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찬샘마을길)

 

여행일 : ‘22. 8. 6(토)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이현동·황호동·부수동·직동 일원

여행코스 : 이현동 억새밭→찬샘마을(아랫피골)→황호동 느티나무→부수동→전망대(왕복)→성치산성→윗피골(성황당고개)→찬샘정→냉천 버스종점(거리/시간 : 10km/ 실제는 찬샘정에서 두메마을까지 역방향으로, 9.9km를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두 번째 구간인 ‘찬샘마을길(10㎞)’을 걷는다. 이현동억새밭에서 시작해 냉천버스종점에서 끝나는데, 해발 210m의 ‘성치산’을 오롯이 넘어야하는 만만찮은 코스다. 거기다 성치산성과 전망대를 제외하면 보여주는 경관도 별로다. ‘대청호오백리길’의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은 트레커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들머리는 ‘찬샘정’(대전시 동구 직동)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문의·청남대 IC에서 내려와 32번 지방도와 대청호반로 등 여러 도로를 번갈아 타게 되는데, 너무 복잡하니 내비게이션에 ‘찬샘정’을 치고 찾아오는 게 편하겠다. 참! 호평동에서 시작되는 냉천로가 1차선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애먹어가며 들어가던 산악회의 (대형)버스도 냉천정에서 차를 돌려야만 했다.

▼ 거리는 10km밖에 되지 않으나 해발 210m의 ‘성치산’을 오롯이 넘어야만 한다. 거기다 산길(3km)이 가파르고 오르내림까지 잦아 오늘처럼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는 지옥의 구간이 된다. ‘부수동 호안’에서 바라본 대청호 풍경이 그나마 위안이었다고나 할까? 참! 트레킹은 주차 여건을 감안 역방향으로 진행했다. 그마저도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한 탓에 원래의 출발지에서 1km쯤 못 미친 ‘찬샘정’에서 시작했다.

▼ ‘찬샘정(현위치)’은 대청호 조성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정자다. 그러니 오랜 세월동안 실향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게 우리 같은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되어준다. 대청호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새로운 활력을 충전할 수 있는...

▼ 역방향(찬샘마을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차선이지만 시내버스까지 오가는 의젓한 도로란다. 하지만 소형버스일 게 뻔하다. 대형버스를 몰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과 마주칠 경우 우리처럼 난감한 상황에 봉착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오늘은 ‘통통투어’ 팻말이 먼저 반긴다. 서울시의 ‘통통’은 ‘통할 통(通)’을 겹쳐서 쓰던데, 이곳 대전의 통통은 뭘 의미하고 있을까? 아서라. 까짓 낱말풀이가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그저 팻말 속 QR 코드를 스캔해 해당 구간의 ‘통통 튀는’ 정보나 받아보면 그만 아니겠는가.

▼ 2구간의 길안내는 ‘119’의 구조지점표시목이 맡았다. 기본 임무인 ‘현위치 번호’는 물론이고, 시점(이현동 억새밭)과 종점(냉천 버스종점)까지의 거리를 적어 이정표의 기능을 더했다.

▼ 1km쯤 걸었을까 ‘윗피골’이란 이름표를 단 이정표가 얼굴을 내민다.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이 근처에 ‘윗피골’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핏골’이란 지명은 후삼국시대 견훤의 후백제 군사와 신라가 노고산성에서 크게 싸워 피가 내를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후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해서 냉천수가 많이 나오는 특성을 감안 ‘찬샘마을’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게 또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피 직(稷)’자가 들어간 직동(稷洞)이 되었다.

▼ 몇 걸음 더 걷자 ‘성황당고개’다. 출발지에서 25분쯤 되는 지점(이정표 : 성치산 1.6㎞/ 찬샘마을 0.5㎞)인데,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로부터 유래된 지명이지 싶다. 윗피골 주민들이 이 나무를 신목으로 모신 흔적이 아니겠는가.

▼ 통나무계단이 놓인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3km짜리 산길구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것도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시작부터 겁을 주려는 모양이다.

▼ 5분쯤 지나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더 높은 봉우리 하나가 어서 오라는 게 아닌가. ‘산너머 저쪽에 행복이 있다기에 사람들과 함께 찾아갔다가 울면서 돌아왔다’는 ‘칼 부세’의 경고가 떠오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 이후부터 산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짧고 완만한 내림과 길고 가파른 오름이 반복된다.

▼ 6분 후에 올라선 두 번째 봉우리, 하지만 이곳에도 행복은 없었다. 아무래도 또 다시 나타난 저 산 너머에 숨어있는 모양이다.

▼ 산길로 들어선지 16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니 무인산불감시탑이 반긴다. 네이버지도는 이곳을 226m봉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이때 상큼한 솔향기가 코끝을 스쳐간다. 그러고 보니 능선이 온통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 아무리 작다고 해도 쉬운 산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오르내리기가 버거운 사람 또한 있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던져놓고 간 돌멩이가 하나 둘 쌓여 저런 돌무더기를 만들었다.

▼ 산길로 들어선지 33분, 특별한 게 하나도 없는 ‘삼각점봉’에 올라섰다. 삼각점(대전 423)과 이를 설명해놓은 안내판만 달랑 설치되어 있다. 해발고도도 202m에 불과한데 더 높은 곳을 놓아두고 하필이면 이곳에 설치했을까?

▼ 삼각점봉을 지나자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오르막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파른 내리막이 대부분이다.

▼ 그렇게 7분쯤 내려서자 안부삼거리다. 오백리길 이정표(성치산성 0.11㎞/ 찬샘마을 1.96㎞)는 빠뜨렸지만 성치산상으로 오르는 게 버거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탈출하면 된다.

▼ 왼편으로 몇 걸음 내려가 보니 임도가 얼굴을 내민다. 정방향에서 2구간을 시작했을 경우 저 길은 따라 부수동까지 간 다음, 산길을 타고 성치산성을 거쳐 이곳으로 오게 된다.

▼ 삼거리를 지나자 ‘성치산성’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요 위에 성치산성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제 위치도 아닌 곳에 안내판을 세운 이유는 뭘까? 저 무거운 철판을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게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 성치산 봉우리를 빙 둘러 쌓은 성치산성(城峙山城, 대전시 기념물 29호)은 둘레가 160m에 불과하다. 퇴뫼식 석축산성이나 거의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역사가 묻어있다.

▼ 다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길, 오늘은 중복과 말복의 사이. 말 그대로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복날 산행이라니’라며 혀를 차던 윤대장의 말마따나 복중 산행은 죽음의 행진이 될 수밖에 없다. 땀수건을 짜기라도 할라치면 장맛비 낙숫물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러니 어찌 죽을 맛이 아니겠는가.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산꼭대기에 올라섰다. ‘네이버 지도’는 이곳을 ‘성치산(219.4m)’으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 흔한 표지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잡목에 포위된 탓에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 둘레길을 만든 지자체도 그게 어색했던 모양이다. 주변 생태계를 소개하는 안내판에다 ‘성치산성’이란 지명을 살짝 끼워 넣었다. 참! 표지기를 매달고 있던 대전관광공사 직원이 친절하게도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성치산성이 나온다고 알려준다. 이왕에 왔으니 멋진 사진으로 콘테스트에 참여해볼 것을 권유하면서...

▼ 그의 말대로 성치산성은 금방 나왔다. 그런데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터가 좁아도 너무 좁다. 거짓말 좀 보태서 손바닥만 하다고나 할까? 이런 곳에 어떻게 성을 쌓고 또 어떻게 상주할 수 있었을까? 맞다. 이곳은 장대(將臺) 터에 불과했을 것이다. 산성을 성치산의 8부쯤 되는 산비탈을 따라 쌓았었다니 말이다.

▼ 이곳도 정상석은 없었다. 그렇다고 산성 안내판을 세워놓지도 않았다. 그저 이정표(서낭당고개 1.6㎞/ 황호동 전망좋은곳 1.2㎞) 하나가 이 모든 걸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이곳이 어디임을 알려주는 못하지만.

▼ 조망은 시원스럽다. 보조여수로댐과 삼정동의 강촌마을(이촌·강존·민촌) 등 지난 번 걸었던 1구간의 풍경들이 북쪽에서 얼굴을 내미는가 하면, 동쪽에서는 오백리길 17구간인 충주시 상당구 권역의 리아스식 호안이 나도 있다며 고개를 들이민다.

▼ 이제 하산 길이 시작된다. 이때 제법 잘 생긴 바위들을 만나기도 한다.

▼ 산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낮추어간다.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편하지만은 않다.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 울창한 숲은 바람까지도 막아버렸다. 거기다 장마철의 습기는 사위를 눅눅하게 만든다. 고진감래라고 했는데, 오늘은 고진(苦盡)에 고진만 계속되는 셈이다.

▼ 하산 길이라고 해서 마냥 내리막만 있는 게 아니다. 가끔은 오르막 구간이 나오기도 한다.

▼ 하산을 시작한지 25분. 공터로만 남은 부수동(芙水洞)에 내려섰다. 연꽃이 물에 떠있는 모양의 명당자리가 있는 곳이라는 뜻의 한자 ‘연화부수(蓮花浮水)’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데, 대청호에 물이 들면서 지금은 집 한 채 없는 마을이 되어버렸다.

▼ 둘레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하지만 이정표는 계속해서 능선을 타란다. 200m만 더 가면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면서.

▼ 고지가 코앞인데도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다. 하긴 등산화 바닥이 질척거릴 정도로 땀을 흘려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맞다. 많은 이들이 전망이 뛰어나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호숫가까지 다녀오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 5분쯤 걸었을까 바다처럼 너른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건너에서는 ‘청남대’가 고개를 내민다. 오른편으로는 옥천군과 보은군의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다면 대청호 속에 가라앉았다는 옛 부수동이 이 부근일지도 모르겠다. 담수 후 주민들은 타지로 떠났고, 마을은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았다.

▼ 호숫가로 내려가 오른편으로 걸어봤다. 마치 물결무늬의 예쁜 매트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모래톱이 아니어선지 촉감마저 썩 곱지는 못하다. 그저 눈으로만 즐기라는 팔자인 모양이다.

▼ 100m쯤 이동했을까 기막히게 예쁜 풍경화 하나가 그려진다. 물 빠진 호수의 가장자리 섬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물이 조금씩 빠져나갈 때마다 호수의 파장이 층층의 예쁜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 핸드폰 삼매경인 저 젊은이의 관심사는 대체 뭘까?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까지 제켜놓았을 정도라면, 투자한 주식이나 가상화폐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했다. 오늘 하루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음에, 바람과 비를 피해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면 되는 것을...

▼ 부수동 공터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임도를 따른다. 대부분 포장길이지만 어쩌다 질퍽거리는 비포장 구간도 나타난다. 가끔은 나무 사이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대청호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 그렇게 10분쯤 걸어 부수동 고갯마루를 지키는 ‘느티나무’에 도착했다. 수령이 340년에 이르는 이 나무는 나이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한다. 안내판은 강씨 성씨를 가진 선비와 그의 딸 부용의 슬픈 얘기를 적고 있었다. 하나 더, 이곳은 사진촬영지로 꽤 각광을 받는다. 길과 나무의 구도를 잘 활용하여 사진을 찍으면 나름 괜찮은 사진이 나온단다.

▼ 나무도 나이를 먹다보면 신령스러워지는 걸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답게 정월대보름이면 이 나무 아래서 ‘부수골목신제’가 열린단다. 나무를 신성시 여기는 건 주민들만이 아닌 모양이다. 나무 아래서 장구와 꽹과리를 쳐가며 굿을 하고 있는 무속인도 만날 수 있었다.

▼ 호숫가에 쳐놓은 저 텐트의 주인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이곳은 깔따구 세상.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오는 깔따구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인데...

▼ 17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삼거리다. 아까 성치산성 못미처에서 내려다보던 지점인데, 이정표(찬샘마을 2㎞/ 성치산성 0.23㎞/ 황호동 전망좋은곳 1.8㎞)가 성치산성의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 따가운 햇볕이 내려쪼이는데도 깔따구의 행패는 여전하다. 숨결에 빨려 들어올 정도로 세상이 온통 깔따구 떼인 것이다. 깔따구는 환경부가 4급수 지표종으로 제시한 벌레이며, 애벌레는 오니 속에서 산다. 그렇다면 이곳 대청호의 수질이 4급? 아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게 사람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효(孝)의 본질이 마음에 들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강이식 장군과 강민첨 장군을 시조와 파시조로 둔 진주강씨 은열공파의 후손들이 세운 빗돌이다.

▼ 길가 비닐망을 감아 올라가며 유홍초(留紅草)가 꽃을 피웠다. 붉고 앙증스러운 꼬마 꽃을... 유홍초의 꽃말은 ‘영원히 사랑스러워’라고 한다. 요즘 너나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주변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많이 있어 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 30분을 더 걸어 도착한 임도의 끝은 ‘찬샘마을(아랫핏골)’이다. 하지만 둘레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동구나무집(찜닭·민물매운탕 전문)’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초입에 이름표(찬샘마을)를 단 이정표(이현동 1㎞)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렇다고 ‘찬샘마을’을 빼먹을 수 있겠는가. 잠깐 들러본 마을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한 옥타브 높은 소리도 요란하다. 맞다. 이곳 찬샘마을은 최근의 아이콘인 농촌체험관광으로 뜨는 중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을 수확하고 다양한 먹거리를 함께 만들어보는 식문화체험이 인기인데, 두부 만들기·매실액 만들기·장아찌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 많은 도시민들이 자녀와 함께 찾는 곳이니 그들을 위한 시설이 어찌 없겠는가. 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숙박 시설 말고도 두어 개의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참! 이 마을은 매화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봄이면 산등성이에 매화꽃이 만발해 마을을 온통 꽃 바다로 만들어준단다.

▼ 도로를 벗어나자 효평천이 갈 길을 막는다. 그 물길 위로 길게 데크로드가 놓였는데, 이게 또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호수 한가운데를 지나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높은 데크길에서 대청호를 내려다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기 때문이다.

▼ 데크로드 아래는 효평천이다. 하지만 물에 잠기면 이곳은 대청호의 일부분이 된다. 지금은 비록 배를 드러내놓고 있지만...

▼ 데크로드가 끝나자 이번엔 산비탈이다. 하지만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걸어가는 데 지장이 없다. 바닥에 야자매트까지 깔아 질척거릴 염려도 없다.

▼ 오백리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길, 그중에서도 호반을 낀 이런 곳에 어찌 전망대 하나 만들어놓지 않았겠는가.

▼ 탐방로는 황새봉을 에돌아가는 모양새다. 그런데 황새봉 인근이 모두 생태공원은 아닌 모양이다. 황새봉 산자락에 민가가 들어서 있는 걸 보면... 자연생태계와 인간의 공존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

▼ 모퉁이를 돌아서자 습지가 시작된다. 그 규모가 3600평에 이른다니 거대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저 습지에는 억새와 노랑꽃창포, 삼백초, 수련 등 수생식물 군락이 조성돼 있단다. 하지만 대청호와 접해있다는 버드나무 군락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이현동 습지는 생태학습지로 꾸며졌다. 사람의 손길을 타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얘기다. 초입에서 길손을 맞는 저 돌탑도 사람이 만들었고, 만든 이의 마음을 담아 또 다른 사람을 맞는다.

▼ 잠시 후 호박터널로 들어섰다. 파이프로 긴 터널을 만들고 호박넝쿨을 올렸는데, 넝쿨마다 큼지막한 호박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매달린 호박은 못생겼다는 속설을 단숨에 날려버릴 만큼 귀엽고 예뻤다. 그래선지 이를 소품삼아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이 여럿 보인다.

▼ 오색 빛으로 영근 호박 터널을 지난다. 각양각색으로도 모자라 기기묘묘하게 생긴 색 호박들이 탐방객의 발길을 붙들어 맨다.

▼ 호박터널 주변은 웃자란 억새와 갈대들로 뒤덮였다. 억새나 갈대는 가을이 제격이다. 낮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은빛으로, 해가 질 무렵 석양에 빛나는 황금빛으로, 그리고 달밤에는 가을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솜털 억새 물결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꼭 가을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푸름을 자랑하는 여름철 억새에서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 호박터널은 널따란 광장으로 연결된다. 마을협동조합에서 개최하는 호박축제장이 열리는 곳이다. 그래선지 정자와 식수대 등 편의시설은 물론이고, 호박마을을 홍보하려는 듯 호박을 주제로 한 조형물을 여럿 설치했다.

▼ 그중에서도 대전의 깃대종인 ‘감돌고기’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대청호에서 서식하는 여러 물고기들과 함께 벚꽃 사이에서 노니는 것을 형상화했단다. 깃대종이란 어느 지역의 생태나 지리적 특성을 대표하는 동식물의 종으로, 대전의 깃대종으로는 감돌고기와 함께 하늘다람쥐, 이끼도롱뇽이 있다.

▼ 오백리길 2구간의 안내도와 이정표는 광장의 뒤쪽에 세워져 있었다. 이 광장이 1구간과 2구간의 경계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이현동(梨峴洞)의 또 다른 이름은 ‘배오개’이다. 뒷산의 지형이 배(梨)처럼 생긴데서 유래됐다. 산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두메마을’, 요즘은 ‘호박마을’이라는 애칭까지 붙었다.

▼ 날머리는 이현동 두메마을(대전시 대덕구 이현동)

호박 구경을 실컷 한 다음 두메마을(계족산 골짜기에 들어선 두메산골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로 향한다. 그리고 7-8분쯤 더 걸어 대전 시티투어 승강장을 겸하는 주차장에 이르면서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9.9km를 찍는다. 3km 정도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탐방기를 쓴 기자들이 너나없이 추천하던 노고산(老姑山, 275m)은 다녀오지 못했다. 오뉴월 삼복더위의 가파른 산길(찬샘정에서 노고산까지 왕복 2km)이 나에겐 벅찼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사진으로 달래본다. 정상 부근의 ‘할머니바위’에서 이름을 빌렸다는 노고산의 정상에는 ‘소원의 종’이 매달려있다고 한다. 역사문화해설사가 탐방단을 주목시킬 때 쓰이기도 하는데, 가족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백제-신라처럼 싸우지 말자는 바람을 담았단다.

▼ 정상 남쪽에는 백제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노고산성(대전시 기념물 제19호)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단다. 노고산성은 둘레 300m쯤 되는 타원형 테뫼식 석성으로, 백제 성왕의 아들 창(후에 위덕왕)이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주변 산성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계족산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면서 금강의 수로와 옥천·문의간 도로를 감시했단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다른 이의 글을 빌려본다. 수많은 섬과 반도가 빼곡히 깔린 남해바다의 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옥천 쪽에서 흘러온 금강 물줄기가 크게 굽이친 뒤, 수량을 불려 발밑 냉천마을 앞을 지나 청남대·대청댐 방향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장관이다. 물빛은 잔 물살 하나 없이 짙푸르고, 바람은 잔소리 하나 없이 부드러워, 물길 너머로 첩첩이 펼쳐진 산줄기들이 더더욱 아득해진다.

♧ 에필로그(epilogue), 삼복더위, 그것도 바람 한 점 없는 산행은 고역이다. 부수동 호숫가와 성치산성을 빼고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거기다 호안도로를 걷는 중에는 새까맣게 덤벼드는 깔따구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코스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둘레길 도반인 별주부님의 ‘도토리묵 야채무침’으로 인해 씻은 듯이 치유될 수 있었다. 여름 산행의 일미는 새콤달콤한 음식이라는 그녀의 말마따나 술꾼인 나에게는 최고의 안주가 되어주었다. 그녀처럼 다정다감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청마산악회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좋아하는 우리부부는 계속해서 주말산행을 따라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