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7코스(용장성-운림산방)

 

여행일 : ‘22. 7. 23(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고군면·의신면 일원

여행코스 : 용장성→용장마을→성재→오일시(고군면)→죽제산 산림욕장→임도→헬기장→첨찰산(왕복)→운림산방(거리 및 시간 : 12.2km, 실제는 12.73km를 3시간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7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진도의 내륙을 걷는 이 코스의 주요 볼거리는 용장성과 운림산방, 호국의 충정과 남도 예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단 첨찰산의 9부 능선을 넘어야 하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 들머리는 용장성유적지 주차장(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읍으로 내려오다 금골교차로(군내면 둔전리)에서 왼편 둔전길(같은 18번 국도다), 세등삼거리(군내면 세등리)에서 왼편 벽파진로, 용장삼거리에서 용장산성길로 옮기면 잠시 후 용장성유적지에 이르게 된다. 네비게이션을 이용(‘진도 용장성’을 입력)해 찾아갈 수도 있다.

▼ ‘용장성’과 ‘운림산방’을 잇는 12.2km짜리 구간으로 바다를 만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대신 높이가 485.2m나 되는 ‘첨찰산’의 9부 능선을 넘어야 한다. 난이도가 ‘최상(5등급 중 5번째)’인 이유일 것이다. 볼거리는 시종점인 용장성과 운림산방이 전부, 하지만 발품을 조금만 더 팔면 첨찰산 정상에서의 조망과 명량대첩에서 산화한 민초들의 묘역을 눈과 가슴에 담아갈 수 있다.

▼ 버스가 들어왔던 길(용장산성 길)을 되돌아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용장성과 연동마을을 잇는 ‘삼별초 호국역사탐방길’의 3코스이기도 하다. 참! 용장성 입구 나뭇가지에 걸려있다는 ‘7코스 시작점’ 팻말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다는 게 옳을 표현이겠다.

▼ 길을 나서기 전, 배중손장군과 삼별초에 목례를 드려본다. 그들은 바다에선 보이지 않는 후미진 산속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높은 ‘망바위’에서 적의 침입을 관찰하면서 항몽 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입도 9개월 만에 적들이 바다가 아닌 내륙의 우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허를 찔려 그만 막을 내려야 했다.

▼ 출발지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 먼저 다녀간 이들을 당황시켰다던 개 사육장은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갈기를 세우며 덤벼든다던 문제의 개가 꼬리를 감추고 실실 내뺐기 때문이다. 양 손에 스틱을 움켜쥔 내 기세에 기가 꺾였는지도 모르겠다.

▼ 7분쯤 걸었을까 도로를 벗어난 탐방로가 용장마을(이정표 : 종점 11.8㎞/ 시점 0.4㎞)의 고샅길로 들어간다. ‘용장(龍藏)’은 ‘용을 품는다’는 뜻이고, 예로부터 용은 임금을 상징했다. 1270년 삼별초군을 이끈 배중손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한데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마을의 정자도 ‘삼별초정자’, 다른 하나는 ‘용장정자’였다.

▼ 마을가꾸기 사업은 현재진행형인가보다. ‘용장의 사계’를 담으려는 모양인데, 화폭만 만들어놓았을 뿐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아니 각자의 생각대로 그림을 그려보라는 차원 높은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 마을은 당산나무의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진도대교가 착공(1984)되기 전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는 벽파항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그 덕에 용장리는 진도읍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벽파항의 뱃길이 사라진 지금은 빛 바랜 사진속에서나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 뿐이다.

▼ 당산나무를 끝으로 마을을 벗어난다. 그렇다고 그냥 떠나지는 말자. 마을 입구의 ‘오호순국지혼(嗚呼殉國之魂)’ 비석에 묵념을 드려보자는 얘기다. 한국전쟁 때 이곳 용장마을도 극한적 ‘Ideologie’를 피해가지는 못했단다. 좌우익의 충돌로 주민 백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중 좌익에 의해 희생된 83명을 추모하는 비이니 그냥 지나쳐서야 될 일이겠는가. 다만 1951년 10월에 세워지다보니 우익에 의해 희생된 30-40명이 빠져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위로도 함께 해주면 어떨까?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탄다. 벽파진로(벽파진과 고군면 오일장을 잇는 2차선 도로)로 연결되는데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넓다.

▼ 마을의 역사는 사우재실(祠宇齋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문중마다 하나씩 만들었는지 여러 개가 보였는데, 은모사(恩慕祠)라는 재실은 규모까지 꽤 컸다.

▼ ‘이 뭐꼬?’ 샘이라기엔 엉성하고, 그렇다고 ‘둠벙’이라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 하지만 석축까지 쌓는 등 정성들여 판 흔적이 역력하다. 용장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저 우물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도로를 벗어난 탐방로가 임도(이정표 : 종점 11.1㎞/ 시점1.1㎞)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철천산(162.1m) 숲속으로 들어선다. 넓지만 다듬지 않은 거친 산길이다. 허리춤을 넘어설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는다.

▼ 하지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래 편백나무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아니던가. 오늘은 첨찰산 고갯마루를 넘어야하는 지난한 여정, 그에 필요한 원기를 미리 보충해보면 어떨까?

▼ 숲속으로 들어선지 5분 만에 고갯마루(Kakaomap은 ‘성재’로 표기하고 있었다)에 올라섰다. 100m 남짓의 나지막한 고개지만 민초들에겐 이마저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넘나들며 던져놓은 돌들이 모여 원뿔 모양의 돌무더기로 변했고, 서해랑길의 리본까지 더해지면서 이젠 서낭당이 되었다.

▼ 고개를 넘자 도평·송산(고군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6구간 때 만났던 둔전 들녘만은 못해도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

▼ 길가 담배 밭은 담배 반 풀이 반이다. 잎도 따지 않은 채로이다. 담배는 판로가 보장된다. 봄에 모종을 옮겨 심으면 별로 할 일도 없다. 하지만 잎을 따는 게 고역이란다. 자라는 속도에 맞춰 따야할 뿐만 아니라 애기다루 듯이 해야만 상품성을 해치지 않는다나? 저 농부도 그게 힘들어 담배농사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 산길은 농로로 연결된다. ‘도평저수지’의 둑(이정표 : 종점 9.9㎞/ 시점 2.3㎞) 아래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널디너른 들녘으로 들어선다. 반대 방향은 ‘도론(道論)’ 마을로 간다. 소전 손재형선생이 써준 글씨로 인해 ‘도룡동(道龍洞)’이란 또 다른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이다.

▼ 저수지를 스치듯 지나친 탐방로는 이제 널따란 들녘, 그것도 한가운데를 헤집으며 지나간다. ‘여기가 섬이 맞아?’ 둘레길 도반의 넋두리처럼 들녘은 넓고도 또 넓었다. 맞다. 학창시절, ‘섬놈’이라며 놀리던 날 보고, 섬이라고 우습게 여기다간 큰 코 다친다며 겁을 주던 진도 출신 학우도 있었다.

▼ 요렇게 귀여운 이정표를 본적이 있나요? 농로의 가장 큰 특징은 표지기를 매달만한 지지대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알아서 가라고 할 수야 없는 노릇. 궁여지책으로 세워놓은 꼬맹이 이정표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준다.

▼ 들녘너머 산비탈에는 ‘평산(平山)’ 마을이 들어앉았다. 각양각색의 지붕이 알록달록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 탐방로는 차도(18번 국도)를 건너 농로로 간다. 하지만 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찾아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우수영에서 눈여겨보았던 조형물들의 주인공, 즉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민초들의 묘역이 근처 도로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 ‘고성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그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흔한 벚꽃나무가 아닌 것만도 고마운데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까지 선물하다니...

▼ 그 사이사이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진도에 359㎞의 무궁화길이 조성되어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사는 섬내 어디를 가든지 국민의 얼이 깃든 백단심·홍단심·아사달 등 활짝 핀 무궁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었다. 무궁화 선양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나?

▼ 잠시 후 ‘정유재란 순절묘역(전남 문화재자료 216호)’에 도착했다.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조응량(曺應亮)을 비롯한 전사자들의 무덤 232기가 이곳에 모여 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서해를 거쳐 안으로 북상하려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다. 전함 13척으로 왜군 전함 133척을 궤멸시키는 찬란한 승리였다. 명량대첩의 더 큰 의미는 인근지역 백성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승리라는 점이다. 그 전투에서 죽은 민초들이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16기의 사족(士族) 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란다. 하지만 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하나 더, 지구의 반대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생각해보자.

▼ 묘역을 바라보다 두 번이나 외세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진도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한번은 반란군인 삼별초를 도왔다는 이유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왜적들에게 보복 당했다. 오죽했으면 장례 치를 남자가 없어 여자들이 상여를 멨을까. 진도다시래기, 진도만가 등 진도사람들의 소리에서 한이 묻어나는 이유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4분쯤 걷자 ‘오일시 삼거리’가 나온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모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피에르 랑디’의 기고로 세계적인관광지가 된 이 신비의 바닷길은 서해랑길에서 빠져있다. 일본의 NHK에서 세계 10대 기적의 하나로 꼽았을 정도인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4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장터’다. 이곳 ‘고성리’를 ‘오일시’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하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다. 하지만 지붕까지 씌워놓은 장터는 텅 비어있었다. 정해진 날만 장이 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진도군에는 세 군데서 장이 섰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오일시(나머지는 진도읍장과 십일시장)인데, 경제 성장과 함께 장날이 추가되어 1·5일장이 되었단다.

▼ ‘고성(古城)’ 마을은 시골답지 않게 무척이나 컸다. 3층짜리 상가가 있을 정도니 면소재가 부럽지 않다. 하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고려 때는 진도읍성까지 있었다니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선지 마을단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의원도 들어서 있었다. 아니 진료과목이 7개나 되는 종합병원이다.

▼ 마을을 빠져나와 고군면소재지로 연결되는 국도를 탄다. 이곳도 역시 은행나무로 가로수를 삼았다. 이 길은 명량대첩과 얽힌 또 하나의 유적과 연결되기도 한다. 전투에서 죽은 왜군의 시신이 조류에 밀려오자 주민들이 수습하여 묻어놓은 곳이다. 원수를 은혜로 갚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산의 이름까지도 ‘왜덕산(倭德山)’이 되었다.

▼ 100m남짓 걸었을까 길가 이정표(종점 7.2km/ 시점 5.0㎞)가 오른편으로 가란다. 바닷가가 서해랑길의 상징인데도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렇듯 7코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만나지 않는다.

▼ 홍천. 우리 부부의 농장이 있는 산골짜기에도 학교가 있다. 옛 초등학교를 개조하여 기숙사까지 거느린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학생 수가 급속히 줄어가는 요즘의 시골. 이를 타개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런 일환인지 고성초등학교에는 골프연습장까지 들어섰다. 골프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모아보려는 유인책일 수도 있겠다.

▼ 오늘은 대서(大暑),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날이다. 반면에 수확의 계절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비닐하우스 앞에 쌓아놓은 저 고추가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도로를 벗어난지 10분, ‘장흥임씨’ 재실(齋室)이 얼굴을 내민다. 세장산(世葬山)에 잇대어 있는 걸로 보아, 문중 시제 때 사용하기 위해 지었지 않나 싶다. 하나 더. 장흥 임씨는 진양주(전남무형문화재 제25호)라는 가양주로 유명한 문중이다. 그 술이 해남에서 생산되기에 그쪽에 몰려 사는 줄 알았는데, 이곳 진도에서도 가세를 이뤄 살아가는 모양이다.

▼ 장흥임씨 재실을 지나면서 임도가 시작된다. 심하지는 않지만 오르막 경사를 어느 정도 유지한다.

▼ 임도 초입, 특이한 빗돌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백파 녹지원-꽃매 휴양림’이란 제목의 시가 적혀있는데 글 솜씨가 여간 아니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요/ 붉게 붉게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오려는 봄철을 미리 알리는 것이 정말 꽃다운 꽃이리라>

▼ 임도를 따라 15분쯤 걷자 숲속에 가려있던 ‘죽제산 산림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해랑길은 이를 스치듯 지나치지만 우리 부부는 산림욕장으로 들어서기로 했다. 정자는 물론이고 음수대까지 갖추었으니 둘레길 나그네에겐 일류의 쉼터가 아니겠는가.

▼ ‘죽제산 산림욕장’은 지역주민들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후박·동백·가시나무 등 난대림의 보고인 죽제산 자락에 물소리·건강·동백 등 너덧 개의 쉼터를 중심으로 등산로와 산책로를 개설했다.

▼ 산림욕장을 지나자 임도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편백나무 숲은 ‘건강쉼터’로 변신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그런 편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을 지자체에서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을 배치해 일류의 쉼터로 가꾸었다.

▼ 임도 특유의 지그재그로 춤을 춰대는 임도를 따라 30분쯤 진행했을까 분지형태의 언덕에 올라섰다. 첨찰산과 죽제산(424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정표 : 기상대 1.5㎞/ 쉼터 0.3㎞)로 조망까지 터지는 것이 잠깐의 쉼터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이어지는 임도는 조금 더 가팔라진다. 그리고 10분쯤 지난 곳에서 약간 어긋난 사거리(이정표 : 종점 2.6㎞/ 시점 9.6㎞)를 만난다. 서해랑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진도기상레이더관측소’로 향한다

▼ 사거리를 지나면서 길은 무척 가팔라진다. 무더위에 지친 탓인지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팔라졌다. 그런 오르막이 7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능선에 올라섰다. 첨찰산과 덕심산(398.9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자 고군면과 의신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탐방로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2.4㎞/ 진도기상대 1.0㎞/ 시점 9.8㎞)인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탄다.

▼ 100m 조금 못되게 오르자 헬기장이 나온다. 첨찰산 정상과 기상대가 자리한 동남봉(東南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즘도 활용을 하고 있는 지 잔디밭이 잘 손질되어 있다. 참! 주변 지세(地勢)가 반반한 것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첨찰산성의 중심지가 이쯤이었을 듯도 싶다.

▼ 이정표(종점 2.3㎞/ 시점 9.9㎞)는 이곳에서 왼편 산비탈로 내려서란다. 하지만 우린 ‘첨찰산’으로 향했다. 또 다른 이정표(첨찰산 정상 0.1㎞/ 아리랑비 1.7㎞)가 고지가 코앞임을 알려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치고 올랐을까 ‘첨찰산(尖察山, 485.2m)’ 정상이다. 맨 꼭대기는 원뿔형의 볼품없는 봉수대(烽燧臺) 차지다. 돌로 연대(烟臺)를 쌓고 그 위에다 수북하게 돌을 쌓아올렸는데, 봉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케언(cairn)에 더 가깝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의젓한 봉수였었다. 해남 관두산봉수로부터 여귀산봉수로 전달된 봉홧불을 해남 황원봉수에 중계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였다. 진도군의 행정체계가 재정비되는 시기, 즉 조선 세종 대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에 폐지되었다.

▼ ‘진도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홍보용 문구를 첨삭한 정상표지석은 봉수대의 바로 아래에다 세워 놓았다. 첨찰산은 ’뾰죽할 첨(尖)‘에 ’살필 찰(察)‘자를 쓴다. 뾰쪽하게 생긴 산 정상부가 적의 동태나 지세를 살피기에 딱 좋겠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산의 정상에다 봉수대를 설치했었고, 산의 이름 또한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 낀 오늘은 건너편에 있는 기상대만이 겨우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5년 전 찾았을 때만해도 진도의 산하와 다도해 풍광을 한눈에 쏙 담을 수 있었는데...

▼ 헬기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아리랑비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곧이어 첨찰산 특유의 상록수림이 시작된다. 숲은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다. 하지만 상큼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숲은 흔치 않다. 그러니 구태여 발걸음 재촉할 필요는 없다. 온몸으로 숲의 기운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아주 천천히 즐기듯이 말이다.

▼ 길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반석을 깔거나 돌계단을 쌓고, 그게 힘들 때는 나무계단을 놓았다. 계단에서 내려 ‘봉화골’로 들어선다. 코끝에 걸치는 공기가 신선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산소음이온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숲이 하도 짙다보니 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은 단점일 수도 있겠다.

▼ 내려오는 도중 복원된 숯가마를 만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숯을 구워냈는데, 이로 인해 재료로 사용되던 동백나무를 너무 많이 벌채하는 결과를 초래했단다.

▼ 내려오는 내내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이마를 스쳐가는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눈도 호사를 누린다.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동백잎이 빛을 발하며 길손을 유혹한다. 계곡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돌들 사이로 낙숫물도 떨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그렇게 25분쯤 내려오면 개울을 건너게 되고, 이후부터는 경사가 많이 누그러진다. 하지만 바닥이 거칠기는 매한가지다. 이 구간에선 아치형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 이정표를 겸한 구호지점표지판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기본 임무인 ‘구호지점 번호’말고도 주요지점까지의 거리(방향 포함) 및 주의해야 할 사항까지 적어 넣었다.

▼ 정상을 출발한지 50분. 지겹다싶을 정도로 길었던 산길이 끝나면서 ‘진도아리랑비 공원’에 내려선다. 공원은 5년 전 찾았을 때와 똑 같은 모습이다. ‘산천은 의구한데’라고나 할까? 하지만 다리(아리랑교) 앞에 세워져 있던 ‘진돗개 시범사육장‘ 입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옮긴 모양이다.

▼ ‘등산안내도’는 이곳을 날머리로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산행을 끝낸 뒤에 바라보는 지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름처럼 공원에는 ’진도아리랑 비(碑)‘를 세워놓았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는 진도아리랑을 기념하는 비이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글씨와 그림,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잠시 후에 들르게 될 운림산방에서 비롯된다. 나머지 하나인 노래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은 정선, 밀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아리랑이 이곳 진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일상이란다. 밭일 하던 할머니도 장터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도 흥만 나면 어김없이 아리랑을 불러 젖힌다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구성진 아리랑의 노랫가락에 녹이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삶이 바로 노래이기 때문이다.

▼ ‘양천허씨 입도조기적비’도 보인다. 양천허씨의 진도 이주는 23세손인 허대(許垈)에 의해서다. 광해군 때이다. 그건 그렇고, ‘진도의 양천허씨(陽川 許氏)는 빗자루나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소치를 중심으로 미산(米山)·남농(南農)·임인(林人)·임전(林田) 등 5대째 내리 화가를 배출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 이정표(종점 0.6㎞/ 시점 11.6㎞)가 가리키는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일차선 도로는 인도를 따로 두지 않았다. 아니 인도용 데크로드 설치공사가 한창이었다.

▼ 운림산방으로 내려가는 도중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사천이제’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남종화의 산실이라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명승 제80호)에 이른다. 운림산방은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경사지를 다듬어 세웠는데 맨 위쪽에는 허련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있고 오른쪽 후면에는 사천사(斜川祠, 문중 제각)가 자리하고 있다. 소치가 머물던 살림집은 그 아래에 있다.

▼ 두어 번이나 들러봤던 운림산방은 밖에서 기웃거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자 소치의 살림집이 눈에 들어온다. 1856년,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죽자 소치는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1893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소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소치기념관(小癡記念館)은 옛 사진으로 대신한다. 기념관은 소치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소치가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세웠다. 영상실과 전시실로 구분되는데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畵脈)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가문(家門)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그들의 활동사항 등을 소개한다.

▼ ‘진도역사관’도 옛 사진으로 대신한다. 진도지역의 역사유물을 보존·전시하고, 진도의 민속과 자연환경 등을 소개하기 위해 지은 전시관으로, 선사/고대실·삼별초항쟁코너·명량대첩코너·유배문화실·향토문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도 향토작가전시실(기획전시실)에는 허백련·하철경·박행보 등 진도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진도의 역사와 현황, 민속과 자연환경 등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 운림산방 앞에 위치한 남도전통미술관도 주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지상 2층(지하 1층)의 규모로 전시실과 서화 체험실, 서화경매장, 수장고 등 부대시설이 있다. 미술관에는 소치 허련과 그 화맥을 이어 온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있으며, ‘남도예술은행 미술품 토요경매’가 열리기도 한다.

▼ 날머리는 운림산방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남도전통미술관을 빠져나오면 운림산방의 널찍한 주차장이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삼복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여정이 끝을 맺는다. 오늘은 12.73km를 3시간50분에 걸었다. 후반부(5km)가 임도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서해랑길(진도8코스)의 안내도는 쌍계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기조차 힘겨운 나와는 달리 집사람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다. 500m에 가까운 ‘첨찰산’을 넘어왔는데도 말이다. 하긴 오일시에서 출발하도록 해 산행거리를 7km로 단축시켜 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