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9), 춘양목 솔향기길

 

여행일 : ‘21. 6. 5(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일원

여행코스 : 춘양면사무소→서동리 삼층석탑→거포 사과마을→새터→도심1리공원→도심2리공원→도심3리 마을회관→춘양목군락지→서벽3리 버스정류장(소요시간 : 19.7km/ 실제는 19.98㎞를 4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아홉 번째 길인 ‘춘양목 솔향기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두 번째 구간으로, 전체의 1/4 정도를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걷게 된다. ‘춘양목 솔향기길’이라는 별도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만산고택과 권진사댁 같은 춘양지역의 고택들과 보물로 지정된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 그리고 서벽리의 춘양목군락지를 들 수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을 경우 종점인 두내약수탕 근처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 들머리는 춘양면사무소(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409-10)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법전면을 거쳐 춘양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춘양로)를 타고 올라오면 잠시 후 춘양면사무소가 나온다.

▼ 외씨버선길의 아홉 번째 구간인 ‘춘양목 솔향기길’은 춘양면에서 시작해 백두대간수목원에 이르는 19.7㎞ 길이의 둘레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1/4 정도를 춘양목이 울창한 숲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택(민속 문화재)이나 석탑(보물) 등의 볼거리는 전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19.7km라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고민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 구간의 테마가 되어있는 ‘춘양목 군락지’를 생략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 보부상길과 춘양목솔향기길의 시·종점은 춘양면사무소의 후문이다. 때문에 면소무소의 뒷벽을 왼편에 끼고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춘양 장터’로 연결되는데,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나가 의양로를 타고 가도 된다.

▼ 가는 도중 타일벽화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옥의 용마루와 담장을 그린 다음 그 아래에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추진배경과 필요성에 대한 얘기를 적었다. 그 옆에는 백두대간을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 호랑이와 사슴을 그려 넣었다.

▼ 잠시 후 ‘억지춘양 시장’이 길손을 맞는다. 반듯하게 놓여야 할 철길을 힘 있는 향사가 애써 지금의 역사까지 철길을 끌어들인 몽니에서 유래된 썩 달갑지 않은 명칭이 이젠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참고로 사전에는 ‘억지춘양’ 대신에 ‘억지춘향’이 등재되어 있다. ‘어떤 일을 순리대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뜻한다.

▼ 시골 장터치고는 규모가 크지만 시장은 한산했다. 장이 서는 날은 시끌벅적하고 부산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한가롭기 짝이 없는 여느 시골 장터와 다름없는 것이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 시장은 4일과 9일에 서는 5일장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좁은 길거리에 그냥 좌판을 놓고 팔고 사는 전형적 시골 장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5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된 후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전통시장으로 생기를 찾아가고 있단다.

▼ 춘양장터를 가로지르면 곧이어 춘양초등학교가 나온다. 개교 103년을 자랑하는 학교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다가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만산고택(晩山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79호)’이 반긴다. 만산(晩山)은 조선 말기의 문신 강용(姜鎔, 1846~1934)을 말한다. 만산고택은 강용이 고종 15년(1878)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채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1칸짜리 행랑채와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임금님이 계시는 근정전에 올라가서 정사를 논할 수 있는 반열이 돼야 한다는 것. 만산 선생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다고 한다.

▼ 마당에 들어서자 고색창연한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방과 대청마루,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감실로 이뤄져 있다. 이 사랑채와 붙어 ‘ㅁ’자 형으로 안채가 뒤로 배치돼 있는데 이 ‘ㅁ’자 구조는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며 집의 안정감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고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안 곳곳에 걸린 현판이다. 사랑채의 처마 아래에는 ‘만산(晩山)’과 ‘정와(靖窩)’ ‘존양재(存養齋)’ ‘차군헌(此君軒)’이라고 적힌 현판이 있다. ‘만산’은 흥선대원군이 대기만성하라는 뜻으로 직접 짓고 쓴 호이고, 조용하고 편한 집이라는 뜻의 ‘정와’는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강벽원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마음을 보존해 본성을 잘 기르라는 의미의 ‘존양재’는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 썼으며, ‘차군헌’은 조선후기 서예가인 권동수의 글로 ‘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 사랑채를 정면으로 왼편에는 자녀들의 공부방인 서실(書室)이 자리 잡았다.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을 뜻하는 한묵정연(翰墨淸緣)이란 현판을 함께 달아놓았다. 글씨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8세 때 썼다고 한다.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지만 오른편에는 담을 하나 더 쳐서 너머에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을 두었다. ‘칠류’는 두 가지 의미의 조합이란다.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 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절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 도로(서동길)로 되돌아 나와 이정표가 가리키는 ‘서동리 삼층석탑’ 방향으로 향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고 그저 굵직한 벚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인 길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춘양성당’에 이른다. 면단위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랗고, 외모까지도 고전미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성당의 사진을 게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성당의 뒤편 언덕에 세워진 ‘망미대(望美臺)’라는 비석을 거론하지 위해서이다. 을사늑약 후 귀향한 만산(晩山)이 나라를 잃은 설움과 임금을 향한 안타까운 충정을 담은 글을 새겨놓았는데, 망미(望美)란 소동파의 적벽부(赤碧賦) 가운데 <묘묘혜여회(渺渺兮余懷)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따온 말로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회포여, 미인(임금)을 하늘 저 끝에 바라보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단다.

▼ 철길 아래를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낙천당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권진사댁 말고도 고택들이 여럿 들어선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앞의 너른 터는 춘양목 묘목을 생산하는 종묘장이라고 한다. 2년 내외의 춘양목을 키우는데 금강송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팔려나간단다.

▼ 철길을 왼편에 낀 채로 몇 걸음 더 걸으면 ‘태고정(太古亭)’이 얼굴을 내민다. 태고정은 만산이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망국의 한을 달래려 지은 정자다. 태고정 주위 바위를 ‘만취(晩翠)’라하고 소(沼)를 ‘세심(洗心)’, 대(臺)는 ‘망미(望美)’라 하고 헌(軒)을 ‘칠류(七柳)’라 했다. 기찻길이 나기 전까지 만산고택에서 망미대, 태고정에 이르는 길은 서로 통해서 쉽게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 태고정 바로 옆에는 안동 김씨의 정자인 낙천당(樂天堂)이 있다. 전서체로 쓴 현판이 돋보이는 이 정자는 수북(水北) 김람(金灠, 1601-1677)이 지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국왕을 호종(扈從)했던 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킨다며 낙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홍우정(洪宇定)·강흡(姜洽)·심장세(沈長世)·정양(鄭瀁)·홍석(洪錫) 등과 이 정자에서 교유했단다.

▼ 권진사댁(權進士宅)도 고택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흙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과 옛날 기와의 진한 색깔은 고택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이 집은 성암(省菴) 권철연(權喆淵, 1874-1951)이 살던 집이다. 선생은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자손으로 권중하의 장자다. 자는 성길(聖吉)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1888년 소과에 응시해 생원이 되었다. 집을 지은 것은 건너 마을인 운곡(雲谷)에서 이곳으로 정착한 고종 17년(1880년)이라고 한다. 100년 정도가 흐른 1987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90호로 지정됐다.

▼ 아홉 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 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전면의 사랑채는 7칸 규모로 오른편과 왼편 끝으로 각각 1칸 규모의 방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사랑방과 침방,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가문 계승을 위한 가부장과 장자 중심의 생활공간이면서 동시에 배움터라고 보면 되겠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건너방, 안대청과 부엌, 곳간으로 구성돼 있다. 안방은 안방마님의 일상 거처고 종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위한 공간이다. 딸도 살림살이와 예절 수양을 위해 안채에서 함께 지냈다. 이렇듯 사랑채와 안채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내외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채와 채를 나눠 남녀를 구분한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 만산고택과 마찬가지로 사랑마당의 왼편에는 감개헌(鑑開軒)이라는 서당이 들어앉았다. 참! 서실 앞에는 권상경에게 수여된 대통령표창이 철판에 프린팅되어 있었다. 맞다. 이 집은 애국지사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라고 했다. 권철연의 아들 권상경(1890-1958)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1926년 심산 김창숙이 독립자금을 모집할 때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심산을 숨겨주기도 했단다.

▼ 탐방로는 이제 춘양의 북측 끝자락에 위치한 춘양중학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7.7㎞/ 춘양면사무소 2㎞)로 이어진다. 권진사댁에서 빠져나와 서원교를 건너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3층으로 지어진 학교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와 함께 쓰는 운동장 동쪽에는 보물 제52호인 ‘서동리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같은 규모와 양식을 가진 2기의 탑이 10m 남짓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형식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층층이 쌓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층석탑이 학교 안에 있는 이유는 원래 이곳이 신라의 고찰 람화사(覽華寺)의 옛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교 안에다 절을 복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석탑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62년 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나온 사리병과 99개의 토탑들은 지금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단다.

▼ 학교에서 빠져나오면 ‘서원마을’. 옛날에 이 부근에 ‘진성 이씨’ 서원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어서 사과밭과 논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거곡길)을 20분 정도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하면 거곡마을. 탐방로는 솟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왼쪽으로 향한다.

▼ 길은 고개를 넘어 ‘양반걸음 걷기’ 체험장에 이른다. 바닥에 새겨놓은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면서 양반걸음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양반걸음이란 다리를 크게 떼어 느릿느릿 걷는 걸음을 말한다. 옛날 양반들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느긋하고 여유 있게 걸었다고 한다. 뛰어가면 비를 피할 수도 있는데, ‘체면 때문에, 체통을 지킨다고’ 온 몸에 비를 적셔가면서까지 팔자걸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썩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채근하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느릿느릿 여유롭게 걸어보자는 제안이 아닐까 싶다.

▼ 체험장을 지나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15.7㎞/ 춘양면사무소 4㎞). 이번에는 오른쪽에 위치한 염장마을로 향한다. 옛날 소금장수가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이 일대에서는 인삼밭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검은 천이 덮인 인삼밭이 산기슭에 넓게 펼쳐져 있다.

▼ 염장마을을 지난 탐방로는 거포마을(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4.1㎞/ 춘양면사무소 5.6㎞)로 이어진다. 거호로도 불리는데 ‘진주 강씨’가 묘를 호걸형의 터에 쓴데서 연유한단다. 그 묘를 쓰고부터 그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였기에 거호(巨濠)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마을은 ‘거포사과’라는 브랜드가 생겨났을 정도로 사과가 유명하다. 그래선지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변의 가로수까지도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거포사과’는 그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앞에 세워놓은 ‘탑프루트’ 인증마크가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탑프루트라는 게 최고 품질의 과일에 주어지는 인증이기 때문이다. 탑프루트 인증은 각 과일별로 적정 무게와 당도, 착색도, 안전성(농약 잔류) 기준을 통과해야만 주어진다. 그만큼 인증을 받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인증을 받으면 가격이 15∼20% 높게 형성된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사과마을이라는 닉네임답게 눈만 들면 온통 사과밭으로 채워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해발고도가 500m도 넘는다. 그러니 일교차가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거기다 푸석푸석해 보이는 토양은 물도 잘 빠질 것 같다. 원예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사과재배의 최적지가 분명하다. 이런 환경에서 생산된 사과가 어찌 향과 맛, 그리고 당도가 뛰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을 뒤 언덕에는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사과 꽃이 필 무렵인 봄부터 수확하는 여름, 가을까지 장관의 연속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거포마을을 출발한지 1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35분 만에 ‘거포재’에 올라섰다. 거포에서 새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이곳에는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 탐방로는 이제 내리막길로 변한다. 걷는 도중 각화산과 왕두산 등 1천m를 훌쩍 넘기는 봉화지역의 높은 산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코스이기도 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낙엽송들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송이버섯 조형물로 장식된 작은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심심산골로 이루어진 경북 내륙지역의 특산품은 ‘청송 사과’, ‘양양 고추’, ‘봉화 송이버섯’으로 대변된다. 특히 봉화 사람들에게 송이버섯은 그저 단순한 버섯이 아니라고 했다. ‘송이버섯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은 기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 조형물에는 봉화 사람들의 ‘송이 사랑’이 담겨있다고 봐야겠다.

▼ 쉼터에는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2.1㎞/ 춘양면사무소 7.6㎞)도 세워놓았다.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시설물이다.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구간 완주가 인증되기 때문이다.

▼ 인증지점을 지나며서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널찍한 임도인데다 굵직한 소나무까지 울창해서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섰을까 임도와 헤어진 탐방로가 갑자기 숲속으로 파고든다.

▼ 산길은 활엽수로 가득하다. 요즘은 전국의 어느 산으로 가더라도 수목이 우거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구간의 뛰어난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이었던 것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두 손 가득이 따더니 내 입에다 넣어준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운곡천이 기다린다. 한자를 풀어쓰면 구름 낀 계곡 사이로 흐르는 하천 정도가 되겠다.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11.4㎞/ 춘양면사무소 8.3㎞)는 이곳을 ‘새터’라고 적고 있었다. 조선 말기 ‘김영 김씨’가 와서 새로 개척했다는 마을이다. 새로 터를 닦았다고 해서 ‘새터’라 부른단다.

▼ 탐방로는 이제 운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둑방길을 따른다. 이 둑방은 2008년 폭우로 하천 자체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돼, 그 이후 폭 60m, 높이 5m 이상 규모로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서인지 그늘을 만들어줄만한 나무가 일절 없는 삭막한 풍경이다. 간간히 강바람이 불어온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양심장독대도 만날 수 있었다. 목마른 여행자들을 위해 생수를 보관해두는 곳이다. 다만 양심껏 1인당 1병씩만 가져가란다. 그래서 이름도 ‘양심장독대’이다. 우리처럼 넉넉하게 물을 챙겨가는 나그네들에게는 별무소용이겠지만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도심1리의 앞뜰은 대부분 논으로 일구어져 있었다. 외씨버선길을 걸으면서 경북 오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오기 전에는 첩첩산중에 빈약한 농지, 가난한 살림일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너른 들과 풍요로운 마을, 오래된 전통이 곳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 ‘수진교’ 다리 곁에 조성해놓은 ‘도심1리 공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9.7㎞/ 춘양면사무소 10㎞)’을 지나자 이번에는 ‘감동골’ 마을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류성룡의 백씨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1601)이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했었다는 마을이다. 그나저나 이 마을의 이정표(두내약수탕 7.6㎞/ 춘양면사무소 10㎞)가 우리 부부를 고생시키고 말았다. 종점까지 7.6㎞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정보를 믿고 이쯤에서 택시를 불러 백두대간수목원으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완주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남은 거리는 거의 9㎞. 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 운곡천을 따라가다 보면 물막이를 여럿 만나게 된다. 경사진 하천의 토사유출을 막기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른 모양새로 만들어져 있어 이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운곡천으로 내려선지 35분 만에 ‘도심2리 공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7.8㎞/ 춘양면사무소 11.9㎞)’에 도착했다. 늙고 젊은 느티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공원은 홍보용 송이버섯조형물 외에도 정자와 벤치에다 그네까지 갖췄다. 마을주민들 보다는 외씨버선길 나그네들을 위한 시설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 탐방로는 운곡천의 둑방길을 벗어나 내륙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도심2리’에 이른다. 이 마을은 현재 한전과 한판 싸움 중인가 보다. 마을회관 앞에다 생명줄 자르는 송전탑 때문에 자신들의 마을이 소멸된다는 현수막을 내걸어 놓았다. 그건 그렇고 도심2리 마을 권역도 역시 사과밭 천지였다. 때문에 탐방로는 사과밭 사이로 나있다. 나무에는 꼬맹이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른 품종인지 종이봉지로 쌓아준 나무들도 간간히 보인다. 과일을 크게 하고, 낙과를 방지하기 위한 농부의 손길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 모내기가 끝난 논과 사과밭을 눈에 담으며 15분 정도 더 걷자 느티나무 숲이 나타난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울창창한 숲속에는 서낭당이 들어앉았다. 마을 한가운데 이렇게 좋은 숲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심3리’ 마을이 그만큼 평안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도심3리’ 마을회관이다. 이 마을은 길가를 온통 꽃밭으로 가꾸어놓았다는 게 특징이다.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여유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이 마을은 ‘황터’라는 단위부락이다.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에 구리왕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오늘의 꽃은 ‘망초’로 꼽아봤다. 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라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하긴 망초가 밭에 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농사를 망치면 나라가 기운다고 해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탐방로는 황터7교를 지나면서 문수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이곳도 역시 눈만 들면 온통 사과밭이다. 아니 자두나무 과수원도 널따랗게 분포되어 있었다. 주인아저씨 말로는 25년이나 묵은 고목들이란다.

▼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만났다. 그간 애써서 뿌리고 가꾼 농작물이라며, 농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오가는 길손들이 농작물에 손을 댔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과수원 지대가 끝나는가 싶더니 지도에 ‘풍경액자’로 표시된 지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담아보라는 듯 액자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액자 속으로 머리를 넣자 각화산(1,202m)과 왕두산(1,046) 등 백두대간에 놓인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맞다. 봉화에는 이렇듯 해발 1천m 넘는 산이 10개도 넘는다고 한다. 그 가운데 봉화의 진산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문수산(1,207m)이다. 외씨버선길은 문수산의 뒤쪽 비탈길을 따라 나있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울울창창하게 들어찬 저 소나무들은 외씨버선 9길의 테마를 ‘춘양목 솔향기’로 만든 장본인이다. ‘춘양목(春陽木)’이란 금강소나무(金剛松)의 또 다른 표현. 즉 춘양지역에서 올라온 ‘금강소나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금강송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수없이 잘려나간 소나무들이 춘양역 앞에 쌓이기 시작했고, 이 목재는 철마(鐵馬)라는 괴물이 하룻밤 사이 서울까지 옮겨다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춘양목’이라 불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산자락에는 수십 년은 되었음직한 소나무들이 꽉 들어차있다. 태백산맥 줄기에서 자라는 저 금강소나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또한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서 궁궐이나 관아를 짓던 목재로 사용해왔다. 모진 남벌(濫伐)에도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이곳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 그리고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라고 한다. 때문에 1981년 유전자 보호림, 1985년에는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단다.

▼ 길가에는 간벌(間伐)로 처낸 목재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간벌은 삼림을 가꾸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나무를 심은 후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주변상황을 살펴 솎아내는 것을 간벌이라 하는데, 삼림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단다. 빽빽한(울폐된) 나무를 잘라내어 나무의 밀도를 조절하면 나무가 지름생장을 하면서 이용가치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 숲으로 들어선지 12분 만에 벤치 두어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를 만났다. 9길(춘양목솔향기길)의 두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완주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후문 3.6㎞/ 춘양면사무소 16.1㎞)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 ‘춘양목 군락지’는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의 산자락에 들어서 있다. 그래선지 문수산에도 숲길을 내놓았다. 하긴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솔향기에 취해 걷는 신선놀음만으로 황송한데, 힐링까지 덤으로 얻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뛰어난 산책로인가.

▼ 숲을 가꾸는 목적은 수자원 보전이나 환경보존이다. 그러니 자연친화적인 숲길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쁜 나비까지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숲 해설 안내소’도 들어서 있었다. 문수산 숲길의 ‘숲 해설사’들이 머무는 공간인 것 같은데, 오늘은 이 해설사 아저씨가 공적이 되어 버렸다. 수목원으로 내려가는 샛문이 잠겨있다는 내 불평에 대한 그의 답변이 어긋나도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가면 만날 수 있다는 탈출로가 2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으니 거기까지 가는 동안 내 입에서는 얼마나 많은 불평이 쏟아져 나왔겠는가.

▼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들은 썩 나이 들어보이지는 않는다. 맞다. 이 일대의 숲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벌되었고, 지금은 수령이 50년 정도 된 ‘반백이’만 남아있다(건축용 목재로 쓰이는 춘양목은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이 된 ‘올백이’를 사용한다)고 한다. 하긴 목질이 단단한데다 썩지도 않고, 소나무 향기가 오랫동안 진하게 풍기고, 대패질을 하면 윤기가 흘러나는 최상급의 목재라는데 어디 남아나겠는가.

▼ 숲으로 들어선지 50분. 춘양목이라는 ‘네임 벨류’까지도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는 지점인데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2㎞/ 춘양면사무소 17.7㎞)는 곧장 직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는 오른편을 향하고 있다. 이제 그만 걷고 싶다는 우리의 마음을 읽었나 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트레킹 날머리는 서벽3리 버스정류장(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1478-1)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4분쯤 내려서자 ‘광촌교’가 나오고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서벽3리 버스정류장이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백두대간수목원 후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우린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하기로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꼽은 언택트(비대면) 관광지 100선에까지 들었다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4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9.98㎞이니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