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13), ‘관풍헌 가는 길

 

여행일 : ‘21. 8. 7(토)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영월읍 일원

여행코스 : 김삿갓면사무소→옥동교→대야산성→가재골→가재골교→갈론마을→고씨동굴등산로→팔괴마을→관풍헌(소요시간 : 23.6km/ 실제는 김삿갓면사무소에서 고씨동굴까지 11.05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13번째 길인 ‘관풍헌 가는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마지막이자 외씨버선길이 마무리되는 구간으로, 관풍헌에서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은 외씨버선길의 전체 길 가운데 가장 긴데다, 높이가 400m도 넘는 고갯마루를 3개나 넘어야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게 대야산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 잠깐이면 끝났을 것을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셈이다. 외씨버선길의 모티브는 보부상. 편한 평지를 제쳐두고 일부러 이런 산길을 오르내렸을 보부상도 없었으련만, 이런 고행의 길을 고집하는 영월군의 의도를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부부는 걷는 내내 툴툴거렸고, 그 불만의 표시로 나머지 구간의 답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 같은 소시민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랄까?

 

▼ 들머리는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266)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제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8호선을 타고 일단 영월읍으로 온다. 영월교차로에서 88번 지방도로 옮겨 춘양 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삿갓면사무소의 소재지인 옥동리에 이르게 된다. 김삿갓면의 옛 이름은 하동면(下東面). 조선 최고의 풍류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본명은 김병연)의 묘가 와석리에서 발견된 것이 인연이 되어 2009년 김삿갓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브랜드 가치를 높여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이었고, 바라던 대로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반면에 땅이름의 역사성 훼손이란 지적도 만만찮다.

▼ 13길(관풍헌 가는 길)은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영월읍(관풍헌)까지 23.6km로 15개 코스로 나뉜 외씨버선길 가운데 가장 긴 구간이다. 이 구간은 또 해발고도가 400m도 넘는 고갯마루를 3개나 넘어야 하는 힘든 코스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한꺼번에 완주한다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선지 산악회에서도 이를 둘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었다.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김삿갓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었다. ‘김삿갓문학길’에 이어 이 구간도 역시 ‘김삿갓’으로 시작된다. 고을 이름에서부터 온통 김삿갓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상호는 물론이고 농장 이름, 심지어는 특산품(포도)에까지 김삿갓이 빠지지 않는다.

▼ 영월방면(북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옥동장터길’이라는데 면소재지치고는 무척 한적한 풍경이다. 들판보다 산이 더 많은 고장 영월. 말이 좋아 산수가 맑고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이지 90년대까지도 탄광촌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탄광이 문을 닫고, 광부 숫자보다 수십 배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고장이 되었다. 외씨버선길을 걷고 있는 우리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 잠시 후 예쁜 벽화골목을 만났다. 외지에서 찾아온 나그네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일까? ‘옥동장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골 장터의 풍경들을 빼곡히 그려 넣었다. 무쇠 솥을 파는가 하면, 튀밥을 튀기는 등 하나같이 5일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 각종 약재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 곁에는 백구 한 마리가 혀를 내민 채로 주인을 지켜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아쉬웠던지 그 빈자리를 집사람이 냉큼 비집고 들어선다.

▼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모양이다. 마을 어귀에 ‘김삿갓 아리랑장터(이정표 : 관풍헌 23.1㎞/ 김삿갓면사무소 0.5㎞)’를 만들어 놓았다. 김삿갓의 풍류를 상징하기 위해 ‘김삿갓’이란 브랜드를 붙였는데, 도시민과 김삿갓면의 농가를 직접 연결해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도농 교류의 장’이다.

▼ 그 옆에는 ‘늘보’라는 단어도 보인다. ‘자연과 함께 여유로운 삶’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맞다. 이곳 김삿갓면은 강원지역에서는 최초, 국내에서는 11번째로 슬로시티(slow city) 인증(2012년)을 받았었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전통과 자연을 보전하면서 유유자적하고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마을을 벗어난 탐방로는 잠시지만 88번 지방도를 따른다. 자동차의 통행이 빈번한 도로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안전사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김삿갓’이란 브랜드로 포장된 포도농장이나 살짝 곁눈질 해보자.

▼ 탐방로는 ‘옥동교’ 직전(이정표 : 관풍헌 23㎞/ 김삿갓면사무소 0.6㎞)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입구에 이 마을이 반딧불이 체험장임을 알리는 ‘마을표지석’과 함께 옥동리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세웠다. 고려시대 옆 고을인 예밀리 밀동에 밀주(密州)의 관아가 있었는데,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監獄)이 옥동리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옥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옥동(獄洞)’으로 불렀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옥동(玉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 119지역대(영월소방서)를 지나자 이번에는 옥동천의 둑방길을 따른다. 이때 오른편으로 옥동천의 물길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저 물은 대야산성의 발치를 적신 후 이내 남한강으로 흡수된다.

▼ 옥동천의 물길이 회돌이 치는 곳에는 ‘마당바위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풍광이 뛰어난 곳인데도 불구하고 주차된 차량은 두어 대가 전부다. 그게 못마땅했던지 누렁이가 목청껏 짖어댄다. 아서라! 우린 그저 지나치는 길손일 따름이란다.

▼ 펜션의 앞마당을 가로지른 탐방로는 곧장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 길은 고운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험하지도 않다. 비좁은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나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산골짜기를 헤집는 옛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인공적인 시설을 배제하다보니 심지어는 벤치 하나도 놓아두지 않았다. 산골짜기의 강원도 사투리가 ‘산꼬라데이’라니 ‘산꼬라데이길’의 전형적인 풍경이랄까?

▼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앞서가던 ‘몽중루’님이 쉬고 계신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외씨버선길 도반(道伴)이신데 초반인데도 저렇게 힘들어하는 건 그만큼 이 구간이 힘들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에 가파른 오르막길과 힘겨룸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 리본에 적힌 ‘폐광지역 걷는 길 조성사업’란 글귀가 눈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2000년대 초반 석탄관련 업무를 담당하면서 폐광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직접 피부로 느껴봤기 때문이다. 1989년 정부는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경제성이 떨어진 탄광들을 정리하는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을 추진했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게 ‘폐광지역’으로 탄광이 있거나 있었던 지역과 그 인접지역으로 폐광되거나 석탄생산이 감축됨에 따라 지역경제가 현저히 위축되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에 1995년‘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해당지역을 지원해오고 있는데 이 길도 그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 부근에 있던 옥동광업소와 후천탄광, 웅봉탄광 등도 당시에 문을 닫았었으니 말이다.

▼ 탐방로는 갈수록 더 가팔라진다. 그러다가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산 넘어 산’이라는 얘기에 딱 맞는 상황이라 하겠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쯤에서야 해발 445m의 고갯마루에 올라설 수 있었다. 펜션을 지난 지 43분만이다.

▼ 정상에는 옛길 이정표(대야뜰/ 옥동뜰)가 세워져 있었다. 낡아빠진 탓에 현재의 위치를 판독할 수 없었지만 영월군청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칠금이재’가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대야본동에서 옥동의 칠금이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했으니 말이다. 칠금이(七錦)는 마을 뒤 칠칠바위에 비가 개인 후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대야뜰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순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 내려서자 민가, 조금 더 내려가면 강원도의 전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세련된 수묵화처럼 펼쳐진 암벽과 소나무 숲 아래로 수십 미터 절벽이 이어지고, 그 절벽 밑으로 옥동천이 흐른다. 옥동천 뒤의 그 산들은 하나같이 기세가 대단하다. 천과 강이 아름다운 영월 땅엔 산들도 높고 깎아지른 듯 가파르다.

▼ 탐방로는 88번 지방도(이정표 : 관풍헌 20㎞/ 김삿갓면사무소 3.6㎞)에 내려서자마자 또 다시 헤어져 버린다. 그리고는 널따란 들녘으로 파고든다. 김삿갓면은 남한강이 서부를 적시는가 하면, 중동면에서 흘러든 옥동천이 면을 가로질러 남한강에 유입한다. 하지만 옥동천 연안을 따라 약간의 경지가 전개될 뿐 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그런데도 이곳은 끝이 가물거릴 정도로 들녘이 넓은 것이다. ‘대야(大野)’라는 지명이 붙은 이유이다.

▼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대야리(大野里, 이정표는 ’대야본동‘으로 적고 있었다)’가 손짓한다. 들녘에 크고 넓은 논과 밭이 있다고 해서 토속적인 지명으로 ‘댓들’이라고 불렀으나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대야리(大野里)’로 변했다. 자연 부락으로 맛밭, 가재골, 덕내, 마대 등이 있다.

▼ 들녘이 넓으니 주민들의 살림도 넉넉할 게 뻔하다. 이는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가옥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맞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영농방법 및 정부의 농업 정책을 비롯한 어업·의학 등 농촌의 생활전반을 다룬 정책서)’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넓은 들녘으로 형성된 대야리를 살기 좋은 ‘가거처(可居處)’로 기록하기도 했다. 명색이 선비였던 그가 어디 허투루 적었겠는가.

▼ 말복이 다음 주이니 아직은 ‘삼복더위’다. 기상청도 연일 ‘폭염경보’를 퐁퐁 날리며 외출을 삼가길 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시골집 처마 아래서는 빨갛게 영근 고추가 말라간다. 하긴 오늘이 입추(立秋)이니 계절은 이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게 아니겠는가.

▼ 동구 밖 숲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를 지었는가 하면 노거수 아래에 의자를 놓아 서늘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참! 수도까지 설치되어 있어 성급한 사람 몇은 땀까지 씻고 있었다.(사진은 총무님 것을 빌려왔다). 들머리인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 오늘의 꽃은 ‘능소화’로 꼽아봤다.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에는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머금고 만개한 능소화 만큼 어울리는 꽃이 없어보여서이다. 능소화는 금등화(金藤花, 꽃말도 ‘명예’이다)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에게 임금이 관모에 꼽아주던 어사화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운의 꿈을 안고 백일장으로 향하는 김삿갓의 마음이 되어 능소화를 바라보면 어떨까?

▼ 탐방로는 소공원의 앞(이정표 : 관풍헌 19㎞/ 김삿갓면사무소 4.6㎞)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맞대천’이라는 개울 수준의 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 산으로 들어서기 직전 해바라기 꽃밭이 널따랗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는 옥동천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이게 만만찮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꽃밭을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면 좋으련만 집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얘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는 고갯마루를 오르내리면서 심신이 지쳐버린 모양이다.

▼ 탐방로는 예상보다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가팔라져 버린다. 특별한 볼거리 없이 힘만 드는 구간이다.

▼ 대야마을을 출발한지 18분 만에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큰재(성재)’가 벌써 나왔나보다 싶었는데, 막상 올라선 고갯마루는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이정표 등 이곳이 ‘큰재’임을 알리는 시설물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맞다. 핸드폰의 앱을 확인해보니 해발고도를 290m로 찍고 있다. 아직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다.

▼ 탐방로는 또 다시 아래로 향한다. 다음에 올라야 할 큰재는 조금 전에 올랐던 고갯마루보다 훨씬 더 놓은 데도 말이다. 그 내리막길이 250m 밖에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다시 시작된 오르막길은 순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탐방로는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위로 향한다.

▼ 대야리를 통과한지 30분 만에 ‘큰재(성재, 400.8m)’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대야산성’이라는 문화재 하나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씨버선길의 여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야산성’을 별도의 이정표(구구새민박/ 대야산성/ 대야본동)에 표기해 놓은 이유이다.

▼ 외씨버선길에서도 ‘대야산성’ 안내판을 세워놓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퇴뫼식 산성(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둘레 400여m의 성벽이 4.5~5m 높이로 쌓여있는데, 지금은 모두 붕괴되고 남쪽성벽 일부와 서쪽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란다.

▼ 배낭을 벗어놓은 채로 대야산성에 다녀오기로 했다. 무너져버린 옛 성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조상이 남긴 소중한 문화재를 그냥 지나쳐서야 되겠는가. 산성으로 가는 길은 ‘대야산성 안내판’의 뒤로 열린다. 탐방로는 밧줄난간을 설치하는 등 잘 닦아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는 않은 듯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이 가는 길을 자꾸 훼방 놓는다.

▼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이정표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그럼 이정표(전망대↑/ 대야산성→/ 큰재↓)를 한번 살펴보자. 큰재에서 올라왔고 전망대로 가는 길이니 두 지점의 방향표시는 맞다. 하지만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대야산성을 찾겠다면 이는 백발백중 허탕이다. 오른편에서는 성곽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야산성의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높이가 4~5m쯤 되어 보이는 성벽이 나타날 것이다. 이게 바로 ‘대야산성’이다. 삼국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됐다고 한다. 현재는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이곳은 서쪽 성벽의 일부다.

▼ 성벽을 둘러본 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야산성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만난 정체모를 바윗돌. ‘이 뭐꼬’라는 스님들이 즐겨 사용하는 화두가 떠오를 정도로 그 용도가 궁금하다. 귀가 후 찾아낸 정보에는 출토 유물로 회백색연질의 기와편과 적갈색연질·회청색 경질의 토기편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큼지막한 돌멩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정상을 지나자 헬기장보다도 훨씬 더 넓어 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관리를 하지 않는 듯 가시덤불로 가득 차있어 망원경까지 갖춘 조망처까지 나아가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 전망대에 올라서면 굽이굽이 흘러가는 남한강의 물길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의 풍경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한 폭의 캔버스를 펼쳐 놓은 듯하다. 참고로 왼편에 보이는 물줄기는 남한강이다. 영월읍내에서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됐다. 그보다 조금 좁아 보이는 오른편은 ‘옥동천’이다. 두 물길은 요 아래에서 합쳐지면서 두물머리를 만든다.

▼ 두물머리에서 옥동천을 물을 보탠 남한강 물길은 이제 강원도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충청도 땅을 휘감아 돌다 경기도를 지나면서 한강이 되고 서해로 흐른다. 반세기 전만 해도 저 물줄기는 뗏군들의 애환을 싣고 흐르던 뗏목길이었다. 정선 여량에서 출발한 뗏목이 동강에 오르면, 황새여울과 된꼬까리 같은 급류가 간혹 그곳을 지나는 뗏군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 볼 것을 다 보았으면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큰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구구새민박 방향으로 내려선다. 아까 올라왔던 상황에 비하면 길은 엄청나게 고운 편이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래골의 해발이 275m이니 서둘러 고도를 낮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가재골 쉼터’에 내려선다. 고개를 넘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외씨버선길 알림판을 세워 탐방로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 놓쳐서는 안 될 시설물인 이정표(관풍헌 17.6㎞/ 김삿갓면사무소 6㎞)도 보인다. 13길(관풍헌가는 길)의 완주를 인정받으려면 이 이정표를 담은 인물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가재골(可在洞)’은 풍수학적인 의미로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워낙 물이 맑아 가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이곳은 김삿갓면 사람들조차 접근이 쉽지 않던 오지였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니 청산녹수(靑山綠水)의 자연이 훼손되지 않았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청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진 암반 위로 푸른빛 가득 담은 옥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 이렇게 좋은 풍광을 그대로 내버려 둘 현대인들이 아니다. 북한산 자락의 고급 주택보다도 더 반듯한 전원주택이 떡하니 들어앉았다. 하긴 이곳은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 괴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니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 예스러움을 퐁퐁 풍기는 저 주택은 십승지를 찾아온 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선 후기 사회혼란 때 정감록에 심취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평안도 출신 박씨들의 후손일지도.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하는 십승지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가재골이라니 말이다. 참고로 십승지란 오랜 전란에 시달린 이 땅의 민초들이 찾던 이상향을 말한다.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질병의 침입에도 끄떡없으며 자연재해에서도 무탈한 복지(福地)가 바로 십승지다.

▼ 외지인들이라고 해서 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도로가 뚫린 이후로는 자동차로도 접근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피크닉용 테이블을 물속에 펼쳐놓고 가족단위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 가재골을 일컫던 ‘오지’라는 단어는 이제 옛말이 됐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시멘트도로로 바뀐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영춘 장날 짐을 지고 다니던 토끼길도 지금은 등산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우리처럼 둘레길을 걷는 나그네들 차지가 되었다. 아무튼 새로 뚫린 도로를 따라 얼마간 내려가자 시야가 툭 트인다. 남한강과 맞닿은 천애절벽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코너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들여 쌓아올린 4기의 돌탑 앞에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대신 ‘산은 그대고 그대는 강이니 깨끗이 즐겨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의자에 적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문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 길은 천애의 낭떠러지로 나있다.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인데도 사면을 깎아 외길을 만든 것이다. 토목 공법의 발전이 만들어낸 역사라 하겠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가재골교’가 나온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 가재골 사람들은 장마 때만 되면 며칠씩 고립되는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옥동천에 놓인 잠수교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 굽이굽이 흘러가는 남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옛날 영월의 특산물인 담배·콩·옥수수 등의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서울 광나루로 가던 물길이다. 뱃사공들이 돌아올 때는 소금·광목·석유 등의 생필품을 싣고 왔다.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 이 다리가 새로 놓이기 전, 각동교로 이어주던 좁은 시멘트도로는 차단되어 있었다. 이유는 ‘안전사고 위험이 있는 급경사지’라서.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2019년 다리를 새로 놓으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는 잠수교의 통행을 막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류하는 저곳은 옛날 ‘맛밭나루터’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민들이 남한강을 건너던 나루터였다. 저곳과 맞은편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든다고 해서 ‘뱃나드리’라 부르기도 했단다.

▼ 다리를 건넌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595번 지방도로 올라서게 된다. 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외씨버선길에서 세운 이정표.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의 진행은 무의미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 뒤돌아볼라치면 남한강과 옥동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곳은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특히 쏘가리의 입질이 좋다는데, ‘영월군수배’ 전국 쏘가리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그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대야산성이다. 험준한데다 시야까지 뻥 뚫리니 산성이 자리 잡기에 저만한 곳도 없겠다.

▼ 탐방을 포기하고 고씨동굴관광지로 가는 길,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각동교(角洞橋)’가 나온다. 각동리와 진별리 사이의 남한강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저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맛밭에서 나룻배(찻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니 두 마을로 봐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다리라 하겠다.

▼ 다리의 양쪽 입구는 김삿갓이 지키고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삿갓과 두루마기, 괴나리봇짐, 지팡이 차림이다. 그래, 혹자는 이 길을 ‘김삿갓길’이라 부르기도 했다. 김삿갓이 세상의 번뇌를 훌훌 털어버린 채로 지나다녔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예사로운 길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길이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찾아온 나 또한 그런 심정이 되어 걸어본다.

▼ 이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레프팅을 즐기는 남한강. 그 건너에는 태화산이 튼실한 등성이를 자랑하며 뻗어 있다. 

▼ 젊은 김삿갓은 백일장 참석을 위해 이 길을 통해 관풍헌으로 갔을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걸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세상을 등진 이후의 심정이 되어 걸어본다. 첫 걸음은 김삿갓의 ‘풍류’를, 또 한 번의 발걸음에 김삿갓의 ‘해학’을, 또 다시 내딛는 한 발에는 김삿갓의 ‘무소유’ 정신을 실어본다. 그리고 난 나이 칠십에 또 다른 무엇을 깨달아간다.

▼ 버스정류장에 김삿갓의 ‘내 삿갓’이란 시가 적혀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는 우연히 쓴 삿갓이 평생의 반려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의 길이자 도반(道伴)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사람살이가 길을 낸다’고 했다. 그 길이 모여 역사를 이루고, 역사가 다시 길을 낸다고도 했다. 김삿갓이 걸었을 이 길도 그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사념으로 걸을 따름이다. 보다 바람직한 사람의 길을 찾아가면서...

▼ 날머리는 ‘고씨동굴 관광지구’

각동교를 건넌지 10분 만에 ‘고씨동굴 관광지구’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이곳은 관광지와 숙박 시설이 밀집해 있어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리 건너에는 ‘고씨굴(천연기념물 제219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 싸운 고씨 일가가 피난한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석회동굴이다. 하지만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 입장 인원을 제한하는 탓에 1시간 이상이나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1.05km.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그만큼 힘든 코스였다고 보는 게 옳겠다.

▼ 완주는 비록 포기했지만, 글로서나마 외씨버선길 240km를 완성시키기 위해 관풍헌(觀風軒)의 풍경을 트레킹 도반인 ‘몽중루’님의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외씨버선길의 종점인 관풍헌은 조선시대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으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端宗)이 피눈물을 흘린 장소다. 이 지역 서강에 둘러싸인 청령포에 유배됐던 비운의 단종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17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사람은 김삿갓이다. 스무 살 나이의 김병연은 이곳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한다. 그리고는 덜컥 장원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지탄한 대상이 조부 김익순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하늘을 보지 않으며 지낸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 비극이 시작된 곳이 이곳 관풍헌이다.

▼ 마당 한켠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子規樓, 총무님 사진을 빌려왔다)’가 있다. 세종 때 영월 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세운 누각으로, 청령포에 물이 범람하자 이곳 영월객사로 거처를 옮긴 단종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두견새 우는 소리에 자신의 한을 실어 시로 남기기도 했다. ‘자규사(子規詞)’ 및 ‘자규시(子規詩)’인데 그 내용이 어찌나 애절했던지 후세 사람들이 누각의 이름을 매죽루(梅竹樓)’에서 자규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둘 가운데 자규사를 옮겨본다. <월백야촉혼추(月白夜蜀魂啾), 함수정의류두(含愁情依榴頭), 이제비아문고(爾啼悲我聞苦), 무이성무아수(無爾聲無我愁), 기어세상고노인(寄語世上苦勞人), 신막춘삼월자규루(愼莫登春三月子規樓) ⇒ 달 밝은 밤 소쩍새는 슬피 우는데, 수심에 젖어 누각에 기대어 있으려니, 네가 슬피 울어 듣는 나도 괴롭구나,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보시오 세상 근심 많은 이들이어,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