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봉(兄弟峰, 531.7m)-신산(神山, 457m)

 

여행일 : ‘16. 5. 29()

소재지 : 경북 구미시 선산읍과 옥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이문삼거리기차바위형제봉헬기장갈등고개부처바위신산천주교공원묘지S-Oil 주유소(산행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렇다면 산행 중에 만나게 되는 기차바위나 부처바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위다운 바위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위가 귀하다보니 다른 산에서라면 족보도 못 내밀 바위들이 명품바위로 등록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했나보다. 그건 그렇고 두 산은 이웃을 하고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형제봉은 도심(都心)속 공원(公園)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는 반면에 신산은 완전한 푸대접이다. 아니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 사람들의 발길까지 뚝 끊겨 있는 것이 대접이란 단어조차도 붙이기 어색한 정도이다. 때문에 신산은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산길이 거칠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나 봉()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신산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느니 부처바위에서 하산을 하다가 영봉정(迎鳳亭)과 비봉산(122.2m)을 둘러보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이문삼거리(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 I.C에서 내려와 68번 지방도를 타고 선산읍으로 들어온다. 읍내로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이문삼거리(선산읍 이문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가야산추어탕예스공인중계사사무소 사이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곳 외에도 선산중학교나 선산고등학교, 선산보건소, 선산순복음교회 등 여러 곳에 들머리가 있으니 편한 곳을 골라잡으면 될 일이다.



골목은 금방 끝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 민가(民家) 앞에서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밭두렁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오른편에 선산중학교 건물이 보인다. 또 다른 들머리가 되는 곳이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아파트는 주공아파트일 것이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흙길은 넓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그 길은 짙은 소나무 숲속을 따른다. 바람결 따라 흘러온 짙은 솔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여유롭다.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해 볼 기회다. 걷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떨어뜨린다. 이어서 가슴을 활짝 연다. 그리고 가능한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청량한 기운이 실핏줄을 따라 온몸을 누빈다. 심신(心身)은 한없이 상쾌해진다. 이런 걸 두고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것이다.



6분 후 갈림길(이정표 : 장원봉0.3Km, 형제봉 3.7Km/ 이문리(서당마을)0.4Km/ 이문삼거리0.4Km)을 만난다. 오른편은 또 다른 들머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10분 후 체육공원에 이른다. 이곳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요 아래에 있는 서당마을의 선비들이 도성(都城)에 있는 과거장으로 향할 때 넘어가던 길목이었던 뒷산 봉우리를 장원봉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고려 우왕 14년부터 조선 정조 14년까지 과거에 급제한 14명의 명단을 적어 놓았다. 안내판의 상단에 적힌 장원방이란 지명은 서당마을에 있었던 글방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장원봉을 지나서도 산길은 변함이 없다. 짙은 소나무 숲속으로 난 길은 여전히 폭신폭신하고 경사(傾斜) 또한 변함없이 평평하다.



그렇게 10분쯤 더 걸으면 왼편 산자락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기차바위라는데, 그 형상이 기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는 강아지의 머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복날이 가까워지니 헛것이 보인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기차바위를 지났다싶으면 정자(亭子)가 나타난다. 하지만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으니 구태여 올라볼 필요는 없다. 조망이 일절 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쉬었다 가라는 의미로 지어놓은 모양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조금씩 가팔라져 간다.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다른 산들의 오르막길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더 걸으면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바위 위로 올라가 볼 것을 권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이기 때문이다. 선산I.C 근처의 들녘과 함께 월류산 등 인근의 나지막한 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바위에서 내려와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오솔길처럼 좁아진 산길이 나름대로 풍치가 있어 보인다. 서둘지 않고 쉬엄쉬엄 오른다. 함께 걷던 김선배에게는 그마저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막걸리로 목이라도 축이고 가자는 것이다. 망설일 것 없이 퍼질러 앉는다. 반쯤 얼린 막걸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참맛이 아닐까 싶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막걸리를 비우고 자리를 턴다. 한 병을 갖고 유사장까지 낀 세 명이서 나누다보니 금방 동이 나버렸던 탓이다.



잠시 후 돌탑이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전망대에서 15분 남짓 되는 지점이다. 누군가는 이곳을 일러 서부재라고 했다. 하지만 나뉘는 길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옳지 않은 것 같다.



돌탑봉에서 안부로 내려선다. 지도(地圖)에 서부재로 표기된 지점이다. 하지만 오른편 사면(斜面)이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 길이 날 것 같지 않다는 얘기이다. 아무래도 지도가 잘 못된 모양이다. 이후로도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또 다른 돌탑봉에 올라선다. 그런데 이번의 돌탑은 거의 예술품 수준이다. 상부에다 돌 몇 개를 신기(神技)에 가깝게 쌓아 놓았다. 아슬아슬한 것이 바람만 조금 불어도 금방 쓰러져 버릴 것 같다. 혹자는 이곳을 비봉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봉산은 따로 있다. 신산보건소 근처에 있는 122.2m봉이다. 형제봉 등 선산의 산들을 펼쳐 놓았을 때 봉황의 머리 부분이 122.2m봉이라니 비봉산의 명찰은 그곳에다 달아 놓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봉우리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그리고 또 다시 위로 향한다. 산길은 여전히 고운 흙길이다. 거기다 주변은 소나무들 천지, 짙은 솔내음이 코끝을 간지른다. 저 내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힐링(healing)산행이 분명하다.




잠시 후 산불감시조소가 세워져 있는 언덕에 올라선다. 두 번째 돌탑봉에서 15분 만이다. 이곳은 조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뿌옇게 낀 연무(煙霧)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형제봉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119구호지점 표시목’, 그리고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형제봉 중 형봉(兄峰)이라 부른다. 얼마 전 작고(作故)하신 고() 한현우선생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그 이유를 형제봉(兄弟峰)이란 이름에서 찾는다. 이곳과 잠시 후에 오르게 될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531m) ,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러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높낮이에 따라 형()과 동생()으로 나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두 산을 아우르는 이름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하나를 비봉산(飛鳳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할 따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한 바퀴 다 뚫리지는 않지만 청화산과 냉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망은 운이 좋을 때나 가능한 모양이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사위가 희뿌옇기 때문이다. 발아래에서 ‘S-Line'으로 펼쳐지고 있어야 할 낙동강과 드넓은 선산들녘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더 넓은 조망을 바란다는 것이 어쩌면 언감생심(焉敢生心)일 것이다.



신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중간에 작은 오르내림도 끼어있음은 물론이다. 형제봉을 지나면서부터 산길은 기양지맥(岐陽枝脈)을 따른다. 기양지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국수봉(794.2m) 남쪽 600m지점인 734.2m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백운산(631m)과 기양산(705m), 수선산(683m), 형제봉(532m), 신산(457m) 등을 일구어 낸 후, 감천(甘川)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구미시 서원마을(선산읍 원리)에서 그 맥을 다하는 45.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감천의 북쪽 울타리가 되며 북으로는 병성천을 흘려보낸다.



15분 후 안부사거리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7분 정도 치고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온다. 일부 사람들이 형제봉 중 아우()봉이라 주장하는 봉우리이다.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것이 아직도 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헬기장 근처에서 왼편으로 길(이정표 : 갈등고개/ 솔바람길(마당숲)1.3Km/ 헬기장20m, 형제봉 0.8Km)이 하나 나뉜다. 신경 쓸 필요 없이 갈등고개로 향한다.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곳도 역시 상당히 가파르게 떨어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완만하게 변한다. 그리고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헬기장을 내려선지 12분 만에 임도(이정표 : 부처바위/ 옛길 합류80m/ 선산복합체육시설3,3Km)를 만난다. 오른편 임도를 따를 경우 선산시내로 연결된다. 임도를 가로지르면 침목(枕木)으로 만든 계단이 나타난다. 부처바위는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야 한다.



1~2분 후, 이번에는 갈등고개이다. 이정표(부처바위 1.5km, 휴양림(옛오솔길) 1.2km/ 뒷골(체육공원) 1.6km/ 임도 0.1Km, 형제봉 1.1Km)119의 구호지점표시목이 세워져있다.



갈등고개에는 이정표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숲길 따라 도보여행 길의 이정표이다. 구미시에서 조성한 일종의 둘레길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경상북도 차원에서 만들었을 테고 말이다. 하여간 이 도보여행길 중 구미 나드리길은 낙동강 물줄기 따라서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길, 즉 신행(新行,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신방을 치른 뒤 신랑집으로 가는 의식)이나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갈 때 걸었던 옛길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니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 걸어볼 일이다. 느릿하게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시절 그들이 느꼈을 것들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흙길은 아예 폭신폭신할 정도이고 경사 또한 평지나 다름없다. 그래서일까 MTB(mountain bike)를 타는 사람들도 보인다. 비켜줬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지나간다. 예의가 바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방금 전 등산객의 안전과 숲길 보호를 위해 자전거나 오토바이의 운행을 자제해 달라는 구미시청의 현수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의 이전에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갈등고개에서 9분쯤 더 걸었다싶은데 곤충을 닮은 바위가 나타난다. 부처바위란다. 바위의 옆에다 부처바위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과 119구호지점표시목등 기본적인 시설 외에도 운동기구와 평상, 그리고 충혼탑에서 이곳까지 걸었을 때 소요되는 칼로리의 양을 몸무게별로 구분해서 적은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쉼터의 기능을 겸하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이곳 선산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라는 증거일 것이다.



부처바위는 바위의 생김새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갈라져 있는 바위들이 붙어있다고 해서 붙여진(사투리로 부처진‘)바위라는 설()도 있다. 두 번째 설이라면 몰라도 첫 번째 설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옆으로도 모자라 바위의 위까지 올라가봤지만 어떠한 각도에서도 부처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방금 지나온 형제봉은 물론이고, 북쪽과 남쪽으로 시야가 열린다. 지금은 비록 연무(煙霧)로 인해 흐릿할 뿐이지만 날씨가 좋을 경우 상주방면의 낙동강과 금오산이 눈에 들어올 것 같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부처바위 근처 갈림길에서는 왼편이다. 잠시 후 무명봉과 운동기구 및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봉(437m)이 연이어 나타난다. 둘 모두 갈림길이 나뉘지만 망설일 필요 없이 왼편방향이다. 신산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영봉정을 거쳐 비봉산으로 가고 싶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437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극도로 나빠진다.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가 하면 울창하게 우거진 잡목(雜木)들이 등산로까지 점령해버렸다. 악전고투를 치러야만 진행이 가능한 구간이다. 1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를 30분이나 걸려서야 이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두어 곳의 안부를 오르내리다보면 드디어 신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형제봉을 출발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신산은 산의 정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능선을 따라 난 길의 한 부분으로 보일 따름이다. 정상표지석을 세우지 않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 흔한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정상표시 코팅지(coating)’가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끔 함께 산행을 이어가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매달아 놓은 것인데 고마운 일이다. 가끔가다가 엉뚱한 곳에다 표지판을 매단다고 해서 다른 산꾼들에게 원망도 많이 듣지만 말이다.


산길은 신산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직진, 즉 왼편으로 난 길은 선산읍과 옥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능선길이다.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하산을 시작한다. 신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희미해진다.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잡목들이 능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자칫 길을 찾느라 헤맬 수도 있는 구간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다. 능선만 따른다고 생각하고 진행하다보면 곳곳에서 길의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르다보면 철조망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은 곳도 보인다. 약초(藥草)를 재배하고 있으니 들어오지 말란다. ‘감시용 카메라까지 설치했다는 걸로 보아 철조망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단출입을 할 경우에는 책임을 묻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저리도 표현이 사나운 걸 보면, 남이 애써 기른 작물(作物)을 넘보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제 그만 우리네 주변에서 사라져야 할 세태(世態)이다.



6~7분쯤 걸었을까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435.3m봉이다. 일부 지도에는 이곳을 신산(神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보현산(普賢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여간 이곳에는 동강난 삼각점이 하나 박혀있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통과해 버렸다. 삼각점도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리본을 찾아가느라 땅바닥을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난 오늘도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곱씹어야 하는 하루가 되어버렸다.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어렴풋이나마 낙동강이 나타난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들은 만경산과 청화산, 그리고 냉산일 것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전망 좋은 바위를 만난다. 형제봉과 금오산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형제봉 산줄기의 끄트머리에는 선산시가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두어 번의 갈림길 흔적들을 만나지만 개의치 않고 지나친다. 능선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아주 또렷한 갈림길을 만난다. 신산 정상에서 출발한지 25분 만이다. 왼편 방향에 종주산행이라고 적힌 리본이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이곳에서 기양지맥과 헤어지는 모양이다. 길의 흔적도 역시 왼편이 훨씬 더 또렷하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그 가파름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길의 흔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개척 산행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방향을 가늠해가며 아래로 향한다. 능선은 거칠기 짝이 없다. 싸대기 몇 대는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묘() 몇 기()가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천주교공원묘지라고 하던 곳인 모양이다.



묘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좋아진다. 제법 너른 데다 경사까지 완만한 것이 임도로 봐도 되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5분 정도를 더 내려오면 민가(民家)가 나온다. 이쯤에서 고생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산행날머리는 S-Oil 주유소(선산읍 신기리)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겨우 승용차나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지만 깔끔하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는 길이다. 중간에 거대한 편백나무들을 만난다. 나무들이 울타리를 친 공터의 한가운데에 캠핑 트레일러(Camping Trailer=Caraban)’ 한 대가 놓여 있다. 유원지로라도 조성하려는 모양이다.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16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S-Oil 주유소와 함께 신축중인 아파트단지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느긋하게 즐겼던 간식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백마산(白馬山, 715.5m)-고당산(姑堂山, 596.8m)

 

산행일 : ‘16. 5. 21()

소재지 : 경북 김천시 조마면·감천면·농소면과 성주군 벽진면·초전면의 경계

산행코스 : 봉곡리고방사백마산전망바위별미령고개삼거리고당산왕복금오지맥갈림길임도고향농원(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백마산과 고당산은 금오지맥에 적을 두고 있는 산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 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은 없을 것 같다.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기 때문이다. 가끔, 그러니까 백마산 일원에서 화강암들이 지면으로 돌출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육산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거기다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715m에 불과할 정도로 산세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보니 기암괴석 등의 눈요깃거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眺望) 또한 백마산 정상 등 몇 곳을 제외하고는 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것은 등산로일 것이다. 정비가 일절 되어있지 않은 탓에 길의 흔적을 찾기조차 힘들 정도로 잡목과 넝쿨식물들이 능선에 들어차 있는 것이다. 만일 산 아래에 위치한 고방사마저 없었더라면 산꾼들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지맥을 하는 사람들이나, 봉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시간을 내가면서까지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는 산으로 치부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고방사 입구(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경부고속도로 동김천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타고 거창방면으로 달리다가 김천혁신도시의 월곡2교차로(김천시 농소면 월곡리)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를 통과한다. 이어서 군도(郡道 : 농남로)를 따라 들어가다 율곡천()에 놓인 농소교(: 농소면 월곡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의 사거리(봉곡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고방사 입구(봉곡리)에 이르게 된다. 부근에 사실마을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참조한다.




고당사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고당사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고방사에 들르지 않고 곧장 산행을 하고 싶다면 버스가 들어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사실마을로 들어서면 된다. 사실(寺室)이란 마을 이름은 고방사(高方寺)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론 마을에 새가 많다고 해서 새실 또는 새 조()자를 써서 조곡(鳥谷)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고당사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 언덕 아래에 제법 규모가 큰 사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백련사라는데 특이하게도 평지에다 터를 잡았다.



고방사로 들어가는 길은 여름철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봐야한다. 햇빛을 가려줄 나무들이 없어 뙤약볕에 곧장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햇볕을 가려줄 나무들은 고방사에 거의 다 이르러서야 만나게 된다.



15분 후 제법 너른 주차장이 나타난다. 도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스님들의 주차장은 위에다 따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하여간 주차장의 왼편에는 일주문(一柱門)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돌계단을 통해 사찰에 오르도록 되어있다. 사찰의 일주문에는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곳 또한 그런 이유로 세운 게 아닐까 싶다. 일주문과 돌계단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내라는 통과의례로 말이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힘들다. 세속의 번뇌를 씻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왼편에 보이는 부도(浮屠)들을 눈에 담다보면 4분 후에는 사찰의 앞마당에 올라서게 된다. 고방사(高方寺)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고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418(눌지왕 2)에 아도(阿度)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당시의 이름은 고방사(古芳寺)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법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탔으나 1636(인조 14) 옥청(玉淸)과 현철(玄哲)이 적묵당과 설선당을, 그리고 1656(명종 11) 학능(學能)이 청원루를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9(숙종 45) 수천(守天)이 옮겨서 중창한 것이다. 원래의 절터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1떨어진 곳에 있는 약수터 자리에 있었는데, 그곳에 빈대가 많아서 사람이 머무를 수 없었으므로,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헐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현재의 고방사는 1981년에 주지인 법전화상이 중흥한 것이다. 감로당을 이전 개축하고 관음전, 삼성각, 향로실, 사천왕문, 범종각, 청원루 등을 신축하였으며 보광명전을 해체, 복원하고 3층 석탑 등을 새롭게 건립했다. 문화재로는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7)’이 있다.




삼성각 옆을 지난다. 길이 나있어서이다. 하지만 사찰의 채마전(菜麻田)으로 보이는 밭에서 끝나버린다. 그렇다고 되돌아나갈 수도 없기에 막무가내로 왼편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그리고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절에서 대략 4~5분 정도가 걸렸다. 왼편에 능선을 따라 난 오솔길이 보인다. 이로보아 절의 사천왕문 근처에서 곧장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능선은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로 시작된다. 오늘 산행은 워밍업(warm up)을 할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아니 고방사까지 한참을 걸어왔으니 워밍업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쳐도 되겠다. 아무튼 산길은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꿈틀대고서야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양새이다.



9분 후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따가 오르게 될 고당산 뒤로 수많은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황악산이나 삼도봉, 민주지산 등이 아닐까 싶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감천면의 들녘이 제법 널따랗다.





바위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렇다고 암릉으로 볼 수는 없다. 그저 딛고 올라서면 그만일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조망이 터진다. 바위답지는 않지만 바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7분 후에는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천시가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행 초입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비닐 끈이 언제부턴가 거의 공해 수준으로 늘어나버렸다.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이 부근에서 송이버섯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가을철 산행지로는 적합하지 않겠다. 눈치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오해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고층아파트들이 만들어내는 숲도 보인다. 김천혁신도시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쯤 되면 주능선에 올라선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백마산 정상1200m, 농소면 노곡길 2600m/ 농소면 봉곡리1700m)를 만난다. 왼편은 봉곡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아까 산행 들머리에서 헤어졌던 사실마을로 들어가는 길과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주능선 만난 산길은 그 사나웠던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여유로운 산길이다 보니 시선까지도 자유롭다. 간간히 터지는 조망을 즐기며 걷는 호젓한 산행이 이어진다.





20분 남짓 후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백마산 정상200m/ 노곡리1600m/ 봉곡리2700m)를 만난다. 이곳도 역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았다. 나무 그늘이 짙은 뛰어난 쉼터이다.



산길은 삼거리를 지나면서 약간 가팔라진다. 하지만 부담은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오르는데 부담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7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백마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한쪽 방향만 표시된 이정표(농소면 노곡리 1800m, 봉곡리 2900m), 그리고 이등삼각점(김천 27 1981 재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 하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국기봉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잘 정비된 모습이다. 아니 정비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정비를 하면서 사용할 통나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발전기로 보이는 기계까지 놓여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백마산의 원래 이름은 갈수산(渴水山)이다. 물이 귀한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음()이 변해서 걸수산(乞水山)으로도 불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풍수지리로 볼 때 말의 형상이라 하여 백마산(白馬山)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백마산은 신성한 산으로 알려져 왔다. 가뭄이 심할 때면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에는 무덤을 들이지 않는데, 묘가 들어설 경우 가뭄이 든다는 속설 때문이란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북녘으로는 김천시가지가 아득하고 그 오른편에는 구미시의 금오산과 칠곡의 영암산 등이 우뚝하다. 남쪽으로는 염표봉산과 염속산, 그 너머로는 합천의 가야산이 눈부시다. 서쪽도 고산준령들 일색이다. 백두대간의 황악산이 하늘 마루금을 그리며 힘차게 달려간다.




하산은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이다. 이제부터는 금오지맥을 따른다. 보드라운 흙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길의 사정은 좋지가 않다. 정비가 일절 되어있지 않아 잡목과 넝쿨식물들이 능선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쪽 방향으로만 길을 안내하고 있던 정상의 이정표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쪽은 아직까지 등산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안내였던 모양이다. 참고로 금오지맥(金烏枝脈)이란 수도산에서 동북으로 가지를 쳐 추량산, 삼방산, 고당산, 백마산, 금오산, 제석봉, 꺼먼재산 등을 일군 후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선산읍 어강나루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81.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6분쯤 걸었을까 능선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빗겨난 지점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바위로 표기된 지점이다. 바위에 오르면 농소면과 감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가 또렷한데, 그 오른편에 있는 김천시가지는 아득하기만 하다.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첫 번째 봉우리는 고맙게도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이어서 나타나는 680m봉과 670m봉은 꼭대기를 넘는다.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길은 또렷하지 않다. 거기다 가끔은 길이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능선을 따라 걷는다는 느낌으로 진행하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리고 나뉘었던 길 또한 다시 합쳐진다는 느낌이다. 참 잊고 지나갈 뻔 했다. 요 아래에 있는 마을의 이름까지 만들어 낸 특징, 즉 갈대밭을 말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몇 군데에서 갈대밭이 눈에 띈다. 비록 거대하지는 않지만 가을철에 찾을 경우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할 것 같다. 하여간 요 아래에 위치한 봉곡리에는 노산(蘆山)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에 갈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뒷산이 바로 백마산일지니 어찌 갈대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서두르지 않고 고도를 낮추어가는 내리막길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렇다고 가파른 구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가파르게 변하기도 하지만 금방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썼을 따름이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내려오면 별미령고개이다. 물론 백마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백마산을 넘어 성주로 연결되는 고개인 별미령(別味嶺)은 예부터 성주에서 서울로 갈 때 거쳐야하는 고개이다. 백마산의 갈대밭을 헤치고 고개를 넘다가 숨을 돌리며 걸치는 막걸리 맛이 일품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주군의 홈페이지에는 별미란 이름이 별뫼(성산, 星山)가 변한 것으로 적고 있다. 어느 설이 옳은 지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일 것 같다.



고갯마루에는 벽진(碧珍)이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이 하나 세워져 있다. 벽진면 청년회에서 세운 것이라는데 벽진의 다짐이란 제목의 글을 새겨 벽진가야(옛 성주가야를 뜻함)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고향' 이란 제목의 시가 적혀있다. 고개를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향수라도 불러일으키려는 모양이다.



도로를 건너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초입은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길은 또렷해진다.



잠시 후 울창한 소나무 숲을 통과한다. 짙은 솔내음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지쳐있던 육신이 가뿐해진다. 이런 게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의 효능이 아닐까 싶다. 질병의 치료나 예방은 물론 피로회복의 효능까지도 뛰어나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이 이어진다. 나무들도 어느새 참나무들 천지로 변해있다. 조망(眺望)도 일절 없다. 하지만 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오르막의 경사(傾斜) 또한 급하지가 않다. 다음에 오르게 될 고당산이 백마산보타 한참 낮다보니 서둘러가며 고도(高度)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30분 후 능선이 둘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물론 별미령에서 부터이다. 삼거리에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헌 비닐들만 어지럽게 널려있을 따름이다. 송이꾼들의 움막터인 모양이다. 우리가 따라갈 금오지맥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흐른다. 하지만 고당산은 오른쪽 방향이다. 주능선에서 살짝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당산 정상을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고당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헬기장을 만난다. 하얀 페인트로 쓴 ‘H'가 아직도 선명한 것이 현재도 사용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헬기장에 서면 건너편에 있는 고당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훌쩍 뛰어오르면 한 번에 닿을 만큼 가까워 보인다.



헬기장에서 안부로 짧게 내려선다. 이어서 맞은편 산비탈을 기다시피 오른다. 바위로 이루어진 탓에 오르는 게 생각보다 난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비록 거대하지는 않지만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다운 바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엎어지고 포개진 바위 무리들을 보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잠시 후 고당산 정상에 올라선다. 삼거리에서 8분 거리이다. 정상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데다 조망까지도 터지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개인들이 붙여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도 두 개나 보인다. 참고로 고당산의 옛 이름은 할미당산이라고 한다. 산의 아래에 할미당절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었는데, 절이 없어지면서 산의 이름도 고당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10분 조금 지났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금오지맥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지만 우린 왼편 지능선으로 내려선다. 첨부된 지도(地圖)에 표시된 하산코스보다 조금 이른 지점이니 참고한다.



길가에 핀 노랑꽃이 시선을 끈다. 널린 게 들꽃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김새가 가을꽃을 닮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하 수상하다 해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산 길도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다. 내리막길의 경사(傾斜)도 완만한 편이다. 산이 낮다보니 서두르지 않고도 고도를 낮출 수 있는 모양이다.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는 산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가끔은 조망까지도 터진다. 수도산 방향으로 연결되는 금오지맥의 산들이 잘 조망된다. 등산로를 메우다시피 하고 있는 잡목(雜木)들만 뺀다면 괜찮은 산길이라 할 수 있다.



지능선으로 갈아타고 15분쯤 지나면 오른편 산비탈로 내려선다. 산자락 아래로 난 임도(林道)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길은 없다. 길을 만들어가면서 내려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쉽지는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산행날머리는 고향농원(성주군 벽진면 용암리)

5분 후 임도에 내려선다. 이어서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수많은 축사(畜舍)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농장이 하나 저만큼에 나타난다.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고향농원이다.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하산지점인 별뫼산장에서 별미령고개 방향으로 100m정도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황우산(黃牛山, 600.8m)-미림산(美林山, 686m)

 

산행일 : ‘16. 4. 23()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명호수쉼터(명호교)570황우산윗고개삼각점(598m)미림산 서봉(686m)미림산 동봉(691m)상리마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황우산이나 미림산은 나름대로 산에 이력이 붙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하긴 높은 산이 많기로 소문난 봉화 땅에서, 700m에도 못 미치는 이런 산을 알고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거기다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볼거리 또한 없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송이버섯 채취지역이니 입산을 금()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을 굳이 볼거리로 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터지지 않는다. 산이 있을 경우 무조건 올라야만 하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지역의 인심(人心)까지도 별로이다. 사유지(私有地)에 승낙도 없이 들어왔다며 낫까지 들고 겁박(劫迫)하는 주민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송이 채취 철이 아니라서 굳이 그래야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도 말이다. 20년 이상 산을 타왔고,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의 산들을 올라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산행들머리는 명호수쉼터(봉화군 명호면 고계리)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영주로 온다. 시가지 초입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에서 36번 국도로 옮겨 울진방면으로 달리다가 봉화제2농공단지(봉화군 봉성면 금봉리)에서 내려와 오른편 918번 지방도를 타면 도천삼거리(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서 35번 국도(918번 지방도와 중복)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 들어가면 잠시 후 고계삼거리(명호면 풍호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나눠지는 918번 지방도로 옮겨 명호교()를 건너면 명호수 쉼터라는 작은 가게가 나온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영천수 쉼터앞 도로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도로를 건너자마자 청량산래프팅(rafting)’ 앞에서 오른편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른다. ‘승용차주차장안내판이 세워진 방향이다.



경작지 사이로 난 농로는 5분쯤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 산길은 왼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경사는 거의 없지만 길의 흔적은 또렷하지 않다.



잠시 후 왼편에 또렷한 길이 하나 나타난다. 농로가 끝나기 바로 전에 왼편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였는데, 그게 옳은 길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검정 비닐 덩어리가 보인다. 뼈대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홈이 파져 있는 걸로 보아 송이 움막 터인 모앙이다. 송이 철이 아니어선지 황량한 모습이다. 그런데 근처에 쓰레기봉지들 까지 널브러져 있어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여느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모양이다. 저런 몰상식한 사람들이라면 산을 찾지 않으면 어떨까 싶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산을 오를 때마다 이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번째 송이 움막이 나타난다. 이번 것은 뼈대만 세워져 있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황우산은 전형적이 육산(肉山), 바위다운 바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예 포기를 하고 오르는데 뭔가 눈에 쏙 들어오는 풍경이 나타난다. 보기 힘들 정도로 기이하게 생긴 고사목(枯死木)이다. 그래 이런 정도라면 볼거리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풍경은 이것 딱 하나 뿐이었다.



움막을 지나면서 산길을 가팔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준을 높여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또 다른 움막이 보인다. 이번 것은 뼈대에 온전한 비닐까지 씌어져 있다. 송이 채취 철이 아닌 요즘에도 누군가 이용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데도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솔향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 향기 속에는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만병통치약,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쯤 되면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570m봉이다. 산길은 정상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지만 그냥 치고 오른다. 정상의 생김새를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상은 그런 내 기대를 저버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바닥만한 바위 몇 개가 깔려있을 따름이다. 물론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도 있을 리가 없다. 조망 또한 꽉 막혀있다.



일단 570m봉에 올라섰다하면 산길은 편해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이 계속된다. 다음에 오르게 될 황우산 정상과의 고도(高度) 차이가 겨우 30m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구간에서 눈여겨 봐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능선의 소나무들이 제법 굵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길가 나무기둥에 입산금지, 송이버섯 채취 금지라고 쓰인 코팅지(coating)가 심심찮게 매달려 있다. 소나무가 저 정도는 되어야만 송이버섯이 자라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길게 쌓여 있는 축대(築臺)가 보인다. 오지(奧地)의 산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산성(山城)의 터를 닮았다. 하지만 내 상식으론 황우산에 산성은 없다. 그렇다면 화전민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가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분지의 바로 위가 황우산 정상이다. 대여섯 평 남짓한 황우산 정상은 산봉우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능선 상에 약간 솟아오른 한 지점으로 보일 따름이다. 정상에는 삼각점(판독 불가능) 하나만이 외로울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정표도 없다. 그저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주변의 잡목(雜木)들 때문에 조망 또한 없다. 참고로 황우산은 한 마리 황소가 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모양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물은 안동시를 눈앞에 둔 낙동강변의 물이다.



미림산으로 향한다. 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얼마나 왜소한지 벼랑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민망스러울 정도이지만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만난 바위였기에 그런 표현을 썼다.



이어지는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아니 제법 높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산길은 정상까지 오르는 것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친절하게도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산행을 편하게 해주고 있다.




산길은 한없이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다. 길가에 늘어선 아름드리 노송(老松)들 덕분일 것이다.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918번 지방도와 이름 없는 꼬맹이 산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오늘 산행은 꽃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능선 곳곳에서 철쭉 군락지들을 만날 수 있는데, 유난히도 크고 고운 철쭉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봐왔던 철쭉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 같네요’, ‘, 맞습니다. 맞고요집사람의 감탄에 장단을 맞추며 산행을 이어간다.




30분 후 송이 움막이 있는 594m봉에 올라선다. 오늘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터지는 곳이다. 건너편에 문명산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막 조망을 즐기려는데 누군가가 고함을 질러대면서 쫒아온 것이다. 아니 이건 숫제 욕설 수준이다. 잠시 후 산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왜 주인의 승낙도 없이 남의 땅에 들어왔냐며 윽박질러 댄다. 그런데 낫을 들고 있어 겁부터 왈칵 난다. 얼마 전 매스컴에서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나라에는 임자 없는 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유(國有)이거나 아니면 사유(私有)인가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산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등산객들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보호해야할 그 뭔가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설사 그럴 경우라도 입구에 금()줄을 쳐 출입을 막던지, 아니면 들머리에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을 붙여 놓는다. 그런데 이곳 황우산은 분명 그런 차단장치나 안내가 없었다. 다만 산행을 시작한지 한참 되고나서부터 입산금지, 송이버섯 채취금지라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금줄을 쳐 놓았다. 이는 금줄을 넘어서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지금은 송이 채취 철도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등산객이 들어오는 것이 싫다면 입구를 막아 애초부터 출입을 금지시키던지, 만일 그 정도까지 금하지는 않는다면 주인의 전화번호를 표기해 놓아 미리 양해를 구할 수 있게 하는 게 온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파출소에 신고하겠다는 주인장에게는 하산지점에서 뵙자는 답변으로 마무리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우격다짐을 계속해서 받아주기에는 산행시간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길은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만을 반복해가면서 이어질 따름이다. 당연히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능선의 왼편에는 금줄이 쳐져있다. 송이버섯이 많으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하긴 주변에 제법 굵은 소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송이버섯이 잘 자라나기도 하겠다.




이번에는 현수막(懸垂幕)이 보인다. 특수임산물 재배지에 산주의 동의 없는 입산을 금지하며, 허락 없는 임산물 채취는 불법으로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진단다. 근처에는 봉화군 진세 산양삼 영농조합에서 붙여 놓은 같은 내용의 경고판도 보인다. 이런 현수막을 산행들머리에 매달아 놓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싶다. 그렇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산행을 시작했을 수도 있었겠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그네들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몰상식한 일부 등산객들이 주인이 있는 임산물을 막무가내로 채취하는 것을 나도 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길은 마지막 봉우리(610m봉이 아닐까 싶다)에서 정상을 고집하지 않고 또 다시 우회(迂廻)를 시킨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서는 게 어렵지는 않다. 솔가리들로 다져진 비탈길이 미끄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황우산과 미림산의 경계인 윗재이다. 움막봉(594m)에서는 25분이 걸렸다. 윗재는 남쪽의 명호면 고지현(명호재)에서 북쪽의 재산면 옥동마을로 연결되는 고갯마루인데 아직까지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 놓았다.



미림산으로 가려면 맞은편 능선을 타야 한다. 하지만 우린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산행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가 그쪽으로 갈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산행을 편하게 해볼까 머리 꽤나 굴렸던 모양이다. 능선의 봉우리들을 아예 빼먹어버리려는 속셈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능선을 타는 것이 더 수월하다. 어차피 중간에 있는 598m봉에 올라서야 하는데 임도를 따를 경우 높여야할 고도(高度)가 오히려 더 늘어나버리기 때문이다.



하여튼 임도를 따르다보면 7분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편은 918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지현으로 가는 길이지 싶다. 1~2분 후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물론 길은 없다. 그저 초입에 보이는 묘()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묘역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산불이라도 났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경제림 조성을 위해 베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런 일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아직까지도 조림(造林)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주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하지만 발길을 잡는 방해물이 없어 오르는 게 어렵지는 않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기존의 산길을 만난다. 아까 윗재에서 제대로 진행했을 경우 이 길로 오게끔 되어 있다. 기존의 산길은 만나자마자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오르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윤선생님을 꼬드겨 위로 오른다. 물론 길은 없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은 삼각점을 발견한 것이다. 산악회의 리본들이 너절하게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598m봉이 아닐까 싶다. 선답자들의 글에 598m봉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미림산으로 향한다. 물론 능선을 탄다. 앞을 가로막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산길은 순한 편이다. 거기다 시야까지 탁 트인다. 발아래에는 이따가 하산하게 될 918번 지방도 주변의 마을들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올망졸망한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일월산과 통고산으로 보이는데 시계(視界)가 좋지 않아 구분은 불가능하다. 오늘은 전국에 미세먼지와 황사 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시야를 가로막을 정도로 그 농도(濃度)가 짙어진 모양이다.




잠시 후 산길은 험해져 버린다. 불에 탄 나무들이 뒤엉킨 채로 길을 꽉 매우고 있다. 쓰러진 나무의 아래를 기어나가거나. 나무들을 피해 새로 길을 만든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아예 나무를 넘을 수밖에 없다. 손이 까맣게 되지만 그 정도를 갖고 불평한다면 호강에 지쳤다고 봐야한다.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 틈새마다 온통 아카시아나무와 가시넝쿨들로 들어차 있어 한걸음 내딛기도 만만치가 않다. 할퀴거나 찔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심심찮게 싸대기까지 맞아야만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앞서가던 윤선배가 너무 예쁘다며 카메라를 치켜들고 계신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보는 꽃이다. 집사람이 상수리나무의 꽃이라고 알려준다. 옛날 산이 황폐했었을 때 사방(砂防)용으로 식재되었던 흔하디흔한 나무인데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끈질긴 삶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곳도 성공한 삶이다.



30분 가까이 악전고투를 치룬 끝에야 미림산(서봉) 정상에 오른다. 만일 등산로가 정상이었다면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거리이다. 하여튼 미림산은 주능선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빗겨난 곳에 뽈록하니 솟아오른 산봉우리이다.




지형도 상의 정상인 서봉(686m)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완벽한 민둥산이다. 그저 불에 타다 남은 나무 등걸들을 쌓아놓은 무더기가 보일 따름이다. 그러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눈치로 때려잡을 수밖에 없다. 하여튼 이곳에서도 조망은 좋다. 그게 산불이라는 좋지 않은 결과 덕분이니 이것 또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한 예가 아닐까 싶다.



다시 능선을 탄다. 이후부터는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만나지 않는다. 그저 조망이나 즐기면서 걸으면 된다. 그것도 무료하다면 산자락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고사리라도 뜯어볼 일이다. 부지런한 우리 집사람은 언제 그렇게 뜯었는지 일 년 동안 제사상에 올리고도 남을 양을 뜯었다. 그렇게 15분쯤 걸으면 미림산의 최고봉인 동봉(691m)에 올라선다.



한두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동봉의 정상도 역시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없다.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았다는 정상표시판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나무들이 검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산불의 영향이 이곳까지 미쳤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부터 쌓여있었다는 돌탑은 여전히 남아있다. 앞서간 누군가가 맨 위의 돌맹이에다 미림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진행방향표시지가 곧장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알기론 조금 더 능선을 타다 아래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 돌아갈 수도 없어 그냥 아래로 내려서고 본다. 그리고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아까 능선에서 만났던 상황은 이곳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길이 험했던 것이다. 아니 이곳은 애초부터 길이 아니었으니 길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검게 그을린 노송(老松)들이 가슴 아프게 만든다. 일제(日帝)의 잔재라는 송진 채취 흔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데, 끝내는 화마 속에서 몸부림치다 그 생명을 다한 것이다.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20분 정도를 내려오면 민가가 나타난다. 마침 집 앞에 수도 파이프가 보인다. 냉큼 쫒아가 물부터 마시고 본다. 산골에서 흘러나온 물이어서인지 감로수(甘露水)가 따로 없다. 물통에까지 채워 넣고 돌아서니 스님의 복장을 하고 있는 여성분이 내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여염집 모양으로 지어진 이 건물들은 암자(庵子)란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을 모신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동안 봐왔던 절간들은 그 외모만 보고도 부처님을 모신다는 느낌을 받았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상리마을

민가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비록 포장은 되어있지 않지만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계곡을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저만큼에 상리마을이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간식 때문에 중간에 쉬었던 시간이 10분을 채 넘기지 않았으니 온전히 걷는데 걸린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산불의 흔적이 길을 막지만 않았어도 3시간30분 안에 산행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학산(飛鶴山, 762m)-두륙봉(628m)-익말봉(627m)

 

산행일 : ‘16. 4. 16()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과 기계면, 기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탑골마을(탑정2)탑정저수지시남못능선비학산두릅바위두륙봉익말봉(627m)북동능선탑정저수지(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집채만도 못한 두릅바위가 이 산의 명물일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비학산의 정상과 두륙봉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기대할 수가 없다. 거기다 법광사에서 오르는 코스를 제외하고는 등산로 또한 버려지다 시피 방치되고 있다. 다만 장점이라면 보드라운 황톳길이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다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폭신폭신한 게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더 많은 산이라는 얘기이다. 모든 산을 다 올라보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산행들머리는 탑정저수지(포항시 북구 기북면 탑정2)

익산-포항고속도로 서포항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면으로 달리다가 화빈휴계소(포항시 북구 기계면 인비리)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921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탑정1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 비학산길로 들어서면 얼마 안 있어 탑골마을(탑정2)이 나온다. 마을에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참조한다. 대형버스의 주차가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이곳 탑골마을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속이 하나 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의 액운(厄運)을 막아주는 솟대를 세운다는 것이다. 전설의 흉조인 벽갈새가 마을에 날아들지 않게 하기 위해 비학산에서 가장 곧고 높게 자란 상록수를 베어다가 껍질을 벗긴 후 울긋불긋한 천과 새의 조각, 등불, 귀면 등으로 꾸며서 높다랗게 세운다고 한다. 이 솟대를 벽갈대라 부른다. 참고로 벽갈새란 2천 년을 묵은 까투리를 말한다. 까투리가 천 년을 묵으면 짐새가 되고, 그 짐새가 다시 천년을 더 묵으면 벽갈새가 된다는 것이다.(MBC 방송기사 참조)





마을회관 앞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가에는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탑들이 여러 개 늘어서 있다. ‘탑골이라는 마을 이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둑 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의 시멘트포장 길은 비학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오른편 길을 통해서도 정상에 이를 수 있지만 왼편의 비포장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조금이라도 더 산행거리를 늘려보기 위해서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오솔길 하나가 나타난다. 능선을 통해 비학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시남못이라는 자그마한 저수지에 이른다. 들머리에서 7분만이다.



시남못을 지나면 곧이어 컨테이너와 신축(新築)중인 조립식 건물이 각기 한 동씩 있는 부지가 나온다. 컨테이너 앞에 관음사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새로 짓고 있는 사찰(寺刹)인 모양이다. 그래선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관음사 부지를 지나 물기 하나 없는 계곡으로 들어서는 듯 하던 산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곧장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산길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이정표는 고사하더라도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잡목(雜木)들이 장난이 아니다. 잠시 한눈을 팔기라도 할 경우엔 싸대기라도 맞기 일쑤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올라온 능선의 생김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니 주능선은 아니고 지능선 쯤 되는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하고 38분이 지난 지점이다.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첨부된 지도(地圖)의 답사로(부산일보가 걸었던 코스)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부산일보 산행팀은 오르는 길에 감나무와 석축이 있는 마을터를 지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린 분명 마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거기다 시간상으로 봐도 능선에 올라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선두대장이 계곡을 따라 오르게 될 것이라고 했었는데 우린 분명 능선을 따라 올라왔다. 아무래도 산행거리가 조금 더 늘어난 모양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묘()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곳 비학산에 천하명당(天下明堂)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명당을 찾아 온 묘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포항사람들에게 이곳 비학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비학산의 정상과 동쪽 능선 어디쯤에 등잔혈이라는 천하명당이 있다고 했다. 묘를 쓸 경우 자손들이 번성한다는 속설(俗說)이 전해지는 곳이다. 하지만 대신 신광 벌판과 포항 일대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된다. 그동안 가뭄이 심할 때마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보았는데, 어김없이 몰래 써 놓은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분노한 사람들이 묘를 파헤침으로써 종종 송사(訟事)가 벌어지기도 했단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편해진다. 가끔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경사가 완만하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송(老松)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소나무 숲에 이른다. 청량한 바람이 인다. 선입감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내 가슴까지도 맑아진다. 사람들은 이런 재미 때문에 산을 찾는가 보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면 또 다른 능선에 올라선다. 이번에는 주능선인 모양이다. 왼편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성법령으로 이어지는 비학지맥(飛鶴枝脈)이고 말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이정표( 정상814m/ 찬물내기/ 수목원)가 세워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참고로 비학지맥(飛鶴枝脈)이란 낙동정맥의 709.1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남진(南進) 내지 남동진하면서 비학산과 도음산(383m) 등을 만든 후, 포항시 북구 우목리 방파제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5.3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후에도 산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오르막길임에는 분명하지만 힘이 들지는 않을 정도의 유연한 산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탑정 갈림길’(이정표 : 정상506m/ 탑정/ 수목원)을 만난다. 아까 저수지 근처에서 헤어졌던 산길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탑정(탑골) 갈림길을 지났다 싶으면 이제 정상에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길은 더욱 또렷해지고 경사 또한 더욱 유연해졌다. 마침 길가의 진달래 무리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으니 틈틈이 눈이라도 맞추며 걸어볼 일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드디어 비학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5분이 지났다.



정상에 올라서면 널따란 헬기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상표지석은 그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공터에 자리 잡고 있다. 삼각점(기계 22, 2004 재설)도 보인다. 하지만 그 흔한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서툴게 쌓아놓은 돌탑들이 두어 개 보일 따름이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주능선을 따르는 길 외에 큰재와 오봉을 거쳐 법광사로 내려가는 길이 하나 더 있다. 두륙봉으로 가는 길은 정상석이 있는 방향에서 열리니 참조한다. 참고는 비학산은 학()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산세(山勢)가 마치 학이 날아가는 형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알을 품던 학이 날개를 펴고 신광면 일대의 넓은 벌판 위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보금자리를 틀려는 학들이 심심찮게 찾아들기도 한단다. 특히 비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학마을 입구의 울창한 노송림(老松林)에는 왜가리와 백로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단다.



비학산 정상은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있는 헬기장으로 가면 시야(視野)가 뻥 뚫리기 때문이다. 왼편, 그러니까 동쪽에는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산이라곤 거의 없고, 있다고 해봐야 고만고만한 나지막한 산들뿐이다. 그 뒤에 아스라이 보이는 것은 동해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인 서쪽에는 낙동정맥의 산군(山群)들을 비롯해서 높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북쪽 또한 산들이 즐비하다. 천령산과 내연산 향로봉, 괘령산 등이다.




두륙봉으로 향한다. 통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으나 가파른 편은 아니다. 급경사가 없이 대체로 널찍하고 편안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0분 정도 내려가면 법광사갈림길’(이정표 : 자연휴양림2.7Km/ 법광사1.8Km/ 비학산 정상0.4Km)을 만난다. 법광사로 내려가는 첫 번째 길이 왼편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보다는 계속해서 능선을 따를 때 통과해야만 하는 바위가 더 눈길을 끈다. 마치 바위로 만든 문설주를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송신용(送信用)으로 보이는 철탑(鐵塔)을 지났다싶으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법광사2.0Km/ 자연휴양림2.5Km/ 비학산 정상0.6Km)이다. 아까 갈려나갔던 법광사가 이번에는 능선을 따르도록 표기되어 있다. 그만큼 법광사로 연결되는 길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자연휴양림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곧이어 무제능갈림길’(이정표 : 두릅바위/ 무제능/ 정상586m)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탑정갈림길’(이정표 : 활공장/ 탑정/ 정상791m)을 만난다. 참고로 무제등에는 제단(祭壇)이 있다. 여름철 한발이 극심할 때 민·관이 뜻을 모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 비학산은 신라시대 때부터 국가가 제사를 지내던 산들 중 하나였고, 요 아래 산록에 위치한 신라 고찰 법광사터도 풍수지리가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전해진다.



마지막삼거리, 그러니까 탑정갈림길을 지나면 갈림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평지와 같은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커다란 바위무리가 길 오른편에 나타난다. 비학산의 명물인 두릅바위이다. 하지만 크기나 생김새는 썩 뛰어나지 않아 보인다.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다 보니 과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두릅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그렇다. 이곳으로 오던 길에 유난히도 많은 두릅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두릅바위 위로 오른다. 아래서 볼 때와는 달리 제법 반반한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일품이다. 발아래에는 탑정지로 이어지는 골짜기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 올랐었던 비학산 정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두릅바위에서 내려와 산행을 이어간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키고 있다. 두륙봉의 정상표지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저 119구조지점(17) 표지판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다 들어가 보니 한현우선생의 정상표시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가끔가다 함께 산행을 해오는 분인데 코팅지에 적혀있는 걸로 보아 그는 이미 2년 전에 이곳의 답사를 끝낸 모양이다. 하여튼 두륙봉 정상은 유심히 살펴봐야만 할 곳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은 삼면봉(三面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광면과 기계면, 그리고 기북면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비학산에서 두륙봉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두륙봉 정상에서 또 다시 조망이 열린다. 코팅지가 있는 쪽으로 2~3m쯤 들어가면 바위벼랑이 나오면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산이라곤 거의 없는 신광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그 끄트머리에 아스라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 동해바다일 것이다.




익말봉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큰 오르내림이 없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봉우리를 오르내리고 있는데도 힘이 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참고로 두륙봉에서 조금 내려오는 곳에서 탑골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고 들었는데 발견하지는 못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119구조지점(15)’ 표지판이 붙어있는 걸로 보아 591m봉이 아닐까 싶다. 오른편은 탑골마을(자연휴양림)로 내려가는 길, 익말봉은 왼편을 따른다. 두륙봉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니 참조한다. 참고로 주능선은 우리가 가려는 익말봉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크게 방향을 트는데다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지능선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길을 잘 못 들어설 염려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비록 잠깐이지만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선 산길은 이후에는 다시 유연해진다. 중간에 봉우리들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골이 깊지 않기 때문에 큰 오르내림이 없다는 얘기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이 이어진다. 그저 능선만 따른다고 생각하고 이어가면 된다.




어쩌다 왼편의 나무들 사이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같은 비학지맥인 도음산이 아닐까 싶다.



두륙봉에서 출발한지 50분 남짓 걸으면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생김새가 기이하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인상적인 안부이다. 하지만 감상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맞은편에 보이는 오르막길이 만만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가뜩이나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데 경사까지 가파르다보니 더욱더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서서히, 그리고 묵묵히 오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드디어 익말봉 정상이다. 작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익말봉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까의 두륙봉 정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현우선생의 코팅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익말봉 627’이라고 쓴 작은 판자를 나뭇가지 위에다 살짝 올려놓았을 따름이다. 두륙봉에서 익말봉까지는 1시간10분 정도가 걸렸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온 곳을 기준으로 할 경우 2시 방향쯤으로 보면 된다. 11시 방향에서도 올라오는 사람이 있는 걸로 보아 그곳으로도 등산로가 나있는 모양이다. 하여간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을 6분 정도 내려오면 도톰하게 솟아오른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가끔 경사가 가파른 곳도 나타나지만 내려서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길 또한 또렷한 편이어서 길을 염려도 없다.





그렇게 30분 남짓 내려오면 널따란 밭이 나오고, 잠시 밭두렁을 따르다가 개울을 건너면 시멘트포장 임도가 나온다. 비학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탑정마을은 물론 왼쪽 방향이다.





임도의 아래는 탑정저수지, 제법 큰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물결은 한없이 잔잔하다. 숲으로 둘러싸인 탓일 게다. 녹음으로 물들어가는 짙은 숲속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저수지는 한마디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속에 잠겨있는 버드나무들이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모양이 주왕산 아래에 있는 주산지의 나무들을 영락없이 빼다 닮았다.



산행날머리는 탑정마을(원점회귀)

저수지의 멋진 풍광에 빠져 머뭇거리다 길을 나서며 잠시 후 둑에 이르게 되고, 산행을 시작하면서 지나갔던 갈림길을 만난다. 그리고 저만큼 아래에 탑정2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참고로 저수지 둑 아래 숲속에 정자(亭子)가 하나 지어져 있다. 산행을 마친 후 하산주를 마시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각화산(覺華山, 1177m)-왕두산(王頭山, 1046m)

 

여행일 : ‘16. 3. 5()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각화사주차장각화사능선삼거리사고(史庫)갈림길각화산왕두산동암각화사각화사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안전산악회


특징 : 각화산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사고가 있었던 산이다. 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군목(郡木)인 춘양목(春陽木)의 기개를 닮았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있단다. 그리고 왕두산은 각화산을 일군 능선이 남동 방향으로 약간 가지를 틀어 2km 정도 떨어진 곳에다 만들어 놓은 산이다. 두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서 바윗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암릉으로 분류할 정도는 못된다. 그러다보니 사고(史庫)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의미 외에는 특별한 눈요깃거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혹자는 각화산 일대의 춘양목을 꼽기도 하지만 인근의 다른 산들에 비해 굵기나 밀도(密度)가 한참 떨어진다. 하지만 고산준령들이 사람의 접근을 막아온 탓에 확실히 때를 덜 탔다.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호젓하게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각화사주차장(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일단 영주시내로 들어온다.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에서 36번 국도로 갈아타고 울진(봉화) 방면으로 달리다가 춘양교차로(봉화군 춘양면 소로리)에서 빠져나오면 춘양삼거리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88번 지방도를 타고가다 공세동삼거리(춘양면 석현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각화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가 필요하다. 공세동에서 각화사까지 들어가는 도로가 차량이 서로 비켜 지나갈 수 없는 1차선 도로라는 점이다. 양보의 미덕이 필요한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라서 산길을 걷는 맛은 덜하지만 길가에 늘어선 기괴하게 생긴 고목(古木)들이 그런 부족한 점을 메꾸어 주고도 남는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렇게 4~5분쯤 걸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천년고찰인 각화사가 나타난다.



절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커다란 비석(碑石) 하나가 보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이다.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귀부는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는 탓에 언제 어떤 경위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없어졌다는 저 비신(碑身)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마 최근에 복원해 놓았는가 보다. 하여튼 귀갑(龜甲)의 몸체는 6각형의 귀갑문양이 전면을 덮고, 그 속에 ()’자와 ()’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를 구경하고 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멋진 누각(樓閣)이 나타난다. 각화사(覺華寺)의 대문역할을 하고 있는 범종각(梵鐘閣)이다. 그런데 현판(懸板)에 적힌 산의 이름이 좀 의아스럽다. 각화산이 아니라 태백산(太白山)인 것이다. 각화사가 조선시대 때 각화산에 있던 태백산 사고(太白山 史庫)’의 수호사찰(守護寺刹)이었다고 하더니 그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옛날에는 이 부근 일대를 모두 태백산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긴 돌계단을 올라 절로 들어선다. 절은 3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맨 아래는 스님들이 머물거나 종무(宗務)를 보는 건물들로 보이고, 가운데 단에는 대웅전과 선원(禪院), 그리고 맨 위에는 산신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좁고 경사진 절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각화사(覺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76(문무왕 16)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1101(숙종 6) 국사 무애계응(無礙戒膺)이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쳐, 1777(정조 1)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 중의 하나인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하여 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한 뒤 8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국내 3대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3년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사고(史庫)와 절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1945년 해방 후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1926년에 달현(達玄)이 법당을 비롯한 다섯 동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 금오(金烏)가 요사채를 중건하였고, 1979년 범종을 주조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2층의 누각인 범종각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인용)




산길은 각화사의 오른편에 있는 이견암(二見庵)에서 열린다. 암자의 오른편 귀퉁이에 있는 해우소(解憂所)의 옆을 지나면 임도에 가까운 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산길은 오른편 산자락으로 나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표현은 쉽게 했어도 들머리를 찾기는 그다지 쉽지가 않다. 이정표나 등산안내도 등 산행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시설물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까 주차장 근처에서 수행 정진하는 선원이므로 입산을 금한다는 안내판을 보았는데, 이 모든 게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이럴 경우에는 스님이나 보살님을 붙잡고 물어볼 것을 권한다.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잘 가르쳐 주시니 어려워할 필요도 없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지레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길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죽죽 뻗어 오르고 있다. 볼을 스쳐가는 바람결에선 진한 솔향이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저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 있을 것이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이런 걸 보고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하는가 보다.



소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색깔이 약간 불그스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저런 소나무들을 일컬어 적송(赤松)이라 부른다. 그 외에 금강송(金剛松)이나 황장목(黃腸木), 홍송(紅松)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지역 사람에게는 춘양목(春陽木)이란 이름으로 통한다. 1950~60년대 춘양역을 통해 질 좋은 금강소나무가 전국으로 실려 나갔던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눈에 거슬리는 소나무들도 눈에 띈다. 나무의 일정부분이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송진을 채취한 흔적일 것이다. 다른 산들에서 보았던 저런 흔적들은 대부분 일제(日帝)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곳도 그때의 아픈 상처가 아닐까 싶다.



산길로 들어선지 12분 후 첫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정표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른편은 태백산 사고지(太白山 史庫址)’로 가는 길이지 싶다. 각화산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산길은 언제부턴가 소나무 대신에 참나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묵은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산불의 후유증일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20분 남짓 더 오르면 주능선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석현리에서 올라오는 능선 길이다. 오늘 내가 따라나선 안전산악회에서는 이 코스를 택했지만 난 각화사를 들머리로 잡았다. 절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하여간 각화산 정상은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그 가파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거기다 보드라운 황톳길이어서 걷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하지만 다른 볼거리는 일절 없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또 다시 춘양목 군락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아까 각화사 근처의 군락지에 비하면 왜소(矮小)해도 한참은 더 왜소하다.



능선에 올라선지 20분 조금 못되면 또 다시 삼거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이정표(각화산 1.0Km/ 사고지 0.3Km/ 석현2리 공세동 2.9Km)까지 갖춘 삼거리이다. 오른편으로 300m쯤 내려가면 태백산 사고지(太白山史庫 : 사적 제348)’ 터에 이르게 된단다. 태백산 사고는 임진왜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어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4개의 외사고(外史庫 : 태백산, 오대산, 강화 정족산과 묘향산 또는 적상산) 중 하나이다. 선원각(璿源閣)과 실록각(實錄閣) 등 이층짜리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빈 터로만 남아있다. 300여 년 동안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실록은 서울대학교로 이장(移藏)되었다가 현재는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 각화산은 비록 태백산 줄기이기는 하지만 주봉(主峰)에서 남쪽으로 약 12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일대의 산을 모두 태백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사고의 이름 또한 태백산사고가 되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해도 이슬비였던 것이 언제부턴가 안개비에 가까운 는개로 바뀌어 있다. 덕분에 걷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안개는 걷힐 줄 모르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짙어져 가는 느낌이다. 음산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깐씩이나마 하늘이 열리는 곳으로 나오면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이다.



또 다시 무덤이 나타난다. 각화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유난히도 무덤이 많지 않나 싶다. 어쩌면 등산로 곳곳에 매달려 있는 천하명당 조선십승지라고 적힌 리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유명한 명당이라면 그대로 놔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십승지(十勝地)란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로서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 중의 하나이다. 십승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중의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그중의 봉화가 이곳 춘양 땅을 이르는 모양이다. 참고로 십승지의 구체적인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을 드는 게 보편적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인용)



사고지 갈림길에서 2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차돌배기 8.8Km/ 왕두산 2.2Km/ 태백산 사고지 1.1Km/ 석현2리 공세동 3.6Km)가 나온다. 각화산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서 오르게 될 왕두산은 오른편 방향이다. 각화산의 정상에 오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갈림길에서 4~5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각화산 정상이다. 주차장에서 1시간25분이 걸렸다. 빗길이라서 천천히 걷기도 했지만 각화사를 둘러보는데 든 10분 정도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각화산이란 지명은, 본래 서동리 3층 석탑(보물 제52)’이 있는 곳, 즉 춘양중학교(춘양면 서동리) 자리에 있던 람화사(覽華寺)를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람화사를 생각한다.’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조금 전에 보았던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부산의 산도깨비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 하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정상석을 거론 안할 수가 없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임시방편으로 만든 정상석인데 길쭉한 자연석에다 각화산이라고 써 놓았다. 앙증맞은 것이 반듯하게 만들어진 여느 정상표지석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온다. 하지만 삼각점(춘양 305, 2004 재설)이 있는 걸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을 정상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삼각측량의 기준점인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이라는 게 본디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헬기장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커다란 바위들까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바윗길은 중간에 가끔 작은 오름짓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물을 흠뻑 머금은 바위들은 딛기가 부담스럽고, 중간 중간에 미끄러운 맨땅들이 나오지만 미끄러운 탓에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다행인 것은 언제부턴가 비가 그쳐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안개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침침한 바윗길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안개가 끼어 좋은 점도 있다. 굵고 오래 묵은 참나무들이 짙은 안개 속에 잠기면서 기괴한 풍경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바윗길이 끝나면 보드라운 흙길이 나타난다. 낙엽까지 도톰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험한 바윗길을 고생해서 내려온데 대한 보상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잠시 후, 그러니까 각화산 정상을 내려선지 40분 후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금봉암(동암)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10분 후 또 다른 갈림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어쩌면 이곳 역시 동암으로 연결될 것이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두 번째 갈림길을 지나면서는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뀐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5분 후에는 왕두산 정상에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각화산에서 왕두산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참고로 이곳 왕두산은 산에 불이 나면 왕이 바뀐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산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왕두산 정상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가늘고 긴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목을 한가운데에다 꽂아 놓았다. 비록 윗부분이 썩어 문드러졌을 정도로 낡았지만 없는 것보다야 한결 나은 풍경이다. 그리고 삼각점(춘양21, 1995재설)과 함께 개인이 만든 정상표지판도 두 개나 달려있어 인증사진을 찍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태백산이 조망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거기다 습기까지 잔뜩 머금고 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잠시 후 널따란 헬기장을 만난다. ‘오늘은 헬기장 천지네요집사람의 말마따나 웬 헬기장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전에 아산에 있는 태학산에 갔을 때 헬기장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곳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헬기장을 지나면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른다. 질퍽거리기까지 한 산길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얼마 후 엄청나게 굵은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산자락 모퉁이를 돌면 작은 암자(庵子)가 하나 나타난다. 각화사의 부속암자인 금봉암(金鳳庵)이다. 동암이라고 부르니 참조한다. 정상에서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암자는 선방의 수좌(首座)처럼 단아한 모습이다.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친근한 감마저 든다. 그래선지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단다. 스님들의 참선도량이기 때문이란다. 저 멀리 안동의 학가산까지 시야(視野)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참선도량이 깃들이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겠는가. 행여 참선에 방해라도 될까봐 소심스럽게 경내(境內)로 들어선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아무래도 동안거(冬安居)가 끝났나 보다.



암자의 담벼락 아래에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다. 맹추위가 아무리 훼방을 부려도 찾아오는 계절만은 막을 수가 없었던가 보다. 심심산골 그것도 이렇게 높은 암자에까지 꽃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금봉암에서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게 된다. 암자가 차량이 오를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가 오래된 고목(古木)들이 보이는가 하면 아직도 그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단풍나무들을 만난다.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일직선으로는 뚫을 엄두를 내지 못한 산길은 좌우로 꿈틀대면서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올라 다니느라 고생깨나 하겠다고 생각하며 내려가는데 마침 스님 한분이 올라오고 계신다. 힘이 들 법도 하지만 표정은 여간 평온한 게 아니다. 미소와 함께 건네 오는 말씀 역시 괜찮단다. 하기야 고생을 하며 오르는 것 자체가 바로 참선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각화사주차장(원점회귀)

왕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난 후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20분 남짓 내려서면 저만큼에 각화사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3시간10분이 걸렸다.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느긋이 걸은 결과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아침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만큼 시간에 여유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사랑나무가 아닐까 싶다.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뒤엉켜 있는 것이 마치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아 사랑나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다른 하나는 매나무이다. 집사람이 먼저 발견한 것인데 고목(古木)의 꼭대기가 흡사 매의 부리를 빼다 닮았다.


학일산(鶴日山, 692.9m)-통내산(筒內山, 674.4m)-토한산(630m)

 

산행일 : ‘15. 12. 19()

소재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과 매전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동곡고개소바위되배기산학일산동내산토한산처진소나무매전교아래 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적절한 암릉에다 조망(眺望), 그리고 계곡이 있어야 좋은 산이겠지요.‘ 산행이 끝나갈 즈음 같이 산행을 하고 있던 일행이 넌지시 건네 오는 말이다. 오늘 오른 산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 오른 산들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가 첫 번째로 들먹인 암릉은 아예 없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올려다본 산은 곳곳에 바위벼랑이 발달해 있었는데 막상 능선에서는 바윗길을 일절 만나볼 수 없었다. 그리고 조망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학일산을 오르는 길에 두어 번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을 빼놓고는 내놓을만한 조망은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 조건인 계곡은 여름이 아니니 거론하지 않기로 하겠다. 거기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 등산로 상태가 형편없다는 얘기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탓인지 등산로는 온통 잡목(雜木)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길 찾기도 쉽지 않은데다. 잠깐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일 정도로 말이다. 혹시라도 다음에 내가 아는 사람이 이 산들을 가겠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갖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산행들머리는 동곡재(청도군 금천면 동곡리)

중앙고속도로 청도 I.C에서 내려와 우회전, 잠시 후 모강교차로(청도읍 원정리)에서 좌회전하여 20번 국도를 타고 건천·포항 방면으로 달리면 매전면 소재지인 동산리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동곡재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금천면과 매전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마루로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갯마루에서 학일산 방향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는 특이하게 생긴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도를 받치는 다리에다 이정표(학일산 정상 **Km/ 삼족대 2.5Km)를 매달아 놓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비를 하지 않은 탓에 안내도는 낡을 대로 낡았고, 이정표의 학일산 방향 거리표시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런 무관심한 방치는 산행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임도로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차단기를 지나면 곧이어 산길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산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어서 분묘(墳墓) 몇 기를 지나면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러다 끝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흙냄새가 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언젠가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산길의 경사(傾斜)가 너무 심할 경우,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숙일 수밖에 없는데, 그 정도가 코가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된다는 얘기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길은 일반적으로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오름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위로 향하고 있다. 더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숨이 턱에 차게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건너편에 갓등산이 마치 삿갓처럼 뾰쪽하니 솟아있다. 누군가 갓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갓등산의 오른편 뒤쪽에는 사자봉, 문바위, 북암산, 구만산, 흰덤봉 등 운문지맥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전망바위를 지나서도 산길의 여전히 가파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까보다는 조금 덜한 편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오르면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이따가 오르게 될 통내산과 토한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왼편에는 아까 보았던 운문지맥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은 비록 짙은 연무(煙霧)로 인해 그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현저히 떨어뜨린다. 언제 그렇게 가팔랐느냐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10분 남짓 후에는 삼각점이 있는 563.2m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삼각점 외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지만 눈에 익은 표지판 하나가 이곳이 563.2m봉임을 알려주고 있다. ‘.라는 독자적인 표기를 하고 있는 최남준씨의 작품이다. 누군가가 그 팻말 위에다 소바위되배기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아마도 이 봉우리의 이름인가 보다.

 

 

 

 

563.2m봉을 지난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덕분에 산행은 수월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15분 후에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하지만 길에서 빗겨나 있으므로 일부러 올라가지 않는다면 그 기능을 잃게 되는 바위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시야가 툭 트인다. 왼쪽에는 아까 보았던 통내산과 토한산이 또 다시 나타난다. 이번에는 나무들 때문에 아랫도리가 잘린 모습이다. 오른편은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저 멀리 운문댐과 반룡산, 발백산, 장육산, 사룡산, 단석산 등이 확인된다. 멋진 풍광이다. 맨 앞에 흉물스런 채석장이 떡하니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수월한 산길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걷다가 마지막 오르막길에서 잠깐 피치(pitch)를 올리면 드디어 학일산 정상이다. 동곡재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5분만이다. 정상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잡초(雜草)만이 무성하다.

 

 

 

정상에는 말뚝모양으로 깎아 만든 작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동곡21/1988복구), 그리고 이정표(통내산.돈치재**km/송림사1.7km/등곡재2.5km/삼족대 2.5Km)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아차! ‘사랑이라는 아호(雅號)가 첨부된 정상표지판이 하나 더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그건 그렇고 헬기장인데도 불구하고 정상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가지산과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 산군이 살짝 보일 따름이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서면서 통내산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어수선하게 매달려 있다. 꽤나 많은 산악회에서 다녀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얼마 후부터는 지금 보고 있는 수많은 리본들이 무색할 정도로 산길은 사정이 나빠져 버린다. 이는 이곳을 찾는 산꾼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증거이지 않나 싶다.

 

 

잠시 후 삼거리(이정표 : 통내산·돈치재 2.4km/ 학일온천 2.4km/ 학일산 0.4km)를 지난다. 오른편은 학일온천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통내산은 곧장 능선을 따르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많이 가팔라진다. 하지만 바닥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커다란 바위무더기를 만난다. 이름 하나쯤 갖고 있어도 되겠다 싶어 기웃거려보지만 끝내 발길을 돌리고 만다. 딱히 닮은 그 무엇을 끄집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4분 후 안부를 지난 뒤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삼각점(동곡418/1998재설)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546m봉이지 않나 싶다. 삼각점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어 그냥 통과한다.

 

 

삼각점봉을 지나면서 전형적인 능선 산행이 시작된다.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을 넘나드는 산행이다. 산봉우리들을 오르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봉우리들이 다 고만고만한 탓에 그 오르내림의 편차가 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또 어떤 봉우리들은 살짝 우회(迂廻)까지 시켜준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걸으면 이정표가 두 개(#1 : 통내산4km/ 천태산2.5km/ 안버구1.0km/ 학일산2.3km, #2 : 통내산3.5km/ 학일산1.2km/ 돈치재2.0Km)나 세워진 학일산갈림길이다. 오른편 돈치재로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또렷하지만 무시하고 곧장 능선을 따른다.

 

 

이정표에 감말랭이가 그려져 있다. 이곳 청도의 특산품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물용으로 챙겨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홍보용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않나 싶다. 사람이 걷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진 산에다 저런 홍보용 표시를 해봐야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등산로 정비부터 먼저 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게 우선이지 않나 해서 하는 말이다.

 

 

학일산 갈림길을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산행이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산길의 흔적이 그다지 또렷하지 않다는 것 또한 같다. 하지만 능선만 따르면 되기 때문에 길 찾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에 그저 앞만 보며 걷는 산행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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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정도의 오르내림이 끝나면 안버구갈림길(이정표 : 통내산2.4km/ 상평/ 안버구1.7km/ 학일산3.8km)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곧장 능선을 따르면 된다.

 

 

안버구라는 지명(地名)이 흔치 않은지라 사연이 궁금해진다. 만일 바위의 고어(古語)버구에서 이름을 따왔다면 이 부근에 바위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보니 토한산 부근은 온통 바위투성이였다. 또 하나 다른 가설(假說)을 생각해보자. 버구를 농악기(農樂器)의 하나인 버꾸(자루가 달린 작은북으로, 모양은 소고와 비슷한데 그보다는 훨씬 크다.)에서 따왔다는 가설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인근 사람들은 흥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국제신문에서는 근거를 옛 봉수대(烽燧臺)‘로 들었다. 첩첩산중에 갇힌 마을에 유일하게 소식을 전하는 게 봉수대인데, 그걸 가리켜 '저귀'로 불리다가 버구(혹은 버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일 것이다. 하여간 안쪽은 안버구, 바깥과 좀 가까운 쪽은 바깥버구다. 공식 명칭은 법이(法耳)마을이다.

 

 

안버구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15분 후에는 능선 위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무턱대고 높은 곳으로만 가려고 하다가는 자칫 왼쪽에 보이는 646m봉으로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방향임은 물론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산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험악해진다. 길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희미해져 가고, 거기다 잡목(雜木)으로 가득 차 버린다. ‘국제신문에서는 이 산을 소개하면서 개척 산행이란 용어를 썼다. 무에서 유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는 그대로의 옛길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면서 말이다. 그들의 표현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다. 특히 자칫 나뭇가지에 싸대기라도 맞을 때는 더하다.

 

 

이후에도 산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점차 고도를 높여가면서 말이다. 다만 중간 지점의 안부가 다른 곳보다는 조금 더 깊은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다가 30분 남짓 지나면 삼각점(동곡420/1982재설)을 만나게 되고, 곧이어 통내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학일산에서 이곳 통내산까지는 2시간10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은 볼품이 없다. 서너 평쯤 됨직한 정상은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돌탑과 이정표(면사무소 3.1km/ 안버구 4.1km)가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석판(石板)은 그 돌탑 위에 올라 앉아 있다. 울산의 어울림산악회에서 만든 것인데 하나도 아닌 두 개씩이나 말이다. 정상은 잡목들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토한산으로 향한다. 토한산까지는 가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다. 두 산이 모두 독자적인 이지만 사이의 골이 그다지 깊지 않기 때문이다. 통내산을 나선지 18분이 지나면 토한산 정상에 올라선다.

 

 

토한산 정상도 초라하기는 매일반이다. 아니 이건 숫제 봉우리 취급도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상표지석은 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토한산도 역시 조망은 터지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작은 봉우리는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안부 비슷한 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산길은 능선을 따른다.’는 일반적인 상식만 생각하다가는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생각 없이 능선을 따르다 15분 가까이 알바를 해야만 했다.

 

 

아래 사진의 풍경이 보이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한시 빨리 발길을 돌려야 될 일이다.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은 했지만 대신 눈은 호사를 누린다. 산행 내내 조망을 즐길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 모처럼 시야(視野)가 터졌던 것이다. 그리고 눈터지는 조망을 즐기는 행운을 누렸다. 눈앞에 이름 모를 수많은 산들이 겹을 이루며 펼쳐진다. 용각산과 선의산 등이 아닐까 싶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들은 비슬산과 최정산, 주암산일 것이고 말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런데 그 가파름이 장난이 아니다. 그렇게나 등산로 정비에 소홀했던 청도군에서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은 것을 보면 그 가파름이 얼마나 심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전로프도 금방 끝나버린다. 나머지 구간은 알아서 내려가라는 모양이다. 붙잡고 내려갈만한 나무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덕분에 제법 볼거리가 있는 바위협곡은 눈에 담을 여유조차 없다.

 

 

위험천만한 내리막길은 20분 이상이나 계속된다. 짧다면 짧을 수도 있겠으나 위험성 때문에 가슴 졸여야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만만찮은 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위험구간이 끝나면 산길은 한없이 고와진다. 오래 묵은 노송(老松)들이 즐비한 산길은 그들이 떨어뜨린 솔가리(소나무 낙엽)로 인해 폭신폭신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져 냅다 뛴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어서 잠시 후, 그러니까 협곡으로 내려선지 30분 후에는 농협갈림길(이정표 : 농협1.4Km/ 면사무소1.3Km/ 통내산1.8Km)을 만난다. 농협 방향으로 내려선다. 참고로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면사무소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는 곳에 위치한 수청산에 다녀와도 된다.

 

 

이어지는 산길도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보드랍기 짝이 없고 두텁게 깔린 솔가리도 여전하다. 갑자기 산행이 여유로워진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긴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작은 전망대에선 망부석이라도 되는 양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빠져들고 있는 나까지 발견한다. 또 하나, 문득 코끝을 스쳐가고 있는 짙은 솔향이 느껴진다. 문득 오늘 산행이 마냥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마지막 구간은 어느 웰빙(well-being) 또는 힐링(Healing) 산행지에 비해 뒤떨어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10분 정도 내려서면 산행은 끝이 난다. 산자락을 내려서려는데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가지들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산행 코스에 처진소나무를 만나도록 되어있다. 이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싶어 차곡차곡 가슴에 담아둔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오래 가지 않는다. 잠시 후 진짜 처진소나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왼편 산자락에 커다란 건물들 몇 동이 보인다. ‘동산기도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동산기도원 앞을 지나도록 되어있던 원래의 코스에서 약간 빗겨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고장의 명물인 처진소나무를 볼 수 있도록 산행코스를 살짝 비틀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마을에서 바라본 토한산의 전경(全景)이다. 곳곳이 바위들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저런 벼랑을 피해 내려오느라 아까 그런 고생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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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을 지나다보면 감나무들 천지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이 아직까지도 빨갛게 익은 홍시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언젠가 수확하는데 드는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로 감 값이 떨어졌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바닥에도 떨어져 있는 홍시들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고 본다. 한마디로 달다. 거기다 씨까지 없다. 홍시나 곶감으로서 최상의 요건이지 않나 싶다. 까짓거 산행을 포기하고 사방에 널려있는 홍시들이나 딸 것을 그랬나 보다.

 

 

달고 단 홍시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셔가며 마을을 빠져나오면 20여분 만에 20번 국도를 만난다. 아침에 산행들머리인 동곡재로 갈 때 지나갔던 도로이다. 그런데 도로에 내려서자마자 특이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가지를 위로 쭉쭉 뻗은 일반 소나무와 달리, 가지를 아래쪽으로 축 늘어뜨리고 있다. 이 소나무도 가지 끝 새순은 항상 낚싯바늘처럼 위를 향해서 선단다. 하지만 이듬해 새순이 날 때에는 지난해의 것은 아래로 처져서 가지가 드리우게 된다고 한다. 그런 특이성 때문에 천연기념물(295)로 까지 지정되어 있는 처진소나무(Weeping Japanese Redpine , 柳松)’이다.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진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서 모습이 다른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가지가 아래로 길게 뻗어서 마치 삿갓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삿갓송의 대표적인 형태는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와 409호로 지정된 울진 행곡리의 처진소나무다. 또 다른 형태는 키가 크고 가지가 짧으면서 밑으로 늘어진 버들 형태의 모습을 지닌 수양버들 모양의 소나무(柳松). 그 대표적인 유송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같은 처진소나무라도 버들 형태의 유송은 대단히 희귀하며, 이 유송 이외에 우리나라에는 아직 알려진 곳이 없다. 일본에는 이와테현(岩手県) 타마야마 마을에 이 유송과 똑같이 생긴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유송과 비슷한 모습을 갖춘 나무는 강원도 창도군 장현리에 북한 천연기념물 235호로 지정된 창도 늘어진소나무가 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산발한 여인의 모습처럼 위쪽에 10여 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길게 늘어져 청도 동산리의 처진소나무와는 형태가 약간 다르다. 참고로 옛날 한 정승이 소나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나무 옆에는 고성 이씨 무덤이 있어 이와 어떠한 관련이 있거나 신령스런 나무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날머리는 매전교() 아래에 있는 주차장

처진소나무에서부터는 국도를 따른다. 잠시 후 동산기도원입구를 지나자마자 오른편에 동창천의 물을 가두어 놓은 보()가 보인다. 다리 아래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려면 이 보를 건너는 게 빠르다. 하지만 우린 매전교 다리를 건너기로 한다. 다리 위에서 눈에 담아야 할 경관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강가 벼랑 위에 세워진 삼족대(三足臺 : 민속문화재 제171)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헤맨 시간과 간식을 먹느라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이 걸린 셈이다.

 

 

삼족대(三足臺)는 조선 중종14(1519)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별장)이다. 그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중종2)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호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 정언(正言), 칠원(漆原)현감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조식(曺植), 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 김응조(金應祖), 김극일(金克一), 신계승(申季誠) 등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이곳에서 강론하였는데, 그의 호를 따서 삼족대(三足臺)라 하였다. 김대유는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만족하고, 항상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만족한다며 이 같은 호를 지었다고 한다. 삼족대(三足臺)는 학일산(鶴日山)의 지맥이 동창천(東倉川)으로 숙으려드는 기슭 절벽위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삼족대 밑에는 1973년 세운 김대유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에필로그(epilogue), 갓등산과 학일산, 통내산, 토한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원점회귀(原點回歸)로 코스설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이때의 기점과 종점은 동산리(매전면)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어렵다고 봐야한다. 바삐 걷는다고 해도 7~8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산에서 뛰다시피 하는 산꾼들이라면 예외일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6시간 이내에 종주를 끝낼 수 있는 4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행들은 동곡재에서 산행을 출발했다. 물론 40~50분 정도를 더 투자해서 갓등산을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코스를 왕복하는 게 싫은 난 동곡산의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느긋하게 걸으면서 조금 더 깊이 산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크게 어긋나버렸다. 산세(山勢)나 조망(眺望) 등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는 산들이었기 때문이다.

오정산(烏井山, 804.9m)

 

여행일 : ‘15. 12.12()

소재지 : 경북 문경시 호계면과 마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문경대학교바위공원791m(헬기장)오정산791m삼태극전망대고모산성토끼비리진남휴게소(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산보다도 산이 품고 있는 주변 경관이 더 입소문을 탄 산들이 있다. 오정산(烏井山)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정산이 어디 있는 산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많아도 경북팔경(慶北八景)’ 중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거기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옛길 영남대로(嶺南大路)’ 중에서 가장 험하다는 토끼비리와 고모산성까지 합한다면 그야말로 빼어난 관광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세(山勢)가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791m봉에서 오정산 정상까지의 암릉은 자못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길 자체만 해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데, 거기다 사방으로 뻥 뚫린 조망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이 아닐까 싶다. 하다못해 주변 관광지에 놀러왔다가 올라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문경대학교(문경시 호계면 별암리)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이용해서 문경(점촌)방면으로 달리다가 불정1(문경시 호계면 견탄리)를 건너기 직전에 만나게 되는 교차로에서 34번 국도로 갈아타고 문경(점촌) 방면으로 잠시 들어가면 명문 가마솥식당(호계면 호계리)’이 나온다. 식당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문경대학교에 이르게 된다. 19963문경전문대학으로 개교한 문경대학교(Munkyung College , 聞慶大學校)’2011년 현재의 이름으로 교명(校名)을 바꾼 사회·실무계 전문대학이다. 1999년 관광특성화 대학 및 전문대학 재정지원 대학으로 선정된 이래, 현재 유아교육과, 사회복지과, 부사관과, 보건행정과, 간호학과, 호텔조리과, 도자기공예과, 축구과 등 8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속기관으로는 도서관, 정보전산원, 언론사, 국제교육원, 학생생활관, NCS지원센터, 취창업지원센터 등이 있다. 부설기관은 학생생활연구소, 평생교육원, 교수학습센터 등을 두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대학 건물의 뒤로 나있다. 하지만 곧장 들머리로 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본관 건물의 앞에 멋진 바위공원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잔디, , 연못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책로와 만물상(萬物相) 바위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구름다리, 그리고 바위 정상의 토론 광장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바위공원의 풍경을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혹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물개사랑바위, 두꺼비바위, 소라바위, 돌고래 바위 등등 각각의 바위들에 붙여진 이름과 바위들의 생김새를 비교해가며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산행 진입로는 오정산을 바라보며 본관건물의 오른편 벽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산자락으로 곧게 뚫린 임도가 보일 것이다.

 

 

임도로 들어서면 잠시 후 길이 왼편으로 크게 휘는 곳에서 등산안내판을 만난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코스를 숙지하고 난 뒤에 산행을 이어갈 일이다. 지도를 보면 토끼비리를 가기 위해서는 능선을 따라 곧장 하천까지 내려가도록 그려져 있다. 그런데도 난 이를 알지 못하고 중간에서 오른편 사면길로 내려서버려 토끼비리를 완주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 버렸다. 만일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게 아니겠는가.

 

 

임도는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한다. 주위는 잣나무 조림지, 조림을 위한 차량들이 올라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않았나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잣나무 숲은 끝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 근처에서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오정산 정상1시간30, 진남교반/ 물탕골)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로 접어들고 나서도 길은 고운편이다. 곧장 산자락을 치고 오르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우회(迂廻)를 시키면서 경사(傾斜)를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솔길로 들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영강의 물줄기가 곡선을 이루면서 흐르고 있고, 그 주변에 나름대로의 들녘을 만들어내고 있다. 문경대학이 있는 위치의 왼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천주봉일 것이다. 그 옆에 있는 것은 공덕산일 것이고 말이다.

 

 

능선에 올라서면서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더욱 더 누그러뜨린다. 그러나 800m를 넘기는 산을 오르는 길이 어찌 평탄할 수만 있겠는가. 잠시 후에는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산길은 위로 오를수록 삭막해져 간다. 능선엔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로 그득하다. 옛날 60년대에 사방사업 때 심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들이 태반이다. 그것도 산불이라도 났었던지 나이들도 얼마 들어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볼품이 없는 길이란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길도 좋은 점은 있다.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 사이로 나타나는 헌걸찬 산릉들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가까이 되면 능선에 돌출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바위들은 뛰어난 눈요깃감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전망대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해 낸다.

 

 

정확히 1시간 만에 첫 번째 전망바위에 오른다. 발아래에는 산기의 산업단지는 물론이고 문경시가지까지 잘 내려다보인다. 또한 문경 들녘을 첩첩이 둘러싼 산릉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연거푸 펼쳐진다.

 

 

 

5~6분 후 또 다른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조금 전에 올랐던 전망바위보다 한층 더 시야가 넓어졌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 잠시 후 고모산성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삼거리(이정표 : 오정산 정상30, 대미산 23.5Km/ 태극마크전망대1시간, 진남교반 2시간/ 문경대학교40, 호계리 쌍샘마을 1시간)를 만난다. 하산 지점을 진남교반으로 할 계획이라면 오정산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아무튼 삼거리를 지나면 곧이어 791m봉에 올라서게 된다. 오정산은 세 개의 비슷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 중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봉우리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791m봉이다. 봉우리 위로 오르면 오정산 상무봉(800m)’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상단에는 상무라고 씌어 있고, 雖死不敗(수사불패)百鍊千磨(백련천마)라는 글귀가 좌우에 적혔다. '백 번을 단련하고 천 번을 갈고 닦는다''죽을 순 있어도 질수는 없다는 내용이니 군인들의 용어로 안성맞춤이겠다. 그러고 보니 국군체육부대인 상무가 오정산 아래로 옮겨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저 글귀들은 상무부대의 표어일지도 모르겠다.

 

 

상무봉, 아니 내가 찾아낸 지도에는 791m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난 791m봉을 고수하겠다. 상무봉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간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791m봉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사방이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데, 그중 가장 또렷한 것은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일 것이다. 사방을 둘러본다. 백화산과 뇌정산은 물론이고 희양산도 나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이화령을 넘고 있는 조령산과 주흘산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참고로 이곳에도 삼거리임을 알리는 이정표(오정산/ 진남교반/ 문경대학)가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지나왔던 삼거리까지 내려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 곧바로 진남교반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봐야 두 길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791m봉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바윗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잠시 후 헛웃음을 짓고 만다.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바윗길이 짧게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암릉을 만들고 있는 바위들이 험상궂다거나 거대하지도 않다. 실망스러움을 안고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른다. 작은 돌들이 널려있는 정상에 오르면 건너편에 오정산이 나타난다. 높이가 얼추 비슷한 것을 보니 이곳 가운데 봉우리의 높이도 800m쯤 되는가 보다.

 

 

 

가운데 봉우리를 내려서면서 본격적인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왜 오정산으로 가는 길을 일러 바윗길이라고 했는지가 금방 이해가 간다. 험상궂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윗길을 걷는다.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위들을 오르내리다가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우회(迂廻)를 하면 된다. 짜릿한 스릴의 연속이다. 하지만 결코 위험하지는 않다. 바윗길임에도 아무런 안전시설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이 구간이 오정산 산행의 백미(白眉)임은 분명하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눈요기만 즐기면 된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는 맛도 좋지만 그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놓쳐서는 아니 될 일이다.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아까보다 더욱 절실해졌던가 보다.

 

 

 

791m봉을 출발한지 20분쯤 지나면 오정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서너 평쯤 되는 정상에는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804m)과 삼각점(점촌22/ 1980 복구) 외에도 소요시간이 지워져버린 이정표(문경대학, 진남교반/ 부운령)와 이정표의 역할을 가미한 정상표지판(부운령 3.75Km, 운달산 13.3Km, 대미산 22.5Km/ 문경대학교 2.0Km, 진남교반 6.0Km)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오정산(烏井山)을 풀어보면 검은 우물이 있는 산이란 뜻이 된다. 우물에서 검은 뭔가를 끄집어낸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건 석탄(무연탄)이 될 것이다. 이 부근이 바로 한때 우리나라 석탄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문경탄전(聞慶炭田)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당시 굴만 뚫었다하면 검은 석탄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이니 오정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오정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 또한 뛰어나다. 하지만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북쪽 방향의 고산준령들이 조금 더 또렷하면서도 넓게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다시 791m(헬기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진남교반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탄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 능선은 오래지 않아 유연하게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791m봉을 내려선지 14분 후에는 또 다른 상무부대 팻말이 세워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상무 소속 선수들의 등반훈련 코스에 설치한 팻말로서, 부대와 정상의 한가운데임을 알리기 위해서 세워 놓은 모양이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으니 그냥 통과해도 좋은 봉우리이다.

 

 

 

이어지는 능선도 급경사 구간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주변 풍광 또한 특별한 것이 없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풍경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또렷하지도 않을뿐더러 아까보다 시야까지도 훨씬 더 좁아졌다.

 

 

하산을 시작한지 20분 조금 못되어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쳐버린다. 다만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봉우리 바로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하나 나뉘지만 개의치 말고 그냥 지나쳐버리라는 것이다. 이어서 7분 후 세 번째 봉우리, 그리고 또 다시 18분 정도를 더 걸으면 네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623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또 다시 조망이 열린다. 시원스럽게 뻗어나가 3번 국도가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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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던 집사람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넋을 놓은 채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다가가보니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태극문양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 부근을 삼태극전망대라고 적고 있다. 삼태극(三太極)이란 산과 물, 그리고 길이 각각 만들어 내는 세 개의 태극문양(太極紋樣)을 이르는 말이란다. 즉 낙동강 상류의 영강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 그리고 옛 국도3호선이 각각 ‘S’자로 돌며 태극문양을 낸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해서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태극문양 뿐만이 아니다. 이 부근의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도 시야가 활짝 열린다. 희양산과 주흘산 등 백두대간을 이루는 헌걸찬 산들이 줄을 이어 도열하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삼태극(··물태극)전망대라고 적힌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이름 없는 전망대보다 한참을 못 미친다. 아무래도 전망대의 위치 표시를 잘못 했지 않았나 싶다.

 

 

 

삼태극전망대에서 또 다시 가파르게 내려선다. 그렇게 1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능선을 아닌 오른편의 사면길을 가리키고 있다. 무심코 표시지대로 내려서고 만다.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토끼비리를 걷고 싶었던 점을 감안할 때 무조건 능선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결정 때문에 난 이곳 진남교반(鎭南橋畔) 인근에서 꼭 담아가야 할 풍경들 중 하나를 놓쳐야만 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을 내려선지 10분 남짓 지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돌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는 언덕배기가 나온다. ‘돌고개또는 꿀떡고개로 불리는 고갯마루이다. 돌고개는 돌을 많이 모아두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꿀떡고개라는 이름은 요 아래 주막거리에서 팔던 꿀떡이 하도 맛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늙은 당산나무가 수문장(守門將)처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에는 금줄이 쳐진 성황당이 들어앉아 있다. 여느 성황당 주변이 그러하듯이 이 이곳에도 돌무더기가 많이 쌓여 있다. 이렇게 돌무더기를 쌓아두는 것은 외침에 대비하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그나저나 저 당집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들어앉아 있을까? 서슬 시퍼런 토끼비리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감사의 인사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뭔가 간절한 염원을 한바탕 풀어놓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이번 장삿길의 이문(利文)이었을지, 아니면 장원급제(壯元及第)였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성황당을 지나 큰 돌이 깔린 길을 조금 내려가니 정갈하게 복원된 초가(草家) 두 채가 나타난다. 옛날 주막거리를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근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고모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토끼비리로 가려면 맞은편에 보이는 진남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고민이 시작된다. 두 곳을 모두 둘러보려면 점심식사를 생략해야 할 판이니 어느 곳이던지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진남문으로 향한다. 길을 잘못 들어 놓쳐버린 토끼비리를 그냥 빼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막거리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성문과 문루(門樓)를 가운데 놓고 좌우로 성벽이 날개를 펼치듯 유연한 자태로 서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진남문이다. 그리고 성벽은 선조 29(1596)에 축성한 석현성(石峴城)이다. 석현성은 고모산성의 외성(外城)으로,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축성된 것이라 전하며, 고모산성의 남문 치성부에서 토끼비리까지 약 400m를 연결하고 있다. 진남문은 외성의 성문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성의 문들보다도 더 활용도가 높았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성 밖으로 나오면 오른편 산허리를 감고 있는 높다란 성벽이 나타난다. 고모산성(姑母山城)이다. 고모산성은 예로부터 그 위치와 역할로 인해서 관방(關防)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상 좌 우도에서 모여든 길들이 남쪽 인근인 호계면의 견탄(犬灘개여울)에 이르러서 한 길로 합쳐지고, 토끼비리를 지나 고모산성 옆 돌고개를 넘어서며 마침내 평탄지로 내려서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고모산성은 본성 1,256m에 외성 390m를 합해 총 1,646m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으로서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특징이라고 한다. 축조연대는 156년 이후, 2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서쪽과 남쪽은 영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조정산(810m)에서 뻗어 내린 험한 산등성이가 있다. 따라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다.

 

 

진남문을 나서면 지형은 남쪽으로 더욱 낮아지면서, 좌우로 길 두 개가 보인다. 왼쪽 길은 진남교나 휴게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신현리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나같이 토끼비리로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왼편 성벽 아래로 난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 길은 그다지 넓지도 그렇다고 잘 닦여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난 그냥 휴게소 방향으로 내려서고 만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길 찾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철로를 건넌다. 오른편에 터널이 보이지만 입구가 막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로인 모양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레일바이크(rail bike, 軌道自轉車)’ 출발역이 있었다. 문경시청의 초대를 받고 지역을 둘러보는 길에 시승(試乘)해봤던 시설이기에 기억이 난다. 레일바이크라는 게 폐()철도를 재활용하는 시설이니 이곳 또한 열차가 다니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1989년 경제성이 떨어지는 탄광들을 정리했던 석탄합리화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문경은 우리나라 석탄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저 터널은 수많은 열차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검은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석탄을 가득 실은 채로 말이다.

 

 

철로를 지나자마자 이정표(고모산성/ 오정산 정상 4.5Km, 토끼비리, 영남대로 옛길)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토기비리로 연결되는 길을 지나쳐버렸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까 석현성(진남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왼쪽 성벽을 따랐어야하는데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하긴 이정표가 세워지지 않은 갈림길이니 미리부터 길을 알아두지 않았다면 그 누구라도 길을 놓쳤을 것이다. 별 수 없이 토끼비리를 향해 산자락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잠시 후 토끼비리의 입구에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에 올라선다. ’위치도(位置圖)‘와 길을 걸을 때 낙석을 주의하라는 경고판 외에도 1744년 권응신이 그렸다는 토끼비리(봉생천)’ 그림을 첨가한 옛길(토천)구간 안내도와 명승 31호인 토끼비리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 찾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영강을 가로지르는 진남교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 일대를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 부른다. ‘진남교반(鎭南橋畔)’이란 진남교 다리 주변을 이르는 말이다. 이 일대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이어지고 강 위로 철교·구교·신교 등 3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人工)의 조화를 이룬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대구일보사에서 경북의 승경지 여덟 곳을 선정해서 경북팔경이라 이름 붙인 일이 있었다. 그때 이곳 진남교(鎭南橋) 주변()이 당당히 경북지역 승경 중 제1경으로 뽑혔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무다리였던 기존의 회연교(回淵橋)를 헐어내고 자기들이 새로 만든 시멘트다리인 진남교를 내세우기 위한 일본인들의 꼼수였다고 말하기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절정의 풍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영강 물과 오정산 어룡산 등 산자락이 빚어낸 자연미가 분명한데, 어째서 갑자기 일제에 의해 개축된 콘크리트 다리가 그 대표성을 가져갔느냐는 것이다. 나머지 7경이 모두 제 각각의 이름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일대의 경관이 빼어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빨려드는 미감은 차라리 도발적이다. 특히 역사적 가치를 지닌 여러 유적과 특이하면서도 뛰어난 자연 풍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저런 가설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에 그저 빠져 볼 일이다.

 

 

토끼비리의 탐방에 들어간다. 벼랑을 헤집으며 난 길이지만 잘 닦아 놓은 덕분에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경고판의 글귀대로 벼랑에 신경을 써가며 걸어야 할 것 같다. 벼랑이 날카로운 탓에 돌이라도 떨어질 경우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토끼비리는 경북 문경의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이다. 층암절벽 사이로 난 길이 1에 폭인 1m인 이 벼랑길은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토천(兎遷)’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비리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이곳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이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과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산간 협곡을 S자 모양으로 파고 흐르면서 동쪽 산지를 침식해 만든 벼랑에 형성된 길이다. 돌벼랑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6, 7리 나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험하다. 권응신이 1744년에 토끼비리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는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산허리를 지나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면곡 어변갑, 권근, 서거정 등이 이 곳을 지나며 시를 남겼다. 그만큼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진남휴게소

아쉽지만 토끼비리 걷기는 중간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철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이 생각나서이다. 위험한 구간이라고만 알고 있을 그녀이기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질 경우 행여 사고라도 났을까 걱정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삼거리, 휴게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저만큼에 휴게소 건물이 나타난다. 산행이 종료되는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난 오늘 그런 준비를 해오지 못했다. 전날 오후에야 오정산산행을 결정한 탓에 준비할만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 문경의 관광지들을 돌아보았다는 어설픈 자신감이 더 큰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때문에 난 크게 두 가지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 첫 번째는 토끼비리의 전 구간을 걸어보지 못했고, 나머지 하나는 경북 팔경의 첫째라는 진남교반의 풍경을 한눈에 담지 못한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가슴에 담으려면 아까 삼태극 전망대아래에서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내려서지 말고 계속해서 능선을 탔어야만 했다. 그리고 능선의 끄트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토끼비리를 걸을 다음 진남문을 통해 석현성의 안으로 들어와 이번에는 성벽(城壁) 위를 걸었어야만 했다. 서문지(西門址) 근처의 성벽 위에서 바라봐야만 진남교반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일이니 어쩌겠는가. 오늘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져 가는 게 인간이 아니겠는가.

영암산(鈴岩山, 784m)-선석산(禪石山, 742.4m)

 

산행일 : ‘15. 12. 3()

소재지 : 경북 칠곡군 북상읍·약목면, 성주군 초전면·월항면, 김천시 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숭오1리 졸음 쉼터보손지북봉영암산선석산용바위비룡산 갈림길불광교세종대왕 자태실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모든 산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골산(骨山=바위산)과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흙산)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오르는 산들은 이 두 가지의 특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첫 번째로 오르게 되는 영암산은 위험천만한 바윗길이 계속되는 골산인데 반해 선석산은 바위가 없으며 등성이가 넓고 반반하여 밭을 일구어도 충분할 것 같은 넉넉한 느낌의 육산이다. 바위산의 특징인 짜릿한 스릴(thrill)과 조망(眺望)을 한껏 즐길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하면서도 호젓한 산길을 산책 삼아 걸어보는 재미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멋진 산행지라는 얘기이다. 두 산을 한꺼번에 연결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산세(山勢)가 뛰어나다고 해서 영암산만 단독으로 산행할 경우에는 산행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석산만 따로 할 경우도 문제가 있다. 산행이 편한 대신에 단조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산을 종주한 뒤에도 체력이 좀 남는다면 비룡산까지 계속해서 타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숭오1졸음 쉼터’(경북 칠곡군 북삼면 보손리)

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미고속도로) 남김천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4회전 국도를 타고 칠곡방면으로 달리면 잠시 후 숭오교차로(칠곡군 북삼읍 보손리)가 나온다. 교차로 근처에 있는 이동식검문소 겸 임시 졸음 쉼터가 산행들머리이다. 쉼터에 내리면 길 건너 숭오1(태평동)’ 버스정류소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쉼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오른편 숭오1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운송업체인 전국로지스건물이 보이니 참조한다. 참고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들머리로 삼는 미타암을 경유하는 코스의 들머리는 쉼터의 중간 부분에서 시작된다. ‘미타암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시멘트 포장길 따라 3~4분 들어가면 차단기가 앞을 막는다.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는 시설임을 알기에 무조건 건너고 본다. 이어서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방댐을 지나면 12~3분 후에는 보손지라는 저수지에 이르게 된다. 저수지 앞에 설치된 입산통제소에서 입산신고를 하는데 감시원 아저씨가 몇 명이 왔느니, 차량은 어디에 주차를 시켰느니 하며 질문을 해온다. 여느 산악회들처럼 버스에 취사장비라도 가지고 다니지 않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반대편 인촌리(성주군 월항면)에 있는 세종대왕 자태실주차장에 차를 세울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고 산행을 나선다.

 

 

들머리(이정표 : 영암산 등산로2.4Km/ 영암산 등산로2.8Km)는 저수지 둑 근처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열린다. 이정표가 말해주듯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정상으로 가기는 매일반이다. 다만 곧장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0.4Km만 더 걸으면 된다. 하지만 이때는 멋진 바윗길을 맛볼 수 없게 되니 진행할 방향을 선택하는데 참조할 일이다.

 

 

산행은 만만찮게 시작된다. 산자락에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길손을 맞기 때문이다.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를 스쳐가는 바람이 고마운 이유이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솔향이 가득하다. 숨이 차오르게 올라야하는 힘든 산행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10분 후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전망대를 만난다. 산행을 시작했던 보손지와 그 뒤의 너른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들녘 가운데 자리잡은 시가지는 아마 북삼읍일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사나웠던 기세를 잠시 누그러뜨린다. 보드라운 흙길에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산자락에 들어선지 20분 정도가 지나면 산허리를 자르며 지나가는 임도(이정표 : 영암산 정상1.5Km/ 영암산 정상2.2Km/ 임도시점인 숭오교차로2.8Km/ 보손지0.9Km)를 만난다. 오른편은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숭오교차로에서 시작되는 임도이고,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갈 경우에는 얼마 후 아까 보손지에서 헤어졌던 임도와 하나로 합쳐진 다음 영암산과 선석산 사이에 있는 안부로 연결된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맞은편에 위치한 금오산에 가려 입소문을 덜 탔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틀렸나보다. 들머리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산악회의 리본들이 무당집 처마처럼 어지럽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여간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산길은 또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상황이 변한다. 만만찮은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은 위험구간임을 알리는 경고판(警告板), 추락 위험이 있는 구간이니 우회(迂廻)를 하란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암벽에 매달린 밧줄을 가리키며 동의를 구해온다. 올라가면 어떻겠느냐는 의사표시이다. 그리고 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냉큼 밧줄에 매달리고 본다. 단숨에 치고 올라가 버리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산행을 해오면서 쌓아온 노하우(knowhow)에 이젠 이력까지 붙어가나 보다. 올라가는 뒷모습이 전문적으로 암벽등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닮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암릉의 위는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뭔가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뻥 뚫린 세상을 발아래에 깔고 내려다보는 기분은 통쾌하기 짝이 없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데미안(Demian)’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설마 이 정도로 작기야 했겠는가마는 나는 바윗길에서 그런 느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만큼 암릉에서의 조망(眺望)이 일품이라는 얘기이다. 발아래에는 북삼읍이 자리 잡은 너른 들녘이 펼쳐지고 그 뒤에는 구미시가지의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하나 아쉬운 것은 거세지기 시작하는 눈발 때문에 금오산의 헌걸찬 산세를 눈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윗길에서 바라본 영암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날이 선 바윗길이 아름답기만 하다. 바위등성이들이 나 보란 듯이 숲 사이로 삐쭉삐쭉하다. 잠시 후엔 저 암릉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어온다. 바위에 매달릴 때 느껴지는 짜릿한 손맛이라니...

 

 

첫 번째 바윗길은 아쉽게도 5분 정도면 끝나버린다. 밧줄에 매달려 내려와 뒤돌아본 암봉은 서슬이 시퍼렇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산행을 해온 산꾼들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이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10분 후 두 번째 암릉에 이른다. 이번에는 우회로(迂廻路)가 없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바윗길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회로를 만들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하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무리 수월한 바윗길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위험성은 항상 지니고 있는 게 바윗길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질 것이 없는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바윗길이다. 어렵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는 바윗길이라고 해서 바위를 붙잡는 손끝에 전해지는 손맛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분 좋을 만큼의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바윗길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시원스런 조망을 맘껏 즐기면 된다.

 

 

 

두 번째 바윗길이 끝났다 싶으면 곧이어 세 번째 바윗길이 길손을 맞는다. 경고판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번 바윗길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이번에는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긴 바윗길을 피해 우회하라는 결정을 내릴 나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번 암릉은 완전한 칼날능선이다. 아까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게 보인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일단 밧줄을 붙잡고 나면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수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암릉에 올라서고 나면 바윗길은 편해진다. 영암산은 옹골찬 바윗길이 골격을 이루는 골산(骨山)이다. 서슬 시퍼런 바윗길에 올라서면 바위산의 특징대로 서슴없이 조망(眺望)이 터지고,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찔한 고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바윗길은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마음 졸이지 않고도 오르내릴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여간 바위를 붙들고 이리저리 돌아 오르는 재미가 영암산에서 맛볼 수 있는 백미(白眉)일 것이다. 거기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원스런 조망까지 즐긴다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일 것이고 말이다.

 

 

 

바윗길이 끝나면 다시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 흙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이정표 : 영암산 정상400m/ 부상리2.4Km/ 보손지2.0Km)로 이루어진 봉우리다. 혹자는 이곳을 북봉(784m)이라 일컬으며 영암산을 이루는 세 봉우리(북봉, 중봉, 남봉) 중 가장 높다고 했다. 그리고 이 봉우리가 5만분의 1 지형도에 영암산이라고 표기된 지점이라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인 평범한 봉우리로 조망마저도 시원치 않아 이곳보다 2m가 낮은 남봉에다 정상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한편 부산일보에서는 정상의 높이를 792m로 표기하고 있다. 난 부산일보의 주장을 따르고 싶다. 북봉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상석이 세워진 남봉이 더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능선은 북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양 면이 벼랑을 이루고 있는 능선은 바윗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거기다 조금만 경사가 져도 어김없이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그냥 좌우로 터진다는 조망을 즐기면서 오르내리면 될 일이다. 오늘 같이 눈발이 내리는 날만 아니라면 말이다.

 

 

 

북봉에서 오름짓을 두어 번 하고 나면 바위로 이루어진 두 번째 봉우리이다. 혹자는 이 봉우리를 중봉이라 한다. 커다란 바위가 정수리에 있어 조망이 시원스럽다지만 그냥 통과하고 본다. 흩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오름짓을 하고 나면 드디어 영암산 정상(남봉)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 만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영암산의 유래가 적힌 정상표지석말고도 자그만 정상석이 하나 더 있다. 오래전에 세웠던 것인 모양인데 임무를 다했으면 그만 치웠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옳지 않은 시설물이 하나 더 눈에 띈다. 바로 성주군에서 세운 등산로 종합안내도이다. 이름만 종합안내도라고 적어 놓고 등산로 표시는 성주군 지역만 표시했다. 만든 지자체(地方自治團體)의 관내(管內)만 표시해 놓은 것이다. 국민들이 낸 세금(稅金)으로 만든 시설이라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로 접경을 이루고 있는 성주군과 칠곡군이 서로 협의해서 예산을 집행했다면 이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가 나왔지 않았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영암산(鈴岩山)을 이름을 풀어보면 방울바위 산이라는 뜻이다. 성주 쪽에서 바라 볼 때 3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상부의 모양이 워낭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일부에서는 매달린() 방울()을 뜻하는 현령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금오동천이 자리한 북삼면 사람들은 바위산인 금오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바우남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밖에도 바울암산, 바우암산 등으로 불리는 이 산은 모두 순우리말인 방울바위산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하나 혹자는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영암산의 바위봉우리가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우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보는 곳이나,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열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흩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대신 다른 이들의 눈에 비쳤던 풍경을 옮겨본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반듯하게 뻗어 가는데, 성주군 초전면 일대의 비닐하우스 단지는 한낮의 햇빛을 받아 넓은 호수를 연상케 한다. 비닐하우스 단지 너머로 가야산이 솟아 있고, 시계방향으로 대덕산, 민주지산, 삼도봉, 황악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아슴푸레하게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정상 바로 옆에 북풍을 피하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마침 그곳에 예쁜 벤치까지 놓아두었으니 간식이라도 먹으며 쉬어가고 볼 일이다. 하지만 선점하고 있는 이가 있어 그냥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만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바라보는 경관이 제법 뛰어나다. 선석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눈발 속에서도 헌걸차게 나타난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위험표시경고판을 만난다. 이번에도 집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위험지역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만만찮은 암벽에 나타난다. 비록 굵직한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지만 바위벼랑이 높고 수직(垂直)에 가까운 벼랑구간도 끼고 있으니 초심자들이라면 꼭 우회로를 이용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위험구간이 끝나면 이제부터는 순수한 흙길이 이어진다. 언제 바윗길이었냐는 듯이 말이다. 우회로와 다시 합쳐진 산길(이정표 : 보손지2.75Km/ 영암산정상(로프구간)270m/ 영암산정상350m)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보손지갈림길(이정표 : 서진산(선석산)정상2.2Km/ 보손지2.2Km/ 영암산정상0.6Km)에 이른다. 구급함과 평상을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지만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쉬어간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잠시 후 안부에서 벤치가 놓여있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번에는 약 10m의 간격으로 좌우로 길이 나뉘는데 이곳에서 또 다른 불협화음이 눈에 띈다. 하나로 해결될 이정표가 두 개(#1 : 선석산정상2.21Km/ 영암산등산로 입구1.38Km/ 영암산정상1.09Km, #2 : 서진산(선석산)정상1.7Km/ 보손지2.2Km/ 영암산정상1.1Km)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칠곡군과 성주군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다른 이들의 산행기를 보면 영암산과 선석산의 중간에 돌목재가 있다고 했는데 두 번째로 만난 갈림길을 두고 한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산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만나는 갈림길에서 하산지점인 세종대왕 자태실이 위치한 오른편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영암산과 선석산은 한데 묶어 산행을 해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날카로운 바위와 벼랑으로 이뤄진 골산에서 짜릿한 손맛을 즐겨왔으니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품에 안을 것 같은 넉넉함을 갖춘 육산을 걸어보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산이 가질 수 있는 특징들 모두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오르막길을 따른다. 낙엽이 깔린 길은 마치 양탄자라도 깔아놓은 양 폭신폭신하기 그지없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바닥에 깔린 낙엽들이 대부분 참나무 종류인지라 미끄럽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갈림길을 마지막으로 보손지로 내려가는 갈림길은 끝난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세종대왕 자태실세종대왕 자태실(世宗大王 子胎室)’로 내려가는 길은 이후에도 두 번(#1 : 세종대왕 왕자태실2.7Km/ 영암산정상1.2Km, #2 : 선석산정상0.99km, 불광교 2.80Km/ 입구1.47Km/ 영암산정상2.30Km)에 걸쳐 갈림길을 갈려 내보내고 난 다음에야 선석산 정상에 올라서게 만든다. 영암산 정상을 내려선지 1시간10분 만이다.

 

 

선석산은 바위가 없는 산이다. 그리고 등성이가 넓고 반반한 흙산이다. 화전(火田)을 치던 옛날이었다면 밭으로 붙여먹어도 충분했음직하다. 펑퍼짐한 분지(盆地) 모양으로 생긴 선석산의 정상에는 세운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두 개의 이정표(#1 : 비룡산 정상2.5Km/ 시묘산 정상3.7Km/ 영암산 정상2.8Km, #2 : 입구2.48Km/ 불광교1.78Km)), 그리고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국제신문 근교산행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정상석, 그러니까 누진산(樓鎭山)이라고 이름을 잘 못 표기해 놓았던 정상석은 안 보이는 것이 이미 철거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참고로 선석산은 산자락에 위치한 고찰(古刹)이자 세종대왕 자태실의 수호사찰인 선석사로부터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서진산(棲鎭山)으로 불렸다.

 

 

정상에는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지만 앉아서 쉴만한 여유는 없다. 가늘던 눈발이 언제부턴가 폭설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강풍을 동반한 한파(寒波)까지 겹치니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바쁘게 발길을 재촉하는 이유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면 잠시 후 용바위를 만난다. 바위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바위의 생김새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용처럼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개국 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가 한 말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는 의미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내 깨우침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다시 조금 더 내려오면 이번에는 마치 처마처럼 산 아래쪽을 향해 툭 튀어나간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태봉바위라고 적혀있다. 이 바위에서 태봉(胎封)자리를 살펴보았다는 설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행여 눈에 들어올까 해서 바위 끝으로 나서보지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태봉바위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바뀌지 않는다. 폭신폭신하면서도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선석산 정상에서 15분쯤 떨어진 지점에서 삼거리(이정표 : 불광교 0.88Km/ 선석산 정상 0.92Km, 입구 3.36Km)를 만난다.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불광교 방향이다. 하지만 길의 흔적은 능선으로 난 길이 훨씬 더 또렷하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산코스를 비룡산(579m)을 경유하는 것으로 잡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도 성주군에서 만든 이정표는 비룡산 방향을 빼먹고 있다. 그 이유가 칠곡군의 관내에 위치한 봉우리였기 때문은 아니었길 빌어본다.

 

 

불광교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스틱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구간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바닥이 곱다는 것이다. 흙길이지만 바닥에 쌓여있는 낙엽이 솔가리(소나무 落葉)여서 미끄럽지가 않다는 얘기이다. 만일 이런 경사에 참나무 낙엽이라도 쌓여있었다면 내려서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20분 정도 내려서면 저만큼에 나무다리 하나가 보인다. 불광교()이다. 이정표(선석산 정상 1.80Km, 영암산 정상 5.10Km, 입구 4.26Km)등산로 안내도는 물론이고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이곳에서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갈 경우 선석산 정상과 들목재 사이의 능선에 이르게 되니 참조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바로 이정표의 표기방식이다. 이정표에 표시된 입구는 이곳 불광교에서 왼편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이정표는 오른편으로 표기를 해놓고 있다. 선석산 정상을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다음 입구로 내려가도록 표기를 해 놓은 셈이다. 헷갈려 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기에 거론해 봤다.

 

 

산행날머리는 세종대왕 자태실(世宗大王 子胎室)’ 주차장(성주군 월향면 인촌리)

불광교에서부터는 임도로 연결된다. 중간에 이정표에 입구로 표기되어있는 지점, 그러니까 돌목재에서 내려오는 길과 합쳐지는 곳 근처에서 제멋대로 휘늘어진 늙은 소나무들을 만나고, 그 생김새에 감탄하며 조금 더 걸으면 세종대왕 자태실주차장이 있는 월향리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추위 때문에 중간에 쉬지 않았으니 온전히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된다.

 

 

주차장에 내려서면 맞은편으로 놓인 돌계단이 보인다.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 자태실(世宗大王 子胎室)’이 있는 봉우리로 연결되니 꼭 올라가보는 것이 좋다. 육관도사 손석우씨가 우리나라 30대 명당(明堂)으로 지목한 곳이니 안 올라보면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거기다 다녀오는데 10분이면 충분하니 시간까지도 걱정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 태실지를 연꽃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명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골짜기 양편의 산줄기가 여자의 양다리이며 태실이 위치한 자리가 여성의 음부에 해당된다고 한다. 어느 설()을 따르던지 이곳이 명당임은 분명하다.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낙점했으니 만큼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세종대왕 자태실(子胎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형태의 유적은 유례가 없다고 한다. 세종 20(1438)에서 24(1442) 사이에 조성된 태실은 세종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와 원손(元孫)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모여 있다.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은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돼 남아 있지 않다. 입구에 위치한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세조)의 경우 왕이 됐는데도 태를 옮겨가지 않은 이유는 유달리 형제애를 강조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에 따른 것이란다. 태실을 옮기지 않은 대신 임금의 태실인 태봉(胎封)으로 봉하고 가봉비를 세워두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의 태봉은 수양대군과 멀리 떨어져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아쉽게도 선석산이 이름을 따왔다는 선석사(禪石寺)는 들러볼 수 없었다. ‘국제신문에서 그린 지도에는 등산로가 선석사로 연결되는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하산하는 도중에 갈림길이 눈에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1(692)에 절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신광사라 불렸는데 신라 화엄10찰의 하나로 이름난 절이었다. 그때의 절은 지금의 절 서쪽에 있었다 한다. 공민왕 10(1361) 나옹대사가 주지로 오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이때 절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 해서 절 이름을 터를 닦는다는 뜻의 선() 자와 돌 석() 자를 써서 선석사라 했다 한다. 그때 발견된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그 일부가 땅 위에 내밀어져 있다고 한다.

 

운제산(雲梯山, 482m)-시루봉(502m)

 

산행일 : ‘15. 8. 15()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대송면과 경주시 강동면·천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오어사자장암깔딱재운제산헬기장시루봉산여고개422원효암오어사(산행시간: 4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부산일보에서는 운제산을 일러 산과 물과 고찰의 3박자가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맞다. 산은 비록 높지 않지만 범위가 넓고, 그 안에는 오어지(吾魚池)라는 너른 인공호수를 품고 있다. 거기다 자장(慈藏)과 혜공(惠空),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 큰스님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천년고찰 오어사(吾魚寺)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원효대사가 수도에 정진하면서 여러 가지 불경의 주해를 지었다는 원효암과 자장법사가 구름다리를 타고 오갔다는 자장암의 단아함과 아슬아슬함은 운제산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각설하고 운제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 할 수 있다. 자장암 일대와 원효암 들어가는 계곡에 바위가 발달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외의 곳에서는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의 순수한 흙산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편하다. 그래선지 포항시에서는 이곳을 공원처럼(都心公園)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정성들여 닦은 등산로는 임도처럼 넓었고, 곳곳에 벤치는 물론이고 시판(詩板) 등의 읽을거리까지 만들어 등산객들을 배려했다. 등산이 아니라 마치 동네 뒷산을 산책이라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이다. 아무튼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산으로 추천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오어사주차장(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35-1)

익산-포항고속도로 포항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구룡포읍(九龍浦邑) 방면으로 달리다가 오천 I.C(포항시 남구 오천읍 광명리)에서 빠져나온다.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이어서 만나게 되는 오천교차로(오천읍 용산리)에서 또 다시 좌회전하면 잠시 후 GS칼텍스주유소(오천읍 용산리)가 나온다. 주유소 앞의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어저수지가 보이고, 이어서 저수지가로 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오어사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고민을 시작한다. 오어사를 둘러보고 산행을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산행을 마치고 나서 들를 것인가로 말이다. 결론은 후자였다. 원효암을 마지막으로 산행을 끝내다보면 어차피 오어사를 앞을 지나야하기 때문이다. 관광안내소 오른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자장암으로 오르는 길이다. 입구에 관광안내도와 자장암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될 일이다. 자장암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많이 가파르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때문에 150m 남짓 정도 거리를 오르는데 12분 정도나 걸렸다.

 

 

가파르게 오르던 산길은 자장암 바로 턱 밑에서 왼편으로 길 하나를 나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무턱대고 들어서고 본다. 10m도 채 안되어 벼랑 때문에 길은 끝나버린다. 그러나 그곳은 자장암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였다. 1744년에 쓰여진 영일운제산오어사사적(迎日雲梯山吾魚寺事迹)’절의 북쪽 층을 이룬 바위 위에 자장암(慈藏庵)이 있는데 삼귀암(三龜巖)이 그 앞에 있어 마치 서로 바라보는 듯하다고 적혀있다. 혹시 이곳이 그 삼귀암(三龜巖)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자장암은 천길 벼랑 위에 흡사 제비집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그 아슬아슬한 광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오어사의 산내(山內) 암자인 자장암은 신라 진평왕(578) 때 자장율사가 창건(創建)했고 전하지만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은 천자봉에서 여의주를 품은 용()이 내려뻗은 산세로 인해 신라 당시부터 기도처로 이름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혜공(惠空)이 이곳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천년 넘게 빈터로 남아 있다가 근세에 들어서서 암자로 개축했는데, 현재는 대웅전과 아래층을 요사채로 쓰고 있는 대성전, 그리고 삼성각과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다 1998년에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세존진신보탑'까지 세워 요즘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암자의 뛰어난 풍모를 보려는 사람들만 해도 넘치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접견하려는 사람들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오늘도 시작부터 실수투성이다. 대웅전 앞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가슴에 담아야 하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덕분에 난 오어사(吾魚寺)와 오어지(吾魚池)가 어우러지는 절경(絶景)을 감상하지 못했다. 산행을 나서기 전에 미리 파악해 두어야 할 사전조사가 부실했던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는 진리를 곱씹으며 발길을 옮긴다. 등산로는 자장암을 뒤로 하고 대각리로 연결되는 차도를 따른다.

 

 

곧이어 운제선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이곳도 역시 무턱대고 들어서고 본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 두 채가 도무지 절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그나마 하나는 아예 완전한 양옥(洋屋)이다. 절간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이다. 그저 일상에서 자주 보는 여염집의 하나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절에 대한 내력을 어디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가 궁금했지만 어쩌겠는가.

 

 

운제선원에서 조금 더 가다 임도와 헤어진 뒤 숲길로 들어섰다가, 곧 또 다른 임도를 만난다. 대각리에서 산여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산여계곡 방향으로 100m쯤 더 가면 입산신고소를 겸하고 있는 산여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을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운제선원을 들어갔다 왔는데도 고작 8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임도를 벗어나 오른쪽에 보이는 다소 넓어 보이는 산길을 따른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들어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여하튼 산길은 고속도로처럼 넓고 반질반질하다. 포항 시민은 물론이고 인근의 산꾼들도 그만큼 많이 찾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록이 우거진 융단 같은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분마저 상쾌해진다. 아마 오늘 산행은 무척 편안한 산행이 될 모양이다. 곱디고운 산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적힌 붉은 입간판을 만난다. 운제산에는 해병대의 신병교육대가 있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은 산악훈련코스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저렇게 해병대의 구호를 적은 입간판들을 세워 놓았나 보다. 훈련에 지친 병사들을 응원하고 독려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해병대의 구호만 보이는 게 아니다. 마음에 담아 두면 좋을 만한 글들을 적은 입간판들도 눈에 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다. 눈만 돌리면 보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많이도 세워놓았다. 서둘지 말고 느긋이 거닐면서 마음속에 담아간다면 신체의 건강과 함께 마음의 건강까지도 챙겨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서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10분 후에는 깔딱재라고 적힌 표지판도 보인다. 그러나 여느 다른 산에서 보아오던 깔딱재를 연상하면 안 될 일이다. 그저 약간 가파른 정도인 데가 그 길이까지 짧기 때문이다. 그저 즐기듯이 걷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길이 훤하고 군데군데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으니 한눈을 팔면서 걸어도 하등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깔딱재에서 4분쯤 더 걸으면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이정표(운제산 0.9Km, 대왕암 1.5Km/ 대각 2.5Km/ 자장암 1.4Km, 오어사 1.6Km)가 있는 삼거리로 왼편은 대각리(대송면)의 영일만온천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삼거리에는 벤치를 놓고 그 곁에다 각종 읽을거리를 진열해놓아 쉼터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벤치에 앉으면 오천읍을 비롯한 포항시내의 풍경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저 멀리 영일만까지도 시야(視野)에 들어올 정도이다. 운제산은 조망(眺望)이 괜찮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운제산의 조망은 별로였다. 어쩌면 이곳이 가장 뛰어난 전망대가 아닐까 싶다. 실컷 조망을 즐겨보라는 얘기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오천읍은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을 품고 있는 고장이다. 신라사람인 연오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은 왜 틈만 나면 그들이 모시던 임금님의 고국(故國)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오천읍은 충절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고려시대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곳 오천읍 문충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지나면 6분 후에는 바위가 없는 바윗재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운제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운제산 정상 0.1Km/ 대왕암 0.7Km/ 오어사, 영일만온천)에 이른다. 정상은 능선을 따라 곧장 진행해야 하지만 일단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운제산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대왕암을 빼먹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운제산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산길은 다음 봉우리 앞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우회를 시킨다.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별 볼일 없는 봉우리까지 일부러 오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왕암으로 가는 길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 사면(斜面)을 따라 걷을 때 오른편 수풀 사이로 얼핏 보이는 바위가 그 첫 번째이다.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시루봉과 무장산 등이 또렷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산에 대한 조망만 놓고 볼 때에는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처가 아닐까 싶다.

 

 

또 다른 볼거리는 왼편에 있는 바위이다. 크기는 비록 대왕암에 미치지 못하지만 생김새만 놓고 볼 때에는 더 낫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왕암은 사면(斜面)길을 이어가다 능선이 꺾어지는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대왕암(大王岩) 하면 사람들은 흔히 경주에 있는 문무대왕의 수증릉을 떠올린다. 그러나 포항의 운제산에도 어엿한 대왕암이 존재한다. 이곳의 대왕암은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의 꼭대기에 커다랗고 뾰족한 촛대 모양의 바위를 누가 일부러 꽂아놓은 듯 말없이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높이 10m, 둘레 30m인 대왕바위는 신라 초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령부인의 수호신이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그리고 바위 사이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바위의 앞에다 제단(祭壇)까지 만들어 놓았다.

 

 

대왕암은 '천자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모든 해병대 신병들이 훈련수료의 기념으로 오르던 원래의 천자봉은 진해 소재의 장복산맥 동쪽에 있다. 그러나 1985년 교육훈련단이 진해에서 이곳 포항으로 옮긴 해병대는 천자봉의 혼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또 다른 상징물이 필요했다. 그 결과로 이곳 운제산의 대왕암을 2의 천자봉으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대왕암 앞에는 바위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을 적어놓고 있다. 왜국(倭國)의 역사(力士)와 우리나라의 신토불이 역사인 창해역사(滄海力士)와의 힘겨루기가 그 주요내용이다. 창해(滄海)는 곧 동해(東海)의 옛 이름일지니 어찌 왜의 장사 따위가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경기의 과정은 너무 복잡해 생략하겠다.

 

 

대왕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 운제산 정상으로 향한다. 그러나 아까 길이 갈렸던 삼거리까지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아까 지나왔던 사면길을 만나기 바로 직전에 곧바로 정상으로 오를 수 있도록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주능선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벤치와 식탁에다 조경으로 돌탑까지 갖춘 훌륭한 쉼터이다. 대왕암을 다녀오는 데는 25분이 걸렸다.

 

 

쉼터에서 운제산 정상은 금방이다. 운제산 정상은 반듯하게 잘 지어진 이층의 정자(亭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그 기세에 눌렸음인지 무인산불감시탑은 정상의 꼭짓점에서 비켜나있고 주인이어야 할 정상표지석은 아예 정자의 아래로 숨어버렸다. 참고로 운제산은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이 산에서 함께 수도를 하면서 구름을 사다리 삼아 절벽을 넘나들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신라 남해왕(南解王)의 비 운제부인(雲帝夫人)의 성모단(聖母壇)이 이곳에 있는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1권 남해왕조(南解王條)영일현 서쪽에 운제산성모가 있고, 가뭄에 빌면 영검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들머리에서 운제산 정상까지는 1시간25분 정도가 지났다.

 

 

 

누군가는 이층 누각에 오르면 조망이 시원스럽다고 했다. 철강입국의 포항공단이 눈길 가득히 들어오고 땅금 너머 짙푸른 동해바다가 태초의 모습 그대로 아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런 풍경은 들어오지 않았다. 웃자란 나무들로 인해 사방이 어느 곳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아랫도리가 싹둑 잘려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저 인근에 있는 시루봉과 무장산 등이 눈에 들어오는 정도이나 그마저도 짙은 연무(煙霧)로 인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시루봉으로 향한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의 반대방향이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면 산길은 다시 완만한 오르내림을 시작하면서 이어진다. 길의 폭이 좁아지고, 길바닥이 아까보다 폭신폭신해졌다는 것 외에는 아까 운제산으로 올라올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양새이다. 그 달라진 것 또한 사람들이 덜 다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15분쯤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지도에 시루봉갈림길이라고 적힌 지점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른편은 대송면 온천장으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 삼거리에서 시루봉은 왼편으로 거의 직각에 가깝게 꺾인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알아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곳의 자세한 상황은 국제신문의 산행기로 대신해 본다. ‘갈림길에 표시가 없으니 안내리본을 참고해 길 찾기에 주의하자. 혹시 이 갈림길을 놓친다면 조금 더 가서 이정표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10도 정도 꺾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튼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길은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한다. 덕분에 볼거리라곤 일절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갈 따름이다. 산행이란 본디 산을 걷는행위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걷는 행위 자체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니 고마운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20분쯤 후에는 임도(이정표 : 시루봉 2.75Km/ 운제산 2.53Km/ 홍계리)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 홍계리(홍계폭포)로 연결된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산의 사면(斜面)을 헤집으며 난 길은 오르내림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산책 삼아서 걷기에 딱 좋다. 임도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12~3분 정도를 걸으면 폐()헬기장으로 생각되는 공터를 만나게 되고, 잠시 후 산길은 임도와 헤어져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능선이 아닌 사면을 따른다. 참고로 이곳에서 계속해서 임도를 따를 경우 왕신리(경주시 강동면)로 내려가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아무튼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13분 정도를 더 걸으면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길가 나뭇가지에 망뫼봉이라고 적힌 자그마한 정상판이 매달려있다. 부산일보 지도에 455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상판에는 447m로 적혀있으니 모를 일이다.

 

 

망뫼봉을 지난 산길은 색다른 변화 없이 그저 평범하게 이어진다. 대신 산길은 고운 편이다. 부드러운 흙길이 계속되는 데다 경사(傾斜)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하기까지 하다. 길 또한 산책로처럼 잘 가꿔져있다. 이런 길을 일러 걸으면 걸을수록 편안한 길이라 하지 않나 싶다.

 

 

산책삼아 30분쯤 걸으면 시루봉 아래의 안부사거리(이정표 : 시루봉 100m/ 산여계곡/ 무장산/ 운제산 5.17Km)에 이르게 된다. 시루봉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100m정도 비켜나 있다. 정상을 둘러보고 나서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다녀오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참고로 이곳에서 직진할 경우에는 억새로 유명한 무장산에 이르게 된다.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루봉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밋밋한 봉우리이다 보니 산봉우리란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거기다 조망까지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고 곧장 되돌아 나오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인증사진을 찍는 것을 빼먹지는 않았다.

 

 

사거리에서 산여고개 방향으로 내려선다. 산길은 적당한 가파름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아래로 향한다. 걷기 딱 좋은 산길을 따라 20분 남짓 내려오면 산여고개(이정표 : 오어사 2.9Km/ 산여계곡/ 시루봉 1.6Km)에 이르게 된다.

 

 

등산로는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나있다. 그러나 난 왼편의 산여계곡 방향의 임도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오른편 산릉(山稜)을 타며 고생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계곡에 앉아 족욕(足浴)이라도 즐기다 내려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원효암은 꼭 들러보는 게 좋다. 이때는 오서사에 내려선 다음 원효암까지 잠깐 다녀오면 되기 때문이다.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 잠시 웃자란 잡초(雜草)들이 무성한 평지를 지나고, 이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구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고 다음부터는 밋밋한 경사(傾斜)를 유지하면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게 된다.

 

 

능선을 걷다가 묘한 풍경과 맞닥뜨렸다. 누군가 길가의 소나무에다 내 나무라고 적은 판자를 매달아 놓은 것이다. 아마 그럴 듯하게 생긴 모습에 마음을 몽땅 빼앗겼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능선을 따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끔은 산봉우리를 다 오르지 않고 살짝 우회를 시키기도 한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이제나저제나 산행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나무에서 25분쯤 더 진행하면 산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헬기장이 있는 422m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러나 고집스레 오를 필요는 없다. 왼편 사면(斜面)으로 우회로(迂廻路)가 나있기 때문이다. 헬기장에 올라봐야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인증사진을 찍을 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집사람에게 이곳으로 올라오지 말고 우회로를 따르라고 한 것이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비록 잠깐이지만 내려서는 게 약간은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이어서 다시 완만해진 산길을 따라 13분 정도를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은 원효사를 거치지 않고 곧장 오어사로 향하는 길이다. 원효사를 향해 방향을 잡자마자 느닷없이 습지(濕地)가 나타난다. 제법 규모가 큰 습지에는 창포가 곧게 잘 자라고 있다. 포항시에서 운제산 산림욕장 조성계획을 세우면서 습지생태관찰원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곳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만 다듬는다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제법 쏠쏠할 것이기 때문이다.

 

 

 

습지를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원효암/ 오어지/ 헬기장)를 만난다. 오른편은 조금 전의 삼거리와 마찬가지로 오어저수지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곧바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배겨내지 못하고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란 곳에는 왔다갔다 갈지()자로 길을 만들기도 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깊은 산골짜기 안에 들어앉은 산중암자가 나타난다. 바로 원효암(元曉庵)이다. 산그늘을 닮은 암자는 한층 더 적요(寂寥)하기만 하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의 냄새가 옅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는 듯이 인기척을 내지 않고 있다. 오어사의 부속암자인 원효암(元曉庵)은 원효대사가 기거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효는 이 암자에 거처하면서 운제산의 구름을 타고 자장암(慈藏庵)을 건너다니며 혜공(惠空)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운제산 또한 이런 연유로 얻게 된 이름이다. 두 암자 사이를 내왕하기 어려우므로 구름으로 다리를 놓아 오고 갔다 하여, ‘구름 운()’, ‘사다리 제()’자를 써서 운제산(雲梯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암자는 1937년 산불로 전소(全燒)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중건하여 현재 요사채로도 사용하는 선방(禪房)을 짓고, 1984년에는 삼성각을, 그리고 2000년에 선방 옆의 관음전을 지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는 느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효암에서 나오는 길은 계곡을 따른다. 바위벼랑이 제법 잘 발달된 골짜기이다. 길가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도 보인다. 민초들의 소박한 심성이 묻어나는 것들이다. 계곡이 끝날 무렵이면 길은 바위벼랑의 중턱으로 나있다. 덕분에 오어저수지는 물론이고 건너편 천길 단애(斷崖)의 위에 자리한 자장암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저기에 물안개라도 낀다면 과연 어떤 풍경으로 변할까. 문득 일재 김윤보(金允輔) 화백의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무튼 자장암은 운제산의 백미(白眉)이다. 오어사를 건너기 위해서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아래는 물론 오어저수지이다. 다리를 아래를 내려다보던 집사람이 갑자기 탄성(歎聲)을 지르며 호들갑을 떤다. 커다란 물고기들이 지천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다리 아래에서 많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혜공과 원효가 서로 내 물고기(吾魚)’라고 고집했다는 그 물고기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산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곧바로 오어사의 뒷문으로 연결된다. 오어사(吾魚寺)는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세웠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창건하여 처음에는 항사사(恒沙寺)로 불리었다고 전해질 따름이다. 이 절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절 이름 가운데 몇 안 되는 현존 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서 항하수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 벗어났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부른다.’항사사라는 절 이름에 담긴 뜻을 각주(脚註)로 풀이하고 있다. ‘항사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이라는 뜻이 되지만 불전에서는 흔히 그 모래알처럼 무한한 수를 가리키는 비유로 쓰인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자장(慈藏)과 혜공(惠空), 원효(元曉), 의상(義湘)스님 등이 이 절과 큰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바로 그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북 문화재 자료 제88호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설선당(說禪堂칠성각·산령각 등이 있으며, 이 중 대웅전을 제외한 당우(堂宇)들은 모두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국가문화재로는 보물 제1280호로 지정된 높이 93.5의 동종(銅鍾)이 있다. 1995년 오어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종의 몸체에 새겨진 명문(明文)에 의하면 동화사(桐華寺) 스님들이 공동으로 발원하여 삼백 근의 중량을 들여 정우(貞祐) 4, 1216(고종 3)에 대장(大匠) 순광(順光)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높이 1척에 지름이 1.5척인 원효대사의 삿갓이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삿갓의 뒷부분은 거의 삭아버렸지만 겹겹으로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단다. 참고로 오어사란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함께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방변(放便)하였더니 고기 두 마리가 나와서,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중 올라가는 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고 하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절 오어사는 오어지라는 호숫가에 있다. 주차장도 저수지와 접해있음은 물론이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운 저수지의 수면(水面)은 한없이 고요하다. 문득 바라보기만 해도 속진(俗塵)에 찌든 마음이 씻겨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저수지 위에 현수교(懸垂橋)가 걸려있다. 독특한 외양을 갖고 있는 다리이다. 다리의 모양새야 다른 곳에서 보아오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양쪽 주탑(柱塔)이 특이하게도 단청(丹靑) 모양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오어사 대형차량 주차장

오어사를 빠져나오면서 실질적인 산행은 종료된다. 그러나 대형버스를 이용해서 이곳에 왔다면 아니올시다이다. 사찰 앞은 대형버스의 주차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행은 10분 이상을 더 연장하는 셈이 된다. 대형버스 주차장이 오어저수지의 둑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4시간 이상을 걸은 후라 힘은 더 들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괜찮은 편이었다. 화장실이 깨끗하면서도 널찍해서 산행을 하면서 흘렸던 땀을 씻을 수도 있고, 거기다 주변에 조성된 숲에서 잠깐의 휴식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오어사 앞에서 대형버스주차장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뺀 결과이다.

달바위봉(月巖峰, 1,094m)

 

산행일 : ‘15. 7. 21()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산행코스 : 월암마을 버스정류장여래사칠성암달바위봉두 달바위봉 중간 안부합장바위철탑속세골입구대현교(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진안의 마이산을 닮았다고 해서 경북의 마이산이라고도 불린다. 태백산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암봉(巖峰)이 우뚝 솟아난 것이, 진안의 마이산처럼 영락없이 두 개의 귀로 보이기 때문이란다. 산도 높을뿐더러, 암벽(巖壁)을 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너무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덕분에 원시(原始)의 숲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다. 그러나 노약자들이라면 오를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 전체가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대현리 월암마을

중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태백까지 들어간다. 이어서 31번 국도로 갈아타고 봉화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물 맑기로 소문난 백천계곡 입구에서 산행들머리인 대현리 월암마을(봉화군 석포면)을 만나게 된다. 도로변 버스정류장 곁에 달바위봉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남쪽 지방에서 올 때에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 영주까지 온 후, 28, 36, 31번 국도를 이용하여 이곳까지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서울에서 내려올 때도 후자를 택했다. 귀경 길은 전자를 이용했음은 물론이다.

 

 

 

대현 1(달바위)’ 버스정류장의 오른편으로 난 동네 안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냇가를 따라 난 길을 잠시 걷다보면 마을이 끝나는 무렵에서 천주교 대현교회가 나타난다. 폐쇄(閉鎖)된 지 제법 오래 되었는지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빛바랜 교회건물이 을씨년스럽다. 우리나라 최대의 아연광산이었던 연화광업소가 번창했을 당시만 해도 성당은 신도들로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전 종전 이후 국제 아연 값의 폭락으로 인해 광업소가 문을 닫고 떠나면서 성당은 제 할 일을 잃었지 않나 싶다. 조금 전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폐가(廢家)로 변한 옛 연화광업소 사택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성당의 옆에는 여래사라는 이름의 자그만 사찰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하느님과 부처님이 바로 곁에서 공존(共存)하고 계시는 모양새이다. 이질적인 풍경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런 게 바로 종교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해가는 것이 종교의 본질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사는 본시 대한불교태고종(大韓佛敎 太古宗) 소속의 문수암(文殊庵)이 있던 자리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여래사로 바뀌었나 보다. 태고종이 본래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로 하고, 출가(出家)를 하지 않고도 사찰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그새 사찰의 매매(賣買)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입구에 문수사이라고 적힌 표석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은 것으로 보아 이름이 바뀐 지 얼마 되지는 않은 듯 싶다.

 

 

여래사를 지나서도 임도는 계속해서 냇가를 따른다.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는 게 임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길이 넓다보니 특별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길가에 곱게 핀 꽃들이 있어 그 무료함을 다소나마 달래준다. 들머리를 출발한지 18분 정도가 지나면 정자(亭子)와 화장실까지 반듯하게 갖춘 제법 너른 주차장(이정표 : 월암봉 1.8Km)을 만난다. 승용차를 가져왔을 경우 이곳에다 주차하면 되겠다. 이정표의 월암봉(月岩峰)은 말 그대로 달바위봉이다. 당연히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주차장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오른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 아래로 난 길을 잠시 걸으면 달바위봉을 배경 삼아 앉아있는 칠성암이 나온다. 옛 월암사 자리란다. 칠성암의 절집 머리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봉우리가 진안의 마이산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경북의 마이산이라고 부르나 보다.

 

 

칠성암은 약사전과 산신각 등 법당(法堂) 세 동()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산중 암자(庵子)인데, 사찰이라기보다는 여염집의 냄새를 더 짙게 풍기고 있다. 작아도 저리 작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법당(法堂)들에 비해 살림집인 요사채가 너무 큰 탓이 아닐까 싶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 표시지를 보고 나무라던 부부의 옷차림이 승려복(僧侶服)이 아니라 일반인의 옷차림이라는 것도 여염집으로 보는 데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선지 칠성암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무속인들의 블로그(blog) 몇 곳에서 영험하다며 기도를 적극 추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찰이 맞는 듯 싶다.

 

 

산길은 산신각 앞으로 나있다. 오솔길을 잠깐 오르면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난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산길은 임도와 헤어져 왼편 산자락으로 오솔길을 연다. 칠성암에서 7~8분 거리이다. 그런데 이정표에 적혀있는 월암봉까지의 거리표시를 누군가 일부러 지워놓았다. 아마 거리를 잘못 표기해 놓았던 모양이다.

 

 

오솔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산길은 아주 가팔라진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곳곳에다 안전로프를 매어 놓았다. 힘에 부대낄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길이 달바위봉의 바위벼랑 아래로 나있어 가끔은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다래넝쿨들은 제철에 찾아올 경우 잠깐의 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아참 놓칠 뻔 했다. 머루넝쿨들도 자주 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싸움은 30분 정도 계속된다.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인데 날씨까지 거드니 죽을 맛이다. 그 싸움에 지쳐 녹초가 될 무렵에야 바위 틈새의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산길은 능선 너머에서 둘(이정표 : 속세골 쉼터 4.5Km/ 칠성암 2Km)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또 다른 이정표(월암봉 2Km)가 가리키는 대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야 함은 물론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본격적으로 바윗길이 시작된다. 바윗길 중에서도 험한 편으로 분류해야 할 정도로 거친 바윗길이다. 가파르고 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어 놓거나 스테인리스스틸(stainless steel)봉으로 만든 사다리를 설치했.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로프에 매달린 채로 중심잡기가 쉽지 않은 곳이 가끔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곳을 오버행(overhang)이라고 부른다. 바위의 면이 툭 튀어나와 있는 곳 말이다.

 

 

 

그러나 위험에 대한 보상은 크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너무나도 빼어난 조망처가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10분 정도의 사투(死鬪)를 치른 후에 만난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깃대배기봉에서 태백산을 거쳐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짙게 낀 구름이 산의 윗부분을 삼켜버렸지만 말이다.

 

 

다시 철계단을 오른다. 이번엔 두어 개의 계단이 연거푸 이어진다. 그리고 그 위에서 또 다시 전망이 트인다. 아까의 전망대와 거의 비슷한 각도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때문에 바라보이는 경치 또한 같다. 그리고 산릉의 윗부분을 구름이 짙게 감싸고 있는 것 역시 아까와 같다. 안타깝게도 백두대간의 헌걸찬 능선을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다른 이의 글로써나마 대신해본다. 서북쪽 멀리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백두대간 능선에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이 우뚝 솟았고 부쇠봉 문수봉 등 태백산군의 봉우리들도 얼굴을 드러낸다. 더 우측으로는 함백산과 매봉산 풍력발전단지가 보인다. 태백산에서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지긋이 달바위봉을 바라보고 있는 청옥산이 눈에 든다. 가까운 곳으로는 조록바위봉과 조람봉 등 문수봉에서 뻗어내린 능선 상의 아기자기한 암봉들이 마치 제주도 오름처럼 올록볼록 솟아나 있어 조망미를 더 조화롭게 해준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 이번에는 스테인리스스틸(stainless steel)봉 사다리가 이어진다. 물론 안전로프에 의지해야 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세 번째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더 높이 올라야 한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라보이는 시야(視野)가 아까보다 많이 넓어졌다. 아직까지 구름이 걷히지 않아서 그 풍경들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는 없지만, 구름만 아니라면 위에서 열거했던 풍경들이 더욱 선명하면서도 아까보다 더 넓게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조망만 좋은 게 아니다. 거대하고 힘 넘치는 바위봉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들이 곳곳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언제가 인사동에서 보았던 고전(古典) 산수화(山水畵)를 보고 있는 듯하다.

 

 

능선에서 전망대의 숫자를 세는 것은 무의미하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오르는 곳마다 모두 뛰어난 전망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빼어난풍경을 보여준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열리는 시야(視野)가 정상에 이를 때까지는 모두 같다는 점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바윗길을 타다보면 아름드리 금강송(金剛松)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마치 천년 풍상을 견디며 살아온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멋들어진데다가 늠름함까지 곁들였다. ‘명품 소나무반열에 올려놔도 될 정도로 그 자태가 뛰어났다.

 

 

명품 소나무에서 칼날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예닐곱 평 남짓 되는 흙으로 이루어진 분지(盆地)를 만난다. 이곳에서 맞은편에 매달려있는 로프를 잡고 오르면 정상이 나오고, 왼편에 보이는 희미한 길은 정법사 쪽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물론 작은달바위봉에 오르고 싶은 경우에도 왼편으로 내려가야 한다. 분지의 한가운데에는 봉분(封墳) 비슷한 것이 자리 잡고 있다. 달바위봉 인근에 살았다는 어느 효자의 가슴 아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묘()란다. 옛날 달바위봉 인근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봉양하고 있던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누군가로부터 바위에서 자라는 석이버섯이 병구완에 좋다는 소리를 들은 그가 이곳에 올라 버섯을 따다가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그의 효()를 기려 쓴 묘가 바로 이곳이란다. 묘의 바로 오른편에서 멋진 조망처가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러보자. 달바위봉 정상과 건너편 작은 달바위봉, 그리고 두 개의 암봉이 만들어 낸 수백 길의 절벽과 그 바위 틈새의 소나무들이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보는 듯하다. 그 그림의 한쪽 끝, 서슬 시퍼런 절벽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무덤에서 로프를 매달려 용틀임을 한번 하면 드디어 달바위봉 정상이다. 3(三面)이 수백 길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진 정상은 이름 그대로 둥근 달을 닮은 형상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바위덩어리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 바위가 하도 크다보니 제법 너른 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공깃돌 모양의 바위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고,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정상표지석은 그 바위 위에 얹히어 있다. 참고로 달바위봉은 월암봉 또는 장군봉이라고도 부른다. 태백산에 입산했다는 단종의 영혼을 천도(遷度)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매년 추석날 저녁에 태백산 천제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산위에 암석(巖石)으로 된 봉우리가 달같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2개의 암봉 사이로 둥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상은 바위봉우리의 특징대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을 선사한다. 남으로 비룡산에서 솔개발목이봉과 넛재를 거쳐 청옥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물론이요, 깃대배기봉에서 태백산을 거쳐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석포 쪽으로는 낙동정맥이 영양 땅을 향해 내달리는데, 경북 땅에서 가장 높다는 일월산은 부드러운 선을 그린 채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달바위봉과 주변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조금 전의 무덤에서 오른편이다. 하지만 이 코스를 이용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실제로도 위험하니 통행하지 말라는 입간판을 들머리에다 세워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산 길로 들어서자마자 간담이 서늘해진다. 차라리 직벽(直壁)은 마음이 놓일 정도다. 매달려있는 로프가 굵어서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가 비록 짧다고는 하지만 양면(兩面)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구간은 어디 하나 의지할 것도 보이지 않고, 벼랑에 매달리다시피 해야 하는 구간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이다. 낭떠러지 쪽에 매어져 있는 로프가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이다. 자칫 로프에 의지라도 할 경우 큰일을 당하기 십상일 것 같다.

 

 

 

 

달바위봉에는 가마솥 뚜껑만한 검은 왕거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정상에서 내려오는 구간은 어느 곳 하나 만만치가 않다. 왕거미가 촘촘하고 탄탄하게 거미집이라도 지어놓은 모양이다. 물론 바위에 매달려있는 로프는 거미줄이고 말이다. 바윗길 위험구간은 5~6개의 로프 구간을 통과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바윗길이지만, 대신 이에 대한 보상도 만만치 않다. 곳곳에서 조망이 트이는데 수직(垂直)의 바위벼랑과 그 너머에 있는 풍경들이 함께 잘 어울리며 잘 그린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높이가 20m쯤 되는 바위벼랑을 마지막으로 바윗길은 끝을 맺는다. 이 마지막 벼랑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난코스이다. 바위 면이 중심잡기가 옹색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길기까지 하다 보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암릉 산행에 제법 이골이 난 집사람까지도 내 도움이 필요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여간 암릉 산행에 익숙하지 않는 등산객들은 가급적 이 코스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산행코스를 오늘 우리가 진행했던 코스와 반대로 잡아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대현교에서 시작해서 월암마을로 내려가는 코스로 말이다. 이럴 경우 위험구간을 올라가게 되므로 위험도가 조금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바윗길과의 사투를 20분 남짓 벌리다보면 작은달바위봉과의 사이에 있는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하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오는 순간이다. 삼거리(이정표 : 정법사/ 문수암, 달바위봉)인 이곳에서는 정법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작은달바위봉으로 오르는 길이 이곳에서 나뉘지만 오르는 것을 생략한 것이다. 가끔 산행을 함께 해오던 산꾼 한분이 저곳을 오르다가 밧줄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위험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게 6~7분쯤 진행하면 성황골(석포리)갈림길’(이정표 : 대현리 속세골/ 석포리 성황골/ 달바위봉)을 지나게 되고, 속세골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후에는 달바위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를 만나게 된다.

 

 

 

성황골가림길에서 6분쯤 더 걸으면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합장바위란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형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문제다. 그러나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바위를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에는 그런 모양새가 나타나지 않지만 바위의 꼭대기만 떼어놓고 보면 영낙없이 두 손바닥을 맞대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합장바위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영양가(營養價) 없는 생각 하나,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대현성당과 여래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성당은 문을 닫았는데 비해 여래사는 암자에서 사()자가 들어가는 절로 오히려 승격이 되었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합장바위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으니 영양가가 없을 것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명색이 가톨릭신자라고 자처하는 인간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산길은 합장바위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로 변한다. 이어지는 산길은 곳곳에 로프와 철사다리까지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만만치 않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구르기라도 할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만 할 정도로 위험했던 아까의 달바위봉의 암릉구간과는 달리 이 구간은 사고를 당하더라도 큰 부상까지는 입지 않을 정도로 그 경사도(傾斜度)나 높이가 약한 것이다.

 

 

 

 

편치 않은 산길은 35분 가까이 계속된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아마 속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길이 고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길은 송전탑(送電塔)을 만나면서 그 기세(氣勢)를 누그러뜨린다. 이어지는 산길은 곧게 자란 소나무 숲속으로 나있다. 순수한 흙길임은 물론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내려오면 무덤을 만난다.

 

 

무덤을 지나면 곧이어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인 속세골이다. 속세골은 언덕 위에 자연 자생한 억세풀(속세)이 유별나게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속세골을 지나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민가(民家)가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정법사로 연결되는 포장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정법사까지는 2~3분 거리, 시간이 촉박하지 않다면 잠깐 들렀다가보는 것도 괜찮다. 산중에 있는 작은 사찰에 불과하지만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약수터와 누워있는 부처님 등 나름대로의 볼거리를 제법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법사는 대한불교조동동(大韓佛敎曹洞宗) 소속의 사찰이나 아쉽게도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창건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참고로 조동종은 1989년 창시된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로서 총본산은 청련사(서울 종로구 평창동)이며,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동산양개선사(洞山良价禪師)를 종조(宗祖)로 받든다.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金剛經)이나 기타 경전연구나 염불지송(念佛持呪)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산행날머리는 정법사의 들머리인 대현교(석포면 대현리)

정법사를 둘러보고 또 다시 길을 나선다. 물론 약수로 목을 축였음은 물론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저만큼에 대현교 다리가 보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10분과 정상에서의 조망 및 정법사 탐방이 포함된 시간이다. 산행을 끝내고 송정리천에 몸을 담근다. 시원하지만 시리지 않는 물이 들어앉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이곳이 물 맑고 차갑기로 유명하다는 백천계곡의 아랫자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백천계곡은 금강송(金剛松) 등 울창한 천연림으로 에워 쌓인 심산유곡이어서 멸종 어종(魚種)인 열목어(熱目漁)의 서식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원래 빙하기 어족인 열목어는 눈에 열()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냉수어로서 한여름에도 수온이 20가 넘으면 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경 길에 태백시 동점동에 위치한 구문소(求門沼)에 들렀다. 바위절벽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가 뚫려있는데 그 생김새가 자못 기이(奇異)해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눈요기를 즐기고 가는 곳이다. 두 굴에는 모두 길이 나있다. 지상의 굴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물길이 나있는 것이다. 이중 물이 흐르는 굴은 황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산줄기를 뚫으며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굴의 생김새가 큰 석문(石門)을 닮았고, 그 아래에 깊은 소()를 만들었다고 해서 구문소(求門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구문소란 구무소의 한자 표기로서 구무는 구멍 또는 굴의 고어(古語)이다.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내(穿川)’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참고로 구문소는 주위가 모두 석회암반으로 되었으며 높이 20~30m, 넓이 30m 정도의 이 특이한 도강산맥(渡江山脈)은 약 15,000~3억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형을 찾기 힘든 기이한 곳이다. 구문소 일대의 천변 4km 구간은 우리나라 하부고생대의 표준 층서를 보여 주는 지질시대별 암상을 비교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알려져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되고 구문소 자연학습장이 운영되고 있다. 구문소는 정감록(鄭鑑錄)과도 인연이 깊다. 책에 나온 얘기를 옮겨본다. ‘낙동강의 최상류로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石門)이 나온다. 그 석문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축시(丑時)에 닫히는데 자시에 열릴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凶年)이 없으며 병화(兵禍)가 없고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오복동(五福洞)이란 이상향(理想鄕)이 나온다.’ 그 오복동(一名 午腹洞)은 지금의 태백시 일원을 말하고 석문(石門)은 구문소를 이른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도 역시다. 차를 타자마자 샌드위치(Sandwich)와 방울토마토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회장이란 여자 분이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란다. 그리고 산행대장의 또 다른 멘트(announcement)에 의하면 산행 후에는 닭백숙이 준비되어 있단다. 이 또한 그분이 제공한다는 말을 듣고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분명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의 회장님이 아니다. 단지 몇 좌석을 할당 받고 있을 뿐인 동호회 성격의 산악회를 이끌 뿐이라는 것이다. 몇 푼 되지 않은 회비를 받고 그녀의 회원들을 돌보기도 힘들 텐데 오늘 산행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다 먹여 살리고 있으니 궁금증이 생기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얻어먹는 게 미안했지만 오늘도 역시 난 맛있게 먹어드리는 것으로 답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