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8), 보부상 길

 

여행일 : ‘21. 5. 29(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 일원

여행코스 : 분천역(버스 이동)→합소삼거리→현동역→소천면사무소→씨라리골→높은터→가마골→춘양면사무소(소요시간 : 18.5km/ 실제는 13.8㎞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여덟 번째 길인 ‘보부상 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첫 번째 구간으로, 오래 전, 보부상들이 춘양장이나 현동장으로 물건을 팔러 가면서 걸었던 길을 따르게 된다. 그래선지 이 구간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길이 유난히도 많았다.

 

▼ 들머리는 분천역(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964)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춘양면을 거쳐 분천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낙동강을 건너면 스위스의 산장 분위기가 나는 ‘분천역’이 나온다. 지난 1956년 영동선을 개통하면서 주변의 광물자원과 목재 등을 수도권으로 운송하기 위해 만든 역이다. 덕분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큰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벌목업의 쇠퇴에다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줄어들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이카시대가 열리면서 하루 이용객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 조용한 간이역으로 변해버렸단다. 참고로 봉화군을 가로지르는 영동선은 분천역을 비롯해 간이역이 13개나 된다.

▼ 외씨버선길의 여덟 번째 구간인 ‘보부상 길’은 분천역에서 시작해 춘양면사무소에 이르는 18.5㎞ 길이의 둘레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국도(36호선)에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우리 부부처럼 18.5㎞의 거리가 부담스러울 경우 체력에 맞게 거리를 조정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현동역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 역 앞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분천역과 함께 생겨난 마을로 역과 함께 흥망성쇠를 겪어왔다. 역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두메산골로 몰려들었으나, 역이 쇠퇴하면서 마을 또한 적막한 산골마을로 전략해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옛 영화를 다시 만들어 보자는 주민들의 의견이 대두됐고, 거기에 행정기관의 도움이 더해지면서 쓸모없어져 가는 영동선을 활용해 2013년에는 V-Train과 O-Train 관광열차가 개통됐고, 다음 해인 2014년에는 산타마을과 산타열차가 생겨나면서, 불과 50여 일 만에 전국에서 연간 10만여 명이 다녀가는 기적이 일어나는 동네가 됐단다. 종류도 다양한 식당은 물론이고 카페 등 웬만한 도회지 거리가 부럽지 않을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마을과 철로 사이의 공터는 산타(Santa)를 주제로 한 축제장으로 바뀌어져 있다. 아니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마을 전체를 꾸몄다고 보는 게 옳겠다. 분천역, 산타 시네마, 소망 우체통, 이글루 소망터널, 물안개터널, 산타카페, 자전거 셰어링, 산타열차 휴게텔, 먹거리 장터, 산타 슬라이드, 농·특산물 판매부스, 대형 풍차 등이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 산타마을은 2014년에 만들어졌다. 봉화 발전의 걸림돌로 추락했던 영동선을 활용해 지역 발전의 기회로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봉화군에서 대두됐고, 거기에 코레일과 산림청, 경북도청이 힘을 보태면서 이곳 ‘분천2리’에 산타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산타마을 아이디어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Rovaniemi)에 있는 ‘산타마을(Santa Claus Village)’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타클로스는 고향인 북극에서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에 있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곳 ‘봉화 산타마을’의 주요 조형물도 산타클로스와 순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은 대한민국. 산타의 오른편에 한국산 꽃사슴이 미소 띤 얼굴로 앉아있었다. 이 셋을 합친 풍경에서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느꼈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3년쯤 전인가 페루 여행을 하면서 기념사진께나 찍었던 알파카(Alpaca)도 보였다. 이름도 ‘알파카 체험농장’이란다. 알파카란 라마류에 속한 가축의 한 종으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그런데 산타와는 무관한 이 동물을 왜 이곳에 모셔다 놓았을까?

▼ 생략한 구간의 풍경이 아쉬워서 다른 일행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아래 사진은 분천역에서 낙동강을 따라 걷다가 올라서게 되는 첫 번째 고개 ‘곧은재’이다. 옛날 보부상들이 간고등어나 소금, 쌀 등을 이고지고 오르던 언덕이라고 한다.

▼ 곧은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 풍경. 즉 왼편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배나드리’의 사진도 그분의 것을 빌려왔다.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말 그대로 ‘배로 드나들었다’는 뜻이다. 강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맞은 편 마을은 ‘고제나루’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지만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는 빈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나드리’ 사람들이 그리로 놓인 잠수교(세월교)를 건너가 농사를 짓는단다.

▼ 실제 들머리는 합소삼거리(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완주가 걱정되는데, 마침맞게 산악회에서 단축코스를 운영하겠단다. 특히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단조로운 구간을 오롯이 빼버리겠다니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분천역 주변을 느긋이 둘러볼 수 있는 시간까지 주겠다는 게 아닌가. 이로 인해 실제 트레킹은 현동역 근처에 있는 합소삼거리에서 시작했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현동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다.

▼ 낙동강변을 따라 난 도로(열람이길)를 따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아니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보부상’을 테마로 꾸며놓은 둘레길이다. 보부상은 행상, 선질꾼이란 이름 외에도 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메고 다녀 이 지역에서는 ‘바지게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바지게에는 소금, 미역, 생선 등 소박한 생필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 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간이역인 ‘현동역(縣洞驛)’이 반긴다. 상주 직원이 없는 무인역으로 무궁화열차가 오전과 오후 왕복 두 차례만 서는데, 이용 고객은 하루 평균 10명이 채 되지 않는단다. 그렇게나 한적한 시골역이지만 외씨버선길을 걷는 나그네들에게는 중요 포스트로 변한다. 역사 앞에 세워진 이정표(춘양면사무소 12.5㎞/ 분천역 6㎞)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완주가 인증되기 때문이다.

▼ 영동선의 임기역과 분천역 사이에 있는 현동역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오랜 세월 견디고 살아남은 역사에는 시집 수백 권이 꽂혀 있었다. 반대편 벽면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공간을 배치했다. 잠시 쉬면서 시를 읽거나, 걸어오면서 느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적어놓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선로를 건넌 다음 시멘트계단을 이용해 언덕 위로 올라선다. 막지고개로 올라가는 길(막지고개길)이 언덕 위로 나있기 때문이다. 

▼ 언덕 위에서 만나는 ‘현동3리’ 마을회관 앞에는 ‘현동역과 막지고개’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길은 옛날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고 한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내성장에 운제(언제) 가노. 가노가노 운제 가노, 열두 고개 운제 가노…> 무거운 봇짐을 지고 험한 고갯길을 오르던 보부상들이 부르던 노래다. 바지게꾼들은 울진에서 소금·미역 등 해산물을 사서 지게에 지고 울진과 봉화사이 열두 고갯길을 넘어 봉화 내성장이나 춘양장에 와서 곡식이나 생활용품 등과 맞바꿨다고 한다. 이들이 걸어서 오가던 옛길은 ‘십이령 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금은 트레킹 마니아들이 오가고 있다.

▼ 잠시 후 막지고개에 올라선다. 조금 전에 만났던 안내판은 ‘막지’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배상들이 소천장(현동)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는 데서 찾았었다. 또 어떤 이는 이 고개를 울진에서 봉화로 넘는 12령 고갯길 중 시장(市場)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고개라고도 했다. 아무튼 이 고갯마루는 지역주민들이 넘나들던 길이자 등짐장수(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생명의 장삿길이기도 했다.

▼ 고개를 넘으면 국도를 따라 형성된 운곡마을(현동4리)이다. 밭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봉화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논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만큼 물이 풍부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마을에 큰 샘이 솟아 석 달 이상 계속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웃 주민들까지도 이 우물을 이용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이제 탐방로는 ‘현동1리(창촌 : 현동의 으뜸 되는 마을로 군량미 보관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로 들어선다. 소천면(小川面)의 소재지라고는 하지만 면의 전체 인구가 3천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한 식당들은 물론이고 카페와 양조장, 심지어는 여관까지도 눈에 띈다. 그만큼 이동인구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한때 이곳에는 시장까지 있었다지 않는가. 농촌인구의 감소로 시장기능을 상실한 지금은 비록 택지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 ‘여기가 봉하마을인가요?’ 뜬금없는 집사람의 질문에 내가 더 당황했다. ‘아니 여긴 봉하가 아니고 봉화일세’.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그림을 보고는 금방 고개를 끄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트레드마크나 다름없는 밀짚모자를 쓴 남성이 볏가리를 수북이 쌓아놓은 들녘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의 위에다 적어놓은 ‘봉화’라는 지명도 집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도착한 면사무소(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11.6㎞/ 분천역 6.9㎞). 이밖에도 파출소와 보건지소, 우체국, 농협 등 주민들을 위한 지원기관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 마을을 통과한 탐방로는 현동천을 지나자 횡단보도를 건넌다. 소천중학교의 정문 앞이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현동1교차로’에서는 3시 방향의 ‘시동길’로 진행한다.

▼ 시동길의 입구에는 ‘현동2리’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현동2리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조금 더 걷자 국도(36호선)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안내판 하나가 이정표(춘양면사무소 10.7㎞/ 분천역 7.8㎞)와 함께 세워져 있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골짜기가 ‘씨라리골’인데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해서 전쟁 때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골짜기에 억새가 많은 탓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억새풀에 베어 쓰라림을 맛봤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시동길’을 따라 씨라리골을 거슬러 올라간다. 참! 혹자는 이 길을 옛날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고 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넘어야만 했던 열두 개의 고개를 잇는 ‘십이령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울진의 울진장과 흥부장, 봉화의 내성장, 봉화장을 오가는 바지게꾼들이 3일 밤낮을 꼬박 걸어서 넘었다는 150리 길이라는 얘기가 된다. 울진에서 시작해 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를 거쳐 봉화 땅에 들어서고, 이어서 고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룻재로 이어진다. 하지만 옛길이 아직도 호젓이 남아있는 울진지역과는 달리 이곳 봉화는 국도가 놓이면서 대부분을 훼손시켜버렸다.

▼ 길가는 온통 찔레꽃 세상이다. 우리나라 토종인 찔레꽃은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들녘이나 산자락에 흔하게 피는 수수한 꽃이지만 향기는 어느 꽃에 못지않다. 찔레꽃 향기를 코끝에 매달고 걸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문득 한종인 시인의 ‘찔레꽃’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는 찔레꽃을 평생 화려함을 모르고 산 어머니와 같은 꽃이라고 노래했었다. 그리고 사랑과 한이 가시로 남았다고도 했었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 골짜기의 비탈진 산자락에는 어김없이 사과밭이 들어앉았다. 해발이 400m도 넘는 고지대이니 일조량이 풍부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거기다 경사진 탓에 배수까지 좋을 테니 사과밭으로는 이만한 적지도 없겠다.

▼ ‘씨라리골’이라는 네임 밸류에 맞지 않는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어디선가는 기를 수밖에 없는 가축이겠지만, 이런 청정지역까지 축사가 들어섰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 이처럼 좁아터진 산골짜기에 밭 한 뙈기 쉽게 나올 리가 있겠는가. 산비탈에 들어선 밭들은 하나같이 경사가 졌다. 그것도 가파르다싶을 정도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런 밭에서는 농사짓기도 만만치가 않겠다.

▼ 소천면사무소를 출발한지 5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에 ‘시동농원’ 앞 삼거리에 도착했다.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정상적인 탐방로는 물론 오른편으로 난 길. 즉 ‘살피재’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왼쪽(대연 호두농장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걷는 거리를 1㎞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부부는 단축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포장길이라고는 하지만 구절양장 (九折羊腸) 같은 산길을 따라 하염없이 올라가게 되는 약간은 힘든 구간이다.

▼ 그렇게 25분쯤 올랐을까 ‘대연호두농장’을 조금 지난 지점(아래 사진의 왼편 모퉁이쯤이라 생각하면 되겠다)에서 아까 헤어졌던 탐방로와 다시 만난다. 덕분에 우린 ‘살피재’를 올라보지는 못했다. 고개의 생김새가 눈이 쌓였을 때 신는 신발인 설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살피재가 살펴서 조심히 가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다시 만난 정규 탐방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작은 쉼터로 꾸며진 ‘높은터’가 길손을 맞는다. 높은터(Daum 지도에 부개재로 표기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는 옛날 현동에서 춘양장을 보러가는 또 다른 길목이다. 보부상이 주로 다닌 씨라리골 살피재와 함께 씨라리골에서 높은터를 지나 가마골을 거쳐 춘양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높은터’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는 사람들이 거주했으나 사람들이 떠난 지금은 농사만 짓고 있단다.

▼ 높은터에는 구간안내도와 함께 방향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인증용이 아닌데도 집사람이 포즈부터 잡는 게 아닌가. 눈에 담을만한 풍경도 없는 길을 오래 걷다보니 꽤나 지루했던가 보다.

▼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 이번에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춘양면사무소 6.1㎞/ 분천역 12.4㎞)가 반긴다. 놓치지 말아야할 시설물이기도 하다. 보부상길(외씨버선 8길)의 두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포장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드는데 집사람의 가벼운 탄식이 들려온다. 이정표를 보고 ‘자작나무 숲’을 연상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맞다. 자작나무숲은 분명 아니다. 가로수 대용으로 길가에 심어놓았을 따름이다.

▼ 자작나무 가로수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이곳 봉화도 송이버섯의 주 생산지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라 하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 비닐 끈으로 금줄을 쳐놓았다. 걷기는 하되 들어가지는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 자작나무 숲길로 들어선지 40분 만에 ‘가마골(가메골)’에 내려섰다. 소로리(춘양면)에 포함된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로 지형이 마치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진에서나 보아오던 화전(火田) 마을을 연상시킨다. 눈에 들어오는 밭들이 하나같이 만만찮은 경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자락을 까뒤집어놓은 풍경이 그런 느낌에 한 몫을 더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 ‘관석길’을 따라 10분쯤 걸어 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4.5㎞/ 분천역 14㎞)가 나오고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이어서 나타나는 또 다른 삼거리(관석교)에서는 왼편이다. 이곳에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 조금 더 걸어 도착한 산자락. 방향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와 함께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 적힌 춘양목에 대한 내용을 옮겨본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부터 경북 울진, 봉화를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줄기가 곧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강송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알려진 나무로 금강소나무는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 이제 탐방로는 오솔길을 따른다. 이어서 경사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모래재’까지 이어진다. 토질이 푸석푸석하고 모래와 같이 부서져 내리는 마사토라고 해서 ‘모래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 잠시 후 올라서게 된 ‘모래재’는 계단처럼 바닥에 홈이 파여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고갯길은 소로리에서 춘양으로 가는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주민들이 춘양장을 보거나 외지로 나가는 고갯길이며 학생들의 추억이 묻어있는 통학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 모래재를 내려서면 봉화 땅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진다. 시쳇말로 한 뼘이나 될 법한 좁디좁은 골짜기에다 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한 폭의 옛 풍경화로 다가오는 걸 보면 말이다.

▼ 이 구간에서는 유난히도 많은 ‘애기똥풀’을 만날 수 있었다. 가지나 잎을 꺾으면 노란 즙이 나오는데, 이 색깔이 애기똥색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기똥풀은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흔하디흔한 꽃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꽃말’만은 여간 범상치가 않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 또는 ‘몰래주는 사랑’이라니 말이다. 아기 재비의 눈병을 고치려고 애기똥풀의 꽃을 지키는 뱀과 싸우다 죽은 엄마재비의 전설에서 꽃말이 나왔단다.

▼ 산자락을 빠져나온 지 20분. 진행방향 저만큼에 춘양면소재지인 의양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운곡마을에 들어선다. ‘운곡(雲谷)’은 구름에 덮인 골짜기란 뜻이다. 항상 구름에 가리어 있는 마을 동쪽의 높은 산에 ‘운중선인’이라는 신선이 살았는데, 이와 연관시켜 마을 이름을 지어냈다고 한다.

▼ 운곡마을로 들어서는데 담벼락에 붙여놓은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구경할 수는 없었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보다도 훨씬 더 멀게 들어가 보았지만 끝내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찾는데 성공한 일행들 말로는 남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었단다. 그러니 눈에 띄었을 리가 만무하다.

▼ 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의 사진은 다른 일행분의 것을 빌려왔다. 높이가 232㎝인 이 불상은 춘양역사(春陽驛舍)를 건설하는 도중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코 부분이 약간 부셔진 것을 제외하고는 보전 상태는 양호한 편이란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춘양역(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1㎞/ 분천역 17.5㎞)’에 이른다. 춘양역은 ‘억지 춘양’ 이란 말을 낳게 한 범인으로 회자되는 곳이다. 반듯하게 놓여야 할 철길을 힘 있는 향사가 애써 지금의 역사까지 철길을 끌어들인 몽니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춘양은 일제 때 경북 북부 내륙의 임산물 집산지였다. 일제는 당시 영주와 철암을 잇는 중앙선을 놓아 수많은 목재를 수탈해 갔다. 조선 후기,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던 울진과 봉화의 금강송(金綱松)이 춘양목이란 아픈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 역사를 빠져나오는데 커다란 체육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이 노인으로 구성된 농촌의 현실에 어울리는 ‘게이트볼 경기장’은 물론이고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떡하니 들어섰다. 이곳 춘양이 작은 면소재지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변신이라 하겠다.

▼ 운곡천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는 송이버섯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다리 중간은 아예 울창한 솔밭과 송이버섯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채워 넣었다. 깊고 깊은 산골짜기 봉화. 워낙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물어 전쟁이 나도 소식 모르는 마을이 있을 정도였단다. 거기다 ‘춘양목’이란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로 금강소나무의 군락지다. 그러니 송이버섯이 봉화의 명품 브랜드가 되지 않고 어찌 배겨나겠는가.

▼ 트레킹날머리는 ‘춘양면사무소’(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409-10)

다리를 건넌 다음 마을 안길을 조금만 더 걸으면 드디어 ‘춘양면사무소’. 오늘 트레킹이 종료되는 지점이다. 8길이 끝나고 9길(춘양목 솔향기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면소무소의 후문에 세워져 있다. 오늘 트레킹은 정확히 3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8㎞. 구간을 단축해 걸었다는 안도감 때문에 속도를 많이 떨어뜨렸던 모양이다.

▼ 9길(춘양목 솔향기길)에 대한 종합 안내판은 면사무소의 정문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춘양이 천하명당 ‘십승지지(十勝之地)’ 임을 알리는 빗돌도 눈길을 끈다. 서양인들이 유토피아(Utopia)를 이상향으로 꿈꿨듯이, 우리 조상들은 ‘십승지지’를 이상향으로 꼽아왔다. 십승지지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곳의 땅을 의미한다. 십승지지를 언급한 옛 책은 ‘정감록(鄭鑑錄)’ ‘택리지(擇里志)’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등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 비기(秘記)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지가 가장 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