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호(神井湖) 둘레길

 

여행일 : ‘21. 6. 26(토)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여행코스 : 공원관리소→옥련암→수변산책로→연꽃단지→느티나무쉼터→안산→남산터널↔남산(왕복)→조각공원(소요시간 : 8.48km/ 2시간 45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신정호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담수면적 92ha의 인공호수다. 해방 이후 관광지로 사랑받던 저수지는 관광트렌드의 변화로 한때 침체를 겪기도 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지금처럼 아름다운 호수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호수는 한마디로 잘 가꿔놓은 정원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아름다운 호수는 기본. ‘장미터널’이나 ‘능소화터널’처럼 꽃을 주제로 한 터널들이 연이어 나타나는가 하면, 꽃망울을 활짝 연 연꽃단지도 드넓게 펼쳐진다. 물놀이장과 염소와 토끼 등을 사육하는 ‘작은 동물원’을 만들어놓아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거기다 접근성까지 뛰어나서 사시사철 탐방객들로 넘친단다.

 

▼ 들머리는 신정호수 공원관리소(아산시 영인면 신화리 산 3-7)

평택·파주고속도로(평택-화성) 오성 IC에서 내려와 국도 38번과 39번을 연이어 타고 아산까지 내려온다. 시내로 들어가기 전 국교교차로(아산시 염치읍 곡교리)에서 국도 45호선, 행목교차로(신창면 행목리)에서는 623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마지막으로 킹스베리카페(아산시 초사동)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정호관광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이게 번거롭다고 생각할 경우 내비게이션에 ‘신정호생활체육공원 주차장’을 찍고 오면 된다.

▼ 호반을 따라 내놓은 4.8km의 둘레길은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호수가 넓은데다 호반을 따라 도로가 나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지점을 골라 트레킹을 시작하면 된다. 산책로 곳곳에 주차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차를 대기도 좋다. 하나 더. 신정호둘레길이 너무 짧다고 생각될 때는 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능선을 걸어볼 수도 있다. 호반에서 시작해 안산(183m)과 남산(145m)를 오른 뒤 다시 호반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둘레길(청댕이길 및 남산길)이 산뜻하게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 능선에도 ‘치학산’이 있다고 했으나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 호수로 다가가자 ‘신정호수 수상레저&커피’가 눈에 들어온다. 수상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인데, 수상스키 마니아들을 위한 카페도 겸하고 있단다. 넓은 호수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청춘들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스키 지나간 자리가 파도 되어 일렁이고, 그 물결을 따라 햇빛이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오른편, 그러니까 제방(堤防)이 있는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공원에서 권장하는 코스의 역방향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안산과 남산을 올라가보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어버렸다. 산길의 날머리가 이곳 조각공원으로 연결된다니 어쩌겠는가. 참! 이곳은 걸음기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빅워크 APP’를 내려 받고 걸으면 10m당 1원씩이 적립된단다. 걸음이 모이면 삼성디스플레이에서 독서문화 활성화를 통해 충남지역 청소년들에게 기부한다니 기왕에 걷는 김에 한번쯤 참여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수상각’으로 여겨지는 건물은 텅 비어있었다. 이름 그대로 물 위에다 지어놓은 저 집은 한때 신정호 관광의 중심축이었다고 한다. 60~80년대만 해도 이곳 신정호는 서울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신혼 여행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이 분위기 잡고 목을 축이던 유흥음식점이 바로 저 수상각이고 말이다.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수정궁’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무튼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길재의 시는 바로 저런 풍경들 두고 읊었을지도 모르겠다.

▼ 꽃망울을 활짝 연 연꽃방죽 너머는 ‘충남 조종면허시험장’이다. 예당호나 탑청호 등 충남지역의 커다란 저수지들을 제키고 면허시험장이 들어서있다는 것은 그만큼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서 팁 하나. 해상에서 모터보트, 제트스키, 요트 등 동력수상레저기구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해양경찰청에서 실시하는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증을 취득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 잠시 후 ‘다솜다리’에 올라선다. 신정호의 옛 유원지에서 ‘보물섬(전에는 이곳에 라이브카페가 있었다고 한다)’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2011년엔가 다리가 준공될 때 아산시에서 우리말 이름을 공모했고, 이때 제안된 여러 이름들 가운데 ‘다솜’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다솜’이란 애틋한 사랑이란 뜻을 갖고 있단다. 이 다리를 건너는 연인들에게 그 사랑을 꼭 이루고 지켜나가라는 격려차원에서 지어놓은 이름일까?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저수지의 제방을 따른다. 시멘트로 포장을 해놓은 탓에 조금은 삭막해질 수도 있으나, 길가를 코스모스 꽃밭으로 가꾸어 그런 느낌을 없애버렸다.

▼ 둑에는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하지만 입추(立秋)는 아직도 한 달도 더 남았다. 세상이 하수선하다보니 꽃들마저도 이젠 계절감각을 잃어가나 보다.

▼ 제방 위를 걷다보면 예스런 풍경 하나가 눈에 띈다. 1920년대 후반 신정호를 축조하면서 함께 만들어진 취수탑이라고 한다. 놀라운 건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저 시설물이 일본인들이 만들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 일본인들은 싫어도 그들의 기술력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취수탑 너머로는 신정호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원래의 명칭은 ‘마산저수지’.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된 ‘마산’이란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후 ‘신정관’이란 온천과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저수지에 수상각을 지었는데, 신정호라는 이름은 저수지가 신정관의 부속시설로 이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제방의 끄트머리에 있는 ‘연춘’이라는 장어구이 전문집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모퉁이를 돌아서자 ‘옥련암’의 표지석이 얼굴을 내민다. 저곳은 ‘치학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답사는 그만두기로 했다. 정상을 철망울타리로 둘러쳐 진입을 못하도록 해놓았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듯해서이다. 신도리코 선대 회장의 묘가 있어 산 전체에 철망이 쳐져 있더라는 것이다.

▼ 둘레길은 탄성도가 가장 높다는 ‘우레탄’을 깔았다. 그러니 오래 걷는다고 해서 무릎에 부담갈 일도 없다. 우리처럼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걷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하겠다. 참! 수변산책로의 일부 구간은 나무데크를 깔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머지 반을 등산로를 이용한 탓에 직접 걸어보지는 못했다.

▼ 둘레길의 총 길이는 4.8km. 성인을 기준으로 할 때 빠른 걸음으로 1시간이면 족하다. 만일 천천히 걷겠다면 거기다 30분 정도만 더하면 되겠다. 1km 간격으로 안내판을 세워져있어 자신이 얼마큼 왔는지,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준다.

▼ 이곳은 ‘신정호 국민관광단지’. 이름에 걸맞게 둘레길은 잘 꾸며져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숲을 조성하고 그 사이로 오솔길을 냈다. 정자와 벤치,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곳곳에 배치했다. 쉬엄쉬엄 걸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유실수 단지도 들어서 있었다.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로 보이는데 나무마다 어린이 주먹만 한 크기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기분 좋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팻말 하나가 과목 밑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몰래 따가는 몰지각한 탐방객들이 꽤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정기적으로 소독을 하고 있다’는 경고판까지 세워놓았다.

▼ 제법 큰 복숭아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오뉴월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과는 달리 쨍쨍 내리쪼이는 햇빛을 속속 빨아들이며 탐스러운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맞다. 얼마 안 있으면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 시작된다.

▼ 신정호 가꾸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새로 놓은 등 곳곳에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도 만났다. 탐방로에 로터리클럽이나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단체들의 표지석을 여럿 세워놓은 것이다. 국민관광단지를 조성하는데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차라리 그 내역을 적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 둘레길 주변에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나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미식가들에게 호평을 받는 곳도 여럿 있단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호수가 다시 한 번 전모를 드러낸다. 이번에는 꼬맹이 섬까지 품은 채로다. 이렇듯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 신정호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출발지점의 반대편에서 연꽃단지를 만났다. 저수지 상류의 2만 평(66,115㎡)이나 되는 너른 부지에 총 11,082본(백연 1000, 수련 700, 홍연 7732, 황연 1650)의 연꽃을 심었는가 하면 전통정자와 원두막, 통나무벤치, 등의자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곳곳에 배치했다. 특히 LED등으로 꾸민 조명은 신정호관광의 백미로 알려진다. 조명 덕분에 한밤중에도 물가에서 은은한 미소를 비추는 연꽃의 자태를 엿볼 수 있단다.

▼ 연꽃이 넘실거리는 방죽의 가운데는 데크로드가 지나간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연꽃을 감상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신정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연꽃’이다. 연꽃으로 유명한 다른 관광지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다. 홍련, 백련, 황련, 수련 등 다양한 연꽃들이 꽃망울을 열며 찾아온 이들을 화사하게 반긴다. 덕분에 사진촬영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 됐단다.

▼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할 정도로 연꽃을 신성시한다. 불교라는 게 본디 자기 스스로 깨우쳐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연꽃의 피는 과정이 이와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진흙 속에서 꽃이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불교에서는 교리를 설명하는 귀중한 꽃으로 여긴다.

▼ 연꽃단지에서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됐다. 저렇듯 푸르른 연잎과 저리도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들을 놓아두고 어찌 쉬이 발걸음이 떼이겠는가.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연꽃의 무리는 끝까지 나를 따라왔다.

▼ 주말이라선지 탐방객들이 무척 많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효녀, 나 홀로 걷기에 열중인 사람들. 사랑 뿅뿅 날리며 뛰고 있는 부부 등 다양한 형태의 삶들이 길 위에 묻어난다.

▼ 곱게 핀 연꽃에 눈 맞추며 걷던 집사람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궁금해서 다가간 나는 더 놀라 도망까지 쳐버린다. ‘뱀 조심’. 이곳에도 뱀이 있는 모양이다.

▼ 신정호자연생태공원의 중심축인 ‘생태학습관(코로나로 문이 닫혔다)’이다. 생태공원은 저 학습관말고도 퀼리티 높은 숲속놀이터와 야생초화원, 습지연못, 생태수로, 식생천이원 등을 포함한다.

▼ 넝쿨장미나 등나무, 능소화 등으로 뒤덮인 터널도 여럿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메타세쿼이아를 배경삼아 한 폭의 풍경화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신정호’의 사계를 담은 사진틀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도 만났다. ‘마산정(馬山亭)’. 호수의 옛 이름인 ‘마산저수지’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정자에 올라 신정호의 자연경관을 편안하게 감상하며 심신을 치유해보라는 안내판의 문구가 무색하게도 입구를 막아놓았다. 못된 코로나라는 놈이 잠깐 여유까지도 막아버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나무 그늘 아래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안산·남산으로 올라가는 탐방로가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 쉼터를 빠져나와 ‘신정호 자전거길’과 이차선도로인 ‘신정로’를 연거푸 가로지르면 또 다른 둘레길인 ‘청댕이길’이 시작된다.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초입에 이정표(남산정상 1.6㎞/ 느티나무쉼터 0.1㎞)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산길인 ‘청댕이길’을 선택한 덕분에 우린 물속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있다는 버드나무 숲을 구경하지 못했다. 청송의 주산지에 못지않은 풍경화가 그려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예쁜 포토죤을 갖춘 수변산책로와 미로원, 수생식물전시장 등도 만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 참! 도로를 건너기 전 ‘아산 둘레길’의 안내도를 한번쯤 살펴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아산시가지 지도에다 남산길과 온천천길, 신정호둘레길 등 여러 둘레길들을 그려 넣었는데 잠시 후에 걷게 될 ‘청댕이길’도 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산’을 ‘남산’으로 잘못 표기해놓은 아쉬움도 있다. ‘남산’은 남산터널에서 조금 더 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산속으로 들어서면서 ‘청댕이길’이 시작된다. 느티나무쉼터 앞에서 시작하는 이 둘레길은 매봉산을 지나고 청댕이고개를 넘은 다음 이순신종합운동장으로 이어지는데 숲길을 걷다보면 아산의 대표 관광지인 신정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청댕이길’이란 이름은 시부모님에 대한 며느리의 효(孝) 전설이 깃든 ‘청댕이고개’에서 따왔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15분이면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남산터널← 1.9㎞/ 623지방도로→ 0.9㎞/ 느티나무쉼터↓ 0.55㎞)를 만난다.

▼ 이번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한 것이 여간 걷기에 좋은 게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산책코스라 하겠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산터널← 1.4㎞/ 갓바위→ 0.56㎞/ 느티나무쉼터↓ 1.02㎞)가 나온다. 2기의 돌탑으로도 모자라 태극기까지 휘날리는 곳인데, 돌탑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날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 보답을 못해드린 선생님 은혜, 밥 먹고 살게 해준 직장의 은혜, 내조에 늙어버린 내 아내의 은혜>. 이 얼마나 구구절절 옳은 얘기인가. 참! 이곳에서 오른편은 갓바위(갓쓴 바위)로 연결된다. 조강지처를 버려 벌을 받아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이다.

▼ 이후로도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10분쯤 지난 곳에서 4각의 정자를 만났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 이곳이 안산의 정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이 안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조망 또한 꽉 막혀있다.

▼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선답자의 표지기(리본) 조차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남산공원 이용수칙 안내판에다 ‘안산(183m)’라고 끄적거려 놓았을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공공시설물에다 낙서를 한 몰지각한 행위까지 나무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안산의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게 뻔하니 말이다.

▼ 이제 남산으로 갈 차례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따라 8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남산터널↖ 0.9㎞/ 이순신종합운동장(청댕이둘레길)↗ 3.1㎞)는 이곳에서 기존의 ‘청댕이길’과 헤어짐을 알려준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남산길’을 따른다.

▼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던 탐방로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 무릇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내림의 길을 모두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평해지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이란 얘기이다. 그건 그렇고 이 부근에 ‘남산길’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쉼터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안산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라는데 아쉽게도 우린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리는 이정표 하나 세워놓지 않았으니 초행자인 우리 부부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잠시 후 내려선 안부는 정자와 벤치로도 모자라 먼지 털이기까지 갖춘 명품 쉼터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정표(남산↑ 650m/ 신정호관광지← 0.17㎞/ 안산↓ 1.1㎞)의 꼭대기에 매달린 이정표가 이곳이 남산터널의 위임을 알려준다. 참! 신정호관광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자.

▼ 능선은 다시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까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할 테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모아미래도아파트단지가 보이는 등 눈요깃거리가 있어 꼭 힘들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 잠시 후 정자가 지어져 있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산↑ 0.2㎞/ 방축동←/ 남산터널↓ 0.4㎞)를 만났다. 이따 되돌아올 때 행여 이곳으로 해서 신정호관광지로 내려가 볼까를 고민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남산터널 위를 통과한지 15분 만에 남산(145m)의 정상에 올랐다. 서너 평이나 됨직한 정상은 상운각(祥雲閣)이란 정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1943년 세종대왕이 온궁(溫宮)에 내려왔을 때 호종한 문신 이숙치(李叔畤)가 지은 ‘교전상운합(郊殿祥雲合) 영천난류청(靈泉暖溜淸)’이란 싯귀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정자이다.

▼ 정자에 올라 잠시 조망을 즐겨본다. 발아래로 아산시의 서쪽 외곽이 펼쳐지는데, 그 중앙에는 아산환경과학공원의 그린타워전망대가 놓여있다. 그린타워는 쓰레기 소각장 굴뚝을 활용한 전망대다. 150m 높이의 굴뚝에 1층은 전망대(망원경 6대), 2층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으며, 주변에는 생태곤충원과 장영실과학관, 배미수영장, 풋살경기장 등 아산환경과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남산도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저 ‘남산 정상(145m)’란 이름표를 매단 이정표(팔각정 0.8㎞/ 남산터널 0.6㎞)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남산터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자 조각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공간이 무척 넓어서 별빛축제 등 아산의 대규모 주요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널따란 잔디밭에는 음악분수와 야외음악당, 인공암장, 항일민족운동자료전시관, 캠핑장 등 꽤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 잔디밭 곳곳에 세워놓은 조각품들을 공원의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 조각공원의 얼굴은 음악분수가 아닐까 싶다. 직경 43m의 분수대에다 파워앰프와 스피커 등을 설치해 음악소리에 맞춰 분수가 뿜어지도록 했단다. 하지만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시원한 물소리만 실컷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160여개의 조명이 만들어낸다는 빛의 잔치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 건강을 위한 ‘지압보도’도 설치되어 있었다. 발은 신체의 축소판이자 제2의 심장이라고 했다. 신발을 벗어들고 한번쯤 걸어볼 일이다.

▼ ‘조각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꽤 많은 조각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내게는 모두가 다 그게 그거다.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 곁눈질로 살펴보며 지나치는 이유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신정호둘레길 탐방이 끝났다. 한 바퀴 도는데 걸린 시간은 2시간 45분. 핸드폰의 앱은 8.48km을 찍고 있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들이 제법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성흥산(聖興山, 260.1m) 가림성 솔바람길

 

여행일 : ‘21. 3. 29(월)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코 스 : 덕고개→구교리길 합류점→가림성길 합류점→가림성 사랑나무→성곽길→유금필장군 사당→대조사→임천면사무소(소요시간 : 약 7km/ 2시간 40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높이 260m의 나지막한 성흥산 산자락에 내놓은 ‘가림성 솔바람길’은 덕고개에서 시작해 한고개에서 끝나는 5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중간에 백제시대 도성 수비의 요충지였던 ‘가림성’을 지난다고 해서 ‘가림성’이란 브랜드로 포장됐다. 이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순하게 이어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전형적인 육산인지라 바닥도 보드라운 흙길이다. 거기다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많아서 솔가리까지 수북이 쌓여있다. 길이 아니라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탐방객들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다고 한다. 가림성의 성벽 위에 올라앉은 ‘사랑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육룡이 나르샤’, ‘호텔 델루나’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잠깐 짬을 내어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가 있는 대조사도 한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 들머리는 덕고개(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4-6)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 IC에서 내려와 국도 29호선을 타고 서천방면으로 내려오다 군사삼거리에서 빠져나오면 임천면소재지인 ‘군사리’이다. 이어서 성홍로를 이용해 마을을 빠져나가면 오래지 않아 ‘덕고개’에 이른다.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가 산행들머리이다. 코너에 영호추모공원과 해촌성결교회, 성불사(점집이 아닐까 싶다)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성흥산에는 다양한 걷기 코스가 나있다. 성곽길(1.55㎞), 솔바람길(4.63㎞), 대조사1·2길(1.1㎞·0.5㎞), 구교리길(0.4㎞), 가림성길(1.8㎞), 호리동길(0.8㎞), 지토리길(2.3㎞)이 성흥산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만난다.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산바람 맞으며 슬렁슬렁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 추모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솔바람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이번에는 이정표(성흥산성 2.97㎞)가 길손을 맞는다.

▼ 산길은 한없이 곱다. 길이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에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 지자체의 노력도 엿보인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가 하면, 심심찮게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 아무리 나지막한 산이라고 해도 가파른 오르막길 하나 없겠는가. 드물기는 하지만 밧줄까지 매어놓은 구간도 만나게 된다.

▼ 성흥산은 역시 산책삼아 오르는 산이다. 저렇게 원탁형의 벤치까지 놓아둔걸 보면 말이다.

▼ 이정표가 참 예쁘다. 아니 마음에 쏙 든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지명과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매달았다. 그 지도의 위에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까지 표시해 놓았으니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겠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꽤 많은 무덤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풍수가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곳 성흥산 자락에는 무덤 숫자만큼은 아니어도 꽤 많은 절간이 들어서있다. 명당을 가장 잘 꿰찬다는 게 본디 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성흥산성↑ 1.42㎞/ 대조사← 0.7㎞/ 덕고개↓ 1.65㎞)을 만났다. 왼편은 첨부된 지도의 ‘구교리 길’. 즉 대조사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 세상이다. 찬 기운을 살짝 머금은 바람도 살랑살랑. 그래 이곳은 ‘솔바람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름 그대로 솔과 바람으로 가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짙은 솔향기가 묻어난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일상에 지쳐있는 내 심신을 다시 깨워준다. 힘차게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라며.

▼ 두 번째는 임도(이정표 : 성흥산성↑ 0.62㎞/ 새터골→ 2.3㎞/ 덕고개↓ 2.5㎞)와 만난다. 새터골에서 올라오는 ‘지토리길’이다.

▼ 이제 솔바람길은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는 왼편에 대조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따가 대조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게 되니 꼭 기억해 두자.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성흥산성→ 0.42㎞/ 임천면사무소← 1.3㎞/ 대조사↓ 0.7㎞). 이번에는 임천면사무소로 연결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참! ‘솔바람길’은 여행자들에게는 즐거운 트레킹코스가 되어주지만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운동코스란다. 그래선지 이곳 삼거리에는 작은 체육공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 잠시 후 문이 닫혀있는 매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몽골텐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짜고짜 체온기부터 들이댄다. 맞다. 세상은 지금 패닉 상태다. ‘코로나19 팬데믹’인데 이 정도 불쾌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 너른 광장에는 꽤 많은 스틸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성흥산성이나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를 액자 모양의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2006년 방영된 ‘서동요’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각종 예능은 물론이고 드라마 세종대왕, 신의, 육룡이 나르샤, 엽기적인 그녀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흥부’ 등의 촬영지로 활용되었단다. 특히 2년쯤 전인가 tvN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호텔 델루나’가 눈길을 끌었다.

▼ 주차장으로 여겨지는 공터 위에는 ‘충혼사(忠魂祠)’가 지어져 있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세운 사당이란다. 맞다. 산세가 만만찮은 가림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단숨에 정복할 엄두가 나지 않던 산성이다. 막강한 나·당연합군도 이곳을 피해 부여로 진격했으며,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스러져간 병사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솔바람길은 이제 가림성(加林城) 구간으로 접어든다. 숲을 빽빽이 메웠던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아찔한 높이의 암벽이 앞을 막는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 가파르다싶을 뿐 길은 바위를 피해가며 위로 잘도 오른다.

▼ 절벽의 앞. 가림성(사적 제4호)의 안내판이 보이기에 집사람을 불러 세웠다. 가림성의 지도에다 설명을 덧붙인 게 전부였지만 정상석이 없는 산에서 이만한 인증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절벽의 위로 오르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반긴다. 바위를 뚫고 우뚝 서있는 나무는 우선 거대하다. 나이도 백 년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선지 나무 아래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나무의 자태는 물론이고 빼어난 주변 풍광까지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하지만 주변 풍광은 눈에 담지 못했다. 자욱한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미세먼지가 주의도 아닌 ‘경보’까지 내려진 날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기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 몇 걸음 더 오르자 이번에는 가림성(加林城)이 얼굴을 내민다. 성벽의 위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걸터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랑나무’다. 400년 전 누군가가 심었다는 높이 22m에 둘레 1.25m의 고목으로 2006년 방영되었던 SBS드라마 ‘서동요’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그런데 다소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일까? 우리에게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마을 어귀가 아닌 산성 꼭대기에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먼 곳에서도 잘 보이고, 반대로 나무 옆에 서면 전망이 탁 트인다는데 말이다.

▼ 남문 터라지만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루나 성문은 보이지 않고 그저 성벽만 좌우로 늘어서있을 뿐이다. 성흥산성(聖興山城) 또는 가림성(加林城)으로 불리는 이 산성은 사비성 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 백제 시대에 쌓았다고 한다. 둘레 1,350m에 높이는 4m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남문과 동문, 서문의 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백제의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해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 사랑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성의 중앙이 아닌, 그렇다고 성흥산 꼭대기도 아닌, 성 안의 끝부분, 그러니까 주변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서있다. 나무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대부분 여자들이 아니면 커플이다. 그런데 줄이 좀 길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려는데 까짓 20~30분쯤 못 기다리겠는가.

▼ 요즘 젊은이들은 사진을 조합까지 하는 모양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눈에 띄기에 빌려온 사진인데 사진을 어떻게 합성했는지 아예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버렸다. 맞다. 누군가는 사랑나무 사진은 최소한 두 컷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두 컷 가운데 한 컷을 반전해서 편집하면 하트 모양의 와이드 컷이 완성된다면서 말이다. 그 안에 사랑하는 커플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사랑나무’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직한 널찍한 터를 지나 오른편으로 향한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다. 그렇다고 성곽 위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곽의 복원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 정도로 가파른 비탈이라면 별도의 성벽이 없어도 적을 막아내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하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으면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성이 험하고 견고해 공격하기가 어렵다’고까지 했을까.

▼ 그렇게 잠시 걷자 ‘동문지’다. 우리부부가 한참을 헤맨 곳이기도 하다. 이정표(서문↑ 0.6㎞/ 성곽길 지장골→/ 대조사↓ 1.25㎞)가 지시하는 성곽길(지장골)을 따랐더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니겠다는 생각에 되돌아가 확인해보니 ‘서문’ 방향에도 ‘성곽길’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글씨의 크기가 지장골 방향보다 너무 적다. 무심코 지나쳤던 이유이다.

▼ 서문을 향해 방향을 틀자 곧이어 공사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수선한 현장이 나타난다. 안내판은 ‘제7차 가림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복토가 진행 중인지라 지반이 약하니 출입을 금한단다. 가림성의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진행형’인 모양이다.

▼ 이 구간도 역시 성곽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옛 병사들이 지나다녔음직한 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걷자 ‘서문지’이다. 세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성곽길/ 한고개/ 성곽길)는 날머리인 ‘한고개’까지 1.16㎞가 남아있다고 알려준다.

▼ 날머리인 한고개는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계속해서 성곽길을 걷고 싶다면 직진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왼편으로 향했다. 이정표에는 빠졌지만 그쪽으로 가야만 성흥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정상은 너른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는 평평한 것이 영락없는 건물터이고, 그 너머에는 현세에 지은 팔각장이 자리를 틀었다.

▼ 봉화제단(烽火祭壇)이 설치된 끄트머리로 나가자 눈앞이 훤해진다. 성흥산은 해발고도가 240m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주변에 이렇다 할 높이의 산이 없다 보니 사방이 훤하게 열린다. 가림성을 쌓아올린 이유일 것이다. 발아래로 인간 지형은 물론이고, 적군의 움직임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으니 이보다 저 좋은 방어진지가 어디 있겠는가. 맞다. 당시 이곳은 사비성과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없는 지금은 부여의 절경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의 전망대가 되었고 말이다.

▼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고색창연한 사당이 고개를 내민다.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는 왕건이 태봉왕 궁예의 장수였을 때 박술희·신숭겸과 함께 의형제를 맺은 인물이다. 그런데 황해도 평주 사람인 유금필의 사당이 왜 이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1929년 발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 실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태조 때 유금필이 송도로 가던 도중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했는데,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 아까 거론했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조사로 향한다. 이 구간 역시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천년고찰 ‘대조사(大鳥寺)’다. 대조사는 성흥산성이 축성되고 26년 뒤인 527년 인도 유학승 겸익(謙益)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다. 이름 그대로 이 절은 새와 관련된 창건 설화를 갖고 있다. 겸익 스님이 성홍산 큰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더란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큰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조사’라 했다는 것이다. 주불전인 ‘원통보전’은 바로 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불전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앞의 석탑도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곳에 머물던 스님들이 지붕 하나 달랑 남아있던 석탑을 보고 신도들과 함께 주변 숲을 샅샅이 뒤진 끝에 몸통을 발견했단다. 우여곡절 끝에 기도처. 아니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원통보전 왼쪽으로 ‘불유정(佛乳井)’이란 약수터가 하나 있다. 대조사는 풍수 상 명당에 위치하면서도 좋은 물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들은 예산 성당의 ‘장 크랭캉(Jean Crinquand)’ 신부가 대조사를 찾아와 이 약수를 찾아주었단다. 약수터 뒤로는 명부전과 산신각이 있었다. 이밖에도 범종각과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도 눈에 띈다.

▼ 절간을 돌아 위로 오르면 대조사의 명물이자 보물 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이 묵직하게 서있다.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한 불상인데 높이가 무려 10m에 둘레도 4.8m나 된다. 미래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이 보살상은 균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12세기)로 추정된다.

▼ 작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대조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해탈문이나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절간을 빠져나왔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절을 빠져나와 잠시 오르니 삼거리(이정표 : 임천면사무소← 0.7㎞/ 성흥산성→ 1.1㎞, 각시바위 50m/ 대조사↓). 이젠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임천면사무소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 이정표에 나타나있는 ‘각시바위’가 궁금해서 성흥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봤다. 하지만 더 이상의 표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게 ‘각시바위’인지 알 수 없는 노릇. 그저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50m) 쯤에서 나타난 ‘호서제일경(湖西第一景)’이라 적힌 빗돌과 그 앞에 깔려있는 바위가 전부였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산장가든’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나무 찻집’이다. 임천면사무소를 200m쯤 남겨놓은 지점인데 시를 적어 넣은 항아리들로 조경을 해놓은 게 여간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 마을로 들어서니 사당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모시는 영당이란다. 원래 홍산면 북촌리에 있었으나 홍산 관아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2010년 후손들에 의해 이곳 군사리로 옮겨왔단다. 그런데 고려 삼은(三隱) 가운데 하나인 이 분의 영정이 무슨 연유로 이곳, 아니 이전에 있었다는 홍산에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영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알아 볼 수는 없었다.

▼ 산행날머리는 임천면사무소

대조사 앞 삼거리에서 출발한지 10분 만에 날머리인 ‘임천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임천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가림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까지도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큰 고을이었다. 면사무소는 당시 관아가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지금은 청사로 쓰이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앉았을 따름이다. 관아의 정문이던 ‘배산루’는 일제강점기에 백마강변의 부소산성으로 옮겨진 뒤 ‘사자루’로 현판을 바꿔 달았고, 임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건물도 해체돼 대조사 경내의 원통보전(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짓는 데 쓰였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성흥산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 면사무소 옆에는 360년이나 묵었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높이는 4m에 불과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게 흡사 온몸을 뒤틀며 가지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 금강 자전거 길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유왕산(留王山)’에 들렀다. 백제가 패망하고 당으로 끌려가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잠시 머물다 떠났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인근 망배산은 의자왕이 타고 떠나가는 배를 향해 백제 백성들이 절을 올렸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진다. 정상에는 유왕정(留王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 정자에 오르자 금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의자왕과 귀족, 백성 등 1만 2천여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실은 배도 저 무심한 강물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 제단(祭壇)도 만들어 놓았다. ‘백제유민정한불망비(百濟流民情恨不忘碑)’.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유왕산 추모제’가 열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를 위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는 위령제는 물론이고 당군이 백제포로를 끌고 가는 모습을 재연한 15척의 포로선단 행렬, 금강변 상여놀이, 씻김굿 등 백제 유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했다.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천군. 대청댐에서 출발해 군산·장항 사이 하굿둑까지 이어지는 ‘금강종주 자전거길(146km)’의 마지막 구간을 자전거가 아닌 다리로 직접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서천군의 금강하구에 있는 조류생태전시관부터 신성리 갈대밭까지 이어지는 총 14km의 이 ‘금강하구 자전거길’은 은빛 물결이 넘실대는 금강을 배경으로 맑은 공기와 갈대밭을 누비며 힐링 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진다.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이 가운데서도 맨 마지막 4㎞이다.

▼ 갈대는 신성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갈대의 굵기나 분포된 면적은 신성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이곳에서도 넘실대는 황금물결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둑으로 막힌 금강의 아랫자락은 현재 바다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선창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그 유명한 철새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점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만들어내는 군무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긴 미세먼지로 뒤덮인 산하가 온통 뿌옇기만 한데 어디서 어떻게 철새 때를 찾아내겠는가.

▼ 금강하굿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 주변은 철새들의 세상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둔치에 널따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탐조대는 물론이고 철새 조형물도 곳곳에 배치했다.

▼ 공원으로 단장한 갈대밭을 S자로 달리던 자전거길은 금강하굿둑과 인접한 서천조류생태전시관에서 대장정을 마친다. 금강과 서해바다의 경계인 이곳은 금강에서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가창오리를 비롯해 청둥오리, 흰빰검둥오리, 흰죽지, 알락오리, 큰고니, 개리 등 온갖 겨울철새들의 보금자리다. 조류생태전시관이 이곳에 자리한 이유이다.

▼ 조류생태전시관은 ‘금강자전거길’ 종주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이를 알리는 여러 조형물들을 철새 조형물과 함께 세워두었다. 자전거 대여소도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공간도 공원으로 꾸몄다. 그런데 황금물결의 갈대밭 속에 들어앉은 움막이 눈길을 끈다. 패총의 유적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오랜 옛날, 원시인들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탑정호 소풍길

 

여행일 : ‘21. 5. 13(목)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 일원

코 스 : 수변생태공원→수변 데크길→출렁다리→제방→탑정호 광장→봉황산→조정서원→수변산책로→평매마을 전망데크→병암마을 쉼터(소요시간 : 12.36km/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논산에 소재한 탑정호는 예산의 예당저수지에 이어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대략 여의도 면적의 두 배(152만 2100평)에 달한다니 엄청난 크기라 하겠다. 이 인공호수는 1944년에 축조된 이래 논산시민의 휴식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변했다고 한다. 2012년부터 시작된 수변개발 사업이 큰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수변생태공원이라는 아늑한 공원을 조성했는가 하면, 이 수변생태공원에서 시작해 탑정리 석탑까지 이어지는 3km의 수변 나무데크길도 완성시켰다. 거기다 양쪽 호반을 잇는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까지 놓았으니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고 어찌 배겨내겠는가.

 

▼ 들머리는 탑정호 수변생태공원(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287-8)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논산 IC에서 내려와 국도 1호선 계룡시 방면으로 달리다가 외성삼거리(논산시 부적면 외성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충곡로)를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탑정호반에 조성된 수변생태공원에 이르게 된다. 차에서 내리면 수생 식물원과 자연 학습원, 분수, 팔각정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참고로 ‘탑정’이란 저수지 이름은 탑정리란 마을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수몰된 저수지 한 가운데 ‘어린사(魚鱗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에 정자 형상의 탑이 있다고 해서 ‘탑정(塔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 탑정호는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담수면적이 축구장 909배 크기인 636만㎡나 된다고 한다. 그런 저수지의 주변에 ‘소풍길’이란 이름으로 24㎞ 길이의 둘게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산책로는 탑정호 둘레와 주변 산을 잇는 걷기 코스이다. 하지만 둘레길에 포함된 산들이 높지 않아서 운동 삼아 오르내릴 수 있다.

▼ 주차장에서 내리자 ‘딸기 조형물’이 반갑게 맞는다. 이곳 논산이 ‘딸기산업 특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조형물일 것이다. 맞다. 논산의 농가소득 1위는 ‘딸기’라고 한다. 100여년의 딸기재배 역사를 가진 전국 최대의 생산단지이기도 하다. 1988년 청정딸기 생산을 위해 국내 최초로 천적 농법을 도입했으며, 현재 전체 딸기재배 농가의 43%에 해당하는 900여 농가에서 고설 수경재배 시설을 이용해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00만 불($) 딸기 수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 행복감을 폴폴 풍기는 조형물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족나들이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조형물 뒤로 보이는 공간은 중앙광장이다. 버스킹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 지난 2010년에 조성된 수변생태공원은 아래 사진의 자연학습원 외에도 들꽃원과 연꽃원, 잠자리연못, 잔디마당, 억새길, 전망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팔각정, 수중분수 그리고 수변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장으로 가족과 연인들에게는 산책 또는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 연못 속에 들어앉은 물레방아는 포토존으로 변해 관광객들이 기념을 남기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곳은 물속에서 노는 잉어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발길을 서둘렀던 탓인지 잉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 공원은 꽃잔치가 한창이다. 숙근성 다년초인 ‘샤스타데이지’가 가슴 설레는 하얀 꽃물결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작약과 팬지, 꽃잔디 등의 봄꽃들이 활짝 피어나 상춘객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 이렇게나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콘셉트는 ‘사랑’. 언제나 함께 한다는 ‘하트’ 조형물은 키스가 한창인 남녀를 형상화 했다. 그리고 이를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주변을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했다.

▼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 작가의 시판(詩板)도 보인다. 천년 동안 내린 빗방울만큼 사랑한단다. 바보같이... 집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읊은 것 같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하지만 내 사랑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한 선택의 결과이다. 천년만년 억겁의 세월에 다시. 또 다시 태어나도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는...

▼ 공원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수변공원의 한쪽 귀퉁이에 ‘수변데크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수변생태공원에서 물막이 둑까지 이어지는 이 데크길은 길이가 무려 3㎞에 달한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수변데크길이 아닐까 싶다.

▼ ‘수변 데크길’은 인공적인 직선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곡선의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들고 나는 모양새가 사람의 들숨과 날숨을 닮아서인지 편안하다는 느낌이다. 거기다 눈에 들어오는 경관마저 빼어나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눈요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힐링까지 얻어갈 수 있는 산책이 되는 이유이다.

▼ 그 옆으로는 탑정호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탑정호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완공된 농업용 인공 저수지다. 대둔산 계곡의 맑은 물이 운주와 양촌을 거쳐 흘러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청정호반 역할을 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호반은 그야말로 달력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물가와 닿을 듯 늘어진 능수버들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 든다. 아침저녁이면 저 풍경화는 물안개로 덧칠된다고 한다. 하지만 낮에 찾아온 나로서는 상상으로만 그런 몽환적 풍경화를 그려볼 따름이다.

▼ 호수의 한가운데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저 다리는 저녁이 되면 그 진가가 더욱 드러난다고 했다. 다리에 설치해 놓은 LED가 스크린 역할을 하면서 저녁이면 다리 전체가 거대한 ‘미디어 도화지’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낮에 찾아간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찾아올 리가 없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산책로에는 두세 곳의 포토죤도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인물과 함께 액자에 담아 보라는 모양이다. 혹시 인생샷 하나쯤 얻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 호수는 빙 둘러 도로가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산책로는 심심찮게 도로를 만난다. 그렇다고 황량한 풍경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주변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흐드러지게 핀 샤스타데이지가 눈길을 끌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탑정호 관광의 백미인 ‘출렁다리’에 이른다. 가야곡면 종연리와 부적면 신풍리를 잇는 저 다리는 다른 지역의 출렁다리들이 갖지 못한 여러 가지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우선 길이가 600m(폭 2.2m)로 동양에서 가장 길다. 이 타이틀은 그동안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402m)’가 갖고 있었으나 이번에 탑정호에서 빼앗아왔다. 출렁다리에 미디어 파사드(LED 자체 발광 방식)가 구현된 것도 국내에서 처음이란다. 2만여 개의 LED등이 출렁다리(보행현수교)의 세로로 뻗은 행어케이블(현수재)을 중심으로 가로 50, 세로 30cm 간격으로 배열돼 거대한 스크린 역할하면서 각양각색의 장면을 연출한단다. 또 하나. 다리 상판이 나무데크와 격자형 철망으로 이뤄져 있어 호수 아래를 직접 내려다볼 수도 있단다.

▼ 출렁다리는 입구를 막아놓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장이 늦춰지고 있단다. 그렇다고 이게 오래갈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시아 최장’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아갈 출렁다리가 다른 지역(경북 안동시)에서 건설 중이라니 말이다. ‘최장’이라는 매력에 이끌려 찾아올 수많은 인파를 놓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참! 이것 하나는 알고 넘어가자.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는 포르투갈 북부 아로카(Arouca)에 있는 ‘아로카 다리(Arouca 516)’라고 한다. 길이가 무려 516m에 이르는 이 보행자 전용 다리는 파이바 협곡(Paiva gorge)의 위 175m나 되는 높이에 놓여있다. 작년에 완공되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개통을 미루고 있다는데 지금쯤은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소풍길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중간 중간에 주차장과 화장실을 배치해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주전부리나 음료수를 파는 푸드 트럭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믿고 사는 세상을 꿈꾸기라도 하는 듯 음료수를 파는 무인판매대도 보였다.

▼ 조금 더 걷자 소풍길의 백미(白眉)라는 ‘솔섬’이 나온다. 호수를 향해 외따로 뻗어나간 자그마한 물가의 동산이자 전망대로 28그루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원형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진촬영의 명소다. 참고로 저 솔섬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노을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라고 한다. 몽글몽글 피어 오른 안개로 인해 몽상적인 풍경으로 보일 때의 솔섬도 아름답다는 입소문을 탔다.

▼ 산책로는 혼자 걷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저 호수는 갖가지 수생식물들과 계절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철새들이 주인공이라고 한다. 특히 겨울에는 국제보호종인 가창오리와 고방오리, 알락오리, 쇠오리 등 4만이나 되는 철새들이 찾는단다.

▼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을 수면 위에 띄워봤다. 그러자 눈까지 즐거워진다. 아카시아 향기에 홀릭된 코와 더불어 눈까지 호사를 누린다는 얘기이다.

▼ 물가의 울창한 숲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새소리까지 더해지니 이 아니 즐거울손가. 아래 사진에서 툭 튀어나온 곳은 ‘솔섬’이다. 멀리서 보니 마치 새싹 여러 개를 모아 놓은 것 같아서 한 주먹만으로도 쥐고 남을 것 같은 풍경이 된다.

▼ 조금 전에 스쳐왔던 ‘출렁다리’도 눈에 들어온다. 저 다리는 분명 ‘현수교’이다. 현수교(懸垂橋)란 높은 양쪽 기둥에 쇠밧줄이나 쇠사슬 등을 건너 매고 그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를 말한다. 그런 다리를 어떻게 600m나 놓았는지가 내내 궁금했는데, 이곳에서 보니 금방 이해가 된다. 말굽쇠(U) 모양으로 우뚝 솟은 주탑 2개가 교각 역할을 하고, 그 사이에 교각 하나를 더 세워 상판의 무게를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올라선 ‘물막이 둑(堤防)’. 난간에는 ‘AR 낚시터’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AR 낚시’란 진짜 낚시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하는 낚시를 말한다. ‘상상이상 논산’이라는 앱을 다운받은 다음 순서대로 실행하면 된다. 한 때 엄청 유행했던 '포켓몬GO'을 연상시키는 게임이니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손맛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울손가.

▼ 제방의 한쪽 귀퉁이는 ‘석탑’ 하나가 외롭다. 이 석탑은 탑정호의 수몰된 지역에 위치한 '어린사(漁鱗寺)'라는 절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탑은 기단과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1층만 남아 있어 원래 몇 층의 석탑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단다. 그저 기단의 양식에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안내판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설화를 적고 있었다. 거기에 후백제 때 대명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추가했다.

▼ 저수지의 규모만큼이나 취수탑의 위용도 대단하다. 하지만 저 취수탑은 날이 어두워졌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단다. 조명시설에 불이 들어오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

▼ 일자로 쭉 뻗어나간 제방을 걷다보면 가슴에 새겨둘만한 문구가 적힌 팻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하나를 게시해 본다. 등으로 짊어지면 짐이 되지만, 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된다면서 ‘오늘도 얼굴엔 미소, 가슴엔 사랑, 마음엔 여유’를 가져보란다. 우리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문구라 할 수 있겠다.

▼ 둑 아래는 주차장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었다. 국제 규격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축구장도 두 면이나 들어서 있다. 참!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둑 아래에는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서있다고 했다. 탑정호의 물을 흘러내려 보내면서 그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소’자가 붙었음은 발전량이 미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제방의 끄트머리에 이를 즈음 또 다른 취수탑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에는 2개. 그렇다면 이곳 탑정호는 취수탑을 3개나 갖고 있는 셈이다. 저수지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이 3개 취수탑의 외관은 각기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북쪽 취수탑은 오천 군사의 방패, 남쪽은 계백장군의 창과 방패를 상징한단다. 그리고 탑정 취수탑은 삼진을 나타낸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도 석탑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아까 살펴봤던 ‘탑정리 석탑’을 쏙 빼다 닮은 게 아닌가. 다만 아까의 탑보다 선이 더 또렷할 뿐이다. 맞다. 이 탑은 반대편에 있는 탑을 복제해 놓은 것이란다.

▼ 논산농지개량조합에서 1989년에 세웠다는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빗돌도 보인다. 그 옆의 ‘풍수제민’이라고 적힌 낡은 빗돌은 일제강점기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석비로 ‘풍부한 물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이란다. 참고로 논산시 가야곡면(可也谷面)과 부적면(夫赤面)에 걸쳐 있는 탑정호(塔亭湖)는 1941년에 착공해서 1944년에 준공된 저수지로 제방의 길이 573m에 높이가 17m이다.

▼ 출렁다리가 조망되는 전망 좋은 곳에는 초승달 모양의 조형물을 배치했다. 이를 본 집사람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만든 이의 마음을 쫒는다며 포즈부터 잡고 본다.

▼ ‘탑정호광장’은 제방과 수문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다. 백제의 영웅 계백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음악분수, 포토죤 같은 시설들이 들어선 호숫가의 작은 공원이다. 또한 유동아 작곡·작사의 ‘탑정호 사랑’이란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가 하면, ‘물빛과 하늘빛이 담겨있는 논산’이란 안내판도 보인다. ‘노을 물빛 꽃으로 물들다’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야경 명소로 출렁다리와 계백장군 상징 동상, 노을섬 등 7곳을 꼽고 있었다.

▼ 광장에는 계백장군상이 투각(透刻)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주변이 계백장군의 마지막 전투지인 황산벌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신라 김유신의 5만군과 맞서 싸운 곳. 기울어진 국가 운명을 말해주듯 결사항전으로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 광장에는 두어 개의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호수를 담을 수도 없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까짓 신경 쓸게 뭐 있겠는가. 또 다른 화폭에다 마음에 드는 풍광을 꽉 채워 넣으면 될 일을.

▼ 공연장 분위기의 쉼터형 데크도 만들어놓았다. 탑정호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은 음악분수를 편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 탑정호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게 될 ‘음악분수’이다. 날이 어두워질라치면 장엄한 음악에 맞춰 물보라를 하늘 높이 내뿜어 올리는 분수이다. 그 뒤는 출렁다리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조명이 받쳐준다고 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하늘 높이 솟구치는 물보라와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빛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멋들어진 볼거리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 광장 주변은 물론 꽃밭으로 가꾸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꽃나무만 심은 게 아니다. 조화를 심어놓은 것이다. 사이사이에는 전구도 꽂혀있다. 야경을 위한 조명 시설이 아닐까 싶다.

▼ 소풍길은 이제 포장도로를 따른다. 도로가에 따로 인도를 만들어놓아 걷는데 지장은 없다. 수문(水門)을 겸하고 있는 ‘탑정호교’를 건너 조금 더 걷다가 이정표(봉황산 정상 0.63km, 탑정호 광장 0.34km)가 가리키는 ‘봉황산 정상’ 방향으로 들어선다. ‘산수정(식당)’의 입간판이 세워진 골목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어 힘들이지 않고도 정상까지 올라설 수 있다.

▼ 산을 오르는 도중에 만난 무덤이 하도 괴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웅덩이를 파듯 땅을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안에다 봉분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무덤이란 게 본래 물을 피하는 게 원칙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가묘(假墓)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이곳 봉황산의 산신령은 영험하기로 소문나있지 않는가. 전설에 의하면 아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공부에 매진하는 아들이 살고 있었단다. 그들은 매일같이 서로를 위해 봉황산에 기도를 드렸는데, 그 결과 아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참한 아내를 얻어 함께 아버지를 잘 모셨음은 물론이다.

▼ 10분 만에 올라선 봉황산(126m)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줄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봉황산 정상’으로 진행방향을 표시해오던 이정표(박범신작가 집필관 1.06㎞, 탑정호 광장 0.97㎞m)가 갑자기 ‘박범신 작가 집필관’으로 바뀐 것을 보고 이곳이 봉황산의 정상이려니 유추해 볼 따름이다. 참고로 봉황산은 산의 생김새가 봉황을 닮았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 이후부터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박범신 작가 집필관’ 방향을 따른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자그만 마을(종연1리, 높은댕이)이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탑정호를 또 다시 만나게 된다. 호반에는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습성에 맞게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흔한 풍경이 아니어선지 열대 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맹그로브 숲을 떠올리게 만든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호반도로(탑정로)를 따라 5분 정도 걷다보면 조정산(125.3m)의 들머리(이정표 : 박범신작가 집필관↑ 0.2㎞, 조정산 정상→ 0.73㎞, 탑정호 광장↓ 2.29㎞)가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박범신작가의 집필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던 봉황산에 대한 실망감도 그리 결정하게 된 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 하지만 그 결정은 큰 실수였다. 인도가 사라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걷는 내내 뙤약볕에 온 몸을 노출시켜야만 하는 죽음의 행진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더 큰 실망은 이정표에서 ‘박범신작가 집필관’이란 방향표지판이 스리슬쩍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중간에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소풍길이 도로변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섰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 걷는 도중에 잠시 들렀던 ‘탑정호가’에서 아래 사진처럼 예쁜 ‘꼬꼬마 하우스’를 만났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참! 심심찮게 탑정호의 풍광을 엿볼 수 있었으니 볼거리가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 조금 더 걷다가 만난 ‘아이비’라는 펜션 겸 카페의 홍보판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자기네 시설이 들어선 곳에 남녀얼굴바위, 아나콘다바위, 악어바위, 코끼리바위, 처녀음부바위, 남근석바위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왕성골’이란 지명을 얻게 된 사연과 함께 이곳에서 기도를 올릴 경우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적었다. 꽤나 유명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공공의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곳에 사유시설을 짓게 해준 지자체의 행위가 못내 안타깝다.

▼ 뙤약볕과의 싸움에 지쳐갈 무렵 오른편 길가에서 이정표(조정서원 0.75㎞/ 조정산 정상 0.55㎞/ 박범신작가 집필관 1.4㎞) 하나를 찾아낸다. 조정산의 날머리를 만난 것이다. 들·날머리의 이정표에서 우린 조정산 탐방로의 길이가 1.28㎞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무려 50분이나 걸었다. 그것도 때 이르게 찾아온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이 구간을 ‘죽음의 구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조정서원(논산시 향토문화유산 23호)’에 이른다. 익안대군 방의(태종 방원의 둘째 형)의 증손자 이현동(李賢童)을 추모하기 위해 노성, 연산, 은진향교 유림들의 발의로 1978년에 건립된 사원이다. 하지만 굳게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참고로 이현동은 단종 폐위를 반대하고는 스스로를 농맹아라 칭하며 낙향하여 생을 마친 분이다.

▼ 서원의 옆에는 비각(碑閣)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여염집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서원에 비해 옛 모습이 풀풀 풍기는 멋진 전각이다. 안에는 ‘월파 이항’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빗돌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또다시 길을 나서면 ‘조정2교’.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다리인 ‘산노교’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탐방로가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호반산책로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아니 들머리에 이정표(탑정관리소 5.3㎞/ 산책로 입구 2.0㎞)와 ‘수변산책로 안내도’가 세워져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 호숫가에 매어있는 나룻배가 정겹다. 그런데 작아도 너무 작다. 저런 조각배를 타고 고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타고 나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 지중해풍의 멋진 건축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펜션인줄 알았는데 brunch cafe인 ‘알바노(ALBANO)’라고 한다. 이탈리아 음식이 전문인데 이곳 논산에서는 꽤 소문난 맛집이란다.

▼ 산책로의 왼편은 온통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Daum이 제공하는 지도에 ‘탑정호 습지’로 표기된 지역일 것이다..

▼ 탑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한참을 더 걷자 드디어 ‘평매마을 전망데크’다. 이정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지점이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탑정호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 전망데크 말고도 데크탐방로를 별도로 만들어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탑정호의 수면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탑정호는 여느 호수와는 다른 풍경이다. 물속에서 솟구쳐 나온 듯한 작은 섬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맞다. 탑정호는 인공호수다. 때문에 계곡을 이루던 주변 산세가 수면위로 펼쳐지면서 다도해 같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 전망대 근처에는 몇 개의 낚시 사이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의 장비가 만만찮다. 10개 가까이나 되는 낚싯대는 물론이고, 비바람에 햇볕까지 막아줄 텐트까지 갖췄다. 전문 낚시꾼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 탑정호는 강태공들에게 인기 많은 낚시터라고 한다. 물이 맑은데다 고기까지 많기 때문이란다.

▼ 이런 곳에서는 하찮은 지게마저도 그림이 된다. 아니 세상이 바뀐 요즘 지게 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이후로도 수변산책로는 꽤 오래 지속된다. 탑정호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덕분에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다. 아니 그늘을 만들어줄 숲이 없기 때문에 뙤약볕 아래서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20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병암리 쉼터(이정표 #1 : 산책로 종점 3㎞, 이정표 #2 : 평매마을 조망대 1.38㎞/ 병암유원지 0.95㎞)’가 나타나면서 ‘탑정호 트레킹’이 종료된다. 때 이른 무더위 탓에 나머지 구간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3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2.36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늠내길 2코스(갯골길)

 

여행일 : ‘21. 3. 13(토)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 장곡동, 월곶동, 방산동, 포동 일원

산행코스 : 시흥시청역→시흥시청→장현교차로→군자갑문→갯골생태공원→섬산캠핑장→미생의 다리→포동펌프장→갯골습지센터→흥부배수갑문→군자갑문→쌀연구회→시흥시청역(소요시간 :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시흥시(始興市)는 서울에 인접하면서도 해안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시의 대부분이 200m 내외의 구릉지와 침식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암봉·마산·소래산·성주산 등이 동·남·북쪽의 시 경계를 따라 솟아있으며, 서쪽은 서해바다(경기만)에 접한다. 이런 특징들을 연결시켜 놓은 트레일(trail)이 바로 ‘늠내길’이다. 산길과 들길은 물론이고 바닷길까지 시가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들을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늠내’라는 이름은 ‘뻗어 나가는 땅’, ‘넓은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시흥의 옛 지명에서 따왔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을 차지한 고구려가 붙여놓은 ‘잉벌노(仍伐奴)’의 당시 표현인 늠내에서 유래됐다. 시흥시청에서 출발해서 높지 않은 숲과 산봉우리로 이어지면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숲길(1코스길)과 시흥시청에서 출발해 갯골생태공원을 가운데 두고 갯벌을 한 바퀴 돌아 원점회귀 하는 갯골길(2코스), 옛날 시흥사람들이 걸어 다녔다는 산자락과 고갯길들을 이은 옛길(3코스), 옥구공원에서 오이도와 옥구천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바람길(4코스) 등 모두 4개의 코스로 조성됐다.

 

▼ 트레킹 들머리는 지하철(서해선) 시흥시청역(시흥시 장현동)

요즘은 내가 갈만한 산을 답사하겠다는 산악회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긴 그동안 오르내린 산들이 이미 2,000개를 넘겼으니 답사를 못한 산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우리 부부 단독으로 오지 산을 찾기에는 아직도 능력부족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 ‘꿩 대신 닭’이라고 둘레길이라도 걸어보자고 나선 이유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늠내길’이다. 관광공사가 선정하는 ‘11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 5곳’ 가운데 하나로 꼽혔을 정도이니 눈에 담을만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마침 지하철역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추었다.

▼ 2코스인 ‘갯골길’은 시흥시청에서 출발해서 군자갑문과 갯골생태공원을 지나, 갯골길을 따라 걷다가 ‘미생의 다리’를 건넌 다음 시흥시청으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이다. 돌아올 때는 포동 빗물펌프장과 갯골습지센터 등을 거치도록 길이 나있지만, 갯골생태공원에서 군자갑문까지는 같은 길을 또 다시 걷기도 한다. 총 거리는 16km. 경기도 유일의 내만(內灣)인 갯골과 지금은 사라졌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염전 터와 습지생태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갯골생태공원에서는 염전체험도 가능하며, 전망대에 올라 넓은 들을 조망할 수도 있다.

▼ 3번 출구로 나와 ‘시청공원로’를 따라 시가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장현천 건너로 보이는 ‘시흥시청’. 즉 ‘갯골길’의 들머리는 이 도로 말고도 장현천의 천변을 이용해 갈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시흥시청’의 후문에 이른다. 참! 사거리의 한쪽 귀퉁이에 정자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꾸며져 있었다. 장현동의 유래를 적은 빗돌도 눈에 띄었다. 1912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 ‘새재(鳥峴)’ 마을과 이웃마을인 장상(長上)을 합친 다음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장현(長峴)’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 시청부터는 ‘시청로’를 따른다. 이 길을 따라 장현교차로까지 가게 되는데, 이 구간 아니 갯골길을 통틀어서 유일한 편의점(하모니마트)이 NH농협은행의 다름 블록(block)에 있으니 식수나 간식 등을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

▼ 급하게 떠나오느라 핸드폰에 앱(카카오앱에 ‘늠내길갯골길’로 치면 되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을 깔지 못했다. 그러니 길을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하지만 막상 찾아와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빨갛고 파란 늠내길 리본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로 가로수나 전봇대 등에 촘촘히도 매달아놓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8분 만에 ‘장현교차로’를 만났다. 동서로(목감에서 월곶까지 시흥시의 동·서 축을 잇는 중요한 도로이다)와 ‘시청로’가 만나는 삼거리이다. 참! 오는 도중에 ‘신혼 희망타운’ 건설현장이 눈에 띄었다. 지하철역에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이니 장차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보금자리치고는 참 좋은 위치라 하겠다. 시흥시도 ‘아동친화도시’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이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왼쪽 방향으로 50m쯤 걷다가 오른편으로 난 샛길로 내려선다. 들머리의 벚나무에 이정표가 매달려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10m쯤 내려섰을까 샛길은 농로(農路)와 연결된다. 언덕 위의 ‘동서로’와 나란히 나있는 농사용 길인데, 이곳에서는 왼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물기를 머금은 땅에 새파란 기운이 감도는 것이 눈에 띈다. 이를 본 집사람이 미나리꽝이란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나리가 제법 유명하단다. 논농사 보다 특수작물 재배가 소득이 몇 배나 높다보니 많은 농가가 미나리로 작목을 바꿨다는 것이다. 아무튼 미나리 하면 전주나 청도쯤으로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지식의 축적이라 하겠다.

▼ 살림꾼인 집사람의 촉이 오늘도 발동했다. 덜렁이인 내 눈에도 띄는 냉이가 그녀의 안테나를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저렇게 하나둘 주워 담은 냉이는 된장찌개로 변해 내일 아침쯤이면 우리 집 밥상 위에 올라올 것이다.

▼ 농로로 내려선지 17분(냉이 캐기에 바쁜 집사람 때문에 조금 더디게 걸었다). 동서로 아래로 뚫린 첫 번째 굴다리를 만난 지점에서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널따란 평야지대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이때 진행방향 왼편에서 동산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육지 속의 섬처럼 다가오는 의외의 풍경이 참 신선하다.

▼ 제3경인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창곡천교)를 통과하니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방향이 고작 둘(갯골생태공원/ 시청)뿐이니 썩 필요해보이지 않는 시설물이다. 거리 표시라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 갈대가 무성한 수로를 따라 8분(동서로에서는 17분)쯤 걷자 첫 번째 포인트인 ‘군자 갑문(군자양수장)’이 나타난다. 방조제로 인해 해수와 내수가 차단된 지역에서 내수를 바다 쪽으로 흘려보내기 위한 일종의 배수(排水) 시설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이따가 되돌아나가는 길에 길 찾기에 필요한 지점이니 기억해 두자.

▼ 늠내길 이정표는 또 하나의 굴다리를 지나가라고 지시한다. 이번에는 ‘마유로(시흥시 장곡동과 하중동을 잇는다)’의 아래로 내놓은 터널이다. 이곳에서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몇 만났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화창한 것이 달리기에 딱 좋은 날이다.

▼ 굴다리를 빠져나가니 널찍한 물길이 갈 길을 막는다. 저런 풍경, 즉 바닷물이 육지로 파고들어 형성된 자그마한 개울이 ‘갯골길’이라는 2코스의 이름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다. 갯가의 고랑을 뜻하는 말이 '갯골'이니 말이다. 

▼ 저 너른 수로를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순리를 따르려는 듯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물길을 따른다. 이때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타는 거대한 시설은 ‘흥부배수갑문’이다. 이따 되돌아 나올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시설이다.

▼ 흥부배수관문부터는 오솔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수로와 자전거길 사이의 좁디좁은 공간에 숲을 만들고 오솔길을 냈다. 식재된 식물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들을 읽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군자갑문을 지난 지 20분 만에 도착한 ‘갯벌생태공원’. 이층짜리 정자가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아치형의 다리가 또 다시 검문을 하잔다.

▼ 다리를 건너자 널따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잔디밭 곳곳에 텐트가 쳐져있는 걸로 보아 가족단위의 나들이 장소로 자리 잡았나 보다. 참고로 이 일대는 1930년대 중반 일제가 조성한 소래염전이 있던 곳이다. 갯벌 사이로 난 수로를 통해 소래포구로 부터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생산하면서 천일염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지만 채산성이 악화되며 1996년에 폐쇄됐다. 약 145만평의 부지의 염전에서 소금생산이 중단되자 일대는 예전 자연습지에서 자라던 동식물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생태환경이 복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넓은 습지와 갯벌이 독특한 생태환경을 연출한데다 인근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생태환경 1등급 지역으로 국가 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면적은 약 45만평이며 갯골을 따라 탐방코스가 마련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하여 정리했다)

▼ 공원입구에는 ‘안내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각종 체험장과 전망대, 습지센터 등의 주요시설 및 편의시설들을 표시해 놓았는가 하면, 30분에서 1시간, 2시간, 3시간까지 4개의 탐방코스를 선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나처럼 ‘늠내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 잔디밭 사이로도 길이 나있었지만 우린 늠내길 리본이 매어져 있는 벚꽃터널을 따랐다. 이때 데크로드에 전망대까지 갖춘 갈대숲체험장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새봄맞이를 위해 갈대를 베어낸 탓에 빈 터만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 조금 더 걸으면 해수체험장이 기다린다. 그런데 외관만 보아서는 여느 야외수영장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아무래도 풀에 민물 대신 바닷물을 넣는다고 해서 ‘해수’라는 접두사를 붙였나 보다.

▼ 벚꽃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갯골생태공원의 랜드마크인 ‘흔들 전망대’가 들어앉았다. tvN의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주인공의 사랑지수가 100% 충전되던 ‘바람 불어 좋은 곳’이다. 극중에서 박보검이 송혜교를 데려가던 곳. 즉 ‘바람 불어 좋은 곳’은 바로 저 ‘흔들 전망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저 전망대는 10.741㎜나 움직인다고 한다. 6층 높이가 다소 부담은 되지만 허용치인 42㎜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니 안전은 기본. 그저 짜릿한 흥분만 즐기면 된다. 박보검이 ‘바람 불어 좋은 곳’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나선형 구조의 전망대는 갯골에 부는 바람이 휘돌아 오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 원형의 나무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올라섰다. 높이가 22m나 되는, 그것도 나무로 만든 전망대라 그런지 걸음을 뗄 적마다 이름처럼 흔들거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무섭기보단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올라선 꼭대기는 갯골생태공원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시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나보다. 사방에 망원경을 배치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한참이나 더 당겨놓았다.

▼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갯골생태공원의 시설지구이다. 염전, 갈대. 해수 등 각종 체험장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염전을 제외하고는 길이 대부분 갯골을 닮은 듯 굽이졌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건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는 이곳 갯골생태공원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 반대 방향에는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순천만 갈대밭 못지않은 풍광을 지닌 곳이지만 갈대를 베어낸 곳도 많이 보인다. 새로운 갈대가 잘 자라나게 하려는 조치라고 한다. 불에 태우기도 한다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무튼 생태계는 돌고 도는 법. 새 생명이 꿈틀거리는 계절에 갈대는 새롭게 자라나 저 들판을 가득 채울 것이다.

▼ 전망대에서 내려서자 널따란 염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토판(土板, 1955년 이전의 흙으로 바닥을 깐 염전)과 옹패판(1955-1980년 초의 깨진 옹기조각으로 바닥을 깐 염전), 타일판(1980년 초-현재) 등을 시대별로 복원시켰는가 하면, 교육관 옆의 벽면에는 소금이 생산되는 전 과정을 타일화로 그려놓았다.

▼ 염전 앞에는 ‘소금놀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박스형의 바닥에 소금을 채워놓았는데 아쉽게도 금줄이 쳐져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어린이 놀이터에까지 미친 모양이다.

▼ 수차(水車) 같은 소금 생산을 위한 옛 기구들도 눈에 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그래선지 ‘엄마 없는 하늘아래’란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다는 안내판도 세워 놓았다.

▼ 시흥갯골역과 가릉가릉거리며 달렸다는 ‘가시렁차’도 복원되어 있다. 시흥은 소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시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염전'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30%가 생산되었을 정도로 이곳 시흥 일대가 온통 염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성을 잃은 염전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제는 시흥 역사의 일부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런 흔적 가운데 하나가 갯골생태공원이고, 그 핵심은 소금을 실어 나르던 ‘가시렁차’이다.

▼ 세월의 흔적은 소금창고로도 남아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40여 동의 소금창고가 갯골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2동만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쓸쓸하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창고는 엄청나게 튼튼한 모양새이다. 지금이야 값싼 소금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고가의 전매품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생태공원을 모두 구경했으면 이제 갈대숲 탐방로를 걸어볼 차례이다. 방산대교로 연결되는 제방길인데 ‘솔트베이 골프클럽’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게 된다.

▼ 오른편은 물론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갈대밭이다. ‘시흥갯벌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너른 갈대밭에는 갯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생태관찰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야자매트를 깔았는가 하면 물기가 있는 곳에는 데크다리를 놓아 무장애 탐방로로 가꾸었다. 하지만 걸어보지는 않았다. 방게와 농게가 서식한다지만 아직은 갯골 깊숙이 숨어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아름다운 다리 하나가 갈대밭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다. 다리의 이름은 ‘바라지’. 바라지란 '돌보다, 돕는다, 기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시흥에서는 방죽·논·간척지를 ‘바라지’라 불러오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간척지에 놓인 다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게 아니라면 갯골생태공원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는 다리일 게고 말이다.

▼ 염전을 나선지 25분. 작은 갯골을 가르는 다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탐방로는 이 다리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섬산캠핑장으로 연결되는 오솔길인데 지도는 이 구간을 ‘아카시길’로 표시하고 있었다. 길의 양편에서 가로수 역할을 하고 있는 아카시아나무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 아카시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나이스 샷!’이라는 골프장에서나 쓸 법한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골프장 하나가 아름다운 갈대밭을 독차지하고 있다. 폐염전 부지에 건설된 ‘솔트베이 골프클럽’으로 서해안의 바람, 환상적인 일몰, 염전 갈대 등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알려진 퍼블릭 골프장이다.

▼ 4분쯤 더 걷자 농경지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는 작은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너른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을 쏙 빼다 닮았다. ‘섬산’이란 지명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갈대밭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현재 ‘캠핑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섬산에서 되돌아 나와 방산대교 방향으로 향한다. 탐방로는 이제 제방(堤防) 위로 난 길을 따른다. 갯벌과 평야지대(염전이 있던 곳이 아닐까 싶다)를 나누는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뻗어나가는 모양새이다. 참! 이 구간의 초입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공원 이용객의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무엇에 대한 안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바닷물이 넘친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 제방길을 따라 걷다보면 드넓은 갈대밭과 그 속에 파묻혀있는 ‘미생의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갯골생태공원의 끝단에 자리한 자전거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로 시흥시가 지향하는 '미래를 키우는 생명의 도시'를 줄여서 만든 이름이고 한다. 늠내길의 반환점이기도 한데 일출 및 일몰 때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 섬산에서 빠져나온 지 40분. 방산대교에 다가갈 즈음에 갯벌이 있는 오른편으로 샛길 하나가 나뉜다. 탐방로는 이 갈림길을 따른다. 낚시와 취사, 동식물 채취 등을 금한다는 ‘시흥갯벌 습지보호지역’ 안내판에 늠내길의 리본이 묶여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잠시 후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늠내길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미생의 다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펄이 두툼하게 쌓인 갯골의 물길 위에 커다란 자전거의 뼈대처럼 서 있는 오묘한 형상의 이 다리는 잘 만들어진 앤티크 철제소품처럼 예쁘다. 그런 독특한 디자인(이걸 찍은 사진이 지난 2015년 올해의 토목구조물 사진공모전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기도 했단다)으로 인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시흥갯벌의 명물이 되었다. 아무튼 눈에 들어오는 다리는 그 구성미 자체만으로도 절경을 이룬다. 그렇다고 주변 경관을 빼놓을 수는 없다. 갈대밭이 우거진 넓은 평원과 구불구불한 갯골, 그리고 갈대밭을 헤집으며 난 늠내길 산책로 또한 그 절경의 한 축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 다리에 올라서면 방산대교 너머로 전형적인 도심 풍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어천마을 소래포구와 월곶포구는 이제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마천루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 다리에서 내려와 또 다시 제방길을 따른다. 갯골길의 북쪽 노선으로 아까 걸어오던 제방의 반대편 제방이라고 보면 되겠다. 두 제방 사이에는 ‘갯골’이 흐른다. 갯골이란 바닷물이 육지로 파고들어 형성된 자그마한 개울을 말한다. 대개는 강물이 하구까지 흘러가다 바다에 합류하는데 반해 갯골은 거꾸로 바닷물이 육지까지 밀려들어온다는 게 특징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현상인데, 이곳 시흥에 그런 갯골이 잘 발달되어 있단다.

▼ 갈대습지를 품은 북쪽 지역은 남쪽보다 훨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하도 넓다 보니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가지가지다.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마라톤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타고 갈대밭을 누비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 말이 들녘을 누빈다면, 하늘에는 ‘모터 행글라이더’가 창공을 휘젓고 있었다. 가벼운 엔진을 달고, 프로펠러로 추진하는 업그레이드 된 ‘행글라이더’이다.

▼ 갈대숲으로 덮인 갯골 너머로는 그보다도 더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그 평야도 역시 갈대밭이다. 세상이 온통 갈대로 뒤덮였다고나 할까? 그런 풍경에 도취되어 걷다보면 어느덧 ‘포동빗물펌프장’이다. 하천 범람으로 인한 침수피해 예방을 위한 시설인데 미생의 다리에서 30분쯤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 펌프장 근처에는 탐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갯골 방향에 둘러친 판자벽에 작은 구멍 몇 개를 뚫은 다음 그중 서너 곳에다 망원경을 설치했다. 새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자주 눈에 띄는 새들의 사진을 게시해놓았음은 물론이다. ‘국가해양습지보호지역’다운 시설이라 하겠다. 맞다. 다양한 생물의 서식처이자, 지형이 희귀한 시흥갯벌은 그 보전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전국에서 12번째로 국가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 시흥의 갯골은 아주 특별하다. 밀물 때면 바닷물이 갯골을 따라 육지 안으로 밀려오는 '내만형 갯골'의 특징대로 시흥의 갯골은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되었다. 미세한 플랑크톤에서부터 갑갑류와 어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관찰되는가 하면 멸종위기 2등급인 맹꽁이와 금개구리까지 산다는 것이다. 백로와 저어새, 기러기, 오리, 갈매기, 도요새 등 다양한 종류의 물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 이후의 갯길은 갯벌 생태계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구간으로 알려진다. 과거에 염전이었던 왼쪽으로는 염생식물이 뿌리내리고, 오른쪽으로는 누런 갈대밭이 펼쳐진다. 갯물과 육지 경계에서 자라는 갈대는 갯골길의 얼굴마담이다. 버려진 염전과 습지 곳곳에 자라면서 거대한 갈대 왕국을 이루었다. 특히 이 근처에서 만나는 갈대군락은 그 끝이 어디만큼일지 짐작되지 않을 만큼 총총했다. 그런 장점을 살리려했는지 관찰데크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안내판까지 세워 시흥갯골 갈대밭의 특징과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 포동펌프장을 스치듯 지나친지 30분 남짓. 능수버들 아래 터를 잡은 ‘갯골습지센터’를 만났다. 아까 염전에서 보았던 소금창고를 연상시키는 외관이 눈길을 끄는데, 내부는 시흥갯벌의 생태환경을 주제로 전시 및 교육 공간으로 꾸며졌다. '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는지', '갯골의 형성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서, 크게 염생식물(塩生植物, 염분이 풍부한 땅에 사는 식물의 총칭)과 저서생물(底棲生物, 바다 밑에 사는 생물들의 총칭), 조류(鳥類) 등으로 나누어 갯골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으로 나문재나 해당화, 퉁퉁마디 등의 씨앗과 약쑥과 갈대, 칠면초 같은 식물의 마디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시흥 갯골의 생태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 놓은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센터 앞 습지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금개구리와 맹꽁이의 대체서식지도 조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맹꽁이는 남양주시에서 이주해 온 것이란다. 다산신도시 건설로 인해 보금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갯골습지센터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부흥교를 건너 생태공원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직진을 해버렸다. 들머리에 매달려있는 늠내길의 리본만 보고 정규 탐방로라고 오판을 해버린 것이다. 잠시 후 리본이 끊겨버린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리 하나쯤 더 나올 것 같아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 그런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 15분이 조금 못되는 지점에서 ‘흥부배수갑문’을 만날 수 있었고, 갑문을 건너 정규 탐방로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군자갑문’을 다시 만났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걸어왔던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의 길을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갑문에서 합류되는 두 개의 하천 가운데 조금 더 큰 하천의 오른편 둑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트레킹날머리는 시흥시청역(원점회귀)

탐방로는 동서로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 모서리에는 ‘시흥시 쌀연구회 가공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시흥의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 즉 ‘햇토미’라는 브랜드의 쌀을 도정하고 모아두는 곳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동서로에 올라서게 되고, 이후는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면 된다. 오늘 트레킹은 4시간 30분이 걸렸다. 듬내길 지도가 내세우는 거리가 16㎞이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이는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다산길 7코스

 

여행일 : ‘20. 12. 23(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일원

산행코스 : GS25 화도묵현점→스타힐 리조트 입구→능선→천마산관리소 연결등산로→깔딱고개→바위능선→GS칼텍스 송라주유소(소요시간 :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남양주시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이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도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그런 특징들을 연결시켜 놓은 트레일(trail)이 바로 ‘다산길’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GS25 화도묵현점(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435-4)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가 100명을 넘기자마자 나 스스로가 여행을 중단했었다. 그게 벌써 6주. 그 시간을 이용해 그동안 게으름을 피워오던 여행기까지 마무리 짓고 나니 이젠 소일거리까지 떨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먼 거리의 여행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거주지 근처의 둘레길(다산길 7코스)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석역 앞에서 65번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스키장입구 사거리’ 정류장에서 내려면 된다.

▼ 다산길은 모두 13개 코스(169.3㎞)로 이루어져 있다. ‘다산’이란 이름은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호에서 따왔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두물머리(남양주시 조안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학정신이 깃든 길을 걸으며 역사의 향기를 음미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양주시의 초심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 지난번에 찾아봤던 6구간에 이어 이곳 7구간도 관리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 이정표 등의 편의시설도 모조리 제거시켜버렸음은 물론이다. 둘레길 마니아들 대부분이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감안해 볼 때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7코스인 ‘마치고개길’은 남양주시청에서 시작해 백봉산과 마치고개를 거친 다음 ‘가곡리 은행나무’에서 종료되는 20.3㎞짜리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절반만 걸어보기로 했다. 20.3㎞라는 거리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남양주시청에서 마차고개까지의 등산로는 꽤나 여러 번 걸어봤기 때문이다. 아무튼 7코스는 구간 전체가 산길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다른 구간들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 편의점을 왼쪽에 두고 난 길(먹갓로). 그러니까 천마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의 이름인 ‘먹갓로’는 이곳이 ‘먹갓 마을’임을 의미한다. 검은 갓을 만들던 고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말총갓을 살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선비들이 직접 종이로 갓을 만들고 먹을 갈아 검게 물들여 쓰고 다녔다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쯤이면 ‘천마산 스키장’ 입구에 이른다. 1982년 개장된 국내최초의 ‘4계절 전천후 스키장(비시즌에는 인조 잔디 슬로프 운영)’이라는 명성에 더해 서울 도심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추고 있다. 현재는 ‘스타힐 리조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 탐방로는 스키장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담벼락에 붙여놓은 ‘산삼마을’이나 ‘사슴농장’의 방향 표시를 보고 진행하면 되겠다. ‘(주)오선 의료기’의 담벼락을 끼고 모퉁이를 돌면 전형적인 시골길이 길손을 맞는다.

▼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는 ‘오선연수원’으로 연결되는 포장길을 버리고 왼편의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산삼마을’의 이정표도 아직 왼편을 향하고 있다.

▼ 작은 개울을 오른편 옆구리에 꿰찬 임도를 따르다보면 ‘고인돌’을 빼다 닮은 멋진 바위를 만나기도 한다.

▼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솟아오른 삼나무 아래에는 체육시설이 자리 잡았다. 기구에 매달려 몸을 풀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저 아래 ‘먹갓 마을’ 주민들인 모양이다.

▼ 바가지까지 놓아둔 약수터도 만날 수 있었다. ‘먹는물 수질검사성적서’는 보이지 않으나 ‘약수터 이용시 주의사항’이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먹을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터를 지났다싶으면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오른편은 봉선암으로 가는 길. 산삼마을 이정표도 이곳에서 이별을 고한다. 탐방로는 물론 왼편 임도를 따른다.

▼ 오른편으로 보이는 저 건물이 ‘봉선암’일지도 모르겠다. 여염집을 닮았지만 마당에 돌탑과 석불을 거느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봉선암’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 도심에 가까운 산인데도 불구하고 숲은 제법 깊다. 여름철 산행지로 괜찮겠다는 얘기이다.

▼ 오래 묵은 나무 아래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들어앉았다. 서낭당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기도를 드렸던 흔적까지 보이니 여간 범상스럽지가 않다. 하긴 오가는 길손의 수많은 염원들이 알알이 배어있는 돌멩이일지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으랴.

▼ 봉선암을 지난 지 30분 만에 주능선에 올라섰다. 사거리라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데다 천마산으로 오르는 왼쪽 등산로가 훨씬 더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고개를 넘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 다산길은 이제 천마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능선들을 횡으로 째며 이어진다. 천마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한적한 산행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 오르내리는 산길이 가파른데다 어설프게 내린 눈까지 더해져 꽤나 미끄럽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보드라운 흙길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였으니 까짓 넘어져봐야 엉덩이 한 번 털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벤치 두어 개와 평상을 놓아둔 쉼터가 나온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게 여름철에는 최상의 휴식처로 부족함이 없겠다.

▼ 쉼터 옆에서 천마산관리소에서 올라오는 주등산로를 만났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주등산로와 합류해 정상으로 향한다. 주등산로인데도 불구하고 산길은 가파르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를 그리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 고통스런 오름짓이 한동안 계속된다. 그러다가 만나게 되는 ‘약수터’는 목마른 나그네에게는 한줄기 빛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마시기에는 왠지 께름칙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바가지까지 놓아두었지만 물이 고인 형태의 샘인데다 ‘수질검사 성적서’ 도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약수터 위에는 벤치도 놓아두었다.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해두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또 다시 시작된다. 오늘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하긴 오죽했으면 ‘깔딱고개’라는 지명까지 붙여놓았을까.

▼ 그렇게 15분쯤 올라섰을까 이번에는 아예 나무계단이다.

▼ 계단이 긴 탓인지 이용하는 사람은 썩 많아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은 대부분 ‘갈 지(之)’를 그리고 있는 옛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 계단의 끄트머리. 힘들게 올라선 능선에는 간이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은 이곳을 ‘깔딱고개’라 적고 있다. 숨을 깔딱깔딱 거려야만 오를 수 있는 힘든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이정표(천마산 정상← 1.45㎞/ 관리사무소↓ 1.43㎞)는 두 방향만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편으로도 길이 또렷하다. ‘너구내 고개’로 연결되는 길이다.

▼ 정상으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의 능선을 타기로 했다. 4년 전에 ‘다산길’을 답사했다는 어느 마니아의 후기에 오른쪽으로 내려가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산길 7코스’의 운영이 중단된 지금은 이마저도 치워버렸다. 오로지 선답자의 후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 능선은 계속해서 오름짓이다. 거기다 바위까지 심심찮게 나타난다. 복사해 온 후기는 가파른 내리막에 흙길이라는데도 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진행해보기로 했다.

▼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이 바윗길로 변했다.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널린 멋진 구간이다.

▼ 산길은 끝내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그것도 이력이 붙은 산꾼들이나 다닐 법한 험상궂은 바윗길이다. 위험구간마다 밧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지자체의 시설물이 아니라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한 곳에 이르자 산길은 바위절벽 아래로 우회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산비탈을 헤집다보니 길이 제대로 나있을 리가 없다. 길이 좁은데다 떡갈나무 잎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엔 최소한 중상이니 그저 조심할 수밖에 없다.

▼ 산길은 능선의 위와 산비탈을 번갈아가면서 이어진다.

▼ 이곳에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돌탑이 세워져 있다.

▼ 고개를 돌리자 빈 가지 사이로 천마산(天摩山, 812m) 정상이 내다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이성계가 천마산 언저리를 지나다가 산이 매우 높은지라 지나가는 촌부에게 산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모른다고 하자 ‘가는 곳마다 청산은 많지만 이 산은 매우 높아 푸른 하늘에 홀(忽)을 꽂은 것 같아, 손이 석자만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고 혼잣말을 하더란다. 하여 산의 이름이 천마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는 ‘天馬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 또 다시 나타난 거대한 암릉, 산길은 더 이상 능선을 고집하지 못한다. 이번 것은 전문산악인도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바위가 험해 넘을 수 없으니 낸들 어쩌겠는가. 절벽 아래서 길을 찾아낼 따름이다.

▼ 조심. 또 조심이다. 발아래 절벽만 조심해서 될 일은 아니다. 자꾸만 배낭을 건드리는 위쪽 바위도 경계 대상이다. 바위에 배낭이 걸려 자칫 중심이라도 잃을 경우에는 큰 사고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 489.1m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내리막길로 변한다. 드디어 하산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 내려가다 보면 조망이 트이는 곳도 만나게 된다.

▼ 비록 빈 나뭇가지 사이이지만 가곡리 일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잠시 후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거기다 떡갈나무 잎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 짝이 없다.

▼ 그래선지 누군가가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가느다래서 믿음은 가지 않지만 이의 도움 없이는 내려서기 힘든 구간이다.

▼ 춤을 추다시피 하며 내려서는 집사람의 뒷모습이 차라리 애처롭다. 나 역시 이 구간에서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 계속해서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 얼마쯤 내려섰을까 바닥에 샌드백이 나뒹굴고 있다. 어느 젊은이의 무도 연습장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동네에 가까워졌나보다.

▼ 하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렇다고 지루해 할 틈은 없었다. 하도 미끄럽다보니 주변을 둘러볼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깔딱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10분. 드디어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풍경이 나타난다. 능선을 다듬어 묘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너머로 아파트단지까지 고개를 내민다. 선답자의 후기에는 보광사로 연결되는 임도가 나타난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섰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린 ‘보광사(寶光寺)’를 둘러보지 못했다. 고려 광종 때 혜거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 절은 고종(조선시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이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폐사되다시피 한 것을 1984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이유원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은 이회영 형제의 둘째 이석영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석영은 만석꾼이었던 이유원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 묘역 아래 잣나무 숲은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거기다 안성맞춤으로 반석까지 보이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을 안주삼아 준비해간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집까지 걸어버렸다. 얼큰하게 술이 올랐는데 까짓 3킬로쯤 더 걷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 잣나무 숲을 벗어나자마자 도로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눈에 익은 풍경이 아닌가. 다산길 7코스의 종점인 ‘가곡리’는 초행길인데도 말이다. 길을 잘못 들었음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덕분에 ‘다산길 7코스’ 답사는 1/4도 채 걷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2시간 40분이 걸렸다. 오랜만에 길을 나섰고 구간 전체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힘든 여정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 그렇게 내려선 곳은 ‘GS칼텍스 송라주유소(화도읍 묵현리 159-3)’ 옆. 마석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30번, 330번)는 100m쯤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너구내 고개’에서 타면 된다. 그나저나 날머리가 바뀐 탓에 가곡리(가오실 마을)의 명물인 ‘공손수(公孫樹)’. 즉 수령이 무려 55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를 구경하지 못했다. 조선 성종의 손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경기도 제1호 보호수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공손수(公孫樹)란 아버지가 심은 나무(은행나무)가 30년가량 지난 뒤 손자가 태어날 무렵이나 돼야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성호 수변길

 

여행일 : ‘19. 12. 1(일)

소재지 : 전남 장성군 장성읍

코 스 : 장성호 입구→댐 관리소→출렁다리→장성호 입구(소요시간 : 3km/ 1시간 남짓)

 

함께한 산악회 : 가족나들이

 

특징 : 벌써 1년 전이다. 광주에서 살고 있는 남동생으로부터 딸을 결혼시킨다는 연락이 왔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다소 무리인 거리이다. 그래서 하룻밤을 광주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고, 이왕에 내려갔으니 일정을 더 추가해 주변 관광지 몇 곳을 둘러보자는 의견이 여동생들로부터 나왔다. 2박3일의 여행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하지만 느닷없이 내린 가을비로 인해 일정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그게 마땅찮아 나들이 결과의 정리를 내팽개쳐왔다. 그렇게 방치된 지 벌써 1년,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여 소일거리가 없어지다 보니 옛 자투리들까지 끄집어내게 됐고, 거기다 당시 다녀왔던 ‘장성호 수변공원’이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지인의 귀띔까지 전해졌다. 그가 찍은 최근의 사진 두어 장을 덧붙여가며 옛 생각들을 끄적거려나가는 이유이다.

 

▼ 결혼식장이 ‘김대중 컨벤션센터’ 근처라기에 결혼식보타 1시간30분 먼저 광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컨벤션센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김대중 컨벤션센터’는 광주광역시(서구 치평동)에 들어서 있는 국제 전시 및 회의용 편의시설로 2005년 9월 6일 문을 열었다. 당시 규모는 지상 4층(지하 1층)에 연면적 11,966평. 2013년 3,000석 규모의 다목적홀과 19개의 중소회의실을 증축한 제2센터를 개관하여 현재는 전시면적 12,027㎡에 회의실면적 4,313㎡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광주전시컨벤션센터(Gwangju Exhibition and Convention Center, GEXCO)’이었으나 개관이전 국제적인 전시회 또는 컨벤션을 주관·개최하거나 컨벤션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활동의 파급력을 높이기 위하여 '김대중'이란 인명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란 판단 아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전허락을 받고, 광주 시민의 여론수렴 절차를 거쳐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 ‘김대중 컨벤션센터’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공공시설이다. 그래선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김대중 홀’이 손님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온 일생을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떤 업적들을 남겼는지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관심도 오로지 이곳뿐이다.

▼ 2006년에 문을 연바있는 이 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을 알려주는 기념공간이다. 그러니 중앙은 오로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몫. 중심에 그의 흉상을 배치했다. ‘인동초(忍冬草)’ 또는 ‘한국의 넬슨 만델라’로도 불리는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가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 좌우로는 정치가 김대중/ 인간 김대중/ 노벨평화상 및 남북정상회담/ 국민의 정부/ 동영상 및 각종 기록물/ 소장품 및 기념물 등의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놓았다. 아래 사진에서 우측 하단에 살짝 보이는 도자기의 ‘관인후덕(寬仁厚德)’이란 글씨는 ‘이희호 여사’가 직접 썼다고 한다. 이는 ‘어질고 너그럽고 온후하며 덕이 두터운 사람이 되자’는 뜻. 가슴에 담아둘만한 사자성어라 하겠다. 예로부터 관인후덕한 군자들에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곧 자산인데 그런 이들이 어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서울 김대중도서관에서 기증했다는 ‘평화의 나무(높이 3m, 너비 2m)’가 눈길을 끈다. 노벨평화상 메달 홀로그램과 동영상 모니터가 부착된 월계수 모양의 구조물인데, 2002년 8월 스웨덴 노벨재단과 노벨박물관, 한국의 호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노벨상 100주년 기념’의 서울전시회(주제: 창조성의 문화-개인과 환경)에 전시되었던 것을 김대중도서관이 기증받아 전시해오다가 2006년 ‘김대중 컨벤션센터’에 다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 전시품 중에는 ‘IOC 올림픽 금장’도 있었다. 이밖에도 그가 찼던 시계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 노벨평화상 증서 및 메달의 복제품, 분노의 메아리 등 서적, 옥중 작사한 시조 CD와 악보, 시사 잡지, 목판 어록, 핸드 프린팅, 친필휘호 등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1980년 7월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청주 교도소에서 1982년 12월까지 입었다는 수의가 눈길을 끌었다. 수의번호는 ‘9번’이었단다.

▼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사용하던 식기 세트도 전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하얀색 톤. 대통령 휘장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문양이 담백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 오른편에는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강복장(강복을 했다는 증서)도 전시되어 있다.

▼ 예식장에서 피로연 겸 이른 저녁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혼주 측에서 예약해놓은 숙소는 나주시에 있는 ‘중흥 골드 스파&리조트’. 나주호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삼은 물놀이장(스파) 겸 리조트이다. 토네이도, 워터롤러코스터를 비롯한 각종 테마 물놀이시설과 수상레포츠, 36홀 규모의 명문 골프클럽을 부대시설로 갖고 있다. 나주시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 광주광역시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이유이다. 리조트의 규모도 크다. ‘스파동’과 ‘골드동’으로 나누어지는데, 19평에서 57평까지 다양한 평수의 방들을 199개나 보유하고 있다.

▼ 물놀이 공간은 텅 비어있다. 워터롤러코스터와 패밀리슬라이드. 아마존리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름철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파도풀과 아쿠아플레이어, 토네이도, 레이싱슬라이드 등은 겨울철에도 운영한다고 했는데 들러보지는 않았다. 아니 여행지를 급히 바꾸느라 찾아가 볼만한 여유도 없었다.

▼ 리조트 앞에는 ‘2천년 시간여행, 나주’라는 제목의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여행지를 나주 읍성권과 영산포 근대문화권, 나주호·다도권역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나주 영상테마파크와 반남 고분군도 따로 표시해 놓았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길을 나서기가 무서울 정도로 늦가을 빗줄기가 거세다. 나주에서의 일정을 포기하고 장성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이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투어를 시작해보기 위해서이다. 거기다 ‘방장산 자연휴양림’이라는 멋진 숙소가 여행지를 변경하는데 크게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은 ‘장성호(長城湖)’. 옮기려는 숙소의 예약 등을 챙기느라 출발이 늦어진 덕분인지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졌다. 장성호는 1976년 영산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된 댐이다. 장성읍 용강리에 높이 36m, 길이 603m의 댐이 건설되면서 넓은 호수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동안 생활용수와 농업용수, 내수면 양식 등으로 지역민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지만, 지금은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된 수변길과 출렁다리가 지역의 새로운 명물이자 장성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호수 면적만 1만2천㏊로 내륙의 바다로도 불리는 장성호에 수변길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 2017년. 폭 1.8m 남짓의 목재 데크가 드넓게 펼쳐진 호수의 풍광과 시원하게 드리운 나무 그늘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아름다운 풍광과 스릴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도록 출렁다리도 두 개나 놓았다. 이 아름다운 수변길은 한국관광공사가 2018년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걷기 길에 선정되기도 했다.

▼ 수변길 탐방의 시작은 장성호 입구의 주차장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걷기는 장성호의 제방(堤防)으로 올라서면서 부터다. 제방은 긴 계단을 힘들여 오르거나, 에둘러 올라가는 길을 따르거나 해야 한다. 참! 직선으로 된 계단의 왼편에 무장애 탐방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계단이 없는 데크길을 별도로 만들어 휠체어나 유모차를 타고서도 수변길을 돌아볼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 장성호의 제방 위로도 길이 나있었다.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는 ‘황금빛 출렁다리’와 연결시킬 새로운 탐방로이자 기존의 ‘출렁길(제방 좌측의 탐방로)’과 더불어 새로운 명품 길로 탄생하게 될 ‘숲속길(3.7㎞)’이기도 하다. 나무와 물이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장성호 풍경이 두 개의 출렁다리와 어우러져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단다.

▼ 탐방로는 ‘장성호 관리소’의 뒤로 열린다. 제방의 왼편, 그러니까 관리소에서 시작해 북이면 수성마을에서 끝나는 이십 리의 이 길은 최근 ‘출렁길’로 이름 붙여졌다. '출렁다리로 향하는 길'을 뜻한단다. 그래선지 들머리의 이정표에도 출렁다리까지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아무튼 이 길은 장성호의 굴곡을 따라 유순하게 흐르는 아주 편안한 길이라서 가족과 함께 걷기에 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음이온이 풍부한 길을 걷다보면 시원한 산바람과 바다를 닮은 광활한 호수 덕에 지루함을 느낄 틈도 없단다.

▼ 제방에 올라서자 ‘영산강유역 농업개발 기념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장성댐은 1973년에 시작돼 1976년에 준공됐다. 백암산과 입암산 계곡을 따라 흘러온 물을 담은 농업용 댐으로 영산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막고, 농업용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데 목적을 뒀다.

▼ 농어촌공사의 로고로 보이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농어촌과 백년, 물 관리로 천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눈길을 끈다.

▼ 관리소의 뒤. 호수 가장자리에는 ‘취수탑’이 들어섰다. 장성호는 호남의 젓줄인 영산강에서 가장 긴 지류인 황룡강의 물길을 막아 생긴 인공호수이다. 1976년에 완공 되었으니 44년이 되었다. 맑은 물과 지천으로 잡히던 물고기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지만, 대신 생긴 장성호는 수상관광지로 발돋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 관리소를 지나자마자 길은 ‘수변길’과 ‘임도’로 나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간 중간에서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제2 출렁다리’가 완공되지 않은 지금 수변길은 편도이다. 장성호 관리소부터 수성마을 버스종점까지는 7.5km. 수변길 보다 조금 안쪽으로 임도와 등산로가 있어서 겹치지 않는 노선으로 왕복할 수도 있지만 임도나 등산로는 수변길 보다 오르내림이 있어 조금 힘이 든다.

▼ 수변길 입구 오른편에는 ‘장성호 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입구가 막혀있을 뿐만 아니라 정박하고 있는 배도 보이지 않는다. 요트라도 두어 척 정박되어있으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될 터인데 아쉬운 일이다.

▼ 탐방로는 호수를 둘러싼 산 안쪽 벼랑을 따라 놓여 있다. 산에서 뻗어 기울어진 나무가 데크길 위를 덮어 호수와 함께 수변길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지금은 비록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내다보이지만, 철따라 색깔을 바꾸며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멋진 파노라마를 연출해왔을 것이다. 새싹이 피는 봄은 물론이고, 여름에는 나무들이 데크 길 위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 잎이 진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햇살이 가득 들어올 텐데 빗줄기가 이를 막고 있다. 집사람의 손길이 옷깃을 여미기에 바쁜 이유이다.

▼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기온까지도 크게 떨어뜨렸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텅 비어있다. 하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씨가 쌀쌀한데 이를 말이겠는가. 하지만 비어있는 길이 우리에겐 오히려 득이 된다. 호젓하게 거닐며 맑은 호수가 빚어내는 잔잔한 물결소리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 탐방로 군데군데 쉼터도 만들었다. 벤치 서너 개에다 식탁까지 배치했는데 하나같이 호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어떤 곳에는 긴급 구호장비도 비치해 두었다. 참! 두 번째 쉼터는 임도(이정표 : 출렁다리 0.6㎞/ 임도/ 장성호 입구 0.6㎞)와 연결되고 있었다. 초입에서 갈려나가는 임도를 따랐다면 이쯤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

▼ 수변길이 모두 데크로 된 것은 아니다. 맞다. 고즈넉한 숲길로 이루어진 수변길은 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사람의 발자취가 사라졌지만 최근 끊겨 있던 길을 나무 데크로 잇고 쉼터를 만들어 걷기 좋은 길로 다듬었다. 그 결과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간직한 아름다운 길로 다시 태어났다.

▼ 호숫가의 가파른 벼랑을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성호의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다리 한쪽에선 숲의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를, 다른 한쪽에선 호수의 물이 벼랑을 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힐링의 최적지이다.

▼ 수변길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장성호를 한바퀴 도는 34km 길이의 ‘장성호 100리길’이 원래 계획. 이 가운데 장성호 제방에서부터 북이면 수성리까지 나무데크길과 기존 임도가 섞인 7.5km 구간이 조성되자 이곳을 관광객에게 먼저 개방했다. 그래선지 탐방로 주변은 아직도 공사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필수시설이라 할 수 있는 매점까지도 시설공사가 절반도 끝나지 않았다.

▼ 아래 사진은 최근에 다녀온 지인이 찍은 매점(편의점)의 사진이다. 공사를 마치고 ‘출렁정’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단다. 비치파라솔을 배치해 경관 좋은 곳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했음은 물론이다.

▼ 휴게소에서 우린 ‘옐로우 출렁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작년 6월에 개통한 옐로우 출렁다리는 장성호 여행의 ‘핫플레이스’로 통한다. 많은 방문객들이 SNS를 통해 사진과 후기를 공유하면서 입소문이 인기를 더했다. 다리 앞에 서면 먼저 두 마리 황룡의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21미터의 주탑부터 보는 이를 압도시킨다. 강물 속에 숨어 살던 용이 마을 사람들을 몰래 도왔다는 황룡강의 전설이 모티브다.

▼ 다리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길이 154미터에 폭은 1.5미터라고 한다.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주탑의 높이도 21미터나 된단다. 참! 명색이 출렁다리인데 주의사항 하나쯤 없겠는가. 뜀박질 금지는 물론이고, 사진을 찍는답시고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아달란다. 그리곤 강풍이나 강우시에는 통행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강한 바람에도 끄떡없으며 동시에 1,000명이 통과해도 이상이 없다던 기사는 뭐란 말인가.

▼ 아래는 ‘옐로우 출렁다리’의 전경으로 홍보용 사진을 빌려왔다. 출렁다리는 수변길 시작점에서 1.2km 지점과 2.7km 지점을 연결한 다리다. 다리 양 끝에서 비상하는 황룡(黃龍) 두 마리를 형상화한 21m 높이의 주탑(柱塔)이 우뚝 솟아오르는 모양새의 현수교(懸垂橋)이다. 장성의 젓줄인 황룡강의 설화 속에 등장하는 황룡을 '옐로우시티(Yellow-City)'로 힘차게 도약하는 장성군의 이미지로 잘 표현했다 하겠다.

▼ 호수는 추위가 더해질수록 물빛은 맑고 더 깊어지는 게 특징이다. 또 겨울바람이 일으키는 잔잔한 물결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다. 하지만 집사람에게는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다. 늦가을 차가운 비로 인해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모자까지 푹 뒤집어썼음에도 연신 옷깃을 여미고 있다.

▼ 출렁다리는 수변길에다 걷는 재미를 더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장점은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고, 호수도 한층 가까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 위에 서면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철이면 저 풍경화에는 제트스키 등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덧칠해 질 것이다. 그런 빼어난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걷기길’로 선정되었는가 하면, 최근에는 전라남도가 추천하는 대표 관광지에도 이름을 올렸다.

▼ 아래는 날씨가 좋았을 때 찍은 다른 이의 사진을 빌려왔다. 누군가 그랬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서러움으로까지 연결된다고. 맞다. 눈물 한 방울 떨구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 출렁다리는 수변길에서 느끼는 백미 중 단연 으뜸이다. 다리를 건널 때 위·아래, 옆으로 흔들리는 느낌과 장성군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결합해 옐로우 출렁다리로 이름 지었다. 다리의 넓이는 1.5미터, 좁은 듯 보이지만 진행 방향이 다른 두 성인이 겹쳐 지나가더라도 불편하지 않다. 다리 한가운데는 탁 트인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 다리의 양쪽. 주탑의 와이어를 고정시키는 핀 역할을 하는 곳에는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앞에는 ‘yellow city 장성’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수변길, 아니 수변길 말고도 장성 땅 곳곳에서 이 표어는 눈에 띈다. 무슨 뜻인지 무척 궁금했다. ‘노란색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자연친화적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황색은 황제의 색이기에 최고를 의미하며, 우리의 전통 색인 오방색 중에서 가운데의 색이라서 지리적으로 호남의 중심에 있는 장성을 잘 표현하는 색이고, 부를 상징하며, 장성을 수호하는 황룡(黃龍, 장성은 영산강의 가장 긴 지류인 黃龍江이 흐르는 지역이기도 하다)의 색이기도 하단다.

▼ 출렁다리의 북단도 편의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매점과 카페, 분식점에 화장실까지 들어설 예정이란다.

▼ 아래 사진은 시설공사가 끝난 후의 북단 풍경이다. 다리 건너의 ‘출렁정’과 함께 이곳 ‘옐로우 출렁다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휴게소, 즉 ‘넘실정’이다. 로컬브랜드로 보이는 ‘여우愛김밥’과 라면, 떡복이 등을 파는 곳이니 편의점보다는 간이음식점에 가깝다 하겠다. 그 옆에는 카페도 들어서 있다.

▼ 출렁다리를 지나자 임도와 데크가 나란히 뻗어있다. 데크의 끝 오른쪽으로 수변길이 이어지는데, 걷기에 편한 황토길이 좌우로 꿈틀대며 뻗어 나간다. 이런 풍경은 ‘출렁길’이 끝나는 수성마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에는 오색의 리본들이 한 가득이다. 이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매달아놓은 모양인데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킬 정도다. 출렁다리의 개통과 더불어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1년 동안의 방문객수가 30만 명을 넘겼고, 주말이면 5천명 이상 찾는 핫플레이스라는 기사 말이다.

▼ 길가 조그만 공터에는 식탁형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안내도에 이 부근을 ‘피크닉장’으로 표기했었는데 이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제2 출렁다리’가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추가 탐방은 무의미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수변길이 편도형 노선이었으니 종점까지 가지 않을 바에는 그만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갈 때는 임도를 따라보고 싶었지만 땅이 질어 이 또한 그만두기로 했다. 갈 때와 올 때의 시야가 달라지기에 길은 같아도 새로운 맛이 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아무튼 우리 일행은 출렁다리를 마지막으로 원점회귀를 했다. 이후의 사진은 지인이 촬영했다는 최근 사진이다. 장성군에서 올해 '황금빛 출렁다리'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 다리는 첫 번째 출렁다리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단다.

▼ 용곡리에 세워진 이 다리의 길이는 154미터. ‘옐로우 출렁다리’와 똑 같은 길이이나 폭은 30센티가 더 넓다. 아니 더 큰 차이점도 있다. 현수교(懸垂橋). 즉 양쪽에 주탑(柱塔)을 세운 뒤 케이블을 이용하여 도로 상판을 지탱하고 있는 첫 번째 다리와는 달리, 다리를 지탱하는 케이블을 주탑 대신 육상 구조물에 연결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앙부로 갈수록 수면에 닿을 듯 내려가는 짜릿함을 선사한단다.

▼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마치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는 것 같다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주위가 온통 호수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란다. 하긴 주탑이 없는 저런 ‘U’자 형 다리는 다리 중심부로 향할수록 수면과 가까워지는 게 특징이다. 특히 이곳 ‘황금빛 출렁다리’는 한가운데 도달하면 물 위에서 불과 2∼3m 밖에 떨어지지 않는단다. 중앙부로 다가갈수록 위아래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흔들거리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맛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단지 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큰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 다리 끝에는 황룡강의 용(龍) '가온'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빨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모습이다. 조형물 뒤로는 3층짜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가온은 황용강에서 산다는 용이다. 낮에는 강물 속에서 숨어살다가 밤이 되면 뭍으로 올라와 사람으로 둔갑해 마을 사람들을 몰래 도왔다고 한다.

▼ 다시 돌아온 제방. 댐 아래에는 행사용 몽골텐트가 여러 동 처져있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을 위한 간이휴게소 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판매하는 직거래 장터이다. 특히 요기를 할 수 있는 포장마차도 들어서있어 가을비의 쌀쌀함으로 인해 가뜩이나 허기졌던 속을 따끈하게 풀어줄 수 있었다. 물론 막걸리와 함께이다. 참! 2020년 7월부터는 수변길의 입장료(3,000원)를 받고 있다는 지인의 얘기를 깜빡 잊을 뻔했다. 하지만 무료나 마찬가지라는 귀띔도 있었다. 주말과 공휴일에 한해서 받는데다, 탐방을 마치고 나면 이마저도 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이지 싶다.

▼ 이왕에 장성에 왔다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筆巖書院)도 꼭 둘러볼 것을 권해본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필암서원’이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과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 등이다.

▼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에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賜額)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속에 살아남았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건축물인 '확연루(아래 사진)'의 현판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글씨며, 서원에서 보기 힘든 화려함을 지닌 경장각에는 인종의 묵죽도 판각과 정조의 편액 등 소중한 사료들이 소장돼 있다.

▼ 장성은 풍천장어로 유명한 ‘고창’의 옆 고을이다. 그러니 맛보러가지 않고 어찌 배길 수 있겠는가. 지인에게 연락해서 찾아낸 곳은 고창산 풍천장어만 취급한다는 ‘금단양만’이다. 1층에서 장어를 구입한 뒤 2층으로 올라가 무료로 구워먹는 시스템이다. 이때 2층에서는 불과 석쇠판만 제공해주고 나머지 양념이나 반찬 등은 셀프로 먹을 수 있다. 가격은 1킬로그램에 6만8천원으로 저렴한 편이며, 식사는 공기밥 1개에 1천원으로 된장국과 함께 제공된다.

▼ 저녁은 ‘국립방장산자연휴양림’에서 머물기로 했다. 나주의 숙소를 나서기 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공실이 없기로 유명한 국립휴양림인데도 불구하고 빈 방이 생겼음에 감사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1999년에 개장했다는 방장산자연휴양림은 다양한 수종의 활엽수와 편백나무 등이 자생하여 아름다운 경치와 신선한 피톤치드가 넘실대 가족 단위로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최근에는 청·장년층 이상이 즐겨하는‘아로마 천연테라피 체험’과 ‘편백 건강 베개 만들기 체험’, 청소년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에코어드벤처 체험’등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산림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방장산의 품에 안겼지만 정상을 오르는 것까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12년 전. 이곳 방장산의 자랑거리인 심설 산행 때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 전라 남·북도의 경계지역에 걸터앉은 방장산(743m)은 주변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신비한 구름속에 가려져 있다해 예부터 지리·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렸다. 또한 조선 문종(1451년)때 편찬된 '고려사 악지'에 도적떼들에게 잡혀간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해주러 오지 않자 이를 애통해하며 부른 노래인 '방등산가'의 유래지기도 하다. 참고로 ‘방장산’이란 지명은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과 비슷하게 생겼다며 같은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화사상’을 내 고향 근처에서 접하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얘기라니 어쩌겠는가.

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4. 2()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여행 둘째 날. 느지막이 아침 끼니를 때우고 나서 찾아간 곳은 이웃 고성군에 있는 상족암(床足巖)’.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는 유명세말고도, 바닷가에 넓게 깔린 암반과 암반 위로 솟아오른 기암절벽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여행지로는 이만한 곳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창선대교와 삼천포대교를 건너 대방교차로(사천시 대방동)’까지 나간 다음, 77번 국도의 하일면(고성군)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흥사거리(하이면 월흥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잠시 후 상족암군립공원(하이면 덕명리 제전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이곳 고성군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꼽힌다. 천연기념물(411)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공룡화석지는 백악기인 약 1~12천만 년 전의 공룡 흔적들을 보여주는데, 12종의 공룡 발자국과 공룡알, 공룡알 둥지, 새발자국 화석 등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상족암과 주상절리 등 자연이 빚어낸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혹시라도 어린이들과 함께 왔다면 공룡박물관도 꼭 둘러봐야 할 것이다. 단 매주 월요일은 박물관이 문을 닫는 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몇 곳의 민박집과 식당이 들어서 있는 제전마을은 상족암 군립공원의 중심축으로 수성암(水成巖)의 단애가 아련히 먼 시간 속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을이다. 거기다 몽돌과 은빛모래가 어우러지는 마을 앞 해변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티라노사우루스(폭군 도마뱀, Tyrannosaurus)’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바닷가에라도 서면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에 가득 차오른다. 해양수산부에서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마을 방파제로 가는 길 오른편에 절리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보인다.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형상, 즉 켜켜이 쌓아올린 시루떡의 모양으로 생긴 절리(節理)’. 절리란 암석에 규칙적으로 생긴 금을 말하는데, 지표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암석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절리는 화성암(火成岩)에서는 용암이 냉각할 때 생기는 수축으로 인해 생기게 되며, 퇴적암(堆積岩)이나 변성암(變成岩)에서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긴다.

 

 

들머리에는 여러 개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임을 알리면서 공룡이란 무엇인지와 공룡발자국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 발자국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았다. 다시 말해 공룡화석에 대한 교육장인 셈이다. 그 외에도 발자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읽어볼 일이다.

 

 

마을방파제를 지나면서 데크로드가 시작된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널따란 암반 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이 또렷하다. 이 일대에는 공룡 한 마리가 세 발자국 이상 걸은 보행렬이 25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무리 지어 있는 발자국은 초식 공룡이고, 홀로 찍혀있는 삼지창 모양의 발자국은 육식 공룡의 것일 확률이 높단다. 공룡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어디를 걸어 다니든 발자국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추론(推論)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룡 발자국 화석은 흔치 않다. 주로 공룡이 진흙을 밟았을 때만 남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고성은 어땠을까? 과거 이곳은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나 늪지대의 진흙 위를 공룡이 걸어 다녀 발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진흙에 남겨진 발자국 위에 흙이 쌓이며 돌로 굳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땅속에 있던 돌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남해의 바닷물이 그 돌 위를 들어오고 나가며 흙을 씻어내자 마침내 공룡 발자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룡은 발자국 모양에 따라 세 분류로 나뉘는데, 고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조각류가 60%, 용각류가 35%, 수각류가 5%란다. 또한 죽은 공룡의 골격 화석이 아닌, 살아있을 때 공룡이 걸어 다녔던 발자국이라니 한층 더 소중하다 하겠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공룡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공룡은 골반 모양에 따라 파충류와 비슷한 구조의 용반류, 새와 비슷한 골반을 가진 조반류로 나뉜다. 또한 발자국에 따라 뭉툭한 삼지창 모양의 조각류, 삼지창 모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수각류, 뭉툭한 발가락에 타원형의 발자국을 가진 용각류로 분류한다. 참고로 공룡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에 출연해 중생대 마지막인 백악기(白堊紀)에 그 수가 최대에 달했다.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화순·여수 등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백악기 공룡 화석지로 유명하다. 특히 경남 고성은 군 전역에 걸쳐 약 5100여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나왔다고 한다.

 

 

길은 잔도(棧道). 험한 벼랑에다 마치 선반처럼 달아냈다. 바다와 바위벼랑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탁 트인 바다풍경과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그리고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조성된 주상절리 등을 볼 수 있는 멋진 산책로이다.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바다 건너편으로 펼쳐진다. 이곳 상족암군립공원의 명물 중 하나인 병풍바위이다. 그런데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났다. 비취빛으로 물든 남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광유람선 한 척이 사량도 사이로 물보라를 가르며 지나가면서 그 그림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모퉁이 두어 개를 돌자 저만큼에 경남 청소년수련원건물이 나타난다. 경남 도내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설립된 시설로 현재 한국스카우트 경남연맹에서 위탁운영해오고 있다. 수련원은 4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 외에도 대강당과 야외공연장, 캠프파이어장, 운동장, 족구장, 배구장, 모험개척활동장, 수상활동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소년 수련원 앞에는 고성 공룡테마파크라고 적힌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청소년수련원에서 갖고 있는 부대시설들을 통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공룡박물관과 공룡공원 등 이곳 상족암군립공원 일대를 아우르는 말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원 너머로 공룡(恐龍)을 닮은 조형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공룡박물관 광장에 만들어놓았다는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 조형물일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공룡탑으로 높이가 무려 24m에 이르고 길이 34m에 너비도 8.7m나 된단다. 참고로 쥐라기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금까지 알려진 공룡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공룡이다.

 

 

수련원 앞의 해수욕장 역시 은빛의 고운 모래로 덮여있다. 그 뒤에 몽돌이 널려있음은 물론이다.

 

 

수련원을 지나면서 또 다시 데크로드가 이어진다. 산책로의 해안 쪽은 평탄하게 층을 이룬 퇴적암에 파도가 넘실거린다. 육지 쪽으로는 수 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수성암 해식애(海蝕崖)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다.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층리(Stratification)’라고 적혀있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층리(層理)란 퇴적물이 수평하게 쌓여 굳어져서 지층이나 암석이 만들어질 때 나타나는 나란한 줄무늬를 말한다. 퇴적물이 운반되어 퇴적되고 다져져서 단단한 암석으로 변한 것을 지층이라고 하는데, 지층은 각 층마다 퇴적물의 종류와 색깔, 알갱이의 크기, 퇴적 시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줄무늬, 즉 층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벼랑의 아래를 따르던 데크길이 잠시 위로 오른다. 그리고 고개 위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오르면 공룡박물관후문을 거쳐 유람선선착장으로 연결된다. 오늘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상족암은 데크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서야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서면 널따란 암반이 나타난다. 이곳이 상족암군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상족암(床足巖), 즉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된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이다. 하지만 아까처럼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얼핏 볼 경우 바닷가 바위에 살짝 팬 구덩이에 불과하니 꼼꼼히 살펴봐야만 공룡의 발자국임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눈에 익은 모양의 절벽들이 해안으로 펼쳐진다. 아까 데크로드를 따라 오면서 보던 모양들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내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던 그런 모양새들을 찾아낸다. 판상절리(板狀節理)란다. 절리란 암석이나 지층이 갈라지거나 쪼개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양에 따라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방상절리(方狀節理)로 나뉘게 된다. 이중 수평방향으로 발달된 절리를 판상절리라고 한다. 기둥모양으로 형성된 수직형의 절리를 주상절리, 그리고 두 방향 또는 여러 방향의 절리들이 교차하여 거대한 장방형이나 육면체로 잘리게 되는 것을 방상절리라고 부름은 물론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관심은 공룡발자국 보다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쏠려있나 보다. 바닥을 살펴보는 사람들보다는 해벽동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이렇게 고운 풍경화가 펼쳐지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상족암(床足巖)은 층암단애(층층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여간 범상스러운 게 아니다. 암벽 깊숙이 동서로 되돌아 돌며 암굴이 뚫어져 있는 것이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족(床足)’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여러 개의 다리모양 같다 하여 쌍족또는 쌍발이라고도 불린다.

 

 

높고 낮으며, 넓고 좁은 굴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돌들이 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태고에 선녀들이 내려와 석직기를 차려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 상족굴이고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은 선녀탕이라 불려오고 있다. 지금도 돌 베틀모양의 물형과 욕탕모양의 웅덩이가 굴 안에 존재하고 있다니 관심을 갖고 살펴볼 일이다.

 

 

상족암 해식동굴은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시달린 흔적이다. 그 흔적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기기묘묘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동굴은 거의 직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동굴이 앞뒤로 뚫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이 동굴에서는 여느 바다 사진과는 다른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시도해 볼 일이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동굴 촬영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동굴은 우선 빛이 매우 부족하고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 동굴사진은 대체로 입구의 윤곽을 이용한 촬영을 많이 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동굴 외각을 잡고 바깥 경치를 촬영하는 것이다. 이때 노출은 주제에 맞추고 동굴 외곽은 노출 부족을 시켜 어둡거나 검게 처리한다. 동굴 안의 모델은 실루엣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얼굴이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얼굴을 보이게 할 때는 보조광을 이용해야 한다.

 

 

 

상족암의 앞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이 평탄한 암반층을 파식대(波蝕臺)라고 부른다. 평탄한 암반위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 몇 개가 보인다. 공룡발자국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모양이다. 공룡의 발자국보다 물이 빠져나가면서 드러난 해조와 조개류에 더 관심을 갖는 걸 보면 말이다.

 

 

이번 여행의 히어로는 단연 손아래 여동생의 큰 손주다. 의사인 부모가 쌍으로 일본에 취업한 덕분에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길에 모처럼 귀국한 엄마까지 동행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거기다 다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유일한 손주였으니 또 얼마나 귀염을 독차지 했겠는가.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공룡박물관으로 향한다. 잠시 후 오른편에 공룡박물관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월요일인 오늘은 전국의 모든 박물관들이 문을 닫는 날이다.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5개 전시실과 영상실로 구성된 공룡박물관은 중생대 백악기(1억년 전)의 공룡 골격 진품 4, 복제품 10, 일반화석 55점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써 공룡화석을 보다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오비랩터(Oviraptor)와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 진품 화석을 비롯하여 클라멜리사우루스 (Klamelisaurus)와 모놀로포사우루스 (Monolophosaurus)와 같은 아시아 공룡,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공룡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남해도로 되돌아가다가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에 들렀다. 한려수도의 중심지인 삼천포는 1956년에 시로 독립되어 유지되다가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현재는 사천시가 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이름은 아직도 삼천포그대로이다.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모이는 중심 어항으로 오랜 세월을 이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곳은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게 매력. 굳이 복잡한 시내를 통과해가면서까지 어시장을 찾아간 이유이다. 이왕에 바닷가에 왔으니 하룻밤 정도는 회 잔치를 해야지 않겠는가.

 

 

평일, 거기다 월요일이선지 몰라도 어시장은 한산했다. 아니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도 있었다. 회를 떠주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 횟집의 90% 이상을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단다. 다른 어시장의 경우 남성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는 남성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튼 우린 이곳에서 10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광어와 우럭에 해삼·멍게까지 두둑하게 살 수 있었다. 활어 외에도 선어와 건어물, 어패류 등을 팔고 있었으나 이는 눈요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또한 이곳은 시장 옥상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주차장을 찾아 헤매거나 무거운 해산물을 들고 주차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랑거리다. 주차장으로 나오면 정박해놓은 어선들이 즐비한데 이 또한 소소한 볼거리이다. ! 어시장 주변에 정박해놓은 어선사이로 갈매기가 날아다니는데 생각보다 너무 커서 옥상 주차장에 말려놓은 해산물이 무사할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죽방렴(竹防廉, 명승 제71)’도 남해도의 명품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해안에 돌로 담을 쌓은 뒤 밀물과 썰물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석방렴(石防簾, 또는 독살)’에 대비되는 원시 어로방식이 죽방렴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죽방멸치역시 죽방렴으로 어획하기에 이름 지어진 것. 이를 보기 위해서는 지족마을로 가야한다. 창선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지족 어촌체험마을이 나온다. ! 창선대교에서도 죽방렴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다리 아래서 진행되는 원시어업 형태의 죽방렴은 물론이고, 일몰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좁은() 바다길이라 하여 손도라고도 불리는 지족해협은 하루 두 번씩 밤낮으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마다 바닷물이 좁은 해역을 빠져나가는 물살이 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다는 이야기다. 그런 조류(潮流)의 특징을 이용한 원시 어로기법이 이곳 죽방렴이다. 물때를 이용하여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방식으로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물살이 빠른 바다에서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V’자 모양의 대나무 정치망인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 300여개를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갯벌에 박고 주렴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물살 반대방향으로 벌려 놓은 원시어장이다. 물살에 떠내려 오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방법으로 현재 남해군 지족해협에 유일하게 23통이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높은 관광자원으로 관심을 모은다. 아래 사진들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다음 방문지는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금산(錦山)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상 근처에 있는 보리암 菩提庵)’이다.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요즘은 산책삼아 다녀올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찾아가는 방법도 간편하다. 남해읍 바로 아래에 있는 무림사거리(이동면 무림리)’에서 19번 국도로 올라타고 상주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산을 안내하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보리암로를 따라 들어가면 복곡저수지 상류의 하부주차장(복곡매표소)’을 거쳐 상부주차장(보리암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 하부주차장에서 상부주차장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20년 전 처음으로 찾았을 때의 보리암은 얼굴 보기가 만만찮았다. 가파른 산길을 낑낑대며 올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네 마실 나가는 것만큼이나 수월해졌다.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찰인데도 인접한 곳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까닭이다. 차에서 내린 후 금산의 수려함과 맑은 공기를 느끼며 10여분만 걸으면 보리암이다.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풍광도 빼어나다. 금산의 자랑거리인 기암절벽과, 한려수도의 특징인 다도해의 풍광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대를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었을까 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려나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보리암 뒤편에 우뚝 솟은 웅장한 대장봉과 대장봉을 향해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의 형리암의 멋진 절경을 이룬다. 그건 그렇고 절 입구의 안내소에서 보광전까지 100는 가파른 돌계단이다. 손잡이가 있긴 하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면 조심해야 한다.

 

 

보리암(菩提庵)’에 도착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절집의 위용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광경이다. 이 절이 창건된 이야기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신문왕 3(683) 운수행각 하던 원효대사가 온 산이 빛나듯 방광한 모습에 홀려 초당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원효는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절의 이름도 보광사(普光寺)’라 불렀다. 그 뒤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리며 수행한 뒤 조선을 개국하자 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었고, 현종 때는 보광사 대신 새로 절을 지어 이름을 보리암으로 한 후 왕족의 명복이나 현세를 축원하기 위한 절인 원당으로 삼았다. 1300여년의 긴 역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담긴 사찰이다.

 

 

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역시 관음을 모신 사찰이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보리암은 불당들도 볼 만하지만 역시 관음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한다. 사찰의 제일 양지바른 곳, 남해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이 우뚝 서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상은 연꽃 문양의 상·하 좌대를 서로 마주 보게 포갠 뒤 그 위에 화강석으로 조각됐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아 흘러내린 옷깃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실물을 보는 듯하다.

 

 

관음상이 세워진 것은 1970년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리암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이라선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려고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만은 꼭 들어 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인자한 미소를 띤 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이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들은 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성취되기를 바라며 함께 고개를 숙여본다.

 

 

해수관음상 바로 옆에는 삼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시대 때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가 태풍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실었던 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683년 개산(開山)을 기념하기 위해 원효대사가 이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인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땅에 서린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은 탑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보리암을 지켜온 것만은 사실이다.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비는 것도 이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축대 위에는 각양각색의 꼬맹이 불상들이 한 가득이다. 불심 가득한 신자들이 하나둘 가져다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보리암의 보리(菩提)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 이곳에서 빌면 뭔가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소문이 난, 영험하고 자비스런 관음기도 도량이다. 그러니 뭔가를 염원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을 것이고, 또 그들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뭔가의 공물(供物)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보였다. 석탑 근처 바위면의 각자(刻字)가 바로 그것인데,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영험에 기대어보려는 중생의 바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또 다른 중생인 내 눈에는 한갓 넋두리로 보일 따름이었다.

 

 

해수관음상 앞은 보리암 최고의 전망대이다. 난간에 서면 발아래 한려수도(閑麗水道)의 시원한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저 멀리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데, 그 파도위에 자그마한 섬들이 마치 돛단배인양 두둥실 흘러 다니고 있다. ! 저런 아름다움이 있기에 이곳 금산이 산이면서도 유일하게 한려수도에서 포함되어 있나보다. ! 이곳뿐만 아니라, 금산 어느 곳에서나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금산은 남해의 금강산이란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빼어난 암릉미를 갖고 있는 산이다. 여유를 갖고 시야를 돌려보면 그야말로 절경, 자연이 빚어 놓은 수석 전시장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난간에서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이곳 금산에는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들, 금산의 38이라는 빼어난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해마다 많은 탐방객들로 붐빈다. 38경에는 망대, 문장암(文章岩), 대장봉, 형리암, 탑대, 천구암,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 이씨기단), 가사굴,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音聲窟), 용굴, 쌍홍문(雙虹門), 사선대(四仙臺),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三師祈壇), 저두암, 상사바위(相思巖), 향로봉(香爐峰), 사자암(獅子岩), 팔선대, 촉대봉(燭臺峰),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흔들바위, 부소암, 상주리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등이 꼽힌다.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데도 집사람의 잔뜩 웅크린 몸은 풀릴 줄 모른다. 이곳 보리암은 관음성지로 명성을 떨치는 곳. 어머니 관음이 사는 곳이라선지 엄숙하기보다는 따뜻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집사람이 느끼는 이른 봄의 쌀쌀함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로서는 그런 관음사상이 강 건너 불구경일 수도 있겠다. 고향집 같은 포근함 속에서 소원을 빌며 칭얼대고, 한껏 휴식을 취하기도하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까지도 남의 집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금산의 정상은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세 번이나 다녀갔기 때문이다. 대신 9년 전 들렀을 때 사용했던 사진과 글을 올려본다. <정상으로 가려면 보리암 뒷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야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문장암(명필바위)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명승 제39호 금산이라고 적힌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금산 제1경인 망대(望臺)가 서있다. 망대는 사방으로 조망이 뛰어나다. 넓고 아름다운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잘 보인다고 해서 망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망대는 또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최남단의 봉수대(烽燧臺)로 사용되어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또 다른 명소도 소개해 본다. 단군성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수백 길 절벽위에 치솟은 거대한 암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웃집 처녀를 짝사랑했던 총각의 전설이 서린 상사바위이다. 상사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고,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이 눈앞에 빈틈없이 들어차고 있다.

 

 

상사바위는 보리암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다. 금산의 정상어림 바위절벽 위. 관음성지로 이름을 떨치는 다른 사찰들처럼 보리암도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민중들은 관음보살이 천축국 낙가산 바닷가 굴에 살았다고 믿었다. 친정 같은 편안한 곳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 기운이 가까운 곳에 관음성지를 지었다. 그 편안함 속에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들어가 함께 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쌍홍문(雙虹門)’이다. 커다란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마치 해골을 보는 듯, 원래는 천양문이었는데 원효대사가 두 개의 구멍이 마치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역시 깨우친 현인들 눈에는 같은 사물도 이렇듯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해골로만 보이는데도 말이다. 쌍홍문을 통과하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또 하나의 경이로운 세상이다. 왼편 구멍으로는 계단을 따라 쌍홍문으로 줄지어 오르는 군상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 구멍으로는 저 멀리 남해 한려수도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남도에는 벌써 벚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도에서도 꽃의 절정은 남해도다. 벚꽃 길을 따르다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눈부신 쪽빛 바다와 알록달록 꽃들이 만나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다. 한마디로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서러움에 겨웠는지 벚꽃은 천지사방에 꽃잎을 흩날리기 시작한다.

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4. 2()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국립 남해편백자연휴양림’(삼동면 봉화리 산 553-1)

이름 그대로 남해 인근에 위치하며, 편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듯 넉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해와 육지를 연결하는 삼천포대교에 다다른다. 다리를 건넌 다음 3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다가 동천리삼거리(삼동면 동천리)에서 우회전해 잠시 들어가면 봉화삼거리(삼동면 봉화리)’.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이정표를 따라 7km쯤 더 가면 휴양림에 도착하게 된다. 1998년 개장한 휴양림은 다양한 숙박 시설을 갖췄다. 독채형 숲속의집 20, 콘도형 산림문화휴양관 객실 13, 단체 방문객을 위한 숲속수련장 객실 14실에 연립동 8실까지 합하면 모두 55실로 국립자연휴양림 중 가장 많은 객실을 자랑한다. 이밖에도 산림복합체험센터, 야영장, 산림욕장, 야외교실, 특산물판매장 등 위락 편의시설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편백자연휴양림이란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부터가 달라진다. 하늘로 치솟은 편백의 물결.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또한 물결을 이룬다. 편백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나무로 알려지는데, 이 물질은 특유의 살균효과 덕분에 아토피를 비롯한 피부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계를 안정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황사와 미세 먼지에 찌들어온 우리 일행에게는 힐링의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첫 번째 방문지인 독일마을로 가는 길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여 잠시 차를 멈췄다. 나이가 270살이나 먹은 보호수로 나무 아래에 돌탑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이곳 봉화마을에서 신목(神木, 당나무)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목은 하늘과 땅,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선지 나무와 탑, 제단 할 것 없이 모두 금줄을 둘러놓았다.

 

 

남해 여행의 시작은 독일마을이다. 때는 바야흐로 상춘지절(常春之節). 산하가 꽃으로 뒤덮이고 그 향기가 더 없는 낙원으로 인도하는데 어찌 길을 나서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하물며 이곳 독일마을은 명품 관광지로 소문난 곳. 마을 주차장은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랫동네인 봉화마을에 차를 대고 1Km 이상을 걸은 다음에야 관광안내소에 이를 수 있었다. 독일마을 투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 투어를 시작하기 전 점심 겸해서 남해도의 명물인 멸치쌈밥을 맛봤다. 남해 멸치는 어른 손가락만큼 크고 통통해서 쌈밥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모든 게 입이 짧은 내 탓이겠지만 말이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 하노버. 독일어를 몰라도 이 정도 지명은 익숙하다. 구텐베르크, 괴테, 베토벤 등도 친숙하다. ‘독일로(Deutsche Straße)’를 사이에 두고 늘어선 40채의 주택엔 이런 이름들이 붙었다. 거기다 외형도 하나같이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이다. 유럽풍으로 꾸며진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관광안내소 정면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독일마을 여행의 시작과 끝이랄 수 있는 도이치 플리츠(Deutscher Platz)’, 즉 마을의 중심축인 독일 광장이 그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유럽의 마을을 벤치마킹이라도 했는지 파독 기념관과 식당, 기념품 판매점 등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그러니 동화 같은 풍경에 이끌려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파독전시관에 들러 마을의 역사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반대편은 원예 예술촌으로 연결된다. 17명의 원예인들이 모여 만든 예쁜 마을로 프랑스풍, 지중해풍, 미국풍, 호주풍, 스위스풍, 멕시코풍의 여러 정원들이 꾸며져 있으며 산책길도 벚꽃길, 매화길, 장미 터널 등으로 다양하게 꾸며졌다. 하지만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5천원의 관람료가 부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이곳 독일마을과 가천 다랑이마을까지 둘러봐야 하는 오후 일정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예예술촌은 단순한 테마 마을이 아니라 원예 전문가들이 거주하는 곳이자, 직접 가꾸는 정원이다. 대다수 주민이 카페나 아이스크림 가게 등을 운영하는데, 운이 좋으면 남해 출신 배우 박원숙·맹호림 씨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박씨는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맹씨는 핀란드 통나무 주택 핀란디아에 산단다.

 

 

들머리에는 정착 1세대의 명단이 새겨진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1960년대 독일(당시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로 파견되었던 독일거주 교포들이 대한민국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공간이다. 2003년 입주 이래 광부 출신 12, 간호사 출신 28명이 터를 잡았다. 독일인 남편 6명도 아내를 따라왔단다. 그들은 독일에서 재료를 수입해와 이곳에다 독일식 전통주택을 지었다. 그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젠 연 1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옥토버 페스트(Oktoberfest)’라고 적힌 행사용 대문도 보인다. 매년 9월 열리는 뮌헨의 축제로 도시 전체가 맥주 향기에 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독일마을에서 열린다는 맥주축제에서 이를 벤치마킹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옥토버페스트는 뮌헨 시장이 대형 오크롱 마개를 나무망치로 따면 그 순간 12발의 축포가 터지면서 시작된다. 이때 뮌헨 시장이 개봉하는 맥주를 메르첸비어(Märzenbier)라 부르는데 '3월의 맥주'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그해 3월 홉을 많이 넣고 5개월 이상 숙성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독일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독일 공방이다. 공방(工房)이라고 해서 단순히 공예품이나 만드는 곳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 이곳에서 만드는 공예품 외에도 와인이나 초콜릿 등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공방의 옆에는 독일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바이로이트(Bayreuth)’가 들어서 있다. 독일 전통방식으로 만든 수제 맥주와 함께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학세(Schweinshaxe)’의 바삭함, 역시 독일의 전통 소시지인 브랏부어스트(Bratwurst)’의 탱탱함을 맛볼 수 있는 독일식 레스토랑이다. 이밖에도 독일맥주와 음료, 식료품을 팔고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다.

 

 

오늘도 집사람은 대한민국 만세!’.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외국에만 나가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애국자가 된다. 집사람에게 세계 일주를 시켜주겠다며 시작된 해외여행이 벌써 6년째. 나라로 쳐도 40개국에 가까워졌다. 거기다 이곳은 하얀 벽면에 주황색 지붕을 한 전형적인 유럽풍의 분위기. 이 정도면 만세삼창이 절로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광장 한켠에는 파독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지하 1,200m 갱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파독 광부와 외롭고 고된 생활을 이겨 낸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곳. 즉 이곳 주민들이 살아온 길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독일 생활의 향내를 간직한 실제 유물과 영상이 독일 생활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곳이니, ‘글릭아우프(Glü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인사로 시작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꼭 방문해 보자. 남과 북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60년대. 뼈저리게 가난했던 나라에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196312월에 광부 247명이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고 1966년에는 젊은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후 1977년까지 광부 7,936, 1976년까지 간호사 11000여 명이 비행기를 탔다. 이들은 먼 타향에서 열심히 일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한국에 보냈다. 그 돈으로 나라에서는 다리를 놓고 공장을 세웠다. 고향집에서는 동생들이 공부를 했고,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셨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탄광에서 쓰던 물건들. 외화를 벌기 위해 멀리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1963년 부자나라에서 운명을 바꿔보겠다며 광부들은 독일 땅을 밟았다. 광부를 지원한 사람 중에는 대학 졸업자도 많았는데 손이 고우면 뽑히지 않을 것 같아 몰래 손등에 검정 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동방에서 온 작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몸집이 큰 독일인들이 착용했던 작업복을 입고 지하 1000m에서 석탄을 캤다. 장비가 무거워 허리가 휘어졌다.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무조건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을 청하기도 했단다.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했던 파독 간호사들의 애환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1966년에 독일 땅을 밟은 한국의 딸들도 말이 통하지 않아 처음에는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손끝이 야무지고 매사에 헌신적인 간호사들은 동방에서 온 천사로 불렸다.

 

 

간단하나마 유럽식 노천카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전시관 옆에 마을주민들이 운영한다는 간이식당 도이체임비스(Deuche Imbiss)’가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독일식으로 만든 전통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 독일에서 직접 공수해 온 다양한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맥주 마니아인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독일식 그릴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마이셀(밀맥주) 한 잔. 아니 나는 석 잔이나 마셔버렸다.

 

 

맥주하면 또 독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선지 이곳에서는 조형물까지도 오크통이다. 아니 마차에 실어놓은 것이 매년 10월에 열린다는 독일마을 맥주축제때 사용하는 소품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벤치마킹해 독일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정통 독일맥주와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는 그 이색적인 축제 말이다.

 

 

남해 스몰비어 파티라는 이름표를 단 오크통 마차도 보인다. ‘스몰비어 파티가 맥주축제 때 독일맥주와 소시지, 학센 등 독일음식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부스가 설치되는 광장의 이름일지니 이 또한 축제 때 사용되는 소품이 분명하다.

 

 

광장을 모두 둘러봤다고 해서 끝난 게 결코 아니다. 남쪽 끄트머리에 독일마을과 물건마을은 물론이고 드넓은 남해바다까지 한꺼번에 조망되는 멋진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남해를 바라보는 언덕바지에 지어진 수십 채의 예쁜 독일식 주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다.

 

 

전망대 앞에는 전경사진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이 생겨난 배경과 함께, 이 주택들이 독일 교포들의 주거지임과 동시에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특수성을 적고 있다. 2006년 최고의 인기를 누린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KBS-2의 인기 버라이어티 ‘12의 촬영지였다는 자랑도 늘어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 깔린 독일마을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바닷가에 터를 잡은 물건마을(勿巾里)’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물건마을은 마음의 독까지 빼준다는 소박한 마을.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된 마을답게 그 풍경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거기다 지중해풍의 빨강 지붕이 더해지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행복을 안겨준다. 그렇다면 저 가운데 하나는 철수네 집일 것이다. 촬영 당시 가정집을 임대해서 사용했다니 지금쯤은 원상으로 복구되어 있을 것이고 말이다.

 

 

물건마을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을 촘촘하게 심은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 천연기념물 제150)’으로 유명하다. 500m 길이의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초승달 모양의 저 숲은 약 300년 전 마을사람들이 방풍과 방조를 목적으로 심었는데, 마을에는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한 가지의 나무도 함부로 베는 일 없이 숲을 지켜오고 있단다. 그건 그렇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안은 여인의 허리처럼 한껏 휘어진 게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은 남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당당한 모습이다. 남해 12경중 10경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물건방조어부림은 다른 세 가지 이름이 있다. 거칠고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준다고 하여 방풍림(防風林)이며, 쉴새없이 달려드는 파도에 의한 해일이나 염해·조수를 막아준다고 하여 방조림(防潮林), 숲의 초록빛이 남해를 떠도는 물고기떼를 불러들인다 하여 어부림(魚付林)이다.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두 번째 방문지는 독일마을과 함께 남해도 마을관광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가천마을(加川里)’이다. ‘좁고 작은 논배미를 뜻하는 다랭이 마을로 더 알려져 있는데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배 한척 없는 마을이다. 마을이 해안절벽을 끼고 있는 탓이다. 방파제는 고사하고 선착장 하나도 만들 수 없다보니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설흘산과 응봉산의 가파른 비탈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 논둑을 쌓고 물이 쉬 빠져나가지 않도록 점토나 흙으로 마감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올린 계단식 논이 108. ‘다랭이 논(명승 제15)’은 그렇게 태어났다.(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게 마땅찮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도로변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니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바다와 도로 사이는 벼랑에 가까운 비탈진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벼랑에 걸려있는 마을이 바로 다랭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참맛은 남해인의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다랭이 논을 돌아보는 것이다. 경사가 심한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과 손바닥만한 논들이 층층이 산을 이루는 모습은 이색적인 파노라마 풍광이다.

 

 

다랭이마을의 장점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은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을 인 독일마을과는 외관부터가 사뭇 다르다. 주황이나 파랑 등도 보이지만 검정색 기와지붕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담벼락도 마을의 일상을 묘사한 각종 벽화로 장식해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대신에 이곳에서는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내놓는다.

 

 

마을로 들어서자 '다랭이 마을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안내도는 마을회관과 두레방 등 공공시설 외에도 민박·맛집·슈퍼·카페 등의 편의시설, 그리고 밥무덤과 암수바위 같은 볼거리까지 다양하게 그려 넣었다. 거기다 지명마다 버튼이 있어 누르면 위치를 표시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고장이 나 있어 무용지물이라는 귀띔이 있어 대충 위치만 보고 그냥 통과한다.

 

 

경운기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마을 담벼락은 그네들의 지난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 좁다란 논밭을 갈고 있는 소. 모두 이곳의 일상을 담은 그림들이다. 모를 내고 가꾸어 거두어들이는 논농사는 오로지 농부들 몫. 소의 도움을 받아 쟁기질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런 악조건까지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슬기롭게 헤쳐 나온 것도 농부들이었다.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 한잔으로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다랭이마을은 2천 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지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선조의 땀이 밴 한 뼘의 역사가 희망이 되어 2002년 환경부의 '자연생태보존우수마을'에 선정됐고, 2005년 문화재청은 명승 제15호로 마을 전체를 포함한 다랭이 논을 지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다랭이마을을 '색깔 있는 마을'로 선정했다. 이뿐이 아니다. CNN에서 운영하는 ‘CNN GO’'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 중 하나로 이곳 다랭이마을을 선정한바 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민박으로 생계용 직종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다랭이마을의 원천적인 경쟁력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먼 옛날 농토 한 뼘이 아쉬워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는 계단식 논과 마을의 풍광은 여전하고, 남쪽 바다는 변함없이 새파랗다.

 

 

마을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도 민박집 일색이다. 그런데 적혀있는 이름들이 재미있다. 해가 뜨는 돋을양지에 있는 해뜨는집’, 느티나무 아래에 있어 느티나무집’, 그밖에도 마을안길을 걷다보면 샘(우물) 옆에 있는 새미끌집’, 비파나무가 있는 비파나무집’, 가파르게 경사진 곳에 있는 까꾸막’, 돌담을 길게 쌓아놓은 긴돌담집등 무척 정겹고 재미나는 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비탈 사이로 구석구석 골목길은 마치 미로와 같다. 그 길을 헤매다보면 옛 우물들도 만나게 된다.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이 들어섰으니 우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랑모샘이다. 지금은 눈요깃거리 삼아 안내판까지 세워놓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또 하나의 샘은 아랫모샘이다. 1970대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고랑모샘과 더불어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옛 우물이라서 두레박으로 물을 직접 길어보는 재미도 있다. 그렇다고 123가구 720여 명이 마시던 생명의 샘이었다는 것까지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밥무덤이라는 특별한 민속자료도 만날 수 있다. 매년 음력 1015일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낸 후 제사에 올린 밥을 묻는 구덩이로 마을 중앙(아래 사진)과 동·서쪽 등 세 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을 중앙의 것은 삼층탑 모양의 구조물이고 동서쪽의 것은 돌담 벽에 감실을 만들어 밥 무덤으로 쓰고 있다. 밥을 묻을 때는 밥을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서 정성껏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반반한 덮게 돌을 덮어둔다. 이는 제물로 넣은 밥을 고양이나 쥐 등의 짐승이 해치면 부정한 일이 생기거나 신에게 바친 밥의 효력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귀한 제물인 밥을 땅속에 넣는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모든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풍요를 점지해 주는 땅의 신, 즉 지모신(地母神)에게 밥을 드림으로써 그 기운이 땅속에 스며들어 풍요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항해 등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어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들을 위해 밥을 묻어둔다는 의미도 있단다.

 

 

우리네 시골마을에도 마을회관정도는 필수다. 2016년에 지어진 지상 2층의 건물에는 이장 집무실과 회의실, 그리고 남·여 경로당 등이 들어서 있다. ! 마을회관 옥상이 가천마을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져 있으니 한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잠깐 앉아 쉬면서 아픈 다리품도 달래고, 맑고 잔잔한 겨울바다를 보면서 번거로운 일상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을은 그동안 국내외를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리고 이제는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조상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좁은 다랭이 논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는 주민들의 노력도 크게 한몫을 했단다. 허물어져 가던 집을 고쳐 펜션과 민박 시설로 탈바꿈하고 마을의 주변 볼거리를 코스로 엮었으며 다랭이 만들기, 농사 체험 등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았다. 그 현장이 바로 체험관인 다랭이 두레방이다. ‘두레란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노동조직을 말하는데, 이 마을에는 다랭이논보존회라는 두레가 조직되어 있다. 이들은 일부 다랭이 논에 벼를 심어 가을 농촌경관을, 10월에는 유채를 파종해 이듬해 봄에 유채꽃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단다.

 

 

 

다랭이마을에서는 꼭 맛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유자 잎 막걸리인데 그 유래가 독특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집에서 만든 막걸리를 관광객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는데, 그 맛에 반한 이들이 주변에 전하면서 입소문을 탔고, 이후 다랭이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할머니의 막걸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흘 익힌 막걸리에 유자 잎을 넣고 나머지 사흘을 숙성시켜 거른 유자잎막걸리는 그렇게 다랭이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유자 향이 솔솔 풍겨오는 것은 물론이고 달큼한 맛이 함께 혀끝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특징. 현재 이 막걸리는 할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은 시골할매 막걸리라는 음식점에서 팔고 있다. 해물된장 정식과 해물칼국수 등 다양한 음식이 있지만 막걸리와 함께하는 해물파전이 가장 인기라고 한다. 투어를 끝낸 다음, 해물파전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마셔볼 일이다.

 

 

골목길을 누비다가 박원숙씨가 운영한다는 커피&스토리를 만났다. 독일마을 앞 예술촌에 그녀가 운영하는 앤티크 커피숍이 있다고 했으니, 이곳은 2호점쯤 되는 모양이다. 2008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모친과 함께 남해도에 눌러앉았다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워낙 많아 사랑방 같은 커피숍을 만들었단다. 그게 또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지 최근에는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라는 버라이어티 예능프로의 무대가 되고 있는 중이다.

 

 

고소한 빵 냄새에 홀려 따라가다 다랭이 빵집을 만났다. 육쪽마늘빵과 치즈고로께, 꽈베기, 팥도너츠, 수제햄버거에 아메리카노 커피까지 판단다.

 

 

전망 좋은 곳에는 울 마더라는 카페도 들어서 있다. 층층이 쌓여있는 다랭이논과 함께 남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니 커피한잔의 여유를 권해본다. 그러다가 색색의 머그잔을 소품삼아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 일이다. 낭만 가득한 인생샷이라도 건질지 누가 알겠는가.

 

 

마을 끄트머리에 이르자 사람의 성기를 닮은 커다란 한 쌍의 바위가 서있다. 다랭이마을의 자랑거리인 암수바위(경남 민속문화재 제13)’이다. 이 바위들은 조선 영조 27(1751)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나타난 노인의 계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서는 미륵불(彌勒佛)’로 불리는데, 5.8m(둘레 2.5m) 높이의 숫미륵은 귀두와 힘줄까지 나타나는 등 남성의 성기를 영락없이 빼다 닮았고, 3.9m(둘레 2.3m) 크기의 암미륵은 여인이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모습을 한 채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성기 모양으로 돌을 깎아 자식을 많이 낳고 농사의 풍요로움을 빌던 대상이 마을전체의 수호신으로 바뀌고, 다시 불교의 미륵불로 이어지는 민간신앙의 한 예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바위들은 간절히 소원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욕심을 부려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거나 바위에 손가락질을 하면 화를 입는다고 믿는단다. 그 믿음은 매년 음력 1023일 풍농과 풍어를 비는 동제(洞祭)로 발전했다. 배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이 개별적으로 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처음 잡는 고기를 바위에 걸어 놓으면 고기도 많이 잡히고 사고도 방지된단다. ! 숫미륵의 모양새에 대비되는 암미륵을 찾다가 헷갈리고 말았다. 남성의 성기에 대비되는 여성의 성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안내문을 읽어보고서야 풀렸다. 1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인데 여성의 성기가 아니라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란다.

 

 

마을을 다 둘러봤다면 이제 주변을 둘러볼 차례이다. 바닷가로 내려가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일명 삿갓논, 삿갓배미라고도 불리는 다랭이논의 논두렁을 걸어볼 수도 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을 갈다가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논이 하나 더 있더라는 데서 유래된 삿갓논은 자투리땅도 소중히 활용한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을 대변한다. 그처럼 작은 논은 다른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작다고 해서 죽배미밥배미로도 불린다.

 

 

개울가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바래길이정표가 보인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토속어이다. 그러니 바래길은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갯벌로 가던 길을 이어 만든 남해도판 올레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다랭이마을은 19개 코스(본선 16+지선 3) 231km로 이루어진 바래길지겟길앵강다숲길에 속해 있다. 지겟길은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고, 반대편인 앵강다숲길은 조용한 호수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앵강만(鶯江灣)을 중심으로 남면, 이동면, 상주면 9개 마을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 ‘바래길가운데 11개 코스는 남해안 전체를 잇는 '남파랑길'36~46코스와 노선이 일치되기도 한다.

 

 

남해 바래길을 따라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들쭉날쭉 제 멋대로 생긴 논들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산뜻한 산책로와 전망대가 마련돼 있어 편안히 돌아볼 수 있다. 이 길은 옛날 다랭이마을의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라고 해서 다랭이 지게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남해 바래길’ 1코스(평산항에서 가천초교까지 16)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해안선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줄곧 한쪽으로 남해의 비경을 안고 숲과 바다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 다랭이 마을의 논두렁길은 또 소를 몰고 다니면서 소에게 풀을 뜯게 했다는 뜻을 지닌 소몰이살피길’, 마을과 다랭이 논 사이를 걷는 상수리길’, 고기 떼가 들어오는지 망을 보던 망수의 발자취를 재현한 망수길등으로 나뉘기도 했다.

 

 

이곳 남해도는 500년 전부터 '꽃밭(花田)'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아름다운 보물섬이다. 바래길은 그런 꽃밭 사이를 누비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꽃밭은 기본, 공들여 가꾼듯한 라벤더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거기다 길이 스며드는 산자락에서는 하얀 벚꽃이 꽃비를 내리고 있다. 이야기꾼들이 풀어놓는 500년 전의 남해도가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바래길은 가천마을 바닷가가 가장 잘 조망되는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4월의 다랭이 마을은 유채꽃이 한 몫을 톡톡히 수행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은 물론이고 길가 빈터에도 어김없이 유채꽃이 피어났다. 맞다. 어느 여행전문가는 다랭이 마을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철로 꼽고 있었다. 친절하게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 다랭이마을과 마주하면 어떻게 저런....정말 신기하다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 모내기를 끝낸 6월과 추수를 앞두고 누렇게 벼가 익는 무렵인 가을도 좋기는 매한가지라고 했다.

 

 

맨 마지막은 바닷가 탐방이다. 비탈과 갯바위에 데크길과 다리, 심지어는 출렁다리까지 놓아가며 길을 냈다. 다랑이 논들이 올려다 보이는 이 산책로는 한마디로 절경이다. 아래로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뻗어나가고 뒤돌아보면 금빛 다랑이 논이 눈부시다. 한려수도 청정해역의 푸른 바다는 기본이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출렁다리. 호들갑스런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곳이다.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마을 풍경도 일품이다. 첩첩이 쌓여있는 논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맞다. ‘다랭이 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 10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것부터 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680여 개의 논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길, ,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바닷가에 이르자 갯바위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조각배 하나 정박할 공간이 보지지 않는다. 맞다. 이곳 다랭이마을은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곳 남해도는 태풍이 잦은 곳. 거친 바위와 거센 파도로 인해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하니 고기잡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산비탈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게고. 손바닥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논이나마 층층이 만들어가며 고단한 삶을 이어왔을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문득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이라던 법정스님의 게송(偈頌)이 생각난다. 이 가운데 마지막 구절은 수주작처 입처개진(隨主作處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라는 당나라 임제(臨濟) 선사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곳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라는 삶의 진리를 담은 글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이 말씀이 하필이면 지금 머리에 떠오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천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그 진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그네들의 삶 말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세상은 모두 참된 진리로 채워질 것이고, 다랭이마을 앞바다의 맑고 푸른 바다처럼 마음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라 믿는다.

내 고향 순창 나들이

 

여행일 : ‘20. 10. 17(토)~19(월)

여행지 : 전라북도 순창군(책여산, 강천산), 임실군(국사봉)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손아래 남동생이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예식장이 머나먼 광주 땅이다. 거기다 코로나가 난리까지 치지만, 그렇다고 집안 행사인데 가보지 않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일산에 사는 여동생이 자기네 차로 편히 모시겠다니 말이다. 가타부타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2박3일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숙소 예약은 첫째 여동생이 이미 해놓았고, 현지에서의 안내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둘째 여동생 내외가 맡았다. 평생 직업이던 교편생활을 조기에 접고 여행 다니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부부이니 나머지 네 가족은 그냥 따라만 다니면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고향 순창 여행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굽어 흐르는 섬진강의 청류로 순창을 읽을 수도 있고, 곳곳에 숨어있는 명당으로도 순창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담을 삼은 정자의 풍류로 순창을 볼 수도 있다. 그윽한 자연을 앞세운 산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비어있는 종이 위에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 여행의 시작은 회문산 자연휴양림(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예식이 저녁시간(17:30)에 있다 보니 혼주 측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아예 만찬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모처럼 만나본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넉넉하게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미리 예약해놓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직행. 88고속도로 순창 IC에서 내려와 27번 국도를 타고 전주방면으로 올라가다 장암교차로(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624-5)에서 ‘회문산로’로 옮긴다. 이어서 구림방면으로 2㎞쯤 들어가다 자연휴양림의 입구 삼거리에서 이정표(휴양림→1.7㎞)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1993년에 문을 연 회문산 자연휴양림은 우리가 머물게 될 숙박시설(16개 동) 외에도 강의동과 야영장, 임간수련장, 물놀이장, 산책로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회문산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표본으로 활용하는 생태교육장은 흔치않은 자랑거리다.

▼ 휴양림의 가장 큰 볼거리는 ‘회문산 역사관(回文山歷史館)’이다. 역사관은 ‘빨치산사령부 벙커’에서의 생활모습을 구현하면서 2000년 시작됐다. 그러다가 2011년 빨치산 사령부를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역사관을 새로 짓고 회문산과 관련된 내용들을 벽화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회문산의 명소인 천근월굴(天根月窟) 등에 대한 소개, 회문산 자락에 위치한 천주교 성지에 대한 설명, 만일사(萬日寺)와 순창 전통 고추장에 대한 이야기, 순창을 지킨 사람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순창의 항일 의병 활동, 풍수지리와 순창의 풍수지리, 1950년 6·25 전쟁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회문산 지역은 1846년(헌종 12) 천주교 병오박해 때 삼족(三族)을 멸하는 화를 피해 김대건 신부의 일가친척들이 피신한 곳이며, 한말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임병찬(林炳瓚), 양윤숙(楊允淑) 등의 의병대장이 일제와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곳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사령부 터로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하였으며 사령부 막사가 설치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회문산은 조선의 건국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민족 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六·二五良民犧牲者慰靈塔)이 추가로 세워졌다. 탑은 중앙에 높이 10여m의 화강암 돌기둥을 두고, 그 앞쪽에 양손을 하늘로 뻗은 여인이 서있다. 그 왼편에 여인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像), 그리고 우측에는 철모를 쓴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을 배치했다. 참고로 회문산의 빨치산 활동은 1948년 여순사건에서 패퇴한 패잔병 가운데 일부가 회문산으로 숨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연합군의 북진으로 갈 길을 잃은 좌익 동조세력이 회문산에 모여들면서 활동은 더욱 거세진다. 이후 국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지리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이때 희생된 수많은 양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0년 이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의 ‘남부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목에서 말한 고추장 색깔의 첫 번째로 사상적인 빨강과 관련된 곳이라 하겠다.

▼ 이왕에 왔으니 회문산의 정상을 밟아봐야 하겠지만 수년 전에 이미 올랐던 것을 핑계 삼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올려본다. <정상은 열 평 조금 못되는 盆地, 북서쪽은 바위 벼랑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잘 열린다. 많은 산들이 그 머리위에 TV중계탑이나 헨드폰 기지국들을 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어김없이 흉물스런 鐵製塔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회문산은 그 모습이 회문봉을 중심으로 깊은 계곡을 좌우로 뒤집은 U자 형상이다. 그 말발굽의 끄트머리를 출렁다리로 연결해 놓았고...>

▼ 당시 가장 의미 있게 보았던 풍경도 올려본다. 정상에서 10여분 정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는 바위다. 집체만한 바위의 한쪽 면에 적힌 상형문자가 ‘천근월굴’로 판독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천근은 陽으로 남자의 性을 그리고 월굴은 陰으로 여자의 性을 나타내어, 陰陽이 한가로이 왕래하니 소우주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란다. 陰陽調和. 아니 調和로운 男女合宮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하나 더, 묘에 대한 당시의 내 기록이 있어 잠깐 옮겨본다. <회문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다른 유명한 산들에 비해 墓가 무척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회문산 정상 바로 옆에도 묘가 있었고, 등산로 주변에 조그만 틈만 보여도 어김없이 묘들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이다. 이곳 회문산은 우리나라 5대 明堂중의 하나로서 예로부터 靈山으로 알려져 왔다. 홍문대사(홍성문)가 이곳에서 道通한 후, 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하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代까지 간다고 했다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이곳에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정상과 주면을 수많은 묘들이 차지하고 있을 수밖에...>

▼ 다음 날 아침, 이동 중에 ‘인계초등학교’에 들렀다. 고학년이 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전주로 유학을 떠났지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추억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당시 나는 동급생들보다 2살 정도가 어렸다. 거기다 작달막한 유전자까지 더해진 내 키는 동급생들보다도 머리 하나쯤은 낮았다. 그러니 오리(2㎞)나 되는 등굣길이 가뜩이나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중간에 만나는 공동묘지나 문둥이가 산다는 골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신은 물론이고 어린이 간을 떼어간다는 문둥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행여 놓치기라도 할세라 동급생들 뒤꽁무니를 쫄쫄 따라다닐 수밖에... 그나저나 반백년을 넘겨 다시 만난 운동장은 엄청나게 작았다.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 심어진 벚나무 고목들도 역시 작달막하다는 느낌이다. 작았던 내 키가 그만큼 자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 첫 번째 방문지는 순창(적성면·동계면·유등면)에 위치한 ‘책여산’이다. 책여산은 두 개의 정상을 갖고 있다. 순창과 남원을 잇는 24번 국도를 경계로 남쪽의 ‘순창 체계산’과 북쪽의 ‘남원 책여산’으로 나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 모두 ‘순창 책여산’이다. 특히 북쪽의 봉우리를 ‘남원 책여산’으로 부르는 것은 턱도 없는 오류이다. ‘순창 책여산’은 남쪽 능선(책암마을 들머리↔무량사 위 능선)에서 남원 땅과 잠시 어깨를 맞대고 있을 따름이고, 북쪽의 ‘남원 책여산’은 그 경계가 아예 산자락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 고려사(高麗史)에 <적성현(赤城縣)은 본래 백제 역평현(礫坪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적성(赤城)이란 지명이 ‘붉음(赤)’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 또한 고추장 색깔이 아니겠는가.

▼ 제1주차장 근처의 들머리(이정표 : 출렁다리 295m, 어드벤처전망대 560m)에는 환영인사와 함께 ‘채계산(釵笄山)’에 대한 안내문을 적어놓았다. 적성강변 일대에서 바라보면 비녀를 꼽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唱)을 읊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선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다면서, 그 중에서도 조선말기의 명창인 이화중선(李花中仙)이 유명하다는 자랑까지 빼놓지 않았다. 이밖에도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아 ‘책여산(冊如山)’, 적성강을 품고 있다고 해서 ‘적성산(赤城山)’이라고도 부르며, ‘화산(華山)’이란 또 다른 이름은 화산옹 바위를 품고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참고로 이화중선은 장재백(張在伯, 순창 출신의 명창으로 남원에서 활약했다)의 조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 이곳 적성에서 머물며 5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 계단을 오르려는데 오른편 편백나무 숲속에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일단은 들어서고 보는 이유이다. 그렇게 들어선 숲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결코 작지가 않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여간 진한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행복이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속설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 중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출렁다리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순창 고추장을 닮은 강렬한 빨간색이 인상적인 다리. 두 산등성이를 잇는 높이 90m의 다리 아래로 만물을 품은 세상이 갇혀있다. 그림치고는 조금 어색한 그림이 되어버렸지만 뭐가 대수겠는가. 상식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게 요즘사람들이다. 최근 이곳이 순창 여행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295m.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전 구간이 나무계단으로 되어있어 오르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올라선 출렁다리의 초입에는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 중간에서 보는 조망이 더 나을 것 같아 다리부터 먼저 건너기로 한다. 2020년 봄, 순창책여산과 남원책여산이라 불리던 두 봉우리 사이의 협곡에 최근 새로 놓인 이 다리는 길이가 270m나 된다. 높이는 90m, 가장 낮은 곳도 75m에 이른다. 국내에서 무주탑 현수교 가운데 가장 길다고 한다. 진안 구봉산의 구름다리 보다 170m. 파주 감악산에 들어선 출렁다리보다도 50m가 길고, 한국기록원이 국내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인정한 청양군의 천창호에 비해 63m나 더 길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赤誠江)’의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채계산을 휘돌아가는 저 물줄기는 광양만에서 남해로 흘러드는데, 조선시대에는 복흥의 도자기와 적성의 옥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중국 상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붐비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저 강에는 물이 넘실거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운암댐의 건설로 인해 물의 흐름이 김제평야 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 반대편에도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방금 건너온 출렁다리와 건너편 ’남원책여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특히 남원책여산(아래 사진에서 맞은편 산봉우리)의 정상어림에 조성된 ‘어드벤처전망대’도 한번쯤을 들러볼만한 곳으로 꼽힌다.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암릉은 물론이고, 적성 고을의 들녘이 발아래로 널따랗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 전망대는 출렁다리를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죤이기도 하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구름다리를 건너는 일은 수월치만은 않다. 주탑(柱塔)이 없는 현수교라선지 위아래는 물론이고 좌우로까지 큰 폭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40층 높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거기다 상하좌우로 흔들리기까지 한다면 이건 숫제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채계산의 출렁다리를 건너는 일은 짜릿한 스릴. 한여름에도 온몸이 오싹오싹해지는 공포 체험이 된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고 난간을 붙잡은 손과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 능선을 따라 놓인 나무계단(이정표 : 한옥정자↑ 62m/ 하산로1← 350m/ 하산로2→ 271m)을 오르면 회문산 및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채계산’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6년 전에 다녀온 것을 핑계로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책여산의 남쪽 정상인 송대봉(松薹峰)은 하도 위태로워 새들조차 앉기를 꺼려했다는 날카로운 바위봉우리이다. 특히 남원 책여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옮겨놓기라도 한듯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 이어진다. 짜릿한 스릴을 맛볼 수 있는 매력 넘치는 구간이다.

▼ 책여산 등정을 포기했으니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주차장이 있는 괴정리 방향(하산로1)이다. 이 구간은 엄청나게 경사가 심하다. 하지만 나무계단이 놓여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보기 드문 기경(奇景)들을 눈에 담으며 시나브로 내려가면 된다.

▼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놓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날머리와 주차장 사이에다 ‘농·특산물 판매장’을 배치했다. 그리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드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참고로 내가 태어난 마을은 이곳에서 4㎞도 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적성강이 내 어릴 적 물장구치며 다슬기 잡던 놀이터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물놀이가 싫증이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채계산(釵笄山)’에 올랐었다. 중턱에 있는 ‘금돼지굴’이 우리들의 또 다른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금돼지굴’에는 적성원님으로 부임만하면 부인이 실종되자 궁리 끝에 한 원님이 부인의 허리에 명주실을 달아놓고 부인을 끌고 가는 금돼지를 쫓아가서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판매장 안에서는 감과 밤, 버섯, 고구마 등의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꿀처럼 약간의 손질을 거친 특산품도 보였다. 관광객들로부터는 커피나 토스트,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가 더 인기를 누렸지만 말이다.

▼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강천산이다. 순창의 옛 이름은 옥천(玉川), 그리고 오산(烏山)이었다. 그 어원을 세세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순창이 예로부터 물과 산이 아름다운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자연 덕분일까, 순창은 예로부터 장수의 고장이었으며, 지금도 순창의 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받는 게 강천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제1호로 지정된 ‘군립 공원’으로 들머리에 집단촌이 들어서있으니 하루를 묵어가기에도 좋으며, 역사가 얽혀 있으니 이야기 듣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건 그렇고 강천산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처연할 정도로 붉은 단풍이다. 이곳 강천산이 고추장 색깔을 닮은 내 고향에서의 마지막 여행지가 되는 이유이다.

▼ 국내 최초의 군립공원이란 명성에 걸맞게 공원은 잘 꾸며져 있다. 애기단풍 숲 사이로 이어지는 왕복 5km의 탐방로(매표소↔구장군폭포)를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황토모랫길로 조성했는가 하면, 곳곳에 산림욕장을 배치해 목재데크를 따라 숲속 공기를 흠뻑 들이킬 수 있도록 했다.

▼ 매표소를 조금 지나면 ‘병풍폭포’가 눈에 띈다. 병풍처럼 넓게 펼쳐져 쏟아지는 물주기가 장관인 폭포이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어왔다. 산을 끼고도는 계곡과 바위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멋진 풍경에다 사람의 손길을 더한 곳이 바로 ‘병풍폭포’다. ‘병풍바위’라는 자연에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지자체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가며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걸 보면 말이다.

▼ 전형적인 ‘스토리텔링’도 보인다. 길가에 있는 평범한 바위에다 ‘거라시바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너스레까지 덧붙였다. 걸인들이 이 굴(사실은 굴도 아니다)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사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루에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외진 곳에서 과연 시주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이야기일 따름이니 그냥 넘어가자.

▼ 다음은 ‘천우폭포’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자연적으로 폭포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무래도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누군가는 순창을 일러 ‘화장기 없는 여자’와 같다고 했다. 수더분한 데다 다양한 매력이 있어서 화장을 하는 대로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곳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또 ‘강천산’을 여기저기 손을 대서 만든 경관이지만 그윽한 자연이라고 평했다. 천우폭포가 그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 메타세쿼이아 길도 운치가 넘친다. 참! 그러고 보니 아까 강천산으로 들어오는 도중에도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났었다. 메타세쿼이아라 하면 사람들은 보통 담양의 것을 최고로 꼽는다. 하지만 이곳 팔덕면이 고향인 제수씨의 말로는 순창의 것도 이에 못지않단다. 특히 가로수 길을 걷는다고 담양처럼 야박스럽게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란다. 아무튼 담양은 거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있다는 걸 알고 가는 곳이지만, 순창은 모르고 문득 만나는 것이어서 더 반갑고 감격적이다.

▼ 강천산(剛泉山)의 또 다른 매력은 계곡이다. 오죽했으면 소금강을 나타내는 ‘강(剛)’자 다음에 ‘샘 천(泉)’를 붙여 놓았을까. 물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며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용소(龍沼)’도 그런 풍경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웅덩인데 윗용소에는 숫용이, 그리고 이곳 아랫용소에는 본처인 암용이 살았었단다. 안내판에는 풍산면 향가에 살던 소첩용과의 다툼도 적혀있었으나, 첩이 본처를 이기는 내용이 귀에 거슬려 옮기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일주문(一柱門)을 만났다. 그런데 문에 걸린 편액(扁額)이 조금 이상하다. 일주문이라는 게 본디 절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 번째의 문일지니, ‘강천산 강천사(剛泉山 剛泉寺)’라고 적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앞뒤 다 빼고 ‘강천문(剛泉門)’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쩌면 군립공원을 정비하면서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맞다. 강천산의 입장료도 절이 아닌 지자체에서 받고 있었다.

▼ 강천사로 오르는 길가에는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돌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이 바라는 바를 담아 하나씩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못생긴 외모라고 해서 품은 염원까지 비하시키진 말자.

▼ 30분쯤 걸었을까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잡은 강천사(剛泉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887년(진성여왕 1)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기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몇 차례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불에 훼손되었다가 이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창건자 도선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는 예언이 적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선은 한국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매표소에서 이곳 강천사까지는 1.65Km이다.

▼ 강천사의 풍경소리를 뒤로하자 개울 건너로 ‘삼인대(三印臺,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가 나타난다. 1506년의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나 그의 부인인 ‘신씨(愼氏)’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축출된다. 10년 뒤, 새로 맞이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이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 축출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이때 목숨을 건 결의용으로 관인(官印)을 걸어놓았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불러오다, 1739년(영조 15년)에야 신씨가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는 비각과 빗돌을 세우게 된다. 참! 근처에는 ‘절의탑’이라고 쓰인 돌탑도 세워져 있었다. 2004년 순창군내 300여 개가 넘는 각 마을들에서 돌 2개씩을 가져와 쌓았다고 한다. 순창의 모든 기(氣)를 품었을 것은 당연한 노릇. 그러니 순창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 근처에는 수피가 아름다운 300년이 넘은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97)’도 있다. 외형은 늙고 보잘 것 없지만 해마다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특히 못생긴 모과 몇 알에서 풍기는 향기는 온 마을을 덮는다고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세 번 놀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먼저 저처럼 너무 못생긴 외모에, 그리고 못생겼는데 향기가 너무 좋아서, 마지막은 향기로운데 너무 뜹뜰해서 놀란다는 것이다.

▼ 주변 풍경은 수년 전 들렀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꽃무릇(石蒜)이 눈길을 끈다. 최근에 새로 식재한 모양인데 산자락이나 길가 공터 등 제법 무성하게 나라나있었다. 2006년 문화관광부 주관 ‘전국 최우수 관광자원’,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뽑혔을 만큼 이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다 다른 하나의 옷을 더 입히려는 모양이다. 하긴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니 그 정도의 공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 석산(石蒜). 즉 꽃무릇은 가정에서도 흔히 가꾸지만 사찰 근처에서 주로 발견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 식물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사용하며, 고승들의 진영을 붙일 때도 썼기 때문이란다. 또 하나. 꽃무릇은 상사화와 자주 혼동된다. 언뜻 보면 두 꽃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이 똑같다. 그러나 꽃 색깔이 달라서 석산은 붉은색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이다. 상사화가 여름꽃인데 반해 꽃무릇은 가을꽃이라는 점도 다르다. 하지만 국내의 상사화 축제를 찾아가 보면 상사화보다 더 많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눈에 거슬리는 풍경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생동물도 아닌, 특히 이곳 강천산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판다’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포토죤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인데, 이왕이면 신토불이를 살려 ‘반달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야생동물로 바꿔 세웠으면 어떨까 싶다.

▼ 강천산은 애기단풍부터 노랑단풍까지 숨겨진 단풍 명소이다. 특히 현수교 조금 못미처부터 구장군폭포까지 800m가량의 아기단풍이 장관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저 단풍나무들이 순창고추장처럼 붉은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할라치면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 이 부근은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아 흔히 애기단풍으로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를 이룬다. 타오르듯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보기 좋다.

▼ 단풍으로 곱게 물든 풍경을 떠올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구장군폭포(매표소에서 2.65Km 거리)’에 도착해 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바로 앞에 팔각정과 벤치 등 쉴 자리가 많고, 폭포가 잘 보이는 곳에 데크를 만들어 사진 찍기도 좋다. 구장군폭포는 옛날 마한시대 혈맹을 맺은 아홉 명의 장수가 전장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차라리 자결할 바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자’는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 구장군폭포는 병풍폭포와 마찬가지로 인공폭포이다. 하지만 병풍폭포가 소담한 여성의 미를 간직했다면, 구장군폭포는 웅장한 남성미가 돋보이는 폭포다. 용이 꼬리치듯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용천산(龍天山)이라 부르던 강천산은 산세가 수려하다. 그 산세에다 사람의 손으로 세 줄기의 폭포를 만들었으니 그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 거기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도 자연스러워 원래 있던 폭포처럼 느껴진다.

▼ 고개라도 들라치면 허공에 걸린 출렁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1980년에 완공된 80m(폭 1m) 길이의 현수교로 철계단을 따라 다리 위로 오르면 50m 아래의 골 바닥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설치될 당시만 해도 담력 약한 사람은 섣불리 올라서지 말라는 너스레도 있었지만, 요즘은 이 보다 더 높은 곳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니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 강천산까지 둘러봤으니 배가 출출해질 건 당연한 노릇.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차례이다. 내 고장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다. 십여 년 전, 나를 초대했던 군수님은 순창의 맛이 남도의 맛이라며 걸쭉한 밥상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메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순창 땅을 잠시 벗어나 이웃 동네인 담양으로 가잔다. 죽통밥에 곁들인 떡갈비가 먹을만하다면서 말이다. 거기다 안내를 맡은 여동생 내외는 담양의 새로운 명물이라면서 청둥오리 전문점인 ‘유진정’ 카드까지 내놓는다. 그네들의 말대로 청둥오리전골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오리의 머리와 뼈를 이틀 동안 푸욱 삶아냈다는 육수가 끓으면, 대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부추와 깻잎 등 신선한 야채를 살짝 익혀 먹는 방식인데, 담백하며 깊은 맛이 나는 육수에 몸을 푼 야채의 향이 코끝에서 향기롭다. 거기다 ‘동의보감’에는 오리가 정력 강장제, 해독작용,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고 성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했다. 뛰어난 맛에 건강까지 챙겼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지척에 있는 임실군의 옥정호(玉井湖)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옥정호 제일의 경관인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국사봉’이다. 내비게이션으로도 검색이 가능한 ‘국사봉 전망대’의 초입에 카페까지 들어선 주차장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 차를 대기도 좋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자락에 놓인 긴 나무계단을 따라 ‘국사봉 전망대’로 향한다. 참! 차에서 내리면 100m쯤 떨어진 아래쪽 언덕에 지어놓은 누각 형태의 전망대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일부러 가볼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는 ‘붕어섬’이 조망되지 않기 때문이다.

▼ 주차장 옆 꽃밭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가을색(秋色)’하면 사람들은 울긋불긋 눈을 휘황하게 하는 단풍이나, 맑은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 내는 억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곱고 그윽한 그 빛. 푸른 밤 달빛을 닮은 꽃, 가을 안개처럼 분분이 피어나는 꽃, 순백의 구절초가 전하는 색 역시 가을색이다. 구절초는 5월 단오에 줄기가 5마디였다가 음력 9월9일(중양절)이면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 흔히 들국화로 부르는 그 꽃이다. 무릇 꽃이란 한 송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무리를 지으면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하는 법이다. 구절초 또한 마찬가지인데 마침 이 근처에는 ‘구절초 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임실 치즈마을’에 들를 예정(코로나 때문에 문이 닫혀 못 들어갔지만)인 우리 일행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새색시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구절초가 큰 군락을 이뤄 피어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비탈진 산자락을 파고드는 계단은 가파르다. 거기다 제법 길기까지 하다. 그러니 다리품을 팔아도 한참을 팔아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통신사 기지국시설이 있는 능선에 오른다. 이곳에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첫 번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붕어섬은 상수원 보호구역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원래 이 근방 산군을 이루던 봉우리가 섬진강댐 건설로 물이 채워지면서, 고향을 잃은 수몰민처럼 본모습인 산을 잃고 섬이 되어버린 곳. 그나마 바위 절벽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을 옥정호 관리선의 운항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폭파하면서 진짜 섬이 되어버렸다. 옛 주민들은 외따로 떨어진 산이라며 ‘외얏날(외안날)’이라고 불렀다. 강줄기가 바깥 날과 안 날을 빙돌아 S자를 그리며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날’은 산등성이를 말한다. 더 오래 전에는 ‘섬까끔’이라고 불렸다. ‘까끔’은 전라도 방언으로 ‘벼랑’이다. 외안날의 북동쪽 날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생긴 데서 연유했다. 그러다가 옥정호에 물이차면서 물안개를 찍으려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고, 예술성 짙은 그들의 눈에 섬이 (금)붕어로 비쳐지면서 ‘붕어섬’으로 불리게 됐다. 전망에서 바라보는 붕어섬은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금붕어. 그것도 화려한 지느러미를 펼치고 유유자적 헤엄치는 중이다. 치렁치렁한 꼬리와 불룩한 배, 툭 뛰어나온 눈까지 금붕어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붕어섬 주변 옥정호의 옥빛 속살도 제대로 보인다. 담백한 수채화 같은 풍경에 눈과 마음이 취한다.

▼ 옥정호 풍경의 절반은 물안개의 몫이다. 새벽녘 물안개가 호수를 감쌀 때면 그야말로 선경이 따로 없단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올랐던 우린 물안개를 만나지 못했다. 호수면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아침햇살을 받으면 마치 신선이나 노닐 법한 풍경을 그려낸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1년 만에 만난 형제, 자매들이니 나눌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웬만큼 조망을 즐겼다면 정상을 향해 또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길은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하면, 너무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경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좌우로 몸을 비틀어가면서 말이다.

▼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둘 모두 붕어섬이 잘 조망되는 곳에 설치했는데, ‘높이 오를수록 풍경은 깊어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순번이 높아질수록 나타나는 붕어 또한 생동감을 더해간다. 참! 세 번째 전망대에는 이야기판도 걸려있었다. 조선 중기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玉井)이 되겠구나.’라고 예언한데서 ‘옥정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훗날 각색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호수가 됐다.

▼ 전망대에 서자 더욱 또렷해진 금붕어가 꼬리를 친다. 그런데 그 금붕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게 아닌가. 옷 벗은 나무들이 숭숭 솟은 붕어의 비늘처럼 보이는데, 그 사이사이에 길을 내고 정자를 세우는 등 공사가 한창인 것이다. 관할 지자체인 임실군에서 ‘섬진강 에코뮤지엄 사업’의 일환으로 잔디마당과 숲속도서관, 꽃이 가득한 정원 등을 갖춘 휴식공간을 만드는 중이란다. 하나 더.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바라보던 저 섬을 앞으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게 된단다. 국사봉 전망대 부근에서 붕어섬까지 출렁다리를 놓고 짚라인까지 설치한단다.

▼ 또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자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국사봉(475m)을 거치지 않고 곧장 오봉산(513m)으로 가는 길이다. 오봉산은 높지 않고 주변 풍경이 좋아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렇다고 5분만 더 투자하면 ‘국사봉’을 넘을 수 있으니 누가 이용하겠는가마는 그쪽 길도 제법 또렷하다. 아니 등산로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하긴 장삼이사의 마음이 어찌 똑 같을 수 있겠는가.

▼ 바위벼랑에 기대어 만든 나무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국사봉(國士峰) 정상이다. 20~30평은 족히 됨직한 정상은 온통 데크로 도배되어 있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무나 바위 등 기존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려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국사봉이 품고 있는 기(氣)를 헤치지 않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동쪽 아래 잿말에서 12명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진사 벼슬을 했다니 말이다. 이는 또 국사봉(國士峰)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드넓은 옥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운암대교까지 시야에 잡힌다. 옥정호를 포위하고 있는 오봉산, 묵방산, 회문산도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진안 마이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요산공원’일 것이다. ‘붕어섬 주변 생태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생태공원이다. 호수 쪽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최응숙(崔應淑)이 지었다는 ‘양요정(兩樂亭, 전북 문화재자료 제137호)’과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세운 ‘망향탑’도 들어서 있다. 봄이면 갓꽃, 튤립, 수선화, 팬지 등 아름다운 꽃들이 넓은 대지를 형형색색으로 수놓아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데, 이때를 기해 ‘옥정호 꽃걸음 빛바람 축제’가 열려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 굴곡이 이어지는 리아스식 호숫가에는 도로가 보일 듯 말 듯 연결된다. 저 도로를 지나는 여정도 하나의 여행코스가 된다. 옥정호를 삶의 터로 삼고 있는 운암리와 마암리를 잇는 저 도로(749번 지방도)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로의 아래 호반에는 ‘옥정호 물안개길 마실길’이 조성되어 있다. 들쭉날쭉한 강변길을 따라 걸으며 옥정호의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이다.

▼ 국사봉(國士峰)은 해발 475m의 작은 산이다. 하지만 등산객들 사이에는 인기가 높은 편이다. 옥정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교차가 심한 날 새벽에 산에 오르면 옥정호를 감싸고 있는 운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섬진강(蟾津江)의 젖줄인 ‘옥정호’는 1965년 섬진강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물을 배수하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하다.

▼ 산을 내려오니 배가 출출해져 있다. 마침 옥정호 근처는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점이 많고 유명하다. 과거 깨끗한 물에서 어업을 주로 삼았던 주민들 덕분이리라. 머리만 채울 게 아니라 배도 채워야겠다며 찾아간 곳은 운암면사무소의 소재지인 상운암마을. 아까 주차장에서 눈여겨봤던 민물요리 전문점(상운암 전주식당)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주요 메뉴는 빠가사리(동자개)와 메기, 민물새우를 넣은 매운탕. 그밖에도 다양한 사이드메뉴를 내놓는데 우리는 이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 ‘빠·새·메탕’을 주문했다. 매운탕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슬기탕’을 선택했는데 부재료로 아욱이나 부추를 넣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애호박을 넣고 있었다. 맛은 물론 좋았다. 매운탕을 먹은 일행들도 맛과 양이 훌륭하다는 평이다. 거기다 밑반찬으로 나온 채소튀김과 도토리묵도 별미였다. 식당 외벽에 걸어놓은 KBS, MBC, SBS, JTV 등 ‘언론이 극찬한 대한민국 대표 맛집’이라는 자랑이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도 여행

 

여행일 : ‘19. 5. 11()~12()

여행지 : 전라남도 순천시(낙안읍성, 국가정원, 순천만습지), 보성군(차밭). 여수시(오동도, 해상 케이블카), 곡성군(기차마을)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큰 처남의 둘째 아들이 얼마 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직장이 위치한 순천에다 새 둥지를 틀었단다. ()가 센 자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더니 집들이 겸해서 신혼집을 다녀오잔다. 멀고 먼 남녘의 끝자락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지만 까짓 신경 쓸 그녀들은 아니다. 다음은 대리운전 해줄 남편들. 요것들도 늘 해오던 대로 통보만 하면 끝이다. 당사자나 마찬가지인 처남댁까지도 끽소리 못하고 따르는 형편인데 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12일짜리 주말여행이 시작되었다. 현지에서의 안내는 물론 처조카 내외가 맡았다. 여행전문가나 마찬가지인 내 조언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둘째 날 일정은 순천만(順天灣) 습지부터 시작했다. 아니 일반 대중들에게는 갈대밭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순천만의 갈대밭은 무려 15만평에 달한다.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 온 이사천의 합수 지점부터 하구에 이르는 3쯤의 물길양쪽이 죄다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다.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거나 성기게 군락을 이룬 여느 갈대밭과는 달리,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웃자란 갈대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갈대밭이다. 갈대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란다. 39.8의 해안선에 둘러싸인 27(갯벌 21.6+ 갈대밭 5.4)에 이르는 순천만 일대에 갈대밭만 무성한 게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물억새, 쑥부쟁이등이 곳곳마다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하구의 갈대밭 저편에는 불그스레한 칠면초 군락지도 들어서 있다. 또한 이곳은 흑두루미,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인 희귀조이거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1종이 날아드는 곳으로 전세계 습지 가운데 희귀 조류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희귀조류 이외에도 도요새,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기러기 등을 포함해 약 140종의 새들이 이곳 순천만 일대에서 월동하거나 번식한단다.

 

 

 

입장권(성인 기준 8천원)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천문대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그 옆에는 자연 생태관이 들어서 있다. 낮에는 흑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을 보고, 밤에는 달과 멀리 있는 별 등을 관찰해 보라는 모양이다. 아니 이곳 순천만이 하루해가 짧을 정도로 넓다보니 아예 저녁 일정까지 포함시켜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연 생태관은 순천만의 다양한 생태 자원을 연구하고, 학생 및 일반인들의 생태 학습을 돕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다. 내부에는 실제보다 5배나 큰 흑두루미조형물이 만들어져 있고, ‘갯벌철새’, ‘텃새등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도 여럿 들어서 있다.

 

 

천문대와 자연생태관 앞은 글라스 가든(grass garden)’이라는 이름으로 꾸며져 있었다. 순천만의 바람을 품고 빗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갈대와 억새들의 소개하는 공간이란다. 그린라이트, 모닝라이트, 몰리니어무어, 무늬새그라스, 무늬억새, 수크렁, 제브리너스, 털수염풀, 팜파스글라스(흰색), 팜파스글라스(빨강), 흰갈풀, 흰줄무늬갈대 등 총 124,749본의 벼과(禾本科, Poaceae)와 사초과((莎草科, Cyperaceae) 식물들이 군락별로 식재되어 있다고 한다. 덕분에 난 갈대와 억새가 벼과의 식물인 걸 처음 알았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했다. 이미 육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널따란 잔디밭은 물론이고 꽃밭과 분수, 그리고 게와 짱뚱어를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액자형 네모 프레임까지 세워놓을 걸로 보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장승 모양으로 만든 안내판도 보인다. 이곳 순천만의 자랑거리인 2.3갈대밭22.2갯벌’, 그리고 멸종위기조류 25종을 포함한 230여 종의 철새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순천만 인근 주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가공한 차와 음료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란다.

 

 

글라스 가든 근처에는 찾아오는 철새들의 생태계를 엿볼 수 있도록 탐조대(探鳥臺)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철새는 눈에 띄지 않고 그저 갈대만 눈에 한가득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망원경으로 살펴본 일이 있었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순천만습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갈대밭을 살펴볼 차례이다. 습지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아치형 다리(무진교)를 건너자 푸르른 갈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이 갈대밭의 사이사이로 데크 탐방로를 놓았는데, 이 길은 용산 전망대(아래 사진의 건너편에 보이는 산)’까지 이어진다. 탐방로는 쭉쭉 곧게 뻗어나가는 데다, 들어가는 방향과 나가는 방향까지 모두 안내되어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느긋하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행여 다리라도 아플라치면 군데군데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서 말이다. ! 갯벌 생태계를 살펴보고 싶다면 탐방로 가에 따로 만들어 놓은 관찰 데크를 이용하면 된다.

 

 

위에서 말한 관찰 데크에서는 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순천만의 상징인 짱뚱어가 진흙 바닥에서 구멍을 뚫고 기어 나오는가 싶더니 다른 놈들과 영역 다툼을 치열하게 벌인다. 그러다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후다닥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생긴 모양이 우스꽝스러운 짱뚱어는 겨울잠을 자는 동면 어류로 잠둥어라 불리기도 한다. 건강한 갯벌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습지의 또 다른 주인은 게다. 사다리꼴 모양의 칠게는 새의 먹잇감으로 유명하며, 도둑게는 벽을 잘 타고 동작이 재빠르다. 바닷가에 있는 민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습지에서 한주먹하는 놈은 단연 농게다. 암놈은 몸집이 작고 두 다리도 짧지만 수놈은 한쪽 다리가 크고 길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분명 기형의 모습인데 힘센 한쪽 다리를 치켜들며 갯벌을 주름잡는 듯한 자세다. 이밖에도 갯벌에는 맛조개, 낙지, 키조개, 갯지렁이 등이 서식한다. ! 혹시라도 갯벌에 사는 생물을 보기 어려운 궂은 날에 방문했다면 자연생태관에 들러 이들의 모습을 살짝 엿보면 된다.

 

 

 

순천만습지를 즐길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갈대밭 산책이다. 갈대밭 사이사이에 여러 갈래로 내놓은 목재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녹색 물결이 일렁인다. 잎을 비비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습지를 구경한다고 하지 않고 즐긴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이다. 가을이면 저 바다는 은빛 물결로 바뀐다고 한다. 갈대의 북슬북슬한 꽃(실제는 털 달린 씨앗 뭉치)이 햇살의 기운에 따라 은빛 잿빛 금빛 등으로 채색되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갯바람이라도 불어올라치면 갈대숲 전체가 일제히 흐느적거리면서 흡사 망망한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장엄하게 변한단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바람결 따라 서걱서걱 흔들리는 갈대를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줏대 없는 사람을 일러 갈대 같다고 한다.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고 해서이다. 하지만 갈대만큼 유익한 식물도 드물다. 줄기는 문 앞에 걸어두는 발이나 돗자리 등을 엮는 데 썼다. 또한 빗자루 재료와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특히 뿌리는 해독(解毒) 능력이 뛰어나서 농약 중독이나 식중독, 중금속 중독 등을 고치는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인다.

 

 

탐방로의 끝에는 용산전망대가 있다. 갈대밭 관광의 중심지인 대대포구 건너편, 길게 뻗은 산줄기의 남쪽 끝 해발 80m 지점에다 전망대를 만들고 길이 1.3km의 탐방로로 연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다음 일정에 쫒기는 우리는 다녀오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왕복 40분 정도 걸린다지만 두 처제의 허약한 체질로는 1시간 갖고도 부족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사진과 글로 전망대의 분위기를 전해본다. <전망대에서 보는 순천만습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갈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서식물(水棲植物)이 갯벌에 원을 그리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휘감아 도는 물길이 신비롭고도 평온하다.> 일몰 시간에 맞추면 그 풍경화는 더욱 황홀하게 변한단다.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몰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갈대밭 사이를 걸어봤다면 다음은 생태체험선을 타볼 차례이다. 갈대밭 입구, 그러니까 무진교아래에 있는 다대동 선착장으로 가면 된다. ‘생태체험선선상투어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이 지역 출신 소설가 김승옥의 작품 무진기행의 주 배경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다. 배를 타고 광활한 갈대밭과 갯골을 지나 드넓은 순천만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인데, 아침엔 피어오르는 안개를, 그리고 저녁엔 노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 순천만습지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씩은 꼭 타보는 인기가 높은 코스이다.

 

 

12톤급의 평갑판선인 생태체험선은 해가 뜬 후부터 일몰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순천만의 유명한 S자 물길을 따라 왕복 6km30분 정도 운항하는데 요금은 성인 기준 7,000원이다. 배에 탄 사람(정원 36)들은 동승한 해설사로부터 순천만에 대한 흥미로운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 승선권을 끊을 때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야 하므로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눈만 들면 사방이 갈대다. 갈대는 순천만의 상징과 같다.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도 갈대가 자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순천만처럼 거창하고 우아하며 매혹적인 곳은 없다. 여름에는 초록빛의 대향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탈색된 줄기들만이 바람에 춤추는 곳이다. 너른 들판에 펼쳐진 갈대가 바람에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참고로 5.4크기의 저 갈대밭은 22.6의 갯벌과 함께 순천만습지를 만들어낸다. 그 덕분에 철새와 갯벌 생물들이 살기 좋은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연안습지 가운데서는 처음(2006)으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는 영예를 얻었다. 연안 습지란 만조 때와 간조 때 바닷물이 들어가고 나오는 경계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강에서 실려 온 흙이 넓게 쌓이면서 만들어진 삼각주나 해안 갯벌이 대표적인데, 다양한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배는 순천만습지의 특징인 ‘S’자형 물길을 누빈다. 갈대밭 사이사이로 나있는 길이다. 갈대는 이른 새벽에는 몽롱한 안개에 젖어 흐느적대고, 맑은 날 오후에는 햇살을 묻혀 흩날리며, 머릿결조차 날리지 않을 미풍에도 살며시 춤을 춘다. 이런 풍경을 마주대하면 갈대는 이미 식물이 아닌 감성의 언어로 변한다. 그런 감성이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문체와 구성으로 문단에 충격파를 던진 무진기행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다.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은 무진(霧津)으로 훌쩍 떠나온 주인공의 1인칭 서술 작품이다. 무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안개가 자욱한 듯 몽롱한 느낌을 주고, 작품이 의도하는 일탈과 도피의 무대로 더없이 어울려 보인다. 그런 무진의 무대가 바로 순천만 갈대밭 일대다.

 

 

얼마쯤 나아갔을까 한 무리의 새떼가 눈에 들어온다. 순천만의 진객은 뭐니 뭐니 해도 철새다. 우리나라 새 종류 540종 가운데 250여종이 이곳 순천만에서 관찰되고 있단다. 이곳 순천만이 조류가 살 수 있는 천혜의 환경 조건을 갖췄다는 증거이자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나저나 새들의 대표선수는 역시 흑두루미다. 순천시의 상징새, 시조(市鳥)이기도 하다. 흑두루미는 과거에 시베리아를 출발해 북한 낙동강을 거쳐 겨울을 나고 일본 이즈미로 날아갔는데 2013년부터는 시베리아, 북한, 서산, 순천만을 거친다. 낙동강 대신 순천을 선택한 것이다. 낙동강에 보를 만드는 바람에 모래톱이 사라지면서 월동지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낮에 농경지에서 먹이활동을 하다 밤이 되면 천적을 피해 모래톱에서 잠을 자야하는 흑두루미의 특성 때문이다.

 

 

두 번째 여행지는 여수의 오동도이다. 아니 그냥 오동도만 둘러본 게 아니고, 해상 케이블카가 포함된 일정으로 꾸며봤다. 그래서 찾은 곳이 돌산도에 있는 돌산공원(突山公園)‘. 오동도의 입구에 위치한 자산공원으로 가는 해상케이블카가 이곳 놀아정류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돌산공원은 여수시와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를 건설하면서 함께 조성된 공원이다. 사방이 툭 트여있어 주변 해양경관을 조망하기에 좋고, 특히 뷰포인트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여수 밤바다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돌산대교 준공기념탑여수시 타임캡슐’, ‘어업인 위령탑등의 기념물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케이블카는 돌산()과 자산(육지) 사이의 바다를 잇는다. 캐빈(cabin)은 총 50.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게 일반 캐빈(40, 8인승)이고, 크리스탈 캐빈(10, 5인승)은 은색이다. 이 가운데 크리스탈은 투명한 바닥으로 발밑의 바다를 관망할 수 있어 시각적인 즐거움과 함께 짜릿한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케이블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30분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우천 시에도 운영된다. 다만 바람이 심하거나 정비가 필요한 경우에는 공지 후 운영이 중단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왕복 기준으로 13,000, 크리스탈은 이보다 7,000원을 더 내야한다.

 

 

케이블카의 최고 높이는 98m이고 바다를 지나는 구간 길이는 650m. 바다 위를 날다보면 케이블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기분이 마치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하다. 아니 그보다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일품이다. 거북선대교(아래 사진)와 돌산대교, 이순신광장, 여수해양공원 등의 명소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이게 요즘은 여수를 대표하는 관광콘텐츠가 됐다고 한다.

 

 

여수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하멜등대도 눈에 들어온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여수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무인등대로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이른바 사진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방파제 안쪽에는 하멜전시관도 들어서 있다. 하멜이 여수에 머무르게 된 과정과 여수에 살면서 겪었던 일을 연대기로 설명해 놓은 공간이다. 그나저나 저 풍경은 밤에 더 아름답다고 한다. ‘여수 밤바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이 케이블카를 야간에 타면 그런 여수 밤바다의 매혹적인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는데 귀경시간에 쫓겨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 아쉬운 일이다.

 

 

1.5km의 거리를 13분 만에 날아간 케이블카는 자산공원(紫山公園)에 위치한 해야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도 역시 전망대와 함께 여수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를 전시하는 자그마한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었다. 각종 요깃거리를 판매하는 매점에서 시장기를 때울 수도 있다. 참고로 자산의 정상에 자리한 자산공원(여수시 종화동)은 오동도는 물론이고 여수항과 여수의 구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공원이다. 또한, 새해 첫날에는 일출을 보고자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자산(紫山)’이란 아침 일출 때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충무공 동상과 충혼탑, 팔각정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거북선 모양으로 지은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도 주요 볼거리이다.

 

 

이젠 오동도로 가볼 차례이다. ‘해야정류장전방에 지어진 주차타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로 내려서면 된다. 이 엘리베이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행하며 이용 요금은 무료이다. 단 강풍주의보나 경보가 발효되거나 정비가 필요할 경우 운행이 중지된다는 점은 기억해두자. ! 오동도 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 계단은 일출정에 접근하기 위해 놓은 것으로 케이블카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단다.

 

 

주차타워를 빠져나와 ‘Sono calm Hotel(구 엠블호텔)’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목적지인 오동도(梧桐島)로 들어가는 길목인 방파제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동도로 들어가는 옵션은 세 가지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그냥 걷는 것이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자전거를 빌리면 된다. 일반(1시간 5천원)과 커플(1시간 1만원) 뿐만 아니라 유모차(1시간 5천원)까지 준비되어 있다. 1시간을 더 빌리려면 3천원과 5천원, 3천원을 추가로 더 내야한다. 체력이 약한 노약자들에게는 동백열차(성인기준 1천원)’를 권한다. ! 모터보트를 이용해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팁 하나 더. 근처에 유람선 선착장도 있었다. 거북선대교와 진남관, 장군도, 돌산도, 오동도 등을 돌아오는데 요금은 12천원을 받고 있었다.

 

 

 

1933년에 준공된 서방파제(섬 반대편에는 445m 길이의 동방파제도 있다)의 길이는 768m나 된다. 방파제치고는 꽤 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생동감을 더해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수에 사는 시인과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데, 물고기가 유영하는 바다 속 풍경과 돌산대교, 무술목, 거북선 등이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거기다 중간에 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했는가 하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삭막할 게 뻔한 방파제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으로까지 선정된 이유일 것이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탐방로를 따라 투어를 시작한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길은 햇빛 한 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동백나무가 울창하다. 맞다. 오동도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섬이다. 오죽하면 여수하면 오동도, 오동도하면 동백꽃이 연상되겠는가. 섬 전체를 덮고 있는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는 이르면 10월부터 한두 송이씩 꽃이 피기 시작하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붉은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중순경에 약 30% 정도 개화되다가 3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룬단다. 이밖에도 섬에는 시누대 등 200여 종의 각종 상록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유명 관광지답게 섬 전체가 잘 꾸며져 있었다. 시판(詩板)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중에 강영은 시인의 시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바람을 품에 안은 여수에서는 바람이 바다보다 먼저 보인단다. 젖을 물고 있는 섬들과 근육으로 다져진 해안들도 모두 바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용굴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 봤다. 아니 전설을 따랐다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전설에 의하면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오동도에 사는 용이 지하 통로를 이용해 연동천 용굴로 가서 빗물을 먹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마을 사람들이 연동천의 용굴을 막았나 보다. 그런 다음부터 새벽 2시경이 되면 이 용이 자산공원 등대 아래에 있는 샘터로 이동을 했다니 말이다. 바다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인데, 그로인해 파도가 일고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는 내용이 안내판에 적혀있었다.

 

 

동백이 지는 날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걷기에 딱 좋은 산책길은 옆구리에 암석해안을 끼고 이어진다. 오동도는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됐다. 그래선지 섬은 대부분 해식애가 발달한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해식동과 풍화혈, 해식아치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소라바위, 코끼리바위, 용굴, 병풍바위, 지붕바위 등 기암괴석의 생김새만큼이나 그 이름도 다양하다.

 

 

오동도의 정상은 등대가 차지했다. 1952년에 불빛을 밝힌 이래 지금까지도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등대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는 8.48m 높이에 백색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었으나, 2002년 높이 27m의 백색 8각형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등탑 내부는 8층 높이의 나선형 계단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외부에 전망대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등대를 찾는 관광객에게 여수, 남해, 하동 등 남해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사무동 2층에 전시실을 마련하고 등대와 바다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등대 옆에는 여수의 일출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는 해돋이전망대가 있다. 하지만 동백터널 너머에 살포시 숨어있어 잘 살펴봐야만 찾아갈 수 있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색이 오동도(梧桐島)인데도 오동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대신 동백나무만 저렇게 울창한 이유를 말이다. 지명처럼 옛날 이 섬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때의 승려 신돈이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단다. 전라도의 전()자가 사람 인()’자 밑에 임금 왕()’자를 쓰고 있는데다, 남쪽 땅 오동도라는 곳에 서조(瑞鳥)인 봉황새가 드나들어 고려왕조를 맡을 인물이 전라도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봉황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오동나무를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아리따운 한 여인이 도적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정성껏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시누대가 돋아났단다. 그런 연유로 동백꽃을 '여심화' 라고도 부른다는 전설이다.

 

 

전망대에 서면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여수 근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인 점을 감안할 때 의외의 풍경이라 하겠다. 하긴 저런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니 어찌 일출 명소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전망대 근처에는 시누대 터널도 있었다. 산죽의 일종인 시누대가 하늘을 가리면서 둥그런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수군연병장으로 오동도를 사용하던 시절, 저 시누대는 화살대로 만들어져 이순신 장군이 10만 명의 왜군을 쓰러뜨릴 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오동도 섬 전체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북쪽 해안가가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세계박람회의 여수유치를 위해 세워진 동백관(세계박람회홍보관)과 음악분수(아래 사진)가 들어서 있다. 음악분수는 3월에서 11월까지 매시 정각과 30분에 각각 15분씩 공연한다. 또한 종합상가의 횟집에서는 인근 남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

 

 

또한 거북선과 판옥선의 모형도 전시되고 있었다. 앞에는 若無湖南 是無國家이라고 적힌 빗돌도 세워놓았다. 1592414, 일본이 우리 땅으로 넘어온다. 임진왜란이다. 이때 임금은 나라를 팽개쳐 버렸다. 임금은 죽더라도 천자의 땅에서 죽겠노라 지껄이면서 말이다. 임금마저 내버린 나라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여수에서 거북선을 만든다. 당시 왜적은 전라도를 휩쓸고 군량을 채워 서울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니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이 왜적에게 넘어가는 순간 나라는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이끌고 호남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쳤고, 여수 앞바다로 넘어가는 왜적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다. 1593년 사헌부 현덕승에 보낸 편지글인 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는 국보 76호 서간첩으로 보존되고 있다.

 

 

 

바다 건너 여수 엑스포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여수는 지난 2012'여수 세계박람회'를 유치했다. 행사는 끝났지만 박람회장은 지금도 여수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인기 짱인 아쿠아리움을 비롯해 엑스포 디지털갤러리(EDG), 빅 오(Big-O) 등 명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빅 오 쇼'는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7m 원형 조형물 '디 오(The O)'에 분수를 이용해 워터 스크린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조명과 레이저, 홀로그램을 쏘아 화려한 볼거리를 연출한단다.

 

 

여수의 명물 돌게장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 후 곡성으로 향했다. ‘칙칙폭폭으로 대변되던 60~70년대의 기차여행을 떠올리게 만드는 명품 관광지가 이곳 곡성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다 황전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로 갈아타고 남원방면으로 달린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서정미 넘치는 길이다. 오곡면 소재지를 지나서 읍내로 들어가기 직전 오른편에 섬진강 기차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증기기관차나 철로자전거 타기, 영화세트장 관람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역사(驛舍)는 맞배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시골 기차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부도 기둥과 천정 등 1933년 지어질 당시의 목조구조가 여실히 드러난다. 등록문화재로까지 지정(2004)된 이유일 것이다. 이 역사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등장한바 있단다. 지금껏 남아있는 옛 역사들 중 꽤 큰 규모이기도 하지만, 흰색 담벼락에 박공지붕 형태라 군더더기 없이 담박한 분위기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옛 곡성역은 현재 기차를 테마로 한 섬진강기차마을의 입구로 사용된다. 반세기 넘도록 곡성 사람들은 이 역사를 통해 타지로 떠나고 또 돌아왔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온 추억들 속에서 명품마을이 출발한 셈이다. 입장료는 성수기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3000원이며, 비수기에는 2500원이다. 이 입장료는 장미공원 등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료로 기차마을 안에 입장한 후 증기기관차나 레일바이크 등을 타보려면 따로 이용료를 내야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플랫폼에 전시해놓은 증기기관차다. 산업혁명의 결과물이자 19세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기차는 이 증기기관차에서 시작됐다. 기차가 한자로 물 끓는 김을 뜻하는 기()자를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칙칙폭폭이란 표현도 증기기관에서 고압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흉내 냈다. 우리나라에선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인 모갈1가 처음 운행됐다. 당시 신문은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흥분된 어조의 시승기를 전하기도 했다. 당시 증기기관차의 평균시속은 20km, 지금의 고속철도가 최고시속 305km를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턱없는 속도다. 하지만 당시 모갈1호가 달리던 인천에서 노량진 구간은 배로는 9시간 30, 걸어서는 12시간이 소요됐었다. 이 거리를 1시간 30분 만에 이동했으니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할속도라고 느꼈던 게 당연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증기기관차 운행은 1967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기차마을의 특징은 옛 곡성역 및 남아있는 철길을 이용해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만든 점이다. 근대문화유산 건축물로 지정된 옛 곡성역을 폐선 철로와 함께 철도청으로부터 매입해 기차마을이라는 이름의 관광지로 꾸몄다. 1998년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버려진 옛 전라선 철길에는 추억의 증기기관차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달리고, 철도공원으로 조성된 옛 곡성역 구내는 사람이 두 발로 동력을 내야 이동할 수 있는 철로자전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한국관광 100'에까지 선정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올해(2019)는 경주 불국사, 전주 한옥마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4년 연속해서 선정되었단다.

 

 

기차마을은 한마디로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곳곳에 화원을 조성해 봄부터 가을까지 꽃밭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앙증맞은 연못 옆에 우뚝 선 풍차도, 바람개비 언덕도 볼거리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화려한 조명이 수놓는 음악 분수 역시 포인트이다. 그 유명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 세트장도 이곳에 있다. 토지, 사랑과 야망, 야인시대도 이곳에서 촬영이 이뤄졌단다.

 

 

놀이시설인 드림랜드도 들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곡성 읍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대관람차는 젊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는 바로 레일바이크이다. 철길 위를 달리는 자전거인 레일바이크는 곡성역 기차마을 내 순환형으로, 1.6구간의 장미원을 돌며 20분 정도를 탈 수 있다. 조금 더 길게 타고 싶다면 침곡역(寢谷驛)에서 가정역까지의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5.1로 조금 멀기는 하지만 슬렁슬렁 페달을 밟다 보면 어느새 가정역이다. 막판 오르막 구간이 조금 힘들긴 해도, 섬진강의 허리를 끼고 도니 풍광만큼은 전국 최고라고 한다.

 

 

또 다른 탈거리인 미니열차는 기차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이용대금은 성인기준 5천원이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는 장미공원이다. 넓이가 4나 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장미공원에는 1004종의 다양한 장미가 식재돼 있다고 한다. 품종마다 다른 모양과 색깔을 띠는 장미들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지의 장미들로 향기 또한 다양하단다. ‘천만송이 세계 명품 장미, 그 향기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장미축제까지 열릴 정도라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꽃망울을 열지 않아 그런 장관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장미는 5월부터 6월까지가 장관이라는데 아쉽게도 올해는 철이 늦은 모양이다.

 

 

이젠 이곳 기차마을의 트레드마크인 증기기관차를 타볼 차례이다. 기차마을에서는 옛날 실제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옛 곡성역(섬진강 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 10km 구간을 2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행하고 있다. 이 기차는 디젤기관차에 증기기관차의 외관만 덧씌운 것이다. 6·25전쟁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참전열차 미카3129의 외관을 재현했다. 그렇지만 둔중한 검은색에 옛 비둘기호를 흉내 낸 좌석 등은 시간을 건너 뛰어 증기기관차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운행속도도 30~40km/h에 불과하다. 때문에 종점인 가정역까지 다녀오는데 30분의 정차시간을 포함해 90분이나 소요된다. 이용요금은 성인이 6000원이다.

 

 

증기기관차는 원래 칙칙폭폭달린다. 하지만 기차마을의 열차는 무늬만 증기기관차라서 그런 소리는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까지는 없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옛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기차여행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삶은 달걀과 사이다인데, 추억의 교련복을 입은 아저씨가 옛날과 똑 같은 멘트를 풀어가며 팔고 있었다. 색다른 별미이니 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한 꾸러미씩 사들더니 상대편 머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이다. 삶은 계란은 누가 뭐래도 상대편, 특히 연인의 이마로 깨서 먹어야 제맛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그러니 기차가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흘려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는 물론이고 잔디광장과 원두막, 디딜방아, 수차, 꽃길 등 환상의 섬진강변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같은 봄날에는 섬진강을 따라 봄의 신록과 도로 변의 꽃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느린 속도로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 섬진강 등 3선이 진풍경을 이루는 이 구간을 호남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택리지`의 이중환도 섬진강을 끼고 도는 이 날렵한 S자 명품 선로를 `천하 절경`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여기서 팁 하나. 기차에서 가장 좋은 관람 포인트는 기차와 기차 사이 난간이다. 철쭉이나 코스모스 등 철마다 달리 피는 꽃은 물론이고, 섬진강변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명품 뷰가 가정역까지 닿는 동안 내내 이어진다.

 

 

기차의 회차지(回車地)인 가정역도 운치가 있다. 전체가 나무로 제작돼 따뜻한 느낌을 준다. 가정역에 도착한 증기기관차는 약 30분 동안 정차하게 되는데, 이때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진강변을 여유롭게 달려볼 수도 있다. 이곳 가정마을은 전라남도가 뽑은 여름휴가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체험, 휴식, 역사문화탐방이란 3가지 테마로 각각 2개소씩을 선정했는데, 가정마을은 다양한 레포츠와 체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단다. 맞다. 이곳 가정마을은 관광열차가 다니는 가정역말고도 섬진강 래프팅 체험과 천문대 별자리 관측, 짚라인, 자전거 하이킹 등 이색적인 체험거리가 많은 곳이다.

 

 

 

역 앞의 섬진강 출렁다리를 건너면 섬진강의 은빛 물결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이왕이면 차가운 물살에 손도 한번 담가보고 강변을 따라 잠시 여유로운 산책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진안에서부터 흐르는 섬진강은 곡성에 이르러서는 곡성과 어울리는 자연경관을 품어낸다. 철로와 조화를 이룬 섬진강변 경관은 독특한 강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