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벌랏한지마을 길)

 

여행일 : ‘23. 4. 1()

소재지 : 충북 보은군 회남면 및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일원

여행코스 : 회남면사무소남대문교소공원남대문리거구리325벌랏한지마을소전교삼거리(거리/시간 : 10km, 실제는 거신교삼거리부터 10.4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여섯 번째 구간인 벌랏 한지마을 길(10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브랜드가 된 벌랏 한지마을에서 한지 만드는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사담길에서는 아름다운 대청호 풍광까지 눈에 담는다. 하지만 가파른 산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하는 버거운 여정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거신교 삼거리(보은군 회남면 거구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회인 IC에서 내려와 571번 지방도를 타고 문의·대전 방면으로 6km쯤 내려오면 회인천을 건너기 직전 거신교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16구간의 공식 시점은 회남면사무소이나 지난 15구간을 이곳에서 마쳤기 때문에 출발지를 변경했다.

 오늘도 부부의 출발지를 따로 잡았다. 2km쯤 전방에 위치한 남대문 소공원에서 집사람을 출발시키고 내가 쫒아가는 형식이다. 기껏해야 10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이지만, 300m 내외의 산봉우리를 3개나 넘어야 하는 난이도가 집사람에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정표(회남면사무소 0.4/ 분저리 7.1)가 가리키는 회남면사무소 방향(서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행장은 삼거리 근처 주차장에서 꾸리면 되겠다.

 첫 만남은 거신교’. 2차선 도로가 회인천을 가로지르는데, 그 왼편에 보행자만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참고로 다리 건너 거교리(巨橋里)에는 것다리(‘거교라는 지명의 원천으로 큰 다리가 마을 앞에 있었다고 한다날방·멱골·본말·사당마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멱골·본말·사당마루는 대청댐 조성과 함께 수몰됐다.

 다리 아래로는 대청호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아니 금강의 지류인 회인천(懷仁川)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피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다 이곳(거교리)에서 금강 본류(대청호)로 흘러든다.

 다리를 건너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직진은 거교리를 횡단하는 지방도(회남로)이고, 가운데는 거교리의 마을 안길로 이어준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선답자의 ‘GPX 트랙은 대청호반을 따라 난 데크로드를 따르란다.

 하지만 난 가운데 길을 따라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문득 벽화로 가득한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는 어느 르포기사를 떠올렸었기 때문이다. ‘민화란 이어져 내려오는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일상생활 양식이나 관습 등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민속적인 내용을 그려왔다. 그러니 부담 없이 감상만 하면 될 일이다.

 이 뭐꼬!’ 옛 풍경 속에 요즘 옷차림의 여인이 등장하다니. 맞다. 민화에는 경계가 없다고 했다. 자연경관·생활풍속·장수·흥복은 물론이고 종교에 대한 믿음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단다. 그러니 옷차림보다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어미의 마음이 되어 그림을 감상해 보자.

 끌고나온 소가 꼴을 먹거나 말거나, 꼬맹이들에게는 남의 집 불구경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만나겠건만 주고받을 말이 무에 그리 많을꼬? ! 충청도 처자들은 소에게 꼴까지 뜯기는가 보다. 소를 몰고 나온 처자가 다른 벽화에 떡하니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다.

 새참으로는 막걸리만한 것도 없었을 게다. 안주 그릇도 안 보이건만, 불콰하게 달아오른 농부는 왕골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서 팁 하나! 민화는 내용에 따라 화조도(꽃과 새어해도(물고기호작도(호랑이·까치십장생도(장수를 뜻하는 동식물산수도(자연경관풍속도(생활상고사도(옛이야기문자도(글자책가도(·문방사우무속도(종교적 내용) 등으로 나뉜다.

 민화에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솔직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자연에 대한 사랑, 웃음을 잃지 않는 익살과 멋이 배어 있다. 물고기를 꼬드기고 있는 저 어부들의 몸짓에도 그런 익살이 배어있다.

 자 모양으로 마을을 돈 다음 화장실(옛 차림의 처녀총각이 안을 기웃거리는 그림이 웃음을 자아낸다)에서 호반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대청호반에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른다.

 최근 날씨가 확 풀렸다. 지난 주말, 10여 일의 그리스여행에서 돌아오니 흡사 여름에 가까워져 있었다. 날씨가 풀리면 어부의 손길은 바빠지는 법.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호반을 따라 내놓은 이 길은 사담길로 불린다. 옛 사람들은 나지막한 산 고개 끄트머리를 날방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날방 주변은 지금 대청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됐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거교리로 편입된 고을(사담리)의 옛 지명을 살리기 위해 사담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사담길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의 볼 것은 다 갖췄다. 드넓게 펼쳐지는 호반은 기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는 물론이고, 작은 쉼터도 두어 곳 마련했다.

 요런 작은 나루터도 만날 수 있다. 대청호를 일터로 삼아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나루터로 내려가면 대청호의 작은 흐름까지 눈여겨 볼 수 있다.

 비닐 망()으로 둘러싸인 터널도 사담길의 한 축을 담당한다. 벚꽃 등의 봄꽃이 흐드러진 지금이야 저렇듯 삭막하지만, 넝쿨식물이 물을 만나는 여름철이면 사담길의 제왕은 이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교리 선착장은 바닷가가 부럽지 않은 규모다. 꼬맹이 어선 예닐곱 척이 묶여있는 시멘트구조물 말고도, 부교(浮橋) 형의 선착장까지 따로 만들어 놓았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 571번 지방도로 올라서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반긴다. 충청도 사람들이 세계 제일로 치켜세우는 벚꽃길이 아닐까 싶다. 571호선 구간이 포함돼 회인선 벚꽃길로 불리어오다가, 최근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로 이름을 바꾼 길이가 무려 26.6km에 달한다는 그 명품 둘레길 말이다.

 벚꽃 향기에 취해 5분쯤 걷다가 왼편 언덕으로 오른다. 그리고 회남면수몰유래비와 탑을 만났다. 맞다. 이곳 회남면은 대청호 수몰지역으로 유명하다.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많은 마을들이 물속에 잠겼고, 나머지 마을들도 삶의 근거지를 대부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면소재지도 신곡리에서 거교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널따란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남대문 공원이 반긴다. 회남면의 녹색장터가 열리는 곳이다. 도농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토·일요일 열린다는데 밴드까지 동원돼 흥을 돋우던 지난번과는 달리 조용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번에는 스치듯 장터를 지나쳤다. 구입한 물건을 짊어지고 산을 넘을 형편이 못되어서다. 구경을 했다고 해도 구입했을지는 의문이다. 녹색장터는 주민들이 직접 기른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하지만 전에 살펴본 바로는 우리 동네 할인마트보다 조금 더 비쌌다.

 남대문 유래비 남대문이란 지명의 내력을 적고 있었다. 둘레가 2.722m쯤 되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산성의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호반에는 수질정화를 위한 인공 수초섬이 떠 있었다. 수초섬 주변에 부교(浮橋)를 띄워 학생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활용한다는데, 그런 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남대문교는 물이 반 고기가 반이라는 속설이 떠돌 정도로 소문난 낚시터이다. 하지만 오백리길 나그네들에게는 6구간과 연결되는 다리로 더 중요하다.

 16구간은 남대문교를 건너지 않는다. 대신 도로를 횡단한 다음, 회인천의 천변을 따라 남대문마을로 들어간다.

 인적이 뜸한 길은 캠핑족 차지인가 보다. 하지만 텐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어디에서 베스(large mouth bass)라도 낚고 있는 모양이다.

 긴 가뭄에 시달린 대청호는 그 속살을 드러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는 홍수로 인한 피해까지 있었는데도 말이다. 맞다. 지구는 최근 기상 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큰 가뭄과 폭우를 인접지역인데도 나누어가며 때려버린다. 인간이 저지른 환경파괴에 대한 조물주의 반격이다.

 회인천을 벗어나기도 전에 집사람을 따라 잡았다. 걸어오는 도중 냉이라도 캤던 모양이다. 사랑하는 이의 밥상에 올리고자 하는 예쁜 마음으로...

 남대문마을의 초입에도 서낭당이 있었다. 민속문화제인 청마리의 제신탑(祭神塔)을 본떠 원추형의 돌탑을 반듯하게 쌓아올렸다. 다만 그 규모가 작고, 솟대와 장승이 함께 있던 청마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돌탑 하나만이 외롭다.

 이곳 보은은 대추나무로 대변되는 고장하다. 주변 풍광만 바라봐도 이곳이 보은 땅임을 금방 알아차린다. 터만 있으면 어김없이 대추나무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사람이 채워가는 법. 대청호 주변은 농부들이 떠난 자리를 노후를 즐기려는 도시민들이 대신했다. 잘 다듬어진 소나무하며, 마당을 가득 매운 항아리들이 주인장의 풍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3. ‘남대문(南大門)’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남대문리를 형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남대문·거구·만마루) 중 하나로 대추나무가 유독 많은 마을이다. 마을 곳곳 조그만 빈터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대추나무를 심어놓았다. 그래선지 연 소득이 1억을 넘기는 농민도 있단다.

 아름다움에 겨운 듯 담장 아래까지 가지를 내려뜨린 홍매화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동백꽃·매화·산수유·개나리·진달래·벚꽃·유채꽃·철쭉 등 이른 봄부터 차례차례 피어나는 저런 꽃들이 없었다면 봄을 기다리는 일이 지금처럼 설레지 않을 것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남대문삼거리’.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507번 지방도를 따른다

 이 구간도 활짝 핀 벚꽃 가로수가 줄지어 반긴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은 벚꽃놀이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이 세계 제일이라며 자랑하는 아오모리현 이와키산 벚꽃길(총 길이 20km)’보다도 더 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귀하디귀한 토종 민들레라는 집사람의 호들갑에 카메라부터 들이대 본다. 아니 집사람에게 저 민들레는 훌륭한 식재료다. 어린잎은 생채로 먹거나, 살짝 데쳐 나물로 무쳐 먹는다. 뿌리는 튀겨 먹고, 꽃은 그늘에 말려 차로 마신다.

 8분쯤 더 걸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거구마을’. 남대문리의 3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옛날 아홉 명의 부자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정표(남대문리 1/ 남대문교)가 가야할 방향(벌랏마을)을 빼먹고 양쪽 도로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GPX트랙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경우 헷갈리기 딱 좋겠다.

 마을을 통과한 오백리길은 임도를 따라 계곡으로 파고든다. 저 멀리 길은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숲으로 흐르던 길은 결국은 다시 계곡을 따라 흐르고 만다. 물이 그러하듯 길마저도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육질의 저 나무는 정력까지 넘쳐난다. 한 뿌리에서 여섯 개의 줄기를 밀어 올렸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출산률이 0.78%라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취업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저 나무처럼 튼실한 몸과 마음을 지녔으면 좋으련만...

 임도를 따라 3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오솔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오백리길은 이 오솔길을 따른다.

 초입의 나무줄기에 오백리길 표지판이 매달려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산길을 따른다. 이 구간은 오백리길 나그네들이 애를 많이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웃자란 잡목이 곳곳에 들어차면서 방향 찾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수북하게 쌓인 참나무 낙엽은 길의 흔적까지 없애버렸다. 오죽했으면 GPX트랙을 만들어낼 정도의 전문가까지 길을 잃고 헤맸었겠는가.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지해 10분 거리의 능선 안부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두 방향(반대편 산비탈과 왼쪽 능선)에 선답자들의 리본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달려 있는 리본의 수가 많은 방향(능선)을 선택했다. 이어서 진달래와 산벚꽃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길을 오른다. 가파르다는 게 다소 흠이지만 아름다움은 모든 걸 용서한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5분쯤 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면 ‘325,9m에 올라선다. 오늘 오르게 될 3개의 산봉우리 중 가장 높지만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백리길 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고나 할까?

 올라왔으니 내려갈 차례.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스틱에 의지해 엉거주춤 내려가는 집사람은 그나마 양반, 스틱을 챙겨오지 않은 유사장은 네 발로 기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리막길이 끝났다고 길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작지만 가파른 오르내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니 완만한 경사로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325m봉에서 14분쯤 진행했을까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린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어성리 갈림길이 위치한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산비탈을 옆으로 째는 지름길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비탈진 탓에 무섭기까지 했지만, 저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을 피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다시 나타난 가파른 내리막길과 한바탕 싸움을 치루고 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난다.

 이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네 발로 길 정도는 아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산길로 들어서고 1시간). 밭두렁에 쳐놓은 울타리 때문에 고생고생 해가며 소금골 임도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어서 비닐 망()으로 둘러싸인 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끝나갈 즈음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준비해 온 먹거리라도 펼쳐놓으라는 듯 식탁까지 떡하니 배치했다. 덕분에 난 오백리길 도반이자 갑장인 유사장이 준비해온 금준미주(金樽美酒)에 옥반가효(玉盤佳肴)로 한껏 즐길 수 있었다.

 쉼터에서 간식을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삼거리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이정표가 2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착장까지의 거리를 0.5km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거리가 부담스러워 다녀오는 것을 포기해버린 일행도 있었다.

 5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선착장은 벌랏마을의 옛 나루터이다. 현재는 승객대기소로 쓰던 낡은 건물만 남아있지만 벌랏마을에서 문의로 가는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나루터가 주민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단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벌랏마을이 육지 속 섬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벤치에 앉자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멀리 대청호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휘어진 물길이 무척 인상적인데, 대청호의 수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보인다고 한다. 참고로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금강을 낀 마을엔 나루터가 많았다고 한다. 금강을 거슬러 신탄진에 물산이 모이면 뱃길을 따라 내륙지역 곳곳을 파고들었단다. 저 물길도 그중 하나가 분명하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벌랏마을로 향한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서낭당을 만났다. 34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보호수) 앞에 돌탑을 쌓아올렸는데, 당제까지 지내오는 듯 금줄을 친 흔적까지 엿볼 수 있었다.

 서낭당 옆 돌장승(시멘트일 수도 있겠다)은 명찰을 따로 달지 않았다. 대신 대장군은 수염을 그려 넣었고, 여장군은 수염 대신 비녀를 꽂았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피난 와 정착하면서 생겨났다는 벌랏마을로 들어선다. ‘벌랏이란 지명은 수몰 전 마을 어귀의 벌랏나루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20여 농가에 30여 명이 거주하는데, 첩첩산중에 물길로 막혀 있던 마을은 6.25 전쟁 당시 전쟁이 난 줄도 모를 정도로 외진 곳이었단다.

 300년 동안 주민들의 생명수였던 우물 위에는 담한정(澹韓亭)’을 세웠다. 담백하고 넉넉하며 평안한 한지(韓紙) 마을이라는 뜻을 담았단다. 그런데 백···(百千萬億)으로 시작되는 저 사언절구(四言絶句)는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조금 더 올라가면 벌랏 한지마당이 나온다. 이 마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봄에 한지를 만들어 대전·옥천·청주 등지로 나가 팔았고 가을 추수 때 쌀로 종이 값을 받았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활력을 잃었다. 마을을 되살린 것은 마을에 널린 닥나무였다. 마을 주민들은 20여 년 전 닥나무를 가공해서 전승이 끊겼던 한지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거기에 재미(다양한 체험)와 예술이 더해지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백리길은 이제 도로(염티·소전로)를 따른다. 1차선으로도 모자라 한없이 구불대기까지 하지만 벌랏마을 주민들에게 이 길은 생명선이다. 이 길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벌랏나루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밖에 없던 육지 속 섬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이때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벌랏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전체가 골짜기에 푹 파묻혀 있는 모양새이다. 아까 눈여겨보았던 주위가 대부분 밭이고 논은 거의 없는 마을이라는 특징이 여실히 들어나는 풍경이다. 하긴 누군가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빗대 충북의 동막골로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15분쯤 올라섰을까. 또 하나의 서낭당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을 표지석 곁에 정자까지 들어앉혀 오백리길 나그네들의 소중한 쉼터가 되어준다.

 벌랏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웠다. 조감도 모양의 지도를 그린 다음 한지체험장, 생태체험장, 물놀이장, 민박촌 등 찾아볼만한 곳들을 표시했다. 일종의 관광지도인 셈이다. 참고로 한지체험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내고 방망이로 두드려 무르게 한 뒤 채로 걸러 한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20분쯤 더 걸으면 고갯길의 정점에 이른다. 고도계가 214.7m를 찍고 있으니, 산마루 하나를 오롯이 넘은 셈이다.

 길은 이제 아래로 향한다. 자동차도로 치고는 제법 가파르게 내려간다. 이 구간에서 우린 널따란 포도밭을 만날 수 있었다. 보은에서 청주로 넘어온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대추밭이 포도밭으로 변해있다.

 날머리는 소전보건 진료소(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소전리)

홍매화·벚꽃·진달래 등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들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어느덧 소전2(所田2 : ‘산서마을이지 싶다)에 이른다. 공식적인 종점은 마을을 지나 소전교삼거리이지만 주차문제로 인해 소전마을 입구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gpx트랙이 10.48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4km도 못되는 산길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