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산(蓬萊山, 397m)

 

산행일 : ‘18. 1. 23()

소재지 : 부산시 영도구 신선동과 청학동, 동삼동 일원

산행코스 : 신선동 주민센터신선초교복천사봉래산(祖峰)자봉(子峰, 387m)손봉(孫峰, 361m)고신대 뒤편목장원 방향 둘레길반도보라아파트(산행시간 : 1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영도 주민들의 뒷동산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선지 산 전체를 도심(都心)의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원뿔형의 산을 나선형(螺旋形)으로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6.0의 둘레길 뿐만이 아니라 정상으로 데려다주는 6개의 등산로가 사방으로 가지를 치고 있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경사가 거의 없는데, 길가에 벤치나 평상을 놓아 주민들이 산책삼아 오르내리기에 딱 좋게 조성했다. 거기다 부산항과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망(眺望)까지 선사한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삼박자를 갖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순한 길에 완벽한 조망, 그리고 시원한 물과 바람까지 갖췄다는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으로 꼽고 싶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신선동 주민자치센터(영도구 신선동384-3)

중앙고속도로(삼락-대동) 삼락 IC에서 내려와 관문대로를 타고 부두사거리(동구 좌천동)까지 온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충장대로를 따라 세관사거리(북구 중앙동 4)까지 온 다음, 좌회전하여 대교로를 따르면 부산대교를 건너게 된다. 오른편 차창 너머로 그 유명한 영도대교가 보일 것이다. 잠시 후, 봉래교차로(영도구 봉래동)에서 좌회전하여 잠깐 달리다가 부산지방경찰청 교통순찰대를 지나자마자 오른편 봉래언덕길로 갈아탄다. 이어서 덕수목욕탕 앞에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신선동주민센터 앞에 이르게 된다.



아래 지도는 부산일보&틤이 답사했던 코스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린 반대방향으로 진행했다. 또한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손봉에서 곧장 내려오지를 못하고, 엉뚱한 방향인 고신대 쪽으로 내려가다가 둘레길을 이용해 날머리인 반도보라아파트까지 오게 됐다.



주민자치센터의 맞은편 도로변은 축대(築臺)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축대의 위로 오르는 길이 양 옆으로 나있으니 참조한다. 두 길이 하나로 합쳐져 신선초등학교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잠시 후 신선초등학교의 담벼락이 나타난다. 축대를 겸하고 있는 걸로 보아 학교 부지의 경사(傾斜)가 심했던 모양이다. 길은 학교를 왼편에 끼고 나있다. 차량이 다닐 정도로 넓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5분쯤 되었을까 자그만 공원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은 임도로 변한다. ‘복천사(福泉寺)’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 옆에 복천사의 일반현황과 보유 문화재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을 세워두었으니 시간이 나면 한번쯤 읽어볼 만도 하겠다.



소공원 앞에 또 다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봉래산 숲길을 설명하고 있으니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코스를 ‘4코스(복천사-정상)’로 분류하면서 지도에 그려 넣었다. 난이도(難易度)는 중급인데 거리는 0.8Km, 시간은 대략 30분에서 50분이 걸린단다. 이밖에도 이곳까지 올 수 있는 방법도 적어 넣었다. 들머리인 신선동 주민자치센터까지 오는 버스의 노선 번호는 물론이고, 승용차를 가져올 경우 주차할 수 있는 장소까지 지도에 그려 넣었다. 전통시장 및 횟집촌에 대한 안내도 빼먹지 않았다. 산행을 마친 후 배를 채우고 가라는 모양이다. 배가 출출해진 등산객들에게도 필요한 정보일 뿐만 아니라, 상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보일 테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발상이 아닐까 싶다.



임도를 따라 5분쯤 더 오르면 산자락에 철망이 둘러쳐진 게 보인다. 이곳까지 오는 길의 양편에도 역시 철망 쳐져 있었다. 산짐승의 민가 방문을 막아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먼지 털이기까지 설치해 놓은 것을 그 증거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복천사로 올라가는 널찍한 길 말고도 양 옆으로 오솔길 형태의 둘레길이 나있다.



들머리에는 이정표(봉래산 정상 0.83Km, 둘레길 목장원 1.86Km) 외에도 봉래산 안내도가 세워져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꼭 살펴보고 나설 일이다. 봉래산의 등산로를 ‘A’에서 ‘G’까지 총 7개로 나누고 이를 지도에 그려 넣은 다음 각각의 거리를 표기해 놓았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이 복천사 입구이니 ‘A 코스(0.8Km)’의 들머리인 셈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E 코스(1.4Km)’를 권하고 싶다. 이곳 봉래산의 명물 중 하나인 산제당(山祭堂)’을 들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왼편에 아치형으로 생긴 문() 하나가 보인다. 천정에 둘레길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매달고 있는 걸로 보아 봉래산 둘레길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E 코스로 가려면 이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집사람이 정상으로 올라가버린 지 이미 한참이나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절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온 집사람인지라 국보급 문화재 한 점 보유하지 않은 복천사까지 들러볼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미 ‘A코스로 올라가버린 그녀를 놔두고 나 혼자 다른 코스를 이용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산제당(山祭堂)’ 사진을 올려본다. 공식 명칭은 산제당(山祭堂)과 아씨당(阿氏堂)’,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절영도(絶影島)에 유배된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첩이었던 선녀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절영도(영도의 옛 이름)는 예로부터 국마(國馬)를 키우던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말이 육지로 건너가면 이유 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진 첨사로 내려온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의 꿈에 선녀가 나타나 나는 본래 탐라(지금의 제주)의 여왕이었는데, 고려의 최영장군이 탐라를 점령하자 그의 첩이 됐다가 헤어졌다. 그가 영도로 유배됐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지만 장군은 없었고, 결국 나는 영신이 되고 말았다. 사당을 지어 내 고혼을 위로해주면 군마가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정발은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었고, 조정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명해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두 번(음력 115, 915) 제사(祭祀)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유지된단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도 원주민들의 뿌리가 제주도로부터 건너온 이주민(移住民)들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복천사(福泉寺)부터 일단 들러보기로 한다. 도해선사(道海禪師)의 부도(浮圖)를 지나자마자 절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3층으로 된 요사(寮舍)와 절의 대문 노릇을 하고 있는 2층짜리 천왕문(天王門)이 비탈진 산자락에 기대듯 지어져 있다. 경남 남해군에 있는 금산(錦山)이나 전남 담양군 소재 추월산(秋月山)의 보리암(菩提庵)처럼 절벽에 기댄 제비집 모양은 아니지만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건물을 올린 모양새가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경내로 들어서면 5칸짜리 대웅전이 중생(衆生)을 맞는다. 비탈진 산자락에도 전각(殿閣)이 여럿 보인다. 조그만 틈새이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전각을 들어앉혔다. 말사(末寺)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절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복천사는 고려 말기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시대 해운암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해 왔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억불 정책과 함께 왜적이 자주 침입한다는 이유로 절영도에 마을이 폐쇄되고 목마장으로 운영되는 동안 사찰은 명맥만 유지하다가 1800년대에 직지사의 승려 김선주가 옛 명맥을 살펴 이곳에 토굴을 만들고 수행 정진하면서 다시 수행 승려들의 발길이 머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1년 영남 지역 전통불교 미술의 대불모(大佛母)이며 조각가였던 양완호(梁玩虎) 화상이 계곡에 흐르는 물이 좋다고 하여 복천암으로 개명하였고, 전통 불교 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불화소(佛畵所)를 운영하면서 옛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1973년 월공당 도해가 하안거(夏安居)부터 주지로 주석하면서 조계종 복천사로 다시 개명하고 명부전과 칠성각, 산신각, 용왕단, 요사 3, 종각, 주지실 등 중창에 버금가는 제반 불사를 원만하게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유 문화재로는 화기(畵記)를 통해 1892(고종 29)에 제작된 그림임을 알 수 있는 복천사 지장 시왕도(福泉寺地藏十王圖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1)복천사 아미타 극락회상도(福泉寺阿彌陀極樂會上圖,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2),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6), ’복천사 석가 영산회상도(福泉寺釋迦靈山會上圖,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6), ‘복천사 현왕도 및 복장 유물 일괄(福泉寺現王圖服藏遺物一括,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9)’ 등이 있다.




요사(寮舍)의 난간에 서면 북쪽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다. 부산남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랄 수 있는 남항대교와 남항방파제는 물론이고, 서구 일대의 시가지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서구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천마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뒷동산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보니 제법 높아 보인다.



절 입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봉래산 정상 방향의 둘레길로 진행한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둘레길에 들어서자마자 산불감시초소를 만나고, 산길은 이곳에서 상당히 가팔라진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 구간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길이 둘로 나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면 둘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둘레길로 들어선지 7분쯤 지나면 복천사 약수터가 나온다. 곱게 다듬어진 바윗돌로 축대를 쌓고 하단에 꽂아놓은 수도꼭지를 통해 물이 나오도록 했다. 그 옆에는 수질검사 성적표도 게시해 놓았다. 분기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음용수(飮用水)로 적합하단다. 약수터 아래의 작은 공터에는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약수를 뜨러온 주민들이 이왕에 온 김에 몸까지 풀고 내려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이곳 약수터에서 길은 두 갈래(봉래산 정상0.6Km/ 목장원1.06Km/ 복천사0.23Km)로 나뉜다. 목장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헤어진다는 얘기이다.




조금 더 오르니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시멘트 계단을 오르니 바위 표면에 양각(陽刻) 기법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제단(祭壇)도 만들어져 있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영험한 것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장(武將) 차림을 한 남자가 새겨져 있는데,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채로 오른손으로 힘찬 도약을 의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왼손이 아령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마애상(磨崖像)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마애상(磨崖像)의 높이는 대략 3,5m, 폭은 2m가 조금 넘겠다. 이쯤 해서 전문가의 글을 옮겨본다. ‘제작 시기는 일제 강점기~6.25전후로 추정이 되며 사회적 혼란기에 자식의 무운장구와 가문의 번성을 기원하면서 조성한 마애신상(磨崖神像)이라고 추정을 할 수가 있으며, 바위 아래에 남근을 상징하는 듯한 바위가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기자상(祈子像)이라 볼 수도 있다



이후부터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힘들 경우에는 잠시 쉬어가면 된다. 마침맞게 부산남항 쪽으로 조망(眺望)까지 트이니 망설이지 말고 발걸음을 멈춰보자.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 삼거리(이정표 : 봉래산 정상0.23Km/ 백련산1.5Km/ 복천사0.64Km)에 올라선다. 오른편은 이곳 봉래산을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이라 쓰고 있는 백련사(白蓮寺)로 연결된다. 정상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함은 물론이다.



능선에 오르자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흙산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산 치고는 그 밀도(密度)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 바위들 사이로 난 길을 잠시 걸으니 이번에는 사거리(봉래산 정상0.13Km/ 산제당1Km/ 함지골 청소년수련원1.1Km/ 복천사0.74Km)가 나온다. 왼편은 들러보지 못함을 것을 아쉬워했던 산제당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사거리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부산 남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 남항대교가 둥그렇게 둘러싼 부산 남항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해 한산도와 안골포해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해서 일본 주둔군과 본국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824일 부산포로 향했다. 부산포해전은 부산포와 절영도 앞바다에 정박해있던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승리로 조선군은 남해상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가 1592105일이다. 부산시는 이 날을 시민의 날로 정하고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능선에 오른 지 8분이 지나면 큼지막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조봉(祖峰), 즉 봉래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이다. 참고로 봉래산은 절영진의 3대 첨사인 임익준(任翊準)이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봉래산은 본래 도교(道敎)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삼신산(三神山 :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가운데 하나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산을 신성시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갈산 또는 고깔산이라 불리었다. 산의 형태가 고깔을 닮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한자명 표기는 목이 마른 산을 뜻하는 고갈산(枯渴山)이었다. 향토사학자들이 땅의 기()를 없애고자 인위적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해방 이후에도 산 모양을 따서 붙은 지명으로 알아 고갈산으로 불리다가, 부정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봉래산으로 개칭되었다. 고갈산이 봉래산으로 바뀐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1980년대 초반의 지형도에서 고갈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정상은 두세 평쯤 되는 공터를 바위가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반석(盤石)을 깔아놓은 공터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봉래산 손봉 0.85km, 목장원 1.61km, 백련사 1.48km, 봉래산체육공원 0.46km)도 보인다.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을 적은 안내판과 함께 정상으로 오르는 입구에다 세워놓았다. 아무래도 비좁은 정상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 그 옆에는 봉래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참고로 정상에 설치된 삼각점은 우리나라 토지 측량의 기준점인 '대삼각 본점'이다. 19106월에 일본 토지국이 설치했는데, 이 삼각점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에 삼각 본점과 소 삼각점을 만들었다. 삼각점의 시조인 셈이다.



정상석 뒤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답답한 북쪽 방향의 조망(眺望)이 조금이라도 트일까 해서 바위 위로 오르려는데 주민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나무라신다. 영도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할매바위라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할매바위는 영도에서 살던 주민이 외지로 나가면 망하게 한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섬이다 보니 사람이 귀해 외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온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나만은 아닌가 보다. 할매바위가 온통 빤질빤질하게 윤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부산의 산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오른편은 감만동과 영도를 잇는 부산항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에 용두산공원부터 오밀조밀한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신선대부두에서 육지 끝자락의 오륙도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한없이 복잡하기만 한 부산 원도심의 지형과 바다물길도 대충 파악이 된다. 왼편의 남항 쪽도 눈에 들어오기는 한다. 하지만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나같이 부산에 문외한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조망도를 만들어 두었다. 북서쪽(남항 방향)과 남동쪽(부산만 방향)에 산과 바다, 그리고 주요시설 등을 꼼꼼히도 표시해놓았다. 실경(實景)을 눈앞에 펼쳐놓고 지명을 대비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산행을 이어간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손봉방향의 능선이다. 작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뿌려져있는 곳을 지나니 느닷없이 시야가 활짝 열린다. 드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리니 화물선과 원양어선 등 대형 선박들이 섬처럼 무리를 이루며 떠 있다. 수리나 급유를 위해 부산항을 찾아오는 배들이 잠시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 묘박지(錨泊地)란다. 그 오른편에는 영도구 영선동과 서구 암남동을 잇는 남항대교가 사선을 그으며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바다 위 뭍으로 진정산, 천마산, 아미산이 사이좋게 산줄기를 이뤘다.




잠시 후 산불감시초소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안부에 내려선다. 어지러울 정도로 갈림길이 많이 나있는 안부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표(손봉 0.68km/ 광명고등학교 0.71km/ 불로초공원 0.55Km/ 복천사 0.84Km/ 목장원 1.46km/ 봉래산 정상 0.2km)도 방향을 여섯 곳으로 나누고 있다. ‘육거리인 셈이다. 이곳에는 봉래산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 외에도 정자를 짓고 평상과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여러 곳에서 올라오는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만남의 광장으로 봐도 되겠다.



안부를 지나자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 범위는 비록 넓지 않지만 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결코 작지가 않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여간 진한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이런 곳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 속설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잠시 후 아들 봉우리인 자봉(子峰) 정상에 올라선다.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조봉(祖峰), 즉 봉래산 정상을 출발한지 10분 만이다.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너른 공터에는 정상표지석 말고도 산불감시초소가 지어져 있다. 옆에는 산불조심깃발이 서너 개나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런 풍경은 봉래산의 곳곳에서 눈에 띈다. 산불 방지에 심혈을 기울이는 영도구청의 노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斷面)이라 할 수 있겠다.



정자에 오르고 본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망이 시원찮다. 오른편(서쪽)을 보면 멀리 낙남정맥의 불모산, 용지봉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남항대교와 부산시가지는 주변의 나무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부산만과 오륙도 방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다대포 앞바다만이 제대로 나타날 따름이다. 몰운대 앞바다에 떠있는 취섬과 동섬, 모섬 등이 바다여행에 나선 돛단배처럼 파도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손봉으로 향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이 능선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다. 얼핏 보면 암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봉우리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回)하자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송도해안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해안의 뒤에는 진정산과 장군산이 사이좋게 산줄기를 이루고,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뭍의 끝자락에는 두도(頭島)’가 나도 있다며 손짓을 한다. 갈매기 등 바닷새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갈매기의 천국이라 불리는 섬이다.




손봉(孫峰)의 정상은 전망바위의 바로 옆이다. 자봉에서 손봉까지는 8분이 걸렸다. 정상에는 작은 돌들을 쌓아 높이가 1m쯤 되는 대()를 만들었다. 자칫 봉화대의 흔적이 아닐까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봉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을 참조해둔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그 아래에 세워져 있다. 앞뒤 사진들과 중복되기에 게재는 생략했지만 손봉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다. 날이 좋으면 일본 대마도까지 보인다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평선 끝까지 시야를 넓혀봤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참고로 부산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이곳 봉래산이 삼포지항을 가장 속속들이 조망할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마침 시간까지 느긋하니 서둘 필요 없이 조망을 즐겨보자. 손봉 이후로는 그런 전망대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손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목장원으로 내려가는 길과 다른 하나는 고신대로 내려가는 길이다. 일단은 고신대 방향으로 코스를 잡는다. 진행방향으로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한마디로 멋진 하산길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길은 또 다시 둘로 나뉜다. 고신대로 내려가는 왼편 길 말고도 바위지대로도 길이 하나 더 나있는 것이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없다. 상황도 알아볼 겸해서 바위지대로 나아가니 시야가 확 열리면서 태종대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왼편에는 부산만과 신선대부두에서 육지 끝자락인 오륙도까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태종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오른편에는 중리바닷가가 자리 잡고 있다. 참고로 이 바위의 아래로도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다. 하지만 길이 위험하니 초심자들에게는 금물이라 하겠다.




하산을 시작한다. 고신대 방향이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다. 거기다 너덜구간까지 겹치다보니 여간 위험스러운 게 아니다. 지자체에서도 이런 점이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길 양편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이를 의지해가며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10분 남짓 내려섰을까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고신대는 곧장 내려가야 하지만 오른편으로 난 길을 잠시 따라본다. 넓게 펼쳐진 너덜지대에 뭔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다가가보니 돌탑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역력한 탑들이다. 저 탑들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이다. 그 위에 내 소원 하나 살짝 얹어본다. 우리 가족의 믿음과 소망, 사랑, 그리고 건강을 담아서 말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고신대방향으로 곧장 직진한다. 잠시 후 이름 모를 아파트의 울타리 옆 삼거리(이정표 : 목장원/ 해돋이배수지/ 봉래산 정상)에서 해돋이배수지로 연결되는 길이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목장원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 더 내려가면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거리(이정표 : 고신대학교/ 목장원/ 해돋이배수지/ 봉래산 정상)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목장원으로 향한다. ‘봉래산 둘레길을 따르는 것이다. 참고로 봉래산 둘레길은 영도 동삼동 목장원에서 출발해 원뿔형의 봉래산을 나선형으로 한 바퀴 도는 6.0의 길로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본래 옛 등산로의 오래된 길을 정비하고 하늘전망대, 삼림욕장, 안내 푯말 등을 세워 트레킹 코스를 조성했다. 길의 70% 이상이 나무 그늘이며 약수터가 곳곳에 있어 명품 둘레길 중 하나로 손꼽힌다.



둘레길은 봉래산의 산자락을 옆으로 꿰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면서 걸어도 될 만큼 길의 폭도 넓다. 거기다 가끔은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만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여느 유명 둘레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국가지점번호(마라 4225 7649)가 적혀있는 이정표(목장원/ 반도보라아파트/ 봉래산 정상/ 해돋이배주지)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2분쯤 내려오면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초소 뒤에는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복천사 앞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산행날머리는 반도보라아파트 옆 도로(영도구 동삼동)

울타리에 난 문을 통과하면 3분쯤 후 반도보라아파트 옆 도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중간에 포켓볼(pocket billard) 경기장으로 보이는 체육시설을 지났음은 물론이다. 날머리에도 봉래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절영공원에서 정상에 이르는 구간이 ’11코스인데 거리는 1.5Km라고 한다. 그런데 난이도를 ()‘으로 표기해 놓았다. 아까 우리가 내려온 고신대에서 정상으로 연결되는 길만 험한 줄 알았는데 이 코스도 무척 험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1시간 5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감안할 만한 멈춤도 없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다만 급할 것 없이 서서히 걸었음은 참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