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9코스(용해동사무소-청계면사무소)

 

여행일 : ‘22. 12. 10()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용해동·석현동·대양동과 무안군 삼향읍·청계면 일원

여행코스 : 용해동사무소삼향동사무소마동마을마갈마을복룡마을월호마을도림천청계면사무소(거리/시간 : 16km/ 실제는 초의선사유적지부터 13.52km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9코스를 걷는다. 6로 이루어진 목포·무안남부구간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목포의 도심에서 출발하는 이 구간은 무안의 바닷가와 드넓은 들녘을 지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하지만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초의선사라는 걸출한 선승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다향을 바닥에 깔고서...

 

 들머리는 용해동 행정복지센터(목포시 용해동 981)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TG를 빠져나와 국도 1(2)호선을 타고 고하도 방향으로 10km쯤 내려오다 산정교차로(목포시 연산동)에서 용당로로 옮겨 2.2km정도 들어오면 용해동 행정복지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무안 19코스)의 안내도는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목포시의 북서쪽 외곽과 무안군의 남부 해안을 걷는 코스이다. 이 코스의 특징은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드넓은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초의선사유적지와 오승우미술관이라는 보너스까지 받아들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도심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초의선사유적지를 꼼꼼히 둘러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실제 출발지는 초의선사유적지(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 위치하며 입장료는 없다)

식상한 도심구간을 생략하고, 탐방로를 살짝 비켜난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초의선사의 출생지인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생가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유적(일지암·용호정)과 전시시설(박물관·기념관), 다성사(사당) 등을 세워 다인들의 순례성지로 자리매김 시켰다. 그나저나 주차장에서 바라본 봉수산(烽燧山 204.4m)이 여간 범상한 게 아니다. 옛날에는 저 암봉 위에 봉수대, 그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암자의 스님이 물에 빠진 초의선사를 구해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투어는 대각문(大覺門)’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헌종이 내린 사호(賜號)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선사에서 따왔다. 이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으라는 격려도 담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탐방로를 가운데 두고 소박한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분을 기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차밭을 지나면 초의선사의 동상, 그냥 지나치지 말고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게송(偈頌)으로 전한바 있는 선사의 기풍을 살짝 엿보고 가자. <두륜산 마루턱에서 주먹을 불끈 세우고/ 푸른 바다 비탈에서 코를 비비네/ 홀로 무외(無畏)의 광명을 크게 베풀며/ 달을 가리켜 모든 어둠을 깨뜨리누나/ ()의 땅이건 고통(苦痛)의 바다이건 가리지 않고/ 한 부처님의 마음을 죄다 가졌네/ 정명(正明) 보살의 말없는 게송이여!/ 허공을 때리는 법계(法界)의 소리여!/ 부처에 들고 또 다시 마군(魔軍)에 드니/ 다만 자기만 아는 웃음소리/ 살 고양이, 쥐잡는 지혜처럼/ () ()이 서로 어우러져/ 봄바람 한 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

 일지암(一枝庵)은 해남 대흥사의 것을 본떴다고 한다. ‘풀 옷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소함과 간결함, 선사의 깊은 삶의 자세까지 배어 있는 암자다. 그런데 현판에 암자 암()’이 아닌 뚜껑 암()’자를 쓴 이유는 뭘까? 하나 더, 암자 옆에는 어린 초의선사가 또래 아이들과 놀았다는 초의암(草衣岩)’도 있었다. 해변에서 잡을 물고기를 말리거나 조개를 구워먹던 놀이터였단다.

 초의선사기념관은 차의 성인(茶聖)’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 근처 숲속에는 세심헌(洗心軒)’이란 초가도 있었다. 안내판은 초의선사가 말년에 온갖 번뇌를 다 놓아버리려고 지은 쾌년각(快年閣)’을 본떴다고 적었다.

 안에는 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놓았다.

 다성사로 오르려면 빗돌에 인사부터 드려야 한다. 왼편의 ‘13대 초의대종사(十三代 艸衣大宗師)’는 대흥사의 13대 대종사였다는 뜻, 오른편의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大角登階普濟尊者 草衣大宗師)’ 55(1840) 때 헌종으로부터 받은 사호(賜號)라고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다성사(茶聖祠)’. 초의선사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선사가 탄생한 음력 45일을 기해 헌다제(獻茶祭)’를 모신다. 열반한 8월 초2일에도 헌다제를 봉행한단다. 사당은 개방되어 있었다. 일반 추모객들에게도 헌다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안에는 선사의 상()과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초의선사는 1786(정조10)에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로 인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당 오른편에는 동다송 비(東茶頌 碑)’를 세웠다. 초의선사가 지은 31( : 한시의 여섯 형식 중 하나) 동다송은 차의 역사·유래·전설, 차를 만들고 마시는 법, 차를 마신 사람들 이야기, 차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하나 더, 사당 왼편에는 초의선사 추원비(草衣禪師 追遠碑)를 세웠다. 이밖에도 유적지 경내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 차 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차에 대한 문화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차 전문 박물관이다. 참고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중국 다경요채를 초록,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다신전(茶神傳)’을 썼고, 이어서 이 책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풍토와 기후에 맞게 쓴 글()을 추가해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안에는 조선시대 사용하던 차 도구를 시대별(조선 이전,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로 전시하고 있다. 중국의 차 도구와 조선시대 차 문화를 기록한 도서도 전시했다.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은 용산(서울)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추사의 정자로 용호(蓉湖)란 용산의 옛 지명이다. 백로가 오락가락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백로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자의 터도 사라지고, 그저 기록으로만 전하던 것을 이곳에 복원해 놓았다. 초의선사는 용호정에서 두 해나 머물렀다고 한다.

 교육관인 초의선원(草衣禪院)은 밖에서 보면 1층이지만 내부는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인간세상을 나타내고, 2층의 다실공간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1층에서 2층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은 구름계단으로 33천의 하늘나라를 의미해서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그밖에도 선사의 생애를 나타내는 문양들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 초의선원 마당의 차 따르는 조형물은 한번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일여(一如)의 미()’ 禪茶一如(선다일여)’로 귀결된다. 선과 차가 하나로 귀결되니 참선을 모르면 은은한 다향(茶香)의 맛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차로 마음을 씻어내듯 고요히 생각에 잠겨보자. ()의 경지는 몰라도 살짝 엿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마당에는 투호놀이, 지게지기, 절구치기, 고리던지기 등 전통놀이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선사의 생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지었단다. 당사자가 살아생전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선사는 저 집에서 열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단다.

 보제루(普濟樓)는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보제는 헌종이 선사에게 내려준 호인 대각등계 보제존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초의선사 탄생 22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2층을 합한 면적을 222평으로 지었다나?

 다음 방문지인 오승우 미술관으로 이동하는데, 방금 전 둘러봤던 전각들에 뒤지지 않는 전통 한옥이 눈에 띈다. 간판을 내걸지 않아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묵어가기 딱 좋겠다.

 유적지 입구에는 오승우 미술관이라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서양화단의 원로이자 한국판 르느와르(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오승우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십장생 시리즈’, ‘한국의 100산 시리즈’, ‘동양의 원형 시리즈 등 오 화백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단다.

 미술관 앞 공터에는 그의 아들인 오상욱이 조각한 천축 가는 길이 세워져 있었다. 미래를 향하여 먼 길을 떠나는 구도자의 걸음에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나? 참고로 오 화백의 부친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오지호(고향인 화순에 미술관이 있다) 화백이다. 거기에 아들인 오상욱까지 조각가의 길을 걸으면서 3대가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은 사진 찍기 딱 좋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얼굴 큰 남자들은 사양. 조그만 구멍에 꽉 차버릴 테니 말이다.

 미술관에서 나오면 도로가 둘로 나뉜다. 정답은 오른편, 1km쯤 떨어진 바닷가에서 서해랑길과 만난다. 하지만 난 반대방향을 선택했다. 19코스의 유일한 항구인 마동항을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내륙의 국도(1호선) 방향으로 200m쯤 걷자 그린빌리지로 이어지는 삼거리. 방향만 보고 들어섰다가 금방 되돌아 나왔다. 숯불구이 촌닭으로 소문난 조선시대라는 식당이 서해바다 뷰가 좋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보만 부여안고서...

 200m남짓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삼연기업의 건물을 기점 삼아 오른편 마동길로 들어선다. 진행방향의 산마루에 마을(‘그린빌리지라는 전원주택단지) 하나가 걸터앉아 있다면 길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 한적한 바닷가에서 히든싱어를 보게 되다니. ‘히든싱어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와 그 가수의 목소리부터 창법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창능력자가 노래 대결을 펼치는 신개념 음악 프로그램이다. 각 편에서 주인공을 이겼던 모창가수들이 이젠 콘서트까지 열고 있는 모양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 마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왕산리(旺山里) 7개 자연부락(평산·왕산·금동·마동·마갈·동뫼·덕산) 중 하나로 바다를 끼고 있어 어촌으로 분류된다. 거기다 방조제 축조로 들녘까지 드넓어지면서 요즘에는 풍요의 상징으로 변했다. 참고로 마동(馬洞)’이란 지명은 삼향읍의 주산인 봉수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마을의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닷가로 나오니 기다란 둑이 건너편 목포시(대양동)를 연결시킨다. 혹자는 중등포방조제라 불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전국의 마룻금을 손바닥 읽듯 하는 그는 또 월산동마을과 중반마을(표석은 분명 마동마을이었다)을 잇는다면서 그 안쪽도 중등포 들녘(들녘 안쪽에 중등포마을이 실제 존재한다)’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후로는 마동길을 따른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해안길이다.

 이때 코스모스악기 연수원이 눈에 띈다. 세계적 브랜드의 악기와 부품 등을 독점 수입·판매하는 회사인데, 자체브랜드(Kingstone, Harrison )로 제작도 한다더니 그 생산 공장이 목포지역에 있는가 보다.

 마동항은 곁눈질, 즉 지나는 길에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어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인근에 항구다운 항구가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방조제. 서해랑길 나그네들은 저 방조제에 복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복구마을 앞 바다를 막았다는 의사표시일 것이다.

 방조제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오른편,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 너머로 삼각뿔을 쏙 빼다 닮은 봉수산이 솟아올랐다. 이름처럼 저 산에는 1898(고종 35)까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는 조형미 뛰어난 압해대교가 바다를 가른다. 목포와 압해도(신안군청이 새로 들어섰다)를 연결하는 닐센아치(다리 상판을 케이블로 매달아 하중을 아치에 전달) 형식의 연륙교이다.

 복구(福口)’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그러다 다 쓰러져가는 폐가 두어 채를 만났다. 서해바다 뷰가 뛰어난 왕산리는 전원주택지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편함이 싫어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꽃까지 떠났겠는가. 서리 맞은 산국이 떠나버린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복구마을을 빠져나오면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한 다도해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그 오른편 산자락은 최근 들어선 듯한 전원마을 차지다.

 마동마을에서 15, ‘825번 지방도(왕산로)’로 올라섰다. 아까 오승우미술관 앞에서 헤어졌던 도로인데, 복구마을의 진입로 역할을 하는 듯,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5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9.3/ 시점 7.5)가 도로를 벗어나란다. GPX트랙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된다는데, 굳이 돌아가라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짧다고는 하지만 오르막길일진데...

 100m쯤 올라갔을까 새로 들어선 듯한 전원주택단지가 얼굴을 내민다. 허투루 지어진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무안군에서 저 마을(도로변 버스정류장은 마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 구경을 마친 서해랑길은 다시 도로(왕산로)로 내려선다. 하지만 100m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도로를 벗어나버린다.

 그렇다고 눈요깃거리까지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 지점은 서해바다의 뷰가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발아래로 꼬맹이 닭섬이 새벽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목을 세우고, 그 뒤의 갓섬(사유지라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압해도가 나타난다. 이게 오른편의 가란도 그리고 왼편의 압해대교를 품으면서 아름다운 풍경화로 승화된다.

 825번 지방도와 헤어진 탐방로는 이제 왕산로(1차선 도로)’를 따라 마갈마을로 간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시골길이다.

 그렇다고 다도해의 멋진 풍광까지 사라질 리가 있겠는가. 아까 도로가에서 보았던 경관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지대가 높아진 탓인지 닭섬과 갓섬이 훨씬 더 또렷해졌다.

 이곳 무안은 영암과 어깨를 맞댄 형세다. 그래선지 영암의 주요 특산물인 무화과가 눈에 띄기도 했다. 하긴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사자성어도 있지 않겠는가.

 12분쯤 걸어 왕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마갈마을로 들어섰다. 마갈(馬葛)이란 지명은 좀 엉뚱한 데가 있다. 지형이 갈마음수(渴馬飮水)’, 즉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인데서 유래됐다. 그러다 말이 목이 말라 죽었다는 속설로 인해 한때 목마를 갈()’ 대신 칡 갈()’ 자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목마를 갈()’을 사용한다나?

 마을을 관통한 탐방로는 나지막한 고개(kakaomap 검동재라 적고 있었다)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 ‘마갈마을에서 19코스의 후반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마을회관 앞 이정표(종점 8.5/ 시점 8.3)가 딱 중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검동재(‘마갈 잔등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올라서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봉수산으로 연결됨을 알리는 이정표가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아까 초의선사유적지에서도 봉수산 등산로가 보였었는데...

 검동재 너머는 지산리(복룡마을)’이다. 봉수산의 북쪽 자락에 들어앉은 삼향농공단지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안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농공단지로, 연간 생산액이 800억 원에 이르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단다.

 길가 제이러브 팜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 catchphrase로 내건 체험농장이다. 강냉이·호박·고추·완두콩 등의 재배나 수확, 가공에 대한 체험은 물론이고 수확된 농작물의 구매도 가능하단다.

 복룡마을은 법정 동리인 지산리(芝山里)’를 구성하는 6(복룡·월호·지산·곽단·노재동·장곡) 자연부락 중 하나다. 복룡(伏龍)이란 지명도 역시 지형에서 유래됐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데 그 형상이 마치 용이 엎드리고 있는 듯 했단다.

 옛 이름은 마장촌(馬場村)’. 옆 마을인 월호 마을과 함께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복룡마을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마을 표석에도 말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복룡마을을 빠져나오니 월호저수지가 반긴다. 월호앞뜰(‘해지안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아니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더 넓은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쌓은 저수지이다.

 월호저수지 아래. 잘 가꾸어진 양 갈래의 길이 산뜻한 인상을 준다. ‘행복 홀씨 안내판도 눈에 띈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아름답게 가꿔 민들레 홀씨처럼 행복을 퍼트리자는 의미의 행복 홀씨 입양사업에 동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월호(月湖)’ 마을은 이름부터가 서정적이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한인촌(漢人村)이었다고 한다. 한나라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그러다가 하인촌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지형적 특성을 따 월호로 바꾸었단다. 간척사업이 있기 전, 밀물 때가 되면 마을 앞 넓은 들에 물이 차 마치 호수처럼 보였는데, 거기다 동산에 달이라도 떠오를라치면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마을가꾸기 사업의 흔적인 듯 월호마을의 담벼락도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 깃발을 내걸고 사물놀이가 한창이다. 월호리가 신명나는 마을임을 알려주려 했다나? 맞다. 이 마을은 명절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고 했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금동마을로 연결되는 도로(지산길)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이때 눈에 익은 풍광이 펼쳐진다. 해남구간의 화원반도를 걸으면서 만났던 이색적인 풍경, 즉 구릉지가 이곳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해남은 푸른 배추가 한 가득이었는데, 이곳은 텅 비어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작은 소류지도 만날 수 있었다. ‘둠벙에서 소류지로 크기만 달라졌을 뿐. 이 또한 해남에서 눈여겨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다만 메마른 구릉지에 물을 대던 해남과는 달리 이곳은 요 아래에 있는 논에까지 물을 대느라 몸집을 부풀렸을 것이다. 아무튼 큰 덩치 덕분에 세월을 낚는 강태공까지 덤으로 품었다.

 저수지 아래로 내려서자 꽤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지금이야 옥토로 변했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만 해도 이곳은 바닷물이 넘나들었다. 이 일대에서 나던 금동머리 감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뽑히기도 했단다.

 이후 300m는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른다. 농경지와 산자락 사이로 농로(중산길)가 나있다. 그러다 지산천을 만나면 쌍 다리 중 하나를 건너면 된다.

 탐방로는 이제 지산천의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이런 둑길은 19코스의 종점인 도림리까지 계속된다.

 오른편으로는 지산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 아래 도림천의 하구둑이 축조되면서 생겨난 저 들녘은 지산리를 넘어 청계리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지산천이 그보다 더 큰 도림천을 만나면, 물길은 아예 호수처럼 넓어져버린다. 아니 도림천 하구에 쌓아올린 복길방조제가 만들어놓은 인공호수일지도 모르겠다.

 두물머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승달산에서 발원 ‘S’자로 굽이굽이 흐르며 드넓은 들녘을 적셔온 도림천은 이곳 복길리(청계면)와 왕산리(삼향읍) 사이에서 몸집을 크게 부풀린 다음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이 일대는 갈대가 장관이다. 하천 양쪽 둔치를 따라 길고 넓게 분포되어 있다. 금강(신성리)의 갈대숲만은 못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바람에 속도가 붙었던지 갈대밭이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이리저리 춤추는 갈대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물결이 은은한 빛을 내며 일렁인다. 그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들녘은 호남고속철도 2단계(고막원-목포 구간) 공사가 한창이었다. 건설역군들에게는 휴일조차 없나보다.

 중간에 청계천(도림천으로 합수되는 지점)을 만나 가로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저 오른편 제방에서 왼편 제방으로 옮겼다는 것만 다를 뿐.

 지산천에서 둑길로 올라선지 1시간(4.3km). 도림천을 거슬러 올라오던 탐방로는 도남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 다리를 건너다 해안길로 우회해 온 일행을 만났다. 탐방로를 벗어나 서해안을 따르다가 도림천 하구둑을 건너고, 계속해서 복길리 해안을 올라가다 남성동삼거리에서 도림리로 들어왔단다. 훨씬 유익했다는 그의 자랑을 들으며 우리 국토의 둘레를 따라가는 코리아 둘레길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껏해야 면소재지인데 도림리(道林里)는 규모가 꽤 컸다. 길거리도 면소재지치고는 꽤 번화한 풍경을 보여준다. 어쩌면 목포대학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풍경이지 싶다.

 도심의 대형교회에 못지않은 크기를 자랑하는 청계중앙교회를 지나면 곧이어 국도 1호선(영산로)을 만난다. 건너편은 목포대학 정문.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지 않고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날머리는 청계면복합센터(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439-2)

방향을 틀자마자 청계면복합센터가 얼굴을 내민다. 19코스가 종료된다는 얘기다. 오늘은 13.52km 3시간 20분에 걸었다.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초의선사유적지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서해랑길(무안 20코스) 안내도는 복합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했다. 활짝 웃는 그녀를 보다 문득 만남의 의미를 고민해본다. 정채봉 작가의 에세이 만남은 만남을 다섯으로 나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는 생선 같은 만남’,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는 꽃송이 같은 만남’, 힘이 있을 때는 지키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는 건전지와 같은 만남 등등. 하지만 나에게 집사람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고 싶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는... 반면에 그녀에게 난 만나면 좋고, 함께 있으면 더 좋고, 헤어지면 늘 그리운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실제는 100m남짓 더 걸어 청계면사무소 앞에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