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11코스(양구 돌산령길)

 

여행일 : ‘23. 9. 17()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및 해안면 일원

여행코스 : 팔랑리대암산용늪 탐방안내소도솔산 전적지돌산령 정상해안입구(거리/시간 : 16km,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부터 10.7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월운저수지 상부(양구군 동면 월운리)

중앙고속도로 춘천 IC에서 내려와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읍까지 온다. 송청교차로(국토중앙면 죽리)에서 31번 국도(양구·해안방면)로 옮겨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월운저수지에 이른다. 댐의 상부에 평화누리길  ‘DMZ평화의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팔랑리(양구군 동면)에서 시작해 해안입구(양구군 해안면)에 이르는 16km짜리 구간. 하지만 팔랑리의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해랑길 같은 공식적인 트랙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답자들의 기록도 중구난방. ‘가톨릭 팔랑리공소를 기점으로 삼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곳 월운저수지(같은 동면이지만 월운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아무튼 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하는 꼼수를 사용했다.

 평화누리길은 자전거 길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 같은 걷기 여행자들은 들러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평화누리길보다 새로 개통되는 ‘DMZ평화의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미 개통구간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걸으면 될 것이고 말이다.

 이 구간은 ‘DMZ평화의 길(27코스)’도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강원도 11코스)과 종점만 다를 뿐 시점은 같기 때문이다. 아니 월운저수지 구간은 두 탐방로가 약간 다르게 나있다고 했다.

 일단은 도로 건너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전적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임과 동시에 우리네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피의능선 전투(Battle of Bloody Ridge)’ 1951 8 16일부터 9 5일까지(20일간) 벌어진 전투다.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 중 하나였던 이 전투를 기억하고, 희생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적비를 세웠다.

 피의능선 전투는 국군이 휴전회담을 진척시키는 동시에 휴전에 대비하여 중요한 요충지(캔사스선 북방 10~20km 지역에 위치한 수리봉 일대)들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공격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1개 연대 규모, 그리고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1,480여 명이 사살되고 70여 명이 생포)가 발생하자 미군 신문(Stars and Stripes) 피의능선 전투라 이름 지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난다.

 실제는 대암산 용늪 탐방안내소 앞에서 출발했다. ‘돌산령 옛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할까도 했지만, 경사만 가파를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특히 쉼터용 정자에 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출발지점으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대암산의 1,280m 구릉지대에 형성된 용늪은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고층습원(高層濕原)으로 다양한 지연환경과 동·식물을 갖고 있어 1989년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1997년에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 조약의 습지로 등록되었다.

 용늪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탓에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에게만 탐방을 허용한다. 탐방안내소는 이곳 말고도 인제군의 서흥리(10년 전 내가 이용했던 곳이다)와 가아리가 있다. 아무튼 민간통제선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군의 통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저처럼 문이 굳게 닫혀있는 이유일 것이다.

 10 : 14. 돌산령 옛 고갯길(돌산령 터널이 생기기 전 양구에서 해안으로 갈 때 이용하던 지방도)을 올라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구간(12.34km)은 갓길이 따로 없는 왕복 2차선 도로다. 산자락 쪽으로 파란 선을 그어 자전거 길을 구분하고 있으나 안전 확보는 라이더(보행자 포함)의 몫이다.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정표는 돌산령 정상까지 4.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11코스가 시작되는 팔랑리까지는 5km. 딱 그만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돌산령 정상까지는 4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길은 경사를 거의 못 느낄 정도로 평탄하다. 하긴 5km를 걸으며 400m만 높이면 되니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몸이 편하면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심심찮게 변하는 주변풍광에 눈 맞추며 걸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절개지의 비탈진 사면에 박아놓은 락볼트(soil nailing공법). 도로개설 당시의 어려움을 대변해준다.

 길가 산비탈은 산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초여름에는 흰색의 화려한 꽃으로, 가을에는 붉게 익은 열매로 우리를 사로잡는 나무다. 그 열매가 딸기와 비슷하게 생겨서 산딸나무라 부른다. 그나저나 붉고 고운 열매가 군침을 돌게 해 따먹어 봤다. 하지만 약간 달달할 뿐 즐겨 찾을만한 과일은 아닌 것 같다.

 10 : 31. 첫 번째 쉼터(이정표 : 정상까지 3.9km)에 닿았다.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온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 모양으로 만든 쉼터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지붕까지 씌웠다. 전천후인 셈이다. 그나저나 쉼터라고 해서 꼭 쉬었다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쉼터는 있는 자체로만으로도 나그네에게 기쁨을 준다.

 옛 고갯길은 군인 통제 하에 있다고 봐야겠다. 길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것은 기본. 도로도 순찰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길섶에 핀 야생화를 촬영하는 중인데, 순식간에 차량이 나타나더니 도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를 내릴 정도였다.

 갖가지 경고용 현수막도 이 구간의 특징 중 하나다. 민통선 이북의 군사시설보호지역이라서 무단출입 및 채집·영농활동을 금지한단다.

 순찰차의 말마따나 철조망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 울타리는 또 북한에서 넘어오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 멧돼지의 차단막까지 겸하고 있나보다.

 무단출입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단다. 전적지를 안내해주던 병사는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카메라나 핸드폰은 꺼내지도 말라며 겁을 주고 있었다.

 그나마 이건 부탁에 가깝다. 천연기념물 217호인 산양의 주요서식지이니 아끼고 보호해주잔다.

 가끔가다 허락되지만 조망 또한 주요 볼거리다. DMZ 방향의 산하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서인지 운해로 뒤덮여 있었다.

 올 여름,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이곳에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산사태가 도로를 덮친 곳에서는 위험을 무릅쓴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가 유실되다시피 한 곳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저런 급경사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1,050m(돌산령 정상)까지 고도를 높여야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맞다. ‘DMZ평화의 길(27코스)’ 안내판은 이 구간을 물리적 난이도가 높다고 적고 있었다.

 10 : 55. 24분쯤 더 걸어 두 번째 쉼터를 만났다. 이정표는 정상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돌산령 고갯길 ·구도로가 나뉘는 삼거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6km라고 했으니 대략 2km마다 쉼터를 만들어놓은 셈이다.

 돌산령 인근은 ‘DMZ 야생화벨트 사업이 시행된 모양이다. 청사초·김의털·비비추·꿀풀·기린초 등을 심고, 흰민들레·질경이·구절초·벌개미취 등은 씨앗을 뿌렸단다. 시간이 흐르면 동아시아 그린브릿지 연결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몰라도 야생화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은 많이 찾아오겠다.

 이 지역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주목·분비·거제수 등을 보호하고 있단다.

 안내판에 이끌려 카메라의 초점을 야생화에 맞춰본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개미취’. ‘들국화라 부르는 국화과 꽃의 얼굴마담이다. 참고로 들국화란 산국·감국·쑥부쟁이·개미취·구절초 등등 산과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들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나 이것 역시 개미취.

 요건 구절초’, 세분류하면 낙동구철초란다. 모 대학 도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여사친 산우가 심심찮게 보내주는 차의 원료이기도 하다. 가끔 이 차를 마시는데 은은한 노란빛이 우려난 차색도 곱지만 향도 정말 일품이다. 향긋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을 정도로...

 블루 마거리트(Blue Marguerite)로도 불리는 블루데이지(Blue Daisy)’이다. 한국 이름은 청화국이라나?

 백공작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쑥부쟁이. 싸잡아서 들국화로 부르는 국화과의 꽃들은 종류도 많다. 꽃의 생김새도 구분이 불가능 할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작은 꽃들이 총총하게 피는 미국쑥부쟁이가 유일하게 뚜렷한 차이점을 본인다고나 할까?

 작약, 당귀, 황기, 지황과 더불어 5대 기본 한방 약재 중 하나로 꼽히는 천궁도 꽃을 활짝 피웠다.

 야산에서 피는 구절초나 개미취와는 달리 심산이나 고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체꽃(스카비오사)’도 눈에 띈다. 꽃봉오리의 모양이 구멍 뚫린 체를 닮았다고 해서 체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스카비오사(Scabiosa) 이란 뜻의 라틴어, 이 꽃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1 : 29: 굽이굽이 돌산령길을 돌아올라 도솔산전적지 입구에 이른다. 하지만 군인들이 딱 막고 섰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야만 탐방이 가능하단다. 말이 안내지 전적지를 둘러싼 울타리를 넘을 것을 대비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도솔산 전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 붉은 글씨로 적힌 무적 해병이 눈길을 끈다. 도솔산 전투의 승리를 치하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준 휘호라고 한다. 한편 도솔산 전투를 기리는 도솔산가라는 군가가 제정되기도 했단다.

 도솔산(兜率山, 1,148m)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도솔산 전적지를 가리킨다. 전적지 뒤로 길이 나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완주하면 담낭이 튼튼해진다는 양구 십년장생 길(4년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도솔산과 대암산 정상을 거쳐 양구생태식물원으로 떨어지는 4코스란다. 하지만 민통선 안이라서 통행은 불가. 길은 길이나 걷지 못하는 길인 셈이다.

 11 : 34. 전적지는 꽤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때 해병대의 주력 상륙장비로 사용되던 수륙양용장갑차. 그리고 비목을 연상시키는 나무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도솔산지구전투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첫 공격은 1951 6 4일 시작됐다. 그리고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2,263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대공방전으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평화나무·생명나무가 눈길을 끈다. DMZ을 횡단하는 평화·생명지내 체험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데,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고,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짓는다.’는 어느 단체의 홍보문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위령비는 나무 장승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그날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양구군 각 면에서 만든 것들이란다. 하지만 난 6.25 전쟁 당시 스러져간 무명용사들의 돌무덤과 철모가 올려진 비목(碑木)을 연상한다. 저 위령비가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전적지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아까 고갯길을 올라오면서 바라보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시야도 넓어졌다.

 되돌아 나오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돌산령 정상이 고개를 내민다. 돌산령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11 : 50. 돌산령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정상을 묘사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군부대가 나오지 않도록 도로만 카메라에 담는다.

 이곳이 돌산령의 정상이라는 표식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이곳의 해발(1,050m, 내 앱은 980m를 찍고 있었다)을 적은 표지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헬기장 너머로 보이는 저 봉우리가 도솔산(兜率山, 1,148m)’이 아닐까 싶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산, 때문에 웬만한 국내의 산을 다 올라봤지만 도솔산은 아직도 미답의 산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그 왼쪽에 있는 산의 정체는 뭘까. 도솔산보다 한참이나 더 높고, 망루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몇 걸음 더 걷자 길이 나뉜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도로(돌산령 옛 고갯길)을 따른다. 왼쪽은 군의 관측기지인  ‘OP(observation post)'로 연결되니 진입하면 안된다.

▼ 왼쪽으로 가면 호국 도솔암이 나온단다. 한국전쟁 당시 여섯 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 가칠봉이 인접한 최전방 군법당이다. 해발 1,070미터에 위치해 설악산 봉정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절이란다.

 11 : 56  12 : 21. 세 번째 쉼터에 이른다. 널찍한 공간에 전망까지 좋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머물다 갔음은 물론이다.

 판박이로 만들어놓았던 아까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도 넓히고 벤치도 여럿 배치했다. 그래선지 많은 이들이 이곳을 전망대로 분류하고 있었다.

 발아래로 펀치볼(Punch Bowl)’이 펼쳐진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고산준령이 기다랗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봉우리들을 운해가 감싸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양구 제일의 전망대 중 하나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로 펀치볼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분지를 둘러싼 모습이 화채 그릇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펀치볼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2주 후에 걷게 될 12코스(양구 펀치볼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평화누리길은 공식적인 지도가 없어 답사를 위한 준비나, 답사 후 기록을 남길 때 애로가 많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전형적인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12 : 33. 네 번째 쉼터에 다다른다.

 건너편에는 대암샘터라는 약수터가 있었다. 사시사철 가뭄을 타지 않는 샘이라니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어온 라이더나 트레커들에게 감로수가 되어주기 충분하겠다.

 그렇다고 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꺼비 조형물의 입에 파이프를 박아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있었다.

 길은 굽이굽이 내리막의 연속이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요런 대전차 방어시설도 만나게 된다. 돌산령 옛길이 군사요충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13 : 10. 다섯 번째 쉼터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계곡 쉼터를 만난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 게 아닌가. 산림청의 입산금지 팻말과 지정된 장소 외의 출입을 금한다는 군부대장의 서슬 퍼런 경고판도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안에는 ‘DMZ펀치볼 둘레길 탐방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출입이 허용된 공간이라는 얘기다.

 작은 폭포가 겹겹이 쌓여있는 계곡은 머물다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아니 족탕이나 알탕을 즐기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겠다.

 맞은편, 길 건너에 있는 야생화공원은 완벽하게 막혀있었다.

 오유밭길은 해안면의 ‘DMZ펀치볼 둘레길 4개의 노선(평화의길·오유밭길·만대벌판길·먼멧재길) 중 하나다. 바람꽃·노루귀·얼레지·제비꽃 등 북방계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고, 전쟁의 흔적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진입로는 열쇠를 채워 출입을 막고 있었다. 안내판은 그 이유를 적었다. 곳곳에 미확인 지뢰가 있으므로 숲길 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산지도사를 대동할 때만 문이 개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30. 20분쯤 더 걸으면 453번 지방도에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첨부된 지도에 해안입구로 표시된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10.70km가 찍혀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해발 1,050m의 돌산령 고갯마루를 넘는 게 만만찮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정표(해안면 4.9km/ 돌산령 정상 5.1km)는 지나왔거나 가야할 곳의 지명과 거리만 표시하고 있을 뿐,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11코스(양구 돌산령길)의 종점으로 알고 있는 내 앎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점 오른편은 돌산령터널이다. 저 직선코스를 놓아두고 만산령 옛 고갯길을 에돌아왔다.

강원도 평화누리길 9코스(양구 평화의 길)

 

여행일 : ‘23. 9. 3()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및 양구군 방산면 일원

여행코스 : 평화의 댐오천터널종점상회각시교금악교방산면소재지(백자박물관·직연폭포)자월교송현1백석대대송현하수처리장두타연갤러리(거리/시간 : 23.5km, 실제는 종점상회부터 송현하수처리장까지 14.80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평화누리길이란 북한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의 서해안 강화도에서 강원도 동해안 고성까지의 접경지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트레킹·자전거 길이다. 이중 강원도 관내(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경유) 강원도 평화누리길이라 부르는데 생태·평화의 상징공간인 DMZ 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20개 코스(370.6km)로 구성됐다. 분단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평화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들머리는 평화의 댐 주차장(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춘천과 화천을 거쳐 오는 것이 보통이나 산사태로 길이 막혀 양구 쪽으로 돌아왔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와 46번 국도를 이용 양구까지 온다. 이어서 460번 지방도를 타고 화천방면으로 가다보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댐의 상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4개 코스(75km)로 이루어진 양구지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양구 평화의 길이라는 브랜드로 포장되어 있다. 공식적인 거리는 23.5km, 산행대장은 실제 거리가 30km에 육박한다며 겁부터 준다. 이에 놀란 난 출발지에서 10km쯤 떨어진 종점상회부터 걷기로 했다. 빈약한 내 체력으로는 20km 이상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워졌다. 북한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을 건설,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는 과장된 발표로 국민 성금을 모았었다(나도 참여했을 정도로).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온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대학 교수들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었다(그 교수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허구였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홍수 조절기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증축되기도 했고, 화천 관광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① 평화의 댐  세계평화의 종  비목공원  평화의 댐 물문화관  피스스카이워크  세계평화의 종공원 / 벨 파크  염원의 종 / 댐 하류전망대  국제평화 아트파크  평화누리마당  노벨평화의 종  DMZ 아카데미  물의 정원  평화오름 길  평화의 숲  평화나래교  평화캠핑장  자유의 숲  물빛누리호 선착장  배수터널

 댐의 상류 쪽 풍경, 하단의 하얀색 부분(80m)은 전두환 대통령 때 쌓았고, 위쪽은 45m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 증축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다. 다른 댐들과는 달리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해 쌓은 탓에 물을 채우지 않고 배수터널을 통해 화천댐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란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세계 평화의 종이 반긴다. 분쟁 현장에서 사용된 탄피 1만관(37.5)에 세계분쟁 종식 및 평화의 의지를 담아 만들어진 초대형 범종이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발포한 탄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분쟁 현장의 탄피, 국방부의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 중 수집한 탄피 120여 개 등 모두 29개국에서 모은 탄피들로 제작되었다. 1만관 중에서 9,999관으로 종을 주조하고, 나머지 1관은 통일이 되면 추가하여 완성시킨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미완의 종이기도 하다.

 조금 더 가면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비목공원이 나온다.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긴 난 반대편 방향인 피스 스카이워크로 간다. 거대한 댐에 매달린 공중 전망대로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시원스런 조망과 스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하류의 파로호,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풍경이 평화로우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매점 옥상도 전망대로 만들었다. 아래층(cafeteria)에서 산 커피라도 마시며 주변 풍광에 푹 빠져보라는 듯 테이블까지 배치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Peace Man’이란다. 자신처럼 같이 온 이에게 사랑을 고백해 볼 것을 귀띔한다.

 이젠 댐의 하부로 내려가 볼 차례다. 산비탈을 따라 569개나 되는 나무계단이 길게 놓여있다.(안내판은 하늘 오름길로 소개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면 세계평화의 종 공원(bell park)’이 반긴다. 평화의 댐이 우리나라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정이품송 장자목(長子木)’이 자라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103호인 보은의 정이품송을 아버지로 삼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어미목(강원지역 금강송)을 선발해 인공 교배시켜 얻은 첫 소나무란다.

 평화와 상생을 바라는 종도 눈에 띈다. 상단은 각 대륙을 상징하는 평화의 아기천사가 지구를 감싸고 있는 형상, 중단의 첨탑은 평화와 행복을 세계로 넓히길 염원하는 화천군민의 의지를 담았다. 종을 형상화 한 하단에는 불교철학자이자 평화건설자인 이께다 다이사쿠 SGI회장의 소설 ·인간 혁명에 나오는 글귀를 담았다. 평화만큼 존귀하고, 평화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생명의 나무(수많은 생명을 품어 기르는 한 그루 나무를 통해 생명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깨닫는다)와 평화의 종(분쟁과 분단을 넘어 화해와 통일을 기원한다), 어린이들의 기원(에티오피아와 한국 어린이들의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소원을 담은 그림엽서를 매달고 있다)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공원 주차장 오른편, 언덕을 향해 계단이 놓여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평화의 댐을 아래서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니 망설이지 말고 올라볼 일이다.

 언덕 위에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염원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담은 침묵의 종이란다. 저 종이 침묵을 깨고 세계를 향해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나?

 댐 하류 전망대라는 이름처럼 거대한 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통일로 나가는 문이라는 초대형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댐 중앙이 뚫려 하천의 물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댐 상류 700m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의 풍경을 트릭 아트로 그렸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저 트릭아트는 높이 93m에 폭이 60m로 기네스 세계기록(4775.7)에도 등재됐다. 기존에 세계 최대였던 중국 난징의 트릭 아트 작품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다음은 국제평화 아트파크이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비행기를 놀이기구와 합성하여 155마일 휴전선 일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테마파크로 DMZ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표현하며, 색색의 기원을 담은 리본들이 철조망에 있는 한 평화는 지속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아트파크의 중심에는 38m 높이의 평화의 약속이라는 상징탑이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의 땅 한반도에서 인류와 생명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꼭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3개의 포신은 자유·평화·사랑을, 2개의 반지는 다음 세대와의 영원한 평화의 약속을 담았다나?

 평화의 약속, 염원, 이카루스의 날개 등 다양한 조형물들이 상징탑을 둘러싸고 있다. 안보·평화·생명을 주제로 탱크·자주포·대공포·전투기·대북확성기 등 수명이 다한 폐장비류를 재활용하여 평화 예술품으로 재구성해 놓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라 하겠다.

 평화를 위한 여정은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의 하나 된 걸음이 더 낫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저 조형물의 문구(All over the world)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면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11 : 23. 실제 출발지는 종점상회. 양구군 군내버스의 오미리 종점에 위치한 상점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버스정류장의 이름을 얻어다 썼다. 그나저나 출발지인 평화의 댐에서 이곳까지는 9.7km. 코스 길이가 30km나 된다는 산행대장의 겁 때문에 그만큼의 거리를 단축했다. 아니 그보다는 지방도를 따라 걸으며 어두컴컴한 터널을 들락거려야 하는 끔찍함을 피하려는 마음이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정표는 수입천 쪽으로 내려가란다. 그리고 중요 기점 중의 하나인 각시교까지의 거리가 3.6km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기인 여름철에 찾아왔다면 각시교까지 곧장 도로(460번 지방도)를 따라 진행할 것을 권한다. 평화누리길을 따르다보면 수중보를 이용해 수입천을 건너야하는데, 냇물이 불어날 경우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수입천으로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또 다른 이정표는 5km 전방에 파서탕(破署湯)’이 있음을 알려준다. 얼마나 물이 차고 맑았으면 물줄기가 더위를 깬다는 지명까지 붙였을까 싶다.

 파서탕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정표 : 각시교 3.5km/ 피서탕 5km/ 오미종점 0.1km). 다른 지역 사람들이 내뱉었더라면 큰일 날 단어를 상호로 내건 입간판이 눈에 띈다. 강원도 지역이나 그 출신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감자바위도 강원도 사람들이 쓰면 흉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화누리길은 그 산과 산 사이 협곡,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기대어 나있다. 맞다. 이곳은 방산(方山)’. 푸른 산이 사방에 널려있다는 고장이다.

 그렇다고 논이 없겠는가. 우리네 선조들은 냇가에 둑을 쌓고, 비탈진 산자락을 일구어가며 농토를 만들었다. 그 논에서 지금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백로(白露)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간이화장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쉼터도 심심찮게 만난다. ‘평화누리길은 트레커보다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주 고객이다. 쉼터마다 만들어놓은 저 자전거 거치대가 그 증거다.

 평화누리길 평화의길과 함께 간다. 평화누리길에 평화의길이 숟가락을 살짝 올려놓은 것 같은데, 두 길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니 말이다.

 탐방로는 수입천(水入川)을 오른쪽 허리춤에 차고 간다. 수입면(양구군)의 청송령(靑松嶺)에서 발원하여 문등리와 방산면 건솔리·금악리 등을 우회하여 파로호로 유입하는 길이 34.8km의 하천이다. 접경지역이라서 개발이 덜 되었지만 두타연 등 명승지를 여럿 끼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도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삶은 편치 않겠다. 장마 때 물이라도 불어날라치면 잠수교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그네들의 집은 육지 속 섬으로 변할 테니까.

 역시 강 건너, 잘 지어진 집들이 무리지어 들어선 것이 영락없는 펜션이다.

 12 : 10.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수입천을 건너라는데, 이게 수중보를 겸한 잠수교라서 수문으로 해결을 못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발목을 넘길 정도로 물이 차올라 건너려면 상당한 모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전 불감증의 현장이 아닐까 싶다. 해파랑길이나 서해랑길, 지리산둘레길 등 그동안 걸어온 대부분의 둘레길들은 강우기를 대비한 우회로를 따로 내놓고 있었다. 이에 대한 안내문도 붙여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양구군은 위험요소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맡은바 일을 제대로 하라며 비싼 세금을 내온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싶다.

 앞을 가로막는 산자락을 에돌아나가는 농로가 나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되돌아나가는 도중 오미리(五味里)의 자연부락인 낭구미를 지나기도 한다. 참고로 오미(五味)라는 지명은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5개 반이 갖고 있는 단맛·쓴맛·싱거운맛·짠맛·매운맛 등 각각의 독특한 매력과 맛 좋은 청정 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30. 400m쯤 진행하니 46번 지방도가 나온다. ‘오미리 산촌 생태체험관이 있는 곳이다. 오미리는 친환경농법(벼 사이에서 노닐고 있는 우렁이를 쉽게 볼 수 있다)으로 생산한 쌀이 자랑거리라고 한다.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오리쌀이나 키토산농법으로 생산한 오대쌀로 밥을 지으면 구수한 밥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질 만큼 향이 좋단다. 밥맛도 대한민국 최고를 자랑한다나? 마을에서는 그런 특징들을 살려 산나물 채취·다슬기잡기·농작물 수확·썰매 만들기 등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사시사철 운영하고 있단다.

 도로변에는 앞서간 이들의 후기에서 자주 소개되는 오미막국수도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그나저나 앱은 4.67km를 찍고 있다. 종점상회에서 이곳까지는 800m(460번 지방도를 따랐을 경우),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다가 3.8km나 더 걸은 꼴이 되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을 길가 코스모스로 달래본다. 기상청은 오늘도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그렇다고 계절까지 속일 수 있겠는가.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백일홍은 마음고생에 대한 보너스다.

 12 : 35 : 300m쯤 더 걸으면 각시교’.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기점으로 삼고 있던 곳이다. 평화누리길은 잠수교(수중보)를 건너 다리 저편으로 온다. 하지만 물이 넘치는 잠수교를 건널 수 없어 빙 돌아왔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이정표(금악교 1.2km/ 방산면사무소 3.1km/ 평화누리길 오미리종점 3.6km/ 오미리 버스종점 1.1km)가 현재 상황을 알려준다. 아까 종점상회(오미리 버스종점)에서 도로를 따라 곧장 왔더라면 1.1km면 되었을 것을 길이 끊긴 평화누리길을 고집하느라 3배 이상을 더 걸었던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악교를 향해 간다. 금악교로 곧장 가는 도로를 놓아두고 수입천의 강둑을 따라 에둘러 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건너편의 또 다른 이정표는 직연폭포 방향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길가 비닐하우스에서는 풋풋한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물소리의 터’. 이름처럼 수입천의 강둑에 매달 듯 탐조대를 겸한 쉼터를 만들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가라며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독수리·황조롱이·두루미·꾀꼬리 등 이곳에서 살고 있는 새들에 대한 설명판도 보인다. 일종의 다목적 쉼터인 셈이다.

 독수리는 아예 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나머지 새들에 대한 조형물도 있다는데 웃자란 잡초에 묻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물소리의 터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팔랑개비다. 10여 개의 커다란 팔랑개비가 힘차게 돌아가는 풍경이 쏠쏠한 볼거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금악리 들녘도 무척 넓었다. 심심산골인 양구 지역에 저런 들녘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12 : 55. 금악교를 건너 금악리(金岳里)로 간다. 옛날 사기를 굽는 막이 있던 곳으로 초기 이름은 사기막 혹은 사금막(沙金幕),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금막(金幕) 또는 금악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무튼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횡단해 수입천의 둑길을 따른다.

 잠시 후 요런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중간에는 주변 풍광을 감상해보라는 듯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수입천에 바위가 늘어나면서 풍경이 한결 고와졌다. 저 물길에는 꺽지·쉬리· 탱가리·뚝지·메기 등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단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낚시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다나?

 13 : 16. 460번 지방도(이정표 : 직연폭포 0.4km/ 평화의 댐 19.9km)로 다시 올라선다. 가드레일 밖으로 잔도처럼 데크길을 따로 냈다.

 ! 거북이 닷!’ 거북이 한 마리가 소를 향해 나아가는 모양새다.

 13 : 20. 방산면(方山面)의 면청소재지인 현리(縣里)’로 들어선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장평리(長坪里)와 함께 방산면의 행정 중심을 이룬다. 조선시대 때 이곳에 방산현(方山縣)의 현청(縣廳)이 있었다고 해서 현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탐방로는 수입천의 천변을 따른다. 560번 지방도와 수입천 사이에 데크로 길을 냈다.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듯 길가에는 정자와 파고라도 배치했다. 수입천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으니 쉼터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장평마을로 가는 초입, ‘조선백자 시원지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종류의 자기 중 조선백자가 시작된 곳(始原地)’이라는 것이다. 흔히 백자 하면 경기도의 광주·이천·여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종실록 등 역사서에 양구의 자기소가 언급될 정도로 양구도 빠지지 않는 백자의 고장이다. 국가에 공납품으로 들어갈 만큼 품질이 좋은 백자를 생산해왔다(금강산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 사리구가 양구에서 생산된 백자로 알려진다). 분원백자(조선시대 왕실용 자기)에 공급되던 최고 품질의 백토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지역민들의 삶을 엿본다며 상가지역으로 들어가는 나그네들도 여럿 눈에 띈다. 하지만 난 수입천변을 따르는 평화누리길로 진행한다. 그래야 먼 거리에서나마 직연폭포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나오는 두 번째 다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이다. 폭포전망대가 막힌 줄 알았더라면 줌으로 당겨보았을 텐데 아쉽다.

 13 : 34. 탐방로는 양구 조선백자박물관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수입천 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조선백자를 구경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참고로 양구백자박물관은 양구의 백자 제작 역사를 보존하고 조선왕실 백자의 주원료로 사용된 양구 백토 연구를 통해 현대적인 사용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 2006년 개관했다.

 전시실은 시대 순으로 백자가 전시되어 있다. 양구 백토에 대한 설명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첫 대면은 14~15세기 초(고려 말 조선 초기)의 백자, 불순물이 섞여 있어 약간 노르스름하고 녹색을 띤다.

 주류를 이루는 조선 중후기 백자는 백색 도는 회백색을 띠며 청화(靑畫)와 철화(鐵畵)로 그린 꽃··물고기·문자 등 다양한 문양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대접이나 접시의 겉면에 간단한 초화문(草花文)을 그려 넣었으며, 18세기로 갈수록 제기류를 비롯 다양한 기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현대백자실이다. 양구 백토로 만든 백자가 전시되고 있는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달항아리를 비롯해 현대 백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을 통해 기증된 작품들과 구백자연구소에서 진행한 백자의 여름 전시에서 기증된 작품, 호주 도예가 스티브 해리슨의 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단다.

 저게 백자? 하긴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기획전시실에도 다양한 백자가 전시되고 있었다. 양구백토로 제작된 작품과 남북한의 원료를 합토해 만든 통일백자 등이라고 한다.

 야외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전 과정을 조형물을 통해 재현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피노키오가 귀여워 그중 하나를 게재해 본다.

 양구 가마도 복원되어 있었다. 양구는 고려시대부터 20세기까지 600여 년간 백자가 생산되어 왔다. 양구 가마터는 1454(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에서 처음 소개된다. 전국의 139개 자기소 중 2개가 양구현에 있었단다. 1530(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전국 자기소 32개소 중에 양구현이 포함된다. 139개에 달했던 자기소가 100년 만에 32개소로 축소됐지만, 양구는 도자기 생산의 요지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 50  14 : 20. 15분 정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직연정(直淵亭)’이란 정자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덕분에 준비해간 간식을 서로 나누며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냇가(수입천)로 간다. 아니 입구에 세워놓은 직연폭포(直淵瀑布)’안내판부터 살펴본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잠시 쉬어가는 곳인데, 폭포수가 곧바로 떨어진다고 해서 직연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떨어진 물줄기가 잠시 멈췄다가는 ()’는 깊이가 20m나 된단다. 1922년 칠천리 김왈룡의 어린 송아지가 물에 빠졌을 때 석자 이상의 메기가 이를 잡아먹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일화도 전해진다.

 몇 걸음 더 걸으면 폭포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것도 꽤 오래된 듯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국가나 지방 행정도 고객 서비스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양구군청은 저 폭포를 보려고 찾아온 관광객들의 바람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납세자인 국민에 대한 배반이라고나 할까?

 폭포는 상부에 놓인 다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폭포는 아래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그러니 반쪽자리 구경이라고 하겠다. 그나저나 물줄기가 곧바로 떨어져서 직연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와폭(臥瀑)’이 분명했다. 그저 높이 20m의 암벽이 병풍을 둥글게 세워놓은 듯한 경관이 아름답다는 설명만이 공감을 줄 따름이다.

 그 아쉬움은 상부에 있는 수중보의 물줄기로 달랠 수 있었다. 보를 넘어오는 물줄기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부러워할 정도로 멋지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에 45m 높이의 인공폭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물줄기가 끊긴 채 시커먼 배만 들러내고 있었다. 물이 흔한 여름철인데도 저렇다면 다른 철에는 아예 운영을 검토할 일도 없겠다.

 평화누리길은 계속해서 수입천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강줄기를 따라 난 산책로는 고요하고 은밀하다. 길은 잘 닦여있으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기 때문이다.

▼ 14 : 33.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일차선 도로(소풍정길)로 올라서고, 곧이어 자월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자월교를 건넌 다음 수입천 강둑으로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수입천을 왼편에 두고 걷는다. 오른쪽으로 누렇게 물들어가는 장평리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제법 넓다.

 길은 접어들수록 물 향기가 짙다. 평화누리길과 어깨를 맞대고 가는 강줄기 뒤로는 맑은 세상이 펼쳐진다.

 경관 좋은 곳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 맞은편, 두타연갤러리로 가는 460번 지방도가 하천 건너로 지나간다.

 백색의 암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위를 물줄기가 떨어지듯 흘러가며 굉음을 낸다. 양구의 또 다른 명소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경관이 고운데 정자 하나 없겠는가. 하천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이정표(두타연까지 6.7km)는 직연폭포에서 2.5km쯤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하천 건너로 큼지막한 건물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 송현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15 : 00. ‘송현1리 경로당을 지나 송현교로 수입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 구간이 ‘DMZ 평화의길’ 25코스임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평화누리길의 방산면 구간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송현리(松峴里)는 웬만한 면소재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인근 군부대의 이전 등으로 경기가 많이 침체되었다고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박 및 휴게 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캠핑장을 송현리에 조성하기로 했다나?

 송현리에서 46번 지방도를 다시 만났다. 그런 다음에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가 무대다. 장돌뱅이인 허 생원은 우연히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와 대화 장터로 가는 길에 밤길을 동행하게 되고, 달빛 아래 메밀꽃 밭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이곳 역시 강원도, 그러니 어찌 메밀꽃밭 한번 지나지 않겠는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도로, 왼편은 군부대의 연속이다. ‘백석대대라는 버스정류장까지 있을 정도다.

 여유롭게 산천경개를 즐기다보니 어느덧 후미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앞질러간 일행이 매달아놓은 표지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허총무, 사슴과 구름... 산에서도 뛰어다닐 정도로 건각을 자랑하는 여성 도반들이다.

 15 : 25. 그렇게 25분쯤 걷자 송현 하수처리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점심상을 차릴만한 자리를 찾던 산악회버스가 하수처리장 맞은편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9코스의 종점인 두타연갤러리까지는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하지만 느긋하게 배를 채운 상태로는 걷는 게 무리, 별수 없이 산악회버스로 왔다. 그렇게 도착한 두타연갤러리는 문이 닫혀있었다. 소지섭이 영화와 드라마 촬영 때 입었던 의상과 스틸 사진으로 꾸며 소지섭갤러리로도 불린다는데... 참고로 배우 소지섭은 영화 촬영을 하며 양구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어 민통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 강원도 DMZ 일대를 배경으로 2010년 포토에세이집 소지섭의 길을 출간하면서 양구군과 깊이 교류하게 됐다고 한다.

 백석산지구 전투전적비에 들러 묵념을 드려본다. 백석산 전투(1951.8.18.-10.28)에서 산화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군 제3군단에서 세운 전적비로, 격전 끝에 백석산과 그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10 25일부터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백석한 일대의 전투가 종료됐다.

 갤러리 앞 고방산교차로 중앙에는 백자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기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다. 고려청자가 옥빛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찬탄하게 한다면, 조선백자는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미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운탄고도 1330’ 2(각동리-모운동)

 

여행일 : ‘23. 8. 5()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일원

여행코스 : 각동리가재골대야리김삿갓면사무소→예밀교차로  예밀와인힐링센터구름품은캠핑장모운동(거리/시간 : 18.8km)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폐광지역인 영월군·정선군·태백시·삼척시 등 4개 지역을 잇는 운탄고도 1330’은 과거 석탄과 함께 흥망성쇠를 누리던 길이다. 출퇴근하는 탄부를 태우거나 탄 더미를 실은 트럭들이 이 길을 달렸었다. 그게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유산이자 역사·문화·힐링의 길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사라진 옛길을 복원하고, 와이너리(영월만항재(만항재매봉산(태백미인폭포(삼척) 등 주요 포인트들을 스토리텔링으로 각색해 세상에 내놓았다. ‘1330’은 운탄고도(運炭高道) 전체 구간 중 해발이 가장 높은 만항재의 높이에서 따왔다.  9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그중 두 번째 구간인 김삿갓 느린 걸음 굽이굽이 길을 오늘 걷는다. 옥동광산 광부들이 내뱉던 숨결에 더해 김삿갓의 흔적, 그리고 winery에 들러 시음까지 해볼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들머리는 각동마을 버스정류장(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

중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따라 태백방면으로 가다 영월교차로(영월읍 방절리)에서 88번 지방도(단양방면). 13km쯤 달리다 각동교차로(김삿갓면 진별리)에서 ‘595번 지방도(강변로)’로 옮겨 남한강을 건너면 곧이어 각동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1길과 2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2길은 김삿갓 느린 걸음 굽이굽이 길이란 브랜드를 내걸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18.8km의 산길을 걸으면서 김삿갓 산천경개 하듯 느릿느릿 주변경관을 둘러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폭염 경보에 놀란 우리 일행은 김삿갓면사무소에서 모운동까지만 걷기로 했다. 아니 2년 전에 걸었던 외씨버선길과 겹치는 구간을 제외시켰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10 : 26, 실제로는 역방향(모운동에서 출발)을 선택했다. 굽이굽이 돌아가며 망경대산(1,087m)을 에도는 2길 중 가장 높은 지점(667m)을 조금이라도 편히 오르기 위해서이다. 제대로 진행하면 오르면 400m가까이를 치고 올라야지만 이곳 모운동에서는 140m만 오르면 되니 망설일 필요조차 없지 않겠는가. 특히 오늘처럼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날이라면...

 김삿갓계곡 입구에서 모운동으로 올라오는 1차선 도로는 구절양장처럼 한없이 구불댄다. 거기다 천애의 낭떠러지 위로 나있어 눈 맞추기조차 두렵다. 하지만 산악회 황사장님은 요리조리 잘만 달린다. 그렇게 도착한 모운동에는 제법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운동을 찾는 관광객들이 꽤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구미를 당기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구름이 모이는 마을, 모운동 걷는 길이란다. 광부의 길, 명상길, 망경사길, 굽이길, 숲속길이 모운동 주변을 실핏줄처럼 헤집고 다닌다. 만사 제치고 저걸 걸어봐? 하지만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쳐야만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서라.

 스탬프보관함은 모운동 쉼터에 기대듯 설치되어 있었다. 주차장 입구, 버스정류장 옆이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만남은 운탄고도 마을호텔이다. ‘tvN’의 동명 예능 프로그램에서 운영하던 호텔이다. 엄홍길 대장을 필두로 그의 찐친 정보석 그리고 막내 이장우와 함께 저 호텔을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출연자들이 여유를 즐기던 소품이 눈길을 끈다. ‘운탄고도 마을호텔 방영 이후 모운동은 관광객이 급증했다고 한다. 제공되는 식사와 편의를 통해 백패커들과 출연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해피 슬로우 라이프에 대한 로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양씨판화미술관은 양태수 판화작가와 전옥경 냅킨아트 공예가 부부가 건립한 사립 미술관이다. 양태수 작가의 자연을 소재로 한 흑백판화와 다색 판화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냅킨아트 공방에서는 냅킨아트 공예 생활소품과 장식품이 전시·판매되고 있다.

 근처 폐가(창고일지도 모르겠다)는 벽화로 인해 동화 속 나라로 새롭게 태어났다.

 호텔 앞, ‘아랫마을을 가리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짬을 내서라도 벽화마을에 들러보라는 모양이다.

 작은 화전마을이던 모운동(募雲洞)’은 옥동광업소가 문을 열면서 상황이 확 변했다. 돈을 캐낸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탄광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는 1만 명이 넘는 주민들로 늘 북적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1989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한순간에 무너진다. 사람들은 떠나고 과거의 영화만 남긴 채 마을은 잊혀졌다. 그러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주민들은 텅 빈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마을 곳곳에 산책로와 등산로를 만들고, 탄 더미가 쌓여 있던 빈터도 꽃을 심어 폐광의 흔적을 지워냈다.

 마을은 곳곳에 동화 속 이야기를 담았다. 주택이나 담장의 빈 공간에 화사한 꽃, 백설 공주, 푸른 산과 구름 등 벽화를 빼곡히 그려 넣었다. 벽화마을이라는 애칭이 붙은 이유이다. 그게 또 동화를 담았다고 해서 동화마을로도 불린다.

 무늬만이지만 사진관도 복원시켰다. 당시는 저런 사진관 말고도 영화관·당구장·미장원·양복점·병원 등 대도시 부럽지 않은 상권을 형성했단다. 특히 영화관은 서울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 영화가 상영되었을 정도라나?

 마을 공터에서는 영월읍보다 더 큰 장이 열렸었다고 한다. 그곳에 지금은 공연장이 들어섰고, 그 벽에 수백 개의 옛 핸드폰이 진열돼 탐방객들의 눈요깃거리로 제공된다.

 야외 테이블로도 모자라 비치파라솔까지 쳐놓은 저 집은 대체 누가 살고 있을까?

 벽면은 홍보의 장으로 이용했다. 모운동의 역사는 모운동 마을이야기로 포장됐고, ‘버디버디 이 모운동에서 촬영되었음을 episode 형식을 빌려 전해준다.

 10 : 36, 양씨판화미술관을 오른쪽에 끼고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모운동을 둘러보는 데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80m쯤 걸으면 임도의 초입. ‘운탄고도 1330’의 이정표(장재터 3.22km/ 모운동 0.64km)가 길을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울창한 숲속을 걷는다. ‘운탄고도 1330’은 기억너머로 사라졌던 석탄 길, 즉 탄광에서 이용하던 옛길을 복원시켰다. 출퇴근하는 탄부를 태우거나 탄 더미를 실은 트럭들이 이 길을 달렸었다. 바닥에 깔린 저 검은 흙이 그 증거일 것이다.

 길 찾기는 나그네들의 몫.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가 나타났고, 그 구간이 멀다싶으면 운탄고도 특유의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널찍한 임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르는 게 만만찮을 정도로 가파른 오솔길도 나타난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오르막구간이니 싫다는 내색은 너무 말자. 거기다 계곡을 끼고 있어 졸졸거리는 청량한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 않는가.

 트레킹을 시작한지 34. 오르막의 막바지에 긴 나무계단이 놓여있었다.

 11 : 01,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1차선 도로인 모운동길(주문교모운동싸리재)’. 이정표(장재터 2.08km/ 모운동 1.78km)가 왼쪽으로 진행하란다. 오른편으로 가면 출발지인 모운동이 나오는데, kakaomap은 저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오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모운동길은 싸리재에서 솔숲길에 바통을 넘긴다. 두 길의 특징은 한없이 꼬불댄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산꼬라이데이길을 조성하면서 굽이길이란 브랜드까지 내걸었겠는가. 특히 솔숲길은 좁은 노폭에 400m의 고도차를 극복하기 위한 가파른 경사도까지 겹친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런 스릴이 좋아 찾아오는 드라이버들도 꽤 많다고 했다. 실제로 적당한 리듬을 타면서 달려가는 차량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5분쯤 더 걸어 도착한 싸리재(kakaomap의 정류장 이름)’. 한우 육종농가인 서로목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암소 계획교배로 생산된 보증씨수소를 기르는 농장일 것이다. 그러니 방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일반인의 출입도 당연히 금물.

 운탄고도는 망경대산의 7부 능선을 향해 고도를 높인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어 평지나 마찬가지로 걷는다. 거기다 주변의 숲은 따가운 햇살까지 막아준다. 덕분에 우린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위인데도 피서를 나온 사람들처럼 즐기면서 걸을 수 있었다.

 이즈음 모운동(募雲洞)’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1.087m의 망경대산 6부 능선 분지에 형성된 산골 마을, 늘 구름이 모여든다는 지명처럼 마을 위 하늘은 뭉게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잠시 후 망경대산의 한 지능선을 넘는다. 앱이 667m를 찍는 어엿한 고갯마루이지만 넘는다기보다는 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이후부터는 내리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해서 평지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이 구간에서도 시야가 트인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흘러가는 옥동천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 어디쯤에는 외씨버선길을 걸으면서 답사했던 김삿갓계곡이 있을 것이다.

 4분쯤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구름품은 캠핑장’. 이름처럼 구름을 품에 안을 만큼 높지막한 곳에 위치한 캠핑장이다. 특히 마운틴 뷰가 뛰어난 곳으로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단다.

 이 캠핑장의 명물은 공중에 걸린 캠핑사이트이다. 솔숲에 대를 올리고 그 위에 사이트를 만들었다. 저 정도면 빗줄기 따라 내려온 구름을 품에 안아볼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애견동반이 가능하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11 : 35, 길을 나선지 1시간 8분 만에 예밀2리삼거리에 이른다. 초등학교(옥동초교 예밀분교)까지 있었다는 갈금마을의 초입이라선지 버스정류장 말고도 운탄고도 이정표(장재터 1.6km/ 모운동 4km) 같은 시설물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의 하단, 현 위치 안내판은 이름표까지 달았다. ‘산꼬라데이 길’, 그중에서도 굽이굽이 돌아가는 굽이길이란다. 옛 탄광 길을 강원도 사투리인 산꼬라데이로 명명하고, 굽이길·광부의길·솔숲길 등 구간마다 고유의 이름을 따로 붙였다. 그런데 이게 모운동을 찾는 여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걷기 코스의 명소로 자리매김 되었다고 한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도로가 구불대기 시작한다. 거기다 경사까지 가팔라진다. 첨부된 지도의 장재터 오른쪽에서 한없이 구불대고 있는 구간이다. 스릴을 쫓는 드라이버들이 딱 좋아할만한 코스라 하겠다.

 5분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오른쪽은 밀엄사(密嚴寺)라는 작은 절로 연결된다. 안쪽에 절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는지 여러 기의 돌탑을 쌓아올렸다.

 도로변에는 쉼터도 조성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은 탓에 의자가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운탄고도 1330’ 2구간은 해발 1.087m의 망경대산을 에두르며 나있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트이며 1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한눈에 쏙쏙 들어온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풍경도 펼쳐진다. 산비탈을 깎아 태양광발전소를 만든 것이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한 결정이겠지만, 원자력을 축소하면서까지 장려된 점은 분명 문제다. 그로 인해 발전단가가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 국민은 두 눈을 뻔히 뜨고 물어야 할 수밖에 없었고.

 17분쯤 더 내려오니 삭도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이 반긴다. 안쪽에는 삭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직한 시멘트 구조물도 있었다. 삭도(索道)란 케이블카처럼 생긴 운반 장치를 말한다. 1960-70년대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옥동광업소에서 캐낸 석탄은 이곳에서 시작되는 삭도에 실려 산을 넘어 석항역 저탄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열차를 이용해 전국의 연탄공장으로 운송되었다.

 몇 걸음 더 내려오니 이번에는 삼거리. 왼쪽은 예밀 와이너리로 내려가는 도로, 이정표는 이곳에서 오른편(장재터길)을 타라고 지시한다. ! 첨부된 지도에는 2길이 장재터를 지나도록 되어있었다. 이 부근을 이르는 지명이 아닐까 싶다. 하나 더, 장재터(長者坪)는 재물이 많은 부자가 살던 집터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산골짜기에서 그런 부자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버스정류장은 영월10을 홍보하고 있었다. 장릉·청령포·별마로천문대·김삿갓유적지·고씨굴·선돌·어라연·한반도지형·법흥사·요선암(요선정) 등인데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이 모두를 이미 둘러본바 있다.

 산꼬라데이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송골길(운탄고도 이정표는 장재터길로 적는다)’ 방향으로 200m쯤 걷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들머리를 지키는 이정표를 참조하면 되겠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가파른 내리막길이 기를 확 꺾어버린다. 등산용 스틱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는 구간이다.

 그럼에도 둘레길 나그네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 예밀천 계곡을 내려가며 원시림 속에 숨어있던 갖가지 비경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남은 높이가 10m쯤 되는 폭포, 수량까지 많아 여느 유명 폭포가 부럽지 않은 풍경을 선사한다. ! 운탄고도 1330‘을 답사한 어느 기자는 이곳을 예밀폭포로 부르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위험천만인 바윗길에는 굵직한 밧줄이 매어있었다.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곳에는 철제다리와 계단을 설치했다.

 대간에 정맥·지맥을 다 마쳤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여성분.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다는 듯, 요즘은 둘레길에 필이 꽂혔다. 그런 그녀의 눈에도 이곳 예밀천 계곡은 새로웠던 모양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철다리를 지나자 또 다른 폭포가 반긴다. 제법 긴 물줄기의 옆. 수직 암벽에는 미지의 숲으로 들어가는 통로라도 되는 양 철제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저 시설물은 산꼬라데이길을 개설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찾는 이들이 드물어 그동안 방치되어오다가, 운탄고도를 내면서 새롭게 정비했단다.

 계단 아래서 길은 더 험해지고 있었다. 안전 밧줄이 매어있지만 몸을 의지하기에는 2%쯤 부족. 다들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이유다.

 계곡의 볼거리는 폭포만이 아니었다. 뾰쪽하면서도 긴 바위 하나가 수직의 절벽에 기대듯 서있었다. ‘촛대바위라 불러주라면서.

 12 : 17-37, 청량한 물길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물가에 둘러앉아 망중한을 즐기기로 했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면서 20분 동안이나 족탕을 즐겼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맞다. 오랜만에 누려본 호사였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하지만 길 찾기가 편치만은 않았다. 쓰러진 거목이 길을 헷갈리게 만들어 한참이나 헤매야만 했다.

 길이 묻혀버릴 정도로 웃자란 잡초도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데 동참했다.

 12 : 51, 숲이 열리면서 첫 민가가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출향인공원 0.3km/ 장재터 2.4km)는 출향인공원이 멀지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눈에 익은 이정표가 반갑다. 영월의 하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말뚝 모양의 이정표로 2년 전 외씨버선길(청송영월)’을 답사하면서 심심찮게 만났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일행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계곡으로 내려서서 출향인공원으로 가야하는데 무심코 민가 진입로를 따라버렸던 것이다.

 놓쳐버린 출향인공원의 사진은 산악회 총무님의 것을 빌려왔다. 맑은 샘물이 흘러나와 족탕에 안성맞춤이라는데 족욕은커녕 눈요기도 못했다. 아까 계곡에서 청정수에 발을 담갔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때문에 계곡이 아닌 민가 진입로를 따라 내려간다. 길가 옥수수 밭은 아직도 푸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옥수수자루가 여물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홍천에 농장을 두고 있는 난 옥수수 수확을 이미 끝냈는데... 같은 강원도임을 감안하면 씨앗의 종자가 서로 달랐음이리라.

 잠시 후 예밀2에 닿는다. 아까 삭도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던 길을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탐방로가 갈 지()’ 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려가며 내려오는 삭막한 아스팔트 도로 대신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고 보면 되겠다. ! 운탄고도 이정표도 오른편 도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전 길을 놓치지 않았을 경우 출향인공원을 거쳐 저곳으로 내려오게 된다.

 운탄고도 1330’은 이제 예밀촌길을 따른다. 그런데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저 예쁜 나무의 정체는 뭘까?

 13 : 00,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 예밀2리 영농조합법인에서 운영하는 예밀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포도 품종인 캠벨얼리가 재료로 사용된단다. 스위트·드라이·로제 등을 생산하는데, 여러 와인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단다. 진한 장밋빛의 아름다운 색과 특유의 산미가 조화를 이루는 화사한 향에다 적당한 보디감을 느낄 수 있다나?

 문간에는 탑도 하나 쌓아올렸다. 눈에 익은 모양새이나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와인체험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와이너리는 예밀 와인이란 자체 브랜드로 시장에 출시된다. 그 와인을 시음도 해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다보면 한 병쯤 사갔을 테니 와이너리로서도 이익이었을 것이고...

 와이너리의 중심축은 힐링족욕체험센터이다. 전문자격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족욕(足浴)으로 피로를 푸는데,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란다. 고단한 몸과 마음을 녹여낼 수 있는, 말 그대로 힐링의 표상이란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함은 물론이다.

 운탄고도 스탬프보관함은 족욕체험센터의 맞은편 소공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동화 속 나라에는 나비와 삿갓 등 여러 조형물 외에도 벤치 등 부대시설을 배치했다. 편히 쉬면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라는 모양이다.

 와이너리 주변은 포도밭이 널려있다. 예밀촌은 낮에는 일조량이 많고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 포도재배의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거기다 배수가 잘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토양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단다. 그러니 좋은 와인이 생산될 수밖에.

 도로 건너 숲속에는 성황당이 들어앉았다. 당집의 생김새로 보아 오래된 게 분명한데도 이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운탄고도 1330’을 만들면서 스토리텔링이라도 입혀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이후부터는 여름철 걷기 코스로는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아니 오뉴월 뙤약볕에 오롯이 노출되는 탓에 오늘처럼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에는 최악의 코스가 될 수도 있는 구간이다.

 밭을 지키고 있는 저 소나무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이탈리아의 우산소나무를 쏙 빼다 닮은 모양새가 하도 예뻐서 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길옆 예밀천은 물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장마철 폭우가 할퀴고 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곳곳에서 수마가 남긴 상처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 정도라면 폭우 때나 잠시 물기를 보이는 순수 건천(乾川)이라 하겠다.

 13 : 30. 88번 지방도와 만났다. 그렇다고 지방도로 올라선다는 얘기는 아니다. 잠시지만 두 도로가 나란히 서서 간다.

 잠시 후 만난 예밀교차로는 공원 수준으로 꾸며져 있었다. 인공 숲은 물론이고 정자에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탐방로를 겸한 예밀천길은 예밀천1교 근처에서 88번 지방도 아래로 난 굴다리(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1.1km/ 예밀교차로 0.3km)를 지난다. 그리고는 영월동로에 바통을 넘겨준다.

 탐방로(영월동로)는 이제 예밀천을 따라 옥동천으로 간다. 이때 예밀천2교를 건너기도 한다. 예밀천을 좌우로 번갈아가며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10분쯤 걸으면 드디어 옥동천, 천변에 정자와 화장실까지 지어놓은 걸 보면 이 부근이 유원지로 개방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예밀천이 옥동천으로 유입되는 두물머리 일대를 물놀이장으로 열어놓고 있었다. 물이 깊은지 강가에는 안전요원도 몇 보인다.

 예밀교는 쌍 다리다. · 2개의 다리가 나란히 옥동천을 가로지른다. 탐방로는 이중 보행교로 변한 옛 다리를 건넌다. 퇴역을 하는 대신 수세미 넝쿨로 터널을 만들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멋진 다리로 변신했다.

 다리를 건너 만난 외씨버선길이 무척 반갑다. 2년 전 경북 청송의 주왕산에서 걷기를 시작해 영양과 청송 땅을 지나 이곳으로 왔었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두 탐방로가 정확히 일치한다.

 탐방로는 이제 김삿갓면 소재지로 들어간다. 트레킹이 끝나간다는 얘기다.

 김삿갓면은 파출소까지도 삿갓을 브랜드로 내걸었다. 하긴 김삿갓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연삼아 면의 이름까지 바꿨는데 어련하겠는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 선천 부사로 있다가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역적이 된 조부는 참수당하고 가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김삿갓 일가가 숨어든 곳이 바로 영월이다.

 14 : 10, 오늘은 김삿갓면사무소에서 마치기로 했다. 잔여 구간은 2년 전 외씨버선 13(관풍헌 가는 길)을 답사하면서 이미 걸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오뉴월 삼복더위에 산 하나를 더 넘어야 하는 일정은 무리가 분명하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0.85km임을 감안하면 더디게 걸은 셈이다. 무더위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함양 선비문화길

 

여행일 : ‘23. 2. 1()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및 안의면 일원

산행코스 : 거연정군자정영귀정동호정람천정경모정황암사농월정월림마을구로정광풍루(소요시간 : 12.21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영남 유림은  안동  함양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중 안동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고, 함양은 주로 재야에서 활동하는 기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했다. 그래선지 함양 땅에는 유독 많은 누각과 정자가 남아 있다. 누정(樓亭)이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던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광장이었기 때문일 게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하천(錦川)’이라는 화림동계곡에도 그런 누정 여덟이 들어서 있는데, 함양군청에서 이 계곡을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들머리는 거연정휴게소(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 IC에서 내려와 국도 26호선(안의·함양 방면)을 타고 8km쯤 내려오면 봉전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 부근 거연정휴게소가 트레킹의 들머리가 된다. 초입에 화림동계곡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화림동(花林洞) 계곡은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계곡, 거북바위로 유명한 원학동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꼽힌다.

 탐방로는 2개 구간으로 나뉜다. 하지만 1구간(선비문화탐방관농월정, 6km) 2구간(농월정광풍루, 4.1km)을 합쳐도 10.1km에 불과해 노약자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또한 구경거리가 계곡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있으니 양쪽 끝인 거연정과 광풍루 중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만 선택하면 된다.

 길을 나서기 전 다볕자연학교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1999년 폐교(1944년 개교)된 봉전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숙박·연수시설인데 이 학교의 교정에서 몇 점의 문화재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정으로 들어가기 전 삼강동(三綱洞)’이란 빗돌부터 눈에 담는다. 거연정을 세운 전시서(全時敍)의 증손인 전우석의 충의(忠義), 아들 전택인의 효행(孝行), 손부 분성허씨의 열행(烈行)  3대에 걸친 ··의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연석이다. 군자정 근처 노변에 있었으나 훼손이 염려되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조 때 선비인 전세량(全世樑)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각(孝子碑閣)’도 눈에 띈다. 효자성균생원전세량지려(孝子成均生員全世樑之閭), 효우문행위세추중(孝友文行爲世推重). 성균관 생원 전세량이 효성과 우애,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다는 내용의 빗돌이 모셔져 있다. SNS에서 어머니가 병들자 단을 짓고 쾌차를 하늘에 빌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 던져주었다는 그의 효행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운동장 측면에는 삼강정(三綱亭)이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새로 지은 티를 풀풀 풍기는 게 흠이지는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함양의 140여 개 정자들 중 가장 크다고 했다.

 

 화림동계곡으로 되돌아오니 선비길 초입에 화장실이 들어서 있었다. 길을 나서기 전 홀가분하게 비우고 선비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보라는 배려겠지만, 손님맞이 첫 풍경치고는 썩 편치 않아 보이는 그림이다.

 들머리의 안내도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는 말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덕유산 자락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 8개의 정자와 8곳의 못이 있다고 해서 八亭八潭이라고도 불리어왔다. 계곡 곳곳에 고풍스런 정자들이 저조차도 풍경인 양 고즈넉이 앉아 있다는 것이다.

 봉전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아치형의 교각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길을 잘못 들었다. 첫 번째 볼거리인 거연정(居然亭)은 하천 중앙의 바위섬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자로 연결시키는 나무다리가 반대편(탐방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으로 놓여있었던 것이다. 어쩌겠는가. 시작부터 어수선해져버렸지만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과 더불어 살고()’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정자이다. 그래선지 풍경 좋은 곳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자연을 바라보는 형태인 여느 정자들과는 달리 풍경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자신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정자가 감상의 대상인 물길과 하나가 되어버린 모양새다 . 그것도 아주 깊은 소()에서. 수심이 너무 깊어 한 번 빠지면 항아리처럼 패어있는 소를 헤어나지 못해 익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거연정은 조선중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억새로 정자를 지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울퉁불퉁한 천연 암반 위에 주초석(柱礎石)과 누하주(樓下柱)를 굴곡에 맞춰 깎아 절묘하게 높이를 맞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치 정자와 암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듯하다. 금천 한가운데에 터를 잡은 이 정자는 연암 박지원 등 조선 선비들의 극찬을 받은 명소이기도 하다.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히 내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정자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화림재 전공 유적비(花林齋全公遺蹟碑)’가 눈에 띈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국치를 당하자 낙향하여 서산서원과 함께 거연정(억새로)을 지었다는 인물이다.

 군자정 봉전교를 건너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다리로 가는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거연정의 반대편에 자리한다. 군자정도 울퉁불퉁한 바위에 걸터앉은 탓에 정자를 받치고 있는 지지대가 들쭉날쭉하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본연 모습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쉽게도 정자 주변에 큰 도로가 나고 식당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고즈넉한 정취는 느끼기가 어렵다.

 군자정(君子亭) 해동의 군자로 불리던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봉전마을에 처가가 있던 그가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강론을 펼쳤다는 인연에서다. 안음현감 재직 때는 고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조세정책을 새롭게 하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단다. 정자 하나쯤은 능히 얻을 수 있는 흔적 아니겠는가.

 봉전교 건너에도 탐방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거연정·동호정·군자정·영귀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구로정...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를 일러 선비문화라 하는 걸까? 아무튼 탐방로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산비탈에 나무로 다리모양의 길을 냈다.

 300m쯤 내려오면 영귀정(詠歸亭)을 만난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름대로 어느 낙향한 선비가 시나 짓고 살자며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휴촌마을(함양군 병곡면)에 있다는 또 다른 영귀정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단종 때 충신 이지활의 손자 송계 이지번(李之蕃)이 수안군수 시절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다는 휴촌마을의 그 정자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영귀정 옆 부지에는 정자보다도 더 잘 지어진 한옥이 들어앉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도 잘 꾸며졌다. 돈 많은 누군가가 금천의 비경 속에서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가 보다.

 선비길은 화림동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이다. 계곡길이지만 데크로드 등 탐방로가 잘 가꾸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그러니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계곡과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들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가끔은 물가로 내려가는 요런 계단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서슴없이 내려가 볼 일이다.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탁족을 즐기면 될 것이고.

 들쑥날쑥한 바위를 타고 흐르는 화림동계곡은 금천(錦川)’으로도 불린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이 비단같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맞다. 발아래로 흐르는 물빛이 그랬다. 비취색을 띤다. 하지만 밤꽃 향이 풍기는 농사철에는 흙 부유물이 흘러들어 비취빛이 탁해진다고 한다.

 현판조차 없는 정자도 만날 수 있었다.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쉼터용으로 지어놓은 듯한데,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은 무관심이 왠지 아쉽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8. ‘다곡교에 이르니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다산정(茶山亭)’이란 정자까지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예로부터 화림동계곡은 팔정팔담(八亭八潭)’으로 불리어왔다.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나 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저런 새로운 정자들이 들어서면서 팔정팔담은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 신세가 되어 버렸다.

 처음 온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안내판도 보인다. ‘1구간(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만 소개해놓은 안내도인데, ‘화림계곡 선비문화 탐방안내라는 이름표를 버젓이 달았다.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200m쯤 걷다가 만나는 대전-통영고속도에서는 대황마을(대봉산·계관봉 등산로가 열리는 곳이다)’로 가는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원래는 개울가를 따르도록 길이 나있었는지, 탐방로가 폐쇄되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굴다리 앞에 세워져 있었다.

 150m쯤 들어가면 삼거리. 이정표(동호정 1.1)가 왼쪽으로 가란다. 2차선 도로에서 1차선의 농로로 들어선다고 보면 되겠다.

 200m남짓 더 걸어 길이 홱 돌아가는 지점에서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고속도로 아래로 나있는 데크길을 따라 내려간다. 탐방안내도가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냇가에 이르니 요런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물론이고, 그에 대한 내력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고객을 위한 기발한 발상이라 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 화림계곡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는 동호정(東湖亭)’에 이른다. 엄청난 너럭바위 지대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정자 사이로는 푸른 바람이 흐른다. 그런 기운을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가 동호정이라고 한다.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길에서 왕을 등에 업고 환란을 피한(그렇게까지 해서 목숨을 살릴 가치가 있었을까?)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5년 그의 9대손에 의해 세워졌다. 장만리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통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계단이 이채롭다. 발판을 도끼로 쪼은 듯한 통나무 두 쪽을 정자에 걸쳐 놓았다. 투박하면서도 멋이 있어 보인다.

 정자에는 꽤 많은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묵향 흩날리며 일필휘지 시구(詩句)를 적으며 노래하던 선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천막처럼 넓고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巖)과 수정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옥녀담(玉女潭) 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저게 놀이터로 보였던가 보다. 움푹움푹 패인 차일암의 웅덩이에 술을 부어놓고 조롱박으로 떠 마시며 풍류를 즐겼는가 하면, 옥녀담에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핑계 삼아 탁족을 즐겼다고 한다.

 금적암(琴笛岩)’은 악기를 연주했다는 바위다. 그래선지 요즘도 이곳에서 국악이 연주되기도 한단다. 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에서 가야금을 반주 삼아 민요를 불러준단다. ‘금적암 영가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퍼포먼스라 하겠다.

 영가대(詠歌臺)’는 노래를 불렀다는 곳. 선비들은 차일암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을 터, 그렇다면 인근에서 호출해 온 기생들이 가무(歌舞)’로 그들의 흥을 돋우었을 게 분명하다.

 탐방로와 동호정은 징검다리로 연결된다. 큰 바위 여러 개를 놓았는데, 장마철에는 이게 물에 잠기기도 한단다. 신발을 벗고 건널 수도 있으나 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히는 수도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미리 알아볼 일이다.

 의외의 풍경(하천의 한가운데에 소나무로 가득한 섬이 있다)을 제쳐두고 징검다리를 다시 건넌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데크로드가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데크길을 지나면 계단식 논이 펼쳐진다. 논 옆으로 너른 박석이 깔려 있다. 박석을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이 구간에서 우린 함양의 산골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함양의 특산물인 사과밭이 좌우로 도열하고, ‘다랭이 논에서는 양파 파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밖에도 함양은 산양산삼과 여주, 곶감 등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과수원을 지나 호성(虎城)’ 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앞의 산 모양이 호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마을과 초현동(招賢洞)이 합쳐져 법정동리인 황산리가 되었는데, ‘황산(黃山)’이란 황석산의 관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 화림동 계곡을 가로지르는 호성교 아래를 지난다. 이때 썩 좋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강변의 큼지막한 바위에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과시욕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조금 더 걸으니 경모정(景慕亭)’이 나타난다. 경모정은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이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진데 비해 비교적 근래(1978)에 지어졌다고 한다. 아니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최근에 다시 지은 모양이다. 단청도 하지 않은 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길은 다시 나무데크로 변했다. 이 구간은 계곡 쪽으로 숲이 울창하지 않아 계곡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 가끔은 나무의자에 앉아 쉬어갈 수도 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람천정을 만난다. 하천 가장자리에 초석(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어느 작가는 화림동 8()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고 적고 있었다. 한글로 된 현판을 람천정(藍川亭)’으로 해석한 그는 작은 규모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드러나는,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겸손하면서도 늠름했기 때문이란다.

 탐방안내도는 람천정 앞에서 다리(이정표 : 황암사 1.4/ 경모정 0.4)를 건너라고 했다. 장마 때는 물에 잠기는 잠수교다. 하지만 우린 경관이 나아보이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덕분에 우린 요런 소나무 숲속을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여정은 어느새 행복감으로 충만해진다.

 또 다른 볼거리도 있었다. ‘회룡포(回龍浦)’를 일러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이라고 했던가? 비록 회룡포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못지않은 풍광을 만나기도 한다. 유유히 흐르던 하천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놓인 황암사가 얼굴을 내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500여 호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사당의 뒤에서 머리를 삐쭉 내밀고 있는 산은 당해 전투가 벌어졌던 황석산(1,192m)’이다. 저 산에 바위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황석산성이 있다.

 호국 영령들에 묵념이라도 드리고 싶다면 서하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 다음 길고 긴 계단을 올라가는 고생을 추가로 감수해야만 한다.

 홍살문과 출입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연이어 지나면 사당인 황암사(黃巖祠)가 나온다. 자료에 따르면 1597년 왜군 27천명이 황석산성을 3일 동안 공격했다. 안의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그리고 거창·초계·합천·삼가·함양·산청·안의에 사는 사람들이 관군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음력 818일에 황석산성은 함락됐다. 숙종 임금 때 이곳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사당을 헐고 추모제도 금지했다. 1987년에 황석산성이 사적(322)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2001년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했다.

 순국영령의 혼이 모셔져 있는 의총은 사당의 뒤편에 있었다. 하나 더, 사당 좌우에는 황석산성순국선열충혼비·황암사중건기념비·황석산성순국사적비를 세워놓았다.

 묘역은 오죽(烏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슴 깊이 묻은 아픈 일들, 밖으로 배어나와 까맣게 탄다던 박영옥 시인의 싯귀처럼 조국을 지키다가 스러져간 영혼들의 애달픈 마음을 담아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황암사를 둘러본 다음 다시 서하교를 건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왼쪽으로 굽어지며 이어져 있는 구()도로로 들어선다.

 옛길의 모퉁이에 들어앉은 농월정 쉼터는 문이 닫혀 있었다. 새로운 신작로가 뚫리면서 오가는 차량이 함께 끊겼을 게고, 손님이 찾지 않는 휴게소는 하릴 없이 낮잠만 잔다.

 조금 더 걸으면 신작로 만나지만, 그에 조금 못미처에 냇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다. 초입에 이정표(농월정 0.6/ 황암사 0.4)를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데크길은 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우린 물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경관이 좋은데, 거기다 긴 겨울 가뭄에 목마른 내()가 길까지 내어주고 있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내려선 계곡은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계곡 전체가 하나의 바위고 그곳에서 바위절벽이 솟아난 형국이다. 너럭바위나 안반바위라는 낱말로는 그 풍경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환호성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수백 명이 올라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옥빛 물살은 요리조리 굽이치며 장쾌하게 바위 사이를 흐른다.

 계곡을 뒤덮은 너럭바위, 그 위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흐른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정자와 그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선 울창한 나무들까지. 옛 선비들도 이런 풍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하긴 TV 드라마 환혼에까지 등장했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여자 주인공 무덕이의 몸으로 환혼한 살수 낙수가 어릴 때 기문이 막혀 술법을 배우지 못한 남자 주인공 장욱에게 최고의 술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집수·유수·치수 단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한껏 실력을 발휘한 듯, 물살은 암반 곳곳을 깎고 부드럽게 다듬어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농월정(弄月亭)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머물며 세월을 낚던 곳. 그는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며 정자를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정자는 2003년 방화로 인해 소실됐고, 10년 동안 방치되다가 2015년 기록사진과 도면을 토대로 복원했다. 참고로 정자 이름 농월(弄月) 달을 희롱한다는 뜻. 정자 앞 너럭바위는 달이 연못에 비치는 바위 월연암(月淵岩)’으로 이름에도 옛 선비들의 풍류가 잘 담겼다.

 농월정 앞 넓게 펼쳐진 반석 지대는 월연암 혹은 달바위로 불린다. 그 바위에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농월정을 지은 지족당 선생이 지팡이 짚고 놀던 곳이란다. 달을 희롱하면서 말이다.

 시간에 쫓겨(판독할 능력도 부족했다) 이해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쳤지만, 누군가의 한시도 적혀 있었다. 참고로 농월을 즐겼다는 박명부는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감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김성일 휘하에서 군무를 도왔고,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면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이곳으로 낙향해 은둔 생활을 했다.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그 너른 반석 곳곳에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참봉(參奉) 등 자신의 관직까지 적어놓은 조선시대 놈들도 있었다. 무릉의 선계에다 이름이나마 두고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계에서 노닐다가 왼편 냇가를 따라 농월정을 빠져나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터널처럼 오솔길이 나있다.

 농월정 앞은 유원지가 들어서 있었다. 작심하고 조성해놓은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식당이 밀집해 있다는 정도랄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5. 유원지가 들어선 방정마을(안의면 월림리)에서는 종담서당(鍾潭書堂)’을 만날 수 있다. 지족당 박명부가 농월정과 함께 세운 서당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아니 박명부가 낙향하여 지었다니 조선 중기쯤 되겠다.

 문이 잠긴 탓에 담 너머에서 기웃거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정문과 자 형태로 배치된 정당은 정면 3,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서당치고는 화려해서일까 함께 걷던 구우(舊友)는 사당 느낌이 난다고 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농월정은 1구간과 2구간의 경계. 그러니 방정마을에서 2구간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2구간 초입에는 농월정오토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길게 늘어선 한옥펜션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밖에도 25개의 사이트와 카라반이 있단다. 뛰어난 경관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춰 캠핑마니아들에게는 또 하나의 성지로 알려진다.

 탐방로는 이제 금천(남강)의 둑길을 따른다. 굴곡이 없는 평평한 길이다. 선비문화탐방로의 대부분은 이렇듯 평평한 길의 연속이다. 덕분에 무릎에 무리가 적다.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한 노약자도 걸을 수 있다. 대신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이 길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탐방로가 도로(육십령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금방 도로를 벗어나 월림(月林)’ 마을로 들어간다. 물레방아에서 물이 내려온다는 함양의 5 물내리마을(율림·안심·두항·월림·봉산)’ 중 하나로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정겨운 마을이다. !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다수(多水)’마을로 불린다는 것도 알아두자.

 이곳에서 우린 월소정(月沼亭)’이란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림동계곡의 팔담팔정(八潭八亭)’에는 끼지 못하고, 그저 동네 쉼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월소정이란 이름은 옛 지명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소동과 황대동·후암동의 일부를 합쳐 월림리가 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이번에는 금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하류로 내려간다.

 목교 너머는 솔숲 쉼터라고 한다. 금천의 물굽이가 만들어낸 섬 아닌 섬이다. 소나무들은 어쩌다가 저런 곳에 무리를 지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하천의 한가운데서 숲을 이루고 있는 솔숲이 경이로우면서도 반갑다.

 금천의 물줄기를 끼고 가는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가로수 삼아 벚나무를 심었는가 하면, 예쁘게 단장된 쉼터도 심심찮게 보인다. 길가에는 작은 꽃밭도 만들었다. 월림마을의 또 다른 특징이 특용작물 재배라고 했으니 제철이라도 만나면 약초나 감국의 꽃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 8번째 정자인 구로정(九老亭)’에 이른다. 1854년에 태어난 선비 9명이 수계를 하여 풍류를 즐겼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55년에 건립한 팔작지붕 정자다. ! 이들에 내한 내력이 궁금하다면 정자로 올라 구로정기(九老亭記)라도 읽어볼 일이다.

 정자에 오르면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금천이 발아래로 깔린다. 밤이 맑은 날, 이곳에 모인 선비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하늘에 뜬 달을 희롱하기에 딱 좋은 풍경이라 하겠다. 그 너머 강둑에는 성북마을이 들어앉았다. 안음현 관아 뒤 대밭산 너머 북쪽에 있었다는 오래 묵은 마을이다.

 이후부터는 시멘트 포장길(후암길)을 따른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금천을 끼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점풍교를 건너면 관북마을’. 용추계곡에서 흘러온 지우천(금천의 지류)의 천변에 들어앉은 마을로 관북(官北)’이란 지명은 옛 안음현 청사가 있는 곳의 북쪽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임수역(臨水驛)’이 있었다고 해서 역말로도 불린다. 그만큼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의대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자 엄청나게 굵은 버드나무가 줄을 지어 얼굴을 내민다. 얼핏 보아도 수백 년은 묵은 것 같은데, 이게 입소문을 타다보니 오리숲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버드나무가 오리(2km)에 걸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는 300m에도 못미처 보였지만...

 잠시 후 고수부지로 내려서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늘어서있다. 금천(이 즈음에서는 남강이라 부르기도 한다)은 보를 막아 물이 넘실거리도록 했다. 지금은 얼어붙어있지만 여름철이면 풍성한 나뭇가지가 잔잔하고 푸른 수면에 비친다고 한다. ‘연암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한 조류인 북학사상을 선도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봉직(1791-1795)하면서 백성을 구휼하고자 했던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이다.

 날머리는 광풍루(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안의교로 금천을 건너면 제법 규모가 큰 2층 누각이 금천을 바라보고 있다. 한때 함양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는 자부심의 상징물이다. 조선 태종 12(1412) 당시 이안현감인 전우(全遇)가 선화루(宣化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세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성종 25(1494)에는 안의현감 정여창(鄭汝昌)이 중건하고 지금의 명칭인 광풍루(光風樓)로 이름을 바꿨다.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이 복원하고, 3년 뒤인 1605년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의 뒤에는 역대 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늘어서 있었다. 불망비라고도 하는데, 선정을 베푼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세워주는 비석이다. 상인들이 세웠다는 상무사 불망비와 의병대장 문태서의 기공비(紀功碑)는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2.21km, 유서 깊은 정자들을 둘러보느라 꽤나 지체했던가 보다.

강화나들길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 길)

 

여행일 : ‘22. 10. 9()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선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용흥궁중앙교회청하동약수터남장대호텔 에버리치남산리찬우물약수터철종외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0.9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열네 번째 코스인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걷는다. 강화의 아픈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강화도령 원범(철종)과 봉이 처자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를 스토리텔링 해 만들었다.

 

 들머리는 용흥궁주차장’(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강화군청에 이어 용흥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철종의 잠저(潛邸, 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 용흥궁부터 들러본다.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에서 시작해 철종의 외가가 있는 냉정리(선원면)에서 끝을 맺는 11,7km짜기 구간.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별칭처럼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중 가장 로맨틱한 코스로 꼽힌다. 첫 번째 러브스토리는 철종과 봉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추정되는 청하동 약수터’. 데이트 코스였을지도 모르는 강화산성 남장대를 거쳐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외가까지 이어진다.

 용흥궁(龍興宮)은 조선의 25대 왕 강화도령 철종이 11세부터 19세까지 살던 곳이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다. 은언군은 역모 사건에 연루돼 강화도로 유배됐고,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인 철종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빈농으로 살다가 1849년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다.

 용흥궁은 말이 궁이지 아담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원래는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른 뒤 기와집으로 개축했다는 것.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르고 4년 뒤 강화 유수 정기세가 한옥을 짓고 용흥궁(용이 흥하게 되다)’이라 했으나, 작은 공간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들인 살림집 수준이라 다소 초라하다. 강화도령의 팍팍한 삶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용흥궁을 빠져나오자 시멘트가 벗겨지고 철근이 드러난 낡은 굴뚝이 우뚝 서 있다. 옛날(1947-2005) 이곳에 있던 심도직물의 굴뚝이라고 한다. 한때는 종업원이 1200명도 넘었다지만, 지금은 용흥궁공원으로 바뀌어 옛 영화는 추억 속에서나 더듬어 볼 수 있다. 30m도 넘었다는 굴뚝이 5m만 남았으니, 추억도 그만큼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남쪽 방향, 그러니까 남산으로 연결되는 북문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4분쯤 걸어 만나게 되는 강화중앙시장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전통적인 재래시장이다. 탐방로는 시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이다. 오른쪽은 첨화루(瞻華樓, 남한산성 서문)’로 연결된다. 주어진 시간에 쫓겨 포기해야했지만 강화의 핫블레이스인 조양방직도 그쪽에 있다. 이 공장은 지난 20-30년 정도 폐공장으로 방치되다가 미술관 카페로 변신했다. 낡은 공장을 미술품·고가구·골동품으로 채워 신문리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며 강화의 관광명소이자 이색카페로 유명하다. 엠제트(MZ)세대의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성지로도 주목받는다.

 강화나들길에 들인 강화군청의 열정을 심심찮게 느낄 수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팔각정 등)를 곳곳에 조성했는가 하면, 진전(眞殿, 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의 제사 때 정한수로 사용했다는 솔터우물 같은 옛 시설들도 새롭게 단장 해 여행자들에게 내놓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여행할 곳의 정보를 미리 알아두어야 하는 이유다. 요즘은 SNS나 관련 인터넷홈페이지 등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현지에서 물어물어 정보를 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강화군에서도 발 벗고 나섰다. 중앙시장 뒤 1914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을 개량해 관광안내소를 만들어 놓았다.

 110년 전통의 강화중앙교회도 스치듯 지나간다. 거대한 몸집을 빼놓으면 특별한 게 없지만, 국민일보에서 본 옛날 사진은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치 창에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인 가는 탑이 3층 높이로 솟구치는데, 특이한 점은 탑머리로 팔작 한옥지붕을 얹고 있다는 점이다.

 성산아파트 근처에서 잠시 헷갈렸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 덕분에 무사히 길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아파트 담벼락에 매달린 나들길 리본을 참조해도 되겠다.

 오르막 골목을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남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나온 지릉인데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강화 사람들에게 남산은 동네 뒷산이다. 산책삼아 마실 나오기 딱 좋은 곳이라는 얘기다. 산자락 곳곳에 근린공원을 들어앉힌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는 무척 잘 닦여있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했고 경사까지 완만했다. 약간이라도 가팔라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남산의 특징을 잘 살린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잣나무·진달래·자작나무 등 군락지들을 지명으로 삼았다. 그런데 건강의 숲 아이의 숲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제가 한로(寒露),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절기이니,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나 보다. 가을비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저 구절초 꽃들이 그 전령이고 말이다.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김용택 시인의 구절초꽃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 40. 계단을 올라 청하동약수터(淸霞洞藥水)’에 다다른다. 1801년 낙향한 은언군(철종 할아버지)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약수터다. 또한 강화도령 원범(元範)이 왕으로 오르기 전 강화도 처녀 봉이(鳳伊)’와 만나 사랑을 키워가던 곳으로도 알려진다. 이 약수터에서 만나 남장대 자락을 지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라는 14코스의 아명을 만들어낸 명소로 보면 되겠다.

 홍보용인지 강화도령과 봉이를 이미지화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나들길 14코스의 지도를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시골스런 옷차림의 처녀총각이 더 눈길을 끈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기에 딱 좋은 포토죤이라고나 할까?

 남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약수터는 그런 산의 7부 능선쯤에 들어앉았다. 그런데도 시원하고 담백한 물이 꽤 많이 흘러나온다. 하긴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옛날만은 못한 듯, 족탕으로 여겨지는 맞은편 물줄기는 물이 마른지 오래였다.

 약수터를 만난 나들길은 지금껏 이어온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오솔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겁다싶을라치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잠시 후 웬만한 집 한 채 크기인 거북바위가 나타난다. 거북이를 닮은 이 바위는 어가를 탄 채 강화도를 떠나는 원범, 이제는 왕이 된 철종의 행렬을 바라보며 그의 무사와 안녕을 빌던 봉이의 일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철종이 떠난 이후로도 매일처럼 이 바위에 올라 물을 떠 놓고 빌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얘기를 간직한 서글픈 바위지만,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많은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곤 한단다. 제단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물도 눈에 띈다. 한 곳은 물이 고여 있고, 다른 한 곳은 초와 향을 키울 수 있는 아궁이다. 상부에 제기까지 놓여있는 걸 보면 이곳 또한 기도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도 영험한... 하긴 어떤 이는 요 아래 약사사 스님의 입을 빌어 우물의 영험함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의 양이 기도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나?

 기도터부터는 생태체험 숲으로 조성된 잣나무 숲을 걷는다. 10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커다란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찼는데, 탐방로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으며 위로 오른다.

 청하동약수터에 10. ‘남암문(南暗門)’에 올라선다. ‘암문이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 출입구이다. 성안의 필요한 물품을 운반했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구원을 요청하거가 적을 역습할 때 이동통로로 사용했다. 그러니 문이 자그마했을 것은 당연.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문은 마차가 지나다녀도 될 만큼 컸다. 이는 강화산성 규모가 대량의 물자수송이 필요했을 정도로 컸다는 증거이리라.

 나들길 이정표는 15코스만 남장대로 가라하고 14코스는 곧장 직진하란다(나들길은 남산에서 14코스와 15코스가 상당히 겹친다). 하지만 난 15코스인 남장대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강화산성의 성벽이 남산의 산자락을 따라 이무기처럼 아찔하게 이어진다. 강화산성은 고려산성으로도 불리는 데, 1232년에 축성돼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당시엔 내성·중성·외성으로 겹겹이 쌓아 섬을 옹위했다 하나 지금 남은 것은 내성뿐이다. 그 둘레는 약 7.1km.

 오르다 힘이 들면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 된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강화의 풍경이 그동안의 고생을 한눈에 씻게 해준다. ! 이 부근은 MBC 월화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여주인공(은산)과 남주인공(왕린)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아름다운 배경으로 성곽길과 진달래꽃이 노출됐었다.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인 남산의 정상에 도달하면 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흔히 보는 정자와는 뭔가 다른 포스를 보여주는데, 몽골 침략 당시 지휘부가 머문 곳으로, 사방에 장대가 있었다지만 남은 곳은 이 곳뿐이다.

 남장대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진무영(鎭撫營)에 속한 군사 시설로 감시와 지휘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누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졌다가 2010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장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염하 건너 김포 땅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북한의 개성 땅까지 바라보인다고 한다.

 강화군의 배려도 돋보인다. 방향마다 전경 안내도를 세워, 실물과 대조해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나들길은 이제 서남쪽 능선을 따른다. 길을 가로막는 성벽은 망루를 이용해 넘는다. 산불감시초소로 여겨지는 망루를 가운데 두고 성안·밖으로 나무계단을 놓았다.

 오래가지는 않지만 능선을 탄다. 우리야 나들길을 걸을 때나 만날 수 있는 강화산성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게는 산책코스로 사랑받는 동네 뒷산이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음에도 불구하고 널찍하면서도 또렷한 이유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울창한 잣나무 숲을 만날 수 있었다. 남산에 조성된 여덟 개의 생태체험 숲(건강의 숲, 단풍나무 숲, 남산 약수터, 아이의 숲, 자작나무 숲, 잣나무 숲, 사랑의 숲, 바위정원) 중 하나인 잣나무 숲이다.

 길은 합쳐졌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강화산성이 강화읍의 사방에 울타리처럼 두른 성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14코스와 15코스가 다시 만나는 지점(이정표 : 국화리공동묘지 250m/ 청하동약수터 500m/ 남장대 200m)도 그중 하나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14코스와 15코스가 또 다시 나뉜다. 국화저수지로 향하는 15코스와 이별을 고한 14코스는 왼편 사랑의 숲으로 내려선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222.5m로 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남산은 꽤나 매섭고 옹골찼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었겠다. 하긴 강화산성이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견뎌낸 요새라 하지 않았던가.

 남장대에서 15, 생태체험 숲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숲을 만났다. 200평쯤 되는 공터에 사랑을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그 옛날 강화도령 원범과 봉이 처녀가 순박한 사랑을 나누었을 법한 장소지만, 그네들을 나타내는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강화나들길과는 별개로 조성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형물은 Love 가 주를 이룬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반지도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키스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뭇가지 모양의 선들로 키스를 하기 직전인 남녀를 그려냈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어떤 곳은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다. 흙길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그게 더 미끄러워질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튼튼한 밧줄 난간을 매어놓아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4(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쯤 내려서자 에버리치 호텔의 뒤편(이정표 : 종점 6.6/ 시점 3.2). 나들길은 이곳에서 왼쪽 방향이다.

 하지만 방향표식을 놓친 나는 오른쪽으로 가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덕분에 호텔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아차린 지점에서 본 선행리 들녘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을 계속해서 가더라도 저곳에서 나들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난 에버리치호텔로 되돌아가 정규 탐방로를 따르기로 했다.

 호텔부터는 널찍한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남산마을 주택가(이정표 : 종점까지 5.9km)를 횡단하듯이 통과한다. 때문에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하지만 길 찾기 쉽다는 게 나들길의 장점 아니겠는가. 이정표나 리본 등 둘레길 표식을 하도 잘 해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내려가는 도중 사소한 공방 다을을 만났다. 공방지기가 직접 만든 도자기에 다육식물을 심어 판매한다는 곳이다. 다기·접시·화병 등 직접 만든 공예품들로 꾸며진 내부가 볼만하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월간 전원속의 내집에서까지 소개했을 정도로 가옥의 구조도 독특하다니 나중에라도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남산마을을 빠져나오면 명진 컨벤션웨딩부페’. 군 단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예식장말고도 컨벤션센터와 뷔페까지 겸한다니 강화도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들길은 버스정류장(명진부페)을 코앞에 두고 왼쪽 골목(이정표 : 종점까지 5.4km)으로 들어간다. ‘태민의 담벼락을 오른쪽에 끼고 돈다면 이해가 쉽겠다.

 뒤이어 나타나는 들녘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들녘 너머로는 남산이 오롯이 솟아오른다.

 들녘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선행천의 둑길을 따른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저 들녘의 풍요로움은 선행천이 있어 보장된다. 혈구산 동쪽기슭과 혈구산과 고려산 사이 고비고개에서 시작되는 선행천은 동락천과 합류하여 선원면과 강화읍 경계를 따라 흘러 갑곳나루 옆에서 염하를 만난다.

 선행천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붉은 색으로 정비된 둔치, 제방도로에는 벚나무가 나란히 심겨 있다. 산책하기 딱 좋게 꾸며졌다고 보면 되겠다. 걷다가 피곤해지면 둔치에 놓여있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면 될 일이고.

 아치형의 예쁘장한 다리(이정표 : 종점까지 4.8km)를 건너자 나무들의 집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교회의 또 다른 샘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예배당을 기본으로 하지만, 평소에는 콘도(신도들을 위한)  MT형의 교육·훈련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시설의 외부공간이 개방되어 있었다. 덕분에 빗속에서 요기를 때울만한 공간을 찾던 나에게는 구제주가 되어주었고 말이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왔지만, 자리를 내어준 교회에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이후부터는 선행리의 마을안길을 따른다. 이 마을은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였던 최우가 세웠다는 원찰 선원사(현 충렬사 근처)’가 있었다는 곳이다. 최우는 몽고군에 의해 불탄 대장경을 다시 조성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병란을 물리치고자 1236년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조판불사를 시작했다. 대장도감은 이후 선원사로 옮겨졌고, 최우의 후원 아래 16년간의 작업 끝에 1251년 재조대장경이 완성됐다.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시리미로(2차선 도로)’는 횡단한다. 나들길이 건너편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하지만 이정표(종점까지 4.1km)나 리본 등 나들길 표식이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까지 된 임도지만 혈구산 자락의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 형태라서 지루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혈구산의 맑은 공기를 실컷 마시며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나무들의 집에서 15. ‘찬우물약수터에 닿았다. 철종이 어린 시절 외가를 오가던 길목에 있는 약수터이다. 위치로 보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목을 축였지 않았을까 싶다.

 약수터 고무대야에는 막걸리가 한 가득이다. 원범은 훗날 임금이 되어서도 봉이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 청하동에서 떠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저 막걸리 하나 챙겨 당시 철종이 느꼈을 감정을 잠시나마 이입시켜 볼까나?

 약수터 주변은 어르신들이 점령했다. 동네 주민들로 여겨지는 할머니들이 좌판을 펴고 제철 체소를 팔고 있었다.

 이곳도 원범이와 봉이의 데이트 장소였다고 한다. 청하동약수터에서 함께 걸어온 청춘 남녀는 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걸어 온 길을 되돌아갔단다. 데이트 코스의 반환점인 셈이다. 그걸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구간 조형물 말고도 사랑의 팻말 걸개판을 세워놓았다.

 약수터를 빠져나온 나들길은 4차선의 84번 지방도를 횡단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의 사랑 놀음에 동화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요놈에게 홀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로셀로나의 구엘공원에서 만났던 풍경, 즉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으로 장식된 기다란 벤치(‘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라고 했었다)를 떠올렸고, 당시를 회상하며 타일화를 감상하다 그만 길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가우디(Antonio Gaudi)’의 작품을 떠올렸으니 오죽했겠는가.

 하나하나의 파편들은 모여 원범 총각과 봉이 처자를 만들기도 한다.

 10분 남짓 엉뚱한 길을 걷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의 반대편 인도를 걷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음은 물론이다.

 조금 걷다보면 도로표지판 아래에서 오른쪽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정표 : 종점까지 3.1km)이 나 있다. 14코스의 마지막 산악 구간인데, 낮고 완만한데다 그 거리까지 짧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지친 심신을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회복시켜주었다. 이곳은 울창한 잣나무 숲, 피톤치드 흠뻑 머금은 솔향기가 사방으로 넘치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일단 능선으로 오르면 산길은 더 이상의 오르막 없이 완만하게 아래로 향한다. 가끔은 표식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다시 나타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산길을 빠져나올 즈음 양봉시설을 만났다. 하지만 늦가을이어선지 벌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냉정마을’, 나들길은 마을을 횡단하듯 지나가는데, 눈에 들어오는 주택들이 하나같이 멋지다. ‘냉정(冷井)’이 맑고 시원한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샘을 이르는 지명일지니, 그런 여건을 찾아 부티 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나 보다.

 찬우물약수터에서 25(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25). 나들길은 또 다시 84번 지방도(이정표 : 종점까지 2.1km)로 올라선다.

 1923년에 개교해 올해 나이가 100살이나 되었다는 선원초등학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자란다는 천지송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한 뿌리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뻗어 나와 옆으로 갈라지면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여준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가 모든 걸 나태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초등학교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이번에는 드넓은 평야지대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몇 번의 이정표 안내를 받으며 냉정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시야가 툭 트여 마음까지 넉넉해지지만,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쬐인다면 그늘이 없어 고역을 치를 수도 있겠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런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고려와 조선의 권력자들이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곳 강화도를 피난처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선원초등학교에서 30. 드디어 철종외가(哲宗外家,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8)에 도착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지어진 집으로 철종의 외삼촌인 '염보길'이 살았다는 집이다. 집은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이한 건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인데 가운데를 흰 벽으로 구분해 놓았다.

 조카가 왕위에 오른 후 지어져서인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멋지기까지 했다. 사랑채의 누마루 위로 오르면 안채가 보이고, 담 너머로는 너른 들녘이 눈에 차오른다. 참고로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자형으로 연결되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했다.

 스탬프보관함 옆의 무지렁이처럼 그려진 강화도령,  원범(철종)’이 눈길을 끈다. 나무를 해 팔아가며 사는 일자무식의 더벅머리 숫총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앎이다. 철종은 18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재위 시 사가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철종이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날머리는 대장간마을 버스정류장(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철종외가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84번 지방도까지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했다. 냉정2리 마을회관 앞 도로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을 겸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0.98km를 걷는데 3시간30(간식 시간은 뺐다)이나 거렸다. 남산의 오르막 산길도 속도를 떨어뜨렸겠지만, 그보다는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epilogue), 철종(원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왕으로 단종·사도세자와 함께 조선 왕실의 야사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은 역모에 휩쓸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어 팔아가며 살다 현종이 급사하자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천자문은 깨우쳤으나 다른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던 삶 때문에 왕으로서의 그의 지시는 조정 권신들에게 반박 받고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수 없는 까다로운 궁중 예법은 예전의 건강한 젊은이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든다. 결국 실권 없이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그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때문인지 철종은 여러 야사를 낳았다. 왕위에 오르고서도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마셨던 막걸리를 잊지 못해 아내인 철인왕후 김씨가 몰래 친정에 사람을 보내 구해서 올렸다는 이야기나, 강화도에서 농민으로 살 때 연정을 품었던 봉이(’양순이라는 설도 있음)’라는 평민의 여식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철종의 그런 지난했던 삶은 애잔했던 러브스토리가 덧입혀지면서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란 명품 둘레길로 다시 태어났다.

한티 가는 길 1구간(돌아보는 길)

 

여행일 : ‘22. 10. 2(일)

소재지 : 경북 칠곡군 왜관읍 및 지천면 일원

여행코스 : 가실성당→숲길입구(낙산2리)→전망데크→바람쉼터→고사리나무화석단지㊞→연화예술원→도암지→성모상→신나무골성지(10.5km, 실제는 10.33km를 3시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누구나 한 번 쯤 걷기를 소망하는 길이다. 최초 순교자 야고보 성인의 전도 행로를 따라 펼쳐지는 이 길은 프랑스 남부의 ‘생장 피데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둘레길이 있다. 조선말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신앙 선조들이 수없이 오가던 길을 순례길로 조성했다. 길이는 45.6km, 칠곡군 왜관읍의 ‘가실성당’에서 동명면의 한티 순교성지까지 이어진다. 한티에서 살고, 순교하고, 묻힌 순교자들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그중 1구간을 걷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핍박을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은둔하던 공소(신자들의 생활 공동체)를 출발해 또 다른 공소가 있는 신나무골 성지까지 이어지는 10.5km짜리 구간이다.

 

▼ 들머리는 가실성당(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경부고속도로 왜관 IC에서 내려와 ‘공단로(칠곡·왜관산업단지 통과)’를 이용해 강변대로(67번 지방도)로 올라온다. 2.5km쯤 달리다가 낙산교차로에서 좌회전, 곧이어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가실성당이다. ‘가실’, 얼핏 보면 순우리말 같지만 실상은 ‘아름다운 집’(佳室)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다. 어쨌거나 그 뜻만큼이나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성당이다.

▼ ‘한티 가는 길’은 ‘그대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돌아보는 길(1구간), 비우는 길(2구간), 뉘우치는 길(3구간), 용서의 길(4구간), 사랑의 길(5구간) 등 다섯 구간으로 이뤄졌다. 오늘 걷게 될 1구간(돌아보는 길)은 신유박해 때 서울·경기·충청의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 모여들었던 가실성당(신자들의 생활공동체인 ‘공소’가 모체일 듯도 싶다)에서 시작한다. 또 다른 공소가 있던 신나무골까지 이어지는데 대부분이 산길이다. 험하지는 않지만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숨소리까지 죽이며 산속을 숨어 다녀야만했던 천주교신자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가실성당(경북 유형문화재 348호)’은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895년 초대 주임신부였던 ‘가밀로 파이아스’신부가 다섯 칸 규모의 기와집을 본당으로 사용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신자가 늘자 1923년 ‘루느뇌(당시 주임신부)’가 현재의 자리에 새로 지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지은 ‘빅토르 루이 푸아넬’신부가 맡았다고 한다.

▼ ‘성모 동굴’은 너른 잔디밭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푸른 숲과 잔디가 주는 싱그러운 풀내음에 성모님이 전하는 평화가 더해지면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무장해제당하는 느낌이다. ‘십자가의 길’도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잔디밭처럼 보드라운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성모님도 만나볼 수 있다. 주보성인인 성녀 ‘안나’와 함께 모셔져있는데,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단다.

▼ 저 정도의 가족이라면 ‘성(聖)’자를 붙여도 되지 않을까? 맞다.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로 선정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월의 청춘(KBS-2TV)’에서 주인공들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영화 ‘신부수업(권상우·하지원 주연)’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 스탬프 보관함은 성당 앞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함에 들어있는 책자를 꺼내 일단은 스탬프부터 찍고 보자. 둘레길 곳곳에 설치된 20개의 스탬프를 모두 찍어오면 완주 인증서는 물론이고 기념품까지 준다니 말이다.

▼ 길을 나서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다. ‘한티 가는 길’의 특징 중 하나는 중요 포인트마다 세워놓은 빗돌에 구간 지도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각 구간의 노선을 바탕에 깔고, 주요 지점을 파란색 원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위치는 주황색으로 칠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 성당 후문을 빠져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방향표시가 된 ‘한티 가는 길’ 팻말이 대문에 붙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당을 나선 길은 곧바로 마을길로 이어진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가 맞는다. 그 모서리 잔디밭은 쉼터를 겸하도록 꾸몄다. 위에서 얘기했던 구간 지도를 그려 넣은 빗돌도 보인다. 방향을 꺾어야 하는 지점인데도 지도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게 다소 아쉬웠지만...

▼ 쉼터의 얼굴은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녹슨 철판에 지팡이를 든 순례자의 형체만 도려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도로를 따른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신나무골성지까지 10.5km를 걸어야 한다. ‘돌아보는 길’, 순례길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구간이다.

▼ 첫 번째 포인트인 ‘3산업단지1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는데, 벽면에 배낭을 멘 여행자가 판화처럼 찍혀있었다. ‘한티 가는 길’은 여느 둘레길이 아닌 ‘순례길’을 모티브로 했다. 그렇다면 지팡이를 든 순례자가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 굴다리를 통과하자 길이 둘로 나뉜다. 선택이 강요되는 지점이다. 아니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석해보자.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보일 것이다.

▼ 오른쪽 방향인 ‘숲길’로 향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공장 건물들이 보이면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공장지대를 향해 가는 초기 구간은 다소 단조롭다.

▼ 현대는 ‘스마트한 삶’으로 대변된다. 그러다보니 길을 찾을 때도 스마트폰부터 꺼내든다. 하지만 ‘한티 가는 길’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길이 나뉠 때마다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나무에 걸린 파란, 주황 띠를 따라 걸으면 된다.

▼ 공장지역을 횡단한 다음, ‘(주)세원이루인터내셔널’을 왼편에 끼고 산속으로 들어선다. 이정표가 가실성당에서 1km쯤 걸어왔음을 알려주는데,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낙원2리(보병골)와 함께 ‘칠곡·왜관3산업단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 숲길의 초입에는 ‘한티 가는 길’임을 알리는 빗돌을 세웠다. 이 길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숨죽이며 걷던 길이다. 대구대교구는 이 길을 1968년부터 도보순례하기 시작했으며, 2016년 칠곡군이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길을 ‘한티 가는 길’이라는 브랜드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바닥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폭신폭신한 게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숲길 초입, 양지바른 곳에 들어앉은 무덤이 눈에 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이품 문무관)까지 올랐던 망자(亡者)의 품위를 지키려는지 무덤은 크고도 반듯했다. 터도 잘 잡았다. 좌청룡우백호까지는 모르겠지만 무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틀을 갖췄다. 하지만 죽어서 명당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는 동안 복 짓고 업 짓는 게 중요하지.

▼ 길을 닦은 칠곡군청의 노고도 엿볼 수 있었다.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곳곳에 벤치나 평상을 놓아 지친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아무리 순해도 산은 산이다.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저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오가는 사람들이 안전을 빌며 던져놓았던 돌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의젓한 돌탑으로 변했다.

▼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순례길 조성에 쏟아 부은 지자체의 노력은 보잘 것 없는 오르막길까지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화시켰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1구간의 초반은 임도와 숲길 중 어느 곳을 걸을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때문에 숲길과 임도가 여러 곳에서 교차한다.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임도를 따라 걸으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 그 자유는 갈림길 초입의 빗돌이 보장하고 있었다.

▼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은 걷기에 딱 좋다.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솔향기까지 코끝을 스쳐 지나가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렇다고 너무 즐거워하지는 말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수없이 이 길을 다녔던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며 걸어보자.

▼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도 꽤 되나 보다.

▼ 앗! 우리 집 식단의 귀염둥이 ‘참취나물’이 꽃을 피웠다. ‘이별’이라는 꽃말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저리도 예쁜 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전망데크’로 내려서기 직전에 ‘스탬프보관함’을 만났다. 가실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맞는 스탬프다. ‘스탬프 북’에는 금호임도의 전망대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숲에 가려 조망은 꽝이다.

▼ 계속에서 숲길을 타야지만 일단은 임도로 내려서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나타나있는 ‘전망대’를 찾아서다. 명색이 ‘전망대’인데 가슴에 담을 거리는 아니더라도 눈에 담을만한 경관쯤은 보여주지 않겠는가. 거기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맥주잔까지 건네는 데야...

▼ 그런 내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맥주잔을 받아들고 선 난간은 눈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100m쯤 임도를 따르다가 또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를 수도 있지만 내 선택은 숲길일 수밖에 없었다. 보드라운 흙길을 걸으며 솔향기까지 실컷 맡을 수 있으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 하지만 썩 바람직하지 않은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1코스의 주제는 ‘돌아보는 길’이다. 순례를 나서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난데없는 오토바이의 굉음이라니... 순례길 초입에 걸어놓은 ‘산악 오토바이 출입금지’라는 현수막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들인 모양이다.

▼ 산악오토바이 라이더들에 대한 내 노여움을 하느님도 눈치 채셨나보다. 사랑은 용서로부터 시작된다며 십자가를 내보여주신다. 이를 본 나는 성호부터 긋고 본다.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수양이 아직도 멀었음을 느끼면서...

▼ 전망대에서 10분 남짓. 또 다시 내려선 임도에는 데크로 작은 광장을 만들었다. 화장실까지 갖춘 걸 보면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먹고 가라는 모양이다. 맞다. 안내 빗돌도 이곳을 ‘바람쉼터’로 표시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을 맞아가며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임도를 따라 짧게 걷자 또 다른 포인트다. ‘임도 종점’, 이후부터는 오롯이 숲길만을 걸어야 한다.

▼ 길 닦기에 쏟아 부은 칠곡군청의 노력은 벤치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가로로 줄을 그음으로써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통나무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의자도 만날 수 있었다.

▼ 인간의 손길을 거부한 통나무는 연륜까지 묻어난다. 옛날, 박해를 피해 이 길을 오가던 신자들이 잠시 쉬어가면서 걸쳐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소나무 숲속으로 난 오솔길은 내리막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산속을 걷는데 어찌 내리막만 있겠는가. 조금은 부담스러운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 산속이지만 길은 심심찮게 나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헷갈릴만한 곳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여의치 않은 곳에는 리본을 매달았다. 그러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만 쫒아가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선두대장은 그마저도 못 미더웠나 보다. 바닥에 방향표시지를 까느라 여념이 없다.

▼ 얼마쯤 지났을까 제법 깊숙한 계곡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가물어선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변은 양치식물(처음엔 고사리인줄 알았다) 천지였다.

▼ 임도 종점에서 산으로 들어선지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35분). 안내판 하나가 순례자를 맞는다. 이곳이 ‘금무봉 나무고사리화석단지(천연기념물 146호)’라고 적었다. 1억3천만 년 전에 자생하던 식물로, 잎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사리와 같으나 나무줄기와 가지가 있고 잎이 그 가지에 붙어있기에 ‘나무고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 이곳에도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불상사가 없도록 하자.

▼ 조금 더 걸으니 경작지가 나타난다. 산길이 이제 끝나가겠거니 했더니 오산이었다. 오르막길, 그것도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올라가야만 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 것이다. 1구간(되돌아보는 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 능선에서 만난 송전탑은 소중한 만큼이나 용도도 다양했다. 송전은 한전의 몫, 소방서는 구호지점표지판을 내걸었고, 지자체인 칠곡군에서는 순례자길 리본을 묶어 이정표로 활용했다.

▼ 이 부근 두어 곳에서 가족묘역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숲으로 가려있던 시야가 툭 터지기도 한다.

▼ ‘ㅏ’가 십자가를 닮았다. 맞다. 이곳은 순례길, 이정표마저도 식상한 것을 피했다.

▼ 울창한 솔숲을 걷는다. 호젓하다보니 사색이 나래를 펴는데, 이때 가상의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 허공으로 던진 내 대답은 간단했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초대하셨고, 내가 응답한 것’이라는 또 다른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난 지금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그 길을 걷고 있다.

▼ 도중에 오순도순 걷고 있는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인데, 이미 완주를 끝냈지만 다시 한 번 걷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제 겨우 두 번째이지만 대여섯 번은 흔하고 개중에는 10번 이상을 순례한 신자들도 있다고 했다. 다섯 구간으로 나눠진 길을 전부 걸으려면 이틀은 족히 걸리는데, 그들은 무슨 매력에 빠져 반복해서 걷는 것일까?

▼ 길을 가다 만난 노송에서 또 하나의 사자성어를 배운다. 보라. 머리를 낮게 하고 마음을 아래로 향하라는 ‘低首下心(저수하심)’의 뜻을 생김새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 화석단지에서 30분. 순례길은 ‘경부선 철도’ 곁으로 내려선다.

▼ 철로의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한 순례길이 이번에는 칠곡대로(국도 4호선)의 아래(이정표 : 신나무골 성지 2.4㎞)를 지난다.

▼ 잠시지만 국도와 나란히 가는 도로(연화2길)을 따른다. 그러다가 청호산업사 앞에서 이정표(신나물골 성지 1.5㎞)가 가리키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전통공예 체험교실인 ‘연화예술원(蓮花藝術院)’이다. 도자기 생산업체인 ‘학산도예’에서 폐교가 된 연화초등학교를 고쳐 2001년 문을 열었다. 각종 공예품 체험강좌를 개최하고 있으며, 부채 만들기나 연날리기 같은 계절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단다.

▼ 연화예술원은 원래 1949년에 개교한 연화초등학교였다고 한다. 1995년 신동초등학교의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7년에 폐교됐다.

▼ 순례길은 이제 도암지로 향한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 잠시 후 연꽃잎 가득한 도암지(道岩池)가 얼굴을 내민다. 1구간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곳이다. 한적한 시골마을과 노송, 저수지가 삼박자로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참!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은 저수지 둑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 도암지는 저수지 둑의 소나무가 호수에 비추이며 만들어내는 반영이 곱기로 소문난 곳이다. 물에 담긴 소나무의 반영이 도암지의 대표사진으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나무 뒤로 지는 석양과 벚꽃 흐드러진 봄날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라고 한다.

▼ 저수지에는 아직도 연잎이 푸르게 가득했다. 그 너머에는 ‘도암마을’이 들어앉았다.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시골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 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암동(岩洞), 마을 북쪽의 용소봉 정상이 바위로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가 이곳으로 피해 와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서 도암(陶岩)으로 고쳐졌다.

▼ 정자는 지친 순례자들에게 행복한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시원한 음료가 채워진 양심냉장고를 비치해 자유롭게 꺼내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물건 값은 양심껏 내면 된다. 순례자들에게는 그게 많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들이 느낀 행복감을 칠판에다 빼꼭히 적어놓았다.

▼ 둑 위로 늘어선 소나무도 압권이다. 사철 푸르른 빛으로 마을을 지키는 낙락장송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남성을 위한 외줄 그네도 보인다. 집사람이 저걸 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오늘도 교회로 달려갔다.

▼ 도암지의 빗돌(이정표 겸용)은 날머리까지 1.4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덕분에 난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굵직한 노송이 가로수처럼 늘어서있는 임도를 따라 공장지대로 들어선다.

▼ 공장지대가 끝나면 숲길이 시작된다. 그 숲속에 가톨릭의 수련시설로 여겨지는 건물(이정표 : 신나무골성지 0.6㎞)이 들어서있다. 하지만 사용을 않은지 오래인 듯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 건물 옆에는 기도하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성모님은 모두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란다. ‘성모송’을 바치며 지나온 삶을 반추해본다. 그러자 지난했던 내 삶이 하나의 길이 된다. 무엇 얻으려 어디로 하염없이 가는 가.

▼ 최종목적지인 ‘신나무골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산길인데다 능선을 가로지르며 고개까지 넘어야하지만 가파르지 않아 걷는데 어려움은 없다.

▼ 성모상에서 15분.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신나무골 성지’로 내려선다. ‘신나무골’이란 골짜기 입구에 신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가톨릭이 박해받던 시절 교우촌(校友村)이었고, 선교사들이 대구 읍내로 들어가기 위한 전초 기지이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것은 을해박해(1815년) 때라고 한다. 당시 노래산(청송)·머루산(진보)·일월산(우련발·곧은정)에 살던 20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된다. 이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거나 옥사했고, 나머지 33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이때 옥바라지를 위해 온 가족들과 다른 곳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문은 ‘김보록(Achille Paul Robert, 1853-1922)’ 신부님의 흉상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목활동하며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단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인 그는 1877년 한국에 들어왔다. 1882년 이곳으로 와 189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지역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단다.

▼ 2019년에 봉헌되었다는 성당은 한옥이다.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성당)이 처음으로 지은 십자형 한옥성당(1901년 화재로 소실)을 이곳에 복원해 놓았단다. 대구 천주교회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 신부가 이곳(신나무골 초기 신자인 이이전의 집)에서 머물며 대구교회를 설립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사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옥성당 지붕 위 십자가와 창문 등은 옛 사진을 토대로 재현했으며, 막새기와와 담장 등에 있는 십자가도 주교좌계산성당의 초창기 대문 담장에 있던 문양을 본떠 만들었단다.

▼ 성당 오른편에는 당시 모습으로 재현된 사제관이 있다. 김보록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목활동 거점이었던 초가 사제관은 그가 머물렀던 새방골 사제관의 사진을 활용해 복원했다. 참고로 이곳 신나무골은 역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포교 활동을 했던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샤스탕 신부와 ‘땀의 증거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신나무골을 찾아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기록이 있다. 1882년부터는 대구와 경상도 지방을 맡은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순회 선교를 시작했다.

▼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눈에 띈다. 카페 등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는데, 초가의 외벽은 ‘로베르 신부와 계산성당’, ‘보두네 신부와 전동성당’, ‘죠조 신부와 초량성당’, ‘파이야스 신부와 가실성당’ 등의 내용을 담은 타일성화로 꾸몄다. 이밖에도 우물터와 빨래터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 양지바른 언덕에는 이곳에서 살다 한티로 피란 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무덤이 들어섰다. 농부의 아내였던 그녀는 죽음 앞에 신앙을 버린 남편과는 달리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에 목을 누이고도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는 절규를 남기며 처참히 죽었다. 참! 묘역에는 십사처도 조성되어 있었다. 잠깐 짬을 내 ‘십자가의 길’ 기도라도 바쳐보면 어떨까 싶다.

▼ 날머리는 성지주차장(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성지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며 내려오면 어느덧 주차장에 이른다. 그리고 ‘한티 가는 길’ 쉼터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그렇다고 쉼터 옆에 전시해놓은 사진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말자. 순례길의 사계를 담았으니, 한 철에 머물고 있는 당신의 안목을 네 배로 늘려주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10.33km를 3시간 10분에 걸었다. 구간의 70%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산길이 편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곳에도 ‘한티 가는 길’ 특유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지팡이를 든 순례자가 아닌 십자가 형체로 도려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도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듯한 별 모양으로 대체됐다. 조선 말, 천주교의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자 이념적 도전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신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강화나들길 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여행일 : ‘22. 3. 13(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과 양도면 일원

여행코스 : 탑재삼거리→가릉→가톨릭대→석릉→곤릉→이규보묘→성공회 은수성당→은수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2km/ 실제는 14.45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세 번째 코스인 ‘고려왕릉 가는 길’을 걷는다. 이름처럼 강화도에 있는 4개의 고려왕릉 중 3개에다 고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명릉 하나. 그리고 고려의 문신 이규보의 무덤까지 만나게 되니 무덤에 특화된 코스라 하겠다.

 

▼ 들머리는 탑재삼거리(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88올림픽도로와 ‘국도 48호선’을 연이어 타고 오다 서김포·통진 IC에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로 올라선다. 첫 번째 나들목인 대곶 IC에서 빠져나와 356번과 84번 지방도를 연이어 타고 초지대교를 건너면 잠시 후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에 닿는다. 이곳 온수리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마니산로, 곧이어 나타나는 회전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강화남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탑재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 ‘고려왕릉 가는 길’이라는 이름처럼 고려의 왕릉들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남한에 있는 5개의 고려왕릉 중 4개가 강화도에 위치한다. 3코스는 이 가운데 진강산 자락에 들어앉은 3개를 둘러보는 여정이다. 그러다보니 코스의 대부분이 산속 숲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오르내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길라잡이(이정표 및 리본)가 잘 설치되어 있어 그저 무덤에 얽힌 스토리나 가슴속에 담으며 걸으면 된다.(산악회 버스의 주차여건 때문에 역방향으로 걸었다)

▼ 탑재삼거리 부근 ‘강화 고기국수’ 앞에서 하천변 농로를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냉면전문점인 ‘유진면옥’이 보였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아니, 초입의 이정표(가릉← 700m)를 참조해도 큰 문제는 없다.

▼ 200m쯤 들어간 곳에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차량회수가 어려워, 종주꾼들보다는 ‘가릉’만 다녀올 요량으로 온 사람들이나 이용할 듯. 참! ‘강화 나들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다.

▼ 탐방로는 ‘능내마을’ 골목길을 통과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길을 나선지 10분 만에 소담하고 아늑한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에 데려다 놓는다. 가릉의 주인은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妃)인 ‘순경태후(順敬太后)’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약선(金若先)의 딸이자, 무신정권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1235년(고종 22년) 원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궁에 들어왔고, 강화천도 초기인 1236년에 충렬왕을 낳고 1244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가 강화 천도기(1232~1270)라서 능이 이곳 강화에 있다.

▼ 능은 봉분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석수(石獸)가 있으며, 석실 전면에 석인상이 석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봉분 서편에는 하대석 및 옥개석, 동자주가 진열되어 있다. 참! 무덤에는 석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울타리를 쳐놓아 가까이 다가가 볼 수가 없었다. 부장대나 벽화의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는데...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의 ‘가릉’이란 시도 만날 수 있었다. ‘강화나들길’이 고재형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니 그도 이곳을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었단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란다.

▼ 4코스의 시점임을 알리는 이정목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가릉주차장에 3코스의 완주지점이자 4코스 시작지점임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스탬프보관함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 조금 더 오르니 이번에는 ‘능내리석실분(陵內里石室墳, 인천시 기념물 제28호)이 얼굴을 내민다. 능으로 여겨지나 주인을 알 수 없어 ‘능’이라는 호칭 대신 동내 이름에 ‘석실분’이란 접미사를 붙였다.

▼ 국가급 문화재가 아니어선지 이곳은 울타리를 쳐놓지 않았다. 덕분에 가까이 가 볼 수 있었다. 고분은 4단으로 구획 되었고, 봉분구조물과 등이 양호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고려 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그것도 아래쪽에 위치한 가릉의 순경태후보다는 지체가 높은 인물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단다.

▼ 이제 ‘석릉’을 만나러갈 차례다.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는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가 빼곡한 오솔길이다. 그러다가 마주친 청솔모는 도망도 가지 않는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음이리라.

▼ 강화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둘레길이니 어찌 정자(鎭江亭) 하나쯤 없겠는가. 읽을거리까지 보탠 일류의 쉼터이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다만 겨울철에 아이젠을 신은 채로 올라가는 건 삼가야 한다.

▼ 이곳은 ‘진강산(해발 443m)’ 자락. 진강산은 강화도에서 세 번째로 높을 정도로 산세가 만만찮다. 특히 왕릉을 4개나 품었을 정도로 풍수가 뛰어난 산이다. 그러니 찾는 사람들 또한 만만찮을 것이다. 그래선지 서너 곳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 저건 어린이용 쉼터? 격식을 차려가며 꾸며놓았지만, 초등학생들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앙증맞다. 그것도 저학년에서나...

▼ 나들길은 보이는데 만족하지 않고 생각까지 하며 걸을 수 있도록 꾸몄다. ‘사랑은 곡선이다. 곡선의 씨앗은 하트(♡)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 사위가 온통 꽃 잔치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진달래, 강화의 진달래꽃 명산인 ‘고려산’만은 못해도 이만하면 꽃놀이 삼아 들르기에 충분하겠다.

▼ 진강산의 봄날은 전남혁 시인의 ‘진달래꽃’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꽃 필 때/ 그미 눈빛에 치여/ 떨어진 꽃잎 같은 약속이/ 생각나는 꽃

구차한 변명 같아/ 미운 꽃

꽃술에 취하듯/ 내 머리에 꽂고 싶은/ 히죽 꽃

봄날 저기/ 연분홍 삐딱 구두/ 또각또각 들리지만/ 기다리다 맥이 빠져/ 주저앉은 꽃>

▼ 요렇게 예쁜 꽃을 보면서, 느닷없이 침샘이 고여 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화전(花煎)과 두견주(杜鵑酒)로 신선놀음에 푹 빠졌었던 옛 추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포근한 봄날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 탐방로는 산자락의 하단을 따라 나있다. 그래선지 논두렁 비슷한 길을 걷기도 한다. 이처럼 나들길은 논과 밭을 지나고 마을을 또 지나 산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들이 있으며 그 곁에 사람이 있다.

▼ 가릉을 지나 30분쯤 더 걸었을까 ‘철문’이 앞을 막는다. 인천가톨릭대학의 사유지라 출입을 제한한단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출입금지’안내판에 적힌 ‘학생들의 기도처이니 조용히 통과해주기 바란다’라는 글귀를 읽었음이리라.

▼ 가톨릭대학은 목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었다. 영계(靈界)과 속계(俗界)의 경계선이라고나 할까? 오래 전, 피정을 위해 심심찮게 찾았던 수도원. 난 그곳에서 군사정권에 대한 불만을 기도로서 버텨낼 수 있었다. 비겁한 자의 회피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 목책 너머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e)’총독 관저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Golgotha)에 이르기까지의 14가지 중요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다. 최근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 부활을 포함시켜 15처로 바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어쩐지 모르겠다.

▼ ‘이 뭣꼬?’. 목책이 반사경을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성범죄 관련 뉴스가 도배를 하더니, 이젠 등산로에까지 저런 시설이 필요했던가 보다.

▼ 어렵게 길을 내주었으니 이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건 어쩌면 당연. 신학생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진강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릴 테니,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다만 입은 닫고서.

▼ 가톨릭대 구간이 끝나면 요런 오르막 구간이 나오기도 한다. 3코스에서 가장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면 믿을 수 있을라나?

▼ 이번에는 쉼터가 시판을 달았다. ‘신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졸지에 신이 되어버린 저 의자가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하다.

▼ 가톨릭대에서 18분쯤 더 걸어 쉼터를 겸하고 있는 ‘지릉마루’사거리에 내려섰다. 나들길은 진강산에서 내려와 석릉방향으로 간다. 직진은 길정리, (괄호)속에 ‘곤릉’이 적혀있는 걸 보면, 곤릉으로 가는 지름이지 싶다. 오른편은 어두마을이라는데 굳이 알아두어야 할 필요는 없을 듯.

▼ ‘석릉’ 방향으로 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숲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는 종점에서 4.9m가 떨어진 지점이란다. 그 옆의 팻말은 왼편으로 30m만 올라가면 ‘석릉’이 나온다고 적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걸어야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돌 깔린 흙길과 돌계단을 오르니 ‘석릉(碩陵, 사적 제369호)’이 얼굴을 내민다. 희종(재위 1204-1211)의 ‘석릉’은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왕릉이다. 희종은 무신 세력이 정권을 잡고, 최충헌을 중심으로 전횡을 휘둘리는 상황 속에서 왕위에 즉위해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왕이다. 하지만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와 영종도를 돌아다니다 고종 24년(1237) 결국 유배지에서 죽었고 이곳에 안식처가 마련됐다.

▼ 패자의 설움인지 고려의 왕릉은 조선의 왕릉에 비교가 안 된다. 석축이 3단으로 남아있고, 나름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는 게 그나마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참! 어느 전문가는 사진의 석인상에 대해 거론하고 있었다. 곤릉이나 홍릉, 가릉의 석인상과 조각 수법이 다른 점을 들어 다른 곳에서 있던 석인상을 석릉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 ‘석릉’에서 내려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지는 탐방로는 이런 갈림길을 가끔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길을 잠시 잃어도 괜찮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걸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해진다. 리본이 촘촘히 매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지만.

▼ 정겹기 짝이 없는 산길을 걷는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이정표와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란 색 나들길 리본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거기다 길이 널찍한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 있으니 걷는 것 그 자체를 실컷 즐겨보자.

▼ 샘터도 만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흔적만 남았지만...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자. 약수는 없어도 쉬어갈 수는 있으니까.

▼ 10분 남짓 더 걸으니 ‘강화 흙 전원마을’이 나온다. 인간의 오랜 염원 가운데 하나는 병 없이 오래도록 사는 것 즉, 무병장수다. 전원생활의 주된 목적 중 하나도 건강하게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산수가 어우러진 시골은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을 갖추고 있어 건강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

▼ 마을을 빠져나와 5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권능감리교회’가 고개를 내민다. 탐방로는 교회 조금 못미처에서 왼편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 잠시 후, 하얀색 건물이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종점에서 6.2km지점)는 이곳에서 직진하란다. 그렇다고 무작정 믿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곳에서 곤릉으로 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릉에 대한 안내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화를 입는 곳이기도 하다.

▼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나들길‘이 아니니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앱을 믿고 헤매기를 3~4분, 민가에 들어가 가는 길을 여쭤보니 자세히 알려주신다. 나 같은 나그네들이 심심찮게 나타날 텐데도 개의치 않고 알려주시는 그 아주머니께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100m쯤 올라갔을까 이번에는 숲속으로 들어가란다. 하지만 철조망과 함께 사유지이니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앞을 딱 막아서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어찌 되돌아가란 말인가. 벌어진 철조망 틈으로 빠져나가 숲길로 들어섰다. 길은 막아놓아선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 그렇게 150m쯤 더 올라가자 소나무 숲속에 숨어있던 ‘곤릉(坤陵, 사적 제371호)’이 얼굴을 내민다.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 유(柳)씨의 능이다. 강종의 태자 시절, 제1비인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李氏)가 아버지 이이방(李義方)이 살해된 뒤 폐출되자, 태자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고종(高宗)을 낳았으며, 1239년(고종 26)에 별세하였다.

▼ 곤릉은 왕릉이라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초라했다. 조선시대의 웬만한 정승 무덤보다도 못할 정도다. 가릉은 그나마 묘역이 넓어 왕릉으로서 최소한의 위엄이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초라한 봉분만 남아있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이 붕괴되고, 석축이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란다.

▼ 능에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도로에 내려서고,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교통량은 많지 않으나 인도가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잘 살펴가며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느티나무가 볼만한 ‘해나무 버스정류장’이다. 3그루 정도가 붙어있어 마치 웅장한 노거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인삼은 강화도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 중 하나다. 그래선지 나들길을 걷는 중 심심찮게 인삼재배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이 내게는 고역이었지만... 인삼밭에서 ‘인삼막걸리’를 떠올리게 되고, 순무를 안주삼아 목을 넘어가던 그 감칠맛이 자꾸만 떠오르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 조금 더 가면 만나게 되는 ‘예비군훈련장’은 사진 생략, 다만 이곳은 길이 나뉘는 지점이라는 것만 기억해두자.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은 ‘길정저수지’를 거쳐 들머리(오늘은 날머리다)로 연결된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선두포와 가능포 앞바다를 메워 만든 들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하는데, 탐방로는 이 저수지의 제방 길을 따라 걷게 된단다.

▼ 도로로 내려선지 17분. ‘길직리입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나들길은 ‘보니파시오’란 카페가 있는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까치골’마을로 향한다. ㈜엠테크놀러지의 축대 아래를 지나...

▼ ‘까치골(도로명 표지판에 ’까치골‘이란 지명이 보였다)로 여겨지는 마을을 지난다. 물론 직진했다. 하지만 정규코스는 이곳 어디선가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자그마한 동산을 에두른 다음 연등국제선원으로 간다. 보호수로 지정된 ’큰나무‘ 근처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걷던 난 곧장 직진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에두르는 코스를 쏙 빼먹어버린 것이다.

▼ 마을안길을 통과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도 길을 잘못 들었다. 왼편으로 가야하는데도 둘레길 리본에 홀려 그만 오른편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길이 탐방로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까 길을 잘못 들어섰던 탓에 탐방로의 중간지점에 닿게 되었고, 상황파악이 안된 탓에 지금 역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 첨부된 지도의 ‘나들길 흙집(버섯모양의 특이한 외형을 지녔는데 펜션일 게다)’에 이르러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걸 알아차렸다. 반대방향에서 걸어오는 일행 몇을 만났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흙집 건너편으로 이규보의 묘역이 내다보이니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논두렁을 따라 곧장 묘역으로 진행해버렸다. 덕분에 우린 외국인들이 한국 선(禪)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연등국제선원을 둘러보지 못했다.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이규보의 묘역. 고려 최고의 문장가라지만 이규보 묘역은 왕릉은 아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묘지 중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국선생전’으로 유명한 이규보는, 신라의 최치원, 조선의 박지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힌다. 이규보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천재였지만 관직을 얻지 못하여 불우하게 지냈다고 한다. 32세에 비로소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의 눈에 들어 관직에 올랐고, 강화 천도 시기에는 벼슬이 재상까지 이른다.

▼ 이규보의 묘(인천시 기념물 제15호)는 상부에 모셔져 있었다(하단의 묘는 이규보의 후손으로 추정될 뿐 신원은 확인되지 않는단다).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었다. 참! 돌하루방을 연상시키는 유머러스한 문무석은 무신정권 당시의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라고 하니 참고하시길.

▼ 묘역의 재실은 ‘사가재(四可齋)’란 편액을 달았다. 이규보가 개경에 있을 당시의 별장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그곳에서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가히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나 가히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단다. 안쪽에 걸려 있는 백운재(白雲齋)란 현판은 윤보선 대통령이 1983년에 쓴 글씨라고 한다.

▼ 따스한 봄날, 잔디밭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일가족이 부럽기 짝이 없다. 한국전쟁 때 태어나 4.19에 5.16, 10.26. 12.12... 혼동의 시대에 고단한 세월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저 먹고 사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이규보의 묘역에 왔으니 그의 시라도 읊어보자. <...앞 부분은 생략, 응련금일악(應戀今日樂), 욕위후일망(欲爲後日忘), 금일극환학(今日極歡謔)> ‘즐거웠던 오늘을 그리워하리/ 훗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 오늘 한껏 즐기자꾸나.’ 이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덕분에 난 준비해 간 술과 안주를 그의 묘역에서 깡그리 비우고 나서야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 다시 길을 나선지 15분, ‘길직1리’에 들어섰다. 이 마을의 ‘회관’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른쪽이 신촌마을을 거쳐 길정저수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갑장과의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곧장 직직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덕분에 ‘강화초대교회’에서 3.1독립만세운동 유적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됐지만...

▼ 요즘도 허수아비가 통하나? ‘유전의 법칙’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 날짐승들이 요즘은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당시 기사는 까치 종류는 가짜 총까지 알아본다고 했었다.

▼ 길직리에서 13분, 농사준비에 한창인 들녘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강화초대교회(옛 길직교회)에 이른다. 감리교단 소속의 교회인데, 그보다 이곳은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으로 더 유명하다. 강화군은 3.1운동 당시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약 2만 4천여 명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운동 발상지 중 하나다. 그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논의된 곳이 이곳 ‘길직(피뫼)교회’인 것이다.

▼ 마당에는 옛 예배당 건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독립지사 유경근과 조종환 선생 등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강화 남부지역에서 ‘강화 3.1만세운동’을 시작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황도문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피뫼(길직)교회’ 담임목사 이진형과 장윤백·황도문·황유뷰·유봉진 선생 등이 이곳에서 회동하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18일 유봉진 대장을 필두로 강화읍 장터에서 2만 여명의 군중과 함께 강화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로 63명이 체포됐고, 43명이 제판에 회부돼 상당수가 옥고를 치른다. 이들 중 길상면 주민이 24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 앗! 저게 뭐꼬?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산꼭대기에 걸터앉은 도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포토 스팟’으로는 최고이나 막상 찾아가보면 식수나 교통 등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풍경이다. 그래도 이색적인 멋에 끌려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았었는데, 그런 풍경을 우리나라에서 보게 된 게 신기롭다고나 할까?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목련꽃이 활짝 핀 어느 이른 봄날, 사색에 젖었을 박목월 시인과는 달리, 난 강화나들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느림의 미학을 한껏 추구하면서...

▼ 온수리에 가까워지자 진행방향 저 멀리로 정족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년고찰 전등사(傳燈寺)가 들어앉은 명산이다. 나들길 3코스는 1시간쯤 더 투자해 전등사를 들렀다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체력은 16.2km인 기본코스만으로도 벅차다. 절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눈팅으로 끝내버리는 이유다.

▼ 이규보 묘역을 출발한지 50분 만에 온수리(길상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마니산과 전등사가 있는 남쪽의 중심지로, 강화읍에 이어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다. 조금 뒤 들러보게 될 ‘성공회 온수리성당’ 말고도 9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양조장 건물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시내로 들어가자 ‘면사무소’가 손님을 맞는다.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한 ‘길상면’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주요 볼거리로 보물을 3점이나 보유한 전등사,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지방기념물인 이규보 선생의 묘, 사적 225호인 초지진, 지방 유형문화재인 온수리 성공회성당을 꼽을 수 있다.

▼ 온수리 성공회성당은 시가지를 지나야 하는 탓에 찾는 게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길가는 이를 붙들고 물어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웬 뚱딴지같은 풍경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는 게 아닌가. 서양풍의 건물을 예상했는데 난데없이 ‘솟을대문’이 나타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정에 종이 매달려 있다. 고단한 삶의 위로를 받고 싶은 이들은 저 종소리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을 마감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은 종소리를 듣고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처럼...

▼ 본당인 ‘성 안드레성당(유형문화재 52호)’도 역시 전통 한옥이다. 1906년에 지은 이 건물은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교회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서양 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과 저항감을 없애려고 일부러 한옥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9칸의 본당과 1칸의 문루(종탑)으로 이루어졌다. 참! 솟을대문 앞에 있는 한옥 사제관도 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었다.

▼ 외형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내부 공간은 유럽의 교회 건축양식을 사용해 동서의 조합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이 성당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 옆에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성베드로성당’이 있다. 2004년에 새로 지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풍성하다고 알려져 있다.

▼ 뭔가 볼거리가 더 있을까 해서 마당을 둘러보는데 150살이나 묵었다는 소나무가 기형적인 외모를 자랑하며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이라면서도 ‘성모상’이 눈에 띄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혼을 원하는 영국 왕 ‘헨리 8세’가 이를 반대하는 로마 교황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 세운 교회가 ‘성공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겠지?

▼ 이곳에서도 독립유공자의 기념물을 만날 수 있었다. ‘조광원 노아신부 독립운동 기념비’와 ‘김여수마태 독립운동순국비’이다. 1931년 사제품을 받은 조광원 신부(1897-1972)는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과 함께 박용만이 설립한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여수 마태’는 독립운동가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22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이다. 1991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성당을 둘러봤다면 이제 온수리 버스승강장을 갈 일만 남았다. 이때 온수리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 강화읍이 강화도 북쪽의 중심축이라면 온수리는 남쪽의 중심지이다.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라는 얘기다. 하지만 강화도 자체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아선지 한가로운 시골 읍내의 풍경을 보여준다.

▼ 날머리는 온수리버스승강장(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예스런 멋이 퐁퐁 풍기는 간판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온수리 버스승강장’에 이른다. 고층빌딩(기껏해야 4층이지만)이 즐비한 것이 온수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모양이다. 참! 스탬프보관함은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4.45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강화나들길 1코스(심도 역사문화길)

 

여행일 : ‘22. 3. 13(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일원

여행코스 : 강화버스터미널→동문→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강화향교→은수물약수터→북문→대산2리 마을회관→해온마을 입구→연미정(월곶진)→6.25참전용사기념공원→갑곶순교성지→갑곶돈(거리/시간 : 18km/ 실제는 16.69km를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첫 번째 코스인 ‘심도 역사문화길’을 걷는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 여기서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브랜드로 내걸었을 정도로 수많은 유적들을 품은 코스라는 얘기가 된다.

 

▼ 들머리는 강화버스터미널(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22)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곧이어 ‘알미골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면 트레킹이 시작되는 강화버스터미널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출발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관광안내소(대합실에 있다)에서 여권처럼 생긴 ‘도보여권(강화 전도·코스별 개념도·여행포인트·버스노선이 적혀있다)’을 무료로 나눠주니 챙겨가라는 얘기다. 이때 완주 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놓치지 말자.

▼ 전쟁이 날 때마다 늘 피난처가 되어준 강화도. 그러다보니 수많은 유적과 다양한 문화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강화의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자연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길이 ‘강화 나들길’이다. ‘나들’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대대로 사람들이 왕래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강화를 ‘나들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총 20개 코스에 310.5km로 이루어져 있다.

▼ 1코스의 이름은 ‘심도문화 역사길’이다. 강화터미널에서 출발해서 갑곶돈대에서 끝나는 길이 18km의 이 코스는 이름 그대로 강화의 문화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용흥궁과 고려궁지, 연미정, 갑곶돈대 등 수많은 문화유적들을 만나게 된다.

▼ 동북방향의 ‘알미골사거리(강화읍 갑곳리)’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버스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 오늘 걸으려는 ‘강화나들길’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란다.

▼ 나들길은 풍물시장 앞에서 도로를 건넌다. 그렇다고 어찌 강화의 명물 풍물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강화특산물(순무·속노랑고구마·인삼·사자발약쑥·화문석)도 구경하고, 밴댕이회에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길을 나설 요량으로 시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집이 하나도 없다. 참고로 강화 풍물시장은 상설 전통시장이 있지만, 날수로 2일과 7일에 오일장이 서서 또 다른 볼거리를 보여주기도 한단다.

▼ 노점 구역을 빠져나면 ‘알미골사거리’. 앱이 탐방로를 벗어났다며 난리다. 그렇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서쪽(강화군청)으로 방향을 틀어 ‘강화우체국’으로 가면 된다. 참! 이번 코스는 앱의 도움을 유난히도 많이 받았다. 둘레길 도반인 ‘즐산’님의 도움으로 지도를 다운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여러 곳에서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 사거리에서 우체국을 오른편에 두고 직각으로 꺾으면 탐방로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길을 나서기 전 생수 한 병과 간식은 필수.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면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좋다. 코스 중간에서는 식당을 찾기도 힘들고, 상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견자산(見子山, 아래 사진)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고려시대 고종이 몽골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를 그리워하며 저 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았단다. 아무튼 올라가는 것까지는 사양했지만 저곳은 1907년의 군대 해산 때 강화진위대가 의병운동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현충탑(한국전쟁 때 전몰한 강화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들을 추모)이 들어서 옛 사람들의 구국의지를 전해주고 있다.

▼ 길을 나선지 20분. 고개를 넘어서자 망한루(望漢樓)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1232년(고종 19년)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강화산성의 동문(東門)이다. 몽고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축조한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문), 첨화루(서문), 망한루(동문), 진송루(북문)의 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 동문을 빠져나와 용화궁으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을 가리키는 작은 팻말과 전봇대에 매달린 꼬리표를 따라 예스런 맛을 퐁퐁 풍기는 고샅길을 따르노라면 어느덧 잔디광장에 이른다. 광장의 주인은 700살이나 먹은 느티나무(강화군 보호수). 나잇값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부풀린 거대한 등치를 자랑한다.

▼ 잔디밭은 강화성당(성공회)의 옛터란다. ‘통제영 학당(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의 영국인 교관이 살던 관사였으나, 1897년 갑곶나루에 있던 ‘성 니콜라회당’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한국성공회 선교본부로 삼았단다. 이후 한옥성당이 신축되면서 ‘성 미카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이 되었다가, 대학을 서울로 이전하면서 터만 남았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424호)인 강화성당은 서구 기독교가 토착화되면서 나타난 산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다. 1890년 조선에 첫발을 디딘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는 강화도에서 첫 조선인 세례신자가 나온 것을 기념해 1900년 이곳에 한옥성당을 지었다. 뗏목을 이용해 두만강과 서해를 통해 운반해 온 백두산 소나무를 목재로 썼는가 하면,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와 솜씨 좋은 중국 석공까지 데려와 지었단다.

▼ 본당인 ‘천주성전’은 방주를 형상화했단다. 하지만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가 올라간 것이 영락없는 사찰이다. 조선의 전통 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했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외부는 절간을 연상시키지만 내부에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예배공간을 갖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와 토착화노력이 엿보이는 걸작이라 하겠다.

▼ 강화성당 옆에 위치한 용흥궁(龍興宮, 인천 유형문화재 제20호)으로 들어선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조선 25대 왕 철종(1849-1863)이 왕이 되기 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철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강화 유수 정기세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와집을 세운 뒤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의미로 ‘용흥궁’이라 이름 지었단다.

▼ 안으로 들어서면 ‘궁’이라는 이름이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왕이 되기 전에 잠시 살았던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가 물려받는 정상적 법통이 아닌, 추대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했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 용흥궁을 빠져나오면 ‘심도직물 터’다. 김상용(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선생의 순절비각 바로 뒤에 공장 굴뚝처럼 생긴 조형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옛날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인데, 공장건물은 오래전 헐리고 굴뚝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참고로 인천의 직물산업은 ‘넉살좋은 강화년’으로부터 시작됐다. 여자들이 중심이 된 가내수공업이 대규모의 직물공장으로 발전했고, 1960~70년대 전성기에는 5천여 명의 종업원이 21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단다.

▼ 심도직물의 옛터는 현재 ‘용흥궁 공원’으로 바뀌었다. 잔디광장과 야외무대, 바닥분수, 연못(mirror pond) 등을 설치해 주민을 위한 쉼터로 꾸며놓았다. 공원에는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도 세워놓았다. 3월18일에 시작된 강화지역의 삼일독립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읍내 장터에서 1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시작되고, 이후 모든 면과 리로 확산되어 4월초까지 지속되었단다.

▼ 공원은 울타리까지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려 고종황제의 ‘강도(江都) 행차’를 그림으로 그려 넣었는가 하면, 강화도의 옛 지도와 사진 등을 게시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 고려궁지로 가는 도중 ‘진무영 순교성지’에 잠시 들렀다.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던 군영으로,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했다. 이중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수많은 성직자 및 신자가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 오르막길의 끝 언덕배기(개성처럼 ‘송악산’이라 불렀다)에는 ‘고려궁지(사적 제133호)’가 올라앉았다.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서면 넓고 휑한 부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했던 외세 침략의 흔적으로 점철된 이곳은 아픔의 장소이다.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면서 39년(1232-1270)이나 머물렀으나 1270년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은 후 임금은 개성으로 환도했고 궁궐은 허물어졌다. 조선 인조 9년에 행궁이 다시 지어졌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로 고려궁지는 또다시 제 모습을 잃었다. 현재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인천시 유형문화재 25호, 아래 사진), 외규장각,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 동헌인 명위헌(明威軒, 편액의 글씨는 영조 때의 명필인 윤순이 썼단다)에 서면 밀랍인형들이 옛 관청의 위엄을 되살려준다.

▼ 궁궐은 조선 인조 9년(1631)에 다시 지어졌다. 행궁(왕의 행차 시 머무는 별궁) 말고도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다. 나라의 장서와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은 정조 때 지어졌다. 하지만 235년이 지난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을 빌미삼은 프랑스함대가 침범(병인양요)해 많은 책과 서류를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살라 버렸다.

▼ 건물의 내부는 현재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의 역사, 기록문화의 꽃 ‘의궤(국가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보고서)’, 빼앗긴 보물 ‘외규장각 도서’로 나눠 전시함으로써 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의 뜻과 자료적 가치 등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 의궤(모두 297권)는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5년 단위 임대’ 형식이란다.

▼ 종각도 들어서있다. 강화산성의 성문을 여닫을 때 치던 종인데,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1711년에 만들어진 ‘강화 동종(보물11호)’은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단다.

▼ 고려궁지를 나와 궁지 담벼락을 오른편에 끼고 돈다. 이후부터는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1코스(심도역사문화길)는 도심 골목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길은 휘어졌다 꺾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두어 차례나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걷고 있는 사람을 그려놓았다)가 애매했던 게 원인이다.

▼ 그렇게 8분쯤 더 걸으면 ‘강화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앞 건물은 ‘유림회관’. 나들길은 두 건물 사이를 지나간다.

▼ 강화여고를 지나면 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강화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34호)’가 길손을 맞는다. 향교(鄕校)라는 게 본디 공립 교육기관일지니 신구(新舊)의 교육기관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양새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케이스라고나 할까? 참고로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갑곶리와 서도면 등으로 이전했다가 17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 나들길은 향교의 담장을 따라 나있다. 그리고 두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도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만 믿고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니 엉뚱하게도 강화여고 기숙사(갑비랑 학사)가 나왔던 것이다.

▼ 조금 더 들어가니 강화여고 기숙사의 축대 밑에 ‘은수물 약수터’가 있다.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길어다 쓴 우물로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 해서 은수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우물은 넘치는 물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자세가 돋보인다. 아래쪽에 빨래터를 만들었는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족욕 좌대로 안성맞춤이겠다.

▼ 약수터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이정표는 종점까지 12.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처음 등장하는 숲길이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쭉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산길은 기숙사 뒤 산자락을 옆으로 짼다. 이어서 4분 후쯤 만나는 토성(土城, 이정표 : 북문 1.05km/ 서문)을 잠시 따르다가,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이정표 : 북문 920m/ 서문 900m)에서 또다시 오른쪽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크게 그리고 거꾸로 ‘갈 지(之)’자를 쓴다고 보면 되겠다.

▼ ‘이 뭣꼬?’. 나들길 이정표가 반사경을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성범죄 관련 뉴스가 도배를 하더니, 이젠 등산로에까지 저런 시설이 필요했던가 보다.

▼ 사부작사부작 밟히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진송루(鎭松樓)’, 즉 강화산성의 북문(北門)에 다다른다.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렸던 내성은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했다. 하지만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효종 3년(1652)에 이중 일부를 개축했다.

▼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북문’이라는 시판이 유독 눈길을 끈다.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강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역사와 문화, 풍물을 담은 ‘심도기행(沁都記行)’을 남겼다. 그러니 어찌 북문에 대한 노래가 빠졌겠는가.

▼ 탐방로는 성벽을 따라 북장대(北將臺)로 향한다. 하지만 난 이를 따르지 않고 그냥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북장대까지의 구간이 15코스와 중복된다는 얘기를 후미대장으로부터 귀띔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1코스 최대 난이도를 자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니 ‘똑 같은 길을 두 번 걷지 않겠다’는 핑계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 북장대를 생략한 덕분에 1구간에서 가장 빼어난 숲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도취되어 오읍약수(아래 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했다. 가뭄에 시달리던 주민과 몽골군을 피해 피난 온 이들이 향수를 달래며 마셨다는 그 유명한 물을 마셔보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참고로 오읍약수는 ‘다섯 오(五)’에 ‘울 읍(泣)’ 자를 쓴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강화 백성 모두가 울었다고 전해진다.

▼ 호젓한 산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후부터 나들길은 마을길과 들길, 산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따른다. 때문에 심심찮게 길이 나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표식들이 진행방향을 알려준다. ‘강화 나들길’이라고 적힌 나무판은 허리춤 높이에서 갈 방향을 가르쳐주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초록·노란 색 끈은 탐방로의 든든한 벗이다.

▼ 군내버스가 다니는 도로(대월로)로 나오자 ‘황선신 정려문’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황선신(黃善身, 1570-1637)은 병자호란 때 68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부중군을 맡아 100여명의 군사와 함께 갑곶진을 지키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한 충신이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까지 제향(祭享)된 분이니 한번쯤 들러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그곳(조금 전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난 갈림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에 있는 줄조차 몰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 나들길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 교회의 첨탑이 우람한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나는 ‘대산리 고인돌(인천시 기념물 31호)’이라는 또 하나의 유적을 놓쳐버렸다.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이라기에 더욱 아쉽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새로 놓인 듯한 48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자 이번에는 ‘대산2리’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나들길은 마을회관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 간간히 나타나는 민가를 만나가며 10분 정도 걷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한 구간이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길이 많이 헷갈렸다. 탐방로가 변경됐는지 지도와 이정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앱으로도 방향 찾기가 애매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길을 가다 나들길 표식(이정표나 리본)이 안보이면 되돌아 나오면 그만. 그 표식들이 하도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걸으면 산길이 끝나면서 ‘해온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하지만 민가는 두어 채가 전부다. 거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참! 강화읍을 벗어난 뒤로는 주민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인연과 만남도 또 하나의 여행일진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탐방로는 잠시 도로를 따른다. 하지만 50m쯤 떨어진 고갯마루에 이르자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붙는다. 초입의 이정표가 종점까지는 아직도 8.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호젓한 산길이 이어진다. 시야가 막혀 조망도 별로다. 대신 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분(‘해온마을’에서는 18분). 산길 구간을 끝낸 나들길은 ‘월곶마을’로 내려선다. 그런데 축구가족을 그려 넣은 저 벽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350년이나 묵은 향나무(보호수)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향나무를 울안에 둔 민가는 텅 비어있다. 강화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로 넘쳐난다는 점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 강화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아 터를 잡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이 집의 주인장은 일상화된 불편이 싫었던 모양이다.

▼ 이후부터는 아스팔트 포장길(연미정길)을 따른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 주차장과 관광안내소를 연거푸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호)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년)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 흐린 날씨 탓에 북녘의 풍경은 언감생심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 정국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니 북한 땅(황해도 개풍군 일대)은 고사하고 연무정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인다는 유도(留島)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는 섬 말이다.

▼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 보이지도 않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호)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이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 이제 나들길은 겹겹의 철조망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다. 자동차도로의 가장자리에 내놓은 자전거도로를 따르는데,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 10분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편을 가리킨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후미대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데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 또한 같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 연미정을 출발한지 45분.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그리고 공장 근처에서 아까 갈라져나갔던 나들길을 다시 만난다.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등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 하단에는 6.25 전쟁 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 강화대교 아래 ‘갑곶성지’의 후문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의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新)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舊)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호)’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년(1893년)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 나들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데크계단을 오르니 ‘구)강화대교’다.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 몇 걸음 더 걷자 ‘갑곶 순교성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이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는데 ‘開國의 聖域, 江華’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이 시선을 붙잡는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홍보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강화는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으로 상고시대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다가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다. 현재의 지명 강화는 940년(고려 태조 23) 이래의 것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로 승격되기도 했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죽산 조봉암선생의 추모비가 맞는다. 죽산은 강화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1889년 강화도 선원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죽산은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9년)나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그가 만든 진보당의 정강 정책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 죽산추모비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너른 주차장을 지나 전쟁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보존·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시설이다.

▼ 2코스의 스탬프보관함은 관광안내소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줄을 서있을까? 2코스인 ‘호국돈대길’은 2주 후에나 걷게 될 텐데 말이다.

▼ 경내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강화유수·판관·군수를 지낸 이들의 선정비가 대부분이지만, 삼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나 말에서 내리라는 개하마비(皆下馬碑) 같은 특이한 비들도 보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비석은 금표비(禁標碑)다. 가축을 방생한 자는 곤장 100대, 재를 버린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세운 시기는 계축년(1733년). 그렇다면 당시에도 자연보호가 사회문제화 되었다는 얘기일까?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 기념비’도 눈여겨 볼만하다. 기념비는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견해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음을 강조한다.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서는 금속활자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의미하는데, 이 활자는 진위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겼던 강도시기(1232-1270)에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빗돌을 살펴보다 문득 연수차 들렀던 독일의 ‘쿠텐베르그 박물관’이 떠오른다. 당시 나를 안내해주던 박물관장은 우리 한국이 자신들보다도 200년 가까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뿌듯했던지...

▼ 바닷가 언덕에는 ‘갑곶돈대(사적 제306호)’가 있다. ‘돈대’란 해안가·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의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이 돈대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상륙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갑곶’이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돈대에 서면 강화해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 아래 어디쯤엔가는 ‘갑곶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강화를 오가던 길목 말이다. 정묘호란(1627) 때 인조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건너왔던 나루였으며,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갑곶나루도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역사의 저 너머로 물러났다.

▼ 1977년 보수·복원되었다는 돈대에는 소포(小砲)와 불랑기(佛狼機)를 놓아두었다. 대포(大砲)는 아예 전각까지 지어 전시하고 있었다. 돈대와 대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증거가 아닐까?

▼ ‘전쟁박물관’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임시 휴관이란다.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돈대에서 내려오다 커다란 ‘탱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이가 400살이나 먹었다는 저 나무는 피침(被侵)의 역사를 전해주는 산증인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섬 주위에 성벽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접근을 막았다니 말이다. 국토방위 유물로서의 역사성과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라는 특이성이 인정되어 천연기념물(7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트레킹을 마치고 근처 특산물 가게를 찾았다. 모처럼 강화에 왔으니 특산물 하나쯤은 사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강화의 특산물로는 섬쌀과 순무, 속노랑고구마, 인삼, 사자발약쑥, 화문석 등이 꼽힌다. 그중 내 지갑을 열게 한 것은 ‘순무김치(2만5천원/1통)’. 갑장인 차사장이 일러준 흥정비법을 살려 꽤 많은 양의 ‘속노랑고구마’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영주 무섬마을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산행코스 : 주차장→무섬마을→제2외나무다리→산길(전망대)→외나무다리→환학암→주차장(거리/ 소요시간 : 의미 없음)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영월 선암마을’처럼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영주천을 보탠 내성천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면서 육지속의 섬을 만들어놓았다.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나머지 한 면은 소백산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버린 것이 영락없이 섬(島)인 것이다. 고립이 역설적으로 보존을 낳았다. 문화재로 등록된 집만 해도 만죽재와 해우당 등 아홉 채나 된다. 특히 ‘ㅁ’자형 가옥, 까치구멍 집, 겹집, 남부지방 민가 등 다양한 구조의 가옥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국가 중요민속문화재(제2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돗밤실둘레길에 이은 탐방이기에 이산면사무에서 출발한다. ‘이산로’를 이용해 용암교차로(영주시 하망동)까지 온 다음, 좌회전하여 조암교차로(영주시 조암동)로 온다. 이어서 ‘조암교’로 원당천을 건넌 다음 문수로(초입부분은 ‘간운로’란다)로 옮겨 10km쯤 들어가면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수도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대형버스를 위해 도로 오른편에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해 놓았으니 이를 이용하면 된다.

▼ 탐방로는 마을길(녹색)과 트레킹길(점선)로 나뉜다. 하지만 길이란 길을 모두 걸어도 2시간이 채 안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도교를 건너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제2무섬외나무다리(오른편)를 건너 트레킹길을 따라 원점회귀 하는 것을 추천한다. 집결지로 돌아오는 도중에는 무섬외나무다리(왼편)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춰 ‘인생샷’을 건져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 주차장을 빠져나와 동쪽(왼쪽), 그러니까 내성천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무섬마을로 들어가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콘크리트 다리지만 이 다리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한다. 30년 전,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외나무다리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다니 말이다. 장마철만 되면 다른 지역과의 길이 끊기다가 다리가 놓이면서 그게 해소되었으니 어찌 보배롭지 않겠는가.

▼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왼편으로 갈려나와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방향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탐방객들을 위해 내놓은 ‘트레킹 길’로 탐방을 마친 다음 저 길을 이용해 원점회귀하게 된다.

▼ 다리에서 내려다본 내성천(乃城川, 내성은 봉화의 옛 이름이다)의 물 흐름은 고즈넉하다. 소백산 줄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마을 뒤편에서 서천(영주천)을 만나 무섬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그 물길은 환학정(喚鶴亭) 앞에 이르러 물살을 살짝 죽이고 모든 흐름을 안으로 감춘다. 한없이 고즈넉하게 보이는 이유다.

▼ 다리를 건너자 잡다한 안내판이 길손을 반긴다. 이 가운데 무섬마을에 대한 설명판과 가옥배치도는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개념도 정도는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반남 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 김씨’ ‘김대’가 들어왔으며, 지금까지도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단다. 마을은 현재 약 48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그중에서도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 이정표는 34.6km나 떨어진 ‘소수서원’까지 표기하고 있었다. 이왕에 왔으니 주변 관광지까지 두루두루 보고 가라는 모양이다. 그래선지 시 단위의 관광안내판도 두엇이나 세워놓았다.

▼ 정보가 더 필요하다면 안내판 뒤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가볼 일이다. 무섬마을뿐만 아니라 영주권역의 자료까지 얻어 볼 수 있다.

▼ 기초 자료를 얻었다면 이제 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마을의 왼편 끄트머리에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다.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의 서당’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화진 주도로 1928년 문을 열어 1933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문맹퇴치와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쳤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되풀이하고도 끝까지 영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단다.

▼ 김희규 가옥으로 여겨지는 초가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치류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그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 치류정(峙流亭)은 앞면 2칸 규모의 작은 정자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서당이었던 아도서숙과 함께 마을사람들이 후학을 양성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치류정’이 ‘예안 김씨’의 입향조인 ‘김대’의 호라서 문화재가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에 대한 안내판이나 기록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마을에는 ‘무섬식당’이란 음식점도 들어서 있었다. 메인 메뉴는 ‘무섬정식’. 하지만 청국장이 더 인기가 높단다. 주인이 직접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청국장을 만들어 식사를 내놓는데, 손님의 대부분은 야외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구조이다.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에 딱 맞는 시스템이라 하겠다. 마침 맛까지 훌륭하다니 끼니때라도 되었다면 출출해진 배를 채워볼 일이다.

▼ 무섬마을은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이다. 그러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음식 하나쯤 없겠는가. 한옥민박을 겸하고 있는 ‘김갑진 가옥’인데, 메주와 된장, 부석태청국장 등 전통식품을 팔고 있었다.

▼ ‘김영석 가옥’의 옆 공터에는 꽤 많은 장독이 오와 열을 맞추며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에서 팔고 있는 제품이 제법 입소문을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근처에는 주실고택(김한직 가옥)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가옥에 대한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한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뿐.

▼ 마을의 맨 안쪽에는 김기현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백송당(白松堂)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다는 의미인 듯.

▼ 입구에서 마당까지 공간에는 눈길을 끄는 조형물과 분재 같은 희귀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주인장의 고상한 취미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 하겠다.

▼ 강변으로 되돌아오면 이번엔 ‘해우당 고택(海愚堂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2호)’이 반긴다. 무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만죽재’라면 가장 큰 집은 ‘해우당’이다. 수도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ㅁ’자 형의 집인데, 이는 남녀를 구분하는 유교의 생활 원리를 반영한 구조란다. 개방적인 공간인 사랑채는 남성, 폐쇄적인 공간인 안채는 여성이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 해우당 고택은 1830년 예안김씨 입향조 김대(金臺, 1732-1809)의 셋째 손자 김영각(1809-1876)이 짓고, 1876년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金樂灃, 1825-1900)이 중수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형 기와집으로 중앙에 안마당. 앞쪽에 ‘―’자 모양의 사랑채, 뒤쪽에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해우당이란 편액은 그의 정치적 조언을 받던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다.

▼ 해우당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퇴정(淸退亭)이 나온다.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돌로 지은 정자는 무섬마을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마을로 지정되면서 단청을 입혔는데, 이게 시멘트로 지었다. 중국 냄새가 난다는 등 꽤 구설수를 탔던 모양이다. 그게 억울했던지 처음 지었을 당시의 사진을 대문 앞에 걸어놓고 있었다.

▼ 정자 아래에 세운 시비에는 오헌의 한시 오헌유거(吾軒幽居, 조용한 나의 삶)가 새겨져 있었다. <평온한 시냇가 한 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맑은 모래밭엔 해오라기 평온하네/ 산 빛은 마땅히 나의 집 비추고/ 물굽이 감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 듯/ 어부와 나무꾼 이야기도 끝나기 전/ 어느새 둥근달 누각 위에 떠 있네>

▼ 만운고택(晩雲古宅)으로도 불리는 ‘김뢰진 가옥(金賚鎭 家屋, 경북 민속문화재 제118호)’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살림집의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라는데 아쉬운 일이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입구에 ‘김성규 가옥’이라는 안내판 하나를 더 세워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김성규는 일제강점기 김화진과 함께 아도서숙을 세우고 농촌계몽과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그는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김성규가옥은 현재 무섬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가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꼬불꼬불한 마을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고즈넉했다. 고택이라 하여 큰길을 차지하지 않고, 가옥이라 하여 막다른 골목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자연의 고즈넉함을 닮은 길과 집을 만날 수 있다. 어느 지역신문 기자는 이런 풍경을 ‘고즈넉함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무섬의 고즈넉함은 느림의 미학을 넘어선다면서 말이다.

▼ 수춘재(壽春齋)라는 편액을 단 ‘김태길 가옥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수춘재 옆은 비교적 큰 규모인 ‘일계고택(逸溪古宅)’이다. 이 집은 조금 특이하다.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사랑채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툇마루를 넓게 만들어 누마루 같은 느낌을 준다.

▼ 다음은 ‘섬계고택(剡溪古宅)’이다. 섬계는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박제익(朴齊翼, 1806-1841)의 호이다. 지금은 ‘김동근 가옥’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집에서도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섬계고택 안쪽에는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 고택(晩竹齋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3호)’이 있다.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한 ‘반남 박씨’ 입향조 박수(朴檖, 1641-1709)가 1666년(헌종 7년)에 지은 집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지을 당시는 섬계초당(剡溪草堂)이었으나, 박수의 8대손 만죽재 박승훈(1865-1924)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로 고쳤다. 이 집도 역시 ‘ㅁ’자 형의 구조로 되어있으며, 웅장하지는 않지만 종택답게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추었다.

▼ 무섬마을은 농지, 우물, 담과 대문, 사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겠는가. 아래 사진처럼 예쁜 담이 이웃에 정과 옛집이야기를 실어 나르기도 한다.

▼ 무섬마을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까치구멍집’이다. 지붕 용마루 아래에 까치집처럼 작은 구멍(공기를 통하게 하는 용도)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유형인데, 대문만 닫으면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앞부분의 봉당(封堂)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을 두고, 우측에 부엌을 두었다. 뒷부분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을 두고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 ‘박천립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4호)’은 카페로 성업 중이었다. 간판은 집의 외형을 담아 ‘초가 카페’라 내걸었다. 우리네 재래 차와 커피를 팔고 있는데, 대부분이 3천원이고 비싸봐야 5천원(대추차)이니 가격도 저렴한 편. 배라도 출출할라치면 사발면(2천원) 한 그릇 비우고 가면 될 일이다.

▼ 다음에 만날 곳은 ‘무송헌 종택(撫松軒 宗宅)’이다. 무송헌이란 당호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1923년에 지어졌으며, 당호는 문중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김담의 아호에서 따왔다. ‘김광호 가옥(金光昊 家屋)’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있다가 얼마 전 김담의 종손인 주인장 내외가 집을 보수한 뒤 살기 시작했단다.

▼ 마을 안내도는 이집을 ‘종택(宗宅)’이라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마당 한켠에 사당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별도로 지어져 있었다. 이 또한 무섬마을 사무(四無)의 예외라 할 수 있겠다.

▼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의 고택은 그의 호를 따 ‘오헌(吾軒)’이 되었다. 오헌이란 바로 우리 집이란 뜻. 내 집에 내가 산다는 의미인데 원래는 도연명이 ‘새들도 깃들 곳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 개방파 관료인 박규수가 썼다. 현 거주자인 후손의 이름을 따 ‘박정우 가옥’으로도 불린다.

▼ 맨 끄트머리 산자락에는 섬계 박제익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교류하던 ‘섬계초당(剡溪草堂)’이 있다. 박제익은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진 문장가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했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나저나 건물을 눈앞에 뻔히 두고도 찾아보지는 못했다. ‘만죽재’의 부속 건물인데도 다른 곳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니 어찌 그게 가능했겠는가.

▼ ‘아석 고택(我石 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117호)’은 1885년에 ‘반남 박씨’ 가문에서 지었다고 한다. 1910년대 ‘예안 김씨’인 김낙기(입향조 김대의 증손)가 매입하면서 소유주가 바뀌었다. ‘김덕진 가옥’으로도 불리는데 ‘아석’이란 당호는 김낙기의 손자인 ‘김원규’의 호에서 따왔단다.

▼ ‘김위진 가옥’은 ‘조은 구택(釣隱 舊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360호)’이라고도 불린다. 1893년 이 집을 지은 김휘윤의 호를 당우의 이름으로 삼았다.

▼ 월미산 초당(月美山 草堂)이라고도 불리는 ‘김규진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1호)’은 까치구멍집이다. 원래의 집이 수해로 떠내려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6칸(앞3×옆2) 집으로,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 무섬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장작을 두둑이 쌓아놓고 있었다. 집집마다 겨울에 장작불을 때기 때문이란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좋아해서라는데, 하긴 겨울 난방으로 온돌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 돌담이 예쁜 ‘금강초당’은 담장 너머로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쁘게 꾸며진 내부가 무척 궁금했지만 주인이 싫어하니 참을 수밖에...

▼ 고색창연한 고택들은 현재 전통을 이어가는 후손들이  기거한다. 그래서 집집마다 오랜 삶의 향기가 배어나고, 동네는 친근한 고향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선지 주말이면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용한 마음의 힐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마을 끄트머리에는 마을의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중 한옥체험수련관은 무섬마을의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행사운영, 단체손님의 숙박을 위한 시설이다. 80-10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공간과 현대식화장실, 샤워시설, 족구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도자기와 염색체험 및 사군자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단다.

▼ ‘무섬자료전시관’도 있다. 조선 후기에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내력을 설명해 주는 곳이다.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내부에는 마을이 배출한 주요 인물들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 전시관 앞에는 조지훈의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었다. 처가 앞 강변을 한없이 거닐며 마음껏 시정 펼쳤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시비에는 별리(別離)라는 시를 새겨놓았는데 아내를 무섬에 남기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았다. 참고로 조지훈이 무섬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 이곳으로 장가를 오면서부터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무섬 출신 김위남(필명 김난희)과 결혼한 그는 방학 때마다 내려와 시심(詩心)을 일구었다고 한다.

▼ 자료전시관 앞에서 이번에는 냇가로 내려선다. 이곳 무섬마을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외나무다리’를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무섬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외나무다리다. 마을과 강 건너를 잇고 있는데, 시집올 때 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린 다리다.

▼ 저 외나무다리는 콘크리트로 새로운 다리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보따리장수나 다른 곳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수도교 건설(1983년)과 함께 사라졌던 외나무다리는 최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단다. 참! 저런 다리는 옛날 3개가 있었다고 한다. 영주시장 갈 때 이용하던 게 하나고, 지금 수도교 쪽에 있던 다리는 학교 갈 때 건너던 길이었단다. 나머지 하나는 들에 일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던 ‘놀기미다리’라고 한다. ‘놀기미논’으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란다.

▼ 저렇게 좁은데 오가는 사람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외나무다리 중간마다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수 있도록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를 놓았다. 마주 보고 건너던 사람들은 비껴다리에서 서로 길을 양보했단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쉽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마는. 오죽했으면 ‘무섬마을에 시집오면 죽어서야 상여를 타고 나갈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 다리는 폭이 30센티에 불과하다. 때문에 긴 장대에 의지한 채 건널 수밖에 없었단다. 그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들은 다리를 건너다 심심찮게 빠지곤 했단다. 그래서 무섬을 드나들 때는 마음 수양부터 하고 건너야 한다고 했다나? 그렇다면 함께 투어를 하고 있는 이석암 선생은 양팔을 쫙 벌린 채로 심신수양을 하는 모양이다.

▼ 강 건너에 이르러서는 ‘둘레길’을 따르기로 했다. 내성천 건너의 산줄기를 따라 내놓은 이 둘레길은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m)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복두산·학가산·보문산·나부산 등을 일구고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 114.5 km의 산줄기이다. 그러니 무섬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 그런데도 문수지맥이란 이름표를 달아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잠시 후 무섬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처를 만났다.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만들어내는 멋진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이 ‘둘레길’을 놓치지 말라는 전화연락까지 해왔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가는 멋진 모양새이다. 마을은 파란 물과 하얀 모래밭이 빙 둘러 감싸고 있는 것이 흡사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풍수에서는 저런 지형을 연화부수(蓮花浮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로 꼽으며 길지 중의 길지로 친단다.

▼ 유연하게, 그것도 상큼한 솔향기까지 맡아가며 걷는 호사스런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탐방로는 이제 강변을 따른다. 그리고 오른편에 무섬마을을 두고 걷는다. 무섬의 옛 지명은 ‘섬계(剡溪)’다. 마을이 안도라는 선비가 살던 중국의 섬계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고을 이름 섬(剡)’ 자이니 물가에 가깝게 있는 동네가 아니겠는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딱 어울리는 지명이라 하겠다.

▼ 둑에서 내려다보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굽은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이 마을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내성천이 ‘C‘자 모양으로 굽으며 마을 앞을 널찍하게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현상이라는데, 그 안쪽에서 잠든 듯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바로 무섬마을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외나무다리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정자와 벤치를 갖춘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섬마을 가옥배치도와 함께 문수지맥트레킹길 안내도를 세워 이방인들의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 쉼터 주변에는 시판(詩板)을 세워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도현의 ‘우물’과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나희덕의 ‘어느 봄날’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과 시도 여럿 보인다. 그 가운데 권서각 시인의 ‘꽃은 피고 물은 흐르고’라는 작품을 올려본다. 술과 안주, 거기에 인심까지 좋다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 강변으로 내려가면 내성천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황금빛 모래가 흐르는 강. 저 내성천이 휘감아 돌면서 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저 강은 무섬마을 사람들에겐 지난한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외부로 나가기 위해 나무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또 물길에 순응하도록 뱀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장마철이면 불어난 물에 다리가 떠내려가는 탓에 해마다 새로 놓기까지 했다.

▼ 다리는 절반으로 쪼갠 통나무를 하천 위에 얹어 만들었다.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하천 바닥에 깊숙이 박은 게 교각이다. 하지만 폭이 좁아 건너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이 다리를 건너 학생들은 학교에 다녔고, 외지로 시집가는 처녀들은 꽃가마를 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는 딸의 고된 시집살이보다도 가마가 물에 떨어지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을 것이다. 주민들 생의 마감도 이 다리였다. 평생 섬마을에 살다 눈을 감은 어르신들을 실은 꽃상여도 이 다리를 건너갔단다.

▼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올라가 걸어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리 곳곳에 교행이 가능하도록 쪼갠 통나무 한쪽을 덧붙여놓아 길이 막히는 일도 없다. 여름철에는 저 대피 공간에 앉아 양말을 벗고 내성천 흐르는 물에 다리를 적실 수도 있겠다.(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

▼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는 둘레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아까와는 달리 이 구간에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을 내지 못할 정도로 비탈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섬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그렇게 잠시 걷자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환학암(喚鶴菴)’이라는 옛집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 듣고 절집(庵子)으로 판단하지는 마시라. ‘가릴 엄(奄)’자가 ‘풀 초(艹/艸)’를 뒤집어썼으니 ‘우거질 암(菴)’자가 된다. 푸른 숲에 가린 집. 즉 경관 좋은 곳에 들어선 정자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환학(喚鶴)’은 박경안(朴景顔, 1608-1671)의 아호(雅號)라고 한다.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朴檖)의 아버지인데, 후손들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그를 추모하고 있단다. 자신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잘못된 점이라도 있을라치면 꾸짖어달라는 바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 정자 앞에 서자 내성천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널따란 모래사장이 겨울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데, 문득 아까 시비에서 보았던 별리의 싯구가 떠오른다.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하지만 무섬마을은 1970년대에 쌓았다는 제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펴보던 조상의 눈을 가려버렸다고나 할까?

▼ 날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원점회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수도교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도로로 올라서면 무섬마을 탐방은 끝을 맺는다.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진다는 무섬마을을 모두 둘러본 것이다. 결론은 대만족이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을 머금은 천혜의 자연경관. 드넓은 모래사장과 그 위를 유유히 흐르는 맑은 내성천의 은은한 풍광을 실컷 눈에 담았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을까?

영주 돗밤실 둘레길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산행코스 : 이산면사무소→망월봉→약수봉→출렁다리→제비봉→흑석사→명학봉→묘봉→이산면사무소(거리/소요시간 : 5.81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영주의 트레일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백산 자락길’로 대변된다.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을 단위의 둘레길도 여럿 나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돗밤실둘레길’이다. 돗밤실의 어원은 마을주변에 졸참나무가 많다는데서 유래했다. 굴밤(도토리)은 돼지밤이라고도 불리며 윷판에도 나오는 도(돗)는 돼지의 옛말이다. 이게 마을 이름(꿀밤마을)을 거쳐 둘레길로 변한 것이다. 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망월봉·약수봉·흑석사·제비봉·명학봉·묘봉을 거쳐 이산치안센터로 이어지는 약 5㎞ 남짓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 탐방로도 무척 곱다. 전형적인 육산의 보드라운 흙길에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보니 경사 또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간에 출렁다리가 둘이나 있어 스릴까지 더할 수 있다. 항간에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이산면사무소(영주시 이산면 원리 445)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이용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까지 온다. ‘영주로’로 옮겨 시내 중앙시장 앞 사거리까지 간 다음 우회전하여 농어촌공사 앞 사거리로, 이곳에서는 좌회전하여 935번 지방도를 탄다.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국제조리고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영봉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산면소재지인 원리에 이르게 된다. 면사무소 주차장이 둘레길의 들머리이다.

▼ 둘레길은 면사무소(지도의 ‘현위치’ 지점)를 기점으로 하는 순환형 코스이다. 이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단축코스를 보탰다.

▼ 산비탈에 기대놓은 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초입에 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계단의 맨 위는 종탑으로 장식했다. 종이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 지서에서 의용소방대를 소집할 때 치던 종이었다니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런 소중한 내력을 그냥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면사무소에서 보관해오다 돗밤실둘레길이 완공되면서 ‘행복의 종’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이 종을 울리면 맑고 은은한 종소리가 행복·건강·사랑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안내판은 종소리를 ‘한 번 울리면 장수, 두 번 울리면 건강, 세 번 울리면 부자, 네 번 울리면 출세, 다섯 번 울리면 자손번창’이라 적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씩이나 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줄을 서는 게 싫은 나는 그냥 통과해버리고...

▼ 탐방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 명품 둘레길이 어디 그리 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길을 깔끔하게 닦은 것은 기본. 갈림길은 물론이고 중요한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세웠는가 하면, 조그만 공터라도 나올라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꽃밭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정성들이 모여 만들어 낸 둘레길이니 저런 경고판이 아니더라도 심어놓은 꽃을 꺾거나 뽑아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 그렇게 얼마간 걷다가 만난 삼거리.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의 제안에 따라 왼편으로 들어서 본다. 이정표(망월봉/ 이산면사무소)에는 방향표시가 없지만 뭔가가 있기에 앞서가는 사람들이 다녀오지 않겠느냐며...

▼ 그의 말대로 멋진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달을 형상화한 의자인데, ‘달맞이 포토존’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조형물에 앉아 느긋하게 일몰을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참! 조형물 뒤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너머의 '이산문화마을'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둘레길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이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착한 길이다.

▼ 길을 나선지 20분 만에 망월봉(望月峰, 232m)에 올라선다. 쉼터를 겸하고 있는 정상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것 말고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정표(약수봉 0.7㎞/ 면사무소 0.6㎞)와 함께 세워둔 정상표지판이 그 흠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 망월봉은 ‘은혜를 갚은 토끼’를 위한 봉우리이다. 올가미에 걸린 토끼를 구해준 효자 성진이가 토끼의 도움으로 좋은 집을 짓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달님에게 드릴 떡을 만들며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해서 망월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엉성한 스토리텔링이지만 이만치라도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 망월봉을 지난 탐방로는 민가가 있는 바닥까지 뚝 떨어진다. 이 근처 ‘돗밤실’ 마을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했다. 공자가 노(魯)나라 사람이고, 맹자가 추(鄒)나라 사람인 데서 유래한 말로 학문과 교육이 흥성한 지방을 가리킨다. 그래선지 안동 권씨의 세거지인 마을에는 경북도 문화재자료(632호)인 ‘도율종중고택(道栗宗中 古宅)’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앱을 아무리 검색해도 돗밤실이나 도율종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능선이 평지나 마찬가지기에 시간을 내어 다녀오려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민가(컨테이너 가건물)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데 귀엽게 생긴 팻말이 눈에 띈다. ‘맥문동’의 특성과 효능을 적는 등 가족나들이 삼아 찾아올 수 있도록 하려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

▼ ‘돗밤실둘레길’이 항간의 입소문을 탔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기에 저렇게 나무뿌리까지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을까.

▼ 망월봉에서 12분이면 약수봉(藥水峰, 261m)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다. 그저 밋밋한 능선에 약간 솟아오른 정도라고나 할까? 이정표(조개재 0.5㎞/ 망월봉 0.7㎞)와 정상표지판 말고도 벤치 서너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것도 망월봉과 똑 같다.

▼ 약수봉은 ‘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옹달샘’이 있다는 봉우리다. 옛날 어느 여인이 이 봉우리에서 찾아낸 약수로 아들의 피부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일 동안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으면 신선이 된다는 얘기에 솔깃해 샘물을 막아 가둔 탓에 마을에 물난리가 났다나? 그래서 산신령은 두 모자를 거북바위로 만들어버렸단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물길을 텄다는 우물과 거북바위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 끊임없이 솔숲을 걷는다는 것도 ‘돗밤실둘레길’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피로가 쌓일 틈도 없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완주 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스탬프는 들어있지 않았다. 작은 흠이라 하겠다.

▼ 길은 또 다시 긴 내리막길로 변한다. 평지에 가까운 안부로 내려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봉에서 내려선지 10분 만에 ‘조개재(蛤峴)’에 닿았다. 면소재지인 원리(오른쪽)와 석포리(왼쪽)를 잇는 고갯마루로 ‘흑석고개(이정표 : 흑석사↑ 0.6㎞/ 흑석쉼터→ 0.2㎞/ 이산면사무소↓ 2㎞)’라고도 불리는데, 이 근처에 ‘검은색 바위(黑石)’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고개에는 최근 출렁다리가 놓였다. 현수교 양식의 보행자 전용 다리로 길이는 65m(폭은 2.6m)라고 한다.

▼ 출렁다리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출렁거림이다. 스릴로 인한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또 다리 위에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짜릿함은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 출렁다리는 별로다. 출렁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 출렁다리 아래로는 차도(2차선 郡道)가 지나간다. 저 길(흑석사 옛길)은 또 흑석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했다.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으로부터 전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흑석사로 내려가는 산길을 만나게 된다는데 삭막하기 짝이 없는 포장도로를 일부러 걸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비록 잠시지만 ‘자개지맥(紫蓋枝脈)’을 따른다. 이 지맥은 명학봉에서 둘레길과 헤어진다. 참고로 자개지맥이란 백두대간의 고치령(소백산) 동남쪽 1.1km 지점의 ‘920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해서 자개봉(紫蓋峰 858.7m)·천마산·국모봉·박봉산·유릉산 등을 일구고 문수면(영주시)의 승문리 서천(西川)과 내성천(乃城川) 합수점(무섬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48.4km 길이의 산줄기이다.

▼ 출렁다리에서 10분쯤 걸었을까 흑석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이산치안센터↑ 2.3㎞/ 흑석사← 0.3㎞/ 흑석쉼터↓ 0.7㎞)’가 나왔다. 아까 윤대장이 전화로 알려주던 지점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제비봉(268m)’을 만났다. 윤대장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봉우리다. 이곳도 이정표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의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 제비봉은 ‘사람의 이마에 집을 지은’ 제비의 이야기다. 제비집을 이마에 얹고도 좋아했다는 노인은 어쩌면 성인군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제비의 집터로 점찍어 준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그래서 이 봉우리는 재물의 기운이 넘쳐난단다.

▼ 흑석사로 내려가는 능선은 꽤 길었다. 왼편 발아래에 흑석사를 놓아두고도 빙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 그게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그네까지 매달아 도리어 멋진 구간으로 바꾸어버렸다.

▼ 산길이 끝나는 곳은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정성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한 저 탑은 산행의 안전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절간을 찾는 이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것일까?

▼ 산에서 내려서니 일주문이 반긴다. 그런데 이게 영 낯설다.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어야 할 편액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에 살펴봤으나. 절의 내력과 보유 문화재(국보 1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 1점)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 몇 걸음 더 걷자 흑석사(黑石寺)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흑석사는 신라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이후 1945년 상호스님(1895-1986)이 초암사의 부재를 옮겨와 중건하였으며, 1950년에는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에 있던 아미타불좌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 흑석사는 총 세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는 종무소와 요사. 두 번째는 본당과 극락전, 그리고 맨 위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들어섰다. 볼거리가 있는 두 번째 단부터 투어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썰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편액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치나 크기로 보아 본당(本堂)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 내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맞다. 이 절은 현재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법천사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의 배 안에서 나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부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어 모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극락전(極樂殿)은 본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있다.

▼ 이곳은 정암산 법천사(동명의 사찰이 많아 정확한 위치는 불명)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다. 한국전쟁을 피해 잠시 초암사로 옮겼다가 다시 이 절로 옮겨 모시고 있단다. 저 부처님은 복덩어리라 할 수 있다. 개금불사 때 불상의 배 안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이 진신 사리와 사리함, 경전과 유품은 현재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 아미타여래좌상(신발 벗기가 싫어 패스한 뒤 문화재청의 것을 빌려왔다)은 목조불상으로,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는데,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보살폈던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효령대군, 왕실종친, 장인, 스님 등 275명이 시주자로 이름을 올렸단다. 불상은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명나라 불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란다.

▼ 맨 위는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올라앉았다. 전각의 좌우에는 소조산신상과 소조불상이 시멘트로 만든 감실 안에 모셔져 있다. 산신각과 칠성각이 아닐까 싶다.

▼ 전각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내 사진이 별로여서 문화재청의 것을 옮겼다)’은 흑석사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옮겨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라는데,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문화재청의 글을 옮겨본다. <얼굴은 양감이 적절하고 전체적으로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어깨가 약간 움츠려 들었고, 무릎 폭이 좁아진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나타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양 발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 석불의 뒤, 자연암벽에 새겨놓은 마애삼존불도 경상북도의 문화재(355호)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돋을 기법으로 새겼는데, 본존불은 가슴 이하를 그리고 두 협시보살은 목 부분 이하를 생략해버린 특이한 모습이다. 신체 일부분만 새겨져 있지만 원형이 대체로 잘 유지되어 있으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게 싫어 무작정 산자락을 치고 올라봤다. 그리고 100m도 되지 않는 지점에서 희미하나마 산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잠시 후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도톰하게 솟아오른 한 지점일 뿐인데도 낯익은 표지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모두 올라보겠다는 그네들도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비봉’을 잘못 찾았다. 아까 삼거리에서 흑석사로 내려가는 초입에 관청에서 만든 정상표지판이 버젓이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둘레길을 따른다.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난 돗밤실둘레길 특유의 산길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또 다른 출렁다리인 ‘송천교(松泉橋)’가 나온다. 소나무(松) 밭에 샘(泉)이라니. 이 부근에 아까 약수봉에서 거론하던 그 영험한 옹달샘이라도 있다는 얘기일까?

▼ 다리는 거짓말 좀 보태 넓이 뛰기 한 번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짧다. 밧줄에 매달아 놓았으니 외형도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출렁거림만큼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출렁다리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게 없었다.

▼ 다시 길을 나서는데 밋밋한 능선을 걷는 게 지루했던지 함께 걷던 이가 말을 건네 온다. 이곳 이산면(伊山面)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났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론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맞다. 옛 문헌에 보면 ‘山伊의 이(伊)자 ‘尹’은 천하를 다스림이며, ‘人’을 덧붙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伊’는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곳’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박봉산 갈림길(이정표 : 명학봉↑/ 박봉산←/ 제비봉↓)’이다. 높이 389m의 박봉산(璞峰山)은 영주지역에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아 새해 첫날에는 해맞이 행사가 열리기도 한단다.

▼ 삼거리에서 6분. 자개지맥과 다시 헤어지는 지점인 명학봉(鳴鶴峰, 278,7m)에 올라섰다. 이곳도 이정표(묘봉 1㎞/ 제비봉 0.8㎞)와 정상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명학봉은 ‘돌을 물어 나르는 학’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다. 산속의 새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내느라 다들 바쁜데, 학만은 묵묵히 돌을 물어다 탑을 쌓더란다. 그때 독수리가 나타나 새 사냥을 시작했는데도 학만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시끄러울 때일수록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나?

▼ 자개지맥과 헤어진 둘레길은 이제 묘봉으로 향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하디착한 구간이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느긋하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시도해보면 어떨까?

▼ 원목으로 만든 벤치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엉덩이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얼마나 낭만스러운가.

▼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흑석고개 출렁다리가 나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 명학봉에서 14분쯤 진행했을까 임도(이정표 : 묘봉/ 명학봉)를 만났다. 원리(오른쪽, 면소재지)와 휴천동(왼쪽)을 잇는 고갯마루다.

▼ 묘봉으로 가는 길은 원리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다 열린다. 가파른, 그러나 높지는 않은 산비탈에 나무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도로 내려서느라 엄청나게 고도를 낮추었던 모양이다. 능선이지만 농경지와 맞물려있으니 말이다. 그런 길은 묘봉의 아래까지 꽤 길게 이어진다.

▼ 능선이 하도 낮다보니 민가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가며 걷는 구간이라 하겠다.

▼ 길은 묘봉 앞에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임도에서 13분을 걸어 맨 마지막 봉우리인 묘봉(猫峰, 209m)에 올라선다. 이곳도 이정표(면사무소 0.7㎞/ 명학봉 1㎞)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 다른 봉우리들과 똑 같이 차려놓았다.

▼ 묘봉은 ‘거미처럼 살고 싶은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놓고 무엇을 먹고 살이 쪘냐고 물었단다. 참새와 사마귀를 거쳐 거미에 이른 결론은 훔치거나, 뺏거나 싸우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아등바등하면 살지 말라는 얘기기 아닐까 싶다.

▼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를 낮추어가는 산길을 8분쯤 걷자 탐방로는 이산파출소로 내려선다. 그런데 날머리의 게이트에도 행복의 종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들머리에서 종을 울리지 않고 지나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이산파출소 옆으로 내려서니 오른편 언덕에 ‘사모바위(紗帽岩)’라는 그럴 듯한 바위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모’란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비단실로 짠 모자를 말한다. 출세·벼슬·큰인물 등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네 선조들은 부처가 바위 속에서 나왔다 바위 속으로 사라진다는 보편적 상상력을 가졌었다. 그런 상상력이 만들어 낸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을을 보살피는 상징물로 삼았을 게고 말이다.

▼ 날머리는 이산면사무소(원점회귀)

사모바위 앞에서 도로를 건너면 이산면사무소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둘레길은 한 바퀴 도는데 정확히 2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5.81km를 찍고 있다. 아무리 둘레길이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능선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치 탐방로가 고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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