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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여행지 : 델피(Delphi) 유적

 

여행일 : ‘23. 3. 22()-29()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파르나소스 산(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유적.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신탁이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옴파로스(Omphals)’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였고 이후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신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자를 보냈고, 델피는 상업·무역이 매우 활발한 곳이 되었다. 하나 더, 이 성역은 기원전 586년부터 4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4년마다 열리기도 했다. 경기의 승자는, 템피 계곡의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아테네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델피에 도착했다. 유적지 앞에 들어선 마을부터 들른 이유이다. ! 델피로 오는 도중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를 스치듯 지나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린 송중기와 송혜교가 키스를 하던 종탑을 곁눈질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델피는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에 들른다. 델피와 테르모필레를 둘러본 다음 메테오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델피마을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협곡을 낀 드넓은 저 평원은 옛날 아폴론의 신성한 땅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에서 길처럼 나타나는 부분은 프레이스토스 강이란다.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하얗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단다.

 투어는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도시 델피’, 그런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개방시간 : 08:30-15:30)

 델피성역의 추정 조감도. 입구라 할 수 있는 로만 아고라를 시작으로 리산데르의 기념물, 트로이 목마,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아르카디아 기념물, 헬레니스틱 스토아,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물창고,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보물창고, 코린토스 보물창고, 낙소스 스핑크스, 다각형 옹벽, 아테네 스토아,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로도스의 전차, 아폴론 신전제단,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아폴론 신전, 극장, 서쪽 스토아가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에는 없지만 맨 위에 경기장인 스타디온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델파이의 무덤(the cemeteries of Delphi)’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 위에 놓인 석관(石棺)을 이르는 모양이다.

 델피 유적은 땅속에 묻혀있던 옛 도시를 발굴해 놓은 현장이다. 그러니 유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있을 건 당연. 참고로 델피는 신탁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변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성한 인보동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390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면서 델피라 명명했다.

 첫 만남은 로만 아고라(Roman agora)’. 전형적인 스토아 형식으로, 성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의 담벼락에 바싹 붙어있다. 로마시대 상업과 만남의 장소였고 신전에 바칠 제물 등을 팔던 시장터이다.

 아고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토의와 그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도시의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늘 아고라에 모여 정치나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고라가 민주주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장소였다는 얘기다. 여자와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돌기둥을 받히던 기단. 그런데 중앙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곳 그리스는 지진이 빈번한 나라, 그러니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저 구멍에 꽂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신성한 길(sacred way)’을 따른다. 델피 성역의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좌우에는 각양각색의 보물창고와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보물창고는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두던 금고다. 각지에서 모인 도시국가들은 신탁을 먼저 받기 위해, 신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보물 창고(Treasury)를 지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델포이 박물관에 있다.

 시키니온과 시프니안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sikyonians and siphnians)’라고 한다.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산토리니가 속한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나라 시프노스(Siphnos)에서도 자신들의 번영을 유지할 방도를 구하며 봉헌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그 신탁을 잘못 해석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지만... 하나 더, 시키온은 코린토스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다.

 아르고스왕의 엑세드라(Exedra of the Kings of Argos). 아르고스(Argos)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와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왕이나 고위직 관료가 델피를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는 엑세드라(Exedra, 반원형의 휴식 공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보이오티아인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the Boeotians). 보이오티아(Boeotia)는 코린토스 만에 접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였던 테베의 보물창고를 따로 지어놓은 이유는 뭘까?

 메가라 코린토스 등 다른 도시국가의 보물창고도 여럿 눈에 띈다. 하긴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을 받고자 하는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다니 어련하겠는가. 심지어는 신탁을 받으려고 델피에서 1년 넘게 머물기도 했단다.

 문자로 가득한 축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역사는 저런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줄 안에 모셔진 저 돌은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한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리스인들은 신체의 중앙을 배꼽으로 보듯 이곳을 땅의 중심으로 보고,  배꼽 돌을 놓아두었다고 한다(저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고고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계의 중심을 향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를 날려 보냈더니, 두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서로 만나더란다. 그 장소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옴파로스.

 아테네의 보고는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서있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아폴론에게 바친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寶庫), 2개의 도리아 양식 기둥이 받드는 매우 단출한 건물 형태를 보인다. 건물의 메토프에는 신화 속 영웅들의 무용담도 부조되어 있다. 1904-1906년 아테네 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완벽하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단다.

 아테네 보고의 맞은 편 언덕에 자리한 가이아 여신의 성소는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왕뱀 피톤이 신탁을 내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놓인 회색 바위는 당시 델피의 여사제 시빌레가 그 위에서 신탁을 내렸다고 해서 시빌레 바위라고 불린다.(사진은 내가 찍은 게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아테네인의 열주랑(Stoa of Athenians :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축하하고 아폴론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 뒤에 있는 아폴론신전의 다각형 돌 축대(Polygonal wall)’. 쌓아올린 다각형 바위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 접촉면이 많은데다 틈새까지 보이지 않아 페루 여행 때 쿠스코에서 신기해했던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을 떠올렸을 정도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건물의 용도는 대체 뭘까?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보니 ‘Do not touch please’란다.

 아폴론 신전으로 오르는 길, 길가에 늘어서 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기단부만 남아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을 경우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라고나 할까?’

 신성한 길(sacred way)’은 델피 유적의 구심점인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으로 인도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곳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졌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원래의 신전은 길이 60m에 폭이 23m이었다.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는데, 현재는 암갈색 돌기둥 6개와 여기저기 깨진 제단만 어지럽게 남아있어 얼핏 폐허처럼 보인다.

 현재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건축구조였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아버지인 제우스는 쌍둥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지 나흘이 지나자, 제우스는 그에게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주며, 피톤(델포이)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헤라의 명령으로 어머니 레토가 임신한 동안, 이들을 줄곧 괴롭혔던 큰 뱀 피톤을 아폴론은 화살로 쏘아 퇴치했다. 이후 아폴론은 피톤이 지키던 가이아의 신전을 차지하고, 지명도 피톤에서 델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델포이의 신전은 아폴론의 신전으로 바뀌고, 신전의 피티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리게 하였다. 그 후로 인간은 가이아의 뜻이 아닌, 제우스의 뜻을 알리는 아폴론의 신탁에 의하여 미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조)

 아폴론 신전의 맞은편, 안내판은 ‘The altar of Chiots area’로 적고 있었다. ‘치오츠 제단 지역이라는데, ‘Chiots’는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지역에는 치오츠 제단(The altar of Chiots)’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The tripod of the Plataeans)’,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동상의 받침대(he pedestal of the statue of Aemilius Paulus)’. 그리고 아탈로스 1세의 스토아(The stoa of King Attalus)’를 포함한다고 했다.

 플라타이아인의 삼각대는 저 청동 기둥을 말하는가 보다.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청동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승리의 기념비이다. 원래 빙빙 꼬여 올라가는 3마리 뱀의 머리위에 피티아의 상징인 삼발이 솥을 올려놓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청동 기둥만 남았다(머리 부분은 1204년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에 의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단다). 아무튼 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약탈당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히포드럼 광장)에 세워졌다. 따라서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고 이곳 델포이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동상(The statue of Aemilius Paulus)’은 받침대(pedestal)만 남아있었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장군이 피드나 전투(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파한 승전기념비로, 전투장면을 부조(상단에) 4각의 빗돌 위에 동상을 올려놓은 형태였으나. 이 또한 동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폴론 신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극장(Tea Theatre)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2,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극장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개축된 것이다. 비교적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연극이나 콘서트가 공연되기도 한단다. 하나 더, 관람석 위로 오르면 델피 유적지뿐 아니라 광활한 올리브 숲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극장의 뒤로도 길이 널찍하니 나있었다. 방향표시석은 이 길을 따르면 ‘Stadium’에 이르게 됨을 알려준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쫓겨 달리듯이 다녀올 수밖에 없었지만...

 원형극장의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델피는 산 사면을 깎아 도시를 건설했다. 제일 위에 원형경기장, 그 밑에 원형극장, 그 밑에 신전, 그리고 가장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들어앉혔다.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신전과 극장, 원형경기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고 한다. 신전은 신과 통하는 장소였고, 극장은 연극이나 노래 등 예술을 통해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하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숨이 턱에 찰 즈음 도착한 꼭대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경기장인 스타디온(Stadion)’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된 경기장은 길이 178m에 폭이 26m, 수용 인원이 6,000명인데,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이 이곳에서 열렸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재건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고,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가 되었다.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다. 하나 더, 이 제전의 특징은 다른 제전과는 달리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들른 건 고고학박물관(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로 아폴론의 성역과 마르마리아에서 발굴된 조각품, 봉납물, 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탁을 행할 때 무녀가 앉는 자리로 썼다는 삼발 솥단지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피티아라 불리던 무녀는 신경이 약간 마비된 상태에서 유황 성분의 연기(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함유된 가스)까지 맡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신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아폴론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고 한다. 절차를 거쳐 받아간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신탁을 받아간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라나?

 낙소스의 스핑크스’. 기원전 6세기에 만든 12m 높이의 원주(圓柱) 위에 얹혀 있던 조각상으로, 에게 해의 섬 낙소스 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단다. 이밖에도 아폴론 성역의 보물창고들 외부에는 많은 조각상들이 건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시국가 아르고스에서 봉헌했다는 쌍둥이 형제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효자 아들들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신에게 빌었더니 둘이 함께 죽어 신의 곁으로 가더란다. 당시는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자신 곁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나? 그러니 아르카익 시대(BC8~5C)에 만들었다는 조각상이 웃을 수밖에...

 벽에는 황금머리 황소(The Silver Statue of a Bull)’가 걸려있었다. 기원전 6세기(아르카이크 시대) 이오니아에서 만든 작품으로 은박을 입힌 구리판 세 조각을 연결해 제작했다. 참고로 황소는 현신한 제우스를 상징한단다.

 아폴론과 그의 자매 아르테미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신상이라고 한다. 금과 상아로 아름답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이름났던 크로이소스 왕이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들이 치장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관과 귀거리, 팔찌 등 황금으로 만든 치장물들을 함께 전시해 화려함을 잔뜩 자랑하고 있었다.

 대접처럼 생긴 저 도자기에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추구하던 비례·대칭의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헌주를 쏟고 있는 아폴론을 묘사한 단순한 그림에 아폴론을 상징하는 까마귀와의 이야기, 적색기법의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추가된 흰색과 1.618의 황금 비율이 가미되어 있단다.

 소크라테스로 여겨지는 조각상도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기른 석상은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댄서의 원주(The Column of the Dancers)’라는 작품이다. 아칸서스(Acanthus) 잎 조각 위로 아름다운 세 여인이 머리에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를 이고 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 앞에 따로 놓아둔 돌(옴파로스)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안티노우스(Antinoos)’로 적고 있었다. 로마의 다섯 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다. 황제를 수행하여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가 로마에 공헌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의 조각상을 델포이 성역에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델피 박물관의 유물 중 최고로 꼽히는 이니오호스(전차를 모는 전사) 청동상이라고 한다. BC373년 지진 때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상으로는 드물게 오닉스(줄무늬가 있는 대리석)로 된 눈까지 남아있다. BC478 혹은 474년에 있었던 피티안 경기의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시실리의 군주 폴리잘로스에 의해 델피에 헌납된 것으로, 옷이 날리지 않게 잡아매어 놓는다거나 굳게 다문 입술, 고삐를 잡은 팔에 보이는 힘줄 등 전차경기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기원전으로 시대를 돌리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도중 테르모필레(Thermophylae)’에 들렀다. ‘테르모 뜨거운’, 그리고 필레 입구라는 뜻으로 이 지역의 유황온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래선지 여행사는 이곳 노천온천에서의 족욕(足浴)을 그리스 여행 최고의 보너스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우리네 동네 뒷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개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장실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물은 따뜻한데다 유황냄새까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임은 분명하다. 물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폭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런 명당자리가 비어있을 리는 만무, 먼저 온 유럽의 젊은이들이 삼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로 선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 보다는 오가는 외국 나그네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편이란다.

 그런 외설스러움이 익숙하지 않는 우리네 아낙네들은 하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좋다면서 희희낙락 했지만... 하나 더, 아낙네들은 족탕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며 이끼를 떼서 몸에 바르는 그리스의 민간요법을 귀띔조차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 노천 온천탕에서 자유롭게 온천욕을 한다. 온도가 40도쯤 되는 해수 온천이라는데, 기록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저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에 지쳐가던 집사람이 손까지 흔들어가며 활기찬 반응을 보인다.

 온천 지역에는 스파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인지 운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난민 캠프로 이용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는 그리스 북부에서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3차 페르시아전쟁 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 벌어진 전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전적지에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이 적군을 향해 포효하는가 하면, 그 아래 기단에서는 300명의 스파르타 특공대가 용전분투하고 있다. 좌우로 보이는 조형물은 스파르타의 전사 상이지 싶다.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특공대는 이곳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적군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파르타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페르시아군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전투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고, 스파르타 군에게는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은 승리를 거둔 것 이상>임을 상징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난다.

 3차 페르시아전쟁 당시 이곳은 서쪽에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있었고 동쪽은 바다였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은 이곳에서 페르시아군(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적는다)을 막았다. 그런 불리함속에서도 첫날과 둘째 날의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중 배신자가 나타나면서 페르시아의 정예부대 1만이 샛길(산을 넘는)로 쳐들어왔고,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특공대 300명은 남아서 협로를 지키고 나머지 그리스군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시킨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특공대는 모두 죽는다. 그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 ‘300’으로 만들어졌고, 그들의 무용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델피에는 아폴론 성역만 있는 게 아니다. 피티아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던 김나시온(Gymnasion)’과 아테나 여신을 모시던 아테나 프로나이아(Athena Pronaia, 델피의 주신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신전이라는 의미)’인데, 아폴론 성역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난 탐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으로는 아폴론성역(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은 달리듯이 다녀왔는데도)과 고고학박물관을 둘러보기에도 빠듯했으니 어쩌겠는가. 평생 한번 다녀오기도 힘든 그리스인데,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돌아서며 아쉬움 넘치는 원망을 여행사로 돌리며 델피를 떠난다.

진안고원길 4구간(섬진강 물길)

 

여행일 : ‘24. 2.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성수면사무소반용재반용마을포동마을성수체련공원양화마을오암마을(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98k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성수면사무소(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오다 병암삼거리(관촌면 덕천리)’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뜨락에 세워져 있다.

 이름(섬진강 물길)처럼 섬진강의 물길을 눈요깃거리 삼아 걷는 12.4km짜리 구간. 초반의 반용재와 중반의 가장골을 빼면 섬진강 본류와 지류(달길천)를 따라 걷게 된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의 길이가 짧지만 반용재의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 : 23. 남서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관촌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관진로)이다.

 10 : 24. 80m쯤 걷다 성수파출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농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반용재골로 들어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섬진강변의 용포리 주민들이 성수면소재지인 외궁리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렇다고 왕래가 잦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용포리가 성수면보다 강 건너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용재로 올라가는 길. 용포리(반용·포동·산막)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 고원길을 내면서 골짜기를 에돌아 올라가는 숲길을 조성했다. 가파른 구간에는 통나무계단도 깔았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팔라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런 오르막이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10 : 36. 트레킹을 시작한지 14. 군도 1호선(가외반로)으로 올라선다. 핸드폰의 앱이 해발 335m를 찍고 있으니 10분여 동안 고도(高度) 75m나 높인 셈이다. 참고로 이 도로(郡道)는 반용마을과 포동마을을 거쳐 745번 지방도(관마로)로 연결된다.

 이정표(오암 12.0km/ 성수면사무소 0.8km)는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겹치게 사진을 찍어두도록 하자.

 이후 고원길은 도로를 따라 반용재(해발 348m)’를 넘는다. 성수면 외궁리(안평마을)와 용포리(반용마을)를 잇는 거리 1.2km, 높이 348m의 고개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동서로 가르는데, 북쪽에는 성수면의 이름 유래가 된 성수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병풍바위를 지나 방미산에 이른다.

 반용재의 왼편(서쪽) 바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세월은 결혼 상대마저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라때 시절. 배우자감은 이웃마을 처자 말고는 없었다. 그게 글로벌 시대를 맞아 동남아 여성으로 폭을 넓혔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북한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구간도 역시 산자락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 차 있었다. 오뉴월에 찾아와야 제격이겠다는 얘기다.

 10 : 43.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600m쯤 걷다보면 이정표가 이제 그만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진안고원 길의 참맛을 다시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고원길 이정표는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구간 정보(오압 11.4km/ 성수면사무소 1.4km)를 기본에 깔고, 근처 주요 포인트에 대한 정보(포동마을 2.5km/ 원외궁마을 2.3km)를 보탰다. ‘야생동물 주의 안내는 팁이다.

▼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가장자리 잡목을 깔끔이 제거해 임도처럼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잘 지어진 고택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뜨락도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반용마을은 성수산을 병풍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섬진강까지 앞마당에 두었다. 그러니 돈 많은 이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10 : 51. 몇 걸음 더 걸어 도로(가외반로)로 올라선다. 고원길의 뭉툭한 방향표지판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30m만 가면 반용교(고원길이 지난다)’가 나오는데 굳이 600m나 에돌아갈 필요가 없다면서.

 10 : 53. 도로를 따라 150m쯤 올라가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반용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용포리(龍浦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반용·포동·송촌) 중 하나로 진안군과 임실군 사이의 협곡에 기다란 형태로 놓여있다. 성수산을 베개 삼고, 섬돌 아래 섬진강을 둔 지형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예쁜 돌담길을 낀 고샅길이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떨지는 말자.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런 길을 열어주었고, 우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소음까지 발생시켜서야 되겠는가.

 소박한 골목길은 강변으로 이어진다. 강변으로 나오니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볼 법한 예쁜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까 봤던 한옥이 양반집이었다면 소슬지붕까지 얹은 이건 사대부 가문에서나 지을 법한 형식이다.

 강변의 정자(盤龍亭)’. 주위를 야외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빗돌까지 세워가며 자랑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요 장승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무튼 반용마을은 귀농귀촌 우수마을이라고 했다. 배산임수의 수려한 경관에다 마을을 가꾸려는 노력들이 더해져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합이 높아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태우기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강변의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 저곳에는 사람만 건너다니던 낮은 다리(잠수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 느티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게고. 하지만 2000년 새 다리가 놓이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한때 나룻배(1970년대 잠수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까지 놓아두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1 : 00. 마을을 빠져나와 반용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마을을 에둘러오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섬진강을 품은 반용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임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주민들 간의 정 또한 돈독한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반용교 아래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반용마을 앞 강물은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하나 더. 저 보를 지난 섬진강 물길은 90도로 방향을 튼다. 앙칼진 산릉이 섬진강을 남쪽에서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 안내판은 반용(盤龍)’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풍수상 마을이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낙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초중반사란 야초·인삼·약초가 우거진 속에 뱀이 소반처럼 사리고 있는 형국을 이른다나? 초중반사의 명당에 뱀이 사리고 있으면 반룡(蟠龍)’이 된다. 이게 언제부턴가 반룡(盤龍)으로 변했나보다. ! 그 옆에는 섬진강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 두었다.

 11 : 05. ‘명산휴게실을 지나자마자 지방도를 벗어나 강변 둑길로 내려선다.

 고원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서는 감입곡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나그네와 함께 간다. ‘섬진강 물길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데미샘을 출발한 물줄기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수량을 늘린다. 백운면을 적시며 흐르던 강물은 마령면과 성수면을 지날 때까지 섬진강 최상류를 이룬다. 그러다 진안군 남부지역 산골오지를 지나 임실 땅으로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강의 면모를 갖춘다.

 ! 봄이닷! 봄이 유독 늦게 찾아온다는 진안 땅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본 푸른 초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요 며칠, 언론은 남녘의 꽃소식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포동마을로 가는 강변길 안쪽에는 경작을 기다리는 논이 자리한다. 그 속에 임마누엘 냉천수양관이 있다. 노인복지센터와 요양원까지 갖춘 큼지막한 시설이지만, 수양관 근처로 도로가 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를 사는가 하면, 선교비 마련을 위해 하느님이 장사를 시켰다는 등 받아들이기가 썩 편지 않는 종교시설이다.

 강 건너 비탈진 산자락에도 민가가 들어섰다. 맞다. 사람들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게 한집 또 한집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렇게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강가 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11 : 24. 그렇게 걷다보면 포동2에 이른다. 메인 도로나 마을을 잇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산자락에 만들어놓은 다랑이 논·밭에 일하러 다닐 때나 이용하는 것 같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파른 절벽과 평평한 농경지가 대조를 이룬다. 강변 둑길은 계속해서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큰 원을 그리면서 포동교로 간다. 참고로 포동교는 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회초천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있다. 회초천을 보탠 섬진강은 포동교 아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고원길 이정표(오암 8.3km/ 성수면사무소 4.5km)은 이제 그만 섬진강과 헤어지란다. 그러면서 포동마을로 인도한다. 동북쪽 좌포리에서 흘러온 섬진강은 반룡마을 앞에서 동쪽으로 휘감아 돌면서 꽤 넓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냈다. 포동마을은 그 들판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11 : 27. 250m쯤 더 걸어 군도(1호선, 용포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포동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참고로 이 길은 745번 지방도를 만난 다음 관촌면(임실군)으로 간다. 관촌(館村)’은 삼례·전주를 지나온 통영대로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으로 출장관원 등이 묵을 수 있는 관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 : 29. 잠시 후 도착한 포동마을(이정표 : 오암 7.7km/ 성수면사무소 5.1km)’. 용포리(龍浦里)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큰 물가에 위치한 탓에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녀야만 했던 오지이다. 그래서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포동(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그런 사연을 적었다.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데다 강과 산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단다. 반면에 강변으로 이어진 임실군 관촌면은 다니기가 수월했다나? 그래서 주민들은 학교도 관촌으로 갔고, 시장을 보기위해서도 관촌으로 갔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관촌이 생활권인 셈이다.

 마을회관 앞 광장. 포동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큼지막했다. 맞다. 포동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근처 유물산포지에서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발굴된바 있다.

 정자는 풍류정(風遊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섬진강변에서 풍치 있고 멋스럽게 놀아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난 이곳에서 15분을 머물다 갔다. 산악회 회장님의 실수로 버스에서 잘못 내려, 아직까지도 길을 헤매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마을에는 카페와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샤워장까지 갖춘 물놀이장도 보인다. 맞다. 이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이라고 했다. ‘바람도 쉬어간다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그러니 저 정도의 부대시설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의 시가 적힌 카페 외벽이 눈길을 끈다. <바람 따라 돌고 돌아 한참을 돌다가/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봄이면 강에는 물안개 피고... -이하 생략-> 읽는 것만으로도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멋진 표현력이다.

 고원길은 고샅길을 누비다가 마을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아까 반용마을에서도 얘기했듯이 주민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이 뭣꼬? ‘기러기 조형물을 문설주에 매달아놓았다.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짝짓기를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 인형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로보아 기러기가 쌍으로 걸린 저 집은 부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기러기가 걸린 옆집에서는 홀아비나 홀어미가 살고 있을 것이고...

 11 : 51. 마을 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로 올라가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주민이 오른쪽으로 나있는 샛길(비닐하우스를 오른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로 가라고 알려주신다. 길이 나뉘는 지점이지만 방향표지판이 없기에 응당 직진이겠거니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11 : 52. 몇 걸음 더 걸어 농로(용포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길가 사과나무는 가지치기를 이미 끝냈다. 맞다. 이틀 후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11 : 59. 잠시 후 만난 삼거리(이정표 : 오암 7.1km/ 성수면사무소 5.7km). 성벽이라도 되는 양 곤포사일리지가 앞을 턱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가란다.

 12 : 03.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기장골에 있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때 진안고원 길의 참모습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둥글고 한가로운 길, 그래서 고원길에서는 경쟁이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기장골 이정표(오암 6.6km/ 성수면사무소 6.2km)는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임도는 기장골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을 한다. 이때 잘 생긴 노송 한 그루가 힘내라며 격려의 손짓을 보내온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를 외치며...

 고개 너머. 고원길 이정표가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지름길이라며 오른쪽으로 간다. 다른 둘레길 도반들도 오른쪽으로 갔다면서 말이다. 고랭지채소밭의 밭두렁 끝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밭두렁 끝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가시나무 넝쿨이 우거진 원시림을 헤쳐 나가며 찔리고 할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원길은 이제 침목계단이 깔린 숲길을 따라 또 다른 임도로 간다.

 12 : 13. 임도를 따라 이번에는 이차선 도로인 용포로를 만나러 간다.

 12 : 20. ‘용포로(이정표 : 오암 5.6km/ 성수면사무소 7.2km)’로 내려선 다음 도로를 따라 북진한다. 이 길은 양산교차로에서 745번 지방도(관마로)와 만난다. 참고로 용포로 745번 지방도 포동교차로(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포동마을과 반용마을(강 건너)을 거친 다음 양산교차로(성수면 좌포리)에서 745번 지방도와 다시 만나는 2차선 도로이다.

 건너편에는 성수산(492.5m)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과 용포로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다시 만난 섬진강은 아까 지나온 반용마을과 포동마을 방향으로 흘러간다. 섬진강이 포동마을 뒷산을 가운데 두고 180도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로 풀어보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동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반용교에서 800m쯤 떨어진) 섬진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섬진강변 아랫삼막들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고 했다. 깊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을 수 있단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다음 날. 다슬기 해장국으로 속을 풀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왼쪽 산자락에는 마이산 풍혈냉천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데크 사이트로 조성된 오토캠핑장 36면과 글램핑 시설 5동이 들어서있는데, 공간이 넓은데다 소나무 사이마다 사이트가 배치되어 있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단다.

 12 : 29.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둔치에 이른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충적지인데, 연습구장 2면과 덕 아웃, 백넷, 내외야 그물망과 펜스 등을 갖춘 전용야구장을 조성해놓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젊은 동호인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덕분에 우린 산골의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12 : 32. ‘산막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초입의 이정표(오암 4.8km/ 성수면사무소 8.0km)가 양화마을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의 최상류라 수량이 많지 않고 강폭도 넓지 않다. 이곳을 지난 섬진강은 수많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돌고 돌면서 남해로 흘러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 진안을 시작으로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땅을 거친 다음,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을 가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닿는다.

 상류 쪽 풍경. 강 오른쪽 둔치로 탐방로가 나있다. 길가에는 둔치 특유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대가 낮으니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는 차량을 옮기라고 적었다. 물이 깊은데다 유속의 변동까지 심하니 물놀이도 삼가주란다.

 강 건너 산비탈은 기암절벽을 이뤘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던 물줄기가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서 깎아 만든 절경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감입곡류의 섬진강은 곳곳에 크고 작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놓았다. 그중 하나에 성수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1만평쯤 되는 부지에 잔디운동장과 족구·배구·농구·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야외시설과 샤워실·취수대·스트레칭 장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개최되는 면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작년에는 진안홍삼배 유소년축구대회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단다.

 12 : 43. 체련공원의 끝(이정표 : 오암마을 4.1km/ 성수면사무소 8.7km). 고원길은 야외화장실 뒤로 간다. 그리고는 745번 지방도(관마로) ‘양산교의 교각 아래를 지난다. 참고로 관마로는 양산교 건너에서 관촌면을 향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이 뚫리기 전 양화마을 사람들이 관촌에 가기위해서는 말궁구리재라는 고개를 넘어야만 했단다. 말이 고개를 넘다가 구르는 일이 하도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이 지역이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둔치를 따른다. 745번 지방도의 왼쪽 아래로 길이 나있다. 그런 인연으로 집중호우 때는 지방도가 고원길이 되어준다.

 12 : 52. 지방도의 교각 아래를 다시 한 번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잠수교(이정표 : 오암 3.2km/ 성수면사무소 9.6km)가 놓여있다.

 잠수교는 장마철마다 물속에 잠겨버리는 반쪽짜리 다리다. 하지만 이게 풍경화로 변하면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철 지난 갈대라도 강물과 어울릴라치면 그 경관을 훨씬 더 고와진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물줄기를 오원천(五院川)’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인 제룡강이 서천·신정천과 합류하여 성수면 좌포리와 용포리를 지나는 구간을 일컫는다. 섬진강은 이렇게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오원이란 지명은 관촌면 철도역 근처에 있던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관할하던 오원역(五院驛)에서 비롯됐다.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이 관할하던 호남평야의 12개 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양화마을 350m/ 풍혈냉천 600m/ 포동마을 4.8km)가 짬을 좀 내면 진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혈냉천을 볼 수 있다며 유혹한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서 걷던 도반이 풍혈의 문이 닫혀있더라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분이 보내준 사진으로 달래본다. 양화마을의 풍천도 밀양 얼음골처럼 냉장고 같은 찬바람이 솔솔 나온다고 했다. 풍혈(風穴)은 바깥 공기가 틈새 많은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단열 팽창하면서 급격히 열기를 빼앗겨 찬바람이 나오는 현상이다. 도반은 찬바람이 나오는 동굴이 사유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섭씨 3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냉천(冷泉)은 구경할 수 있었다나?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2 : 56. 고원길은 745번 지방도를 횡단해 양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동리인 좌포리(佐浦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원좌·봉좌·내좌·산수동·양화·증자) 중 하나로, 섬진강을 뜨락에 두고 달길천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강촌마을이다. 강변 사람들은 섬진강과 함께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랜다. 강변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기도 한다.

 달길천의 둑길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보림(裨補林)이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상 길지 또는 명당의 조건에 부족할 경우 숲과 나무를 심어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유산이다.

 수령이 21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보호수’.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까지 지내주는 고목이다. 그래선지 나이만큼이나 품도 넓어 보인다. 그늘에 정자는 물론이고 마을회관까지 품었다.

 안내판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어 눈이 잘 녹는다고 해서 양화(陽化)’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풍혈냉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준다.

 양화마을(이정표 : 오암 2.7km/ 성수면사무소 10.1km)부터는 둑길을 따라 달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섬진강 본류를 벗어나 지류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달길천은 성수면 중길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화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 7km 길이의 하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는 이 근처에 대산종사의 탄생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산은 원불교 세 번째 종법사(宗法師,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김대거(金大擧, 1914-1998)의 법호이다. 2대인 정산종사에게서 바톤을 받아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인물인데, 이곳 좌포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출가했다. 하나 더. 대산종사는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남긴 게송에 반해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지류이어선지 강폭이 많이 좁아졌다. 수량도 뚝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변이 보여주는 풍광은 여전히 고왔다.

 달길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지 않은 농경지가 길게 펼쳐진다. 하천가에 자리한 농경지는 낮은 산들로 감싸여있다. 가는 길에 그런 풍경 속에 들어앉은 중길교(오암 1.5km/ 성수면사무소 11.3km)를 지나기도 한다.

 13 : 36. 4구간의 종점인 오암마을에 도착했다. 두 개의 하천(만덕산 오두재에서 흘러내린 중길천과 이 마재골에서 발원한 물줄기)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작고 소박한 자연부락이다. 고원길(5구간) 조형물은 마을 앞, 두물머리에 놓인 다리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98km를 찍고 있으니 시간당 4km를 걸은 셈이다. 반용재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고개를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