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산(伏虎山, 678m)-지룡산(池龍山, 659.2m)

 

산행일 : ‘17. 5. 16()

소재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산행코스 : 승호장 가든암릉지대신선봉(643m)복호산지룡산전망바위안부삼거리내원암솔바람길운문사 주차장(3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운문사를 감싸고 있는 복호산과 지룡산은 영남알프스 산군의 막내 산자락이다. 가지산의 산줄기가 상운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갈라지면서 배너미재를 따라 이어진다. 두 산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복호산을 오르는 바윗길은 전율과 스릴의 연속이라 할 정도로 쾌감과 흥분을 자아낸다. 10m가 넘는 직벽과 암릉을 타고 오르다보면 아슬아슬하다 못해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윗길에서의 조망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발아래로는 운문사가 내려다보이고 좌우로는 청도와 경주의 산들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이런 산들을 어찌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약자만 아니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신원삼거리(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 청도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경주방면으로 달리다 대천삼거리(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1444)에서 69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운문사방면으로 들어오면 오래지 않아 신원삼거리(운문면 신원리 699-2)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신원 삼거리의 코너(corner)에 있는 승호장가든앞에서 운문령(석남사) 방향으로 20m쯤 가면 오른편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등산로 초입은 밀성 손씨(密城孫氏)‘ 문중 묘역(門中 墓域)이다.




묘역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 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14분쯤 지났을까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뭔가를 알려주려는 신호려니 하고 살펴보니 길 왼편에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부산일보의 취재기사에 조망바위로 기록되었던 지점인 모양이다.



바위에 서면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신원삼거리 일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염창(鹽倉)이란 이름의 마을이다. 한때 이곳에 소금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청도뿐만 아니라 경산과 밀양, 대구 지역에까지 소금을 공급했었는데 필요한 소금은 울산 지역에서 만들어 사람과 소 등을 이용하여 지금의 운문령을 넘어 염창 마을로 옮겨왔으며, 필요에 따라 각 지역으로 분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금이 구하기 어려운 생필품이던 시절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립학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조용한 산골마을일 따름이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5분쯤 후에는 또 다른 밀성 손씨묘역을 만난다.



무덤을 지나면서 잠시 완만해졌던 산길은 TV안테나를 지나면서 또 다시 가팔라진다. 이번에는 바위구간까지 섞여있는 오름길이다. 그 덕분에 가끔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까치산과 방음앞산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대왕산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암릉을 따르려면 왼편, 그러니까 곧장 능선을 치고 올라야 한다. 오른편은 암릉을 우회(迂迴)하여 곧장 복호산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왼편 길로 진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눈이 쌓였을 때나 노약자는 예외이다. 수직(垂直)에 가까운 암벽 두어 곳과 그보다는 조금 약한 몇 곳을 거쳐야 하지만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있어서 조금만 조심하면 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왼편 능선을 치고 오른다.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에서 기분 좋게 조망을 즐기고 나면 곧이어 높이 10m쯤 되어 보이는 첫 번째 암벽(岩壁)이 앞길을 막는다. 밧줄과 크랙(crack)에 의지해가며 조심스럽게 능선에 올라선다. 암벽이 수직에 가까우나 굵직한 밧줄에 손잡이용 매듭까지 만들어놓아 큰 어려움은 없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암벽구간이 나타난다. 조금 전에 올라선 암벽보다 경사(傾斜)는 조금 약하지만 그 길이는 배나 더 길어졌다. 바위타기를 즐기는 산객들에게는 위험하기도 하지만 짜릿한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 구간을 통과하면 주위의 조망은 더욱 더 좋아진다. 눈터지는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또 다시 신원삼거리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The seagull that flies the highest sees the farthest)’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나오는 명문장이다. 그런데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범위가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높여진 고도에 비례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아무튼 신원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물가에 터를 마련한 염창(鹽倉) 마을을 물과 산이 아우르며 특이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마을 뒤로는 방음산이 산세를 펼쳐 울타리가 되어 감싸고 있다



양쪽이 모두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절벽구간에 서면 아름다운 바위 풍광이 덤으로 펼쳐진다. 오금저리는 암벽구간을 고생하며 올라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위벼랑을 옆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구간도 있다. 발아래는 천애(天涯)의 절벽, 마치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발을 붙일 만한 공간이 제법 너른데다 붙잡을 만한 나무들도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딱 이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밧줄에 매달려 고생하다보면 곳곳에서 눈터지는 조망(眺望)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흡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듯, 유장한 산줄기들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어느 누가 탄성을 지르지 않겠는가. 암벽을 오르내리며 끙끙대던 고난(苦難)의 기억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이 구간을 통과하면 이후부터 산길은 암릉의 위로 나있다. 칼날 같은 아슬아슬한 암릉이지만 오르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크랙(crack)이 잘 형성되어 있어 손으로 잡기가 편하고 발 디딤 또한 좋다. 고생에 비해 보상은 더 크다. 고도감과 함께 탁 트인 전망을 실컷 즐길 수 있다.




30분쯤 힘들게 올라 암벽 구간을 벗어나면 너덜길을 만나고 곧이어 643m봉에 올라선다. 신선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위봉우리이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신선봉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까치산을 중심으로 오른편 멀리 장륙산과 발백산, 구룡산 등을 비롯한 경주 인근의 산이 겹쳐지고, 왼편으로는 대왕산, 학일산, 통내산, 갓등산, 용당산, 대남바위산 등 청도의 산들이 너울처럼 넘실댄다.




진행방향에 복호산이 나타남은 물론이다.



복호산으로 향한다. 노송(老松)들이 늘어선 암릉을 짧게 내려서면 안부에서 운문사주차장 갈림길‘(이정표 : 복호산 정상/ 운문사주차장/ 신원삼거리)을 만난다. 이곳에서 그만 탈출을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아까 바위를 건너 뛰면서 굳어버린 종아리 근육이 풀리지를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 힘과 무릎 근육을 이용해가며 기다시피 암릉을 올라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평지를 걷는 게 더 힘들다. 걸으려면 자동으로 종아리 근육을 사용해야만 하는 데 이때 종아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는 것이다.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복호산으로 향한다. 까짓 암릉도 기어 올라왔는데 이 정도도 못 참겠는가. 오르는 길에 잠시 시야가 열리면서 방금 전에 지나온 신선봉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 발아래에 운문사주차장이 내려다보인다. 머리라도 들라치면 호거대 능선이 방음산 뒤로 뻗으면서 까치산까지 선명하다.



안부에서 5분 남짓 급하게 치고 오르면 복호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이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바윗길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게 싫다고 그냥 건너뛰다가 종아리 근육이 뭉쳐버린 탓이다. 정상까지 겨우겨우 올라오기는 했지만 뭉친 근육을 풀어보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했었다. 아무튼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예닐곱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을 정도의 넓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숲속에 파묻힌 관계로 조망은 터지지 않는다.



복호산은 엎드릴 복()’범 호()’자를 쓴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지룡산(池龍山)의 정상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복호산으로 변해있다. 물론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부산일보의 취재기사를 보면 예로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불러오던 이름이란다. 산의 생김새가 호랑이가 누운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문사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맞은편 산봉우리에 또 다른 호랑이가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 앞 장군평 너머 거대한 바위인 호거대(虎踞臺) 말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호거산(虎踞山)이 두 곳에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운문산에서 북쪽으로 좌우에 하나씩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축척으로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복호산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북대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룡산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지룡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산길은 곧장 아래로 향하지를 못하고 좌우로 갈지()자를 그려가면서 겨우 고도(高度)를 낮추어 가고 있다.



복호산에서 한 굽이 내려서면 안부이다.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타다보면 돌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지룡산성의 터가 아닐까 싶다. 이런 흔적은 이따가 지룡산을 내려가는 길에 더욱 또렷해진다. 혹자는 이 지룡산성을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의 터전이라 주장한다. 이 산성을 축조한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공략하게 되자, 신라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그 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룡산성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신라후기 지금의 운문면 신원리 내포에 한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주위 젊은이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처녀를 취한 사람은 복호산 중턱에 살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자였다. 밀통을 즐기던 처녀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부모에게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사실을 부모에 다 털어놓은 처녀는 그들의 강압에 못 이겨 남자의 옷에 명주실을 묶게 되었고, 다음 날 아침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복호산중턱에 위치한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더란다. 그 안에는 오색이 찬란한 거대한 지렁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고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렁이는 죽임을 당했고, 달이 찬 처녀가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후백제의 견훤이 되었다는 것이다. '황간 견씨'의 시조라고도 한다. 그런 인연으로 복호산은 지룡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견훤은 신라를 정복할 겸해서 선조 지렁이의 영지에다 지룡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안부를 지나 완만한 참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곧이어 지룡산 정상에 올라선다. 복호산에서 20분 정도 걸렸다. 발을 절뚝거리다보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룡산도 역시 예닐곱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석도 복호산 것과 거의 같은 크기다. 조망도 역시 터지지 않는다. 복호산과 거의 같은 느낌이라는 얘기이다. 후백제 견훤이 이 산에 살던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야설(野說)이 산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는 지룡산에 대한 유래는 아까 지룡산성에서 거론 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 이곳에는 삼각점(동곡 313, 82 재설)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지룡산을 벗어나면 서서히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잠시 후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나게 해준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바위로 표기된 지점이다. 가야 할 산릉이 눈앞에 다가서고 영남알프스의 맏형격인 가지산을 비롯해 좌우로 펼쳐지는 산세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아까 지룡산으로 오를 때 만났던 것보다 훨씬 더 또렷해진 산성터를 만났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거의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었는데 사진촬영은 하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해 아래로 내려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룡산성은 지룡(지렁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견훤의 탄생 설화에 기원을 둔다. 견훤산성 혹은 호거산성으로도 불린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공격하기 위해 쌓았지만 성은 이후로도 많은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김사미의 난때는 농민군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고, 임진왜란 때는 청도 의병장 박경전과 의병들이 이 산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전망바위를 지나며서 또 다시 암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험스럽지가 않다. 능선을 따라 암릉이 날을 세웠지만 오르내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즐기면서 걷기에 딱 좋은 코스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릉의 특징들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 곳곳에서 시야가 트이는 것이다. 전면으로 억산을 비롯해 범봉, 운문산, 가지산, 상운산, 고헌산, 쌍두봉, 문복산, 옹강산 등이 시계반대 방향으로 펼쳐지고 내원암과 운문사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운문사 가람은 아늑하기만 하다. 주변의 산들이 연꽃잎이 되어 사찰을 감싸 안았다. 구름이 넘나든다는 운문사(雲門寺)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잘 알려진 절집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 제835)을 비롯한 7점의 보물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대웅보전 천장의 반야용선(용머리의 배)에 매달린 악착보살(악착동자)이다. 참고로 운문사는 진흥왕 18(557)에 한 신승(神僧)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절을 짓기 시작하여 동쪽에 가슬갑사(폐사), 남쪽에 천문갑사(폐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폐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600년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고, 930년에는 보양 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973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보은의 뜻을 담아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대작갑사의 명칭을 운문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부에서는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내원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길의 초입은 급사면(急斜面)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낭떠러지가 연상될 정도로 비탈진 사면이라서 주의가 요구된다. 이 구간을 지나면 산길은 지능선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이곳 역시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바닥이 작은 자갈투성이이다. 가만히 서있고 싶어도 자동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되는 상황이라는 얘기이다. 이를 배겨내지 못한 산길이 좌우를 오가면서 경사를 죽여보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고생하다보면 계곡에 내려선다. 물기 한 점 없는 마른 계곡이다. 이어서 계곡을 피해 난 길을 잠시 따르면 잠시 후 저만큼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내원암(內院庵)의 뒷 담장을 역할을 하는 대나무 숲이다.




내원암은 운문사의 암자 중 제일 오래되었으면서도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고려 중기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 )이 창건하였고 조선 숙종 때 설송대사(雪松大師)와 순조 때 운악화상이 고쳐지었다. 하지만 옛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현재의 암자는 1930년경에 옛 터를 낮추어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 당시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 도량이 되었으며, 1992년 무량수전과 멱우선실, 삼성각, 요사 등이 신축되고 1998년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문화재로는 높이 90, 60의 옥돌로 제작된 석조아미타불좌상(石造阿彌陀佛坐像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2)과 산신도(山神圖 :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72)가 있다.



마음을 비우고 가는 곳이라는 현판을 단 쉼터에서 쉬고 있던 여성대장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손짓을 해댄다. 다가가보니 경내에 연못을 파고 그 안에다 돌탑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 앙증맞은 불상을 하나를 얹었다. 그게 마애불(磨崖佛)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절은 깔끔하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비구니(比丘尼)들의 도량(道場)이 갖는 일반적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널따란 임도를 따른다. 부도전(浮屠田) 근처에서 잠시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참 내려가는 길에는 청신암의 표지석도 보인다. 문수선원, 사리암, 북대암, 내원암 등과 함께 운문사의 부속사찰 중 하나이다.



25분쯤 후 도로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왼편은 사리암, 운문사도 물론 왼편 방향이다.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운문사주차장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덕분에 난 삿된 것을 멀리 한다는 사리암(邪離庵)을 들러보지 못했다. 사리암이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시는 암자라기에 꼭 들러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통증이 심한 다리 때문에 중간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참고로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경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이후부터는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낸 소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솔바람길을 따른다. 솔바람길은 경북 청도 운문사 매표소에서부터 운문사까지 약 1.2km의 소나무 숲길이다. 길은 도로를 따르지 않는다. 족히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거대한 노송(老松)들 사이로 데크길을 따로 내두었다. 그래서 한층 더 풍취(風趣)가 돋보이는 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소나무를 거쳐 왔으니 당연히 솔바람이다. 그 바람 속에는 짙은 솔향기가 배어있다. 피톤치드(phytoncide) 또한 가득할 것이다. 소나무도 편백나무 못지않게 피톤치드를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치유(治癒)의 길이 된다. 한 걸음 내딛기조차 불편한 내 다리에는 큰 효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걷는 중에 법화경(法華經)까지 음미해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예전에는 게을렀더라도 지금 게으르지 않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산행날머리는 운문사주차장(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굵고 오래 묵은 소나무는 기본, 느티나무까지도 수백 년을 족히 넘겼다. 거기다 나무들 사이에는 일년생(一年生)의 꽃밭을 조성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古木)들과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화초(花草)들의 만남은 묘한 조합을 이룬다. 끝없이 돌고 돈다는 윤회(輪廻) 사상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닐까? 아무튼 솔바람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렇게 사념에 젖어 2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운문사매표소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으니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호거산과 지룡산,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작년엔가 맞은편에 있는 호거대에 올랐을 때는 과연 저 산을 오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너무 험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위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릴(thrill)을 느낄 수 있어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에필로그(epilogue),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천 번 생각에 한 번 실수라는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가운데는 잘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산행 중에 내가 처했던 상황이 딱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바위구간에서 내려섰다가 반대편 바위를 올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싫어서 건너뛴다는 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양쪽이 서슬 시퍼런 벼랑인지라 긴장한 탓에 다리에 힘을 풀지 못한 채로 뛰어내렸던 모양이다. 그런 상태에서 내 체중이 실리게 되어 근육이 뒤틀려버린 것이다. 잠깐의 방심에 대한 결과는 참혹했다. 산행 내내 통증으로 고생했고, 끝내는 중간에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꼭 들러보고 싶었던 사리암을 다녀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대신에 얻은 것도 많았다. 잠깐의 방심이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의 따뜻한 위로와 보살핌은 덤이었다. 내 상태를 체크해가며 하산을 도와준 솔채꽃대장과 솔바람길에서 나를 보자마자 상비약(근육이완제)부터 건네준 김영순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휴게소에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화장실을 다녀오는 나를 보고 자신의 상비약을 선뜻 넘겨주신 또 다른 일행 분께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