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9코스(남도국악원-서망항)

 

여행일 : ‘22. 8. 13(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귀성삼거리→상만마을→굴포마을(고산사당)→남선마을→동령개공원→남동마을(남도진성)→서망항(거리 및 시간 : 12km, 실제는 13.88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9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들길·임도길·해안길·마을길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만난다. 민초 보호를 위해 쌓은 남도진성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한 단면인 고산둑은 꼼꼼히 살펴봐야할 역사유적. 거기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천연기념물인 ‘상만리 구상나무’도 살펴볼 수 있다.

 

▼ 들머리는 귀성삼거리(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진도읍 방면)를 타고 내려오다 송월삼거리(임회면 봉상리)에서 좌회전하여 진도대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귀성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9코스)는 귀성마을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간 지점에 세워져 있다.

▼ ‘귀성삼거리(남도국악원)’와 ‘서망항’을 잇는 12km짜리 구간. 거리가 짧아 지난 번 8코스 때 자투리로 남겨두었던 7km를 보태기로 했으나, 귀성시간에 쫓겨 ‘여귀산’ 입구 돌탑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피서철 traffic jam 탓에 1시20분에야 들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이마저도 포기하고 정규 시작지점인 귀성삼거리에서 시작했다.

▼ ‘진도 다시래기’ 등 진도사람들의 한 맺힌 가락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는 남도국악원은 스치듯 지나간다. 국립국악원(서울)과 민속국악원(남원)에 이은 세 번째 국립국악원이라지만 일부러 들르지는 않았다. 음악에 문외한이 ‘진악당(국악 전용극장)’과 ‘달빛마당(야외공연장)’ 등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시선을 들자 ‘아리랑 담배’ 문양으로 치장한 하얀색 건물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아리랑마을관광지의 랜드마크인 ‘아리랑체험관’일 것이다. 아리랑의 전체 맥락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술꾼인 나는 부속건물인 ‘홍주촌’에 더 관심이 갔다. 홍주의 제조기법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손수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녀오지는 않았다. 숙박시설을 겸하는 홍주촌이 문을닫았다는 ‘즐산’님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영향이겠지만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오른편에서는 ‘귀성(貴星)마을’의 바닷가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남종화의 산실 ‘진도’를 대변하는 풍경이랄까? 그림 속 포구에는 꽤 많은 어선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금리’라는 본명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마을 앞 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고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황금리’로 불려왔었다니 말이다.

▼ 서쪽으로 난 경사로를 100m쯤 오르면 ‘귀성삼거리’. 서해랑길에서 9구간의 공식 들머리로 내세우는 지점이다. 귀성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아리랑마을’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별(吉星)처럼 귀(貴)한 땅이라는 지명에 발맞추기라도 하듯이 ‘아리랑’ 관광단지를 들어앉혔다는 얘기일 것이다.

▼ ‘상만마을’까지는 18번 국도를 따른다. 이 구간은 자동차와 사람으로도 모자라 자전거까지 공유하는 구간이다. 인류 번영의 최선 과제는 ‘공존’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짧은 구간에서나마 서로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온 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저 라이더들처럼...

▼ 잠시 후 ‘나절로 미술관’을 만났다. 한국화가 이상은씨가 폐교된 (구)상만초교를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나절로는 미술관을 지은 이상은 화가의 호로 ‘스스로 흥에 겨워 즐거움’이란 뜻을 담고 있단다. 호처럼 자유분방한 내면적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곳이라나?

▼ 소정의 입장료(2천원)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상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한국화·서양화·조각 등 국내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미술품 구매도 가능하단다. 하지만 문외한이라서 이곳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길을 나선지 12분쯤 되었을까 상만마을에 이르니 주변이 온통 대파 세상이다. 맞다. 이곳 진도는 우리나라 대파(겨울)의 40%를 생산한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철에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들판을 초록 융단처럼 수놓을 것이다. 달착지근한 맛의 겉절이로 유명한 ‘봄동’과 함께...

▼ 빗돌에 적힌 이름이 눈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70년대 ‘율산 신화’의 주인공 신선호(현 센트럴시티 회장)의 부친이 바로 ‘신형식(申衡植)’이기 때문이다. 율산(栗山)이란 회사 이름도 부친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무튼 자식 농사(나머지 자녀들도 대학교수·의사·은행장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이력들을 지녔다) 잘했기로 소문난 인물인데 그가 이 마을에 뭔가를 베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는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초입(이정표 : 종점 11.3㎞/ 시점 0.7㎞)에서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저 마을에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된 비자나무가 있다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을로 들어서니 거대한 몸집의 팽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의 역사가 14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니 저 나무의 나이 역시 만만찮을 것이다.

▼ 담벼락을 가득 채운 벽화가 나그네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 노인들은 소나무 아래서 신선놀음에 푹 빠져있고, 마을은 씨름 삼매경인 젊은이들 차지다. 그런데 오층석탑은 보물찾기용에 불과한 걸까? 그림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워 넣었다.

▼ 경사진 마을 길 끝자락에서 나이가 600살이나 된다는 비자나무를 만났다. 키 12m에 가슴높이의 둘레가 6.35m라니 거대하지는 않다. 하지만 유난히 옹골찬 수형을 가졌다. 키에 비해 굵직한 줄기는 물론이고 나뭇가지도 매우 촘촘하게 돋았다. 천연기념물(제11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비자나무는 총 3점(강진 삼인리·사천 성내리·진도 상만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비자나무숲 5곳은 통째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았단다.

▼ 비자나무는 스님들이 공들여 키우던 나무다. 영양이 풍부해 먹을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 좋은 간식거리였고, 거기다 구충제 성분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비자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둬 절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이제 마을의 정자나무로 살아간다. 십여 개의 벤치를 놓아 나그네의 쉼터까지 겸하도록 했다.

▼ 비자나무 뒤편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재공파의 재실이라는 ‘성모사(誠募祠)’가 있었다. 하지만 ‘두문동 72현’ 박침의 손자 박심문을 중시조로 한 청재공파는 나주에 종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진도로 입도했다는 박용(박심문의 손자)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후손의 위패를 모시고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했으나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誠敬門)이 닫혀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몇 걸음 더 올라, ‘또 다시 그리운 그곳 돌아보니 구암사’라는 팻말에 홀려 ‘해탈문’을 넘어서니 ‘구암사(鳩巖寺)’가 얼굴을 내민다. 1930년대 옛 ‘상만사(上萬寺)’의 터에 새롭게 지었다는 사찰이다. 기록이 없어 이 역시 정확한지는 모른다. 하긴 태고종·법륜종 등 출처마다 소속 종단이 다를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헷갈리면 물어보는 게 상책, 절간 앞을 서성이는 승려차림의 남성에게 물어보니 앞뒤 싹 자르고 ‘조계종’이란다. 요즘 중들은 요렇게 싸가지가 없나? 손아래 사람에게 반말 듣는 게 싫어 더 이상의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귀경해 알아보니 예산(충남)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 절간은 단출했다. 극락보전을 가운데 두고, 대 아래 좌우에 청향당(淸香堂)과 요사(寮舍)를 둔 모양새다. 전남도 유형문화재(10호)인 ‘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단(2층)과 몸돌(5층), 지붕돌로 이루어진 이 돌탑은 고려 때 상만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단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 떨어진 ‘탑리’라는 마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4~15세기 무렵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도 적고 있었다.

▼ 절에서 빠져나오는데 일주문 대신 돌부처가 잘 가란다. 그 싸가지 없던 중에 대한 미안함을 담았다는 듯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다. 그나저나 장승에 가까운 해학을 담은 부처가 무척 귀엽다. 뭉툭한 코에 눈은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왔고, 작다란 입은 미소까지 띤다. 사람들은 저런 석불을 ‘민불(民佛)’로 분류한다. 권위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평범한 중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면서...

▼ 마을을 둘러봤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되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렇다고 아까 헤어졌던 지점으로 되돌아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버스정류장(오른쪽)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100m쯤 걸으면 탐방로를 만나게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인데, ‘T’자형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 수로의 둑길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18번 국도로 올라서고, 이정표(종점← 10.6㎞/ 시점↓ 1.4㎞)의 지시대로 ‘상만3교’를 건넌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번에는 임도로 들어서란다.

▼ ‘S’자형 커브를 그려대는 임도는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오르막을 유지한다. 그리고 구릉지의 고개를 넘어 굴포해안으로 향한다.

▼ 임도로 길지 않았다. 8분 만에 또 다시 18번 국도로 내려선다. 이어서 이정표(종점← 10km/ 시점↓ 2㎞)의 지시대로 고산사당(고산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고개를 넘자 호리병을 연상시키는 ‘굴포만(屈浦灣)’이 얼굴을 내민다. 움푹 파고들어온 만(灣)의 길이가 긴데다 입구가 좁아 내부는 천혜의 항구가 된다. 그래선지 중만마을·신동마을·굴포마을 등 많은 어민들이 저 바다를 업으로 하며 살아간단다.

▼ 산경표의 기본원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뜻이다. 18번 국도는 이를 알기라도 한 듯 바닷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 코너에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임회면 헌복동과 서망항을 잇는 ‘진도 미르길(7개 코스 19.7km)’이다.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하는 오솔길이 마치 용(龍)이 승천을 준비하려고 움직이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서해랑길은 몇 곳에서 그 ‘미르(龍의 古語)길’과 겹친단다.

▼ ‘워따메~ 불 나부렀는갑다’. 해무에 잠긴 ‘굴포항’이 마치 연기에 휩싸인 듯한데, 그게 또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준다. 하지만 어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뿐이다. 짙은 안개에도 풍요를 찾아 쉼 없이 들락거린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안을 따른다. 중만마을(상만리)에서 신동마을(백동리)을 거쳐 굴포리까지, 호리병처럼 움푹 파인 ‘굴포만’의 절반(1.4km)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바닷가에 매어놓은 저 줄은 빨래건조용일까 아니면 생선건조용일까? 궁금증을 못 참고 주민에게 물어보니 ‘無主先占’이란다. 전형적인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신동(하)마을에서 ‘고산 윤선도’를 만났다. 고향도,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등지고 칩거하던 보길도도 아닌데 웬 고산이란 말인가. 알고 보니 그가 이곳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모양이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방조제를 쌓아 농지를 조성한 다음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줘 농사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은공을 기리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감사제와 당제를 지내왔단다.

▼ 사당은 새로 지은 듯한 모양새다. 맞다. ‘배중손 사당’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고산사당은 그동안 불편한 동거를 해왔었다. 지난 1999년 지역 유지들이 삼별초 지휘관인 배중손 장군을 기린다며 당집이 있던 이곳에 배중손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주민과 윤씨 종친회 등이 역사 왜곡이라며 반발, 소송까지 진행해 법원 조정을 통해 2003년 배중손 사당 이전에 합의했다.

▼ 경내에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그의 대표작을 새긴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孤山 尹善道(1587-1671)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사람이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삶은 짧은 관직생활과 긴 유배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 우리나라 ‘민간 간척사업 1호’라는 ‘고산둑’은 사당 앞에 있었다. 1650년 쌓았다는 방조제는 높이 3m에 길이가 380m나 된단다. 고산의 숭고한 마음을 하늘도 알았음인지 이곳을 훑으며 지나간 수많은 태풍에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 둑에서 내려오니 멋진 꽃길로 연결된다. 둑 아래는 무궁화를 바탕으로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반대편에서는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이 길은 ‘굴포삼거리’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고산들녘’의 젖줄인 하천(이름은 모르겠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 이때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산 선생이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는 농지로 그 넓이가 무려 100ha에 이른단다. 고산은 저 농지를 굴포·남선·백동·신동 등 4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져 농사를 짓게 했단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나눔 정신’이 아니겠는가.

▼ 둑길을 8분쯤 걷다가 이정표(종점← 9.4㎞/ 시점↓ 4.6㎞)가 가리키는 진도휴양림을 향해 방향을 꺾는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환호성을 질러대는 게 아닌가. 길가가 온통 ‘돌나물(또는 돗나물, 돈나물)’ 천지였던 것이다. 냉이·달래와 함께 봄나물 3총사로 꼽히는데, 특히 돌나물 나박김치는 봄의 미각을 돋우는 ‘엄지 척’의 별미다. 그동안 집사람이 담아주는 나박김치의 맛에 길들어온 나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 18번 국도로 올라선 탐방로는 잠시 후, 이번에는 ‘남선마을’로 들어선다. ‘임회면 남단의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남선(南仙)마을은 굴포리(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이자, 고산선생이 토지를 나눠졌다는 4개 마을 중 하나이기도 하다.

▼ 하지만 마을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구릉지 위로 난 농로(이정표 : 종점 9㎞/ 시점 5㎞)로 올라선다. 이때 널디너른 고산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니 천천히 걸으며 고산의 나눔 정신을 음미하며 보자.

▼ 입추가 지난지도 6일, 물러갈 줄 모르는 삼복더위지만 다가오는 철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벼를 비롯한 곡식이 여무는 시기’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오곡 중의 하나인 기장이 이미 고개를 숙였다. 만주에서는 저걸로 황주(黃酒)를 빚는다던데...

 

▼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질매봉(259m)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난 번 8코스 때 거론했던 진도지맥의 마지막 구간(총 길이 47km를 3개 구간으로 나누어 답사하는 게 보통이다)에서 솟아오른 봉우리 중 하나로 멋진 산세에도 불구하고 지맥 종주꾼들이 아니면 별로 찾지 않는 편이다.

▼ 구릉지로 올라선지 10분. 헌칠한 장부형의 질매봉을 소재삼아 수묵화를 그리다보면 어느덧 ‘동령개 삼거리’에 올라선다. 운림산방에서 배운 남종화 기법으로 고산들녘의 포근함도 덧칠해봤음은 물론이다. 참! 삼거리 도로표지판에 적힌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4년 전에 들러본 경험으로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잔잔한 섬 풍경, 울창한 수목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휴양지였다.

▼ 동령개 삼거리부터는 꽤 오래 국도를 따른다.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올라가는 모양새이지만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보도를 따로 내놓지 않았으니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어야 할 일이다.

▼ 하지만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독특한 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준다는 ‘동령개마을’ 해안과 선착장, 거기다 더해 ‘불무도’로 여겨지는 예쁜 섬까지 눈을 담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 7분쯤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 근처에 ‘동령개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경은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놓아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 일행도 역시 10여 분을 머물며 준비해간 간식 통을 비우고 갔다.

▼ 공원에는 시와 그림을 담은 빗돌들을 꽤 많이 세웠다. 이곳 진도는 예술의 고장, 특히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산실이다. 그러니 선비들이 좋아하던 사군자가 빠질 리가 없겠지?

▼ 빗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시인들의 시가 적혀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향아 시인의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며’가 눈길을 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지금,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나 할까? 여름 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물릴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에... 잠시 후 용혜원 시인의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공원의 시비는 시보다는 글씨를 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 앗! 누드화까지. 서양화의 전유물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동양화로도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듯하게.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는 무궁화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진도군은 무궁화 선양운동을 꾸준히 전개해왔고, 그 결과 220km의 무궁화 꽃길과 동산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이 무궁화동산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5.6㎞/ 시점↓ 6.4㎞)에서 임도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천둥산(198.9m)의 허리께를 헤집은 다음 남동마을 해안으로 연결된다.

▼ 임도는 관리청인 산림청의 품격에 걸맞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숲도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처럼 빽빽했다. 그런 길을 10분 남짓 걸었을까 모퉁이를 만난 임도가 크게 방향을 튼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서리 바위벼랑이 제법 그럴듯하다.

▼ 그게 지자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모퉁이에 돌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런데 2%가 부족하다는 이 느낌은 무슨 이유일까? 지리산둘레길을 걷다가 만난 돌 의자가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의 돌 의자 마다 명심보감용 글귀를 새김으로써 읽는 재미까지 더하던 지혜, 그게 바로 최근의 화두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 짜증스러울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집사람을 미소까지 띄게 만든 건 대체 뭘까? 아니 트레킹 중에 채취한 ‘왕고들빼기’를 맛있게 먹어주는 서방님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서방님 바라기인 사랑꾼이니까. 내 초점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 임도는 35분이나 걸려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서 삼거리, 이정표(종점→ 3.8㎞/ 시점↓ 8.2㎞)는 남도진성(오른편) 방향으로 가란다. 참고로 왼편으로 가면 남동리 포구로 연결된다. 마을과 5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걸로 보아, 마을 앞은 배를 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남도진성과의 첫 만남을 ‘선소(船所)’로 시작된다. 선소란 배의 출입과 건조 및 수리를 하던 곳이다. 수군의 필수시설이라는 얘기일지니, 남도포진의 축조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성곽에서 500m나 떨어졌다는 건 약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곽 앞까지 배가 들어갈 수 없어 별 수 없었겠지만... 참고로 남도진성은 15세기 초 전선이 배치되고 4개의 수군진이 설치되는 등 해안요새로 활용되었단다.

▼ 지난 8코스 때 만났던 죽림해안의 방풍림에는 못 미치겠지만 남동마을에서도 곰솔 숲을 만났다. 작지만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라면 그 용도나 규모가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처럼 일렬로 쭉 늘어서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모래를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으며...

▼ 남동리 앞바다는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이다. 그 안에 발달된 광활한 갯벌은 철을 가리지 않고 꿈틀대는 생명을 품는다. 그리고 척박한 인간의 삶에 풍요를 내어준다. 그뿐 아니다. 우리처럼 서해의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삶의 길을 찾아보려는 나그네들에게는 정신적인 풍요를 선사한다.

▼ 사대(射臺, 궁술 훈련장)를 지나자 쌍운교 너머로 ‘남도진성(南桃鎭城, 사적 127호)’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제주도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싸웠다는 곳이다. 아니 한참 이전인 백제(당시 진도에는 도산현과 매구리현이 있었다) 때 쌓았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13세기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로 인해 이 일대가 수시로 약탈당했고, 이에 세종 20년(1438년) 이곳에 해안방어 부대격인 수군만호부(萬戶府)를 창설한다. 그래도 피해가 이어지자 숙종 9년(1683년)에는 만호보다 상급부대격인 남도진(南桃鎭)을 설치한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본거지가 된다. 성곽은 조선 초기 축성당시 읍성 형태를 띤다.

▼ 3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남문(南門)이지만, 삼별초 당대의 기록이 모두 사라진 탓인지 성문은 편액 하나도 달지 못했다. 그래도 성문 앞에는 그럴 듯한 옹성(甕城)까지 두었다. 하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야할 방패막(女牆)이 없어 옹성으로 나갔다간 적의 표적이 되기에 딱 좋겠다.

▼ 서문(西門)은 복원되지 못해 아예 이가 빠진 모양새다. 복원은커녕 터로만 남아있는 동문은 이보다도 못했다. 이렇듯 남도진성은 넓고 거칠었다. 부분적으로 공사하는 곳도 있지만, 문화재라는 게 늘상 수리하고 고치고 복원하는 게 일 아니던가.

▼ 안쪽에는 만호가 근무하던 관아와 내아, 객사가 복원되어 있었다. 지난 2010-2011년 동신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발굴결과라고 해봐야 우물과 석축, 기와나 옹기·백자 조각, 상평통보가 전부였다지만... 망국과 함께 남도만호 역시 스러져갔고, 그들이 사용하던 변변치 못한 생활도구가 유구의 전부였던 셈이다.

▼ 600여m 길이의 성벽은 높이가 3m-4m로 일정하지가 않다. 높낮이가 불규칙적인 지형에 맞춰 쌓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 점은 다른 성과 다른 또 다른 특징이다. 성벽에는 (동·서·남) 3개의 문과 4개의 치성(雉城), 그리고 4개의 수문(水門)을 두었다. 성 밖 동·남쪽으로는 해자도 길게 냈다.

▼ 남문을 빠져나오니 ‘단운교(單雲橋)’가 눈에 띈다. 해자(垓字) 역할을 하던 개울(세운천)에 놓인 2개의 홍교(虹橋,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13호) 중 하나이다. 무지개가 하나인 것이 단운교이고, 쌍으로 핀 것이 ‘쌍운교(사진 생략)’이다. 두 다리는 주변의 돌을 다듬지 않은 채로 사용한 게 특징이다.

▼ 성곽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제 날머리인 서망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 길을 나서며 저 성에 살았을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삼별초·왜구·왜란 등을 생각하며, 전쟁도 침략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게 해준 조물주께 감사드려본다.

▼ 삼별초에 역사적 의의가 부여된 후부터 철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모여드는데, 어찌 특산품판매장 하나 없겠는가. 뭐라도 하나 살까 기웃거리는데 집사람이 옷소매를 잡아챈다. 4년 전 형제들과 함께 진도를 찾았을 때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특산품이라는 (건조)톳을 사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톳이 아니라 미역 자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집 하나였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 성곽 밖에는 ‘전원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58개로 구획된 부지에 들어선 가옥은 25채 뿐, 목재를 쌓아둔 곳도 있는 걸로 보아 공사가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과 팽목항·남도국악원·미르길(산책로) 등의 접근성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니 한번쯤 묵어볼 만도 하겠다.

▼ 함께 걷던 ‘몽중루’님이 혹시 울면서 넘어왔냐며 너스레를 떠신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내 표정을 보더니, 우리가 방금 ‘천둥산 박달재’를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갯벌 너머 오른편 산봉우리가 바로 천둥산(198.9m)이란다. 맥없이 점잖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에게도 유머스러운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 마을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같이 행락 차림이 아니겠는가. ‘학습장’이라고 해서 학습시설인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교직원들의 휴양시설이지 싶다.

▼ 남도진성에서 서망항까지는 2.8km나 된다. 줄곧 차도나 걸어야할 뿐 눈요깃거리라고 전무한 편이다. 그나마 햇볕까지 가려주지 못하니 여름철 코스로는 최악인 구간이다. 다들 축 늘어져서 걷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이지만 시야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점이다. 사자도와 불무도로 여겨지는 섬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곳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 남도진성을 나선지 30분, 서망항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고, 몇 걸음 더 걸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0.5㎞/ 시점↓ 11.5㎞)에서 ‘서망항’으로 내려선다.

▼ 날머리는 서망항(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서망항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탐방로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마을표지석과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 곧이어 해안가에 이른다. 이어서 서망항에서 가장 큰 건물(진도항로표지사무소)로 가면 된다. 항로표지사무소 건물 근처가 날머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가어항인 서망항(西望港)은 가을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루는 전국 꽃게 주산지다. 인근 조도 해역에 매일 40여 척이 출어해 1척에 200kg가량을 잡아 하루 위판량이 3t~5t에 달한단다. 또한 싱싱한 횟감과 수산물을 살 수 있는 수산물 시장과 맛집들도 있다.

▼ 서해랑길 안내도(진도 10코스)는 해경파출소 뒤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제시된 거리보다 1.88km가 더 많은 13.88km를 걸었다. ‘상만리 비자나무’를 다녀온 때문일 것이다.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 무더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지난 8코스의 생략부분은 ‘여귀산 돌탑길’을 살짝 엿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름 그대로 여귀산(女貴山) 아래에 돌탑들을 세워 조성한 길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귀산 남신과 여신의 전설을 돌탑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옛날 여귀산을 중심으로 죽림쪽에는 남신, 탑립쪽에는 여신이 사이좋게 지냈는데,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남신이 여신을 지배하고자 일 년에 한 번씩 힘과 지혜를 겨루기로 했고, 지는 신이 이기는 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는데, 여신이 계속 이기자 남신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시켜 여신의 탑을 파괴했고, 탑을 잃은 여신이 힘과 지혜를 쓰지 못해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남신과 여신을 화해했고, 마을 사람들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돌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돌탑 주변엔 시비도 세웠다. 이 지역 문인들이 쓴 창작시라고 한다. 진도의 삼락(三樂) 중 하나인 서화(書畫)가 밖으로 튀어나왔다고나 할까? 남도 예술혼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 남종문인화의 산실인 운림산방의 맥이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잘 그린 수묵화 몇 점도 바위 속으로 파고들었다.

▼ 고갯마루는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詩야 그림아 바람과 놀자’.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바로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그러니 이곳 여귀산 돌탑길에선 얕은 예술 지식을 함부로 꺼내놓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