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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고원길 6구간(전주가는 길)

 

여행일 : ‘24. 3. 1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장승삼거리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실제 출발지, 인증)모래재휴게소모래재주화산(조약봉, 인증)임도사거리부천마을원봉암마을부귀면사무소(거리/시간 : 15.8km, 실제는 메타세쿼이아길부터 12.22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완주)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장수 방면으로 19km쯤 내려온다. ‘서판사거리(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에서 우회전 모래재로로 옮겨 3km쯤 들어오면 원세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올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장승삼거리에서 출발해 메타세쿼이아길 따라 전주를 넘나들던 모래재로 오른다. 이어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을 넘은 다음, 금남정맥 아래 임도를 따라 부귀면사무소로 오는 전형적인 고원길이다. 해발 500m도 넘는 산줄기를 탄다고 해서 난이도는 ’. 구간 거리도 15.4km나 되지만, 지난 5구간 때 추가로 걸었건 거리를 빼고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부터 걷기 시작했다.

 10 : 40.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으로 늘어서있는 이 길은 모래재휴게소까지 이어진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잠동-큰터골의 1km 구간에 메타세쿼이아가 집중적으로 식재됐고, 2008년에는 모래재휴게소까지 구간이 확장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가로수는 수령 40년이 되어가면서 어른의 몸통보다도 더 굵어졌다.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뚝우뚝 솟아 삼각형을 이루는 메타세쿼이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주인공 박유천과 윤은혜가 아픈 상처를 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던(네티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기도 했단다),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걸었던 추억의 길이다. 영화 국가 대표에서도 이 길이 등장했었다. 주인공 하정우 등 스키선수들이 성동일 코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10 : 42.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테크길 입구. 이정표가 이름표(메타세쿼이아)를 달았다. 6구간의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바깥에 데크 탐방로를 새로 내놓았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저 길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니 탐방로를 따라가다 오가는 차량이 없을 때 잠깐 도로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들녘 너머에는 신덕마을(웅치골)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야생화를 키우고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 편백나무 숲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숙박시설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있단다. 그래선지 고원길 트랙은 저 마을을 들렀다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데크길을 따르다가 그만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10 : 50. 잠시 후 도착한 웅치골 사거리’. ‘모래재로(옛 국도 26호선)’에서 옛 웅치길이 갈려나가는 지점이다. 호랑이와 도둑떼가 출몰하던 시절, 이 길은 전주를 연결되던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로 향하던 왜군이 이 재(熊峙 또는 곰티재)를 넘었다.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대격전을 벌였고, 고갯마루에는 현재 이를 알리는 웅치전적비가 서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산길은 1910년 신작로가 되었다. 하지만 99굽이의 비포장 길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모래재가 뚫리면서 기억너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비포장 산길로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트레킹족의 차지가 되었다.

 웅치골 입구. 코너에 백곰 한 마리가 서 있다. 곰은 제 몸만 한 마을 표지석을 껴안고 웃는다. 충렬의 혼이 깃들어있는 곳이니 잠시 들렀다가라는 듯. 아무튼 옛 웅치(熊峙, 곰티재) 길은 신덕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모래재길이 생기기 전 진안과 전주를 연결하던 아주 오래되고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안내도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에 대해 간락하게나마 알려준다. 1592 7 8, 왜군은 웅치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전장에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이 안덕원으로 후퇴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해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웅치를 넘은 왜군은 7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현감 황진이 그런 왜군을 안덕원 인근에서 격파했다. 하나 더. 이 전투의 승리와 한산대첩이 있었기에 호남지방이 보전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정묘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고원길은 사거리에서 큰터골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메타세쿼이아길 1차 조림지의 끝이라는 것 외에는 귀가 솔깃할 얘깃거리는 전해주지 않는다.

 이정표는 6구간의 시점(始點) 장승삼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4km로 적고 있었다. 핸드폰의 트랙은 현재 0.85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6구간의 시점이 아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출발(생략구간은 지난 5구간 답사 때 이미 걸었다)한 덕분에 3.9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큰터골 마을회관. 고원길은 회관 앞 고샅길을 따라간다.

 당산나무 아래 철망울타리는 걷기 여행자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울긋불긋한 게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10 : 54. 마을을 빠져나오면 다시 모래재로이다. 그런데 가로수가 은행나무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느닷없이 수종이 바뀐 게 조금 어색했지만.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철이면 메타세쿼이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10 : 57. ‘큰터골 버스정류장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을주민들보다는 송어요리 전문점인 진미가든의 단골손님들에게 더 유용할 듯.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은 로컬 맛집이라니 말이다.

 11 : 02. 노거수 두 그루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수목원 가든 찻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적천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세동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버스정류장(적천마을) 맞은편에는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생가가 있었다.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간하고, ‘가람동인회로 활동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 한국시조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병순의 생가. 1917년에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라사랑도 남달랐는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고 한글보급운동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마당에는 박병순의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봄눈. 앵도, 속금산, 무궁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새겼는데, 이중 속금산과 무궁화는 이 집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북진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으나 억새가 무성한 것이 가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길가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9. 도로(모래재로)로 올라서자 또 다시 메타세쿼이아가 반긴다. 아까보다는 굵기나 크기가 작아졌지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명품 파크 웨이(Park-Way)’로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크 웨이란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길로서 주변자연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휴양활동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11 : 13. 길은 좀 더 가팔라지고 좀 더 급하게 굽이진다. 그리고 적천저수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호젓이 지난다.

 11 : 17. 그러자 고갯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모래재 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26번 국도가 새롭게 놓이면서 모래재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러다 느리게 달리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그리고 잠시 멈추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길로 변했고, 모래재 휴게소도 그들이 찾는 쉼터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모래재 휴게소. 아침마다 토종 계란과 향 짙은 원두커피를 준비한다는 곳이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재를 넘는 직장인들도 있단다. 하나 더. 어떤 이는 휴게소의 약수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했다. 해발 480m의 지하 73m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뽑아 올린 건강한 물인데, 진안군에서 1년에 한 번씩 수질검사까지 해준단다.

 맞은 편, 도로 건너에는 전주공원(공원묘지)이 위치하고 있다.

 11 : 19. ‘모래재 휴게소 광장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간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는 모래재 터널로 연결된다. 참고로 모래재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진안과 장수, 무주 등 이른바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무진장 주민들이 전주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도로는 1972 11월 개통됐다. 1997 4차로의 도로가 보룡고개에 나기 전까지 차량통행이 가장 많았으나, 한편으론 심한 굴곡으로 인해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났기도 했다.

 임도는 제법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다.

 11 : 25. 잠시 후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이 끝나고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정표는 산행구간의 핵심인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거리를 0.81km로 적고 있다.

 고원길은 이제 산길을 탄다. 느리게 오르는 반듯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진안고원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 갖는 특징이지 싶다. 진안과 다른 지역의 고도 차이가 300m나 되다보니 능선까지 오르는데 드는 힘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안지역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11 : 29. 덕분에 4분 만에 모래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해 내려온 호남정맥의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높이는465m, 진안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으나 전주시 방향으로는 매우 높은 고도를 갖고 있다.

 모래재라는 지명은 고갯마루 왼편에 위치한 신촌리(완주군 소양면)의 골짜기 모사골에서 유래했다. 모사가 모새(모래)로 발음됐고, 이게 또 표준어가 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정표(주화산 0.6km/ 곰티재 4.7km/ 모래재휴게소 0.31km)가 가리키는 주화산 방향의 능선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마루금을 따라간다.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이고,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 산줄기를 경계로 농경과 산업은 물론이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능선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이 리본은 진안의 특산물인 홍삼과 인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잠시 쉬어가라며, 천천히 돌아가라며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반자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멋지게 꼬부라진 도로가 내다보인다. 한때 위험하기로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모래재이다. 진안은 산이 8할이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고개로 연결되고 다른 고장을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가늠도 어렵게 많은 고개들. 그 중 모래재는 노령산맥의 호남정맥에서 제일 먼저 산을 넘어 진안과 전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고개였다.

 ! 아까 모래재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산길이 많이 가팔라졌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하긴 명색이 백두대간 다음으로 큰 산줄기인 정맥(正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39. 도중에 편백나무 숲이 적힌 이정표(주화산/ 편백나무 숲/ 곰티재)를 만났다. 요 아래 소양면의 어디쯤에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사납던 기세를 확 누그러뜨린다. 덕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11 : 45.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이다. 아니 실질적인 주화산일수도 있겠다. 고도계가 3정맥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보다 3m나 더 높은 570m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출발지인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를 만들었다.

 난간에 서자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묵방산과 응봉산 등 완주의 산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전주시가지의 고층빌딩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11 : 48. 공터를 지나자 곧이어 주화산(조약봉, 563.5m)이 길손을 맞는다. 진안군(부귀면 세동리)과 완주군(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63.5m의 산으로 산악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주화산(珠華山)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이 갈려나간다고 본다. ‘주화산이란 이름도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건건산악회에서 세운 ‘3정맥 분기점 표시봉이 이들을 대신한다고나 할까? 아니 주화산을 기점으로 강 3개의 수계가 나뉘는 점은 특별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동남쪽에 섬진강(부귀천), 동북쪽으로 금강(정자천), 서쪽으로 만경강(소양천)의 분수령이 된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6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정표가 정맥 3개가 나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은 정맥 종주산악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장수군 영취산에서 시작되는 금남·호남정맥이 팔공산부터 주화산(조약봉)까지 41.5km, 이곳 주화산에서 갈라진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각각 26.3km, 10.5km 진안고원을 지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귀산 방향, 즉 금남·호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아 내려서는 부담을 덜도록 했다.

 11 : 53. 그렇게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조약치이다. 이정표(모래재휴게소 1.15km/ 주화산(조약봉) 0.22km)는 이곳이 금남호남정맥에 있는 고갯마루 중 하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막상 금남호남정맥의 부귀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다.

 이후부터는 세봉임도(細鳳林道)를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모래재휴게소의 반대방향인데, 입봉(638.7m)을 거쳐 연석산(928.2m)로 넘어가는 금남정맥의 8부쯤 되는 산허리를 따라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백나무로 옷을 갈아입은 산자락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봉암리 산골짜기(kakaomap 봉호재골 연애골로 적고 있었다) 써미트 골프장이 들어서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퍼팅그린이나 페어웨이, 인공호수 등 골프장에서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작용해주기 때문이다.

 임도는 골프장의 바로 위를 지나기도 한다. ‘굿 샷’, ‘나이스 버디 등 서로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골퍼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도중에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1 : 부귀면사무소 7.6km, #2 : 부귀면사무소 6.3km)를 두 번이나 만날 정도로 임도는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가 주화산보다도 높은 입봉(立峰, 638.7m) 9부 능선을 넘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2 : 23 - 12 : 32. 진안군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2 : 39. 임도가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저 벤치는 미리 체력을 보충해놓은 다음 산길을 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오르막길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12 : 41. 잠시지만 입봉에서 봉암리로 뻗어나가는 능선(이정표 : 부귀면사무소 5.1km/ 장승삼거리 10.7km)을 타기도 한다. 아니 능선(해발 583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길이 나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다.

 12 : 58. 두충나무재배지와 산죽군락을 연이어 지나 농로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부천마을(봉암리)’로 향한다. 이렇듯 고원길은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들을 지난다. 덕분에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놓쳐버린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13 : 02. 마을 안길을 지나는데 정자(富泉亭)가 이 마을의 유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부천(富泉)’. 물이 넉넉하니 농사가 잘 되었을 게고, 주민들의 삶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은 내()가 없어 샘()을 썼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갈음해버린다. 마을의 유래라도 건져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소규모 주택단지도 눈길을 끈다. 하나의 대지에 세 가구가 들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은 이제 들길을 탄다. 굽이마다 마을과 자연이 반겨주는 길이다.

 이때 보령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가던 26번 국도가 지금은 4차선으로 변해 저 고개를 넘는다. 1997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개통됐다.

 13 : 20. 부천마을에서 출발한 들길은 10분쯤 지나 2차선의 부귀로를 만난 다음 원봉암(元鳳岩)’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 4개 행정부락(원봉암·소태정·부천·미곡) 중 하나로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있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7km/ 장승삼거리 13.1km) 신촌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원봉암이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13 : 27. 도로(부귀로)를 따라가다 만난 봉암교’.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2km/ 장승삼거리 13.6km)가 다리를 건너지 말란다. 보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피해 정자천의 둑길을 따르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자연과 함께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게 특징이다.

 이후부터는 정자천(程子川)을 따라 내려간다. 운장산 골짜기(부귀면 궁항리)에서 발원하여 거석리와 정천면 월평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드는 길이 20km의 하천으로, ‘정자란 지명은 하천 주변에 정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이웃한 주천면과 용담면 지역에 주자천(朱子川)’이 흐르므로 이에 견주어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에 맞추어 이름을 고친 듯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자천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는 용담댐에 수몰되어버린 하류의 얘기고, 상류는 충적지를 만들면서 생긴 곡선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 충적지를 지나다 만난 요런 길이라도 볼거리로 꼽으면 몰라도...

 13 : 40. 26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에서 바깥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다.

 굴다리 근처 부귀교차로에서 잠시 49번 지방도(귀상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부귀로로 다시 내려선다.

 13 : 44. ‘오산교로 정자천을 건너면 이번에는 사인암 마을이 맞는다. 법정 동리인 거석리(巨石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상거석·신거석·사인암·하거석·금평·금계곡) 중 하나로 사인암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사자 형국이고 큰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그러다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었다며 요즘은 사인암(舍人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하지만 마을 정자는 아직도 사인암(獅仁岩)이란 지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새롭게 단장된 신작로를 따라간다.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 50. 배구·족구·풋살 경기가 가능한 다목적구장이란다. 우천 시에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육상 트랙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목적구장 옆에는 충혼탑이 있었다. 안내판은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을 지키다가 숨진 주민자치대 및 의용경찰대원들의 거룩한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9.28 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공산당이 운장산 일대로 몰려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만행을 일삼자, 이들이 목숨 받쳐 이 지역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6구간이 끝나는 신거석 마을로 간다. 거석리의 중심 마을이자, 부귀면 소재지로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 부귀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이 무슨 생소한 풍경이란 말인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가 버젓이, 그것도 대로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친일잔재라 할 수 있는 윤치호 시혜 불망비 윤치호 흥학 불망비 시혜불망비는 부귀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소작료를 경감해 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29년 소작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흥학불망비는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부귀면 초대 면장이 건립했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인공동회 등 애국 계몽활동을 지도하고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不忘)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빗돌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행적을 밝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를 삼기 위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4 : 03. 부귀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은 12.22km를 찍는다. 코스의 절반 정도가 500m 안팎의 능선과 임도를 오르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눈에 익은 진안고원길 특유의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7구간(황금폭포 하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서해랑길 47코스(격포항  변산해수욕장)

 

여 행 일 : ‘24. 3. 9()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원

여행코스 : 격포항(금정모텔 앞)채석강격포해수욕장수성당적벽강하섬전망대성천항고사포해수욕장송포항변산해수욕장 사랑의 낙조공원’(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5.64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7코스를 걷는다. 10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질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변산마실길(2·3코스)과 겹친다고 해서 마실길 위의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불린다.

 

 들머리는 격포항(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내려오다 종암교차로(변산면 마포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격포로로 들어오면 잠시 후 격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부안47코스) 안내도는 닭이봉전망대의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다.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네 번째 여정. 서해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간다. 길이는 13.9km,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쉽다고 볼 수는 없다. 난이도가 별이 3(5개 중)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다.

 10 : 41. 탐방로는 2차선 도로인 방파제길을 따라 북쪽으로 간다. 전망대가 있는 닭이봉(鷄峰. 85m)’을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인 격포항 쪽을 선택했다. 물 때(썰물)가 맞은 덕분에 세계적 지질명소인 채석강을 둘러볼 수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10 : 44. 채석강으로 가는 길. 왼쪽은 격포항이다. 격포(格浦)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다. 조선시대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으로 개발되어 있어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서 자그마한 공원을 만난다. ‘채석강 갤러리라는데, 부안군에서 석재로 만든 각종 조형물들로 예쁘게 꾸며놓았다.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에 채석강과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격포항 종합안내 변산팔경 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 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10 : 47.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彩石江)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중생대 백악기(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참고로 원래의 채석강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해식동굴은 인생샷을 건져보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바다 쪽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서 눈길을 끈다. 해식절벽이 저런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는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11 : 02.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1.5km쯤 되는 암반지대를 진행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난 오른편 나무계단으로 오른다. ‘서해랑길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11 : 06. 호텔과 음식점들이 들어서있는 골목을 지나 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해수욕보다는 오히려 채석강과 서해안의 일몰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인데, 500m 길이의 백사장이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으며, 경사가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딱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 호텔, 리조트, 펜션, 캠핑장, 음식점, 카페, 수산시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 없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늘이 편치 않은 빈약한 배후 숲은 단점이라 하겠다.

 11 : 09. 백사장을 지나 반대편 갯바위에 오르면 인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노을공주로 불리는 인어인데 걸쭉한 얼굴이 공주보다는 왕비에 가깝다. 이 인어상은 31년 전, 격포 앞바다의 대 참사(292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를 겪은 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나? 하나 더. 이 인어상은 격포 앞바다의 석양이 진홍빛으로 물들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도 갖고 있단다.

 그 위에는 해넘이 채화대가 있다. 1999 12 31, 새천년을 맞이하는 국가행사를 하면서 마지막 햇빛으로 해넘이 성화에 불을 붙였다는 곳이다. 이 성화는 다음 날 일출 행사에서 얻은 성화와 합쳐진 뒤 새천년 영원의 불 보관함에 간직되어오고 있으며, 각종 대회의 성화에 불씨로 제공되고 있단다. 참고로 영원의 불 보관함은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옆에 있다.

 바다 건너에는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蝟島)’가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풍경 등 천혜의 경관을 갖고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 홍길동전에서 꿈꾼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다. 그 앞에 떠있는 꼬맹이 섬 임수도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몸을 던진 임당수로 구전되는 곳이다.

 11 : 16. 채화대에서 빠져나와 ‘SONO Belle Hotel & Resort’ 옆으로 난 소로를 따르면 2차선 도로인 변산해변로(이하 변산 해안도로’)’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간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11 : 21. 400m쯤 걸었을까 이정표(종점 12.1km/ 시점 1.8km)가 수성당까지 0.6km가 남았다며 왼쪽으로 난 소로(죽막길)로 들어가란다.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의 정문 앞 삼거리이다.

 11 : 25. 조금 더 걸으면 서해생명자원센터(한국수산자원공단)에 이어 죽막마을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마을 앞 개천가를 따라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에서 만난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해안가 200m의 지정구역 안에 132그루가 자란다)’. 안내판은 이 숲이 천연기념물(123)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이 후박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서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나? 그나저나 후박(厚朴)하다는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이름대로 후박나무는 후박한 나무이다. 약재, 목재, 염색재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다 내준다.

 후박나무군락지 옆 너른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뭔가를 심으려는 듯 밭갈이를 해놓았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식재한다고 했으니 유채 씨라도 뿌리려나 보다.

 11 : 29. 공터를 가로지르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58호인 수성당이다. ‘죽막동 유적이라는 이름의 사적(541)으로도 보호받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

 수성당(水聖堂)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으로 조선 순조 1(1801)에 처음 세웠다. 지금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로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도 한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한다는 바다의 신이다. 때문에 이 지역 어민들은 개양할미를 정성껏 모셔왔다. 요즘도 정월 열나흘 날에 계양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수성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공동제사이다.

 수성당 앞에서의 조망. 아까 채화대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일몰도 변산팔경의 으뜸인 격포낙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조선의 빼어난 풍광 10경으로 뽑은 그 변산 낙조말이다.

 수성당을 나오면 산책로는 시누대 숲길로 이어진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란 시누대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그 숲속으로 터널형의 산책로가 굽이굽이 휘돌아가며 나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죤까지 만들어놓았다. 온 서해가 다 보일 정도로 막힘이 없는데, 이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으라는 듯 액자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11 : 39. 시누대 숲을 빠져나오면 길은 적벽강(赤壁江)’으로 이어진다. 채석강과 더불어 국가 명승(13)’으로 지정된 곳이다. 용두산(龍頭山)을 에도는 2km의 해안선을 따라 펼치는 붉은 절벽은 채석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더했다고나 할까? 참고로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가서 빈한한 삶을 살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붉은 색을 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니 적벽강의 백미는 석양 무렵이라고 했다. 바위 단애가 진홍색으로 물들며 장관을 이룬단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 해안의 자갈 구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귓가를 때린다. 달빛에 술상을 마주한 소동파가 읊조리는 싯구라도 되는 양...

백악기 후기, 거대한 호수 아래 퇴적된 격포리층이 지질운동으로 솟아올랐다 침식되면서 적벽강이 만들어졌단다.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경계 부분에 성질이 다른 두 암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페퍼라이트는 적벽강을 대표하는 지질구조이다.

 글자 조형물은 우리가 변산 마실길 3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적벽강 노을길로 포장된 3코스는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의 구간으로 변산마실길의 백미다. 길은 줄곧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데 변산반도의 명소인 적벽강과 채석강, 그리고 바닷길이 드러나는 하섬과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지를 품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을 걷다가 만나는 노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알려진다.

 11 : 42. 서해랑길은 적벽강의 해식 단애 위를 따라간다.

 덕분에 적벽강의 빼어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변산의 해안은 모래와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멋들어진 기암들이 수문장처럼 바다와 뭍의 경계를 지킨다. 이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서쪽으로 향하다 순식간에 서해 바다로 몸을 숨긴 덕분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산줄기가 물속으로 잠수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하나 더. 사람들은 내륙의 산줄기를 내변산’, 해안을 외변산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아두자.

 11 : 46.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또 다른 적벽강 생태탐방로 입구.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와 함께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내판은 적벽강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다.

 안내판은 페퍼라이트, 주상절리, 단층, 돌개구멍 등 다양한 지질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려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4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 : 49. 적벽강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변산 해안도로를 만난다. 그리고는 꽤 오래 이 도로를 따라간다.

 변산해안로라는 이름대로 도로는 바닷가를 따라간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가 확 트인다. 이 무렵 나그네들은 하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12 : 09. 도로변에 있는 마실길의 반월안내소에 도착하면 회화나무 고목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은 ‘500여 년 전 부안 현청 동헌에 심어졌던 것으로 수령이 다하여 그 몸통을 수거·보관해오다 변산마실길 반월안내소를 개소하면서 수명을 다한 고목이지만 향토의 애환을 지켜온 수혼을 변산 마실길의 수호신으로 삼아 탐방객의 안녕을 빌고자 세워 두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 더. 안내소 옆에 변산 아으리랑 노래비와 하섬 부근에서 해양자원을 조사하다 숨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연구원들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도록 하자.

 12 : 15. 도로에서 내려와 오솔길(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5km)을 따른다. 이후부터 길은 변산 해안도로와 해안 숲길, 바닷길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하섬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도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TV만 켜면 방송은 온통 남녘의 꽃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 저 매화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바닷가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부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

 12 : 20. ‘변산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마실길 이정표 : 성천항까지 3.2km)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식탁용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드라이브 스루로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전망대에 서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이곳 부안에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수식어들이 참 많다. ‘변산삼락(邊山三樂)’도 그중 하나인데, ·풍경·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저런 풍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바닷가 오솔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산책로라기보다 등산로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47코스의 난이도가 별이 3개로 평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길은 시누대라고 하는 해장죽(海藏竹) 숲속을 헤집기도 한다. 터널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로 인생 사진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는 구간이다.

 바다로 눈을 돌리자 하섬이 부쩍 가까워졌다. 사당도와 석도, 비안도 등 주변의 섬들도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 더. 육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하섬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 썰물 때가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3일간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백합·꼬막 등 해산물을 줍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12 : 47. 산길 느낌의 탐방로를 따라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해안초소에 이른다. 변산반도의 해안을 지키던 옛 군사시설을 전망대 겸 쉼터로 바꾸어 놓았다. 쉼터는 꽃을 들고 프러포즈를 하는 남성의 조형물을 세워 가슴 설레는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탐방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그래선지 해안절벽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이 구간은 철조망에 걸린 팻말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유수불부(流水不腐)’ 같은 사자성어가 있는가 하면, 청춘이 기생을 안으면 천금이 건불이라는 유머 넘치는 글귀도 눈에 띈다.

 12 : 51.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작은 개울이라도 만날라치면 어김없이 다리를 놓았다. 이뿐 아니다. 작고 예쁜 해변은 나무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갈 수도 있도록 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하섬이 성큼 다가온다.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는 하섬은 새우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새우 하()를 썼다. 그러다 원불교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바다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꽃 하()’자로 바꿔 사용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눈에 들어오는 하섬은 여느 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하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전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옛날 옛적에 육지에서 노부모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와 부모님이 탄 고깃배가 하섬까지 떠내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용왕님께 빌고 빌어 용왕님이 바닷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교통호를 따르다보니 군의 옛 시설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군인들이 떠난 뒤, 초소와 녹슨 철조망만 남아있던 초병의 길 변산 마실길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12 : 58. 그렇게 시나브로 걷다보면 어느덧 하섬 전망대. ‘변산 해안도로의 도로변, 하섬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탐방로에는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을 세워 이곳이 변산 마실길임을 알린다.

 마실길 나그네들을 위한 전망대도 빼먹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망대를 탐방로에 걸쳐놓았다. 그나저나 산길을 걷다가 바다에 둘러싸인 하섬을 만나니 눈이 절로 시원해진다. 하지만 하섬은 눈으로 즐기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원불교 재단에서 사들여 해상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위한 원불교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단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뻗어나가는 오솔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저 능선을 넘으면 성천항으로 연결되는 산비탈이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은 한 명씩 차례로 줄을 서서 가야 할 만큼 비좁다.

 13 : 15. 길을 나선지 2시간 35. 변산마실길 2코스(적벽강 노을길)의 시점인 성천항에 도착했다. 포구의 초입, 유유동천(遊儒洞川)의 배수갑문 못미처 갈림길에 변산마실길 안내도와 이정표(송포항 5.0km/ 격포항 9.0km), 그리고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6km)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변산면 운산리에 위치한 성천항(成川港)’은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5개 지방어항(곰소항·궁항항·송포항·식도항·성천항) 중 하나다. 연근해 어업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질산어장에서 주로 전어와 갈치를 잡는다.

 성천항은 바다낚시의 명소인 듯. 동호인들이 버스까지 끌고 와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에 그려놓은 물고기가 나그네의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저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낚자마자 뼈만 남기고 회를 떠서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13 : 20. 포구의 모퉁이(이정표 : 종점까지 5.2km)를 돌아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이 길손을 맞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모래밭이 가장 길다는 해변으로,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른다고 한다. 잠시지만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물 빠진 변산의 해수욕장에 들어서면 신발은 벗어두자고.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종착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을 뿐...

 고사포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물이 깨끗하고 수온이 적당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근거리에 있는 하섬은 물론이고,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파도소리에 더해진 솔바람소리가 인상적인데, 그 숲속에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앞으로는 드넓은 서해바다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 좋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멋진 해변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아직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소나무 숲에는 꽤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다.

 13 : 39. 서해랑길은 해수욕장을 지나 맞은편 산자락(이정표 : 종점까지 3.7km)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병사들이 사용하던 교통호를 따른다.

 하섬이 바라보이는 갯바위에는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내려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니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13 : 44. 모퉁이를 돌아서자 수많은 펜션들이 잠시 쉬었다가란다. 운산교차로를 스치듯 지나면 서해랑길은 마리나, 헤이데이, 그랑메종, 보보스, 바라한 등 서구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펜션들로 가득한 저 마을을 관통한다.

 13 : 55. 펜션지구의 뒤 작은 고개를 넘자 양어장으로 여겨지는 시설이 나타났다. 하지만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경관 좋은 곳으로 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정자까지 지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가득했다.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아무렇게나 다듬어진, 태고의 신비스러운 흔적을 여기서도 본다. 역광으로 인해 어둑해진 풍광이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함께 걷던 80대 도반의 손가락 끝에는 거북바위가 걸려있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정자에 올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맞다. 한반도가 품은 작은 반도 변산은 서해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서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저런 명소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모실길 노선안내판이 우리가 지금 변산 마실길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를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구간은 철책 초소길을 따라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송포항에서 출발해 솔향기 가득한 숲길과 붉노랑상사화 군락지, 금빛모래의 고사포해수욕장을 거쳐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성천포구에 이르는 길이 4.8km의 코스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교통호를 따라간다. 바닷가 산비탈에 쳐놓은 녹슨 철조망도 함께 따라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벌거벗은 구릉지도 만난다. 그곳에는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마실길은 이렇듯 봄의 유채꽃에서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발하게 피어난다.

 14 : 14.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를 건넌다. 작지만 탄력이 있어 출렁거림이 남다른 곳이다.

 14 : 20. 시야가 툭 트이는 널따란 구릉지는 상사화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매년 늦여름(8월말부터 9월초) 샛노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순백의 위도상사화가 곱게 피어난단다. 때를 잘 맞추면 푸른 파도와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나?

 어떤 이는 이곳을 샤스타데이지 꽃밭으로 적고 있었다. 맞다. 봄에 이곳을 찾으면 상사화 대신 샤스타데이지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단다.

 붉노랑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잎은 꽃을,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꽃이다. 평소에는 연한 노란색이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곳에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해서 붉노랑상사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만개 때는 껑충한 연초롱 꽃대 끝에 왕관처럼 얹혀진 노랑 꽃술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조망도 좋다. 비안도와 두리도, 거기에 고군산군도의 수많은 섬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안은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선지 부안의 바닷가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할퀴어지고 뜯기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탐방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부리를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한적한 오솔길은 사색하기 딱 좋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는 맑아지고 맘속의 모난 돌도 둥글둥글 다듬어진다.

 14 : 25. 모퉁이를 돌아서자 반원형의 전망대가 잠시 들렀다가란다. 다리 모양의 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서자 변산해수욕장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나로서는 옛 추억을 소환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35년쯤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의 중반 무렵, 가족들과 함께 저곳에서 하계휴가를 보냈었다. 당시 아버지가 잡아온 바지락과 백합으로 술국을 끓였고, 그걸 반주삼아 마신 술로 나는 얼큰하게 취했었다. 그날 밤. 판소리랍시고 흥얼대는 내 술주정을 늦게까지 들어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바다 건너 저 멀리서는 새만금 방조제와 고군산군도가 자신도 한번 보아달란다.

 1960년대 전후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녹슨 철조망은 이제 소망의 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개껍데기나 판자에 나름대로의 소원을 적었는데, 남녀의 이름과 함께 하트() 표식을 넣은 게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안내판은 이 부근을 붉노랑상사화의 자생지라고 했다(9월 무렵)를 잘 맞추면 샛노랗게 핀 상사화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단다하지만 3월 초인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대신 복수초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있었다이른 봄소식은 복수초의 노란 꽃잎에서 온다고 했다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활짝 핀 복수초에서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14 : 31. 변산해수욕장의 남단과 맞닿아있는 송포항(松浦港), 부안군수가 관리하는 또 다른 지방어항이다. 이곳도 성천항처럼 칠산어장을 주요 어장으로 삼아 전어와 갈치 등을 잡는다. 참고로 송포(松浦)는 지지포라는 곳에서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14 : 36. 변산해수욕장은 송포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작된다.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변산해수욕장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대천·변산·만리포)’ 중 하나로, 희고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2km 길이의 사빈과 배후의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룬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해변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백사장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란다.

 탐방로는 해수욕장의 배후 솔숲으로 나있다. 변산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로 1933년에 개장했다. 배후 솔숲에 굵직한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탐방로에는 수많은 시판(詩板)이 늘어서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들인지 하나같이 부안의 산하를 노래하고 있다. 맞다. 이곳 부안은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던 명기 매창(梅窓)이 있었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서정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변산반도와 채석강 등 부안의 주옥같은 산하를 빼어난 문장으로 풀어냈었다.

 글자조형물은 파도를 담았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지역 예술가가 만든 조형물이란다. 제목은 꿈꾸는 물고기’. 변산과 관련된 주제인 물고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채로운 포토존과 조형물들이 해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안내책자나 kakaomap 47코스의 종점을 변산해수욕장의 버스정류장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47코스와 48코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헷갈려하는데 두루누비에서 다운받은 앱이 사랑의 낙조공원까지 조금 더 가라고 알려준다.

 14 : 52.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 이정표가 당신은 이미 48코스를 400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

 변산해수욕장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굳힌 사랑의 낙조공원은 꽤나 긴 계단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첫 만남인 전망대를 겸한 작은 광장에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며, 한 쌍의 하트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트는 반쪽만 만들어 놓았고, 비워진 반쪽은 탐방객들의 사랑 표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석양 무렵 이 조형물에 대칭으로 신체를 맞출 경우 인생사진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아래(다섯 번째)에 게재되어 있는 해넘이 안내판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로마의 명물인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을 닮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왔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난간에 서면 변산해수욕장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런데 생경스럽다는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맞다. ‘변산해수욕장이 서해라고 해서 갯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커먼 갯벌 대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이 들락거릴 때도 흙탕물 대신 쪽빛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공원에서 바라본 해수욕장의 배후 풍경. 변산해수욕장은 노을이 머무는 사계절 관광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시작으로 전기시설이 가능한 야영장(80), 스토리센터, 노을바라기(전망대), 비치가든(물놀이장), 노을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놓았다.

 하트 손이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가 손인데 사랑의 첫 단계가 손잡기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남자와 여자의 손으로 하트를 조각했단다. 사랑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니,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증사진 하나쯤 남겨보면 어떨까?

 사랑의 낙조공원 해넘이 안내판. 월별 해넘이 위치와 일자별 해넘이 시각을 담았다. 노을에 대해서는 최적의 뷰를 보여주는 곳이니 부안의 멋진 노을을 듬뿍 담아가라고 한다.

 15 : 02. 서해랑길 안내도(부안 48코스) 사랑의 낙조공원의 진입광장 남쪽 가장자리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5.64km를 찍고 있으니 상당히 더디게 걸은 셈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여행과 레포츠에 푹 빠져있는 나. 집사람은 그런 내가 좋다며 항상 함께 해준다. 이런 생활 패턴이 우리 부부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다. 미국 대중문화계의 스타이자 코미디의 전설로 불리는 조지 번스 10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 앨런과 함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