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13코스(우수영관광지-학상 마을회관)

 

여행일 : ‘22. 10. 22(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문내면 및 화원면 일원

여행코스 : 우수영관광지→청룡산→명량대첩비→양정마을→임하도 갈림길→예락마을→용정교→학상마을회관(거리 및 시간 : 16.5km, 실제는 13.16km를 3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3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해남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서해랑길의 특징인 바닷길에 더해 산길·들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걷는다. 덕분에 다도해의 멋진 풍광과 함께 해남의 풍요로운 들녘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의 유적지 중 하나인 우수영에서는 이순신장군의 애국충정에 더해,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까지 살짝 엿보게 된다.

 

▼ 들머리는 학상 마을회관(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와 77번 국도를 이용 장춘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장춘리)까지 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개초길(장춘교차로↔화원면 화봉리)’로 들어서면 오래지 않아 ‘학상마을’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곳은 13코스의 들머리가 아니다. 산악회에서 주차 여건을 감안 들·날머리를 바꿨고, 덕분에 들머리였을 우수영관광지가 졸지에 날머리로 변해버렸다.

▼ ‘우수영관광지’에서 출발해 ‘학상마을’에 이르는 16.5km짜리 구간이다. 하지만 산악회 결정으로 시·종점이 뀌었다. 우리 부부는 한술 더 뜨기로 했다. 집사람의 부실한 무릎을 핑계 삼아 3km를 줄여 ‘예락1방조제’를 들머리로 삼았다.

▼ 남쪽 방향의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을 위한 내 배려지만, 이면에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들녘 구간을 살짝 지나쳐버리겠다는 내 얄팍함이 숨어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 실제 출발지는 ‘예락1 지방관리방조제’. 문내면 예락리와 무고리 사이 바다를 막은 방조제인데, 현재 개·보수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 방조제로 막히면서 옛 하천(서심원천)은 자연스레 담수호로 변했다. 그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이정목은 출발지를 변경한 내 결정이 3km를 거저먹었음을 알려준다.

▼ 반대편 바다에는 멋진 동산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산자락에 지중해풍의 마을을 품고서. 기획 당시부터 지중해식으로 디자인을 통일시켰다는 ‘무고마을’일 것이다. 이국적인 정취가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 참! 길을 나서기 전에 길을 찾는 방법부터 알아두자. 서해랑길의 방향표식은 노란색(정방향)과 군청색(역방향)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니 역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오늘은 군청색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 해남의 특징은 유난히도 간척지가 많다는 점이다. 예락1방조제가 만들어낸 예락리 들녘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확을 끝낸 저 들녘에서 거둬들인 벼는 대체 얼마나 될까?

▼ ‘농업은 과학입니다’. 시사 프로그램 패널(panel)들이나 들먹이던 얘기가 아닌지도 이미 오래다. 요즘은 거기에 ‘경제성’이라는 개념 하나를 더 보탰다. 그러니 벼농사보다 경제성이 뛰어난 작물이 있다면 갈아타는 게 정석일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저 비닐하우스가 그 증거일 테고 말이다.

▼ 안에서는 부추처럼 생긴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소금기가 남아있는 간척지에서 자생하는 ‘세발나물(잎이 가늘다는 뜻으로, 가는 줄기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이라는데, 지난 2006년 해남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했다나? 덕분에 바닷가 주민들이나 먹어보던 겨울철 별미가 도시인들의 밥상에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요게 각종 비타민·무기질·섬유질이 풍부한데다, 칼슘·칼륨·천연미네랄까지 다량 함유한 게 알려지면서 수요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단다. 하긴 면역력을 높여주는 건강식품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만추를 걷는 나그네에게는 수확기가 지난 감까지도 그림이 된다.

▼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본보기? 기생으로도 부족해 숙주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 길을 나선지 30분. 지형이 그물질하는 것처럼 생겼다는 ‘예락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예락리(曳洛里)의 4개 자연부락(예락·동리·양정·임하) 중 하나로, 대외적으로는 해남 천주교의 시발지로 유명하다. 1904년 우수영 관아의 좌집사 김병범·김보현·박내국 등이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해남 가톨릭이 시작되었다. 그 흔적은 1923년에 지은 ‘예락공소’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예락마을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다. 때문에 간척지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구릉지가 바닷가까지 드넓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 밭은 온통 배추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속이 차오른 것들로. 김장배추의 35%를 생산하는 해남 배추의 위세가 느껴지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 전에도 얘기했듯이 해남에서는 심심찮게 ‘둠벙’을 만난다. 밭농사에도 물은 항시 필요했을 게고, 조상들은 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요즘은 ‘영농도 과학’이다. 그러니 농가의 펌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둠벙’에서 끌어올린 물은 저런 스프링클러를 통해 밭작물에 공급된다.

▼ 강원도의 고랭지를 연상시키는 구릉지는 바닷가까지 계속된다. 해남의 자랑인 배추밭도 끊어질 줄 모른다. 해남배추의 특징은 흰 눈이 쌓인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겨울에도 아삭하고 신선한 김치를 담아먹을 수 있단다.

▼ 바닷가를 따라 난 803번 지방도로 내려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섬들이 눈앞에 쫙 깔려있다. 상태도·장산도·안좌도 등 큼지막한 섬들이 여러 새끼 섬들을 꼭 껴안고 있는 모양새다.

▼ 왼쪽 방향으로 잠시 걷자 삼거리(우수영과 임하도가 좌우로 나뉜다)가 나타났다. 임하도 쪽으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임하도로의 초대를 사양하며 왼편 바닷가를 따른다.

▼ 바닷가로 나가자 ‘임하교(林下橋)’가 눈에 들어온다. 임하도는 1986년 방조제 형태의 다리로 놓이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저 다리는 조류의 흐름을 트기 위해 옛 다리를 헐고 2010년 새로 건설했단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남 복 터진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복 터진 마을’이란 해남군이 개발을 위해 그 지역의 역사·문화·농업 자원을 활용하면서 내건 ‘브랜드’이다. 그 대상은 ‘예락마을’. 천혜의 개펄과 그 곳에서 생산된 토판염·세발나물 등 다양한 농수특산물, 주민 간 끈끈한 믿음(천주교)이 있는 복 터진 마을이란 속뜻을 담았다.

▼ 건물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민물장어·닭구이·하모샤브샤브·장어탕 등을 파는데, 이게 입소문을 타면서 성업 중이라고 한다. 참! 예락마을의 특산품인 ‘세발나물’도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 식당을 지나 방조제 제방을 걷는다. 길이가 500m도 넘는 거대한 규모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해남의 드넓은 땅은 대부분 ‘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났다. 간척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던 당시는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였다. 물론 대단위의 역사가 있긴 했다. 다만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됐기 때문에 지방 토호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 해남의 명문가인 ‘해남윤씨’도 간척사업으로 논을 일구어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 오른편으로는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진다. 왼쪽은 진도, 오른쪽은 장산도일 것이다. 그 사이 상·하태도를 배경삼아 마진도·백야도·족도·평사도·고사도 등 자잘한 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 왼편은 방조제가 만들어 놓은 ‘담수호’. 가을의 전령인 억새를 배경삼은 호수와 들녘이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담수호 대신 나타난 저 붉은 풀밭은 대체 뭘까? 오래 전 증도에서도 저와 비슷한 풀들을 보았는데, 안내판은 무기질과 미네랄이 풍부한 ‘함초’라고 적고 있었다. 함초의 ‘함’은 짠맛을 의미한다. 소금을 흡수하면서 자라나 고혈압과 당뇨에 효능이 큰 것으로 알려진다. 아닐 것이다. 소금보다도 값이 더 나가는 함초를 저렇게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겠지?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임하교에서는 30분). 양정마을로 들어섰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예락리’로 편입되면서 4개 자연부락 중 하나가 됐다. 취락은 구릉지에 분포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단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임하도(林下島)’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임하’라는 지명처럼 울창한 산림(곰솔이 주를 이룬단다)으로 인해 유명해진 섬이다. 섬은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의 생업이 농업과 어업을 동시에 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인 이유이다.

▼ 양정마을 주변도 배추밭 일색이다. 하지만 ‘세발나물’을 기르는 듯한 비닐하우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발나물’의 본명은 ‘갯개미자리’. 바닷가 땅이나 염전 주변 등 소금기가 있는 곳에서 자라는데, 푸른 잔디를 연상시키는 외관과 달리 짠맛이 돌면서도 약간 단맛이 난다. 요즘 트렌드인 ‘단짠(달고 짜고)’을 갖추었다고나 할까?

▼ 마을 뒤 ‘양정길(2차선 도로)’을 가로지른다. 바다가 보이는데도 사방은 온통 배추밭뿐이다. 그렇다면 ‘1% 명품소금’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천일염은 대체 어디서 생산된단 말인가. 전통방법(갯벌을 단단히 다지는 토판염)으로 생산되는 귀하신 몸으로 도시의 고급식당에나 납품된다던데...

▼ 해남의 구릉지를 걸을 때는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채소밭 사이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 밭에서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스프링클러 물줄기가 언제 나에게로 향할지 누가 알겠는가.

▼ 양정마을은 천혜의 자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선지 구릉지를 지나 만나게 되는 드넓은 들녘에서는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 염전이었던 듯한 너른 들녘에는 태양광 패널이 한 가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을 쫒아가겠다는데 뭐라 하겠는가마는 내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이 꼭 아니어도 요즘은 식량에까지 ‘안보’라는 개념이 붙는다. 그만큼 자원이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력은 효율이 좋은 원자력 등에서 얻고, 염전이나 평야에서는 그에 맞는 자원을 획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 양정마을 앞 바다는 숭어·도미·갑오징어가 잡힌다고 했다. 채취되는 낙지·모자반·다시마 등도 가계 소득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어부는 대체 무엇을 잡고 있는 중일까? 내 눈에는 망중한을 즐기는 강태공쯤으로 보였지만...

▼ 작은 고개를 넘자 규모가 제법 큰 축사가 길을 막아선다. 그리고는 이정표(시점 7㎞/ 종점 12㎞)를 이용해 바닷가로 우회시킨다. 그렇다고 꼭 따를 필요는 없다. 빙 돌아가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축사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된다.

▼ 이정표의 지시대로 바닷가로 나섰다. 모퉁이를 돌아서 만난 바다는 양식시설로 한 가득이다. 한마디로 바다목장이라고나 할까? 전복으로 여겨지는 양식장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있는가 하면, 뗏목 같은 부대시설과 채취선 등이 뒤엉키면서 어수선한 풍경도 함께 연출한다.

▼ 숫제 바다목장의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특산물인 전복은 기본, 전복의 먹이사슬인 다시마양식장이 함께 들어섰는가하면, 김발을 매달기 위해 세운 지지대까지 눈에 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시설물은 우수영 인근 해역에서 성행한다는 광어양식장?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전복의 달인, 오션’ 간판을 내건 양식장(성패가 될 때까지의 양식 및 수확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이 얼굴을 내민다. 흔하디흔한 전복양식장이 뭐가 새롭겠는가마는 열대성식물로 치장된 주택이 이색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 주택 옆에는 전복 종자를 키운다는 비닐하우스가 여러 동 들어서 있었다. 전복 양식장은 어린 전복을 키우는 ‘육상수조 치패장(아래 사진)’과 바다의 가두리양식 성패장으로 이루어진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양정마을에서는 50분), ‘서외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뒷산은 전라우수영 수군진성의 성지였다는 ‘망해산(73.7m)’이다. 전라우수영은 최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35호)로 승격·지정됐다.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이젠 성역화작업만 남았다. 발굴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저 산자락은 그 현장이다.

▼ 서외마을은 ‘우수영문화마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서해랑길 특유의 이정목(시점 5.6㎞/ 종점 13㎞) 말고도 ‘Soul project’지도와 벽화, 시비(초등학생이 지은 시를 적었다)가 세워져 있었다.

▼ 마을길은 직진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의 표식은 왼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또 다른 이정표(망해루← 363m/ 방죽샘↑ 186m)는 아예 다음에 만나게 될 유적지의 이름까지 적어놓았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산자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무릎이 부실한 집사람에겐 곧장 직진해 충무사로 오도록 이르고 말이다.

▼ 하지만 망해루로 오르는 탐방로가 막혀있었다. 전라우수영(사적 535호)의 정밀발굴조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란다. 그렇다고 고지가 눈앞인데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길의 형편도 살펴볼 겸 산속으로 들어선다.

▼ 그런 내 판단은 옳았다. 발굴조사 현장은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로 인해 훼손된 구간도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야자매트로 덮어 위험요소를 없앴다.

▼ 그렇게 8분쯤 진행하자 드디어 ‘망해루(望海樓)’. 망해산의 정상에 있는 전라우수영의 망루로 성(城)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1665년 무렵 지어졌으나 그간 소실되었다가 발굴조사로 그 면모가 밝혀졌고, 이어서 2006년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참고로 전라우수영에는 망해루 외에도 구 충무사의 남장대인 정해루(靜梅樓)와 북장대가 더 있었다고 한다.

▼ 이름과는 달리 망해루는 조망이 꽉 막혀 있었다. 하지만 우수영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운동기구를 배치했는가 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섬을 의인화 한 초등학생의 시도 눈길을 끌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수영 오일장(805m 전방)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이어서 길고 긴 통나무계단을 내려서자 ‘북문길(이정표 : 오일장 525m/ 망해루 280m)’. 길가 정자가 잠시 쉬어가란다.

▼ 803번 지방도(우수영로)를 건넌다. 이어서 궁전아파트 옆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오일장’이 나타난다. 서외마을로 들어선지 25분 만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 시장이 있다. 시장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또한 정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때(4일과 9일)만 잘 맞추면 해남의 특산물을 제 값에 살 수 있다. 하지만 장날이 아니면 장터는 텅 빈 공터로 남는다. 그러니 장날을 미리 확인해보고, 아니라면 트레킹 코스를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 망해루에서 내려와 803번 지방도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면 탐방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 ‘오일장’부터는 마을길을 따른다. 상점과 음식점, 금융기관 등이 몰려있는 우수영의 번화가이다. 간판을 기웃거리며 5분쯤 걷자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꼭대기에는 ‘명량대첩비’를 모신 ‘비각’이 올라앉았다. 명랑대첩비는 숙종 14년(1688년) 동외리(문내면)에 세워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로 뜯겨져 서울 근정전에 묻혀 있던 것을 1950년 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왔다. 그러나 원래 자리가 아닌 청룡산(학동리)에 옮겨놓았다가, 2011년에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나라 빼앗긴 설움을 온몸으로 버텨낸 불굴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 비각 안에는 명량대첩비(보물 503호)가 들어있다. 이 빗돌은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승전비이다. 이순신이 원균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으로 우수영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무용담을 담았다. 당시 대제학이었던 이민서가 비문을 지었고, 본문은 명필로 이름난 판돈녕부사 이정영의 글씨로 새겨졌다. 상부는 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글씨라고 한다.

▼ 건너편에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들어앉았다. 둘 사이의 광장에는 옛 충무사에서 함께 옮겨 온 비석이 늘어섰다.

▼ 충무사(忠武祠)는 임진왜란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충무공 헌창(軒敞) 사업이 활발하던 1964년 명량대첩비가 있던 학동리에 세웠던 것을 2017년 이곳으로 옮겼다. 영정을 모시는 제각 등에 제한됐던 옛 충무사와는 달리 사당, 동·서무, 외삼문과 강강술래마당 등으로 확대되었음은 물론이다.

▼ 사당에는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떠한 느낌으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옛 충무사에 걸려있던 것(김은호 화백이 그렸다)을 옮겨왔을지도 모르겠다.

▼ 유적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탐방로를 따른다. 그리고 100m쯤 더 걸어 우수영의 동문을 상징화 했다는 조형물을 만났다. 이정표(법정스님 생가↑ 488m/ 동헌터→ 133m/ 명랑대첩비↓ 118m)는 사거리인 이곳에서 곧장 직진하란다. 하지만 난 오른편을 선택했다. 100m 남짓만 걸으면 ‘동헌터’를 만날 수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내 선택은 후회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헌터’로 여길만한 공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볼 수밖에...

▼ 그러다가 문내면생활문화센터를 만났고, 직원으로 여겨지는 분으로부터 문화센터 부근 전체가 ‘동헌터’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사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직진한다. 이어서 건물의 외벽과 담장을 벽화로 빼곡히 채워 넣은 아름다운 골목을 걷는다.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마을길로, 벽화·아트카페·생활사박물관·강강술래 아트로드·시(詩) 조형물 등 다양한 볼거리로 꾸며졌다니 천천히 걸으며 마음껏 음미해 볼 일이다.

▼ 이순신장군의 시도 눈에 띈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 바다에다 맹세하니 바다 속의 용도 감동하여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오르고, 산에다 맹세하니 초목도 놀라 소스라치네)로 시작되어 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 : 원수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무슨 여한이 더 있겠는가?)로 끝을 맺는다. 전장에 나서야 하는 마음가짐을 담은 ‘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와 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가 생략되었지만 이순신장군의 우국충정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주민이 떠나버린 낡은 흙집은 문내면의 특산물인 목화로 만든 포목을 판매하던 ‘면립상회(面立商會)’로 탈바꿈했다. 안에 생활유품이 전시되어 있다니 일종의 생활사박물관인 셈이다. 영업이 중단된 현대부동산도 ‘복덕방’이라는 강강술래를 체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쌈지공원이 들어섰는가 하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낮게 이어진 지붕 밑 담벼락에는 명량의 역사에서부터 이어져온 우수영 사람들의 사연이 벽화로 담겼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사람들이 ‘부산에 감천이 있다면 해남에는 우수영이 있다’고 외치는 이유일 것이다.

▼ ‘정재 카페’도 눈여겨 볼만하다. ‘정재’는 부엌을 부르는 전라도 사투리. 우수영을 왕래하던 뱃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제일여관’의 부엌이 커피 향 가득한 카페로 바뀌었다. 작고 허름한 옛 부엌처럼 보이지만 부뚜막과 식초병·소쿠리·부엌살림 같은 옛 생활용품으로 꾸며놓아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짬을 내서라도 한번쯤 찾아볼만한 이유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법정스님 마을도서관’이 나온다. 스님이 태어난 터를 새롭게 꾸미면서 만든 공공도서관이다. 마을도서관 외에도 법정스님의 어록이 담긴 포토존, 생가터 기단 등이 함께 조성됐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이곳(문내면 선두리 우수영마을)에서 태어났다. 2010년 길상사에서 세수 79세(법랍 56세)로 입적하기까지 맑고 향기로운 삶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떠난 우리 시대의 청빈한 스승이었다.

▼ 생가 터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스님이 부르짖던 ‘무소유’를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무체(無體)가 유체(집)를 대신하고 있었다. 스님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에 나오는 글귀를 싣고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생가 터 위로 오르면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우리를 맞이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스님의 말씀과 함께. 그 앞에는 불일암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나무의자를 본뜬 의자를 배치했다.

▼ 스님의 자필 비문도 눈길을 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법정스님이 ‘숫타니파타’를 해설하여 만든 책, 법정스님의 뜻대로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어진 책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 언제부턴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래 코뿔소의 뿔이 하나이듯, 우리네 삶의 수행도 홀로 해볼 일이다.

▼ 우수영항, 우수영 마을은 서남해의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었다. 현재도 수륙을 잇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제주를 오가는 정기 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 문화마을은 ‘점빵’도 탄생시켰다. 1960~1980년대 동네 골목길에는 어디나 구멍가게인 ‘점방’이 있었다. 점방은 과자와 사탕,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소주·콩나물·설탕·라면·비누 등 모든 생활용품의 보고였다. 또한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소를 넘어 지역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골목 곳곳에 편의점이 들어오면서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갔고, 이제는 도심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점방이 문화마을과 함께 다시 태어나 어릴 적 소중한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해준다.

▼ 포구 앞 벽화로 채운 가림막이 문화마을의 끄트머리임을 알려준다. 아니 우수영의 입구이니 문화마을이 시작을 알려준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안내자는 물론 명랑해전의 영웅 이순신장군이다.

▼ 우수영을 빠져나오자 ‘선두리’ 마을표지석이 이별을 고한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강강술래길’의 산길구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수영의 꽃이라며 강강술래를 소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처럼 위장하여 옥매산을 빙빙 돌며 군사가 많은 것처럼 인해전술을 펼친 유래가 있다며.

▼ 데크로드를 2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충무사연리지 198m/ 우수영항 464m)가 18번 국도의 아래로 들어가란다. 서해랑길은 옛 충무사와 연리지를 구경시킨 다음, 청룡산을 넘어 우수영관광지로 이어진다.

▼ ‘학동리’ 표지석이 세워진 다리 아래는 두어 개의 표지판이 길손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중 1962년에 지어져 201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갈 때까지 이순신장군의 위패를 모셨던 옛 ‘충무사’는 ‘강강술래길’로부터 소개를 받는다. 참고로 ‘강강술래길’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과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던 전라우수영을 잇는 길이다. 걸음마다 충무공과 조선 수군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 갯벌의 무늬가 하도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용(龍)을 쏙 빼다 닮았다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하늘이 아닌 육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 고개를 돌리자 우수영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라 우도 수군의 본영이었던 우수영은 일제와 해방·건국을 거치면서도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유동인구가 확 줄어들었고, 아는 사람만 찾는 곳으로 변했었다. 그러다가 영화 ‘명량’의 성공으로 이제는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고 한다.

▼ 강강술래길(서해랑길과 겹친다)이 아닌 ‘명량로(옛 18번 국도인 듯)’를 따르기로 했다. 이미 걸을 만큼 걸어온 집사람이기에 산등성이를 넘어야하는 코스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산길을 탈 수야 없지 않겠는가.

▼ 날머리는 우수영관광지(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8번 국도를 따라 걷다 진대대교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우수영관광지(단지 안 풍경은 지난 번 5코스 때 소개했다)이다. 13코스의 시점이었으나 역으로 걸은 덕분에 졸지에 종점이 되어버린 지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3.16km를 걷는데 3시간 20분이 걸렸다. 볼거리가 제법 많았는데도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난이도가 낮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서해랑길’은 민관의 협력으로 이루어 낸 윈윈(win-win)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니 그에 대한 감사는 여행자들의 몫이다. 우리 부부가 특산물판매점을 찾았던 이유이다. 그리고 김치·젓갈·미역 등 해남의 특산물을 두둑이 챙겼다. 거기다 점심까지 현지 식당에서 때웠으니 인사치례를 한 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