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6구간(대추나무 길)

 

여행일 : ‘22. 10. 1(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군북면)·대전광역시 동구(오동·주촌동)·보은군(회남면) 일원

여행코스 : 와정삼거리→꽃봉갈림길→오동(주촌마을)→산적소굴→대추나무단지→우무동→법수리선착장→연꽃단지→어부동→회남대교→남대문교 소공원(거리/시간 : 16㎞/ 실제는 오동마을부터 13.32km를 4시간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여섯 번째 구간인 ‘대추나무 길(16km)’을 걷는다. 이 구간도 호숫가를 걸으며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4km나 되는 산길로도 모자라 차도(이 구간의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도 있다.

 

▼ 들머리는 ‘와정삼거리(방아실 입구)’(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대청호까지 온다. 신상교차로(대전시 동구 신상동)에서 571번 지방도를 타고 대청호반을 따라 북진하면 오래지 않아 ‘와정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6구간(대추나무길) 말고도 7구간(부소담악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보은의 특산물인 대추나무를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 하지만 산길과 도로(차량통행이 빈번하지만 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만 하는 단점이 더 크다. 특히 구간 대부분에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앱의 도움 없이는 길 찾기가 불가능했으니 둘레길로서는 빵점짜리 구간이라 하겠다.

▼ 와정리(‘힐호텔’ 쪽)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떨어진 힐호텔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능선을 타고 4km쯤 진행하다 ‘주촌2구(토방터)’ 근처 회남로(571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 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동 버스정류장’(대전시 중구 오동)에서 출발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위한 내 작은 배려인데, ‘와정 삼거리(방아실 입구)’에서 4km쯤 떨어진 곳이니 딱 그만큼 코스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 정류장 옆에 ‘광산김씨 공안공파’의 유허지 비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오백리길은 도로를 따라 ‘토망대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하지만 일단 ‘주촌동’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오백리길을 역(逆)으로 가는 셈이지만,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곳에 예상치 못한 풍광이 숨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5분쯤 내려갔을까(주촌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호수를 만난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 ‘차단봉’으로 막아놓았지만 호숫가로도 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한걸음 내디디면 깊은 물길로 이어지는 가지 못할 길이다. 만수위에 이른 대청호가 삼켜버린 ‘안골 선착장’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차단봉을 넘자 대청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건너편 야트막한 산들이 물위로 비쳐 자연의 데칼코마니가 성큼 다가와 있다. 첫 만남이 이리도 아름다운 걸 보면 오늘 트레킹은 아마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다.

▼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회남로’를 따라 걷는다. 길가 가로수는 아직도 벚꽃나무다. 맞다. 지난 5구간 때도 얘기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은 바깥아감에서 회남면(충북 보은군)까지라고 했다.

▼ 5분쯤 걸어 ‘토망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대전 땅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버스정류장이다. 회남로는 이제 보은 땅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정류장 옆에는 문중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 오백리길은 버스정류장을 기점으로 도로를 벗어나 왼쪽 임도로 내려선다. 하지만 난 곧바로 출발할 수가 없었다. 정류장에 적힌 최원규 시인의 시 ‘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나 그대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게 아니라 수미산이나 잎새에 가려있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음도 바람 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라는 싯구가 어찌 그리 가슴에 와 닿는지...

▼ 5분쯤 내려갔을까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적힌 빗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태산북두란 태산과 북두칠성을 우러러 보는 것처럼, 남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존재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아래 적힌 ‘산적소굴’을 뭘 의미하는 걸까? 한유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인재인 주인장이 산적처럼 웅크리고 있다는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 임도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대청호를 푸른 물빛을 만난다. 그리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 임도는 사진처럼 제법 높은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도 한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이어도 조금 힘들어지려 하면 금세 내리막이 나타나 지루함이 없다. 오백리길의 특징 중 하나라 하겠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촌마을의 한가로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금빛 윤슬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고향 풍경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 문중 묘역도 여럿 만났다. 대청호로 인해 이장이 불가피해진 조상의 무덤들을 한꺼번에 모은 것들인데, 회덕황씨 묘역(아래 사진)도 그중 하나다.

▼ 포장길이던 임도가 언제부턴가 흙길로 변했다. 하지만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건 변함이 없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고나 할까?

▼ 산적소굴에서 25분.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가 싶던 임도가 느닷없이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벌초를 마친 가족 묘역이 얼굴을 내미는데,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다. 묘역의 끝에서 그 오솔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그널이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잘 살펴보고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다.

▼ 묘역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호숫가로 내려서게 됐다.  의도치 않은 고생을 했지만 대신 아름다운 대청호의 풍광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 호반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여름철 긴 장마는 대청호를 만수위까지 끌어올렸다. 대청호의 얼굴마담인 호숫가 모래사장은 물속에 잠겨버렸고, 저 배는 무심한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 묘역을 지나면서 길 찾기가 만만찮아진다. ‘태봉골’로 들어서자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니 사라져버린 것까지는 아니고 희미해졌다.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시그널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본을 촘촘히 매달아놓은 게 오백리길의 특징일진데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 문득 ‘길에서 길을 묻다’는 화두를 던진 어느 선승이 떠오른다. 바람직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라는 물음표를 나는 왜 산속에서 떠올렸을까? ‘길이 분명하겠건만 길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앞에서 얘기한 ‘화두 선’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 노익장을 자랑하는 ‘뚜벅이’님이 갑자기 분주해지셨다. 현재의 상황을 동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일 것이다. 하긴 20분 이상이나 길을 찾으며 고생하다 처음으로 오백리길 팻말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런 삶을 롤 모델로 삼고 싶은 난 그런 모습을 가슴에 담는다. 팔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말마다 산을 찾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자신의 궤적을 동영상에 담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원시의 숲’에 가까운 울창한 숲이 계속되는데, 웃자란 잡초와 넝쿨식물들까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이다. 할퀴고 찔리는 건 기본,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다.

▼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밤나무가 소일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살림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더니 거의 한 되박이나 되는 밤을 줍는 게 아닌가.

▼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으름’이었다. 산 속에서 자생하는 어름나무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4,5월에 꽃을 피운 으름나무는 추석을 전후로 열매가 익는다. 이때 표피가 갈라지는데, 맛은 바나나처럼 달콤하면서 고유의 향기가 난다. ‘코리아 바나나’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 5m까지 자라는 ‘으름나무’는 계곡이나 산기슭의 물이 많고 비옥한 토양에서 다른 나무를 감아 오르며 자란다. 한방에서는 뿌리와 줄기 말린 것을 목통(木通)이라 해 이뇨와 통경 등의 약재로 사용하고 민간에서도 열매의 껍질을 말린 후 차로 이용하는데 숙취해소에 좋다고 한다.

▼ 어쩌다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리본이 눈에 띄기도 했다. 앱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길을 찾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저런 리본이라도 하나 눈에 띄면 구세주나 다름없다.

▼ 오솔길로 들어선지 30분. 거짓말처럼 시야가 툭 트이더니 과수원(사유지이므로 주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이 나타났다. 대추와 호두, 감나무 등이 혼재된 과수원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횡단하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간난아이 주먹만큼이나 커다란 알밤을 가득 매달은 밤나무도 보인다.

▼ 호수를 향해 배를 툭 내민 언덕 위에는 앙증맞은 집 하나가 걸터앉았다. 그게 호수와 어우러지며 조화를 일으킨다. 옛날 달력에서나 봤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 잠시 후 오백리길은 대추나무단지로 들어선다. 분지형의 골짜기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대추나무뿐이다. 그것도 과일삼아 먹어도 충분할 만큼 큰 대추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참고로 대추는 보은군 농업의 기둥이다. 생산농가가 1500호나 된다니 명실공히 최고의 지역특산물이라 하겠다. 해마다 대추축제까지 열린다고 한다.

▼ 널디너른 과수원 한가운데를 지나다 만난 아주머니의 표정은 썩 편치 않아 보였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에 손이라도 댈까하는 노파심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땅에 떨어져 있는 열매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무튼 대추나무단지를 빠져나온 오백리길은 다시 ‘회남로’를 향해 올라간다.

▼ 도로(회남로)에 올라서면 소가 춤추는 듯한 형국이라는 ‘우무동(牛舞洞, 법수2리)’. 법정 동리인 ‘법수리(法水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행정구역만 보은군이지 사실 대전시와 성황당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경계마을이다. 4백 년 전 광산김씨가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생겼다는 등 마을의 역사를 주렁주렁 매달은 빗돌이 도로가에 세워져 있었다.

▼ 오백리길은 도로(회남로)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내려간다. 보은군의 랜드마크(land mark), ‘정이품송’이 그려진 버스정류장에서 호수(왼쪽) 방향으로 내려간다.

▼ 포장길을 따라 법수리로 향한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품은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 가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아래 사진처럼 사거리도 만난다. 하지만 이정표는 세워놓지 않았다. 그 흔한 리본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앱(gpx track)의 도움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로, 6코스(대추나무 길)의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특징이라 하겠다.

▼ 고개를 넘으니 이국적으로 지어놓은 목조주택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럽다. 호기심에 이끌리더라도 다가오지는 말라는 모양이다. 아서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념으로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닌 내 기억 속에는 너희 집보다도 훨씬 더 멋진 집들이 수북이 쌓여있단다.

▼ 임도로 내려선지(우무동에서) 20분, 앗뿔사! 길이 끊겨버리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만수위까지 차오른 대청호의 물이 ‘법수리 선착장’으로 연결되는 길을 삼켜버린 것이다. 물 따라 대청호반의 아름다움까지 사라졌다. 물이 찼다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놓은 층층의 곡선과 함께, 그 위로 난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보는 낭만까지도 없애버렸다.

▼ 한달음이면 충분할 거리에 선착장이 놓였건만, 길을 삼켜버린 호수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만 수북하다.

▼ 그렇다고 우무동까지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산비탈을 살펴보다 어느 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리본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구세주를 만난 심정으로 산속으로 파고들었다.

▼ 그렇다고 길이 나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길의 개척은 오롯이 우리 부부의 몫이 됐다. 산짐승이나 다녔을 법한 흔적을 찾아가며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해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리다시피 해가며...

▼ 산속으로 파고든지 10분. 악전고투 끝에 데크로드를 두른 자그마한 연못에 내려섰다.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집사람이 걷고 있는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난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왕에 왔으니 ‘법수리선착장’을 곁눈질로라도 봐야하지 않겠는가.

▼ 하지만 4분쯤 되는 지점에서 길이 끊겨 있었다. 만수위에 가까운 대청호가 길을 삼켜버린 것이다.

▼ 선착장의 주차장으로 여겨지는 공터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발견했다. 호수 너머로 아까 길을 찾아 헤매던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 때라면 1~2분이면 족했을 거리를 물이 차오른 탓에 15분이나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저 물체는 대체 뭘까?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법수리 선착장’의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법수리는 보은군(회남면)에 속한 산골마을이다. 하지만 대전시 경계에 놓인 지리적 여건 덕분에 근교농업을 주로 한단다. 또한 대청호에 물에 차면서 어촌마을로 변해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도 꽤 된단다.

▼ 집을 잃은 배들은 잡초 속에서 낮잠을 잔다. 고기잡이 나가는 주인이 찾아와주길 기다리며...

▼ 예로부터 효는 만행의 근본이라 했다. 그러니 법수리라고 해서 효부나 효자 하나 없었겠는가. 선착장에서 올라오다 ‘경주김씨’라는 효부의 기적비각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효행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위해(危害)하는 ‘희생효’가 우리나라 효의 대부분인데 글쎄다.

▼ 조금 더 걸어 ‘연꽃마을’에 닿았다. 연꽃마을은 법수리 일대에 조성된 연꽃단지 및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일컫는 이름이다. 2010년, 기존 6,600㎡ 규모 연꽃단지를 확장하고, 옛 회남초등학교 법수분교를 매입, 연 관련 체험장 및 식품제조 작업실로 리모델링하여 연잎차·연잎가루·연근 등 연(蓮)관련 농산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 연꽃마을은 펜션과 캠핑장, 연꽃단지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각종 식용연과 수련, 수생식물들을 식재한 연못은 연꽃마을의 자랑거리로 꼽힌다. 데크 산책로를 곁들인 생태학습장으로 꾸몄는데, 이게 입소문을 타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철이면 인생샷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작품사진을 찍으려는 사진동호회원들까지 몰려들 정도로 붐빈다고 한다.

▼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보잘 것이 없었다. 연꽃은커녕 철 지난 잎줄기마저 누렇게 말라비틀어져가고 있다. 집사람도 그게 아쉬웠나보다. 조형물삼아 놓아둔 마차에 오르더니 연꽃 대신 사진배경으로 넣어주란다.

▼ 오백리길은 ‘회남로(571번 지방도)’쪽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도로를 코앞에 둔 지점(우정횟집 앞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정표(어부동 날망 : 산수리 0.7㎞/ 대청호반 0.8㎞)’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 그러나 우리부부는 ‘회남로’를 따르기로 했다. 연꽃마을에서 만난 둘레길 도반의 조언(단축코스를 놓아두고 왜 돌아가느냐는)이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다른 산악회에서 산행대장까지 한 경력의 소유자이니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 결정에 대한 반대급부는 오롯이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부동 날망’이나 산수리(山水里) 일대에서 만나게 된다는 전원 풍경을 모두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 그렇게 올라선 도로에는 ‘어부동 종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어부동 마을의 한쪽 귀퉁이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도로(오백리길은 아니다)를 따라 ‘회남대교’로 간다. 참! 법수1리(어부동 날망)의 역사를 적은 비석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니 곁눈질로라도 읽어보자. 그래야 법수리(法水里)가 옛날 뒷산에 법수사(法水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 4분쯤 더 걷자 또 다른 버스정류장, 이번에는 ‘어부동’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민가가 몰려있을 뿐만 아니라, 어부동지역 아동센터까지 들어선 걸로 보아 어부동의 중심마을이지 싶다.

▼ 어부동(漁父洞)은 어부들이 모여 산다는 의미를 지녔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전 금강에서 어업을 생계로 하던 어부들이 이 마을(현재의 사음리 강변)에서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법수리를 중심으로 사음리, 산수리 일대를 다함께 아우르는 별칭이 되었는데. 아직도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단다.

▼ 이정표(회남대교 1㎞/ 마름골 1㎞)가 가리키는 ‘마름골’로 향했다. 지름길로 오느라 놓쳐버린 산수리 일대의 풍경을 보고 싶어서다. 아무튼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대추나무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우무동의 것보다도 더 너른 대추나무 과수원이 능선 좌우로 길게 들어서있는 것이다. ‘날망’이란 ‘산등성이’의 충북지역 방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다녀간 이들이 거론하던 ‘어부동 날망’은 저곳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 호안까지 가보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매의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집사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호숫가를 걸어왔으면서 무얼 더 보겠느냐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발아래까지 파고든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 어부동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로(회남로)를 따른다. 아직도 가로수는 벚나무 차지다. 하지만 길의 폭이 좁은 2차선인데다 인도도 따로 없어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어야만 한다. 곁을 지나가면서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스칠 듯 위협까지 하는 운전자까지 있었다. 여기서 팁 하나! 앞에서 차가 올 경우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야하므로 좌측통행할 것을 추천한다.

▼ 이때 왼편 가로수 사이로 ‘인공 섬(수초재배 섬)’이 내다보인다. 인근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정화시키기 위한 ‘부유습지’로, 미나리 꽃창포 등 섬에서 재배되는 수생식물이 부영양화의 원인 물질인 질소와 인을 흡수해 대청호의 수질을 개선시킨다.

▼ 10분 남짓 더 걸어 ‘회남대교’에 닿았다. 지도를 보면 6구간 지형은 대전에서 한 줄기 산자락이 뻗어 나와 대청호 깊숙한 곳에 이른다. 반도와 같은 지형으로, 6구간의 시작점에서 보면 땅끝(土末)이라 할 수 있겠다. 해남의 ‘땅끝마을’처럼 이곳에도 정자까지 갖춘 작은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전망 좋은 카페도 들어섰다.

▼ 오백리길은 이곳에서 대청호를 횡단한다. 땅끝인 이곳 ‘사음리’에서 또 다른 육지인 ‘신곡리’를 길이 450m의 다리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대전(보은군이지만 대전과 근접해 있어 그런 표현을 썼다) 땅과 보은 땅이 가장 가까이서 만난다고나 할까?

▼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일품이었다. 곡선의 미를 한껏 자랑하는 리아스식 호안으로도 모자라 금린(전망 좋은 식당·카페로 소문났다)에 귀여운 선착장까지 보탰다. 하긴 회남면이장협의회에서 제작한 달력에 이 부근이 표지모델로 등장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 이제 구간 여정의 막바지다. 계속해서 회남로를 따르지만 그렇다고 삭막하지는 않다. 걷는 내내 대청호반을 옆구리에 매다는 덕분이다.

▼ 이때 대청호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풍경이 펼쳐진다. 대청호의 특징 중 하나는 호숫가가 ‘리아스식’이라는 점이다. 후기 간빙기(間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섬이나 곶으로 변한 현상인데, 인공이긴 하지만 이곳 대청호도 물에 잠기면서 그런 모양새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멋진 곳에 터를 잡은 이는 대체 누굴까?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나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양중지(신곡리에 속한 자연부락)에는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음식상(솔밭횟집)을 기다릴 여유야 없었지만, 그렇다고 잠시 쉬어갈 짬까지 내지 못하겠는가. 구멍가게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겼다. 집사람의 손에는 물론 아이스크림이 들렸다. 참고로 ‘양중지’란 지명은 옛날 승지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났다는 데서 유래됐단다.

▼ 조금 더 걸어 만나는 ‘양지공원가든’. 식당의 커다란 규모도 규모지만, 배불뚝이 화상과 거북이 등 커다란 돌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식당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광도 빼놓을 수 없다.

▼ 길을 걸으며 만나는 대청호의 풍광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대청호에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떠있고, 그 너머의 산들, 그 위로 떠가는 구름, 이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 대청호를 건넌지 12분. ‘신곡공원’에 이른다. 대청호반의 언덕에 비좁지만 작은 터를 닦고, 정자와 벤치 등을 배치해 공원을 만들었다.

▼ 신곡마을 앞에도 쉼터가 들어서 있었다. 카페를 겸한 음식점(판장횟집)이 인기가 있는지 꽤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 옛 영화가 그리워서였을까? 신곡마을 앞은 데크로드를 놓고 꽃길을 조성하는 등 단장이 잘 되어 있었다. 참고로 대청댐이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 신곡리는 회남면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버렸고,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등 관공서는 거교리로 옮겨졌단다.

▼ 강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1인용 조각배에 올라앉아 낚시 삼매경인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하지만 배가 뒤집히는 사고도 일어난다니 조심할 일이다.

▼ 8분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정문공원(旌門公園)’이다. 이곳도 역시 호숫가 비탈진 언덕에 걸터앉았다. 공원의 이름은 이곳에 있던 효자 양달해와 그의 처 효열부 안동김씨의 정문(旌門)에서 따왔다.

▼ 공원에서는 대청호(이곳은 금강이 아니라 회남천이라고 한다)의 시원한 풍광을 마음껏 즐겨 볼 수 있다. 호수 너머의 데크로드는 6구간이 종료되는 남대문공원의 시설물일 것이다.

▼ 날머리는 ‘남대문공원’(보은군 회남면 남대문리)

571번 도로와 문의에서 넘어온 ‘염티길(509번 지방도)’이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남대문교’를 건넌다. 그러자 널따란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남대문 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유래비’는 ‘남대문’이란 지명의 내력을 적고 있었다. 둘레가 2.722m쯤 되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산성의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13.32km를 걷는데 4시간10분이나 걸렸다. 길에서 길을 찾느라 헤맨 탓일 것이다.

▼ 공원에는 ‘녹색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도농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토·일요일 열린다는데 밴드까지 동원돼 흥을 돋운다. 저 행사는 주민들이 직접 기른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하지만 우리 동네 할인마트보다 조금 더 비쌌다. 장터에 외지 손님들 대신 주민들만 오락가락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