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12), ‘김삿갓 문학길

 

여행일 : ‘21. 7. 17(토)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일원

여행코스 : 김삿갓문학관→김삿갓묘→조선민화 박물관→김삿갓계곡→묵산미술관→와석1리 마을회관→가랭이봉→김삿갓면사무소(소요시간 : 12.4km/ 실제는 13.11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한 번째 길인 ‘마루금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이 숨어살던 지역을 지난다고 해서 ‘김삿갓 문학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김삿갓 계곡’을 따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옛날 김삿갓이 걸었음직한 길을 걷는 도중에는 그의 문학도 함께 되새겨볼 수 있다. 또한 조선민화박물관이나 묵산미술관 등 길에서 만나는 이색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문화 체험까지 가능하다. 눈만이 아니라 가슴까지도 알차게 채워갈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이라 할 수 있겠다.

 

▼ 들머리는 김삿갓 문학관(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913-1)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제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8호선을 타고 일단 영월읍으로 온다. 영월교차로에서 88번 지방도로 옮겨 춘양 방면으로 내려오다 와석상회(김삿갓면 와석리 598) 앞에서 오른쪽 28번 지방도로 바꿔 들어서면 얼마 지나니 않아 김삿갓 문학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개관한 지 18년째를 맞은 김삿갓문학관에는 김삿갓 관련 연구 자료와 유물, 서적 등을 비롯해 주거지 복원 모형, 가계도, 김삿갓이 생전에 착용했던 신발과 삿갓 등이 전시돼 있다.

▼ 12길(김삿갓문학길)은 김삿갓문학관을 출발해 12.4km를 걸은 다음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에서 끝나는데, 코스 대부분이 냇가와 들녘을 따르지만 가랑이봉이라는 난관을 만나기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외씨버선길에서 가장 빼어난 구간의 하나로 12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파른 산길에서 고생 좀 하는 것을 무서워해서야 되겠는가. 고진감래라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영월객주’ 앞에 세워져 있었다. 구간난이도는 ‘중’. 주요 볼거리로는 김삿갓묘역과 조선민화박물관, 메기못, 가랑이봉을 꼽고 있다.

▼ 객주 옆에 머리를 빡빡 밀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마에는 청산영리녹포란(靑山影裡鹿抱卵), 백운강변해타미(白雲江邊蟹打尾), 석양귀승계삼척(夕陽歸僧髻三尺), 누상직녀낭일두(樓上織女閬一斗)라고 새겨놓았다. 이 시에는 ‘허황된 시(虛荒詩)’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까를 묻는 내용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요즘은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의 반열에 올려놓는 이들도 있다.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이 헛된 말장난 속에 숨어있다면서 말이다.

▼ 붓으로 난간을 두른 ‘노루목교’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어서 28번 지방도를 따라 100m쯤 더 걸으면 ‘김삿갓 유적지’이다.

▼ 유적지 입구에는 ‘정암 박영국(靜岩 朴泳國)’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영월을 찾아서’라는 향토지를 발간하여 영월 향토사연구의 체계를 정립한 사람으로, 난고 김삿갓이 영월로 찾아오게 된 내력을 밝혔는가 하면, 그가 살던 집터와 묘비도 찾아냈다고 한다. 또한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며 읊은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찬 유시(遺詩)들을 발굴해 ‘김삿갓 유산’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삿갓 유적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나 할까? 그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빗돌일 것이다.

▼ 길가에 늘어선 김삿갓 시비(詩碑)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땔나무가 없다는 핑계로 길손을 내쫓는 개성의 인심을 비꼬거나, 한자의 운을 빌려 세상사의 흐름을 재미나게 표현한 시구 등 김삿갓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 김삿갓의 유적지임을 알리는 빗돌 앞에 도포(道袍) 차림의 멋쟁이 하나가 서있다. 그런데 삿갓이 아니라 보통의 갓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분위기에 안 맞는 풍경이라서 다가가보니 겨우 13살에 장가를 간 꼬마신랑을 놀려먹는 시가 적혀 있었다. 김삿갓이 아니라 그가 놀려먹은 꼬마신랑이었던 것이다.

▼ 김삿갓의 시 ‘환갑연(還甲宴)’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피좌노인불사인(彼坐老人不似人,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의시천상강진선(疑是天上降眞仙,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기중칠자개위도(其中七子皆爲盜,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투득벽도헌수연(偸得碧桃獻壽筵,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잔치에 바쳤네)> 한 수의 시로 잔칫집 자식들을 놀려대다가, 장수의 상징인 ‘서왕모의 선도복숭아’로 환갑분위기를 살려주는 김삿갓의 재치가 돋보이는 시다.

▼ 조금 더 들어가면 김삿갓의 무덤이 나온다. 우리에게 김삿갓으로 더 익숙한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할아버지가 1811년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집안이 망하자 강원도 영월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 집안의 내력을 모르고 성장한 김삿갓은 과거에 응시해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했다. 이후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으로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니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1863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숨을 거두자 그곳에 묘를 썼으나 3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 삿갓선생의 조롱박에서는 감로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걷다 보면 가장 당기는 것이 시원한 물이다. 물 좋은 대한민국이 옛말이라 느껴질 정도로 집집마다 정수기물을 마시니 미네랄, 철분이 풍부한 약수는 생소해진 지 이미 오래. 이곳 역시 약수는 아니다. 하지만 청량감만은 일품이니 준비해 간 물통을 꼭꼭 채워보자. 이따가 마주칠 가파른 오르막 구간에서는 구원의 생명수로 이만한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참! 김삿갓의 생가로 가는 길은 저 삿갓선생의 뒤편으로 열린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5년 전에 이미 다녀왔기 때문이다.

▼ 10분 남짓 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도로(28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영월읍 방면으로 향한다. 이어서 만나게 되는 곳은 ‘김삿갓교’. 이름에 걸맞게 김삿갓 조형물이 보초를 서고 있다. 김삿갓 시비와 돌탑이 세워져 있는 다리의 초입(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11.9㎞/ 김삿갓문학관 0.5㎞)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탐방로가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천변을 따르기 때문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돌탑의 오른편으로 난 소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앞사람의 꽁무니를 뒤쫓던 우리 부부는 무심코 다리를 건너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류를 알아차렸지만 그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형식에 억매이지 않고 살다간 김삿갓을 흉내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는 발걸음을 빨리하거나 정해진 길만을 고집하지 않겠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걷고 유유자적하면 그만. 천천히 걷다가 배고프면 어디든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솔솔 잠이라도 오면 나무에 기대어 잠깐 졸면 그만이다. 그러니 구태여 숲속으로 난 정규 탐방로를 고집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숲길보다 시야가 더 트이는 도로를 따르는 이유이다.

▼ 유적지를 출발한지 28분 만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조선민화박물관’에 도착했다. 2000년에 개관한 민화전문의 군립박물관으로 어해도와 화조도, 까치와 호랑이 등의 작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어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9세 미만 출입금지인 춘화방에는 250여점이나 되는 춘화가 전시돼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뒷방으로 전락했던 남녀상열지사의 그림을 어디 그리 쉽게 구경할 수 있겠는가.

▼ 큼지막한 바위들이 널린 ‘김삿갓 계곡’의 경관은 자못 빼어나다. 하긴 김삿갓이 ‘무릉계’라고 칭했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거기다 물이 차갑고 깨끗한데다가 수심까지 깊지 않으니 여름철이면 이곳은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이 몰고 온 새로운 풍경일 것이다.

▼ 빼어난 계곡미에 빠져 걷다보면 어느새 ‘싸리골’에 이른다. 거석리(擧石里, 든돌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쌀농사가 가능한 20여 마지기의 논이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쌀골(米洞)’로 불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싸리골’로 변했단다. 이곳은 또 정감록에서 얘기하는 십승지(十勝地)로도 유명하다.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나 수염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 된다>라는 글귀를 쫓아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았단다.

▼ 탐방로는 싸리골에서 이름조차 없는 다리를 건넌다. 아니 이 다리를 건너 정규탐방로와 다시 만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겠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마포천(김삿갓계곡)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걷게 된다. 참! 정규탐방로를 벗어난 덕분에 우린 12길의 첫 번째 인증지점인 ‘물레방아’를 찾아보지 못했다. 거기다 빼먹은 구간이 하필이면 12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어쩌란 말인가. 김삿갓 흉내 좀 내다 망했다.

▼ 벼랑이라도 앞을 막을라치면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도 한다. 그마저도 폭이 좁은데다 기울기까지 해서 중심을 잡아가며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참! 걷는 도중 ‘양수사터’라도 눈에 띌까 해서 두리번거려 봤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옛날 호적과 부역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고리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양수척(陽水尺, 무자리)들이 살던 곳이 싸리골 아래에 있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 ‘개인 사유지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영월구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나무랄 수도 없는 이기심이 아닐까 싶다.

▼ 냇가로 내려섰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손을 씻는 것은 기본. 땀이라도 흘렸다면 세수까지 해보자. 이렇듯 김삿갓문학길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순한 산을 따라 길이 나있고, 시원하고 넓은 계곡이 끝없이 이어진다. 계곡엔 멋들어진 조각 같은 바위가 아무렇지 않게 솟아 있다. 복잡함이나 시끄러움보다 맑고 깨끗한 쪽. 느리고 조용한 것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곳이 영월의 외씨버선길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곳 김삿갓면은 강원도에서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었다.

▼ 싸리골을 나선지 20분. ‘삿갓교’에 도착했다. 첨부된 지도에 ‘꽃비농원’으로 표시된 지점(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8.3㎞/ 김삿갓문학관 4.1㎞)이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삿갓교를 건넌다.

▼ 이후로도 탐방로는 마포천을 따른다. 다만 오른편에 꿰차고 있던 게 이번에는 왼편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고요한 숲길을 걷는 집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걷기 삼매경에 빠진 것일까? 나 역시 천천히 걸으며 흙의 촉감을 느끼고 자연의 향기를 음미해본다. 그러자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버린다.

▼ 하지만 이 구간에서는 가파른 산자락을 10분 이상 치고 올라야만 했다. 생각보다는 힘든 구간이라고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곳 영월구간의 특징은 심심찮게 길을 에둘러놓았다는 점이다. 이 지점도 역시 사유지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오를 만큼 올라왔으니 이젠 내려가야 할 차례. 이곳 ‘생골’의 해발고도가 345m나 되니 내려가는 길 또한 제법 길다. 하지만 눈은 즐겁다. 내려가는 내내 시야가 툭 트이면서 산촌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자 ‘든돌마을’이다. 김삿갓문학관이 있는 노루목으로 올라가는 ‘골어귀’와 ‘싸리골(쌀골)’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든돌’이란 지명은 옛날 아기장수가 힘자랑을 하면서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다 작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신할머니가 치마폭에 담아다 이곳에 옮겨놓았다는 전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순수한 우리말이었던 ‘든돌’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거석리(擧石里)’로 바뀌었다.

▼ 든돌마을 앞에는 작은 현수교가 놓여있었다. ‘묵산미술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박물관은 정선과 김홍도, 이중섭의 작품을 비롯해 조선시대와 근현대 미술품을 고루 갖췄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을 게 뻔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자화상을 그리는 체험도 해볼 만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든돌마을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도로변을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든돌’을 만나게 된다. 집채만 한 바위가 몇 개의 작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모양새라는데, 이게 공중에 떠있기라도 한 듯 명주실을 넣고 잡아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나온단다. 신기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눈앞에 들어난 바위는 그런 형상을 그려내지 못했다. 난리가 났을 때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밑에서 피난까지 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해와 도로공사로 인해 많이 묻혀버렸기 때문이란다.

▼ 도로를 따라 6분쯤 걸으면 ‘와석1교’.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김삿갓계곡의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곳에 화장실과 함께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 역시 이곳에서 준비해간 간식을 먹었다. 이때 함께 걸어왔던 갑장이 ‘김삿갓 북한 방랑기’ 얘기를 꺼냈다. 예전 TV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듣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이 50을 넘길 때까지 계속되었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왜 내 귀에는 생소할까? 평소에도 라디오나 TV 등을 별로 보지 않는 내 습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창 인기가 있었다는 60~70년대는 공부하기도 바쁜데 라디오를 들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 이 구간도 역시 잘 닦여있었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비탈진 곳에는 데크로드까지 설치해 놓았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88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곡동교(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5.2㎞/ 김삿갓문학관 7.2㎞)’에 이른다. 다리 근처 널따란 공터에는 ‘김삿갓휴게소 체험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4개의 카라반과 16개의 사이트를 보유하고 있는데 김삿갓계곡의 하류인 마포천을 곁에 두고 있어 물놀이 나온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곡동교는 김삿갓계곡의 하류인 마포천이 숨을 다하는 곳이다. 다리 바로 아래서 남한강 줄기인 ‘옥동천(玉洞川)’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포천에서는 물놀이와 다슬기잡이를, 반면에 물이 많은 옥동천에서는 낚시를 즐긴다.

▼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김삿갓유적지로 가는 28번 지방도. 삿갓을 형상화한 대문이 정겹다. 바람 무늬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돈 김삿갓을 의미할 것이다.

▼ 조금 더 도로를 따라다가 ‘주문교’ 조금 못미처서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카페나 펜션 할 것 없이 외국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목조건축물로 가득한 ‘와석1리’다. 참고로 이곳 ‘와석리’는 비기서인 정감록(鄭鑑錄) 신봉자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정감록은 물론이고 조선 명종 때 남사고가 지은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까지 영월의 정동인 이곳을 어지러운 세상에서 난리를 피할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10승지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마을은 와인리, 거석리(들돌), 두릉골, 싸리골, 곡골, 노루목, 어둔, 미사리 등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마을회관 앞에 세워놓은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4.9㎞/ 김삿갓문학관 7.5㎞)는 놓쳐서는 안 될 중요 시설물이다. 12길(김삿갓문학길)의 완주를 증명해 줄 2번째 인증물이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른다. 옥수수 밭이 주를 이루는 왼편은 강원도의 전형적인 풍경. 하지만 널따란 들녘으로 이루어진 오른편은 이와는 상반되는 그림이다. 그 가운데 ‘들모랭이’가 들어있었다. 용마(龍馬)의 무덤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아까 얘기했던 ‘든돌’의 아기장수가 힘센데다 똑똑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장차 나라의 큰 역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죽인 다음 고지기재 밑 도일바위 근처에 묻었단다. 이 아기장수가 죽자 이웃 마을인 외룡리의 용담에서 용마가 나와 사흘 동안이나 울부짖다가 죽었고, 그 용마의 무덤을 이곳 들모랭이에 썼다는 것이다.

▼ 들모랭이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농로를 따른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묵은 생각을 정리하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조용한 가운데 소소한 행복! 사색도 즐겁고, 아무 생각 없이 빈둥빈둥 즐기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 아닐까?

▼ 잠시 후 동남아에서나 볼 법한 지붕을 얹은 정자를 만났다. 편액은 ‘연지 테마단지’.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와 관련된 기사가 눈에 띈다. 마을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농촌관광·체험시설 확충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에 조성했는데, 친환경 쌀 생산단지(10ha)와 연꽃단지(4,100㎡), 메기 못(3,000㎡), 두릉골 생태등산로(1km)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벼가 심어진 논이 전부. 13년이 지난 지금은 옛 얘기로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위에서 얘기한 ‘메기못’이 나온다. 안내판은 옛날 이 소(沼)의 옆에 소를 매어놓았는데 큰 메기가 나와서 소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을 적고 있다. 명주실 한 꾸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물이 깊었다는 또 다른 얘기도 적었는데 글쎄다. 갈대가 자라고 있는 것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조금 더 진행하자 이번에는 ‘옥동천’과 마주한다. 그리고는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김삿갓송어장’ 앞에 이른다.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3.4㎞/ 김삿갓문학관 9㎞)는 이제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 두릉골(杜陵谷) 입구에서는 마을길은 버리고 계곡 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이 구간은 조금 위태롭기는 해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보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발아래로 수십 미터의 절벽이 아찔한데, 좁은 산비탈 길은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절벽에 뿌리를 박고 옆으로 자란 소나무와 기암괴석을 곁을 지나기도 한다. 절경 지나 절경의 연속이다.

▼ 길이 위태하니 안전을 비는 마음도 그만큼 간절했을 것이다. 길가에 작은 돌탑들을 서너 개나 쌓아올렸다. 생김새만 보면 심심풀이 삼아 쌓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저 돌멩이 하나하나에는 간절한 소망이 가득할 것이다. 세상에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 멧돼지의 옹달샘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옛날 보부상이 걷던 길이다. 지금보다 숲도 더 울창했을 거고 야생동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산길을 어떻게 지나다녔을지 궁금하다. 저런 멧돼지 놀이터만 보고도 이렇게 오싹거리는데 말이다.

▼ 옥동천 제방으로 올라선지 18분. 삼거리(이정표 : 옥동←/ 지르네→/ 와석송어장↓)인 ‘가랭이봉 입구’를 만났다. 왼편은 옥동(가랭이봉), 그리고 오른편은 ‘지르네’로 연결되는데 어디로 가더라도 날머리인 김삿갓면사무소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오른편은 하천을 횡단해야 되기 때문에 물이 불어날 경우 길이 막힌다는 산행대장의 귀띔이 있기는 했다. 오늘은 그저 발목이 잠기는 수준이었다지만 말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팔라졌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이석암(‘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선생은 이런 길을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썼었다. 경사 때문에 상채를 숙이다보니 코가 땅에 닿을 정도까지 됐다는 것을 에둘러서 표현했을 것이다. 둘레길 관리자들도 이게 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붙잡고 올라가라며 드디어는 밧줄까지 매달아 놓았다.

▼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길 14분. 능선에 올라서면 이정표(옥동/ 지르네)가 가리키는 옥동방향을 따른다. 잠시 후 가랑이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 ‘와석전망대’가 나오지만 그대로 통과한다. 시야가 트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구태여 정상까지 올라가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후로 더 이상의 오름은 없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폭이 좁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비탈지기 때문이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선지 아래 사진처럼 밧줄을 매달아놓기도 했다.

▼ 그렇게 얼마간 더 걷자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옥동↑/ 약수터←/ 정상↙/ 지르네↓)를 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지르네전망대(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1.4㎞/ 김삿갓문학관 11㎞)’가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이름만 전망대이지 지르네는 숲에 가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겨울철 전용의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 조망에 대한 아쉬움은 ‘밀골전망대’에서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낭떠러지 위로 나가자 시야가 툭 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예밀1리(밀골)’의 산촌 풍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밀골’은 고려 의종 때 밀주라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난리를 피하면서 적을 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마을회관 근처에는 당시 고을 원이 머무르던 ‘원터’도 남아있다고 했다.

▼ 이 구간에서는 울창한 소나무 숲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굴곡이 심하다. 직각으로 줄기를 꺾어 사선으로 뻗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밑동부터 줄기 두개가 휘어져 뻗었다. 그런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김삿갓을 떠올렸다면 과민반응일까? 그의 기구한 인생이 나무로 자랐다면 딱 저와 같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그런 삶이 조선후기 문학에 작지만 뚜렷한 한 획을 그었지만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1시간.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옥동천의 물굽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옥동천(玉洞川)은 상동읍(영월군) 구운산(九雲山, 1,346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야리 맞밭나루(김삿갓면)에서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50.7km의 하천이다. 영월의 젓줄이기도 한 이 하천은 옥동리 부근에서 심한 곡류를 하면서 하천 양안에다 널찍한 하안단구를 만들어내는데, 그 현장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강가로 내려서면 옥동천변의 28번 지방도이다. 옥동천에는 같은 이름(예밀교)의 다리가 두 개나 놓여있다. 그중 옛 다리는 보행자 전용. 수세미 터널을 둘러 관광 상품화 했다. 그러니 어찌 건너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외씨버선길은 다리 입구에서 왼편으로 나있다는 점도 잊지 말자. 하긴 들머리에 ‘가랑이봉 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1.1㎞/ 김삿갓문학관 11.3㎞)를 세워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 다리 건너편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 예밀마을이 ‘포도’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리는 각종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참고로 예밀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라고 한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도 풍부한 데다 석회암지대라는 특성도 갖고 있단다. 덕분에 포도가 잘 자라며, 이게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품질 인증을 받기도 했다. 2001년부터 마을 자체적으로 포도축제를 개최하면서 ‘예밀 포도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김삿갓포도’는 당도가 높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단다.

▼ 날머리는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266)

예밀교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난 정규탐방로를 따른다. 잠시 후 덕가산(823m)의 산줄기를 배경삼은 ‘옥동초등학교’가 보이는가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김삿갓면사무소가 나타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이 고을의 원래 이름은 하동면(下東面)이었다.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온 이름이다. 그러다가 1982년 김삿갓의 무덤이 와석리(어둔마을)에서 발견되면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고을 이름을 아예 ‘김삿갓’으로 바꿔버렸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물론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이다. 핸드폰의 앱은 13.11km를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