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2), 슬로시티길

 

여행일 : ‘21. 6. 19(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청송읍과 파천면 일원

여행코스 : 신기리 느티나무→소망의 돌탑→용전천 징검다리→중평솔밭→중평마을→덕평마을→가풀막재→소헌공원(소요시간 : 10.5km/ 실제는 14.59㎞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두 번째 길인 ‘슬로시티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청송 권역의 가운데 구간으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인증 받은 청송의 산길과 들길, 마을길을 걷게 된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느림의 기술(slowware)을 느림(Slow)과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그러니 청송의 슬로시티 길을 걸으며 농촌과 도시, 아날로그와 디지털, 빠름과 느림이 조화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깊이 느껴보자. 소읍이지만 도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송 시내에서는 글로벌과 디지털을 그리고 고택이 즐비한 덕천마을에서는 로컬과 아날로그를 음미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강변이나 산길을 걷게 되는 나머지 구간에서는 느림의 미학이라도 펼쳐보면서 말이다.

 

▼ 들머리는 신기리 느티나무(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659)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다 ‘신기1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신기옹정길’을 따르면 잠시 후 들머리인 신기리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의 느티나무는 1660년경 ‘인동 장씨’의 입향 시조가 심었다고 한다. 360살이라는 나이는 느티나무 치고는 꽤 젊은 편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제192호)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나무가 품은 내력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되어 정월 대보름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동네 제사를 지내왔다니 말이다. 나무의 아래와 윗가지에서 동시에 잎이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다.

▼ ‘슬로시티 길’은 청송읍(월막리)의 소헌공원에서 시작해 송강리(파천면)의 전통한지체험장까지 11.5㎞ 구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지체험장까지 가지 않고 이곳을 들·날머리로 삼는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셋째길인 ‘김주영객주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외씨버선길의 이정표도 구간 거리를 10.5㎞로 적고 있었다. 아무튼 이 구간은 고택에서 전통가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옛길을 따라 걸으며 전통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들머리 사진은 지난해 말 3길을 시작하면서 찍은 것을 사용했다)으로 나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미 3길(김주영 객주길)을 걸었던 나에게는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처음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길 찾기가 다소 애매한 곳이다. 2길과 3길이 거의 같은 방향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왼쪽은 3길의 시점이고 오른편은 2길의 종점이라고 기억해두면 되겠다.

▼ 길가는 온통 사과밭 천지다. 문득 ‘사과가 익어가는 청송 들녘을 돌아 나오는 바람에는 사과향이 배어있다’던 어느 글이 떠오른다. 그만큼 사과밭이 많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송 하면 가장 먼저 ‘사과’를 떠올린다. 영양의 ‘고추’, 봉화의 ‘송이버섯’과 함께 말이다.

▼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들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그러다가 20분 조금 못되는 곳에 위치한 신기농원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으면서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10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산길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변한다.

▼ 트레킹의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눈요기다. 하지만 주전부리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오늘의 주전부리는 산딸기가 되어주었다. 길가 비탈진 곳에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탐스럽게 열린 것을 반가운 마음에 몇 개 따먹어 봤다. 새콤달콤한 맛이 어릴적 추억의 맛 그대로였다.

▼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신기리의 느티나무에게 이별을 고한지는 30분 만에 ‘한티재(257m)’에 올라섰다. 고갯마루에는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돌탑이 쌓아져 있었다. 안내판은 큰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적었다. 특히 바라는 바가 너무 많은 어른들보다는 어린이의 소원을 더 잘 들어준단다. 그 이유가 행정 일손이 딸려서라는 게 재미있다. 요즘은 스토리텔링까지도 시대에 맞게 각색되는 모양이다. 참!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곳의 이정표(소헌공원 9㎞/ 신기리 느티나무 1.5㎞)를 꼭 챙겨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 올라왔던 길에 비해 내려가는 길은 무척 사나웠다. 가파른 경사는 기본.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토끼비리에 가까운 곳도 있다. 거기다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바닥에 깔린 돌멩이까지도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 그렇게 6분쯤 내려서자 국도(31호선)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탐방로는 몇 걸음 걷지 않아 도로와 헤어진다. 그리고 들길로 내려선다.

▼ 이어서 탐방로는 용전천(龍纏川)의 제방을 따른다. 용전천은 청송군 부남면 중기리에서 발원하여 주산천과 주방천 등 소하천과 합류하면서 흐르다가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반변천에 합류되는 물줄기이다.

▼ 강변을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하천으로 내려선다. 그런데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각으로 반듯하게 자른 화강암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의 돌이 아니어선지 가슴에 와 닿는 낭만은 없다. 그렇다고 껑충껑충 뛰어 다리를 건너는 재미까지 없는 것은 아니니 미리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 참! 이 길은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길이 막힌다. 첨부된 지도에 우회로가 그려져 있는 이유이다.

▼ 징검다리를 건넌 후에도 탐방로는 용전천의 제방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오른편에는 널따란 농경지. 반면에 왼쪽의 천변은 갈대가 무성하다. 안타까운 것은 용전천을 곁눈질로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기와 다슬기를 방류했으니 출입을 통제한다는 경고판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서있다.

▼ 들길로 내려선지 20분. 오른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사양서원(泗陽書院)’이 눈에 들어온다. 평산신씨 영해파 시조인 신현(申賢)과 그의 아들 신용희(申用羲), 그리고 원천석(元天錫)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1888년 논산의 계룡산 아래에 화해사(華海祠)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농지개혁으로 인해 서원의 땅이 분배되면서 사당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1966년 종택이 있는 현 위치로 이전했다. 서원 내의 화해사란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 서원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중평솔밭’이 나온다. 200살이 넘은 소나무 8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은 ‘평산 신씨’라는 본관까지 버리고 ‘평해 신씨’로 살아가던 중평마을의 선비들이 마을을 숨기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다. 현재 야영장으로 운영 중인데, 지반 정비를 잘 다듬어 놓아 텐트를 치고 근처 강에서 낚시나 물놀이하기 좋아 휴가철에는 가족단위 이용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 슬로시티길은 솔밭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용전천을 건넌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발길은 반대 방향에 위치한 ‘중평마을로 향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세 채나 들어서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중평마을에 대한 정보는 외씨버선길 트레킹을 함께 이어오고 있는 ‘몽중루’라는 분의 후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고택의 주인장과 같은 ‘평산 신씨’라는 이분은 글에서 옛 은자가 살던 마을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중평솔밭을 만든 이들이 숨어살던 마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 마을입구의 안내판을 살피다가 동네로 들어선다. 연화봉 아래에 들어앉은 이 마을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15세손인 신득청(申得淸)을 파시조로 한 ‘평산 신씨’ 판사공파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신득청은 고려말 공민왕 때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영해로 낙향한 뒤 은둔한 인물이다. 그 후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동해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 ‘점심 때가 되었는데도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고택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찾아들어간 ‘우선당(又善堂)’이란 저택의 주인장이 우리 부부와 헤어지며 건네 온 인사말이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지도를 그리듯이 자세히 설명해 준 것 만해도 고마운데, 자신의 부인이 집을 비운 탓에 찾아온 손님에게 점심 한 끼도 대접하지 못한다며 미안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겨운 인사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그리워했던 인심인가. 문득 ‘맑은 공기, 달콤한 바람, 따뜻한 마음’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청송을 찾아가라던 어느 글이 생각난다. 맞다. 이곳은 청송이다. 그리고 난 청송의 슬로시티 길에서 마음속으로 동경해오던 따뜻한 인심을 만났다.

▼ 그가 알려준 대로 ‘평산신씨 판사공파(平山申氏 判事公派)’의 종택(宗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1호)’을 찾았다. 판사공의 12세손인 신한태(申漢泰, 1663-1719)가 1705년경에 지었다는데 현재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영정, 서당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판사공파는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13세손 신현(申賢)이 영해군(寧海君)이 되면서 영해파로 분파했다. 그 후 대동보 규정에 따라 15세손인 태복판사(太僕判事) 신득청(申得淸)을 분파조(分派祖)로 판사공파가 되었고, 이 집이 파종택이 되었다.

▼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라서 세세한 것까지는 살펴볼 수 없었다. 대신 안내판에 적힌 글을 옮겨본다. 대문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바깥마당 우측에 별채가 빗겨 앉았고, 그 뒤편에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 본채가 자리 잡고 있다. 본채 배면 북동쪽 높은 곳에는 사당이 별곽을 이루고 있으며, 대문채 우측과 본채 후 좌측 모서리에는 내·외측이 놓여있다. 좌측 담장 중앙부에 나있는 트임문을 나서면 영정각과 서당이 사당과 이룬 동서축 선상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서당 앞쪽 낮은 곳에는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인 아래채가 들어앉았다.

▼ 종택과 붙어있는 서벽고택(棲碧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2호)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가림막으로 가려놓아 본래의 모습을 가늠조차 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로 상황 설명을 대신해본다.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의 서당 아래에 있는 아담한 ‘ㅁ’자형 한옥이 바로 서벽고택이다. 판사공파의 후손인 신한창(申漢昌)이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건립했으며, 1739년 신치구(申致龜)가 확장 증축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 ‘서벽고택’이라 했다.

▼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남고택(泗南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3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 고택도 역시 ‘ㅁ’자형 건물인데, 판사공파의 19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1780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특징은 사랑채의 기단을 높게 조성하여 누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팔작지붕도 높지막하게 올려 마치 독립된 별동의 건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 솔밭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중평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 건너에는 이정표(소헌공원 6.1㎞/ 신기리 느티나무 6.1㎞)와 함께 작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있다면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참! 정규 탐방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평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 데는 35분이 걸렸다.

▼ 이후부터는 용전천의 제방을 따라 걷는다. 용전천이 이번엔 오른쪽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왼편에는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심심산골인 청송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하겠다. 아니 조금 전에 들른 중평마을이나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덕천마을의 거대한 고택들은 이런 농경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을 더 걷자 이차선 도로인 안파로(안덕면과 파천면을 잇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로 올라선다. 이정표(소헌공원 4.8㎞/ 신기리 느티나무 5.7㎞)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용전천을 건너란다. 그곳에 ‘덕천교’가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조금 더 걷자 ‘경의교’라는 또 다른 다리가 나타난다. ‘덕천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라 할 수 있는데, 다리 앞에 이르자 커다란 장승 둘이 길손을 맞아준다. 이 장승들은 수문장 역할 말고도 ‘전통 테마 마을’임을 알리는 홍보 도우미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맞다. 이곳 덕천마을은 2005년부터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운영되고 있다. 고택에서 머물며 천연염색과 문인화, 전통혼례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매년 3만 명 이상이 찾는 청송의 대표적인 농촌체험형 관광마을이기도 하다

▼ 마을에서의 첫 만남은 경의재(景義齋)라는 제실. 향파 시조인 악은공 심원부(沈元符)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립했다. 본채 1동과 행랑채 1동, 그리고 부속건물로 관리사 및 신도비가 들어서있는데, 비교적 최근인 1983년에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이유이다.

▼ 경의재에서 마을은 가로수 길로 연결된다. 길 오른편에는 옛 둠벙(물 웅덩이)을 복원해 생태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그러니 곧게 뻗어나간 가로수 길이 내키지 않을 경우 둠벙가로 내놓은 산책로를 따르면 된다. 참!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곳에 덕천마을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덕천마을의 지도를 상세하게 그린 다음 고택과 정자 등의 주요 볼거리들을 사진과 함께 표시했다.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마을의 역사도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와 중국어, 일어를 병기했다.

▼ 숲길이 끝나자 ‘덕천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들어앉았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저런 걸 명당이라 부른다. 그건 그렇고 고색창연한 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은 ‘송소고택’을 중심으로 여러 고택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생각지도 못한 볼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이다. 그런 내 예상은 옳았다. 거기서 창실고택(昌室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421호)이라는 중요한 문화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저택은 1917년 청송 심부자로 알려진 심호택(송소고택의 주인)의 친동생인 심시택이 송소고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도 크게 보면 ‘ㅁ’자 형의 배치형태를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건축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一’자 형의 안채와 ‘ㄴ’자 형의 사랑채, 그리고 부속채로 나뉜 것이 영락없이 독립된 가옥들이다.

▼ 다음은 ‘초전댁(草田宅)’이다. 이 집은 순조 때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석촌공파(石村公派) 17세손인 덕활(德活)이 요절한 아우 덕종(德宗)의 양자로 입적한 친아들 헌문(憲文)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하여 1806년에 지었다고 한다. 전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큰사랑 공간이 자리하고, 왼편은 작은사랑인 온돌방 좌우로 외양칸(現在 창고)과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 안의 안채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인장의 안식을 헤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 마을 앞길(이정표 : 소헌공원 3.8㎞/ 신기리 느티나무 6.7㎞)로 되돌아오니 ‘청송장 가는 길’이란 글귀가 눈길을 끈다. 30㎏이나 되는 고추를 머리에 이고 청송장에 나간 어느 아낙내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글귀가 자꾸 낯설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으리으리한 고택들이 즐비한 마을 풍경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가난이라니. 하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송소고택(松韶古宅)’. 고택들이 즐비한 덕천마을에서도 가장 중요한 볼거리이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1880년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이곳 덕천리로 이주하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고택은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원형을 비교적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소중한 문화재라고 한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250호)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현재 고택체험시설로 개방·운영되고 있는데 2011년에는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 송소고장(松韶古莊)이란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눈앞을 막아서는 담이 있다. ‘ㄱ자’를 아래위로 뒤집어 놓은 모양새의 ‘헛담’인데,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안채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려는 배려의 소산이란다. 이 담을 여인네들은 오른쪽으로, 남정네들은 왼쪽으로 돌아 각각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갔다. 그리니 남녀유별의 ‘내외담’이기도 하다. 헛담의 뒤에는 사랑채가 들어앉았다. 전면을 향해 오른쪽에 큰 사랑채, 그리고 왼쪽에 작은 사랑채를 배치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작은 사랑채가 큰 사랑채보다 한두 발짝 뒤로 물러앉아 있었다.

▼ 전체적으로는 영남지방 특유의 양반가옥 형태인 ‘ㅁ자’ 형을 취하고 있다. 송소고택은 각 채마다 다양한 마당을 지닌 게 특징이다. 그래서 내부를 연결하고 있는 문턱을 하나 넘어서면 다른 마당이 나온다. 이는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주요한 특징이란다. 참! 송소고택은 99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커보이지는 않았다. 방과 칸의 개념이 달라서라고 한다. 칸은 집의 기초가 되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기 때문에 통상 방보다 칸이 많다. 정면 4칸, 측면 2칸 집은 ‘4×2=8’로 8칸으로 친다. 그래서 99칸이라고 해서 방이 99개는 아니라고 한다.

▼ 송소고택 바로 옆에는 그의 둘째 아들 송정 심상광이 기거하던 송정고택이 있다. 부친의 집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내부로는 두 고택을 연결하는 쪽문도 있다. 송정 심상광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했던 사람으로 학문에 뛰어난 유학자였다 한다.

▼ 송정고택 역시 전형적인 한옥인 장작 온돌방과 넓은 마당, 정원과 텃밭이 어우러져 있다. 농경제가 대부분이었던 당시의 경제적 여건 생각해 본다면 이 두 고택의 규모만으로 부(富)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참! 이 집을 지은 가문은 ‘만석꾼’이라고 했다. 논밭이 별로 없는 이런 산간지역에서 그렇게 큰 부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일단은 믿어보란다. 한양으로 가려면 심씨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었을 정도였다면서 말이다. 해방 직전 심처대의 9대손까지 2만석을 유지했다고 하니 그 가세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 송소고택 오른쪽으로는 두 고택보다 50여 년 늦게 지어진 ‘찰방공종택(察訪公宗宅)’이 있다. 청송 심씨 시조 악은공의 9세손인 심당의 종택이다. 찰방공 종택은 다른 고택과는 달리 ‘ㄷ’ 자 모양이다. 다른 고택과 비교했을 때 안마당에 장독대와 화단이 배치된 점이 독특하다.

▼ 마을에는 ‘백일홍’이란 찻집도 운영되고 있었다. 고택이 즐비한 마을에서 한적함과 옛 멋을 즐기며 걸었다면 이곳에 들러 잠시나마 따스한 차 한 잔으로 마음과 몸을 달래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청송 심씨 본향’이라고 쓴 큼직한 자연석이 눈에 띈다. 맞다. 덕천마을의 소개는 보통 성씨로부터 시작된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의 시조는 심홍부(沈洪孚).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했다. 고려 말에 전리판서를 지낸 그의 4세손 심원부(沈元符)는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덕천마을은 심원부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약 600년간 뿌리내리며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청송 심씨의 대표적인 세거지이다. 한편 심원부의 형 심덕부(沈德符)는 조선의 개국공신에 올랐으며, 그의 후손들은 세 명의 왕후와 네 명의 부마를 배출한 조선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 30분 남짓 머물던 덕천마을을 빠져나와 ‘덕천1교’를 건넌다. 이어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100m 조금 못되게 걷다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가풀막재’로 연결시키는 농로이다. 방향을 꺾는 지점에는 ‘가풀막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래전 마을에 살던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산을 넘다가 산적을 만나 변을 당했는데, 후손들이 도적을 찾아 원수를 갚았다하여 ‘가풀재’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니 ‘914번 지방도’. 안내도는 ‘도로구간 보행주의’라는 경고까지 적고 있지만, 탐방로는 도로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산속으로 향한다. 참! 이곳은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아니면 앞으로 부딪칠 가파른 오르막길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라는 배려일 것이고 말이다.

▼ 별동산의 정상 어림에 있는 ‘가풀막재’까지는 ‘소원길’이라는 산책로를 따른다. 산책로라고는 하지만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고, 거기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기까지 하다.

▼ 계단이 끝나면서 길은 고와진다. 경사가 완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리기다소나무의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그런 길을 콧노래 흥얼거리며 잠시 걷자 ‘가풀막재’에 올라선다. 옛날 근동의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이고지고 청송에 내다팔기 위해 이 재를 넘어갈 때면 힘들고 숨이 가빠진다고 해서 ‘가풀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고갯마루이다. 덕천마을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이곳의 이정표(소헌공원 3.1㎞/ 신기리 느티나무 7.4㎞)도 놓쳐서는 안 된다. 완주 인증을 위해서는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가풀막재에서 내려서자 아름다운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이정표 : 소헌공원 2.4㎞) 하나가 나타난다. 용전천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에 걸터앉은 ‘벽절정(碧節亭)’이다. 6칸에 지나지 않는 이 정자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심청의 절개와 용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벽절 심청은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부친상을 당한 후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집 뒤에 정자를 짓고 아홉 그루 소나무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무수한 전공을 세우다 끝내 숨졌다. 왕은 이를 기려 충·용·의·열 네 글자를 내리고 벽절(碧節)이란 호를 내렸다. 원래 이름인 구송정(九松亭) 대신 ‘벽절정’이 된 이유이다.

▼ 벽절정을 지난 탐방로는 잠시 오솔길을 거친 다음 ‘용전천(龍纏川)’으로 내려선다. 날머리인 소헌공원을 2.1㎞쯤 남겨둔 지점인데, 이후부터 탐방로는 용전천의 강변길을 따른다.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이 구간은 대략 1.4km 정도. ‘수달생태공원’이란 이름이 붙었다. 운이라도 좋으면 강변에서 노니는 수달 가족을 살짝 엿볼 수도 있다는 곳이다.

▼ 이를 알리려는 듯 ‘수달’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천연기념물(330호)이자 멸종위기종인 수달은 본래 깨끗한 지역에서만 서식한다면서 이런 수달의 특징이 푸르고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 ‘청송’의 이미지에 부합하므로 군의 동물로 지정하고 있단다.

▼ 길을 걷다보면 강 건너에 터를 잡은 청송읍 시가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층빌딩은 보이지 않지만 도시의 풍모를 갖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3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청송군의 인구로 볼 때 제법 큰 규모라 하겠다. 하긴 한때 도호부(都護府)에까지 이르렀던 곳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청송은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本鄕)이라는 연유로 1459년(세조 5년) ‘청송군(靑松郡)’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됐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 때 다시 청송군으로 환원되었다.

▼ 용전천은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홍수조절 기능을 갖추었다는 ‘보(洑)’가 먼저 눈길을 끈다. 기존의 재래식보와 차별화하려는 듯 입체적으로 만들어 단순한 보를 하나의 볼거리를 승화시켰다. 거기다 강변에 자전거 길을 조성했는가 하면 데크로드와 체력단련용 운동시설을 설치해 주민들의 나들이 코스로 만들었다. 여름이면 저곳은 물놀이장으로 변한단다. ‘현비암 강수욕장’. 강에서도 바닷가처럼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수중미끄럼틀, 수중징검다리, 수중시소, 수중암반 등의 놀이시설들이 들어선다니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겠다.

▼ 용전천을 건너면 ‘청송 전통시장’이다. 청송지역에 있는 여섯 곳의 5일장(청송·진보·부남·도평·안덕·화목) 중 하나로 매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그러니 오늘은 시장바닥이 텅 비어있을 게 뻔하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참! 시골의 5일장은 온갖 농특산물들이 즐비하고 아직도 장돌뱅이들이 찾아다닌다고 한다. 옛날 보부상과는 달리 지금은 차량에 물건을 가득 싣고 다닌단다.

▼ 너른 모래사장을 거느린 용전천 너머로는 용머리 형상의 기암절벽이 솟구쳤다. 원래의 이름은 바위의 생김새에 착안한 용비암(龍飛岩). 이 바위의 기운으로 소헌왕후가 태어났다하여 ‘나타날 현(顯)’자를 써 현비암(顯妃岩)으로도 불리었는데, 그 소현왕후가 매우 어질다하여 지금은 ‘현비암(賢妃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 소헌공원으로 가는 도중 사과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곳 청송의 브랜드는 ‘사과’. 청송을 방문했다는 인증용으로 너나없이 올리던 ‘합격사과’를 찾지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이것 하나는 알고 지나가자. 10월 24일은 애플데이(Apple Day)라고 한다. 둘(2)이 서로 사(4)과하고 화해하는 날이어서 `애플데이`란다. 누가 만들어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운치 있는 발상이다. 하나 더. 과즙이 풍부하고 육질이 단단해 ‘꿀맛사과’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청송사과는 전국으뜸농산물품평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해발고도 250m 이상, 연평균 일교차가 12℃로 사과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날머리는 ‘소헌공원(昭憲公園)’

1길(주왕산·달기약수탕길)의 종점이자 2길(슬로시티길)이 시작되는 소헌공원은 사과 조형물에서 5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인 이 공원은 조선시대에 가장 어진 왕후로 칭송받는 소헌왕후 심씨의 시호(諡號)에서 이름을 따왔다. 세종대왕의 정비(正妃)였던 그녀의 본향(本鄕)이 청송이라는 인연에서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14.59㎞를 걸었다. 탐방로에서 비켜나있는 중평마을을 다녀오느라 3㎞쯤 더 걸은 셈이다. 핸드폰에 찍힌 시간은 3시간 40분. 수많은 고택들을 기웃거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참! 이곳 소헌공원의 입구에는 청송객주가 들어서있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완주 인증을 이곳에서 받으면 된다.

▼ 소헌공원은 운봉관과 찬경루, 청송부사·군수 송덕비(10기) 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그 가운데 운봉관(雲鳳館, 경북 유형문화재 제252호)은 1428년에 청송군수 하담(河澹)이 건축한 객사(客舍)다. 세종의 명에 의해서였다. 객사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 외에 중당(中堂)에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리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중당과 좌익사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2008년에 원형대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 운봉관과 함께 지어진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는 소헌공원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 누각에서 소헌왕후 심씨의 시조 묘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에서 ‘찬경루’라 했다는데, 약간 경사지에 세워져 정면에서 보면 누각의 형태이나 뒤에서 보면 단층에 가까운 모습이다. 연회나 지방 유생들의 시문회(백일장) 장소로 사용되던 이 누각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올랐다고 한다. 서거정과 김종직, 송시열 등이 쓴 시가 전해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