품가게들이 꽉 들어찬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카페까지도 들어서 있다. 참고로 지프투어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관광버스는 이곳을 끝으로 곧장 호텔로 이동해버린다. 지프투어의 종점이 오늘 저녁에 머물게 되는 호텔이니 여행객들을 기다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문대로 엄청난 전망을 자랑한다. 탑처럼 솟은 바위기둥들 너머로 도시가 있고, 도시 뒤로는 협곡과 수직의 암벽이 펼쳐진다. 카파도키아의 지형은 규칙도 없고 최소한의 패턴도 없는 것 같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셋째 날 : 소금 호수(Tuz Golu)와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특징 : 소금호수 투즈괼(Tuz Golu) : 터키의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에 아크사레이(Aksaray)와의 중간 지점에 소금호수(Salt Lake)가 있다. 바다와 같은 인상을 주는 이 호수는 넓이가 충청남북도보다도 더 넓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와 연결되지도 않은 이 내륙의 호수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단다. 그것도 터키 국내소비량의 64%를 생산 한단다.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 :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네브셰히르와 니데(Niğde) 사이에 난 도로상에 있으며 주도(州都)인 네브셰히르에서 29km 떨어져 있다. 터키의 많은 지하도시 가운데 가장 큰 이곳은 1960년 닭을 쫒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지하도시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여개나 된단다. BC 8~7세기에 프리지아인()이 처음으로 세웠으며 이후 로마제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온 초기 기독교인들이 숨어들었고, 7세기부터는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살았다. 예배당과 학교 교실, 식당, 침실, 부엌, 마구간, 창고, 와인·식용유 저장고 등 다양한 생활시설이 갖춰져 공동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각층은 독립적으로 구별되며 긴 터널을 통해 다른 지하도시들과 연결된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소금호수라는 투즈괼(Tuz Golu)‘이다. 널따란 주차장은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를 한 세트로 묶어서 1(EUR)를 내란다. 그럼 외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TL(터키 리라)로 거슬러준다. 거슬러주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소금사막을 만난다는 부푼 기대가 까짓 거스름돈 정도야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지난번 중남이 여행 때 유우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을 들러보지 못했던 걸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그런데 이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유우니사막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니 얼마나 흥분되는 일이겠는가.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내려 허름한 간이매점들 사이를 지나기만 하면 된다. 간이매점에서는 호수에서 생산된 소금을 이용해서 만든 비누와 화장품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호기심이라도 생긴다면 하나쯤 팔아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소금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들을 설명하는 광고판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투즈 괼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엄청나게 많은 새의 무리를 찍은 사진도 포함되어 있는데 터키어로만 설명이 되어 있어서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빠질 리가 없다. 그것도 무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니 말이다. ’Maras Dondurmasi‘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염소젖으로 만든 Turkish 아이스크림일 것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시야가 툭 터진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넓이가 1,500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한다. 그런데 물 대신에 하얀 소금이 수북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먼 옛날 이곳은 바다였으나 지각변동으로 인해 호수로 변했다고 한다. 그 이후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호수가 마르면서 바닥에 소금 결정체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소금호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우기(雨期)가 되면 이곳은 다시 물로 채워진단다.

 

 

호수에는 수많은 소금 제조공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허름한 간이매점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허허벌판 같은 소금밭뿐이다. 그나저나 이곳 투즈괼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터키 국내 생산량의 64% 정도를 차지하는데,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항아리를 만드는데 사용된단다. 먼 길을 이동하며 물건을 팔러 다니던 대상(隊商)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소지하고 다니던 항아리이다. 이곳 투즈괼에서 생산된 소금과 진흙을 알맞게 조절해서 만든 항아리는 아무리 더워도 물이 얼음물처럼 차고 변질되지 않는다고 해서 최상의 제품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소금항아리 200개를 만들려면 소금 10kg이 드는데 이때 소금의 양이 많으면 뜨거운 오븐이나 화덕 속에서 쉽게 깨지고 또 적게 넣으면 물이 미지근해진단다.

 

 

 

 

 

 

바닥을 파보면 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건기가 아닌 때에는 여느 호수들처럼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물이 염분이 많은 탓에 햇빛이 강한 봄과 여름에는 증발되면서 소금밭이 되고, 비가 오는 가을과 겨울에는 호수로 변하는 것이다.

 

 

 

 

 

 

우기에는 드넓은 수평선도 볼 수도 있단다. 하지만 지금 같은 건기에는 사방이 온통 소금밭뿐이다. 그래도 꼭 수평선을 보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보자. 저 멀리 아득하게나마 수평선이 보일 것이다.

 

 

다음 목적지인 데린구유로 향한다. 지하 동굴로 유명한 곳이다. 차창 밖으로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고도(高度)1000m를 훌쩍 넘기는 중부 아나톨리아지역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창밖 풍경이 확 바뀐다. 멀리 병풍처럼 절벽이 둘러쳐진 아래에 마을 들이 보는가 하면, 구멍이 뻥뻥 뚫린 커다란 암괴(巖塊)가 도로변에 가깝게 솟아있다. 먼 옛날 이곳에서 일어났다던 화산활동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버스는 어느덧 데린구유(Derinkuyu)에 도착한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인데 이정표에는 마을 이름과 함께 지하도시(Underground City)라는 이곳의 특징을 적어 놓았다. 그만큼 유명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데린구유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이 유적은 기원전 히타이트(Hittite)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특히 6세기경, 로마와 이슬람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땅 속으로 파고들면서 규모가 커진 피난처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창 많을 때는 1만여 명이 거주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현재 극히 일부만이 공개되고 있는데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환기구(換氣口, ventilating hole)이다. 데린구유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5년 닭 한 마리가 작은 구멍에 빠져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닭을 찾느라, 부근의 땅을 파 보다 지하도시를 발견했다고 한다. 당시 닭이 빠졌다는 구멍이 이곳일 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데린쿠유 지하도시에는 모두 52개가 넘는 공기환풍구가 있는데, 가장 상층부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공기구멍이 있어서 모든 층에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환기구 근처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젠 굴속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이때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나 허리가 아픈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가이드의 경고음이 들린다. 하지만 이에 응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 하긴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희귀한 구경거리를 포기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이곳 사람들은 깨어 있었다. 그 안에서 결혼과 출산 등 인간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인 집회와 세례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굴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주거의 기능을 모두 갖춘 하나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쟁이나 재해를 피해 얼마간 동굴에 숨어살 수는 있다. 그러나 SF도 아니고 어떻게 수천 명이 도시를 이루며 그것도 수많은 세대를 이어오며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었을까.

 

 

아래 사진은 데린쿠유(Derinkuyu)’의 단면도이다. 거대한 바위지대에 지하 20층까지 방을 냈다고 하는데 현재는 지하 8층까지만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갖고도 거대한 지하도시(Underground City)이다. 한때 이곳에는 1만여 명이나 살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도시의 1, 2층에는 주로 성경학교와 수도원, 부엌, 저장고, 침실, 응접실, 와인창고, 식당 등이 자리 잡았고, 무기저장고와 은신처, 각종 터널들은 3, 4층에 배치했다. 마지막 층에는 특별히 견딜 수 있게 우물, 숨겨진 무기, 교회, 회의실, 고해성사실, 무덤, 환풍구가 있다.

 

 

굴은 구불구불 이어지다 가파르게 떨어진다. 곳곳에 안내 등이 켜져 있지만 굴속이 어두워 발걸음 떼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거기다 한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몸을 웅크리고 걸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허리를 숙이면서 예의를 차려야만 하는 곳도 있다. 외부침입에 대비해서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아무리 많은 적이 침입하더라도 일대일로 저항할 수 있을 테니 한번 해볼 만 했겠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입이 딱 벌어진다. 신기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원시 히타이트(Hittite)’인들이 만들었다면 BC 8~7세기경일 텐데, 어떻게 이런 동굴을 축성할 생각을 했을까? 전문가들은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지하로 굴을 파고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주민들은 더 넓은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옆으로 혹은 지하로 더 많은 시설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해 결국에는 하나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개방되어 있는 시설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지하 8층 가운데 지하 1층이 선사시대인 히타이트인들이 저장고로 삼았던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를 거치면서 다른 종족들이 숨어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했단다.

 

 

 

 

지하도시에는 지상에서 필요한 시설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방이나 부엌 외양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간은 물론이고 학교나 세례 제의를 위한 집회시설,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긴 죄수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을 가두어 놓은 흔적도 있어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외에도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 저장소, 환기시설, 매장공간도 보인다. 이쯤에서 화장실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화장실을 따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일을 보고,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단다. 몽골 유목민들이 가축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듯 재활용했던 모양이다.(아래 사진은 신학교의 강의실로 여겨지는 장소이다. 긴 암반 두 개로 책상을 만들어 놓았다.)

 

 

 

 

 

 

 

 

 

 

 

 

 

 

출입구가 있는 복도에는 돌문을 만들어두었다. 급습을 당했을 때는 지하로 내려와 볼트를 풀어 문을 닫음으로써 긴급대피 했단다. 이 돌문의 가운데에는 지렛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안에서는 쉽게 열고 닫을 수 있지만 외부에서는 이 돌의 무게 때문에 문을 열기가 불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에필로그(epilogue),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동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데린쿠유처럼 평지에서 아래로 파내려간 지하도시, 바위산을 옆에서 뚫어 만든 괴레메 동굴주거지,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지은 동굴교회 등이다. 이러한 동굴들은 상당 부분 침략과 도피의 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인간이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수렵 채취기인 4000년 이전으로 보인다. 이곳 지형이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석기나 뼈조각 등 단순한 도구로도 쉽게 파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추위와 맹수를 피하기 위한 동굴을 이곳에다 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처음에는 지평면 근처에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겠지만 이후 광야로 쫒겨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 완성된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연결통로를 확장하여 주변에 있는 지하도시와 소통하기도 했단다. 물론 이들이 수백 년간 계속 땅속에서만 산 것은 아니다.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려면 지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동굴 안에 웬만한 주거기능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적의 위협이 없는 평시에는 지상으로 나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면서 지하도시에 식량을 공급한 것이다. 저장 공간에서 발견된 밀이나 포도주 그리고 교역을 통해 얻은 직물 그릇 제의도구는 지상과 지하생활을 병행하던 이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도 그렇지 그 긴 세월을 지하에서 버텨냈는지는 의문이라 하겠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둘째 날 :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 유람선 투어

 

특징 :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협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스탄불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유람선을 타고가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놓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부유층이 사는 별장촌은 물론이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궁전(宮殿)과 가난한 어촌 마을 등 다양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여행전문가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배 안에서 마시는 차이 한잔의 여유를 꼽기도 하니 시도해볼 만도 하겠다. 또한 그들은 고등어 케밥을 먹는 재미도 추천한다. 배를 타기 전에 선착장 근처의 식당에서 고등어 케밥을 준비해 놓았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뱃놀이 시간을 그저 눈요기로만 채울게 아니라 다른 즐길거리까지 끼워 넣는다면 더욱 풍성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점심 후에는 에미노뉴(Eminonu) 부두로 이동한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을 둘러보는 일정인데, 해협을 왕복하는 크루즈가 출발하는 곳이 에미노뉴(Eminonu) 부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에미노뉴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지난번 여행 때는 배가 출발하자마자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를 지났었는데 이번에는 그 다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진 복층(復層) 구주의 갈라타 다리를 구경하지 못했다. 서울로 치면 반포대교인 셈인데, 아래층인 잠수교 전체가 생선요리를 파는 식당가로 이루어져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신시가지에 있는 해안에서 유람선을 탔다고 보는 게 옳겠다. 그러고 보면 유람선마다 타고 내리는 게 제각각인 모양이다. 지난번에는 이곳을 출발한 배가 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부두로 가서 다른 관광객들을 태운 후에 2유라시아대교까지 갔다가 회항(回航) 했었는데, 이번에는 2유라시아대교에 한참을 못 미치는 곳에서 배를 돌렸고 거기다 배를 대는 곳도 보스포루스대교의 동단(아시아 쪽) 옆에 있는 선착장이었으니 말이다.

 

 

 

 

 

 

에미노뉴(Eminonu) 부두의 사진도 지난번 출장 때의 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글도 당시에 썼던 걸 올려본다. 부두의 노천(露天)에는 간이식당들이 늘어서있다. 그리고 물위에도 아담하고 예쁜 지붕 얹은 배들이 떠 있는 것이 보인다. ‘고등어캐밥을 팔고 있는 식당들이란다. 아니나 다를까 생선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집집마다 고등어를 굽고 있으니 비린내로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린내에 질려 사진만 찍고 얼른 유람선 위로 올라서버린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중의 하나라는 고등어 케밥이라지만 비린내가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는 선답자들의 얘기를 들었던 탓이다. 참고로 고등어캐밥은 빵의 가운데에다 구운 고등어를 통째로 놓고 그 위에 야채를 얹은 일종의 샌드위치라고 보면 될 것이다.

 

 

선착장 옆 부두에 정박한 작은 선박들에서 고등어 케밥을 판매한다. 터키 전통 복장의 케밥 요리사들이 뼈를 발라낸 싱싱한 고등어를 갑판 위에 설치한 커다란 철판에서 쉴 새 없이 구워낸다. 지글지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맛깔스럽게 구워진 고등어는 레몬즙이 뿌려지고 양파, 토마토, 피망 등과 함께 빵 사이에 끼워져 배 밖의 손님에게 건네진다. 고등어의 비릿함이 거북하면 피클이나 청량음료를 추가할 수도 있다. 아무튼 출렁이는 배에서 빚어낸 고등어 케밥은 이스탄불 여행에서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할 별미로 꼽힌다. 이스탄불 시내의 다른 고등어 케밥 가게와 비교를 불허한단다. 그래서인지 에미노뉴 부둣가는 온종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해가 저문 뒤에도 불야성을 이룬다고 한다.

 

 

유람선은 정기선과 관광선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대부분 관광선을 이용한다. 정기선은 가격이 저렴한 대신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운행 선박 또한 많지 않기 때문이다. 크루즈는 보통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서 갈라타교와 보스포루스대교를 지나 2 보스포루스대교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로 대략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에 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들은 가이드의 동선(動線)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그의 배려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유람선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시원스럽게 달려간다. 탑승객은 우리 일행이 전부이다. 그래선지 한껏 여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위층에 올라가보니 해변 좌측은 유럽인데 반해 우측은 아시아 땅이다. 묘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유럽 쪽 해안으로 자꾸만 눈이 간다. 어제 그리고 오늘 오전에 구경한 유적지들이 눈에 익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가 유럽 쪽이 더 아름답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수도 있겠다.

 

 

출발지가 바뀐 덕분에 우린 처녀의 탑이라는 크즈 쿨레시(Maiden's Tower,Kız Kulesi)‘를 보지 못했다. 위스퀴다르 앞바다의 인공섬에 있는 작은 탑()으로 12세기 비잔틴 제국 때는 이곳에 해양 감시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1763년 바로크 양식의 탑으로 재건되면서 그동안 등대로 사용되어오다가 리모델링(remodeling) 과정을 거쳐 2000년에 레스토랑 레안드로스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작은 전용 선박을 이용해 저곳까지 왕복할 수 있다니 참조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구시가지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이어지는 골든 혼을 사이에 두고 유적들이 몰려있는 구시가지(술탄 아흐메드 지역)와 최근 트렌드의 중심이 되고 있는 신시가지로 나뉜다. 주요 볼거리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에 몰려 있다고 보면 되겠다. 가파르지만 꼭대기가 평평한 7개의 구릉(丘陵) 위이기도 한 이곳에는 거대한 이슬람 사원들과 용도가 바뀐 옛 성당들, 그리고 박물관으로 변한 여러 왕궁과 세계 모든 물품을 파는 대형 바자르들이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한꺼번에 눈에 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왼편의 유럽지역은 고색창연하면서도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반면에 오른편 아시아지역은 덜 깨어난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들이다. 터키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이 얘기했던 보스포루스에서 노는 즐거움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들을 넓게 그리고 깊게 맞아들여본다. <거대하면서도 역사적이지만 방치된 도시. 힘차고 변화무쌍한 바다의 자유와 힘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느껴보는 것이다. 복잡한 도시의 더러움과 연기 그리고 소음의 한가운데서 바다의 힘이 자신에게 전이되고, 그 모든 군중과 역사, 건물 속에서 여전히 홀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보스포루스대교(Bosphorus Bridge, 터키어 Boğaziçi Köprüsü)가 보이기 시작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3개의 현수교 가운데 하나로 서쪽의 오르타쾨이(Ortaköy) 지구와 동쪽의 베이러베이(Beylerbeyi) 지구를 연결하는데 영국의 기술진에 의해 지어졌다. 영국의 프리드만 폭스 & 파트너스(Freeman Fox & Partners)’에서 설계한 도면으로 터키·영국·독일의 3개 건설회사가 협력하여 1970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터키 공화국 수립 50주년 기념일인 1973년에 1030일에 완공했다. 중력고정 현수교(gravity anchored suspension bridge)로 총 길이는 1,510m이고 다리의 폭은 39m이다. 현수교를 지탱하는 첨탑의 높이는 105m이며 다리 상판은 8개 차선과 1개 보도로 나뉘어 있다. 하루에 약 18만대의 차량이 다리를 이용하고 있단다.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선 이용 시 선상에서 맨 처음 만나는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ςe Saray)’은 왜 제국이 몰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유럽해안을 따라 600m가량 뻗어있는 궁전은 술탄 압둘메지드 1(Abdülmecid I)1853년에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탓에 유럽풍이다. ‘모든 것이 가득한 정원이란 뜻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궁전은 화려함과 사치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각각 6개의 발코니와 목욕탕을 짓는 데 금 14t과 은 40t이 사용됐다고 한다. 전등 750개가 2층 홀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무게 4.5t의 초대형 샹들리에를 비롯해 36개의 샹들리에와 고급 수제 카펫, 150여개의 벽시계 등 호화스럽게 내부를 꾸몄다. 제국이 공화정으로 바뀐 뒤 프랑스로 쫓겨난 마지막 황태자는 199256일의 아주 짧은 고국 방문 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내가, 나의 부모가, 나의 선조가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여러분은 그 옛날의 부귀영화를 아직도 누릴 수 있을 텐데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다음에는 시라간 궁전(Relax at Ciragan Palace)’이 고개를 내민다. 오토만 제국 최후의 술탄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한 이 궁전은 16세기에 나무로 지어졌다가, 1867술탄 압둘아지즈(Sultan Abdulaziz)‘가 대리석으로 재건축했다. 지금은 럭셔리한 별 다섯 개짜리 호텔로 임무수행 중인데 그동안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할리, 우마 서먼,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이 머물다갔을 정도로 유명하다. 환상적인 풀장과 보트는 물론이고 헬리콥터 서비스까지 A급 손님들이 원할만한 건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특히 술탄의 스위트룸은 화려한 샹들리에와 시대풍의 가구,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개인 집사 서비스까지 제공된단다.

 

 

해협의 양안(兩岸)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 기슭에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지형적으로는 일종의 익곡(溺谷)으로 양안은 급사면(急斜面)을 이루고 있는데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숲 속으로는 고급스러운 건축물들이 많으며 주변 풍광과 어우러진 것이 보기에도 아늑하다. 때문에 해협의 양안(兩岸)에 늘어선 아름다운 별장들은, 유럽의 부자들이 하계(夏季) 별장으로 이용하고 있단다.

 

 

 

 

아시아 쪽의 해안에는 술탄이 여름별장으로 사용했다는 궁전이 보이기도 한다. 언덕에는 제법 비싸게 보이는 별장들도 곳곳에 들어서있다. 개중에는 지은 지 백년이 넘는 것들도 있단다. 이런 집들은 불이 나서 전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인 마음대로 뜯어고치지를 못한단다. 문화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무튼 고급주택들이 유럽해안보다 아시아해안에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휴양지로 삼기에는 아시아쪽 해안이 더 제격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두 개의 첨탑이 우뚝한 건물은 지도에 ‘Kuleli Sahil’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1800년대에 군대 막사용으로 지어진 건물로 현재는 군사학교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보스포루스해협의 바다를 잘 들여다보면 바다 속에 있는 길고 좁은 협곡을 따라 흑해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바닷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흑해 방향으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의 흐름이 있다고 한다. 유라시아대륙에서 흑해로 흘러드는 강물이 섞여든 흑해의 가벼운 물은 바다의 위쪽을 따라 지중해로 흘러가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무거운 바닷물이 흑해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2 보스포루스교가 나타난다.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Fatih Bridge, Fatih Sultan Mehmet Bridge)’로도 불리는 다리이다. 서쪽의 히사뤼스튀(Hisarüstü) 지구와 동쪽의 카바식(Kavacık) 지구를 연결하는데 1988년에 완공되었다. 1교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프리드만 폭스 & 파트너스(Freeman Fox & Partners)’에서 그린 설계도면에 따라 터키·이탈리아·일본의 3개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1986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887월에 완공했다. 저 다리도 역시 중력고정 현수교(gravity anchored suspension bridge)이며 총 길이는 1,510m, 폭은 39m에 다리를 지탱하는 첨탑의 높이는 105m이다. 첨탑 사이의 거리만 빼면 보스포루스대교와 규모가 같다. 터키 수도 앙카라(Ankara)와 서부 도시 에디르네(Edirne)를 잇는 트랜스 유러피안(Trans European)’ 고속도로 8차선과 비상도로 2차선이 다리를 지나가며 보도(步道) 통행은 제한된다. 하루에 약 15만 대의 차량이 이 다리를 이용하고 있단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보스포루스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하나가 더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주탑(322m)을 자랑하는 3 보스포루스대교인데 총 연장이 2,164m(주경간 1,408m)로 이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장현수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다리를 우리 기술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과 SK건설이 컨소시엄(consortium)을 구성해 작년에 준공했다고 한다. SK건설은 터키의 야피메르케지와 컨소시엄으로 유라시아터널’(터키명칭 아브라시아튀넬리)도 건설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복층 해저터널인데 터널 구간 5.4km에 육지 접속도로를 포함하면 14.6km에 달한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단숨에 관통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깨가 우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람선은 다리에서 한참을 못 미치는 곳에서 뱃머리를 돌려버린다. 덕분에 우린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지었다는 히사르(Hisar)를 눈에 담지 못했다. 히사르는 성()을 일컫는 터키어로서 해협의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있다. 유럽 쪽에 있는 3개의 성을 루메르 히사르(Rumeili Hisar, 아래 사진으로 전에 이곳을 다녀가면서 찍었던 것을 올렸다)’, 그리고 아시아 쪽에 있는 것은 아나돌르 히사라고 부른다. 마호메트 2세는 이 성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도우러 오는 다른 나라들의 배를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젠 배를 내려야 할 차례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보스포루스대교 동단, 즉 아시아 쪽에 있는 선착장인데 이름은 모르겠다. 아무튼 누군가는 이곳 이스탄불을 오전에는 아시아를, 오후에는 유럽을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라고 했다. 아까 유람선을 탔던 곳이 유럽 땅이었는데 지금 내린 곳은 아시아 땅이니 딱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포구에는 강태공들 여럿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터키인들 특유의 미소를 띠우고 있는 표정들이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그 표정에 이끌려 그들에 다가가 본다. 기껏해야 많이 잡았냐는 문장이 다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터키인들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친절함이다. 선물이라며 자기가 잡은 물고기 중에서 가장 큰 놈으로 골라주었던 것이다. 처치할 수가 없는 선물이기에 극구 사양했지만 이방인에 대한 친절로서는 이보다 더할 수 없지 않겠는가.

 

 

여행 마지막 날 선택 관광 상품으로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ςe Saray)’을 찾았다. 둘째 날 오후에 유람선 투어를 하면서 보았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을 닮은 건물이다. 이 궁전은 오스만 건축기법에 로코코와 바로크 양식을 가미한 탓에 오스만제국의 궁전이면서도 정원과 외관은 유럽식에 더 가깝다. 돌마바흐체는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드1(재위기간 1603-1617)가 이곳에 작은 정자를 세운 뒤로 목재 건물들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이름이다. 당시의 건물들은 1814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고, 1853년 술탄 압둘메지드 1(Abdülmecid I)가 그 자리에다 궁전을 다시 지었다. 그는 그때까지 사용해오던 톱카프궁전이 유럽의 궁전들에 비해 호화롭거나 안락하지 않아 구닥다리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단다. 그리고는 기울어가는 오스만제국의 위엄도 만방에 과시할 겸해서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궁전을 짓는데 현재 가치로 15억 달러가 넘는 건축비가 들어갔다니 얼마만큼 화려하게 지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 화려함은 내부에서 더욱 두드러진단다. 45,000면적에 285의 방, 46개 홀과 68개 화장실. 그 넓은 공간에 값비싼 가구와 장신구, 그릇과 도기를 채우고 홀마다 우아한 조명과 거대한 샹들리에로 장식해 이동할 때마다 감탄이 끊이지 않는단다. 하지만 1856년 궁전을 완공한 후 재정이 기울었고, 7명의 칼리프()를 거쳐 제국은 터키공화국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건축물이라 하겠다. 그리고 난 과거의 번영이 끝이 난 줄도 모르고 허세부리며 서있는 유적 앞에서, 거대했던 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되새겨보며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본다.

 

 

 

 

궁전의 입구에는 5층짜리 시계탑이 있다. 궁전이 완공된 후인 1894년에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높이가 27m에 이르는 석조(石造) 탑이다. 4층에 부착된 시계는 프랑스의 시계 제작자인 폴 가르니에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계가 9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란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111095,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단다. 그래서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마당에는 오래 묵은 대포도 전시해 놓았다. 거대했던 왕국만큼이나 커다란 몸뚱아리를 자랑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돌마체흐프 자미(Dolmabahçe Cami)’가 있다. 1853년 술탄 압둘메지드(Abdülmecid)‘의 어머니 베즈미 알렘 술탄(Bezmi Alem Valide Sultan)이 코린트양식(Corinth style)으로 지은 이슬람의 모스크이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주변을 돌아보기로 한다. 박물관으로 개조된 내부는 전에 이미 들어가 봤을 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까지 금지되고 있으니 또 다시 들어가 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해변에 자리 잡은 카페,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터키식 차인 차이(çay)’를 주문해본다. 난생 처음으로 터키를 찾은 집사람을 위해서이다. 현지의 전통 차를 마셔보는 것 또한 여행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진한 붉은색이 특징인 차이의 맛은 홍차와 우롱차의 중간 정도이다. 이를 마셔본 집사람은 낯선 차이점을 못 느끼겠단다. 그리곤 냉큼 터키식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하긴 수년 전 출장차 이곳에 들렀던 나도 마찬가지였었다.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맛을 즐기겠다고 찾아간 피에르 로티(Pierre Loti)’에서도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당시 나는 석양이 지는 골든 혼이 바라보이는 언덕의 카페에 앉아 터키의 맛을 차이(çay)’ 대신 터키식 커피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터키인들의 하루는 차이로 시작해 차이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는 일상적인 음료이다. 이왕에 터키에 왔다면 한번쯤은 꼭 마셔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수면 위를 나르는 갈매기들을 희롱하고 있는 집사람의 모습이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카페는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과 맞닿아 있다. 덕분에 테이블에 앉아서도 보스포루스 해협을 맘껏 구경할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과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길이 30km, 넓이 5503,000m, 수심 60125m)이다. 고대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인데다가 마르마라해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1453년 이래 이곳을 장악한 터키는 방위를 목적으로 양안(兩岸)을 요새화(要塞化)한바 있다. 그건 그렇고 양안(兩岸) 모두 터키 땅이지만 해협은 공해(公海)라니 기억해 두자.

 

 

 

 

카타토피아로 이동 중에 하룻밤을 머문 프레스티지 써멀호텔(Prestige thermal Hotel spar & Wellness)‘, 터키의 수도 앙카라(Ankara) 근처에 있는 아야스(Ayas)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호텔이다. 하지만 호텔만은 다른 대도시의 유명 호텔들에 비해 뒤질 게 없다. 별이 다섯 개라는 품격에 맞게 스파(spa)까지 갖추고 있어 만족스러운 트리트먼트를 받을 수 있다. 이 스파에는 사우나, 스팀룸, 터키식 목욕탕/함맘 등이 마련되어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유람선 투어의 백미는 일출이라고 했다. 터키의 문화관광부에서 추천했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한낮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곳에서의 일출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터키 정부에서 꼽은 해돋이 명소는 모두가 다 내로라하는 유명관광지들이다. 기암괴석들이 펼쳐지는 카파도키아에서부터 석회암 온천이 있는 파묵칼레’, 그리고 동서양이 공존하는 이스탄불과 소금으로 이루어진 투즈 호수까지 해가 떠오를 때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이 모두를 둘러보는 코스로 짜여있으니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카파토키아를 제외하고는 일출과 상관없는 시간에 들르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말이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둘째 날 : 성 소피아성당(Hagia Sophia)

 

특징 : 중앙의 큰 돔과 주변의 4개 미나레트(첨탑)만 보면 이슬람사원일 것 같지만 원래는 정교회의 대성당으로 출발했다. AD 360,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릴 때, ‘콘스탄티누스 1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교회 대성당이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로 불리게 되었는지, 아니면 훗날의 재건 이후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저 당시의 위치와 목조 지붕을 가진 바실리카(basilica)였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이후 404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추방과 관련된 난동과 532년에 일어난 니카의 반란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 성당은 중앙 돔(dome)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주변에 작은 돔을 만들었는데, 균형 감각과 예술미의 극치를 이룬다. 이런 건축 양식을 비잔틴 양식이라 한다. 내부는 대리석 기둥과 모자이크, 금박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중앙을 차지하는 돔은 지름이 31m나 된다. 네 개의 첨탑(미나레트)과 내부의 아랍어 장식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워진 것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종교 행위도 금지되고 있단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국교를 정하지 않고 유연한 세족주의를 택한 가장 터키다운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토프카프궁전의 관람이 끝나면 이번에는 성 소피아성당이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스탄불의 상징이라는 1500년 역사의 대성당이 나타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성 소피아성당이다. 눈에 들어오는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중앙 돔에 수많은 보조 돔을 사용함으로써 비잔틴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양식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쯤에서 꿀팁 하나,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의 중간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가운데에 커다란 분수대가 있는데, 분수대에서 바라보는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의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아야 소피아(터키어, Aya Sofia)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Hagia Sofia)로 불리는 이 동방정교회의 대성당은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진다. 로마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니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매우 크다고 봐야 한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미나레트)이 그 증거이다. 아무튼 현재는 박물관의 임무를 수행중이다. 약간의 돈을 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회랑(回廊, gallery)이 나온다.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개의 회랑(복도)을 만나게 되는데, 첫 번째 회랑은 세례를 받지 못한 이가 머무는 장소라고 한다. 벽과 천정에 별 다른 장식이 없는데다가 천정의 십자가 아케이드(arcade) 또한 습기로 얼룩져 있어 보존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모자이크 패널(panel) 등이 벽에 걸려 있는 걸로 보아 가이드들의 설명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회랑에는 2(John )’ 왕비의 관()과 내력을 알 수 없는 종()이 전시되어 있다. ‘11세기의 대리석 비문(marble inscription 11th century)’이라고 쓰인 안내판도 보인다. 옆에 있는 비문이 새겨진 대리석을 얘기하는 모양인데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 회랑은 넓고 높고 화려한 것이 조금 전의 외랑(外廊)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벽면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나뭇결 같은 무늬가 대칭을 이루는가 하면 색깔도 각각 달라 신비감을 연출한다. 아치형으로 만든 천정은 화려한 금색 프레스코(Fresco)’ 그림들로 채워 넣었다.

 

 

 

 

내랑(內廊)에서 본당(本堂)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홉 개가 있다. 이 가운데 황제가 출입하는 문은 가장 크고 높을 뿐만 아니라 조각도 화려하다. 황제의 문 위쪽 벽면에는 레오 6(866~912)’황금 모자이크상이 그려져 있다. 모자이크는 1933년 소피아 성당이 아직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을 때 발견되어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인간적인 위엄을 갖춘 예수가 앉아 있는데, 그리스어로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할지니, 나는 온 세상의 빛이로다.’라는 구절이 새겨진 성서를 왼손에 들고 있다. 좌측에 성모 마리아와 우측에 가브리엘 천사를 배치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발아래에는 레오 6가 무릎을 꿇고 예수의 축복을 받는 모습이 모자이크로 묘사되어 있다. 아들을 두지 못한 그는 교회법을 어기고 세 번씩이나 결혼했는데 그것을 용서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문으로 들어서면 본당 중앙 홀과 마주하게 된다. 중앙 홀에 서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대성당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첫 느낌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보면 더 놀라게 된다. 중앙의 드높은 천정과 거기에 새겨진 정교한 모자이크 성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 수많은 작은 둥근 천정들에 입혀진 고색창연한 프레스코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긴 성당을 지은 유스티니아누스 1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고 자부하면서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라고 외쳤을 정도라니 오죽하겠는가.

 

 

 

 

 

 

 

 

소피아 교회 건축 양식은 다중 돔(Dome)’형의 형태로서 높이 56m에 폭이 33m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략 20층 높이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다. 중앙의 거대한 메인 돔과 그것을 받쳐 주는 4개의 소형 돔, 그리고 그것들을 받쳐 주는 많은 보조 돔들로 이루어져 있다. 돔은 정확한 원형이 아니고 약간 타원형인데, 그 무게를 분산해 붕괴를 막기 위해 시공 중에 살짝 틀었단다. 그 아래는 거대한 기둥들이 양옆으로 열병하듯 줄지어 서서 하중을 지탱해준다고 한다. 교회 중앙에 기둥이 없는 널따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 공간의 넓이는 77mX71.7m이며 메인 천장은 40개의 창문이 있고 그 아래는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의 벽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초기 기독교 저술가이자 안티오키아의 주교)’ 등의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반면에 이슬람계통의 문양(紋樣)도 눈에 띈다. 직경이 7.5m인 거대한 원판 8개에 회교 지도자(알라와 무함마드를 비롯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초대 칼리프들과 알리의 두 아들인 하산, 후세인)들의 이름을 문양으로 써 넣었다.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나 이 또한 우리가 품어야할 역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저런 부자연속에서 조화를 찾아야만 인류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당의 벽과 천정은 온통 모자이크 일색이다. 노란색은 순금이고 흰색은 순은이며, 푸른색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재료는 모두 보석들이란다. 이렇게 치장하는데 황금만 무려 18톤이 들어갔다고 한다. 중앙 돔의 천정은 회칠을 한 위에 이슬람의 아랍어 문양이 새겨져 있고 네 모퉁이는 천사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작은 돔 천정에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의 황금 모자이크가 있으며, 천사 가브리엘, 미카엘이 있단다. 하지만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왼쪽 복도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있는 게 보인다. ‘땀 흘리는 기둥이라 불리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기둥이다. 기둥에 뚫려있는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단다. 반질반질하게 닳아진 것을 보면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돌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건축 당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가 두통으로 고생했었는데 이 기둥을 지날 때면 두통이 사라지곤 했단다.

 

 

 

 

바닥에 관람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줄을 쳐놓은 공간도 보인다. 하지만 그 문양이 기하학적이라는 것 외에는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층 회랑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편편하게 돌을 깔아 놓았다. 가마를 타고 가는 황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완만한 나선형이지만 5층 높이까지 이어지니 힘이 들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런 점을 감안했는지 가이드가 노약자들은 일부러 올라가볼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는 계단 입구에 만들어 놓은 패널(panel) 앞에서 이층에서 만나게 되는 모자이크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이층 난간에 서면 본당 전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우람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모자이크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참고로 이층은 여자들이 기도를 드리던 공간이다. 주교회의가 열리기도 했단다.

 

 

 

본당의 앞부분에는 이슬람의 미흐랍(Mihrap, 무슬림들의 기도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스크에 가면 정면에 아치형 모양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가리킨다)이 있고, 그 옆에 설교단인 민바르(Minbar)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미흐랍이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게 아닌가. 소피아의 예배당 방향은 원래 정동(正東)인데도 말이다. 모든 동방 교회는 해가 솟는 동쪽으로 예배당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모든 모스크는 메카를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흐랍을 메카가 있는 동남쪽 방향에다 설치하게 된 이유이다.

 

 

이층 회랑의 '천국의 문'을 통과하면 대리석 문이 나온다. 이 문을 지나면 소피아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나타난다. ‘데이시스 모자이크(Deesis Mosaic /간청, 탄원)’로 일명 최후의 심판모자이크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 성모 마리아’, 그리고 우측에는 세례자 요한이 있다. 심판의 날을 맞은 인류를 위해 세례자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며 간청하는 내용이란다. 그건 그렇고 성화는 절반 이상이 훼손되어 있다. 이슬람이 덧칠해놓은 회반죽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저리 되었다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화가 파손되었다고 이슬람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지하는 이슬람이지만 인물 성화를 파괴하지 않고 그냥 회반죽으로 덧칠만 해놓았으니 말이다. 소피아대성당을 처음 정복한 메흐메드 2는 이곳을 모스크로 바꾸면서도 기독교 성화를 건드리지 않은 채로 하얀 천으로 그냥 덮어 놓기만 했단다. 11세기까지 로마의 가톨릭과 우상숭배 논쟁으로 격돌하면서 무자비한 성상 파괴 운동을 벌였던 비잔틴 제국이 자신의 종교적 요람이 이슬람으로부터 보호받았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슬람의 정신이 최고조에 달했던 술레이만 시대에 들어 기독교 성화는 회칠로 살짝 가려졌다. 하지만 쪼아 없애지 않은 덕에 오늘날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가 지켜볼 수 있다. ‘제국을 경영해 본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문화에 대한 아량과 포용의 결과물이라는 누군가의 주장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하단에는 작은 액자를 하나 걸어두었다. 회칠로 인해 파괴되어버린 본래의 그림을 상상으로나마 복원해 놓은 모양이다.

 

 

이층 남쪽 회랑 끝에는 콤네누스 황제 모자이크 (Comnenus mosaic)’가 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John II Komnenos)’ 황제와 이레네 황후(Empress Eirene)’가 그려져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이는 이들 부부의 아들인 알렉시우스(Alexios)’라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요하네스 2세는 신앙심이 깊으면서도 유능한 군주였다고 한다. 그로인해 아름다운 요하네스라는 뜻의 '칼로안니스'라는 별칭까지 얻었을 정도란다. 또한 그는 자신의 누나와 매형이 역모를 꾸며 암살을 기도했었을 때도 관대하게 용서를 베풀었을 정도로 성격이 온순했다고 전해진다.

 

 

 

 

그 옆에는 황후 조에 모자이크(Empress Zoe mosaic)’가 있다. 이 모자이크는 예수를 중심으로 우측에 조에 황후(Empress Zoe)‘가 있고 좌측에는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Constantine IX Monomachos)’가 그려져 있다. 조예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헌명세서이며 황제는 성금주머니를 들고 있단다. 아무튼 조에는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로 비잔티움 역사상 몇 안 되는 정식 황녀였다고 한다. 그 자신이 스스로 여제가 되기도 했단다.

 

 

주어진 시간이 조금 남아 일층 본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양 옆의 갤러리(gallery)에 줄지어 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엄청난 무게를 머리에 이고 묵묵히 서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들의 모양과 색깔이 제각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제국 곳곳의 신전과 궁전 터에서 가져온 기둥들이라서 그렇단다. 비잔틴 제국 전성기의 위용을 뽐내기라도 하듯 제국 전역에서 최고로 좋은 재료만 골라 와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에서 뽑아 온 것은 물론이고 붉은 대리석 기둥은 이집트에서, 푸른빛의 대리석 기둥은 에페수스에서 가져왔단다. 에페수스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이다. 포세이돈 신전에 사용되던 기둥도 두 개나 있단다.

 

 

본당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들도 많이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이슬람의 흔적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본당 입구에는 있는 두 개의 큰 항아리는 버가모(Pergamon)로 부터 가져왔다고 한다. 등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항아리의 밑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이 항아리를 발견했을 때는 세 개였는데 하나는 발견한 농부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 속에 은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니 농부는 횡재를 한 셈이다.

 

 

성수대도 성당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인다. 아니 이것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중요한 건축자재의 대부분을 제국의 휘하 여러 나라에서 운반해왔었다니 말이다.

 

 

투어를 모두 마치고 출구로 나오는데 소피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모자이크가 문틀 위에 그려져 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보좌에 앉아 있고 우측에는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the Great)’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도시모형을, 좌측에는 유스티아누스 1(Emperor Justinian)’ 황제가 소피아 교회모형을 자랑스럽게 봉헌하고 있는 모습이다.

 

 

 

 

 

 

투어가 종료되는 출구 쪽에서 바라본 소피아대성당. 외형적인 구조물은 거대하고 웅장한 둥근 돔과 첨탑 그리고 대리석과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구한 세월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반들반들 닳아지고 더러는 퇴색된 상처를 안고 있다.

 

 

 

밖으로 빠져나오면 블루 모스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저곳은 마지막 날 일정에 들어 있으니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식당으로 향한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둘째 날 : 토프카프 궁전(Topkapı Palace/Topkapı Sarayı)

 

특징 :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하던 궁전으로 이스탄불을 관광할 때는 꼭 들려야하는 명소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토프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 갖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무기·직물·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참고로 토프카프 궁전의 첫 번째 이름은 예니 사라이(Yeni Sarayı)’이었다. ‘아흐메트 2가 새로이 지은 궁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토프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투르크어()로 토프는 `대포` 카프는 ``을 뜻한다. 이 궁전은 1856돌마바흐체 궁전이 설 때까지 오스만투르크(Ottoman Turks)’제국의 정치·문화 중심지로 통했다. 궁전은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이른 식사를 마치고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스탄불 역사지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로 향한다. 오늘도 역시 대로변에서 투어가 시작된다. 버스의 진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어가 시작되는 진입로의 풍경이 눈에 참 익숙하다. 그러고 보니 5년 전엔가 업무출장차 이스탄불에 들렀을 때도 이 길을 지났었다. 하긴 소피아대성당과 토프카프궁전, 블루모스크, 지하궁전 등 이스탄불 관광의 필수코스라 할 수 있는 유적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탐방로는 블루모스크 옆을 스치는가 싶더니 소피아대성당 앞으로 우릴 인도한다. 하지만 가이드는 이곳도 역시 통과해 버린다. 문이 열리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조금 더 안쪽에 위치한 토프카프 궁전을 먼저 들러보겠다는 것이다.

 

 

잠시 후 토프카프 궁전의 앞에 이른다. 토프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 집안의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뜰)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아랍어: Bâb-ı Hümâyûn)’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아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는 내용이라는데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그림문자일 따름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왔을 때는 총을 든 군인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스탄불의 치안이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1중정(I. Avlu or Alay Meydanı, First Court)’이다.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는 이름의 근위대가 주둔했다고 해서 예니체리 마당(Court of the Janissaries)’ 또는 퍼레이드 마당(Parade Court)’이라고도 불린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 현재도 이스탄불 시민들의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왼편에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는 하기아 이레네(Hagia Eirene)’ 성당이 보인다. 건축 재료와 구조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인데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해왔으며 1846년에는 오스만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1중정을 지나면 경의의 문(Middle Gate; Ortakapı)’이 나온다. 국정운영을 담당했던 제2중정은 이 문과 바뷔스 셀람(Bab-üs Selâm)’을 통해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술탄과 술탄의 어머니만이 말을 타고 경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상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곳을 통과해야 했단다. 일반 백성들은 아예 출입 자체가 금지되었다니 참조해두자. 아무튼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미국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되었을 정도로 동화적이라니 한번쯤은 잘 살펴볼 일이다. 이 문의 또 다른 특징은 공항 검색대처럼 몸은 금속 탐지기, 가방은 X-선 촬영으로 보안 검색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중요한 보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경의의 문을 통과하면 2중정(II. Avlu, Second Court)’이다. 문안으로 들어선 가이드가 일행을 불러 모은다. 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후부터는 개인적으로 궁전을 둘러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문의 바로 뒤에 만들어 놓은 오스만투르크 당시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와 이곳 토프카프 궁전을 축소시킨 미니어처(miniature)를 앞에 두고 설명을 시작한다.

 

 

 

 

 

 

2중정은 아름다운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아니 이곳 말고도 궁전 안에 있는 네 개의 중정(中庭) 모두가 잘 가꾸어진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바닥의 일부분을 파헤쳐 놓은 게 보인다. 과거에는 이렇게 생겼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2중정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중정의 왼쪽에 위치하는 대회의실 격인 디완(Dîvân-ı Hümâyûn, Imperial Council Chamber)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건물 위에 만들어 놓은 탑은 정의의 탑으로 회의시간 동안 스파이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도 부른다. 콥베는 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토프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무서운 사실은 재상들의 회의과정을 황제가 2층 밀실에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엿봤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불평불만을 털어놓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을 테니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디완에는 고풍스런 시계들이 전시되고 있었.

 

 

 

 

 

 

 

 

 

정의의 탑(Tower of Justice)’ 아래에서 연결된다는 하렘(Harem)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토프카프 궁전을 방문한 이상 놓쳐서는 안 되는 궁전의 하이라이트라는데 방문 당시에는 이를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긴 알고 있었다고 해도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하렘은 왕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공간이었다. 하렘의 모든 생활은 전통과 의무, 의식에 지배당했으며 하렘이라는 단어는 금지’, ‘개인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단다. 술탄은 이슬람법에 따라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었다. 술탄의 아내는 카든(kadın; 아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후 아들을 낳으면 하세키술탄(haseki sultan)으로, 딸을 낳으면 하세키 카든(haseki kadın)으로 불렸다. 술탄의 어머니 왈리데 술탄(valide sultan)이 하렘을 지배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흑인 환관을 통해 이를 관리했다. 수상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 지시 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고 술탄의 아내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후궁 선택과 국정 운영에 있어서도 술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궁전 부엌(Palace Kitchens)’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종탑처럼 천장을 높게 만들어 요리할 때 풍기는 연기와 냄새를 내보낼 수 있도록 구멍을 뚫은 게 특징이다. 1200여 명의 조리사가 매일 200마리의 양을 요리하는데,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하니 머릿속으로나마 그림을 그려보자. 황실의 위엄이 그려지지 않는가. 아쉽게도 안은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독이 든 음식이 닿으면 색이 변하는 그릇 등 술탄이 아끼던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젠 3중정(Third Court)’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or Bab-üs Saadet)’라 불리는 지복의 문(Gate of Felicity)’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이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네모난 돌맹이 하나가 뽈록하니 튀어나와 있는 게 보인다. 옛날 출정식(出征式)을 할 때 이곳에 술탄이 깃발을 꽂으면 출정하는 군인들이 이를 빼들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지복의 문오른편에는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다. 황제가 재상이나 사신들을 맞을 때면 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음으로써 황제와의 대화를 밖에서 엿듣지 못하도록 했단다.

 

 

 

 

지복의 문(Gate of Felicity)’을 통과하면 3중정(Third Court, III. Avlu)’이다.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리던 술탄의 개인 공간으로 백인 환관이 보초를 섰는데,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16세기에 건축된 알현실(Audience Chamber)’이라 할 수 있다. 중책을 맡은 관리와 외국의 대사가 국정을 논의하기 위해 이 작은 공간에 모이곤 했단다. 술탄은 황금과 에메랄드로 장식된 옥좌에 앉아 사절단이 입구를 통과할 때 그들이 가져온 공물과 선물을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3정원에는 토프카프궁전의 중요한 보석들을 전시하는 공간도 있으나 사진촬영은 금지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스푼 모양의 다이아몬드(86캐럿), 현란한 보석들이 박힌 금 투구, 루비 사파이어가 박혀있는 단검 등 술탄과 왕비가 누렸던 부귀영화를 엿볼 수 있는 보물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성물관(聖物館)도 역시 사진촬영은 금지된다. 성물관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요한의 손 등도 보인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8월 칼리파직을 이양 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3중정에 있는 ‘1719년에 세워졌다는 아흐메트 3세의 도서관(Library of Ahmet III)’도 있다.

 

 

4중정은 출입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들어선다. 술탄과 왕족이 거주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출입문이 따로 없다고 한다.

 

 

메지디예 키오스크(Grand Kiosk, mecidiye koshku)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시야가 뻥 뚫리면서 시원스런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은 물론이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4중정에는 세 개의 정자가 있는 데, ‘바그다드 정자는 바그다드를 정복한 기념으로 은과 진주, 상아로 장식되었고, ‘예레반 정자는 코카서스산까지 영토를 확장한 기념으로 지었는데 연못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금빛 지붕을 하고 있는 아프타리에 정자는 골든 혼을 바라보기에 전망이 뛰어나다. 아래 사진은 예레반 키오스크(Yerevan Kiosk, revan koshku)이다.

 

 

 

 

 

 

 

 

 

 

 

궁전 안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무심코 들어가 보니 타일로 장식된 호화롭기 짝이 없는 방들이 길손을 맞는다. 궁전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꼽히는 무라트 3세의 개인실(Privy Chamber of Murat III)’이 아닐까 싶다. 1578년 세워졌으며 현재의 장식이 모두 원본이라는 곳 말이다. 아니 혹시 예레반 키오스크의 실내였는지도 모르겠다.

 

 

 

 

 

 

 

 

 

 

 

 

 

 

 

궁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몽골의 게르(ger)’를 빼다 닮은 둥근 지붕들이 자주 눈에 띈다. 자신들의 뿌리가 몽골 유목민의 후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게르를 본떠 지은 것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지 : 터키 여행

 

여행일 : ‘18. 8. 16() - 8.24()

 

일 정 : 이스탄불(16~17)아야스(17)투즈괼(18)카파도키아(18~19)이고니아 콘야(19)안탈리아(20)파묵칼레(20)에페소(21)트로이(22)이스탄불(23),

 

여행 첫째 날 :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와 히포드롬(Hippodrome)

 

특징 : 터키(Turkey) : 북쪽으로 흑해와 동쪽으로 조지아·아르메니아·이란,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지중해, 서쪽으로는 에게해·그리스·불가리아와 접해 있다.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역인 트라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나누어진다. 터키 민족은 서기전 2000년경부터 아나토리아반도에 정착하여 독립국가를 형성해 왔다. 특히 1281년에 설립된 오스만터키제국은 1354년에 유럽에 진출하고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가 되었으며, 에티오피아·중앙아프리카·예멘·크리미아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측에 가담하여 패전국이 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터키공화국으로 독립하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케말 파샤 이후 잦은 정권교체와 두 번의 군사혁명을 거쳐 1982117일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49년에 국교를 수립한 이래 6·25전쟁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혈맹의 우방국으로서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스탄불(Istanbul) :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로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을 세운 곳으로,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 채택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개칭되었다.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터키의 역사·문화의 중심지였던 탓에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토인비(Arnold Toynbee)의 말처럼 이스탄불에는 인류가 이룩한 5천년 역사의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살아 숨 쉰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로마와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서로 만난다.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 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 카팔르 차르쉬(Kapalı Çarşı)’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메흐메트 2(II. Mehmet) 때인 1461년 비잔틴 시대의 마구간 자리에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작은 시장이었다가 증축을 거듭해 현재는 2천 개에 가까운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 최대의 시장이 되었다. 내부는 여전히 미로에 가까운 모습이나 예전에 비해 깔끔한 느낌으로 많이 바뀌었으며 호객꾼들이나 강매도 많이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여행의 첫 방문지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대형버스의 진입을 막고 있는지 버스는 대로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덕분에 5분쯤 걸어야만 목적지에 이를 수가 있다.

 

 

 

 

 

 

18개의 출입구 가운데 하나이자 정문이랄 수 있는 베야즈트 문(Beyazıt kapısı)’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오래 묵은 시장이다 보니 보수 또한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박공머리에 새겨져 있다는 신은 상인들을 사랑한다라는 글과 술탄 압둘하미트의 인장은 구경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굽이굽이 흘러온 역사만큼이나 이스탄불에는 시장이 여럿 숨 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그랜드 바자르가 생긴 것은 560년 전인 1461술탄 모하메드 2(II. Mehmet)’에 의해서이다. 이후 여러 번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의 시장들은 대부분 지붕이 없었는데, 지붕을 덮었다고 해서 터키사람들은 그랜드바자르를 지붕 있는 시장이라는 뜻의 카팔르 차르쉬(Kapalı Çarşı)’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나마 몸수색을 받아야한다. 테러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올라오는 유럽지역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은 수천 개의 상점들이 60여 개의 미로(迷路)로 얽혀있다. 출입구만도 18개나 되니 자칫 길을 잃고 해맬 수도 있다. 시장 지도를 미리 챙겨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혹시라도 준비를 못했다면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 두자. ‘베야즈트 문(Beyazıt kapısı)’에서 누루오스마니예 문(Nuruosmaniye kapısı)’까지 곧게 이어지는 중앙의 메인 통로가 가장 넓고 가장 화려하다는 것을 말이다. 귀금속 등의 화려한 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대부분 중앙 통로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들어서면 그 화려함에 눈이 부실 정도이다. 각각의 색을 내뿜는 보석들을 진열해놓은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양으로 세공된 귀금속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시장의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보석들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 보석상들은 오스만제국 때부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도 보석과 귀금속은 힘을 상징했기 때문이란다. 힘 있는 귀족들이 금으로 치장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시장의 중심에 보석상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인파에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문득 이곳에 시장이 들어선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1의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이런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이스탄불은 옛날부터 여러 대륙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을 파는 한편, 자기 나라에 없는 물건을 사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육상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끝나고, 해상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단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스탄불에서 동방의 상인들에게 건네졌고, 그러는 사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나서 섞이게 된다. 이스탄불을 서양 속의 동양, 또한 동양 속의 서양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아무튼 그렇게 생겨난 시장이 바로 이스탄불 최대의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1,200여 개의 가게가 모여 있고 매일 250,000명에서 400,000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우아한 자태의 등()들로 장식된 상점들도 보인다.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장된 등들이 시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가게 자체만으로 아라비안나이트에 들어온 것 같다. 패턴도 다양하다. 조각 난 유리조각들이 색색별로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나오는 빛은 오묘했다. 가게에는 유리공예품과 도자기도 함께 진열되어 있다.

 

 

 

 

 

 

 

 

반짝이는 보석들로 눈요기를 하다가 미로(迷路) 같은 길에 들어섰다. 여기저기에서 프리 애플티를 외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차를 얻어 마실 경우 곁에 딱 들어붙어서 자신의 상품을 설명하니 호객행위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양할 일만은 아니다. 차를 마시면서 그가 설명하는 제품의 품질 등에 대해 경청해주는 것도 일종의 예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미안하다면 미안한 표정과 함께 고맙다는 터키어인 테쉐퀴르 에데림(Teşekkür ederim)’이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면 된다.

 

 

 

 

 

 

이곳에서는 주로 토산품이나 장식품, 양탄자, 도자기 등을 판다. 대부분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기 때문에 아이쇼핑을 즐기거나 가벼운 기념품들만 구입하는 것이 좋다. 가이드의 안내 멘트에도 이런 경고가 꼭 따라다녔다.

 

 

 

 

 

오토만 시대의 그랜드 바자르는 상업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환전소와 은행 등 각종 경제활동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이 시장은 노천에서 행해지던 상거래를 지붕으로 덮인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전천후 상거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각종 향료나, 섬유, 나무 등을 파는 전문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노예시장의 역할도 했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도망 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골동품 및 왕실의 보물들을 이 시장에서 팔곤 했으며,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레이스 품목 및 고급 천, 침대 카바 등도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누루오스마니예 문(Nuruosmaniye kapısı)’을 빠져나오면서 시장구경은 끝을 맺는다. ‘누루오스마니예 문역시 보수공사 중이다. 박공머리에는 새겨져 있다는 의장용 무기와 책, 그리고 깃발 또한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출입구의 밖에도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상점의 외관이나 규모, 진열된 상품들이 안쪽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그래선지 기웃거리는 관광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출입문을 나서면 누루오스마니예 모스크(Nuruosmaniye Camii)’가 나온다. 대부분의 패키지여행자들이 집결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1748년 마흐무트 1세 때 시작되어 그의 후대인 오스만 3세 때인 1755년에 완성된 이 사원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이 오토만 건축양식에 적용된 가장 성공적인 건물로 꼽힌다. 고전적인 오토만(Ottoman) 사원들과 이 누루오스마니예 사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벽에 행해진 많은 장식과 장식이 된 첨탑의 캡, 그리고 본당의 이중으로 된 미흐랍(Mihrap, 메카가 있는 방향의 벽)’이다. 12개의 기둥과 14개의 돔이 있고 분수가 만들어지지 않은 반원형 정원은 이 전에 세워진 사원들과는 전혀 다른 장식이 많은 바로크양식의 특성이라고 한다.

 

 

 

 

 

 

사원의 난간에 서니 그랜드바자르의 아치형 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저 지붕 위의 풍경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몇 년 전에도 ‘007 스카이 폴테이큰 2’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다음 방문지는 히포드롬(hippodrome)’이다. ‘블루모스크의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풍스런 옛길을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지금 찾아가고 있는 히포드럼(Hippodrome)’은 말(horse)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hippos와 경주(race)를 뜻하는 dromos를 합성한 말로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누렸던 경마나 전차경주의 U자 트랙을 의미한다.

 

 

 

 

 

 

 

길쭉한 터로 이루어진 히포드롬(hippodrome)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고대 검투 경마장 터이다.  처음에는 검투경기장이었으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경기가 금지되면서 마차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단다. 경기장은 1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중앙에다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기둥이나 조각상 등을 배치하고, 밖에다 트랙을 만드는 구조였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는 니카의 난이 일어나 처형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오스만 시대 때는 예니체리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곳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십자군의 침입으로 유적 대부분이 파괴·약탈당했다. 당시 이곳에 있던 4개의 청동말 장식은 지금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성당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단다참고로 히포드럼은 1959년에 제작된 영화 벤허의 배경으로 벤허(찰톤 헤스톤)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던 바로 그 전차 경기장이다. 현재 이름은 술탄 아흐멧 광장’, 오스만 제국의 14번째 술탄()인 아흐멧이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을 고대도시의 심장부 히포드럼에 세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로 원래 높이는 32.5m이었는데 현재는 20m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BC 15세기 즉 35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신전에서 이 엷은 핑크색 대리석 기둥을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4면 본체에 음각된 이집트 상형문자이다. 내용은 투트모스 파라오의 용맹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글씨가 무려 3500년이 흘러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 그 역사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기단 받침대 4면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모습,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의 일들을 양각으로 부조해 놓았다.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에 만든 오르메 수툰(Orme Sutun)’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벨리스크이다. 높이는 32m, 탑의 기단부에 콘스탄티누스 7세가 할아버지를 위해 탑을 세우고 청동을 입혔다.’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원래는 청동으로 덮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 표면에는 당시 비잔틴시대의 시민생활상을 조각해 놓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3세기 초 라틴 군이 청동을 떼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해버렸고, 청동을 떼어낸 자리는 마치 속살을 베어 낸 것처럼 움푹 움푹 들어갔으므로 현재의 모습은 몹시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가운데에 위치한 뱀들이 뒤엉켜있는 모양새의 기둥은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으로,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BC 479년 그리스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AD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곳 히포드럼 광장의 트랙 중앙에 세워 놓았다. 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며 위로 올라가는 형상인데 페르시아의 청동 무기를 빼앗아 녹여서 만들었다. 원래는 머리 위에 직경 2미터의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고 하나 황금 트로피는 뱀 기둥이 이스탄불에 옮겨 오기 전에 이미 분실 되었고 뱀들의 머리도 오스만 시대에 부서졌는데, 하나는 이스탄불 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푸른빛을 띤 청동 기둥이 철()이었다면 산화로 인해 벌써 부식되어 옛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청동은 고도의 합금 기술이 요구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므로 뱀 기둥은 청동기의 우수성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히포드럼의 북쪽 귀퉁이에도 고풍스런 건물이 들어서있다. ‘마르마라 예술대학(Marmara University)’의 캠퍼스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틀(첫날과 마지막 날)을 머물렀던 메리어트 호텔(Courtyard by Marriott Istanbul international airport), 이스탄불공항 근처에 위치한 5성급 호텔로 넓고 깔끔한 객실은 물론이고 바와 라운지, 사우나, 헬스클럽, 비즈니스 센터, 실내수영장, 회의실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블루 모스크와 소피아 사원, 톱카프 궁전 등 유적지가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와 가깝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여행지 : 북부 유럽 여행

 

여행일 : ‘17. 6. 19() - 7.1()

여행지 : 러시아(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에스토니아(탈린).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노르웨이(오슬로, 발드레스플라야, 요정의 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뵈이야 빙하, 베르겐, 하당에르 피오르드, 하당에르비다국립공원, 덴마크(코펜하겐)

 

일 정 : 6.29() : 뉘하운 운하, 아멜리엔보그성·크리스티안보그성, 시청사, 게피온 분수

 

여행 열째 날 :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특징 : 덴마크(Kingdom of Denmark) : 북유럽의 유틀란트반도와 씨일랜드(Zealand) 500여 개의 부속 도서로 구성되었으며,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제도는 덴마크의 자치령이다. 종족은 북게르만계 노르만족의 한 분파인 데인족(Dane)이며, 언어는 덴마크어가 공용어이다. 종교는 바이킹시대는 다신교적 신앙형태였으나 9세기경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1936년 복음주의루터교가 국교로 지정되어 전체 국민의 88가 믿고 있다. 덴마크는 9세기경 독립 국가를 이루어 13~14세기에는 북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대국이었으나,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해 나가고, 1814년 나폴레옹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웨이를 잃으면서 약화되었다. 1864년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 패하면서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잃었다. 권력구조는 입헌군주제이다. 1448년에 창시된 올덴부르크 왕조가 18496월 절대왕정 폐지 및 의회 신설을 골자로 하는 자유헌법을 제정하면서 권력구조가 바뀌었다. 국제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침공 이후 이를 포기하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맹, 1973년에는 유럽공동체(EU, 유로화는 쓰지 않는다)에 가입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대한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27월 대한제국 전권대신 유기환(兪箕煥)과 덴마크 전권대신 파블로우(巴禹路厚) 사이에 한정수호통상조약(韓丁修好通商條約) 및 부속통상장정이 조인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마지막 수호조약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교기간이 3년에 불과했지만 덴마크 정부의 기술 지원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가설이 이루어지는 등 경제교류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1959년의 공사급 외교부 설치, 1966년 명예총영사관 개설 등의 과정을 거쳐 1972년에는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코펜하겐(Copenhagen) : 셸란섬의 북동 해안에 있는 무역항으로 1043년에는 하운(Havn) 또는 하프니아(Hafnia:항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1167년에 최초의 성채가 축조된 뒤에 발전하여 13세기 중엽에는 수륙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는 지리적 조건으로 쾨벤하운(去來港)이라 불리었다. 13~16세기에 한자동맹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1422년 도시권을 획득하였고, 1443년 이후 덴마크의 수도가 되었다. 16581659년 스웨덴의 공격을 받았으며, 나폴레옹 시대에는 1801년과 1807, H.파커와 H.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의 포격을 받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 시내에는 녹지가 많으며, 유서 깊은 건물들이 많아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아말리엔보그 왕궁의 북쪽에는 별 모양으로 해자(垓子)를 두른 성채가 있고, 그 해안에 안데르센의 동화로 유명한 인어상이 있다. 대안에 있는 스웨덴의 말뫼 사이에는 철도 연락선이 오간다.

 

 

 

코펜하겐의 투어는 크리스티안보그 궁전(Christiansborg Palace)’으로부터 시작된다. 1167년 코펜하겐의 창설자 압살론(Absalon) 주교가 세운 성채(城砦)가 시초로, 1560프레데릭 2(Frederik II, 1559~88 재위)’가 옛 성채가 있던 자리에다 짓기 시작해서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4세 때(1620)에 완공되었다. 독일 르네상스 양식을 띠고 있는 이 궁정은 18세기 말까지 왕실의 거처로 사용되어오다가 1794년의 화재로 왕실은 아말리엔보그 궁전(Amalienborg Palace)’으로 옮겨가게 된다. 1828년에 새로운 궁전이 지어졌지만 플레데릭 6(Frederik VI, 1808~14 재위)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별장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또 다시 화재를 입었던 것을 1907년부터 21년에 걸쳐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궁전의 안에는 덴마크 수상의 집무실 외에도 국회와 대법원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등 3(三權)이 한 공간에 집결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간의 일부는 덴마크 왕실의 리셉션 룸과 예배당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상단에는 네 개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턱을 괴고 괴로워하는 모습, 귀를 기울이는 모습,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 가슴을 움켜쥐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국회의원이 된 자는 국민의 말에 귀 기울이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도 하나쯤 만들어두면 어떨까 싶다. 하긴 그런다고 해서 따를 사람들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안쪽 뜰에서 생소한 풍경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전거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타고 온 것이라는데, 이 나라의 국회의원들은 절대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란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국정을 논한다?‘ 이 얼마나 검소한 삶인가. 거기다 봉사정신(정문 위의 인물상)까지 더해졌으니 맨날 싸움질만 하고 있는 국회를 바라봐야만 하는 우리네 현실로서는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궁전 앞 광장에는 프레데릭 7(Frederik VII, 1848~63 재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48년 왕위에 오른 그는 덴마크의 마지막 절대군주이며 재위 중에는 덴마크 의회(兩院) 설립에 관한 헌법을 승인(1849)하여 입헌군주제가 되도록 하였다. 전제주의의 포기, 성격 등을 이유로 최근의 왕 중 덴마크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이 되었다. 술을 즐기고 괴팍하였지만, 격의 없으면서도 기품있게 보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덴마크 전국을 수시로 여행하며 일반인들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모토는 '민중의 사랑은 나의 힘'이었다.

 

 

궁전의 맞은편에는 홀멘스교회(Church of Holmens, Holmens Kirke)‘가 위치하고 있다. 그 오른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거래소로 알려진 옛() 증권거래소(Børsen, The Stock Exchange)의 첨탑(尖塔)이다. 코펜하겐을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대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크리스티안 4(Christian IV. 1588~1648 재위)‘의 지시로 1619년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1640년에 완공되었다.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네 마리 용의 꼬리가 서로 꼬여 올라간 모양의 첨탑으로 유명하다. 높이가 56m에 이르는 이 첨탑은 루드비히 하이드리터(Ludwig Heidritter)‘가 제작했으며 코펜하겐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길게 뻗어 있는 건물의 전체 길이는 127m 이며, 건물의 지붕과 벽면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745년과 1855년에 보수, 재건되었고 1974년까지 증권 거래소로 사용되었다.

 

 

홀멘스교회(Church of Holmens)‘는 현 국왕인 마르그레테 2(Margrethe II, 재위 1972~)‘ 여왕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67년에 거행되었던 이 세기의 결혼식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종교까지 바꾸어야 했던 사랑이야기가 더 흥미를 끈다. 당시 덴마크의 차기 군주였던 마그레트 공주의 결혼 상대인 앙리 드 라보레 드 몽페자 백작(Comte Henri de Laborde de Monpezat)‘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덴마크의 국교인 복음주의 루터교로 개종(改宗)을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프레데릭(Frederik Andre Henrik Christian) 왕세자의 세례식도 이곳에서 행해졌었다.

 

 

다음 방문지는 게피온 분수(Gefion springvandet)이다. ‘아말리엔보그 궁전(Amalienborg Slot)’에서 대략 5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피온 분수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 황소 4마리를 채찍질 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게피온 분수대는 1908년 칼스버그 재단이 정부에 기증한 것으로 1908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덴마크 선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덴마크 조각가 안데스 분드가르드 (Anders Bundgard)’가 디자인했는데, 이곳 코펜하겐이 위치한 질랜드(Zealand) 섬의 탄생 신화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질랜드(Zealand) 탄생 신화에 따르면 스웨덴 왕은 밤에 이 지역을 경작할 수 있도록 여신, 세피온에게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여신은 그녀의 네 아들을 황소로 변하게 한 뒤, 땅을 파서 스웨덴과 덴마크 핀(Fyn) 섬 사이를 흐르는 바다에 던져 질랜드 섬을 만들었다. 그때 파헤쳐진 스웨덴 땅은 지금의 베네렌(Vanern)호수로 변하였으며, 호수의 모양이 질랜드와 비슷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같았나 보다. ()까지도 사랑하는 자식을 짐승으로 변하게 했을 정도이니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욕 얻어먹기에 바쁜 요즘의 정치인들을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닐 것 같다.

 

 

분수의 옆에는 세인트 알반 교회(St. Alban's Kirke, St. Alban's Anglican Church)’가 자리 잡고 있다. 1887년에 지어진 영국 성공회의 교회당이다. 교회의 이름은 영국의 첫 순교자인 알반 성인(St. Alban)’에서 따왔다. 35년간의 고생 끝에 완성되었는데 건축비용은 전액 교인들의 모금으로 충당되었단다. 신고딕양식(초기 영국스타일)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높은 종탑과 흰 석회암 타일, 좁은 아치형 창문, 그리고 예쁜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분수의 근처는 공원(公園)으로 가꾸어져 있다. 울창한 숲과 호수, 그리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화보에서나 보았음직한 예쁜 풍경으로 나타난다.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화나. 그 그림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여유로워 보인다. 누군가 이곳 코펜하겐 사람들이 언급한다는 몇 개의 단어들을 나열한 적이 있었다. 가족, 자연, 오늘 그리고 행복이다. 너무 당연해서 자주 잊고 사는 그것들을 오늘은 꼭 챙겨봐야겠다. 참고로 세인트 알반 교회가 있는 인근은 처칠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까지 포함되는지는 모르겠다.

 

 

 

 

 

분수의 뒤편은 항구다. 대형 크루즈선박이 입항하는 곳으로 평소에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텅 비어있다. 그래서 게피온분수가 붐비지 않았던 모양이다.

 

 

코펜하겐 시청사로 가는 길에 잠시 코펜하겐대학교’(University of Copenhagen, Københavns Universitet)‘에 들른다. 겨우 외관만 눈에 담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코펜하겐대학은 1479크리스티안 1(재위 14481481)’가 교황 식스토 4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서 설립된 이래 북유럽 지역의 고등교육 및 학술연구 부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며, 유럽에서 연구를 선도하는 명문대학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현재 8개 학부에 100개 이상의 학과 및 연구소가 있다. 대학은 4개의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는데,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곳은 그 가운데 중앙캠퍼스이다.

 

 

건물의 앞에는 높다란 좌대(座臺)를 여럿 만들고 그 위에다 흉상(胸像)을 올려놓았다. 이 대학에서 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했다고 하더니 그들의 흉상이 아닐까 싶다. 수상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닐스 뤼베르 핀센(1903, 의학)’닐스 보어(1922, 물리학)’, ‘오게 보어(1975, 물리학)’, ‘닐스 카이 예르네(1984, 의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잠시 후 시청 광장(City Hall Square, Copenhagen)에 이른다. 코펜하겐 시내 중심부, 코펜하겐 시청사의 앞에 있는 광장이다. 29.300 m²에 이르는 널따란 광장은 시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공식 행사와 축제, 시민들의 시위와 집회 장소로 사용된다. 이 광장은 코펜하겐과 다른 지역의 거리를 측정할 때 기준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광장을 에워싼 대부분의 건물들에는 전광판과 네온사인 간판이 설치되어 있어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광장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여러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다. 1905년에 완공된 시청사는 물론이고, 덴마크의 유력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폴리티켄스 후스(Plitikens Hus)‘의 본사 건물도 이 광장에 있다. 190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의 전면 상단에는 뉴스를 알리는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1902년에 지어졌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야콥 가데(Jacob Gade)‘가 연주했던 장소로도 유명한 브리스톨 호텔(Hotel Bristol)‘ 건물과 1985년에 문화재로 지정된 팔라스 호텔(Palace Hotel)‘ 등도 있다.

 

 

코펜하겐 시청사(Copenhagen City Hall, København Rådhuset))’1892년 짓기 시작해 1905년에 완공된 붉은 벽돌의 중세풍 건물로, ·외부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면 입구에 있는 상은 코펜하겐의 창설자인 압살론 주교이고, 청사 내부에는 100년에 1천분의 1초밖에 오차가 생기지 않는다는 옌슨 올센의 천문시계가 있으며 15분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105.6m 높이의 시계탑에서는 코펜하겐 시내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코펜하겐 역사상 여섯 번째로 지어진 점을 인정받아 1981년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사 견학은 가이드 투어로만 가능하다.

 

 

 

 

시청사로 접근하는 길가에는 이곳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Andersen | 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의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다. 1961년에 제작된 이 동상은 어딘가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평소 그가 자주 찾던 티볼리 공원(Tivoli Gardens)‘이다. 1805년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15세 때 코펜하겐으로 상경하여 배우가 되려했으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몇 번인가 절망의 늪에 빠졌지만, 당시 유망한 정치가이자 안데르센의 평생 은인이었던 요나스 콜린(Jonas Collin)‘의 도움으로 슬라겔세와 헬싱고르의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하고, 마침내 코펜하겐의 대학을 졸업하였다. 1835년 발표한 즉흥시인(Improvisatoren)‘이 독일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그의 문명은 유럽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내놓은 최초의 동화집은 동화작가로서의 생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미운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등 130여 편의 주옥같은 동화들을 발표했는데,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데르센 동화의 특징은 서정적인 정서와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그리고 따스한 휴머니즘에 있다.

 

 

광장에는 1904년에 만들어졌다는 청동과 화강암으로 된 '용의 분수(Dragespringvandet)’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의외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용이라고 하면 선뜻 동양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네 용()과 많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 그 낯설음을 조금은 완화시켜준다.

 

 

시청사 맞은편에는 1938년에 지어진 리치 빌딩(Richshuset)’이 있다. ’THAI‘라는 글자가 적힌 건물이다. 이 건물의 꼭대기 탑()에는 날씨를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소녀상(少女像)이 들어 있다. 금색으로 만들어진 이 소녀상은 맑은 날씨에는 자전거를 타고, 비가 올 때는 강아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걸로 보아 날씨가 맑을 모양이다. 배에서 내릴 때만 해도 비가 내렸었는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 아래의 벽면에 수은주처럼 생긴 조형물도 만들어 놓았는데 설마 진품은 아니겠지?

 

 

아멜리엔보그 궁전(Amalienborg Palace)’1794년 크리스티안보그 궁의 화재 때 프레데릭 5가 사들인 이후 현재 국왕인 마그레테 2여왕까지 무려 223여 년이나 덴마크 왕족의 거주지가 되어왔다. 원래는 네 귀족가문이 쓰던 별장이었는데, 크리스티안스보그 성이 불타면서 왕가에서 이를 사들인 것이란다. 궁전은 네 개의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이 건물들에 왕실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겨울철에만 사용한다고 해서 겨울궁전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 궁전들은 크리스티안 7세와 8세의 궁전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궁전은 프레데릭 5세의 기마상을 기준으로 8각 형태의 광장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광장을 로코코풍의 건축물 네 채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건물들은 크리스티안 7세 궁전((Christian VII's Palæ, eller Moltkes Palæ, 몰케 궁전), 크리스티안 8세 궁전 (Christian VIII's Palæ, eller Levetzaus Palæ, 레베차우 궁전), 프레데릭 8세 궁전(Frederik VIII's Palæ, eller Brockdorffs Palæ, 브록도르프 궁전), 크리스티안 9세 궁전(Christian IX's Palæ, 샤크 궁전) 등의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균형 잡힌 덴마크 사회답게 건물도 안정적이고 균형 있게 지어졌다. 그리고 전혀 사치스럽거나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검소함이 생활에 배어 있는 덴마크의 전체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프레데릭스 5세 기마상을 배경으로, 뒤에 보이는 웅장한 건축물은 프레데릭스 교회(Frederiks Kirke)’이다. ‘프레데릭 5(Frederik V)’ 때 지어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노르웨이 산 대리석으로 100년에 걸쳐 지었다고 해서 대리석교회(Marmorkirken)’라고도 불린다. 교회는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돔의 높이는 31m이다. 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돔이라고 한다.

 

 

네 개의 건물들은 각기 국기봉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국기를 내걸어놓은 건물은 하나도 없다. 왕족이 궁전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만 건물에 덴마크 국기가 게양된다니 왕족들 모두가 집을 비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덴마크 왕실(Danish Monarchy)’10세기 초에 유틀란트 반도 북부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러 바이킹 부족들을 규합한 노왕(the Old/老王) 고름(Gorm)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1042~1447년의 에스트리스(Estrith) 왕가와 1448~1862년의 올덴부르그(Oldenburg) 왕가를 거쳐 1863년부터 시작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쇠너보르그 글뤽스부르그(Glucksburg) 왕가가 현재까지 이어져 유럽의 여러 왕가 중 가장 오랜 왕통을 기록하고 있다. 현 국왕은 1972년에 즉위한 마르그레테 2(Margrethe ) 여왕이다. 1967년 앙리 백작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남 프레데리크와 차남 요아킴 등 2남을 두었으며, 아멜리엔보그 궁전에 거주한다. 참고로 덴마크 국왕은 헌법상 입법권과 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으나 실제로 입법권은 의회에, 행정권은 내각에 속함으로써 국왕은 상징적 존재에 머문다.

 

 

짙은 갈색의 초소는 여전하지만 그 앞에 서있어야 할 근위병(近衛兵)은 보이지 않는다. 왕족들이 집을 비우면 그들에게도 휴식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그 덕분에 아멜리안보그 궁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근위병의 교대식은 구경할 수 없었다. 하긴 매일 정오에 이루어진다니 시간도 맞추지를 못했다.

 

 

 

광장에는 프레데릭 5(Frederik V, 1746-1766)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의 영향으로 인해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했던 왕이다. 그러나 첫 번째 왕비인 루이세가 죽고 난 뒤 국정을 소홀히 하게 되자.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Adam Gottlob Moltke), 요한 하르트비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Johann Hartwig Ernst von Bernstorff), 하인리히 카를 폰 심멜만(Heinrich Carl von Schimmelmann)과 같은 유능한 각료들이 국정을 대신했다. 아무튼 재위기간에 7년전쟁(1756~63)에서 덴마크의 중립을 유지한 결과 대외무역이 증진되었고, 러시아와의 전쟁위기(1762)를 가까스로 넘겼으며, 1757년 농업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 영농기술 분야의 정부주도 개혁을 단행했다. 전체적으로 무능한 국왕으로 평가되지만 이 궁전으로 이사 온 첫 국왕이라는 인연으로 광장의 한가운데까지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멜리엔보그궁전 맞은편 강 건너에는 오페라 하우스(Copenhagen Opera House)가 위용을 뽐내며 화려한 자태를 보여준다. 1,700석 규모의 이 현대적 건물은 덴마크의 건축가 ‘Henning Larsen’가 설계를 맡았다. 이 지역 출신의 선박업체가 코펜하겐 시에게 기부한 것인데, 완성하는데 무려 미화 5억 달러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알려진다. 오페라하우스의 현대적인 디자인은 건축 애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고 한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둥근 유리벽과 직각의 석조 벽면이 철제 지붕을 이고 있는 구조로, 건물의 어느 한 면도 동일하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은 21세기 초 유럽을 지배하던 경제적 낙관주의를 보여주는데, 천장은 금박 105,00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은 스모크 오크로 제작되었단다.

 

 

부촌들이 즐비한 해안을 잠시 따르면 코펜하겐을 상징하는 작은 인어상(A Statue of the little mermaid)’을 만날 수 있다. 코펜하겐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관광 명소인데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공주에서 동기를 얻었으며, 덴마크 유명 발레리나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칼스버그 맥주 창업주의 아들인 칼 야곱센(Carl Jacobsen)’이 조각가 에드바르 에릭센(Eadvard Eriksen)’에게 제작을 의뢰하여 얼굴은 프리마돈나 엘렌 프라이스’, 몸매는 작가의 부인을 모델로 했다. 80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작은 청동상은 응답받지 못한 슬픈 사랑에 얽힌 덴마크 동화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어느 나이 어린 인어가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와 함께 육지에서 살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는 대신 다리를 얻게 되었다. 왕자가 다른 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인어는 왕자를 죽여야 마법에서 풀려나고 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1800년대 코펜하겐에서 살던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의 작품 인어공주에 나온다. 덴마크를 방문하기 전에 한번쯤 원작을 읽어보고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이 동상은 한때 목이 잘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범인은 거짓으로 가득 찬 기성 미술계에 항의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는 괴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다행히도 머리 부분은 한 달 만에 원래 위치로 돌아와 다시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인어공주 주변 해안에는 ‘Svend Rathsack’의 작품이라는 천사 상이 세워져 있다. 해군 수병(水兵)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다.

 

 

코펜하겐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뉘하운 운하유람선 투어이다. 투어는 뉘하운(Nyhavn)‘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시작된다. ‘새로운 항구(new harbor)’라는 의미의 뉘하운은 1673년 완성된 인공(人工) 항구이다. 1670년부터 1673년까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국왕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658년부터 1660년까지 일어난 덴마크-스웨덴 전쟁에서 잡힌 스웨덴 출신 전쟁 포로들의 노동력이 활용되었다. 뉘하운은 콩엔스 뉘토르브 광장(Kongens Nytorv)’과 바다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했으며 수많은 화물선들과 어선들이 이곳에 기항했다. 또한 맥주, 어부, 매춘으로 악명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부두로 사용되고 있는 수로(水路)에는 수많은 요트와 유람선이 오간다. 참고로 투어는 뉘하운항구에서 시작해 오페라하우스를 지나 인어공주상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크리스티안보그 성이 있는 슬로츠홀멘 섬을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운영된다.

 

 

매표소 앞에는 커다란 닻(anchor)이 놓여있다. 이곳이 항구임을 알려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뉘하운은 운하를 앞에 두고 서있는 예쁜 색깔의 오래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광경이 볼 만하다. 운하 남쪽에는 18세기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하고, 북쪽에는 네모난 창이 많이 달린 파스텔 색조의 건물이 화려하게 이어진다. 과거 선원들이 휴식을 즐기던 술집 거리였으나 현재는 야외 테라스를 갖춘 세련된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그리고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들로 언제나 붐빈다.

 

 

아래사진은 코펜하겐에서 가장 작은 아파트가 있는 건물이라고 해서 올려봤다. 코너의 건물과 그 다음 건물의 사이에 있는데, 두 건물을 연결시켜 놓은 듯한 모양새이다. 얼핏 보아서는 통로로 보이지만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분명한 아파트란다.

 

 

 

뉘하운은 안데르센Andersen, Hans Christian’이 사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845년부터 1864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는데, 가난했던 그는 비싼 방세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고 한다. 그가 살던 집은 18번지와 20번지 그리고 68번지인데, 아래 사진은 그 가운데 하나인 20번지이다.

 

 

너른 곳으로 빠져나오자 외벽이 유리로 된 왕립극장(Royal Danish Playhouse)’이 나타난다. 그런데 중세의 느낌이 강한 왕립(王立)’이란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건물은 완전 현대식이다. 옳은 얘기다. 사실 왕립극장의 본관은 코펜하겐 중심부의 콘겐스 뉘트로브(Kongens Nytorv)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또한 1874년에 지어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중세풍의 외관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건물은 2008년에 개관한 연극 전용극장이라는 얘기이다.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강연회나 소규모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3층으로 이루어진 객석에는 모두 95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덴마크 왕립극장1748년에 왕실을 위한 극장으로 설립되었다가 후에 국립극장으로 변경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발레단인 덴마크 왕립 발레단과 1448년에 설립된 왕립 오케스트라, 오페라단이 왕립극장에 소속되어 있다. 현재 덴마크 왕립 극장은 덴마크 문화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아까 아멜리엔보그궁전에서 보았던 오페라하우스이다. 덴마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오페라하우스로, 15백석 규모의 대극장과 200석 규모의 소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국립극장과 더불어 덴마크 왕립극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지역에는 개인용 도크(dock)‘로 보이는 시설들을 보유하고 있다. 건물들 사이로 물길을 연결하여 주거지와 선착장을 최대한으로 가깝게 했다. 이 지역에서는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는 자그만 요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소득이 높은 나라이다 보니 저 비싼 요트가 없이 사는 나라의 자동차쯤으로 여겨지는가 보다.

 

 

‘Holmen 해군기지에는 군함 몇 척이 정박해있다 1400년대 덴마크의 해군 영웅인 ‘Peder Skram’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아래 사진은 일부러 군함을 피해 찍었다.

 

 

유람선 투어 중에 다시 한 번 인어공주를 만난다. 이번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광명소답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있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하나 전해볼까 한다. 인어공주 동상이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그리고 독일의 로렐라이의 언덕과 함께 유럽의 3대 썰렁 명소로 꼽힌다는 얘기이다. 그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저 작은 공주님은 랑엘리니(Langelinie)’의 바위 위에 꿋꿋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이번엔 아멜리엔보그 궁전이다.

 

 

또 다시 운하로 들어간다. 뉘하운보다 색감은 조금 뒤떨어지지만 예쁜 요트들이 쭉 늘어서 있는 게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가이드의 멘트가 뒤따른다. 부지런히 카페라 셔터를 눌러대란다. 감탄할만한 사진이 찍힐 거라면서 말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행여나 놓칠 새라 다들 손놀림이 바빠진다.

 

 

카메라를 들이댈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가이드의 귀띔이다. 눈 깜작할 새에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만 사진촬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건물을 놓칠 경우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는 겁까지 곁들이는 게 아닌가. 그 정체는 코펜하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진 구세주교회(Vor Freslers Kirke)’이다. 1696크리스티안 4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설계는 건축가 ‘Lambert van Haven’가 맡았다. 이 교회는 천사가 조각된 정교한 바로크양식의 제단과 파이프오르간도 눈길을 끌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95m의 나선형 첨탑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교회탑을 설계한 이는 다 지어지고 나서야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거꾸로 설계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탑의 바깥으로 빙 둘러 꼭대기에 이르도록 설계된 이 계단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이 계단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소설 지구속 여행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엑셀이 현기증을 치료하기 위해 리덴브로크 교수에게 끌려가는 곳으로 나온다. 이왕에 거론한 김에 한 구절만 옮겨볼까 한다. ’내부의 나선계단을 올라가는 중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50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바깥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종탑의 테라스에 이르자 거기서 계단은 외부로 계속 이어졌다. 난간은 약해보였고 점점 좁아지는 계단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했다

 

 

 

아까 보았던 오페라하우스나 국립극장보다도 더 화려하고 독특한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북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왕립도서관이다. 1999년 밀레니엄을 시대를 맞이하여 증개축한 별관인 블랙다이아몬드에는 책방은 물론이고, 카페와 공연시설이 함께 들어있다고 한다. 검은 유리에 반사된 물과 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는 건물이다.

 

 

어느덧 유람선은 크리스티안보그 성이 있는 슬로츠홀멘(Slotsholmen, 덴마크 어로 '성의 섬' 이라는 뜻이다)에 다가와 있다. 이어서 코펜하겐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중 하나인 크리스티안4세 양조장(Christian IV’s Brewery)‘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도시방어용 시설이었는데, 나중에 군사들에게 알코올(alcohol)을 제공하기 위해 양조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67년의 대화재로 규모가 크게 줄었고, 다시 지으면서 무기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부터 ‘Lapidarium of Kings’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덴마크의 여러 궁전에서 사용해오던 집기나 예술품 등을 전시·보관 하는 곳이다.

 

 

고개를 숙여야만 통과가 가능한 다리 몇 개를 지나면 배는 이미 크리스티안보그 성에 다가와 있다. 운하 주변으로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티안보그성의 건너편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의 첨탑도 보인다.

 

 

이어서 독특한 생김새의 첨탑을 갖고 있는 구 증권거래소 건물이 나타난다. 왼편에는 홀멘교회가 보이지만 사진은 생략했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Taastrup Park Hotel’, 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자그만 호텔이지만 객실이 널찍할 뿐만 아니라 시설 전체가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커피포트가 비치되어 있는 게 최대의 장점, 다만 북유럽답게 이곳에서도 일회용품은 제공되지 않는다. 비누도 역시 물비누이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주위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2~3분만 걸으면 제법 큰 호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호숫가를 따라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데 1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때 호숫가에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징검다리 삼아 뛰어다녀볼 수도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청둥오리들의 재롱잔치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에필로그(epilogue), 덴마크 여행 중 가이드로부터 들었던 안내 멘트 중에 낯설었던 문장이 하나 있다. ‘어느 기업의 전액 지원으로 만들어졌다.’이다. 그게 하도 자주 듣다보니 나중에는 국가는 아예 손을 놓고 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다. 코펜하겐의 명물 오페라하우스와 아말리엔보그 왕궁 앞에 있는 아말리에 정원은 덴마크 최대 기업인 ‘AP묄러-머스크(A. P. Moller-Maersk) 그룹이 기증한 것이고, 세계적인 맥주회사 칼스버그(Carlsberg)’는 코펜하겐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인어공주상과 게피온분수대로도 모자라 칼스버그박물관까지 국민들에게 선물했다. 그 외에도 열측정장비 제조업체인 댄포스(Danfoss)’와 장난감 제조업체인 레고(Lego)’, 인슐린·의약품 제조업체인 노보 노르디스크(Novo Nordisk)’ 등 수많은 기업들이 그런 사회 환원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는 기업이 현지 사회의 한 부분이 되겠다는 전략이라고 한다. 그래서 덴마크 기업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시티즌 십(citizenship)’이라고 달리 부른단다. 조금 오래된 얘기지만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에서 조사·발표했던 '존경받는 기업들'에는 상위 33개 기업 가운데 8곳이나 덴마크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기사였지만 그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덴마크는 소득구간에 따라 세금 부과율이 다르고 그 회사의 소득으로는 약 60%의 세금을 내야한다고 한다. 그 세금만으로도 사회에 돈을 환원하는 면이 없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환원하고 있는 그네들이 부럽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기업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