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0코스(서망항-가치 버스정류장)

 

여행일 : ‘22. 8. 27(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및 지산면 일원

여행코스 : 서망항→팽목항→팽목방조제→마사마을→봉암저수지→하봉암마을→가치버스정류장(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14.1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0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산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닌 ‘팽목항’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아픔의 현장. 산악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동석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주보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 들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38km쯤 내려오면 ‘서망항’에 이르게 된다. 사진은 출발지 근처의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로 세월호 사고 때 한참 말이 많았던 곳이다. 참!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 ‘서망항’과 ‘가치마을’을 잇는 15.9km짜리 구간. 서해안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실컷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소박한 항구를 품은 마을들을 지나며 어촌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반면에 무책임한 어른들로 인해 생때같은 어린 생명들을 잃은 ‘세월호’의 아픔을 되돌아보게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 동쪽 방향, 그러니까 ‘서망 삼거리’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팽목항(출발지에서 1.3km쯤 떨어진 지점)’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세월호 기억관’에 들렀다가 출발지인 ‘마사 수문’으로 가려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팽목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할 계획이다.

▼ 때문에 국민해양안전관은 차창너머로 보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양안전체험시설과 유스호스텔·해양안전정원(추모공원) 등으로 꾸며졌다는데, 그보다는 노란색 ‘맘’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국화꽃을 손에 들고 가슴이 뚫린 엄마 모습을 형상화했다. 상부좌대까지의 높이가 9m, 무릎부터 발끝까지의 높이는 3.5m로 참사 발생 시각인 ‘9시35분’을 의미한단다.

▼ 버스에서 내리니 ‘팽목항 대합실’이 반긴다. 조도나 관매도, 서거차도를 들어갈 때 이용하던 눈에 익은 시설이다. 그밖에도 관사도·소마도·대마도·모도·각흘도 등 진도군 관내의 모든 섬을 연결하는 여객선들이 이곳 팽목항에서 떠나고 들어온다. 참고로 팽목항은 세월호 침몰사고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 항구다. 사고 당시 구조된 생존자와 부상자를 받았고, 싸늘하게 식은 희생자들도 안아줬다. 세월호가 가져다준 슬픔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오늘도 슬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대합실 옆의 ‘진도 국제항개발사업 조감도’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2019년까지 배후지를 조성하고, 2030년까지 국제항으로 개발하겠다는 청사진으로, 사업이 종료되면 팽목항 주변에는 산업시설, 복합휴양·펜션단지, 테마파크,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단다. 그런데 저게 청사진에서 끝나버릴 것 같다는 예감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 ‘팽목항(현 진도항)’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가슴 한켠에 상흔처럼 새겨졌을 지명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세월호 참사’를 품은 항구이기 때문이다. 항구 주변에는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 가장 먼저 둘러봐야 할 곳은 ‘방파제’, 세월호와 관련된 각종 조형물들과 기억의 벽, 다녀간 이들이 남긴 추모의 리본,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신발 등 눈이 아닌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풍경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번쯤 둘러보고 누구나 갖고 있을 먹먹한 아픔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고백해보면 어떨까.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형상화한 조형물. 그런데 ‘2014.415’라는 숫자에서 ‘5’자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세월호의 아픈 기억도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일까? 참! 조형물은 기다림의 의자와 세월호 참사지점이 그려진 지도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것으로 여겨지는 신발도 두엇 놓여있었다.

▼ 방파제에는 ‘기억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년(2015.4.16.)을 맞아 높이 50㎝×길이 200m의 방파제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새겨진 4,656장의 타일(도자기)을 붙였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이 전국 26개 지역을 돌며 글과 그림을 받았고 그 타일을 경기도 이천에서 구웠다.

▼ 방파제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세 명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추모객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추모의 공간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의 의자에 앉아보고, 기억의 타일을 살펴보며, 참사의 현장 위치도도 헤아려본다. 그리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면서.

▼ 200m쯤 되는 방파제의 한쪽 난간은 수천 개의 노란 리본(그 아래가 그림타일인 기억의 벽이다)과 종들이 매달려 있다. 그 리본을 따라가 빨간 등대, 이른바 ‘기다림의 등대’에 이르면 빨강 우체통이 반긴다. 세월호 사망자들에게 보낼 편지를 넣는 ‘하늘나라 우체통’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벤치’도 보인다. 하지만 선뜻 엉덩이를 내려놓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 방파제에 서면 참사의 현장인 ‘맹골수도’가 저만큼이다. 그날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듯 지금 그 바다에 바람이 분다. 그나저나 여덟 번의 아픈 4월이 지났다. 팽목항은 지금 밤낮으로 들리던 통곡소리가 사라졌고, 목탁소리나 찬송가도 없다. 자원봉사단체의 천막도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그저 하얀 깃발과 노란 리본들만 혼령처럼 바람에 나부낄 따름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듯 휘날린다.

▼ 터미널 신축공사가 한창인 항구에는 ‘산타모니카호’가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항과 제주항을 하루에 2회씩 오가는 쾌속 카페리라는데, 생김새부터가 커다란 등치에 비해 날렵하게 생겼다. 606명의 여객과 승용차 86대를 싣고도 42노트(시속 78km)의 속도로 달려 90분이면 제주도에 도착한단다. 덕분에 제주도가 당일 여행지가 되어버렸다.

▼ ‘세월호 팽목기억관’은 여객선터미널 공사현장 근처에 있었다. 참사 당시 아들·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곳, 결국은 분향소가 된 컨테이너다. 지금은 분향소와 유품, 관련 기록물 등이 그 참사를 기억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16일 발생했다. 인천-제주를 운항하던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진도군(조도면) 부근 해상. 이 사고로 승선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미수습자 5명 포함)했다. 탑승객 중 상당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나이에 따라 생명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10대 후반에 불과한 단원고 학생들이 전체 사망자 중 82%라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매체의 ‘전원 구조’란 ‘오보’에 잠시나마 안도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접하고 ‘속았다’는 생각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 구조된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 원인을 떠나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기억관’은 방문자의 서명대가 있는 ‘복도’와 사고 당시 사망한 이들의 대형 사진이 걸린 ‘분향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향소 참배는 생략하고, 방명록을 적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기억관 앞에는 ‘가족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회색 바탕에 세월호 기적을 상징하는 ‘세월호 고래’와 시민들의 소원을 담은 노란 풍등을 그려 넣었다. 고래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배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및 아이들이 고래를 타고 바다에서 나오는 기적을 바라는 간절함을 담았다고 한다. 풍등은 그걸 띄워 올린 추모객들의 마음을 담았다. 잊지 말자는 다짐과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등등...

▼ 기억관 뒤 울타리에 걸린 노란 리본에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게 바닷바람에 리본이 나부낄 때마다 8년 전 그날의 슬픔과 아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미수습자를 가족 품으로’, ‘별이 되어 빛나소서’ 등 노란 리본에 새겨진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기억의 공간과 함께하기를 15분 여, 마무리되지 못한 아픈 상처를 숙제로 남겨놓은 채 길을 나선다. 이때 진도지맥의 마지막 봉우리랄 수 있는 한복산(漢福山, 231.6m)이 불쑥 솟아오른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지만 쉽게 오르내릴 수는 없을 듯...

▼ 걷다보면 꽤 많은 현수막을 만나게 된다. 그중 두엇은 미국 LA에서 온 추모객들이 내건 것이었는데, 4월16일을 잊지 않았고, 기억하고 행동하겠단다. 예!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 ‘진도항 배후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널디너른 주차장 끝에는 ‘팽목(彭木)’마을이 있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 앞 사거리(약간 엇걸린 오거리이기도 하다)에서 왼편으로 간다. 참! 이때 마을을 관통해버릴 수도 있다. 이럴 경우 200m 정도가 단축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바닷가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시 ‘팽목마을’이다. 이번에는 작은 포구까지 끼고 있다. 자신의 이름까지 빼앗긴 채, 죽은 듯 숨어있는 불쌍한 항구다. 아니 팽목항이 진도항으로 개명했으니, 이젠 ‘팽목항’으로 불러도 되겠다.

▼ 마을 앞에서 ‘팽목 바람길’ 팻말을 만났다.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숲길·갈대밭을 끼고 한 바퀴 도는 13.5㎞짜리 둘레길이다. 팽목항에 들른 이들이 참배만 하고 떠나지 말고 진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걸으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그간 참사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진도 주민들도 생각하자는 의미도 담겼다. ‘기억과 성찰의 도보여행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이다.

▼ 오늘 새벽, 집을 나서는 집사람이 바람막이 옷을 덧입는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다. 아니 가을의 전령사인 저 호박은 이미 만추까지 지났나보다. 넝쿨로는 제 한 몸을 못 이겨 받침대로 올라앉았다.

▼ 길을 나선지 23분, 탐방로는 바닷가로 나간다. 산자락과 진도항배후지 사이에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 8분쯤 더 걸으면 ‘팽목방조제’. 임회면 동쪽(팽목리)과 지산면 남쪽(마사리)을 이은 1,755m 길이(높이 4.7m)의 둑이다. 803번 지방도가 지나는 둑길은 임회면의 ‘진구지 수문(이정표 : 종점 12㎞/ 시점 3.9㎞)’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차량통행이 끊기다시피 한 한적한 도로를 따라 꽤 오래 걷게 된다.

▼ 이정표(마사수문 1.8㎞/ 갈대밭길 0.9㎞/ 팽목길 0.9㎞)가 ‘팽목 바람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관광 상품화’했다고나 할까? 휴양이나 관광 목적의 여행과 달리 역사적 사건, 특히 비극적인 역사를 추적하는 여행이 ‘다크 투어리즘’이니 말이다. 비극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려는...

▼ 방조제 너머 물가엔 갈대들이 춤을 추고 오후 햇살을 받은 물결은 은빛으로 일렁인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풍경이다. 참고로 1.8km의 방조제는 396ha나 되는 드넓은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대신 낙지·꼬막·장어 등 이 지역에서 많이 나던 해산물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단다.

▼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둑은 강태공 차지였다. 팽목항 인근 바다는 돔과 볼락, 우럭, 붕장어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저 낚시꾼의 대답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입질 한 번 없다’였다.

▼ ‘와, 나비 떼 같아요!’ 방조제에서 합류한 집사람의 외침이다. ‘아니 저건 ‘나비 떼’가 아니라 ‘세 떼’라오’ 조도(鳥島) 인근의 섬들이라는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나비를 고집했다. 작은 물결에 사뿐히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은빛날개를 가진 나비 떼를 닮았다며... 맞다. 집사람은 아직도 감성을 잃지 않은 꽃띠 소녀였다.

▼ 20분 이상 걸어 도착한 방조제의 끝에는 ‘마사 수문’이 있었다. 이정표(종점 10.2㎞/ 시점 5.7㎞)는 죽도선착장이 있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마사마을이 있는 오른편을 추천한다. 지시를 따를 경우 2km가 넘는 산길을 오르내려야하기 때문이다. 5분이면 족한 거리를 50분이나, 그것도 죽도록 고행해가면서.

▼ 하지만 그런 정보를 몰랐던 우리 부부는 ‘죽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어서 해안도로를 5분쯤 더 걸으니 부교(浮橋)를 이용하는 작은 ‘선착장’이 나온다.

▼ ‘팽목 바람길’에서 내건 이정표(다순기미 소망탑 0.8㎞/ 마사수문 0.5㎞)는 이곳을 ‘마사 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구도(馬口島)’ 밖에 보이지 않는데 ‘죽도선착장’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 선착장 한켠에는 멸치어장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솥이 걸려있었다. 서망항(또는 팽목항) 인근 바다는 ‘꽃게’ 주산지다. 통발로 잡은 꽃게를 ‘물칸통’에 담아 살려서 가져온다. 서망항이 꽃게잡이로 유명한 이유다. 그런데도 멸치를 삶는 시설이라니... 귀경해 알아보니 이곳에서도 멸치잡이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니 인근 조도에는 멸치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민들도 있단다.

▼ 나무계단을 오르자 숲길이 펼쳐진다. 가끔은 밧줄에 의지해야 할 만큼 비탈진 곳도 나오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왼쪽 바다에선 파도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이 길은 마사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옛길인 바닷가 숲길이다. 잡풀과 관목이 무성했던 버려진 길을 동화작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정돈해 도보길을 냈단다.

▼ 그렇게 17분쯤 진행하자 시야가 트이면서 선착장(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죽도선착장’으로 적고 있었다)이 있는 ‘다신기미’가 나타난다. 다신은 따뜻하다는 뜻이고, 기미는 움푹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전라도말이란다.

▼ 인근 해역은 마사마을 어민들의 어장이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멸치와 ‘디포리(‘보리멸’의 전라도 사투리)를 잡았었단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멸치를 삶는 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 추억으로만 남은 듯, 정체 모를 시멘트 구조물만 여럿 보일 따름이다.

▼ 다신기미에는 ‘소망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월호 리본’을 형상화한 걸로 보아,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이미지 말고도 아직도 물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들을 담았지 않나 싶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웃자란 풀숲 때문에 돌탑에 돌을 올려놓는 장면은 카메라에 잡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는 다짐으로 달래본다.

▼ 초반과 달리 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가파른 구간이 많아진다. 그러다가 9분쯤 후 정체불명의 플라스틱 통이 매달린 삼거리를 만났다. 희미하나마 바닷가를 향해 길이 나있는 것이다.

▼ 길이 있으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덕분에 나는 최고의 전망대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이면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지구의 수많은 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조도면은 맹골군도의 저런 섬들 외에도 거차군도와 독거군도 등 수많은 섬들이 있다. 오죽했으면 ‘세 떼’가 섬의 이름으로까지 굳어졌겠는가. 참! 사람들이 머물다 간 흔적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일몰을 기다렸음직한...

▼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었다. 죽도·곽도·맹골도 등 유인도와 병풍도 등 여러 무인도 및 암초들로 이루어진 맹골군도(孟骨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저 흔적들은 섬들 사이로 지는 일몰을 찍기 위해 머물던 사진작가들이 남긴 게 분명하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해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기상청이 이 일대의 낙조를 한반도 최남단에서 만나는 최고의 낙조로 꼽았겠는가.

▼ 바닷가 해안절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 안내리본과 부표를 이정표 삼아 ‘팽목 바람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이 길을 기억과 상생을 위해 걷는다고 했다. 그는 또 아픔을 딛고 함께 가는 그 길, 바다도 바닷바람도 하늘도 나무도 풀도 모두 산 자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 17분쯤 더 걸으니 ‘잔등너머(이정표 : 종점 8㎞/ 시점 7.9㎞)’다. 예전에 말이 떨어졌다는 바닷가 낭떠러지가 요 너머에 있다고 한다.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해안절벽을 말하는가 보다.

▼ 잔등너머를 지나자 숲길이 끝나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마사마을이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가는 구릉지는 온통 대파 밭이었다. 맞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 그런데 문제는 가뭄에 내몰린 대파가 말라비틀어져 간다는 것이다. 김장철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걱정되는 이유다.

▼ 탐방로는 마사마을을 관통한다. 마사(馬紗)라는 이름대로 제주에서 서울로 보내는 말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말들이 머물던 ‘마장’과 인근 ‘모래해변’을 합쳐 ‘마사’가 됐단다.

▼ 마을을 빠져나오니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아까 지나왔던 ‘마사 수문’이 코앞에 놓여있지 않겠는가. 맞다. 도로(수마로 : 마사수문↔수양리 버스정류장)를 따르면 금방인데도, 탐방로는 산 하나를 에둘러 돌도록 만들었다. 그만큼 경관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도로(수마로)와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수마로 0.6㎞/ 잔등너머 0.7㎞)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최고의 쉼터이겠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서 오늘만큼은 사절이란다.

▼ 마사마을을 벗어나 10분쯤 걸었을까, 종점까지 6.7km가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이제 그만 농로로 들어서란다. ‘수마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정표(갈대밭길 0.8㎞/ 마사마을 0.6㎞)는 ‘팽목바람길’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 리본을 달았다. 노란색은 세월호의 상징색이면서 대지와 흙의 색이기도 하다. 파란색은 팽목바람길에서 만나는 하늘과 바다를 의미한단다.

▼ 탐방로는 이제 너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간척사업’에 의해 생긴 들녘이다. 간척(干拓)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에는 조생종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른 것도 아니다. 며칠 전 고흥(흥양농협)에서 배달되어온 쌀이 22년산 햅쌀이었으니 말이다.

▼ 600m 남짓 되는 농로의 끝에는 ‘지산보 양수장(이정표 : 종점 6.1㎞/ 시점 9.8㎞)’이 있었다. 팽목방조제가 만들어낸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하지만 안내판은 용도를 ‘배수장’으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 침수를 막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압이 380볼트나 되니 조심하란다.

▼ 양수장이 있으니 근처에 보가 있을 것은 당연, 웬만한 강보다도 더 넓은 수로가 있었다. 지금껏 함께 해온 ‘팽목 바람길’은 이곳에서 수로를 건넌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강둑을 따라 수로를 거슬러 올라간다.

▼ 이후부터는 수로를 오른편에 끼고 걷게 된다. 이때 하천변에 들어선 ‘갈대밭’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금강변의 신성리나 순천만의 갈대밭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할 정도로 드넓다. 하긴 ‘팽목 바람길’에서도 이 부근의 갈대밭을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지 않았던가.

▼ 진행방향에서는 동석산(銅錫山)이 우뚝 솟아오른다. 높이라고 해봐야 200m를 겨우 넘기는 자그마한 산이지만, 수려함만 놓고 보면 세상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산이다. 수년 전에 올라본 경험에 의하면, 힘줄처럼 툭툭 불거진 암봉의 짜릿함과 함께 능선에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 압권이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냅다 논두렁으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지름길을 찾아냈다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한다. 하지만 길은 끊겨 있었고, 곧바로 갈 수도 있던 길을 괜히 에둘러가는 꼴이 돼버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집사람이 즐거워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30분쯤 더 걸어 ‘심동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건넜다. 이곳에도 양수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걷는 내내 바라보던 종석산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 종 여러 개가 붙어 늘어선 모양새다.

▼ ‘하심동’마을에 가까워지자 ‘동석산’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저 산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오랫동안 오를 수 없는 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바위에 난간을 대거나 밧줄을 매고, 문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박아 접근이 가능해졌다. 아찔함을 맛보며 산을 오르겠다면 ‘종성교회(사진의 왼쪽)’로 가면 된다. 밧줄에 매달려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오르며 칼날 같은 능선을 곡예를 하듯 건너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 하심동마을을 스치듯 지난 둘레길은 이제 봉암저수지와 오봉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봉암저수지의 거대한 둑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이정표(종점 3,2㎞/ 시점 12.7㎞)가 세워진 삼거리에서 농로(왼쪽)로 들어섰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봉암저수지’로 올라선다. 붕어 낚시로 소문이 나서, 전국의 조사(釣師)들이 손맛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는 곳이다. 참고로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는 1945년에 처음 축조됐다. 그러다가 1966년 팽목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늘어난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1979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시켰다.

▼ 이후부터는 803번 지방도를 따른다. 봉암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아가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이렇듯 서해랑길은 바다와 산을 넘나들고 마을과 들판을 오간다. 그래서 사색의 길이 되고, 성찰과 치유의 길이 된다.

▼ 탐방로는 ‘하봉암(下蜂岩)’ 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가치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봉암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윗봉암’마을과 마주한다. 참! 마을회관은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 하봉암은 진도에서 가장 큰 봉암저수지를 끼고 있다. 하지만 동석산과 큰산, 부흥산 등 200m 내외의 산들로 둘러싸여있어 논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그 밭에서 따온 고추를 다듬던 부부가 나에게 포즈를 취해주신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가가는 내가 기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 저수지 상류는 꽤 많은 왜가리들이 노닐고 있었다. 수초로 뒤덮인 물속에 물고기가 많은가 보다.

▼ 도로로 올라선지 20분, 느닷없이 나타난 이정표(종점 1.5㎞/ 시점 14.4㎞)가 다시 농로로 들어가란다. 그리고는 들녘 끝까지 간 다음 산자락을 따라 가치마을로 오란다.

▼ 하지만 우리 일행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가치마을이 보이는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이때 들녘 너머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림의 점정(點睛)은 검망산과 지력산의 거대한 암릉이 찍었다. 진도에서 그리는 풍경화는 저렇듯 암릉을 끼었을 때가 제격이다.

▼ 날머리는 가치마을 버스정류장(진도군 지산면 가치리)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걷자 ‘가치(加峙)’마을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보건소와 초등학교(폐교)가 있는가 하면, ‘서부마트’라는 점포까지 들어선 걸로 보아 지산면의 중심마을 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4.18km. 2km정도의 산길을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도반들 대부분이 산길을 생략해버린 탓에, 엉겁결에 우리가 꼴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버스정류장 맞은편의 안내판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하지만 난 그 속에 숨겨진 근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서 걷다가 조금 나아졌던 무릎에 다시 이상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좋은 것을 먹어도 맘이 불편하면 행복이 아니라는, 이 세상의 무엇을 다 준대도 당신만은 못하다>던 테너 박종호의 ‘당신만은 못해요’를 떠올리며 10코스의 트레킹을 마무리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