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산(伏虎山, 678m)-지룡산(池龍山, 659.2m)

 

산행일 : ‘17. 5. 16()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산행코스 : 승호장 가든암릉지대신선봉(643m)복호산지룡산전망바위안부삼거리내원암솔바람길운문사 주차장(3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운문사를 감싸고 있는 복호산과 지룡산은 영남알프스 산군의 막내 산자락이다. 가지산의 산줄기가 상운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갈라지면서 배너미재를 따라 이어진다. 두 산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복호산을 오르는 바윗길은 전율과 스릴의 연속이라 할 정도로 쾌감과 흥분을 자아낸다. 10m가 넘는 직벽과 암릉을 타고 오르다보면 아슬아슬하다 못해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윗길에서의 조망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발아래로는 운문사가 내려다보이고 좌우로는 청도와 경주의 산들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이런 산들을 어찌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약자만 아니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신원삼거리(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 청도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경주방면으로 달리다 대천삼거리(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1444)에서 69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운문사방면으로 들어오면 오래지 않아 신원삼거리(운문면 신원리 699-2)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신원 삼거리의 코너(corner)에 있는 승호장가든앞에서 운문령(석남사) 방향으로 20m쯤 가면 오른편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등산로 초입은 밀성 손씨(密城孫氏)‘ 문중 묘역(門中 墓域)이다.




묘역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 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14분쯤 지났을까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뭔가를 알려주려는 신호려니 하고 살펴보니 길 왼편에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부산일보의 취재기사에 조망바위로 기록되었던 지점인 모양이다.



바위에 서면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신원삼거리 일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염창(鹽倉)이란 이름의 마을이다. 한때 이곳에 소금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청도뿐만 아니라 경산과 밀양, 대구 지역에까지 소금을 공급했었는데 필요한 소금은 울산 지역에서 만들어 사람과 소 등을 이용하여 지금의 운문령을 넘어 염창 마을로 옮겨왔으며, 필요에 따라 각 지역으로 분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금이 구하기 어려운 생필품이던 시절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립학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조용한 산골마을일 따름이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5분쯤 후에는 또 다른 밀성 손씨묘역을 만난다.



무덤을 지나면서 잠시 완만해졌던 산길은 TV안테나를 지나면서 또 다시 가팔라진다. 이번에는 바위구간까지 섞여있는 오름길이다. 그 덕분에 가끔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까치산과 방음앞산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대왕산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암릉을 따르려면 왼편, 그러니까 곧장 능선을 치고 올라야 한다. 오른편은 암릉을 우회(迂迴)하여 곧장 복호산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왼편 길로 진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눈이 쌓였을 때나 노약자는 예외이다. 수직(垂直)에 가까운 암벽 두어 곳과 그보다는 조금 약한 몇 곳을 거쳐야 하지만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있어서 조금만 조심하면 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왼편 능선을 치고 오른다.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에서 기분 좋게 조망을 즐기고 나면 곧이어 높이 10m쯤 되어 보이는 첫 번째 암벽(岩壁)이 앞길을 막는다. 밧줄과 크랙(crack)에 의지해가며 조심스럽게 능선에 올라선다. 암벽이 수직에 가까우나 굵직한 밧줄에 손잡이용 매듭까지 만들어놓아 큰 어려움은 없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암벽구간이 나타난다. 조금 전에 올라선 암벽보다 경사(傾斜)는 조금 약하지만 그 길이는 배나 더 길어졌다. 바위타기를 즐기는 산객들에게는 위험하기도 하지만 짜릿한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 구간을 통과하면 주위의 조망은 더욱 더 좋아진다. 눈터지는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또 다시 신원삼거리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The seagull that flies the highest sees the farthest)’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나오는 명문장이다. 그런데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범위가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높여진 고도에 비례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아무튼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물가에 터를 마련한 염창(鹽倉) 마을을 물과 산이 아우르며 특이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마을 뒤로는 방음산이 산세를 펼쳐 울타리가 되어 감싸고 있다



양쪽이 모두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구간에 서면 아름다운 바위 풍광이 덤으로 펼쳐진다. 오금저리는 암벽구간을 고생하며 올라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위벼랑을 옆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구간도 있다. 발아래는 천애(天涯)의 절벽, 마치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발을 붙일 만한 공간이 제법 너른데다 붙잡을 만한 나무들도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딱 이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밧줄에 매달려 고생하다보면 곳곳에서 눈터지는 조망(眺望)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흡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듯, 유장한 산줄기들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어느 누가 탄성을 지르지 않겠는가. 암벽을 오르내리며 끙끙대던 고난(苦難)의 기억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이 구간을 통과하면 이후부터 산길은 암릉의 위로 나있다. 칼날 같은 아슬아슬한 암릉이지만 오르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크랙(crack)이 잘 형성되어 있어 손으로 잡기가 편하고 발 디딤 또한 좋다. 고생에 비해 보상은 더 크다. 고도감과 함께 탁 트인 전망을 실컷 즐길 수 있다.




30분쯤 힘들게 올라 암벽 구간을 벗어나면 너덜길을 만나고 곧이어 643m봉에 올라선다. 신선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위봉우리이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신선봉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까치산을 중심으로 오른편 멀리 장륙산과 발백산, 구룡산 등을 비롯한 경주 인근의 산이 겹쳐지고, 왼편으로는 대왕산, 학일산, 통내산, 갓등산, 용당산, 대남바위산 등 청도의 산들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진행방향에 복호산이 나타남은 물론이다.



복호산으로 향한다. 노송(老松)들이 늘어선 암릉을 짧게 내려서면 안부에서 운문사주차장 갈림길‘(이정표 : 복호산 정상/ 운문사주차장/ 신원삼거리)을 만난다. 이곳에서 그만 탈출을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아까 바위를 건너 뛰면서 굳어버린 종아리 근육이 풀리지를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 힘과 무릎 근육을 이용해가며 기다시피 암릉을 올라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평지를 걷는 게 더 힘들다. 걸으려면 자동으로 종아리 근육을 사용해야만 하는 데 이때 종아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는 것이다.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복호산으로 향한다. 까짓 암릉도 기어 올라왔는데 이 정도도 못 참겠는가. 오르는 길에 잠시 시야가 열리면서 방금 전에 지나온 신선봉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 발아래에 운문사주차장이 내려다보인다. 머리라도 들라치면 호거대 능선이 방음산 뒤로 뻗으면서 까치산까지 선명하다.



안부에서 5분 남짓 급하게 치고 오르면 복호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이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바윗길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게 싫다고 그냥 건너뛰다가 종아리 근육이 뭉쳐버린 탓이다. 정상까지 겨우겨우 올라오기는 했지만 뭉친 근육을 풀어보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했었다. 아무튼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예닐곱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을 정도의 넓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숲속에 파묻힌 관계로 조망은 터지지 않는다.



복호산은 엎드릴 복()’범 호()’자를 쓴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지룡산(池龍山)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복호산으로 변해있다. 물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부산일보의 취재기사를 보면 예로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불러오던 이름이란다. 산의 생김새가 호랑이가 누운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문사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맞은편 산봉우리에 또 다른 호랑이가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 앞 장군평 너머 거대한 바위인 호거대(虎踞臺) 말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호거산(虎踞山)이 두 곳에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운문산에서 북쪽으로 좌우에 하나씩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축척으로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복호산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북대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룡산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지룡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산길은 곧장 아래로 향하지를 못하고 좌우로 갈지()자를 그려가면서 겨우 고도(高度)를 낮추어 가고 있다.



복호산에서 한 굽이 내려서면 안부이다.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타다보면 돌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지룡산성의 터가 아닐까 싶다. 이런 흔적은 이따가 지룡산을 내려가는 길에 더욱 또렷해진다. 혹자는 이 지룡산성을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의 터전이라 주장한다. 이 산성을 축조한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공략하게 되자, 신라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그 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룡산성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신라후기 지금의 운문면 신원리 내포에 한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주위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처녀를 취한 사람은 복호산 중턱에 살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자였다. 밀통을 즐기던 처녀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부모에게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사실을 부모에 다 털어놓은 처녀는 그들의 강압에 못 이겨 남자의 옷에 명주실을 묶게 되었고, 다음 날 아침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복호산중턱에 위치한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더란다. 그 안에는 오색이 찬란한 거대한 지렁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고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렁이는 죽임을 당했고, 달이 찬 처녀가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후백제의 견훤이 되었다는 것이다. '황간 견씨'의 시조라고도 한다. 그런 인연으로 복호산은 지룡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견훤은 신라를 정복할 겸해서 선조 지렁이의 영지에다 지룡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안부를 지나 완만한 참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곧이어 지룡산 정상에 올라선다. 복호산에서 20분 정도 걸렸다. 발을 절뚝거리다보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룡산도 역시 예닐곱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석도 복호산 것과 거의 같은 크기다. 조망도 역시 터지지 않는다. 복호산과 거의 같은 느낌이라는 얘기이다. 후백제 견훤이 이 산에 살던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야설(野說)이 산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는 지룡산에 대한 유래는 아까 지룡산성에서 거론 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 이곳에는 삼각점(동곡 313, 82 재설)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지룡산을 벗어나면 서서히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나게 해준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바위로 표기된 지점이다. 가야 할 산릉이 눈앞에 다가서고 영남알프스의 맏형격인 가지산을 비롯해 좌우로 펼쳐지는 산세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아까 지룡산으로 오를 때 만났던 것보다 훨씬 더 또렷해진 산성터를 만났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거의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었는데 사진촬영은 하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해 아래로 내려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룡산성은 지룡(지렁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견훤의 탄생 설화에 기원을 둔다. 견훤산성 혹은 호거산성으로도 불린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공격하기 위해 쌓았지만 성은 이후로도 많은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김사미의 난때는 농민군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고, 임진왜란 때는 청도 의병장 박경전과 의병들이 이 산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전망바위를 지나며서 또 다시 암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험스럽지가 않다. 능선을 따라 암릉이 날을 세웠지만 오르내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즐기면서 걷기에 딱 좋은 코스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릉의 특징들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 곳곳에서 시야가 트이는 것이다. 전면으로 억산을 비롯해 범봉, 운문산, 가지산, 상운산, 고헌산, 쌍두봉, 문복산, 옹강산 등이 시계반대 방향으로 펼쳐지고 내원암과 운문사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운문사 가람은 아늑하기만 하다. 주변의 산들이 연꽃잎이 되어 사찰을 감싸 안았다. 구름이 넘나든다는 운문사(雲門寺)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잘 알려진 절집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 제835)을 비롯한 7점의 보물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대웅보전 천장의 반야용선(용머리의 배)에 매달린 악착보살(악착동자)이다. 참고로 운문사는 진흥왕 18(557)에 한 신승(神僧)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절을 짓기 시작하여 동쪽에 가슬갑사(폐사), 남쪽에 천문갑사(폐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폐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600년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고, 930년에는 보양 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973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보은의 뜻을 담아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대작갑사의 명칭을 운문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부에서는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내원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길의 초입은 급사면(急斜面)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낭떠러지가 연상될 정도로 비탈진 사면이라서 주의가 요구된다. 이 구간을 지나면 산길은 지능선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이곳 역시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바닥이 작은 자갈투성이이다. 가만히 서있고 싶어도 자동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되는 상황이라는 얘기이다. 이를 배겨내지 못한 산길이 좌우를 오가면서 경사를 죽여보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고생하다보면 계곡에 내려선다. 물기 한 점 없는 마른 계곡이다. 이어서 계곡을 피해 난 길을 잠시 따르면 잠시 후 저만큼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내원암(內院庵)의 뒷 담장을 역할을 하는 대나무 숲이다.




내원암은 운문사의 암자 중 제일 오래되었으면서도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고려 중기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 )이 창건하였고 조선 숙종 때 설송대사(雪松大師)와 순조 때 운악화상이 고쳐지었다. 하지만 옛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현재의 암자는 1930년경에 옛 터를 낮추어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 당시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 도량이 되었으며, 1992년 무량수전과 멱우선실, 삼성각, 요사 등이 신축되고 1998년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문화재로는 높이 90, 60의 옥돌로 제작된 석조아미타불좌상(石造阿彌陀佛坐像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2)과 산신도(山神圖 :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72)가 있다.



마음을 비우고 가는 곳이라는 현판을 단 쉼터에서 쉬고 있던 여성대장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손짓을 해댄다. 다가가보니 경내에 연못을 파고 그 안에다 돌탑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 앙증맞은 불상을 하나를 얹었다. 그게 마애불(磨崖佛)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절은 깔끔하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비구니(比丘尼)들의 도량(道場)이 갖는 일반적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널따란 임도를 따른다. 부도전(浮屠田) 근처에서 잠시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참 내려가는 길에는 청신암의 표지석도 보인다. 문수선원, 사리암, 북대암, 내원암 등과 함께 운문사의 부속사찰 중 하나이다.



25분쯤 후 도로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왼편은 사리암, 운문사도 물론 왼편 방향이다.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운문사주차장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덕분에 난 삿된 것을 멀리 한다는 사리암(邪離庵)을 들러보지 못했다. 사리암이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시는 암자라기에 꼭 들러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통증이 심한 다리 때문에 중간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참고로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경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이후부터는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낸 소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솔바람길을 따른다. 솔바람길은 경북 청도 운문사 매표소에서부터 운문사까지 약 1.2km의 소나무 숲길이다. 길은 도로를 따르지 않는다. 족히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거대한 노송(老松)들 사이로 데크길을 따로 내두었다. 그래서 한층 더 풍취(風趣)가 돋보이는 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소나무를 거쳐 왔으니 당연히 솔바람이다. 그 바람 속에는 짙은 솔향기가 배어있다. 피톤치드(phytoncide) 또한 가득할 것이다. 소나무도 편백나무 못지않게 피톤치드를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치유(治癒)의 길이 된다. 한 걸음 내딛기조차 불편한 내 다리에는 큰 효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걷는 중에 법화경(法華經)까지 음미해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예전에는 게을렀더라도 지금 게으르지 않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산행날머리는 운문사주차장(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굵고 오래 묵은 소나무는 기본, 느티나무까지도 수백 년을 족히 넘겼다. 거기다 나무들 사이에는 일년생(一年生)의 꽃밭을 조성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古木)들과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화초(花草)들의 만남은 묘한 조합을 이룬다. 끝없이 돌고 돈다는 윤회(輪廻) 사상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아무튼 솔바람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렇게 사념에 젖어 2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운문사매표소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으니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호거산과 지룡산,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작년엔가 맞은편에 있는 호거대에 올랐을 때는 과연 저 산을 오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너무 험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위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릴(thrill)을 느낄 수 있어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에필로그(epilogue),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천 번 생각에 한 번 실수라는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가운데는 잘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산행 중에 내가 처했던 상황이 딱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바위구간에서 내려섰다가 반대편 바위를 올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싫어서 건너뛴다는 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양쪽이 서슬 시퍼런 벼랑인지라 긴장한 탓에 다리에 힘을 풀지 못한 채로 뛰어내렸던 모양이다. 그런 상태에서 내 체중이 실리게 되어 근육이 뒤틀려버린 것이다. 잠깐의 방심에 대한 결과는 참혹했다. 산행 내내 통증으로 고생했고, 끝내는 중간에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꼭 들러보고 싶었던 사리암을 다녀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대신에 얻은 것도 많았다. 잠깐의 방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의 따뜻한 위로와 보살핌은 덤이었다. 내 상태를 체크해가며 하산을 도와준 솔채꽃대장과 솔바람길에서 나를 보자마자 상비약(근육이완제)부터 건네준 김영순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휴게소에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화장실을 다녀오는 나를 보고 자신의 상비약을 선뜻 넘겨주신 또 다른 일행 분께도 감사드린다.

백자산(栢紫山, 485.9m)-현성산(賢聖山, 475.3m)-삼성산(三聖山, 554.2m)

 

산행일 : ‘17. 2. 16()

소재지 : 경북 경산시 평산동·여천동·유곡동과 남천면 그리고 남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삼성현초등학교삼보사용천대353m백자산기필봉(其筆峰, 483m)현성산상대고개중방재삼성산상대온천(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세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용천대나 삼성산의 정상 근처에서 잠깐 바위를 만날 수는 있으나, 그 정도의 바위조차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눈요깃거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망(眺望) 또한 내세울 게 별로 없다. 대신에 편안한 산행이 보장된다. 육산 특유의 보드라운 황톳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도심(都心)에서 가까운 백자산은 이정표를 세우고 벤치와 운동기구를 설치해 마치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그에 반해 삼성산은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는 했으나 이정표 등의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더 흥미를 끄는 산은 삼성산이다. 불성 원효대사와 그의 아들인 설총선생, 그리고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일연선사가 이곳 삼성산 자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삼성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이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들이 아닐까 싶다. 바람직한 후손들이라면 세 분 성인(聖人)이 이루어낸 업적을 되새기며 걸어보는 산행을 한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이다.

 

산행들머리는 삼성현초등학교 앞(경산시 백천동 438-3)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 수성 I.C에서 내려와 좌회전한 뒤 월드컵경기장을 앞두고 다시 좌회전하여 곧장 25번 국도를 따른다. 이어서 25번 국도상의 백천셀프세차장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삼성현초등학교가 나온다. 초등학교의 담벼락을 낀 사거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사거리의 전신주에 삼보사(300m)‘ 이정표가 매달려 있으니 참조한다.



오늘 산행은 아래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대신대학이 아니라 삼성현중학교(초등학교)의 앞에서 산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산일보 산행팀이 걸었던 길을 따라 진행했다고 보면 된다.



삼성현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삼보사 가는 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단에 전쟁터에서 싸워 백만 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다라고 적혀 있다. 옳은 얘기이다.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번에는 이전에는 게을렀더라도 지금 게으르지 않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라 적힌 안내판이 왼편의 길로 안내한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공사가 한창인 3층짜리 한옥건물이 나타난다. 삼보사(三寶寺)이다.



공사 중이라서 어수선하기 짝이 없지만 일단은 절 마당으로 들어가고 본다. 삼보사(三寶寺)라는 이름에 끌려서이다. 삼보(三寶)란 불교도의 세 가지 근본 귀의처(歸依處)인 불보(佛寶)와 법보(法寶), 그리고 승보(僧寶)를 말한다. 불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삼보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교도는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시작되며 최후까지 삼보에 귀의해야만 한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에게는 불가결한 요건이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삼보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삼보를 이름으로 삼았으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기웃거림은 실망으로 연결되어 버렸다.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寮舍)가 전부인 단출한 사찰인데다, 전각에 새겨진 글들이 대부분 한글이란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언제 무슨 사연으로 지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시는 부처님의 영험함만은 인정받았나 보다. 새로 신축중인 전각(殿閣)의 규모가 저리도 큰 것을 보면 말이다.



절을 둘러봤으면 이젠 산행에 나설 차례이다. 잠시 후 산불감시초소에서 왼편으로 약수터가는 길(이정표 : 약수터1.1Km/ 쉼터0.2Km)을 나눠보내고 나면 곧이어 쉼터가 나타난다. 정자와 벤치, 그리고 운동기구까지 두루 갖춘 것으로 보아 신경 써서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에는 백자산 등산로 안내도도 세워 놓았다. 백자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꽤나 많으니 잘 살펴보고 어느 코스를 이용할 것이지를 골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멋지게 생긴 조형물을 만난다. 안내판에는 비상급수시설이라고 적혀있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음수대(飮水臺)가 분명한데도 말이다. 아마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쉼터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계곡을 건너 오른편으로 향한다. 용천대를 지나 정상으로 연결되는 1등산로이다. 통나무계단을 오르자마자 길이 또다시 둘로 나뉘고(이정표 : 용천대/ 백자산 정상) 있다. 오른편 용천대 방향으로 향한다. 왼편은 제2등산로와 제3등산로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향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되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쉼터에서는 6~7분쯤 되는 거리이다. 아무튼 경산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잠시 후 너덜지대를 지났다싶으면 저만큼에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절벽 아래에는 작은 건물이 하나 들어서있다. 용천대란다. 강송산악회 오회장님 말씀에 의하면 용천대자는 샘 천()‘ 자라고 했다.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철문(鐵門)과 가시철망으로 꽁꽁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 후에 집안이 번창하고 자손들이 잘 살게 되자 자신들의 기도처로 삼아버렸다는 설()이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물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쉬운 일이다.



가파르게 위로 향하던 산길은 금방 끝이 난다. 이어서 사면(斜面)을 따라 옆으로 돌고 있다.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8분쯤 걸으면 표지판이 다 떨어져 나간 이정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선삼거리에 올라선다. 누군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하나를 주워 기둥에다 끼워 놓았다. ’옥곡동(백농교) 0.8Km’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오른편 길이 옥곡동(경산시)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옥곡동은 아까 우리가 산행을 시작했던 백천동(삼성현초등학교)과 맞닿아 있는 이웃동네이다.



또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경사가 심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저 오르는데 부담이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오르면 353m봉에 올라서게 된다. 오회장님 말로는 이곳을 용천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용천대의 위에 있는 봉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조망은 시원찮다. 경산시가지 방면으로 시야가 열리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다. 잡목(雜木)들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모두 잘라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353m봉을 지나자 산길이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이어진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솔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그득할 것이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오는 산행은 웰빙(Well-being)산행이라고 봐야 하겠다. 아니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아무튼 산행을 하면서 속세(俗世)에 찌든 몸까지 치유할 수 있다니 행운이 아닐 수 있다. 하긴 이런 맛에 끌려 주중이나 주말을 불문하고 시간만 나면 산을 찾고 있을 것이다.



힐링뿐만이 아니다. 이 구간에서는 눈까지 호사(豪奢)를 누리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경산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 용천대 근처에서 보았던 풍경보다 그 범위가 사뭇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를 높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4분 후 운동기구와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하고 있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0.9Km/ 주차장(쉼터)0.8Km/ 용천대0.7Km)를 만난다. 왼편은 아까 개울을 건너자마자 헤어졌던 제2등산로일 것이다.



능선으로 곧장 치고 오르려는데 제2등산로에서 올라오던 비구니(比丘尼) 스님이 오른편으로 가라고 외치신다. 오른편으로 난 편한 길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가라는 당부까지 빼놓지 않으신다. 여성의 섬세함에다 불자의 자비심까지 갖추신 모양이다.



그녀의 권유대로 오른편의 사면 길을 따른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조금도 부담이 없는 편한 길이다. 그리고 9분 후에는 또 다른 능선의 안부사거리(이정표 : 정상0.6Km/ 군부대2.0Km/ 남천2.0Km/ 주차장1.5Km)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정상과 군부대로 가는 두 길의 방향이 엇비슷해서 자칫하다간 잠시 후에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능선을 따른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꿈결 같은 능선이 이어진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황톳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산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뚫고 나있다. 잠시 후 왼편이 참나무 숲으로 변하지만 오른편은 여전히 소나무들의 천국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은 여전하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2분쯤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정표 : 정상100m/ 사동3.0Km/ 주차장(쉼터)2.0Km)이 나타난다. 헬기장은 활용을 안 한지 오래인 듯 억새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산길은 이곳에서 또 다시 나뉜다. 왼편은 제3에서 제8까지 6개의 등산로가 중간에서 합쳐져서 함께 올라오는 길이다.



헬기장과 정상은 바로 이웃이다. 1~2분만 더 걸으면 백자산 정상(이정표 : 상대온천 3.5Km/ 주차장(쉼터) 2.1Km)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하고 1시간을 조금 더 넘겼다. 열 평도 훨씬 넘어 보이는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두 개나 세워져 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기념으로 세웠다는 검은색 정상석에는 현성산의 맥을 이어 받고 있으며 잣나무가 많았다하여 백짐산 또는 백자산(柏紫山) 이라 이름 하였다는 유래를 적어 놓았다.



조망(眺望) 좋은 곳에는 옛 정상석이 자리 잡았다. 정상석 뒤로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인터불고(INTER-BURGO) 경산골프장과 경산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팔공산이 분명하다.



현성산으로 향한다. 정상표지석의 오른편, 즉 올라온 반대방향이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황톳길 자체만으로도 보드랍기 짝이 없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산길이 나있어 솔가리(소나무 落葉)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폭신폭신한 게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원래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쉼터도 보인다. 참나무 토막을 기둥에 걸어 의자를 만들었다. 그 옆에는 통나무 몇 개를 쌓아 놓았다. 키 작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반반한 것이 비박(bivouac)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공간이 될 듯도 싶다.



그렇게 20분쯤 걸으면 안부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경산불교산악회에서 아름다운 현성산 둘레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걸어 놓았다. 널판에는 이 둘레길의 지도(地圖)를 그려 넣었다. 현성산을 중심으로 문수봉과 보현봉, 대구한의대를 잇는 둘레길이란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정성들여 산을 가꾸어 가는 모든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해본다. 그러나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보인다. 보현봉이나 문수봉 등의 지명이다. 무명의 봉우리에다 불교와 관련된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까지는 뭐라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는 그 지점에다 새로운 지명이 적힌 안내판 정도는 매달아 놓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 가팔라진다. 그리고 오르막구간의 거리가 많이 길어진다. 그만큼 높여야할 고도(高度)가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적당히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14분 정도를 더 걸으면 기필봉 정상이다. 열 평 남짓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만일 누군가가 꽂아놓은 표지판(기필봉 483.9m)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기필봉 정상이라는 것을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능선상의 한 지점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밋밋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런데 능선의 풍경이 많이 바뀌어 있다. 계속되던 소나무 숲이 언제부턴가 참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까와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으면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철탑을 지나자마자 길이 둘로 나뉘는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주변을 잘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뭔가가 보일 테니까 말이다. 아까 안부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현성산 둘레길안내판이 이곳에도 매달려 있다. 왼편에 현성산이 있단다. 그리고 삼성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떼면 현성산 정상이다. 열 평이 훨씬 넘는 널따란 정상에는 삼각점(영천 472, 1995재설)외에도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경산불교산악회에서 현성산 둘레길을 개통하는 기념으로 만든 것이란다. ‘발걸음 인연마다 영험한 산기운과 함께하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능선은 이곳 현성산에서 오른쪽으로 휘어간다. 발걸음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함은 물론이다. 만약 그대로 직진하면 봉우리 아래로 곧장 떨어져 산행이 끝나버린다.



철탑이 있는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삼성산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 역시 편하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경사가 없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상큼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숲이 깔끔하게 간벌(間伐)이 되어있다. 간벌된 숲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다. 텅 빈 나뭇가지들 사이로 시야가 열리면서 널따란 들녘이 성큼 다가온다. 그 한켠에는 저수지가 자리 잡았다. 논농사를 위해 만든 것일 게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진행하면 차도에 내려선다. 경산시 남천면 상대리와 금곡리를 이어주는 925번 지방도인데, 이곳에서 왼편으로 50m쯤 이동하면 상대고개의 고갯마루이다. 이곳에서 삼성산으로 향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곧장 능선을 치고 올라 453m봉을 경유하는 방법이 그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임도(林道)를 따라 중방재까지 편하게 가는 방법이다. 참고로 지방도를 따라 내려가면 상대온천에 이르게 된다.



우린 차량차단기가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임도를 택하기로 했다. 4개월 만에 산행에 나선 집사람의 체력을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453m봉이 꼭 올라봐야만 할 의의(意義)가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능선 상에 위치한 그저 그렇고 그런 산봉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중방재에 이르면 오른편 지능선으로 난 산길이 보인다. ‘다랑골산으로 가는 길인데 이 또한 무시하기로 한다. 왕복 1Km이므로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집사람을 남겨놓고 나 혼자서 다녀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431m봉도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가는 길에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들은 선의산과 상원산 등이 아닐까 싶다.



삼성산 들머리까지 이어지는 임도는 제법 먼 거리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길이 곱고 가로수로 심어 놓은 단풍나무들이 그동안 벚꽃나무 가로수들에 식상해 온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진행하면 '상대온천 내려가는 길'이란 작은 푯말이 임도 옆에 자리하고 있다. 삼성산으로 가기 위해선 이곳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서야만 한다. 왼편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대온천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벤치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쉬어가며 오르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평상(平床)을 만들어 놓았다. 조망이 트이지는 않지만 야영(野營) 장소로는 안성맞춤이겠다.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피톤치드를 맘껏 마시며 하룻밤 머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야영장이 어디 있겠는가.



이 구간에서는 바위길도 만나게 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지만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라서 그런 표현을 써봤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3분 만에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쉼터에 올라선다. 빙 둘러서 벤치를 놓아둔 것이 수십 명이 몰려와서 쉬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이후부터는 편한 산행이 이어진다. 오늘 산행의 특징인 보드라운 흙길과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6분쯤 더 걷자 삼성산의 유래가 적혀있는 정상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지명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와 학자 설총(655~미상), 그리고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의 고승 일연선사(1206~1289) 등 세 성현이 이 산자락에서 태어났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상은 헬기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따랗다. 그 덕분에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인터불고(INTER-BURGO) 경산골프장과 경산시가지 등 아까 백자산에서 보았던 풍경화가 다시 한 번 그려진다. 대구의 명산인 팔공산이 그림 속에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반대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그쪽 방향에 있는 산봉우리 하나가 이곳 정상보다 오히려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4분 후에는 또 다른 정상표지석을 만난다. 이번에는 삼각점(영천 332, 1995복구)까지 보인다. 제대로 된 삼성산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보았던 정상석은 뭐란 말인가.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예산까지 들여 만드는 시설물들이라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잡목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을 다른 곳에 세운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 즉 상대온천 방향이다. 왜 그쪽이냐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올라올 때 만났던 상대온천표지판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되돌아가도록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곳으로 내려가도 상대온천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리막길의 경사(傾斜)가 심하고, 비록 잠시지만 바윗길을 타야 하는 불편까지 피할 수는 없다. 표지판을 굳이 반대방향으로 돌려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굵직한 밧줄을 매어놓았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가파른 구간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고와진다. 보드라운 황톳길에 경사까지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곳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아무튼 주변 경관도 바라볼 겸 쉬엄쉬엄 걸어볼 일이다. 옛날 세 분 성현들이 뛰어놀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렇게 40분쯤 내려서면 좌우로 길이 나뉘는 능선안부에 이른다. 물론 최대한으로 속도를 떨어뜨린 채로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이다. 이곳에서는 왼편 방향으로 내려서야 상대온천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산행날머리는 상대온천

7~8분쯤 산자락을 내려오자 복숭아로 보이는 과수원단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상대온천 건물이 보인다.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30분 정도를 쉬었으니 대략 4시간을 걸은 셈이다. 참고로 상대온천(上大溫泉)은 경산온천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부터 대추골더운샘, 온수골, 온암정이라 하여 한 겨울에도 얼지 않아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1972년 국립지질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온천지대로 판정되었는데, 수량은 풍부하고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알칼리성이 강한 황산천으로 알려져 있다. 부근에서 신비의 돌로 알려진 맥반석이 출토되는데, 이 성분이 온천수에 용해되었는지 황산이온과 염소, 과망간산칼륨 등의 광물질이 풍부하다. 하지만 수온은 25에 불과해서 40까지 가열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 온천수는 피부병과 신경통, 위장병, 비뇨기질환, 동맥경화증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1982년 상대온천관광호텔의 완공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는데, 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대구광역시 동쪽 18) 거리에 있어 대구시민의 휴양지로 인기가 있는 편이다.


건령산(建靈山, 521.6m)-명봉산(明峰山, 401.7m)

 

여행일 : ‘17. 2. 2()

소재지 : 경북 칠곡군 동명면·지천면과 대구시 북구 읍내동의 경계

산행코스 : 창평리고개건령산여부재420.1m명봉산양지마을 갈림길말산양지마을 입구(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건령산과 명봉산은 황학지맥(黃鶴枝脈)의 백운산(713m)에서 남쪽으로 곁가지를 쳐서 대구 시가지로 뻗어 내리는 능선 상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다. 두 산 모두 제대로 된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흙산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산세는 비록 보잘 것이 없지만 보드라운데다가 경사까지 없는 흙길 덕분에 힘들지 않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여느 흙산에서도 볼 수 없는 조망(眺望)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산불 덕분에 한쪽 사면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두 산이 바로 이웃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도심(都心)의 체육공원을 연상시키는 명봉산과는 달리 건봉산은 이정표 하나 없이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건봉산이 산불에 모든 것을 태워버린 탓에 주민들을 위한 모든 노력을 명봉산에 쏟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두 산 모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인근 주민들이나 산을 오르내리며 건강을 만들어나가기에 딱 어울릴 것 같아서이다.



산행들머리는 창평리고개(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경부고속도로 왜관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대구방면으로 내려오다 지천면 덕산리에서 내려와 923번 지방도를 타고 다부동(칠곡군 가산면) 방면으로 달리다 신리사거리(지천면 신리 873-1)’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 창평로)를 따라 들어가면 송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동명면 송산리와 지천면 창평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오늘 산행은 첨부된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양지마을삼거리에서부터는 지도에 표시된 코스를 따르지 않고 164.6m봉을 거쳐 양지마을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164.6m, 즉 말산을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오른편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널찍하게 임도(林道)가 나있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능선은 은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가 가득하다. 굵기가 가는 것으로 보아 심은 지는 오래지 않은 모양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쉼터를 기점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2~3분 쯤 오르면 원형의 탁자에 의자까지 갖춘 반듯한 쉼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쉼터의 위는 담쟁이넝쿨을 길러 햇볕까지 가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쉼터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의 왼편에는 길게 금()줄이 쳐져 있다. 사유지이니 들어올 경우에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문까지 붙여 놓았다. 뭔가 약용식물이라도 재배하고 있는가 보다.



능선의 양 사면(斜面)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왼편이 참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반면 오른편 사면은 텅 비어있다. 2006년엔가 이곳에서 큰 산불이 났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도 반대편 산자락까지는 산불이 번지지 않았었고 말이다.



뒤돌아보면 백운산을 거쳐 황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곳도 역시 산불의 피해를 보았던지 산은 텅 비어있다. 덕분에 겹으로 뚫린 임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산불 진화를 염두에 두고 개설을 했었는지 빈틈을 두지 않고 산자락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오른편 방향의 시야는 막힘이 없다. 그리고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산불로 인해 산의 사면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칠곡군청이 있는 왜관 쪽 풍경이 시야(視野)에 들어오는데,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것이 마치 강원도의 산간오지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20분쯤 지나면 산길이 그 사나웠던 기세를 뚝 떨어뜨린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능선산행이 이어진다. 산행이 무척 편해진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오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갈 따름이다.



왼편으로도 시야가 열린다. 동명면 송산리 방향이다. 저곳은 동제(洞祭), 즉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洞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데, 이때 모시는 신()건령산신(建靈山神)’이라고 한다. 또한 송산리의 무악골(舞樂谷)이라는 마을은 건령산신이 내려오실 때 춤을 추면서 오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건령산이 이곳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의 한쪽 귀퉁이에 쌓아놓은 나무들마다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다. 잔불을 정리하면서 한쪽에다 모아놓은 모양이다.



17분쯤 지났을까 작은건령산(516.5m)’이라고 적힌 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선다. 저만큼 앞에서 걷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놓고 가신 모양이다. 이름이 없던 산봉우리로 알고 있는데 그가 새로운 이름을 붙였나보다. 그가 지은 이름이 그대로 사용될지는 아직 모른다. 아마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뜬금없는 이름이라면 코팅지를 떼어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작은건령산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건령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만이다. 건령산의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두루뭉술하게 생긴 것이 산봉우리 같지도 않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없다. 그저 두세 평도 안 되는 비좁은 공터에 돌 몇 개를 쌓아놓고 정상표지판을 그 돌에 빗대어 세워놓았을 따름이다. 대구의 산악인인 김문암씨의 작품일 것이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건령산의 정상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건령산에 대한 기록은 조선 영조 때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건령산은 관아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북쪽으로 인동 경계에 닿아있다. 소학산에서 남쪽으로 구불구불 뻗어 나와 녹봉(鹿峯)을 이룬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북쪽으로 소야현을 거쳐 가산으로, 남쪽으로는 여화재로 산줄기가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한자 표기는 건령산(乾灵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건령산(建靈山)’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산신령이 서있는 형상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산을 오르는 동안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나는데 고도(高度)가 높아진 만큼 시야(視野) 또한 더 넓어졌다.



명봉산으로 향한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명봉산과의 사이에 있는 여부재까지 내려가려면 꽤나 많이 고도를 낮추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15분 조금 넘게 내려왔을까 작은 봉우리 하나가 진행방향에 나타난다. 산길은 그 앞의 안부에서 능선을 벗어난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하지만 맞은편 봉우리를 오르는 길도 또렷한 편이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안부 오른편에 망주석(望柱石)까지 갖춘 묘역(墓域)이 보이니 참조한다. 안부에서 여부재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안부에 있는 묘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놓았지 않았나 싶다.



길가에 한티가는 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작년 가을 한티가는 길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사업이 벌써 마무리되었나 보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순례자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누구나 한 번쯤 걷기를 소망하는 길이다. 최초 순교자 야고보 성인의 전도 행로를 따라 펼쳐지는 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 피데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이어진다. ‘산티아고 길을 모티브로 한 순례길이 바로 한티가는 길이다. 한국판 산티아고 가는 길로 보면 되겠다. 이 길은 한말(韓末)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요, 순교의 길이었다. 당연히 신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연단(鍊鍛)의 길이 될 것이다. 다시 산티아고 가는 길로 되돌아가 보자.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희망한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35일 여정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데다 하루 20를 걸어야 하는 강한 체력이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600만 명 이상의 순례객들을 불러들이며 문화, 관광 비즈니스는 물론 종교,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니 어느 누가 그 모티브를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이곳 한티가는 길이다.



여부재에 내려선다. 북쪽의 건령산에서 남쪽의 명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안부에 위치한 고갯마루로서 칠곡군의 동명면(송산리)과 지천면(심천리)의 경계를 이룬다. 여부재가 처음 기록된 사료는 해동지도(海東地圖)’이다. 하지만 이 지도에는 여부재가 아니라 이칭인 여화현(如火峴)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여화현(餘火峴)이라 쓰기도 하는데, 여부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을 화()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여부재라는 이름은 옛날에 동명면의 시장에 가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남편과 같은 고개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이 고개는 지천면과 동명면 주민들이 넘나들면서 인적이 끊이지 않던 고갯마루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니면 명봉산이나 건령산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나 찾아올 정도로 한적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고갯마루에는 주차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널찍한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사각의 정자(亭子)를 짓고 그 아래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이로 보아 순례길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진 시설이지 싶다. 정자 옆에 서있는 스탬프보관소가 그 증거일 것이다. ‘한티가는 길을 탐방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을 지나갔다는 증거를 남기라는 의미일 만들어 놓은 시설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쉼터에는 여부재를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 아래에 그려져 있는 지도(地圖)가 더 관심을 끈다. ‘한티가는 길에 대한 안내도이다. 이곳 여부재는 그 세 번째 구간으로 뉘우치는 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단다. 동명성당에서 창평지까지로 거리가 대략 9Km인데, 전체를 다 걸으려면 4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부연설명까지 적어 놓았다.



고갯마루에는 한티, 신나무골 성지, 도보순례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한티가는 길이 조성되기 전에 일부 신자들이 걷던 순례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신나무골은 지천면 연화2리이고 한티는 동명면 득명리에 있는데, 두 군데 모두 천주교도들의 신자촌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인 1859년 말 경신박해가 일어나 신나무골에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배씨 가정 다섯 식구는 눈이 덮여있던 이 고개와 건령산을 넘어 80여리 떨어진 한티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추격해온 포졸들은 한티 옹기굴에 숨어있던 일가족을 끌어냈고, 끝까지 천주교를 믿겠다고 한 부인 이선이(엘리사벳)와 장남(배스테파노)186031일 끔찍하게 참수했다고 한다.



건너편 산자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명봉산으로 향한다. 마음 같아서는 한티가는 길을 따라가고 싶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2년 전 가을에 10일 안팎의 일정으로 스페인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도전해보지 못했던 신티아고 가는 길을 맛이라도 좀 보고 싶었지만 이 또한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다음에라도 한번쯤 짬을 내어 꼭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그게 잘 안될 경우에는 사색과 음유(吟遊)로라도 한갓지게 걸어보고 싶다.



5분 조금 못되게 올라서면 능선 안부에 이른다. 명봉산은 왼편 능선을 따라야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아니 엄청나게라는 수식어(修飾語)를 쓰는 게 더 실감이 나겠다. 그나마 6분이면 그 가파름이 끝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420.1m봉으로 오르는 길에 뒤돌아본 건령산의 왼쪽 사면(斜面), 민둥산의 허리를 도는 목조 데크길이 끝 간 데 없이 길게 나있다. 저런 길을 내려면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예산을 쏟아 부어야 했을 정도로 필요한 시설이었을 지가 의심스럽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420.1m봉에 올라선다. 이곳에도 역시 박건석선생이 코팅지를 매달아 놓으셨다. ‘여부봉이란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여부재에서 따다 붙인 모양이다. 의미 없는 표시라 생각되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조삼국선생님께서 자신의 표지기를 매달고 계신다. 이미 1만개 이상의 산봉우리를 오른 분이니 뭔가 의미가 있는 봉우리일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산봉우리를 올랐다는 문정남선생님의 표지기도 매달려 있다. 오늘 산행은 그 둘에다 심명보선생님과 김신원선생님 등 만산회 회원들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왼편 조망, 동명면 소재지인 금암리일 것이다. 그리고 푸른빛으로 나타나는 동명저수지의 뒷산은 도덕산이 분명하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팔공산일 것이고 말이다.



아래로 떨어졌던 산길이 다시 위로 오르기를 멈춘 채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능선을 따라 위로 오르는 게 옳기 때문이다. 벌목(伐木)을 한 나무들을 그대로 바닥에 깔아놓은 탓에 산길이 안 보였을 따름이다.



2~3분쯤 사면을 따랐을까 산악회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한다. 길이 안 보이는데도 말이다. 늦게나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눈치 챘나 보다. 그리고 잘못 들어선 지점까지 되돌아가느니 그냥 치고 오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나 보다. 아무튼 비록 잠깐이기 하지만 없는 길을 새로 만들어가는 산행이 이어진다.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나무들을 넘거나 피하면서 오르는 만만찮은 산행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무명봉 위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뛰어나다. 왼편으로 시야가 열리며 동명면(칠곡군)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도덕산과 가산, 팔공산 등일 것이다.



이후로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행이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느낄 수 없으니 산행은 지극히 편안해진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작은 바위들이 능선에 늘어서 있다. 마치 누군가가 흩뿌려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다. 비록 왜소하기 짝이 없지만 그냥 지나쳐버리지는 못한다. 그 생김새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보는 바위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늘 산행 중에 유일하게 만난 바위들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이후로도 바위를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3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움막에 가까운 가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하지만 의젓하게 문까지 달고 있는 것이 집의 모양새는 제대로 갖추었다. 그리고 명봉산악회에서 관리하는 시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은 참나무들로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올랐던 건령산이나 이곳 명봉산 할 것 없이 온통 참나무들 일색이다. 참나무가 자생하는 표본지로 삼아도 되겠다.



움막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명봉산 정상에 올라선다. 건령산을 내려선지 정확히 1시간 만이다. 엄청나게 널따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대구 K2산악회에서 세운 조그맣고 예쁜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옆에는 삼각점(대구 21 2007재설)도 보인다. 참고로 명봉산이란 이름은 옛날 큰일이 있을 때 봉화를 밝히던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헬기장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간 뒤끝이라는 이유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왼편에는 동명 시가지와 송림지 뒤로 도덕산이 보이고 그 뒤에는 팔공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 발아래에는 심천리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 칠곡 시가지일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느긋하기만 하다. 평지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얼마나 정성들여 산을 가꾸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길가에 나뭇잎 하나 없이 줄기만 앙상한 고사목(枯死木)들이 늘어서있다. 대부분 굵은 줄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모두가 하나 같이 검은 색으로 덧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흔적들일 것이다. 그나마 불에 탄 나무들보다 살아남은 나무들이 더 많은 것이 다행이다. 그 덕분에 공원처럼 잘 가꿀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10분이 조금 못되어 운동기구 몇 개와 벤치를 마련해 놓은 쉼터에 이른다. 이런 시설이 있다는 건 이곳 명봉산이 동네 뒷산과 마찬가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쉬엄쉬엄 올랐다가 몸 좀 풀고 내려가는 그런 산 말이다.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 바로 이런 체육시설들일 것이다.



산길은 넓고 완만하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도 가끔 보인다. 그래 누군가는 이곳을 MTB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했다.



20분쯤 지났을까 또 다른 쉼터를 만난다. 이번에는 아예 오붓이 둘러앉아 쉴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붉은 칠을 한 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다 달력은 물론이고, 시계와 간단한 집기들까지 갖추어 놓았다. ‘명사모’. ‘명봉산을 사랑하는 사람모임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걸로 보아 그네들이 관리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그런데 청폐장수(淸肺長壽)’라고 적힌 편액(扁額)이 눈길을 끈다. ‘폐가 맑으면 오래 산다.’ 이 얼마나 좋은 얘기인가. 산에 내걸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게 없을 것 같다.



숲속에는 정자(亭子)도 들어 앉혔다. 아까 하산을 시작하면서 떠올렸던 내 느낌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흡사 도심공원(都心公園)’에라도 온 것 같다는 그 느낌말이다.



또 다시 체육시설이 나타난다. 첨부된 지도에 '양지마을삼거리'로 표기된 지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몸 풀기 정도가 아니다. 철봉까지 갖춘 걸로 보아 아예 몸을 만들어보라는 얘기인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명봉산을 건강지킴이산이라는 애칭을 붙이는가 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양지마을 1.9Km, 명봉산산불초소 2.2Km, 해원사 2.6Km/ 명봉산 1.9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한틔재를 거쳐 돌고개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가 내려가려는 양지마을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10분 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쪽 다 또렷하게 길이 나있는데 이정표(양지마을 1.2Km, 해원사 1.8Km/ 명봉산 2.6Km)에는 오로지 오른편 양지마을 방향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그저 이정표를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진행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대한 신뢰도 한번쯤은 가져보자.



5분쯤 내려갔을까 산악회의 진행방향 표시지가가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다. 말산의 들머리가 되는 기점(基點)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를 필요하다. 산길의 흔적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기 때문이다. 이정표도 세워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요상하게 생긴 텃밭도 보인다. 나무기둥을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케이 목장의 결투였던가? 총잡이들이 드나들던 미국 서부의 그 목장(牧場) 말이다. 아무튼 도심(都心)의 공원 같이 잘 가꾸어진 산속에서 만나는 텃밭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러한 풍경은 말산의 정상 근처에서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잠시 후 말산의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이곳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산봉우리라고 여기기보다는 그저 둔덕 정도로 보는 게 정상일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이정표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삼각점(대구 406, 1982년 재설)과 이곳을 먼저 지나간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고 간 표지기들을 보고 이곳이 말산의 정상이려니 추정해볼 따름이다. 참 깜빡 잊을 뻔 했다. 방금 전에 지나간 박건석선생께서도 코팅지를 매달아 놓고 가셨다. 그런데 말산 1이란다. 내가 알고 있기론 말산인데도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또 다시 만나게 되는 요상한 텃밭을 오른편에 끼고 아래로 향한다. 길이 의외로 또렷하니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아까 헤어졌던 정규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시계를 본다. 이곳 명봉산을 돌아오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재보라는 것일까?



산행날머리는 양지마을 입구(대구시 북구 읍내동)

그렇게 잠시 내려오면 양지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이정표 : 해원사 0.5Km/ 명봉산 3.8Km)에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야만 만날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의 아래를 통과하자마자 나오는 널찍한 도로(관음로) 가에 버스가 주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칠곡 우방타운의 건너편인데 이 부근이 시내버스들의 종점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이라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주차가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엉덩이 한 번 대보지 않고 걸었으니 오롯이 걷는데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칠보산(七寶山, 810.2m)-등운산(騰雲山, 767.4m)

 

산행일 : ‘17. 1. 15()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온정면과 영덕군 청수면·병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유금마을 버스정류장유금사주능선헬기장칠보산헬기장유금치산사랑 쉼터등운산임도자연휴양림(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칠보산과 등운산은 전형적이 육산(肉山)이다. 하산 길에 바위 몇 개를 만나게는 되지만 그 정도의 바위도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여느 흙산들이 나타내는 일반적인 특징들을 이곳 또한 여과 없이 보여준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대신에 산행이 편하다는 특징 말이다. 아무튼 부드러운 흙길에는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이다.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육산 치고는 조망(眺望)이 뛰어난 편이기 때문이다. 칠보산과 능운산을 잇는 주능선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조망은 어디다 내놔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부산일보에서는 이곳을 일석삼조의 산이라고 칭찬했다.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산행은 물론, 피곤할 경우에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자연휴양림에서 머물 수도 있고, 산행 후에는 대게등 영덕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거기다 요즘은 해돋이 명소로까지 각광을 받고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산행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으로 구분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유금마을 앞 버스정류장(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의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27km 정도를 올라온다. 금곡교차로(영덕군 병곡면 금곡리)에서 빠져나오면 좌측으로 칠보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군도(郡道)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3km 정도 진행하면 우측에 유금사행 도로가 나오고, 이 길을 따라 3km 정도를 들어가면 유금마을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왼편으로 난 도로를 따라 유금사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유금마을의 대문 역할을 하고 있는 다리에 유금사진행방향이 표기되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행방향에 있는 유금사버스정류장과 지역특산물 간이판매장을 이정표 삼아도 될 일이다.



3분쯤 걸었을까 저만큼에 산골 사찰치고는 제법 큰 규모의 유금사(有金寺)가 나타난다. 유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선덕여왕 6(637)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웅전, 종각, 장화부인신령각(莊華夫人神靈閣) 등의 전각들을 갖춘 제법 큰 규모의 절이었으며, 승려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로전·서운루(棲雲樓산왕각(山王閣요사채 등이 있다. 석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은 1973년에 보수하였는데, 이때 천장 속에서 금서(金書)가 발견되어 이 건물이 1627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유금사에는 이 절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주지가 불국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절 앞 용소(龍沼)에서 두 마리 용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고약하게 여겼는데, 스님이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뒤 다시 중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燒失)되었으며, 1627(인조 5)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다른 설화도 있다. 신라 말 경순왕의 첫째 아들 김일(마의태자)을 사랑했던 장화라는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여인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자 이곳에서 신령각을 짓고 마의태자를 위해 밤낮으로 축원하다 죽자 보살들이 장사를 지내고 묘폐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묘폐를 세운 석축이 남아 있다. 다른 한편으론 신라시대 이 마을의 구장자가 금척을 발견, 왕에게 진상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국가급(國家級) 문화재(文化財)가 있다고 해서 유심히 살펴보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석탑(石塔)’으로 알고 있기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절들은 주 법당(法堂)의 앞에다 탑을 배치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은 대웅전의 뒤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레 해소된다. 보물 제674호로 지정된 유금사 삼층석탑(有金寺 三層石塔)’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탑을 보수(補修)하고 있는 중이라서 그 전모를 눈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원래는 대웅전의 앞에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이곳으로 옮겨 놓았단다. 탑의 생김새는 다른 문헌의 글로 대신해본다. 이 탑은 높이 320‘2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낮은 하층기단이 있는데 하대석과 중석은 1개의 돌로 되어 있고, 중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1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다. 그 위에 4매로 된 갑석이 있는데 중앙에 호형과 각형으로 된 2단의 굄이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 각 면에도 우주와 1개의 탱주가 있고, 넓고 얇은 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윗면에는 2단의 각형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각 층의 옥신석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옥신석의 받침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없어진 것을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절의 입구로 되돌아와 왼편 임도(林道)를 따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임도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솔향이 코끝을 건드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로 길이 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 임도가 둘로 나뉜다. 그런데 갈림길에 산삼 체험장 가는 길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칠보산에서 발견된 일곱 가지의 보물 중에 산삼(山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전설(傳說)이 옳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인근 주민들이 산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산양삼(山養蔘)‘이라도 재배하고 있던지 말이다. 아무튼 칠보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의 계곡 사이로 뾰쪽한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칠보산의 정상이 아닐까 싶다. 제법 높아 보이는 게 오늘 산행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솔솔 든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길이 둘로 나뉜다. 임도를 떠난 산길이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왼편 산자락을 살피며 걷다가 선답한 산악회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곳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주변 풍광이 바뀐다. 소나무들의 허리통이 많이 굵어진 것이다. 오래 묵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개체(個體)의 수는 많이 줄었다. 잠시 후 유금치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왼편 방향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그렇다고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할 일은 아니다. 어디로 연결되는지가 정확치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른편 방향이 훨씬 더 또렷한데다가 리본들까지 너절하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냥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자락은 급사면(急斜面)을 이룬다. 들머리와 정상의 표고차가 500m를 훌쩍 넘기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웬만한 1,000m급 고봉(高峰)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왔다갔다 갈지()자로 길을 내놓아 경사(傾斜)의 각도를 확 죽여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둘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길의 폭도 넓혔다. 굳이 속도만 내지 않는다면 큰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을 것이란 얘기이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동해바다가 내다보인다. 겨울 산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일 것이다. 나뭇잎이 지지 않았더라면 그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겨울철 산행이라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가 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45분 만에 능선에 올라선다. 칠보산에서 등운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칠보산600m/ 휴양림3Km/ 유금사1.2Km)를 만난다. 한가운데에다 현재의 위치를 표시해 길 찾기를 한결 편하게 했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 지명까지 표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곧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터지는 것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가 아닐까 싶다.



조망(眺望)은 막힘이 없다. 왼편으로는 백암산과 백수산, 독경산 등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 너머의 산은 아마 일월산일 것이다. 동해 쪽 조망도 시원스럽다. 눈앞에 고래불 해수욕장이 있고, 쪽빛 바다의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구분이 없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는 금방이라도 산기슭까지 밀려올 만큼 바다가 가까워 보인다.




능선에 올라섰다 싶으면 이후부터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진다. 큰 오르내림이 없는 능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저 바닥에 얼어붙은 잔설(殘雪)을 조심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드디어 칠보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영해 산사랑산악회가 설치한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과 케언(cairn, 돌탑)이 있고, 소나무 한 그루가 싱싱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는 동해 쪽으로 조망이 열린다. 눈앞에 고래불해수욕장과 그 너머의 쪽빛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은 풍경이 그림 같지만 조금 전에 헬기장에서 보았던 풍경과 거의 같기에 사진은 생략한다.



칠보산(七寶)이란 지명은 이 산에 일곱 개의 보물이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그러니까 고려 중기 때이다. 이곳을 지나던 중국 지리학자 사두충이 칠보산을 지나는 길에 샘물을 마셔보고는 샘물 맛이 여느 물과 다르니 이 산에는 일곱 가지 귀한 물건이 있다는 말을 남기도 떠났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이 찾아본 결과 과연 돌옷과 더덕, 산삼, 황기, 멧돼지, 구리, 철 등 동식물과 지하자원 일곱 가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금곡리 뒷산 아래에는 지금도 그 샘이 있다고 한다. 공식적인 전설과 달리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구전(口傳)도 있다. 신라시대 성덕왕의 일곱 공주가 이곳에서 출가해 수도하다 모두 신선(神仙)이 된 데서 산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헬기장으로 되돌아와 남쪽 방향에 있는 등운산으로 진행한다. 큰 오르내림이 없는 밋밋한 능선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금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유금치(有金峙)가 나온다고 했는데 갈림길은커녕 고갯마루 비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아니 아까의 유금사삼거리유금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아무튼 '유금(有金)'이란 지명은 금()이 손으로 주울 정도로 많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폐쇄된 금광굴이 있단다. 또한 신라시대에 요 아래 마을의 구장자가 금척을 발견하고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후 이정표(분기점 1.0Km/ 칠보산 1.2Km)119의 구조지점표시목(No 3)이 세워진 펑퍼짐한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다른 이들의 후기를 보면 이 근처에 유금치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검푸른 물빛의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래 저래서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낱말이 생겨났나 보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17분 후에는 팔각의 정자(亭子)가 지어진 사거리(이정표 : 등운산 1.2Km/ 휴양림 1.8Km/ 해돋이전망대 2.0Km/ 칠보산 2.3Km)에 이른다. ‘산사랑 쉼터라 불리는 곳이다. 산사랑 쉼터는 전망대지만 숲에 가려 조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쉼터는 오늘 산행 코스 중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다. 능선을 타고 곧장 직진하면 헬기장을 지나 등운산 정상으로 가게 된다. 이곳 칠보산의 또 다른 명물인 해돋이전망대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왼쪽 길을 잡아 내리막을 내려가면 칠보산자연휴양림으로 가게 된다.




이정표의 하단에 국립칠보산자연휴양림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휴양림은 분명 등운산(騰雲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등운산과 칠보산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다, 칠보산이 더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강한 놈이 하나라도 더 가진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요즘의 현실을 말이다.



쉼터에 세워진 등산안내도를 살펴보다가 등운산 정상으로 향한다.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평범한 산길이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앙상한 모양새들이다. 하지만 겨울을 지난 다음에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다시 잎을 키워 풍만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4분 후에 휴양림삼거리‘(이정표 : 등운산400m/ 휴양림1.8Km/ 칠보산3.3Km)에 이른다.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곳에서 또 다시 나뉘는 모양이다.



자연휴양림에서 세워놓은 이정표 외에 또 다른 이정표도 보인다. 나무판자를 세로로 세워놓았는데 기존의 이정표들보다 훨씬 더 보기가 좋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아까와 다름없는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 없다는 얘기이다. 물론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렇게 6분쯤 걸으면 헬기장이 나타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웃자란 잡초들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터를 온통 차지하고 있다. 그 탓에 조망까지도 꽉 막혀있다.




헬기장을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오르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시원스럽게 펼쳐져야할 동해바다가 숲으로 가려있는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진 빈 가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마저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전망대를 만들어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이왕에 만들었다면 시야를 가로막는 나무 정도는 정리하는 게 옳겠기에 하는 말이다.  





등운산의 정상은 전망대의 바로 옆에 있다. 정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 흔한 정상표지석도 하나 없고 봉우리조차 솟지를 못 했다. '등운산, 해발 767m'라고 적힌 안내판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게 뻔하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이래서 요 아래에 있는 휴양림의 앞에다 등운산 대신에 칠보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




하산을 시작한다. 밋밋한 능선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잠시 길이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능선을 따라 길이 나있을 법도 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휴양림1.72Km/ 등운산0.29Km)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산길이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본적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편은 아니다. 가끔 바위들 사이를 돌아 내려가기도 하지만 내려서는 데는 조금도 부담이 없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산길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는 것이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솔향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가끔가다 바위틈을 막아놓기도 했다. 등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락주의라고 쓰인 경고판도 보인다. 경사가 심한 지역이니 통행에 주의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새로운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길이 있었던 곳으로 들어서보지만 솔가리 등이 어찌나 많이 쌓여있던지 지금은 발을 들여 놓을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소나무 숲이라선지 고사목(枯死木)도 보인다. 썩 뛰어난 자태는 아니지만 잠시의 눈요깃감으론 충분하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휴양림 0.5Km/ 등운산 1.51Km) 말고도 멋지게 생긴 바위 몇 개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해돋이 전망대로 연결된다. 쪽빛의 동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은 물론 고래불해수욕장의 하얀 모래사장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는 곳이다. 하지만 진행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보다 멀기 때문이다. 정 가보고 싶을 경우에는 일단 주차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들머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휴양림에 가까워질수록 소나무의 크기가 굵어진다. 숲 또한 갈수록 깊어지는데, 그에 따라 솔향의 농도(濃度)도 짙어진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많이 섞여있을 것이다.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웰빙(Well-being)산행이라 분류할 수도 있겠다. 아니 요즘의 대세인 힐링(healing)이라 하는 게 더 옳겠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삼거리(이정표 : 휴양림 0.1Km/ 정자 0.2Km/ 등운산 1.81Km)를 만난다. 어디로 가든지 주차장으로 연결되지만 이쯤에서 휴양림으로 내려서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1994년에 문을 열었다는 칠보산휴양림을 만난다. 산림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설로서 천연소나무가 일품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해수욕과 산림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휴양림에는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야영장, 숲속수련장, 체력단련시설, 물놀이장, 등산로, 산책로, 어린이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주변에는 몸에 좋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맘껏 뿜어내는 소나무가 주 수종을 이루고 있고 숲속엔 작지만 시원한 계곡이 어우러져 있다. 이 계곡물을 막아 물놀이장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여름엔 이용객들의 놀이공간으로 인기가 좋다.




산행날머리는 칠보산자연휴양림 주차장

숲 자락 여기저기에 숙박시설이 세워져 있다. 양 갈래로 하늘을 향해 뻗은 거대한 소나무가 숲 속의 집들을 호위하는 모양새이다. 하루 최대 1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이 휴양림은 겨울 비수기라 그런지 한적하기 짝이 없다. 휴양림의 시설들 사이를 지나면 곧이어 주차장이다. 주차장의 끄트머리에는 솟대 몇 개를 꽂은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데크에 오르면 고래불해수욕장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른 아침에는 동해의 해돋이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긴 객실에서도 해돋이를 즐길 수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아무튼 그런 점이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내세우는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11일이면 휴양림에서 새해 해맞이 행사를 실시하고 있단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쉬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된다.



가산(加山, 690.7m)-북두산(北斗山, 687.9m)-삼암봉(三岩峰, 425.7m)

 

산행일 : ‘16. 10. 27()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수륜면·고령군 덕곡면과 경남 합천군 가야면·야로면의 경계

산행코스 : 북두림마을(59번 도로)능선가산정견대솔티재북두산모로현 갈림길삼암봉하림리 새터마을 경로당(산행시간 : 3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러다보니 바위다운 바위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딱 하나 보기는 했다. 그다지 크지도 않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산세(山勢)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조망(眺望) 또한 정견대(正見臺)를 제외하고는 보잘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산은 방치되어 있다. 솔치에서 북두산까지 임도가 개설되어 있지만 정상에 만들어 놓은 헬기장과 연결하는 용도일 따름이지 등산용은 아니다. 정상석과 이정표 또한 일절 없다. 때문에 임도를 제외하고는 산길이 거친데다 희미하기까지 하다. 비록 산이 높지는 않지만 산행을 이어가기다 만만찮다는 얘기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전국의 모든 산들을 모두 다 올라보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북두림마을(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 I.C에서 내려와 33번 국도를 타고 고령방면으로 달리다가 수륜삼거리(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서 우회전하여 59번 국도로 옮겨 들어가면 가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가천분소가 있는 백운리(수륜면)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북두림마을이다. 마을 앞 도로변에 북두림이라는 마을 이름이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참고로 이곳 북두림은 해발이 500m나 된다. 이따가 오르게 될 가산의 높이가 690.7m이니 정상까지는 190m만 더 오르면 된다. 오늘 산행은 공짜나 다름없는 셈이다.




마을표지석에서 50m쯤 떨어진 북두림 버스정류장의 맞은편에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참고로 북두림(北斗林)’은 백운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부락 중의 하나이다. 조선조 영조 때 처음으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북두림(北斗林)’이란 마을 이름은 북쪽에 울창한 숲이 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50m쯤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민가(民家)를 왼편에 끼고 돈다. 그리고 얼마동안은 임도를 따른다. 최근에 정비를 했는지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다.




하지만 5분이 채 안되어 임도는 끝나버린다. 그리고 오솔길로 변하면서 길 찾기가 어려워진다. 전문가가 아니면 찾아가기 힘들 정도로 길의 흔적이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오늘따라 선답자(先踏者)들의 흔적인 리본(ribbon)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데도 말이다.



돌로 쌓아올린 축대(築臺)들이 자주 보인다. 조림을 위한 사방(砂防) 공사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계단식으로 만들어놓은 논이나 밭일 것이고 말이다. 아니 산림복구(山林復舊)가 끝난 채광지역(採鑛地域)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이 부근에 꽤나 많은 고령토(高嶺土) 광산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잡목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좌우로 오가기를 반복하던 산길이 이번에는 오롯이 오른편으로 향한다. 길의 흔적도 생각보다는 또렷한 편이다. 이제야 가령으로 향하는 산길을 찾아낸 모양이다.



하지만 앞서가던 일행들은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왼편으로 방향을 튼 후, 막무가내로 산비탈을 치고 올라버린다. 구태여 가령까지 에둘러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령이란 고갯마루가 주는 의미가 적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길을 만들어가는 산행이 잠시 동안 이어진다. 잡목(雜木)들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는 험난하지 않다.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를 7분쯤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령에서 올라오는 산길을 만난다. 가산은 왼편으로 가야함은 물론이다. 일단 능선에 오르면 길이 고와진다. 길이 또렷할 뿐만 아니라 경사(傾斜)까지도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고갯마루의 높이가 640m나 되니 서둘러서 고도(高度)를 높여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산의 정상과는 고작해야 50m의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걸으면 가산(加山)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이 조금 못 걸렸다.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그저 한쪽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삼각점(가야 315) 하나가 외롭고,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그 뒤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아카시아를 위시한 잡목들이 주인노릇을 대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곳 지자체에서 관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먼저 올라온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를 매달고 계신다. 오늘부터 이 산은 이름표 하나를 더 달게 될 모양이다. 정상을 올랐다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정상은 길이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내려서야만 솔티재에 이를 수가 있다. 하지만 올라온 반대방향, 즉 상각사로 연결되는 듯한 길이 훨씬 더 또렷하게 나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알바를 하고 되돌아온 선두그룹이 무작정 왼편방향의 산비탈을 치고 내려간다. 길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내려가다가 길을 찾아보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얼마간 내려갔을까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산비탈을 따라가며 제대로 된 산길을 찾아나간다.



잠시 후 제대로 된 산길을 만난다. 그리고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얼마동안 걷게 된다.



잠시 후 난데없는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 하나가 눈에 띈다. 삼각점이라면 산봉우리 등의 기준이 될 만한 곳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의아해 하는데 누군가가 도근점(圖根點, supplementary control point)이라고 알려준다. 지형을 측정하기 위한 기준점이 부족할 때 보조용으로 설치하는 기준점이란다. 아무튼 오늘 또 하나의 앎을 배웠다.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不亦說乎(북역열호)’,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상에서 내려선지 10분쯤이면 잘 지어진 2층짜리 정자를 만난다. 정견대(正見臺)라는데, 가야국의 창건신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상아덤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란다. 그 상아덤에서 살았다는 가야산 여신(女神) 정견모주(正見母主)에서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감응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를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곳이 가야 땅이다 보니 가야국의 창건신화에 이름을 따왔나 보다.



정견대는 가야산을 바라보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정자(亭子)에 오르면 가야산의 헌걸찬 암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늘은 비록 구름이 윗부분을 가려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가야산의 빼어난 자태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아니 구름이 가야산의 경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고 볼 수도 있겠다. 기암괴석들이 구름과 어우러지며 자못 현묘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런 걸 보고 자연의 신비로움이라고 일컫는 게 아닐까 싶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깔끔하게 정비된 돌계단을 내려서면 59번 국도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솔치재로 향한다.



길가에 예쁘게 지어진 집이 보여 그 위에다 가야산을 얹어본다. 나름대로 그림이 그려지나 썩 뛰어나지는 못하다. 아직도 내 솜씨는 카메라의 구도조차 잡지를 못하나 보다. 괜히 가야산의 절경까지 숨을 죽여 버리는 걸 보면 말이다.



잠시 후 솔치재에 이른다. 합천의 가야면에서 성주의 수륜면으로 넘어가는 5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백운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되는데, 백운리에 송현마을이 있어 송현 또는 솔티재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경상 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선지 수많은 시설물들이 늘어서 있다.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나 잘 손질된 소공원은 보기에도 좋지만 그 외의 시설물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정비를 하는 게 어떨까 싶다. 하도 많아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도 역시 감이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홍시를 쌓아놓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외에도 손수 수확한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농산물들을 진열해 놓았다.



산행을 이어간다. 들머리는 경상 남·북도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잘 닦인 임도(林道)이다. 아니 차도(車道)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차량통행이 심심치 않는 지 자동차의 바퀴자국이 선명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15분이 조금 못 되었을 게다.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나뉜다. 이를 무시하고 임도를 따르는 게 옳은데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는 오솔길을 가리키고 있다. 명색이 오지(奧地) 산행 전문산악회이니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름 없는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다시 임도를 만난다. 비교적 짧은 구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행하는 게 편하지 만은 않다. 잡목들 때문에 길을 헤쳐 나가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길은 거칠지만 좋은 점도 있다. 어설프긴 하지만 억새들도 만나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괜찮은 단풍과도 조우(遭遇)한다. 이래서 사람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 냈나보다.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임도를 타면 된다. 하지만 앞서 가던 박건석 선생께서는 임도를 벗어나 또 다른 봉우리 위로 오른다. 그리고 봉우리의 이름이 적혀있는 코팅(coating)지를 매달아 놓는다. ‘학발봉으로 높이는 ‘577.4m’이란다. 하지만 지도에는 이 봉우리를 별도로 표기하고 있지 않으니 참조한다. 왼편 아래에 위치한 백운리(성주군 수륜면)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부락 중의 하나가 학발(鶴足)’ 마을인데, 이를 인용해서 봉우리의 이름을 새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학발이란 마을 이름은 뒷산의 모양새가 학()의 발()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가 지은 이름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다.



임도로 되돌아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곁길로 새지 않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예상보다 긴 구간이라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간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사가 거의 없는데다 바닥까지 폭신폭신해서 걷기가 무척 편하다는 점이다. 사색(思索)을 하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렇게 30분 가까이를 걸으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난다. 네모반듯한 착륙장만 만들어져 있을 뿐 다른 어떤 시설도 눈에 띄지 않은 것이 그저 단순한 공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헬기장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없는 걸로 보아 헬기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무슨 행사라도 있을 때 주차장 용도로 쓰인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조금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헬기장과 거리도 너무 가깝고, 그곳에 제단(祭壇)이 설치되어 있기에 그런 추정을 해보았다.



잠시 후에는 두 번째 헬기장에 올라선다. 억새꽃밭 가운데에 자리 잡은 헬기장은 조금 전에 만났던 첫 번째보다는 훨씬 더 격식을 갖추고 있다. 반듯하게 깔아 놓은 보도블럭을 이용해 헬기장의 표식인 ‘H'자까지 반듯하게 써 놓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얼마쯤 떨어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등산객들이 찾지 않는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자체의 무책임이 그 원인일 것이고 말이다. 가산에서 이곳 북두산까지는 1시간 15분이 걸렸다.



뒤따라오던 박선생께서 부르신다. 이곳이 북두산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한쪽 귀퉁이에 설치되어 있는 삼각점(가야 316)을 가리키신다. 나 역시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자 한다. 지도에 정상(687.9m)으로 표기되어 있는 지점보다 이곳의 해발(695,6m)8m나 더 높기 때문이다.




헬기장의 뒤, 그러니까 삼각점이 세워져 있는 반대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그 앞에 제단(祭壇)이 설치되어 있다.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상석(床石)이 제법 의젓하다.



제단의 옆에는 돌로 원탁(圓卓)을 만들어 놓았다. 식탁의 대용으로 만들어 놓았는지는 몰라도 외국 영화에서 보았던 기사(騎士)들이 회합을 하던 원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생김새이다.



원탁의 아래에는 커다란 빗돌이 하나 세워져 있다. ‘희애비(喜哀碑)’란다. 뒷면 가득히 내력을 적어 놓았으나 자세히 읽고 있을 여유가 없어 처삼촌 벌초 하듯이대충 읽고 지나간다. 아니 어려운 한자를 읽어 내리는데 시간을 쏟을 만한 가치를 못 느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아무튼 빗돌에는 이 부근에 있었다는 어전(於田)’이라는 화전민 마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적어 놓았다. 한 때는 마을이 번창(繁昌)하기도 했었으나 정부의 산중독가촌철거명령(山中獨家村撤去命令)’에 의해 우목장(雨牧場)’이 철거되자, 이를 삶의 방편으로 삼고 있던 주민들 또한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까워한 주민들이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했고, 그 계가 만들어진 취지를 빗돌에 적어 놓은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대충대충 읽어본 것이니 내용이 틀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그러운 이해를 바래본다.



임도는 두 번째 헬기장에서 끝난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른다. 경사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10분 만에 세 번째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지도에 북두산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저 잡초와 잡목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곳은 두 번째 헬기장보다 높이가 낮다. 그런데도 이곳을 북두산의 정상으로 표기한 이유를 모르겠다.



함께 도착한 박선생이 코팅지를 매달고 계신다. 이번에는 늘밭봉이다. 조금 전에 지나온 두 번째 헬기장을 북두산이라 지명했으니, 이 봉우리를 달리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도에는 이곳을 북두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북두산은 오늘부로 늘밭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 하나를 더 얻었다. ‘늘밭(於田)’이란 지명은 이 봉우리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야천리(倻川里:합천군 가야면)를 이루고 있는 네 개의 자연부락 중 하나이다. 1979년경 정부의 독가촌(獨家村) 폐촌 정책에 따라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는 정감록(鄭鑑錄)의 비결을 믿고 이주해 온 화전민들이 30여 호나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옛 지명을 되살려 놓은 박선생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의 경계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할 삼암봉은 왼편, 즉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참고로 도의 경계를 따라 1Km남짓 더 걸으면 시루봉이 나온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곳까지 다녀오면 된다. 하지만 난 포기하기로 한다. 기록해 두어야할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볼거리 또한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숲을 만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줄기들이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정상을 지나면서 산길은 사뭇 달라진다. 잡목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길이 희미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쓰러져 있는 나무들에 신경쓰다보면 잡목들에게 싸대기를 맞기 일쑤이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나뭇가지에 눈이 찔리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인다. 오늘 산행에서 두 번째으로 만난 바위이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하도 어렵게 만난 바위이기에 카메라에 담아 봤다. 아니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삼암봉의 바위()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음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마치 급할 것이 없다는 듯한 모양새다. 하긴 산이 낮은데다 날머리까지의 거리까지 길다보니 서두를 이유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25분쯤 걸었을까 능선이 둘로 나뉜다. 이곳이 모로현으로 가는 길과 나뉘는 지점이 아닐까 해서 유심히 살피는데 앞서가던 일행이 아니란다. 갈림길은 한참 전에 이미 나뉘었다는 것이다. 하도 길이 희미하다보니 놓쳤었나 보다. 아무튼 우리가 가야할 능선은 오른편이다.



문득 기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릇 산행이란 오르는 높이만큼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 산행은 분명 200m정도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m만 내려가면 산행이 종료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한참을 내려왔는데도 산 아래는 저만큼 아래에서 아직까지 가물가물하고 있는 것이다. 끝내는 지도를 꺼내 보고야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들머리가 날머리보다 300m나 더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산행이 되는 셈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50분 가까이 되면 삼암봉에 올라서게 된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도 물론 없다. 그저 감마로드라는 모임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과 삼각점(가야 459)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삼암봉(三岩峰)이라면 3개의 바위라는 뜻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바위를 닮은 것조차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산행 후에 검색을 해봐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삼암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거기다 길의 흔적까지 또렷하지 않으니 주의해서 내려서야 한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물론 길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짧고 편하게 산행을 마치고 싶은 선두대장의 의지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새터마을 경로당(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산비탈을 내려서면 새로 개간한 듯 보이는 경작지가 나타나고, 미안한 마음으로 울타리를 넘으면 저만큼에 새터마을(하림리)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새터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기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3시간 20분이 걸렸다.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거의 없으니 온전히 걷는데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화산(花山, 280.5m)-식산(息山, 503m)-백원산(百元山/국사봉, 524.3m)


산행일 : ‘16. 10. 20()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헌신동·서곡동·인평동과 낙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성동리 성골고개화산422m식산배우이고개삼거리백원산 왕복서곡2서곡(구두실) 노인정(산행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하나 같이 육산(肉山)이다. 그것도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순한 육산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산세(山勢)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거기다 바위 몇 개가 튀어나온 식산의 정상어림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산길은 원시의 숲 그 자체이다. 관할 지자체에서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온통 산초나무와 명감나무, 아카시아 등 가시나무들이 점령해 버렸다. 가시에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 싸대기를 맞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만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지맥(支脈)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시간을 내면서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찾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서곡2동에서 출발해서 식산과 백원산을 오른 후에 다시 서곡2동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권한다. 이들 산의 특징이랄 수 있는 가시나무들을 덜 만날 수 있는 데다 오르내리는 중에 동해사와 도림사 등 역사가 있는 절간도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산행들머리는 성골고개에 있는 성동리 버스정류장’(상주시 낙동면 성동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I.C에서 내려온다.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하여 고속도로와 25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면 곧이어 성동리 버스정류장아 나온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지도에는 이곳을 성골고개로 표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개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니 주의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달리던 방향으로 40m 정도 더 걸으면 성동리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진입로의 반대편으로 난 농로(農路)를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25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는 굴다리가 보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도로의 왼편 언덕으로 연결된다. 옳은 길은 왼편 방향이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무인산불감시탑이 보인다면 당신은 지금 옳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20m쯤 더 걸었을까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이번에는 오른편이 옳다. 길가는 온통 감나무 천지, 때문에 남의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해서 혹자는 망설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서슴지 말고 들어서고 볼 일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진행방향에 수로(水路)로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이 보이면 옳게 들어온 셈이다. 곧이어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는 또 다른 굴다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아래의 굴다리를 지나서도 포장길은 계속된다. 굴다리를 통과하고 나서 1~2분쯤 지났을까 왼편으로 난 오솔길이 하나 보인다. 일단은 올라서고 본다. 곧바로 잘 관리된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 길은 끝나버린다. 그러나 오회장님에게 그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막무가내로 잡목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 진군(進軍)이다.’ 회장님의 뒷모습은 보무(步武)가 당당하기만 하다. 길을 잘못 들어서고 있는데도 말이다.



묘역을 지나고 나면 길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고행(苦行)이 시작된다. 아니 전투라고 보는 게 더 옳겠다. 길은 애초부터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주변의 나무들에 부대끼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마주치는 나무들이 문제다. 주종은 산초나무, 그리고 명감나무도 심심찮게 만난다. 그러다가 끝내는 아카시아까지 마중을 나온다. 이 나무들의 특징은 모두가 가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찔리거나 할퀴는 것 정도는 감수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참는 것에도 한도는 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싸대기는 못 참겠기에 하는 말이다. 발아래 명감나무 넝쿨에 신경을 쓰다가 자칫 위라도 놓칠 경우에는 부지불식간에 산초나무 가지에 뺨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오는 육두문자까지야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헤매기를 15분여 만에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산길을 만난다. 첫 번째로 오르게 되는 봉우리인 212m봉의 바로 아래서이다. 그렇다고 길이 반들반들하게 나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등산객들이 오가며 만들어 놓은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길이 오른편에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들머리를 잘못 들어섰던 셈이 된다. 임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제대로 된 들머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말이다.



봉우리를 내려서는데 난데없이 묘지(墓地)가 나타난다. 묘역(墓域)은 손질이 잘 되어 있다. 이를 자축(自祝)이라도 하려는 양 나뭇가지에다 빈 페트병들을 꽂은 간이 조형물까지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대단한 후손들이다. 비록 높지는 않지만 이렇게 험한 곳에 묘를 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관리를 잘 해놓을 것을 보면 조상들에 대한 효심(孝心) 또한 대단하다고 봐야겠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다가가보니 산초나무 열매를 따고 있다. 찔리고 할큄을 당해 보기조차 싫겠건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그저 가족의 식탁에 오를 건강식의 재료로만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저런 게 바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좋지 않은 상황까지도 자신에 맞게 바꾸어 버리는 마음자세 말이다. 무릇 행복이란 자신의 만족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겠는가.




산길을 만났다고 해서 길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산초나무와 명감나무가 갈 길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을 경우엔 차라리 즐기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심장전문의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et)이 그의 저서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서 주장한 내용일 것이다. 이를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집사람을 도와 산초열매를 따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그렇게 30분 남짓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급경사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난다. 침목(枕木) 계단이 놓여 있는 것이다. 길을 찾기조차 힘든 곳에서 만난 시설이다 보니 낯설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상주시(119)’에서 구호지점 표시목(B-16)’까지 설치해 놓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난 모양이다.



몇 걸음만 더 떼면 잡목(雜木)에 둘러싸인 화산의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없다. 그저 안내판까지 거느린 삼각점(상주 426)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손질을 잘 해놓은 등산로에 비하면 의외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정상이기에 머무를 필요 없이 산행을 이어간다. 침목으로 내리막길의 계단을 놓는 등 산길의 정비는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길가는 온통 소나무들 천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진한 솔향이 묻어난다. 모처럼 산행다운 산행을 하게 되는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이정표(화산리 등산로3.8Km/ 신상리2.3Km)를 만난다. 지도에 나와 있는 400m봉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정표에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아니 큰 문제일 수도 있겠다. 삼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화산리로 내려가는 방향만 표시되어 있을 뿐 식산으로 가는 방향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화산 방향은 신상리로 표기되어 있다. 신상리는 화산리의 바로 옆 동네로 두 동네 모두 낙동면에 소재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이정표는 낙동면에서 세웠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식산이나 화산이 모두 상주시 관내에 소재하고 있는데도, 관리를 꼭 면() 단위로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최소단위의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조차 지역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큰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이정표에 나타나지 않는 방향이라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오른편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이정표가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선다는 것만 기억해 놓는다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오솔길로 들어서니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소나무가 울창했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주변의 나무들이 온통 활엽수로 바뀐 것이다. 덕분에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계절은 이미 단풍철로 접어든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험악해져 버린다. 길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흐릿하기만 한데, 곳곳에는 산초나무와 명감나무까지 도사리고 있다. 거기다 아카시아나무까지 가세를 하니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산행은 거의 전투라 해도 과언 아닐 것 같다. 넘거나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기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옛날 신병훈련소에서 받았던 유격훈련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간혹 나무 등걸에 부딪치게 되는 정강이는 조교에게 얻어 차이는 구둣발이고 말이다.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지도상의 422m봉쯤 될 게다. 나무기둥에 기양지맥이라고 쓰인 코팅(coating)지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걷고 있는 이 길은 기양지맥(岐陽枝脈)이었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면 기양갑장단맥(岐陽甲帳短脈)이다. 기양지맥이 백두대간 국수봉 남쪽 청운봉에서 동남으로 분기(分岐)하여 흐르다가 백운산과 기양산을 지나 상주시 청리면·낙동면과 구미시 무을면의 삼면봉(三面峰)인 수양산(修善山, 683.6m)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것이 기양갑장단맥이다. 이 단맥은 상주시 청리면과 낙동면의 경계를 따라 912번지방도로의 돌티로 내려선다. 이어서 갑장산(甲帳山)과 문필봉, 상산, 백원산, 식산, 병풍산 등을 일구고 난 후에 상주시 병성동 병성천이 낙동강을 만나 낙동강물이 되는 곳에서 그 숨을 다한다. 전체 길이는 약 19.5km가 된다. 아무튼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휜다.



전부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야생화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의 전령이랄 수 있는 쑥부쟁이는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것도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 오지(奧地)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식산이 가까워지면서 산길은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니 아까부터 고도(高度)를 높여오기는 했다. 이 근처에서 조금 더 가파르게 변했다고 보는 게 옳겠다.



기양지맥 코팅지를 보았던 지점에서부터 15분 남짓 오르면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바위이다. 그것도 그냥 바위가 아니라 무척 큰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있다. 요즘 부쩍 손맛을 즐기고 싶어 하는 집사람이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냉큼 바위 위로 올라서고 본다. 하긴 바위다운 바위 하나 보기 힘들 정도의 전형적인 육산(肉山)에서 모처럼, 그것도 저렇게 거대한 바위를 보았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바위 위에 올라서면 뛰어난 조망이 펼쳐진다. 우선 발아래에 상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노음산일 것이다. 또한 지나온 방향으로는 병풍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잠시 후 바닥에 바위들이 널려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식산의 정상인데 화산에서 한 시간이 걸렸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화산에서 보았던 삼각점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높이가 200m 후반 대에 불과한 화산만큼도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대신 이곳에는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정상표지판이 아니었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게 지나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만 보고 걸을 경우 정상표지판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진행방향의 반대편을 향해 매달려 있기 때문에 자칫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를 놓치고 지나친 덕분에 여성 일행의 사진을 빌려서 써야 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주변의 나무들이 시야(視野)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주시가지와 그 뒤편의 노음산을 바라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또한 지나온 화산과 그 뒤의 병풍산, 그리고 조금 후에 오르게 될 백원산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백원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능선 안부에 있는 배우이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상주시 서곡동에서 낙동면 화산리로 연결되는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에 세워진 이정표에 한양옛길이라는 지명(地名)이 보인다. ‘한양옛길이란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와 장사꾼 등이 왕래하던 옛길을 말한다. 신작로(新作路)가 뚫리면서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復原)해 놓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2012년쯤인가 한양옛길 등산로 개설사업에 관한 기사를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복원된 한양옛길 주변에 도곡서당과 행상방구(상여 모양으로 생긴 바위), 범굴, 징담(澄潭) 등의 문화유적과 명승들이 산재돼 있다는 얘기를 함께 전했었을 것이다.



배우이고개를 지난 산길이 오름짓을 시작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오르면 지도에 485m봉으로 표기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45도 정도 방향을 튼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얘기이다. 우리가 가야할 오른편 능선뿐만 아니라 왼편의 능선까지도 또렷하게 뻗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485m봉을 지난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렇게 안부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한 번 오름짓을 하고나면 삼거리이다. 485봉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집사람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 능선을 따를 경우 인평동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하산하려고 하는 도림사도 오른편 능선을 타야만이 이를 수가 있다. 하지만 백원산 정상은 왼편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만 한다.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8분 정도 치고 오르면 드디어 백원산 정상이다. 웃자란 잡초(雜草)와 잡목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제법 너른 것으로 보아 지금은 비록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원래는 헬기장으로 조성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백원산 정상도 텅 비어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식산과 마찬가지로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기는 했다. 비록 기둥만 남아 있어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참고로 국사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백원산은 두문동 72의 한 사람인 한철충(韓哲沖 : 1321~?)과 인연이 있는 산이다. 1353(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처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역임한 뒤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던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조선 왕조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한 후 그가 은신했던 곳이 바로 이곳 백원산이라는 것이다. 태조가 아들인 한렴에게 상주목사를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자 고령군 석절촌(石節村)으로 종적을 감추었고, 태종 때에 다시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며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조동(釣洞)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기양갑장단맥(岐陽甲帳短脈)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은 또렷하다. 하지만 이쯤해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하산지점인 도림사로 가려면 조금 전에 만났던 삼거리로 되돌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되돌아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곧장 진행하면 천연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된 구상화강암(球狀花崗岩, orbicular granite)’을 만날 수야 있겠지만 산악회를 따라 나온 이상 개인행동은 금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화강암에 속한다는 구상화강암은 모양이 거북이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100여 곳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며, 특히 이곳의 구상화강암은 구조가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일부는 현재 상주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왼편 능선을 따른다. 이 길도 역시 사납기는 매한가지이다. 우거진 잡목(雜木)들이 산길을 먹어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내려오면 철망(鐵網)으로 된 울타리가 나온다. 과일나무로 보이는 묘목들이 심어져 있는 걸로 보아 개인 소유의 농원(農園)인 모양이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사면(斜面)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이쯤해서 길은 사라져 버린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회장님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찾아가며 내려갈 뿐이다. 그것마저도 눈에 띄지 않을 경우엔 대충 눈짐작으로 방향을 잡아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헤매고 나면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農路)에 내려서게 된다.



농로를 따라 얼마간 내려서니 삼거리가 나오면서 도림사(道林寺)’의 이정표가 보인다. 그런데 이곳에서 1Km나 떨어져 있단다. 그렇다면 길을 잘못 내려왔다는 얘기가 된다. 원래는 도림사로 하산하도록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산 길 중간 어디쯤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길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도림사까지 왕복 2Km의 거리를 다녀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려시대에 창건(創建)되었다는 도림사는 들러볼 수 없었다. 도림사가 자랑하는 항아리들도 구경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곳 상주의 특산물인 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장류(醬類 : 고추장, 된장, 간장)들이 풍기는 구수한 냄새를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거리에는 아까 배우이재에서 만났던 한양옛길의 이정표도 보인다. 이번에는 아예 안내도까지 세워 놓았다. 옛날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이던 한양옛길은 당시만 해도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면서 새로 복원한 사연을 함께 적어 놓았다. 고려(高麗)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읊었다는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싯귀(詩句)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무심코 길을 걷고 있는데 동네주민께서 불러 세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서곡2동 경로당의 위치를 물어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로당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야만 한단다. 그의 말대로 했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하산지점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해서 하산지점을 구두실노인정으로 변경했단다. 오회장님께서 방향표시지를 길가에 깔아두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하는 싯귀(詩句)가 있다. 그분이 그냥 지나치셨더라면 제대로 진행이 되었을 텐데, 친절이 병이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결코 억울하지는 않다. 시골이 아니면 그 어디서 이런 인심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우린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에야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서 반가운 이정표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동네가 자랑하는 두 곳의 명소인 동해사(東海寺)와 도림사(道林寺)가 나타나있는 이정표이다. 그렇다면 식산과 백원산의 산행코스는 이곳 서곡리에서 시작해서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원점회귀(原點回歸) 산행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길가에는 상주 곶감평가라고 적힌 빗돌도 보인다. 뒤에는 가건물이 들어서 있다. 곶감을 매달은 줄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걸로 보아 곶감 건조장인 모양이다. 그리고 빗돌의 뒤에 롯데백화점 곶감평가라는 입간판이 보이는 건 이곳이 롯데백화점에서 관리하는 시설이라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상주가 곶감의 고장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의 특산물에는 눈앞에 보는 저 곶감 외에도 쌀과 누에가 더 있으니 참조한다.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노거수(老巨樹)를 만난다. 비록 보호수로 지정은 되어있지 않지만 수백 년은 묵었지 않나 싶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나무 아래에다 쉼터까지 정갈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행날머리는 서곡(구두실)노인정

동네 안길을 빠져나오면 저만큼에 서곡노인정 건물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은 시간과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50분 정도가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 고을에는 명소가 제법 많은 편이다. 들러볼만한 사찰로는 1398(태조 7)에 창건된 동해사(東海寺)와 위에서 거론했던 도림사가 있고, 1551(명종 6)에 건립된 도곡서당(道谷書堂)’1900년경에 건립된 조효치(趙孝治) 고택(古宅)’ 등도 한번쯤을 들러볼만 하다. 그보다 더 눈에 확 띄었던 건 곶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롯데백화점의 시설 외에도 곶감이 연상되는 풍경이 심심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린 빈손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감말랭이의 가격은 12만원, 가격이 적당한 것 같아 한 봉지 사들고 왔다.



마을회관 앞에 예쁜 벽화(壁畵)가 눈길을 끈다. 도림사의 세 스님과 흥인이가 KBS-TV의 인간극장 코너에 소개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이로 보아 도림사에서 하고 있는 장류사업에 얽힌 사연들이 꽤나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누군가의 사진에서 보니 도림사 입구에 이라고 적힌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있었다. 절의 마스코트가 ()’이라면 거기에 스며든 사연 또한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하긴 SBS'내 마음의 크레파스'KBS'한국인의 밥상' 등에도 소개가 되었다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천마산(天馬山, 385.7m) - 자개봉(紫蓋峰, 858.7m)

 

산행일 : ‘16. 8. 25()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과 단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옥대리(931번 도로)천마산왕복버스로 이동소천5467자개봉서남능선좌석교(산행시간 : 3시간2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했다는 산이 바로 소백산이다.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면서 말이다. 현인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마는 넉넉하게 생긴 소백산의 산세(山勢)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개봉은 그런 소백산의 한 줄기이다. 그래선지 소백산의 기풍(氣風)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육산(肉山)인 것이다. 때문에 산은 흙산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별한 볼거리가 일절 없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헬기장으로 닦아 놓은 자개봉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지맥(支脈)을 답사하려는 사람들이나, 하나라도 더 많은 봉우리를 오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없는 시간을 쪼개어가면서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는 산일 것 같다. 다만 폭신폭신한 흙길로 이루어진 산길이 걷기에 무척 편하고, 울창한 숲으로 인해 쾌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산행들머리는 금대마을 입구(영주시 단산면 옥대리)

영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931번 지방도를 타고 단산면소재지인 옥대리까지 들어온다. 이때 풍기읍 시가지를 지나게 되니 참조한다. 옥대리에서 부석면 방향으로 1Km쯤 더 들어가는 지점이 산행들머리이다. 하지만 기점을 삼을 만한 지형지물이 눈에 띄지 않아 길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저 50m쯤 못 미치는 지점에 금대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하나 왼편으로 나뉘고 있다는 게 특이사항일 따름이다.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 포장 농로(農路)를 따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햇빛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어 여름철에 이용하기에는 최악의 코스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늘 같이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에는 말이다.



주변은 천지가 과수원이다. 사과, 자두, 포도, 오미자 등 이건 숫제 종합세트이다. 영주 하면 그저 사과만 생각했었는데,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요즘 경제분야 뉴스들을 보면 다변화(多邊化)’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과수업(果樹業)에 까지도 전이(轉移)가 되었나 보다. 아무튼 이곳의 기후가 그 과일들의 성장발육에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5분쯤 지났을까 과수원 지역이 끝나면서 농로는 비포장 임도로 바뀐다. 그리고 2~3분 후에는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이 없기 때문에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 물기 없는 작은 개울을 가로지르도록 만들어 놓은 통나무다리를 참조하면 되니까 말이다. 가늘은 통나무 몇 개를 엮어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솔길의 들머리를 놓쳤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고갯마루에서 왼편으로 진행해도 정상에 오를 수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오솔길의 사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은 탓인지 잡목들이 산길까지 비집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오솔길로 접어든지 10분쯤 지나면 천마산 정상이다. 구릉(丘陵) 형태의 정상 한가운데에는 묘()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무인산불감시카메라에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이곳이 산봉우리의 꼭지점임을 알려주는 삼각점(영주302)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영주에서 말 마()자를 쓰는 산은 이곳 천마산(天馬山) 외에도 대마산(大馬山. 372.9m)이 있다. 두 산은 모두 소백산 형제봉에서 갈려 나와 동남으로 뻗은 자개지맥(紫蓋枝脈) 상에 있는 산들이다. 산행이 조금은 여유로웠나보다. 산의 이름과 말()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가 궁금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대마산 근처에 있는 과현(현재의 진우)’ 고갯마루에 대마산목장이라는 말 목장(牧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후세에 이곳에 말목장이 생길 것을 미리 예언한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가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옛날 이 부근에 말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데 무게를 두고 싶다. 삼국사기(三國史記)소지왕 11(489) 9월에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10월에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과현은 영주시 상망동에서 진우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과현 고갯마루 아래에는 술골(戌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술병(戌兵, 지키어 막는 병사)들의 주둔지(駐屯地)라는 뜻을 지닌 마을이다. 과현에 고구려 군사가 주둔했다면 그 후방에는 말을 관리하는 마사(馬舍)나 조련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근처의 산 이름에서 마()자를 유추해 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을 거쳐 국망봉에 이르는 소백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산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일행들은 너 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갔지만 우리 부부만이 이 코스를 이용해봤다. 마침 통나무계단까지 놓여 있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정상에서 보았던 소백산 방향의 능선이 조망된다. 그 아래에 있는 부석저수지도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조망은 잠시 뒤 다시 한 번 펼쳐진다.



두 번째 조망을 즐기자마자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아까 올라올 때 이용했던 임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한다. 하지만 길이 또렷하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말았다. 그리고 10분 동안이나 악전고투를 치러야만 했다. 능선은 온통 명감나무와 아카시아나무 등 가시나무 천지, 그중에서도 우릴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산초나무였다. 아무튼 우린 가시에 찔리거나 긁히는 것은 물론 싸대기까지 얻어맞고 난 뒤에야 겨우 아까의 고갯마루로 되돌아 나올 수가 있었다.



두 번째로 오르게 될 자개봉의 산행은 소천5리 조금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근처에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듭니다.’라고 적힌 안내판을 문패처럼 내걸고 있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한 채 보이니 참조한다. 천마산의 하산지점에서 이곳까지는 산악회의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지맥(支脈)을 답사하는 사람들이라면 걸어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들이라면 일부러 고생을 사가면서까지 오뉴월 염천(炎天)의 뙤약볕 아래에서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왼편의 사문로 135번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부석저수지로 연결되는 간이도로이다. 도로 오른편의 너른 들녘은 온통 과수원이다. 아까 천마산 입구는 벼가 심어진 논도 많이 보였지만, 이곳은 오로지 과수원뿐이다. 눈이 닿는 곳이 전부 사과밭인 것이다. 영주의 사과생산량이 전국 최고라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널따란 들녘은 온통 사과밭 천지이다. 누군가는 사과밭 길을 일컬어 카멜레온(chameleon) 이라고도 했다. 봄이면 예쁜 꽃으로 치장된 하얀 길이지만 여름철엔 녹음 짙은 녹색 길로 변하고, 가을이 되면 빨간 사과 길로 바뀌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가을의 문턱인 오늘의 색깔은 과연 뭘까? 짙은 녹음 속에서도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하나 둘 보이고 있다. 철모르는 무더위가 제아무리 기승부려도 계절까지는 속일 수 없었나 보다. 참고로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한 영주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곳이란다.



5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소천5리 마을회관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삼거리의 코너에 이정표(양지마을 1.3Km/ 사그레이 0.3Km)가 하나 세워져 있다. 상단에 문화생태탐방로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영주판 둘레길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둘레길의 이름이 소백산 자락길이란다. 그리고 그 둘레길의 11구간이 이곳을 지나가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 아래에 있는 소천5리의 옛 이름이 사그레이였던 모양이다.



2분 정도 더 걸으면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양지마을로 연결되는 자락길일 것이다. 하지만 산길은 갈림길에서 부석저수지 방향으로 50m쯤 더 들어간 곳에서 열린다.  아무튼 ()영주문화연구회에서 만들었다는 이 둘레길의 정확한 명칭은 自樂이다. ‘스스로 즐기며 걷는 길이라는 의미란다.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스로 하는 행위다. 그리고 즐거움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다. 길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사색과 즐거움이 교차하기도 한다. 언제 한번쯤 짬을 내어 소백산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 들머리를 찾는 일은 쉽지가 않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더욱 난감할 따름이다. 산자락이 온통 칡넝쿨로 뒤엉켜 버리는 탓에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저 자락길을 갈려 보내자마자 만나게 되는 산자락을 치고 오른다고 생각하고 들어서는 수밖에 없다. 이때 두어 번의 차단용 그물망을 만나게 되지만 이를 무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잠시 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묘()를 만난다. 조금 전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던 사그레이마을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사그레이사그랭이라고도 부르는데 한자로는 사문(沙文)이라고 쓰며, 모래밭에 글쟁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옛날 학문이 높은 선비 김희소(金熙紹)가 경치가 좋은 산천을 찾아다니다 이곳에 왔다. 그는 이 동네에 있는 폭포에서 글을 읽고 폭포로 이루어진 모래밭에 글을 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글쟁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사글쟁이가 사그랭이를 거쳐 사그레이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희소라는 선비는 실존 인물임을 참조한다. ‘의성 김씨로 영남지방에 살던 남인계 문인으로 1874년에 목판본으로 발행된 문천집(文泉集)’이라는 문집(文集)을 남겼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다고 한다.



묘역(墓域) 위에는 임도 같은 길이 나있다. 묘역을 관리하려고 닦아 놓은 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길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곧장 능선을 치고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거기다 흔적까지도 그다지 또렷하지가 않다. 우리야 산악회 회장님이 깔아놓은 진행방향 표시지만 보고 오르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길 찾기에 만만찮게 애를 먹겠다.



힘겨운 싸움 끝에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12분 만이다. 이어서 잠시 완만해지는가 싶던 산길은 잠시를 못 참고 또 다시 가팔라져 버린다.



그리고 11분이 더 흐른 후에는 또 다른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왼편으로 길 하나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467m봉이 아닐까 싶다. 첨부된 지도를 보면 467m봉 근처에서 자개지맥(紫蓋枝脈)과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개지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 고치령 동남쪽 약 1.1km 떨어진 959m봉 직전에서 분기해 자개봉(紫蓋峰/858.7m)과 천마산(天馬山/386m), 대마산(大馬山/372.9m) 등을 지나 서천과 내성천이 합류하는 무섬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가 대략 47km 쯤 되는 산줄기를 말한다. 이제부터는 자개지맥을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부터는 산길은 단산면과 부석면을 양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두 면의 경계를 따라 나있다는 얘기이다.



지맥을 만나면서 산길은 고와진다. 길이 넓어진데다가 경사까지 완만해진다. 그런데 오른편 길가에 통제구역, 입산금지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그것도 20m 정도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히도 매달려 있다. 사면(斜面)에 잣나무와 소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송이버섯 채취지역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잠시 후 움막이 보인다. 그런데 평소에 보아오던 송이버섯 움막이 아니다.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철에는 사람이 상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송이버섯보다는 산양삼 등 희귀 약재를 기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능선은 가파른 오름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가끔은 봉우리를 만나기도 하지만 내림구간이 극히 짧은데다 완만한 탓에 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힘이 들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지루하고 힘든 힘겨룸 끝에 두 번째 움막에 도착한다. 첫 번째 움막에서 26분 만이다. 이번의 움막은 이층으로 되어 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라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움막을 지나면서 산길의 가파름은 많이 누그러진다.



그리고 9분 후에는 세 번째 움막을 만나게 된다. 움막의 생김새는 가장 초라하지만 앞에 의자까지 만들어 놓은 걸로 모아 이곳이 가장 주된 초소(main sentry post)가 아닐까 싶다.



세 번째 움막에서 6~7분쯤 더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가 없어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그저 정상 조금 못미처에 있는 묵묘()’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왼편은 단산저수지 방향으로 연결되는 지맥 길이다. 오늘은 하산지점이 조재기마을이니 정상을 둘러본 후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정상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의 능선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잠시 후 자개봉 정상에 올라선다. 소천리 삼거리를 출발한지 1시간 30분 만이다. 널따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번호를 식별할 수 없는 삼각점 하나만이 외로울 뿐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한쪽(남쪽) 귀퉁이의 나무기둥에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들 몇 개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자개산은 단산지옆의 큰 산이 한밤중인 자시(子時)에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자개봉 너머에는 도화동(桃花洞)이 있다는 얘기도 구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요 아래에 있는 단산저수지 주변 마을에는 선비의 효성에 탄복해 천도복숭아를 내렸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상향(理想鄕)을 꿈꾸던 민초(民草)들의 바램이 물씬 풍겨나는 전설이 아닐까 싶다. 꼭 전설이 아니더라도 그 천도를 얻었다는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석문(石門)을 한번쯤 찾아보고 싶다. 이 자개봉 어딘가에 있다니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정상을 둘러싼 잡목(雜木)들 때문에 아랫도리가 잘려나긴 했지만 왼편에는 백두대간이,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국망봉이 시원스럽게 내다보인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봉우리 앞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무더위로 인해 체력이 고갈되어가는 마당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산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고집만 내세울게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줄 아는 지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과정이나 결과가 모두 옳아야 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뭔가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산행이 계속된다. 그만큼 편한 산길이 이어진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노송(老松) 한 그루를 발견한다. 커다란 소나무가 무에 그리 색다를까 만은 오늘 만은 예외이다. 하도 오래 묵은 나무들이 귀하다보니 저 정도만으로도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능선의 좌우(左右)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능선을 기준으로 왼편 사면(斜面)이 온통 소나무들의 독차지가 되어 있는데 반해 오른편은 참나무들 세상이다. 마치 좌우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념(理念)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그 경계를 넘어선 놈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까짓것 그냥 스파이(spy) 정도로 쳐두자. 그것도 아니라면 청개구리파라고 제켜놓던지, 어디나 성질 못된 놈들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30분 만에 630m봉에 올라선다. 그런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뭔가가 눈에 띈다. 이곳이 630m봉임을 알려주는 정상표시 코팅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도 조재기봉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서 말이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하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조금 전에 붙여 놓고 가신 모양이다. 문헌(文獻)은 물론 구전(口傳)에서도 찾아지지 않는 이름들이라 바람직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오늘부로 이 봉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하지만 암릉으로 부르기에는 난감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눈에 담아둘 만큼 잘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바위들 몇 개가 능선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 산행 중에 유일하게 만난 바위이다 보니 이 또한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훌륭하다 할 것이다.



산길은 대체로 가파른 편이다. 하지만 내려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하나 부담스러운 것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오다 보니 거의 맨땅 수준으로 굳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폭신폭신한 낙엽의 느낌까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저 양탄자 위를 걷는다는 느낌으로 서서히 내려서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고도(高度)가 낮아지면서 주변의 나무들이 식생(植生)에 변화를 준다. 자연적으로 자라난 참나무들이 주류를 이루던 숲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인위적(人爲的)으로 식재한 숲으로 변하는 것이다. 잣나무 숲이 나타나는가 하면 뒤이어 리기다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그런가 하면 낙엽송(일본이깔나무)들이 나도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630m봉을 내려선지 25분쯤 되면 주변이 깔끔하게 벌초(伐草)된 등산로를 만난다.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큼 아래에 자그마한 산촌마을이 나타난다. 조재기마을에 이른 것이다.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공작새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마을에 내려오니 잔일을 하고 계시던 노인장께서 어디서 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신다. 산골마을에 살다보니 어쩌다 보이는 나그네가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몇 마디 한담(閑談)을 주고받다 돌아서려는데 낯선 경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양송이 양여구역이니 입산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가을에 이곳으로 오르내릴 때에는 눈총깨나 받겠다. 아니 아예 통행 자체를 막아버릴 지도 모르겠다.



날머리인 도로까지는 마을 진입로를 따른다. 길과 함께 개울이 나란히 나있으니 산행 중에 흘린 땀이라도 씻을 요량이라면 개울로 내려설 일이다. 풍족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물속에 들어앉아도 될 만큼의 양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가뭄에도 이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다면, 평상시에는 요란스러운 물소리까지 만들어가며 흐를 게 뻔하다. 그렇다. 이곳은 소백산 줄기가 분명하다.



이곳도 역시 과수원 천지다. 오른편은 사과, 그리고 왼편은 포도이다. 그런데 그 종자가 머루포도란다. 어린 시절에 먹던 새콤달콤한 맛이 생각나 냉큼 한 박스를 사고 본다. 4들이 한 박스에 3만원이라니 가격도 괜찮은 편이다.



산행날머리는 좌석교()

마을에서 5분쯤 내려오면 단산면소재지인 옥대리에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좌석로로 연결되는 군도(郡道 : 영단로)에 내려서게 된다. 도로의 아래는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축조된 단산저수지이다. 아니 지금은 홍수 조절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니 다목적 댐(dam)인 셈이다. 그리고 아까 조재기마을 앞으로 흐르던 개울이 단산저수지로 들어가 직전에 그 물길을 가로 건널 수 있도록 놓은 다리가 좌석교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과 목욕을 위해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다리를 건너 조금만 더 올라가면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앉은 바위마을이라는 뜻의 좌석리가 나온다. 앞서 얘기했던 소백산 자락길11자락 마지막 마을이다. 좌석리 뒤로 넘어가는 산길은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기 위해 영월로 오가던 길이다. 참고로 소백산 자락길은 모두 12자락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26개의 소문화권으로 구분하면서 그 특성에 따라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 등의 별칭(別稱)들을 붙였다. 소수서원에서 출발한 자락길은 충북 단양군을 지나고 봉화군 오전약수탕관광지를 거쳐 10자락길 부터는 다시 영주로 이어지는데, 그 길이는 대략 360리길, 158km이다. 이 길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생태관광부문에서 한국 최고의 관광지인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유학산(遊鶴山, 839m)

 

산행일 : ‘16. 8. 13()

소재지 : 경북 칠곡군 가산면과 석적읍의 경계

산행코스 : 팥재도봉사유학산 정상헬기장신선대837m793m674m철탑다부동전적기념관(산행시간 : 3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자 모양으로 생긴 유학산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하지만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등성이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남쪽으로 높은 바위벼랑을 이룬 곳이 많다. 때문에 멋진 기암괴석과 뛰어난 전망대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을 눈요기 삼아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등산로 또한 잘 정비되어 있다. ‘6.25 격전지 순례 탐사로로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두었고, 어려운 곳에는 쇠사다리도 설치했다. 물론 줄도 매어져 있다. 다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시설물들이 눈에 띈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전쟁 당시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교두보(橋頭堡)이자 대구를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근원이 될 수 있었다. 산행 날머리에 그때의 승리를 기리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팥재에서 이곳까지의 구간은 ‘6·25전쟁 격전지 순례 답사로에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가족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자녀들에게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어떠한 희생이 따랐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팥재(경북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를 타고 대구방면으로 달리다가 다부원앞교차로(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서 79번 지방도로 옮겨 왜관방면으로 향한다. 잠시 후 학산1마을회관 앞에서 우회전하여 석적읍으로 넘어가는 길(유학로)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팥재 고갯마루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국도를 타는 게 싫은 사람들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다부 I.C까지 와서 곧장 79번 지방도를 타거나 경부고속도로 남구미 I.C에서 내려와 석적읍(칠곡군)을 통과한 후 유학로(軍道)를 타고 팥재까지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실제로 청마산악회의 버스는 맨 마지막 방법을 이용했다.




팥재 고갯마루에는 유학산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널따란 광장(廣場)의 한켠에는 축제(祝祭) 때나 사용할 법한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유학산의 비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닐까 싶다.



칠곡군 관광안내도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도봉사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50m쯤 더 들어가면 유학산 6.25격전지 순례 탐사로 안내도와 유학산의 내력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읽어보고 갈 일이다. 우리네 강산을 지켜낸 소중한 역사들이니까 말이다. 이곳 유학산은 1950729일부터 924일까지 있었던 2개월여의 전투 동안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2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이 나라를 구해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계적으로도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발판이 되었다. 그들의 충혼(忠魂)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며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유학산 산행이 우리에게 주는 큰 의의가 아닐까 싶다.



호국(護國)의 길을 따라가며 산행을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희희낙락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충혼(忠魂)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오로지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뛰었을 길이다. 당시 군인들이 들었을 소총 대신에 스틱을 들고, 전투화 대신에 난 등산화를 신었다. 그래 전진이다.



17분 쯤 걷다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유학산 정상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잠깐의 짬을 내여 오른편에 있는 도봉사에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수직의 바위절벽을 병풍삼아 들어앉은 절간이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다만 비구니들의 수행도량(修行道場)이니 그녀들의 청정(淸淨)을 깨뜨리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말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거대한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유학산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 할 수 있는 쉰질바위란다. 어른 키로 50질이나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학바위로도 불려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쉰질바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도 유명하단다.



깎아지른 절벽을 병풍삼아 도봉사(道峰寺)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사찰인데, 가파른 지형에 터를 마련하고 종각과 대웅전, 비로전, 석탑, 산신각, 요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19622월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신라시대의 고찰 천수사의 옛 터에 건립되었으며, 19984월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 등을 증축하였다.



절간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니 안내판 하나가 반긴다. 이곳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6.25전쟁 당시 이곳은 5번과 25, 907번과 908번 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1950813일부터 23일까지 11일간 국군 제1사단 12연대와 북한군 제15사단이 혈전을 벌인 다부동지구 전투의 최대 격전지(激戰地)였다. 고지(高地)의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뀌었고 유학산의 능선과 골짜기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때의 전투는 아군(我軍)의 승리로 끝났지만 우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포연(砲煙) 속에 사라져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국군전사자들의 유해(遺骸)를 발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곳 유학산에서만 123구가 발굴되었단다. 잘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론(無限責任論)도 적혀있다. 제발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심심찮게 올라오는 그와는 반대되는 뉴스들을 접하지 않도록 말이다.



산길은 안내판 옆(이정표 : 헬기장 640m/ 팥재 700m)으로 열린다. 통나무 계단이 반듯하게 놓인 길이다. 그러나 아까 들어갔었던 도봉사의 오른편으로도 산길이 열려있으니 참조한다. 이 오른편 산길을 따를 경우 쉰질바위(학바위) 등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왼편으로 오를 때 만나게 되는 바윗길의 멋진 경관은 포기해야만 한다. 낙동강의 조망도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통나무 계단을 오르고 나면 바윗길이 시작된다. 잘 손질된 길이 기암괴봉(奇巖怪峰) 사이로 이어진다.



들머리로 들어선지 10분쯤 지나면 길가의 좁은 공터에 놓인 벤치를 만난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되니 구태여 앉아보라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의자의 뒤편으로 나가볼 것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처음으로 조망이 열리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칠곡의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아쉽게도 낙동강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무(煙霧)가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바윗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위험하지는 않다. 가끔가다 바위가 길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까짓 조금만 우회(迂廻)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4분 후,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조금 전에 집사람이 손짓하던 바위벼랑의 위이다. 벼랑의 초입에 위험한 암벽길임을 알려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조망만 즐기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무튼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곳이다.



10분 후, 또 다른 조망처를 만난다. 바위벼랑을 피해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에서다. 앞서 만났던 풍경들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아까보다는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그만큼 높이 올라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계단을 올라서자 산세(山勢)가 바뀐다. 바위가 사라지는 반면에 길은 고와진다. 흙길로 변한다는 얘기이다. 경사(傾斜) 또한 완만해진다. 오늘같이 무더운 날에도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10분쯤 오르면 이정표(유학정 0.14Km/ 도봉사 0.64Km)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이어지는 산길은 더욱 고와진다. 이번에는 아예 바닥에다 덕석까지 깔아 놓았다. 장마 때의 질퍽거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폭신폭신한 것이 여간 걷기 좋은 게 아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을 만난다. 유학정(遊鶴亭)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정자 앞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839고지 탈환전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실질적인 정상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다. 실제 정상은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이곳 '839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 대구를 공격하려는 공산군과 이를 막으려는 한국군들 사이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주야간에 9번이나 그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고, 당시의 전투에서 아군만 하더라도 600여명이나 목숨을 잃었단다.




정자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웃자란 나무들로 인해 아랫도리가 잘려나가기도 하지만, 동쪽의 팔공산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왜관과 굽이치는 낙동강 물줄기, 그리고 구미의 금오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안내판도 보인다. 인근의 소학산과 기선산, 자고산, 숲데미산은 물론 낙동강과 경부고속도로까지 조망이 된다고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안내도는 자리를 잘 못 잡은 것 같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정자의 아래에다 세워놓은 탓에 경관과 그림의 대비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림의 내용도 문제다. 사진 형태의 그림에다 위치를 표시해야 이해하기가 편한데도 이 안내도는 지도에다 위치를 표기하는 식으로 그려 놓았다.



능선을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도봉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다부리 4.5Km/ 도봉사 0.6Km/ 유학정 0.2Km)를 만나고 곧이어 유학산의 실제 정상에 올라선다.



유학산의 실제 정상은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10m 정도를 들어가니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흉물스런 무인 통신시설이 홀로 길손을 맞는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세울만한 공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유학정 앞에다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나 보다. 참고로 유학산의 원래 이름은 유악산(流嶽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그리 적고 있는 것에 근거한다. 이 문헌은 이 산을 일러 인동현의 동쪽 10리에 있으며, 인동현의 진산이다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지도(朝鮮地圖)’에도 '유악(流岳)'이라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유학산(留鶴山)'이라고 기재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현재 쓰고 있는 '유학산(遊鶴山)'이라는 이름은 ‘1872년 지방지도에 처음 나타난다. 학이 노니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헬기장을 지난다. 사용한지 오래인 듯 웃자란 잡초들만이 무성하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바위들의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바위봉우리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주는 곳들이다. 하지만 정규의 등산로만 고집해서는 이런 조망을 즐길 수가 없다. 모두가 다 등산로에서 몇 걸음씩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837m봉 방향의 조망, 중간쯤에 보이는 암릉이 신선대이다.



바윗길이긴 해도 위험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등산로가 바위들을 피해서 나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철계단 등의 시설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신선대에 이른다. 유학산 제일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몇 그루의 노송(老松)이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까마득한 벼랑 위에는 대여섯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반석(盤石)이 있다. 반석에 앉아 산하를 굽어보면 신선이 된 듯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고 흐뭇하다. 신선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일 것이다.




신선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아니 전체가 다 바윗길은 아니다 곳곳에 바윗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바위길 구간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똑 같은 특징을 지닌다. 오로지 오른편만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백 년을 살아왔음직한 노송(老松)들이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이 보통이 아니다. 기암절벽과 낙락장송이 함께 어우러지며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잘 그린 것들이다.



신선대를 지난지 20여분 만에 유학산의 제2봉인 837m봉에 오른다. 유학정에서는 50분이 걸렸다. 높이가 상봉과 2m 차이에 불과해 또 다른 주봉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선지 일부 지도에는 두 봉우리 모두를 유학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열 평쯤 됨직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1950813일부터 924일까지의 전황을 설명한 상세한 상황판을 세워 놓았다. 당시 이 '837고지'는 대구 진입로를 방어하는 최고 요충지였다. 인민군 제13사단이 먼저 점령한 고지를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13의 숫적 열세를 딛고 탈환한 곳.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매일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참 이정표(674고지 1.24Km/ 820고지 600m)가 보이기도 한다. 비록 전황안내판 아래에서 나뒹굴고 있지만 말이다.



837m봉을 지났다 싶으면 곧이어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유학산의 또 다른 명물로 지도에는 ‘V자형 소나무로 표기되어 있다. 산길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양 옆으로 휜 가지를 뻗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난 젊은가 보다.



‘V자형 소나무에서 12분 정도 더 가면 봉우리 하나가 나온다. 지도에 836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봉우리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조망 역시 허락되지 않는다. 그냥 지나쳐버리면 되겠지만 길 찾기에 주의는 필요하다. 정상 직전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뉘는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천평리(가산면)로 내려서게 되니 주의한다.



이후로도 바위등성이를 타는 산행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13분 후에는 또 다른 바위 전망대에 올라선다. 아까 지나왔던 신선대보다도 한결 더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멋진 전망대이다. 앉아서 쉴 자리도 더 넓고 편한 것은 물론이다. 발아래에는 전적기념관이 있는 다부동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한가운데를 중앙고속도로가 ‘S'자를 그리면서 지나간다. 황학산과 백운산, 가산 등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옴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왜관과 구미, 대구 시내도 시야에 잡힌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가파르게 아래로 내려섰다가 짧게 올라서면 793m봉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방향표지판이 떨어져 나간 빈 스테인리스 막대 하나와 삼각점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삼각점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해서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광주 출신의 산악인 백계남씨가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793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주변은 온통 철쭉들 천지, 봄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꽃 잔치가 볼만 하겠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유학산의 동쪽 끝봉인 674m봉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674고지 탈환전안내판과 이정표(다부동 전전기념관 1.56Km/ 837고지 1.24Km)가 자리를 지킨다. 이곳은 1950813일부터 92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다. 국군 1사단은 인민군 13사단과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국군이 8부 능선까지는 여러 차례 올랐지만 고지에서 아래로 던져대는 수류탄 때문에 번번이 분루(憤淚)를 삼키며 패퇴해야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다 그해 822일 백병전(白兵戰) 끝에 고지 탈환에 성공한다. 그 뒤로도 반격과 재탈환의 공방전이 924일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674m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산길은 넓을 뿐만 아니라 통나무계단을 놓는 등 잘 닦여 있는 편이다. 거의 임도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내려서는 게 쉽지만은 않다. 바닥의 흙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데다가 수없이 많은 돌들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발을 내려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35분쯤 내려오면 오른편 산자락에 송전탑(送電塔)이 보인다. 첨부된 지도에 철탑이라고 표시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곳에서 송전탑으로 연결되는 길이 하나 보인다. 혹시 674m봉 근처에서 이곳으로 곧바로 내려오는 길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민가를 만난다. 다부동(多富洞) 마을에 내려선 것이다. 다부동은 부자들이 많은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이 유유자적 평화롭던 동네는 갑자기 몰아닥친 한국전쟁이란 참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개전 2개월 만에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은 잠시 후 전적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산행날머리는 다부동 전적기념관 주차장(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민가(民家)를 만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중앙고속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농로(農路)를 따라 잠시 걷다가 고속도로의 교각 아래에서 왜관으로 가는 79번 지방도를 건너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유학산을 낀 다부동은 대구 사수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무려 9차례나 뺏고 뺏기기를 거듭하며 온 산과 들판은 선혈로 물들었다. 다부동 전투는 안강 전투와 함께 대구를 지켜낸 전투였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전사 상 빛나는 전투였다. 지금은 비록 그 비극의 흔적이 거의 다 지워졌지만, 그 충혼(忠魂)의 역사만은 남겨두었다. 50여 일 간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적기념관은 13,220의 부지에 전시실, 구국관, 주차장이 있고, 구국용사 충혼비, 구국경찰 충혼비, 백선엽장군 구휼비, 조지훈 시비 등이 있다. 248의 전시실 안에는 45구경 권총, 인민군 다발총 등 무기 장비 59점과 6.25전쟁 약사, 다부동 전투 약사, 그림 등 전시물 126점이 있다. 실외에는 비행기 2, 전차 2, 장갑차 2, 나이키유탄 대포 8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바데산(646m)

 

산행일 : ‘16. 7. 9()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과 영덕군 달산면·남정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옥계유원지옥녀교바데산곰바위안부비룡폭포호박소경방골신교옥계유원지팔각산장(산행시간 : 4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안전산악회


특징 : 바데산은 낯선 이름이다. 웬만큼 산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는 산이 700m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나지막한데다가 생김새 또한 전형적인 육산(肉山)인 것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보잘 것 없는 산세(山勢)에다 볼거리까지 일절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주왕산과 내연산, 팔각산, 동대산 등의 유명세에 가려버린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산에 들고 나면 그런 생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린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지는 빼어난 풍경이 비경(秘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나타나는 바위에 오르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색다른 풍경으로 나타나고, 특히 하산 길에 만나게 되는 경방골의 비경은 전국의 어느 산들에 견주어도 뒤질 게 결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 협곡(峽谷)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폭포와 담(), 그리고 소()들은 그 하나하나가 비경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다.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옥계유원지(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으로 향한다. 이때 안동시내를 통과하면서 35번 국도를 탈 경우 청송방면으로 가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한다. 신양삼거리(영덕군 지품면 신양리)에서 우회전하여 69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오다 대지삼거리(달산면 대지리)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대서천을 가로지르는 흥기교(: 달산면 용평면 437)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930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옥계유원지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잠수교(潛水橋)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대서천(), 쉽게 말해 옥계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비가 올 경우 물에 잠긴다고 해서 잠수교라 불린다. 참고로 옥계(玉溪)’는 옥같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란 뜻이다. 14세기 말인 정종 연간에 노()씨라는 선비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의 자연에 반해 자신의 호를 옥계라 했고, 지명 또한 옥계가 되었다.



옥녀교로 연결되는 도로(죽장로)를 따른다. 오가는 차량이 조심해서 비켜 지나다녀야 할 정도의 도로이다. 옥계계곡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들어간다옥같이 맑다는 물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피서 인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맞다.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 폭염경보가 내렸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근처였었다.



15분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오른편에 멋들어지게 생긴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옥녀교란다. 옥계계곡과 연관을 시켜 지어낸 이름인 모양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옹녀라는 단어로만 맴돌고 있다. 다리의 모양새가 옹녀의 다리처럼 매끈하게 생겨서 그런 것이나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 성정이 본디부터 음탕해서였을 테고 말이다.



산길은 옥녀교와 만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바데산 정상 2.5Km/ 동대산 정상7.8Km/ 동대산 입구300m)가 세워져 있으나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말뚝모양으로 생긴 이정표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웃자란 잡초들 때문에 길머리 또한 뚜렷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웃자란 잡초들 때문에 산길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거리가 짧을뿐더러, 길가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산악회의 리본들을 찾아가며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통나무계단이 나타나면서 산길은 또렷해진다. 그리고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올라서면 작은 능선(이정표 : 바데산 정상2.2Km/ 바데산 입구0.3Km)을 만나면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만나는 지점에 무덤이 있으니 기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산길은 능선을 만나면서 가팔라진다. 그리고 그 도()를 더해가더니 끝내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오늘은 폭염경보까지 내려졌을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게다가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 ‘지옥의 행군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길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는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가끔 나뭇가지 사이로 건너편에 있는 동대산이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그렇게 45분 정도를 오르면 전망이 트이는 봉우리(이정표 : 바데산 정상 1.2Km/ 바데산 입구 1.3Km) 위에 올라서게 된다. 건너편에 있는 팔각산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주왕산까지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그 사나웠던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등산로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껴난 곳에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위의 한쪽이 수백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일단 올라가고 볼 일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망바위는 바윗덩어리 세 개가 나란히 붙은 형상이다. 바위 위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나란히 서있는 팔각산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팔각산 뒤에는 낙동정맥의 주능선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주왕산이 또렷하다.



전망바위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로프가 매어져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안부로 내려선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너덜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드디어 바데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무더위로 인해 속도를 낼 수가 없었던 탓일 게다.



예닐곱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영덕 25), 그리고 이정표(동대산 정상, 동대산 입구 9.8Km/ 바대산 입구 2.5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산행 삼행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가지고 가는 것은 도시락, 못가지고 가는 것은 담뱃불, 가지고 오는 것은 쓰레기라고 적혀있는데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동대산 방향이다. 하산 길은 너덜길로 시작된다. 그리고 잠시 후 제주도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나타난다. 무덤의 담을 돌로 둘러친 것이다. 봉분도 역시 돌투성이다. 제주도의 무덤이 돌이 많은 특성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곳도 역시 돌이 많다보니 저런 모습으로 만들어졌나 보다.



계속해서 너덜길이다. 제법 규모가 큰 바위도 보인다. 생김새도 괜찮은 편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정도가 지나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건너편에 동대산의 능선이 또렷하고, 수직의 발아래에는 경방골이 내려다보인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하산 길을 재촉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길게 내려선다. 그러다가 산길은 가팔랐던 경사를 한꺼번에 뚝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고 갈림길 하나를 만들어 낸다. 동대산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된다. 하지만 이쯤에서 산을 내려가고 싶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비룡폭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조망이 일품이라는 곰바위에 올라보기 위해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한 뒤에야 독바위에다 올려놓는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곰바위이다. 학성바위 또는 쌍바위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곰바위의 상부는 바위를 왼편에 끼고 돌아 오르면 된다.



바위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펼쳐진다. 영덕풍력발전단지와 영덕 앞바다가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나온 바데산과 진행방향에 있는 동대산은 보너스로 쳐도 될 듯 싶다.



5분 후 십자로 안부(이정표 : 비룡폭포1.4Km/ 동대산 정상3.4Km/ 사암리 회관2.3Km/ 바데산 정상 1.8Km)에 이른다. 다음 행선지인 비룡폭포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 동대산으로 가게 되니 주의한다.



능선을 벗어난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춘다. 이어서 6분 후에는 경방골에 내려선다. 상류인데도 불구하고 물의 양이 제법 많은 골짜기다. 계곡에 내려선 집사람이 세수부터 하는 걸 보면 날씨가 덥기는 더운가보다.




하지만 산길은 개울을 지나자마자 또 다시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그리고 산비탈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개울가로 길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골짜기가 험했던 모양이다.



10분쯤 후 또 다시 계곡에 내려선다. 그리고 계곡의 좌우(左右)를 오가면서 내려간다. 장마 때 물난리라도 치루고 나면 길의 흔적을 찾기가 만만찮을 구간이다. 하지만 계곡을 벗어나지 않는 다는 점만 염두에 둔다면 큰 어려움이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군데군데 매달려 있는 리본(ribbon)을 참고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테고 말이다.



계곡을 가로질러가며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추락주의라는 경고판이 나타난다. 산길은 바위 협곡(峽谷)의 왼편 벼랑에 걸치듯이 나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코스이다. 그래서 경고판까지 세워 주의를 촉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안전로프를 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법 굵다. 그리고 로프가 움직이지 않도록 촘촘하게 고정을 시켜 놓았다.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큰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을 것이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이내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비룡폭포란다. 비룡폭포란 그 생김새가 흡사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안내판 앞에 서면 이단(二段) 삼단으로 연결되는 비룡폭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설악산에 있는 비룡폭포의 웅장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분위기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지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흡사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계곡으로 내려서서 이번에는 폭포와 대면(對面)한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제법 거세다. 폭포의 아래는 어른의 키를 약간 넘을 정도로 깊은 소(),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고 본다. 무더위에 지친 육신이 더 이상의 버팀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수도 해보고, 폭포에 낙차 큰 물줄기로 안마도 받아본다. 그러기를 20여분, 천국(天國)이 따로 없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속세에 물든 인간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상향(理想鄕)‘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폭포 아래에서 길이 둘(이정표 : 동대산 입구2Km/ 곰바위0.7Km/ 사암1.4Km)로 나뉜다. 아까 곰바위 근처에서 나뉘었던 길이 이곳에서 다시 합쳐지는 모양이다. 동대산 입구 방향으로 내려선다. 물길을 따라 가지런히 걷다가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니 쉬어갈 수 있도록 정자(이정표 : 동대산 입구1.7Km/ 동대산2.8/ 비룡폭포0.4Km)를 세워두었다. 왼편에 보이는 물침이골골짜기를 따라 길이 나있다. 아까 십자안부에서 동대산으로 향했을 경우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다.



동대산에서 시작되는 물침이골의 물줄기와 합쳐진 경방골은 더욱 더 힘 있는 물줄기로 변화를 꽤한다. 덕분에 곳곳에다 폭포와 담(), 그리고 소()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뛰어 들기만 하면 된다. 물론 옷은 입은 채로이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골이 왼쪽으로 휘면서 기암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 아래에 쟁반처럼 널찍하고 맑은 물이 넘칠 듯이 담겨 있다. 경방골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호박소란다. 와폭(臥瀑)에서 떨어지는 물길이 만들어낸 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른 빛이다. 그 물결 위에 또 다른 푸른빛이 감돈다. 구름 몇 점 떠다니는 파란 하늘과 녹음 짙은 산자락이 물결 위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계곡은 색상과 모양이 제각각인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를 흐르는 청류(淸流)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다가가 보면 작은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나들이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갈 줄을 모르는 것은 그만큼 인적이 뜸한 곳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협곡 위로 솟아 오른 기암과 그 위로 걸린 강인한 생명력의 소나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산길은 골짜기를 따라 나있다. 때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장마철에는 피해야 하는 코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 같이 무더운 날에는 최상의 코스가 아닐 수 없다. 어떠한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고 물에 첨벙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 길을 따라 내려서는 동안 형형색색의 기암괴석이 널려있고, 물길이 빚어낸 소와 담을 만난다. 길게 드러누운 와폭도 뒤질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민다. 자연미 넘치는, 오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누군가는 경방골을 일러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고 했다. 산중미인(山中美人)들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느라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름 없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폭포와 소, 그리고 담이 많다는 얘기이다. 크고 작게 'U'자를 그리는 계곡은 곳곳에다 폭포를 만들었고, 소와 담에 모였던 물은 한 바퀴를 휘돌아 나와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2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저만큼에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첨부된 지도에 신교로 표시된 다리이다. 제대로 된 산행은 대충 이곳에서 끝난다고 보면 된다. 이제부터는 널따란 도로를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5분쯤 후 산행을 시작하면서 길이 나뉘었던 옥녀교에 이르게 되고, 이후부터는 아침에 걸어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면 된다. 내려가는 길, 건너편 언덕 위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시루떡을 쌓은 듯한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너른 너럭바위를 타고앉아 비췻빛 옥계계곡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45)인 침수정(枕漱亭)일 것이다. 물가에서 탁족(濯足)을 즐기다가 올라가 쉬기에 딱 좋은 곳에다 지어 놓았다. 옛 사람들에게 탁족이란 단순히 더위만을 피하는 방편은 아니었다. 흐르는 물을 관조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수양이기도 했다. 체면을 중시하던 선비들이 인적이 드물고 산수가 좋은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읊으며 자연과 풍류를 벗 삼았다. 여유와 멋이 가득 느껴지는 친 자연피서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 정조 8(1764), 손성을(孫星乙, 1724-1796)에 의해 지어진 침수정은 정면 두칸, 측면 두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亭子). 뒤쪽 두 칸은 방이고 앞쪽 두 칸은 바위 위에 기둥을 세운 누마루다. 누마루를 돌아가면서 계자난간을 설치해 운치를 더 했다. 침수정이란 이름은 '침류수석(枕流漱石)'에서 나왔다고 한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라는 뜻이란다. 손성을은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세상의 명리를 허공에 떠다니는 뜬구름으로 여겼다고 한다.



15분 조금 못되어 산행을 시작하려고 차에서 내렸던 곳에 이른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는 팔각산장에 주차되어 있단다. 930번 지방도를 따라 10분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도로는 땡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거기다 지금은 폭염경보까지 내려졌을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걷는 것 자체가 무리이겠지만 어쩌겠는가. 흐느적거리며 발걸음을 내디딜 따름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경치 좋기로 소문난 옥계계곡을 눈요기 삼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란히 앉아 물속에 다리를 담그고 있는 젊은 연인들도 보인다. 그들의 싱싱함이 전해진 듯 피로에 지친 심신에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고려 때의 학자 이인로는 탁족부(濯足賦)’라는 글에서 돌 위에 앉아 두 다리를 드러내고 발을 담그니 불같은 더위가 지나가네.’라고 탁족의 시원함을 노래했다. 옛 사람들에겐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쫓는 탁족만한 피서가 없었을 것이다. 어디 옛 사람들 뿐이겠는가. 그래서 저리도 많은 사람들이 물가를 찾지 않았겠는가.



산행날머리는 학소대(鶴巢臺) 앞 팔각산장 주차장(달산면 옥계리 43-3)

더위에 지친 몸은 갈수록 더 흐느적거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할 즈음에야 저만큼에 팔각산장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20분이 걸렸다. 목욕 등을 위해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4시간50분이나 걸렸다. 거리에 비해 많이 걸린 셈이다. 아무래도 무더위 때문에 속도가 많이 떨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산장의 앞에는 선경옥계(仙境玉溪)’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수백 길 높이의 학소대(鶴巢臺) 바위벼랑이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말이 있다. 이백의 시조인 산중문답(山中問答)의 마지막 구절이다. 저 빗돌을 세운 이는 이백의 시를 읊으며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갓바위산(740m)-신선봉(547m)

 

산행일 : ‘16. 5. 21()

소재지 : 경북 영덕군 달산면·지품면과 청송군 부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용암사표지석국립공원(용암사)지킴터전망바위망봉틈바위시루봉계곡갓바위정상신선봉용전초교(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국립공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 오른 갓바위산을 보면 말이다. 갓바위산은 주왕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거기다 웬만한 산꾼들이라면 한번쯤은 답사해봤을 법한 낙동정맥까지 지나가는 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표지석 하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산로 또한 낙동정맥 구간과 용암사 방향으로만 정비가 되어 있고, 나머지 구간은 완전히 버려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출입까지 금지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이 구간이 갓바위산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공원에서는 자연자원 보호등산객의 안전을 그 이유로 들고 있었지만 이는 등산객들이 조금만 주의하면 될 일이겠기에 이해가 가지 않은 처사였다. 하여간 산은 괜찮은 편이었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거대한 바위들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전망대 또한 다른 산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멋진 조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명산의 반열에까지 올려놓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용전리(영덕군 달산면 용전리)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방면으로 달리다가 신양삼거리(영덕군 지품면 신양리)에서 우회전하여 69번 지방도를 따라 강구방면으로 들어온다. 곧이어 대지삼거리(영덕군 달산면 대지리)에서 오른편 914번 지방도로 옮기면 잠시 후 용전리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마을로 들어가기 직전에서 오른편 길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머리 위로 수로(水路)가 지나가고 있고, 또한 들머리에 커다란 용암사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길가에 기괴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오래 묵어 가운데가 홈이 파여 있는데 그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것이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다. 꿀벌들이 달려든 것이다. 아마 내가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알았나보다. 그 안에 들었던 게 한봉(韓峰)의 벌통이었던 것이다.



15분 되었을까 진행방향에 높다란 둑이 나타난다. 용전저수지의 둑이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저수지 둑이 보일 즈음에서 오른편으로 비포장임도 하나가 나뉘어 나간다는 것이다. 오늘 산행이 짧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볼 일이다. 돌패산(398m)이라는 쓸만한 산 하나를 더 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산행시간이 30분 정도 더 늘어난다.



잠시 후 저수지에 올라선다. 수위(水位)가 만수(滿水)를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가뭄이 극심했던가 보다. 바람기가 없는 탓인지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물속에 잠겨있다. 아름답다. 하지만 등산객들에게는 불행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오늘 같이 무더운 날에 바람까지 없다면 산행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수지를 지나서도 임도는 계속된다. 용암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만들어 놓아선지 경사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리고 임도의 옆은 계곡이다. ‘갓바위골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용전저수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9분 후, 공중화장실을 갖춘 작은 공터를 만난다. 용암사에서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아니 국립공원 지킴터가 지어져있는 것으로 보아 주왕산국립공원에서 갓바위산 등산로를 만들면서 부대시설로 조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곳이 오늘 산행의 실질적인 들머리가 된다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어선지 국립공원에서 출입금지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자연자원 보호와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를 어기고 만다. 부산일보에서 걸었던 코스를 그대로 답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국립공단에서 내건 출입금지의 사유 정도는 우리가 조금만 주의하면 지켜질 것으로 봤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그만큼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700m급의 산이라고 해서 우습게보지 말라며 겁이라도 주려는 모양이다. 하여간 고생문이 훤한 산행이 시작된다. 거기다 30도 가까이나 되는 무더위까지 겹쳐 더욱 죽을 맛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산의 이름을 낳게 한 갓바위이다.



산으로 들어선지 20분 쯤 지났을까 작은 슬랩(slab)이 나타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조망다운 조망을 보여주는 곳이다. 발아래에는 용암사가 내려다보인다. 아까 산행들머리에서 보았던 표지석에 적혀있던 절인데, 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에 소속되어 있단다. 이난이라는 노()보살이 2002년에 절집을 지었으나 현재는 서남사(영덕읍 화개리 소재)에 속한 수도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조망이 터진다고 넋을 잃을 것까지야 없다.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더 좋은 바위전망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조금 전에 슬랩에서 보았던 용전저수지가 다시 한 번 멋지게 펼쳐진다. 그 왼편에 있는 산은 돌패산이다. 그리고 저수지의 뒤편, 그러니까 용전리 마을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덕갈산과 팔각산일 것이다.




5분 후 능선에 올라선다. 왼쪽 능선을 따라 오른다. 오른편은 돌패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능선을 만난 산길은 한결 완만해진다. 그 사나웠던 기세를 한풀 꺾으려나보다.



다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정상 어림이 바위로 이루어져 조망이 시원스런 곳이다. 다리미를 닮았다는 용전저수지는 물론이고 갓바위산과 덕갈산, 팔각산, 돌패산 등 주변의 산들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에서는 반대편의 산들도 눈에 들어온다. 방향으로 봐서는 포도산과 백암산이 아닐까 싶다.





5분 후 이번에는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를 만난다. 지도에 망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지점이다. 봉우리 위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산길은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나 역시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먼저 올라간 일행이 괜히 올랐다고 손사래를 치며 내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루봉으로 향한다. 잠시 아래로 내려서던 산길이 이번에는 긴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 오름은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파르다.



7분쯤 지났을까 지도에 나와 있는 틈바위를 만난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밖에 없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모양이다. 바위의 틈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좁았다. 비록 배낭을 맨 채로 이었다고는 하지만, 몸무게 73Kg인 내가 겨우겨우 빠져나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봉우리를 만난다. 지도에 시루봉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바위의 생김새가 시루떡을 빼다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글쎄올시다이다. 아무리 훑어봐도 시루떡 모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통천문으로 들어서고 본다. 그래야 하늘, 아니 바위 위로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통천문을 지나면 작은 바위굴이 나타난다. 무조건 바위 위로 오르고 본다. 마땅히 잡을 만한 크랙이 없으니 초보자들은 따라 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바위 위로 오르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건너편 바위, 그러니까 또 다른 시루떡 너머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갓바위가 멋지다.



바위를 내려와 이번에는 건너편 바위를 오른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경사가 제법 심한 슬랩이니 초보자들이 오를 때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아니 전문가의 도움이 없다면 올라가는 걸 포기하는 게 좋겠다.



바위에 오르면 또 다시 갓바위가 나타난다. 아니 건너편 바위에서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다. 갓바위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실컷 감상하고 갈 일이다. 막상 갓바위 아래에서는 이렇게 멋진 형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이다. 8분쯤 후 가픈 숨을 고르기에 딱 좋은 쉼터가 나타난다. 노송(老松) 아래 널따란 바위가 앉기도 좋을뿐더러 조망까지도 시원스럽다. 아까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던 포도산 방향의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봉우리는 왼편으로 우회(迂廻)한다. 그리고 그 다음 봉우리는 아예 허리 어림으로 우회를 시켜버린다. 갓바위로 가는 지름길인 모양이다.



사면(斜面)을 따라 난 길을 10분쯤 걷다보면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물이 쉽게 흐르지를 못하고 멈칫거리고 있다. 가뭄이 극심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계곡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아니 이보다 더 가파른 구간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따라주지 않다보니 아까보다 더 가파르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10분 후 능선에 올라서면 능선을 따라 수직으로 뻗은 기존의 등산로를 만난다. 길은 거대한 바위를 오른편에 끼고 나있다. 갓바위이다. 갓바위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갓바위의 진면모(眞面貌)를 보려면 망설이지 말고 왼편으로 가고 볼 일이다.



잠시 후 갓을 쓴 모양새를 닮았다는 갓바위(일명 관암, 冠巖)의 정면에 이른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대궐령 0.4Km, 내기사저수지 9.3Km, 대전산 11.6Km/ 갯바위골지킴터 1.6Km)를 만난다. 바위의 앞에 갓바위에 대한 설명판까지 세워 둔 것을 보니 이제야 국립공원에 들어온 느낌이다. 하여간 갓바위는 덩치 큰 바위 세 덩어리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맨 앞의 바위가 갓을 쓰고 있는 모양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액운을 떨치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해서 예로부터 주민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게 입소문을 탔던지 요즘은 먼 외지로부터도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란다. 그만큼 영험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갓바위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용암사(갯바위골 지킴터)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걸어보라는 얘기이다. 용암사에서 올라오는 계단의 맨 위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걸었던 망봉과 시루봉을 낀 능선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저 중에는 칠보산과 백암산도 끼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마을들이며 논과 밭, 하천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다. 날이 맑을 경우 동해의 푸른 물결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가 이번엔 갓바위산으로 향한다. 가파른데다가 바위구간까지 나타나지만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부담스러운 구간에다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이 조금 못되게 오르면 갓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국립공원에서 나무계단의 끝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갓바위를 눈에 담는다. 아까 갓바위에서 보았던 풍경은 덤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20분이 지났다.




다시 길을 나선다. 방향을 틀자마자 의외의 풍경과 맞닥뜨린다.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푸른 초지가 광활하다싶을 정도로 널따랗게 펼쳐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낙동정맥 마루금인 대궐령(大闕嶺)이다. 대궐령은 옛날 중국의 주왕인 주도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성을 쌓은 후, 대궐(大闕)을 짓고 머물다 청송 주왕산으로 넘어갔다 하여 대궐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주왕이 전투에 패하고 이곳 주왕산에 숨어들었을 때 영덕지방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첨부된 지도에는 731m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대궐령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왕거암 2.6Km, 내기사저수지 8.9Km, 대전사 11.2Km/ 갓바위 0.4Km, 갓바위골지킴터 2.0Km)로 나뉜다. 오른편은 낙동정맥,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도 역시 낙동정맥이다.



왼편으로 향한다. 푸른 초원을 따라 난 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 리본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곳에 이른다. 지도에 갓바위산(740m)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을 대궐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그들은 대궐령을 임금이 계신 곳을 둘러서 이어진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며 일반적인 고개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산줄기의 높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얘기하는 대궐령이란 731m봉과 740m봉을 아우르는 의미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널따란 산상(山上) 분지(盆地) 내에 두 봉우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조금 전 대궐령에서 만났던 낙동정맥과 다시 헤어지기 때문이다. 이정표는 없지만 낙동정맥은 오른편이다. 신선봉은 물론 직진(直進)이다.



드넓은 초원지대가 끝나면 곧바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상당히 가파른 편이다. 거기다 가끔은 바윗길도 나타난다. 하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게 13분쯤 내려오면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지도에 나와 있는 멧돼지바위인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멧돼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내리막길은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러다가 잠깐 오름짓을 했다 싶으면 이내 신선봉에 올라서게 된다. 신선들이 앉아 놀았다는 바위봉우리이다. 갓바위산을 출발한지 35분 만이다.



신선봉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조망만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소리를 듣는 모양이다.




발아래에는 청련사가 내려다보인다. 신라 때 지어졌다는 고찰(古刹)이다. 한때는 전각이 12동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과 나한전, 그리고 산신각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조그맣고 한적한 사찰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신선봉의 바위는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한다. 다소 험하지만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연꽃봉으로 연결되는 길이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15분 정도의 시간을 들여 다녀올만한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곧이어 바위무더기를 만난다. 오른편에 촛대봉이 있다고 했는데 찾을 수는 없었다.



조금 더 능선을 타다가 왼편으로 내려선다. 신선봉에서 8분 거리이다. 경사가 가파른데다가 가끔은 바윗길까지 나타나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미끄러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마사토로 이루어진 바닥이 경사까지 심한 탓에 미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25분 후 드디어 임도가 내려서면서 지루했던 하산 길은 대충 끝이 난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에 눈 맞추며 걷는 호사스런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벌통들이 널려있는 곳에 이르게 되고, 이제부터 임도는 시멘트포장으로 바뀐다.



산행날머리는 폐교된 용전초등학교(달산면 용전리)

오늘은 원점회귀 산행이다. 불현듯 산행을 시작하면서 걸었던 임도가 떠오른다. 온전히 뙤약볕에 노출되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길가 나무들이 그늘막이 되어주고 있다. 비록 완전하게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싶다. 마을까지의 거리는 제법 길다. 거기다 볼거리 또한 없다. 그저 길가 바위틈마다 비집고 들어선 한봉(韓蜂)의 벌통들이나 구경하는 수밖에 없다. 참 하나 빼먹을 뻔했다. 수풀 속에 반쯤 숨어있는 산딸기를 찾아 따먹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용전리 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참고로 용암초등학교는 지난 1994년 폐교(廢校)가 되었다고 한다. 1945년에 개교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학교였지만 요즘의 농촌현실을 비켜나가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배출된 2700명의 졸업생들이 느껴야 했을 허탈감에 공감이 가는 건 나 또한 농촌 태생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