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10), ‘약수탕 길

 

여행일 : ‘21. 6. 19(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 일원

여행코스 : 백두대간수목원 끝부분→주실령→박달령→오전약수→물야저수지→생달마을→상운사(소요시간 : 15.1km/ 실제는 물야저수지까지 11.31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 번째 길인 ‘약수탕 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마지막 구간으로, 중간에 조선 제일의 약수라는 주전약수를 거친다고 해서 ‘약수탕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도 역시 보부상들이 물건을 팔러 다니면서 걸었던 길이다. 주실령이나 박달령처럼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들머리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는 고개(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산 103-3)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법전면을 거쳐 춘양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 영월방면으로 올라오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앞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915번 지방도를 타고 오전약수 쪽으로 올라오면 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면서 작은 고갯마루 위에 올라선다. 국가지점번호판(마바 1428-9034)의 하단에는 ‘서벽시점(0㎞)’이라고 적어 이곳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아마 백두대간수목원의 뒤로 나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외씨버선 9길의 일부구간)’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약수탕길은 이곳에서 시작해 상운사에서 끝을 맺는다. 첨부된 지도에 ‘시점’으로 표시된 지점이다. 하지만 들머리에 세워진 구간안내도는 시점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후문(카페테리아)으로 적고 있었다. 이보다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10길인 ’약수탕길‘의 얼굴마담이 주전약수탕 하나만으로는 외로웠던가 보다. 약수탕길을 설명하면서 수목원의 후문 근처에 있는 두내약수탕까지 포함시킨 걸 보면 말이다.

▼ 10길의 수문장은 ‘장승’이다. 흔히 만나게 되는 여느 장승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의 외씨대장군과 외씨여장군이 길손을 맞는다. 우체통도 보인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마음속 그리운 이에게 몇 자 적어 내 마음을 실어 보내는 ‘제멋대로 우체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이. 그것도 그리운 이로부터 편지가 날아온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가슴 따뜻한 추억 오래오래 간직하며 두고두고 꺼내볼 것 같다. 엽서도 비치되어 있으니 서툰 글씨로나마 그리운 마음 가득 담아 우체통에 넣어보자. 곧바로 배달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전달 될. 제멋대로 편지다.

▼ 왼쪽, 그러니까 북쪽 방향의 숲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가 산속으로 나있으니 트레킹(trekking)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코스라 하겠다. 트레킹이란 게 본디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산길에서의 도보 여행을 가리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 탐방로는 능선을 따른다. 오른편의 산자락 아래로 915번 지방도가 따라오는 모양새이다. 어쩌면 이 길은 ‘외씨버선길’을 조성하면서 도로변을 걷지 않아도 되도록 새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오가는 차량들을 피해가며 걸어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중간에 임도를 가로지르기도 하나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외씨버선길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탐방로가 도로변을 피한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처럼 외씨버선길을 조성하면서 별도의 탐방로를 새로 내놓은 것이다. 해파랑길을 3년간이나 걸으며 우리 곁을 씽씽 달리던 자동차들에 얼마나 소름끼쳐 했던가. 외씨버선 관계자들에게 지면을 빌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숲길을 따라 18분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다시 915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그리고 주실령까지 도로변을 걷게 된다. 오뉴월 뙤약볕에 통째로 노출되는 고약한 구간이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부담스럽지는 않다.

▼ 잠시 후 춘양면(서벽리)과 물야면(오전리)의 경계인 ‘주실령’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백두대간 마룻금의 ‘옥돌봉(1,242m)’과 금강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문수산(1,205.6m)’ 사이에 위치한 해발 780m의 고갯마루이다. ‘주실령’이란 지명은 옛 얘기로부터 출발한다.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곳은 물속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당시 움푹하게 파인 이곳으로 배가 지나다녔다고 해서 ‘배 주(舟)’자를 붙여 주실령이라 했다는 것이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길가에 세워놓은 지도에도 물야과 춘양을 잇는 도로 말고도, 옥돌봉과 문수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그려 넣었다.

▼ 주실령은 보부상들이 해거름에 지게를 작대기에 걸쳐놓고 땀을 식히며 부모자식을 생각하던 고갯길이라고 했다. 탐방로는 이 고갯마루(이정표 : 상운사 12.2㎞/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0.8㎞)에서 도로와 헤어진다. 보부상들이 박달령으로 가기 위해 걷던 숲길이다.

▼ 길이 나뉘는 곳에는 외씨버선길의 알림판까지 갖춘 작은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란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해 문수산과 만리산, 조운산, 학가산 등의 산들을 일군 뒤 내성천이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14,5㎞의 산줄기이다. 봉화군에서 이 산줄기에다 트레킹코스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주실령과 헤어진 탐방로는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참! 지름길도 있다는 걸 깜빡 빼먹을 뻔했다. 첨부된 지도에 녹색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이 경우 박달령을 오르지 않고도 도로를 따라 오전약수관광단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섰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정규 탐방로를 온전히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 이곳 ‘주실령’은 산기슭에 수목이 울창하여 다래나 머루 같은 열매가 많이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맞다. 우리부부는 이곳에서 지명을 되새기게 만드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이었던 것이다. ‘산딸기 잼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집사람의 호들갑이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울창한 숲속을 걷다보니 특별한 볼거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오른 침엽수림이 유일한 볼거리라고나 할까?

▼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임도(이정표 : 상운사 11.3㎞/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7㎞)와 마주친다. 박달령으로 올라가는 임도인데 거리는 대략 4.2㎞쯤 된다. 꼬불꼬불 산허리를 감아 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오르막 임도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거리가 4.2㎞나 되니 급할 것이 없는 모양이다. 이 구간은 길이 꼬불꼬불해서 주변의 나무들이 그늘막이 되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그 숲이 시야를 막아버려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 시야를 막았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가끔은 낙엽송이 만들어내는 이런 멋진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낙엽송은 초봄의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숲을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때를 제대로 맞추어 찾아온 셈이다.

▼ 겨울 풍경의 진미라는 ‘자작나무’도 보인다. 숲이 아니라 가로수 대용. 그마저도 금방 끝나버렸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계속되었다. 1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박달령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라선 박달령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안내판과 이정표(선달산 5.0㎞/ 옥돌봉 3.0㎞) 등은 기본.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가 하면, 기상악화 때를 대비한 대피소도 지어놓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 박달령(해발 970m)은 예로부터 경북(봉화군)과 강원도(영월군)을 오가던 부보상들이 이용하던 고갯마루였다. 지금은 그 길을 우리처럼 외씨버선길을 걷는 종주꾼들로도 모라자 백두대간종주꾼들까지 걷는다.

▼ 고갯마루에는 이곳이 ‘백두대간(白頭大幹)’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높이가 4m쯤 되는 거대한 화강암 자연석에 ‘백두대간 심벌로고’와 ‘백두대간 박달령’ 글자를 선명하게 새겼는데, 백두대간 종주꾼들에게는 인증을 위한 포토죤이기도 하다. 참고로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친 다음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총 길이는 약 1,400km의 산줄기이다. 이 가운데 갈곶산에서 시작되는 봉화구간은 부소봉까지 대략 20km쯤 된다.

▼ ‘산령각(山靈閣)’도 들어서 있었다. 요 아래 오전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한편, 자연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고사를 매년 지내온다는 신당(神堂)이다. 산신제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었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 어귀에 세워진 성황당(城隍堂)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도 다른 의미라고 한다.

▼ 안에는 ‘박달령 성황신(朴達嶺 城隍堂)’을 모시고 있었다. 성황신(또는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최근까지 가장 널리 제사지내던 신이다. 그나저나 마을사람들이 우리처럼 어쩌다 한번 박달령을 찾는 사람들의 안녕도 빌어준다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선다. 우리부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짐을 풀었다. 벤치에 앉으니 선선한 바람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어서 산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간지럽힌다. 박달령의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바람이 주는 쉼과는 또 다른 종류의 쉼이 일상에 찌든 ‘스트레스’라는 때를 말끔히 날려준다.

▼ 초입의 이정표(상운사 7.5㎞/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5.5㎞)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시설물이다. ‘약수탕길’을 완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팻말을 배경으로 삼은 사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젠 오전약수로 내려갈 차례이다. 산길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약수인데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이 찾아낸 약수라 전해진다. 물야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곽개천’이라는 보부상이 약수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가 쑥밭에 누워 자다 ‘네 옆에 만병통치의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꾼 후 옆을 보니 약수가 솟고 있더란다.

▼ 내려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 나있다. 그런데 가끔은 능선을 꿰뚫어놓기도 했다. 능선의 곳곳을 움푹하게 파가며 길을 내놓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오르려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보다.

▼ 어떤 곳은 능선을 따라 홈을 파듯이 길은 내놓은 곳도 있다. 이 길은 옛날 보부상들이 오가면서 만들어진 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소설가 김주영이 소설 ‘객주’를 완성하기 위해 걸었던 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험하고 고된 이 길을 오가던 그들의 여정은 고스란히 시가 되고, 소설로 되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길에는 그네들의 삶의 애환이 오롯이 남아있다.

▼ 덕분에 뿌리가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언젠가 캄보디아의 ‘따 프롬(Ta Prohm)’에서 만났던 풍경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잘 생긴 것도 눈에 띄었다. 설마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액션과 판타지에 모험까지 곁들인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에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탄 나무에 견주겠는가마는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했다.

▼ 주전마을에 내려서면서 산길은 끝난다. 날머리에는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백두대간으로 올라가는 진입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2002년도엔가 백두대간을 이어가면서 이곳을 들머리로 삼았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만 해도 백두대간은 접근이 어려웠던지라 무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곳 주전마을 역시 첫 닭도 울기 전에 통과했었다.

▼ 부지런히 걷던 집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순전히 자연이 준 선물이다. 집사람이 건네 준 산딸기 몇 알을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온통 진동한다. 달콤함의 연장이 곧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일 것이다.

▼ 이제 주전마을의 마을안길을 걷게 된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마을이자 경북 북부지역의 젖줄인 내성천(乃城川)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주실령과 박달령을 통해 부석·풍기·봉화·춘양·태백·영월 등으로 통하는 도보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옛 보부상들이 드나들며 곳곳에 그들의 정취와 역사를 담은 이야기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 몇 걸음 더 걷자 ‘오전약수’가 길손을 반긴다. ‘오전’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약수이다. 이곳의 약수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은 다음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 먹으면서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쑥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있다. 생달과 물집마을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서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를 이룬다 하여 ‘수전(水田)’. 이게 ‘쑤뱅이’로 불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수밭’, ‘쑥밭’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190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쑥 애(艾)’자와 ‘밭 전(田)’자를 따서 애전(艾田)으로 불리다가, ‘쑥밭’의 한자식 표현인 오늘날의 ‘오전(梧田)’이 되었다.

▼ ‘으~~’ 약수를 떠 마시던 집사람의 표정이 마치 소태를 씹은 것처럼 변해버린다. ‘탄산약수’라 적혀있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로 여기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나도 한 모금 마셔봤다. 그러자 톡 쏘는 맛과 철분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병까지 고치게 해준다는 오전약수를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두 잔이 아니라 서너 잔을 연거푸 마셔버린 이유이다.

▼ 조금 더 내려서면 이번에는 멋진 바위절벽이 길손을 맞는다. 주상절리처럼 만든 인공절벽인데 쉼터용으로 조성했는지 벤치 및 분수까지 함께 만들어놓았다. 참!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분수 앞에서 도로를 버리고 왼편으로 내려가야 오전약수의 ‘원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로(이정표 : 상운사 5.5㎞/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7.5㎞)를 건너면 ‘약수정’이란 정자를 만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나게 된다. 보부상의 유래가 적힌 석상까지 세워놓은 걸로 보아 이곳이 ‘원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의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큰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며 조선 최고의 약수로 인정받아 왔다. 청주의 초정약수는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오전약수는 전설도 하나 전해진다. 옛날 이 부근에 살던 부정한 여인이 남자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단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갑자기 흙탕물로 변해버리더란다. 이는 약수가 몸을 이롭게 하는 효능 못지않게 마시는 이의 정갈한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는 거북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김새로만 봐서는 일반의 약수터와 다름없다. 그런데도 길거리 이정표들이 하나같이 ‘약수탕’으로 적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몸을 담글 수 있는 탕(湯)이 있는 줄 알고 속옷까지 챙겨갔다가 헛걸음만 했다는 어느 지인의 농담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방문객을 위해 비치해 둔 종이컵으로 한 모금 받아 마셔보니 혀끝을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달콤한 음료에 익숙해진 내 취향은 아니었다.

▼ 약수터 옆 바위에는 ‘人生不老 樂山樂水(인생불로 요산요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신재 주세붕이 이곳을 찾아 약수를 마시고 남겼다는 휘호로 ‘산을 즐기고 약수를 즐기면 인생이 늙지 않는다.’쯤 되겠다. 그는 또 주전약수를 일러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고 칭송했단다.

▼ 마을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데크 탐방로는 기본. 분수로 치장된 하천에, 조그만 터라도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물레방아나 조명등 같은 조형물들을 설치했다.

▼ 조금 더 내려가자 이번에는 보부상을 테마로 한 공원이 나온다. ‘보부상 정원’이라는 이름의 마을 쉼터로 보부상 조형물과 오두막, 장승, 솟대 등을 설치해 놓았다.

▼ 지게를 지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여간 안쓰럽다. 자신의 몸보다도 더 커 보이는 짐이 얹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 표정을 엿볼 수는 없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누군가가 마스크를 씌워놓았다.

▼ 외씨버선길 나그네들을 위한 지원시설인 봉화객주는 ‘보부상 정원’의 맞은편에 들어서있었다. 외씨버선길 안내센터로 쓰이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길…노닐다 봉화객주’라는 이름의 카페로 재탄생시켰다. 봉화에서 생산되는 약초들을 활용한 한방족욕체험을 하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특색 있는 카페란다.

▼ 내부는 이곳이 ‘외씨버선길’의 객주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천정에 매달린 한 쌍의 ‘외씨버선’. 봉화군에서 만날 수 있는 관광명소가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있는가 하면, 판매용의 외씨버선길 기념품도 여럿 진열해 놓았다.

▼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이곳 봉화객주를 지키는 근무자였다. 웃음 띤 환대와 친절한 안내로도 모자라 따뜻한 커피까지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슬그머니 건네주는 ‘토시’는 일정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우리 부부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오전약수를 모두 둘러봤으니 이젠 생달마을로 내려갈 차례이다. 그런데 낯익은 이름이 적힌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가 이 부근에 있다는 것이다. 이몽룡의 모티브가 된 ‘계서 성이성(成以性)’의 생가를 말하는데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조선 중기 남원부사 성안의 아들로 태어나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 후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4차례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니 말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도로와 헤어져 숲속으로 들어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가급적 도로변을 벗어나려는 외씨버선길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런 한적한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지게 된다.

▼ 또 다시 도로로 내려서자 길가에 커다란 자연석 하나가 심은 듯 세워져 있다. ‘보부상위령비 표지석 비문’을 새겼는데, 지금은 ‘물야저수지’ 속에 잠겨버린 마을(백병마을)에서 살던 보부상들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보부상들이 언제부턴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이 없던 그들은 죽으면서 소유하고 있던 땅을 모두 마을 소작인들에게 기부했는데, 이후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보상을 받게 되자 그 돈으로 마을 기금을 조성하여 이 위령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 그 옆에는 조선 말기 보부상 11명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를 세워놓았다. 매년 9월 그믐날이면 지낸다는 보부상들의 합동제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자손이 없는 그들의 영혼을 마을 주민들이 합동으로 섬긴다는 얘기이다.

▼ 생달마을을 향해 걷다가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날머리인 상운사는 아직도 멀었는데, 아니 아직 물야저수지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산악회 버스가 도로변에 세워져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대충 이곳에서 마무리 짓겠단다. 그렇다면 다음 11길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 얘기가 된다. 다음 코스는 선달산과 어래산 등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봉우리들을 넘어야한다. 거리도 15.4㎞나 되기 때문에 많이 버겁다. 그런 구간을 오히려 늘려서 걸어야만 한다니 난 이제 죽었다.

▼ 왼편으로는 ‘물야저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홍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위해 백병마을 부지에 조성한 다목적 댐이다. 아니 나에게는 추억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오래 전, 선달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 이 저수지를 만났었고, 이곳에서 난 또 다른 추억을 떠올렸었다. 당시의 소회를 옮겨본다. <몇 번인가 영국출장을 갔었지만. 런던, 맨체스터 등등 늘상 출장지에서만 머물다가, 언젠가, 워드워즈의 생가를 둘러보고파 힘들여 짬을 내어봤던 글라스미어 지방의 원더미어 호수.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단체에서 18세기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워즈워드 생가보다도, 난, 하룻밤을 묵으며 거닐었던 호숫가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 옛 추억을 되살리는 호수를 만나다니. 그때, 원더미어 호숫가에서 난 그 호젓함에 가슴을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 울렁거림에 나도 몰래 저수지 물에 손을 담가본다.>

▼ 생달마을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물야저수지의 또 다른 상류로 버스길은 이곳에서 끝난다. 상운사로 올라가는 길은 1차선이라서 대형버스의 통행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번 11길(마루금길)은 그 시점이 상운사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곳부터 걸아야만 한다.

▼ 약수탕길의 인증용 이정표(상운사 2.7㎞/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0.3㎞)는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까 박달령에서 인증사진을 찍지 못한 사람은 이곳에서라도 꼭 찍어두어야 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3시간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1.31km이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오르막 임도와 산길이 대부분이었던 데다, 오색약수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나 보다.

▼ 부근에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여겨지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소백산자락길의 스탬프보관함과 안내도도 보인다. 9자락과 10자락의 분기점이 이곳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