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룡산(望龍山, 442m)-천황산(345m)-방갓산(381m)

 

산행일 : ‘17. 11. 4()

소재지 : 경남 의령군 대의면·칠곡면과 진주시 미천면·대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머리재망룡산천황산방갓산덕촌마을회관(산행시간 :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방갓산을 지날 즈음 만난 바위를 제외하고는 바위다운 바위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시선을 끌만한 볼거리는 일절 없었다. 망룡산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트이지 않는다.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산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흙산의 특징대로 산길이 곱기 때문이다. 보드라운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능선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잡목들의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산악마라톤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갈 필요는 없는 산으로 분류하고 싶다. 혹시 지맥 종주를 해오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머리재(의령군 칠곡면 산북리 959-1)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의령방면으로 달리다가 죽전교차로(의령군 대의면 다사리)에서 빠져나와 구() 도로로 갈아타면 잠시 후 머리재(대의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의령군 대의면(다사리)과 칠곡면(산북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대의고개 쉼터의 너른 주차장은 텅 비어있다. 그러니 사람인들 보일 리가 없다. 그저 누렁이 한 마리가 오랜만에 보는 인기척이 반가운지 쪼르르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어 줄 따름이다. 맞은편에 있는 망경휴게소와 ‘S-Oil’의 행복가득주유소 역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아니 이곳은 문을 닫아 건지 이미 오래인 모양이다. 요 아래에 터널이 뚫리고 나서부터는 이 고개를 넘나드는 차량이 뚝 끊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머리재 고갯마루 정중앙의 북쪽, 그러니까 칠곡면을 정면으로 볼 때 오른편 사면(斜面)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동안 이용해오던 주유소 뒤편의 쪽문이 주유소가 문을 닫으면서 함께 폐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머리재라는 지명(地名)'머리'·'마루(산마루)'·'높다'라는 뜻으로 험하고 가파르면서도 외진 고갯길이라 그 재를 넘다가 돈도 털리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기다보니 머리가 잘리기 쉬운 잿길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칠곡 사람들은 '머리재', 대의 사람들은 '한티재'라고 부른다. '한티''큰재'·'높은 고개'란 의미의 고유어이며 한자로 대현(大峴)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 대현원(大峴院)이라는 역참까지 있었다고 하니 옛날에는 꽤나 알아줄 정도로 험한 고갯마루 중 하나였나 보다.



산행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새로 개척해가는 길이라서 흔적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개를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切開地)의 사면만 통과하면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폭이 넓어진데다가 고도(高度) 또한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높여간다. 그렇다고 속도까지 빠르게 낼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비하지 않은 채로 버려둔 틈을 노려 산길까지 비집고 들어선 잡목들이 갈 길 바쁜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렇게 14분 정도를 올랐을까 눈앞이 훤해지는가 싶더니 커다란 철 구조물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다. ‘KBS-TV’의 송신시설이란다.



길은 시설물을 둘러싼 펜스 왼편을 지나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열린다. 자굴산과 한우산이 왼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가 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는 망룡산의 정상부가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한갓지게 걷고 있는데 코끝을 스쳐가는 향 내음이 곱다. 그러고 보니 능선이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부담 없는 산길에 솔향까지 음미하며 걸을 수 있다니 오늘 산행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곳 지자체 사람들에게는 그게 못마땅했나 보다. 능선을 따라 길게 벚나무를 심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저 벚나무가 식상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도로에서 마주치는 것도 모자라 산에서까지 벚나무를 보게 된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풍나무 등 산을 아름답게 해주는 나무들이 많은데도 굳이 벚나무를 심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완만하던 산길이 서서히 경사도(傾斜度)를 더해간다. 그러다가 끝내는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팔라진다. 하지만 다른 높은 산들에 비길 정도는 아니니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그 구간이 짧기까지 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은 진양기맥(晋陽岐脈)의 일부 구간이다. 진양기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덕유산에서 동쪽으로 분기해 월봉산과 금원산, 기백산, 매봉산, 소룡산, 황매산, 철마산, 한우산, 자굴산, 광제봉을 지나 진양호로 빠져드는 도상거리 약 15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경상도 지역의 유일한 기맥인 이 산줄기는 하동을 제외한 서부경남의 전 지역인 함양, 거창, 합천, 산청, 의령, 진주 등 6개 시·군을 지나며 서쪽의 남강과 동쪽의 낙동강 사이를 가른다.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치고 오르자 반갑지 않는 풍경이 또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도 벚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봉우리 전체를 아예 벚나무 숲으로 바꿔놓아 버렸다.



망룡산 정상은 벚나무 숲의 바로 옆에 있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한국통신(KT)SK텔레콤의 기지국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TV의 송신시설로 보이는데 어느 방송사 것인지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이것들 말고도 다른 시설들이 또 있었나보다. 대문의 기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망룡산까지 오는 데는 40분이 걸렸다.



망룡산(望龍山)’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처음 나타난다. 산의 이름은 이 산의 아래쪽에 있는 '미리섶'이라는 천연 샘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부터 물이 맑고 수량도 풍부해서 산북 앞 들녘의 논물로 넉넉할 정도의 샘이었는데, 여기에 살던 큰 용()이 큰비가 내리는 어느 날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로 솟구쳐 오르다가 잠시 망룡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샘물은 더 맑고 수량도 많아져서 식수만이 아니라 농경지 관개용수로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인연으로 용천(龍泉), 용동 등의 지명이 생겨났고, '미리섶'도 미리샘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별도의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이나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진주의 산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제작한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송신시설의 펜스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참 서툰 글씨로 망룡산이라 적어놓은 판자도 하나 매달려 있다.



시멘트포장 임도(林道)가 나있는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임도의 초입에는 사각의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시원스럽게 트이는 조망을 실컷 즐기다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왼편에는 아까 보았던 자굴산과 한우산이 또렷하고 맞은편에는 남해바다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벽화산(522m)과 월아산(470m), 연화산(531m) 등이 아닐까 싶다.





천황산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으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무심코 임도를 따르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법은 임도를 따라 100m 조금 못되게 내려가다가 배나무 과수원이 나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는 않지만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우린다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0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평분(平墳)으로 된 의령 여씨 가족묘역(家族墓域)’이 나오니 이를 들머리의 기준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봉분(封墳)도 없이 종횡으로 열을 맞춰 눕힌 비석들만 있는 특이한 묘역이니 쉽게 눈에 띌 것이다.



산길은 배나무 과수원을 왼편에다 끼고 반 바퀴를 돈다. 그런데 수확을 이미 끝낸 위쪽 나무들과는 달리 아래쪽 나무들은 아직까지도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가가 보니 일반의 배들보다는 그 알맹이가 훨씬 작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에서 자생한다는 돌배나무(학명 : Pyrus pyrifolia)’가 아닐까 싶다. 약배로 불릴 만큼 해열과 건위(위를 보호함), 지갈(갈증해소), 이뇨, 항당뇨, 지방분해 등에 좋다고 하더니 이젠 이렇게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서리라도 맞힐 요량으로 놔둔 걸 보면 아마 과일처럼 먹으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메타세쿼이아 숲이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말마따나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나무들이 밭두렁을 따라 길게 심어져 있다. 비록 우리 고향마을 근처에 있는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배나무 과수원을 돌아 나가면 또 다시 마룻금과 연결된다. 하지만 길의 형편을 그다지 좋지가 않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던지 잡목(雜木)들이 길까지 잠식해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아래 사진처럼 고운 옷으로 갈아입은 억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분쯤 지났을까 산악회의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봉우리(387m봉이 아닐까 싶다)가 나오고, 조금 더 진행하면 조망이 트이는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오른편 잡목 너머로 상미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광제산(420m)이 아닐까 싶다. 왼편에 자굴산과 한우산이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다.




조망을 보여주던 산길이 이번에는 아래로 향한다. 경사는 급할 것이 없으나 발길을 부여잡는 잡목들 때문에 진행하기가 썩 편치 않은 길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자 안부에 내려선다. 양쪽으로 희미하게 샛길이 나뉘고 있으나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흡사 방화선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하나 그 경사는 상당히 가파른 편이다. 그렇게 5분쯤 치고 오르면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는 밋밋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어느 선답자가 ‘327m라고 표기했던 곳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곳을 1:5만 영진 지도에 천황산으로 잘못 표기 되어 있는 지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거론했던 ·(최남준 선생의 약칭)’ 님이 매달아 놓았다는 팻말은 눈에 띄지 않았다.




327m봉을 지난 산길은 잠시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아까 327m봉을 오를 때의 형세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부드러운 풀들이 수북하게 자라있는 것이 여름철에는 흡사 양탄자의 위를 걷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길의 곳곳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나지막한 축대를 쌓아 놓았다. 토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천황산 정상에 올라선다. 진양기맥에서 방갓산 능선이 갈라져 나가는 봉우리이다. 327m봉을 내려선지 11, 망룡산에서 이곳까지는 48분이 걸렸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정상에는 정상판이 부착된 이정표(설매소공원7.2Km/ 덕촌마을4.8Km/ 망왕산2.0Km)가 세워져 있다. 정상표지석의 대체용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게 하나 있다.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는 망왕산이라는 지명이다. 아까 지나왔던 망룡산망왕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 천황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천황(天皇)’이 아니라 천왕(天王)’인 것은 우리나라에 있는 천황산이 대부분 천왕산으로 이름을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방갓산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설매소공원방향이다. 하산지점이 덕촌마을인데도 왜 설매소공원으로 가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덕촌마을로 가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덕촌마을은 진양기맥을 따라 50분 남짓 더 걷다가 용당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는 방법이고, 만일 방갓산을 올라볼 요량이라면 설매소공원 방향으로 진행하여 방갓산에 오른 다음에 덕촌마을로 내려가면 된다. 아무튼 산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탓에 잡목들이 산길까지 비집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찾아 나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천황산에 이른 진양기맥은 동남 방향으로 산줄기 하나를 분기시킨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능선인 진양벽화단맥(晋陽碧華短脈)’이다. 길이가 24.7km쯤 되는 이 산줄기는 방갓산과 벽화산(碧華山), 박대산, 남산 등을 일구고 난 후에 의령천이 남강을 만나는 곳에서 그 숨을 다한다. 그러니까 천황산에서 방갓산까지의 구간은 진양벽화단맥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가던 산길은 20분이 조금 못되어 안부에 내려서고, 이어서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암릉구간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15분쯤 치고 오르면 드디어 방갓산 정상이다. 방갓산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삼각점도 보이지 않는다. 천황산과 마찬가지로 이름표(방갓산 해발 381m)를 단 이정표(설매소공원6.0Km/ 용암리1.1Km/ 천황산1.2Km)가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지도 앱(application)이 자꾸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니 조금 더 진행하라고 채근하는 것이다. 지도에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삼각점봉을 정상으로 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가 잘못된 것이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이곳 방갓산에는 최남준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도 보인다. 천황산에서 방갓산까지는 35분 정도가 걸렸다.



방갓산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방갓산이 막아주는 덕분에 칠곡면(七谷面)이 길지(吉地)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막을 방()’자를 썼다는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용암리 방향인데, 덕촌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능선에 놓여있는 게 보인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들일 뿐만 아니라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도 충분할 정도의 자태까지 지니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중간에 잠깐잠깐 밋밋한 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몸을 가누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흙산의 특징대로 볼거리도 없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오는 게 전부인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난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산길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유연해졌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더 내려가면 들녘이 나오면서 산행은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2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이후부터는 농로(農路)를 따른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널찍한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그렇게 10 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아까 이정표에서 보았던 용암마을이 나온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쉼터노릇을 해주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진주시 보호수)의 나이(樹齡)320년이나 되었단다. 마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가는 온통 감나무천지이다. 나뭇가지마다 커다란 대봉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자칫 가지라도 부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가 대봉의 주산지(主産地)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예로부터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했다. 임금님에게 진상되었을 정도로 그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저 감들은 11월경에 수확을 해서 홍시(연시)나 곶감으로 만든다.



산행날머리는 덕촌 마을회관(진주시 대곡면 월암리)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덕촌마을 회관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커다란 대봉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인심 좋은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집 앞에서 햇볕을 쏘이고 있는 주민들이나 감을 따고 있는 주민들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따뜻한 인사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트럭이 멈춰서더니 가는 곳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 정도였다. 땀을 씻으라고 자기 집 수돗물을 내어준 할아버지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주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인정이 넘쳐흐르는 마을이었다.